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파리 아랍문화원, 빛의 기하학

아랍의 전통문양을 연상시키는 프랑스 파리 아랍문화원 건물 정면 외벽의 창문

아랍의 전통문양을 연상시키는 프랑스 파리 아랍문화원 건물 정면 외벽의 창문

심은록 감리교신학대 객원교수, 미술비평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성당 등 중요 미술관과 건축물들은 파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센 강을 따라 세워졌다. 아랍문화원Institut du Monde Arabe(아랍세계 연구소, 이하 ‘IMA’)도 예외가 아니다. IMA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문화예술을 통해 프랑스와 아랍 19개 국가(이후 3개국 추가)의 우호를 증진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어 1987년에 완공됐다. 이러한 원래 의도를 상기시키듯,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는 붉은색 문장이 IMA 건물 정면에 과격할 만큼 큰 글씨로 쓰여져 있다. 올해 1월 7일, 시사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한 데 대한 보복 테러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붉은색 문장은 테러에 반대하는 강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 아랍의 봄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모로코 현대미술전>(2014.10.15~3.1)을 계기로 IMA광장에는 건축가 타릭 우알랄루Tarik Oualalou가 기획한 서부 사하라식 텐트가 세워져 있다.
장 누벨, 질베르 레제네, 피에르 소리아와 아르쉬텍튀르 스튜디오의 공동 작업으로 건립된 IMA는 서구와 근동의 건축적 콘셉트를 조화시킨 알레고리적 종합이다. 현대식 재질인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건축된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의 IMA 건물의 외벽은 아랍의 전통 문양 마슈라비아mashrabiyya를 연상시키는 240여 개의 창문으로 꾸며졌다. 이들 창문은 정교한 장치에 의해 햇빛 강도에 따라 자동으로 조절되는 카메라 조리개 같은 기능을 한다. 창문은 원, 사각형, 육각형 등의 형태와 수학적인 정확함, 빛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신비함을 내뿜는다. 섬세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퐁피두센터처럼 가설구조물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건축물 높이규정에 따라, IMA의 건물 높이도 주변 건물들과 같다. 좀 더 높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 퐁피두센터 앞 광장처럼 IMA의 광장 지대를 낮추었음에도, 층간 높이가 낮아 답답한 인상을 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유리 재질 특유의 투명한 느낌이 드는 건물 내부의 한가운데는 더운 지역의 내부 뜰인 파티오patio처럼 비워놓았다. 승강기 또한 4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IMA의 파티오를 오르내리며 투명함을 즐길 수 있다. 이 투명함과 반대되는 지하의 닫힌 공간은 수많은 기둥에 의해 천장이 지탱되는 고대 이집트의 히포스타일hypostyle을 연상시키며 무겁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IMA는 아랍권 국가의 문화와 예술을 보여주는 ‘상설 미술관’과 현대미술을 비롯 다양한 전시를 보여주는 ‘특별 전시장’으로 나뉜다. 1층에는 서점, 카페, 매표소가 있으며, 옥상에 올라가면 노트르담 성당, 유유히 흐르는 센 강, 파리의 정경이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고, 옥상 입구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현재 공사 중인 도서관에는 아랍 전문서적과 신문·잡지 등이 비치되었다. 특히 계단이 인상적인데, 바빌로니아, 수메르, 아시리아의 지구라트ziggourat에서 영감을 얻은 피라미드식 계단에 책장이 있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필요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서구와 아랍은 교류가 늘고 서로간 이해가 충돌하는 등 점점 더 예민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IMA 입구에 설치된 거리작가 콤보Combo의 작품 <공존하다COEXIST>는 서로 다른 세계와의 교류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IMA의 궁극적인 정신을 말해준다. 이 작품에는 이슬람의 초승달, 유대교의 별, 기독교의 십자가, 이렇게 세 개 유일신 종교의 상징이 한 단어(세계)에 공존한다. ●

아랍문화원 입구에  설치된 작가 콤보(Combo)의 〈COEXIST(공존하다)〉 사진·심은록

아랍문화원 입구에 설치된 작가 콤보(Combo)의 〈COEXIST(공존하다)〉 사진·심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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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의 외관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의 외관 서울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39

Report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국내 이슬람교도 인구는 3만5000명(한국이슬람교중앙회 홈페이지 참조)에 달한다. 우리에게 이슬람문화는 그야말로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서 이슬람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의외로 제법 많다. 이태원에 있는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은 무슬림의 예배공간이지만 모스크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호기심이 동한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태원의 대표적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방문에 제한은 없으나 이슬람법에 따라 사원2층의 예배실은 여자의 출입이 금지된다. 서울중앙성원은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모스크로 1976년 개원했다. 현재 국내 이슬람 사원은 부산, 전주, 경기도 광주, 안산, 파주, 제주 등 전국 14곳에 있다.
음식을 맛보는 것은 이슬람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좀 더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국내 무슬림 가족이 할랄 인증 식품을 구매하는 과정을 소개하면서 할랄음식점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할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은 꽤 많지만 한국이슬람교중앙회의 공식인증을 받은 할랄 식당은 전국 5곳에 불과하다. 그 중 전통 터키 음식을 판매하는‘케르반Kervan’은 국내 최초로 할랄인증서를 발급받은 레스토랑이다. 여기서는 터키의 피자, 피데와 각종 케밥 등을 맛볼 수 있다.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서 하얀 마녀가 건네는 달콤한 유혹의 젤리로 알려진 로쿰, 직접 구운 바클라바 등 터키식 디저트를 판매하는 베이커리도 운영하고 있다. ‘케르반’을 관리하는 (주)투트라 비디엠의 황은하 부장은 “한국이슬람교중앙회의 할랄인증서를 받으려면 점검받을 사항이 40여가지가 넘는다. 조리 시 국내외에서 이슬람법에 따라 도살되지 않은 고기, 알코올 사용을 금하다 보니 식재료부터 각종 소스나 향신료까지 예민하게 확인해야 한다”며 까다로운 할랄인증서 발급과정을 설명했다.
한편 이슬람문화를 시각적으로 접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강남구 역삼동 주한이스탄불문화원은 1998년에 설립된 민간 문화원이다. 이곳은 ‘이슬람’에 방점이 찍혀 있기보다는 이슬람문화권인 ‘터키의 문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터키어, 터키요리 강좌를 비롯해 한국·터키 간 문화적 이해를 돕는 다양한 강의와 행사를 진행한다. 터키 관광지에 대한 자료와 터키 관련 서적을 700여 권 보유하여 열람 및 대출이 가능하고 소규모 전시실이 있어 터기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예나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다. 단체 신청자에 한해 터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도 있다.
이외에도 문화체험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문화 관련 외부 행사를 주최하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한국-아랍소사이어티(KAS)를 들 수 있다. 한국 및 아랍 22개국 정부(왕실), 기업, 단체가 참여하는 민・관 합동 비영리 공익 재단법인으로 한국과 아랍국가간 문화, 학문, 비즈니스 교류를 목표로 세워진 기관이다. 매년 진행되는 ‘아랍문화제’는 이곳의 대표적인 문화사업이다. 아랍국가의 공연팀을 초청하고 아랍문화를 소개하는 다양한 전시를 열 뿐 아니라 아랍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도 개최한다.
임승현 기자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서울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39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서울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39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인증하는 할랄인증서를 국내 최초로 발급받은 정통 터키 레스토랑 ‘케르반(Kervan)’.  02-792-4767 kervanturkey.co.kr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인증하는 할랄인증서를 국내 최초로 발급받은 정통 터키 레스토랑 ‘케르반(Kervan)’. 02-792-4767 kervanturkey.co.kr

주한이스탄불문화원의 내부. 소규모 강의실과 터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02-3452-8182 www.turkey.or.kr

주한이스탄불문화원의 내부. 소규모 강의실과 터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02-3452-8182 www.turkey.or.kr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아랍문화제의 공연 모습. 02-551-7130 www.korea-arab.org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아랍문화제의 공연 모습. 02-551-7130 www.korea-arab.org

 

SPECIAL FEATURE 이슬람미술의 역사

전완경 (1)-누끼

〈Page of Nasta‘liq Calligraphy〉 Opaque watercolour, ink, gold on paper 42.3×28.8cm Burhanpur, India(Historic Hindustan)1631~1632 1659년 다라 쉬코우 왕자의 사인이 있다 사진제공 Aga khan museum

