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욱 Choi Young Wook
삶의 태도를 품은 조형성과 수행성
안진국 미술비평
Artist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 이미지 제공: 작가
1964년생. 홍익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오아르미술관(2026), 미국 LA 헬렌제이갤러리(2024), 미국 뉴욕 AP Space(2024),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2024), 노화랑(2024), 문화역서울284(2023), 일우스페이스(2018)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중정갤러리(2024 ), 가나아트센터(202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2021), 제주도립미술관(2021), 경기문화재단(2016), 타이베이 당대 예술관(2013) 등에서 열린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필라델피아뮤지엄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달항아리를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달항아리로 불린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달이 항아리에 담기고, 그 항아리가 그림에 담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달과 달항아리와 달항아리 그림. 재현의 재현인가? 달항아리는 애초부터 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2005년 이전까지도박물관에서는 ‘백자대호’라는 이름이 더 일반적이었던 이 항아리1는, 달을 연상해서 빚었던 것이 아니라 그 둥근 모양이 보름달을 닮아서 달항아리로 불리기 시작했다.2 단지 ‘달항아리’라는 명칭을 얻게 되면서 달의 형상과 상징을 품게 된 것이다. 단순한 기물이었던 항아리가 명명을 통해 달이라는 상상적 형상을 내포하는 문화적 대상으로 바뀌었다. 달은 한국의 전통 농경사회에서 풍요와 다산, 풍년을 기원하는 문화적 기호였다. 그렇다면 달의 이미지를 품은 항아리를 다시 그림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달, 항아리, 그림이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는 고정된 범주가 아니라, 서로를 경유하며 달이 항아리가 되고, 항아리가 그림이 되는 이중의 변환 속에서 관계항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하나의 형상이 명명을 통해 문화적 기억을 획득하고, 그것이 다른 매체로 옮겨와 회화적 물질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함의, 즉 달이라는 문화적 기호를 품은 항아리, 그리고 그 항아리를 품은 그림이라는 중층적 구조의 의미와 관념(달)-입체(항아리)-평면(그림)으로의 변환의 연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 그 연쇄 사이에 발생하는 초과 영역이 지닌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 달과 항아리와 그림은 질적으로 다르다. 달이 항아리가 되면서 파생되는 맥락이 있고, 달을 닮은 항아리가 그림이 되면서 생성되는 요소가 있다. 그림은 이미 의미를 얻은 형상을 다른 감각의 층위로 이동시키는 사건이다. 이 이동으로 이전 형상에는 다른 의미가 생성된다. 그림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하지만 달항아리를 그리는 최영욱에게 그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것은 이러한 변환의 의미가 아니라, 전통성이었다.
최영욱의 회화를 이해하는 데 경계해야 할 지점은 바로 달항아리의 전통성이라는 도식 안에 그의 회화를 가두는 일이다. 물론 그는 달항아리의 형상을 그린다. 그 형상이 한국미술의 맥락 안에서 전통, 백자, 조선의 미감, 소박함, 전통의 계승 같은 어휘들을 즉시 불러오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때문에 그의 회화가 지닌 진정한 의미를 놓치기 쉽다는 점이다. 최영욱은 이러한 어휘들을 그대로 재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는 달항아리를 공예사적 대상으로 연구하여 회화로 옮기는 작가도, 전통 도자의 상징을 재현하기 위해 달항아리를 그리는 작가도 아니다. 그에게 달항아리는 하나의 강렬한 형상이며, 자신의 회화적 감각과 내면의 시간, 반복의 노동, 표면의 구축, 정신적 수행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달항아리의 재현적 완벽성이나 전통에 기초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달항아리라는 형상이 회화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고, 평면이 어떻게 사유의 장으로 전환되는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최영욱: 응결》 일우스페이스 전시 전경 2018
발견한 삶의 태도와 조형성
