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암에 대한 시각예술적 리서치_노상익

암에 대한 시각예술적 리서치

외과의사 노상익

‘C25.0 췌장암, 전씨, 81세/남, 서울 홍은동 거주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통증, 황달, 전신쇠약은 해소되었다.
3기 췌장암 수술 후 항암/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14개월을 생존하였고 2011년 1월 12일 사망하였다.’

연작 ‘Biography of cancer’ 중 세 번째 부분 ‘RESULTs’ 작업에 포함된 도큐먼트의 일부이다. 환자의 개인자료, 임상차트 기록, 여러 가지 감시 장치의 모니터링, 다양한 검사결과, 수술 등 일반인이 보기엔 난해하고 이해불가능하며 무미건조한 기록물들이 병원의 캐비닛과 전자차트에서 튀어나와서 전시장에 걸릴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기록물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때문이다. 이 작업은 고통을 받고 있는 ‘암환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동시대에서 감추기에는 너무 흔해진 ‘암’이라고 하는, 불멸하는 질병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성격을 이해하고 행동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려는 시도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비유적, 의학적, 과학적, 사회적 함의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2008년 전 세계적으로 760만 명이 ‘암’으로 사망하였다. 이런 비극적인 세계지표 위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의학 논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리서치였다. ‘암’을 둘러싼 다양한 함의에 대하여 시각예술적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데 그것이 어쩔 수 없이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서 우선 과거의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흘러갔지만 아직 흘러가지 않고 정지 상태에 있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지나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아직도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 있음을 느꼈다.
먼저 자료 수집의 룰을 만들고 리스트를 완성한 뒤 다양한 루트를 통한 접촉을 시도했다. 자료의 양이 많아지고 현대예술이 포용할 만한 수사를 포함시키기 위한 사고의 전개와 고리를 풀기 위해 체계적인 방법론이 필요했는데, 이미 말랑말랑한 머리는 한참 지난 후여서 어쩔 수 없이 가장 익숙한 의학 논문의 형식을 차용했다 (효과적이기는 하다). 의학 논문과는 전혀 별개의 작업을 하려는데 방법은 그것과 똑같은 것을 사용하니 아이러니했다. 작업을 ‘Introduction’ ‘Material and Method’ ‘Result’ ‘Conclusion’ ‘Discussion’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고 현재와 미래의 자료를 위해 전향적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했다.
실제 작업에서는 다양한 함의의 내러티브를 포함하기 위한 이미지의 컨텍스트가 중요했고 도큐먼트와 사진자료의 발굴, 생산뿐만 아니라 수용되는 지점까지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것들에 실패하면 어떤 수사를 가져다 붙여도 단순히 자료를 수집해서 나열하고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업은 ‘암’을 매개로 만나게 되는 의사, 환자, 그 주변사람들의 그칠 줄 모르는 투쟁, 환상, 희망, 절망, 죽음과 생존에 대한 작업이다. 작업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존재하며,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이다. 신원을 보장하려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인지 못하는 와중에 공개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부디 그들의 신원과 영역을 존중해 주기 바라고, 이러한 시각자료가 훗날 2000년대 초반을 살았던 한 외과의사가 남긴 가치 있는 아카이브가 되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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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익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간담췌외과 전문의로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근무 중이다.  암 환자들의 진단에서부터 진료, 수술, 수술 이후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을 선별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2012년에는 란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된다.
홈페이지: http://jasonnoh.com/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조선 초상화는 왜 자랑스러운가_이성낙

