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변천

2005년 이후 우리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2007년과 2008년 전반기 미술시장의 유례없는 활황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가 하반기 닥친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허망하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연관하여 미술계 분위기는 어땠으며 어떤 상황 등이 펼쳐졌을까? 필자는 이를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풀었다고 말한다.
미술계의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문혜진 미술이론
자신이 속한 시대를 역사화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006년부터 현재까지 지난 10년간 한국현대미술의 변천을 정리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평가와 정리는 시간적 거리감을 확보한 ‘밖’에서 가능한 일이지 떠내려가는 강물 ‘안’에서 함께 휩쓸리는 당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매가량의 짧은 분량에 갈수록 확장·가속화하는 동시대미술 신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보였다. 10년간의 잡지 목차와 산처럼 쌓인 복사물을 바라보다가 가능한 선에서 범위를 좁히기로 마음먹었다. 상대적으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간의 한국미술 변화를 간략히 정리해볼까 한다.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전시나 작업 선정은 주관이 가미되는 일이라, 매체에서 배제된 전시까지 고려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시간도 지면도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미술시장의 과열을 화두로 2000년대 중반을 열어볼까 한다. 세계 경제의 호황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책 및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한국 미술시장은 2005년 말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전무후무한 상종가를 기록한다. 상승기류가 정점에 달한 2007년 서울옥션과 K옥션은 낙찰률 70%를 돌파하며 전년대비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같은 해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빨래터>는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경신했고, 11월에는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컨템포러리 경매에 출품된 국내 작가들의 작품 52점 중 47점이 한화 약 49억8600만원에 낙찰돼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2007년 한 해 동안 92개의 화랑이 신설되었고, KIAF는 입장객 6만을 돌파했으며 신생 경매사가 속속 등장했다.1
이러한 이례적인 호황은 같은 시기에 나타난 두 가지 현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미술 붐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출이다. 신흥 미술시장으로 각광받는 중국 미술시장에 편승하기 위해 2006년부터 2007년 사이 베이징 동부의 지우창, 차오창디, 798 지구에 일련의 한국 화랑들이 입성한다.2 아울러 장샤오강, 팡리준, 웨민쥔, 왕광이 등 블루칩으로 부상한 중국 작가들의 국내 전시도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2008년 후반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고 정치적 팝아트의 유행이 시들해지자 중국미술 열풍은 금세 꺼지고 만다. 불과 몇 년 후인 2010년 전후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 화랑 대부분이 철수했음을 떠올리면, 한국화단이 외부 자극에 얼마나 취약하며 시류에 예민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편, 시장이 활성화하자 새로운 투자 대상을 물색하던 화랑은 상대적으로 작품가가 낮은 젊은 작가들에 주목했다.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입절차는 1990년대 말에 등장한 1세대 대안공간들이 이미 마련해 놓은 장치지만, 2000년대 중반 시장의 과열은 과거 유지되던 일종의 검증 절차(대안공간이 발굴한 작가를 일정 기간이 흐른 뒤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이 흡수하는 과정)를 무시하고 미술관과 화랑이 직접 젊은 작가를 선발하는 현상을 낳았다. 이 시기 가장 흔한 전시 제목은 ‘신진 작가 발굴’, ‘뉴스타트’, ‘영 아티스트’, ‘젊은 작가 발굴’ ‘이머징 아티스트’ 등이었고, 그 결과 젊은 작가의 기준은 35~45세에서 25~35세로 하향 조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도권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흡수하는 시기, 1세대 대안공간들이 급격히 노화하여 사실상 대안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2005년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한 대안공간 루프는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 됐다. 다음해 인사미술공간과 대안공간 풀이 임대료 인상으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고 한동안 고립되자, 대안공간이 주류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대안공간이 하던 새로운 작가 발굴 및 전시방식이 이미 일반화한 상황에서 젊은 작가를 직접 지원하는 상위 기관이 늘어나자 이들 기관과의 차별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새로운 미술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담론의 중심은 더욱 빠르게 전환된다.
2000년대 중후반은 오늘날 한국미술계를 가능케 한 물적 토대가 대폭 확충된 시기다. 우선, 현재 주목받는 주요 전시 공간 중 다수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일례로 중형 기업 미술관 중 상당수가 2006~2007년에 세워졌다. 아뜰리에 에르메스(2006), OCI미술관(2006), 코리아나미술관(2006), 두산갤러리(2007), KT&G상상마당 갤러리(2007) 등이 그 예다. 국공립 레지던시 공간이 대폭 확충된 것도 비슷한 시기다.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실질적으로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으나3, 물리적인 자원이나 프로그램 운영, 실질적 효과 면에서 현재의 지위가 구축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라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창의문화도시 구현의 일환으로 서울 곳곳의 유휴 공공건물이나 공장이전지를 재활용해 창작공간을 조성한 서울시창작공간이다. 2006년에 출범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필두로, 2009년 서교예술실험센터,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 2010년 문래예술공장, 성북예술창작센터, 2011년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연이어 개관하면서 작가를 지원하는 물적 조건이 확장·개선되었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공립 레지던시 두 곳이 문을 연 것도 같은 시기다. 국내 최대 규모의 경기창작센터와 인천아트플랫폼이 2009년 개관하면서 수도권 레지던시 하드웨어의 기본 골격은 완성된다. 이들 레지던시가 대안공간이 무력화된 빈틈을 메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지던시는 일차적으로 2008년 이후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활동하기 힘들어진 젊은 작가들을 물리적으로 지원(작업실 제공 및 전시 후원)했고, 이차적으로는 단순한 작업실 제공을 넘어 인맥 형성과 비평가 연계, 국제교류 프로그램, 다양한 워크숍 등을 통해 과거 대안공간이 담당하던 기능(인적 네트워킹 및 정보 교류)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한편 대형 미술관 및 비엔날레들도 2000년대 후반을 통과하며 꾸준히 증가한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8년, 문화역서울 284는 2011년 개관했고, 비자금 파문으로 잠정 휴관됐던 삼성미술관 리움 및 플라토 (구 로댕갤러리)도 약 3년 만인 2010년 재개관했다. 지방미술관 중에서는 2011년 문을 연 대구미술관이 <쿠사마 야요이전>(2013)의 흥행 돌풍 이후 지역을 넘어선 신화를 새로 쓰고 있다. 2013년에는 미술계의 숙원이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는데,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전반이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인 기획으로 무게중심이 조율되었다. 또한 짝수 해마다 의무적 그랜드 투어를 조성하던 대형 비엔날레는 홍보 및 관광 효과를 노린 지자체 간 경쟁에 따라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기존의 3대 비엔날레인 광주(1995~), 부산(2002~), 미디어시티(2000~)에 이어 금강자연예술비엔날레(2004~), 대구사진비엔날레(2006~), 프로젝트 대전(2012~)이 차례로 문을 열었고, 플랫폼 프로젝트(2006~0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2009~10) 등 준(準)비엔날레급 행사들이 양적 팽창에 가세했다. 동원을 위한 동원, 작품과 유리된 주제, 역치를 넘어선 피로감 등 비엔날레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지만, 백화점식 전시의 효율성 때문인지 대안 없는 행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규모로는 비주류이나 최근 담론을 주도하는 독립 미술공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의 대두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있는데 2010년 하반기 즈음 활성화된 SNS가 인지도 및 트렌드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예로는 2010년대 초 짧고 굵은 존재감을 보인 이태원의 공간 해밀톤이나 꿀풀, 2010년 오픈한 더북소사이어티와 미디어버스의 독립출판 관련 활동들이 대표적이며, 최근의 사례로는 2013년 말에 생긴 커먼센터와 시청각, 2012~2014년 동시다발적으로 설립된 신생 공간들을4 꼽을 수 있다. 청년 세대의 감성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와 탈장르적이고 유연한 태도가 이들의 장점이겠지만, 일부 여론 주도자와 특정 집단의 취향이 (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불편함을 표출하는 주된 이유다. 이런 우려를 종식시키는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이 기존 미술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 제도권에 편입하기 힘든 젊은 작가들의 생존 실험인 신생 공간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는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새로운 플랫폼과 운영 방식이 (일시적이나마) 신선한 탈주 가능성을 낳을지 아니면 또 다른 진입 수단을 만드는 데 그칠지. 한 가지 희망사항을 덧붙이자면 운영 주체의 자립과 발언 외에 보는 주체의 권리도 고려했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게 찾아간 관객이 받을 보상이라면 결국 작품과 전시/행사의 질이 아니겠는가. ●

