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Artist-Ingo Baumgarten

잉고 바움가르텐

“나는 그리 새롭지도 않지만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그러나 나의 눈에는 진정으로 한국적인 건축양식을 대변하는 듯 보이는 어떤 집들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최근 점점 사라져가는 주택의 모습은 그것이 한 때 가졌던 가치들이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처럼 사라져가는 한국의 건축양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때로 과거에 대한 향수나 낭만적 기분을 자극하기도 한다.”
– 잉고 바움가르텐

한국의 주택에서 찾는 도시 이미지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 해외로의 이동을 꿈꿨다. 군대 문제로 오스트리아로 이동하고픈 꿈이 좌절된 한참 후 프랑스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해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들에서 나의 정체성과 상반되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예술가로서 많은 자극을 받는다. 그러던 중 역사 문화적으로 유럽과는 매우 다른 아시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20년 전에 한국에 처음 오게 되었다. 프랑스의 석사과정 중에 지도교수인 폰튜스 훌텐(퐁피두센터의 첫 디렉터)이 대전엑스포에 초대받았고 당시 그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나의 첫 아시아 국가 방문이었다. 이후 일본에서 4년간 살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홍익대 교수에 임용된 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잘 설명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유럽의 미술과 한국미술 사이에 개념적 대립이 분명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가르치고 있다. 유럽 예술이 좀 더 공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유럽문화의 기반과 철학적 사고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학생들은 재능 있고 기술적으로 발전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수로서 나의 의무는 이러한 면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는 과정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 양국 미술 시스템에 어떤 차이를 느끼는가 일본을 떠난 지 약 6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 미술 시스템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에 미뤄 봤을 때 일본은 전통미술과 서구화된 현대미술 사이에 굉장히 큰 간극이 있어 서로간 교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한국 역시 이러한 측면이 있지만 일본만큼 간극이 크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또 일본은 이른 경제성장으로 서양미술의 방식을 빨리 흡수해왔던 것 같다.
일상의 건축을 소재로 작업하고 있다. 거주국가가 변함에 따라 당신의 작업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가 내가 있는 곳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나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내 주변의 일상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내가 있는 곳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떤 작가들은 자기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곳의 전통미술 방식과 사고방식을 흡수한다고 한다. 하지만 서구적인 것을 흡수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흡수한 이곳의 문화, 라이프스타일 등에 관심을 두고 서구인인 나의 시선으로 이를 이해하고 분석한다.
주변을 둘러싼 건축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주택의 특징을 설명해 달라 독일에서 건축은 반영구적인 예술분야로 이해되고 있다. 법적으로 건물이나 교량 등을 지을 경우 20년간 제작자가 어떠한 문제도 책임지고 수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한국은 날마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진다. 서울의 풍경은 매우 다이내믹하게 변화한다. 유럽의 도시와 이곳의 도시는 개념 자체도 다르고 모습도 전혀 다르다. 파리의 경우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도 드물지만 건물을 짓더라도 기존 건물의 모습과 흡사하게 짓는다. 한국은 내가 사는 동안만 집 주변 100m 반경에 6채의 집이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 건설되었다. 한국의 1970~80년대 지어진 주택의 경우 한국의 전통적인 양식과 모던화된 서구적 방식이 결합된 건축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건축은 전통과 모던의 조화를 시도한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건축에선 대문이 굉장히 중요하다. ●

잉고 바움가르텐은 1964년 독일 서부에서 태어나 1984년부터 1999년까지 국립 카를수르헤 미술학교, 파리 고등예술학교, 노르위치 디자인예술대, 도쿄예술대 등에서 다양한 예술교육을 받았다.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 등을 오가며 다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수십여 회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현재 홍익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ingobaumgarten.de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12~2013 캔버스에 유채

<untitled, (house, blue gate, Seogyodong, Seoul)>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12~2013

 

[특별기획] Artist-Dana Ramon Kapelian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나는 이방인이었기에 여성들이 어떠한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개방의 문을 열고 있다. …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변화의 속도가 불안해 여성들이 자신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과 위치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대항하고 적응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한국여성을 통한 역사읽기

한국 여성 60명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엮었다. 어떻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며 한국인의 삶이 도전적이고 저항적인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느껴졌다. 매우 미래지향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전통문화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뒤섞여 있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여성의 삶이 궁금했다.
왜 여성에 초점을 맞춘 작업을 결정했는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각각의 여성들의 삶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1927년생 할머니부터, 6·25전쟁, 군부독재를 지나온 세대, 그리고 10대 소녀까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그들이 겪은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듣고 이후에는 개인적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흐름과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본 한국 여성과 유럽 여성의 삶에서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 여성들 사이엔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된 삶의 공감대가 있다. 문화적으로 다른 면을 꼽자면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들 수 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라는 말을 사회적인 코드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한국여성들의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내가 만난 한 20대 후반의 이혼여성은 인터뷰 후에 책에 사진이 노출되는것을 꺼렸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직장동료와 주변인들에게 이혼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유럽 사회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한국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인터뷰이를 어떻게 선정했는가 다양한 매체의 기사를 읽어가며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고 한 사람을 인터뷰하면 그가 다른 이를 소개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터뷰를 이어갔다. 인터뷰이를 선정할 때 최대한 사회, 경제적 계층과 연령이 다양하게 포진되도록 신경썼다. 60명의 여성이 한국 여성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다각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해하려 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 한국에서 평생을 산 미국인 수녀 등도 포함했다. 나에게 그들 역시 한국인이고 한국사회의 일부다. 비록 내가 한국어를 잘못해서 부끄럽지만 한국은 이미 나의 일부이다.
책의 출간에 맞춰 전시 계획은 없는가 처음부터 책 출간을 염두해 두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터뷰를 한 몇몇 사람의 사진을 벽에 걸고 소수의 관람객에게만 작업을 보이는 방식을 지양한다. 책을 출간하면 보다 많은 사람이 내 작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국적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한국이 닫혀있는 경향을 띠게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와 시스템의 유연함은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적인 도시에 비해 서울은 거주하는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결단하면 빠르게 실행에 옮기지 않는가. 지금도 변해가고 있고 곧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은 1963년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메리트 장학금과 소벨 장학금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1989년부터 20년간 파리에 머물며 프랑스, 독일, 브라질 등지에서 수차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2010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다나 (4)

왼쪽·《한국의 여성들: 전통에서 자아의 재발견으로》에 인터뷰와 함께 게재된 사진. 사진 속 인물은 가수 최은진

 

[특별기획] Art Historian-Inaba Mai

이나바 마이

한국미술을 통해 본 동아시아 저항미술
한국에서 미술사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1년 대학생 때 봉사활동을 하러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이때 한국 친구를 통해 한일 간의 과거사를 알게 됐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은 역사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귀국한 후에 나름대로 한국 역사 공부를 했고, 졸업 후 한국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 2004년 한국에 건너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부 때 조각을 전공했지만 작업 자체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990년대 당시 일본 미술은 1980년대 거품경제의 영향으로 상업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2004년 우연히 홍성담 선생님을 통해 민중미술을 알게 됐고 함께 연구하는 동료들을 만났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현실 참여적인 민중미술은 나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민중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국민대에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현재 박사과정 수료 상태다.
일본에 민중미술과 유사한 미술의 흐름은 없는가 1945년 패전 이후부터 약 15년 동안 한국과 상황은 다르지만 민중이 주체라는 인식을 토대로 작가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판화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참여 작가가 적지 않지만 이후 흐름은 찾기 힘들다. 내 경우 민중미술을 통해서 일본 미술을 돌아보게 됐다. 1980년대 민중미술과 1950년대 일본 미술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 내 박사논문 주제다. 그리고 동아시아 저항미술에 관심이 많다. 이런 시각도 한국에 10년 넘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지만 동아시아는 1945년 이후 힘든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이고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살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가 한국에 와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인간관계에는 고생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다. 운이 참 좋았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매사 급하게 진행하는 한국의 일처리 방식이다. 나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고 편할 때도 있지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엄격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도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제대로 된 논의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에 언제 돌아갈 계획인가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다. 지금은 광운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