조선 초상화는 왜 자랑스러운가

피부과 의사 이성낙

필자가 초상화에 눈을 뜬 계기는 반세기 전 의과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뮌헨 의과대학 마르히오니니(Alfred Marchionini) 교수는 학기 마지막 피부학 강의를 ‘미술품에 나타난 피부 질환’이란 주제로 마무리하였다. 저런 시각에서도 예술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우쳤다. 그 강의는 필자가 피부학을 전공하며 서양 초상화에서 병변(病變)을 찾는 ‘습관’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된다.
1975년에 귀국하며 동양화에서는 피부 병변을 찾아볼 수 없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부끄럽지만 동양화 하면 아름다운 산수화만 생각하였나 보다. 그런데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초상화를 만난다.
《 한국귀인초상대감(韓國貴人肖像大鑑)》을 편찬한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을 만나는 큰 행운이 따랐다. 선생은 조선시대 초상화가 얼마나 꾸밈없이 정교하면서 정직하게 제작되었는지를 강조하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숙종 14년, 1688)에 정확히 기록된 초상화 제작 지침을 필자에게 가르쳐주었다. 즉 ‘한 가닥의 털(一毛), 한 올의 머리카락(一髮)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되었었다’고. 이는 필자의 논문 <초상화에 나타난 백반증(白斑症) (Vitiligo auf einem historischen Portrat)>이 독일 피부학 전문 학술지《DerHautarzt》(1982)에 실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논문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병변인 ‘하얀 피부’와 정상 피부의 경계 부위가 불규칙하게 더 검게 그려진 것은 초상화의 안료(顔料)가 변색된 결과가 아니라, 백반증의 전형적 증상인 경계과색소침윤(境界過色素浸潤, marginal hyperpigmentation)이 선명하게 묘사된 것임을 지적했다. 즉 병변이 임상적으로 활성화하면 더 검게 되었다가 하얗게 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번져 나가는 임상적 현상과 일치한다고 했으며, 조선시대《 승정원일기》를 인용해 임상적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편집위는 이 논문의 임상적 과학성을 인정해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이는 조선 초상화가 과학적으로 인증 받은 생생한 증언이다. 한국 미술사에 큰 이정표라 아니할 수 없다.
spec15-4대학원 과정에서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더 넓게, 더 깊이 연구하면서 초상화에 담긴 사회성에 눈을 돌리게 된다. 유럽 초상화에서는 예상보다 적게 피부 병변을 확인할 수 있고, 동양 초상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초상화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으며, 일본 초상화(고승의 초상화 예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
특히 두창(痘瘡), 일명 마마병(媽媽病, small pox)과 초상화를 키워드로 동양 초상 미술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명(明) 태종(太宗)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두창에 감염되었던 점. 17~19세기에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일본 열도에서도 전염성이 강한 두창이 만연했는데도 두창의 상흔(傷痕)을 중국 초상화에서는 아주 드물게 볼 수 있고 일본 초상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데 반해 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만 두창의 상흔을 쉽게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화가가 대상자의 얼굴을 화폭에 옮기면서 두창의 상흔을 ‘있는데도 못 본 듯’ 주관적으로 그렸고 조선의 화가는 대상자의 얼굴에서 보이는 피부 병변을 우직하리만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옮긴 것이다. 조선 초상화는 과시성과는 거리가 먼, 거부감을 줄 수 있을 피부 증상마저 가감 없이 화폭에 옮겼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더욱 경외(敬畏)스러운 것은 심한 두창 상흔이 있는 ‘외모 장애자’인데도 초상화의 대상자들이 영의정을 비롯해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에서 당시 사회의 포용성을 보았다. 당시 선비 사회의 정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이다. 조선 초상화에는 자랑스러운 조선의 시대정신(Zeitgeist)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다. ●

이성낙은 피부과 의사를 은퇴하고 미술사학을 전공하기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명지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생으로 돌아갔다. 2014년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病變)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다. 독일 뮌헨 유학에서 귀국 후, 1975년부터 전국 박물관과 사찰, 사당을 찾아다니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보고 우리 그림에 나타난 피부병을 연구해왔다. 현재 가천의대 명예총장이자 (사)현대미술관회 회장직을 맡고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_전창림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전창림

미술대학에서 강의하며, 미술대학 교재를 출판했고, 명화를 해설하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색채학회에서 제가 내미는 명함을 본 분들은 대개 깜짝 놀랍니다. 미술 전공이 아니라 생소한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과 미술이 무슨 관계인가? 진학 상담을 할 때도 미술계로 가는 사람이 화학에 관심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미술가와 과학자가 거의 동의어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특별한 천재가 아니라도 중세의 화가들은 직접 물감을 만들며 상당한 화학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공학과 재료에 관한 높은 지식을 갖춘 미술가들이 있었기에 기술적으로도 실현이 쉽지 않은 조형구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저는 미술대학을 진학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술의 꿈을 못 버리고 유학지를 프랑스로 정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화학이 너무 어려워 한눈을 팔지 못하였고 결국 화학과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학에 눈을 뜨고 보니 이 화학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벤젠의 구조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육각형 조형물입니다. 특히 이 육각형 고리에 약간의 방울(산소 원소 표시가 O2이기 때문)이 달린 아스피린 구조를 보면 조화와 균형과 약간의 파격이 어우러지면서 심플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환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화학자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진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화학을 비롯하여 기술공학 분야는 효율성과 유용성을 놓고 다툽니다. 아름다움은 그 다음이죠. 그러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진리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합니다. 이 말의 역(逆)도 진리입니다. 맛 좋은 떡이 아름답습니다. 요즘은 제품마다 성능은 거의 비슷하여 디자인이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기까지 성능을 발전시키려는 피눈물 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야말로 기술과 미학의 완전한 융합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물질은 새로운 성질과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물질로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면 새로운 예술이 되겠지요. 전통적인 재료로 만드는 작품에 수많은 미술가가 끝없이 도전하여 이제는 하늘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재료만으로는 표현양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료를 바꿔야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제 재료에 대한 연구가 미술가에게 필요합니다. 화학이 미술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미술은 시각적 결과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재료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 재료가 나타내는 모든 성질과 형태적 변화를 미술에 응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미술대학에서 미술재료학과 색채화학을 강의합니다. 또한 미술작품에 숨어 있는 과학적 요소들과 화학적 문제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저의 책《 미술관에 간 화학자》가 미술과 화학을 융합하였다고 대입 논술교재로도 쓰인다고 합니다만 저는 ‘미술과 화학의 융합’이라기보다는 ‘미술가를 위한 화학’을 제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화학과 재료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학문으로 정립하여 각 미술대학에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를 담당할 미술과학자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미술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미술가는 자기 작품을 세대를 넘어 보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 기법도 응용할 수 있습니다. 융합과 통섭을 외치는 시대에 우리 미술가들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새로운 재료와 미술재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많지 않지만 미술을 위한 화학과 융합학문을 정립하는 데 뜻을 같이 할 분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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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은 한양대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물감과 안료의 변화나 색의 특성 등 미술과 화학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현재 홍익대 과학기술대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대학원 색채전공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화학회, 공업화학회, 한국화학공학회 회원이자 한국색채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그림이 법의학과 만나니 억울함의 탈도 벗겨지더라_문국진

