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 <응시> 전시광경
조각가 최병민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다. 해부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인체조각은 정적(靜的)인 동시에 동적(動的)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지난 4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전통조각어법으로 몰두해 온 그의 작품은 그만의 독특한 조각적 형식과 함축적인 상징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넓고 광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인체에 축약해내는 침묵의 음유(吟遊)와 은유(隱喩)의 발성법과 표현법이다. 작가 최병민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최병민의 천문?인문?지문 그리고 한국 구상조각의 현실에 대한 한 소회
성완경 인하대 명예교수
어떻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게 됐는지 어안이 좀 벙벙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한 일인데 좀 늦게 일어난 것뿐이다. 좀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면서 2년 전 그의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그와 나눈 대화 중 ‘포기 각서’란 말에 잠시 생각이 머물렀다.(이 얘기 나중에 더 하기로 하겠다). 읽는 분들을 위해 소식부터 적는 게 순서일 것이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기관인 한국천문연구원이 2018년 금년에 개원 40주년을 맞아 천문과 인문, 우주와 인간의 행복한 융합을 기원하는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그 틀 속에서 소백산 연화봉 소백산천문대에 최병민의 작품 <구름을 훔친 사람>(1991)을 구입 설치하기로 했다는 기사다. 좋은 소식은 그 밖에도 더 있다. 파주의 임진각 근처 평화공원이 최병민의 작품 <평화 2>(1996)와 <해바라기>(1995)를 매입했다는 소식이다. 이 공원은 방문객들이 자연 속에서 에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테마파크형 산택로를 이미 조성해놓았으며 인간과 우주, 자연과 전통, 평화와 문화에 대한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여러 점을 앞으로 추가 매입하거나 제작 발주할 계획이라고 한다.
최병민은 진지한 인식론적 자각과 뚜렷한 개성과 장인적 공력의 인체조각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사색과 명상을 표현해온 작가다. “수천 년에 걸친 신화·토템·설화 등을 알고 상상하고 내가 추구하는 인간형의 문화를 형상화하는 게 바로 내 작업의 궤적”이라고 최병민은 말한 적 있다. 바로 그렇게 그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가 경력은 40년이 넘는다. 최병민이 1973년 대학 졸업 후 주로 발표의 장으로 삼았던 것은 화단의 경력 쌓기와는 거의 무관한, 독특한 미술공동체인 <혜화동 화실 동인전>과 서울대 미대 출신의 뚝심 좋은 재야 엘리트 예비사단 비슷한 <12월전>의 연례전이었다. 그는 조각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거의 15년 만인 1988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제3갤러리) 첫 개인전부터 고집스러울 만큼의 독특한 개성으로 일관된 특이한 음각부조 작품들로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구름, 해골, 거품, 이무기, 거인, 사신, 눈, 물고기, 새, 철조망 같은 모티프를 등장시켜 본질적으로 죽음과 존재, 인간의 유한함과 현실이 거역할 수 없는 힘들에 대한 명상을, 체관과 허무, 분노와 연민을 표현한 작업들이었다. 능숙한 기량의 그의 음각부조에서 빛과 어둠의 교차가 거꾸로 빚어내는 볼륨의 허상 — 존재의 허공에서 존재의 환영을 읽게 해주는– 은 존재와 비존재, 탄생과 스러짐이 교차점에 불안정하게 붙잡혀 있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또다른 메타포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기량과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시였다.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그 4년 후에 있었다. 이 2회전의 내용을 그의 중기 작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는 1회전 이후 4년 만에 열린 전시지만 그 후에도 오래 지속되는 그의 조각작업의 강한 형식적 · 내용적 특징들이 이 전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뼈와 근육만을 남기며 훑어 내려진, 밀도 높은 단순성으로 요약된 강인한 육체들, 마임(Mime)이나 상형문자처럼 거의 기호(記號)에 가깝도록 분명하게 읽히는 갖가지 포우즈나 동작들, 그리고 머리에 이고 있거나 어깨 팔, 등짝, 손끝 등에 걸려있는 구름, 초생달, 번개 따위의 우주적, 설화적 상징물들”이 그것이다(졸고, 위 전시서문. 이하 동일). 이것이 사람들이 비교적 뚜렷이 기억하는 그의 작업의 양식적 표지이다.
초기작의 기질적 색채는 그대로이나 보다 열리고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의 작업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 이 중기작들의 특징이다. 이제 우화는 하나의 신화로, 보편적 언어와 윤리와 세계관으로 통합된 하나의 문화로 변모해가는 느낌이다. 문화의 ‘원형(原型)’을 느끼게 하는, 원형을 찾아서 그 원형을 통해 얘기하려는 예술적 장치가 다양하게 구사된다.
