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삼성미술관 Leeum 개관 10주년

interview

성미술관 리움 학예연구실장 우혜수

 “Beyond and Between은 리움의 비전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DF2B4191먼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 특히 처음으로 리움 전관(全館)에 걸쳐 전시하는 것도 꽤나 부담이 컸으리라. 전시 개막 후 주위 반응이나 평가는 어떠한가?
많은 분이 리움 개관 10주년을 축하해주신다. 이번 전시는 개관 10주년 기념전시이자 첫 전관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교감(交感)’이라는 주제는 이 시대의 화두이기도 하고 리움의 향후 방향 설정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시의적절하다고 평가해주신다. 전시 면에서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상설전시실의 변화에 중점을 두었는데,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교감을 시도한 고미술 상설전시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밖에도 국내외 작가의 신작을 준비했고, 로비 같은 공용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볼거리가 많은 전시로 준비했다. 어떤 분이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 표현대로 어릴 때 특별한 날 선물로 받았던 ‘종합선물세트’의 행복한 느낌 일거라는 생각을 하니 매우 감사하고 덩달아 기뻤다.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함께 보여준 점이 특히 돋보인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리움의 소장품 특성이 잘 드러난 것 같다. (현대미술 전공자로서) 고미술에 대한 이해나 접근 방식을 어떻게 설정했는가?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로부터 가장 주목 받는 전시가 고미술 전시실, 즉 Museum 1에서 열리는 ‘시대교감’이다.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관객의 호응과 관심이 이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소장품 전시실 가운데에서도 특히 고미술 소장품 전시실에서 이루어지는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미술은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을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점으로 불러들여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석해내고 맥락화할 때 생명을 갖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미술에 대한 연구와 해석은 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에 의해서만, 혹은 고미술 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반면 이번 리움에서의 시도는 고미술에 대한 작가들의 연구와 해석이다. 이것은 분명히 생동하는 가치 부여이며 유의미한 예술적 연구라고 확신한다. 많은 분이 이런 시도가 지속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이야기해주셔서 반갑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두 분야 큐레이터의 연구는 물론이고 현대미술 작가와도 오랜 시간 연구와 토론을 통해 작품과 전시 구성을 완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번처럼 완성도 높은 전시를 다시 기획하려면 최소한 1~2년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교감(交感)’이라는 타이틀은 시기적으로나 주제를 드러내는 면에서도 적절한 것 같다. 영문으로는 ‘Beyond and Between’이라고 표기하는데, 타이틀에 대한 부연 설명을 부탁한다.
교감, 소통, 공감 등은 우리 사회의 화두이다. 이것은 예술과 사람이 함께 하는 미술관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특히 한국의 고미술과 현대미술, 외국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리움의 소장품은 전통과 현대의 단절 문제, 동양과 서양의 복잡한 관계 등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는 교감, 현대미술에서 한국과 서양이라는 지역을 초월한 교감을 통해 예술 간의 단절을 극복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리움이라는 미술관이 관람객에게 더욱 가까운 도심의 휴식처가 되고자 하는 바람을 관객교감이라는 주제에 담고자 했는데, 이 세 교감은 미술관이 중점을 두게 될 미래를 담는 것이기도 하다. 영어로 Beyond and Between은 많은 의미를 담기 위해 다소 의역한 면이 있다. Beyond는 경계를 초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Between은 예술과 사람, 과거와 현재, 예술과 과학 등 다양한 가치들을 포괄하고 예술로서 매개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Beyond and Between은 미술관의 슬로건이기도 한데, 리움의 비전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소장품 외에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 혹은 특히 눈여겨볼 작품을 소개해달라.
<교감전>에는 리움 소장품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이 제작된 작품이 여럿 있다. 특히 로비의 작품들은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 누구나 볼 수 있는 공용공간에 설치되어 누구나 가까이 접할 수 있다. Museum 1 계단 공간에 설치된 올라퍼 엘리아슨의 네온 설치, 플라스틱 바구니로 만든 최정화의 18미터 높이의 기념비적 기둥, 카페 공간을 변화시킨 리암 길릭의 벽 설치작업과 파티션은 모두 리움 공간을 면밀히 관찰, 분석하고 주제에 대한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신작이다. 특히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은 고미술 상설전시실과 현대미술 상설전시실을 연결하는 계단에 위치하는데, 이 공간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실 외국 작가가 이 공간의 의미를 해석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고미술관을 나오면서 마주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고려가 있었다. 오랜 기간 작가와 논의해 우리는 태양계 우주공간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주라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표현한 것으로 인류와 예술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영속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고미술 상설전시실과 현대미술 상설전시실을 연결하는 상징적 의미다. 로비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고헤이 나와의 유리구슬로 뒤덮인 사슴도 매우 아름답다.

‘관객교감’이라는 주제가 눈에 띄는데 기획의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관객교감이라는 주제는 세 관의 주제를 하나의 주제 아래 놓고 볼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미술관은 어렵고 엄숙한 듯 보이며, 특히 현대미술은 난해하다. 대중에게 미술이 어떻게 하면 흥미롭고 즐거우며 가끔은 단순하게 몸을 움직여 걸어 다니기만 해도 즐길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관객교감이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구성했다. 네토는 자칫 현대미술이 간과하기 쉬운 아름다움, 즐거움, 휴식 등과 같은 요소들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작가로 이해되며, 티라바닛은 예술작품의 역할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관점의 변화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작가이다. 재닛 카디프 & 조지 뷰어스 밀러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통한 공간 창조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온 작가이다. 그리고 인사이트씨잉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젊은 작가들이다. 리움이 이태원에 자리 잡은 이래 이 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리움과 이태원은 알게 모르게 소통하며 서로를 변화시켜왔다고 보며, 작가들이 이태원을 연구함으로써 리움과 개인을, 나아가 예술이 사회와 세계를 매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표면적인 흥미로 작품을 즐기는 것도 충분히 좋고, 그 이면에 자리 잡은 맥락들을 해석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는 모두 보는 사람의 몫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대로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삼성미술관 학예사들에게도 이번 전시는 새로운 경험이자 도전이었을 듯싶다. 전시를 준비하며 고미술과 현대미술 전공-담당 학예사 간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했나. 혹시 이견은 없었는가?
리움의 고미술 학예실과 현대미술 학예실이 통합된 지도 이제 6년이 넘었다. 리움 개관 이전 오랫동안 서울과 용인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두고 있었던 두 학예실이 통합된 후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늘 가까이 대화한다. 또한 정기적으로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누고 전시에 대해 토의한다. 처음 ‘교감’과 ‘시대교감’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간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4년 리움이 개관할 당시 고미술 학예실과 현대미술 학예실은 ‘고미술 상설전시실은 조선말기까지, 현대미술 상설전시실은 그 이후부터’라는 시기 구분 외에는 함께 논의한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서로 놀랐다. 고미술 전시실은 고미술 작품의 크기를 고려한 전시실의 형태와 작품 보호를 위한 고정된 진열장으로 인해 장르 간의 교류나 전시 실간 교체 등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큰 제약이었다. 또한 현대미술과의 표피적인 교류가 되지 않기 위해 현대미술 큐레이터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고미술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작품이 나오기를 서로 원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예사들 간에 주제와 작가 선정을 위한 토론, 고미술/현대미술 학예사와 작가의 토의를 거쳐 작품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의미 있고 뿌듯한 일이었다.

리움 전시실의 전시환경은 국내 최고수준이다. 소장품을 보존 관리하는 수장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소 소장품 관리와 연구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미술관의 근간은 소장품이다. 리움은 사립기관으로는 드물게 보존연구실이 있는 미술관으로 늘 소장품을 최상의 상태로 관리,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이번에 상설전시에 처음 나온 박노수의 <산정도>는 오랜 기간 복원처리를 통해 공개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오래된 고미술, 근대미술의 보존과 복원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레지스트라는 작품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관리한다. 크기, 서명, 재질 등은 물론이고, 이동에 대한 세세한 기록도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은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의 기본적 활동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임을 늘 생각한다. 학예사들은 소장품으로 구성되는 상설전시를 위해 각각의 소장품을 늘 연구하며 또 그 작품들의 맥락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리움처럼 한국 고미술, 현대미술, 외국 현대미술에 이르는 방대한 소장품을 가진 미술관에서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이번 10주년 기념전은 오랜 기간 소장품 연구의 축적으로 맺은 열매이다. 앞으로도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새로운 소장품 전시들을 기획할 계획이다.

개관 10주년 기념전 이후 계획하고 있는 일정이 있다면 소개 바란다.
올 연말까지 <교감전>이 열리고, 내년 상반기에 작가 양혜규의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2015년은 삼성문화재단이 창립 50주년을 맞는 해다. 이를 기념해 삼성미술관의 근간이 되었던 고미술 분야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호암미술관과 리움에서 기획하는 2개의 고미술 특별전이 있고, 연이어 한국 고건축을 다루는 전시가 리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또한 올해 새로이 개편한 아트스펙트럼도 지속하면서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등 시대와 지역, 장르를 초월하여 다양한 분야와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아우르는 전시들을 기획하고자 한다.

