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진 Sujin Moon

문서진의 작업 일지-
질주를 멈추기, 방랑을 시작하기

조주리 독립큐레이터

Artist

문서진/ 개인전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씨알콜렉티브, 2025),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레인보우큐브, 2022), 《살아있는 섬》(CICA미술관, 2020)을 개최했으며, 단체전 《돌에 갇힌 별을 보는 방법》(동덕여대, 2024), 《종이로 만든 거울: 시간조각모음》(성북어린이미술관꿈자람, 2024),《마당: 마중합니다 당신을》(수원시립미술관, 2023), 《지구와 예술Handshaking》(윈드밀, 2022),《Skyline Forms On Earthline》(두산갤러리, 2022), 《낙관주의자들》(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2021) 등에 참여했다. Pier 2 Art 레지던시(2025, 가오슝), 얀반아이크 아카데미 레지던시(2023~2024, 마스트리히트), 고양레지던시(2022), 금천예술공장(2021) 등에 참여했다. 사진: 박홍순 이미지 제공: 씨알콜렉티브


문서진의 작업 일지-질주를 멈추기, 방랑을 시작하기
조주리 독립큐레이터

글을 쓰는 요 며칠, 습동(蟄冬)을 지나 입동(立冬)으로 접어들고 있다. 겨울잠에 들 벌레들이 땅속으로 들어가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각자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어떤 이에게 이 시간은 작업을 감싸던 화려한 외피가 벗겨지고, 들끓던 욕망이 사위어가는 때일 것이다. 긴 외출을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온 작품은 어딘지 버석해 보이고, 지금부터 이듬해까지 붙들고 가야 할 숙제가 무엇일까 마음이 수런거린다.

무엇인가가 맹렬히 휘갈기고 간 시간. 깊은 밤에도 꺼지지 않는 머릿속 회로와 시시한 생각들을 차단할 요량으로, 한 뼘 크기의 책 『호수일지』(2022)를 꺼내어 읽는다. 하루 종일 알게 모르게 쌓였던 분한 마음을 내려두고, 작가의 차가운 살갗 위로 솟아오른 땀방울에 감정을 투영하며, 그날 그곳의 온도와 바람의 향방에 함께 마음을 졸인다. 책의 구성과 내용은 단순하다. 미국 메인주에 위치한 헤브론 호수를 작가가 매일같이 오가며 기록한 한 달간의 작업 일지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호수 표면 위에서 날마다 삽으로 눈을 치우고 쌓아 일종의 ‘살아있는 섬’을 지어 나가는 작업의 과정은 싱겁기 짝이 없지만, 어쩐지 응원하며 몰두하게 된다. 어느 날은 호수 바닥에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또 다른 날에는 둥둥거리는 진동이 전해온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 앞에 선 작가의 대응은 근심과 걱정 속에서도 하루만큼의 작업을 이어나가는, 최소한의 전략이자 최대치의 노동에 가깝다. 일지의 마지막은 언제나 ‘무사하기를 바란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오늘의 무탈함에 안도하고, 내일의 안전을 기원하는 순박한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며 어느새 안도와 해방을 느낀다. 야단법석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갔음에, 솟아오른 어깨가 툭하니 떨어진다.

기획자에게 전시 바깥에서 작가를 만나는 일은 유난히 반갑다. 문서진과의 만남은 대체로 목적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신인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통해서였고, 두 번째에는 레지던시 오픈 기간 중 우연히 작업을 실견하면서이다. 작업은 대체로 작고 가벼웠으며, 과도한 설명이나 야심이 빠진 듯 잔잔했다. 그다음 만남은 그룹전의 기획자와 참여자로서였지만, 그것 또한 스치듯 짧은 인연이었다. 전시장 한편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걸어둔 채, 홀연히 해외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서로가 외지인이 되어 마주한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문서진: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씨알콜렉티브 전시 전경 2025