한국 고대문화의 샤먼적, 제의적 색채나 동양문화권 특유의 약간 기괴하고 마술적인 신비한 에너지 – 이를테면 우리는 그것을 기(氣)철학이나 단학, 18계나 봉술, 염력 등 정신의 집중과 엄격한 육체적 단련에서 나오는 에너지 그리고 바람춤이나 구름춤 달춤 학춤처럼 문화와 자연에 독특하게 어우러진 지점에서 나오는 운률의 에너지 같은 것에 연관시켜 상상할 수 있다 -, 天地人의 조화에 기반을 둔 우주관과 그것의 반영으로서의 윤리, 신화적 설화적 분위기 등 대체로 이런 것들이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동양적 문화전통의 냄새나 운률을 풍기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의 상당 부분은 춤, 음악, 민간 전승놀이, 전설, 제의(祭儀) 등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전통문화의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놀이문화적인 요소의 활용은 이번 전시작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후기 작업은 그가 양평군에 작업장을 마련한 2000년 이후의 작업들이다. 앞의 시기에 비해 차분하고 정관적인 것이 특징이다. 전시회로 치면 2008년 제5회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작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사이 3회와 4회 개인전에 선보인 작업들은 2회전의 내용과 양식들을 마케트로 다양하게 변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개인전의 기획자 김진하는 이 시기 작업 속 인물상들이 지닌 고요함과 경건함과 부드러움에 특히 주목하며 이것을 앞선 시기 작업과의 차별성으로 인식한다. “하늘을 경배하듯, 땅을 위무하듯, 해를 마주하듯, 비와 바람을 부르듯, 신을 맞이하듯, 운명을 바라보듯 경건하게 서 있는 사람. 머리와 어깨 팔에는 구름, 해, 달, 번개 등을 이고 두 발은 가지런히 대지를 딛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도 강인한 육체, 절제되고 고요한 동작, 시대와 공간을 구별하는 의복이나 배경이 없는 나신의 직립. 거기에 부드러운 바람이 일며 스치는 듯, 그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김진하, 투명한 인간, 그 아름다움에의 헌사 – 최병민의 근작 ‘응시’에 대하여, 2008)
특히 눈여겨 볼것은 인체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이다. 농경적 샤먼, 노동, 놀이, 춤, 제의 등의 소재들은 여전하지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다. 뼈만 남았던 인체는 부드러운 살갗과 강건한 근육으로 덮이고, 움직임과 기울임이 컸던 다채로운 동작의 변화는 직립의 수직으로 고요하게 멈추어 섰다.
팔의 동작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하체에 의해 안정적이다. 여전히 신화적인, 그러면서도 경건한 느낌이 극대화된다. 정지(停止). 시간은 흐르되 동작은 멈추어진 상태. 그 멈춤은 스스로의 의지 혹은 의례 때문인 듯 다분히 의도적인 자세다. 사람이 이런 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의전(儀典)·의식(儀式)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작이라 하겠다. 무거운 분위기의 어떤 중압감, 수도승 같은 비의(秘儀)적 느낌을 불러일으킨다(위 같은 글).
작가들의 경력을 보면 대개 작품 소장처가 몇 개 나열되어 있다. 최병민의 경우에는 그것이 없다. 단지 금호미술관과 모란미술관 이렇게 두 개 미술관이 있을 뿐이다. 두 미술관은 그의 초대전을 열어준 미술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초대전이니까 의례적인 인사로 한 점 사줬거나 초대 비용의 정산 차원에서 작품 한 점이 미술관으로 건너간 것일 뿐 순수하고 진정한 구매라고 보긴 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는 미술관이나 기업의 구매도 화랑이나 일반 고객 혹은 수집가의 구매도, 비껴간 예술가였다.
앞서 말했듯이 최병민은 1999년 고교 미술교사직 퇴직 후 양평군 서종면에 작업장을 짓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암중 모색해온 신작 40~50점을 모두어 2008년 개인전에 선보였다. 나무화랑 기획에 모란갤러리(화봉갤러리/종로구 관훈동) 초대로 연 전시였다. 1993년과 1995년에 나무화랑 초대로 연 두 차례(제3회와 4회) 개인전에 이어 13년 만에 열린 다섯 번째 개인전이고 ‘응시’라는 타이틀의 주제전이었다.
앞서 1993년과 1994년에 이어 이번에도 이 전시 기획을 맡은 나무화랑의 김진하 대표는 “최병민의 조각은 묵언(默言)을 수행하는 순수한 상태의 인간형 또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직관적인 깨우침을 지향하는 수행자나 예지자로 읽힌다”며 “현자의 침묵이 절제된 조각을 통해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평한 바 있다. 그의 작업의 핵심적 맥을 짚은 말이다. 이 전시는 초대자 쪽에서 작품 한 점을 구매한 것으로 끝났다. 그에 앞선 3회전(1993)과 4회전(1995)의 경우도 작품 판매는 전혀 없이 끝났었다.