‘카르마(Karma)’라고 명명한 최영욱의 달항아리 작업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은 200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백자 달항아리 작품을 보고 감동과 영감을 받은 경험이다. 이 순간이 그의 달항아리 그림의 시작이며, 작업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다. 타국에서 만난 달항아리가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자각을 일깨웠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왜 달항아리인가? 달항아리 외에도 다른 한국 전통 공예품이 즐비했을 텐데, 왜 달항아리였던 것일까? 이점이 그와 달항아리의 조우가 단순히 ‘한국적인 것을 발견한 사건’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하는 질문이다. 이 조우가 최영욱에게 문화적 자각을 불러일으킨 점이 분명 있겠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던 것은 달항아리의 형태안에서 발견한 삶의 태도다. “달항아리를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 굽(바닥 부분)이 되게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전에는 둥글둥글하게만 생각했다.”3 작가는 달항아리의 굽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둥글고 유순한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항아리에서 예상 밖의 강인함을 발견한 것이다. 당당함과 버팀의 감각을 봤다. 그는 이 형태에서 “당당하게 살아도 되겠다”라는 느낌을 받았다.4 달항아리와의 조우에서 최영욱이 본 것은 전통문화의 상징이라기보다, 자기 내면의 절박함과 겹쳐진 하나의 태도, 곧 조용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존재 방식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달항아리가 역사적 유물의 재현이 아니라, 어떤 심리적이고 존재론적인 힘에 대한 언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달항아리가 달의 문화적 기호를 품으며 새로운 의미를 형성했듯이, 달항아리를 그린 최영욱의 그림은 달의 문화적 기호와 달항아리의 전통 형상적 구조,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삶의 태도가 겹겹이 감싸여 있는 존재론적 사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날 이야기 2002-10〉(부분) 캔버스에 혼합재료 42×91cm 2002 
최영욱 스튜디오 전경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
최영욱이 달항아리에서 발견한 이와 같은 새로운 감각, 삶의 태도는 시점과 색채, 그리고 크기라는 세 가지의 조형적 양식과 관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밑에서 우러러보는 시점도 아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수평적 시점도 아닌 애매한 시점, 즉 경계적 시점을 택한다. 이 시점은 편안함과 긴장감, 부드러움과 당당함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구연부(입구)의 상세를 생략하여 명확히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항아리는 정물화의 기물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닫힌 표면, 혹은 버티는 몸체처럼 보인다. 또한, 다른 부분에 비해 굽(바닥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함으로써 달항아리에서 느꼈던 당당함과 버팀의 감각을 강조한다. 상부의 완만한 구형과 하부의 약간 역삼각형 구형, 그리고 음영의 고요한 변화는 고요하고 단단하지만, 조형적 긴장을 은은하게 생성한다.
더불어 회색조의 미묘한 채도와 명도의 변화와 대비는 입체와 평면을 교란하고, 배경과의 대비를 줄임으로써 달항아리가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화면 전체의 리듬에 스며들게 한다. 이러한 색채는 그가 달항아리 그림을 시작한 2005년 이전의 작업을 상기시킨다. 다소 내러티브적인 회화인 그의 초기 작업 ‘어느 날 이야기’ 연작은 흰색·회색조의 화면 위에 사물이나 풍경이 희미하게 등장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러한 색채의 느낌이 달항아리 그림인 〈Karma〉에서도 여전히 이어진다. 작가는 서울 중구의 도심에서 성장했기에, 그의 기억 속 풍경은 자연의 전원성이 아니라, 콘크리트 벽, 인사동, 을지로, 동대문과 같은 도시적 표면들이었다. 회색조의 무채색 계열이 그의 작업 전반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이러한 기억과 관계 깊은 것으로 보인다. 미술비평가 윤진섭은 최영욱의 색채에 관해 “그에게 있어서 흰색 또는 회색조의 바탕에 사물을 그려 넣는 일은 다시 말해 체험을 응축해 기호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5 달항아리의 색채가 사물의 재현을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체험(경험)’이 응축되어 발산한 기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초기 작업에 대해 “묘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그 느낌을 많이 담았던 것 같다”고 말했는데6, 이는 구체적 재현보다는 형상 이전의 감각적 장을 더 중요시하는 태도로, 달항아리 연작이 이러한 태도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언뜻 달항아리가 상당히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채도와 명도 대비를 줄이고, 음영 변화를 미묘하게 처리하고, 철분 흔적이나 묘사적 장식도 지워가며, 반복되는 선을 전면화함으로써 화면의 깊이가 얕아져 전면회화(전면균질회화, 全面均質繪畵)의 양상이 느껴진다. 특히 작가의 작업 중에 달항아리의 외형을 버리고, 마치 달항아리에 근접해서 그 표면을 표현한 듯한 작업은 전면회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표면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빙열(氷裂), 즉 항아리의 숱한 균열을 연상케 하는 그물망 같은 짧은 선들과 우주의 행성을 떠오르게 하는 물감을 흩뿌린 점들, 그리고 미묘한 색채 변화를 보여주는 이러한 작품들은, 구상회화와 추상회화가 중첩된 면모를 지닌다.
