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6 김승현

텍스트의 자간과 행간의 의미

우리는 문자 그 자체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타이포그라픽’ 영역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심리와 호기심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김승현 작가는 이러한 문자의 디자인적 요소가 첨가된 조형적 결과물에 특정 장소의 의미를 더해 작업한다. 언뜻 팝아트의 주요 작가 에드 루샤(Ed. Ruscha)의 빌보드 작업을 연상시키는 김 작가의 작업은 작품이 설치된 공간의 물리적 여건과 사회, 정치, 역사적 의미와 맞물려 전혀 다른 갈랫길로 접어든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누구나 들어봤을 유명 팝송의 가사 한 구절이 전하는 의미는 노랫말의 맥락과 단절되어 온전히 공간과 관련한 이야기로 변질된다. 2014년 <강정대구현대미술제>에 출품된 <One of the lyrics of pop song> 연작엔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Vincent>)나 “Don’t forget to rememver”(<Don’t forget to remember>) 문구가 등장한다. 4대강 개발의 폐해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너무나 평범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remember’를 ‘rememver’로 살짝 바꾸었는데 오타 아닌 오타로 ‘river’와 ‘remember’를 합성한 작가의 능청맞은 위트도 엿보인다. 작가는 이런 위트를 한 번 더 드러낸다. “강정보의 경우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린 장소입니다. 그 자료를 보던 중 故 박현기의 작품에 등장하는 포플러 나무를 보며 고흐가 그린 포플러나무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상황에 직면할 때, “세상 모든 노래 가사가 나를 말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 일상이나 삶이 노래 가사의 한 구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김 작가의 재기발랄한 응용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찰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텍스트가 전달하는 의미는 문장의 결합체인 전체 흐름의 구조와 분리되면 그 의미가 아예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상한 제품들> 연작 중 ‘mainstream’은 바로 그 의미와 구조 사이의 괴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주류’의 의미를 전면에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알파벳으로 제작한 설치물 내부에 만들어진 통로를 지나가면 글자를 볼 수 없다. 우리의 주류 사회도 그렇다. 누구나 주류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만 막상 그 안에서는 무엇이 주류인지 명확히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주류라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경계를 나누어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통로를 걸으면서 느끼는) 소외감은 그런 상황에서 주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단어를 읽을 수 있거나 읽지 못해 인식과 비인식의 조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그렇게 생성된 “소속감과 소외감이 발생하는 점에 대한 반복적인 경험이 주류·비주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에 대한 작업이다.
최근 김 작가는 텍스트를 공간에 설치하는 작업과 함께 평면에 회화로 표현하는 작업을 실험하고 있다. 앞서 밝혔듯 에드 루샤의 <Your Space>에 대한 작가의 화답이며, 작가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서와 역사 연구에 다름아니다.
올해 강의를 시작했다는 그는 이를 계기로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의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 의심의 결과는 그가 설치하거나 그려내는 텍스트 사이사이에서 ‘의미’로서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석권 수석기자

김승현
1983년 태어났다.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총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강정대구현대미술제>(대구, 2014), <유목적상상>(2012, 삿포로) 외에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대구에서 작업하고 있다.

  시트커팅 가변설치 2014

< One of the lyrics of pop song > 시트커팅 가변설치 2014

 

NEW FACE 2016 우정수

믿음이 가라앉은 혼돈의 시대

“나는 인간들로서는 파헤치지 못할 한 수수께끼의 과정을 풀었고, 그리고 그것을 기록했다. 이성의 탐구 정신에 따른 하나의 행운. 그러나 어떤 정황들은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특별대우를 받았으리라는 점에 의구심을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과연 줄기차게 진실을 기록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다.”(보르헤스 〈또 다른 죽음〉 중에서)
작가 우정수의 그림에는 책이 등장하지만 책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가 이야기로 삼은 서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물론 전시 혹은 작품 제목에 늘 문학의 레퍼런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무너지는 책더미에서 텍스트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책뿐만이 아니라 보름달, 원숭이, 부엉이 등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상징물이 등장한다. 마치 중세 기독교 벽화나 네덜란드 정물화에 등장하는 오브제처럼 그의 작업 속 기물은 상징을 해석하기 위한 매개이자 도구이다. 그러나 그 매개의 다중적인 해석 가능성은 관객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집중하는 매개체 중 하나는 ‘책’이다. 그 텍스트를 이미지화 하면서 작가는 현실과 가상 사이를 오가는 교묘한 줄타기를 한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한 작가만의 방법일 것이다. 작가는 2015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불한당들의 도시〉에서 선보인 작업에서 사회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면, 2016년 OCI미술관에서 선보인 〈책의 무덤〉에서는 고질적 사회 부조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바뀔 수 없다는 허망함을 드러냈다. 그는 그동안 사회적 저항의 감정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비록 서브컬처 이미지를 활용할지언정 그의 회화에는 독기 어린 화가 있었고 투쟁의 메시지가 강렬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형지물이 한 공간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소용돌이치는 〈책의 무덤〉시리즈에서 이전보다 배가된 회화의 역동감이 느껴지지만, 감정적으로는 ‘분노와 열정’보다 무너져내리는 허무함이 포착된다. “과연 이미지가 어떤 힘을 지닐 수 있을까? 억누르지 않고 표출하는 감정표현이 사회적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을까?” 작가는 자문했다. 그렇다면 이제 한숨 뱉어낸 듯한 그의 목소리는 어느 지점을 향하고 있을까?
우선 구도에서부터 변화를 시도했다. 거대한 종이를 사용한 〈책의 무덤〉시리즈의 경우 액자 없이 펼쳐진 종이를 사용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텍스트의 홍수를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책을 넘기듯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마치 두루마리 그림을 펼친 듯 구성의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평면과 공간, 현실과 가상, 저항과 포기를 동시에 내포한다. 더 나아가 스페이스 BM에서 선보인 신작에선 액자를 그림의 도구로 사용했다. 펼치는 그림과 달리 프레임을 사용해 맺음이 있는 작업을 만들어내면서, 액자의 유리를 사용해 관객의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구도를 택한 것이다.
그가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텍스트에는 현실 같은 허구가 존재했다. 한편 회화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진짜 현실이 있다. 그 표현의 딜레마에서 찾아온 허망함이 회화에 대한 절망은 분명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어느 지점을 부유하던 그는 이제 맺고 끊을 수 있는 회화를 찾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는 아니길 조심스레 바란다.
임승현 기자

우정수
1986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와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과 OCI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7년부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7월 14일부터 8월 14일까지 스페이스BM에서 열리는 그룹전 〈나레이션〉에 참여한다.

