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두크로트 Isabella Ducrot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1
The Love That Moves the Sun and the Other Stars
김승덕 르콩소르시움 공동 디렉터
번역 김소정
Artist

로마의 저택 응접실에서 포즈를 취한 두크로트. 뒤에 걸린 그림은 그가 남편과 함께
수집한 바로크 회화 작품이다. 르콩소르시움 전시장 입구 한 벽에 설치되어 방문객을 맞이했다
《Profusione》 르콩소르시움 전시 전경 2024 사진: Laura Sciacovelli 제공: Le Consortium
이사벨라 두크로트 / 1931년 이탈리아 나폴리 출생. 로마 국립근현대미술관(2014),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2015), 로마 MAXXI(2023), 디종 르콩소르시움(2024) 등에서 주요 개인전을 열었다. 1993년과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2022년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섹션에 대형 설치작품을 출품해 전 세계 컬렉터의 이목을 끌었다. 올해 나폴리 마드레미술관에서 애덤 와인버그 전 휘트니미술관 관장이 기획하는 첫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온라인 플랫폼 아트시(Artsy)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10명’(2024)에 오르기도 한 두크로트는 다수의 출판물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Recent Animals』(2025), 『Women’s Life』(2021), 『La stoffa a quadri』(2019) 등이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202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공식 상영작으로 초청받은 〈이사벨라 두크로트 언리미티드(Tenga Duro Signorina! Isabella Ducrot Unlimited)〉다. 정식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한 이탈리아 여성이 뒤늦게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이제는 전 세계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는 서사는 자칫 흔한 성공 스토리로 들릴 수 있겠으나, 한 세기 가까이 삶을 일구며 예술을 사랑한 작가의 일상은 특별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2024년 르콩소르시움에서 열린 두크로트 개인전을 기획한 김승덕 디렉터가 거침없는 붓놀림과 섬세한 콜라주 사이에 충만히 자리한 그의 예술 세계를 전한다.
“노년이 되면 용기 있는 감정과 자유로운 몸짓으로 충만할 수 있다.”2
1931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난 이사벨라 두크로트는 로마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이자 작가이다. 그의 작업 세계는 직물(fabrics)에 대한 비범하고도 지속적인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회화 작업과 글쓰기 작업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두크로트의 전문적인 예술 활동은 1980년대, 작가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50대에 시작되었고 그 이후 4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이어졌다.
본격적인 예술 행보를 시작하기 전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과 함께 끊임없는 여행을 했다. 이 시기 두 사람은 수백 점에 이르는 페르시아 세밀화와 희귀한 앤틱 직물을 수집했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직물과 오브제 외에도 바티스텔로 카라치올로(Battistello Caracciolo), 카를로 돌치(Carlo Dolci),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등 바로크 시대 거장들의 회화 작품으로 구성된 두크로트의 컬렉션은 1980년대에 그가 자신만의 예술 여정을 내딛는 데 영감을 주었다. 작가는 이를 통해 명성 있는 거장들이나 전 세계의 무명 직조공들과 진정한 친분을 쌓으며, 문화적이고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지평을 자유롭게 오가며 활동할 수 있었다.
이사벨라 두크로트는 종이와 천, 콜라주 위에 이야기와 인용구들을 옮겨 적는 한편 영속적인 추상 패턴을 창조하는 도전을 이어갔다. 풍경, 정물, 기모노, 사랑에 빠진 연인과 같은 모티프를 빈번히 묘사하는 식으로 지난 40년간 방대한 양의 작품 활동에 매진해 온 그는 한 글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그릴 수는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안의 다정함이 늘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다정함을, 그리고 접촉의 가능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희귀한 종이 위에 연필, 파스텔, 잉크, 수채 등 다양한 매체로 펼쳐내는 두크로트의 작업은 철학, 민속학, 직물 직조에 이르는 폭넓은 문화를 참조하고 이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두크로트는 자신이 소장한 희귀한 직물 작업에 나타난 반복성, 형태, 색채에 매료되어 작은 크기에서 대형 작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이를 반영했다.
