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의 Jooneui Noh
토탈미술관이라는 사건
심지언 편집장
The Interview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에서 ‘토탈미술관’이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무게는 ‘국내 1호 사립미술관’이라는 연대기적 수식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1976년 대학로의 작은 갤러리로 시작해 장흥의 야외조각공원을 거쳐 평창동에 이르기까지, 토탈미술관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의 선두에 서 있었다. 개관 50주년을 앞둔 토탈미술관의 노준의 관장을 만나 미술관의 지난 행적과 그 활동의 의미를 돌아보았다.
노준의 / 한국 최초 등록 사립 현대미술관인 토탈미술관의 관장으로, 1976년 토탈갤러리를 설립한 이후 1984년 장흥 야외조각공원, 1992년 평창동에 본격적인 현대미술 공간인 토탈미술관을 개관하며 한국 사립미술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제도 기반을 강화하였고, 다양한 실험적 현대미술 전시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월간미술대상(2003), 국무총리 표창(2006),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2009), 옥관문화훈장(2010)을 수상했다 사진: 박홍순 이미지 제공:토탈미술관
토탈미술관의 역사와 발자취
새해면 토탈미술관 개관 50주년입니다. 반세기라는 시간 동안 한 기관을 이끌어온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부터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50년이라는 숫자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닥친 일을 해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죠. 돌아보니 지난 시간 동안 협력해 준 수많은 미술인에게 감사한 마음이 가장 커요. 처음에는 다소 무모하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50년이라는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작가, 큐레이터 등 주변 분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처음 시작은 1976년 대학로였어요. 그때는 ‘미술관’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절이었죠. 남편인 문신규 건축가가 ‘토탈 디자인’ 이라는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 1층에 디자인과 공예 전반을 보여주는 갤러리를 열었어요. ‘토탈’이라는 이름은 남편의 사무실 이름에서 가져온 건데, 다 합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완전함을 지향한다는 뜻이었죠. 그때 우리는 가구도 만들고, 잡지 『꾸밈』도 만들고 전시, 공연도 했었죠. 당시 공예 작가들은 작품 판매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 않아 갤러리 세일즈는 시원치 않았어요.

토탈미술관 장흥 야외조각공원
1987년 경기도 장흥의 토탈야외조각공원은 한국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야외조각공원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건립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땐 작가들의 환경이 참 열악했어요. 작업실도 제대로 없고, 조각을 만들어도 보여줄 곳이 없었습니다. 조각공원은 미학적 선택이라기보다 현실적 대안이었다고 할 수 있죠.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는데,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줄 공간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978년 장흥 일영리에 약 5,000여 평(1만6500여 ㎡)의 부지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 1984년 국내 최초의 야외조각공원 형태로 문을 열었습니다. 조각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실내 전시장에서는 기획전과 작가들의 개인전을 개최했죠. 등록 승인은 1986년 연말에 이르러서야 받았어요. 그때부터 일주일 관람객이 2~3,000명이나 됐어요. 1990년대 중반에는 하루 최다 관람객수로 4,700여 명이 기록된 적도 있죠. 역에서 미술관까지 20분 정도 이동하는데 주말이면 그 길에 방문객들의 행렬이 줄을 지었어요.
사립미술관 등록과정에 대한 에피소드도 궁금합니다.
등록 과정이 정말 험난했어요. 행정기관에서는 미술관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다며 박물관이 있는데 왜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쓰냐며허가를 내주지 않았어요. 제도도, 선례도 없었기에 등록 신청만 해도 여섯 번 이상 반려 당했죠. 군부대, 환경청, 문교부, 경기도 등 여섯 개부서의 허가를 통과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미술관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부터 매번 다시 시작해야 했죠. 그러다가 올림픽 전후로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이 열리고, 초청된 해외 유명 작가들이 장흥에 와서 감탄하니까 그제야 정부에서 이런 것이 필요하구나 하고 허가를 내준 거예요.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토탈야외조각공원이 등록되었어요.
장흥에 이어 1992년 서울관을 개관하셨어요.