짧은 교차점에서 간취한 단편들이 정밀할 수는 없겠지만, 통제할 수 없는 힘과 구조에 밀려난 것들에 마음을 두고 기꺼이 몸을 쓰는 작가적 태도만은 분명해 보였다. 문서진이 작업을 만들고 지속해 나가는 방식은 주변의 대상, 즉 가까운 인물과 사물, 자연에 대한 세세한관심과 기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작업으로 이행시키는 굳건한 동력은 세계와의 직접적 접촉을 향한 작가의 몸의 부대낌에서 비롯된다. 걷고, 뛰고, 매달리고, 웅크리는 몸의 움직임이 세계에 가한 ‘압’의 정도와 그 지속 속에서, 새로운 피부와 텍스처, 빠르기와 흔들림을 흡수한 부산물이 생성되는 듯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 남는 흔적에 가깝다. 조각을 제외한 여분의 것들-텍스트와 영상, 퍼포먼스와 해프닝-이 작업의 시간을 사후적으로 중계할 뿐, 가시적으로 ‘솔리드’한(견고한) 형태를 빚어내거나 공간을 조탁하려는 태도는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문서진의 작업은 개념미술의 틀 안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기존의 작업 비평에서 언급된 바 있는 여성주의적 조각 서사와 탈(脫)조각적 논조 또한 함께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022년 전시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에서 다루었던 여성 서사나 촉각성 담론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는 일관된 방식으로, 조각하는 주체의 신체적 사유와 접촉의 장으로 조각 개념을 확장하며 그 속에서 몸·물질·서사·시간의 교차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작가의 창작 주기와 제작 방식에서 장소적 토대가 되는 레지던시 제도와 그에 따른 삶의 유동성 또한 함께 고찰할 필요가 있다. 레지던시 제도에 내재된 삶의 주기율을 창작의 조건으로 전환하고, 낯선 환경을 작업으로수용해 예술적 아카이브로 축적해 나가는 방식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생존법이자 필연적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선택에 따른 방랑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유목은 젊은 작가들의 집단적 초상처럼 느껴진다. ‘삶(living)’과 ‘떠남(leaving)’의 상태는 완전한 이항 대립이라기보다, 언제나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예술적 거주의 한 양태로 읽힌다.

〈던져진 것들〉(부분) 씨앗이 심겨진 수제 종이, 가변 설치 2025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작가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네덜란드 남동부에 위치한 얀반아이크 아카데미에서 문서진이 한 해 동안 머물렀던 작업실과 숙소, 그리고 주변 환경을 둘러볼 기회가 만들어졌다. 친교가 깊다 할 수 없는 사이에, 어쩌다 그곳까지 움직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서울과 비교하자면 마스트리흐트는 작은 도시이고,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볼거리도, 탐구해볼 만한 사회적 쟁점이나 특이점도 없어 보였다. 객지에서 만난 문서진의 모습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맑은 표정과 다갈색의 안색, 옷차림과 몸짓 모두 가붓해 보였다. 그날 작가를 따라간 작업실에서 마주한 것은 낱장의 종이들과, 완성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종류의 작업들이었다. 인근 식물을 채취해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제작된 듯한 모양새였기에, 작업의 전모나 종이에 담길 서사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혹은 허름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완결되지 않은 형태 속에 작업의 체온과 시간의 결감이 감돌았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가 쥐어준 소책자 『액체 수정 섬유』를 읽으며, 그 하찮은 귀여움에 실소를 터뜨렸다. 숙소 앞 텃밭을 점령한 달팽이 떼와 맞서 싸웠던 기록은 어딘가 하찮았고, 결국 포기하게 된 이야기는 귀여웠다. 책장을 넘기며, 어디선가 묻어온 그 구수함의 정체가 무엇일까도 궁금했다. 잡풀을 삶아 말려 만든 종이에서 나는 흙과 건초 내음일 거라 생각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얼음 호수 위에 섬을 짓는 이야기와 텃밭 아래 달팽이 떼를 몰아내려는 이야기는 서로 닮아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봄볕에 녹아내리는 얼음덩어리를 지켜낼 수 없고, 작가의 무해한 지략으로 밤새 불어난 달팽이들의 끈질긴 생존력을 제압할 도리 또한 없었던 것이다. 호흡이 제법 긴 실패담이었던 셈이다.