그림이 법의학과 만나니 억울함의 탈도 벗겨지더라

법의학자 문국진

인권이 침해된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법의학적 감정(鑑定)을 의뢰하게 된다. 이때는 사람만이 아니라 각종 증거물들이 대상이 되며,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서는 시신도 부검한다. 만일 시일이 오래 경과하여 시신이나 증거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게 되는 것이 지금의 법의감정 분야 실정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 고인과 관계되는 문건이나 창작물이 남아 있다면 이를 분석해 법의학이 목적하는 인권의 침해 여부를 가려낼 수 없을까를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정신의학에서의 병적학(Pathography)
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문호나 장인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정신분석을 실시함으로써 살아생전 작가의 정신적 질병이나 당시의 심리상태 등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병적학이다. 현존하지 않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문헌이나 작품 분석을 통해 고인의 정신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법의학계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생각 되었다. 따라서 고인의 유물이나 문헌 및 작품 등을 통해 법의학 분야에서도 사인이나 인권의 침해 여부를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능성 여부를 시험해보기에 이르렀다.
spec19첫 번째 시험 대상은 화가 반 고흐의 작품이었다. 그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사망했기 때문에 타살 또는 사고사라는 의견이 분분했으며 사인에 대해 많은 의문을 남겼다. 필자는 그의 작품과 문헌들을 면밀히 검색하여 그의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급성법발성 복막염’이며 ‘자살’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를《 반 고흐 죽음의 비밀》(2003)
이라는 저술로 펴낸 바 있다. 각종 문건의 분석을 마치 시체를 부검(剖檢)하듯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문헌검색을 ‘문건부검(Book Autopsy)’이라 칭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창작물 등의 흔적을 탐지하고 탐구하여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법의학의 이런 분야를 ‘법의탐적론(Medicolegal Pursuitgraphy)’이라 칭하기로 했다. 법의탐적론의 대상이 되는 각종 창작물 중에서도 미술작품이 가장 좋은 분석 대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화가는 역사화나 인물화 등을 그릴 때 시대가 부여하는 목적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고증을 참작하고 철학적 지성과 자신만의 미적 혼(魂, 예술적 영감)을 융합해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에 미술작품은 곧 그 환경과 시대를 증언하는 무언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보는 이의 안목과 전문성에 따라 그 해석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행위자체가 제2의 창작행위라 할 수도 있다. 이는 그림을 보는 감상자 각자의 경험과 전문성에 따라 마음속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감상결과가 생겨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의 미적 기교보다 현 시대적 비판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 그 결과 명화들 가운데는 인권에 대한 침해를 경고하고, 인권의 수호를 찬미하는 등의 여러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도 있었다. 즉 스페인의 거장 고야의 <벌거 벗은 마하>(1800)의 모델이 누군가에 대하여 작가가 함구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 비화해 200여 년간 의문의 화제가 되어 오던 것을 작품들의 법의탐적론적 분석으로 모델은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가려내어 오랫동안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리던 알바공작 가문이 이제는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고인이 된 알바 공작부인의 영혼도 시름을 풀고 고이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술작품의 법의탐적론적 분석으로 억울했던 누명을 벗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 학문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쾌거라 하겠다. 동시에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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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은 대한민국 1호 법의학자이자 국과수 창립 멤버이다. 1925년생으로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과수에 들어가 법의관으로 활동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본 후루하다 다네모노가 쓴 《법의학 이야기》에서 “사람에게는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법의학의 길에 들어섰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예술가의 사인(死因)과 작품을 의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해석하는 ‘법의 예술 병적학’ 분야로 여전히 수사 중이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판소리와 풍속화, 조선후기 아방가르드 예술