88올림픽을 지나면서 우리도 본격적으로 국제교류를 진행하기 위해선 서울에 거점이 필요하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울관을 개관하면서 제가 관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토탈미술상’ 운영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부분을 고려해 현대미술에 집중하고, 국제적인 흐름까지 반영하는 것이 서울관의 역할이었죠. 1990년대 중반이 되니 광주비엔날레도 시작되었고, 해외에서 오는 손님이 광주에 이어 장흥까지 이동하기엔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있었지만, 서울을 방문하기엔 용이했거든요.
평창동 토탈미술관은 장흥 미술관의 분관 격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현대예술 전반을 통섭하는 복합문화공간이자 본관으로 정착했습니다. 설립자 문신규 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은 1993년 ‘올해의 건축상’을 수상하는 등 독특하고 열린 공간 구조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평창동에 자리 잡으며 이 공간을 설계한 과정을 말씀해 주세요.
장흥에 토탈미술관을 개관하면서부터 현대미술관으로 방향성을 잡았어요. 평창동 공간은 ‘조각 전용 전시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 큰 조각품을 옮기기 위해 크레인이 들어갈 수 있는 거친 구조에 골조를 드러낸 본질적인 공간을 지향했죠. 장식보다는 기능, 과시보다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공간을 지배하도록 했어요. 해외 작가들이 미술관에 오면 이 공간의 구조적인 힘에 다들 놀라요. 층의 구분이 모호하고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설치미술을 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죠.

2004년 이영철 큐레이터가 기획한《당신은 나의 태양》전시 도록 표지
토탈미술관은 1986년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 1987년 《한국 조각의 오늘》 등 당시 전시마다 중견과 신진 작가를 50여 명씩 소개한 대규모 기획전을 개최했고, ‘토탈미술상’(1991~1997, 5회 운영)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이러한 전시와 시상제도를 운영한 배경과 원칙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인 미술 관계자들이 한국을 찾아오는 시점에 한국 현대미술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 《한국 조각의 오늘》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하며, 현대미술관으로서의 토탈미술관의 정체성을 확고히 정립했죠. 당시 한국 현대미술에는 정리된 ‘현재형’의 기록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가 누구인지 묻고, 그 답을 전시로 만들었습니다.
‘토탈미술상’ 역시 같은 맥락이었어요. 상의 권위는 상금이 아니라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공정한 운영을 위해 추천, 심사, 전시, 그리고 해외 비평가의 참여까지, 모든 과정을 엄격하게 설계했습니다. 최고의 평론가 10명에게 추천을 받았고, 운영위원회에서 후보 7명을 선정했습니다. 위원회에서 작품 성격에 따라 100만원부터 최대 400만원까지 작품 제작비를 책정하여 지급했어요. 그리고 최종 1인으로 선정된 작가에게는 상금으로 미화 만 달러와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 작가를 지원했죠. 당시 수상했던 김종학 고영훈 최인수 등 대상 수상자뿐 아니라 조덕현 육근병 이기봉 임옥상 홍승혜 최정화 등 ‘토탈미술상’ 수상 작가들이 지금 미술계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그때의 선정이 꽤나 공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말이면 미술관 관람객이 2,000명에 달했어요. 입장료를 천 원씩 받았어도 입장료 수입이 상당했죠. 미술관이 큰 사랑을 받았으니 이를 미술계에 되돌려 주기 위해 시상제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토탈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 흐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토탈미술관이 국내 동시대 미술신에서 해온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돌아보니, 우리가 새롭게 시작한 것이 참 많았어요. 미술관 등록부터 남들이 한 번도 하지 않은 일들을 만들어 왔죠. 앞에서 말한 전시들이나 ‘토탈미술상’도 그렇고 현대미술과 현대음악의 접목까지 가능한 한 새로운 것을 추구했죠. 주류 시장에 편승하기보다 늘 새로운 생각과 실험적인 장르를 접목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토탈미술관에서 진행했던 수많은 전시 중 가장 의미있게 여기는 전시를 꼽는다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2004년 이영철 큐레이터가 기획한 《당신은 나의 태양》입니다. 이 전시는 1960년대부터 당시까지의 한국 현대미술사를 아주 비판적이고도 입체적인 시각으로 정리하면서 반성한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서구의 미술 사조와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그것을 현대성이라 믿어왔는데, 이 전시는 우리가 서구 미술을 얼마나 편협하고 반쪽짜리로만 받아들였는지를 통렬하게 반성하고 성찰하게 했습니다. 한국 작가들의 작업 속에 내재된 독자적인 생명력과 뒤섞인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우리의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 것이죠.