최영욱이 그린 달항아리의 크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 달항아리는 커봐야 높이 40cm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의 그림은 100호 크기가 일반적이며, 2.5m 크기의 화면에 달항아리를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화면이 커질수록 달항아리를 하나의 사물처럼 한눈에 파악하기보다, 화면의 표면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최영욱은 이에 대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 내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더 크게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7. “내 작품을 보는 것은 나의 내부로 잠행해 들어가는 동시에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 자신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8. 달항아리가 커짐으로써 ‘보는’ 차원을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외형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축적된 시간과 반복의 흔적을 따라가는 체험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크기의 변화는 내부성의 확대를 가능케 한다. 달항아리는 본래 비어 있어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인데, 크게 확대된 화면 속에서는 마치 비어 있음이 드러나듯이 하나의 깊이로 다가온다. 형상의 외곽이 커질수록 보는 사람은 그 안쪽의 침묵, 여백, 내면의 공간을 더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영욱의 달항아리에서 크기는 외형의 증대가 아니라, 보는 이를 표면에서 내부로 이끄는 감각적 확장의 방식이다.
작가의 달항아리 그림이 지닌 이러한 세 가지 조형성(시점, 색채, 크기)은 달항아리를 더 잘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적 재현의 조건이 아니라, 그가 달항아리에서 받은 느낌을 회화로 표현하기 위한 변환의 조건인 것이다.

〈Karma 20184-49〉캔버스에 혼합재료 65×400cm 2018 
〈어느 날 이야기 2005-3〉캔버스에 혼합재료 35×140cm 2005

〈어느 날 이야기 2005-1〉 캔버스에 혼합재료 35×140cm 2005
수행성이 품은 명상과 사유의 감각
수행성이다. 돌가루와 매트 미디엄, 동양화 물감, 무광의 층위가 섞여 형성되는 표면은 결코 한 번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미디엄을 바르고, 부드럽게 보이게 갈아내고, 다시 바르고,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화면을 아주 매끈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매트하지도 않은, 마치 무광 도자기나 석고의 표면 같은 질감으로 만든다. 작가는 “내 안의 어떤 정신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한다”고 밝혔다.9 반복되는 공정은 화면을 침전과 축적의 장으로 만들며, 회화를 하나의 수행적 시간으로 전환한다. 일종의 명상적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성을 통해 그의 회화는 지속과 인내, 미세한 조정이 응결된 시간의 지층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표면의 숱한 균열(빙열)을 연상시키는 선 긋기 역시 반복적인 행위라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항아리 표면을 메우는 수많은 선은 몸의 감각을 화면 위에 기입하는 수행의 흔적이다. 일기 쓰듯, 독백하듯, 상념 속에서 채워가는 선들은 동일한 행위의 축적을 통해 내면의 상태와 시간의 밀도를 드러낸다. 최영욱에게 반복된 행위는 세계의 속도를 늦추고 자기를 가라앉히는 미학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성은 채움과 비움의 역설 위에서 작동한다. 물질적 행위를 끊임없이 중첩하여 화면의 밀도를 채우지만, 그 결과는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을 비워내는 명상적 행위에 가깝다. 이는 수행의 역설이기도 하다. 반복해서 채우는 행위를 통해 비움의 감각에 도달하는 것. 결국 화면이 주는 고요함은 그 표면에 누적된 수행적 시간의 밀도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최영욱의 회화는 단순히 달항아리 형상을 반복하는 작업이 아니라, 반복 그 자체가 지닌 채움과 비움의 역설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태도와 정신을 보여주는 수행의 행위인 것이다.