이준희 편집장

[Special Feature] 삼성미술관 Leeum 개관 10주년

삼성미술관 Leeum 개관 10주년 기념전: 교감 특별전을 둘러보고

안휘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문화재청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2014년 8월 20일 오후 나는 그동안 써오던 논문 한편을 대충 마무리 짓자마자 서둘러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향하였다. 전날 공개하기 시작한 <리움 개관 10주년 기념전: 교감(交感)>을 빨리 보기 위해서였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조지윤·이승혜 학예원이 나와서 맞아주었다. 모처럼 만난 이 제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고미술 상설전시관인 Museum1의 4층으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고려청자 전시부터 보기 시작하였다. 평소 상설전시를 통하여 눈에 익은 작품들 이외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자기들도 여러 점 볼 수 있어서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고려청자들은 구면이든 신출이든 단 한 점도 예외 없이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뛰어난 조형성과 형태미, 그윽하고 고운 비색(秘色, 翡色)의 유약(釉藥), 섬세하고 세련된 문양 등 무엇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송나라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이라는 학자가 그의 저술 《수중금(袖中錦)》에서 ‘천하제일(天下第一)’을 꼽으면서 고려의 비색, 즉 청자를 꼽은 사례가 떠올랐다. 고려청자는 하버드대의 박물관 전시에서도 ‘천하제일(The First under the Heaven)’으로 소개되었을 정도로 서양에서도 그 진가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최고 중의 최고(The best of the best)라고 부를만하다. “어떻게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낮은 신분의 고려 도공들이 이처럼 놀라운 수준의 아름다움을 그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창출할 수 있었을까” 늘 경이롭게 느꼈지만 이번에는 더욱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역시 자신들의 비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철저하게 지켜낸 ‘청기와쟁이들’의 작품 답다. 청기와도 청자를 굽던 청자 도공들이 만든 것이어서 ‘청기와쟁이’는 ‘청자쟁이’로 바꾸어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청자는 공예이면서 유약의 제조법과 번조법 등 전 제작과정이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기술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한국도자기 전문가 곰퍼츠(Gomperts)가 고려청자의 4대 업적으로 꼽았던 ‘아름다운 조형성’, ‘신비로운 유약색깔’, ‘상감기법(象嵌技法)의 창안’, ‘진사(辰沙)의 최초사용’ 등도 절감하며 재확인하였다.
평생 걸작들 앞에서도 알량한 미술사가의 냉철한 객관성을 보도(寶刀)처럼 앞세워 표정관리를 엄격히 하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자 애를 썼건만 이제는 늙어서일까 이번에는 보석 같은 청자들 앞에서 자제력을 잃은 듯 한숨과 감탄이 입에서 저절로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왔다. 실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의 높은 격조와 다양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였다. 이어서 보게 될 다른 전시도 대단한 것임을 예감케 하였다. 4층의 고려청자실에서 나는 이미 미적 포만감을 충분히 느꼈고 설령 더 이상 다른 전시를 못 본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두 제자는 3층의 조선시대 도자기실로 나를 이끌었다. 조선왕조 전반기에 우리 도공들이 발전시킨, 다른 나라에는 없던 조선 고유의 각종 분청사기와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간단없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순백자 및 청화백자를 위시한 다양한 백자들은 잠시 동안이지만 나를 시각적 충격 속에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마치 4층에서 3층으로 갑자기 떨어진 것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별개의 세계로 옮겨진 듯 혼미하게 느껴졌다. 한국의 도자기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아마도 4층의 고려도자실을 본 다음에 3층의 조선도자실로 들어서면서 ‘같은 나라의 도자기 맞아?’라는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고려와 조선왕조의 도자기들이 드러내는 차이는 새삼스럽게도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늘 같은 층의 다른 전시실에서 두 시대의 도자기들을 수평적으로 이동하면서 보았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으나 이번의 리움 전시에서는 같은 건물의 4층에서 3층으로 수직 이동한 후 층을 달리하여 보니 그 차이가 그렇게 별나게 두드러져 보일 수가 없었다. 이번의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를 통하여 겪은 새로운 시각적 경험이었다.
이 방의 압권은 그 유명한 얼룩진 달항아리이다. 둥글고 아담하고 덕스러운 몸매, 희고 깔끔한 피부, 넘치는 안정감 등등 흠잡을 데 없는 보름달 같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얼룩마저도 흰 캔버스 위의 담갈색 추상화같이 보여서 전혀 밉지가 않다. 다음 기회에는 조그만 별실을 만들어 따로 모셨으면 좋겠다. 주변에 누구의 어떤 작품을 갖다 놓아도 압도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귀얄문 편병도 형태의 특이함과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귀얄무늬가 돋보이는 세계 유일의 대표작이다. 그렇다고 다른 분청사기들이 그보다 못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각종 분청사기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와 무늬와 유약의 안정적인 소박성, 넘치는 창의성과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또렷한 한국성, 확연한 시대성과 지역성을 이번 전시에서 다시 한 번 절감하고 거듭 확인하였다.
15세기의 <청화백자매죽문 항아리> 앞에서는, 중국 것보다 뛰어난 우리나라 미술의 대표작들을 선정하여 기술한 졸저 《청출어람의 한국미술》(사회평론, 2010)에 여러 차례의 주저 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거듭거듭 후회하며 개탄하였다. 중국에서 워낙 뛰어난 청화백자들이 원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 가작을 누를 수 있는 작품이 혹시라도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앞서서 포함시키기를 망설였던 것인데 역시 포함시켰어야 마땅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이다. 이 항아리에 그려진 매화와 대나무 그림은 일류 화원의 작품이 분명하여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처럼 도자사 뿐만 아니라 회화사의 측면에서도 더없이 중요한 작품인 것이다. 이 청화백자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거듭 재확인한 것을 소득으로 여기며 마음을 달랬다. 이번 전시에서 얻은 또 다른 큰 소득이다.
2층으로 내려가니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정선의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군선도> 등 국보들이 반겨주었다. 정조대왕의 화성 능행(陵幸) 장면을 그린 그림 중의 한 폭인 <환어행렬도>도 낙폭이지만 최고 수준의 궁중기록화로서 눈길을 끈다.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하였다는 서도호의 <우리나라>는 수많은 아주 작은 인물상을 군집시켜 한반도 형태를 재현했는데 작품 속에 깃든 젊은 작가의 남다른 창의적 생각과 수고로움을 마다않는 성실함이 합쳐져 관객들의 눈길을 끌어들인다. 평면미술인 회화의 방에서 회화도 아닌 엑스트라가 관람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작가의 능력과 평판, 작품이 지닌 한반도의 지도와도 같은 조형성이 합쳐진 결과일 것이다.
1층 전시실에서는 불교미술과 금속공예를 감상하였다. 국보 제196호인 통일신라의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과 변상도, 국보 제218호인 고려의 불화 <아미타삼존내영도>와 삼국시대 및 후대의 불상들,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속공예들이 각기 뛰어난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적 의미를 드러낸다. 불화와 불상 곁에 배치된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와 자코메티의 조각은, 이번 전시의 기획자들이 보여주고 싶어 한 ‘교감’에 대한 강한 의도를 엿보게 한다. 이로써 Museum1의 고미술전시관을 터질 듯한 미적 포만감 속에서 떠날 수 있었다.
이어서 ‘동서교감’을 느끼게 하고자 계획된 한국의 근현대미술과 서양의 미술을 Museum2 현대미술관에서 보게 되었다. 현대미술의 조형적 변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 다양화하는 여러 가지 특성 등을 엿볼 수 있었다. 현대미술 전시는 Museum2의 2층부터 지하 1층까지 차지하고 있다. 동서 현대미술의 여러 경향과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실험적 성격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현대미술 전시는 기획전시실과 로비로 까지 이어졌다.
이번 전시는 고미술 상설전시관인 Museum1과 현대미술 전시관인 Museum2 등 삼성미술관 리움 전체의 공간을 모두 활용하여 한국의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을 위주로 하면서 서양 및 중국 등 외국의 현대미술까지 포함하여 최대한 많은 작품을 ‘교감’이라는 시각에서 효율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이번의 삼성미술관 리움 10주년 기념전은 종래의 전시들과 원칙적인 점에서는 공통된다. 다만 전시의 규모가 훨씬 더 커지고, 박물관 전시공간을 비우지 않고 꽉 메우듯 최대한 활용하여 동서고금의 다양한 미술의 흐름과 특성을 되도록 많이 소개하되 ‘교감’이라는 큰 명제로 조화롭게 묶어보고자 한 점이 두드러진 차이일 뿐이다.
지금까지 삼성문화재단은 1965년 설립 이후 호암미술관, 호암갤러리를 거쳐 삼성미술관 리움, 플라토(구 로댕갤러리)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삼성미술관 리움만이 할 수 있는 전시’, ‘삼성미술관 리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전시’를 개최해왔다. 1990년대에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했던 <고려, 영원한 美>, <大고려 국보전>, <조선전기 국보전>, <조선후기 국보전>, 리움에서 열었던 <조선말기 회화전>, <금은보화전>, <조선화원 大展>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리움개관 10주년 기념전: 교감>은 특히 더욱 주목할 만한 전시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아니면 어떤 박물관이 이런 대규모의 폭넓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다양한 전시를 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고미술은 물론 현대미술, 그리고 서양의 현대미술까지 어우르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막강한 소장품, 대규모의 전시가 가능한 넉넉한 전시공간, 뛰어난 전문 인력, 옹색하지 않은 예산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 같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전시들이다. 이런 전시들을 통하여 국민은 많은 문화적 혜택을 누려왔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제에 실제로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생각만 하고 글로써 드러내지 않았던 몇 가지를 이번의 전시를 핑계 삼아 털어놓고자 한다. 만약 삼성미술관 리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와 문화재, 현대미술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전제로 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리움이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이 열 수 없는 ‘굉장한’ 전시회를 끊임없이 열어왔으나 그 중요성을 제대로 아는 국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막연히 ‘돈이 많으니까 하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문화를 키우고 문화재를 보전하겠다는 투철한 인식과 애국심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크나큰 중대사가 바로 문화재와 미술품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세워 국민을 위해 전시하고 교육하는 일인 것이다. 실로 국가를 위해서 또는 국가가 할 일을 대신해서 하는, 숭고한 애국적 문화사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고마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리움은 지나치게 좌고우면하지 말고 당당하게 홍보를 보다 적극화하고 국민들은 그런 전시들을 통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현대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만 한다.
둘째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오랫동안 수집해온 수많은 문화재와 현대미술품의 엄청난 가치를 정부와 국민 모두가 올바르게 인식하고 인정해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 이후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 회장· 홍라희 관장 부부, 호림박물관의 윤장섭 회장을 비롯한 문화재 및 미술품 수집가들이 없었다면 간송선생 사후의 문화재 분야의 공백을 누가 메우고 가꾸며 끊임없는 문화재의 해외 밀반출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었겠는가. 간송선생과 더불어 후대의 애국적 문화재 수집가들에 대해서도 올바른 평가가 똑같이 공평하게 이루어져야만 하고 대등하게 고마운 존재들로 대우해야 마땅하다.
셋째는 삼성미술관 리움 같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이 생겨날 수 있도록 ‘문화융성’ 차원에서 정부의 정책이 마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1000개의 박물관 늘리기는 언뜻 성공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진정으로 견실한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은 지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전문가들은 훤히 알고 있다. 우선 돈 많은 재벌들이 리움 수준의 튼실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는 세제상의 혜택을 부여하는 등 정책적 배려를 하는 것이 장족의 국가 발전과 문화융성을 위해서 절실하게 요구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산하는 재벌은 자동차박물관, 소비재를 주로 만들어내는 재벌은 소비재박물관의 설립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나라가 선진국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숫자가 얼마나 되며 그것들이 또 얼마나 알찬지도 중요한 잣대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10주기를 충심으로 축하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훌륭한 전시를 위해 애쓴 홍라희 관장과 홍라영 상임부관장, 우혜수 학예실장을 위시한 직원 모두에게도 전시를 만끽한 관람자의 한 사람,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오늘의 리움이 있게 한 이건희 회장의 빠른 쾌차를 마음으로부터 기원한다. ●

[Special Feature] 삼성미술관 Leeum 개관 10주년

블랙박스 속 현대미술의 교감

정연심  홍익대 교수

재난이 유난히 많이 발생한 올해, 예술이 우리 사회에 근원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예술을 추방한 것은 어쩌면 예술이 가진 전복적인 힘, 예술이 미메시스로서 모방 차원이 아니라 ‘예술작품에서 그려진 이미지, 재현 그 자체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예술은 사회에서 때때로 전복적인 힘을 가지고 충격효과를 더해서 기존의 질서에 혼란을 가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전복적인 현실, 어려운 현실을 마주한 채, 오히려 예술작품 그 자체에서 위안을 받으려 기대를 걸기도 한다.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개최되는 〈교감〉은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형태의 갈등과 충돌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소통’과 ‘함께함(Being-together)’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전시를 구성하는 상이한 미학적 요소들, 시대적 배경, 다양한 역사성과 예술성은 시대와 특정 장소를 초월하는 독특한 미적 언어로 다가온다.
특히 삼성미술관 리움의 블랙박스에 배치된 현대미술은 참여를 지향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지점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로벌한 맥락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대미술가들을 중심으로 비엔날레, 도쿠멘타 등을 통해서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들인 에르네스토 네토(Ernesto Neto), 리크릿 티라바닛(Rikrit Tiravanija), 재닛 카디프와 조지 뷰어스 밀러(Janet Cardiff & George Bures Miller), 함경아, 문경원+전준호, 이세경, 아이웨이웨이(Ai Weiwei), 최정화,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리암 길릭(Liam Gillick) 등이 이 전시에 참여한다. 이들의 작품을 함께 모아주는 요소들은 한 단어일 수 없지만,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200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동향이나 단면들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현대미술은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을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이전의 예술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랙션(interaction)의 증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시각예술은 이제 시각성이나 시각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것을 확장하여, 인간이 가진 또 다른 감각들에 반응하거나 작용하는 예술로 나아간다. 시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것, 인체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지각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가들은 시각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예술을 정의하고자 한다. 1964년 브라질 태생의 미술가인 에르네스토 네토는 리우 데 자네이루의 파르크 라즈 시각예술학교(Escola de Artes Visuais do Parque Lage)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설치미술은 관람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관람자들은 네토의 비정형적인 설치물 안으로 걸어가면서, 브라질의 원시림을 걷는듯 정향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심비오인테스튜브타임-향기는 자궁집에서 피어난다>(2010)에서, 반투명한 재질들은 조각적이면서도 건축적이고, 또 은신처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번잡한 일상에서 잠시 떠나 명상에 취할 수도 있다. 아로마 향을 맡으면서 말이다.
전통미술을 바라보는 수동자의 위치가 아니라, 작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원형무대 위로 직접 올라가야 한다. 니콜라 부리요가 관계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선정했던, 리크릿 티라바닛은 <데모스테이션 No.5>(2006~2014)를 통해 관람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실제로 작가는 영감의 원천으로 회화를 삼차원적 입체 조형물처럼 전시했던 프리드리히 키슬러를 들고 있다. 관람자들은 미술관 안에 배치된 놀이터와 같은 <데모 스테이션>에서 같이 온 사람들과 담소를 나눌 수도 있고, 날씨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일종의 벤치, 혹은 공연장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미술관에서 오브제는 만지지 말아야 할 대상이었던 역사가 무색하게 이제 관람자는 작품을 직접 사용하는 공간의 유저(user)가 되는 것이다.
이번 리움 전시에서 전통미술을 관람하고 내려오는 순간 발견할 수 있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은 ‘세런디퍼티(serendipity)’이다. 실내공간에서 인공자연과 빛을 주로 다뤄온 작가(1967년생)는 덴마크 태생으로 아이슬란드에서 성장했다. 북유럽의 사회주의적인 공동체를 주장하듯, 그의 작업에는 유난히      ‘당신/당신들(you)’이라는 대명사가 많이 등장한다. 엘리아슨의 신작인 <중력의 계단>은 벽 전체를 거울로 덮어 무한한 우주 공간을 만들고, 그 위로 태양계를 상징하는 빛의 고리들이 부유하게 하였다. 그는 문화의 공간인 미술관 안에서 빛과 거울, 기계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미술관 내에 자연의 시뮬라크라를 형성한다. 천장에 비춰지는 관람자 자신과 상대방의 모습은 그 공간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공간과 빛을 새롭게 체험하게 한다. 그는 미술관 안에 이끼, 버섯, 가짜태양 등을 설치하여 관람자들이 순간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낸 바 있다. 그것은 지속되지 못하는 공동체이지만, 리암 길릭의 <일련의 의도된 전개>처럼 예술작품과 사물의 경계를 계속해서 얄팍하게 만들면서, 관람자들을 오브제의 향유자가 아니라 ‘설치’라는 물리적 공간의 개입자들로 존재하게 한다.
카디프(1957년생)와 밀러(1960년생)는 각자 단독 작업도 하지만, 사운드설치 협업 미술가들로 활동한다. 두 작가는 72개의 스피커를 설치하여 피아노, 첼로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소음이나 대화 등을 사용하여 전시 공간에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F#의 음악은 다양한 스피커 아래에 설치된 센서들을 통해 관람자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는데, 특히 그림자는 다양한 소리를 이끌어낸다.  이 작품은 관람자 수와 위치에 따라서도 인터랙티브하게 반응한다. 그들이 모두 떠나면, 이 작품이 놓인 룸은 고요와 침묵이 흐르는 빈 방으로 바뀌게 된다. 카디프는 최근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중세분관에서 현대미술로는 처음으로 <40성부 모테트(40 Part Motet)>를 설치하여, 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성을 새로운 조형요소로 실험하였다. 이러한 사운드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리 채집인 경우도 있지만, 종교적인 숭고함과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현존성(presence)을 강조했다면, 아이웨이웨이와 문경원+전준호의 작업은 심리적이고 실존적이다. 대표적인 저항 미술가인 아이웨이웨이는 중국 남부지방에 버려진 나무들을 가져와 전통방식으로 이어 중국정원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한 그루의 나무지만, 가까이서 보면 상처받고 어눌하게 이어진 나무 정원은 실제로 오늘날의 사회를 말해주는 듯하다. 문경원과 전준호의 신작 <q0>는 이번 전시의 주제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신작이다. 영상은 리움의 소장품인 통일신라시대의 <금은장 쌍록문 장식조개>를 소재로 이용하여, 소지섭 등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유물의 탄생과 역사를 가상적인 시나리오로 연결한다. 소장품과 영상작업 사이에 위치한 관람객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것 같은 순간적인 아찔함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넓은 스크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람자가 설 수 있는 공간이 다소 좁아서, 영상 속의 이미지와 관람자의 몰입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이용하는 이세경은 <카펫 위에 머리카락>으로 전혀 예기치 않은 공간에 사람들이 직접 밟아서 들어올 수 있는 작품 위의 길을 만들어낸다. 함경아는 추상화가 모리스 루이스의 회화 형식을 차용하되, 인터넷 뉴스에서 가져온 문구들을 이용하여 탈추상화시키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리고 4명의 젊은 작가로 구성된 인사이트씨잉 그룹은 영상작업인 <잇!태원: 감각의 지도 프로젝트>에서 상황주의자들처럼 여기저기를 표류하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들추어내어 과거의 기억 지도를 재편성한다. 낯설다고 느껴지는 현대미술은 최정화의 <연금술>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봐온 플라스틱들을 이어 붙여서 만든 연금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동아줄 같기도 하지만, 로툰다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머리를 내밀고 끝없이 긴 선을 보면 아찔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에게 ‘연금술’은 일상적인 것을 예술적인 가치의 오브제로 변형시키는 일이며, 그 어떤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연금술사의 비밀이 내재된 것 같다. 전통미술을 보면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서도호의 <우리나라>와 고려청자 옆에 배치된 바이런 킴의 <고려청자 유약> 작품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작업들은 어려운 비평언어 속에 매몰되어버렸거나, 예술의 전복적인 은유 속에 은폐되어버렸던 예술작품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설치들은 작품 속 몰입과 비평적 거리두기를 적절하게 작동시키는 동시에 관람자들의 물리적 참여와 개입, 심리적 교감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을 만들어낸다. <교감>전은 미술관의 공적 기능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서구와 한국의 지리성과 시간성을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실천, 수평적인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어 2000년대 이후 한국미술의 동시대성과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