전완경 부산외국어대 아랍어과 명예교수

622년 공식적으로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에 아랍인은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아랍문자 이외에는 미술에 공헌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비록 문자를 가지고 있던 까닭에 비문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책이나 문헌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아랍인 대부분이
유목민이었으므로 기념비적인 예술을 만들 환경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슬람은 초기의 기독교와 달리 시각예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슬람이 출현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후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의 지도자들은 메디나가 이슬람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도록 노력했으며,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바빠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이슬람 공동체의 확대와 더불어 건축물의 건립과 장식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사람은 비잔틴, 콥트, 사산, 중앙아시아인 등 정복지의 숙련된 장인과 예술가들이었다. 당시 예술가들은 다양한 국적을 갖고 있었으며, 반드시 이슬람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이슬람미술가들은 고유의 회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잔틴제국과 사산제국 등 정복지역의 문화가 제공하는 모델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점차 비잔틴제국이나 페르시아 회화가 아닌 그들 자신의 예술로 만들어갔다. 즉 이슬람문명에 공헌한 모든 문화의 전통을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에 비로소 이슬람건축양식이 확립됐다. 이슬람 초창기부터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던 사원(모스크)에 이슬람의 상징물이 다수 소개됐다. 안뜰, 첨탑(미나렛), 설교단, 벽감(미흐랍), 분수대, 마끄수라(VIP Room), 돔 축을 이루는 본당 회중석 등이 이슬람 사원의 특징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그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모스크를 더욱 큰 규모로 지었다.
건축학적으로 볼 때 모스크에는 기독교 교회나 성당과는 판이한 특징적인 요소들이 있다. 모든 모스크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서 세워졌다.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횡대를 이루어 길게 도열해 예배 의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배치는 메카를 향해 벽면에 가깝게 자리 잡으려는 욕구의 반영이며, 이슬람에서 절대적으로 지향하는 평등성에도 부합하는 행위이다. 자연적으로 모스크는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구조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같은 건축 분야와는 달리 금속 세공, 직물 직조, 필사본 채색 등 장식미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거나 빈약하다. 이슬람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회화는 의학 논문, 동물에 관한 책 그리고 서정시집 몇 권 등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려진 삽화들뿐이다. 그나마 이것도 이런 특정한 주제에 삽화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의학 같은 과학서적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 삽입돼야 했다.
무슬림 종교 그림은 14세기 초가 돼서야 출현했다. 최고의 완성품이자 오리지널 그림은 1330년부터 15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8세기부터 13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회화가 걸어온 운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예언자 언행록에서 그림을 금지하고 혐오하는 내용이 많이 전해져 내려왔고 또 이슬람 신학자 대부분이 인간과 동물의 재현은 신神만의 특권이며, 그것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생물의 상을 만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미술가가 오직 신만이 가능한 창조행위를 빼앗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생물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를 포함해 그 어떤 사람과 동물, 심지어 신이나 천사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화가들은 이슬람 초기부터 우상숭배 전통과 전쟁을 벌인 사상가와 문인들과는 달리 고상한 지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회화의 전통은 이슬람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화가들에 의해 유지된 것이 분명하다.
대신 무슬림은 기하학, 식물, 자연경치, 서예 등을 이용한 장식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미술을 발전시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의 벽면은 여러 가지 색깔의 보석을 사용해서 대리석에 기하학적 문양과 꽃문양을 새겨 넣은 아라베스크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건축 장식, 조각된 나무와 돌 표면, 색칠한 표면과 도기, 유리, 금속공예, 제본, 도서 채색, 이슬람 카펫 등 다양한 장식에서 아라베스크가 발견된다.
필사자는 당시 이슬람 신자에게 아주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특히 코란의 필사본은 무척이나 신중한 계획 아래 작성되었고, 선 하나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8세기에 발생하여 가장 칭송받는 예술이 된 서예는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의 돔 사원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문碑文의 형태이긴 하지만 분명히 장식적인 기능을 보여준다. 이처럼 장식적인 아랍어 명문을 만드는 전통은 이슬람 초기 건축물은 물론 후대의 수많은 건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스크에서 아랍어 문자는 일반적으로 돔 아래나 벽감 주변 또는 출입구 주위에서 발견된다. 이 서예야말로 오롯이 이슬람적인 예술이며, 이슬람회화에 끼친 영향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무슬림은 인간과 동물의 재현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미학을 나타낼 경로로 서예를 선택했다. 아마도 서예가 단 하나의 순수 아랍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아랍어 글자는 장식적 디자인에 크게 한몫 차지하면서 이슬람미술에 하나의 강력한 모티프가 되었으며, 심지어 종교적인 상징이 되기도 했다.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는 이슬람문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것 중 이슬람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을 살펴보면, 장식이 무척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사원과 궁전의 내부는 마치 화려한 색채의 꽃으로 꾸며진 화원과도 같다. 톱카프 궁전 타일의 장식 도구에도 꽃문양이 많이 쓰였다. 14세기 중후반에 완성된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의 알함브라 궁전은 외부에 비해 내부를 지나치게 호화롭게 장식했다. 궁전의 벽은 타일과 치장벽토 세공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이곳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복잡성에 놀라게 된다. 내부는 추상적인 선線 요소 그리고 아라베스크(포도나무 덩굴손 등 고대의 잎사귀 디자인을 채택하고, 이것을 아라베스크라는 새로운 형태의 장식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 바로 아랍인들이다. 한마디로 아라베스크는 이슬람세계의 예술과 밀접히 연관된 무슬림 예술의 형태이며, 이슬람 장식미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와 아랍어가 결합된 장식적인 형태의 커다란 아랍어 서체로 치장됐으며 아울러 기하학적 형태의 타일도 함께 볼 수 있다.
고대부터 장식 디자인과 색채 전문가로 인정받는 페르시아인들은 이 시대에 이슬람의 산업공예가 높은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주인공이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카펫이 크게 발전했다. 본질적으로 이슬람미술에 속하는 카펫의 디자인으로는 사냥하는 모습과 정원 풍경이 선호됐으며, 염색에는 명반이 사용됐다. 이와 같은 동양풍의 카펫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유럽의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파랑, 초록, 빨강, 노랑 중 두 가지 색조를 선택해 채색하고, 중앙은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장자리는 아랍어 서체로 장식했다.
한편 기하학적 문양 이외에도 인간의 형태나 동식물을 그려 넣은 세라믹이 장식적 스타일의 아름다움을 획득했다. 또 페르시아로부터 다마스쿠스에 소개된 타일은 전통적인 꽃문양으로 꾸며져 건물 내/외부 장식에 쓰였고, 모자이크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유리와 도기 등 공예분야는 이 시대에 특히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시리아를 중심으로 최고조에 이르면서 일상생활 도구를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갔다.
은이나 금으로 만든 그릇을 성당 예식에 사용한 기독교사회와는 달리, 이슬람사회의 사원에서는 그런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공예품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던 사치품들이다. 이슬람의 도공들은 다른 분야의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색과 질과 문양 같은 외형적 장식을 선호했다. 이처럼 정교한 외형에 대한 선호는 이슬람미술을 특징짓는 불변의 요소 중 하나이다.
13세기는 이슬람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몽골인이 이슬람 세계를 침공해서 예술의 중심지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나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들을 통해 주제의 처리, 여러 색으로 칠한 불사조, 정교하게 그린 나무와 꽃 그리고 물 등 분명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극동의 사상과 예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로의 맘루크 시대에는 금속 공예품의 생산이 증가하고 상감 세공기술의 발달도 두드러졌는데, 아랍어 서체와 문장 화법이 주요 장식 테마로 이용되었다. 카펫 중에는 특히 적색 바탕에 별, 삼각형, 팔각형 등 기하학적 문양을 넣은 디자인이 발달했다. 맘루크 술탄들의 후원하에 만들어진 세밀화는 대단히 아름다웠고, 이는 14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세밀화 속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인형 같고, 그림은 해설적이라기보다는 눈에 띄게 장식적이다.
세밀화 부분에서도 새로운 양식이 나타났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화가들이 양식과 기술을 교환하면서 양측이 모두 좋은 결실을 얻은 것이다. 이때부터 다양하고 깨끗한 채색이 무슬림의 그림에 도입되었고, 극동의 요소가 가미되어 풍경, 특히 바위・나무・구름 등이 혼합됐다. 그래서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된 세밀화는 티무르 왕실의 옥외문화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5세기 후반기에 가장 특징적인 사건을 들자면 몇몇 화가가 처음으로 작품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인은 지중해와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이 시대에 여전히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은 서예와 세밀화 분야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그림에 보이는 독특한 사실주의는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발전했고 초상화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 무굴제국의 그림과 경쟁 구도에 놓였다.
16세기 중반에 터키와 페르시아, 양쪽 모두에서 필사본 서적을 후원하는 위대한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 세계의 회화는 분명히 쇠퇴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금속공예, 직물, 타일, 유리병, 비단, 카펫 산업이 발전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17세기 이전 페르시아 회화는 유럽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은 17세기 중반 유럽인과 페르시아 화가들이 직접 접촉하면서부터 한층 강화됐다. 그러나 이는 결국 페르시아 회화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페르시아 화가들이 빛과 음영을 적용한 유럽의 원근법과 입체 표현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옛 페르시아 세밀화보다 커 보이지만 생생한 느낌을 주지 못했으며,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치 긴장한 듯 어색해졌다.
당시 오스만 화가 중 한 사람인 레브니는 술탄의 딸 결혼 축제행사를 묘사한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 화단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기에 결국 오스만 회화의 특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진통이 이어졌다. 이처럼 이슬람미술을 만들어낸 가치들은 이슬람 세계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점차 사라지고, 서구의 개념과 기법에 압도되었다. ●

알 하산 이반 알 아라브샤 (Al-Hassan Ibn al-Arabshah) ‘카산의 메이단 모스크의 미흐랍 (Mihrab of the Meidan mosque in Kashan)’ Glazed and painted Listre ceramics 1226 Staatliche Museen Beriln 소장

알 하산 이반 알 아라브샤(Al-Hassan Ibn al-Arabshah ‘카산의 메이단 모스크의 미흐랍 (Mihrab of the Meidan mosque in Kashan)’ Glazed and painted Listre ceramics 1226 Staatliche Museen Beriln 소장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아라리오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아라리오의 실체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기 때문이다.아라리오는 서울과 천안 그리고 중국 상하이엥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엔 아주 의미 있고 특색 있는 미술관을 연이어 개관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다시 이목을 끌고 있다. 아라리오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건축가 고 김수근의 옛 ‘공간’  건물을 매입해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라는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고, 제주도 구도심인 탑동 일대를 핫한 아트타운으로 재생시키는 뮤지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989년 처음 갤러리 문을 연 이래 2002년 재개관하면서 거칠것 없이 진화하며 무한증식해 온 아라리오의 중심에 김창일 회장이 있다. 그는 현재 1인 4역의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리리오의 행보에 대해 이제 섣불리 개인의 호사스러운 취미 혹은 돈을 벌기 위한 갤러리 비지니스라고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존재감이 너무 커진 까닭이다
아라리오,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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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MUSEUM jeju

탑동 시네마

이 건물은 1999년 제주에 처음으로 문을 연 복합영화상영관이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이 극장은 2005년 폐관된 이래 9년 동안 빈 건물로 방치돼왔다. 천장이 높은 극장 건물의 특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동시에 콘크리트 구조의 건물 뼈대를 그대로 살려 대형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장환 Zhang Huan (왼쪽) 혼합재료 160×1070×520cm 2009

장환 Zhang Huan <영웅 No.2>(왼쪽) 혼합재료 160×1070×520cm 2009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   혼합재료 설치 110×2135×315cm 2012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What Does the Vessel Contains)> 혼합재료 설치 110×2135×315cm 2012

동문모텔 Ⅰ

제주 구도심의 상징인 동문시장과 제주항에 인접해 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뱃사람들이 머물던 여인숙과 여관, 모텔 같은 숙박업소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항공교통 발달과 신도심 개발과 맞물려 이 일대 상권이 쇠퇴했다. 1996년 개천을 복개하고 생태환경을 복원하면서 서서히 활력을 되찾고 있다. 5층 규모의 모텔 객실과 부대시설 흔적을 간직한 채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이 연중무휴로 상설 전시된다.