이나바 마이는1968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교토교육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했고 국민대학교 미술이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국민대학교 아트갤러리에서 열린 <우리, 또 다른 우리전>과 2011년 오키나와 사키마미술관에서 열린 이윤엽 개인전 등을 기획했다. 현재 광운대학교 한림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특별기획] Curator-Haily Grenet & Martin Schulze

하일리 그레넷 & 마틴 슐츠

 한국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다

한국에 머무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하일리 그레넷 | 1년 전에 왔고 프랑스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미술이 활발하게 성장하는 것에 관심 많고, 적극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여행 왔다가 지내다보니 적어도 1년 이상 거주하면서 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마틴 슐츠 | 한국에는 3년 전에 왔다. 독일에서는 상업갤러리에서 일했는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만두고 2010년 우연히 한국에 왔다가 한국의 문화, 전통, 기술, 사람, 음식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계속 머무르게 됐다.
전시 <유토피아의 날들>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하일리 그레넷 | 우리는 지난해 6월 이웃의 소개로 알게 됐다. 나는 그동안 토탈미술관 게스트 큐레이터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마틴 슐츠와 함께 기획안을 제안해 이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게 됐다. 이번 전시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비디오 작품들을 소개하는 국제 비디오아트 페스티벌이다. 처음부터 순회전으로 기획했고, 매번 새로운 주제를 설정해 새로운 기관과 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자유’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토탈미술관의 양전선 큐레이터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실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투쟁이나 갈망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 25편을 모았고 안드레 세라노, 왕칭쑹, 아델 압데세메드, 시징맨, 함양아 등 24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마틴 슐츠 | 이번 전시를 위한 웹사이트를 따로 제작해 작가의 영상, 이미지, 텍스트 등을 올렸다. 전시가 진행될 때마다 아카이브가 쌓이길 기대한다. 매번 새로운 전시를 만들고 소비하는 방식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하고 이슈를 발전시키는 데 순회전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안정적인 플랫폼으로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확정된 다음 일정은 아직 없으나 멕시코, 러시아, 중국 등 각국에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앞으로의 어떤 계획이 있는가
하일리 그레넷 |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가 곧 갤러리175에서 열릴 예정이다.
마틴 슐츠 | 당분간은 한국에 머무르면서 이 전시에 집중할 계획이다. 다른 곳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계속 컨택을 진행하고 있다. ●

하일리 그레넷은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브레티니 현대예술센터, LA><ART, 페로탱갤러리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토탈미술관 게스트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동덕여대 강수미 교수의 프로그램 퍼포먼스 강사로 활동하며, 프랑스 온라인 미술잡지 《Tk-21》과 《아트인 아시아》 등에 기고하고 있다.
마틴 슐츠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스위스 프리부르대학교와 홍콩 중문대학교에서 심리학과 대중문화와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슈프뤼트 마게르스 갤러리에서 일했고, 한국에 와서는 2012년 독일의 그래피티 작가 ECB(본명 헨드릭 바이키르히)의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특별기획] Artist in Residence

Guillaume Clermont 귀욤 클레몽

귀요미인물 (1)

 같은 모티프, 다른 장소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여자친구가 작년에 서울의 한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그녀가 이미 한국 사람들을 알았기 때문에 나도 함께 4월 25일부터 열리는 그룹전에 참여하게 되었고 또 금천 레지던시에 지원하게 되었다. 또한 3개월이라는 기간도 매력적이었다. 더 짧은 경우는 그곳에서 삶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동안 캐나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레지던시는 작업 지원을 받고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예술적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새로운 언어권으로 왔다.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생활이 어렵지 않은가 그점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내가 독일에 갔을 때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알파벳이 같기 때문에 아주 기초적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리고 이곳(한국)에 왔을 때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숫자와 몇몇 간판의 영단어뿐이다. 내 작업은 같은 작업이 상황과 지역의 배경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분석되느냐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작업이 더욱 기대되고 흥미롭다. 비록 서구화가 전 세계에 퍼져있다고 하더라도 서구적인 방식이 나라마다 다르게 흡수되고 반영되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에 내 작업의 중심이 있다.
이동하는 장소에 따라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내 생각에 사고 전개방식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체류하는 국가가 바뀐다고 해도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작업에 새로운 환경은 직접적인 변화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분명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10년 뒤에 나타나든지 내가 한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 갔을 때 나타나든간에 영감은 갑자기 떠오르게 마련이다.
작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마르세유의 도서관에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16세기 네덜란드 해골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에 그 해골을 그리고 조금씩 변형을 가한다. 위에 색을 덧칠하거나, 바탕을 다르게 만든다. 회화 작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이 작품을 내가 작업한 나라의 길거리 어딘가에 버린다. 잘 그린 그림을 갤러리에, 못그린 그림을 길거리에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똑같은 완성도의 그림을 길거리에 버리는 것이다. 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나의 그림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작업이 완성된다. 결국 나의 작업은 내가 이동하는 지역 곳곳에 위치하게 된다. 서울에서도 같은 작업을 할 계획이다. ●

바요타귀욤 클레몽(왼쪽)은 1983년 캐나다 몬트리올 출생이다. 캐나다 퀘벡 라발대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몬트리올 UQAM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술잡지 《E IL TOPO》의 에디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www.guillaumeclermont.org

 

 

Hanna Hildebrand 한나 힐데브란트

한나 (6)

지역주민과의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전에 덴마크, 독일 등지의 레지던시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내 작업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 여러 사람과의 콜라보레이션에 입각한 분석과 기록의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이러한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좋은 기회이고 새로운 거주지는 작업에 최적의 장소이다. 주변의 다양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 지역사회와 주민들과의 자연스러운 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천 레지던시는 한국에 관심이 있는 독일인 친구의 소개로 지원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며 주변의 한국인 학생, 작가들을 알고 지내왔기에 한국이 낯설지는 않다.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작업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 끊임없이 거주지를 옮기며 노마딕한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환경을 향한 갈망과 이주는 나뿐 아니라 현대미술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성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작업의 기반은 탐험이자 탐구이다. 전혀 다른 환경은 창작에 활기를 불어넣고 인간에 대해 새로운 고찰을 하는 시작점이 된다. 내가 속해있던 문화와는 거리가 먼 생활 방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회에 대한 조사가 내 작업의 기본이기에 지속적인 이동은 작업의 필수적이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작업의 방향이 변하는 편인가 난 작업 방식을 반복하지 않는다. 내가 유일하게 반복하는 방식이 있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계속 이동하면서 작업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작업은 참여미술의 형태를 띤다. 내가 조정한 틀 안에서 관람객 혹은 작업 참여자들이 퍼포먼스를 하는 셈이다. 이러한 참여자의 기여는 내 작품의 실질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관람자는 나의 예술적 행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 못하겠지만 난 작가로서 다양한 태도와 변수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서울에서 하려는 예정된 작업이 있는가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몇몇 여성을 만났다. 나는 상대방의 경험과 일상적인 삶을 나눈다. 이 지역 주민들을 만나 특정 오브제를 두고 서로 그 물체에 대해 의견을 나눌 생각이다. 물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인터뷰를 진행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오브제를 사이에 두고 타인과 소통하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시각적 관계를 맺기를 취하려 한다. 나는 언어를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있다. ●

한나 힐데브란트(가운데)는 1978년 이탈리아 코도에서 태어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타델슐레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세르비아 멕시코 미국 등 세계 각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Baj ta 바요타

바이요따 (5)

