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21세기의 지정학적 노마드 이우환

김미경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소장, 강남대 교수

이우환은 스스로를 노마드(nomad) 혹은 중간자로 정의하는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가 우리 미술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까? 또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유무형의 환경은 이우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계의 시각은? 이러한 많은 질문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필자의 글을 통해 이우환과 우리, 그리고 일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거장이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예술가 이우환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큰 예술로 배태되어 미학적 토론의 대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양은 근본적으로 일본과 유럽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과연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nomad)면서 중간자(中間者)로서의 이우환에게 한국은 어떤 곳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 문화예술은 이우환의 사상 및 예술과 정작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예술가들과 이우환의 실체적인 관계는 어떠한가? 아울러 이우환을 바라보는 일본 내부의 비평적 시각과 일본이 세계에 선보이는 이우환은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서구에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일본이나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계에서 이우환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거장의 사소한 주변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던 그 대목은 먼저 한국에서 논의되어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세계적인 한국인 예술가에 대해 자부하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1956년 여름,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갓 입학한 이우환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가 손에 들려준 약을 갖고 작은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감행했던 대학 1년생의 일본 밀항은 60여 년 전의 은밀한 사건이었고, 현재의 이우환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그는 도쿄의 다쿠쇼쿠(拓殖)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니혼(日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문학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끝없이 글을 쓰던 그가 자신의 열린 사상으로 젊은 일본 작가와 처음 교감했던 글은 1969년 6월 《산사이(三彩)》에 실린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存在と無を越えて-關根伸夫論)>이었다. 무명의 작가이자 비평가가 떠오르는 신예 작가에 대해 쓴 글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세키네와 주변의 작가들에게 사상적 키워드를 제공하며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관계항>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국민미술 ‘모노하’(ものほ)로 불리게 된 일본의 중요한 예술 흐름에서 재일 한국인 이우환은 사실상 결정적인 존재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5년 일본 《비주츠테초(美術手帖)》의 ‘일본근현대미술사 100년’ 특집에서 일본 대표 미술가로 선정된 일,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과 2010년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미술관 건립, 그리고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과 201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전시를 관통하는 이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우환의 사상과 예술의 특성이지만 일본의 국력과 다각도의 모노하 담론도 만만치 않은 뒷받침이다.

‘근대초극’ 논의의 중요성과 일본에서의 이우환

한국 문화예술계에서는 서구 근대나 컨템퍼러리 개념이 혼용되고 있을뿐더러 그것들을 우리에게 대입하는 이상으로 ‘근대초극(近代超克, The modern)’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필자가 《모노하의 길에서 만난 이우환》(2006)에서 상세히 다루었듯이 일본 지성계에서 ‘근대초극’ 논의는 매우 심도있게 전개되었으며 이우환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 근대문명과 모더니즘의 역사를 비판하며 뛰어넘자는 일본의 근대초극은 이우환의 글 <세계와 구조-대상의 와해>(1969.6)나 <컨셉션과 대상의 은폐> (1969.8), <데카르트와 서양의 숙명>(1969.9)에서도 잘 피력되어 있다. 그러나 이우환의 근대초극 관점의 보다 큰 강점은 단순히 서양을 이기는 동양 찬미가 아닌 ‘중간자’로서 서양과 동양의 경계도,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경계도 없는 통섭적 입장으로 열려있는 태도이다. 그것은 모노하 작가들을 그의 주변으로 모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다마(多摩) 미술대학의 비쿄토(美共鬪)가 이우환을 맹공격한 이래 그 공격의 주동이었던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尚嘉)는 물론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나 지바 시게오 (千葉成夫)로 이어지는 일본의 비평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우환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신비주의적 자연주의 파시스트’(히코사카)나 ‘창조를 부정하는 자’(지바), ‘붓을 빼앗기고 추방된 자들이 세운 왕국 모노하의 이우환’(미네무라) 같은 일본의 비평적 관점은 이우환 예술의 성격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노하가 일본의 국민미술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이우환이 껄끄러운 ‘타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세계적인 모노하를 말하기 위해 이우환이 일본의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그의 말은 그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국에서 커서 일본에서 서려고 하니 일본 쪽은 나더러 한국적이라며 침입자 취급을 하려들고 시간이 흐르니 한국에서는 일본 바람을 탄 도망자로 몰려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더 멀리 설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삼십여 년 헤맸더니 그쪽에서는 또 동양적이니 이방인이니 하며 칭찬으로 점잖게 제외시키려 들지 않는가. 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을 쫓아다녀야 하고 생소한 작가와 만나고 함께 전람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열린 자기를 기르는 수 밖에 따로 살 곳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우환 《여백의 예술》(2002)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이우환의 실체적 관계

이우환은 평면회화나 입체설치에서 모두 자신의 미학을 관통시킨다. 1960년대 초엽에 이미 시도된 점과 선의 회화들은 1970년대에 특유의 조형과 미학으로 진화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입체설치는 모노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우환의 회화는 모노하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노하는 평면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공간》을 통해 ‘일본현대미술의 동향’을 처음 국내에 소개한 이우환의 글에는 ‘모노하’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다카마쓰 지로(高松次朗)의 광목 천과 세키네 노부오나 나리타 가즈히코    (成田克彦), 요시다 가쓰로(吉田克郞)의 돌로 눌러 놓은 종이 외에 이다 쇼지(飯田昭二)의 반으로 자른 통나무, 아오야마 고유(靑山光佑)의 인간형체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과 1972년 이우환의 명동화랑 전시, 그리고 이우환이 커미셔너였던 1973년 파리비엔날레 무렵까지 일본 모노하를 둘러싼 새로운 설치 형태의 조형은 한국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모노하’를 특정 카테고리화하지 않던 이우환이 그 용어를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이우환 하면 ‘모노하’를 떠올렸던 국내 비평가들에게 이우환의 회화와 입체는 모두 ‘모노하’라는 이름으로 묶어졌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모노하’는 ‘모노크롬’과 혼동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모노하’는 결코 회화적 개념이 아니며 ‘모노크롬(Monochrome)’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학이 아닌 우정 관계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의 모노톤* 예술

이우환과 몇몇 한국의 실험미술 작가는 시공간에서 물체들이 발휘하는 물질성의 놀라운 생생함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태도를 공유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우환과 한국의 모노톤 예술을 주도한 작가들 간에 맺어진 관계는 사실상 미학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인간적인 우정 관계였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 작가들의 관계는 1968년에 시작되었다. 1968년 7월 한국내 반일감정을 다소 극복하면서 본격적인 한일교류전으로 <한국현대회화전>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이우환이 재일 작가로서 출품한 <퐁경Ⅱ>가 박서보에게 ‘그리지 않은 그림’으로 깊은 인상을 준 사실은 1984년 가을         《화랑》에 실린 박서보의 <이우환과의 만남 68년 이후를 회상한다>에 기록되어 있다.
“…이우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8월… 그는 한국현대회화전에 300호가 넘는 대작 3점을 출품했는데 분무기로 전 화면에 형광도료를 뿜어 놓은 소위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것이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한 열기에 심신이 만신창이로 화상을 입고 있던 서울화단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곧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우환은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과 같이 전시를 하며 어울려 다녔으면서도 자신의 회화의 미학적 입장을 그들과 관련시켜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회화는 한국의 ‘모노톤 예술’과 거의 상관이 없는 예술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유의 출발 지점부터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최근의 국내외 전시에서까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모노톤 예술가들과 이우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 그리고 몇몇 전시 기획자와 국내의 몇몇 비평가가 미학이 아닌 우정관계에서 비롯된 이우환의 태도를 이우환의 미학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영향이 미술계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
필자가 ‘모노톤 예술Monotone Art’
이라 부르게 된 미술 경향은 그것이 ‘단일한 색’을 의미하는 모노크롬Monochrome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단일한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의미하는 ‘단색화Dansaekhwa’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1999년 박사논문 이후 ‘단색조 회화Monotone Painting라 부르기도 했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김장섭 등 중요 작가들의 작업이 단순히 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로 이미 확장되어 있다는 점을 중시하게 되었다.