〈원숭이도서관〉 종이에 잉크, 아크릴 433×514cm 2015

〈원숭이도서관〉 종이에 잉크, 아크릴 433×514cm 2015

 

NEW FACE 2016 오종원

“좋은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오종원과 3시간이 넘는 대화를 마치고 작업실을 나오면서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입사한 지 5개월 만에 최대 난코스를 만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기자의 눈에 들어온 하늘은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인터뷰 전 그가 보내준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기자는 이토록 여러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그와 나눈 대화에서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작성한 녹취록을 여러 차례 읽어 보니, 몇몇 단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쇼 메이커(show maker)’, ‘롤 플레잉(role playing)’, ‘옴니버스 드라마(omnibus drama)’… 그의 모든 작업은 이 세 단어로 설명되는데 그 연관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는 게 이 글의 목표다.
‘쇼 메이커’, 이것은 오종원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로 그는 ‘작가’보다 이 단어를 더 선호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쇼를 만들어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피드백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행하는 쇼 메이커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롤 플레잉’과 연결된다. 직역하면 역할놀이를 일컫는 이 말은 그가 작업, 즉 연기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오종원이 만들어내는 쇼의 메인 테마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가치’다. “한 개인으로서 옳고 옳지 못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걸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선택한 ‘가치’다.”라고 그는 말한다. 보통 가치 판단의 기준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기호가 아닌 (무)의식적으로 학습되는 이념적인 의식 형태이며 의식의 흐름이다. 즉, 가치란 청년 실업률, 가계부채, 사회 안전 및 정치권을 향한 불신 등 모든 게 과잉 상태인 현실을 향해 쇼 메이커 오종원이 내뱉는 날 선 발언인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그림자는 있는데 실체는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작업할 이야기가 주변에 널려 있는 지금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 좀 더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예술계 현실은 그가 쇼를 제작하는 원동력이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감이 잡힐 듯 말 듯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그에게 전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 중 기억나는 건 “옴니버스 드라마”다. 작업 하나하나를 옴니버스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시간이 흘러 개수가 늘어나면 보다 성숙된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였다.
전화 인터뷰를 추가로 진행했음에도 기자는 오종원이 하려는 이야기가 그가 제작해온 여러 편의 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쇼 메이커 오종원은 욕심이 무진장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가 신작이라며 보여준 LED 작품에는 “좋은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기자는 그 문구를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반드시) 좋은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로.
곽세원 기자

오종원
1986년 출생했다. 인천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2011년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지상최대의 섹슈얼리티-예고편〉 제하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3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다.

냉정한 신도시의 아이스박스 프로젝트 中〈떠오르기 연습〉 퍼포먼스 2014

냉정한 신도시의 아이스박스 프로젝트 中〈떠오르기 연습〉 퍼포먼스 2014

 

HOT PEOPLE | 이 명 옥

열정으로 달려온 사비나의 20년

1996년 3월 사비나갤러리로 시작해 한국의 대표적인 사립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은 20년을 쉼 없이 달려왔다. 그간의 여정을 들어보기 위해 6월 10일 미술관을 찾았다. 먼저 20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그는 “20년 세월이 나 또한 놀랍다”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개인이 설립한 비영리 미술공간이 20년을 버티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답한다. 미술관을 운영하며 절망한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이 관장은 작가와 관객에게 한 약속을 떠올렸다고. 미술관 운영을 중도 포기하는 일은 그에게 작가의 전시경력을 없애고 사비나미술관을 찾은 관객의 기대와 애정을 저버리는 행동이었다. 이는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이 관장의 소신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결국엔 ‘책임감’이다. 그것이 나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사비나미술관의 전신인 사비나갤러리는 처음부터 여타 상업 화랑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내세웠다. 그것은 바로 차별화된 기획력으로 승부를 거는 이른바 ‘기획 전문’ 갤러리였다.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를 떠올려보면 이 관장의 운영 방침은 시대를 앞서가는 행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밤의 풍경〉(1996), 〈교과서 미술〉(1997), 〈그림으로 보는 우리 세시풍속〉(2000) 등 주제 중심의 전시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 관장의 차별화 전략은 전례 없는 모델을 만들어내
신생 갤러리였음에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특색 있는 전시공간이란 이미지가 확고하게 형성되고 미술관으로 전환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이 관장은 2002년 7월 사비나미술관으로 등록을 마쳤다. 이후 다른 분야와의 융복합 전시와 역량 있는 작가의 개인전을
각 2회씩 개최하는 등 신선한 기획과 주제로 관객을 찾아가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1월 미술품
컬렉터의 데이터베이스인 래리스 리스트(Larry’s List)와 AMMA(Art Market Monitor of Artron)가 공동 조사한 ‘사립미술관보고서’에서 국내 우수 미술관 3개 기관에 이름을 올린 것도 이러한 노력이 일궈낸 성과였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이 관장의 열의는 오래전부터 해온 강연과 칼럼 및 저술활동에서도 읽힌다. 관장이란 이름표를 떼고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인으로서 “미술에 관심은 있지만 낯가리는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알기 쉬운 대중적 언어로 글을 쓴다”는 그는 이미 서른 권이 넘는 미술 관련 서적을 출간한 베테랑 작가이자 미술과 대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운영자금이 안정적으로 지원되는 공립미술관과 개성 있고 유연하게 미술관 색깔을 만들어갈 수 있는 사립미술관이 결합된 형태의 미술관”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이 관장. 언제나 초심을 되새기며 일한다는 그가 머지않아 또 한 번 전례 없는 형태의 새로운 미술관을 구현할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곽세원 기자

이 명 옥 Savina Lee
홍익대 미술대학원 예술기획 석사를 졸업했다. 사비나미술관 관장이자 국민대 미술학부 교수, 한국미술관협회장(2011~), 과학문화융합포럼 공동대표 (2008~)를 겸하고 있다. 대한민국과학문화상 도서부문(2006),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식 국무총리 표창(2009)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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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60sec ART전〉(5.21~7.10) 전시광경

ARTIST REVIEW 김형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형대 회고전〉 전시광경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형대 회고전〉 전시광경

회화와 판화를 50여 년간 탐구해 온 작가 김형대의 화업을 총망라한 전시가 4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다색 목판화와 채색 부조 회화로 나뉘는 그의 작품은 크게 물성(物性)과 환원(還元)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이 걸어온 역사 한편에 현재까지도 활발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김형대의 작품세계를 면밀히 들여다 본다.