나무화랑은 다시 2011년과 2012년에 제6회와 7회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2011년 6회전은 전시장 전경을 찍은 도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깔끔하게 절제된 디스플레이가 최병민 작업의 정신적이고 귀족적인 아우라를 그야말로 금강석처럼 투명하고 단단하게 뿜어내는 전시였다. 별로 크지 않지만 아주 알맞은 크기의 전시공간 전체가 한 작품처럼 통합된 전시였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작은 모두 마케트 크기였다. 제7회전은 ‘인간-우주’라는 부제가 붙었다. 관훈갤러리와 나무화랑이 공동으로 초대한 전시다. 7회전, 8회전 역시 판매 성과는 전무했다. 다만 한 평론가가 주물 작업비를 대어 한 작품에서 네 개의 멀티플을 떠내어 돈 댄 사람, 작가, 두 갤러리 주인이 각각 한 점씩 나누어 가져가는 것으로 끝난 것이 유일한 성과라면 성과였다.
2013년 서울 평창동 소재 김종영미술관에서 김영원 홍순모 김주호 최병민 배형경 등 삶의 문제를 탐구해온 5인의 조각전이 열렸다. <인간, 그리고 실존>이란 타이틀의 주제전이었다. 최병민은 이 전시에 <하늘 풍경> 과 <벽> 연작을 선보였다.
김종영미술관 최종태 관장은 위 전시서문 말미에 이 전시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 사람들을 보라. 예술을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 예술행위란 무엇을 추구하는 일인가. 예술의 목표는 어데인가? 외진 빈터에서 끈질기게도 무슨 신념으로 이들은 왜 이렇게 인간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 의문, 그 알 수 없는 함정! 그런 길고 긴 끝없는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최병민이 판화가 이상국이 타계했을 때 그 빈소에서 최종태 관장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작가로 살기가 너무 힘들고 작업장에 쌓여만 가는 작품들을 보면 근심만 깊어져서 한 말일 것이다. 최병민이 제시한 방도가 폐탄광촌의 지하 공간이나 공장 공간을 손봐서 작품 저장 공간(매장 공간? 저장 후 봉인?)을 만들고 안 팔린 작품들이 쌓여 있는, 죽음을 앞둔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거해서, 작가는 작품의 ‘포기 각서’를 쓰고 국가는 그 작품들을 일단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말하면 타임캡슐 묻듯이 하자는 얘기와 유사해 보이는데) 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최 관장이 나라에 건의해주십사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가 생존한 동시대에 관중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냥 버리는 것도, 사후에 뿔뿔히 흩어지는 것도 견디기 힘든 심정이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묻어버리라’는 얘기다. 얼마나 부조리하고 웃픈(우습지만 슬픈) 얘기인가.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이며, 기질적 개성과 가치론적 세계관을 함축한 작품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그리고 전통과 자연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탐구를 보여주는 작품들, 민중적인 동시에 귀족적인 깊은 울림을 간직한 정통적인, 정공법적 자세의 작품들이 점점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생물종의 멸종 위기와 유사할 정도의 미술생태계의 위중한 현실이다. 이 문제를 미술의 사회적 인식 문제 차원에서 그리고 미술 수용의 제도적 틀의 차원에서 잘 살펴보고 나아가 복지와 사회안전망의 차원에서도 대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기술한 2018년 뉴스 이야기는 한 작가의 작품이 어디에 어떻게 놓였으면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온 나의 행복한 상상이었다. 2회전 서문에서 나는 전시작 대부분이 나중에 확대해서 완성하는 것을 전제로 한 소형 작품인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시작들이 이 같은 ‘완성’을 위한 물적 공간적 조건들을 만날 것인지는 이번 전시 이후의 작가의 행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지금 최병민의 양평 작업장을 가 보라. 그리고 거기 쌓여 있는 마케트가 대부분인 100여 점의 작품을 보라. 거기 한 조각가의 비극이 만개해 있다. 이 푸른 오월에. ●
최 병 민 Choe Byoungmin
1949년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8년 제3미술관에서의 첫개인전을 시작으로 금호미술관(1992), 나무화랑(1993, 1995, 2011, 2012), 모란미술관(2008), 관훈갤러리(2012)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경기도 서종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2011년 나무화랑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 전시광경
왼쪽 페이지 <山> 브론즈 34×19×17cm 2011(maque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