Museum3 블랙박스 아래 언더그라운드 전시장 광경

Museum3 블랙박스 아래 언더그라운드 전시장 광경

 

[특별기획] 이상향, 그들이 꿈꿨던 어딘가 있을 그곳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신이 있는 시공을 초월하여 보다 나은 공간과 상황을 꿈꾼다 즉 이른바 이상향을 꿈꾼다는 것이다 그 꿈의 내용은 역사적 상황과 문화환경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 말은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은 그 수치를 가늠할 수 없음과 같은 의미이리라 이러한 이상향을 주제로 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대표작이 모였다  7 월  29일부터 9월 2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국 상하이박물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중 이상향을 주제로 한 대표 산수화 40여 건을 선보인다. 이에 맞춰  월간미술 은 고미술품에 드러난 이상향을 주제로 특집을 내보낸다. 이번 전시의 프리뷰와 각 섹션에 대한 설명을 담아 전시장을 찾을 독자 여러분이 좀 더 진중하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이상향을 그린 작품이 산수와 만나 일으키는 화학작용과 그것의 구성에 대한 내용과 이유를 밝힌다 마지막으로 현재 이상향이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글을 싣는다. 이상향을 꿈꾸는 것조차 버거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의미다.  이상향의 모습은 작가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 초월적 존재에 대한 동경은 인간이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기에 더 강렬해지지 않을까?    비록 동경의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추락할 것을 알지라도 말이다.

이상향의 대표적 상징

<소상팔경도>는 중국 호남(湖南)성의 동정호(洞庭湖) 남쪽 소수와 상수가 합류한 곳의 절경을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전래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그려졌으며 일본에도 전달되어 또 다른 양식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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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특집 사진5

문징명(文徵明, 1470~1559)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비단에 먹 24.3×44.8cm(각) 명(明) 16세기 상하이박물관 소장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연사만종(煙寺晚鐘)> <산시청람(山市晴嵐)> <원포귀범(遠浦歸帆)> <강천모설(江天暮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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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창(董其昌, 1555~1636)  <연오팔경도(燕吳八景圖)>
비단에 채색 26.1×24.8cm(각) 명(明) 1596 상하이박물관 소장 동기창의 초기작으로 귀향을 앞둔 고향 친구 양계례(楊繼禮)를 위해 그렸다.
‘연(燕)’은 베이징을, ‘오(吳)’는 고향 ‘송강(松江)’을 가리킨다.
사진 왼쪽부터 <성남구사(城南舊社)> <서산추색(西山秋色)><방재후월(舫齋候月)> <서호연사(西湖蓮社)> <구봉초은(九峰招隱)> <서산모애(西山暮靄)> <서산설제(西山雪霽)> <적벽운범(赤壁雲帆)>

정선장동팔백운동-1정선장동팔창의문-1

정선(鄭敾, 1676~1759)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
종이에 담채 33.7×29.9cm(각) 조선 18세기 <백운동(白雲洞)>(왼쪽) <창의문(彰義門)> 인왕산과 백악산 일대를 장동이라 일컫는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산수를 이상향으로 삼아 그린 작품이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다

 18세기 조선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사람과 자연이 벗되어 살면서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장면을 통해 그들이 생각한 현실적 이상향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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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李寅文, 1745~1824?)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비단에 담채 43.9×856.0cm 조선 18세기 폭이 8m가 넘는 대형작품인 <강산무진도>는 김홍도와 쌍벽을 이뤘던 이인문의 대표작이다.
산 아래 배가 정박해 있는 마을과 인물이 다양한 준법으로 표현됐다. 궁중 소장품으로 그렸다고 추정되며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위정자가 바라던 이상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존경하는 그가 머물렀던 그곳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는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자(朱子, 1130 – 1200)가 찾은 중국 무이산(武夷山) 구곡계(九曲溪)의 경관을 그린 것이다. 현인의 거주 장소를 그려 우회적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8월 특집 사진1

8월 특집 사진2

8월 특집 사진3

이성길(李成吉, 1562~?)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비단에 담채 33.5×398.5cm 1592 두루마리 형식의 작품으로 계곡을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1곡부터 9곡까지 연결되어 있다. 조선 초기 안견(安堅)파 화풍과 명(明)대 절파(浙派)의 화풍이 절충되어 있다.

은자(隱者)의 삶을 살다

은거의식은 산수화가 문인들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되었다. 도연명(陶淵明)이 상징적인 인물로 전해지며 그의 행적과 시구는 이후 수많은 문학과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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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 전선  <귀거래도(歸去來圖)>
종이에 채색 26.0×106.7cm 원명(元明) 14~15세기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mage source: Art Resource, NY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주제로 그린 작품. 이 작품은 남송(南宋) 말부터 원 초에 활동한 전선(錢選, 1235?~1307?)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왼쪽의 제시(題詩)는 전선이 지었다.

여기가 내가 머물 낙원인가 하노라

정치와 제도는 현실을 이상적인 곳으로 만드는 데 있어 걸림돌일지 모른다.
그러한 시스템의 속박을 벗어나 오로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수 있는 곳,
그곳도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그러한 꿈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드러나 있으며 그것을 그린 <도원도(桃源圖)>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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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오카 데사이(富岡鐵齋, 1836~1924)  <무릉도원도(武陵桃源圖)>
종이에 색 178.0×365.0cm(각) 일본 메이지(明治) 1904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봉래선경도(蓬萊仙境圖)>와 교체 전시된다.

[특별기획] 동아시아의 꿈을 담은 전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이상향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한데 모았다 각국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나라와 문화권과 연계해 비교하며 볼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전시가 가진 의의라 하겠다.

박은순・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뜨거운 폭염으로 심신이 수고로운 한여름을 맞아 많은 사람이 몸과 마음의 피로를, 삶의 피로를 덜어낼 휴가를 꿈꾼다. 멀리 떠나는 휴가가 아니더라도 이 여름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고 하여 마음이 설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때로는 예술에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담아왔으니,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하는 특별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는 한중일 선조들이 마음속에 품어왔던 이상향에 관한 전시이다. 이 전시는 한중일을 대표하는 100여 점의 산수화 작품을 모아 비교, 전시하면서 동아시아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감상하고, 이루어온 예술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특히 세계 최고의 미술관 중 하나인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중국회화 명품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된다. 또한 중국회화 소장품으로 유명한 상하이박물관 소장 작품도 여러 점 전시되며, 일본의 대표적인 국립박물관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일본작품들도 전시되어 유사한 주제를 다룬 한중일 삼국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의욕적인 기획이자 국립중앙박물관이 성숙해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 전시는 대규모의 전시답게 전체 내용을 일곱 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진행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각 주제를 따라 가면서 주요한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 내용을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주제는 ‘이상향으로 가는 길’이란 개념으로 전시의 프롤로그가 될 것이다. 한중일 삼국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서화 및 각종 시각예술품을 통해서 이상향에 대한 염원을 담아내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제에 만들어진 <산수문전>과 작품을 통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산수문전>에는 고대의 이상적인 산수 표현을 대변하는, 세 봉우리를 가진 삼산형의 산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공간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공간은 아마도 신선들이 살았던 봉래산이자 현존하지 않을 것만 같은 아름답고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개념을 시각화한 대상일 것이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상향을 시각화하는 전통은 회화작품을 통해서 꾸준히 이어지면서 한국 특유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김홍도(金弘道)는 풍속화가로 유명하지만 유명한 고사나 문학작품을 주제로 한 작품도 자주 그렸다.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는 세상사를 벗어나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고자 하였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범하면서도 이루기 어려운 꿈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화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방식대로 이상향을 시각화하는 전통이 존재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장소들을 더욱 이상화해 그려 늘 감상하고자 하였던 작품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주제 및 작품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이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최대의 호수인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들어가는 여러 물줄기 가운데서 가장 이름난 절경이었던 소수와 상수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담은 산수화이다. 소상팔경은 소수와 상수 주변 이름난 경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덟 곳의 경치를 선별하여 이르는 것으로 중국 후난(湖南)성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다. 필자는 어느 해 더운 여름 이 여덟 곳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남한만한 면적의 후난성 전역을 8일에 걸쳐 버스로 답사하면서 빡빡한 일정으로 벅찼던 기억이 난다. 즉, 이 아름다운 여덟 곳은 실재하는 장소들이지만 차도 없던 그 옛날 이 장소들을 방문하고 감상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아름다운 명승 금강산 여행을 꿈꾸면서 금강산도를 그리고 감상하였던 것처럼 중국사람들도 <소상팔경도>를 그리고 감상하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11세기경 그려지기 시작한  <소상팔경도>는 특히 문인계층에게 선호되면서 후대까지 비교적 꾸준히 제작되었다. 중국에서 그러하였듯이 소상팔경은 시문(詩文)의 주제로도 선호되었다. 따라서 <소상팔경도>는 시화 (詩畵)일치를 대표하는 산수화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명대의 대표적인 문인화파인 오문화파(吳門畵派)의 대가 문징명(文徵明)이 그린 <소상팔경도>를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상팔경도>는 고려시대 11세기 중엽 이후 소개되면서 꾸준히 애호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소상팔경은 꿈에서만 갈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 중국 사람들에게 명승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선 그야말로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그래선지 <소상팔경도>는 어쩌면 중국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 더욱 많이 제작, 감상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15세기 이후 19세기까지 <소상팔경도>는 관념산수화의 대표적인 주제로서 지속적으로 제작, 감상되었다. 그리고 이상적인 명승을 대변하는 소상팔경의 전통은 18세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한양 장동의 아름다운 팔경을 그린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까지 그 여맥이 이어졌다.
세 번째 주제는   ‘현인이 놀던 아홉굽이, 무이구곡도’이다. 무이구곡(武夷九曲)이란 남송대 주자학의 창시자 주자(朱子)가 중국 푸젠(福建)성에 있는 명산인 무이산에 은거하면서 아홉 굽이의 물줄기를 구곡이라 명명한 것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시대였고, 주자는 성리학의 연원이 된 신유학, 주자학의 창시자로서 지속적으로 존경받았다. 성리학과 그 시조인 주자에 대한 존경은 주자가 살던 무이구곡을 본따 이이(李珥)가 황해도 은거지에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설정하거나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가>를 본따 <고산구곡가>를 짓는 등 특히 16세기 이후 조선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를 본따서 조선에서도      <무이구곡도>를 그리는 일이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의미있는 명승의 실경으로서 <무이구곡도>가 그려졌다고 한다면 조선에서는 이상적인 학자 주자가 살던 이상적인 장소로서 무이구곡에 대한 상상과 흠모를 전제로 그려지고 감상되었던 것이다. 즉, 시적인 영감을 일으키는 명승으로서의 <소상팔경도>와 또 다른 맥락에서 성리학의 이상향으로서의 <무이구곡도>가 존재하였다.
1592년 선비화가 이성길이 그린 <무이구곡도권>, 16세기에 제작된 필자 미상 <주문공무이구곡도>, 1915년에 제작된 채용신의 <무이구곡도> 등은 조선시대 성리학적 관념의 이상향으로서 무이구곡에 대한 열망과 흠모를 담고 있다. 또한 중국 청나라 때의 정통파 문인화가 왕휘가 그린 <무이첩장도(武夷疊嶂圖)>는 위의 작품들과 달리 단폭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중국과 조선 무이도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비교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죽주거

