ARTIST REVIEW 김지연
비교적 뒤늦게 사진공부를 시작한 김지연은 사진에서 이론과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며 자신의 사상을 구현한다. 그는 점차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가치와 옛것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 사진작업 외에 공간운영을 통한 전시기획과 아키비스트로서의 다재다능한 역량을 펼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김지연이 주목하는 ‘낡은 방’을 가리켜 과거로의 회귀도, 이전 세대에 대한 애가도 아닌, 사람이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에 관한 ‘정직한 보고서’라고 정의 한다.
사물의 질서로서의 ‘낡은 방’
전가경 디자이너, 《세계의 아트디렉터 10 》 저자
2015년 10월 중순, 나는 김지연 사진가와의 1년여에 걸친 사전작업을 거쳐 사진 책 《빈방에 서다》를 완성했다. 출판사 ‘사월의 눈’에서 나온 다섯 번째 사진 책이자, 김지연 작가에겐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집’이다. 애초 사진 책에 김지연 사진가의 <낡은 방> 시리즈만 수록하고자 했다. 그간 발행된 여덟 권의 사진 책이 사진시리즈 명과 동일하게 갔듯이, 아홉 번째 사진 제목책도 의심의 여지없이 ‘낡은 방’이었으며, 출판사와 작가가 바라본 사진들 또한 일관되게 ‘낡은 방’이었다. 그러나 출간일자를 두 달여 남겨둔 8월 중순, 김지연은 새로운 사진꾸러미를 준비해 내 앞에 나타났다.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는 그는 인근 군산의 철거예정지역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철거 전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버려진 빈집들을 촬영한 것이다. 새로운 시리즈의 등장으로 기존의 사진책 계획안은 완벽하게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아홉번째 사진책은 《빈방에 서다》라는 제목과 함께 ‘낡은 방’과 ‘빈방’의 교차편집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2012년 발표된 김지연의 ‘낡은 방’은 2015년이라는 시간과 테이크아웃드로잉이라는 전시공간 속으로 새롭게 편입되었고, 그의 사진은 무거운 은유가 되었다.
애당초 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김지연의 개인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건물주 싸이와의 법적 분쟁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안전한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점으로 ‘망명’하여 전시가 열린 것이다. 김지연은 전시와 책을 준비하는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강제집행이 이뤄진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어느새 국내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그의 전시 또한 불안한 약속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공간을 중심에 둔 세입자와 임대인간의 팽팽한 긴장은 ‘땅’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낳은 상처였다. 공간이 곧 자본인 임대인에게 공간에 축적된 삶은 언제든지 죽음의 문 앞으로 던져질 수 있는 헌신짝이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의 그런 투쟁 속에서 김지연의 군산 철거지역 화면들이 전시되었다. 전라북도 군산과 서울 한남동의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어느새 박탈당하는 삶의 상징으로서 운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김지연의 군산 사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쉬어가는 목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사진적 목소리였다. 전시공간의 절박한 상황은 김지연의 사진을 재난에 대한 은유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는 분명 빛나는 은유였다. 그런데 손택은 “은유는 오도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의미의 무덤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0도의 글쓰기죠.” 손택은 1970년대에 조너선 콧과의 대화에서 “질병은 저주다”와 같은 은유를 가리키며 이를 사유의 붕괴에 빗대었다. 사진은 명징한 오브제들의 세계다. 객관적 실체라는 ‘기능적 역할’로서 사진은 실존했던 대상을 찍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사진은 여전히 우리가 보는 사물들의 뚜렷한 윤곽이 존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이 그리는 윤곽을 따라 사진에 담긴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그 윤곽으로 인해 그려진 사물이나 대상이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각자 안에 저장된 지식을 불러내어 해석의 낚시망을 던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형적 각론 이전에 해석의 총평을 서두르진 않았던가.
사회적 발언의 매체로서 사진은 당연히 존재한다. 다만, 김지연의 사진 앞에는 이미 고안된 어떤 결론이 묵직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이미 고정된 어떤 해석의 틀이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진들은 윤곽선들을 아주 명징하게 드러낸다. 포착된 대상은 “나는 여기 있음”을 알몸으로 드러낸다. 캐논 EOS 마크투로 기록된 윤곽선이 대상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구별 기준이라면, 우리는 그 윤곽을 따라 대상에 침잠해 볼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반짝임을 보자. 더 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감수성을 회복하자”라는 손택의 표현대로.
김지연의 사진들은 현재의 완벽한 ‘재현(represenation)‘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이란 기술적으로 똑같이 복사한다는 뜻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의 현대적 삶의 테두리에 겹겹이 달라 붙거나 간신히 걸려 있을 넝마를 찍는다. 시간의 유속에서 기능을 박탈당한 건물 혹은 장소로서의 넝마이다. ‘고물’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만도 한데 김지연이 찍는 ‘넝마’는 견고하게 땅에 붙어 있다. 그런데 바래고, 낡은 대상의 면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를 들추도록 부추긴다. 초기작인 ‘정미소’ 시리즈부터 ‘나는 이발소에 간다’, ‘근대화상회’ 등이 그렇다. 그가 기록하는 대상들의 일관된 ‘조형적’ 특질 때문인지 그의 사진에 대한 해석은 과거를 향한다.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기념비적인 존재로서, 잃어버리는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사유’ 혹은 ‘노스탤지어’로 양분되어 소비된다. 물론 이것은 사진의 운명이기도 하다. “카메라라는 기계적 장치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사진은 살아온 삶을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물인 것이다.”라고 존 버거는 말했고, 이말은 사진과 관련된 ‘진부한 진리’가 되었다. 특히, 과거에 익숙한 것이 포착되어 사진으로 환기되면, 우리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발견에서 오는 쾌락을 느낀다. 그런데 온전히 사진적인 쾌락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보는 이의 감성적 쾌락이 아닌, 사진 그 본연으로서의 쾌락 말이다.