유목민 중간자 이우환

이우환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이라는 삼각형 속에서 그 어떤 꼭지점도 자신의 철저한 본거지가 되지 않는 일종의 유목민(nomad)이다. 그래서 어디서도 ‘타인(他人)’의 처지를 면치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관계’ 속에서 이동하는 운동성을 갖고 있다. 2013년 파리의 카멜 므누(Kammel Mennour)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신의 회화와 입체설치를 놀랍게 조우시키는 ‘만남’의 관계를 또 한번 새롭게 시도했고 2014년 베르사유전시에서 서구 전통과 아시아의 미학을 조우시켰다.
필자는 올해 4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란 제목으로 한 영어 발제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모노톤 예술의 용어 문제 및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두 가지 정치 사회학적 매핑을 피력했고, 대단히 진지한 반응과 공감을 나누었다. 앞으로 한국의 미술계에서도 이우환과 그의 예술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토론의 장에서 연구자들의 만남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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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므누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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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풍경 Ⅱ> 1968, <한국현대회화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2003년 이우환이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한 컬러 슬라이드)

위 이미지. 이우환 <관계항> 180×230×50cm 1969, 파리 비엔날레(1971) 출품작

사진 :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아카이브 자료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1

 (부분)

<머리가 알지못하는 마음ll> (부분)

Chun Yoonjo 전윤조

전윤조의 작업은 오래 걸리고 반복적이고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간다. 두꺼운 면사는 작업의 중요한 기본 재료이다. 일일이 실로 엮어 수도 없는 인물들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어려서부터 가진 청력장애로 인해, 지독하게 반복적인 훈련으로 습득한 언어는 작품의 구조와 닮아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시각보다는 작가의 몸이 많이 개입되고 그 노동의 반복 구조가 전윤조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끝없이 계속되는 손작업을 통해 미적 치유를 받는 것일까. 그것만이 자신의 언어인양, 작가는 집요하게 매달린다. 언어가 장애인 그에게는 몸을 통한 의사소통이 그만큼 절실한 것이다.
— 전영백

전윤조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고 몽클레어 주립대학교 석사학위를 마쳤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2년 김종영 조각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김종영미술관에서 5번째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허진 유목동물 인간2010-10,162×130,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2010

<유목동물 인간2010-10>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162×130cm 2010

Hur Jin 허진

역사와 철학, 과학기술, 전통과 현대, 자연과 문명의 관계망이 복잡하게 뒤얽힌 다중복합체로서 현실인식을 토대로, 관계 내 존재라는 유한성을 극복하는 자율적 주체로서 인간, 그리고 다양한 개(성)체들의 조화로운 공존과 상생을 그리고자 했다. 전통과 새로움, 형상과 서사라는 양날 사이에서, 도도하고 단단한 권위의 영역들 사이의 그 첨예한 경계에서, 나는 한결같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원적이고 다각적이며 다층적인 힘들, 그들 간 길항적 세력관계의 역동적 에너지에 긍정적 시선을 보내왔다. — 허진

허진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동덕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8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제1회 한국일보 청년작가 초대전 우수상, 2001오늘의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목을 공1001  - copy

<空1001> 나무에 유채 117×65cm 2010

Lee Mokul 이목을

이목을은 생의 수행자이다. 누군들 허투루 생을 영위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이목을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그는 극사실회화의 선두주자였다. 우리의 전통적 생활 매재인 소반이나 도마에 수저, 생선, 과일 등을 실체보다 더 실감나게 그렸다. 단순히 잘 그렸다기보다도 대상의 기운이 생동감 있게 와 닿는 그런 작업들이었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작업의 큰 전환기를 맞았다. 불행하게도 첫째 이유는 사물을 겨우 분간할 정도로 나빠진 시력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돌파구로 택한 작업이 <스마일 시리즈>이다. 모든 화면은 그 웃음으로 다 채워져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웃음 속에서 다양한 생의 표정들을 본다. — 류석우

이목을은 1962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4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뉴욕, 세네갈, 베이징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허욱 5

< 첨첨(添添) 사이 pierrot1>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cm 2013

Heo Wook  허욱

허욱은 듣지 못한다. 나는 이 말을 여기서 하기가 꽤 조심스럽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을 논할 때 작가의 신체적 한계조건을 밝힐 경우, 작품의 관람자(독자)는 우선 그 조건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허욱의 미술을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며, 반대로 이데올로기화된 정치적 올바름으로 ‘쿨하게’ 허욱의 작품이 내포한 특수성을 외면하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왜곡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추상의 선, 원색, 덩어리, 이것들의 변주와 반복과 이합집산. 허욱은 자신의 들을 수 없는 세계 안에서 가촉성과 가청성과 가시성으로 충만한 세계를 구현하며, 말하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 것들(선, 색, 부피)의 촉각적이고 시각적인 현전(現前)을 토대로 그 고요한 ‘있음’을 작품으로 현재화한다. — 강수미

허욱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갤러리 퓨전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8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뉴욕, 싱가포르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다양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했으며, 2007 아시아 문화도시 거주 프로그램 광주 의재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했다.

 

박경묵 무진풍

<무진풍> 한지에 먹, 채색 40×109cm 2013

Park Kyoungmug 박경묵

삶과 예술을 행함에 있어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으며,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묻는다. 삶과 예술의 진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상대적인 것에 대한 존중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진리에 대한 사고는 만물이 무한히 변화하고 또 생성하는 원리를 깨닫는 것에서 싹튼다다. 조금 천천히 진행될 순 있어도 정지된 것은 없음을 인식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발자국이 없다 하여 걸음이 없었음이 아닌 진의(眞意)를 파악하는 것이다’. — 박경묵

박경묵은 198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동아대학교 회화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2007년 꿈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회의 개인전과 2014년 갤러리 AG에서 정희석과 2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삼청미술제 우수상, 겸재정선기념관 내일의 작가 한국화 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잠실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2

박대성 천지인 300x240종이에 수묵담체 2011년작

<천지인> 종이에 수묵담체 300×240cm 2011

Park Daesung  박대성

소산 박대성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게다가 자신의 팔 한쪽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예술의 속성은 고행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작가의 고통이 클수록, 또 그 고통을 잘 소화하면 할수록 예술은 싱싱해진다. 소산 예술의 특성은 바로 극한상황을 넘고 피어난 야생화와 같다. 그 꽃은 바람과 천둥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오래간다. … 소산 먹 그림의 특징은 무엇보다 선(線)을 중시한다는 점, 더불어 원(圓) 방(方) 각(角)의 묘체를 자유스럽게 구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원각(圓角)의 원리, 곡선과 직선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 우주의 원리는 숨어 있다. — 윤범모 박대성은 1945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마치고 자연을 스승삼아 그림을 그렸다. 1974년 대만 공작화랑 초대전을 시작으로 서울, 도쿄, 파리, 베이징 등지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1979년 제2회 중앙미술대전 대상, 2006 문신미술상, 2010 금복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장지에 채색 91×73cm 2012

<경종을 울리다> 장지에 채색 91×73cm 2012

Lee Universe 이우주

‘우물 안 개구리’를 소재로 현대사회 속에 개인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 표현한다. 또한, 자연의 다양한 실험적인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이 생각하는 생물은 어떤 의미인지, 같은 환경에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생물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 이우주 이우주는 1989년 태어났다. 조선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보문미술대전 우수상, 어등미술대전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잠실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65×50cm

<생각에 잠겨있는 삐에로> 캔버스에 아크릴 65×50cm

Dennis Han 데니스 한

그는 어디에서건 틈만 나면 스케치를 한다. 생각해보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지 못한 아이, 그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서 일반인이 알아볼 수 있도록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의 그림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여 연습한 숙련의 기미가 보이고 아름다운 색상 속에 불완전한 자유로움이 있어 바라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즐겁게 해준다. — 심현지 데니스 한은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1999년부터 파리에 정착한 후 서울 피쉬갤러리, 파리 유네스코갤러리, 뉴욕 유엔본부, 서울 꿈의숲 아트센터,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2013 평창 동계 스폐셜 올림픽 개최기념 <아트링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종이 위에 색연필, 마카  25×36cm 2014

<베이터벤 타고 임진각까지 숨은그림 찾으세요> 종이 위에 색연필, 마카 25×36cm 2014

Kim Donghyun 김동현

발달장애인으로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김동현은 열차, 기차역, 전철 노선 등을 주로 그리지만 그것을 외워서 그리는 것을 넘어 그림 속에 자신이 상상해낸 독특한 이야기를 넣는다. ‘벽 타고 친가집 가는 선수’, ‘만리장성 고속도로’, ‘바둑돌이 깔린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책상’, ‘수백 개의 재미있는 이름이 담긴 전철역’ 등 위트 넘치고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그의 작품에 녹아 들어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노트에 그려나갔고, 최근에는 노트의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과감한 구도와 색감으로 공간을 구체화하고 있다. 김동현은 1993년에 태어났다. 2013년 서울시 북부병원에서 첫 개인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행>을 열었다. 그문화갤러리, 경기도미술관, 일본 하나아트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비영리 예술단체인 로사이드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김태호  종이에 마카 38.5×52.5cm 2013

김태호 <지동시장> 종이에 마카 38.5×52.5cm 2013

Kim Taeho 김태호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김태호는 새, 물고기, 얼룩말과 같은 동물과 자전거 타는 사람, 주로 한 방향성을 가지고 무리지어 이동하거나 또는 그저 무리지어 한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다. 종이 한가득 여백 없이 펼쳐지는 이 무리의 풍경 속에서는 작가가 그만의 속도로 관찰한 개체들의 특유한 자태와 섬세한 표정 그리고 역시 그만의 속도로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채색한 마카펜의 정렬된 얼룩을 발견할 수 있다. 김태호는 1987년 태어났다. 2014년 에프앤아트스페이스에서 4번째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안공간 눈, 경기도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과 <2013 뉴욕 아웃사이더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3

위 왼쪽 · 장님코끼리만지기 체험

위· 장님코끼리만지기 체험
아래 ·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열린 시각장애작가 김준범, 김영빈의 북촌사진전 <두 사람의 눈> 광경 2014

 