포기하지 않은 꿈
네 번째 주제는 ‘태평성대를 품은 산수’로서 시대를 초월한 이상으로서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진 태평성대에 대한 이상을 담은 작품들이다. 이러한 이상은 때로는 현실적인 실경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러한 시대에 대한 꿈을 담은 관념적인 산수화가 될 수도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두 작품은 대조적인 두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궁중에서 활동하던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성시도  (太平城市圖)>는 왕도정치가 이루어진 시절 번성하는 수도에서 살고, 노동하고 즐기던 백성들의 삶을 이상화해서 표현하였다. 그려진 건축물과 사람들의 모습은 중국인지 조선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결국 가장 평화로운 시절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사회적 환경을 시공을 초월한 모습으로 표현한 풍속화이자 산수화이다. 이러한 작품이 정치적, 사회적 이상을 좀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재현하였다고 한다면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무궁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이상향에 대한 최대한의 가능성을 펼쳐본 작품이다. 이처럼 조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누린다는 것은 곧 가장 이상적인 삶이고, 그러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곧 태평성대의 도래를 통해 현실 속의 이상향을 만나는 것이리라. 18세기 말 정조연간 최고의 산수화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인문(李寅文)은 당시 사람들이 꿈꿀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자연경을 창조하였다. 이 대작 속에는 당시 유행한 남종화(南宗畵)뿐 아니라 북종화(北宗畵)의 다양한 소재와 기법이 총체적으로 동원되었으며, 안정되고 번성하던 정조연간의 시대적 자신감과 예술적 수준이 성공적으로 담겨 있다.
다섯 번째 주제는 ‘자연 속 내 마음의 안식처’로서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이상적인 삶을 다룬 작품들을 전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대표하는 화제로 <귀거래도(歸去來圖)>는 중국 육조시대의 유명한 시인으로 은거하는 삶을 구가하였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유래했다. 명나라 초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귀거래도>는 중국에서 제작된 <귀거래도>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참고가 된다. <귀거래도>는 조선 초부터 말까지 꾸준히 제작되면서 조선 선비들의 이상을 담아냈다. 또한 19세기에는 전기(田琦)의 <매화초옥도>와 이한철(李漢喆)의 <매화서옥도>에서 확인되듯이 중인 여항화가들이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를 자주 그렸다. 이 또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시절, 즉 겨울로 은유되는 시절에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자신의 뜻을 펼 날을 기다리는 은자의 삶을 재현한 화제이다. 여항화가들은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한계에 갇혀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중인의 고뇌를 이러한 화제를 통해서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여섯 번째 주제는 ‘도가적 세계관 속 이상적인 산수’이다. 도가적 이상을 잘 반영한, 가장 애호된 화제는 <도원도(桃源圖)>였다. 도원도는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된 화제로서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사는 도화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복사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도화원의 경치를 부각시켜 그리거나 현실과 유리된 장소로서 도화원을 그린 작품이 조선시대 내내 제작되었다. 물론 중국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도화원은 꾸준히 재현되었다. 불교에서 서방극락정토가,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천국이 이상향이라고 한다면 한중일 동아시아의 선조들에게는 도화원이 그러한 이상향에 해당하였다.
중국화가 정운붕의 <도원도>와 20세기 초 일본화가 도미오카 데사이가 그린 <무릉도원도>, 조선 초 화원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그리고 19세기 화원 안중식(安中植)이 그린 <도원문진도(桃源問津圖)>는 곧 그러한 곳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뜻을 담은 작품들이고, 동시에 어쩌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에 대한 열망, 혹은 그러한 이상향을 현실 속에 이루고 싶은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꿈이란 현대인이 꿈꾸는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더운 복날 따사롭고 기분 좋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복사꽃이 활짝 핀 시절은 그저 먼 꿈이야기만 같다. 도원도를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꿈을 꾼다. 언젠가는 나도 그러한 곳에 살리라는.
일곱 번째 주제는 에필로그로서 ‘현대미술 속 재해석된 이상향’을 재현한 작품들이다. 이상향이란 시대를, 국적을,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이 꿈꾸는 파라다이스이다. 선조들이 지녔던 이상향에 대한 소망은 시대를 초월하여 20세기,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련한 봄날을 그린 이상범의 작품 속에, 낙원을 꿈꾼 백남순의 작품 속에,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표현된 장욱진의 풍경에도 이상향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 시대와 국적을 초월한 인간의 꿈이 시대적 경향을 통해서 변화된 채로, 그러나 그 본질만큼은 영원히 변치 않은 채로 우리의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한 이상향에 대한 우리의 시각화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견하면서 전시장을 나오게 될 것이다. ●

도원문진

 

[특별기획] 산수화로 그린, 이상향의 꿈

이상향은 왜 산수화로 표현되었을까?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 산수는 사람들이 꿈꾼 다양한 이상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소재로 그린 그림은 그 다양함을 담을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 너머의 그곳에 대해 알아본다.

고연희 ・미술사

산수화의 ‘산수(山水)’란, 처음부터 자연 속의 자연이 아니었다. ‘산수’란 오히려 인공의 개념이었다. ‘산수’는 현실적인 욕심이 제거된 청정한 도덕이요,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없는 고요함이며, 나아가 우주적 순리의 실현체로 인정받았다.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문명의 속도보다 지혜롭고 사회적 성취보다 현명한 사람이라, 말하자면 그 고상하고 뛰어남의 정도가 비현실적인 사람을 뜻했다. 손에 꼽을 만한 동아시아의 성현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모두가 산수를 배울 만한 개념으로 정의했고, 좋아하기에 가장 마땅한 대상으로 제시했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즐기고 어진 자는 산을 즐긴다”고 한 공자의 요산요수(樂山樂水)나 아래로 흐르는 물의 덕을 지목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모두 고전의 상식으로 전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속된 기운(俗韻)이 없고, 본성이 산과 언덕(邱山)을 좋아했지”라고 말한 5세기의 도연명     (陶淵明), “그대가 정치를 안다면, 나는 구학(丘壑)을 더 잘 안다”고 자부한 같은 시절 사유여(謝幼輿)가 속된 현실과 고상한 산수의 대비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11세기 송나라 최고의 산수화가로 활약한 곽희(郭熙)는, 산수로 나가지 못하는 관료를 위하여 산수화가 필요한 현실사정을 역설하며 산수화를 널리 진작시켰다. 조선의 모든 선비는 산수를 사랑하노라고 시로 읊었고, 심지어 산수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에 깊은 병이 들었노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관직을 떠날 의향이 없더라도 오직 산수를 사랑하노라고 읊음으로써 내면의 고상함을 표현하는 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산수는 지고한 이상(理想)으로 의심 없이 인정되었다.
‘산수화’란 이러한 ‘산수’를 담은 그림이다.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지식과 권력을 획득한 이들이 산수화를 꾸준히 요구했던 근본적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보기 좋게 산이 솟고 맑은 물이 흐르는 산수는, 현실적 문제가 말끔하게 사라진 곳이며 선량한 사람이 머무는 곳이다. 현실 너머로 펼쳐낸 꿈이나 특정한 이상사회의 소망이 있으면 산수화로 표현되었고, 그 가운데 어떤 테마는 산수화의 주요한 화제가 되었다.
동서고금의 사람들은 현실의 부족이 충족된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동서의 역사 속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이상세계를 보면, 그 시절의 정치사회적 모순이 사라진 사회이거나, 이데올로기가 제거된 곳, 혹은 억눌린 욕망을 마음껏 향유하거나 아예 인간적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절대영원을 향유하는 곳 등 다양한 모습이다. 동아시아에서도 극락정토나 불로불사의 선계 등 절대시공을 추구하는 종교적 상상세계가 있었고 현실사회 및 철학분야에 집중한 이상향도 여려 형태로 구축되었다.
유가와 도가의 사유방식에 근거한 이상향의 주제는, 현실 너머의 이상을 꿈꾸는 지식인의 산수 지향 개념과 근본적으로 일치했다. 산수화는 문학작품 못지않게 이러한 이상향을 담아내는 멋진 그릇이 되었다. 말하자면 산수화는 다양한 이상향을 표현하는 시각매체로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예컨대 정치사회적 문제가 제거된 ‘도원(桃源)’, 지상 최고의 풍경으로 동경된 ‘강남(江南)’경, 성리학적 이상을 담은 ‘무이(武夷)’계곡과 군자로 추앙받은 사마광의 독락원(獨樂園), 도가의 최고경지 ‘선경(仙境)’ 등이 산수로 그려졌고, 이에 더하여 조선후기 중인들이 완벽한 아(雅)의 실현을 그린 산수화와 조선후기 학자들과 국왕의 비전으로 빚어낸 강산무진   (江山無盡)이 모두 이상경을 그려내어 회화사에 빛나는 산수화 작품들이다.
‘도원’(桃源)을 찾는 바람.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기록된 도원은 무릉 깊은 산에 자리한 상상의 마을이다. 길 잃은 어부가 우연히 입구를 찾아냈다는 도원은, 자급자족하는 작은 농촌이라 정부의 횡포가 없고, 국제 간 왕래가 불가하여 전쟁이 없는 곳이다. 도원은 폐쇄적이며 정태적인 사회였지만, 그 기원이 노자의  《도덕경》에 제시된 소국과민(小國寡民)에 이르고 이후로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나 두보의 <위농(爲農)> 등 한・중・일의 모든 문인이 노래하였을 만큼 동아시아에서 오래오래 지속된 이상향이었다.