〈텃밭에서〉3D 스캔한 마스트리히트 뒷마당 텃밭, 터치스크린 인터랙션 2025

그렇지만 네덜란드에서의 종이 조각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 협업, 출판물 생산은 이전보다 한층 활물적(活物的)이며 중층적인 방식으로 이행된 듯 보였다. 레지던시마다 체류 시기와 지형 조건 차이도 있겠으나, 잠시 머무는 공간 안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정주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가시화된 까닭일 것이다. 새롭게 맞닥뜨린 환경을 수용하고, 그에 맞춰 삶의 방식을 조정하려는 노력은 자연으로부터 물질을 채집·채취하고, 인공물의 형태로 세공하며, 외부인과 능동적으로 협업하는 과정을 통해 작업의 지평을 넓히고 레이어를 쌓아가는 일로 이어진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의 작업 서사가 단편에서 중·장편으로 넘어간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 아니었을까.

작업의 궤적을 자연의 순환 원리에 비춰본다면, 그 변화는 단순한 형식적 확장이 아니라 한 생의 리듬이 옮겨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평점을 찾아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속성, 무엇인가를 깊이 품어 씨앗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게 하는 흙의 속성, 그리고 존재의 이동을 더 넓은 반경으로 확산시키는 바람의 속성을 떠올려본다면, 결국 어떤 궤도 위에 작업의 흐름을 놓고 움직이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존재론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방랑이 아름답게 발화하기 위해서는 물의 유속과 흙의 온기, 바람의 운동성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작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삶의 속도와 방향을 조타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전시로 다시 만난 문서진의 세계는 물·흙·공기, 세 가지 요소가 서로의 힘을 발휘하면서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풍경으로 오늘의 나를 맞이한다. 《뿌리 내리며 떠돌아다니는》이라는 전시의 명명은 그간의 삶과 현재의 작업,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생산의 조건과 위상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표제다. 나아가 그것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생존 방식, 더 넓게는 부표처럼 흔들리는 우리 모두의 삶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시의 전면을 덮고 후면을 감싸는 것은 다름 아닌 지난날 마주했던 무수한 종이 조각들이다. 작가가 지나왔던 행로에서 실려온 달큰한 조각들이 공간 속에 정갈하게 펼쳐져 있다. 코끝을 스치는 내음 속에 흙과 풀, 물의 구수함과 비릿함이 교차한다. 거칠거칠한 질감, 그리고 베이지·그레이·브라운으로 스며드는 토양의 스펙트럼은 그 자체로 회화적이다. 인류가 처음 종이를 만들던 방식 그대로, 식물의 섬유질을 부드럽게 풀어헤치고 널따랗게 펼쳐 건조시키는 원초적 제작 과정이 눈앞에 펼쳐진다. 낱장의 종이는 2019년부터 최근까지 작가가 머물렀던 곳에서 얻은 자연 재료로 만든 것이다. 시계열적으로 도열한 종이의 그라데이션은 시간의 층위와 장소의 이동 과정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서 있는 것들 Ⅲ〉(사진 왼쪽) 씨앗이 심겨진 한 장의 종이 180×90×100cm 2025,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것들〉(사진 가운데) 컬러, 퍼포먼스 영상기록물 Full HD 11분 2025,
〈서 있는 것들 Ⅱ〉(사진 오른쪽) 씨앗이 심겨진 한 장의 종이 200×110×110cm 2025 《문서진: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씨알콜렉티브 전시 전경 2025

전시의 중앙부로 들어서면, 입체물로서의 종이 조각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비스듬히 서 있다. 크고 단단하게 굳혀 만든 조각들은 무명의 기념비, 혹은 농업시대의 토템을 연상시킨다. 어딘지 잘못 만든 허수아비 같기도 하고, 일각(一刻)의 소나기에 속수무책으로 녹아 사라질, 무언가의 포장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 있는 것들〉(2025)이라 이름붙인 이 종이 조각들은 새삼 문서진이 조각가였음을 환기시킨다. 조각들이 살아 있는 씨앗을 내장한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시간과 생명의 순환을 품은 매개체로 읽힌다. 따라서 이 작업이 조각의 문법을 넘어서, 대지미술 혹은 생태미술, 나아가 시간 기반 예술 영역으로 확장되는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 안에는 한때 직립했던 조각이 습기와 빛을 머금으며 자연스레 ‘쓰러지고’, ‘썩어가는’ 상태 그대로 병치되어 있다. 혹은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전시라는 무대 위에 펼쳐진 이 종이 조각들의 연대기는 삶의 순환성에 관한 고전적 서사를 들려준다. 흙에서 풀로, 나무로, 종이로, 그리고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이 사이클은 물질의 탄생과 소멸을 이야기하며, 이를 예술적 실천에 비유해도 다르지 않다.