이주와 이동의 역사

한국의 인상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지원동기가 궁금하다 친구 중 하나가 난지스튜디오에 참여했다. 그 친구의 추천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국적인 지역으로 가서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은 나에게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은 매우 다르게 느껴져 방문해 보고 싶었다. 헝가리에 비해 한국은 굉장히 큰 나라다. 수치적으로 서울의 인구가 헝가리 전체 인구의 약 2배이며 경제적으로도 훨씬 발전했다. 서울에 오니 그 규모가 그대로 느껴졌다.
당신의 작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난 루마니아의 트란실베니아 사람이다. 내 프로젝트의 시작은 트란실베니아의 전통적인 쥐덫에서 찾을 수 있다. 아주 단순한 구조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격자구조의 형태인데 자연스러운 연결과 먹이를 탐할 때 움직여 쥐를 잡는 이러한 전통방식은 나로 하여금 움직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유럽 사람들의 삶은 이주와 이동의 역사다. 현대에 와서 이동은 훨씬 보편적인 행위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많은 트란실베니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헝가리 및 다른 국가로 이동했다. 요즘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동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지만 정작 작품이 무거워 운반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무거운 설치 위주로 작업하다보니 막상 작품의 운반이 어려웠다. 그래서 좀 더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작업으로작품 이동이 편리하도록 시도한 적도 있었다. 팝업북처럼 접었다가 펼 치면 작업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술이 꼭 이동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한다. 이곳(금천예술공장)에서 하는 작업도 크기문제로 일정 정도 두고 떠나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내 실질적인 작업의 일부이고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계획한 작업이 있는가 작업을 할 때 플라스틱같은 비자연스러운 재료를 피하려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 재료인 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를 찾아 사용해보고 싶다. 지금 생각으로는 대나무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 소나무는 헝가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대나무가 나에게는 더 지역성이 강하다. ●

바요타(오른쪽)는 198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아카데미, 헝가리 부다페스트 헝가리안 아카데미에서 파인아트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www.bajota.com

 

 

Adam Thompson 아담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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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의 창작환경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 서울을 방문한 건 2007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수학한 한국인 친구가 기획한 그룹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한 독일갤러리가 KIAF에 참여하면서 나의 작품을 소개했는데 한국에 나를 알리는 좋은 기회였다. 서울의 여러 레지던시에 지원 하였고 운좋게도 2011년 창동 창작 스튜디오, 2012년에는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여했던 레지던시에서 어떤 후원을 받았는가 창동창작스튜디오는 작업실, 각종 생활편의시설과 일정정도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항공권의 경우 개인적으로 유네스코 장학금을 받아 해결했다. 금천예술공장은 비슷한 금전적 지원과 더불어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작업할 기회를 제공했다. 결국 두 곳 모두 원하는 가능한 대부분의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유럽에서도 몇몇 레지던시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다른 소관이므로 한국의 방식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국경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외국에서 작업하려면 여전히 힘든 점이 있을 것 같다 예술가는 어느 때보다 더 노마딕한 삶을 살 수 있다. 비자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다른 기관을 통해 지원을 받아 아시아와 유럽을 규칙적으로 오갈 수 있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있다. 그 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런던과 한국을 오가며 전시하고 교육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미술기관이나 작가들과 어떤 경로로 관계를 맺는가 한국의 친구들 대부분은 런던에서 공부한 작가여서 국제 미술계 정보를 함께 공유하곤 했다. 서울에서 작업했지만 한국의 갤러리와 일을 해보거나 전시를 한 적은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작업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건 맞지만 꼭 전시를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은 갖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 체류 후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변한 점이 있는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내 작업의 과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다루는 재료/자료(materials)와 이를 교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에서는 변화를 자아냈다. 나는 한국에서 수많은 재료/자료를 취합하여 작업이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럽으로 돌아와 리서치 작업을 한다. ●

 

 

Romy Achituv 로미 아키투브

로미인물

비자갱신을 위한 무의미한 여행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찾은 경로가 궁금하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2000년 미디어 시티 서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화여대의 뉴미디어 과목 방문교수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는 홍익대의 WCU 리서치 교수로 머물렀다. 내 계약기간 만료일이 다가옴에 따라 적당한 스튜디오와 거주방법을 찾다가 이곳 학생들과 동료, 친구들을 통해 레지던시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계속 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에 열리는 전시에 초대를 받았다. 이 전시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규모가 커서 지역적으로 제작을 요한다. 내 작업의 매체와 장비는 배로 운반하기 어려워 한국에 더 머무르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와 내가 가진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한국에 적어도 1년은 더 머물 생각이다. 그렇지만 레지던시 기간이 끝나고 스튜디오와 거주방법을 찾지 못하면 떠나야만 한다.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동과 거주의 제약이 따르는 것 같다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대학의 계약이 끝나고 레지던시가 만료되자 나는 3개월 관광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지금은 7월을 시작으로 2개의 레지던시에 연속해서 참여하게 되어 한국에 8개월간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해가며 3개월에 한 번씩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해외에 다녀와야 하는 것은 여전하기에 화가 나는 부분이다.
예술가의 비자 및 거주 문제의 개선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우선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비자연장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거주를 연장하는 선택권을 주는 것이 매우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종합적인 해결책은 좀 더 긴 기간 동안 지속하여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는 예술가를 위한 비자를 따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국내 예술가들에게 제공하는 것과 동등하게 외국인 예술가에게도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장기 레지던시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해외작가로 활동하면서 미술관 갤러리 등 한국 미술 기관들로부터 차별적 시선이나 불편한 점을 느낀 경험이 있는가 외국인으로서 느낀 차별은 없었다. 다만 많은 한국 동료작가가 경험하듯 나 또한 예술가에 대한 이중잣대를 느꼈다. 이는 세계적인 미술계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다. 한국 미술계 내부의 기관들도 그들이 필요할 때만 예술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얻을 것이 없으면 무시하는 사례를 봤다. 일반적으로 미술계에서는 어떠한 관용도 느끼기 어려운데 한국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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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예술공장 국제교류 프로그램

예술가와 기획인력, 민간영역의 국제화 통로
1990년대 후반 광주시립미술관의 ‘팔각정창작스튜디오’(1995)와 ‘쌈지스튜디오’(1998)를 필두로 한국에도 레지던시 스튜디오가 발흥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중앙정부와 광역시도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이른바 ‘2세대 레지던시’가 설립돼 국공립 레지던시 스튜디오가 20여 개에 달하고 지속 확장세에 있다. 여기서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11개 창작공간 중 금천예술공장은 설립단계부터 ‘국제 레지던시 스튜디오’를 표방하며 출발하였다.
2009년 출범한 서울시 창작공간사업의 좌표에서 ‘국제교류’의 미션을 부여받은 금천예술공장은 해외교류사업 원년인 2010년 이후 5년차에 이르렀다. 올해부터 에이팩스아트(Apexart, 뉴욕), 거트루드 컨템포러리(Gertrude Contemporary, 멜버른), ISCP(International Studio&Curatorial Program, 뉴욕), 관두미술관(Kuandu Museum of Arts, 타이베이) 등 해외기관과 1:1 예술가교환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참여작가는 1개월에서 3개월간 해당 해외기관에 거주하며 창작활동 혹은 창작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설계된 도시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된다.
교류 2년차인 2011년부터 이 프로그램은 작가교환-거주 및 체류비 지원의 기초적 교류방식을 넘어 당해의 특정주제를 선정하고 이에 따른 작가를 각 기관에서 선발하여 금천예술공장의 국내 작가들과 3개월간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왔다.
각 기관에서 선발된 예술가들은 매해 11월 금천예술공장에서 기획하는 <커뮤니티&리서치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이슈 또는 미학적 소재를 현장 ‘리포터’의 핍진(乏盡)함 또는 ‘액티비스트(activist)’의 태도로 작업해왔다.
국제교류사업에 넓게는 입주예술가 국제공모, 국제심포지엄까지 포함된다. 이들 해외예술가와 전문가의 유입을 통해 동일 공간에 함께 작업하는 국내예술가를 국제화하고 해당 센터가 입지한 지역을 국제화하며, 기획인력을 국제화하고 무엇보다도 레지던시 스튜디오로 우수 예술가 유입을 견인한다. 문화예술계 국제교류사업은 국제동향에 무척 예민한데, 근래 스페인의 경제난으로 3년간 교류 중이던 마드리드의 앙가(Hangar)는 재정난으로 교류가 단절되었으며,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요코하마에 위치한 ‘BankArt1929’는 지원자가 한명도 없는 사태를 맞이한 바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시점엔 국제공모로 선발된 해외예술가들이 입국을 꺼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대부분 4인 전후의 기획행정인력을 보유한 영세한 창작스튜디오에서 국제업무는 ‘인력의 국제화’라는 긍정적 측면의 한편으로 국가별로 조금씩 다른 해외비자 발급 문제의 해결, 단기 여행비자를 통해 입국하는 예술가들에게 경제활동이 불허되는 데 따른 창작지원비 등의 어려움을 실무자에게 안겨준다. 그러나 해외예술가의 초청과 장기체류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바, 국제 레지던시 스튜디오를 통해 유입된 해외예술가들이 국내 사립미술관과 대안공간 전시에 참여하면서 ‘초청 및 체류비용’의 부담 없이 국제 프로젝트를 가능케 하는 인프라를 현재의 창작스튜디오가 제공하고 있다.
김희영ㆍ 금천예술공장 총괄매니저