산수와 이상향의 만남
복숭아꽃잎 흩날리는 분홍빛 산수 속에 착한 농민들이 거주하는 전원풍경으로 떠오르는 도원은, 한중일의 산수화로 수없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어부가 도원으로 드는 장면이 가장 많이 그려졌으니, 도원을 찾아들고픈 꿈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로부터 기록되는 청학동(靑鶴洞)의 전설이 모두 도원의 꿈을 반영한 상상이었으며, 조선초기 왕자 안평대군이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도원에 드는 꿈으로 선포하고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데서도 도원이 멋진 이상세계의 대명사로 통용된 사정을 보여준다.
‘강남(江南)’에의 동경. 모든 이상은 현실에서 비롯한다. 어떤 현실은 거부되고 어떤 현실은 과장되면서 이상이 만들어진다. 직접 갈 수 없기에 이상화된 곳으로,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과 서호십경(西湖十景) 등이 있었다. 소강과 상강이 흘러드는동정호나 서호가 자리한 항주는 중국에 실재한 풍경이지만, 중국뿐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이곳에 대한 동경이 깊어지면서 이상향으로 정착되었다. 세계의 중심을 중국이라 여기던 시절, 중국 양자강 남쪽의 ‘강남’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수로 인정되었다.
호수의 수평선이 하늘과 이어져 망망한 ‘강남’경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가을달이 뜨고 기러기가 내려앉는 상상 속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풍광들은 한중일 산수화의 주요한 테마로 수백 년 동안 그려졌다. 특히 소상은 순임금의 아내들이 나란히 숨진 열녀 미담으로 조선에서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었고, 효녀 심청이 인당수로 가는 길에 유람하는 꿈의 공간이 되었다. 민화라 불리는 산수화에서도 소상팔경은 가장 많이 그려지던 주제였다.
존모하는 사람이 머물던 곳.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그들에 대한 이상화와 맞물려 그 공간도 이상화되기 마련이다. 주자성리학에 매료된 조선 학자들은, 주자의 시 <무이도가>(武夷棹歌, 무이계곡 뱃놀이)를 읽으면서 무이산 계곡을 굽이굽이 돌며 단계단계 철학의 경지가 오르는 만족을 꿈꾸었다. 무이산의 아홉 계곡을 상상한 <무이구곡도>를 보고, 이황 선생은 눈물을 흘렸고 그의 제자 정구는 감동으로 탄식하였다. 조선의 학자들에게 무이구곡은 대스승의 숨결이 감도는 곳이요 학문성취의 경지였다. 조선후기 이익이 병중에 무이산을 보고자 강세황에게 그림을 부탁하고, 국왕 정조가 김홍도에게 무이산 그림을 요청한 이유이다. 무이구곡은 민화라는 범주에서도 실로 많이 그려졌다. 굽어지는 물길을 따라 배에 탄 주자의 모습으로 점철된 무이구곡도는 철학의 이상을 담은 감동의 산수화였다.
이외에도, 공자의 태산 등반, 제자 증점이 꿈꾼 기수의 물놀이, 왕유의 망천, 소동파의 적벽, 주렴계의 연못, 백거이와 사마광의 정원 등 대학자 대문인과 함께 하고픈 꿈이 산수의 이상경으로 그려졌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시절《  자치통감》을 저술하며 정원 독락원(獨樂園)을 경영했고 그 내용은 <독락원기>로 전한다. 독락원은 중국 명나라 문인들의 요구 속에 구영(仇英)이 여러 차례 그렸고, 조선후기에도 거듭 그려졌다. 이러한 그림들은 수백 년 전 공간에 대한 상상이며 당시 조선학자들이 누리고 싶어 한 정원이나 산수경의 이미지였다.
신선의 경지, 선경(仙境). 신비로운 식물과 동물, 불사의 선약, 신선과 선녀가 노니는 곳으로의 상상을 하노라면, 유한한 인간의 운명이나 현실의 질곡을 모두 잊고 무한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선의 경지는 실존하지 않은 고대의 신화로부터 실존한 인물의 신비화가 어울리며 이미지화되어 실로 오랜 역사를 가진다. 중국 한나라 박산(博山)의 상상에서《  산해경》,       《  장자》 등의 언급을 거쳐 조선시대 유선시(遊仙詩, 신선계를 노닐다)로 드러나는 조선 학자들의 선계 유람 상상이 어울려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신선경이나 신선을 그리는 그림, 잘 익은 반도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서왕모의 요지를 그린 그림 등이 모두 현실을 잊는 행복을 공유하게 해주었다. 산수화로 그려진 신선산의 풍경은 먼 바다 속 신비로운 산으로 표현되었으며 뿌리가 가늘고 위가 넓어 오르기 어려운 오묘한 형태로 그려지기도 했다.  봉래 ·영주· 방장이란 기록을 바탕으로, 신선경은 ‘봉래선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중인의 ‘아(雅)’ 추구. 지위가 높고 고결한 사람들의 행위를 ‘아(雅)’라고 부른 역사가 깊다. 우아하고 고아하다는 의미의 아(雅)란, 속(俗)의 반대말로, 옛 문인들이 추구한 이상의 개념이었다. 조선후기에 ‘아’를 간절하게 바라고 표현하는 문화그룹이 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한 문화현상이다. 이들은 사회신분이 중인이라 양반사대부에 속하지 못했지만 경제적 성취로 문화적 수준도 높았기에, 그들 자신의 모습을 ‘아’로 표현하여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이 향유한 산수화를 보면, 실로 고상한 운치로 그려진 그들의 아집(雅集)이 있고, 산수 속에서 하염없이 독서를 하는 비현실적 장면도 있다. 산수에서 시간을 잊은 독서 ‘산중독서(山中讀書)’나, 이른 봄 매화 가득 핀 산속의 독서 ‘매화서옥(梅花書屋)’은 환상경이었다. 눈 향기의 밤바다를 연상케 하여 ‘향설해     (香雪海)’라 불린 매화서옥은, 간절한 바람이 만든 특별한 이상향이었다.
학자와 국왕의 비전, ‘강산무진.’ <강산무진도>는 특기할 만한 산수경이다. 기이한 산수가 펼쳐진 가운데, 시끌벅적한 수레 소리, 나귀 굽 소리, 도르레를 돌리는 함성이 산속 구석구석까지 진동하는 그림이라, 이 그림의 산수는 청정하고 고요하지 않고, 폐쇄적이고 정태적이지 않다. 백 척도 넘는 거대한 배들이 정박하고 드나들며 산비탈로, 폭포 뒤로 유통과 건축이 이루어지며 곳곳에서 수레가 돌아간다. 당시 조선에는 수레와 배와 나귀가 이렇게 발달하지 않았다. 튼튼한 배를 만들라 당부하고 요동과 심양까지 이르는 수레길을 꿈꾸었던 국왕 정조의 비전을, 이 그림 속에서 엿보게 된다. 정조 시절 우리산천은 관동절경으로 인기를 누렸기에 우리 국토 깊숙한 곳에 대한 국왕의 상상은 기암절벽이었다. 국토 깊은 곳까지 파고든 개발과 유통의 비전이 <강산무진도>로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위정자의 이상이 반영된 문명추구의 산수화이다. 현실문명을 제거시켰던 오랜 산수화의 이상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산수 속 이상, 그리고 우리
‘산수’란 그 자체로 현실 너머의 이상이며 초월이었다. 그곳은 생각으로 빚은 ‘이상한 나라’였다. 그 속에는 가장 멋진 산수경이 펼쳐지고 훌륭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산수의 이상은, 사람들이 꿈꾼 다양한 이상향을 반영할 수 있었다. 산수화로 그려진 이상의 표현 속에서 우리는 그 시절의 결핍을 보고 그 결핍에서 자란 꿈의 형상을 만나보게 된다. 그 꿈과 이상은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가끔 공허한 메아리로 울리는 것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공허함 속에서 반짝이는 빛줄기는 우리에게  영감의 원천과 삶의 위안을 준다. 이상과 꿈은 고금과 동서를 초월하여 인간이 공유하는 또 다른 하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전근대기의 산수화에 구현되었던 이상향의 모습은 근현대로 오면서 그 모습과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성서적 파라다이스가 우리의 꿈에 포함되었고, 전통시대의 간절했던 이상은 과거의 아련함이나 푸근함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꿈이 되었다.
7월 말에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없었던 이상한 산수와 그 속을 노니는 이상하고 멋진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 안에 산수화의 정수가 있었고, 그것은 옛 시절 꿈과 바람의 극점이었다(필자는 이 특별한 전시의 오픈을 기다리는 한 명의 관람자로서, 함께 관람하실 분들을 위한 작은 안내의 역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썼다.). ●

도 8) 소아미, 소상팔경(오른쪽)

소아미(相阿彌, ?~1525)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종이에 먹 173.4×370.8cm(각) 일본 무로마치(室町) 16세기 전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mage source: Art Resource, NY 일본식 6폭 병풍에 그려진 <소상팔경도>. 강남의 습윤한 경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위·이한철(李漢喆, 1812~1893?)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종이에 담채 138.3×198.3cm 조선 19세기 1981 이홍근 기증 매화나무 사이에 가옥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선비를 그린 전형적인 매화서옥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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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을 기획한 권혜은 학예연구사

“큰 구성 속에 한중일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_MG_2281이번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은 아시아의‘이상향’을 주제로 한 흔치 않은 전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이유와 그 과정, 그리고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설명해달라.
‘이상향(理想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오랫동안 널리 애호된 회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 전시는 이상향을 그린 한·중·일의 정통 산수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전시로, 동아시아 회화의 큰 흐름 속에서 형성된 이상적인 삶과 사회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기획하였다. 회화 전시는 일반적으로 작가나 화파, 장르를 주제로 하는데, 이상향이라는 주제로 산수화전을 개최한다는 점에서 외국에서도 드물다고 한다. 회화를 카테고리를 벗어나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전시하는 것은 박물관 입장에서도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우리 박물관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이상향을 주제로 한 한·중·일 3국의 작품이 모였다. 모두 중국문화권이라 주제나 모티프, 그리고 형식이나 구현방식이 같거나 비슷한 작품도 눈에 띈다. 그래서 혹자는 이번 전시에 대해“중국회화에 드러난 이상향이 한국과 일본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기회”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공통된 문화를 공유했다고 해서 모두가 중국회화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주자에서 비롯된 무이구곡은 조선에 들어온 이후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등의 영향으로 조선만의 구곡문화를 형성한다.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 중국보다도 다양한 구곡도가 성행한 것이다. 오히려 이처럼 같은 주제라도 세 나라의 문화권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그렸는지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전시에서도 큰 구성 속에 한중일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실제 전시작업을 하면서도 서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세 나라의 작품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 기획도 그런 방향으로 구성하였다.

이른바 이상향을 그렸다고 한다면 흔히 관념산수를 떠올린다. 그 의미를 살펴본다면?
중국의 문인 종병(宗炳, 375~443)은 산수의 아름다움과 감상 작용을 중요시하고, 산수화를 보는 것은 “정신을 펼쳐내는 것(暢神)”이라 하여 산수화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산수화를 곁에 두고 감상하며‘마음을 맑게 하고 도를 본다(澄懷觀道)’는‘와유(臥遊)’의 정신은 산수 자체에 도덕성과 자연미를 부여하고 이를 그린 산수화의 심미 작용과 나아가 교육기능까지 인정되어 산수화를 창작할 수 있는 토대가 굳건하게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의 눈으로 본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는 것이고, 여기에 마음속 바람을 담은 것이라 하겠다.

이른바‘이상향을 주제로 그렸다’고 한다면 당대의 현실에 염증을 느꼈거나 심정상 도피를 목적으로 작업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조선 산수화에서‘이상향을 주제로 그렸다’라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달라.
조선 문화와 예술의 부흥기인 18세기,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자연과 사람, 사회가 서로 평화롭게 어우러진 이상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백성들은 맡은 일에 충실하고 군주는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는 유교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사회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개인으로는 선비들은 모름지기 벼슬길에 나아가 왕을 보좌하며 백성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표이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하면 자연에 귀의하여 조용히 덕을 쌓는 것이 도리였다. 한편으로 관직에 있을 때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은거를 꿈꾸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작품들을 통해 대의적인 이상사회를 꿈꾸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안식을 취하는 은거를 표방하였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이상향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작가들은 주로 어떤 이들인가? 그들이 이상향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이유와 함께 설명해 달라.
화가들은 워낙 다양한 화목(畵目)을 다루었기 때문에, 이상향을 주로 다룬 특정한 화가를 꼽기는 어렵다. 진경산수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역시 실경뿐만 아니라 은거(隱居)를 지향하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조선시대 화가들 중에선 조선후기 대표적 화원인 이인문이나 조선말기 화가 이방운을 꼽을 수 있겠다. 이인문은 진경산수화보다 우리가 잘 아는 <강산무진도>나 산거(山居)를 주제로 한 <산정일장도>를 많이 남긴 작가이다. 산속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거나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삶을 추구한 것 모두 조선후기 문인들이 애호한 주제 중 하나이다. 진경산수나 풍속화 등이 유행한 당시의 풍조 속에서도 그가 전통적인 화목들을 지향하고자 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별도의 영상으로 관객을 만나게 된다. 최근 고미술 전시에서 디지털 콘텐츠로 전시를 진행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아닌가 싶다.
최근 전시에 디지털 콘텐츠를 활용하는 것은 고미술이나 현대미술을 떠나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전시실 입구에 이미지화 한 단순한 영상물 하나를 설치하고 내부에는 최근 많이 하는 디지털 전시기법을 배제하였다. 오직 작품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공예품이나 대형 유물의 경우 디지털을 활용한 보조물이 그 유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산수화는 멀리서 감상해야 할 작품도 있고 디지털 전시보조물이 오히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한 전시해설 음성가이드를 운영하고 있다.