ANOTHER WAY OF SEEING 

우리들의 눈

미술은 시각이 아니라 오감이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우리들의 눈’은 (사)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를 중심으로 미술의 사각지대에 놓인 시각장애인들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예술 프로그램이다. ‘우리들의 눈’ 디렉터이자 작가 엄정순은 1996년부터 ‘본다’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시각장애를 또 다른 창의적 가능성으로 바라보며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을 만나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엄 디렉터는 “시각장애인들과 소통하면서 역으로 미술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그러고는 “시각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느끼고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시각장애라기보다 시력장애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들의 눈’은 서울맹학교, 한빛맹학교 등에서 매주 미술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특별 워크숍을 통해 살아있는 미술 체험 프로그램을 시도한다. 뮤지엄 투어는 다리 힘 기르기, 흙 작업은 손 힘 키우기, 요리하면서 입맛 키우기 등 일상의 경험을 미술로 풀어보면서 그 과정에서 내면의 힘을 발견한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중심 내용이다. 엄 디렉터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장애라는 이름 뒤에 숨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며 “장애인뿐 아니라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와 마주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일어서는 굉장한 힘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18년간 다양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어느새 우리들의 눈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 중에 자연스럽게 작가 활동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미술 수업을 통해서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하고 어릴 때부터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이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미술이 단순히 과목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친숙한 것이 되고 있다. 실제로 한 학생은 현재 미술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엄 디렉터는 ‘우리들의 눈’을 통해 결국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 창의적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애를 통한 고유한 시각이 발전되면서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 아니라 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창의적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들의 눈’은 다양한 전문 분야와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협력해 3D 프린터를 활용한 시각장애인 교재를 제작하고, 삼성애버랜드패션과 함께 패션 클래스도 운영하고 있다. 엄 디렉터는 “‘우리들의 눈’이라는 미술컨텐츠가 동시대에 혁신적인 기술과 만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며 시각장애와 연결할 수 있는 다양한 미술의 가능성을 제안했다.
www.artblind.or.kr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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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아트센터스튜디오 광경

에이블아트센터스튜디오 광경

샘터갤러리에서 열린 에이블아트센터 소속작가의  전시광경

샘터갤러리에서 열린 에이블아트센터 소속작가의 <같이놀자> 전시광경

ABLE ART CENTER

에이블 아트센터

장애 예술, 가능성의 예술

2010년 설립된 에이블아트센터는 장병용 목사가 장애를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무궁무진한 예술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원천으로 인식하고 장애예술가, 특히 발달장애를 가진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장애인문화예술 공간이다. 전문예술강사가 진행하는 미술, 도예, 음악,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자들의 표현능력을 향상시키고 이들의 작품이 전시, 공연 등의 통로를 통해 대중에 소개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조민서, 박태현, 이찬규, 최봄이 등이 센터 소속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혜정 에이블아트센터 실장은 장애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함께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공교육 안에서 지원이 없다. 발달장애인들은 스스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아트센터는 아트 교육기관인 동시에 장애 작가와 평생 같이 가는 개념으로 울타리가 되어야한다.”
이 실장은 센터의 슬로건이 “상상력은 장애를 넘어선다”라며, “현재 센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은 20대 초반으로 지금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지만 10년 뒤에는 장애라는 딱지를 떼고 젊은 작가로서 미술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작업을 관심 있게 봐주는 젊은 기획자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센터는 미국 오클랜드에 있는 장애 예술가 전문 스튜디오인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처럼 작가들이 센터의 운영 주체로서 참여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밝혔다.
www.ableart.or.kr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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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환  종이 위에 연필, 색연 21×29.7cm 2010

홍석환 <드로잉시리즈> 종이 위에 연필, 색연 21×29.7cm 2010

RAW+SIDE  

로사이드

날 것의 예술,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예술공동체

2008년 설립된 비영리 예술단체 로사이드는 한 작가가 자폐를 가진 소년의 노트에 그려진 낙서가 장애에서 비롯된 증상으로 여겨져 버려지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이 단체는 미술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서 협업을 추구해 참여 예술가의 관심에 따라 정체성을 고민하는 열린 구조를 띠고 있다. 단체의 구성원은 크게 ‘운영 스태프’와 특정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공동 창작자’와 ‘후원자’, 그리고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독자적으로 창작하는 ‘날것의 아티스트’로 이뤄지며 곽규섭, 김동현, 홍석환 등 대부분 발달장애를 가진 작가들이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고재필 로사이드 공동대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장애인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 작가 모두가 동등한 구조 아래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현재 로사이드가 진행하는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서울시 북부병원과 협약을 맺고 작가들이 환자들의 얼굴을 그리는 ‘함께하는 풍경’, 성북문화재단 지원으로 지난해에 이어 문화를 공유하는 경험을 나누는 ‘어떤 아트투어 프로젝트’ 등이 있다. 최선영 아트 스태프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선보이는 전시도 중요하지만 출판, 영상, 퍼포먼스, 아트상품도 등 날것의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방식의  창의적인 활동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rawside.kr