프랑스문화원 관계자들이 전시를 관람하고는 “한국 현대미술의 이면을 이토록 예리하게 파고든 전시는 처음”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사립미술관이 주류 담론에 편승하지 않고, 이토록 비평적인 태도로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토탈미술관 그리고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전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원방 큐레이터가 1989년에 기획한 《뜻.밖.의》는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장르를 대표하는 13명의 작가가 한자리에 모였던 장르가 섞인 첫 전시였어요. 그 당시에는 구상, 추상 또는 정물, 풍경 등 끼리끼리 모여서 전시했었는데, 이 전시는 멀티 컬처 시대를 맞아 13개의 장르를 한곳에 모아 선보인 거죠. 대학로에서 한 전시인데 이 새로운 시도에 관람객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죠.
또 하나 1993년 정준모 큐레이터가 정리하고 기획한 《한국 현대미술–격정과 도전의 세대전》이 있어요. 이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뿌리를 다시 짚어본 굉장히 본격적인 프로젝트였죠. 당시 토탈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온 모더니즘 세대를 한자리에 모았고, 김구림 서승원 윤명로 하종현 같은 13명의 작가가 참여했어요. 특히 그들의 초기 작업과 1993년 신작을 함께 보여주면서, 한 세대가 걸어온 길과 그 안의 긴장감까지 드러낸 전시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참여 작가들이 1년 동안 매달 토탈미술관에 모여 밤늦도록 1950년대부터 1970년대를 회고하던 모습이에요. 미술 현장의 분위기와 경험을 작가들이 구술하면, 정준모 큐레이터가 기록하고 정리했죠. 그래서 이 전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자료 정리와 기록 방식이 정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집중적으로 전개해 온 글로벌 협력 프로젝트인 ‘프로젝트 8’은 국제교류 플랫폼으로서 선구적인 사례입니다.
단발적인 이벤트보다는 특정 주제에 집중한 연구나 지속적인 플랫폼 유형의 기획이 토탈미술관이 추구하는 방향성인데, 이를 잘 보여준 사례가 ‘프로젝트 8’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의 준비와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 국제화 바람이 불던 시기였습니다. 광주비엔날레를 맞아 외국 작가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우리도 제대로 된 국제전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프로젝트 8’은 현대미술의 다양한 주제와 새로운 예술 형식을 소개하는 국제교류전으로 1996년부터 5년간 진행했어요. 첫해인 1996년에는 한국-독일 교류전으로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4명의 작가가 참여했어요. 당시 양국을 대표할 수 있는 글로벌 거장 작가 2명씩 그리고 후배 세대인 기대되는 젊은 작가 2명씩 선정했죠. 한국에서는 이우환, 전수천 그리고 김동현, 김영진, 독일에서는 토니 크랙(Tony Cragg)과 토마스 슈테(Thomas Schütte) 등이 참여했어요. 이 프로젝트는 독일문화원의 후원을 받았는데, 토탈미술관이 외부 후원을 받은 첫 전시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프랑스, 영국 등 문화원의 후원을 받는 국제전을 꾸준히 진행했죠. 1999년에는 건축을, 2000년에는 비디오아트를 주제로 이어 갔습니다.