 Antony Gormley  206×88×77cm 동문모텔 1층 안내 데스크 옆에 놓여있다

Antony Gormley <우주의 신체들 I> 206×88×77cm 동문모텔 1층 안내 데스크 옆에 놓여있다

토니 아워슬러 Tony Oursler   2002

토니 아워슬러 Tony Oursler <제거(Eliminations)> 2002

탑동 바이크샵

탑동 시네마 바로 뒷골목에 위치한 이 건물은 이름 그대로 자전거 매장과 분식집 등이 있던 건물이다. 개관전시로 한국 실험미술의 산 증인인 원로작가 김구림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 이어서 올봄 사진조각으로 유명한 권오상 작가의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도 이 공간은 개인전 중심으로 운영된다.

김구림 (왼쪽) 1973

김구림 <걸레(닦여진 바닥과 걸레)>(왼쪽)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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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GALLERY Cheonan

시외버스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충청점 바로 옆에 있는 아라리오 갤러리 앞마당은 천안시에서 선정한 ‘천안 12경’ 가운데 하나로, “학생, 청소년 등 하루 7만여 명이 찾는 젊은이의 광장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조각품 63점과 백화점 갤러리 등이 있음”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서있다. yBa 대표작가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아르망, 수보드 굽타, 코헤이 나와, 김인배, 성동훈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대형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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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ien Hirst  브론즈에 도색 700 x200cm 2000

Demien Hirst <cksrk(Hymm)> 브론즈에 도색 700 x200cm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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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GALLERY Shanghai

일찍이 중국 베이징과 미국 뉴욕에 진출했던 아라리오는 현재 아시아 아트허브로 성장한 상하이에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 본토 작가와의 협업을 비롯해 새롭게 급부상하는 아시아 동시대미술의 최신 경향을 소개하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2월 8일까지 차세대 중국작가로 주목받는 가오 레이의 개인전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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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 레이 Gao Lei   330×120×180cm 2012

가오 레이 Gao Lei < M-275.> 330×120×180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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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GALLERY Seoul

그동안 서울 청담동 옛 카이스갤러리 자리와 아트선재센터 옆 골목 옛 목욕탕 건물에 있던 갤러리는 2014년 3월 소격동 현재 위치에 문을 열었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바로 옆에 자리 잡아 인근 국제갤러리와 학고재 등과 어우러져 명실공히 한국 현대미술의 메카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2월 22일까지 사진작가 한성필의 개인전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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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한성필의 개인전  전시광경

2월 22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한성필의 개인전 <지극의 상속(Polar Heir)>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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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MUSEUM in space

등록문화재 제586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한국 현대건축사의 거장 故 김수근(1931~1986)의 철학이 깃든 유서 깊은 장소다. 건축사무소의 경영난으로 궁중분해될 위기에 처한 이 건물을 매입한 아라리오는 건축물 원형의 특성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공간과 조화를 이룬 신개념의 미술관 모델을 제시한다. 건축예술과 만난 현대미술품은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발산하며 관람객에게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함에 부족함이 없다.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옆 건물은 한옥카페와 베이커리, 일식, 이태리식,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사진은 4층 일식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 광경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옆 건물은 한옥카페와 베이커리, 일식, 이태리식,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사진은 4층 일식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 광경

최욱경 Choi Wook-kyung  (왼쪽) 캔버스에 오일 96.5×79.5 cm 1961 변관식 (오른쪽) 29.5×165cm 1963

최욱경 Choi Wook-kyung <여인좌상>(왼쪽) 캔버스에 오일 96.5×79.5 cm 1961 변관식 <춘경산수>(오른쪽) 29.5×165cm 1963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어제와 오늘

배혜경 크리스티 한국사무소 대표

“I have a dream~” 그룹 아바Abba의 경쾌한 노래가 들리면 나는 항상 조건반사처럼 김창일 회장을 떠올린다. 그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김창일 회장의 휴대전화 컬러링이었다. “나는 꿈이 있고 어두움을 헤치며 때가 되면 비상하리라”는 가사처럼 그는 늘 꿈을 품고 사는 ‘청년’이다.

# Dream
어린 시절 비 온 뒤 갠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던 소년이 있었다. 무지개는 소년에게 막연하지만 한 가지 꿈을 건넸다. 그 무지개처럼 누군가의 영혼을 정화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소년 창일은 장년이 되어 미술관을 견학하고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 꿈을 멋지게 구체화했다. “LA 현대미술관 MOCA와 디아:비컨 Dia:Beacon을 보면서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미술관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느꼈다”는 그는 전 세계의 좋은 작품들을 수집해서 미술관을 통해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2000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천안에 미술관을 지을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고 외국의 건축가와 이미 설계를 진행한 상태였다. 김 회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평생을 간직해온 그의 화두인 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과 자기 최면, 자기 암시이다. 보통 사람은 꿈을 꾸더라도 모든 일상이 일관되게 그 꿈을 향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면 끊임없이 “ 꿈, 운명, 아름다움, 예술” 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는 실제로 일상에서 잔가지와 군더더기는 다 쳐내고 매우 단순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꿈에 선택, 집중한다. 3년 전쯤부턴가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들국화 전인권이 절규하듯 부르는 “하지만 후회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가 꿈꾸던 미술관이 가시적으로 풀리지 않았고 뉴욕 아라리오, 베이징 아라리오의 철수 등으로 인해 힘든 시절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소격동과 상하이에 갤러리를, 그리고 옛 공간사옥을 매입해 꾸민 뮤지엄 인 스페이스와 제주도에 세 개의 뮤지엄을 지속적으로 개관했지만 그 모든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35년간 축적된 그의 땀과 노력이 이루어낸 꿈의 결실이라 하겠다.

# Destiny
김창일 회장은 본인이 유학 간 것도 아니고 미술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컬렉션을 하게 된 것은 기적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예술은 곧 운명이다. 운명은 그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중 하나가 공간사옥이다. 어느 날 그가 예고도 없이 우리 사무실에 들러 상기된 표정과 들뜬 목소리로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공간사옥을 인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던 기억이 난다. ‘낡고 침침하고 오밀조밀한 건물에 어떻게 미술관을?”이라는 세간의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멋진 미술관으로 공간사옥을 살려냈다. 역사성과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직접 큐레이팅하여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현대 미술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대미술을 전시하기 쉽지 않은 공간 구조인데도 신디 셔먼, 바바라 크루거, 앤디 와홀,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등과 백남준, 강형구, 최병소, 이동욱 , 수보드 굽타, 권오상 등의 작품들이 마치 ‘바로 여기가 내 자리야’라고 웅변하고 있는 듯한 미술관…. 참으로 진지한 컬렉션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전시된 이 미술관이 있어 나는 요즘 외국 방문객이 와도 마음이 놓인다. 그들에게 한국 개인 컬렉터의 실험적인 현대 미술관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assion
한 남자가 티셔츠에 갇혀 마구 버둥대고 있다. 한 팔을 소매에 끼었는데 다른 한 팔은 소매 구멍이 영 찾아지질 않는다. 너무 허둥대는 바람에 티셔츠는 더 엉키고 만다. 딱 학교에 지각한 소년 같은 이 사람은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빨리 작업장으로 달려가려 서둘다가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처럼 그에게 창작은 간절한 소망이며 운명 같은 신내림이다. “나는 한때 죽을 만큼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업가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꿈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나의 예술로 표현하겠노라, 결심했다.”
예전에 그를 보면 솔직히 뜬구름을 잡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고 에너지가 지나치게 넘치는 무모한 사람. 나처럼 평범한 세상 사람의 잣대로 보기에 그의 열정은 왠지 부담스러웠고 그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적잖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6년간 그 어떤 전업 작가보다 더 치열하게,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다양한 기법과 주제의 실험을 통해 계속 발전된 그만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그가 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했다. 그냥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괜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스스로 고독한 환경 속에 침잠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작품에 쏟아 부었다. 그림을 그릴수록 자신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릴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하며 고민했다는 그는 오늘도 하루의 반은 작품 구상과 작품을 만드는 데 보내고 있다. 그에게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더 투철한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그다. 요즈음의 그를 보면 소년처럼 눈이 맑아진 느낌이 물씬하다. 15년 전에 느꼈던 사업가의 풍모보다는 예술가의 아우라가 더 강하다.

# Arario Brand, Collection Brand
“나는 내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산다.” 김 회장이 컬렉션을 할 때 선택하는 기준은 그 자신의 ‘필feel’이다. 그의 컬렉션은 대부분 커팅에지cutting edge 작품들이다. 매우 실험적이고 이슈가 되는 작품들을 과감하게 컬렉션함으로써 아라리오만의 특별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냈다. 그에겐 시대를 앞서가는 그만의 직관과 필이 있다. 특히 영국의 yBa 작가들과 독일의 라이프치히 화파 작품을 그들이 글로벌 미술계에서 막 부상하기 시작할 때 수집했고, 나아가 아시아의 떠오르는 신진 작가들에 주목하고 컬렉션해왔다. 마크 퀸의 <셀프>나 채프먼 형제의 작품처럼 매우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작품들까지도 수용할 정도로 그는 열려있으며 또한 많은 한국의 동시대 작가도 후원해왔다. 그 동안 동시대 미술시장은 급성장을 했고 키스 해링, 시그마르 폴케, 라이프치히파 작가들, 신디 셔먼,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채프먼 브라더즈, 안소니 곰리, 앤디 워홀, 바스키아, 장환 등 등 이미 국제 시장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일찌감치 수집해온 그의 안목은 결과적으로 아라리오 컬렉션의 정체성이 되었다.
용도 폐기되고 버려진 영화관과 바이크숍 그리고 모텔. 제주도에 있는 이 건물들을 미술관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 건물들이 헐리고 그 위에 번듯한 현대식 미술관 건물들이 우뚝 서게 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김 회장은 그 특유의 역설과 예측불허의 감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멋진 현대 미술관으로 재창조해냈다. 서구에서는 이미 용도폐기된 건물을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재창조한 경우가 많지만 이렇게 한국적 상황에 절묘하게 접목시킨 것은 그동안 해외의 여러 미술관을 견학하면서 머릿에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친 김 회장 개인의 내공에서 기인한다. 아라리오 제주 뮤지엄의 콘셉트는 죽은 도시를 재생시키고 활성화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이다. 이렇게 그는 서울의 뮤지엄 인 스페이스와 일관된 컨셉의 미술관으로 아라리오 뮤지엄만의 새로운 실험적인 브랜드 콘셉트를 만들어 냈고 이는 지역 문화의 가치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은 아라리오 아이덴티티의 정점에 있다. 그는 사업가, 컬렉터, 예술가로서 아라리오란 브랜드에 스토리를 입히는 사람이다. 그중 어느 하나를 빼면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듯이 그 셋은 삼각대처럼 김창일이라는 개인 브랜드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가 회사명을 ‘아라리오”로 채택한 것도 재미있다. 한국적 고유성을 가지면서 외국인도 쉽게 발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에서 “아라리오”란 참으로 기발한 이름을 추출해냈다. 이처럼 그는 매우 단순 명쾌하게 핵심에 집중한다. 그는 영원한 청년이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입에 붙었고 꾸벅 인사도 잘하며 항상 배우는 학생처럼 스스로를 낮춘다. 그러한 젊은이의 기질은 그로 하여금 남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남과 다르게 세상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매우 소탈하고 다혈질인 그는 만날 때마다 기발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주위를 무장해제시키며 행복바이러스Happy Virus도 전파한다. 하지만 겉으로 굉장히 외향적이고 사교적으로 보이는 그에게 실제로는 매우 내성적이며 예민하고 상처도 쉽게 받는 소년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인간 김창일의 매력이 아라리오에 색깔을 부여하는 근본 원인이 아닐까?
사람들은 김 회장의 승승장구를 보면서 ‘꿈을 실현한 행운아’라며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에게도 동트기 전의 어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 성공은 그의 과거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의 산물이다. 특히 뉴욕 아라리오와 베이징 아라리오를 닫으면서 그는 많이 슬퍼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많이 배웠고 성장했고 단단해졌다. 성공이 너무 일찍 왔다면 그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그의 꿈은 실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의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기에 앞으로 아라리오가 가는 길에 또 어떤 의외와 역설이 튀어나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한 시골 사업가의 꿈이 천안이라는 문화적 변방을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생동하는 풍요로운 문화도시로 변모시킨 이변을 보았다. 또 서울과 제주의 문화 지형도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보고 있다. 앞으로 김 회장은 제주에 6개의 미술관을 더 만들어 그가 지난 35년간 모은 3700점의 컬렉션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그의 행보는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된다. 그가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면서 어떻게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여갈지는 그대로 의문형으로 열어놓기로 하자. ●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우리 미술계가 아라리오를 주목하는 이유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