판소리와 풍속화, 조선후기 아방가르드 예술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현주

판소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나에게 그림은 더 이상 한가롭게 감상하고 즐기는 여기적 대상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풍속화는 내 학문 속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자기를 학술적으로 대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건 어찌보면 불행한 일이다. 학문적으로 연결되면 그림이라는 즐거움의 대상도 괴롭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풍속화를 학문적인 시선으로 골똘하게 바라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판소리와 풍속화가 지닌 비슷함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풍속화가 판소리 연구자인 내게 의미를 지닌 존재로 다가온 건, 처음에는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다. 대학 시절 서예와 동양화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산수화도 좋았지만 풍속화에 관심이 더 많이 갔다. 풍속화에 보이는 유려한 붓놀림을 흉내내면 붓글씨를 활용한 새로운 묵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품어봤던 것이다. 어쨌든 김홍도와 신윤복을 비롯해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김득신 등 많은 풍속화가의 작품을 뜯어봤던 그때 경험이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되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특히《춘향전》에서 이도령과 방자가 광한루 구경을 나갔다가 그네 뛰고 목욕하는 춘향을 발견하고 혹하는 묘사 장면이라든가, 야밤에 춘향집으로 은밀하게 이동하고 춘향과 통정하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곧바로 혜원의 <단오풍정>, <월하정인>, <야금모행>, <연소답청>, <삼추가연> 등의 그림들을 머리에 떠올렸던 것이다. 마치 춘향전 작가가 그런 그림들을 보고 서술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화공이
《춘향전》을 읽고 그런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는 거꾸로의 논리도 가능하다. 이렇게 신기한 그림과 사설의 연상작용이 판소리와 풍속화를 연결하는 내 이력의 첫걸음이 되었다.
spec16처음엔 정황상의 유사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좀 따져보니 판소리와 풍속화 양자가 만나는 지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상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아주 자세하게 뜯어보는 사실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든지, 당시 금기시되는 환경 속에서 과감하게 성적 노출을 감행한다든지, 대상을 희화화하여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든가, 여러 각도의 시선들을 배치하여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관점을 드러내는 구조상의 상동성 같은 것도 볼 수 있었다. 양자가 비슷해진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분위기가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둘 사이의 상상력 차원의 교류도 작용하지 않았겠나 판단된다. 소설 작가에게 당시의 풍속화나 민화가 주는 회화적 상상력이 어느 정도는 작동하지 않았을까.《춘향전》의 언어 자질을 정밀하게 따지다보면 강렬한 시각적 어휘소(語彙素)들이 널려 있음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강렬한 원색의 색채소, 매우 역동적인 형상소와 동작소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건 당시의 색채와 운동감각을 주도했던 풍속화와 민화를 빼고 말하긴 어렵다고 본다.《춘향전》 언어의 이러한 회화성은 춘향전의 영상화 작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난 보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 춘향이 그네를 뛸 때 흰색 붉은색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장면을 카메라가 잡고 있는데, 그건 ‘백백홍홍난만중(白白紅紅爛漫中)’이라는《춘향전》 언어를 가지고 고민한 결과가 아닌가. 소설 작가에게 회화적 상상력이 작동한다면, 풍속화가에게는 소설적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소재 그림 대다수는《이춘풍전》이나《왈자타령》,《절화기담》 등과 같은 당시의 세태소설들과 테마, 분위기, 정조, 표현방식 등에서 상당한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혜원은 유곽이 있는 뒷골목과 거기 사람들의 생태를 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책가의 소설본들을 빌려 읽는 데도 관심이 아주 많았던 듯하다.
내가 풍속화와 판소리에 견인되었던 이유의 하나는 화공과 광대의 그 치열했던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숱한 난관에도 불굴의 의지로 그림과 소리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판소리 광대들은 천민으로부터의 계급적 해방, 그리고 무당 집안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비원을 소리에 담아내고 있고, 풍속화 화공들도 신분의 한과 사회적 냉대 등의 환경 속에서 시대정신을 화폭에 담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들의 도전적인 실험정신과 투철한 장인정신이 없었다면 전대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찬연하게 등장한 아방가르드 예술로서의 풍속화와 판소리가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문화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조선후기 문학과 판소리를 보고 있는 한 풍속화는 아마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내게 다가올 것 같다. 거울처럼 상대가 되는 장르를 비추면서 문화론적인 반사작용을 할 것이므로. ●

김현주는 서강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춘향전의 연행론적 연구》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썼다. 현재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전서사체 담화분석》 《구술성과 한국서사전통》 《판소리 담화 분석》등을 저술했다. 판소리와 풍속화를 소설과 회화적 상상력으로 서로 소통하는 존재로 보고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연구한 《판소리 소설을 읽으며 풍속화를 보다》를 펴냈다. 이 저서에서 정조시대 문학과 회화에 주목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흐르는 물이 담긴 어항_신현림