당시는 이와 같은 정기적인 국제교류 프로젝트가 거의 없던 시절로, 매년 국가 교류전 형식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죠. 미술관은 작품을 보여주는 곳을 넘어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중장기적으로 지속되며 한국 현대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 평창동 이전과 함께 시작된 ‘토탈 아카데미’는 민간 대안 교육의 시초로 꼽힙니다. 아카데미라는 교육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카데미를 거창하게 교육사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당시 평창동 미술관에 온돌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언론사 논설위원 이었던 김영하,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을 역임한 권영빈, 박범신 소설가를 비롯해 화가, 건축가 등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노상 모여서 놀곤 했어요. 그 양반들이 우리가 이 동네에 살면서 동네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걸 좀 나누고 기여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제안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분들께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열자마자 70명씩 신청했어요. 강사의 면면이 워낙 쟁쟁해 수준이 무척 높았고, 수강생들의 열의도 엄청났어요. 재계 사모부터 고위공무원까지 다양한 분들이 다녔는데, 그때 시작해서 지금까지 듣는 분도 많아요. 그렇게 시작된 공부 모임이 입소문이 나면서 1년 과정의 전문적인 아카데미로 정착됐고 현대음악, 건축, 영화, 문학까지 분야도 넓혔죠. 나중에는 현대음악에 공연까지 접목하고, 아카데미와 연계한 여행을 진행하며 독보적인 커리큘럼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 대학원에 진학한 분도 있고, 세계의 미술관 건축 관련 책을 출판한 분도 있어요. 부산 위미라 문화재단 1963 이사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도 우리 아카데미 회원 출신이에요. 지금은 최고의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관장님은 함께 일하는 큐레이터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덕분에 정준모, 김원방, 이영철, 신보슬 등 훌륭한 기획자들이 이곳에서 양질의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저는 미술관에는 좋은 기획자가 중요하다고 항상 말해요. 관장이 큐레이터 위에 군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많이 공부하고 똑똑한데 간섭할 필요가 있나요? 적임자를 찾으면 그저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책임은 내가 진다. 그리고 1년에 진짜 의미 있는전시 두 개만 제대로 하라고 했죠.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고,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든 뭘 하든 자유를 줬어요. 본인의 실력도 쌓고 제대로 된 일을 하면 서로 좋은 거죠. 큐레이터를 직원이 아니라 전문가로 대우할 때 진정으로 혁신적인 기획이 나오거든요.
앞으로의 50년
긴 시간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보람된 일이 많겠지만 미술관을 닫을 생각까지 할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을 텐데요.
힘든 건 재정적인 부분에서도 많았지만 돈 이상으로 어려운 것은 내 스스로의 고민이었어요.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의 반복이었죠. 최근에는 소신있게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는 곳에서 재정적 후원을 하거나 맡아줄 좋은 파트너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노준의입니다》 토탈미술관 전시 전경 2023
토탈미술관 소장품전 《안녕하세요, 노준의입니다》를 2023년에 시작해 토탈미술관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노준의입니다》는 ‘토탈미술상’ 수상작들을 비롯한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으로 구성된 전시입니다. 요즘처럼 신진 작가들의 전시가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1980~1990년대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기 위해 많은 분이 미술관을 찾아주셨어요. 사실 이 전시는 소장품을 점검하고 보수하기 위해 빈 전시장에 작품들을 펼쳐놓은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예실의 기획자들이 지금은 거장이 된 박현기, 이승조와 같은 작가들의 청년 시절 작품을 보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관객들과도 공유하고 싶다 생각하게 됐죠.
특히 ‘토탈미술상’은 1990년대 당시 가장 실험적이고 중요한 작가들을 조명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을 제시해왔는데, 전시에서 그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다시 되새기며 당대 미술계의 흐름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좋은 기회로 파주와 천안에서도 전시를 진행했는데, 앞으로 연구와 보완을 거쳐 더 많은 분이 이 전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순회전시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개관 50주년을 맞아 특별히 준비중인 전시나 프로젝트가 있다면?
이영철 큐레이터와 다시 한번 50주년 기념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단순히 과거를 나열하기보다 50년의 이야기를 새롭게 엮어내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아카이빙 자료도 정리하고 있고요. 전시는 2026년 가을에 선보일 예정이고 기획자에게 전권을 주고 맡겼어요. 이영철 큐레이터와 신보슬 큐레이터 등 지금의 학예팀이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을 운영하고 또 미술관에 종사하는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후배 기획자들을 위해 정리한 글이 있는데, 그중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들이 있어요. 이 질문들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을 열망하며 사는가? 나는 평생 이 직업을 가져도 좋을까? 나의 의식은 얼마나 건강한가? 나는 남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는 전시를 기획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일로 얼마나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가? 이런 질문을 평생 가슴에 안고 일했어요. 지금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도 꼭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무엇보다 창의적인 상상력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내면의 정신적인 힘과 스스로의 직관을 믿고 창의적인 일을 해 나가면 좋겠어요.
5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토탈미술관이 수행해 온 역할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떤 태도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연속 이었다. 사람을 믿고 질문과 실험을 지속하는 일, 그 단단한 태도야말로 토탈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현재형의 유산일 것이다. 개관 50주년을 앞두고 노준의 관장이 건넨 “나는 무엇을 열망하며 사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후배 세대들의 몫으로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