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희 Seunghee Kang

강승희: 동판화를 통해 보여준 실험정신과 새벽의 감각

Artist

강승희/ 1960년생. 홍익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 서양화과 석사 졸업. 추계대 미술창작학부 교수. 한국현대판화공모전 우수상(1987),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1987) 와카야마 국제판화비엔날레 2등상(1991),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1991), 칭다오 국제판화비엔날레 동상(2000)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 및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동숭미술관, 갤러리 사비나, 학고재, 조지아타운아트 갤러리, 노화랑 등에서 35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후쿠오카시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등의 기획전과 가나가와 국제판화트리엔날레, 오사카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홍익대 현대미술관, 영국박물관, 오사카문화재단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박홍순


강승희: 동판화를 통해 보여준 실험정신과 새벽의 감각
김윤애 
미술사

〈새벽 5시 30분-8830〉 애쿼틴트 에칭 40×60cm 1988

2025년 여름, 강승희는 교수 정년을 한 학기 앞두고 서울 종로구 노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독학으로 동판화를 익혔다. 1986년 현대 판화공모전 특선을 시작으로 1988년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1991년 와카야마 국제판화비엔날레 2등상 등 다수의 상을 받으며 짧은 시간에 판화 작가로서 존재감을 확고히 했다. 특히 기법적 숙련과 실험정신을 겸비한 작가로서, 정통 판화의 원칙을 지키며 오랫동안 동판화에 집중해왔다. 이번 전시는 강승희란 한 작가의 여정을 정리하는 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고전적 매체인 동판화가 지금의 미술과 어떻게 접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명과 실험의 장이기도 하다.

1기 – 도시 새벽의 환유(1980년대 후반~1990년대)
강승희의 작품세계는 도시의 새벽을 포착한 풍경에서 출발한다. 1980년 제주도에서 상경해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홍익대에 진학하면서 그가 경험한 도시는 혼돈의 공간이었다. 섬에서 그렇게 바라던 육지, 그것도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생활하게 됐지만, 당시 서울은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강승희는 이때를 “하루도 최루탄 냄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삭막하고 혼란스러운 도시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는 새벽 5시 30분이면 조깅을 했다. 그리고 제주에서 보던 유사한 풍경을 발견했다.1

이 시기 강승희는 애쿼틴트와 에칭 기법으로 고층 빌딩 사이로 퍼지는 새벽의 정서를 담아냈다. 〈새벽 5시 30분 8830〉(1988)은 어두운 도시 공간을 묵직한 블랙톤으로 채우며, 정적 속의 감정을 절제된 선으로 환유한다. 〈새벽 5시 30분 여름〉(1990)에서는 장방형 화면에 고층 빌딩과 흐릿한 하늘빛이 대비를 이루며 도시의 침묵과 긴장을 포착했다.〈새벽-9663 광화문〉(1996)에서는 실루엣으로 표현된 광화문과 먹빛의 농담이 도시의 새벽 공기를 시각화한다. 이처럼 새벽은 작가에게 고향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치유의 시간이었으며, 이를 통해 “삶의 혼란 속에서도 평온함을 간직하고자 했던 치열한 시기”를 시각화했다.

〈새벽-2411〉 애쿼틴트 에칭 50×80cm 2004

2기 – 자연 풍경과 내면의 감정(200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 경기 김포의 작업실로 이주한 뒤 그는 도시에서 자연 풍경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부식 작업으로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고, 보다 나은 환경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김포로 작업실을 옮긴 그는 이곳에서 동판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을 창안했다. 이 시기 강승희는 세밀한 선 중심의 기존 에칭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실험했다. 판화 재료인 줄을 변형해 만든 본인만의 니들을 사용한 드라이포인트를 통해 발묵법을 응용한 유려한 선과 질감을 창조했고, 노출 부식(spit bite) 기법을 활용해 동판화에서 표현하기 어려웠던 어슴푸레한 그라데이션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작품에서 수묵화와 같은 농담과 번짐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그네, 나룻배, 들판, 물가 등 유년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자연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새벽-21107〉(2011)과 〈새벽-21415〉(2014)는 축소된 화면 안에 나룻배, 들판 같은 상징적 오브제를 배치하고, 주변 풍경을 흐리게 처리해 기억의 깊이를 암시한다. 번짐과 흐름은 ‘새벽’이라는 시간대를 감각적으로 환유하며, 여백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작품 속 ‘새벽’은 침묵과 고독, 내면의 반추가 일어나는 시간으로 표현된다. 고충환은 강승희의 풍경이 실제에 기반하고 있지만, 실경의 재현보다는 작가의 감정과 사유가 투영된 심리적 풍경으로, 작가의 정체성이 이입된 상징적 발현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2