한·중·일의 대표작이 모였다. 작품 대여를 섭외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번에 전시되는 총 109점 중 42점이 해외 박물관 소장품이다. 보통 우리 박물관을 비롯해서 해외에서 유물을 대여받으려면 최소 전시 1~2년 전에는 협의를 해야 한다. 이번에 우리가 원한 작품들은 모두 유명한 작품이라 전시 스케줄을 맞추고 협의하는 데도 많은 시일이 걸렸다. 다른 기관보다 한발 늦게 섭외하여 놓친 작품이 있었는데 매우 아쉬웠다. 또한 미국, 중국, 일본에서 여러 작품을 들여오다 보니, 기관별로 대여조건들을 맞추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전시작업 첫날 한국, 미국, 중국의 큐레이터가 한자리에 모여 작업을 하였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각국의 전시방식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라면? 일반 관람객을 위한 관람 팁을 제시해달라.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안중식(安中植), 장욱진(張旭鎭)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이번 특별전에는, 특히 18세기 조선 화단에서 쌍벽을 이룬 이인문과 김홍도의 대작 산수도가 모처럼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김홍도의 <삼공불환도>에서 조선시대 문인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나라와 개인의 삶의 모습이 아름다운 산수로써 구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폭이 무려 8m50cm에 달하는 <강산무진도>의 전장면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삼공불환도> 역시 대작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도록 전시하였다.
전체 전시 작품 중 42점은 국내에 처음 전시되는 중국과 일본의 명작들로 놓칠 수 없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문징명(文徵明)과 동기창(董其昌) 등 중국 산수화 대가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그린 <귀거래도歸去來圖>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중국 회화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명품이다.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서 온 <봉래선경도(蓬萊仙境圖)>와 <무릉도원도(武陵桃源圖)>는 일본의 마지막 문인으로 불리는 도미오카 데사이(富岡鐵齋)의 대작이다. 여름의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한 대폭의 화면이 시선을 끈다.
한편 전시기간에 맞추어 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휴게공간에 디지털 산수로 유명한 황인기 작가의 <몽유도원도>가 전시 중이다. 전시 중인 옛그림과 이를 자그마한 못으로 픽셀화하여 재해석한 현대 작품을 비교해보는 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오디오가이드를 제작하였다. 오디오가이드를 받으며 작품들을 감상한다면 전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특별기획] 이상향,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우리 미술판에서 이상향을 그린다는 말은 요원해져 버린 것일까   
근현대 격동의 역사와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의 이상향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분명한 것은 있다 그렇게 꿈꾸었던 이상향에 가깝게 세상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

최열・미술비평

20세기 한반도가 탄생시킨 언어의 마술사 정지용은 1935년 고향을 노래했다. 정지용이 부른 <향수>의 풍경은 우리가 상상하던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세상을 훌쩍 뛰어넘는 또 다른 이상향 바로 그것이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곳, 이제는 꿈에서나 있을 풍경이다. 그렇게 사라진 세계, 그 세계는 이상향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식민과 전쟁의 탓만이 아니다. 일백년 동안의 산업화, 도시화를 떠올리거나 새마을운동과 4대강사업이 낳은 황폐한 현장을 생각할 일이다. 은빛구름 흐르고 금빛모래 반짝이던 물결에 몸을 빠뜨리던 고향 마을 냇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이가 없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던 흔하디흔한 고향 풍경이 이상향처럼 여겨지다니 말이다. 저 청학동이나 무릉도원, 몽유도원 그리고 허균의 율도국(栗島國)을 지금 우리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아미타의 극락정토나 미륵의 용화세계, 예수의 천당도 마찬가지다. 사후 안식처일 뿐이다.
동북아시아는 19세기 말 서구문명을 수용하면서 이상향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도덕주의 세계관을 폐기했다. 대신 서구 근대가 설계한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을 이상적 가치관으로 삼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핵심가치로 삼는 서구근대의 이상은 동양의 기존 정신가치를 전복해버렸다. 이에 따라 이상향을 상징하는 문인산수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변관식, 이상범의 실경산수가 각광을 받으며 유행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덕적 이상을 상징하는 사군자가 최후의 선비화가 윤용구를 끝으로 한갓된 정물화가 되어버린 일도 무척 자연스러운 시대 추세일 뿐이었다.
20세기 최초의 이상주의자들은 아마도 근대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화론의 세례를 받은 개화당원들로서 기술과학문명을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미술인으로서 오세창, 안중식, 이도영과 같은 개화당원들은 그러나 자신의 이상향을 예술세계로 형상화하지 못했다. 이상사회 설계도는 수용했으나 그 내면을 채우는 이념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밀고 나가지 못한 까닭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이래 영민하고 강직한 사회주의자들은 반제민족해방과 독립자주국가 건설이라는 원대한 이상사회 설계도를 그려놓았지만 그냥 설계도였을 뿐이다.
현실은 그들에게 아주 작은 자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오지호와 이인성이 그토록 화사하고 세련된 색채로 조선의 자연과 인간을 눈부시게 묘사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심미주의 미학이 지향하는 궁극의 이상향을 형상화하기에는 그들이 처한 시대가 지나치게 강퍅했다. 마찬가지로 다음 세대인 이중섭과 이쾌대가 몽환에 가득한 초현실세계를 그렸지만 그 세계는 환상이 아니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악몽의 전설일 뿐이었다. 그렇게 식민지 시대가 흘러갔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또렷한 이상향은 신기하게도 미증유의 학살과 파괴가 이어지던 6·25전쟁 한복판에서 탄생했다. 이중섭이 피난민으로 서귀포 시절 그린 <실향의 바다>와 통영 시절 그린 <도원(桃園)>은 낙원 풍경 그대로다. 통영이건 서귀포건 모두 남쪽바다 그 아름다운 물빛에 뒤엉킨 하늘 복숭아가 천상의 노랫가락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풍경으로서 이상향은 난민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현실을 초월하여 몽환의 세계로 순간이동하고 싶었던 욕망이 조작한 가상현실 말이다.
그 뒤로 우리 미술사에서 이상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산업화, 기계화 시대의 미래상을 눈부시게 보여주는 저 숱한 새마을 기록화, 산업 기록화 제작 열풍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이상을 함축하는 예술작품은 결코 태어나지 못했다. 또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거센 폭풍이 10여 년을 몰아쳤던 저 1980년대에도 그렇게 꿈꾸던 민중세상, 통일조국의 아름다운 이상향은 탄생하지 못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구호로 내세웠지만 바로 그 이상세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그렸는지, 그 민중이 그리워 가고 싶어하는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갖추었는지 질문만 잔뜩 던져두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상상력의 고갈
오히려 흐르는 시계의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고서 과거 농경사회의 두레와 대동굿 판에 어우러지는 농악과 춤의 선율에서 설레는 감동을 느끼곤 했던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윤의 <통일대원도>가 참으로 20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참된 이상세계였던 것일까. 혹 지난날의 향수가 아니었을까. 이런 향수 취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상향의 설정과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현상은 한국형 단색 추상화 계열에서 일어났다. 이들이 노자나 장자의 철학을 자기 예술론으로 삼은 것은 한국형 단색화다운 선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나 사회로부터 단절된 미술임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너무도 공허해서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아득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그곳엔 소요유(逍遙遊)의 이상세계 즉 아무것도 없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기묘하게도 1980년대 민중미술이 보여준 과거로부터 이상향 찾기와 같은 꼴이었다.
추상 및 민중미술 이후 1990년대 미술현상에서 이상향을 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니 집단이 해체되고 기획자의 개념 설정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중심의 상실시대에 발맞춰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또한 파편처럼 흩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비단 미술계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이 어느 계급계층이건 모두 이익집단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터에 유독 미술집단만이 공동의 가치를 추구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던 이념집단이 노동조합과 같은 이익집단으로 변화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지난날 뜻을 모아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던 결사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개인의 이해와 욕망의 내면으로 잠복해 들어갔고 각자가 꾸는 꿈이 곧 이상향인 세상이다. 이제 더 이상 이상향은 없다. 꿈꾸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아져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다. 개인의 환상일 뿐.
사전에 나와 있는 이상향의 뜻은 평화롭고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반성이나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서 출현한 근대의 이상향은 여전히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이지만 그것도 지나가버린 옛이야기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난 세기는 이상향을 꿈꾸는 행위 그 자체가 사치였다. 극단의 황무지 위에서 살아온 기나긴 세월 끝에 안식을 구하기는커녕 절망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상상력마저 메말라갔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20여 년 동안의 미술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현실에 대한 염세주의 시선과 태도는 난무하지만 고상한 윤리와 도덕의 시선을 내비치는 경우는 없었다. 허위의식이라고는 해도 19세기 이전 공동체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던 시절에는 계급계층에 따라 이상세계의 설계도를 제출했었다. <무이구곡도>나 <고산구곡도>,
<도산구곡도>가 설령 자기 문파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홍보수단이었다고 해도 집단의 가치와 이상을 호소하는 방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것이 괴멸당했고 남은 것은 벌거벗은 세속의 욕망 또는 음울한 도시의 냉소뿐이다.
이상향을 향해 거침없이 항해할 만큼 순결했던 미술가가 있었을까. 심미주의를 채택했다고 해서 그 예술가가 심미의 삶을 꾸려나갈 수나 있었던 것일까. 작업실을 나서면 시장에서 팔리기나 하는지 초조해 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행색에서 무슨 공염불이란 말인가. 심미와 재물의 사이에 설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자아는 결국 분열의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한 손엔 세속의 욕망을, 또 한 손엔 심미의 이상향을 쥐고 흔드는 모순의 희극! 어디 그게 20세기만의 이야기일까.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정지용이 부르던 노래 <향수>마저 끝났다. 세속을 향하지도, 이상향을 찾아가지도 못한채 방황하는 자의 어리석은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

백남순낙원8곡병

 

백남순(白南舜, 1904~1994) <낙원(樂園)> 캔버스에 유채 166.0×366.0cm 1937 개인소장 ‘심산유곡(深山幽谷)’이 서구적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백남순은 서양의 낙원도를 동양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위)채용신(蔡龍臣, 1850~1941)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부분) 종이에 채색 107.4×37.3cm(각) 1915 어진화사 채용신이 무이구곡을 그린 10폭 병풍. 성리학적 정서는 약화되고 형식화된 경향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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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 시대의 마지막 이상향을 꿈꾸다

(장욱진)_photo by 강운구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작품에서 산수화풍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70년 중반 이후라 할 수 있는데, 덕소아틀리에(1963~1974) 시기 후기부터 작품의 표현이 수채화처럼 묽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 작품에서는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는 도가적 정서가 잘 드러난다. 이 시기 장욱진은 수많은 <풍경>을 그렸다. 전통 산수화 기법과 같이 한 획으로 그린 나무와 집, 그리고 집 안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인물, 나무 위나 하늘 나는 새, 해와 달이 공존하는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유화물감을 통한 수묵화기법과 화면 구성에서의 산수 표현은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잇는 실험적인 작업이자 전통과 현대를 잇는 혁신적인 활동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술에 대한 그의 확고한 정신으로부터 나왔다. 화가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철학은‘신사실’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결성한 <신사실파(新寫實派)> 모임은“사실을 새롭게 보자”라는 주제의식을 표방했는데, 이는 사물 속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본질을 찾고자 한 것이다. 특히 장욱진의 경우에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가장 이상적인 측면들을 발견해내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을 더욱더 사물답게 그리는 데 평생을 매달렸다. 즉, 나무를 나무로 그리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그랬기에 그는 순수한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대상의 참모습을 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장욱진이 추구한 예술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상적 세계관은 불교와 도가적 사상의 핵심인‘무위자연’의 단순함과 근원을 지향하는 정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장욱진의 산수화는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모던한,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순수함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백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학예사

 

장욱진  캔버스에 유채 50×25cm 1988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소장

장욱진 <풍경> 캔버스에 유채 50×25cm 1988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소장

 

[특별기획] 베르사유 작가 이우환, 외부와의 대화

베르사유 작가 이우환, 외부와의 대화

심은록  미술비평, 철학

베르사유궁은 어떻게 보면 작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나 자칫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장소가 가지는 역사적 상징과 규모에 압도되거나 그것과의 이질감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우환의 이번 전시는 베르사유와 작품이 서로 소통하는 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필자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우환의 작품을 분석하며 작품과 공간이 나누는 대화에 귀 기울인다.