주)
1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두 글 참조. 반이정, ‘2007년. 사건과 시장의 해. 솔드아웃의 일장춘몽’, 《월간미술》, 2013년 9월, 182~185쪽; 서진수, ‘2007년 한국미술시장의 성과와 과제’, 《월간미술》, 2008년 3월, 164~166쪽.

2이음갤러리(798지구, 2005),아라리오 베이징(지우창, 2005), 표갤러리 베이징(지우창, 2006),갤러리 아트사이드(798지구, 2007), 두아트 차이나(2007, 차오창디), PKM갤러리 베이징(2006, 차오창디), 금산갤러리(798지구, 2007) 등이 대표적이다.

3초기의 대표적인 레지던시 공간으로 1998년에 문을 연 암사동 창작스튜디오(쌈지스페이스의 전신), 2000년에 개관한 영은창작스튜디오,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와 고양레지던시를 꼽을 수 있다.

4구탁소, 교역소, 지금여기, 합정지구, 개방회로, 800/40, 노 토일렛 등이 대표적이다. 작가 겸 운영자가 기존 제도에 한계를 느껴 공간을 직접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로 임대료가 싼 지역에 위치하며 느슨하고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

노형석 《한겨레》 기자
10년 전 필자가 쓴 《월간미술》 특집 기고글의 서두는 이런 코멘트로 시작했었다. 당시 제도권 미술에 냉소하며 대안세력임을 자부했던 청년 미술인들의 구호를 집약한 말이었다. 2015년, 지금 글의 서두는 “이젠 우리끼리 터 잡고 놀거야!”로 바꿔야할 듯싶다. 10년 전 선배들은 대안공간과 비엔날레의 든든한 후원, 새 블루칩 작가군을 확보하려는 화랑업자들의 추파 속에서 도발과 실험을 즐겼지만, 지금 청년작가들은 자기세대들 외엔 별로 우군이 없다. 끼리끼리 놀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자본에 짓눌린 제도권 미술판은 더 이상 그들에게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알아서 전시장을 차리고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지 않으면 도통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내놓은 존재가 된 지금 잉여세대 삼포세대 작가들은 대도시의 변두리에 그들만의 전시장을 만들고 또 만들어낸다. 특히 올해는 ‘자족공간’ ‘자생공간’으로 불리는 신생공간이 30여 곳이나 우후죽순 생기는 바람이 불면서 청년미술판의 또 다른 지형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10년 전은 젊은 작가군이 쑥쑥 커나가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1999년 밀레니엄과 2002년 월드컵을 지나 2005년까지 진행된 시간대는 이른바 K팝과 개념미술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시장에서도 컬렉터들의 각광을 받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장기 불황으로 미술시장이 동면에 들었던 질곡 속에서 당대 청년작가들은 시장의 유통망과 다른 판을 깔고 새 진지를 쌓았다. 왜곡된 근대화가 빚은 산업사회 한국의 기괴한 일상과 사회적 시공간의 잡다한 이미지들을 작품에 녹여넣으며 한국미술판에 새 개성을 불어넣었다. 특유의 미술지형을 생성했고,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아쉽게도 이런 흐름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강타하면서 훅 꺼져버렸다. 젊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바로 앞 선배들이 화랑가와 경매장에서 각광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들 앞에는 언제 퇴출될지 모른다는 잉여의 공포감이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 3~4년 사이 청년미술판의 주변 환경은 퇴행의 징후들로 넘쳐났다. 90을 바라보는 ‘어르신’ 작가들이 40여년 전 벽지처럼 그린 단색조 그림이 화랑들의 마케팅 공세를 업고 ‘블루칩’ 상품으로 뜨는 기묘한 반전이 일어났다. 반면, 전망을 잃은 젊은 작가들은 귀신과 심령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세월호 침몰과 양극화, 종북몰이 같은 사회적 이슈들이 툭하면 터지는데도, 그들은 과거와 달리 무력하게 관망하기만 했다. 청년미술의 또 다른 숨통이었던 비엔날레와 국공립 미술관들은 정부와 지자체들의 전횡에 따른 작품 검열과 낙하산 인사, 채용 비리 등으로 숱한 적폐를 드러냈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청년작가들은 ‘성찰’과 ‘저항’을 잃은 채 눈앞 생계와 잉여의 두려움에 휘둘린다. 더 이상 공모전, 레지던시의 간택만 기다릴 수는 없다. 미술판 바깥의 젊은 작가들은 자구책으로 작업실 겸 전시장을 변두리 지하골방 등에 차려놓고 그들만의 기획전과 아트페어 리그를 구상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건 1990년대 이래 청년작가들의 안전판 기능을 해온 대안공간과 작업공간 지원(레지던시), 공모전 등이 또 다른 제도의 벽으로 변질되면서 신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실존의 압박에 휘둘리는 청년작가들은 작업하고 전시할 보금자리부터 꾸리는게 급선무다. 일단은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고 작업세계를 공유 하는 게 긴요해졌다. ‘동시대 새로운 도전과 과제’ 보다 ‘일단 서식할 터부터 잡자’로 꿈이 바뀐 것이다.
지금 청년작가들은 소통의 벽 앞에서 고단하다. 대안을 좇던 10년 전과 달리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앉은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장소 특정적인 미술, 사이버 게임과 비슷해지는 미술, 소셜미디어로만 소통하고 담론을 나누는 작가, 기획자들의 기묘한 꿈틀거림을 기존 미술계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소화할 것인가. 임흥순 작가의 노동다큐영화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성취에서 보이듯, 일부 작가들은 세계 무대에서 약진하고, 한국미술의 위상은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것 또한 사실이다. 외부의 도약과 내부의 양극화가 공존하는 미술판의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역동적인 판으로 탈바꿈시킬지가 과제로 남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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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_1990년대와 한국현대미술의 조변석개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비평
1990년 3월 서울미술관에서 심광현의 기획으로 개막한 <동향과 전망: 새벽의 숨결전>(민중미술 그룹전으로는 드물게 큐레이터십이 발휘된 사례), 10월 예술의전당에서 당대의 다양한 흐름을 한자리에 소환한 <젊은 시각 내일에의 제안전>(심광현 서성록 이준 등 5인이 각자 작가들을 선정해 비전을 겨루는 논쟁적 형식) 개막, 1991년 1월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호암갤러리 개인전, 3월 르네 블록이 큐레이팅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전>, 1992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경주의 힐튼호텔에서 대전엑스포93의 사전 부대행사로 열린 <20/21세기 예술 심포지엄>(국내 논자들에게 무식의 두려움을 일깨움), 1991년 11~12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대상작 <또 다른 꿈>의 표절(패스티시?) 