이슬비 기자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4

창작 본질은 아름답다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

다르다는 것이 잘못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장애를 가진 예술인의 창작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식상한 얘기지만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양성을 뜻한다. 따라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양성 가운데 장애인이 있는데 장애의 다름을 틀림으로 보아 편견이 생겼고 그로 인해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이중적이어서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다만 여기에서는 장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예술 분야에 존재하는 차별 문제에 국한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장애인의 예술 활동과 예술 활동을 하는 장애인에 대한 정의부터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장애인예술이라고 하고 예술 활동을 하는 장애인을 장애예술인으로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인데 현재는 장애인예술을 ‘에이블아트’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에이블아트는 일본에서 시작하였는데 장애를 불가능으로 보는 인식에 반해서 가능성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장애인예술을 VSA(very special art) 매우 특별한 예술이라고 칭한다. 우리는 한국의 정서에 맞는 용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장애인예술의 영어 명칭을 ‘Being Art’로 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장애인예술이 존재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고 장애인예술의 본질이 비장애인의 예술과 다르지 않고 예술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예술이 주류예술계에서 소외되는 것은 장애인예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기 때문이다. 장애문화예술인실태조사(2007)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애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묻는 질문에 매우 낮다 35.3%, 다소 낮다 24.9%, 그저 그렇다 27.5%로 87.7%가 사회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바라보는 인식이 매우 이중적이란 것을 알 수 있는 연구가 있다. 박혜신(2010)에 따르면 같은 공연을 감상하였어도 예술인이 장애인임을 알 때 더 감동을 받고 흥미롭게 본 것으로 나타났지만(73.3%) 예술인이 장애인임을 알 때 예술인의 전문성 평가 항목의 평균은 아주 낮았는데 이것은 장애예술인을 전문예술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인식 때문에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이 예술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고 그로 인해 장애예술인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
하지만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 경험에 나타난 구성요소인 ‘예술과 만남’, ‘창작 활동 몰두’, ‘고통스러운 작업’, ‘나는 예술인이다’의 본질은 매우 순수하고 열정적이기에 아름답다. 장애인예술의 아름다움은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역사 속의 장애미술인
옛날에는 장애인이 없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시작한 작업이 역사 속의 장애위인들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물로 발간된《   한국장애인사》(정창권 외, 2014)에 조선시대에 활동했던 66명의 장애위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66명을 직업별로 구분해보면 예술가가 38%를 차지해 가장 많았다. 조선시대 장애인이 예술적 감각이 더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장애 때문에 과거시험을 치르고 벼슬을 하는 제도권 내 진입이 어렵다보니 혼자서 할 수 있는 예술을 선택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장애예술가 가운데 미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을 소개하면 시각장애 천재 화가 최북이 있다. 최북(崔北)은 영조·정조 시대 인물로 조선후기 직업 화가였다. 중인(中人) 출신이었으며 체구가 작고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애꾸눈 화가라 불렀다. 최북은 예절이나 관습에 구속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유스럽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그의 행동은 기행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다. 빼어난 그림 실력을 지닌 최북은 젊은 시절부터 금강산·영동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수준 높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까닭에 생동감이 넘쳐 보는이로 하여금 그림 속에 빠져들게 하였다. 최북은 강한 개성을 지닌 작품으로 당대를 사로잡았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 이정(李霆)은 조선중기 왕실 종친으로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대나무 그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묵죽화의 대가이다.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으며,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에게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하면 화가로서의 생명이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절단된 팔이 이어졌고, 그림 실력도 이전보다 더욱 뛰어났다고 했다.
조선의 명필 조광진(曺匡振)은 조선후기 서예가이다. 평양에 살았으며, 호가 눌인(訥人)인데 말을 더듬는다 하여 얻게 된 호로, 조광진은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언어장애인이었던 조광진은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 , <눌인서첩(訥人書帖)>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조광진은 큰 새끼줄로 붓을 어깨 위에 동여매고 큰 걸음으로 걸어다니며 힘 있게, 그리고 섬세하게 글씨를 썼다. 그의 열정은 글자의 신비한 조화를 이루어냈고 사람들은 이에 탄복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방을 유학하며 서체를 배운 조광진의 열정과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는 당대 명필가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조선 사람들과 청나라 사람에게까지 실력을 인정받고 아낌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장애예술인이 활동을 했는데 근대와 현대에 장애예술인이 없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시기라서 장애예술인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아 장애예술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에서 발굴한 장애예술인 가운데 고인이 된 근·현대 장애미술인 중 미술교과서를 만든 화가 구본웅(具本雄)은 190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우연한 사고로 가슴을 다쳐 척추장애를 갖게 되었다. 구본웅은 경신학교와 일본의 단천미술학교, 태평양미술학교, 동경미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그는 경신학교 졸업 후에 조각작품 <자화상>으로써 선전 특선을 차지했다. 동경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는 국내 화단에 처음으로 포비즘의 화풍을 가지고 왔었다. 일제강점기의 침묵 기간 구본웅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조선미술사》의 집필이었다. 당시 문교부 편수관으로 참가하여 최초의 중등미술교과서를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출발을 기도했지만 피난살이에 건강을 해쳐 1953년 2월 47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침묵 속의 횃불, 화가 운보 김기창은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17세에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워 6개월 만에 <판상도무(板上跳舞)-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 1956년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수도여자사범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백양회(白陽會)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김기창은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만 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다.
한국의 로트렉 손상기는 1949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입상하며 1981년 동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손상기는 세 살 때 앓은 구루병으로 척추장애를 갖게 됐다. 그는 가난과 외로움을 그림과 글로 승화시킨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1980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공작도시> 시리즈이다. <공작도시>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노인,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를 소박하지만 강한 필치로 표현한 작품이다. 1988년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건강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최근 들어 그의 예술세계가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현재 장애예술의 방향
우리나라에서 장애에 대한 복지는 1981년 장애인복지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장애인미술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이 수면으로 드러났다. 장애인미술은 두 가지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하나는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이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은 청각장애인 화가들이 1988년에 농미회를 결성하고 한국농미회전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을 손이 아닌 다른 신체를 사용해서 그리는 구족화가들이 1991년부터 세계구족화가협회 한국지부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동양의 서예에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한 수묵크로키를 개발하여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한 의수화가 석창우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석창우는 감전사고로 두팔을 절단하고 의수를 끼고 있는데 전시회는 물론 시연 등을 하며 왕성하게 활동을 한다.  중학교 2학년 미술교과서에 그의 작품 <세종대왕>이 수록되어 화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장애인미술은 초창기에는 화가 개인이 개최하는 개인전시회가 많았는데 장애유형별로 또는 작품장르별로 소규모 활동(소울음, 그림사랑, 농미회 등)을 해오다가 1993년 한국장애인미술협회를 구성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인가를 받은 후 활성화되어 회원이 1,000여 명에 달하고, 한중일장애인미술교류전을 개최하는 등 장애인미술을 국제화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장애예술인들은 사대부들과 소통하며 최고의 경지에 올랐고, 근현대에 활동한 장애예술인은 오로지 열정과 노력으로 예술 주류계에 진입하여 실력을 인정받아 일반 예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예술인으로 당당히 활동하였다. 이에 반해 최근 장애예술인들은 언론에 자주 모습을 보여 인지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예술인으로서 그들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장애인인데 예술 활동을 한다는 사실에 격려를 보내는 차원이라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장애예술인은 주류 예술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에 머물러 소외를 당하고 있다.
라이어슨 대학교(Ryerson University)에서 제시한 장애인예술 발전의 3단계를 보면 첫 번째 단계는 장애예술인 자신이 예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장애인 커뮤니티에서 장애예술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장애예술인의 활동이 주류 예술에 포함되는 것인데 우리는 첫 번째 단계인 장애예술인의 정체성조차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애인예술의 욕구만 분출되었다.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장애예술인(방귀희, 2013)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장애인예술의 정책이 필요한데 그 정책방향을 다음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1800년대 중반 독일에서 활동한 헝가리 출신의 프란츠 리스트와 폴란드 출신의 프레드릭 쇼팽에 관한 일화이다. 리스트 피아노 연주회가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연주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촛불을 켰는데 놀랍게도 연주를 한 피아니스트는 리스트가 아니라 쇼팽이었다. 당시 리스트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쇼팽은 연주회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무명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리스트가 친구인 쇼팽을 위해 자기 연주회에 쇼팽을 초대해서 쇼팽의 연주 실력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리스트는 관객들을 향해 “신사 숙녀 여러분, 깜짝 놀라셨죠. 처음엔 연주를 한 사람이 제가 아니어서 놀라셨을 것이고, 나중에는 저보다 훨씬 감미로운 연주에 놀라셨을 겁니다” 라며 쇼팽을 칭찬하였다. 이 일로 리스트는 미담의 주인공이 되었고, 무명의 쇼팽은 돌풍을 일으켰다. 쇼팽은 야상곡으로 피아노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며 오늘의 우리들은 리스트보다 쇼팽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만약 리스트가 쇼팽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쇼팽의 성공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리스트처럼 무명의 예술인을 지원하는 것이 유명예술인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가 되었으면 한다.
이에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장애예술인이 예술계 주류사회에 편입할 수 있도록 예술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기성예술인들이 재능있는 장애예술인들의 멘토로 예술 활동을 지지해주는 예술계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장애예술인에게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균등하게 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창작지원금제도로 창작 동기를 부여하고 출간이나 전시회 그리고 공연의 일정 비율을 장애예술인에게 할당하는 쿼터제도를 마련하여 장애예술인에게 발표의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런 지원을 통해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 장애예술인의 자립이 가능해지고 정부 국정 목표의 하나인 문화융성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

위.최북 <메추라기> 비단에 채색 24×18.3cm 고려대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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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회장 김충현

“장애인미술에 관한 관심이 절실하다”

그동안 협회에서 집중한 사업은 어떤 것이 있는가?  한국장애인미술협회는 1995년 창립해 올해 햇수로 20년을 맞았다. 화가 방두영이 초대회장을 맡아 혼자서 11년이나 꾸렸고, 저는 1996년에 협회에 참여했다. 회장을 맡은 지는 8년째다.
장애미술인의 역량 강화를 위해 교육프로그램을 7년째 운영하고 있다. 5년 전부터 문광부  지원으로 2년 동안 교재를 개발했고, 3년 전부터 장애인 미술강사 파견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협회 회원이면서 미술강사 자격이 있는 경우 공모를 하면 장애를 가졌지만 강사로 활동할 수 있다. 올해에는 20명을 파견한다. 최근 2년간 중증장애미술인을 위한 전동이젤을 보급해왔다. 창작발표 기회를 위해 다양한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 <장애인 미술가의 희망 축제>, <대한민국 장애인미술대전>과 함께 5년 전부터 <한중일 장애미술교류전>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6월 25일부터 31일까지 홍익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월에 .
장애미술인에게 복지와 예술의 비중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과거에 비하면 장애인 복지 수준이 향상된 편이다. 이제 장애인 스스로도 찾아 나서야 한다. 장애인의 경우 예술 지원과 복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복지 없는 예술이 어딨냐. 그러기 위해서는 운영 주체도 일원화해야 한다. 현재 장애인 관련 부서가 노동부, 안행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부 각각에 흩어져 있는데 장애인청을 만들어 한곳에서 운영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단체 위주로 지원금을 줘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하는데, 일본은 장애인에게 개인 연금을 주고 스스로 돈 내고 당당하게 배우라고 한다. 우리는 어렵게 행사를 벌여도 작가들이 작품을 내고 나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전시에 못 오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졌는데 재단 정관상 예술가로 인정받는 자격요건이 까다롭다. 장애인 관련 사업은 하나도 없다.
장애인미술 관련 행사가 많은데 일반 미술계와 장애인 미술계의 간극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 작가들도 먹고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비교하기 힘들다. 전체 문화예술예산 중에 비장애인 예산 대비 장애인 예산 비중은 1%도 안된다. 편견도 심하다. 회원 중에는 국전에서 입상해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있지만 그나마도 못 낀다. 그 속에서도 완전 아웃사이더라 어울리기가 힘들다. 그런 면이 제일 안타깝다. 그래도 장애인미술 분야가 문학, 연극, 무용 등 타 분야에 비해서 굉장히 활성화된 편이다.
장애미술인에게 장애라는 딱지를 떼고 작품만 보는 것이 오히려 역차별이란 이야기를 하셨다. 작가가 장애인임을 밝히고 이 그림은 장애인 작가가 그렸다고 왜 하겠나. 그냥 예술로 순수하게 편견 없이 봐주면 그렇게 밝힐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내가 협회 회장이지만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미술인들이 상상력과 초월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시야나 시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협회를 운영하면서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장애인 문화예술 단체들이 활동하는 데 보장돼 있는 것이 없다. 우선 전문인력이 부족하다. 정부에서 한 사업당 인건비 100만 원을 지원하지만 1년 내내 주는 것이 아니라 9~10개월에 한 번 주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전문 인력이 1년 넘게 근무하기가 힘들다.
앞으로의 계획은? 매년 20여 개의 제안서를 낸다. 그중에서 3분의 1이 선정돼 진행하는 식이다. 해마다 제로에서 시작한다. 장애인 교육사업은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트페어는 국가에서 따로 지원하는게 없어 계속 갈 것이다. 올해는 처음이라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내년에는 한층 활성화시키고 싶다. 2015년 구 예총건물 리모델링이 완료되면 그곳에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개관한다. 스튜디오, 전시장, 발표 공간, 사무실, 자료실 등으로 구성된다. 내년에 사무실이 그곳에 입주할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에서 열린  광경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에서 열린 <2013년 한중일 장애미술 교류전> 광경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5