김형대의 ‘환원 B’, 정박되지 않은 한국 모더니즘의 기표

김미정 | 미술사

김형대의 50년 화업을 결산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사 정립을 위해 한국 현대미술가들을 조명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전시는 ‘격정과 도전의 시기’, ‘탐구와 체화의 시기’, ‘후광 그리고 새로운 시작’ 총 3부로 구성되었다. 앵포르멜 시기의 〈환원 B〉부터 2012년 제작한 대작 아크릴 부조 회화 〈후광 12-303〉까지 일람할 기회였다.
1936년생인 김형대는 소위 ‘단색화’ 세대의 화가이다. 그러나 회고전에서 살펴본 김형대의 작품세계는 앵포르멜 세대의 집단 미술운동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 1960년대의 <씨족>과 <생성시대>, 다색 목판화와 <후광> 연작에서 보듯이 작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 화단에 몰아친 이우환식 모노하 설치나 퍼포먼스를 시도하지 않았다. 〈에꼴 드 서울전〉과 같은 단체전에 초대는 되었지만, 김형대의 활동은 1970~1980년대 단색 모노크롬 평면화의 대열에서도 반 발자국 정도 빠져나와 있는 듯하다.
김형대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개념이기보다 표상이다. “수행과 행위”보다는 “소재”로서의 한국적 미술을 추구한 것인데, 그래서인지 김형대의 그림에서는 모티프와 장식, 색채와 같은 조형 요소들이 중요하다. 전시장에서 영상으로 제공되는 작가의 말에서, 혹은 회고담에서 거듭 드러나듯이 김형대는 자신의 추상화 기원이 사적인 추억과 주변의 자연물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통학 길에 보았던 여의도 샛강 여울의 소용돌이, 조계사의 목조장식과 불상, 나무의 나이테 등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들이다. ‘생성’ 연작의 유기체적인 프랙탈 구조는 쉼 없이 역류하는 물의 이미지였다. 화사한 채색은 그가 진솔하게 털어놓듯이 동대문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어머니의 추억에서 비롯하였다. 차곡차곡 쌓여 정리되어 있다가 좍 펼쳐지는 옷감들의 휘황함에 자극받은 유년기의 미적 체험은 화가 미의식의 원형이었던 셈이다. 사실 이러한 낭만적 회고담은 전위미술의 대열에 섰던 동년배 한국 미술가로서는 다소 특이한 고백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196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과 연이은 국전 서양화부 최고상으로 출발한 김형대 미술의 범주는 제도권에서 장려(?)한 한국적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단색화 시대로 기억되는 한국적 모더니즘 양상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단체나 주력하는 전시에 따라, 지역과 연배에 따라 기법, 형식, 주제가 다양하게 갈라져 있는데, 김형대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화사한 색채와 민예적 소재는 1970년대 국전 비구상 부문 수상작들, 예를 들면 이준(1919~), 유희영(1940~) 박길웅(1941~1977) 등의 작품과 유사한 장르적 특징이었다.
<국전>과 김형대의 화업은 그 시작부터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김형대의 미술은 1961년 수상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 이라는 이름에 결박되어 있는 듯하다. 이 수상이 명예로운 이력인지, 올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김형대의 미술이 이후 회화에서 판화, 아크릴 부조로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이었음에도 이 한 줄의 이력은 화인(火印)처럼 화가를 따라다녔다. 이 이력은 ‘지글지글 끓고 있는’ 현대미술 전위로서의 면모를 상쇄시키며, 김형대가 1960년 10월에 덕수궁 담에서 동료들과 감행했던 <벽전>과도 논리적으로 충돌하였다. 무엇보다 이 상의 낯설고 긴 명칭은 어쩔 수 없이 1961년의 역사적 상황을 상기시킨다.
1960년과 1961년에 연이어 발발한 4·19와 5·16 두 사건에 대한 해석이 곧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을 형성하듯, 미학적 전위와 관전 진입이 동시에 가능했던 당시의 미술계 상황은 전후 한국 모더니즘에 대한 어떤 비평적, 혹은 미술사적 해석보다 상징적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연구하는 필자에게 김형대의 〈환원 B〉가 전후 한국 모더니즘의 ‘증후’ 적 작품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필자는 이 작품과 사건을 증거 삼아, 앵포르멜 세대의 전위에서 주류로의 전환이 군정(軍政)기에 이루어졌음을 논증하며 한국적 모더니즘에 관한 정치·사회적 해석을 시도한 바가 있다. 그러나 미술사가 정치·사회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결국은 미술가들의 실천의 역사라는 사실에 더 큰 방점을 두는 지금, 중요한 것은 <국전> 최고상 이력이 김형대의 이후 50여 년 예술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질문이다.
김형대의 미술은 단색화의 수행적 담론이나 이우환(1936~)의 신체와 장소성과 같은 현학적 수사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두고 진행되었다. 물론 장인적 노력과 다색 채색판화를 통해 관전 추상화라는 좁은 장르적 울타리도 뚫고 나왔다. 기성세대로 몰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감상적인 회상을 늘어놓는 김형대의 미학적 취향은 윤명로(1936~), 김봉태(1937~) 등 동료 세대의 단체인 ‘60년 미술가협회’의 논조보다 오히려 김환기(1913~1974)나 유영국(1916~2002)과 같은 근대기 모더니스트의 서정주의와 유사하다. 1960년대 실존주의 미학의 전방위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긋하게 감상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첫 번째 빛나는 이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이 허용한 미학적 자유의 결과였을지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형대가 회화의 물성에 몰두하게 된 것은 다색 목판화 제작의 여파였다. 1960년대 김형대의 색채에 대한 탐닉은 다색 목판화 시대로 이어졌다. 그가 다색 목판화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사실 다색 목판화는 한국 현대판화에서는 희귀한 것으로 유강렬(1920~1976), 정규(1923~1971)의 초기 판화는 물론이고, 1960년대 이후 많은 미술가가 조형실험으로 혹은 미술의 대중화를 위해 목판화를 제작했으나 주로 단색의 민예적인 투박함을 선호하였다. 그가 판본을 여러 개 만들어 색채를 거듭 찍고 종이에 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게 했던 것은 판화에 섬세한 회화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었다. 요지는 기름기를 빼서 담백한 느낌을 주는 잉크 제조, 원하는 배색을 위한 종이의 선택이 까다롭게 이루어지면서 화가는 자연스럽게 질료의 문제에 집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포괄적으로 보자면 김형대의 색채와 빛에 대한 집착도 사실은 서구의 물질성에 대한 저항이었다. 결국, 담론의 구조는 ‘무위(無爲)’의 수행으로 서구의 물질성을 상쇄하려 했던 한국 단색화 미술가들의 논법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김형대 회화가 단색화의 울타리 바깥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단색화 미술운동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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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 〈후광 85〉 캔버스에 아크릴 100×155cm 1985 왼쪽에서 두 번째 〈후광 84-6〉 캔버스에 아크릴 96.5×124.5cm 1984