논란과 구체제 권위의 몰락, 1992년 5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현대미술계의 새로운 토대를 일궈낸 임영방 관장의 리더십, 1992년 12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비평을 본격화한 현실문화연구(윤석남, 김수기, 엄혁 등)의 출범, 1993년 3월 예술의전당 개관에 맞춘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로 김홍희 큐레이터 데뷔, 4월 개막한 호암갤러리의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을 둘러싼 논쟁과 허황했던 미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투쟁 종결, 7월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의 충격과 파장, 10월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전> 개막, 12월 큐레이터 이영철의 평론집 《상황과 인식: 주변부 문화와 한국현대미술》 출간, 대우의 선재현대미술관과 삼성의 호암갤러리가 경쟁하는 가운데, 1994년 1월 쌍용제지의 스카티 광고에 김선정 출연(큐레이터란 단어를 한국사회에 널리 알림), 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빈사 상태의 민중미술이 ‘역사’로 성급히 정리됨), 3월 페미니스트 미술을 표방한 <여성, 다름과 힘전>에 윤석남, 김수자, 이불, 박영숙 등 참가,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8월 호암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전> 개막(이때 <인서울매거진>이 등장, 무가지 시대의 도래를 알림), 1995년(“미술의 해”) 2월 국제화랑에서 제프리 다이치의 기획전 <경계 위의 미술> 개최(데미언 허스트의 대표작 <약국>이 전시됨), 5월 아트선재센터 착공 기념 <싹전>(시대를 전후로 양분하는 지표로 기능), 6월 동아갤러리의 <인간과 기계: 테크놀로지 아트전>(제니 홀처, 토니 아우그슬러, 백남준 등 뉴미디어아트를 선봬), 6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과 전수천의 특별상 수상, 6월 금호미술관에서 박모 개인전 개막, 8월 일본위안부 출신 할머니 김순덕 여사 21세기화랑의 그룹전 <못 다 핀 꽃의 외침전>에 출품, 9월 광주비엔날레 출범, 1996년 6월 최정화의 뮤지엄바 ‘살’ 개점, 1997년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개원, 9월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지원에 힘입어 제2회 광주비엔날레가 성공적으로 개막, 10월 호암갤러리가 자체 소장품으로 현대미술의 역사를 개괄하는 <전환의 공간전>을 개최, 12월의 외환위기와 해외 거주 청년 작가들의 집단적 귀국, 1998년 외환위기의 한파를 맞은 미술계에서 대형기획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가운데, 동아갤러리와 벽산갤러리는 폐관, 7월 아트선재센터 개관, 7월 쌈지아트스튜디오(암사동) 출범, 8월 가나아트센터 개관, 세대교체가 급격히 이뤄지는 가운데, 10월 <98 도시와 영상-의식주전> 개막(대성공!), 1999년 2월 대안공간 루프 개관, 4월 대안공간 풀 개관, 9월 예술의전당에서 <99 여성미술제 – 팥쥐들의 행진> 개막, 9월 아트선재센터에서 하세가와 유코의 큐레이팅으로 일본청년현대미술전 <팬시댄스> 개막, 10월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개관, 그리고 뉴밀레니엄의 도래.
1995년 여름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에선 전지구화 시대의 당대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국현대미술계도 그간의 양적 팽창을 발판 삼아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새로운 청년미술가들이 나타났기에, 세대 교체를 통해 구시대의 어두움을 금세 타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사고에 빠지기도 했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오세권 대진대 교수, 비술비평
1980년대는 한국 미술문화의 양상에서 크게 ‘모더니즘’ 부류와 ‘리얼리즘’ 부류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 부류는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한 이들을 포함시킨 것이며, ‘리얼리즘’ 부류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 미술문화를 추구한 이들을 말한다.
1980년대 전반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1970년대에 형성된 미니멀리즘 미술에 의존하면서 지배구조를 더욱 돈독히 하는 시기였으며 지난 약 20년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모더니즘 미술문화의 최대 전성기였다. 그러나 세계 미술문화의 새로운 지형도는 ‘한국적 미니멀리즘 미술’에 대한 자기 합리화 논리에 한계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또한 리얼리즘 미술세력의 급속한 확장으로 위기에 직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한창이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유입함으로써 리얼리즘 미술과의 대응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을 정리할 때 1985년 ‘난지도’, ‘메타복스’ 등이 ‘탈모던’의 문제를 제기했고, 〈현·상전〉, 〈로고스와 파토스전〉, 〈엑소더스전〉, 〈현대미술의 최전선전〉, 〈상하전〉 등의 표현이 점차 포스트모더니즘 미술표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주로 유학파들에 의해 1980년대 중반기에 소개되다가,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1980년대 말기와 1990년대 초반에 한국 미술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리얼리즘 미술은 1969년 선언문만 남기고 사라진 ‘현실’ 동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1979년의 ‘현실과 발언’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리얼리즘 미술은 1980년대 초기에는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점차 조직적이고 이념화했다. 그러던 것이 1985년 7월 〈20대 힘전〉을 계기로 ‘민족미술 대토론회’가 열렸으며 11월에는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했다. 이로써 1980년대 전반기 난립하던 리얼리즘 미술의 양상을 정리하고, 산발적인 활동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체계적인 미술운동을 위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하면서 ‘민족미술’로 불리다가 후에 ‘민중미술’로 불리는 등 이미 그 개념에서 ‘민족’과 ‘민중’의 의미를 포함하는 미술문화운동이었다.
1987년은 리얼리즘 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특히 총선과 대통령선거 등 사회적 상황들과 연결되면서 집회 현장에서는 깃발그림을 비롯한 벽화, 걸개그림, 만화, 전단과 각종 시각매체가 대중투쟁 현장과 같이하였고, 이것은 사회 현실에 직접 참여하는 선전·선동미술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대중투쟁의 확산에 따라 걸개그림 등이 리얼리즘 미술표현의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집회 현장에서 열기를 돋우는 미술운동이 되었다. 특히 리얼리즘 미술은 비평의 적극적인 이론적 지원을 바탕으로 삼아 미술운동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며, 조직화·체계화하면서 대중정치 선전사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와 88올림픽 이후 1980년대 말기에는 조직이 노선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고 분화되면서 점차 그 힘이 흩어지게 된다.
한편 1980년대 미술문화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부류들이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 속에서 서로의 이념적 합리화를 위하여 치열한 이론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작가가 중심이 되어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미술문화를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모더니즘’ 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속에서 그 변화를 보면 1980년대 초반기에는 미니멀리즘 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미술이 활발했으며, 1980년대 중반기에는 리얼리즘 미술이 맹위를 떨쳤고, 1980년대 말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정착하던 시기로 정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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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의 70년, 역동의 1970년대