예술은 경계가 아니라 관계다

김최은영  A-아트페어 예술감독

얼마 전 작고 50주기 기념전이 열린 작가 ‘손상기’에게 우리는 그 누구도 ‘장애’예술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물론 ‘쿠사마 야요이’도 마찬가지로 ‘여류’작가, ‘장애’작가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 <제1회 장애예술인창작아트페어>라는 작위적인 제목의 페어를 준비하여 왜 굳이 ‘장애’라는 수식어가 필요한지 몸으로 알아가고 있다.
장애예술가라 일컬어지는 작가군은 어쩌면 신진작가, 지역작가나 여류처럼 특정단어의 보호장치가 필요한 또 다른 이름의 작가군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들의 궁극 목적은 수식어를 삭제함에 있다.(사실, 필자는 이런 식의 분류법이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진부한 설명이 오히려 이해를 돕기에 용이할 듯하여 사용하니, 지나친 오해는 없길 바란다)
신진작가는 기성작가의 예술적 능숙함에 상대적 가치절상의 위치에 놓이기 쉽다. 지역작가는 문화중심권인 서울(중앙이라고도 불린다)작가에 비해 발표의 기회나 장(場)이 계량적으로 적다는 박탈감을 안고 있다. 장애예술가는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 인식적 소외 속에서 위치한다. 오늘의 사회는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책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현실적 결과물에서 드러난 문제항목이 역으로 주장되어 사실이 정책에 반영되었거나 소수 식자의 배려로 마련된 새로운 관계항이다.
천재를 제외한 대다수의 신진 작가가 활동 10여 년의 작가와 동등하게 비교, 분석, 판단 대상이 된다면 순위 안에 들어 지원을 받고, 작품 활동의 도움을 받겠는가.
어떻게 입으로 붓을 물고, 발가락으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평등’이란 명목에 같은 평가의 잣대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 앞에서 ‘장애’를 떼고 ‘예술’로만 말하자 하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고 ‘역차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시대의 예술가는 필요이상의 정규교육과정(미술교육에 한정)을 요구받는다. 전시도록에서 빠지지 않는 작가 약력의 영문인 CV는 Curriculum Vitae로 번역하자면 이력서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이 글에서 학력타파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애예술가 대부분은 후천적 장애, 다시 말해서 전혀 다른 분야의 정규교육을 받고 장애 전 사회생활을 했거나,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는 선천적 장애(자폐, 정신지체)로 미술교육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대다수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들은 불의의 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입고 고뇌의 시간을 거쳐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을 택한다. 여기서 이들의 선택이 절대적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장애 이후의 수많은 재활교육이나 재교육을 통해 다른 직업군을 선택하는 경우도 상당하다는 점이 장애예술가들이 왜 하고많은 직업 중에서 미술을 선택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며, 이들의 선택은 장애가 없이도 일반교육에서 전문적인 미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술전공을 선택한 무수한 미술인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이들의 절대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술교육 환경은 열악하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파운데이션 없이 테크닉을 배우고, 개념을 훈련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대상을 예쁘게 묘사하거나 기성작가의 그림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어 오늘 한 장의 만족스러운 자위로 작품의 수를 채워나가기 일쑤였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진짜 문제는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이 지점부터 진짜 예술가로 서기 위한 더 체계적인 교육이 뒷받침되던가, 아니면 그 만족의 지점을 마침표 삼아 아마추어 작가지만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나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분류는 스스로 행하기 매우 힘들다. 이때부터 행정과 교육체계의 적극적 도움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들을 이끌며 예술가와 취미미술가, 양쪽의 삶이 있음을 제시했어야 한다.
입문의 방식은 예술장르마다 조금씩 다르다. 언론의 공모에 당선되거나(문학), 불규칙적이지만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거나(미술), 해당 분야에서 어시스턴트를 거치며 본인의 시나리오로 수장이 되는(영화)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장르의 예술이든 아마추어와 프로 집단은 존재한다. 유독 장애예술작가(미술)만이 아마추어와 프로가 혼재되어 있다.

장애예술을 위한 인큐베이팅
필자는 현실적 범주 안에서 생각하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한 신진, 소외, 학습, 분류법 등을 떠나 오늘의 장애예술을 보기로 한다. 인큐베이팅(incubating) 없이 독자적으로 유지해 온 장애예술가 집단을 미적 평가 기준에 의거, 외면하거나 보호 속에서 무작위적 옹호론을 펼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에게 방치되어 홀로 버텨온 세월에 대해 기초가 없으니 ‘제대로’라는 명목으로 비장애의 잣대를 들이대며 걸음마부터 다시 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물리적 나이로는 기성작가의 연령을 가지고 있고, 전시 횟수나 수상 경력 등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여온 사투의 결과물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련된 아트페어다. 소모적이며 의례적인, 그들만의 모임으로 끝나는 전시 말고, 현실적이며, 구현가능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인큐베이팅을 객관화하여 제공하는 것. 아트페어를 통해 전시를 기획하는 갤러리, 혹은 전문 기획자에게 그들의 면목을 제시하는 것. 성과를 통해 현실의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것. 단 한 명이라도 뛰어난 작가를 발굴하여 그들의 모델링으로 삼게 하는 것. 한 단계를 끝내야만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식 학습법이나 적용론이 아닌 동시에 골고루 끌어올리는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제1회 아트페어의 실제 목적이다. 동시에 기성작가와 협업을 통해 교집합으로 가지고 있는 조형적 감수성을 교류(access)하고, 장애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작품만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 충분히 승산 가능한(able) 지점을 짚어주고 싶었다.
결국, 결론은 관계항이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바라보는 지점과 소통의 고리들. 관계라는 예술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다차원적 지점과 문제들의 관계항 속에 그들을 자연스럽게 용해하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분명하게 나뉘어 있어 불편했던 그들과 그들의 예술이 결국 한 덩어리, 한 가치로 섞여 있을 때 분류도 없고, 나뉨도 없어 불편하지 않게 되는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룬 것과 부족한 것. 반성과 성찰. 성장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며,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다. 부족한 사회의 역할과 무관심 또한 더 이상 수준 높은 작품을 할 수 없는 그럴싸한 핑계나 불만이 되어서도 안된다. 장애가 있건 없건 이 시대의 예술가는 언제나 사회의 무관심과 미술계가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노력’과 싸워왔다. 그 지루하고 반복된 싸움 속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는 길은 장애가 있건 없건 같은 길일 것이다. 그리고 ‘승자’가 된 후 그 앞에 ‘여류’작가 아무개, ‘장애’작가 누구씨로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그림 앞에서  보다 객관화할 것. 타자에게 들킨 예술작품의 부족한 점은 작가가 더 먼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필자다. 도망가지 말고 화면과 한판 정면승부를 펼칠 것! 그들은 손을 잃었을 때도, 떨리는 사지(四肢)를 가지고도 붓을 들지 않았던가. 삶과 작품을 분리하여 볼 수 없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삶이 이미 예술인 그대들이다. 그대들의 삶의 열정만큼 그림의 열정을 객관적으로 보여달라. 그들이 펼치는 내러티브(narrative)에 흠뻑 빠져 미술계가 허우적거리도록!  ●

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 전시광경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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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제1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 6.9~13 문화역 서울284

장애미술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

장애 미술가의 작품 판로 개척과 장애 예술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가 6월 9일부터 13일까지 문화역 서울284에서 그 첫발을 내디딘다. 아트페어 전시, 콜라보 전시, 특별 전시, 미디어 전시 등의 다양한 전시 공간이 구성되며, 별도의 경매 프로그램도 진행하여 장애미술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을 마련했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88명의 장애미술가와 관훈갤러리, 갤러리 담, 갤러리 이레, 갤러리 터치아트, 스페이스 오뉴월,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등 국내 22개 화랑과 전시공간이 공동으로 작품을 홍보하고 판매를 진행한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지적장애를 가졌지만 꾸준한 작품 활동을 선보여온 작가 데니스 한과 갤러리 한옥이 전속 계약을 맺고,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김충현이 미술 전문 출판사 ‘헥사곤’과 출판계약을 체결한다.
이번 행사에는 장애작가뿐 아니라 김명범, 김태은, 노동식, 로와정, 박성연, 변대용, 하원 등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비장애 작가들도 참여한다. 권기수, 한진수, 장승효 등은 장애작가와 협업을 통해 장애와 비장애가 아닌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작가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특별한 결과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행사의 예술감독을 맡은 전시기획자 김최은영은 ‘장애 예술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아트페어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혔다. “실질적으로 장애작가는 대중에게  인지도가 낮다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장애 작가나 비장애 작가나 열정은 똑같다.” 김 감독은 그동안 장애 미술에 관한 행사가 많았으나 비효율적으로 진행된 측면이 많다며 이번 아트페어는 미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마켓을 통해 장애작가와 비장애작가의 간극을 현실적으로 좁혀보자는 취지에서 개최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장애인의 경우 작품 값도 제대로 매겨져 있지 않고 들쑥날쑥하며 전체적으로 하향조정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의 작품도 실력에 의해 정당하게 값을매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장애작가와 화랑의 긴밀한 협조 체계가 마련돼  행사 종료 후에도 장애작가들의 예술 활동과 미술시장 진입이 수월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www.a-af.or.kr

 