[특별기획] 자유로운 학습의 기회를 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AMA + (Art Major Asian Plus Scholarship) 장학생 프로그램

자유로운 학습의 기회를 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의 증가와 더불어 한국의 미술대학에서 수학하는 외국인 학생 수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 학생과의 교류는 학교의 국제적인 명성과 이미지를 높이는 방편이기도 해 각 대학에서는 다양한 교류 및 장학금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 학생을 보다 많이 유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월간미술》은 다수의 학교 프로그램 중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AMA Plus 장학생 프로그램(Art Major Asian Plus Scholarship)을 통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에 재학 중인 파키스탄 출신의 사디아(학부 1학년)와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니마(전문사 3학기)를 만나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한 동기와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AMA Plus .
인터넷으로 장학프로그램을 알아봤다는 불니마는 “방글라데시의 예술교육 프로그램은 한국에 비해 범위가 협소하고 매우 경쟁적인 구조다. 해외로 나가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교육을 받고 싶었다”고 지원동기를 말했다. 방글라데시의 대학에서는 작업 기법과 기술 측면을 강조하고 극심한 경쟁구도 시스템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불니마는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자신의 생각, 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리얼리즘식의 작법을 강조하고 반복하는 방글라데시 대학의 교육방식과 차이를 느낀다”고 했다. 방글라데시의 대학은 고득점을 얻은 소수의 학생만 논문에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교수의 미감에 맞출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파키스탄에서는 2학년이 되어야 구체적인 전공을 정하는 시스템으로 수업 일정이 짜여 있다. 이 때문에 사디아는 파인아트 전공만 조형예술과에 지원 할 수 있는 조항에 따라 2학년이 되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예술교육도 방글라데시와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을 중요시한다. 예컨대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지역으로 가서 실경수채화 작업을 하는 과제는 가장 보편적인 수업 방식 중 하나라고 한다. 사디아와 불니마는 “컵을 그리라는 주제를 정해주면 우리나라(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학생들은 모두 컵을 그린다. 같은 주제를 제시할 경우 한국 학생들의 캔버스에는 컵이 등장하지 않는다. 컵이라는 개념만을 가지고 전혀 다른 형상을 구현해낸다”며 학생의 사유와 사고가 강조되는 한국의 교육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에서 수업을 들으며 가장 어려운 점으로는 한결같이 ‘언어’를 꼽았다. AMA Plus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타 장학프로그램과 달리 입학 전에 단 3개월의 어학연수 과정이 주어진다. 프로그램 지원 시 한국어 능력에 대한 증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 지원자의 한국어 수준은 걸음마 단계이거나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3개월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느낀다.“팀별로 서로의 작업에 대해 논의 할 때 정말 곤란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한국어로 말하는 그들의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도 못해 아쉽다”라고 사디아는 말했다. 이미 11년간 수업을 들은 불니마는 “이제 수업시간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의견을 표현할 수준은 되지 못하는 정도”라고 했다. 유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들의 원활한 수업진행을 위해 입학 전 어학연수 기간을 늘리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어학을 제외하고 이 프로그램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사디아는 학부과정을 마치면 전문사 과정에, 불니마는 전문사과정을 끝내면 박사과정에 지원할 생각을 갖고 있다.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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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iew

<유니버셜스튜디오, 서울전> 6.17~8.10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은 2014년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을 포스트뮤지엄으로 설정하고 그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와 주제를 선정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2014세마골드 <노바디> (3.11~5.18)는 이러한 의도에 해외로 이민을 갔거나 장기거주하며 작업하는 중년의 한인 여성작가 3명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상반되게 현재 국내로 이주했거나 장기거주하며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국내 거주 외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 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6월 17일부터 8월 10일까지 열린다.
은 폴 카젠더, 올리버 그림, 사이먼 몰리, 탈루 L. N 등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외국인이 아니라 최소 1년 이상 한국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다. 한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작가들의 경우 한국에 대한 자신만의 이해와 관점이 생기고 이것이 그들의 작업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타나게 된다.
전시 제목인 <유니버설 스튜디오(universal studio)>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영화 배급사이자 배급사에서 운영하는 테마파크와 동명이다. 전시를 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조아라 큐레이터에 따르면 “영화 테마파크로서 갖는 판타지, 유희적 이미지가 ‘문화적 판타지’로 연결된다고 생각해 전시제목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외국인이 한국에 거주하며 갖게 되는 한국의 일상과 문화에 대한 ‘낭만화’와 이들과 이들의 작업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낭만적 시각이 ‘문화적 판타지’로서 압축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낭만적 시각은 긍정 혹은 부정적 시각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다. 참여하는 작가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하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들 개개인의 한국 생활이 작업에 녹아들어있다고 판단된 작가들이다. 작가로서 그들의 보편적인 고민과 개인적인 삶의 스토리가 어떻게 작품에 구현될지 기대된다.
결국 이번 전시는 “외국인 거주자 비율이 비교적 낮은 한국에서 다른 직업이 아닌 예술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외국 작가 개개의 삶과 시각을 시각예술작업을 통해 미시적으로 접근하여 관람객과 공유하고 그들이 본 한국문화, 그리고 그들을 보는 한국인의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장을 마련하는 데 의의”가 있다. 임승현 기자

아래·올리버 그림(Oliver Griem) Multimedia installation; 3D print figures, moving light, light, sound scape 2013

올리버 그림(Oliver Griem) Multimedia installation; 3D print figures, moving light, light, sound scape 2013

[특별기획] 예술가와 국경(國境)

예술가와 국경(國境)