베르사유 궁전은 ‘전통과 현대와의 대화’를 목적으로 2008년부터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주세페 페노네 등 세계적인 현대작가 전시를 잇달아 개최하고 있다. 첫 번째 초대작가인 제프 쿤스의 전시가 개최되자마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베르사유의 전통과 명예를 모독한다며,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외국의 미술애호가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제프 쿤스의 전시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훌륭했다. 그런데 너무 훌륭해서 작품만 보이고 작품이 놓인 장소인 베르사유궁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전시의 목적인 베르사유의 전통과 현대 미술 간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단지 현대미술만의   ‘모놀로그’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작가의 경우에는 ‘조화’를 지나치게 염려한 결과, 그의 작품은 베르사유궁의 웅장함과 찬란함에 묻혀버렸다. 이 경우도 베르사유와 현대미술의 ‘대화’가 아니라, 베르사유의 ‘모놀로그’가 되었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고 싶어선지, 올해는 ‘대화’와 ‘관계항’의 대가인 이우환이 초대되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대화’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라 할지라도 아시아인이 과연 프랑스의 오랜 역사와 철학이 담긴 베르사유 궁전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회의가 일었다.
6월 17일, 마침내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전>(6.17~11.2)이 막을 올렸다. 까다로운 입맛과 날카로운 혀를 지닌 프랑스 미술애호가들은 감탄했다. 베르사유도 보이고 작품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우환의 작품은 노쇠하고 무거운 베르사유에 생동감과 젊은 역동성을 주었고, 베르사유는 작품에 장엄함과 신비를 더해 주었다. <이우환 베르사유전>에는 총 10점 (실내 1점, 실외 9점)이 설치되었으며, 작가는 관람객들의 동선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작품을 정원을 산책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상하도록 배치했다. 이 글에서는 이우환의 ‘외부와의 여러 가지 대화법’ 가운데, <관계항-솜의 벽>을 통해서 ‘전통과 역사’와의 대화법을,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와 <관계항-바람의 날개>를 통해서 ‘자연’과의 대화법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전통과의 대화법 : <관계항-솜의 벽>

<관계항-솜의 벽>은 베르사유 궁전의 가브리엘 건물(Aile Gabriel) 내에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이 건물에 들어가면, 멀리 이 작품과 그 배경인 내부건물이 보인다. 내부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에는 모던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원주(colonne)들이 있고 이 원주 가운데에 가브리엘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아래층에는 모던하고 남성성이 표출되는 도리아식 원주들이 있고, 이 대리석 원주들 한가운데 이우환의 솜으로 된 원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솜으로 된 원주 꼭대기에는 커다란 돌이 마치 주두장식인 것처럼 가뿐히 앉아 있다. 그리스로마의 건축양식에서 주두장식은 시대적 특징과 성격을 반영하면서 서로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루이14세의 유명한 두 왕실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와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에 의해 지어진 베르사유의 건물 외부는 대부분 프랑스식 고전주의 양식을 따른다(반면에 내부는 대부분 바로크적 양식이다). 루이15세의 왕실건축가 앙주-자크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은 이러한 프랑스식 고전주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또한 모던한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가브리엘 건물’을 설계했다. 프랑스식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 양식은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美)의 표상인 그리스로마 양식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모던하고 날렵한 모양의 그리스로마 양식 원주가 세워졌다.
<관계항-솜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면, ‘원주’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벽’의 한 단면이었음을 바로 깨닫게 된다. 이렇게 ‘벽’을 ‘원주’로 착각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작가의 거듭된 숙고를 거친 의도 때문임에 틀림없다. 가브리엘 조각상을 가운데 둔 도리아식 원주와 이오니아식 원주가 정면으로 보이는 바로 그 위치에서만 <관계항-솜의 벽>은     ‘원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위치에서 단지 몇 도만 방향을 바꾸거나 조금만 위치가 바뀌었어도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없다. 특히, 기존의 원주들이 없었다면, <관계항-솜의 벽>은 이러한 사고로 이끄는 암시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관계항-솜의 벽>은 허물어진 벽의 모습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지에 가보면, 원주들은 세월의 폭풍을 견뎌내고 서있지만, 건물들의 벽은 거의 온전한 것 없이 무너져 있다. 바로 그 허물어짐에서 영원성이 보인다. 금방 신축된 완벽하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에서는 오히려 영원성을 느낄 수 없다. 반대로,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있는 성의 폐허나 고대 조각들을 보면 먹먹할 정도의 영원성이 느껴진다. 존재성 혹은 현존성이 그만큼 사라지면서, 시간, 자연, 영원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의적인 느낌이 ‘솜이라는 가벼운 존재성’과 ‘영원성의 자취인 허물어진 벽’ 그리고 이미 ‘영원의 시간을 겪은 자연석’으로 재현되었다. 더욱이 <관계항-솜의 벽>이 그리스로마의 초월적이고 영원한 미를 표상하는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과 원주들 사이에 놓여 있기에, 이러한 양의적인 감성은 더욱 극대화 된다.
육중한 돌이 가벼운 솜 위에 가뿐히 앉아 있는 이 작품은 ‘트릭’을 사용했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은 이우환 조각의 초기 스타일이다.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느낌과 효과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이번 베르사유 전시 출품작에 철봉과 자연석을 사용한 <관계항-거인의 지팡이>가 있는데, 이는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에 있는 작품과 같은 종류의 마티에르를 사용한 같은 이름의 연작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같은 이름을 지니지 않았다면, 연작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이우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일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내 작품을 포함하여 모노하 작가들의 작품은 공간이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모노하 작가들의 예전 작품을 그대로 재생하거나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대와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관계항-솜의 벽>이 비록 작가의 초기 조각 스타일을 연상시킨다고 할지라도, 이 작품은 ‘이곳 현재(sic et nunc)’에서만 가능한 기능을 한다. <관계항-솜의 벽>뿐만 아니라 베르사유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이곳 현재’라는 시공간성과 관련하여 기능하고 있다. 이는 베르사유 전시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곳에서 그가 전시해 온 방식이다.

자연과의 대화법 :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 <관계항-바람의 날개> 그리고 ‘대운하’

베르사유의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작품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이하, 아치)가 보인다. 높이 12미터와 길이 30미터의 스테인리스스틸로 된 아치의 양 끝에는 두 개의 자연석이 놓여 있다. 아치 밑에는 아치와 똑 같은 크기의 스테인리스스틸이 긴 융단처럼 바닥에 깔려있다. 정원 초입에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에 서면, 저 멀리 정원 끝에 있는 또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이 보인다. 사실, 후자는 융단이 아니라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대운하이다. 스테인리스스틸 융단과 대운하 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놀라울 정도로 모양과 색감이 일치해 대운하가 또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이라고 착각할 만큼 비슷하다.
<아치>와 ‘대운하’ 중간에는 ‘녹색융단’이라고 불리는 푸른 잔디밭이 있고, 그 위로 이우환의 또 다른 작품
<바람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40개의 거대한 스테인리스스틸로 구성된 이 작품의 반(20개)은 잔디밭 위에 누워있고, 또 다른 반은 세워져 있다. 미풍처럼 혹은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굴곡진 스테인리스스틸 판들은 아치에서 운하를 오가는 바람의 움직임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이우환의 작품은 정원이 시작되는 <아치>에서부터 <바람의 날개>를 타고 정원 끝에 있는 ‘대운하’까지 3부작(triptyque)처럼 밀접하게 연결된다.
아치의 양끝에 있는 자연석처럼, 이우환의 조각은 언제나 자연에서 가져온 돌을 원래 상태 그대로 전시해왔다. 전시장에 자연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으면서도 그는 이를 ‘ready-made’(여기서는 ‘자연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re-made’(‘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시선이 갔다는 것은 이미 순수하게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는데, 더욱이 자연을 전시장에 옮겨다 놓았으니 이는 re-made이다”라는 작가의 설명은 슈뢰딩거의 유명한 가설 ‘동시에 살아있고 죽은 고양이’를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자연을 볼 때, 본다는 그 행위로 인해 자연(슈뢰딩거에 의하면 ‘양자’)과의 관계가 발생하며 자연(‘양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자의 고민과 똑같이, 그는 보기 이전의 자연을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왔다. ‘대운하’가 비록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이번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연을 옮겨오지 않고, 있는 상태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시켰다. 이로 인하여 그가 바라던 것이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가 조각에서 ‘자연’(자연석)을 차용해왔듯이, 이번에는 베르사유의 ‘대운하’를 그의 작품으로 그대로 차용하면서, 거대한 3부작인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 <관계항- 바람의 날개> 그리고 ‘대운하’가 성립되었다.
이 글의 도입에서 언급했듯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에서 ‘전통과 현대미술의 대화’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의 초대 작가인 제프 쿤스도 그의 예술목적이 ‘소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프 쿤스의 ‘소통’과 이우환의 ‘대화’는, 비슷한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 이우환 작가에게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통’과 이우환이 말하는 ‘대화’의 차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Communication(소통)’은 ‘community(공동체)’에서 나온 말이니까 공동체 내부의 일을 암시한다. ‘Communication’이란 community의 ‘identity(정체성)’로서 이미 공통견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진다. 그래서 이는 ‘common sense(상식)’는 되지만 공동체 밖의 세계, 타자와 통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correspondence(조응)’는 공동체 내부에 국한되는 ‘dialogue(대화)’가 아니기에,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킨다거나 어떤 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서구적인 표현으로 ‘dialogue’라고 할 때는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여기 사람들의 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하고는 또 다른데, 서양에서 ‘dialogue’는 ‘monologue’에서 나온 것으로, ‘monologue’가 깨진 상태가 ‘dialogue’이다. 에고(ego)가 깨진 상태에서 오는 것이 ‘dialogue’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말하는 ‘대화(對話)’는 서로 대(對)하고 마주하고 말하는 것(話)이기에, 서로가 대면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고, 처음부터 에고(ego)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에고가 깨지거나 답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제프 쿤스의 ‘소통’의 경우와 관련해서 미셸 푸코의 설명을 추가할 수 있다. 푸코는 사람들이 담론하는 경우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미세한 권력(pouvoir)이 작용한다고 했다. 소통하면서 상대를 설득하여 화자의 의도를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거나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우환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대화’하고 ‘관계성’을 가진다. 관계를 맺으면서도 개별적으로 남을 수 있는 미묘한 상황에 대해, 타자성에 대해 늘 고민해온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계는 그 자체에 의해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유지한다. 타자로서의 타자는 우리가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되는 오브제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이우환의 조각은 오브제로 환원되지도 않으면서, ‘돌은 돌대로’, ‘철판은 철판대로’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이번 베르사유의 전시에서도, 그의 조각품은 조각품대로, 베르사유 정원은 정원대로 존재케 하면서, 관계에 의해 서로의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서로의 신비 속으로 초대되어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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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Wavelength Space> 철 150×500×1.5cm (세로설치, 총20점)/150×24320cm(바닥설치, 총20점) 2014

맨 위 이미지 <Relatum-Wall of Cotton> 바위 솜 270×40cm(솜에 싸인 벽) 30×30cm (바위, 각, 2점) 2014 이번 출품작 중 유일하게 실내에 설치되었다. 1969년에 제작된 <Relatum-System> 연작을 변형한 작품

[특별기획] 이우환 작업이 벌이는 관객과의 끊임없는 대화

성하(盛夏)의 계절을 맞은 베르사유는 따가운 햇살로 가득했다. 2013년 유럽을 휩쓴 이상 고온 현상이 낯설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럽 특유의 쨍쨍한 햇살도 강렬했다. 그 아래 베르사유궁을 마주하고 선 이우환의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Relatum-L’arche de Versailles)>의 은색 호(弧)가 유난히 반짝였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외관을 대표하는 베르사유궁과 이우환의 아치는 과거와 현재, 화려함과 단순함, 서구와 동양 등 대립되는 다양한 요소가 마치 기싸움을 벌이듯 마주서 있었다. 폭 15m에 이르고, 높이 11m에 이르는 이 아치는 양 옆의 바위에 기댄 것처럼 세워져 있었고 베르사유궁의 정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출입문 같아 보였다. 이미 《르몽드》에 실린 프랑스의 저명한 비평가 필립 다장(Philippe Dagen)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이우환은 “시골 길에서 비가 멈추자 뜬 무지개를 봤다. 그것이 너무 근사해서 언젠가 저것을 모티프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 일을 잊고 있었지만. 그런데 베르사유궁에서 그랜드 커널이 보이는 곳에 서니 예전에 무지개를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무지개를 만들 수는 없지만 아치를 만들면 그 당시 걸으며 느낀 공간에 대한 감동과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라며 작품의 모티프를 설명했다.
6월 12일 프레스컨퍼런스를 마치고 겨우 시간을 내어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따로 마주한 이우환은 일정에 쫓겨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듯 보였다. 기자간담회 준비로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며 어린아이처럼 손에 꼬치 하나를 들고 나타난 그는 그마저 다 먹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는 총 10점이 베르사유궁 실내외에 설치되었다.
이 전시를 위해 이우환은 50여 회 이곳을 방문했다. 베르사유궁에서 전시한다는 것은 작가의 일생에 단 한 번 올까말까 한 매우 드문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베르사유궁은 1973년에 관광차 처음 왔었다. 그때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정원이 인공적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 나무를 사각형, 원통형, 구형으로 깎아놓았더라.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나 같은 작가가 개입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환경에서 작품을 하면 자연성이 너무 강해 내 작품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깐 비자연적이고, 인공미가 강하며, 산업적으로 발전한 공간에서는 내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완벽한 정원을 만든 앙드레 르 노트르가 자신에게 완벽과 또 다른 공간을 열어달라 부탁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런 르 노트르에 대한 오마주 형식의 작품이 바로 <Relatum-The Tomb, Homage to André Le Nôtre>이다. 이 작품이 놓인 공간은 그간 폐쇄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으로 이날도 따로 관리인의 도움을 얻어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우환은 이 작품에 대해 “르 노트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덩어리처럼 땅 밑에 웅크리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알프레드 파크망 전 퐁피두센터 관장은 “모든 작품은 신작으로 베르사유궁이라는 공간에 맞춰 작업했다. 물론 베르사유궁의 모든 공간을 사용할 순 없었지만 선택할 수 있는 한 그가 직접 전시 공간을 찾아내어 베르사유와의 대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특히 몇몇 작품은 신작일 뿐 아니라 형태와 구조 면에서도 전혀 다른 방식을 띤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사유궁이란 공간이 그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본다”며 이우환의 작업이 베르사유궁에서 특별한 무엇을 만들어냈음을 강조했다.
오픈된 공간에 펼쳐놓은 작품이어서 화이트큐브에서 만났던 이우환 특유의 경건함과 작품 주위를 맴도는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진 듯하다는 기자의 말에 파크망은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베르사유궁의 환경이 다른 화이트큐브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부분을 증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Relatum-The Shadow of the Stars>나 <Relatum-The Tomb, Homage to André Le Nôtre>의 경우, 관객은 작품과 개인적 관계를 느끼고 경건한 묵상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업은 갤러리에 놓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람객의 수가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같은 의미를 띤다. 작업에 사용하는 물질, 작업의 구성과 외부 즉 관람객과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베르사유궁을 방문하는 이는 하루에 약 2만5000명이라고 한다. 또한 여름 성수기에는 그 수가 10만 명까지 훌쩍 늘어난다고. 그들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우환의 작품을 스쳐지나게 되는 셈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내 이름이나 작품의 의미를 알 필요는 없다.
그저 ‘아 신기하다’ ‘여기 이런 작품이 있네’ 정도의 감흥을 받으면 된다. 언뜻 들어보니 관객들에게서 그런 반응이 있어 좋았다. 내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
건강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엉망진창이다. 허리도 좋지 않다. 정말 쓰러질 것 같다. 그런데 백남준이 그랬듯 아무리 작은 전시도 다음은 없다는 생각으로 열의, 성의와 돈, 생각을 몽땅 다 털어넣는다”라고 답하며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떴다.