‘환원(還元)’ 정박되지 않은 한국 모더니즘의 기표
김형대의 미술은 근대 주정주의와 현대 물질주의 미학의 접경지대에 있을 뿐 아니라 국전 추상화라는 ‘장르’ 미술과 ‘단색화’ 미술 그 중간에 걸쳐 있다. 이를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경계의 확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미학적 자기 완결, 평면의 매체 담론으로 “환원” 하고자 했던 1970년대 동시대 모더니즘의 다른 영토에도 많은 한국의 미술가가 군집하고 있었으며, 김형대는 그중에서 확연한 성취를 이룬 미술가라는 사실이다.
논박할 여지없이 앵포르멜 추상미술의 제도적 승인의 징표가 된 <환원 B>는 한국 현대미술사 전후 추상미술의 챕터에서는 빠지지 않는 대표작이다. 한국적 모더니즘 시대를 동고동락했던 비평가 이일(1932~1997)의 유명한 평문 “환원과 확산”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듯이 환원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용어이다. 그러나 오래전 국전 출품작 〈환원〉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필자의 전화 인터뷰에 화가가 돌려준 대답은, 기억하건대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근거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화가가 설명하는 ‘환원’은 추억으로의 회귀라는 대단히 낭만적 시어였다. 기대했던 “표면으로의 환원”이라거나 “매제의 물성”이라는 형식주의 이론과 상관도 없는 이야기라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생각해보면 김형대의 〈환원 B〉의 붉은 색조는 미묘하고, 수평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요철은 ‘켜켜이 쌓여 있는 옷감’ 같이 섬세하다. 당시 앵포르멜 작가들의 미학적 퍼포먼스가 부조리극에 가까웠다면 김형대의 지향은 대상에서 환기되는 시적 정서였다. 그래서인지 1960년 ‘벽동인’과 같은 전위 미술가로서의 분명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김형대의 미술은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 서술에서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미술을 전위와 보수의 역학적 좌표로만 파악하려는 미술사가의 성긴 그물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서구적 모더니즘 담론으로 무장했던 현대 비평가들의 맹점(盲點)에 그의 작업이 포섭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형대의 이번 회고전은 그가 서정주의와 물질성이라는 근대와 현대미술의 두 논제를 규합하려 분투해왔음을 증명한다. 그의 목판화는 국전 추상화 장르의 진부함을 깨고, 조선시대 회화의 은은한 배채법(背彩法)과 다색 목판화 기법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이었다. 화가는 지금도 어엿한 현역 작가로서 다색 목판화와 채색 부조 회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기억은 반복적 해석의 행위라 했다. 김형대의 긴 화업의 첫 줄에 선명한 화인을 남긴 ‘환원’이 정박되지 않은 기표인 것처럼 말이다. ●

김 형 대 Kim Hyungdae
1936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를 지냈다. 1965년 신문회관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0여 회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1982년 제2회 공간국제판화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기도 안성에서 작업한다.

ARTIST REVIEW 이숙자

 순지에 암채130.3×162cm 2010

<푸른 보리밭 – 황소> 순지에 암채130.3×162cm 2010

작가 이숙자는 채색화의 뿌리가 우리의 전통에 있음을 확신한다. 그는 채색화의 정통성에 대한 강한 신념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채색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숙자의 작품에 드러나는 화려한 색채와 선명한 주제는 한국적 정서와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양식의 상징으로 굳건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채색화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요기로운 초록빛 환영과 자아

류철하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초록빛 환영_이숙자전>(3.25~7.1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3전시실)은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한국화부문 세 번째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사 정립을 위해 진행하는 중장기 프로젝트이다. 작가 이숙자는 수묵화 중심의 한국화단에서 전통 채색화의 명맥을 유지해온 독보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숙자의 회화적 연혁을 약술하면, 홍익대 동양화과에서 천경자(千鏡子, 1924~2015), 박생광(朴生光, 1904~1985)과 김기창(金基昶, 1923~2001) 같은 근대기 한국 채색화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스승들에게 지도를 받았고, 196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을 통해 데뷔한 이후 1980년 <국전>과 <중앙미술대전>에서 동시에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바 있다.
이숙자는 전통채색화에 대한 탄탄한 기초와 현대화에 대한 다양한 시도, 지속적인 전시를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정작 이숙자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된 작품은 <보리밭과 이브>다. 이 작품을 통해 강렬한 대비를 통한 인상이 대중에게 오래 깊이 각인되었다. 보리를 통한 추억과 향수, 보리 잎이 주는 꺼칠꺼칠함, 일렁이는 눈부신 푸른빛과 추수기의 황금빛 등은 전쟁과 재건, 경제개발 시기를 살아온 세대에게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이숙자의 ‘보리밭과 이브’는 화면 전면을 가득 채운 보리밭과 함께 누드의 이브라는 강렬한 파격과 도발을 동반한 것이었다.
수직으로 상승하는 푸르고 거친 보리의 생동하는 색과 압도적인 군집의 힘, 낱알과 수염의 세밀한 묘사라는 공력(功力) 위에 체모를 과감히 드러낸 채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용감히 누운 근육질의 육체미 여인은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로 탄생했다. 꽃과 나비, 고독과 환상의 누드 여인상은 <이브의 보리밭>에 와서 ‘생명에 대한 직설적 예찬’과 숙명을 거부한 당당한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여인의 자화상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작가는 ‘벌거벗은 이브’에 대해 “살아오면서 갈등했던 여성의 굴레와 인습에 대한 저항의식이 형상화된 나의 내면”이라고 하였다. 보리밭과 여체라는 두 자연의 아름다움은 신의 창조물로서 여인의 몸이라는 찬미와 함께 낙원 추방과 원죄의식이라는 태곳적 풍경을 자극한다.
이숙자가 구성한 보리밭과 이브는 한국적 정서와 미의식이라는 자연의 재현적 풍경(보리)과 함께 강렬한 누드상을 통한 초현실의 감정(이브)을 자극함으로써 현대, 여성, 전통, 채색이라는 미술적 시각 틀을 깨뜨려 나간다. 이숙자는 풍부한 자의식과 강렬한 주관, 깊고 다양한 색감으로 구성된 화면으로 대상을 끌어들여 간략하고 요체화된 풍경(보리밭과 이브)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조형성과 색감을 지닌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초록빛 환영_이숙자전>은 한국화와 채색화가로서 작가의 도정, 한국화의 정체성 확립과 한국미술사에서의 채색화의 정통성 수립이라는 과제를 풀기 위해 작가가 도전했던 과제들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이숙자는 첫 개인전인 1973년 <이숙자 한국화전>에서부터 한국화라는 명확한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전통과 우리 정서의 추구에 집중하였다.