권기수+김태호 콜라보레이션 영상 스틸컷 2014

권기수+김태호 콜라보레이션 영상 스틸컷 2014

석창우  2014

석창우 <평택 농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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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잠실창작스튜디오 강득주 총괄매니저

 “작가들의 성장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힘쓴다”

잠실창작스튜디오 강득주 (2)

그동안 어떤 점이 달라졌다년 당시만 해도 작업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상황이었개월간 공사를 진행해 스튜디오가 입주.
 현재 입주 작가의 구성은 어떻게 됐나? 2013년 8월 입주한 6기 작가는 작가 12명, 기획자 1명으로 구성됐다. 지난해부터 기획부문을 신설했다. 기획자의 경우 현재 비장애인이다. 장애에 관심있고 활동성 있는 기획자가 늘어야 작가들도 성장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우 장르가 한국화, 서양화, 사진, 설치, 돌조각 등 다양하다.
작가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로 한정하고 역량, 성장가능성을 중요시한다. 작업계획서를 받아 그 계획성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본다. 더불어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중요하다. 장애를 가진 경우 움츠려 있어서 소통이 활발하지 않고 사회성이 부족할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작가들이 동시대미술에서 융화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등 일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와는 다른 리그로 보는 것 같다. 실제 장애를 가진 작가와 이야기해보면 작업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데 항상 장애인이라는 꼬리표가 먼저 붙으니까 스스로 위축되는 면이 있다. 그걸 해소해야 하는데 쉽지 없다. 또 개인적인 성향 차이도 있고, 선천적 장애인보다 후천적 장애를 가진 경우 성인이 되어 뒤늦게 미술을 시작하거나 대학에서 전공을 안하다보니 동시대미술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클래식한 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도록 교육해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가 쉽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장애인 작가들끼리 모이는 것 같다. 비장애인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나, 협업도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젊은 작가들은 스스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기획자들도 장애를 가진 작가를 주목하고 작가 스스로도 밖으로 한발 더 나가서 비장애 작가들과 융화될 수 있는 활동을 많이 하길 바란다.
현재 스튜디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환경적 인프라는 충분히 잘 갖춰놨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씨티은행 후원을 받아서 사진 기자재, 전기 가마, 대형 이젤, 판화 프레스 등 기자재도 많이 구비했다.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 먼저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레지던스 공간의 1회 프로젝트 비용이 이곳의 1년 예산에 해당한다. 예산을 늘려 직원도 늘어나야 작가들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다. 현재 저 포함해서 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케어하려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들도 더 성장해서 모범적 사례를 보여줘야 스튜디오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 육성하고, 장애를 가진 작가와 비장애 작가의 교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는 이곳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을 받아야 예산도 지원되고 새로운 서포터도 생긴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내년에는 서울시창작공간 통합공모에 합류한다. 7기 입주작가부터는 어떤 식의  변화가 생길지 고민이 많다. 그리고 국제적인 교류 프로그램, 장애예술 관련 세미나 포럼을 기획하는 등 하고 싶은 일은 무궁무진하다. 예산이 뒷받침 된다면 신진기획자 인턴십을 통해 장애예술가 대상 기획전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

이슬비 기자

구족화가 김경아의 작업실 광경

구족화가 김경아의 작업실 광경

 

홍석민  합성수지 14.5×9cm

홍석민 합성수지 14.5×9cm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6

거울 속의 나를 보듯 소통하기

최효준  경기도미술관 관장

2012년 가을 경기도미술관에서 <다른 그리고 특별한전>이 열려 한국 미국 일본의 발달장애인의 미술작품 400여 점이 전시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장애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사회 적응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취약했던 발달장애 부문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시였다. 예술적 재능이 빼어난 발달장애인들이 독창적으로 구현한 미학을 바탕으로 전하는 그 다르고도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많은 이가 감명을 받았고 전문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전시의 의도는 각별하였다. 예술적 성취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한국, 미국, 일본의 발달장애인들의 엄선된 작품, 자기몰입 과정을 거쳐 ‘다름과 특별함’을 드러내는 창조적 결과물을 만나는 대중들 내면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하려 하였다. 장애 예술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정규 미술관 전시를 통하여 관련 인프라 구축에 기여하려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장애인 대다수가 재능에 상관없이 예술 창작을 통해 행복을 찾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려 하였다.
예술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회적 예술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경기도미술관이 주관한 이 전시의 한국 측 협력기관은, 2011년 개관하여 장애예술가들의 독보적 문화창작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수원의 ‘에이블 아트센터’와 비영리 소수자예술단체인 ‘로사이드’였다. 미국 측 협력기관은 방대한 수준의 창작 시설과 전시 공간을 갖춘 39년 역사의 장애예술가 전문기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였고, 일본 측 협력기관은 23년의 역사를 가진 장애예술가 전문 지원기관으로 국내에서 왕왕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는 나라 시의 ‘하나 아트센터’였다.
그간 장애인 문화 복지 관련 국내에서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작년에 장애인 문화예술 관련 업무가 종전 문화체육관광부 장애인체육과에서 예술정책과로 이관되었는데 여전히 담당 두 분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근간 장애예술가들의 아트 페어 행사를 치르게 되며, 숙원이던 장애인문화예술센터의 개관 사업을 한국장애인예술협회와 함께 초인적인 노력으로 만난을 극복하고 추진하여 2015년 개관을 앞두고 있다. 수원의 에이블 아트센터는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인 장애 작가 발굴과 지원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요 전시 관련 장애인 교육 프로그램을 위탁 운영하는 등 전문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바가 있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의 정책 추진 등 관(官)주도의 사업 추진과 지원 방식은 분명 낙후된 여건을 비교적 단기간 내에 개선하는 데에 효과적인 한국형 모델이다. 그런데 그것은 절실히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아 보인다. 사실 바람직한 것은 앞서 말한 미국, 일본, 그리고 수원 에이블 아트센터 사례에서 보듯 우리도 속히 민간 주도의 장애인 예술 진흥 인프라를 양적, 질적으로 꾸준히 성장, 심화해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여건을 정책적, 법제적으로 탄탄히 조성해 나아가는 면에서 관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모든 책임을 관에 지우고 늘 관만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아야 할 터, 시민사회와 시민의식의 성숙이 관건이 될 것이다. 결국 대중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대중의 느낌이 바뀌어야 한다. 장애인미술 관련 전시가 본격적으로 더 열리고 널리 관심을 끌어 대중의 느낌이 바뀌고 그래서 “장애는 그저 다른 상태다”라고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라건대 바뀐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 예술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민간 지원이 크게 활성화되고, 그를 위한 여건이 정책적, 법제적으로 조성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효과가 검증된 민간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현재 까다롭고 거의 불가능한 관의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 적극 모색되기를 기대한다. 이 부문에서 효과적인 민관 협치, 거버넌스가 필요할 것이다. 예술 활동, 특히 장애인들이 주체가 되는 예술 활동을 관 주도로 진흥시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 사례를 주목해보자.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특별함
41년 전 플로렌스 루딘스-카츠와 엘리아스 카츠라는 선각자들, 정신과 의사와 예술가 부부에 의해 설립된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는, 당시 함께 설립된 3개의 다른 자매기관과는 다른 발전 과정을 거쳤다. 오늘날까지 존속한 베이 지역의 다른 두 군데 기관 중 니아드 아트센터(NIAD Art Center)는, 미술과 무관한 배경의 디렉터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장애를 가진 작가들이 모본(模本)을 충실히 모사하는 식의 ‘공예’ 개념으로 작업을 하고 있어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와는 확연히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경우, 디렉터인 톰 디 마리아(Tom di Maria) 가 표방하는 대로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의 공동 창작 스튜디오로서 운영되어 자유와 창의의 분위기와 활기와 열정이 온 스튜디오에 넘쳐났다. 장애인 작가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만족감을 표시했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외부 방문객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기쁘게 공개했다. 톰은 그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거나 상품 생산을 위한 단위 공정을 담당하는 등 공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그들과 함께 미술의 본령에 뛰어드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을 비숙련 노동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논리로부터 자유롭고 즐겁게 창의적인 작업에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톰은 그들의 미술을 ‘아르 브뤼’나 ‘아웃사이더 아트’와 같은 이름으로 범주화하는 것도 거부하고 그것이 오직 ‘동시대미술’로 불려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센터에는 많은 작가가 스태프나 자원봉사자로 일하지만, 미술기법을 가르치거나 지도하지 않고, 오직 작가 개개인의 창의적 표현 통로를 열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성공 비결인 듯하다.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창작활동은 그들에게 내적 자유를 찾아주며 장애 극복과 자기실현을 가능케 해주는데. 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과정들이 동시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센터에서는 협력적인 집단 창작 환경이 주효한 듯하였다. 이 점이 놀라웠고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창작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여러 장애 작가가 한 장소에 모여서 개별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어떤 각별한 이점이 있는 듯하였다. 발달장애인 사회에서 통할 행복의 조건, 그것은 ‘협력’의 패러다임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경쟁’의 패러다임을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할 이 시대 이 사회의 비장애인들이 배울 바가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센터 작가 대부분이 학교로부터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들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작가들을 이끌고, 지적으로 도전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이다.