세계 미술사의 변화 뒤에는 언제나 뛰어난 딜러와 컬렉터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교회와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19세기 파리의 인상파 미술은 폴 뒤랑-뤼엘이라는 딜러의 눈이 있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전위적 작가로 ‘실험 단계’에 있었던 피카소와 마티스는 이들을 일찍 알아본 거트루드와 레오 스타인 남매라는 컬렉터가 있어서 클 수 있었다. 20세 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가 세기를 바꾼 새로운 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리오 카스텔리 같은 뛰어난 딜러가 있었다. 미국 현대미술작품의 값이 치솟은 뒷 배경에는 물론 자국의 미술품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의 부자 컬렉터들이 있다. 중국 현대미술이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위치에 오른 데에도 당연히 중국의 미술시장과 중국 컬렉터들의 힘이 있었다.
전 세계의 역사까지 거창하게 가지 않더라도, 한 나라의 한 시대에서 예술 트렌드를 만드는 데에 딜러와 컬렉터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21세기 현대미술계에서는 어떤 딜러, 컬렉터가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아라리오의 김창일 회장을 빼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가 변화해온 모습을 생각하면, 중요한 포인트마다 김창일 회장과 그의 ‘아라리오’가 있었다.
시외고속버스터미널, 백화점, 아라리오 갤러리가 나란히 들어서 있는 충남 천안시 신부동 일대는 전부 김창일 회장의 소유이면서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재미있는 미술거리다. 코헤이 나와의 높이 13m 폭 16m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김인배, 수보드 굽타, 키스 해링 등의 작품들이 거리에 전시되어 있고, 그 옆 아라리오 갤러리에는 김창일 회장의 가장 유명한 컬렉션인 데미안 허스트의 <찬가>를 비롯해 아라리오가 소장하거나 전시하는 동서양의 첨단 미술작품들이 교체되며 보여 진다.
그는 천안의 얼굴을 바꿨고, 이를 통해 천안이라는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천안에서 시외고속버스터미널, 백화점, 외식사업,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처음엔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로 시작해 딜러 겸 컬렉터로 점점 이름을 알렸다. 세계적인 미술잡지 《아트 뉴스》가 뽑은 세계 컬렉터 200명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인으로 유명한 그는 ‘미술 사업’ 영역을 확장해 작년에는 서울과 제주도에 ‘아라리오’ 이름의 미술관을 지었다.
김창일 회장의 미술 컬렉션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우선 우리나라에서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김창일 회장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미술컬렉터나 미술관 설립자라면 으레 재벌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재벌가의 며느리로 대표되는 ‘여성 컬렉터’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컬렉션은 해외미술의 경우 유럽과 미국의 근현대미술 대가들에게만 초점을 두었다.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 컬렉션’은 이런 세상에 나타난 참 새롭고 다른 컬렉션이었다.
김창일 회장이 등장하기 전에 국내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터로 꼽힐만한 사람은 삼성미술관 리움 홍라희 관장이 유일했다. 그런데 홍 관장의 리움 컬렉션만해도 이미 서양미술사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전통적인 대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이 골고루 갖춰진 교과서적이면서 ‘아트뱅크’에 가까울 정도로 투자가치 있는 작가들로만 형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김창일 회장은 소위 가장 ‘핫’한 지금 현재의 미술에 집중한 새로운 개념의 컬렉팅을 보여줬다. 예컨대 2000년대 초에는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의 yBa작가들을 수집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중국현대미술 작가들과 우리나라의 독특한 젊은 작가들을 수집하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흔히 재벌가와 부자들의 컬렉션은 당장 내일이라도 경매회사에 들고 나가면 비싸게 값 매겨질 환금성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라리오 컬렉션은 비싼 작품도 있고, 잘 팔리지 않을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다. 그가 꼭 투자에 연연해 작품을 모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이유다.
한마디로 아라리오가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이후 많은 게 새로워졌다. 김창일 회장이 설립한 아라리오 갤러리가 2006년 여름에 〈중국의 현대미술과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그룹전시를 열었을 때만 해도 장 샤오강, 위에민 준, 팡리 준, 왕 광이 등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중국 현대작가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우리나라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매우 신선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 현대작가들과 친분을 쌓아놓았기에, 세계 미술시장이 아시아에 눈을 돌리던 2000년대 중반에 이들을 한 번에 한국으로 몰고와 전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한국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일약 중국현대미술로 끌고 갔다.
좋은 컬렉션에는 뚜렷한 ‘테마’가 있다. 이런 점에서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 컬렉션’은 뚜렷한 테마 아래 수집한 표가 난다. 그는 특히 한국과 중국의 현대미술에 일관된 관심을 가졌다. 중국현대미술이 이렇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에 일찍이 중국에 가서 중국작가들을 직접 작업실에서 만나면서 작품을 보고 소장했다. 작품 크기는 소장하고 팔기 쉬운 작은 사이즈에서부터, 실내에는 전시가 불가능한 어마어마 큰 것까지 다양하고, 회화뿐 아니라 조각, 설치, 미디어까지 장르도 다양하게 수집해왔다. 어떤 작품은 투자가치가 있지만 어떤 작품은 투자가치를 불분명하되 그냥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들이다. 뭔가 고집이 있고 의도 자체가 남다르게 보인다.
두번째로,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방법이 색다르다. 그가 서울 종로에 있는 옛 공간사 사옥을 사서 개조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방문해본 사람들은 안다. 건물을 요리조리 뚫고 헤집고 다니면서 그 작품들을 감상하는 동선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지. 더군다나 “외국 여행 갔을 때 미술관이 문을 닫으면 슬프다”며 미술관을 365일 무휴로 열고 있다. 작품 수집하는 방법이나 그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방법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중에게 자기 모습을 늘 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 다른 컬렉터들과 참 다르다. 전시 오프닝 리셉션에서는 사회자 역할을 자청하고, 오프닝을 자축하는 ‘고성방가’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자기 갤러리에서 자기가 전시한다’는 미술계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벌써 개인전을 6번이나 가진 아티스트가 아닌가. 사업가로서 아트딜러로서 컬렉터로서 유명한 그이지만, 어딘가에 있는 그런 아티스트 기질 때문에 모험적이고 고집스러운 컬렉션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해외에는 이렇게 대중 스타급의 컬렉터들이 꽤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창일 회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이렇게 색다르고 재미있고 역사에 남을 컬렉터가 있다는 점, 열정과 고집으로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미술 컬렉션이 결국 성공한 ‘미술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우리 미술계는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

아트숍 전경

아트숍 전경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191×68×137cm 2001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 Reflection > 191×68×137cm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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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러티(Charity))> 브론즈에 도색 680×200×200cm 2002~2003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씨킴에게 선물 받은 행복한 외로움