흐르는 물이 담기는 어항

시인 신현림

푸른 물고기떼가 내게 헤엄쳐오듯 미술에 대한 즐거운 기억부터 떠올려보자. 중3때 반장이었던 나는 잔소리 심한 담임의 수업시간이면 반항한답시고, 일종의 미술의 역사 개략서인 교재를 읽곤 했다. 몰래 먹는 찹쌀떡처럼 야릇한 기쁨에 떨기도 했다. 고흐, 구스타프 크림트, 마티스, 뭉크, 마그리드, 자코메티를 통해 미술의 마력에 이끌렸고, 들판을 뛰어다니듯 자유한 미술세계의 신비한 매력을 맛보았다. 하지만 코믹하게도 미술대회마다 학교 대표로 나가 상을 타도 방학 때와 졸업 후에 후배로부터 상장만 전달받던 일이나 고1때 미술학원을 돌며 가격만 묻고 돌아온 쓸쓸한 날과 우리 반이 특별 구급반으로 뽑혀 미술반 가입 기회를 삭제당하는 등등 우울한 기억들이 참 많다. 예술가는 밥을 굶는다고 엄마는 미대 진학을 반대하셨고,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투사였던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의 반복으로 고단해진 엄마의 인생 앞에 미술대학 진학의 내 꿈은 사치였고 죄였다. 그러다 재수시절 엄마에게 떼를 써서 싸게 서양화과 입시를 위한 데생과 수채화를 배웠다. 낙방과 도전 끝에 응미 쪽에 합격했으나 반년 다니다 자퇴, 원하던 학교 진학에 실패한 4수생은 심각한 불면증을 얻어 병원과 성당을 오가며 13년을 죽을듯이 앓아봤다.
국문과 선택은 단지 내가 무식한 거 같아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인생에는 반드시 세렌티피티가 있다. 2학년 문예사조사 수업 때 바로크사조 발표를 준비하며 나는 ‘모든 예술은 한곳에서 만난다’ 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통섭에 감을 잡은 것이다. 이후 시, 소설만이 아닌 허버트 리드, 곰브리치 예술사……. 무엇보다 철학책은 필독서라 여겼으므로 쉬운 책부터 독파해나갔고, 전보다 더 열심히 전시장을 찾으며 카탈로그도 꼼꼼히 읽곤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니 보이더라. 예술이 먼지, 내가 뭘 해야할지. 이제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며 절망은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는 시작이라고 나는 간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지리도 불면증을 떨치지 못한 채,의원직을 딱 한 번 하신 아버지 덕에 취직하여 번 월급으로 판화 1년, 유화 1년을 배울 정도로 미술에 압도되는 애착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 31세 때 사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사진을 찍고싶은 갈망이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이번에는 사진에 미쳐서 어머니께서 해주신 아파트 전세비를 빼서 사진 공방을 다닐 때 새로 이사간 흉가 같은 데서 부들부들 떨며 살기도 했다.
낮엔 애들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고 틈틈이 시를 쓰고 밤에는 사진 공부하면서 3수 때는 지원 대학원을 바꿔 들어갔다. 사람이든 학교든 인연이든 금세 풀리더라. 편집증적일 정도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 방구석에는 아직 정리 못한 사진파일이 가득하다. 남은 어렵지 않게 입학하는 학교를 나는 왜 이다지도 지지리 힘들게 들어갈까. 나는 왜 이럴까, 회의하며 정말 남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눈물겹게 싫었다. 하지만 고뇌와 고통은 인생을 깊이로 파헤쳐가는 과정이며 기회였음을 이제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한다. 늘 내 인생의 표어처럼 냉장고 문에 붙여둔 마르쿠제의 글메모가 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부드럽게 가슴에 비쳐들지만 글은 예리한 문 모서리같이 슬쩍 가슴을 긋고 지나간다. “예술적 진실과의 만남이란, 일상생활에서 아직껏 느껴지지도 이야기되지도 또 들리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만드는 낯설음을 자아내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서 이루어진다.”
낯설음, 새롭게 하기. 예술에서 진정성과 함께 너무나 귀한 덕목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으나 새롭게 발견하는 시선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나는 세계 사진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사진 영상에세이를 세 권 냈다. 중앙일보에 1년5개월 연재를 다시쓴 현대 세계사진사를 주제별로 묶은《 나의 아름다운 창》 외에《 희망의 누드》《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이 있다. 또한 사진과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에《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이란 책도 낸 바 있다.)
우리 존재는 흐르는 물이며, 물고기며, 물풀이다. 예술은 그렇게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존재를 환기시키는 고민이며, 되살리는 기억이고, 그 기억을 담으려는 어항이다. 시와 미술, 사진의 어항 모습은 다르나 인생의 관점과 진실의 이미지를 다룬다는 면에서는 다 똑같다. 넉달 전에 쓴 내 시를 읊어보면 조금은 쉽게 가닿을지도 모른다.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시간에
죽은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떼를 품고 싶어해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우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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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은 시인이자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미술관련 저서로는 사진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희망의 누드》 미술 에세이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등이 있다. 사진작가로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사과밭사진전>등 3회의 사진전을 열었다. 2012년에는 울산국제사진 페스티벌 한국작가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고양이를 부탁해_고경원