미술 영역의 확장, 일상화, 보편화
디렉터 톰은 지난 10여년간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주된 운영방향을 정하면서 동시대미술계 최고의 기준에 부응했다고 했다. 그 결과 뉴욕의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된 댄 밀러, 주디스 스콧 등 여러 성공 사례가 만들어졌다. 내면의 창의성을 끌어내어 자기실현의 한 과정으로서 예술 창작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할 때, 예술적 재능이 출중한 장애 작가뿐 아니라 예술적 수월성에서 뒤지는 대다수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를 정착시킬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체육으로 치면 사회체육을 진흥시켜 저변이 넓은 피라미드를 만들면 그 정점에 자연스럽게 엘리트 체육이 꽃피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데, 저기능 발달장애인의 경우, 주변의 인정이나 수월성을 기준으로 하는 평가를 떠나서 자기가 좋아서 즐겁게 일상적으로 예술적 표현활동에 몰입하곤 할 때 그 시도와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그때에 모종의 자가 치유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충분히 주어지고 그런 활동이 장려되어야 할 터인데 우리의 경우 특수학교에서 ‘예술성’과 무관하게 그러한 보편적 표현활동을 장려하는 정규 또는 특별 교과 프로그램은 거의 없는 듯하다.
디렉터 톰은 자폐 장애를 가진 작가에 대한 조언을 요청받았을 때 “마음으로부터, 상상으로부터, 꿈으로부터, 걱정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말했다. 그러한 조언은 예술적 재능이 없는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에게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운영될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가정에서나 특수학교에서나 비록 예술적 재능이 없는 학생이라고 하여도 누구나 즐겁게 창의적 예술관련 활동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하고 정책화하는 것을 그 주요 기능의 하나로 삼았으면 하는 기대를 갖는다.
비장애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수많은 백화점의 아카데미에서도, 슈타이너의 발도르프 학교에서처럼 창의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미술수업이 이루어지고, 주체적 활동으로 신체적 정신적 성장을 이끄는 인간 중심의 예술 활동이 보편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름지기 창작활동이란 수월성의 기준과 무관하게 오직 내면의 창의성의 발현으로서 가치가 판단되고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며 창의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개개인의 삶들이 토해놓은 큰 산의 정점에 빼어난 예술적 성취도 자리하게 될 것이다.
뇌과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저술을 통해 밝힌 것처럼 발달장애인의 소통언어는 독특하다. 우리가 그 독특한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들과의 전반적인 소통을 보다 심도 있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먼저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해독’하려 노력하고 그 노하우를 축적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회화적으로 왜곡, 변형, 생략 등의 기법을 썼을 때 비장애예술가라면 의도적으로 그리하였겠지만 발달장애 작가들의 경우에는 실제로 사물을 그렇게 보았고 이해했고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 대로 느낀 대로 표현했을 것이다. 여기서 미술이, 통상적으로는 비장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들의 자기 표현 방식으로서, 의사소통과 감정 전달을 위한 일종의 ‘언어’ 기능을 할 수 있는지가 화두가 된다.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 작가들을 촬영하여 책을 출간한 사진작가 레온 보렌츠타인은 자신이, 장애인들과 자신을 갈라놓는 얽히고설킨 거미줄 밖의 국외자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센터의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통하여 미술은, 그 거미줄을 걷어내고 장애작가들과 비장애인들을 통하게 하여 양자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효과적인 언어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거울 속의 나를 보듯 소통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참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어 소중한 존재이다.  ●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센터  소속 작가 댄 밀러의 작품  그의 작품을 신디 셔먼,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이 소장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센터 소속 작가 댄 밀러의 작품 그의 작품을 신디 셔먼,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이 소장하고 있다.

위.2012년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다른 그리고 특별한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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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발달장애 자녀를 둔 펠트 작가 이재범, 한상미 부부

“펠트회화를 통해 장애를 보듬다”

이재민, 한상미 (2)딸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책 《마냥 7살 송이》(이서원, 2013)를 펴냈다. 이 책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자녀가 장애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부모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노력한 것 같다.
이재범 예전에는 자녀가 장애라는 사실을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송이가 발달상태가 더뎌서 3세 이전에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충격을 크게 받았지만 장애라는 사실을 빨리 받아들인 편이다. 작업을 하는 부모로서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우연히 송이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동안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이 사회에서 송이만 장애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송이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있지만 타 지적장애인들에 해당하는 증상까지 함께 담으려고 노력했다.
한상미 송이는 처음부터 일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서도 초반에는 지적장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했다. 송이 학교에는 특수반이 없어서 특수반을 만드는 문제부터 교육청뿐아니라 교장실, 교무실을 수없이 드나들며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언제 돌발 행동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매일 학교에 가서 교실 앞 복도에 숨어서 대기상태로 있었다. 송이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내가 항상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쉬는 시간에 와서 나를 위로하는 아이도 있고, 송이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물어보는 아이도 많았다. 일반 아이들이 지적장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송이를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데 그림책만한 것이 없다. 아이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보다 글을 쓰는 데 참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의 인식에 변화가 일었으면 좋겠다.
송이는 생각주머니가 다르다는 식으로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할 수 있나?
한상미 송이가 유치원 다닐 때 선생님이 또래 아이들에게 생각주머니라는 표현을 쓰더라. “송이는 너희보다 생각주머니가 작아서 그래.” 실제 지적장애인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주머니 용량보다 작지 않을까. 송이와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 눈에는 이해 안가는 부분이 꽤 많다.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을 못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생각하기에 송이의 경우 포커스를 두는 부분이 엉뚱한 데 꽂혀있다. 예컨대 전교 학생, 선생님의 이름을 모두 외운다. 저희가 생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대용량을 외우고 있긴 하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을 뿐이지 나름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어서 때땔 좌절하지만 재밌는 상황도 많이 벌어진다. 우리는 울상만 짓고 있지 않다. 물론 상황을 인정할 때까지는 많이 슬펐지만 오히려 이 아이 그 자체로 바라보고 함께 생활하다보니 겸손해지고 아주 기본적인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공감하실 것이다.
그림책을 펠트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양모의 따뜻한 느낌에 수공적인 느낌이  더해져 그림책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재범 국내에서 펠트회화는 우리가 처음인 것 같고 해외는 아직 잘 모르겠다. 송이도 의미가 있지만 작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의미를 찾자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업을 계기로 펠트를 회화적으로 평면화하는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17년째 수제 펠트로 작업을 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많은 편인데 국내에서는 펠트를 전문적으로 하는 작가가 5명도 안 된다.
펠트 작업의 매력은 무엇인가?
이재범 펠트는 양털뿐 아니라 머리카락도 재료가 될 수 있다. 웬만한 동물의 털은 다 된다고 보면 된다. 머리카락처럼 불규칙한 동물의 털이 힘에 의해 결합이 되어 엮어진 부조직의 직물이다. 아무리 힘을 가해 분리하려고 해도 찢을 수 없다. 그림책에 사용된 회화적인 표현은 니들펠트라고 해서 한 땀 한 땀 특수바늘로 누르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펠트는 서양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재료이지만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했다. 유목민에 의해서 발전된 기법이고, 우리나라에서도 8세기에 펠트로 제품을 만들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다.
장애에 대한 이해가 작업세계와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재범 어려운 질문이다. 초기 작품이 한때 ‘치유’에 포커스를 두었다. 당시에는 나의 내적 치유에 집중했는데, 지금은 함께 바라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 작업을 하면서 공예 쪽은 순수미술에 비해 형식은 완벽하지만 내용이 약하다는 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제가 공부할 때는 공예가 순수미술을 많이 받아들이는 편이었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아이와 어른 구분 없이 모두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로드킬>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림책으로도 표현된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재범 우리 작업을 필요로 하는 그림책이 있으면 추진하고 싶다. 지난 4월 갤러리 이앙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앞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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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Artist-Bernd Halbherr

웰컴 투 코리아!
한국의 외국인 작가들

통계청이 2013년 10월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체류 외국인은 150만 7000명. 인구대비 3%가 넘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대중매체나 일상에서 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한국미술은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가. 한국현대미술을 ‘한국인이 만든 현대미술’로 이해한다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작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든 현대미술’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국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는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 국가 간의 물리적ㆍ심리적 이동이 가속화되고 국가 간 경계가 흐릿해진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국현대미술의 화살표는 누구를 혹은 어떤 곳을 향하고 있을까.
《월간미술》은 너무나 일반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소개한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함께 지켜보며 같은 장소의 문화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한국에 기반을 두고 해외 각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들은 한국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갖는 동시에 한국인 작가와 공통된 고민을 하고 있다. 이번 특집은 외국인 작가를 소개하며 또다시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구분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과 해외를 오가는 한국작가들처럼 이들도 한국미술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베른트 할프헤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예술이 언제나 요구해왔던 지점이다. 물론 할프헤르의 작업도 그러하다. 원구와 사진을 접목한 작업 시리즈는 방 안 전체를 촬영하고 이를 원구의 조형물에 옮긴 것이다. 이 시리즈의 작업에서 거울이미지란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은 제거되고 일시적인 가변성 바깥에 고정된 사진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이해의 근원에 의문을 제시한다.”
– 스태판 본 비즈(뒤셀도르프 예술궁) 관장