계열체로서의 미적 성취
나에게 김지연의 ‘낡은 방’은 사물의 질서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에서는 찬란한 사물의 질서가 펼쳐진다. 그것은 버네큘러 감수성을 담은 찬란한 인테리어이기도 하다. 요강, 물파스, 전기장판, 곰팡이, 에프킬라, 파리채, 유선전화기, 카네이션, 꽃무늬, 벽시계, 농협달력, 플라스틱 옷걸이, 보일러, 벽거울, 연분홍 수건, 담요, 약봉투, 부채, 두루말이 휴지, 재떨이, 홈키파, 십자가, 빨래집게, 라디오, 전기밥솥, 먼지떨이, 맨소래담, 양은 주전자, 자개장, 리모컨, 브라운관 TV, 플라스틱 꽃무늬 휴지통, 땅콩 캬라멜, 2단 서랍장 등.
사물을 하나하나 뜯어 보고 있노라면 주인의 삶의 방식과 대략의 나이도 가늠하게 된다. 친구들과 캬라멜을 나눠 먹을 동네 할머니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구석에 놓인 밥솥에서 플라스틱 하얀 주걱으로 밥을 한가득 퍼서 밥상기 앞에 앉아 소박한 반찬으로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독거노인도 어렴풋이 그려진다. 파리는 연신 음식의 냄새를 쫓으며 날아다닐테고, 그때마다 분사방식의 홈키파나 날렵한 파리채의 내리치기가 성가신 소음을 단번에 잠재울테다. 그 흔한 스마트폰이 보이지 않는 이 방들에서 달력과 벽시계는 여전히 병렬적일 수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의 증명이기도 한다. 난잡해 보이지만 각각의 사물은 오랜 시간 형성되어온 삶의 패턴, 그러니까 삶의 질서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질서의 한가운데 사진들이 있다.
돌사진, 결혼식 사진, 회갑 사진 등이 나열되어 있다. 전통 한옥구조에서 흔히 보던 현판은 가옥이 변하면서 어느새 사진액자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사진들은 우리가 평소 응시하는 높이에서 조금 더 높은 벽 그곳에 자리해 있다. 손안 스마트폰에서 보고 유통되는 ‘젊은’ 사진과 달리 ‘낡은 방’의 ‘늙은’ 사진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조금 높이 존재한다. ‘낡은 방’은 과거로의 회귀도, 이전 세대에 대한 애가도 아닌, 사람이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정직한 보고서이다. 동시에 ‘낡은 방’은 각 방에 진열된 사진들을 매개로 한 삶의 기념물로서의 사진 기능에 대한 환기이다.
존 버거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을 본 방식이란 유물론적이었다. 그는 잔더의 인물사진에서 신사복에 집중했고, 신사복의 생산 배경과 그 사회적 표상을 짚었다. 아마도 김지연의 사진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태도라면 이렇듯 버거가 잔더의 사진에 취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진이 기록의 기능을 할 때, 그 기능에 순응하여 버티는 것이다. 해석의 그물망은 잠시 놓고서. 이는 관념론적이고 개념적인 현대사진에서 사진아카이브연구소의 이경민이 시도했듯이 아키비스트로서의 김지연을 재배치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모든 사물이란 특유의 임무를 갖고서 태어난다. 사물의 배경엔 사물의 생산자가 존재한다. 각 사물엔 사물을 사용하는 일종의 사용매뉴얼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기능 때문에 사물을 구매한다. 그렇게 사물과 한 사람과의 결속관계를 맺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의 기능은 본연의 기능에서 멀어진다. 아마도 가장 기초적인 기능은 남아 있겠지만, 시간은 사물에 다른 이야기를 풍성하게 삽입한다. 사물의 다른 용도가 마련된다. 사물은 일차적, 보편적 기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화자로서 독립적이 된다. ‘낡은 방’은 그러한 사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벽면에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있거나 방 여기저기 무심하게 놓인 사물들은 주인공과 장기계약을 맺은 모습이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방에서 사물들을 통해서 사람의 모습을 대략 떠올릴 수 있고, 사람의 모습에선 그의 취향을 읽어낸다. 사물과 취향, 그 명징한 관계맺기가 ‘낡은 방’에 포착된 것이다. 그래서 ‘낡은 방’은 사물의 유형학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근대적 시간관에 숨어있는 ‘주체’의 존재를 거부했다. 그런데 사진은 촬영과 인화라는 시간적 공백 때문에 해석의 주체가 개입하기 쉬운 매체다. 하지만 “삶에서는 플래시 조명을 받아 영원히 고정된 세세한 디테일들이 낱낱이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렇다”란 손택의 말처럼 우리는 그 순간 고정된 세세한 디테일을 일단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계열체의 차이와 반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철저하게 형식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김지연의 사진은 다시 스캐닝될 수 있다. 설사 그 태도가 군산의 ‘빈방’ 사진들을 조형적으로 예쁜 화면으로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들 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조형 또한 김지연 사진을 이루는-아마도 가장 핵심적인-구성물이기 때문이다. ●
김 지 연 Kim Jeeyoun
1948년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수료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갤러리룩스에서 첫 개인전 <정미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9회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집 《정미소》 《나는 이발소에 간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진안골 졸업사진첩》 《근대화상회》 《용담위로 나는 새》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빈방에 서다》를 냈다. 진안 계남정미소 공동체박물관과 전주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