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5.17~9.18
Exhibition Focus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인간은 어떤 사물의 꿈을 꾸는가?

이성휘 하이트문화재단 큐레이터


인간은 인간에 선행하는 이유, 원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사물들에게도 다양한 가치가 존재할 수 있음을 상상해야 하며 그 방식은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전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통상적인 인식을 재고해서 이를 확장하거나 전환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전시는 사물을 단순히 인간의 도구나 물질적 객체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고, 동시대 미술과 디자인 등에서 나타나는 사변적 사고나 대안적인 실천을 강조한다. 또 사물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사물이 존재론적으로는 인간과 동등하다는 철학적 사고를 따르며, 사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경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전시제목은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연상시키는데, 전시도록에서 기획자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연한 유사성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다만, 전시를 통해서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며, 사물이 단순한 무생물이 아닌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가짐을 강조하려는 기획자의 의도는, 필립 K. 딕의 소설이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안드로이드도 인간과 같은 감정과 욕망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존재론적인 의미를 탐구한 것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21세기 들어서 철학적, 생태학적, 과학적 동기들에 의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넘어서는 시도들이 꾸준히 진행되어 온 상황에서, 전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가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인간 대 사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사물’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전시가 사변적 상상에 의한 것, 특히 가상적인 것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실재를 강조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출품작들을 통해서 작가들의 개별적인 방법론을 살펴보고, 이들의 상상력이 시도하는 비-인간적 차원으로 건너서기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앞세우지만, 우리는 결국 사물의 인격화나 의인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또 다른 종류의 사물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전시는 사물을 개념이 아닌 실재의 차원으로 다루고자 하며 주로 인공물에 집중한다. 이에 대해 기획자는 작품이 예술가의 머리와 손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밝힌다. 또 사물과 인간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인간이 오랫동안 사물을 물건으로 한정하면서 놓친 부분이 무엇인지 디자인의 맥락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그는 사물이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이와 같은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총칭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물이 실재하는 어떤 것보다는 개념에 가깝다고 본다.1 이와 같은 기획자의 관점은 사물을 삼라만상, 우주만물과 같은 거시적인 세계관이 아나라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에 놓인 상대이자 수평적인 위치에서 서로를 보게 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그래서 전시는 대체로 인간 대 사물이라는 양립적인 역학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1 우현정 「물건에서 존재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국립현대미술관 2024 p.4

박소라 〈시티펜스〉(사진 왼쪽) 복합매체 가변 크기 2022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섹션인 ‘사물의 세계’는 사물을 상품이나 물건으로 상정하는 우리 인간의 고정관념을 지적하며, 사물을 변화가능하고 능동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려는 의도에 적절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섹션에서 드리프트의 작업〈머티리얼리즘〉(2018~)은 총, 휴대전화, 전구, 자전거와 같은 사물을 해체하여 하나의 제품을 재료의 수준으로 환원시킨다. 모든 재료는 직육면체 형태로 제시되는데 이들의 무게는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 각 재료와 일치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할수록 소비자는 제품의 원재료와 구조,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하게 된다. 특히 전자적 장치로 구성된 사물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원리를 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드리프트는 재료와 사물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과정에 대해 상상의 다리를 놓는다는 점에서 사물을 변화가능한 존재로 제시한다. 한편, 이장섭의 〈보텍스〉는 자연에서 온 재료가 환경에 유해한 영향을 최소화하며 사물이 되는 방법을 연구한 프로젝트다. 그간 효율을 강조해온 산업디자인이 자연과 환경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함을 돌아보게 하는 접근방법이다. 우주+림희영의 버려진 사물들을 디스크 사운드로 전환시킨 작업들과 신기운의 영상 작품 역시 인간에 의해 기능과 성격이 부여되었던 사물들이 그 맥락이 소거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제시됐을 때에도 여전히 재료와 물질적 차원에서는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체로 이 섹션에서 보여주는 사물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물질로서의 사물을 강조한다. 이는 사물에 가해진 인간의 가공 행위가 얼마나 무자비한지를 상기시킨다.