백기영 경기문화재단 수석학예사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가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 독일에서 자신의 평생 동지가 될 플럭서스 동료들과 만나 현대미술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예술가로서 성공의 토양이 된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업했다. 2006년 결국 그는 뉴욕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이렇게 극동아시아와 유럽, 미국문화를 가로지르며 6개국의 언어를 구사했던 대표적인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다. 1984년 1월 1일, 텔레비전 위성방송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했던 백남준은, 전 세계 2500만 명이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즉 텔레비전 세상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실현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1984년 설날 뉴욕과 파리를 거점으로 하여 미국과 독일, 프랑스 그리고 한국에 동시 방송되었다. 이미 동유럽의 몰락을 예견한 그는 “예술가의 힘은 국경의 벽을 넘는다”고 하면서, 1986년 도쿄-뉴욕-서울을 연결한 <바바이 키플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하여 위성 작업 <랩 어라운드 더 월드>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텔레비전의 가능성을 실험함으로서 전 세계를 시공간으로 통합하는 우주적 예술로서의 확장을 꾀한 셈이다.
백남준의 국경을 넘나드는 전 지구적인 예술 활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20세기 정보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예술가들 뿐 아니라, 인류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았다. 니꼴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그의 책 《래디컨트》에서 이런 세계화된 환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뿌리와 줄기를 동시에 가진 식물에 비유했다. 래디컨트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유목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과 접속한다. 이런 ‘래디컨트’ 형 예술가들은 최근 전 세계를 이동하며 비행 마일리지를 축적하고 있다. 특히, 서구 유럽에 비해서 미술제도나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지역 출신의 작가들은 서구 주요 도시와 자신의 모국을 오고가며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서구유럽의 국가들은 역량 있는 예술가들이 자국에 체류하는 것이 얼마나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가들을 자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의 이동(Mobility)’을 장려하는 문화예술지원정책도 확대하고 있는데, 현재 전 세계 레지던시 기관네트워크를 담당하고 있는 레즈아티스(Resartis)에 등록된 단체만 해도 현재 70개국 400여 기관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예술가들의 이동을 촉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관이 노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국제교류를 기반으로 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이 지역마다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지역의 대안공간이나 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있는 프로젝트형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이 그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비자제도의 장애물
그러나 정작 예술가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문화교류의 필수적 요소인 ‘체류’의 문제에 있어 실질적인 어려움들이 존재한다. 3개월 미만까지는 전 세계 여행자의 대부분이 별 어려움 없이 어느 나라 건 체류할 수 있으나, 누군가 좀 더 오래 체류하기를 원한다면, 혹은 예술가로 그 나라에 정착하기를 원한다면 쉽지 않은 난제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예만 봐도, 정작 3개월 이상 장기간 체류 하고 있는 외국인 작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국내에 체류하는 예술가들의 유형과 그에 따른 비자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제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여행비자로 오기 때문에 대분의 작가는 무비자 체결 협력국가에서 오고 아닌 경우는 1~3개월 체류비자를 발급해 줌), 한 쪽 배우자가 한국인으로 결혼을 통해 동반자 비자로 체류하는 작가(F-3), 최근 대학에서 영어수업을 필수화 하면서 교수로 체류하는 작가(E-1), 공부하러 온 유학생 작가(D-2), 드물기는 하지만 영어 학원 강사(E-2)나 국내 다른 직종에 취업하여 체류하면서 작업하는 작가(C-4/단기체류, 문화예술은 D-1 비자로 분류)들로 순수하게 예술 활동만을 위해서 체류하고 있는 작가(D-1)들이 그 예다. 반면, E형 혹은 D형으로 분류되는 장기체류를 위한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취득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소위 해당분야의 전문가여야만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문제는 문화예술분야에서 있어서 그 전문성을 어떻게 확인 하느냐에 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전문성이란 학력증명을 위한 졸업증명서와, 국전이나 공모적의 수상경력 같은 것에 불과하다. 공연예술 쪽은 더 심각한 상황인데, 정작 예술가들보다는 유흥업소의 무희들에게 예술흥행비자(E-6)가 더 많이 발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2006년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교류를 위한 문인화 기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2007년에는 다문화 밀집지역인 안산의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를 운영하면서 2008년과 그 이듬해에 이어 듀얼게임(Dual Game)을 통하여 예술가 스스로가 매니지먼트하는 예술가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2009년에는 새롭게 개관된 경기창작센터를 통해 약 2년 6개월 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예술가들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한 바 있다. 이러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의 운영에서 일반적으로 외국인 작가들은 국내에 3개월 미만의 기간 동안 체류한다. 그러나 외국작가들의 관광 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타자로서 객관적인 시선을 지역문화공간에서 얻어 내고자 한다면, 이들의 체류기간은 너무 짧다. 지역협력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 외국인 작가들은 부족한 정보와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나마 통역을 통해서 끝없는 정보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내 지치거나 자신의 피상적인 정보만 가지고 작업을 끝내고 자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에서는 외국인 작가들이 D-1이나 C-3 비자를 취득하기도 했는데, 3개월 여행비자가 아닌 그 이상의 체류비자를 얻으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 한다. 특히, 예술가들의 체류비자를 처리해본 경험이 없는 지역의 출입국관리소의 관계자들은 이들 예술가를 마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취급 하면서, 좀처럼 체류비자를 내주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가능한 채널을 모두 동원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레지던시에서는 작가들을 3개월 여행비자로 한정해서 받거나 더 머물고 싶은 경우는 인근 국가인 일본이나 중국으로 한번 나갔다가 다시 귀국하는 방법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각 나라와 맺고 있는 쌍방주의 외교정책으로 인해서 딱히 정해진 규칙도 없고, 사례가 발생하면 직접 해당 기관과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볼 때, 창조경제의 핵심 주역으로 예술가를 국가정책의 모델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의 외국인 예술가 체류 비자 문제를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비자문제의 해외사례
그러면,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외국인 예술가 비자 정책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을까. 예술가체류 비자정책을 관용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들은 캐나다와 미국과 같은 다문화 국가들이다. 캐나다에서 유학을 한 외국인 학생은 졸업 후에 일할 수 있도록 3년 체류 비자를 받게 된다. 이 비자로 체류하는 도중에 영주권을 얻거나 영구비자를 취득하게 되면 캐나다에 계속해서 체류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도 비슷한데, 졸업 후 1년간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라는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지고, 이 기간 동안에 주요 갤러리나 예술관련 기관에서 활동하게 되면, 그 활동 기간이 얼마나 확정 되었는가에 따라 비자를 연장해 준다. 즉 예술가가 만일 활발히 활동해 3년간의 예술가 비자(O-1B)를 지원해 줄 갤러리를 찾으면, 그 비자를 신청해서 3년간 더 연장할 수 있다. 물론 3년 후에 영주권을 신청해서 취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별도의 체류를 위한 비자문제는 없어진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영주권이나 비자취득 요건이 까다롭지 않은데도 이 기간 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느슨하게 생각하다가 간혹 불법체류자가 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유럽의 국가들은 북미의 다문화 국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예술가 비자정책이 까다롭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우리나라보다는 관용적이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친 예술가가 지속해서 체류를 하려면 재학시절에 보다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하고 전시나 수상경력 같은 것들을 바탕으로 갤러리와 전속을 맺거나 쿤스트 페어라인이나 독일의 미술제도 기관에서 확증된 전시 일정이나 계획, 더 나아가서는 1년 간 예술 활동 스케줄과 일정 금액 정도의 수입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친절한 미술계 인사를 만나면, 불법이지만 이 또한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해 주기도 한다.) 이 증빙서류를 바탕으로 외국인 예술가는 1년 혹은 2년 비자를 받는데, 보통은 1년 비자를 받는다. 문제는 최초 취득은 쉽지만, 연장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비자 기간이 끝나면 다시 2년 비자를 신청할 수가 있고 이렇게 해서 5년을 지속해서 체류하면 “영구체류 예술가 비자(Unbefristete Aufenthaltserlaubnis)”를 얻을 수가 있다. 다만, 첫 연장 시부터 독일 세무서에 등록되어 있어야 하고 수익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다. 특히 일년 수익금으로 7,000유로(10,000,000원) 정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변호사나 세무사를 통해서 진행해야 한다.
통계청이 2013년 10월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체류 외국인이 150만7000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인구대비 3%가 넘는 외국인이 살고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중에 10만8천명의 유학생들이 체류하고 있고 문화예술 전문가(D-1) 비자를 취득해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90명 정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의 모 대학에서 4년을 유학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일본인 작가가 찾아와서 리트머스에서 체류서류를 준비해 줄 수 있는지 부탁해 왔다. 담당 큐레이터와 대표가 출입국관리소를 여러 차례 오고가며 장기체류를 돕고자 했는데, 현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작가였지만, 예술을 통한 실질적인 소득을 증빙할 수 없었던 작가는 자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안산 원곡동에서 “바벨 디스코스(Babel Discourse)”라는 생활문화 공동체 사업에서 만나 인도네시아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주었던 작가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안무를 전공한 그녀는 한국에 좀 더 체류하며 작업하고 싶었지만, 비자 체류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바로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예술계의 국제화를 위해서 한국에서 유학하거나 한국과의 교류 사업을 통해서 한국에 우호적인 친한파 예술가들이 국내에 편하게 체류하면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많은 항공료를 들여가며 해외에서 예술가들을 초청해 오는 방식보다 더 낫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 같은 정책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예술계가 외국인 체류를 위한 비자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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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주 (1)