강형구 작가

언젠가 친하게 알고 지내던 기자가 내게 물었다. “아라리오 씨킴 회장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그 질문은 씨킴 회장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전제된 것이었고, 사업가의 개인적 취미에 불과하지 않냐는 비아냥거림이 강하게 풍겼다.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유명하지만 게으른 작가보다 그가 훨씬 작가답다고 생각한다”고. 이런 나의 반응에 그는 당연히 머쓱해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기자는 나와 친하다는 생각에 그 비아냥거림에 내가 동조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 제주도 성산 하도리라는 아름다운 마을에 자리 잡은 아라리오 스튜디오 ‘생각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씨킴 회장의 작업장에는 그의 작업 흔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씨킴 회장은 평소 “I have a Dream,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슬로건을 입버릇처럼 자주 말한다. 그의 말처럼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결과물과 그 과정은 앞선 기자의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증거인 셈이다. 그는 이렇게 꿈을 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욕망이 큰데 세속의 요구에만 충실한, 그래서 꿈을 포기한 소위 잘나가는 작가가 많은데 비해 이런 점에서 그는 정말 훨씬 더 작가다웠다. 나는 여기서 씨킴 회장의 꿈에 대한 실천과 결과물에 대해 언급하려는 게 아니다. 그 작품에 대한 실천은 바로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예술을 향한 그의 유별난 애착을 검증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하려 함이다.
이런 씨킴의 열정으로 지금의 이 스튜디오가 만들어졌고 나는 지금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비록 제주도가 고향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마치 낙향한 선비처럼 내 마음의 세속성과 서울이란 중심에서 일탈해 있다. 대인관계가 없는 외로움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세상에 소위 이름이 알려지기 전, 이와 비슷한 외로움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당시 미술의 시장성은 아예 고려조차 않고 확대된 얼굴을 200호 크기로만 그려댔던 무모함 속의 외로움은 공포였지만 그 순수성 속의 내가 생각난 것이다. 감상자들의 고마운 사랑을 받으며 아라리오와 함께한 지난 10년은 영광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세속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고 나는 제주 스튜디오를 택했다. 나는 요즘 젊을 때 꿈속으로 다시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아라리오와 씨킴 회장은 내게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뿐만 아니다. 나는 그의 진취적 엉뚱함에서 뜻밖의 에너지를 얻는다. 누군가는 내게 외롭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는 다시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 행복한 외로움을 즐기고 있다. 나는 행복할 때 외롭기를 각오한다. 가끔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야, 강형구! 너 요새 잘나가더라?” 나는 답한다. “아냐! 요새도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가!”라고. ●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제주도 하도리 해변에 있는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 외관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제주도 하도리 해변에 있는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 외관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Art is Life, Life is Art”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탑동. 공항에서 차로 약 10분, 제주항 여객터미널에서 걸어서 2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이 있다. 이렇게 좋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는 자칫 도심 공동화 현상이 우려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라리오 뮤지엄이 개관하면서부터 다시 사람들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 개관으로 심폐소생술을 받은 듯 활력을 되찾았다.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쇠락했던 제주 구도심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주인공이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컬렉터로, 그리고 뮤지엄 설립자인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며 1인 4역의 삶을 살고 있는 김 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거의 반을 제주도 스튜디오에 머물며 작업하고 사업 구상도 한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김 회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Art is Life, Life is Art”

이준희 편집장

미술, 나아가 미술관에 대한 꿈을 언제부터 가졌나요?
저는 서울 남산 기슭 회현동에서 자랐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비가 갠 후 햇빛이 쫙~ 비치면서 엄청나게 큰 무지개가 뜬 하늘을 봤어요. 그 광경은 마치 천국 같았고, 우주 같았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제 인생에 대해 자문했지요. “도대체 나는 뭐지?”라고.
아무튼 처음으로 작품을 산 건 1978년입니다. 스물여덟 살 때죠. 당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남농과 청전의 작품을 샀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게,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키지도 않았고 얘기해준 것도 아닌데 뭐에 홀린 것처럼 제 발로 찾아가서 그림을 구입했어요. 그 다음부터 차츰 그림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하나에 절대적으로 몰입하다보니 감각이 진화했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거나 외국 유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배운 것도 없고 오직 필드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배운 거죠.
그래도 미술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LA현대미술관(MOCA)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모카MOCA는 제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컬렉션의 기준이랄까, 작품 구입을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해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삽니다.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작품 말이죠. 저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 컬렉션하지 않습니다. 대신 ‘생명과 영혼’이 깃든 작품이라는 판단이 서면 두 배 값을 주고라도 살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얘기가 많은데, 단색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색화 중에서도 어떤 단색화 작품이 좋은 건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컬렉터란 어떤 인물일까요?
무엇보다 아트 컬렉터는 인격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컬렉션 리스트에는 그 컬렉터의 인격이 반영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컬렉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컬렉터를 존경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사야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나중에 돈도 벌게 되는 거고요. 처음부터 짧은 기간에 컬렉션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남길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결국 10년, 20년 후에 가치가 증명되니까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요?
갤러리는 생존게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걸 라이브로 배웠어요. 갤러리를 하면서 실제경험을 통해 온몸으로 직접 피부에 와 닿게 공부했어요. 뉴욕에 갤러리를 냈다가 결국 손해를 봤지만,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무엇인가요?
2005년 라이프치히 화파를 국내에 처음 선보인 그룹 쇼입니다. 라이프치히 작가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고, 누구도 그들의 작품을 선뜻 사지 않을 때였죠. 하지만 당시 제가 보기에 그들의 작품엔 ‘생명과 영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이런 전시를 유치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직접 작업하는 컬렉터로도 유명합니다.
아티스트는 하느님과 닮아가려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창조하려고 하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작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생을 망쳤을 겁니다.(웃음) 젊어서 제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어요. 진짜 헐크 같았다니까요.(웃음)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평양에서 월남하신 부모님께 물려받은 제 DNA는 굉장히 착하고 말이 없고 소심하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휘문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물어보세요.(웃음) 그런데 원하던 대학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특히 군 복무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육군본부 의장대에서 근무할 때 무진장 맞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천안에서, 그것도 험한 터미널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저도 모르는 집념과 집중력이 생겼어요. 그래선지 그때는 사람 많은데 갑자기 테이블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면 안정감이 생기고 차분해졌거든요. 일종의 정신병이었죠(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작업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작업하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요.(웃음)
원래 컬렉터보다 아티스트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군요?
한때는 식당을 25개나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 모든 식당 인테리어에 제가 다 관여했어요. 천안터미널에서 처음 매점 사업을 시작할 때도 당시로는 잘 사용하지 않던 알루미늄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리고 처갓집이 있는 LA에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섰는데 인테리어가 아주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식당에서 자유롭게 사진 찍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아날로그 필름카메라에 플래시 펑펑 터뜨려야 했으니까요. 허락 없이 사진 찍었다가는 경찰한테 잡혀가는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식당 분위기를 직접 드로잉 했지요. 요즘도 식당 뿐 아니라 옷집이나 카페처럼 맘에 드는 공간과 장소에서 닥치는 대로 드로잉을 한답니다. 그리고 여행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도를 익히게 된 것 같아요. 이런 훈련이 지금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요.
항상 열정과 에너지가 넘칩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는 방전시키지 않고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간혹 친구가 집을 설계해 달래요. 하지만 저는 안 해줘요. 하기 싫어요. 왜냐면, 그걸 하면 내 에너지가 방전되니까요.(웃음)
저는 사업 초기부터 운전기사와 비서를 꼭 두었습니다. 1978년에 운전면허를 땄지만 직접 운전하지는 않아요. 그 시간에 집중해서 생각을 하거나 피곤하면 자면서 에너지를 충전하지요. 그러니 기사 월급 주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요. 비서도 마찬가지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비서가 처리해주고, 저는 창의적인 일만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도 안 써요. 비서가 팩스로 전달해줍니다.
아라리오라는 이름은 직접 지으셨나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소심한 성격이라 남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눈에 띄지도 않았죠. 대학 두 번 떨어지곤 괜히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죠.(웃음)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갔는데 정말 악몽이었어요. 지금은 말도 안 되겠지만, 엄청 얻어맞고, 기합 받고…. 졸병 때 헬기장에서 보초 서면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했어요. 완전히 킬링 타임용. 그렇게 몰입하다보니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떠올랐어요. 그때 결정했죠, 내가 앞으로 사업을 하면 회사이름을 ‘아라리오’로 정하겠노라 말이죠.(웃음) 알파벳 A로 시작하는 영어 표기로도 좋고, 한자도 없는 순수 한글이라 좋아요. 다른 회사이름도 제가 작명했어요. 우스갯 소리로 “홍도야 우지마라”를 세 글자로 줄이면 “홍도뚝”이라고 하는 것처럼, ‘야우리’라는 회사이름은 명상하던 중 떠오른 “야! 우리들만의 세상”에서 앞 세 글자를 따서 졌어요. 제주도 아라리오 뮤지엄 이름도 누구는 구겐하임 뮤지엄이나 바이엘러 뮤지엄처럼 ‘씨킴 뮤지엄’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주었지만, 원래 건물의 역사와 특성을 살리고자 ‘탑동 시네마, 바이크샵, 동문모텔’로 정했답니다.
막상 뮤지엄을 개관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첫 컬렉션을 시작한 게 1978년이고, 1989년에 백화점 내에 처음으로 갤러리를 오픈해서 1999년에 문을 닫고, 2002년에 갤러리 건물을 새로 지어서 조각광장을 만들었죠. 이렇게 20년 넘게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릴레이션 십도 형성됐고, 특히 외국 미술관을 둘러보면 그날 저녁 몇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눈을 감고 낮에 본 미술작품을 머릿속으로 리와인드 합니다. 그렇다고 목적이 있는 학습은 아니고, 호텔방에서 저녁에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풀이로 하는 거죠.(웃음)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저도 모르는 ‘촉觸’이 생겼어요.
그러고 보면 예전엔 단순하게 갤러리와 작가가 미술계를 이끌었어요. 두 바퀴 자전거 처럼요. 그런데 이제는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처럼 더욱 복잡해졌어요. 갤러리와 작가뿐 아니라 컬렉터와 뮤지엄이 공존공생하며 유기적으로 얽히고 관계 맺는 시대가 됐어요. 예전엔 미술관이 직접 작가를 상대했는데, 이제는 만약 죽은 작가를 전시하려면 그 작가와 관계를 맺었던 갤러리나 컬렉터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좋은 컬렉터가 현대미술을 이끄는 시대인 거죠.
기존 건물의 구조와 특성을 최대한 살린 점이 눈에 띕니다.
제가 미술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페인팅이 주도했다고 봅니다. 그 페인팅에 맞는 공간은 ‘화이트 큐브White Cue’였고요. 하지만 동시대미술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페인팅뿐 아니라 비디오나 설치처럼 다양하죠. 즉 이런 경향을 소화하기에 화이트 큐브는 적합하지 않아요. 깔끔하면 재미없거든요, 새로 지어도 맛이 안 나고요. 건축이란 원래 100~200년 지나야 제 맛이 우러나요. 오래된 절에 있는 석탑처럼. 요즘에 지은 매끈한 화강암 건물은 맛이 안 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자재를 시멘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치 곰팡이처럼 과거의 시간과 흔적이 배어있는 거기에 동시대 작품이 조화롭게 어울리면 새로운 맛을 풍깁니다. 화음이 잘 맞는 거죠. 그래선지 건축과 학생들도 견학을 많이 옵니다.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처럼 이곳 제주도 뮤지엄도 전시장뿐만 아니라 레스토랑과 수제 맥주 펍, 아트숍 등이 어우러진 ‘아트 타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이 동네를 ‘아라리오 로드’라고 부릅니다. 뮤지엄 하루 관람객을 1000명으로 목표하고 있는데,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관광 온 관람객 비중이 60%가 넘습니다. 4월에 동문모텔Ⅱ와 편집매장이 오픈하면 제주 뮤지엄 프로젝트가 1차적으로 완성된다고 봅니다. 저는 패션이 미술관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음식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옷 가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꼭 구입하지 않더라도 구경을 할 수 있어요. 미술관도 마치 옷가게처럼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의미에서 “Art is Life, Life is Art”가 실현되는 거니까요.
최근 구입한 작품은 어떤 건가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일본작가 다츠오 미야지마의 작품입니다. 저는 뮤지엄 디렉터는 지휘자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가 각기 다른 악기 소리를 듣고 전체 음악의 색깔을 구상하듯 저는 항상 머릿속에 미술관에 전시될 작품의 레퍼토리와 화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론 개별 작품도 중요하지만 전시의 화음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비디오작품이 이쯤에 있고, 이쯤에 회화가 걸리고, 이쯤에 설치작품이 놓여지고…. 예를 들어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앤디 워홀 판화시리즈는 제가 250만 불을 주고 산 작품인데, 원래는 제가 10만 달러에 구입했다가 25만 달러를 받고 되팔았던 그걸 10배 값에 다시 구입했어요. 뮤지엄의 화음을 위해서요. 마찬가지로 서울 인 스페이스 5층 구석방에 있던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故 류인 작가의 조각으로 바꾸었습니다. 다츠오 미야지마 작품 역시 뮤지엄 인 스페스 전시공간의 화음을 고려해 구입한 거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관이나 롤모델이 있다면?
앞서 말한 대로 모카를 처음 보고 무의식적으로 미술관을 꿈꾸었는데, 디아 비컨Dia:Beacon을 보고 그 꿈을 실제로 이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다 둘러보고 나와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죠. 아내와 아들이 부축해서 간신히 야외 벤치에 한참을 앉아 복기했어요. 그 미술관에서 제 상상력의 실체와 미래 비전을 보게 됐답니다. 미술을 핑계로 한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미술관의 권력을 다 내려놓았더군요. 디아비컨을 둘러본 경험과 그 잔상이 지금 이 미술관을 가능하게 했어요.
앞으로 꿈꾸는 미술관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지금 뮤지엄은 예행연습일지도 몰라요. 제가 생각하는 뮤지엄의 최종은 하나의 박스형태입니다. 덩어리 같은 박스를 툭툭 던져 놓은 듯한 공간에 오직 한 작품만 있는…. 작품은 팔수도 없고, 박스-공간에 작품이 없다면 그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는 그런 미술관 말입니다. 제 스튜디오가 있는 하도리에 땅 15만 평(49만5000여㎡)을 구입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가능성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씨킴의 작품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씨킴의 작품