3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광경

3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초록빛 환영 _ 이숙자전> 전시광경

한국 채색화의 정통성
이숙자의 초기작엔 색지함, 목안(기러기), 태극선, 족두리, 댕기, 십장생도, 고가구 등 전통 민예품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민속적 소재의 독특한 색채감각은 규방과 여인의 다감한 정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달래색, 배추색, 옥색, 자주색 등 깊게 가라앉은 애환의 색감들은 조선시대 여인의 시름과 한숨, 애환 어린 정서를 상기하게 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애환 어린 정서가 이후 보리밭 작품을 하면서도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숙자는 원색의 오방색이라는 민속적 기물에서 꽃으로 소재와 관심이 추이되면서 간결하고 극명한 묘사와 환상적인 톤의 색채가 많아졌고, 색감이 풍부하고 다양한 꽃은 색채의 발견이라는 문맥 속에 더없는 소재가 되어 주었다. 한국미의 정체성을 색채 속에서 찾고자 하는 이숙자에게 꽃과 여인이라는 소재는 최상의 것이었다.
이후 이숙자는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보리밭이라는 주제를 택해 집중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민속품을 통해 한국미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작가가 추구한 한국적 정서와 미의식은 보리밭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숙자에게 있어 보리밭으로 상징되는 초록빛 색채에 대한 경험, 보리밭에서 만난 초록빛 환영의 경험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것이었다.
이숙자는 “포천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지막한 언덕 등성이에 넓게 펼쳐진 보리밭을 보고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보리수염은 초록빛 안개처럼 자욱하게 느껴졌다. 밝은 회청색의 보릿대와 연둣빛 보리이삭 그리고 옆으로 힘차게 뻗은 잎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전생에서나 들어본 듯 느껴지는 뻐꾹새와 종달새 소리가 환상적이었다. … 잠시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향도 바람도 정지된 한 폭의 짙은 녹색 보리밭은 요기스러운 초록의 공기로 싸여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제비나비가 펄럭펄럭 그 초록빛 대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가슴속에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가 한여름철 소나기로 씻긴 것 같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맛보았다.”고 밝히며 “보리밭이 슬픈 빛 정서를 띠면서도 기氣가 살아 요요한 초록빛을 띠는 것은 그러한(민중의 양식이 여물어가는) 희망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보리밭을 만나면서 민족적이고 민중적 양식의 상징, 고난과 좌절을 넘어선 굳건한 생명력의 발아와 힘을 발견한다. 그리고 보리밭과 함께 여자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인습과 문명에 도전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징화했다.
하나의 전형과 양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공력을 고스란히 담을 대상이 필요하고 강인한 탐구욕과 견고한 자기세계 그리고 의지가 요구된다. 이숙자에게 있어 보리밭과 이브는 한국적 정서와 함께 열정과 공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이브는 강렬한 주체의 상징이 되었다. 채색에 대한 온갖 왜곡을 딛고 석채를 통한 채색의 고유한 색감과 깊이, 그리고 자기세계의 전개는 ‘다이내믹’한 현대사 속에 또 다른 정체성이 되어 새로운 공감을 제시하고 있다. ●

이 숙 자 Lee Sookja
1942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조형학부 교수로 재직(1993~2007)하다 정년퇴임했다. 1973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6회 개인전을 열었다. 제5회 석주미술상(1994), 제5회 대한민국미술인상 – 여성작가상(2011), 제13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 미술진흥부문(2013) 등을 수상했다.

NEW FACE 2016 김선영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집중해 관찰하지 않아도 익숙한 주변 풍경이 ‘문득 발견’ 될 때가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일상에 무심해지지만 때론 어쩌다 발견하는 변화에 유난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유난스러움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으로 돌아가버린다.
여기 김선영의 회화가 있다. 거기에는 그녀가 늦은 밤 귀가를 위해 걷는 길, 서너 정거장 남짓의 거리를 일부러 걸으며 발견한 풍경이 담겨있다. 특별히 별스러운 대상도 아니다. 공터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토사, 폐수영장, 빛이 바랜 회색 벽, 넝쿨 등이 보인다.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의식되지 않을 그것들이 작가의 관찰과 붓질을 거치자 이상하리만큼 큰 불안감을 표출한다.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이 아닌데도 편하지 못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김선영 작업의 특징인듯 하다. “불안과 불안정함은 누구나 감추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단념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나는 미완의 땅에서, 개척의 변두리에서, 현재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닮은 풍경을 만난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나의 감정, 나의 역할, 나의 자리를 낯선 땅으로부터 느낀다.”(작가노트 중)
작가와의 대화 중 가장 확신에 찬 말은 “저는 어떤 상황, 대상에 제 감정을 잘 이입시켜요”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내면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일 수도 있겠고, 어두운 밤일 수도 있겠다. 모두 그 세부가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확실성 가득한 대상이다. 그 불완전하고 어두운 공간의 작업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신에게서 측은함을 느꼈다는 작가다. “완전한 객관화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그것은 또 다른 주관의 생성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김 작가는 스스로 더 강해지거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객관화하여 혹독하게 다그치기보다는 자기연민의 제스처를 취한 것이 아닐까? 집단에 의해 버려진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추스르고 싶은 것은 아닐까?
“몇 번의 휴학을 거치면서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석사 청구전을 앞두고 고민이 극에 달했죠. 그 당시 6개월이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그 직전 시기에 작가는 사실 사진을 긁어 표현한 작업을 선보였다. 다만 그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일었다. 이는 지금의 작업으로 회귀하는 계기가 됐다. 어떤 포기는 다른 선택을 의미한다. 작가는 그러한 전환에 결코 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최근 김선영은 파주 헤이리로 작업실을 옮겼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는 그곳에서 부유하는 자신을 확인하는 중이라고 했다. 어떤 지향점과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그저 괜찮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릴지도 모르겠다. “고민이 없어지는 것이 고민”이라는 작가의 고백을 들어보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
황석권 수석기자