박계리 미술사
지난 10년간의 미술계를 돌이켜보면,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중 특히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자문하게 된다. 단색화 다시 (평가해)보기 열풍이 촉발되었고, 이러한 공격적인 재평가 작업은 역설적인 듯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단색화전 성공과 해외미술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단색화 열풍을 다시 불러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는 데는 단색화의 그림자에 가려 있던 1970년대의 다양한 실험적 미술에 대한 관심이 기폭제가 됐다. 학계의 관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구림, 박현기 작가의 대대적인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지면서 이 시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전이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시대를 마감하고 민전 시대가 열린 것이 1970년대이다. <한국미술대상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이 민전 시대를 이끌었다. 신인 등용문의 확장은 미술계의 역동성을 추동해내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말 청년작가연합회전과 회화68, 한국아방가르드협회(약칭 A.G.)가 창립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강력한 흐름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활기차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1972년 한국미술협회가 <앙데팡당전>을 신설해서 젊은 세대에게 실험 무대를 제공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물질과 상황에 대한 실험을 지속해왔던 일련의 움직임들과 흐름을 같이하던 A.G.와 S.T. 등 젊은 세대들은 미술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1970년대는 1975년 ‘에꼴 드 서울’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되곤 한다. 전반기는 A.G.,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에게 무대를 제공한 <앙데팡당전>의 실험적인 시도가 한창이던 시기이다. 미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질문과 물질에 대한 실험이 매재의 확대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술개념의 확대는 이전의 장르개념인 ‘회화’ 또는 ‘조소(조각)’라는 용어에서 벗어나 ‘평면’과 ‘설치’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포함할 수 있는 용어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탈회화화, 탈조각(조소)화의 움직임으로 확장되어갔다. 이와 더불어 장소와 환경, 공간과 시간, 상황과 예술이라는 미술의 존재론적 화두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퍼포먼스도 활발해지고, 대지미술과 같은 화이트 큐브 바깥에서의 미술도 시도되었다. 이렇듯 미술이 확장되던 전반기와는 달리 1970년대 후반기는 다시 회화라는 평면구조로 환원되면서 단색화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회화로의 회귀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리지 않는 회화라는 점에서 드로잉의 전통적 맥락보다는 1970년대 전반기의 개념미술과의 연결선상에 있다. 단색화의 부각은, 1975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전>에서 촉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막혔던 일본과의 교류가 열리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일본미술시장과의 관계 속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본질적 물음은, 무아(無我)와 무위(無爲)의 세계를 지향하며 정신의 문제와 자연세계로 화두를 확장시켰다. 한국 단색화는 당시 국제적인 흐름이었던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의 자장 속에서 국제미술계와 공존할 수 있는 소통력을 지니면서 화단에 강력한 자장을 형상해냈다.
이렇듯이 1970년대는 국제 교류의 포문이 열리면서 남관, 이성자, 이응로 등 파리를 근거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선전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이 되면 다시 표현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기류가 싹트기 시작한다. 1978년의 ‘사실과 현실’ 그룹은 거창한 정신세계가 아닌 일상으로 눈을 돌려 극도의 사실주의 기법으로 대상을 묘사하였다. 이들의 화면은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포토리얼리즘과 연계되면서도 비판적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적 화면을 생산해내며 또 다른 세대의 등장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처럼 역동적이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들어 다시 부각되면서, ‘짝퉁’인가 아닌가 하는 원형에 대한 기존 논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와의 동시대성이 갖는 소통의 확장성에 대한 주목과, 타자적 시선이 포착해내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1970년대에 대한 논의를 보다 풍성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 좌절되는 우리미술의 정체성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비평
식민지를 거쳐 6·25전쟁을 막 치러낸 1954년은 전쟁의 상흔과 공포, 가난 그리고 분단 속에서 신음하던 시기였다. 당시 남한의 미술계는 식민미술의 청산, 민족미술의 수립, 전통미술의 계승, 그리고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여러 과제를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우선 광복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친일 청산과는 거리가 멀다. 이후 분단과 전쟁, 쿠데타를 통해 반민족, 친일세력들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왜곡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 이전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현재 한국 미술계에도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전쟁 후의 한국 화단에는 일제강점기의 화풍과 영향이 변함없이 온존해 있었고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은 서구미술에 급속히 경도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서구를 (직접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다른 피식민지 국가의 민중과 달리 서구를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구원과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다. 서구가 어떤 나라인지 분별할 수도 없었으며 당연히 서구미술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검증 절차도 없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저 서구에 대한 열렬한 추종만이 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동안은 일본미술 혹은 일본화 된 서구미술의 어법을 충실히 모방했다가 광복과 전쟁 이후에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 어법을 추종해왔다는 얘기다. 이렇듯 식민지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일구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으며 끊임없이 좌절되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마감되었다. 독재정권이 시민의 힘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꺾인 것이다. 1960년대는 이렇게 4·19혁명 정신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4·19를 주도한 젊은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의 유산과 단절된 세대였으며 가장 민감한 10대 때 4·19혁명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민중적 에너지’를 직접 보고 경험했다. 그러나 이내 박정희의 집권과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이른바 굴욕적인 한일 외교 관계의 정상화 역시 접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개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가슴에 품고 자란 이들”(강헌)이 후에 1970년대 청년문화를 태동시키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이 영향이 바로 1980년대 미술을 만들어낸다. 나로서는 오윤이 그 대표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치 대중음악에서 신중현과 김민기의 존재처럼 말이다.
한국의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4·19혁명이었다. 단 한 번도 공화주의 공화제의 가치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인에게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한편 4·19혁명을 시작으로 열린 1960년대는 전후의 폐허와 허무를 딛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확산된 시기이자 곧바로 이어진 5·16군사정변으로 인한 굴절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제 1·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대이자 정치적으로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였다.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1960년과 1961년에 연달아 일어난 그 시기, 연간 한국 총수출액은 100만 달러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산업적 기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의 어젠다는 ‘조국 근대화’였고, 그가 지은 노랫말처럼 ‘잘살아보세’였다. 박정희 체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를 일컫는다. 이념적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지속되면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 이념이 강화된 시기다. 박정희는 문화를 집권 연장과 독재 강화 그리고 경제 성장의 도구로 인식하였기에 문화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정책도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예술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했으며 정치적 통제와 활용방법 매우 구체화했다. 그에 따라 작품의 창의성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및 진보적 성향의 예술이 싹을 틔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문화산업은 철저히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제약당했다. 정권 역시 예술작품이 정권의 홍보물에 머물 것을 요구했으며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반공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만 기능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대다수 미술작품이 그에 순응해서 제작되었다.
1969년 9월 14일 국회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의결한다. 이후 11년을 규정짓는 불행한 정치적 사건이자 이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둡고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는 그렇게 저물어갔으며 1970년대는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참혹한 시대에 단색주의라는 화풍이 발아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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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잃어버린 기회