고양이를 부탁해

고양이 전문기자 고경원

‘길고양이’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도시의 무법자, 혹은 달갑잖은 불청객. 언론매체에서 길고양이 뉴스를 다룰 때 묘사하는 방식은 대개 그랬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이 진실만을 기록한다고 믿지만, 어떤 관점으로 편집되느냐에 따라 사진의 메시지는 달라진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경험했기에, 부정적인 필터를 거쳐 편집된 길고양이가 아닌,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웹진 기자로 일하던 2002년 여름부터 길고양이를 찍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이다 보니 꼬질꼬질한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세상모르고 곱게 자란 집고양이보다 고단한 삶을 의연하게 이어가는 길고양이들이 내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기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동지를 발견했을 때의 연대감에 가깝다.
고양이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사진이 별 감흥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 사진을 찍는 이유가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길고양이의 삶을 더 생생하게 전하니까. 그리고 그 사진이 무심했던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거리의 고양이에게도 사연과 감정이 있고, 소중한 삶이 있음을 눈으로 보게 된다면 생명의 무게가 좀 더 묵직하게 와 닿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찍은 길고양이 사진은 1인 미디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공유되며, 단행본으로 제작되어 오프라인에서도 독자들과 만난다. 첫 책《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갤리온, 2007)를 펴낼 때만 해도 길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다룬 한국 작가의 사진 에세이가 전무했기에, 출판기획자로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보람이 있었다. 최근에는 지난 10년간의 길고양이 관찰기를 모아《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앨리스, 2013)을 펴내기도 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다양한 분야와 접목될 때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고양이와 여행, 예술 이야기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2007년 여름부터 ‘세계 고양이 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고양이 여행자의 눈으로 각국의 애묘(愛猫)문화와 고양이 명소를 소개하는 작업인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 여행》(아트북스, 2010)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공존’이라는 주제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일본 외에 타이완, 스웨덴, 프랑스 등 다른 나라의 고양이 여행기도 순차적으로 쓰고 있다.
spec12고양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 창작하는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세계를 알리는 것도 요즘 주력하는 일 중 하나다. 고양이를 사랑한 예술가의 작업실 탐방기《 작업실의 고양이》(아트북스, 2011)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순수예술 작가뿐 아니라 고양이 만화를 그리거나, 길고양이를 위한 제품 디자인을 하는 분들도 인터뷰하고 있다.
길고양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물운동가처럼 활동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고양이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꾸준히 한 목소리를 낼 때, 길고양이 문제는 동물운동의 영역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2009년 9월 9일에 시작한 ‘고양이의 날’ 기획전도 그런 마음을 담은 것이다.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민간 속담이 있지만, 그 말이 무색할 만큼 길고양이들의 삶은 짧고 고단하기만 하다. 1년에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생명을 생각하는 날이 있기를 바라며 9월 9일을 ‘고양이의 날’로 삼아 매년 기획전을 열고 있다. 9월 9일은 고양이의 강한 생명력을 뜻하는 아홉 구(九)와, 고양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오랠 구(久)의 음을 따 정한 날이다. 또한 동음이의어인 구할 구(求)의 뜻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자비로 진행하는 행사이다 보니 예산이 빠듯해 무상대관이 가능한 전시장을 섭외하는 게 가장 어렵지만, 올해도 뜻 맞는 분들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

고경원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2001년부터 웹진 및 잡지기자로 일했다. 2002년부터 여름 길고양이의 삶을 글과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고양이와 관련된 저서로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하다》 《고양이, 만나러갑니다-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여행》 《작업실의 고양이》등이 있다. 국내외 고양이 문화와 길고양이 이야기를 그녀의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블로그: http://www.catstory.kr/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_주영하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

민속학 교수 주영하

어릴 적에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사생대회에 나가서 제법 큰 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릴 적 일이지 대학원에서 음식의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미술은 추억이었다. 그런데 옹기 장인을 조사하면서 그들이 펼치는 미학에 빠져서 전국의 장독대를 뒤진 적이 있다. 아무리 사물이라도 자주 보면 더 자세히 보이기 마련이다. 매번 만나는 옹기의 문양과 형태를 필드노트에 그리다 보니 어느새 옹기 그리는 일은 밥 먹듯이 쉬웠다.
1990년쯤, 옹기 때문에 만난 그림이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다. 너무나 매력적인 기산 풍속화에 빠져들면서 먼저 옹기와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였다. 그것을 화집으로만 보니 옹기를 그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 제법 큰돈을 들여 몇 장의 기산 그림을 큰 그림으로 인화 하였다. 이것을 공부방 벽에 붙여 놓고 매일같이 내 얼굴 들여다보듯이 보았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다가 점차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나왔다. 바로 ‘독점’이란 화제의 그림이었다.
급기야 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어 옹기 장인을 찾아 나섰다. 마침 그해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충남 홍성 갈산의 고 이종각 장인을 알고 있던 터라 그 일은 쉬웠다. 이종각 장인도 처음 이 그림을 보고는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왔다. 가마의 제작과 창불구멍의 기능, 그리고 일꾼들의 역할 분담까지. 이 인터뷰가 바탕이 되어 나는 기산의 ‘독점’ 그림 하나를 가지고 200자 원고지 80매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오로지 백성을 배 불리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대안으로 음식을 다루었다. 비록 허균과 같이 전국의 맛있는 음식을 짧은 글로 적은 선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정(食政)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적어놓은 음식 관련 기록이 실제로 행해진 일인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실제로 행해진 것이라 해도 그 현장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2000년부터 다시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기산의 ‘독점’을 두고 했던 작업 방법을 떠올렸다. 먼저 중앙일보에서 펴낸《한국의 미-풍속화》편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고구려 때의 고분벽화는 물론이고 안중식의〈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까지 수십 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spec10이들 그림 역시 매일 거울을 보듯이 읽었다. 그래도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남의 밥그릇을 넘보는 듯하여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 대학 비문자(非文字) 연구센터(당시 상민문화연구소)에서 진행하던 기록화 자료 읽기 작업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그림 자료와 사진자료를 사료로 보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이용했다. 특히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일반 백성의 일상생활을 그림 자료를 통해서 읽어내는 작업은 마치 현장을 복원하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내의 한 식품회사 사보 담당자가 음식을 주제로 연재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 자료를 가지고 음식의 역사를 풀어보자고 응답했다. 그 편집자가 작명한 연재의 제목이 그 이후 단행본의 책 제목이 된《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그림 속에 음식 자체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화원들이 사진 찍듯이 그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상 식사 장면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러니 나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음식과 관련된 그림은 음식을 소비하는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현장감은 조선시대 음식사를 연구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다. 더욱이 음식의 색감은 그림 속에서 분명히 감지된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 그림 자료는 현장은 물론이고 음식의 색과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이해하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사료이다. ●