www.salad.or.kr 박경주 (주)샐러드 대표

다문화 창작 집단 샐러드 – 다문화의 핵심은 문화다양성

2005년 독립미디어 인터넷 다문화방송국 샐러드TV(구 이주노동자방송국)를 설립해 지금까지 이주민과 정주민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을 통해 문화다양성을 추구해왔다. 최근 활동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샐러드 TV는 2011년 이후 잠정 휴업상태이며, 2009년에 이주민 커뮤니티와 문화다양성 공연을 위해 이주민들이 배우로 활동하는 극단 샐러드를 창립했다. 지금은 문화예술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국제결혼 등으로 발생하는 현상과 문제 등을 희곡부터 연출까지 내가 직접 맡아서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국어, 영어, 다국어로 ‘샐러드 붐’이라는 신문을 내고 있다. 내용은 극단 공연 소식에서 샐러드 이주민 단원들이 직접 작성하는 문화다양성에 관한 기사로 확대하고 있다. 2012년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됐으며 올해 문화예술단체에서 (주)샐러드로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사회적기업 인증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다문화’가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다문화의 개념이 편향된 측면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관련된 콘텐츠가 많이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는 어떤 정책이 나와도 사회적인 인식이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지금은 덜하지만 초기에는 행사성 사업이 많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앞으로 20년은 더 사회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다문화’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다문화의 핵심은 문화다양성으로 이것은 국적에 따른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소수자 문제, 경제 소외계층 등 많은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데, 지금 과하게 국제결혼 가정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보니 국제결혼으로 입국하는 여성의 주된 출신 국가인 중국, 베트남 등을 중심으로 다뤄지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현재 다문화 이미지는 상품화된 측면이 많다. 또한 지난 10년간 이슈화된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최근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극단 샐러드의 활동은 어떤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이주노동자방송국을 운영할 때 이주노동자들이 삶과 연계된 문화활동을 통해 주체적인 목소리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극단 샐러드는 이주민들에게 문화예술 일자리를 창출하고 문화예술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래 예술을 하던 사람도 있고, 한국에 와서 예술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
극단 단원들은 주 20시간에서 40시간씩 일하며 이들에게 정식으로 급여를 지급하고 사회보험도 제공하고 있다. 수습기간에도 연습비와 출연료를 지급한다. 샐러드 아티스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정식 단원 중에서 우수한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 이들이 직접 연출을 한다거나 스스로 창작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들이 10년 후에도 예술가로 활동하리라 장담하긴 힘들지만 중요한 건 그런 사례를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극단을 5년 넘게 운영하면서 공연에서 만난 관객이 2만 명이 넘는다. 창단 당시에는 무료 공연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대부분 유료 공연을 하고 있다. 예술활동 외에 이주민 공연예술 아카데미도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 미술분야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공연을 하면 수익이 생기기 때문에 아카데미 수료 후에 취업활동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는데, 미술 분야는 아무래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되어 아직까지 시도하지 않고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 작가들이 주로 서구권 출신에 집중되어 있다. 아시아계 예술가의 경우 국내 거주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 같다 단기로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 말고는 찾기 힘든 것 같다. 생활비도 비싸고 특히 예술가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일거다. 현재 국내 대학에서는 재정적인 문제로 국외 유학생을 많이 유치하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경우 예술분야 아시아 장학생 제도도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졸업 이후 실질적으로 국내에 거주하면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유치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2012년 국내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록밴드 ‘곱창전골’ 멤버들이 샐러드와 전속계약을 맺어 예술가 비자를 받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예술가 비자 제도에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일명 예술흥행비자라고 불리고 있는 예술가 비자(E-6)는 기본적으로 허가 받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서는 주로 공연예술 쪽에서 이 비자를 받아 입국하고 있다. 러시아 무희들, 아프리카 공연단 등이 이에 해당되며 비자 신청시 기본적으로 공연장과의 계약서를 증빙자료와 본국에서 동일한 활동을 한 경력을 증빙할 수 있는 영상자료를 제출하여야 한다. 이들의 비자취득 자격심사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맡는다. 과거 예술 이주노동자의 덫이 된 예술흥행비자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들이 인신매매, 성매매, 임금 체불, 폭력 등 인권침해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만약 공연장과의 계약서가 없다면 국내 소속사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소속사를 통해 문화부장관의 고용추천서를 받아 출입국에 비자 신청을 해야 한다. 한해 문화부 장관의 고용추천을 받는 경우는 20여명이라고 하니 얼마만큼 비자 취득이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취업하겠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계약 관계가 있어야하며 고용주는 근로자의 신원보증도 해주어야 한다. 예술가하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프리랜서 직업이다. 그러나 국내 출입국법상 외국인 근로자는 고용주와의 사업계약이 있어야 비자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비자를 받는 것이 희박한 것 같다. 선진국에서처럼 예술활동 증빙자료, 갤러리 대표나 큐레이터, 교수 등 관련분야 전문가의 추천서, 그리고 현지에서 진행할 프로젝트 제안서 등을 증빙하여 예술인 비자를 신청할 수 있도록 관련제도가 바뀐다면 앞으로 더 많은 이주민예술가들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본국에서 이미 예술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유학생들의 경우 학업이후 예술가 비자를 받아 활동한다면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메이드인코리아’ 상표를 붙인 이주민예술가들이 국내 예술시장의 다양성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극단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가 현재 극단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극단 설립 6년차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 같다. 작가로서 나에게 샐러드는 새로움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예술프로젝트다. 이러한 예술적 실험이 지속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매년 한해 살림을 위해 새로운 도전에 부딪혀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예술 활동을 하고 싶어 극단의 문을 두드리는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있는 한 예술과 사회, 예술과 삶의 경계에 대한 샐러드의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이슬비 기자