조은정 미술사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이 휴전으로 종식되기까지의 시기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선택적 이데올로기의 공간이었다. 친일(親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맞은 광복은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전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다.
광복을 기념하기 위한 ‘해방기념예술대축전’에 당시 남쪽에 거주하던 미술인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해방기념미술전>을 열였다. 전시를 마친 1945년 11월에 미술인들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고희동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치에 대한 절대 불간섭과 엄정 중립, 미술문화의 독립적 향상을 꾀함, 민족미술을 창조하여 건국에 이바지함’ 등이 강령이었다. 하지만 고희동이 회원의 의사에 관계없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하고, 1947년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맞선 우익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협회를 가입시키자, 탈퇴한 몇몇 회원은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진보적 미술인들은 다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결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미술가협회’는 협회명을 ‘대한미술협회’로 변경함으로써 대표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광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구태를 벗고 새로운 화단을 설계하려던 미술계는 당시 사회 전반이 그러하였듯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친일의 상대편에 선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반공정책을 편 미군정에 의해 억압되었던 것이다. 반공은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구축된 화단의 헤게모니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강조된 반공이념의 실현처로서, 미술가들의 좌익 참여 금지 방편으로 〈국전〉을 이용했다. 작가들이 좌익에 경도되는 경로를 차단하고, 정치적 혼란에 따른 미술·문화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이른바 민주진영이라 일컬을 수 있는 미술가들에게 합법적인 활동무대를 제공하는 데 〈국전〉 설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혔던 김인승, 윤효중, 이상범 등이 전후 재개된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부각된 것은 그러한 실상을 드러낸다.
6·25전쟁은 광복 이후 남과 북이 만난 유일한 지점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미술인은 동시에 남과 북 두 체제를 모두 경험했고, 두 권력 아래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이념전이었던 6·25전쟁의 특성상 선전화(宣傳畵)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국가 동원체제 아래 미술은 어느 때보다 국가의 부름에 강하게 응답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미술인들은 동원되었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서울이 수복되자 대한미협은 ‘화단 수습과 전시하의 국가정책에 호응할 것’을 천명하였고 인민군 점령기간에 인민군에 협조한 미술인들에 대해 부역자 심사도 하였다. 서울에 잔류하던 미술인을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부역 정도를 구분해서 법적인 제재를 받을 것이 뻔한 조사위원회에 회부하였다는 사실은, 이들 도강(渡江)파에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미술동맹에서 이 미술가들을 조직하고 지도하던 미술인들은 이미 모두 월북한 뒤였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국가가 미술을 통제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으며 그 힘에 반할 때는 처단할 권력을 부여하였다. 전쟁에서 미술인은 종군화가로 국가에 봉사하였고 국가가 요구하는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전쟁의 경험과 공산주의적 양식은 리얼리즘, 자유주의 양식은 자유주의 국가의 미술, 즉 추상주의라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민족미술에 대한 합의와 이념적 결집을 이루지 못한 광복 이후 화단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로 인해 새로운 민족적 미술양식은 산화되었다. 국가 통제의 반공주의 앞에서 미술의 사조나 도덕적 명분은 생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반도덕적 기회주의의 산물인 미술계 내부의 권력은 자본의 논리, 즉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상품’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이미 이념의 분열을 통해 배양하였던 것이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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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프로젝트> 7.21~9.29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시각문화로 바라본 북한의 오늘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 앞에서 광복은 미완의 상태이다. 오늘(2015년 7월 23일자) 뉴스 보도를 들으니 광복 70주년 남북 공동행사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 민간단체가 개성에서 사전접촉을 했다고 한다. 여러 갈등과 어려움이 예상되기에 구체적인 합의와 성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럼에도 분단을 넘어서 남북한이 함께 광복을 기념하고자 논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슬픔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통일은 우리의 역사적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풀어갈 단서는 지속적인 교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다. 60년 이상 분단 상황이 계속되면서 남북한의 문화교류, 특히 미술과 관련된 교류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북한미술을 소개하는 국내 전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북한의 조선화가 주를 이루었고, 그것도 단편적으로 전시되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전시 형태로 북한의 미술을 볼 기회가 적었던 터라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이 광복 70년 기념으로 개최하는 <북한프로젝트전> (7.21~9.29)은 무엇보다 반가운 전시이다.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전시는 흥미롭게도 ‘프로젝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전시를 담당한 여경환 학예사는 기획전 서문에서 “프로젝트의 일반적인 의미와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pro)’ ‘만들어가는(ject)’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의 행위에 방점을 둔 프로젝트의 의미를 강조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적인 전시 구성에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의미를 살리려고 한 노력이 여실히 엿보인다.
전시는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북한 내에서 제작된 유화, 포스터, 우표 등이 전시된 곳은 북한의 시각문화를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북한 포스터이다. 포스터의 대부분은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북한 미술의 조형성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외국 작가 닉 댄지거, 에도 하트먼, 왕궈펑 등이 북한의 문화풍경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 또한 돋보인다. 작가들은 사진으로 북한의 문화풍경을 기록하는 것에서 나아가 예술적 감성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 작가 강익중, 권하윤, 노순택, 박찬경, 이용백, 전소정, 탈북 작가 선무 등은 북한과 분단의 문제를 저마다의 고유한 시각으로 주제화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번 <북한프로젝트전>은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내부, 외부 그리고 경계라는 세 가지 문화적 층위에서 조망하는 듯 보인다. 이는 북한 작가, 외국 작가 그리고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햇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시를 기획하기란 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기획 단계에서 자료 수집 그리고 작품을 선정하기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힘든 작업 또한 많았을 것이다. 물론 비판적 시각으로 볼 때, 전시 구성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문화적 층위들이 다소 인위적으로 혹은 도식적으로 연결된 듯하고, 또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제시된 듯해서 약간 산만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시각문화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시도한 전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아쉬움은 간단히 뒤로 밀려난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북한의 미술 및 문화와 관련된 전시가 해외 블록버스트 전시나 유명한 작가의 특별전보다 더 주목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분단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이며, 통일은 우리의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한류, 경매, 세계화 등에도 관심을 두어야겠지만, 현재의 한국 미술계가 남북한의 미술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향후 북한의 미술과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촉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임성훈 미학, 미술비평