 〈새벽-22527〉 애쿼틴트 에칭 45×30cm 2025

3기 – 회화적 확장과 기법의 진화 (2023년 이후)
강승희의 기법적 탐색은 최근 작업에서 회화적으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리프트그라운드 기법으로 구현한 그의 최근 작품이 공개된다. 이 작품에서는 동양화의 먹 선처럼 자연스럽고 가는 선으로 표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리프트그라운드는 붓질한 부분만 부식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회화적인 제스처와 농담 표현이 가능하다. 강승희는 대나무, 풀, 꽃과 같은 자연물의 일부를 확대 구성하며 이미지의 응축과 시각적 암시의 조화를 강조했다.

〈새벽-22417〉(2024)은 화면 가득 퍼진 대나무 잎을 통해 자연의 리듬을 강조하고, 먹의 갈필 효과로 동양화의 운율을 환기시킨다. 〈새벽-22514〉(2025)는 미니멀한 구성으로 여백을 강조하는 동시에 한 줄기 식물의 흔들림을 포착해 정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자연을 감각의 스크린으로 전환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의 최근 작업 태도는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감정이나 기억의 ‘어떤 상태’를 화면에 머무르게 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러한 태도는 작업노트 전반에 드러나는 작가의 지향성과 맞닿아 있다.

정통 판화의 창작 윤리와 동시대의 귀감
강승희의 판화는 인쇄 기술의 축적을 넘어 기법 자체를 조형 언어로 전환하고 있다. 드라이포인트, 스핏 바이트, 애쿼틴트, 에칭 등의 표현은 작가 스스로 개발한 잉크인 ‘다이아몬드 블랙’과 결합해 깊고 투명한 흑의 농담을 만들어 낸다. 그는 적, 청, 녹, 흑, 백을 섞어 철판에 끓여 만든 특별한 블랙을 사용한다.3

강승희는 기성 기법과 재료에 안주하지 않고 독창적인 표현을 구현하며, 늘 새로운 표현을 탐색한다. 그에게 동판화는 ‘계속 숙제를 주는 매체’다. 반복을 전제로 하면서도 매 순간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실험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40년간 동판화에 집중한 이유에 대해 작업을 할수록 깊이 빠져드는 ‘매력’과 ‘몰입’을 꼽았다. 그러면서 “실험 결과에 대한 뿌듯함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고된 창작과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부연했다.4

〈새벽-22515〉 애쿼틴트 에칭 30×45cm 2025
제공: 작가

그는 오리지널 판화의 원칙을 고수한다. 인쇄된 뒤에는 수정하지 않으며 에디션 관리도 철저하다. 이는 ‘판화가 독립된 예술 장르로 존중받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태도다. 강승희는 판화가 미술시장에서 소외받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시장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묵묵히 정통 판화를 지켜가고 있다.

강승희는 판화라는 고된 매체를 오랜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고수했다. 그의 여정은 지금의 젊은 판화 작가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실험정신과 예술적 태도를 놓지 않았던 끈기 역시 기술적 성취를 넘어 창작의 자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창작과정에서 실험하는 태도와 인내하는 자세, 그리고 시장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인터뷰에서 전시를 열고 작업을 지속하는 행위가 단순히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시장에 흔들리지 않고 작업의 진정성을 지켜나가는 실천이 될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고자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판화가 소외되고 있는 지금, 강승희의 행보는 그 자체로 동시대 판화에 대한 따뜻한 신뢰의 기록이다.


1 작가는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아 빛과 어둠의 경계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흔적조차 없는 새벽의 도시 풍경이 마치 한라산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다가왔다고 회상하며, 부정적 인상을 안겨준 도시 속에서도 새로운 자연의 풍경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강승희 인터뷰(2025.7.14 )
2 고충환 「자연의 원형, 존재의 원형」 『미술세계』 288호(2008.11) p. 64
3 강승희는 적, 청, 녹, 흑, 백을 모두 섞은 블랙 30%와 순수한 블랙 70%를 철판에 끓인 후 특별한 ‘다이아몬드 블랙’을 만들어 쓴다 이화순 「동판화 연금술사 강승희, 갤러리포레서 《블랙예찬》 성료」『시사뉴스』(2023.12.20)
4 강승희 인터뷰(2025.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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