베르사유=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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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광경

[특별기획] 작가로 전략가로서 이우환

류병학  미술비평

한 작가를 규정하는 작업은 그의 일생 전반과 주변 환경과 주고받은 영향 등 이른바 맥락을 살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우환이라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 어떻게 대화하고 부대꼈는지 점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가 어떻게 동시대미술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역사가 깊고 위대한 명소인 베르사유궁 정원에서 전시회를 하게 돼 기쁘고 흥분됩니다. 이 완벽미를 지닌 인공정원 속에서 완벽을 넘어선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게 제 작업의 의도였습니다.” 지난 6월 12일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전> 기자회견에서 이우환은 벅찬 감회에 젖어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일명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인 베르사유궁을 현재진행형의 공간으로 되살리는 야심 찬 프로젝트로 2008년 제프 쿤스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제적인 스타 작가들을 차례로 초대해왔다. 이우환은 아시아 작가로는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2010년)에 이어 두 번째다. 전시를 기획한 알프레드 파크망(전 퐁피두센터 관장)은 “파리 주드폼(1997~98),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2011)에서의 회고전 이후 열리는 이번 베르사유 전시는 이우환 예술세계에 또 하나의 전기를 이룰 것이며, 그는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떻게 이우환은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월간미술》은 필자에게 ‘작가로 전략가로서 이우환’을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다.

미술비평가로서의 이우환

이우환(1936년생)은 1956년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에 밀항한다. 그는 1961년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나 고민 끝에 철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화 학원을 다니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1960년대 중반 《매일신문》의 <현대일본미술전>과 쉘 주최 <현대일본미술전>에 몇 차례로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당시 그는 일본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작품’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같다. 1968년 이우환은 곽인식의 추천으로 한일 문화교류 일환으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참여한다. 196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세중은 곽인식과 함께 이우환을 선정한다.
1969년은 이우환에게 뜻 깊은 해이다. 그는 <오브제에서 사물로>를 미술출판사 미술평론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비평상을 받고, 국제청년미술전에 응모하여 수상한다. 그는 당시 일본 미술계에 ‘핫’한 모노하(物派)에 비평(<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 <다카마쓰 지로-표현작업으로부터 만남의 세계로>)으로 개입하여 일본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힌다. 이를테면 이우환은 급진적인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미술계에서 작품보다는 평론으로 주목받았다는 말이다. 1971년 이우환은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한다. 당시 이우환의 평론은 철학과 출신답게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이론을 미술에 접목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하이데거의 예술개념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신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성 개념을 ‘모노하’에 접목했다. 이우환의 미술평론은 1960년대 말부터 한국미술계에 ‘이론공부 열풍’을 일으킨다. 이우환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 중반까지 40여 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지만, 1960년 초 철학도의 길을 포기했듯이 이후 미술비평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걷는다.

아티스트로서의 이우환

하지만 이우환의 아티스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 사건과 1971년 파리비엔날레 사건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구겐하임미술관은 <재팬, 아트, 페스티벌>에 이우환을 선발했지만, 일본 측은 이우환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시 초대를 보이콧한다. 그리고 《르몽드》를 위시해 적잖은 파리 언론매체에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이우환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결국 그는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일본작가 신분으로 출품할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아티스트로서 이우환의 행보를 알려면 그의 전시 경력을 살펴보면 된다. 이우환은 1973년부터 2008년까지 당시 일본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한다. 1973년 그는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는데, 그가 일본미술계에 자리매김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의 ‘일본현대미술전’에 출품하지 못했던 이우환은 197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이우환은 도쿄화랑의 파워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뒤셀도르프미술관 그룹전을 계기로 사방팔방으로 독일 메이저 갤러리들을 물색한다. 그는 1976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보쿰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리처드 세라 등 국제적인 미니멀아티스트들이 소속돼 있던 갤러리m은 유럽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이다. 당시 갤러리m의 딜러인 알렉산더는 유럽미술계의 파워맨이었다. 1976년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우환은 그다음해인 1977년 ‘카셀도쿠멘타’에 초대된다. 갤러리m의 딜러 알렉산더의 파워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1974년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그룹전(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했던 그는 1978년 당당하게 개인전을 개최한다. 같은 해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유명 미술관인 스테델(STADEL)에서 개최한 조각전(Z. B. Sculpture)에 초대된다.
이우환은 또 한국의 메이저 갤러리인 갤러리 현대에서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는 프랑스의 메이저 갤러리 중 하나인 갤러리 드 파리(Galerie de Paris)에서 1984년부터 1995년까지 개인전을 연다. 1986년에는 퐁피두미술관에서 개최한 <일본의 아방가르드(Le Japon des Avant-Gardes)전> 에 초대된다. 1994년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무디마미술관(Fondazione Mudima)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구겐하임 소호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Scream against the sky>에 초대되고, 국립현대미술관과 갤러리 현대 그리고 인공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은 갤러리 현대가 금전적 지원을 편집디자인은 인공갤러리가 맡았다.
이우환은 영국의 메이저 갤러리인 리슨갤러리에서 1996년과 2004년 그리고 2008년 개인전을 개최한다. 1997년에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파리 주드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퐁피두에서 기획한 그룹전 <Made in France>에 초대된다. 1978년 프랑크푸르트의 스테델에서 그룹전에 초대된 이우환은 1998년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어서 1999년에는 독일의 저명한 른 루드빅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룹전 <Kunstwelten im Dialog>에 초대된다. 2001년에는 영국 런던의 저명한 테이트모던에서 기획한 그룹전<Century City>에 초대된다.
2003년 이우환은 삼성미술관(호암갤러리, 로댕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같은 해 그는 일본의 모리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룹전(Happiness)에 초대되고, 2004년 도쿄국립미술관의 그룹전 <Ecole de Limpa>에 초대된다. 2006년엔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2007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된다. 2008년 그는 <이우환 베르사유>를 후원하는 갤러리 중 하나인 뉴욕의 메이저 갤러리 페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2011년에는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2014년 베르사유궁에서 이우환 개인전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단편적인 이우환의 전시경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전자는 이우환이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메이저 갤러리의 역할이다. 물론 유럽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우환의 개인전들 중에는 이우환 개인의 노력으로 성사된 것이 적잖다. 필자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이우환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당시 50대 말이었던 이우환은 자신의 도록들을 직접 들고 미술관 관계자를 찾아다녔다. 한마디로 이우환에게 매니저가 없었던 것이다. 와이? 왜 이우환은 매니저도 없이 혼자 고군분투한 것일까?  이우환 왈,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문득 “내 인생을 통해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며 교육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후자는 세계미술계의 권력으로 부상한 미국에서의 전시경력이다. 이우환은 유럽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한 반면, 미국에서는 2008년 페이스갤러리의 개인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시경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와이? 왜 이우환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우환 왈, “미국미술계가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필자는 <쓰리스타와 이우환>(2003)에서 이우환이 미국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의 외향이 아니라 이우환의 상업적 시스템 결여에 있다고 보았다. 그 대안으로 필자는 쓰리스타에게 그동안 구축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여 이번(2003년 삼성미술관) 이우환 회고전을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 순회할 수 있게끔 공격적인 마케팅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2011년 삼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는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삼성과 이우환

국내 모 일간지는 이우환이 삼성가(家)와 친분이 깊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1960년대부터 이병철 선대 회장과 최순우 선생 등 고미술 전문가들 사이에 심부름을 자주 하면서 인연을 쌓게 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과도 그 시절부터 즐겨 어울리며 답사를 다닐 만큼 절친했고, 지금도 종종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아티스트는 개인이다. 따라서 아티스트는 어느 갤러리에 소속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국제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위해서는 메이저 갤러리의 서포트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 대기업의 후원 없이 국제미술계의 스타가 되기는 쉽지 않다.
이우환은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따라서 그는 이건희 회장의 고등학교 선배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 미대를 중퇴했지만)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물론 홍 관장은 서울대 응미과를 졸업했고, 이우환은 동양화과를 다녔다. 1984년  《중앙일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건축된 《중앙일보》 신사옥에 중앙갤러리가 개관했다. 당시 신사옥에 공공작품을 설치할 때 이우환이 자문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우환은 그 이후에도 삼성미술관의 자문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로 미루어 삼성은 이우환에게 후원자가 돼줬으며 이우환은 삼성에 자문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삼성미술관과 이우환은 일류를 지향한다.
2001년 이우환은 호암상을 수상하고, 2003년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대대적인 개인전을 개최한다. 지난 2011년 2월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현직에 복귀한 후 2012년 VIP 달력 작가로 이우환을 선택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인용했던 알프레드 파크망이 주목했던 두 개의 이우환 회고전(파리 주드폼과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미술관)은 삼성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파리 주드폼은 1990년 중반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삼성의 후원을 받아 1997년 주드폼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을 기획한다. 삼성은 201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삼성아시아미술큐레이터’를 설립한다. 첫 큐레이터인 알렉산드라 먼로는 미주 삼성의 후원을 받아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을 기획한다.
야심 찬 프로젝트인 일명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세계미술계의 절대권력을 꿈꾼다. 이를테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가 되는 ‘티켓’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계미술계의 절대권력을 향한 꿈을 이루는 데 재정적 문제라는 현실을 비켜갈 수는 없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의하면 재정위기로 정부 지원이 줄어든 파리의 박물관은 후원금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에 아해(세모그룹 유병언 전 회장)는 2012년 루브르 박물관에 110만 유로(약 15억3000만 원), 베르사유 궁전에 140만유로(약 19억4600만 원)를 후원금으로 기부하고, 그 대가로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궁 미술관에서 아해의 사진전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혹자는 “프랑스 문화예술의 자존심이 자본의 논리에 영락없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자본을 위해 프랑스 문화예술로 장사를 하고 있다.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베르사유전> 개막 기자회견에서 카트린 페가르 베르사유 박물관장은 “이우환의 작품은 우리를 조용하고 매혹적인 그의 시 속으로 이끈다”고 평한다. 하지만 현지 언론 기자들은 이우환 옆에 앉은 카트린 관장에게 베르사유궁에서 개최된 <아해 사진전>에 대해 질문했다. 카트린 왈, “‘아해 전시’는 돈 받고 대관해주는 공간 ‘오랑주리’에서 열린 이벤트였을 뿐이다. 이우환 전시는 베르사유궁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매우 권위 있는 전시”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아해 사진에 관한 카트린 관장의 인터뷰는 그와 전혀 다르다. “그(아해)의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겸손하다. 한 사람이 세상, 자연, 생명을 시적으로 바라보는 점이 이례적이다”라고 평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이우환의 벅찬 감회가 길지 못했을 것 같아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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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팔라조 팔룸보 포사티에 설치된 <Resonance>

위 이미지. 2008년 9월 10일부터 10월 25일까지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전시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