위 이용백 <우리에게 희망은 언제나 넘쳐나>알루미늄, 흙 350×200×120cm 2015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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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5.23~8.23 대전시립미술관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5월 23일 개막해 8월 23일까지 계속된다.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전시는 오원 장승업에서 최정화, 이불의 동시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뚜렷한 흔적을 남긴 67명의 거장을 초대하여 격렬했던 20세기를 성찰하고, 이중섭, 박수근과 같은 잘 알려진 작품을 직접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한 야심 찬 기획이다. 그간 주목할 만한 한국근현대미술 전시가 주로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대전에서 마련된 이 대규모 특별전은 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의미 또한 깊다.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의 작품 선별과 배치는 그 자체로 지난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각과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번 특별 전시회는 ‘계승과 혁신’, ‘이식과 증식’, ‘분단과 이산’, ‘추상과 개념’, ‘민중과 대중’ 이라는 5개 장으로 나뉘어, 앞의 2개 장은 근대기 전통화와의 변모와 서양화의 도입을 다루고 후자의 2개 장은 6·25전쟁 이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근대 수묵화는 안중식을 거쳐 이상범의 풍경에서 토착화되었고, 박생광의 강렬한 채색화는 전통의 혁신으로 제시되었다. 고암 이응노의 사실주의, 김기창과 박래현의 파격적인 추상화는 한국미술이 격동의 역사에서도 단절 없이 창안되어 왔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근대기 자아를 표현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매체로 유입된 유화가 결국에는 한국의 서정을 구현해냈음을 오지호, 김환기, 박서보 등의 작품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 조각은 오롯이 김복진에게 초점을 맞춘 후 권진규의 테라코타에 집중하는데, 특히 김복진의 1935년 미륵불은 불교조각의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모두 갖춘 한국 근대미술의 정수로 특별한 조명을 받고 있다.
광복 70주년 특집이라는 전시 콘셉트에 비추어 볼 때, ‘전쟁과 이산’은 핵심이 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을 터, 재일조선인 화가 전화황의 1960년 작품 <낙오자>를 핵심으로 송영옥과 월북화가 배운성의 작품이 여럿 출품되었다. 배운성이 독일에서 그린 조선 풍속화 수점은 대작 <가족도>와 함께 관람객들의 큰 관심을 얻고 있는데, 북유럽 전통의 유입에 따른 도상의 특이함, 가족이라는 우리에게 각별한 주제 때문인 듯했다. 전쟁기 이별과 가난의 기억이 새겨진 이중섭, 박수근의 작은 그림에 우리가 한없이 몰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우환의 <조응>을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배치한 점도 이전에 볼 수 없는 방식이다. 단색조 회화와의 형식적 유사성보다는 일본에서 모노하 미술가로 활동한 이우환의 역사적 위치를 먼저 헤아린 결과였다.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전시 후반부에서도 드러나는데, 단색조 회화에 뒤이은 분방한 최욱경 작품의 배치라든지 민중미술의 시작을 홍성담의 <5·18 연작-새벽>으로 압도한 것 등이다. 이동훈과 임동식을 비중 있게 전시에 편입시킨 것은 충청지역 대표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고려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 모든 다채로움은 20세기 한국미술사의 정론을 넘으려는 대전시립미술관의 적극적인 시도가 가져온 즐거운 변주였다.
그렇다면 명작을 앞세워 대중성을 담보하고 새로운 서사로 한국미술사를 재편하려는 애초의 의도는 얼마나 달성된 것일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식과 증식’, ‘민중과 대중’ 같은 반복적 대구(對句)가 혼성의 시공간이었을 역사를 이분법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묵은 계승으로, 채색화는 혁신으로 본다거나, 한국 사회의 탈근대성을 민중에서 대중사회로의 진입으로 쉽게 치환해버리는 것 등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식’이라는 용어는 근대미술을 자칫 모방의 역사로 깎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작 전시는 근대기 양화를 신문화의 포용으로 열린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작명이 불러온 오해인 듯싶다.
사실 이 같은 시시콜콜한 지적은 전문가의 삐딱함의 산물일 뿐이다. 차분하면서도 알차게 마련된 근현대미술 걸작들은 가족을 동반한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김달진자료박물관의 세심한 미술교과서 전시도 ‘추억 돋우는’ 코너였다. 그럼에도 ‘2%’ 부족한 것은, 이인성, 변관식, 김환기의 난만한 완숙기 작품이 빠진 것, 동시대 작가 이불이나 최정화 특유의 도발과 요란함을 받쳐줄 전시 스텍터클의 부재였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는 벅찬 자리에 늘 미술을 빼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은 외압과 내분으로 격렬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혹은 통일 논쟁으로 부딪혔던 열기마저 사그라져가는 요즈음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전람회는 한껏 소란하고 강렬해도 좋을 것이다. ●
김미정 미술사

위 박생광 <무당>(사진 맨 왼쪽) 1961 대전시립미술관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전시광경

SPECIAL FEATURE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정형민 관장이 직무정지에 이어 불명예 퇴진한 이후 8개월을 끌어오던 신임관장 선임은 문체부의 최종 후부 부적격 판정으로 결국 재공모로 가닥을 잡았다. 유일한 국립미술관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장이 오랜 기간 공석인 사태에 미술계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미술계에 대한 모욕이라는 성토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월간미술》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지금을 위기로 규정하고 난국을 타개할 방안을 미술계와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우선 설문을 통해 사태를 바라보는 미술계의 시각을 전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문제를 짚어본다. 그리고 문제 원인 해소를 전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또한 신임 관장의 요건, 즉 디렉터십에 대한 박신의 경희대 교수의 글을 싣는다. 박 교수는 시대에 걸맞은 미션과 비전을 가진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신임 관장이 갖추어야 요소에 대해 일갈한다. 이번 인사 파문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알려진 최효준 전 경기도미술관 관장의 글도 싣는다. 이와 더불어 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회장이 보내온 제언도 읽어보시길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동시대 한국미술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다만 그 실체가 작금의 관장 인사 사태로 드러났다는 점이 유감이다. 선장 없이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정상 항로로 진입하도록 유능한 선장 선임을 촉구한다.

초유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 사태,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 건을 두고 미술계가 시끄럽다. 매끄럽지 못한 인사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미술계는 “미술계를 무시한 처사”라며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미술계는 오늘의 파행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책임운영기관 제도’ 도입 당시 이미 예고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로부터 서울관 건립, 그리고 최근 관장 재공모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을 둘러싼 주요 사건을 연보로 정리했다.

2006. 1
국립현대미술관 책임운영기관 체제로 전환

책임운영기관으로의 전환 여부를 놓고 치열한 찬반 논의를 벌인 끝에 2006년 1월 1일자로 책임운영기관제를 도입했다. 책임운영기관 제도란 “정부가 수행하는 사무 중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쟁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무에 대하여 기관장에게 행정 및 재정상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운영 성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다. 제도 시행을 앞두고 미술계 내부에서도 “기관의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견과 “극대화된 수익성 추구로 인해 예술의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맞선 바 있다.

2009. 1
국군 기무사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부지로 선정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서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옛 기무사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조성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로써 서울시내에 국립미술관을 조성해야 한다는 미술계의 오랜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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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배순훈 제17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선임

국립현대미술관 최초로 전문경영인이 관장에 선임되어 화제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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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서울관 설계공모 당선작 발표

2010년 2월에 공모한 서울관 건축설계공모에서 민현준 홍익대 교수의 설계안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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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서울관 기공식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기공식이 정병국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각계 인사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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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배순훈 관장 사퇴

임기를 3개월 남긴 배순훈 관장이 전격 사퇴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름을 ‘UUL’로 지은 것에 대해 질타하는 국회의원과 이에 답변하던 배 관장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고 이것이 사퇴를 촉발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2012. 1
제18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정형민 교수 선임
국립현대미술관 수장·보존센터 건립 추진 발표

정형민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가 제18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선임됐다. 정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여성 관장이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청주 옛 연초제조창 건물을 활용, ‘국립미술품 수장·복원센터’(가칭)을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정형민 2

UUL 국립현대미술관 UUL국립서울미술관 브랜딩

2012. 8
서울관 건축현장 화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4명이 사망하는 등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건립현장 이미지1

2013. 5
국립현대미술관 신규통합 MI 발표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 청주관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표현한 새로운 통합 MI(Museum Identity) ‘MMCA’를 발표했다. ‘MMCA’는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의 이니셜 약자다.

2013. 1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개관전 <시대정신>, 학연 논란 및 출품작 철거 외압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기념 <시대정신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전시 출품 작가가 특정 학교 출신에 치우쳤으며 개관전에 걸맞은 전시 내용과 수준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게다가 일부 작가의 작업이 전시 직전 외압에 의해 철거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시대정신 (1)

2013. 12
한국미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규탄대회
성명 발표
국립현대미술관 발전 TF팀 구성 발표

국립현대미술관은 12월 3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일각에서 일었던 개관전 작품에 대한 균형성 미흡과 과천관과 덕수궁관 등에 대한 배려 미흡 지적에 대해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기구를 구성하겠다”며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견수렴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014. 10
정형민 관장 정직(직위해제)

10월 10일 감사원은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학예사 채용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 지인 2명을 합격시켰다고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감사원은 정 관장에 대해 직권남용과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10월 16일 정 관장에 대해 직위해제 조치했다.