그동안 발간된 작가 씨킴의 도록

그동안 발간된 작가 씨킴의 도록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이른바 ‘세계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2015년 새해를 맞아 《월간미술》은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가 미술현장이 ‘변화했다’고 하는 이유는 근래 미술계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서 변화의 물결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생각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작업실에 처박혀 작업만 하는 이로 정의되지 않고, 비평은 미학적 언어를 쏟아내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문화, 사회, 사상 등 주변 환경은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탔으며 따라서 미술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고정돼 있지 않다.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며 우리가 주목한 것은 국가가 아닌 도시다. 즉, 각국을 대표하는 미술계 거점 도시를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작품을 전시하고 비평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시장market이 형성됐다.
아시아에서는 서울을 비롯 가장 뜨거운 미술시장으로 정의되는 중국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홍콩을, 지긋하지만 최근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는 일본 도쿄 미술계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다. 또한 전통적으로 미술계 중심지를 자임하는 유럽에서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동향에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세계 미술의 수도 미국 뉴욕을 살펴본다.
‘변화’와 ‘발전’이 항상 등가적 의미를 갖진 않는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방향을 살피되 결론을 예단하지 않는다. 지금 미술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말이다.

침범侵犯당한 인사동 미술에서 글로벌화된 탈脫장소적 미술까지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

오늘날의 글로벌 현대미술은 전시를 통해 양육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갤러리스트 조르주 필립 발루아Georges Philippe Vallois에 의하면, 이 시대는 경매의 젖꼭지를 빨며 자란 작가들의 시대다. 글로벌 단일시장화된 미술은 장소에 귀속되지도,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다만 시공을 넘나드는 자본에 의해 발육이 결정된다. 도쿄에서 태어난 독일 작가 조나단 메세 Jonathan Messe의 그림은 그의 나이 32세에 24만 유로(한화 약 3억2000만 원)에 팔린다. 자본의 속도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동유의 회화 1가 3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2007년 같은 경매에서 홍경택의 회화는 7억7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한국작가의 해외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2
이 경매 건들은 한국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글로벌 무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예술적 성장’의 결정적인 신호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성과없는 ‘인사동 미술’의 밖으로 빼내야만 하는 근거로 채택되었다. 2014년 10월 29일 동일한 경매사가 김동유와 홍경택을 포함하는 ‘엄선된’ 한국 작가 5인전을 제임스크리스티룸에서 열면서 “표현과 혁신의 관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겠노라 선언했다.3
2008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임동식의 회화 두 점이 각각 4920만 원과 5720만 원에 낙찰된 사건은 고스란히 “작품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와우! 하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나 브뤼겔Pieter Brueghel의 작품들조차 경매회사가 키운 젊은 현대작가의 작품에 훨씬 못 미치는 값으로 팔리는 게 오늘날의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발루아에 의하면, 정말 놀라운 것은 “경매장에서 도출되는 결론의 힘”이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비평가나 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사가의 견해를 압도한다.” 경매에서 정해진 고가 낙찰이 예술성의 부동의 판명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경매의 낙찰가격 순위와 이론가들이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는 작가들의 순위 목록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매장에 오르지 않은 작품이 비평가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갈수록 드문 사건이 되고 있다. 큐레이터들이라고 경매장 바깥 작품이나 작가들로 자신의 전시를 꾸미고 싶어 하랴. 비평담론도 전시공학도 고가 거래가 성사되는 곳에서 꽃핀다. 발루아는 말을 잇는다.

“비엔날레에서 보았던 작가들을 다음 달에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크리스티의 망치를 바쁘게 만들었던 작가들을 이듬해 비엔날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스템이다. 상인으로서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그 속도다.” 4

글로벌 단일체계화된 미술의 작가들은 경매의 망치소리와 함께 급속하게 성장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긴 전시 목록으로 구성되곤 했던 과거의 커리어는 불필요하다. 질 프슈Gilles Fuchs에 의하면, 1960, 1970년만 해도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은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이 돈벌이의 기제로 전락하는 경매장에서 형성된다. 전시와 장소성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리적 경계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뉴욕 미술이라고? 순수하게 ‘미학적 정체성’으로서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런던미술이나 베를린미술, 파리미술의 시대는 지나갔다. 다만, 프랑수아 피노나 베르나르 아르노의 미술이 작동할 뿐이고, 가고시안의 라벨이 붙었거나 찰스 사치의 색인을 지닌 미술이 지구촌의 도처에서 출몰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지 덜 속기 위해서라도 순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작가를 바젤이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다. 바젤에서 급조된 예술을 베니스가 바코팅, 곧 각각의 것에 코드를 붙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침범당한 시스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 또한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신화화된 고도성장으로 은폐된 글로벌 경제체계의 거품이 조만간 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 시스템을 비춰볼 수 있는 다른 거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연대를 1980, 90년대쯤으로 조정하기만 하면, 이는 ‘전적으로’ 글로벌화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겨온 한국미술의 상황이다. 인사동이 미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1970년대에 그 형체를 드러내면서 한때 인사동은 욕망이 들끓던 장소였다.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하는 흐름이 그곳을 관통해 흘렀다. 하지만 오늘날 그곳은 경유지로서의 의미조차 희미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세계 5대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를 개최하고, 틈만 나면 아시아미술 선도론을 입에 올릴 만큼 외형적으로 커졌다. 한국미술은 중심을 잃은 적 없이 이 성공으로 간주되는 노선을 내달릴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만들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화되고 경직된 인사동 미술의 미래적 대체를 선언한 이 미술은 중심이 부재하기 때문에, 집중에 대한 부담도, 상실에 대한 성찰도 원천적으로 봉쇄된, 기형적으로 경쾌하고 더욱 욕망하는 미술이다. 하지만, 안으로부터 전해오는 공복통空腹痛은 사라지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크리스티 경매가 곧 예술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간주되는 지경이고 보니, 그 실체적 토대의 빈곤에 대한 인식을 외면하고 언제까지 도망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해석 및 담론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실상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장소와 함께 장소 이상의 것을 누락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것처럼.