로마의 팔라초 도리아 팜필리(Palazzo Doria Pamphilj) 는 그가 거주하는 공간이자 작업실이다. 1층에 놓인 커다란 서랍장 속에는 종이 위에 화분 속 꽃, 찻잔, 기모노 형상이 콜라주 된 작품들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2024년 가을, 작가가 이탈리아 밖에서 연 첫 미술관 전시인 프랑스 디종의 르콩소르시움 개인전을 위해 그는 종이 작업, 직물, 콜라주를 아우르는 약 80점의 작품을 모았다. 이 전시에서는 대형 신작들도 처음 공개됐다. 이는 두크로트가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대화를 나누고 난 후 자발적으로 시작한 작업으로, 작가의 놀라운 열정을 여실히 증명한다. 서로 다른 주제와 기법,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균형 있게 엮어낸 당시 전시는 주요 미술잡지와 매체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Omaggio a Mishima (Homage to Mishima)〉종이에 콜라주(양면) 6점 각 180×120cm,
종이 작업 1점 1450×510cm 2016 가변 설치
아트바젤 인 바젤 언리미티드 섹션 전시 전경 2022 제공: Le Consortium
르콩소르시움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두크로트와 함께 체크무늬 모티프와 패턴에 대해 길고도 산만한 대화를 나눴다. 앞치마, 식탁보, 안감용 직물 등 일상의 세속적 삶에 뿌리를 둔 체크무늬는 두크로트의 작업에서 일종의 계시처럼 등장한다. 과거에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을 방문한 두크로트는 1333년에 그려진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with St. Margaret and St. Ansanus)〉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작가는 체크무늬 직물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했고, 중세부터 19세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체크무늬가 대량생산을 통해 어떻게 값싸고 흔한 패턴이 되었는지 그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두크로트는 우피치미술관에서의 경험으로 자신의 예술적 토대를 구축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The Checkered Clot』(2019)에 잘 기록되어 있다.3
“시모네 마르티니의 제단화는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기적이 일어나는 한 장면을 재현한다. 말(言)의 소리가 처녀의 태에 스며들어 그를 잉태케 하는 순간으로, 그 말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인사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4
여기서 우리는 사자(使者)가 먼 길을 재촉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그가 타고 온 소용돌이로 인해 여전히 펄럭이고 있는 망토의 주름이 그 단서다. 접힌 주름 사이로 본래 보이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드러나는데, 바로 천사 망토의 안감인 체크무늬 천이다.

시모네 마르티니 〈The Annunciation with St. Margaret and St. Ansanus〉
목판에 템페라 265×305cm 1333
이처럼 완전히 노출된 날것 그대로의 격자무늬는 나를 이상할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면서도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사의 튜닉에 사용된 귀한 구릿빛 장식과 함께 배치된 체크무늬의 기초적인 디자인이 나에게는 봉인된 메시지처럼 다가왔다.5
시모네 마르티니의 이 회화는 나에게 세 가지 암호화된 정보를 건네주었다. 내가 그것을 열자 여성성, 체크무늬 직물, 구조가 흘러나왔다. 이 세 요소는 직물의 연결성을 포괄하는 일종의 삼위일체와도 같았다.”6
여성성
두크로트의 페미니즘은 그의 글에서 엿볼 수 있듯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작가는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서 여성의 위치를 조용히 관찰하며, 헌신적이면서도 우아한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온 평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통찰을 건넨다. 예컨대 그는 여성과 남성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지금의 우리를 ‘최근의 동물(recent animals)’이라고 일컫는다. 인터뷰 당시 아흔네 살을 맞이한 작가는 (“그렇다. 아흔넷.” 작가는 이를 여러 번 강조했다) 자신을 인류사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목격한 증인이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나 스스로를 역사적 존재라고 느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최근의 동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2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아주 최근의 존재들이 되었지만, 정작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7
시대의 변화는 여성이 스스로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두크로트는 여성성과 언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언어가 열렸다. 페미니스트들이 그 언어를 열어젖힌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성적 활동을 묘사할 수 있게 된 지금, 에로스는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이 아니다, 여성이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미스터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는 언어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나는 언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이 페미니즘이다.”8
두크로트가 스스로 밝혔듯 그는 단어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가로, 때로는 단어들을 작업 속에 그려 넣기도 한다. 이는 형태와 색채에 더해 작품에 시적인 요소를 덧입히는 요소가 된다. 작가는 시적인 요소를 여성성의 영역에서 새롭게 해석하는데, 이는 그가 지닌 예술성이 창작을 통해 드러나지 못한 환경에서도 예술적인 태도를 오랜 기간 견지해 온 자신의 삶과 교차되는 것이다. 작가는 한나 아렌트의 글을 통해 이에 관한 성찰을 공유한다.

