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조: 어둠 속에서 더 찬란한 빛과 불변의 의미들
제이갤러리
2019. 6. 18 – 7. 7
어둠 속에서 더 찬란한 빛과 불변의 의미들
살다 보면 변하는 것이 있고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도 않거니와 변해서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주로 존재의 이유와 관련된 것들이고 삶의 의미와 연관된 것들이다. 여기서 사정에 따라서 변하는 것들을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상황과 무관하게 변치 않는 것들은 절대적인 개념일 수 있다.
여기에 금괴가 있다. 그런데 잘 보면 금괴 표면에 영문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Lord(하느님), Purity(순수), Grace(영광), Family(가족), Love(사랑), People(사람), Hope(희망), World(세계), Pardon(용서), Time(시간), Mother(어머니), Latter(편지), Eternity(영원), 그리고 Faith(신념) 같은. 작가가 생각하는 절대개념(Absolute Concepts)들이다. 금괴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에 작가가 붙인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변함없는 절대 개념을 사람들이 소중해 마지않는 금괴에다가 아로새겨놓았다. 변치 않는 재화에 변함없는 개념을, 절대 재화에 절대 개념을 새겨 넣어 그 절대적 의미며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이다. 그리고 반전이 있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금괴 작업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황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물신주의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금괴에 머물렀다면 좋았을 걸, 금괴의 표면에 아로새겨진 문자의 의미가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답게 사는데 필요한 준칙을, 어쩜 계명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소중한 의미들이며, 금쪽같은 의미들을 제안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왜 금인가. 금은 자본주의 시대의 물신주의를 표상한다 (자본은 모든 걸 삼킨다). 그 자체 물신이다. 존재의 이유가 죽고 삶의 의미가 죽은,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형이상학이 죽고 신이 죽은 시대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물신이다. 죽은 신을 대신한 물신이다. 원래 물신을 의미하는 페티시는 한갓 물질을 실재(이를테면 살아있는 인격체와 같은)와 동일시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기왕에 물질을 물질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지만, 비물질적인 대상(이를테면 정신적인 가치관과 같은)마저 물질과 동일시하는 것이 물신주의 곧 페티시즘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가 금괴의 표면에 아로새겨놓은 문자의 의미들을 보면 하나같이 정신적인 것들이고 가치와 관련된 것들이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는 한갓 물질로 본 것이다. 순수도 살 수 있고 사랑도 살 수 있고 신념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지식도 살 수 있고 권력도 살 수 있고 존경도(그리고 어쩜 존엄마저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금괴 작업은 어쩜 이런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를 숨겨놓은 것일 수 있다. 황금을 돌 보듯 하라는 옛 격언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무슨 선사상(이를테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서처럼 금에 현혹되지 말고 금쪽같은 소중한 문자의 의미를 곱씹어보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죽은 신을 되불러온다. 물신(어쩜 그 자체 또 다른 우상이며 시대의 우상일)에 밀려난 신을 소환해 죽음의(그리고 죽임의) 시대를 구원할 방책을 궁구한 것이다. 기독교적인 형상과 불교적인 도상들인데, 반가사유상과 부처상, 십자가상, 가시면류관,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세상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같은 표상들이다. 전통적인 아이콘에서 보면, 원래 부처와 예수가 신성한 존재임을 표상하기 위해 머리 뒤편에 후광(님부스, 빛의 어원)을 그려 넣었는데, 작가의 그림에 그런 후광은 없다. 아예 몸 전체가 빛을 발하는, 몸 자체가 빛으로 화한 것으로 신성한 존재임을 표상했다. 신성한 존재의 표상이 더러 알려져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경우로 치자면 단연 빛이다. 신은 빛이다. 나무를 태우지 않는 불이고, 눈을 멀게 만드는 빛이다. 이처럼 맨눈으로는 미처 쳐다볼 수조차 없는 존재, 빛으로 화한 존재를 표상하기에 금만 한 것도 없다. 신성한 존재, 스스로 빛인 존재가 금으로 표상된 것이다.