급격하게 변하는 도시 속의 소외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93년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수학하고 많은 곳을 여행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문화적으로 막연하게 궁금했다. 당시 여자친구(현재 부인)의 영향도 있다. 그러던 중 2003년 서울의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하제마을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한국의 어떤 문화가 특히 신선한가 한국사회는 정말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내가 한국에서 산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그동안 내가 작업했던 숭례문은 불탔고, 현재는 그 자리에 복원된 숭례문이 서있다. 나의 집 앞에는 일년 사이에 6채의 빌라가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집 앞을 둘러싸고 있던 숲은 딱 한나절만에 사라졌다. 그 정도로 한국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빨라 작가로서는 신기하고 독특한 체험의 공간이다. 또 한 가지 인상깊은 점은 아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독일에서는 타인의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아이에게 굉장한 관심과 사랑을 전한다. 아이에게는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갖게 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독일과 한국은 생활뿐 아니라 작가로서 작업 환경이 다를 것 같다 물론 다르다. 유럽의 현대미술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차근히 밟아온 흐름이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한국보다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전시 공간, 컬렉터 등 많은 부분에서 독일의 시장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외국인 작가로서 한국에서 전시하고 활동하는 데 제약은 없는가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힘들다기보다는 여느 작가와 같은 고민을 한다. 아이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갖게 되는 어려움이지 외국인 작가이기 때문에 갖는 고민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 외국인 작가는 전시에 첫발을 들이기는 오히려 쉬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지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하면서 좀 더 다양한 지역에서 전시를 하려고 하면 그때부터 어려움에 봉착하곤 한다. 서울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전시하기가 쉽지 않다.
사진을 보이는 방법이 독특하다 구형의 사진작업을 학생 때부터 해왔다. 사진을 찍으면 내가 원치 않게 앵글에 다 담지 못하고 놓치는 부분이 생겼다. 소외되는 부분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파노라마를 선택했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구상하다가 구형을 선택했다. 사실 파노라마 방식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 성당의 반구형태 천장화에서도 나타난다. 비디오를 사진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기본적으로 대학 때부터 과학, 기술을 작업에 접목시키는데 관심이 있었다. 최근에는 5월 14일부터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 최근에는 3D 프린터를 사용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특히 관심을 가진 장소가 있는가 한국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이곳의 풍경과 공간을 담는다. 그러나 그 나라의 특정한 장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예가 여러 나라에 있는 축구경기장이다. 독일에서 작업할 당시에 축구장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축구장은 수천명 관중의 시선이 경기하는 운동장으로 향한다. 나는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운동장의 자리에서 카메라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볼록한 구형태로 나타냈다. 다수와 소수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 자체가 흥미롭지 않은가. ●

베른트 할프헤르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학사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2009년에 파주의 하제마을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1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중앙대 조형예술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berndhalbherr.de

 photography, coated with plastics 2013

photography, coated with plastics 2013

[특별기획] Artist-Simon Morley

사이먼 몰리

“나는 자기 표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매체가 표현의 영역에서 가진 잠재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나는 서두르지 않고 좀 더 복잡하게 시각적으로 대응해서 ‘보기’와 ‘읽기’ 사이의 차이를 모호하게 하고자 한다. 나는 배경과 인물 사이의 관계에 혼란을 야기한다.
무엇이 강조되는가와 읽혀지거나 그렇지 않은가 ‘사이’의 차이 말이다. 본인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효과란 변형이나 분명하지 않은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 사이먼 몰리

사이를 포착하다

한국의 전통 문화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작품에 표현하는 작가다. 작품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내 작업은 특정한 문화와 역사적인 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의 맥락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다. 요즘은 전통방식을 모던화하는 작업을 하는 나의 파트너 장응복 디자이너에게 도움과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는 동아시아의 정신과 철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책에 대해 관심이 있다. 내 작품에 나타난 텍스트를 읽으면 이미지가 보이지 않고, 작품에서 조금 떨어져 이미지를 보면 텍스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작업은 그 ‘사이’ 어딘가를 보여주려 한다. 서구와 한국, 어제와 오늘, 이미지와 텍스트 음과 양 등의 분명하지 않은 경계 등 말이다. 한국 문화는 오랜 시간 이를 고민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한국에서의 작업은 그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내 이름이 ‘사이’몬 인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것에 집중한다.
외국인 작가들이 한국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제적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온다.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 국가에 비해 한국의 경제사정이 낫다. 또 한 가지는 서양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예전보다 훨씬 알려진 것도 한몫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도 분단국가로서 가지는 위험성을 떠올리고 이를 걱정하는 인식이 강하지만 예전에 비해 한국에 대해 훨씬 자세하고 다양한 측면이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거주가 아니더라도 한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많다.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외국인 교수에 대한 대우는 어떠한가 사실 객원교수가 되기까지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현재 한국에서 외국인은 종신교수가 불가능하기에 그 이상의 직책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 역시 매년 계약을 갱신하고 있다. 이건 미술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이런 부분은 한국인들도 외국으로의 이동이 많아지는 만큼 서로가 서서히 변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에 참여한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에 주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느끼기에 한국 미술계는 주목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작가들과의 활발한 문화적 혼성과 융합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런 점은 미술계의 다양성을 막는다. 이동과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미술에 대한 공통된 취향이 생겨나기도 했다. 서울은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이미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다. 더 이상 외국인이 주변에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미술계에서 여전히 작가는 국적으로 나뉘어 지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예술가는 기질적으로 새로움을 찾고, 어지럽게 무엇인가를 섞고 혼합하는 성향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미술에서의 활발한 교류와 접목은 어느 분야보다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

사이먼 몰리는 1958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에서 근대사를 전공하고 골드스미스대에서 파인아트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한국과 일본 및 유럽 각국에서 19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Writing on the Wall》《L’Art Les Mots》등이 있다. 현재 단국대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simonmorley.com

acrylic on canvas 40×30cm 2011

acrylic on canvas 40×30cm 2011

 

[특별기획] Artist-Tallur L. N

탈루 L. N

“진단: 난기류(Turbulence)란 리듬을 잃은 상태라 할 수 있다. ‘가속’에 대한 희망과 함께 뿌려져 ‘속도’에 대한 탐욕으로 자라난 씨앗이다. 전무후무한 속도로부터 탄생하는 흥분! 쾌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 속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 결과: 크로마토포비아, 즉 돈에 대한 공포이다.”
– 탈루 L. N

현대사회의 공통된 고민

다양한 주제의 작품 중 돈을 소재로 한 작업이 있다. 이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2000년대 후반 급격한 경제성장과 함꼐 미술계에도 붐이 일어나면서 예술의 내용보다 돈의 가치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때부터 돈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16세기의 중국의 승려 포대화상은 현대에 와서 부의 상징으로 변했다. 여기서 생각을 발전시켜 돈과 관련된 아이러니한 상황을 주제로 작업했다. 사람들은 돈이 많든 적든 돈을 사용하는 데에 두려움을 느낀다.의 경우는 이에 대한 일종의 테라피로서 작용한다.
세계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고민을 주제로 작업한다고 보여진다 나는 인류의 생각과 고민에 무언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늘 생각의 경계를 지양한다. 내가 느끼기에 한국은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강한 편인 것 같다. 내 작업은 그다지 민족주의적이지 않다. 비자와 여권만을 있으면 어느 나라든 방문할 수 있는 시대이다. 각 나라만의 경험이 있고 특징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그 경계를 허무는 데 관심이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백인 남성이 아니기 때문인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과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러한 경계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고립된 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한국인 아내를 만나 8년 전에 한국에 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과 인도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한국의 겨울에는 인도에서 거주하고 나머지 시간은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거주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예술가로서 지속적인 이동은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대학에서 파인아트를 전공한 후 공예에 매료되어 공예를 전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한 나머지 창의적인 예술적 사고의 발목이 붙잡히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인도와 매우 다르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에 25세 이후 세상을 바로보고 결정하는 판단근거가 고착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은 모든 것을 재고(re-thinking)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리적인 이동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해외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미술시장 진입에 외국인 작가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는가 한국에서 내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한국에서 전시를 열면 오직 유럽인이나 미국인들만이 내 작업을 컬렉팅할 뿐이다. 한국의 컬렉터들은 작업이 좋아서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미술시장의 영향력에 따라 작업을 고른다. 이런 경향은 미술시장이 확대되는 것을 가로막는 문제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내 경우는 새로운 매체를 많이 사용하여 관심을 받는 편이며 소속 갤러리가 있어 전시와 그 외 기반에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작업이 한국에서 판매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을 돕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인 작가로서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는가 사실 한국 작가들과 교류할 일은 극히 드물다. 매우 적은 수의 예술가하고만 깊게 작품의 이야기를 한다. 내가 느끼기에 한국 작가들은 의견을 내는데 굉장히 조심스러운데 이런 부분은 인도사람의 태도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그들의 감정 변화와 표현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개인의 의견을 주장하기 보다는 한 사람이 좋다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따라가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

탈루 L.N은 1971년 인도 카르나카에서 태어났다. 인도의 미소르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발로다의 마하라자 세이야이지로대에서 박물관학, 영국 리즈 대에서 현대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미국, 한국 등에서 1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그룹전에 참여했다. www.tallur.com

MM_TR (1)

Wood, two bronze sculptures and nailed coins 500×200×300cm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