‘인사동 미술’의 실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이 경영하는 골동품상들이 입지하면서 고미술거리가 형성된 것이 오늘날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의 시초였다. 몰락한 세도가들의 집과 골동품, 고서화와 도자기 등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미술품 상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채 반 세기가 안 된 2000년 현재 고미술 관련 화랑, 표구점, 필방업소 등의 절반 이상이 인사동을 떠났거나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한류스타의 조악한 사진이나 중국산 짝퉁 민속공예품이나 잡화들로 채워졌다. 2012년 40%가 넘는 상점들이 설치한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품목의 평균가격은 2.000원 내외로 양말 티셔츠, 스카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유무형의 역사적 자산을 정비해 한류의 밑바탕이 되었던 우리 문화의 이야기들을 찾아내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문화특구이자 한류의 재생산기지로 만들자” 등의 담화가 난무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장소의 복원과 관련된 그러한 구호들에는 복원해야 할 실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왜곡돼 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식은 정작 1980년대 들어서면서 관광특화구역에 대한 국가 차원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국가적 이벤트 성황에 부응하려는 정치적 기획은 1983년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이나 1986년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문화예술부분 계획’ 등을 통해 실행되었다. 제5공화국은 전통문화 및 민족문화 관련 사항을 헌법에 명시하고, 7년(1980~1988)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문화에 관한 중장기 계획을 4번 발표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5 하지만 그것은 헌법에 문화, 특히 전통문화의 창달에 대한 조항을 편입시키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극히 이례적이라는 점 등에서 드러나듯, 문화를 통치술의 일환으로 편입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6 전통문화를 이용한 은폐의 정치, 곧 문화와 예술을 국민을 회유하거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도록 함으로써 7 정치적 과오를 덮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예컨대 ‘국풍 81’같은 국가주도 이벤트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8
전통의 거리만큼이나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서 인사동의 실체도 미심쩍다. 인사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뒤늦게 문화예술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상업화랑 입점이 그 직접적인 계기였다.(현대화랑) 상징적 읽기가 가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74년 문헌화랑, 1976년의 경미화랑과 동산방화랑이 개관했으며 1977년에는 선화랑, 1983년에 가나화랑이 개점하면서 화랑가로서의 면모를 다져나갔다.9 이후로 화랑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현재 인사동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업종이지만, 10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참담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3년 현재 인사동에 자리한 12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의 65% 이상은 여전히 ‘대관貸館화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가운데서도 18%는 대관과 작품 판매를 병행하고, 소위 ‘상업화랑’으로 운영되는 17%의 상당수조차 작품 판매에 비중을 두는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인사동 미술의 한 실체다.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임대 화랑들에 작가나 작품성에 근거한 선별, 미학적 신념이나 노선에 대한 존중, 전시의 실질적인 수준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더 열악하던 시절, 임대 화랑들이 젊은 작가들에게 해방구가 돼주기도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소수를 그렇지 못했던 다수로부터 선별하는, 억압적인 자본의 검증을 실행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설상가상 2002년 정부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대관 임대료가 급격하게 상승했는데, 이는 인사동이 자본의 굴락화化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작가에게 대관료의 벽은 창작을 접거나 현대미술 장을 떠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인사동 미술의 성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높은 대관료에서 전시 카탈로그 제작비와 오프닝 세리머니 비용까지 지불할 여력이 있는 젊은 작가들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대 화랑을 기반으로 하는 인사동 미술의 이러한 하부구조는 오히려 한국미술 잠재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구조적 기반 위에서 인사동은 향후 “고급문화로서 특권화되어 갈”  또 하나의 인사동 미술,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명명되곤 하는 제도화된 미술을 위한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사동 미술의 양분화된 작동 패러다임이었다.
고급주택화gentrification된 현재의 인사동에서 양극화된 두 예술의 우생학적 생존 여건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아마추어 미술과 고도의 지대상승률을 앞지를 만큼의 수익률을 담보하는 ‘글로벌 블루칩 미술global bluechip art’ 또는 ‘아트스타의 아트art of art star의 양극 사이에 정작 인간을 위한 내적 토대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동이 조선조 도화서가 있었던 자리라 하여 미술과 결부시키는 것은 낭만적 소설에 가깝다. 전통거리로서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말기의 산물이며, 인사동 미술은 고작 1970년대의 소산물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토대, 어떤 본질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예술의 장소로서 인사동의 실체는 미미하다. 인사동 미술은 역사 만들기와 회유와 은폐의 정치술과 초상업주의의, 침범당한 근현대사의 거울이자 우리 미술의 내적 빈곤과 마주하는 장소다. 인사동의 향수를 논하고 복원을 주장하는 담론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 넘어 나가야 할 곳으로서의 거울이다. ●

비엔나 (12)

빈 크리스틴 쾨니히갤러리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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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찰된 작품은 <마릴린먼로 vs 마오주석>이었다.
홍경택의 작품은 2013년 홍콩 크리스티 이브닝 세일에 재등장, 663만 홍콩달러(약 9억6000만 원·이하 수수료 포함 가격)에 낙찰되며 다시 한 번 기록을 경신했다.
3  ‘홍경택·김동유 등 5인展…28일 크리스티홍콩 개막’, 이향휘 기자, 기사입력 2014.10.9
  Marie Maertens, L’Art du Marche de l’Art, ed. QUE, 2008, Espagne, p.104.
네 번의 중장기 문화정책은 다음과 같다. 1981년 : ‘새 문화 정책’ 1983년 :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
1984년 : ‘지방문화중흥 5개년 계획’ 1986년 :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게획’
구광모,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목표와 특성-80년대와 90년대를 중심으로>,  《중앙행정논집》, 제12권, 중앙대학교 국가정책연구소 중앙행정학 연구회, 1988
7   동아일보 1985년 2월 19일자. 참조
  장승백이 지신밟기, 풍년기원제, 민속제, 전통에술제, 국풍장사씨름판, 팔도굿, 남사동놀이 등의 행사가 ‘국풍81’의 중심에 있었다.
9  김종근, <현대미술의 메카, 인사동>, 《인사동 가고 싶은 날》, 디자인하우스, 2002, p.140.
10 전체점포수 대비 화랑의 비중은 1998년 이전 21.6%에서 2002년에는 34.3%로 증가했다.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北京

베이징 (2)

위 798예술구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UCCA 전경, 아래 798예술구 골목 전경. 독일식 건물의 공장지대였던 이곳의 과거를 보여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798예술구
권은영  예술학

중국 팔대 고도八大古都 중 하나인 베이징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외국인보다 절대 다수의 중국 내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자금성과 톈안먼 광장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총생산량(GDP)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14억 인구 다수를 구성하는 소시민에게 950만km2의 대륙을 횡단하여 ‘중국 꿈中國夢’의 도시, 베이징을 찾는 것은 여전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다. 중국인들이 과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감흥에 심취하는 반면, 외국인에게는 오늘의 중국 역시 매력적인 호기심의 대상일 것이다. 그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베이징 동북쪽에 위치한 798예술구로 향한다. 1960년대 ‘신중국 전자 공업의 요람’이라 불리던 국영 공업단지가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이자 관광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의 명소로 변신하는 것은 이미 예술계의 클리셰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 가치는 유효하며 지금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등 공신이다. 베이징 곳곳에 예술가들이 틔운 문화의 싹을 추적해보자.
30여 년의 중국 동시대미술 역사에서 베이징의 예술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 작업실 중심의 작가촌 개념의 예술구이며, 다른 하나는 전시공간 중심의 화랑가 개념의 예술구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 모두 작업실과 전시공간이 혼재해 발전하는 것이 다반사이며, 초지일관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지역은 드물다.
초기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에 촉매제가 된 것은 ‘85 미술운동’으로 대표되는 전위예술운동이었다. 당시 이들이 폭발적인 양의 작업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지역에서 동고동락했기에 가능했다. 작가들의 생활 터전이자 작업실이 모여 있는 작가촌은 순간의 미학, 행위예술과 소규모 전시로 가득했기에 그곳이 곧 가장 뜨거운 미술현장이 되었다. 1990년을 전후해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에 각각 두 개의 작가촌이 형성된다. 하나는 다산쯔大山子 인근에 장환張洹, 마리우밍馬六明, 창씬蒼鑫 등 행위예술가를 주축으로 형성된 동촌, 다른 하나는 18세기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 일대 푸루먼福綠門촌과 과이자둔挂甲屯을 중심으로 딩팡丁方,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 등 아방가르드 회화 작가들이 운집한 서촌이었다. 이들이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지역에 모이게 된 것은 물론 당시 두 지역 모두 폐허나 다름 없었으며,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중국 건설 이후, 중국 정부는 엄격한 호적제도를 시행해, 출생지를 벗어나는 것이 출국 절차와 비견될 만큼 까다로웠다. 하지만 개혁ㆍ개방 이후 1986년 국무원이 발표한 <국영기업 실행 노동계약제 임시 시행 규정>과 1992년 노동부가 발표한 <전원 노동 계약제 확대 시행에 관한 통지> 등을 통한 노동자를 중심 인구의 이동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면서 작가들도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흡수될 수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지역이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으로 발전하는 동안, 농민공을 비롯한 소외 계층도 모여들어 작가들은 작가촌과 슬럼의 경계에 서게 된다. 일찍이 들어왔던 팡리쥔 등 몇몇 작가가 안정된 작업 환경을 찾아, 1994년 베이징 퉁셴通县의 쑹좡宋庄으로 이주해 ‘쑹좡예술가촌’을 건설한다. 실제로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뿐만 아니라, 당시 베이징 외곽 지역에 맹목적으로 상경한 농민공들로 구성된 저장浙江촌, 신장新疆촌 등이 형성되고 있었다. 정부는 1995년 가을, 베이징 일대 무허가 판자촌 정리에 들어가고, 결국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도 해체된다.
1990년대 중반 방황하는 작가들을 흡수한 곳이 쑹좡과 718연합창 일대다. 오늘날 798예술구가 기타 예술구에 비해 성공적으로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미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718연합창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하여 작가들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중국 팔대 미술학원 중 하나인 중앙미술학원이 베이징 중심 왕푸징王府井에서 망경望京과 다산쯔 사이 화가디花家地로 이전을 시작하면서, 다산쯔 전자공장 부지에 1995~1998년까지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작업실이 꾸려지고, 당시 조소과 교수와 학생들이 모두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이전이 완료된 2000년,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교수 쑤젠궈隋建國를 시작으로 718연합창 공장지대로 속속 작가 작업실이 유입된다. 1990년대 말, 왕징 지역 아파트로 장샤오강張曉剛, 추즈제邱志杰, 쑹융훙宋永紅, 예융칭葉永青, 마리우밍, 잔왕展望 등이 작업실을 옮겼다.  이로서 왕징, 중앙미술학원, 718연합창에 이르는 베이징 동북부에 풍부한 인프라가 구축된다. 저렴한 임대료 외에도, 1950년대 동독의 설계로 지어진 바우하우스풍 공장들이 즐비한 718연합창은 작가들에게 넓은 작업공간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랑에도 매력적인 전시공간이었다. 2002년 도쿄화랑의 프로젝트 공간인 BTAPBeijing Tokyo Art Projects 개막전은 718연합창이 798 예술구로 승화하는 전환점이 됐다. 2000년대 초반, 798예술구는 작가촌과 화랑가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 중심지로 재탄생한 798사례는 중국 정부가 주관하는 국제문화창조기업박람회에서 2006, 2007년 2회 연속   ‘중국 최고 창의적 공원中國最佳創意园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798예술구의 성장은 임대료의 상승을 불러왔고, 작가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부터 798예술구 외곽에 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전략적인 예술구도 만들어졌다.   1999년 도예 디자이너 출신의 웨이강韋崗이 페이자费家촌 지역의 장아찌 공장을 개조한 ‘샹그리라香格里拉예술공사’ 작업실이 문을 열면서, 페이자촌에 자연적으로 작가 중심의 예술구가 형성된다. 반면 차오창디草場地 예술구는 2002년 ‘베이징 차오창디 문화예술센터’가 투자해서 건설한 계획 예술구이다. 이렇게 베이징에는 자연 발생적인 혹은 계획적인 예술구가 십수 개에 달한다. 경제 발전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베이징 미술계의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두 전문가에게 들어봤다. 왕춘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과 마쉐둥馬學東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AMRC) 디렉터를 통해 중국 학술계와 시장의 시각을 비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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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베이징 (11)왕춘천王春晨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중국관 큐레이터)