〈Big Aura Ⅲ〉(사진 오른쪽) 섬유 위 천, 안료 390×473cm 2017
《Profusione》 르콩소르시움 전시 전경 2024
제공: Le Consortium
“여러 해 전, 한나 아렌트는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아렌트는 벤야민이 ‘시적으로(poeticamente)’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시적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시적으로 살아왔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면에서 많은 여성들은 표현하지 못한 채 시적으로 생각하도록 내버려져 왔다.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을 두고 시적으로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그의 삶이 파괴되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우리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9
체크무늬 직물과 구조
패턴은 구조를 구축하고 단어는 서사를 형성하며 색채는 감정을 빚어낸다. 두크로트의 작업 세계에서는 이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광경이 재현된다. 그 과정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대립하는 것은 한 점으로 수렴하고 가장 아름다운 직조는 분기하는 것으로부터 형성되며 모든 것은 분쟁으로부터 일어난다.’
직물을 직조하는 과정에서 실과 실이 교차하는 것은 날실과 씨실이라는 상반되고 구별되는 두 존재가 깨지지 않는 계약을 맺는 것과 같으며, 이 계약은 수천 번의 교차를 통해 매 순간 재확인된다. 서로 묶여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날실과 씨실은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한쪽의 기능이 다른 쪽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엮임은 그것이 누더기든 비단이든 간에 모든 직물의 기초를 이룬다. 결합과 긴장이 동시에 발생하는 역동적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직물은 단일 섬유보다 훨씬 강력한 저항력을 지닌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씨실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날실 덕분에 존재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날실 역시 씨실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10

〈Teapots〉종이에 먹, 안료, 콜라주 55×83cm 2024
사진: Giorgio Benni 제공: Galerie Gisela Capitain, Cologne
이와 같은 물리적 구조 외에도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구성과 패턴의 대립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카펫과 러그, 그 외 다수 작업에는 두 개의 선이 주요 패턴을 감싸며 경계를 긋는 테두리(border)가 특징적으로 보인다. 마치 창문처럼 화면을 구획하는 프레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요소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경계는 자연을 정복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일부 페르시아 러그에 나타난 것처럼, 꽃과 풍성한 식물로 이루어진 화려한 정원 같은 모티프를 테두리가 감싸고 있는 모습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나의 작업에서도 사물, 인물, 꽃이 꽂힌 화병이나 찻주전자 같은 이미지들이 이러한 경계선 안에 배치된다. 배경 역시 콜라주 과정을 통해 앤틱 직물의 일부로 구성되기도 한다. 추상과 구상의 대비, 즉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변증법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이다.”
〈Big Aura Ⅲ〉(2017)은 높이가 5m에 달하는 대규모 회화 작품으로, 2024년 르콩소르시움 전시 이후 작가가 미술관에 기증한 3점의 작품 중 하나다. 작품 속 옷의 직물로 사용된 베이지색 천은 대마와 같은 섬유인데, 바티칸미술관의 보존팀이 미술관 소장품 라파엘로의 회화 작품 밑에 배접을 위해 사용한 천과 같은 것이다. 두크로트가 세계적인 고직물 수집가로도 알려지면서 작업에 활용하라는 취지로 미술관에서 보내왔다. 이 에피소드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그의 작업 세계를 비춘다. 즉, 소장 가치가 높은 고가의 직물도 서슴지 않고 작업 재료로 쓰는 예술적 동력과, 일반적으로 평범한 것으로 여겨온 체크무늬 등의 패턴을 자신의 예술 언어로 가져오면서 새로운 맥락을 만든 고유성이다.
이사벨라 두크로트는 이제 더 이상 여행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규칙적으로 작업실을 오가고 글쓰기와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시간을 보낸다. 작가는 2022년 세상을 떠난 남편과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을 기억한다. 그는 부인을 뮤즈처럼 사랑했고, 이들은 미술품과 고직물을 수집하며 예술품에 둘러싸인 ‘시적인’ 삶을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정작 예술가로서의 두크로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작업하지 말 것을 권면하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두크로트의 작업실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크로트는 남편 사후에 창조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산하며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창작의 삶에 온전히 몰두해 있는 작가는 “나는 아주 행복하다!”고 말한다.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여성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예술의 가능성을 찾아낸 노년의 예술가는 여전히 자유로운 몸짓으로 시적인 삶을 직조하고 있다.
1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지옥과 연옥, 천국을 둘러본 단테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힌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편집자 주
2 작가와의 인터뷰 2024.9.24
3 본 저서는 2018년에 작가가 이탈리아어로 출간한 『La stoffa a quadri』를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4 Isabella Ducrot The Checkered Clot Quodlibet 2019 p.8
5 위의 책 p.11
6 위의 책 p.78
7 앞의 인터뷰
8 앞의 인터뷰
9 앞의 인터뷰
10 앞의 책 p.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