《최영욱: 쉼표: 비우고, 머무르고, 채우는》 오아르미술관 전시 전경 2026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
이 수행성의 감각은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공공미술 ‘쉼표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그의 회화가 수행성을 통해 내면을 비워내고 본질적인 자신을 대면하듯이, 작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달항아리와 만나게 하는 회화와 설치가 융합된 ‘쉼표 프로젝트’ 프로젝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명상의 집이자 작은 미술관, 기도소, 회복과 사유를 위한 공간이다. 최영욱은 도심의 후미진 장소, 빌딩 옥상, 산책길 중턱, 백화점 옥상 등에서 사람들이 잠시 들어와 작품 앞에 머물다 가는 구조를 상상했다. 그래서 “잠깐 쉬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쉼표를 마크처럼 쓰자고 했다.”10 이는 단절이 아니라 잠깐의 멈춤이고, 다시 이어질 호흡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회화 작업을 하면서 경험했던 명상적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조화했다는 점이다. 작가가 회화에서 보여준 반복적 행위가 화면 속에 침전된 시간이라면, ‘쉼(,)의 집’은 그 시간을 관객이 실제로 체류하며 느끼게 하는 공간적 장치인 것이다.
‘쉼표 프로젝트’는 그의 수행성의 감각이 평면 회화의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공간적,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수행성이 지닌 명상과 사유의 감각은 ‘쉼의 집’을 통해 관계적이면서도 내면적인 면모로 드러난다. ‘쉼의 집’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장소지만,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일상에 들어와 있는 공간이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헤테로토피아다. 일상을 비워내고 고요함으로 채워진 ‘쉼의 집’은 획일화된 일상 공간의 숨 가쁨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우리의 공간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인식하게 한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최영욱 회화가 단순한 재현의 회화가 아닐뿐더러, 전통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님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달항아리와의 조우를 통해 삶의 태도를 발견했고, 그것을 조형성과 수행성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쉼의 집’을 통해 자신의 느꼈던 감각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저 짧은 마주침의 감상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작품을,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경험을 주고 싶은 것이다.

2025년 워커힐 호텔에 전시됐던 ‘쉼표 프로젝트’
달항아리처럼 산다는 것
최영욱은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오랫동안 화면 앞에서 미디엄을 바르고, 갈아내고, 다시 바르고, 갈아내는 것을 반복한 후, 수많은 선을 그으면서 얻어낸 삶의 감각이 스며 있는 것 같다. 달항아리처럼 산다는 것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 것, 겉으로는 둥글고 부드럽지만 안에서는 단단히 서 있는 것, 비어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 상태, 가득하면서도 비워진 상태일 것이다. 조금 늦게 드러나도 괜찮고, 오래 보아야 비로소 보여도 괜찮고, 무던한 듯 보여도 괜찮은,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달항아리처럼 산다는 것은 그런 속도를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조용히, 천천히 자기를 보여주는 것.”11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다는 것은 고요한 용기를 배우고 싶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프리즈서울 2025에 전시됐던 ‘쉼표 프로젝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