[특별기획]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

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

이윤종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반도는 고대부터 크고 작은 외세 침탈의 역사를 겪어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까지 한반도에서 ‘외국’이란 언제나 중국 아니면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차지하는 크기가 워낙 큰 데다, 한반도가 서구의 시각에서 소위 ‘극동(Far East)’이라 불리는 동아시아의 맨 끝에 위치한 것도 모자라 북·남미 대륙 혹은 유럽과의 연결 통로인 태평양마저 러시아부터 동남아 지역까지 이르는 기다란 일본 열도에 가로막혀 있는, 고립된,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게다가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반백년 이상 지속되면서, 일제강점기에 한국 독립 운동의 근거지였던 러시아의 연해주와 지금은 중국 연변 지역인 간도와의 접근성마저 북에 가로막혀 차단되면서, 남한은 더더욱 외국 혹은 외국인과의 교류가 드문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이래 전략적으로 고도성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김영삼 정부의 국가정책적인 ‘세계화’ 추진 이후, 대한민국도 서서히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물결에 편입하면서 서울은 이제 제법 다인종, 다문화가 자연스러운 코스모폴리스(cosmopolis)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 글은 6·25 전쟁 이후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급변해온 한국 사회의 문화적, 인종적 인식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중심으로 그 속에서 그려지거나 비쳐지는 외국인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이후인 1950년대부터라는 전제하에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만화, 영화, 대중음악, 잡지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문화가 존재하고 사랑받았고 이를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영화 전문가로서 필자가 영화 분야에 관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의 영화 중 필름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몇 편에 불과하고, 현존하거나 복원한 영화들 속의 외국인도 시대적 특성상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나운규 등의 영화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제 치하 초기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풍토하에서 일본인은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메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1941년 작 <반도의 봄(이병일)>의 영화 속 영화인 조선 영화 <성춘향>의 일본인 제작자처럼 조선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중립적인 인물로서 표현되기도 했다.
광복 전 한반도의 외국인이 주로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면, 광복 후 6·25 전쟁 전후 냉전시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외국인이란 미군 부대 주변의 미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이나 비즈니스맨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냉전시대에 미국 혹은 미국인은 한국이 생각할 수 있는 서구와 서양인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제유적인 존재였다. 이웃나라이긴 하지만 당시 동구권의 중심국들로서 각각 중공이라 불리던 중국이나, 소련이라 불리던 러시아와의 교류가 남한 사회에서 미국이라는 정치, 경제적 초강대국이자 거대 서방세계 우방국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외국인의 절대 다수 또한 미군이었고 드물게 일본인이 등장하곤 했다. 특히 미군들은 다수의 한국 영화 속에서 ‘양공주’라 불리던 미군 기지촌 주변 한국인 직업여성들의 고객 혹은 연인으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들은 가끔은 진정한 사랑에 빠져 그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에서 구원해 “아름다운 나라”인 미국으로 데리고 가는 남성 구세주의 역할도 맡았지만, 대부분 그녀들을 홀대하고 학대하거나 무책임하게 임신시킨 채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버리는 매정한 남성들로 그려졌다. <지옥화(1957, 신상옥)>, <오발탄(1961, 유현목)>,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이만희)>, <육체의 고백(1964, 조긍하)> 등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들 속 미군은 주로 후자로 묘사되었다.
미군이나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양가적인 인식, 즉 정치·경제적 구원자/원조자인 동시에 정신적, 문화적 착취자/수탈자라는 인식은 1970~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계속 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미국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방관했다는 거센 비판과 함께 영화 속에도 반미주의적 흐름이 강하게 드러나, 미군이 아니더라도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일반 미국인 남성도 한국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함으로써 정신적인 타격을 주는 민족적 위협을 상징하는 서사적 장치로 자주 동원되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이장호)>, <깊고 푸른 밤(1985, 배창호)>, <여왕벌(1986, 이원세)>, ,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장길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장길수)> 등이 그러한 서사 장치를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 스웨덴 입양아인 수잔 브링크의 실화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후 영화화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 장길수)>에서는 스웨덴 백인 남성들이 미국인을 대신한 서사 장치로서 (외국에서 성장한) 한국 여성에게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주는 외국 남성으로 활용되었다.
미군이나 백인 남성에 대한 보다 복합적인 시선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다. 김기덕 감독은 <수취인 불명(2001)>과 <해안선(2002)> 등의 영화에서 미국/미국인과 한국/한국인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설정하지 않고 미군 병사나 그 한국인 혼혈 후예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꾀했다. 봉준호 감독도 천만 관객 흥행작 <괴물(2006)>에서 한강에 유독 물질을 방류해 대형 유전자 변이 괴물을 제조하는 도덕적 결함을 지닌 미군 장교뿐 아니라 그 괴물에 맞서 싸우는 미군 병사를 병치시킴으로써 미국과 미국인/미군에 대한 한국인의 복합적인 심리 상태를 표출했다.

복잡하고 세분화된 시선
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인/미군으로 대표되던 외국인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보다 다양하게 세분화되기 시작한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 도시와 최근에 한국관광공사 사장까지 지낸 독일 출신 사업가이자 방송인인 이한우/이참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다양한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귀화 한국인으로서 정착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특히 이참은 1994년 KBS 드라마 <딸 부잣집>에서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 사위로 등장해 한국 드라마 속 외국인 배우의 포문을 열었고 이후로도 SBS의 <천국의 계단(2003)>, MBC의 <제 5 공화국(2005)>등의 드라마에도 꾸준히 출연해 한국에 거주하는 유럽 혹은 미주 출신(재연) 배우 지망생들에게 꿈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 유럽계 외국인들의 방송 출연 빈도는 매우 높아져서 KBS의 예능 프로인 <잘 먹고 잘 사는 법(2002~)>의 “팔도유랑기” 코너에 출연했던 벨기에 출신의 줄리안, 프랑스 출신의 티에리, 한국계 프랑스 입양아 출신인 필립을 비롯해 MBC 드라마 <탐나는 도다 (2009)>에 주연급으로 출연한 프랑스 출신 황찬빈(피에르 데포르트) 등도 한국인 시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 다문화가정의 증가와 함께 시행된 한국 정부의 다문화정책에 따라 백인에 국한되었던 한국 대중문화 속 외국인의 인종적, 문화적 스펙트럼도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KBS의 예능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는 유럽과 미주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한국어가 능숙한 미녀들을 게스트로 섭외해 다문화주의를 주제로 다양한 토크를 유도하며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다. 물론 포맷의 식상함으로 장수 프로그램으로 안착하지는 못 했지만, 이후 다문화가정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으로 KBS에서 1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방송하는 <러브 인 아시아> 등의 프로그램과 함께 한국 내 비백인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와 행복을 찾는다는 소재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SBS 드라마 <황금신부 (2007~2008)> 이후로 공중파 일일 드라마들은 점차 한국에 거주하는 동남아시아계 신부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이 혹은 이들의 자손들이 한국의 인종주의에 의해 고통 받는 불행한 일상을 영화 속에서는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기도 하는데,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의형제(2009, 장훈)>, <완득이(2011, 이한)> 등이 특히 그러했다.
2010년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영화나 TV 드라마뿐 아니라 가요계에서도 외국인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KBS의 최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스타가 된 방글라데시 출신 가수 방대한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해 한국인에게 익숙한 연예인이 되었다. 특히 한류를 겨냥한 한국 아이돌 그룹 속에는 닉쿤(2PM), 빅토리아(F(X)(위 사진)), 페이(미쓰에이) 등의 아시아계 스타들이 포진해 있다. 물론 닉쿤은 음주운전 사고로 물의를 빚은 후 예전에 비해 한국 내에서의 인기가 상당히 주춤하고, 한때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슈퍼주니어의 한경도 그룹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론 이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외국인 가수의 시초는 아니다. 1999년 데뷔한 남성 트리오 Y2K의 일본인 형제도 한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다. 또한 2011년 슈퍼스타 K를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록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드러머는 브레드는 백인 미국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문화 속 외국인은 이제 미국과 일본, 중국이라는 제한적 국적의 고리를 풀고 다양한 나라 출신들로 확대되었다. MBC 군대 체험 예능 프로그램인 <진짜 사나이>를 통해 스타 개그맨으로 자리를 굳힌 샘 해밍턴이 호주 출신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다. 2014년 현재 다양한 분야의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백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나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도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의 비백인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환상하에서 오랫동안 타인종이나 외국인에 대한 공포와 경멸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의 정치, 경제적 지원하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백인 미국인 이외의 외국인에 대해 양가적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우호적인 감정을 품을 틈도 없이 한국인들이 바삐 살아와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보다 열린 시선과 자세로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진정으로 포용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외국에 나가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감내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먼저 외국인에 대한 그러한 시선을 폐기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차별하여 차이를 만드는 시선부터 먼저 거두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사진, 처음 만나는 자유_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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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처음 만나는 자유