전시의 두 번째 섹션인 ‘보이지 않는 관계’는 이 세계가 인간 중심적 세계로 해석되어 왔지만 기실 주변부의 사물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관여하고 있는지를 인지시키고자 한다. 인간의 삶의 조건이자 환경으로 막연히 이해되어 온 사물은 사실 인간과 매우 복잡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르마판타스가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여 제작한 영상인 〈숲을 위한 나무 보기〉(2020)와〈캄비오〉(2020), 그리고 〈참나무〉(2020)는 인간 중심적으로 행해진 벌목 산업을 나무와 인간의 공생이라는 관점으로 전환시켜 사고하게 하는 영상들이다. 특히 〈참나무〉는 나무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에게 공생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생태학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깊이가 있다. 한편, 미카 로텐버그의 〈코스믹 제너레이터〉(2017)는 자본주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인간의 삶이 너무나 많은 상품에 지배, 종속된 삶이라는 것을 꼬집는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멕시코, 미국, 중국은 상품과 재화가 넘쳐나는 대표적인 나라들로써 상품과 인간은 초현실적으로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주의가 극도로 강조되는 초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비물질적이거나 비가시적으로 존재한다. 로텐버그는 이 은폐된 시스템을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물질적 풍요의 부조리함을 블랙 코미디로 제시한다.

루시 맥레이 〈고독한 생존 보트 34.0549° N, 118.2426°〉
C-프린트 
162.2 × 130.3cm 2020
사진 : 아리엘 피셔 제공 : 작가

우주+림희영 〈Song From Plastic〉폐플라스틱, 스테인리스 스틸, 철, DC 모터
전자장치, 음향장치, 인체감지센서, 에나멜 도색 180 × 220 × 140cm 2024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이 전시는 사물을 물건이 아닌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두고자 시도하는데 이는 전시의 세 번째 섹션인 ‘어떤 미래’에 소개된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다. 우선 미래라는 시점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없는 세계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시간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사물을 단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위해서, 즉 사물을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보기 위해서 사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로운 리얼리티를 생성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 섹션은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미래이기도 한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먼저 수퍼플럭스의〈교차점〉(2021)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여 인종 차별이나 기후 문제 등 오늘날 각종 사회적 이슈가 데이터 수집 및 추출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영상은 근미래의 상황처럼 연출되어 있지만 화면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사물들은 과거의 유물처럼 낡고 오래되어 보인다.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1980년대 홍콩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처럼 과거가 미래처럼 비쳐져 있다. 타이요 오노라토와 니코 크렙스의 〈미래의 기억들〉(2020~2021) 역시 팬데믹에 의해서 촉발된 작업인데, 작가들은 사진을 부분적으로 커팅하고 다른 시공간과 연결하여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풍경과 같은 모습으로 제시하였다. 루시 맥레이의 〈고독한 생존 보트〉(2020)와 잭슨홍의 〈러다이트 운동회〉(2024)에서는 삶의 주도권이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있는 형국이 된다. 이 작품들에서 인간의 삶은 인간이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디자인에 의해 조정을 받는다. 인간은 사물의 결합으로 트랜스 휴먼을 꿈꾸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사물에 적응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세 개의 섹션의 구성 방식은 이 전시가 “사물이 존재론적으로는 인간과 동등하다는 철학적 사고를 따라 사물과 물건을 동의어로 생각해 온 믿음에 도전하고 사변적 시나리오에 기반한 작품을 경유하여 질문”을 던지는 시도임을 충분히 강조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전시를 다 본 후, 관람자에게는 여전히 인간에게 과연 인간 너머 비인간의 시선이 가능한지 자문하는 일이 남게 된다. 이것은 지식의 유한성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인식론적인 문제다. 그런데 전시는 이 한계를 인식하고 출발하였기에, 기획자는 그럼에도 이 전시가 실현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상상해보는 시도로 그 의미가 충분하다고 주장하며2,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상상의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며 얼마나 긍정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상상력의 저변에 깔린 두려움의 기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힘을 (가진 자를) 두려워하며 스스로 힘을 가지고자 하였다.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신에게서 자유롭고자 하였으며, 자연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연을 정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된 인간이 이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거기에는 사물이 포함되며, 인간은 자멸하지 않기 위해 또는 사물과 공멸하지 않기 위해 사물에게 평화를 제안한다. 즉 사변적 상상력과 일련의 시나리오는 인간의 두려움에서 촉발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사물로부터 획득했던 힘을 다시 사물에게 건네거나 나눠가질 수 있을까? 이 일은 인간이 선의로 위장할 수는 있겠지만, 본능에 의해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모든 힘은 인과적이고 멈추지 않겠지만, 인간은 끝까지 그 힘을 뺏기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앞세우지만, 많은 경우 사변적 상상력은 사물의 인격화나 의인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또 다른 종류의 사물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또 자멸을 막기 위해 인간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사물의 조건만을 찾는 것이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라도 사물을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입하는 원인을 회피할 수 없지만, 이러한 원인을 수용하고 반응하는 방식은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3 이 말처럼 인간은 인간에 선행하는 이유, 원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사물들에게도 다양한 가치가 존재할 수 있음을 상상해야 하며 그 방식은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2 우현정 앞의 글 p.10
3 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사물들의 우주 : 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 갈무리 2021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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