주영하는 1962년 경남 마산의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풀무원 김치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음식사를 접했다. 1993년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김치, 한국인의 먹거리-김치의 문화인류학》《음식전쟁 문화전쟁》《음식인문학 》《맛있는 세계사》 등의 저서가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감동으로 하나 되는 예술_권순훤

감동으로 하나 되는 예술

피아니스트 권순훤

피아노를 전공한 내가 미술가와 미술작품을 다루는 책을 쓰게 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다. 2007년 12월, 런던의 왕립음악학교에 시험을 치르러 간 나는 귀국 전 파리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술관 해설을 담당하는 ‘이용규’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그가 하는 일에 대한 관심보다 파리를 속속들이 아는 친구와 도시의 정취를 한껏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관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친구의 말에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했다.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과연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으로 작품을 보았다. 작품 감상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한 친구의 설명을 듣고 그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친구는 어떤 직업의 주인공을 그렸는지, 침대 위의 고양이가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림 속 주인공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그림에 담긴 사회적 분위기와 비판적 어조의 상징 등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고흐의 그림에 보이는 강렬한 붓터치는 고흐의 정신적인 압박감과 심신의 질환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르누아르 그림의 모델은 당시 르누아르의 애인이자, 로트렉과 다른 거장의 애인이기도 했던 누구였다는 점 등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무릎을 탁 쳤다. 클래식 음악도 이와 유사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이 있는데, 이를 공연에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이 여행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진행하게 된 공연이 ‘미술관에 간 피아니스트’였다. 훌륭한 프로듀서들과 함께 작업한 이 공연은 유료관객 매진이라는 즐거운 기록을 남기며 무척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미술관에서 얻은 감동이 클래식 공연장에서도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한발 더 나아가서 이 두 가지를 통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저서가 얼마 전 출간된《 나는 클림트를 보면 베토벤이 들린다》다.
spec5왜 클림트를 보면 베토벤이 들릴까. 나는 이 두 예술가가 가진 ‘미완의 사랑’에서 힌트를 얻었다.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베토벤과 줄리에타 귀차르디에. 클림트는 동생의 처형이던 에밀리 플뢰게와의 이룰 수 없던 사랑을 <키스>라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이 그림은 두 남녀가 절벽에서 불안하게 키스하는 장면을 담았는데 남성은 여성의 입술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볼에 키스를 하며, 여성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두 사람이 처한 당시의 상황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이 작품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감상자로서 예술작품을 느끼는 데 ‘감동하는 마음’이 중요하기에 감상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와 그가 작곡한 <월광 소나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베토벤이 당시 만났던 명문가의 소녀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와의 사랑의 감정이 녹아있는 곡으로 베토벤은 그 소녀에게 이 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당시 음악가라는 직업의 사회적인 위상이 귀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에는 힘든 위치였다. 월광곡에는 베토벤 스스로 명문가의 자제인 줄리에타와 정말로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음에도 경제적인 풍요, 사회적인 배경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여러 감정이 녹아 있다. 특히 1악장에는 이러한 베토벤의 암울한 정신적 고뇌가 녹아 있다. 그리고 이 곡이 완성될 때쯤 줄리에타 귀차르디에는 집안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여 다른 귀족과 결혼을 했다. 베토벤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3악장은 그 분노를 담아 작곡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3악장은, 과연 이 악장에 <월광>이라는 제목이 가당키나 한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든 예술은 ‘감동’이라는 조그마한 ‘점’이 되는 곳에서 최후에 조우한다고 말하곤 한다. 미술, 음악, 영화, 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의 최종 목표는 ‘감동’이다. 또한 그런 ‘감동’ 뒤에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작가의 삶과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미술 속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가의 삶을 떠올리고 음악인으로서 음악을 다양한 각도로 이해한 듯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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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훤은 피아니스트, 네오무지카 대표, 서울종합예술학교 겸임교수로 그의 이름 뒤에는 많은 타이틀이 따른다. 가수 보아의 큰오빠도 그의 타이틀 중 하나.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영국왕립음악원에 합격했으나 전문 피아니스트가 되기보다는 클래식 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선택했다. 다양한 장르 간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고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옛 그림은 나의 친구이자 멘토_손태호