김선영
1984년 태어났다. 성신여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총 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과 광주, 부산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제7회 겸재 내일의 작가 대상’(겸재정선미술관, 2016)을 수상했다. 현재 파주 헤이리에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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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 종이에 채색 162×130cm 2013

 

NEW FACE 2016 김이박

물끄러미 식물을 바라본다

김이박(본명 김현영)은 작가보다 소장으로 불릴 때가 잦다. 그는 미술과 생업의 영역이 뒤엉킨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의 경계를 허문다. 그의 활동 영역을 잇는 매개는 단 하나. ‘식물’이다. 스스로를 ‘식덕후’라 칭할 만큼 작가의 식물 사랑은 유별나다. 식물은 그의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 소재이자 본인을 투영하는 대상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코스모스다. 그는 식물을 통해 각박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 매뉴얼을 만들면서 사회적 관계 형성에 미학적으로 접근한다.
2015년부터 계속되온 프로젝트 〈이사하는 정원〉은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그의 창작물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업이다. 김이박은 의뢰인으로부터 시름시름 앓는 식물을 위탁받아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보살핀다. 그의 작업실은 식물이 치료받고 안정을 취하는 일종의 식물병원이자 요양원이다. 일련의 과정은 화훼디자인을 전공하고 플로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쌓인 식물에 대한 전문지식이 수반되었기에 가능했다. 이 프로젝트는 식물에게서 느낀 동병상련에서 시작했다. 도시에서 키우는 대부분의 반려식물은 ‘화분’이라는 부자연스러운 거처에서 인공적으로 생활한다. 화분 속 식물은 분갈이 혹은 주인의 이사에 따라 함께 터를 잡지 못하고 이주한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수없이 이사를 다닌 김이박의 모습과 닮았다. 자신을 투영한 그의 시선은 차츰 약하고 여린 식물을 바라보는 보호자이자 관찰자로 이동한다. ‘식물을 기른다,’ ‘키운다’는 표현에서 나타나듯 식물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위치는 상대적 우위에 있다. 말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을 연약한 보호 대상으로 설정하고 보살피려 한다.
한편 작가의 관찰자적 시선은 감시카메라를 활용한 작업 〈정원 cctv〉에 잘 드러난다. 작가는 어느 날 자신의 정원이 훼손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처음 의도와 달리 촬영된 영상을 관찰하며 작가의 시선은 식물의 신변보호에서 점차 식물을 둘러싼 사람들의 행태로 번져갔다. 그러나 식물을 둘러싼 그의 작업이 관음증적이거나 판옵티콘의 권위적 시선과 구별되는 점은 상호적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관계성’은 김이박의 모든 작업의 기초가 된다. 〈이사하는 정원〉에서 식물의 병증을 치료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의뢰자의 태도 변화다. 그는 의뢰자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의뢰자의 환경과 상태를 이해하고 식물과 의뢰자를 함께 바라본다. 이를 통해 의뢰자-식물-작가의 정서적 유대를 도출한다. 또 다른 작업 〈사물의 정원〉도 마찬가지다. 이 작업은 관객이 지닌, 사물과 그에 얽힌 간단한 사연을 작가가 준비한 화분과 교환하는 방식이다. 끊임없는 관계맺기는 정서적 거리감을 줄인다. 한편 모든 관계의 설정은 작가의 설계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그 속에는 타자적 시선도 있다.
식물의 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조건은 ‘사람’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늘 식물과 사람이 공존한다. 김이박의 상호 관계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따뜻한 보호자의 감성과 차가운 관찰자의 시선이 겹치며 오묘한 감성적 변이를 일으킨다. 모든 생물은 참 복잡한 존재다.
임승현 기자

김이박
1982년 태어났다. 계원조형예술대 화훼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서울 성균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Twists and Turn〉을 시작으로 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6월 17일부터 8월 28일까지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데몬전〉(6.17~8.28)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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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정원〉 혼합재료, 관객의 물건 가변설치 2016

 

NEW FACE 2016 송수영

손으로 보고 눈으로 만지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 혹은 동/식물에게 작가 송수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 같다.
“너는 어디서 왔니?”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어디서’다. 작가의 작업은 비닐봉지, 면봉, 이쑤시개 등 집 안 어딘가에 꼭 있을 법한 물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물이 기억하는 과거와 대면하여 불현듯 스치는 또 하나의 사물을 소환하고 병치시킨다. 〈향-나무〉, 〈면봉-꽃〉, 〈비닐봉지-고양이〉 등 하이픈(-)을 사이에 두고 연결된 두 사물의 관계가 다소 의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앞서 언급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연결된 것이다. 작가가 생각한 두 사물의 유사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평소 시를 즐겨 읽고 한때는 시인을 꿈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그는 ‘은유적 관계’, 다시 말해 논리적으론 설명할 수 없지만 서로를 환기시키는 관계에 주목한다.
재료에 대한 관심은 학부 때부터 있던 습성이었다. “석조 시간에 두상을 열심히 깎고 있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저는 나무의 결이나 벌레 먹어 생겨난 자국 등에 눈길이 갔어요. 그래서 그걸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두상을 재료에 맞춰 깎았어요.” 그렇다고 작가가 재료의 물성(物性)에 집착한 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재료가 머금은 과거의 흔적에 주의를 기울였다. 또 두 개를 연결하는 그의 행위가 단순히 직관과 상상력에 따른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여기엔 그가 이전부터 꾸준히 천착해온 문제의식이 배어 있다. “인간이 동물에 가하는 폭력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아요.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가 지금은 유해동물로 취급받고 있어요. 사실은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비둘기를 수입해서 불러온 결과인 데 말이죠.” 현재 셔틀콕과 새의 깃털로 하고 있는 작업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평범한 사물에 미세한 변화를 주어 인간의 폭력성을 환기시켰다. 이는 작가가 너무도 익숙한 일상의 물건을 주재료로 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목으로 규격화된 나무, 의류로 제작된 모피, 식용을 위해 도축된 가축 등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 외의 것에 폭력을 가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물질, 색채, 형태로 환원되는 과정”이며 “너무 시각적”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차가운 감각이다. 시각의 이러한 면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바로 ‘재폭력, 낯선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얗게 표백된 모피를 다시 한 번 비닐봉지 안에 넣어 밀봉하거나 셔틀콕을 마트 상품처럼 패킹하는 식이다. 즉 익숙한 폭력으로 살해된 생명을 낯선 방법으로 ‘다시’ 살해함으로써 폭력성을 강조한다.
이렇듯 인간과 사물, 인간과 주변의 관계를 다루는 그의 작업을 통해 잠시나마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잊을 수 있는 틈을 발견한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직면하 인간과의 관계에서 숨 돌릴 그 ‘틈’ 말이다. 문득 사람하고도 잘 지낸다고 말하는 그의 장난어린 농담이 떠오른다.
곽세원 기자