2014. 11
개관 1주년 기념전 <정원> 개막

2015. 1
관장 공모(~2.9) 원서 접수

‘관피아’ 논란으로 신설된 인사혁신처를 통해 신임 관장 공모를 실시했다. 총 15명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5. 2
관장 선임을 둘러싸고 잡음

자칭 ‘국립현대미술관 정상화를 위한 범미술행동 300’은 관장으로 선임되지 말아야 할 10대 사양 인물을 발표했다. 또한 관장 공모에 지원한 이 중 정계 출신 인사가 포함되어 낙하산 인사 논란이 일었으며 일부 후보자의 과거 이력과 로비 등이 입길에 올랐다.

2015. 3
최종후보 최효준 윤진섭으로 압축

2015. 6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 결정

P1070657문화체육관광부 6월 9일 보도자료를 통해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재공모 등 후속조치를 추진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법적 근거로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제3조 제5항)을 들었다. 이에 다음 날 최종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 최효준 전 경기도미술관 관장은 서울시내 모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문체부로부터 자진 사퇴를 종용받았다”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또한 그는 “인사혁신처의 심사를 적격으로 통과했음에도 문체부에서 이를 거부한 것은 하자가 없는 인사시스템을 무력화하는 전례를 만들 것”이라고 비판하며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문체부 장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즉각 보도자료를 내 “인사혁신처는 후보자를 추천하고, 적격자 여부는 주무부처에서 최종 결정한다”며 “문체부 임용심사위원회에서 문화예술계 의견, 국립현대미술관 근무 당시의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적극적인 업무추진력, 창의성과 혁신적 마인드 등 변화와 진취성이 요구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최종적으로 재공모를 추진키로 의결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최 전 관장이 주장한 ‘사퇴 종용’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며, 사전통보 과정에서 적격자 없음으로 발표될 경우 후보자가 명예 또는 경력 훼손을 걱정해 스스로 사퇴하는 방법이 이야기됐다”고 밝혔다. 이후 김종덕 문체부 장관이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문호를 외국인에게도 개방할 것”이라고 밝혀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정리・황석권 수석기자

SPECIAL FEATURE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재정비, 디렉터십에 달렸다

박신의 미술비평 경희대 교수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 개관을 기점으로 그 위상이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서울관 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존재감을 기대 이상으로 올려놨다. 가장 큰 수확은 북촌이라는 위치에 따른 대중적 접근성에서 이루어낸 감동적인 변화다. 과천 시절을 생각한다면, 과연 대중의 머릿속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존재가 있었을까 싶지만, 서울관에 대한 대중적 호응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니 말이다. 게다가 현대자동차의 파격적인 후원까지 생각한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전에 없던 화려한 변신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성장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여겨져 안타깝고 불안하다. 그런 인식은 변화에 값하는 우리 미술계의 내부 역량이 여전히 미흡하여 준비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연유한다. 서울관이라는 존재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여러 가지면에서 유리한 지점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정작 이를 ‘기회’로 만들어가는 데는 역부족으로 보여 그렇다. 이제 국립현대미술관은 대중적 시선만이 아니라 국제미술계의 시야에도 노출도가 높아졌다. 그에 상응하는 내부 역량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모처럼 얻어낸 행운을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염려 아닌 염려가 앞서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디렉터십의 요구와 맥락
그런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리더십과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관 개관전 사태로 당시 정형민 관장이 직위 해제되면서 불명예 퇴진한 마당에, 미술계 전문인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내적 요구와 당위성 때문에라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제 다시 시작한다는 다짐이 필요한 터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관장 선임이 마무리된 상태가 아니지만, 누가 선임되든지 디렉터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디렉터십이란 단적으로 말해 관장이 발휘하게 될 리더십이다. 리더십은 미술관 운영에서 관장의 역할과 그에 따른 조직 운영의 문화, 관리 의사소통 절차, 그리고 조직 내 역학관계를 헤아리는 일이다. 물론 리더십은 비단 리더만의 일이 아니라, 조직 구성원 내에서도 각각의 업무에 따른 역할과 수행과정에서 발휘되는 것으로 봐야 하고, 결과적으로는 조직 전체의 리더십을 말한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예술분야에서의 리더십은, 예술적 리더십(artistic leadership)의 영역으로서, 예술적 수월성과 경영 효율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목표로 발휘된다.
무엇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에 요구되는 예술적 수월성은 전시 및 소장품 활동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국현대미술의 경쟁력을 키우며 진흥을 꾀하기 위한 몫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대중의 문화 향유 기회와 수준을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경영 효율성은 서울관을 비롯하여 과천관, 덕수궁관, 그리고 2017년 개관 예정인 청주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 4관 체제와, 창작스튜디오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등의 하부 관리시설을 보유하는 방대한 규모의 조직에 대한 합리적인 운영 및 경영 성과 관리 역량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을 염두에 둘 때 과연 우리에게 디렉터십을 이야기할 만한 모델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되면, 그 답이 시원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역대 관장을 보면 주로 미술사나 미술평론 분야 인물이 담당해왔다. 경영 역량보다는 전시기획 역량에 따른 개인적 성향을 드러냈고, 3년이라는 짧은 임기 내에서 충분한 디렉터십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중간에 배순훈 관장과 같이 기업 경영인 출신이 발탁된 바 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예술적 수월성과 경영 효율성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모두 성취할 만한 인물이 없었고, 그런 면모는 어떻게 보면 초기적 양상이라고 양해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모든 역량을 갖춘 완벽한 디렉터십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 있다. 어쩌면 현대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기반으로 미술계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헤아릴 수 있는 역량과, 조직 운영 훈련을 거친 경영 역량을 겸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시급한 사안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의 우선순위와 비중을 두고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실제로 미술관 성과(관람객 수, 전시 개최횟수, 재정 효율성 등)도 본질적으로는 전시와 소장품, 연구기능의 수월성이 전제되는 것이어서, 현대미술의 수월성과 경영 성과가 분리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변화 주도의 리더십과 관리 능력의 배합
이상적인 디렉터십을 거론할 때 리더십과 관리(leadership and management)의 차이를 살피는 것은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 관리란 제도와 규칙, 구조에 초점을 두고 통제와 지휘를 행함으로써 안정적인 조직 운영을 목표로 하는 경우다. 리더십은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 구도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기보다는 변화와 혁신을 꾀하면서 비전을 제시하는 유형이다. 관리는 세세한 부분에 관심을 갖는 미시적인 계획인 반면, 리더십은 거시적인 계획에 무게중심이 실린다. 따라서 관리는 ‘일’이나 ‘성과’를, 리더십은 ‘사람’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관리는 책임을 요구하지만, 리더십은 사람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더욱 중시한다.
그런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관리적 기능보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리더십으로 보인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션과 비전을 먼저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현재 홈페이지에 미션과 비전은 제시돼 있지 않다. 대개 미술관은 대내외 환경이 바뀔 때마다 미션과 비전을 교체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번이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역적 맥락만이 아니라 국제적 위상을 고려한다면, 안팎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현실과 도전 과제는 무엇이고 국제 현대미술의 동향 속에서 어떠한 전략이 필요한지를 고심한다면, 그리고 대중의 문화향유와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 증진을 추구한다면 미션과 비전의 맥락은 힘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 업무별로도 미션과 비전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전시와 소장품 정책, 교육프로그램을 위한 미션과 비전은 활동의 목표이자 기준이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디렉터십은 각 분야별 책임자가 갖는 전문성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해주고, 그들 스스로 자기 발전과 변화를 주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럴 경우 큐레이터의 전시 기획력은 상승하고, 소장품의 수준과 관리 역량은 높아질 것이며, 에듀케이터의 미술관 문화 활동은 큰 호응을 받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직이 갖게 될 전문성은 곧 디렉터십의 권위이고, 미술관 경쟁력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2006년부터 책임운영기관제를 실시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추후 전망할 조직의 성격도 디렉터십에 부과된 주요 과제라 하겠다. 책임운영기관제는 일반 행정기관보다 폭넓은 조직・인사・예산상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한편, 성과의 책임 및 보상을 강화함으로써 운영의 효율성 및 서비스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조직을 보면 책임운영기관제를 수행하는 기관치곤 뚜렷한 실행체계가 눈에 띄지 않는 중성적인 모습이다. 성과에 대응하기 위한 홍보와 마케팅 차원의 맥락이 거의 체감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전시 기획에서의 전략도 현재 조직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다.
게다가 현대자동차의 기업 후원이 지속되고, 문화재단을 통해 수익사업이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디렉터십의 대응은 준비돼야 할 것 같다. 실제로 이러한 정황은 책임운영기관제라는 체제보다는 법인화에 걸맞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추후 국립현대미술관이 법인화로 갈 수 있을 만큼 내적 역량이 준비되어 있을지는 되물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라도 강력한 디렉터십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하지만 홈페이지에 역대 관장의 연혁이 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관장의 존재는 미미하다. 과연 이 미술관이 관장의 역할을 중시하기는 하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디렉터십을 이야기하고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