기록과 사유의 매체로서 종이가 지닌 인문적 기능은 정신을 영속적으로 보존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것 역시 한낱 사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생태와 인공, 정신과 물질이 결코 완전한 대립항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문서진은 종이를 “시작과 끝을 가르는 시간의 마디”라고 표현한다. 그의 작업에서 종이는 자신의 이동을 증명하는 실체적 기록물이자, 그의 몸으로 접촉해 온 흙, 물, 바람의 흔적이 응축된 데이터셋으로 읽힌다.

이번 전시를 단순히 예술가의 유목적 생산에 연계된 수공예적 몸짓이나 생태주의적 사고, 혹은 물질의 배치와 횡단이라는 개념적 장(場)에 머물지 않게 하는 장치는 무엇일까. 그 핵심은 물질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행위의 역전, 시선의 운동성, 그리고 ‘생태’라는 대문자 개념을 일상의 삶과 끈질기게 접속시키려는 지구력에 있다. 지난 여름, 남양주에 위치한 문서진의 작업실에서 진행 중인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전시의 구상은 그동안 방랑하듯 옮겨 다닌 각 거처에서 직접 채집하고 건조한 식물 그대로의 자연 오브제, 그리고 그 식물을 원재료로 한 종이와 조각의배열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작가는 타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작은 텃밭의 지형과 지질을 디지털로 재구성하며, 화면을 두드리고 문지르는 신체적 제스처를 통해 생태의 중층을 탐사하는 인터페이스를 실험하고 있었다. 손의 감각과 기술적 매체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만드는 행위’와 ‘만지는 행위’는 상호 수렴되는 의도로 다가왔다.

몇 달 뒤 전시에서, 완전히 새로운 프로덕션이라 할 수 있는 영상 작업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것들〉(2025)과 만났다. 화면 속에는 갈매기의 양 날개처럼 활짝 펼쳐진 두 대의 패러글라이더가 떠 있고, 그 위에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탑승해 있다. 이들의 비행은 또 다른 제3자의 시선으로, 공중에서 포착된 영상으로 기록된다. 두 퍼포머가 문서진이 만든 종이 뭉치를 하늘 위에서 흩뿌리는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어딘가 뭉클한 해방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을볕 아래 노랗게 물든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야트막한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비행의 포물선과 활강의 속도는 어떤 익스트림 스포츠보다도 더 대담하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 순간, 관객은 이 전시가 무엇을 다루고 있었는지를 잠시 잊은 채, 자유롭게 흩날리는 물질과 몸의 궤적에 온전히 몰입하게 된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작업에 사로잡혀 몇 차례나 더 이 영상을 보러 갔다.

전시의 한 토막을 어딘가에 전하기 위해, 일부러 먼 이야기들을 소환하고 기억 속 단편들을 기어이 이어 붙여 보았다. 스쳐 지나간 순간들을 긴 여정으로 반추하는 동안, 나는 전시에서 작동하는 이중의 어법이 실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됨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 던진 것과 던져진 것, 주저앉은 것과 서 있는 것, 떠도는 것과 뿌리내린 것, 연약한 것과 단단한 것들이다. 반쯤은 떠나 있고, 반쯤은 뿌리박힌 자리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쓰고 어제를 지운다. 어쩌면 문서진이 지금껏 이어온 작업들은, 단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되어 가는 산만한 파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기며, 다음 장으로 이어질 새로운 작업 일지를 묵묵히 기다려본다. 언젠가 그가 스스로를 ‘행복한 시시포스’라 비유했던 말이 떠오른다. 전력 질주하는 대신 방랑하는 나그네의 신세를 조금 더 자처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 바닥까지 고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어김없이 밝아오는 날, 굴러 오는 돌에 묻어난 세계를 두 팔 가득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다.

*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2025년 12월호 (VOL.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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