송수영
1984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2011년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열린 〈○-△전〉을 시작으로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을 가졌다. 2015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다.

송수영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 살았던 나무 – 연필로 그린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 종이에 연필 21×27.9cm 2012

 

SPECIAL ARTIST 최 병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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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 <응시> 전시광경

조각가 최병민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다. 해부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인체조각은 정적(靜的)인 동시에 동적(動的)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지난 4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전통조각어법으로 몰두해 온 그의 작품은 그만의 독특한 조각적 형식과 함축적인 상징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넓고 광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인체에 축약해내는 침묵의 음유(吟遊)와 은유(隱喩)의 발성법과 표현법이다. 작가 최병민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최병민의 천문?인문?지문 그리고 한국 구상조각의 현실에 대한 한 소회

성완경 인하대 명예교수

어떻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게 됐는지 어안이 좀 벙벙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한 일인데 좀 늦게 일어난 것뿐이다. 좀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면서 2년 전 그의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그와 나눈 대화 중 ‘포기 각서’란 말에 잠시 생각이 머물렀다.(이 얘기 나중에 더 하기로 하겠다). 읽는 분들을 위해 소식부터 적는 게 순서일 것이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기관인 한국천문연구원이 2018년 금년에 개원 40주년을 맞아 천문과 인문, 우주와 인간의 행복한 융합을 기원하는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그 틀 속에서 소백산 연화봉 소백산천문대에 최병민의 작품 <구름을 훔친 사람>(1991)을 구입 설치하기로 했다는 기사다. 좋은 소식은 그 밖에도 더 있다. 파주의 임진각 근처 평화공원이 최병민의 작품 <평화 2>(1996)와 <해바라기>(1995)를 매입했다는 소식이다. 이 공원은 방문객들이 자연 속에서 에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테마파크형 산택로를 이미 조성해놓았으며 인간과 우주, 자연과 전통, 평화와 문화에 대한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여러 점을 앞으로 추가 매입하거나 제작 발주할 계획이라고 한다.
최병민은 진지한 인식론적 자각과 뚜렷한 개성과 장인적 공력의 인체조각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사색과 명상을 표현해온 작가다. “수천 년에 걸친 신화·토템·설화 등을 알고 상상하고 내가 추구하는 인간형의 문화를 형상화하는 게 바로 내 작업의 궤적”이라고 최병민은 말한 적 있다. 바로 그렇게 그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가 경력은 40년이 넘는다. 최병민이 1973년 대학 졸업 후 주로 발표의 장으로 삼았던 것은 화단의 경력 쌓기와는 거의 무관한, 독특한 미술공동체인 <혜화동 화실 동인전>과 서울대 미대 출신의 뚝심 좋은 재야 엘리트 예비사단 비슷한 <12월전>의 연례전이었다. 그는 조각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거의 15년 만인 1988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제3갤러리) 첫 개인전부터 고집스러울 만큼의 독특한 개성으로 일관된 특이한 음각부조 작품들로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구름, 해골, 거품, 이무기, 거인, 사신, 눈, 물고기, 새, 철조망 같은 모티프를 등장시켜 본질적으로 죽음과 존재, 인간의 유한함과 현실이 거역할 수 없는 힘들에 대한 명상을, 체관과 허무, 분노와 연민을 표현한 작업들이었다. 능숙한 기량의 그의 음각부조에서 빛과 어둠의 교차가 거꾸로 빚어내는 볼륨의 허상 — 존재의 허공에서 존재의 환영을 읽게 해주는– 은 존재와 비존재, 탄생과 스러짐이 교차점에 불안정하게 붙잡혀 있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또다른 메타포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기량과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시였다.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그 4년 후에 있었다. 이 2회전의 내용을 그의 중기 작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는 1회전 이후 4년 만에 열린 전시지만 그 후에도 오래 지속되는 그의 조각작업의 강한 형식적 · 내용적 특징들이 이 전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뼈와 근육만을 남기며 훑어 내려진, 밀도 높은 단순성으로 요약된 강인한 육체들, 마임(Mime)이나 상형문자처럼 거의 기호(記號)에 가깝도록 분명하게 읽히는 갖가지 포우즈나 동작들, 그리고 머리에 이고 있거나 어깨 팔, 등짝, 손끝 등에 걸려있는 구름, 초생달, 번개 따위의 우주적, 설화적 상징물들”이 그것이다(졸고, 위 전시서문. 이하 동일). 이것이 사람들이 비교적 뚜렷이 기억하는 그의 작업의 양식적 표지이다.
초기작의 기질적 색채는 그대로이나 보다 열리고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의 작업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 이 중기작들의 특징이다. 이제 우화는 하나의 신화로, 보편적 언어와 윤리와 세계관으로 통합된 하나의 문화로 변모해가는 느낌이다. 문화의 ‘원형(原型)’을 느끼게 하는, 원형을 찾아서 그 원형을 통해 얘기하려는 예술적 장치가 다양하게 구사된다.