그럼 작가는 어떻게 이처럼 신성한 존재(존재의 신성)를 표현하는가.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그동안 한지 조형으로 남다른 성과를 이룬 바 있다. 그 기량이며 감각으로 먼저 한지로 된 모노톤의 바탕(섬세하지만 쿠션이 감지되는 살)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위에 금박을 붙이고, 그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면서 원하는 형상을 만든다. 도구로는 동판화(드라이포인트)의 니들을 비롯해 기성의 펜(펜촉)을 작가가 직접 세공해 만든 것들이다. 때론 정치한 묘사를 위해 돋보기로 보면서 작업해야 하는 것이 흡사 금 세공사를 방불케 하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고도의 감각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으로, 도구에 가해지는 힘(그리고 어쩜 호흡)을 조절하는 여하에 따라서 가장 어두운 부분(드러난 바탕)과 밝은 부분(금박 자체에 해당하는)을 포함하는 음영의 모든 스펙트럼이 올올이 살아 그 적절한 형체를 얻는다. 더러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어두운 색상의 바탕과의 대비를 통해 형상이 부각되고 강조된다. 그렇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형상이 오롯해지고, 신성한 존재가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렇게 금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은 세속적인 욕망(금괴)과 신성한 존재(신성)를 표상하고, 성과 속으로 나타난 삶의 그리고 존재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이처럼 금(빛)은 욕망을 표상하고 신성을 표상한다. 그리고 어쩜 금쪽같은 가치며 변함없는 의미를 표상한다(아마도 작가가 최초로 의도한 방점이 여기에 찍혀져 있을 것이다). 작가의 금괴(캐스팅 표면에 금박을 입힌) 작업은 양가적이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어떤 이는 금괴(욕망)를 볼 것이고, 혹자는 그 표면에 아로새겨진 문자의 의미(불변하는 가치)를 되새길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신성한 존재의 표상 쪽으로 그 의식이 옮아갈 것이다(다시, 아마도 작가가 의도하고 인도하는 것에 따르자면 그렇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빛은 표상(각 욕망과 신성을 표상하는)이라는 관념적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빛은 무엇보다도 그 자체 자연의 질료이며 자연현상이기도 하다. 금이 발하는 빛은 빛의 질료적 형식이고 물질적 실체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 중엔 이런 빛의 질료적 성질을 다룬 경우가 있는데, 달과 바다, 도시야경과 밤하늘을 소재로 한 것이 그렇다. 하나같이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소재들이고, 어두움과 대비될 때 더 잘 부각되는 소재들이다(진즉에 작가는 욕망과 신성을, 성과 속을 대비시킨 것에 이어, 다시금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빛은 심지어 자연현상을 다룰 때조차 관념적 표상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어스름한 흑점과 은근한 빛이 어우러진 달이 서정적인 감흥을 자아낸다. 수면을 자잘한 빛의 조각들로 해체시키는 바다가 풀사이즈로 잡아 가장자리를 가늠할 수 없는 탓에 실재보다 더 아득한 느낌을 준다(수면과 빛이 희롱하는˙빛과 물의 현상학). 수면에 잠긴 밤 위로 아롱거리는 야경이 몽롱하게 만들고, 칠흑 같은 밤 속을 미아처럼 떠도는 별들이 흡사 세상 저편에서 건너온 시간의 화신을 보는 것 같다. 세상의 안쪽에 속한 것들이지만, 왠지 세상의 바깥을 떠올려주는 소재들이고 자연현상들이다. 아득한, 막막한, 가없는 자연현상에서 세상의 경계를 본 낭만주의자의 파토스가 감지된다고나 할까. 자연현상 자체가 그렇다기보다는 자연현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그렇고, 작가가 재현해놓은 자연이 그렇고, 아마도 자연에 작가가 불어넣었을 입김이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농담처럼 황금사과를 새기고 황금돼지를 그렸다. 복 받으라는 주문이다.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아마도 진심을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상작업들과 함께 일련의 추상적인 작업도 엿보이는데, 한지와 금박이 서로 엇갈리면서 중첩되는 띠 그림이다. 모노톤의 화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로 치자면 단색화의 경향으로 볼 수 있겠고, 색 띠가 강조되고 있는 부분에 주목해보면 색면화파를 변주하고 확장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금(금박)을 재료로 한 일련의 작업에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고, 성과 속의 양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형식적으로 형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사의 확장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앞서 작가는 한지조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했다. 한지조형작업 이후 금박작업이 작가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줄 것 같다.
글: 고충환(미술평론가)
사진 제공: 제이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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