SPECIAL FEATURE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긴급 앙케트, 국립현대미술관을 진단한다

전임 관장의 불미스러운 퇴진과 장기간의 공석 끝에 관장 재공모 논란에 휩싸인 국립현대미술관의 현 상황을 위기라고 규정한 《월간미술》은 미술관계자를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총 214명에게 설문지를 발송했고, 이중 60명이 참여했다. 설문은 총 25개 항목으로 구성됐으며 4개 카테고리로 나눴다. 첫째 ‘관장 재공모와 관련된 긴급 현안’, 둘째 ‘표류하는 MMCA’, 셋째 ‘MMCA 전시에 관하여’, 넷째 ‘서울관에 관하여’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의견을 들었다.
설문 결과, 응답자 대부분은 이번 문체부의 관장 재공모 방침을 ‘잘못된 일(78.3%)’로 받아들였으며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문화체육관광부(68.8%)’로 돌렸다. 이는 재공모 결정까지 8개월이 걸려 관장 공석이 장기화한 데 따른 책임을 물은 것이며 더욱이 문체부 장관이 나서서 외국인 관장까도 고려한다는 의사를 피력해 논란에 더욱 부채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장 선출방식 문항에는 ‘현행(공모제)유지’(28.8%), ‘추천제’(27.3%), ‘임명제’(19.7%) 순으로 답했다. 하지만 현 관장 선출방식인 공모제에 대해선 ‘반대’(63.3%)가 ‘찬성’(28.3%)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많았다. 이 같은 결과는 공모제가 가장 공정한 선출방식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면서도 현행 공모제에 개선이 필요함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재공모를 통해 선임될 관장이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으로는 ‘미술(관)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81.8%)을 압도적으로 주문했다. 이는 관장의 유형을 묻는 후속 문항에서 압도적 응답을 받은 ‘국내 미술현장 전문가형’(80.0%)과 응답률이 비슷해 미술인들이 바라는 관장은 미술현장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함을 입증했다. 재공모를 두고 미술인들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선 ‘모르겠다’(48.0%)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시위형식의 집단행동’과 ‘사태관망’이 각각 26.0%로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최종 후보로 거론되던 후보자에 대한 신뢰가 두텁지 못했고, 재공모로 가닥이 잡히면서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신임 관장 선임에 더욱 기대를 거는 것으로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항목에는 10점 만점에 ‘4점’(38.3%)과 ‘6점’(33.3%)이라고 응답한 이가 많았다. 미술계 내부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이 높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계를 대표한다고 보느냐는 문항에는 ‘그렇다’(67.2%)가 ‘그렇지 않다’(25.9%)를 크게 앞질러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 이는 현재 상황과는 별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계에서 갖는 의미가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런 국립현대미술관이 ‘현재 위기’(82.8%)라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했으며 위기를 야기한 문제점으로 ‘관장의 장기 공석’(31.6%). ‘전시내용과 수준’(30.1%)을 꼽은 이가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만족도 문항에는 10점 만점에 ‘6점’(45.0%), ‘4점’(28.3%)으로 대답한 이가 많아 전시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보여줬다. 불만족의 이유로는 ‘기획력 부재’(66.7%)를 첫손에 꼽았다. 이는 ‘전시 역량 강화를 위해 필요한 점’을 묻는 항목에 ‘기획 전반의 책임 및 자율성 보장’(56.4%)이 다수의 응답을 획득한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미술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개관한 서울관에 대한 만족도는 앞선 항목의 만족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 10점 만점에 ‘4점’(39.0%), ‘6점’(32.2%)으로 응답한 이가 많았다. 접근성과 부대시설(60.7%), 설립(존재) 자체(32.1%)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으나 전시에 대해선 불만족(69.2%)이란 응답이 70%에 육박했다. 즉 하드웨어에 대한 만족도를 콘텐츠가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접근성(79.7%)을 서울관의 최고 장점으로 꼽았으나 전시 및 프로그램 과잉에 따른 질적 저하(42.9%)를 부정적 평가항목으로 선택한 이가 많은 것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번 설문을 통해 확인된 것은 미술인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바를 결코 경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술계, 그리고 동시대 미술문화를 상징하는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관 개관으로 외형적인 성장은 가시화했지만 그러한 성장에 걸맞은 전시 등 미술관 본연의 기능은 미흡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술인 대부분은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학예기능의 역량 강화를 꼽았다. 이번 신임 관장 재공모 결정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상급기관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와 정치력 부재를 드러냈다. 이는 전시를 비롯한 미술관 고유기능에서 내실을 다지지 못하고 제도적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빚어진 결과라 하겠다.
황석권 수석기자

<설문 참여 60인>
강선학 강재현 고충환 김달진 김동일 김만석 김민기 김 석 김승영 김용익 김윤경 김정헌 김지연 김지원 김학량 남선우 노순택 노형석 류병학 문혜진 박소현 박영숙 박우홍 박인권 반이정 배종헌 백 곤 백기영 변길현 서상호 서준호 손성진 송미숙 신승오 안경화 안규철 안인기 양은희 양지윤 유진상 윤규홍 윤우학 이명옥 이선영 이영란 이영주 이용우 이태호 임근준 임종은 장동광 정정엽 정준모 정진우 조광석 조은정 채은영 최금수 최 열 하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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