옛 그림은 나의 친구이자 멘토

여행사 대표 손태호

꾸벅. 고개가 살짝 꺾이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지만 교실 화면에 떠있는 사진자료는 이내 초점이 흐려지고 만다. 점심시간 이후 오후 수업시간은 항상 이 모양이다. 졸음을 참으려 해도 자꾸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람” 눈을 비비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려본다. 4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다른 아빠들은 자녀 교육문제로 고민할 나이에 강의실에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지금도 그리 익숙하지만은 않다. 어린애들 손잡고 사적지나 문화재를 재미삼아 보러 다니던 내가 점점 옛 그림에 빠진 것은 30대 후반. 미술책에서만 보던 옛 그림을 간송미술관에서 직접 보면서 느낀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후 시간만 허락되면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 호림, 호암미술관 가는 것이 취미였고 옛 그림 전시회가 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지방까지 달려가 관람했으며 인사동, 북촌, 동대문, 장안동 고서화점들을 찾아가 그림 감상하러 왔다고 소장품을 보여달라는 뻔뻔함도 그 당시 새로 발견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며 너무 감동스러워 눈이 빨개지기도 했고 화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서 먹먹하기도 했으며 그런 감정들은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곤 했다. 지쳤을 땐 어깨를 툭 쳐주는 친구가 되기도 했고 소심할 때는 같이 용기 내서 앞으로 걸어가자고 손을 잡아주는 동료가 되주기도 했다. 게으르고 나태할 때는 회초리 들고 호되게 나무라는 선생이기도 했으며 온 세상이 회색으로만 보일 때는 손가락으로 멀리 아름다운 곳을 가리켜주는 멘토이기도 했다. 어느새 옛 그림은 나에게 그런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혼자 좋아 그림을 보러 다니면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스스로의 안목 부족을 절감하고 보다 전문적인 시각과 이론적 토대의 필요성을 느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 학교를 가는 야간 대학원이었지만 새로운 그 무엇을 배운다는 설레임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학교를 다녔다. 딱 반은 즐겁고 반은 힘겨웠던 석사과정 중 그림을 통해 느낀 감동을 한 편 한 편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서 벗들과 소통했던 글들이 어느새 제법 양이 쌓여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내 이름과 사진이 인쇄된 책을 받아들고 내가 너무 전문가 행세를 한 것 같아 조금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동안 그림을 보며 웃고 울고 감동스러웠던 순간들을 정리했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책을 출간한 후 여러 매체와 글로 인연을 맺기도 했고 저자와의 만남 형식으로 강연을 통해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하였다. 나로서는 참으로 예상치 못했던 도전이자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에 이젠 한술 더 떠 지금은 미술학과 박사과정에 도전 중이다. 굳이 박사과정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석사 때 공부했던 불교조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으니 미혹되지 않아야 할 나이라는 불혹이란 말이 참으로 무색하다. 일 년에 한 번도 미술전시회를 가지 않았던 30대 중반 시절부터 생각해보면 참으로 엉뚱한 길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에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는 본업인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고객들에게 세계 곳곳을 소개하며 그곳의 문화와 풍물에 대해 설명하고 상담을 한다. 여행업이 실제 출국하기 전까지는 말로 떠드는 서비스업이다 보니 늘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가 쌓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지근거리고 속상한 마음이 있어도 힘겹게 찾아간 심산유곡에 자리한 사찰에서 너무나 잘생긴 불상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옛 그림 전시회에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그림 한 점을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니 어찌 하겠는가. 늦깎이 학교생활도 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마어마한 학비 고지서를 보며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제외하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같은 관심사의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미와 여가활동이 다 있겠지만 그중에서 그림과 조각, 즉 미술을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여행과 운동은 좋아해서 여행을 다니거나 여러 운동을 취미로 여기는 것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동, 식물을 가꾸고 키우거나 장난감을 모은다거나 쇼핑이 취미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즐거울까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 나에게 안 맞다고 해서 안 좋다는 건 아니고 다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다.
오늘도 난 사무실에 앉아 이런저런 일로 씨름하고 있다. 조각과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딱딱한 일을 반복한다. 여행업이란 게 고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이란 사명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가끔은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자조감이 들기도 한다. 역시 즐기면서 하는 것과 해야 하기에 하는 일은 하늘과 땅만큼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조선후기 화가 조영석과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일하는 자의 모습에 고단함만 있는 그림이 어디 있는가? 윤두서와 윤용의 <나물 캐는 여인>에서 삶에 억눌린 기색이 어디에 있는가? 모두 힘겨운 노동 속에서도 땀의 신성함과 노동의 즐거움도 함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역시 옛 그림은 여전히 나에게 멘토이자 선생이다. 앞으로도 그런 옛 그림과 함께 잘 살아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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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찾다가 여행사, 항공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 인도 서역 전문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다. 2005년 간송미술관 봄 전시에서 단원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를 보고 우리그림에 푹 빠져들었다. 40대에 들어와 불교미술로 관심사가 넓어져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입학해 2011년 조선후기 조각승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불교미술과 조선회화를 쉽게 풀이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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