중국 동시대미술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베이징 미술현장의 중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간단히 설명해달라.
1980년대 중국에는 현대적인 개념의 예술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진정한 의미의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작가’들도 대부분 교편을 잡고 있었고, 보편적으로 자신의 집 혹은 직장에서 작업을 겸했을 뿐, 작업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첫 예술구라면 둥춘東村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둥춘을 시작으로 위안녕위안圆明园, 쑹좡宋庄에 작가들이 모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베이징 변두리 여기저기에 예술구들이 생겨난다. 베이징에 본격적으로 예술구들이 등장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798예술구를 비롯하여, 지우창酒廠, 추이거좡崔各庄, 페이자춘费家村, 이하오디一號地국제예술구 등이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다. 이어서 헤이차오黑橋, 차오창디草場地, 다산쯔환태大山子環鐵국제예술성 지역에 예술구가 형성되었고, 비교적 최근에 스산링十三陵, 창핑昌平, 샤오탕싼小唐三 등지에 작가들이 모이고 있다. 작가들이 공간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작가들이 모이는 곳에 자연스럽게 예술구가 형성되는 분위기이다. 대부분의 예술구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반해, 정부가 주도하여 정책적으로 개발한 예술구도 있다. 베이징 남쪽에 위치한 관인당觀音堂 예술구가 대표적인데, 관인당 예술구는 실패했다고 본다.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구도 모두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2010년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던 정양正陽 예술구는 정부 개발 정책에 의해 사라진 곳 중 하나다. 당시 몇몇 예술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부의 도시관리정책하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3년 가을, 몇몇 화랑이 798예술구를 떠나면서 매체에서 798예술구 상업화를 우려했다. 798예술구가 여전히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라고 할 수 있나?
798예술구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해졌고, 사람들로 붐볐지만 이곳을 꽉 채운 사람들이 모두 미술작품에 관심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화랑 입장에서 798이 번화해진다 해서 꼭 작품 판매량 증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798 땅값은 오르고,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화랑은 안정적 운영 안정을 위해 798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798의 주요 화랑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몇몇 화랑의 이동이 798 전체 위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건강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구는 798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로 몇몇 기관이 이동했지만, 여전히 주요 예술 관련 기구와 대표 예술가들은 비록 경쟁이 치열하지만 여전히 베이징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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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SONY DSC마쉐둥馬學東
AMRC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 디렉터

지난 30년 중국 동시대미술의 변화에서 예술구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베이징 최초의 예술구 개념은 예술가 집성촌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예술구는 예술산업구 개념으로 화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 작업실과 기타 기관들도 공존한다. 하지만 문화 및 디자인 방면에 편중되어 있다. 전통 서화시장을 제외한다면, 대표적인 곳이 798예술구이다. 2013년 통계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523개의 화랑이 있다. 그중 중국화 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유리창에 255개 전통 화랑이 집중되어 있으며, 798예술구에 157개의 화랑이 모여 있다. 그리고 차오창디 예술구에 28개, 지우창예술구에 7개, 싼리둔三里屯 지역에 9개, 융허궁雍和宫 주변에 4개, 쑹좡에 37개, 22위안제22院街 예술구에 11개, 관인당에 15개 화랑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구 개념의 변화는 실제 예술환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 예술산업 발전의 변화를 이른다. 예술시장이 발전한 지금의 예술구는 화랑가의 의미가 강하다. 작가 작업실도 공존하지만, 화랑이 중심이 되고 음식점, 카페, 예술 상품점, 디자인 전문점 등 창의적인 문화산업 기구들이 함께하면서 ‘산업’ 성격이 가미되었다.

현재 대륙 미술계 발전에 베이징 예술구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 12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회 중국 예술품시장 최고 논단’에서 베이징시 문화국 관위關宇 부국장은 베이징이 대륙에서 예술가, 화랑, 경매회사, 미술관, 박물관 등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베이징의 예술구는 대륙 미술현장의 중심으로서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대륙 미술계를 선도하고 있다. AMRC 통계에 따르면, 현재 베이징시에는 총 520여 개의 화랑이 운영되고 있으며, 115개의 경매기관이 2013년 한 해 26만6957점을 거래했다. 동시에 21개의 예술품산업박람회(아트페어) 덕분에 베이징은 매달 풍성한 예술행사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베이징시 한 해 경매 낙찰총액은 약 280억 위안(한화 4조9862억 원)으로, 전국 낙찰총액의 64%를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박람회, 화랑, 인터넷 거래량 등을 합산하면, 베이징시는 작년 한 해 미술품 거래액이 약 450억 위안(한화 8조136억 원)으로 산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798예술구가 있다. 798예술구는 베이징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화랑, 작가 작업실, 비영리 기구 등을 갖춘 예술 환경이 매우 풍부한 단지이다. 대형 유명 화랑도 많을 뿐만 아니라, 유동 인구를 흡수하며, 동시대예술을 전파하는 기지로 그 영향력도 상당하다. 798예술구는 이미 베이징의 문화를 상징하는 명함과도 같은 존재이다. 베이징시 분포 화랑 중 30%에 해당하는 157개의 화랑이 798예술구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베이징=권은영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香港

2014년 5월 열린 에 전시된 마이클 린의 작품

2014년 5월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 전시된 마이클 린의 작품

잘 키운 아트페어 하나가 가져온 홍콩 미술시장의 변화
황희경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홍콩 아트페어가 막 성장하던 때만 해도 사람들은 홍콩을  일러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홍콩은  런던과 뉴욕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의 3대 허브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그 중심에는 지금은 <아트바젤 홍콩>으로 이름을 바꾼 <아트 HK>가 있다.
미술 분야를 취재하면서, 그리고 홍콩에서 3년간 지내며 지켜본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는 놀라웠다. 2008년 <아트 HK>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급성장했고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켜본 바젤 아트페어에 인수되면서 거래 금액에서나 참여 갤러리 면면, 관람객 수 등에서 세계 수준의 아트페어로 위상을 확고히 했다. <바젤 아트페어>가 1970년 설립돼 4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행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채 10세도 안 된 <아트바젤 홍콩>의 성장은 대단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트바젤 홍콩>의 성장은 연쇄적으로 홍콩 미술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아트바젤 홍콩>을 전후한 기간은 ‘아트 위크art week’로 불리다가 이제는 ‘아트 먼스art month’로 불릴 정도로 각양각색의 미술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홍콩에서는 <아트바젤 홍콩> 개최 기간에 맞춰 열리는 위성 아트페어가 속속 생겨났다.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열린 2013년 5월에만 아시아 컨템포러리 아트 쇼와 홍콩 컨템포러리, 스푼 아트페어 등 4개의 아트페어가 열렸다. <아트바젤 홍콩>의 높은 진입 장벽과 비싼 부스 임대료에 부담을 느낀 갤러리들은 나름대로 특색을 갖춘 위성 아트페어에 참가해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자리를 잡은 아트페어들은 이제 <아트바젤 홍콩>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일정으로 개최되기도 한다.
<아트바젤 홍콩> 기간엔 경매도 풍성하게 열린다. 크리스티 홍콩 봄 경매는 <아트바젤 홍콩>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가 됐고 서울옥션을 비롯해 여러 경매사도 <아트바젤> 기간을 전후해 경매를 연다. 중국 고미술품을 많이 내놓는 중국 경매사들의 프리뷰 장에서는 마치 시장처럼 출품작들이 빼곡하게 전시된 가운데 중국 컬렉터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광경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아트바젤 홍콩>은 이처럼 홍콩의 미술시장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홍콩에서 벌어지는 대형 미술판은 ‘그들만의 잔치’일 뿐 정작 홍콩 작가들과 홍콩 대중은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눈에 띈다. 홍콩 정부는 미술시장이 아닌 미술 전반을 키우려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홍콩 주룽九龍 반도 서부 지역에서 진행되는 ‘웨스트 까우룽 문화지구West Kowloon Culutre District’에 들어설   ‘M+ 시각문화미술관’(이하 ‘M+미술관’)이다. 사실 웨스트  주룽 문화지구는 사업이 계속 지연되고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홍콩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는 사업이다. 그러나 M+미술관이 2017년 완공돼 본격적인 전시를 시작하면 사실상 제대로 된 미술관이 거의 없는 홍콩의 미술지형에 변화가 예상된다.
영국 테이트모던의 초대 관장을 지낸 라르스 니트브를 총디렉터로 영입하고 한국 출신의 큐레이터 정도련 씨를 수석큐레이터로 영입한 M+미술관은 꽤 공격적으로 컬렉션에 나서고 있다.
2012년에는 중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컬렉터로 평가되는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로부터 중국 미술품 1640여 점 기부를 이끌어냈다. 그가 기부한 미술품들은 약 13억 홍콩달러 (약 1억6800만 달러)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평소 소장품을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말했던 지그는 중국 당국의 미술품 검열을 우려해 중국 영토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있는 홍콩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M+미술관은 또 중화권 ‘큰손’ 기부자들 덕분에 <아트바젤 홍콩>에서도 작품들을 사들이는 한편 홍콩 작가를 비롯한 중화권 작가 미술품은 물론 다른 아시아 지역 미술품 소장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콩 화랑협회는 2013년부터 ‘갤러리 위크Gallery Week’ 행사를 시작해 아직 갤러리 방문이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홍콩에서 홍콩인들이 갤러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올해 11월 26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흘간 열린 두 번째 갤러리 위크에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가 참여해 작가와의 대화, 오픈 스튜디오, 워크숍 등 100여 개 행사를 소화했다.
과거 갤러리들이 홍콩섬의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 주변 지역에 집중됐던 것에서 벗어나 홍콩의 외곽 지역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갤러리들의 이동에는 홍콩의 살인적인 도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측면이 크긴 하지만 홍콩 작가들을 위주로 개성 있는 프로젝트를 펼치면서 홍콩의 미술판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홍콩섬 동부의 차이완柴灣은 최근 홍콩의 개성 있는 미술가, 디자이너, 음악가들이 모이는 새로운 예술지구로 각광받고 있다. 옛 공장 창고를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과 작업 스튜디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일부 평론가들은 이곳이 제2의 ‘뉴욕의 첼시’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