아나운서 신성원

무거워진 마음을 끌어안고 지낼 자신이 없을 때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금세 마음이 사뿐사뿐 가벼워질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카메라를 들었고 일단 나갔고 일단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시간을 버티다 보면, 입술 끝도 살짝 올라가 있고 머릿속도 텅 비워졌다. 일에 치여 놓쳐버린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감동받고 행복해 하는 지인들을 보면 내가 먼저 행복했다. 그러다가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을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찍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 오래된 습관은 사진을 좋아하던 친구와 어울리던 10년 전쯤부터 시작되었다. 셔터스피드나 조리개 수치, 심도 같은 카메라의 기술들은 잘 몰랐어도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프레임 안에 담고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었다. 정확하면서도 맥락에 딱 맞는 적확한 단어로 말해야 하는 방송과는 다르게 사물과 상황에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표현하는 사진은 마음마저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진에 집중하는 동안의 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고 남의 시선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무엇에 그렇게 몰입해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언젠가부터 집을 나설 때는 무조건 카메라가 동행했다. 찍고 싶은 장면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찍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함께 여행할 친구가 없어도 카메라를 들고 떠나면 든든했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유로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름도 낯설고 지리적으로도 머나먼 나라, 쿠바다. 내가 갔을 땐 우기에 접어들 무렵인 5월이었는데, 적도 부근의 나라라서 그런지 하루 종일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길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그 무더운 곳에서 나에겐 남보다 항상 짐 하나가 더 있었다. 카메라와 렌즈 몇 개를 넣은 묵직한 가방은 마치 달팽이의 집이나 거북의 등처럼 늘 내 등 뒤에 붙어 있었다. 그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로 여기저기 다녔다. 체 게바라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산타클라라에 갔을 땐 쨍쨍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려 2km를 걸은 적도 있었다. 시내 광장에서 체 게바라 기념관까지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걷는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거리겠지만 나에겐 고행의 길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더위에 괴로운데 무거운 카메라 가방 때문에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티셔츠는 이미 흥건하게 젖었다. 카메라 따위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 풍경들 다 머릿속에 담아가면 될 텐데 왜 굳이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하는 건지. 스스로를 책망했다. 얼마나 좋은 풍경을 담겠다는 건지. 그리고 이 무거운 카메라가 무슨 소용인지.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래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고생해서 찍은 사진들에는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내 생각과 감정들이 오롯이 투영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으면 기억과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시간과 공간에서 가졌던 생각들과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열정을 다 바칠 무엇이 절실했던 때 사진을 만났다.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서 팍팍한 현실을, 지루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지기도 했고,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소박한 삶의 또 다른 이면을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는 “사진이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허가증”이라고 말했다. 사진을 알게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에 푹 빠져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다이앤 아버스의 말처럼 자유로 향하는 허가증을 갖게 되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안만큼은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복잡했던 세상의 모든 고민은 내려놓은 채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어서 살 것 같았다. 나는 살아있었고, 나는 자유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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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원은 <문화공감 신성원입니다>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10시 라디오에서 인사하고 있는 KBS의 아나운서다. 1997년 KBS 24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KBS음악실, 문화탐험 오늘, 시사플러스, 문화읽기 등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맡아왔다. 2009년 3월 <신성원의 사진일기전>을 열었고 같은 해 12월 에세이 《속삭임》을 출간했다. 얼마 전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을 졸업하며 방송국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연작을 선보였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패션은 안경이다_김홍기

패션은 안경이다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사람들은 나를 패션 큐레이터라고 부른다. 책을 쓰면서 저자 소개란에 그렇게 적은게 화근이었을까? 사람들은 특화된 직업명에 대해 궁금해 했다. 미술사를 공부했는지, 혹은 패션계에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는지, 심지어는 올 계절에 유행하는 패션 트렌드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 이도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지만, 나는 대학에서 미술사를 비롯한 패션관련 영역을 공부한 적이 없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대형 유통업체에서 패션 바이어로 우연하게 일하게 되면서, 내 업무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한 맘을 먹고(?) 독학을 시작했던 게 그 출발점이다. 아동복 바이어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패션기업들과 디자이너들을 만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느낀 건 패션에 대한 누적된 지식 없이 관련 업무를 깊게 이끌어가는 건 힘들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매년 봄/여름 가을/겨울로 나뉘어 생산된 수많은 옷 중, 시장에서 먹힐 만한 것들을 선별하고 관리하는 일,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왜 특정한 옷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버릴까 하는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해야 했다. 어떤 상품은 세일(Sale)을 위해 가격을 인하하고 업체와 함께 시장을 만들어가야 했다. 책임을 함께 지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특유의 복식업계 및 디자인계 언어들에 친숙해져야 했다. 대학시절 영화를 부전공하면서 영상미학을 비롯해 문화이론, 기호학 등을 공부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요즘 뜨는 말로 인문학적인 패션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이질적인 영역들을 결합시켜서 제3의 것들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
유학을 위해 떠난 영국 여행길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던 시각의 구조〈 Fabric of Vision전〉은 내 인생을 바꿨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림 속 패션에 나타난 주름의 의미를 통해 각 시대의 미감과 사회적 체계, 사람들의 열망의 코드를 읽어내는 전시였다. 머리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패션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해왔다고 했고, 대학시절부터 갤러리를 자주 다니며 작은 판화작품부터 컬렉팅을 해왔던 내가 미술사를 비롯한 인문학이 패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두 개의 영역이 어떻게 공동의 땅을 경작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독학해온 복식사에 대한 나만의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샤넬 미술관에 가다》이다.
서양미술사의 명작에 나오는 옷의 의미들을 다층적으로 풀었던 것. 책을 쓰는 문제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게 용기를 준 이가 있다. 바로 영국 법조계의 스타 변호사 앤소니 줄리어스다. 그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변호하다가 관심을 갖게 된 유대인 미술에 대해 연구하며《 미술과 우상》이란 책을 냈다.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술을 역사적으로 공부하고 자신의 일과 관심사를 결합시켜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4년에 걸쳐 자료를 다시 모으고 편집하면서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패션이란 렌즈로 미술전시를 하게 될 경우, 생산적인 교집합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구체화했다.
패션의 역사는 당대의 옷 스타일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패션은 일상에서 입는 옷이란 오브제를 미학적으로 표현, 승화시키는 기본적인 문화 활동인 동시에 지역적 차이와 시대적 변화의 방향을 반영하는 변화의 바로미터다. 인간이 입는 사물이란 점에서 일상성을 사유할 수 있고, 특정한 지리적 경계 내부의 사람들, 즉 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미감의 수준에서 입을 수 있는 것들, 패셔너블(fashionable)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사회성을 띤다. 패션은 그 자체로 삶과 예술, 실천과 미학, 생산과 소비, 개인의 취미와 집단정신을 연결하는 삶의 현장이 된다. 되짚어보면 패션이란 단어가 그저 한 벌의 옷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할 수 있는 오브제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옷에 담긴 이런 정신성들을 전시란 양식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지금껏 저술에 온 힘을 쏟은 것은 옷이란 사물을 전시하기에 앞서, 패션이란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고 지금껏 ‘패션’을 규정해온 우리 사회가 협소한 시각을 넘고자 한 시도였다.
최근에 나온《댄디, 오늘을 살다》도 그런 연장선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유통체계와 패션의 논리로 뒤덮였다. 이때 새롭게 부상하는 지배적 스타일에 저항하는 정신의 소유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을 댄디라고 부른다. 댄디즘은 일종의 생활철학으로서 삶의 많은 부분에 적용될 수 있다. 음식을 먹고 소비하는 섭생의 방식에서 옷차림, 신체를 가꾸는 일,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방식 등 다양한 측면을 성찰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소비문화와 패션에 대한 해석들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우리나라’ 작가들의 감성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큐레이팅이란 어떤 점에서 보면 삶을 위한 편집된 태도를 갖는 것이다. 패션이한 벌의 옷을 넘어, 그것을 입는 인간의 표정과 태도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인간의 행위는 항상 이해관계로 연결된 이들의 시각 속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패션을 큐레이팅하는 일은 제2의 피부라 불리는 옷을 해석하는 안경을 사람들에게 씌워주는 일이다. 좌와 우를 가로지르며(안경에서 코에 걸치는 부분을 브리지(Bridge)라고 한다) 누군가의 가교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 평생 패션이란 황홀한 소울메이트와 업고 빨고 사랑하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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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는 국내 1호의 패션 큐레이터.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연극영화와 의류학을 복수전공했다. 졸업 후 신세계에 입사해 아동복과 상품기획을 익혔다. 현대미술과 패션을 독창적인 시선으로 결합한 저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방송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샤넬, 미술관에 가다》 《하하 미술관》 등이 있으며 《패션디자인 스쿨》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등을 번역했다. 그의 글을 읽고 소통을 원한다면 www.facebook.com/fashioncurator1 혹은 twitter.com/fashioncurator에 들어가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