한국 고대문화의 샤먼적, 제의적 색채나 동양문화권 특유의 약간 기괴하고 마술적인 신비한 에너지 – 이를테면 우리는 그것을 기(氣)철학이나 단학, 18계나 봉술, 염력 등 정신의 집중과 엄격한 육체적 단련에서 나오는 에너지 그리고 바람춤이나 구름춤 달춤 학춤처럼 문화와 자연에 독특하게 어우러진 지점에서 나오는 운률의 에너지 같은 것에 연관시켜 상상할 수 있다 -, 天地人의 조화에 기반을 둔 우주관과 그것의 반영으로서의 윤리, 신화적 설화적 분위기 등 대체로 이런 것들이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동양적 문화전통의 냄새나 운률을 풍기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의 상당 부분은 춤, 음악, 민간 전승놀이, 전설, 제의(祭儀) 등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전통문화의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놀이문화적인 요소의 활용은 이번 전시작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후기 작업은 그가 양평군에 작업장을 마련한 2000년 이후의 작업들이다. 앞의 시기에 비해 차분하고 정관적인 것이 특징이다. 전시회로 치면 2008년 제5회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작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사이 3회와 4회 개인전에 선보인 작업들은 2회전의 내용과 양식들을 마케트로 다양하게 변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개인전의 기획자 김진하는 이 시기 작업 속 인물상들이 지닌 고요함과 경건함과 부드러움에 특히 주목하며 이것을 앞선 시기 작업과의 차별성으로 인식한다. “하늘을 경배하듯, 땅을 위무하듯, 해를 마주하듯, 비와 바람을 부르듯, 신을 맞이하듯, 운명을 바라보듯 경건하게 서 있는 사람. 머리와 어깨 팔에는 구름, 해, 달, 번개 등을 이고 두 발은 가지런히 대지를 딛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도 강인한 육체, 절제되고 고요한 동작, 시대와 공간을 구별하는 의복이나 배경이 없는 나신의 직립. 거기에 부드러운 바람이 일며 스치는 듯, 그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김진하, 투명한 인간, 그 아름다움에의 헌사 – 최병민의 근작 ‘응시’에 대하여, 2008)
특히 눈여겨 볼것은 인체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이다. 농경적 샤먼, 노동, 놀이, 춤, 제의 등의 소재들은 여전하지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다. 뼈만 남았던 인체는 부드러운 살갗과 강건한 근육으로 덮이고, 움직임과 기울임이 컸던 다채로운 동작의 변화는 직립의 수직으로 고요하게 멈추어 섰다.
팔의 동작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하체에 의해 안정적이다. 여전히 신화적인, 그러면서도 경건한 느낌이 극대화된다. 정지(停止). 시간은 흐르되 동작은 멈추어진 상태. 그 멈춤은 스스로의 의지 혹은 의례 때문인 듯 다분히 의도적인 자세다. 사람이 이런 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의전(儀典)·의식(儀式)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작이라 하겠다. 무거운 분위기의 어떤 중압감, 수도승 같은 비의(秘儀)적 느낌을 불러일으킨다(위 같은 글).
작가들의 경력을 보면 대개 작품 소장처가 몇 개 나열되어 있다. 최병민의 경우에는 그것이 없다. 단지 금호미술관과 모란미술관 이렇게 두 개 미술관이 있을 뿐이다. 두 미술관은 그의 초대전을 열어준 미술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초대전이니까 의례적인 인사로 한 점 사줬거나 초대 비용의 정산 차원에서 작품 한 점이 미술관으로 건너간 것일 뿐 순수하고 진정한 구매라고 보긴 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는 미술관이나 기업의 구매도 화랑이나 일반 고객 혹은 수집가의 구매도, 비껴간 예술가였다.
앞서 말했듯이 최병민은 1999년 고교 미술교사직 퇴직 후 양평군 서종면에 작업장을 짓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암중 모색해온 신작 40~50점을 모두어 2008년 개인전에 선보였다. 나무화랑 기획에 모란갤러리(화봉갤러리/종로구 관훈동) 초대로 연 전시였다. 1993년과 1995년에 나무화랑 초대로 연 두 차례(제3회와 4회) 개인전에 이어 13년 만에 열린 다섯 번째 개인전이고 ‘응시’라는 타이틀의 주제전이었다.
앞서 1993년과 1994년에 이어 이번에도 이 전시 기획을 맡은 나무화랑의 김진하 대표는 “최병민의 조각은 묵언(默言)을 수행하는 순수한 상태의 인간형 또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직관적인 깨우침을 지향하는 수행자나 예지자로 읽힌다”며 “현자의 침묵이 절제된 조각을 통해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평한 바 있다. 그의 작업의 핵심적 맥을 짚은 말이다. 이 전시는 초대자 쪽에서 작품 한 점을 구매한 것으로 끝났다. 그에 앞선 3회전(1993)과 4회전(1995)의 경우도 작품 판매는 전혀 없이 끝났었다.
나무화랑은 다시 2011년과 2012년에 제6회와 7회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2011년 6회전은 전시장 전경을 찍은 도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깔끔하게 절제된 디스플레이가 최병민 작업의 정신적이고 귀족적인 아우라를 그야말로 금강석처럼 투명하고 단단하게 뿜어내는 전시였다. 별로 크지 않지만 아주 알맞은 크기의 전시공간 전체가 한 작품처럼 통합된 전시였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작은 모두 마케트 크기였다. 제7회전은 ‘인간-우주’라는 부제가 붙었다. 관훈갤러리와 나무화랑이 공동으로 초대한 전시다. 7회전, 8회전 역시 판매 성과는 전무했다. 다만 한 평론가가 주물 작업비를 대어 한 작품에서 네 개의 멀티플을 떠내어 돈 댄 사람, 작가, 두 갤러리 주인이 각각 한 점씩 나누어 가져가는 것으로 끝난 것이 유일한 성과라면 성과였다.
2013년 서울 평창동 소재 김종영미술관에서 김영원 홍순모 김주호 최병민 배형경 등 삶의 문제를 탐구해온 5인의 조각전이 열렸다. <인간, 그리고 실존>이란 타이틀의 주제전이었다. 최병민은 이 전시에 <하늘 풍경> 과 <벽> 연작을 선보였다.
김종영미술관 최종태 관장은 위 전시서문 말미에 이 전시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 사람들을 보라. 예술을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 예술행위란 무엇을 추구하는 일인가. 예술의 목표는 어데인가? 외진 빈터에서 끈질기게도 무슨 신념으로 이들은 왜 이렇게 인간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 의문, 그 알 수 없는 함정! 그런 길고 긴 끝없는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최병민이 판화가 이상국이 타계했을 때 그 빈소에서 최종태 관장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작가로 살기가 너무 힘들고 작업장에 쌓여만 가는 작품들을 보면 근심만 깊어져서 한 말일 것이다. 최병민이 제시한 방도가 폐탄광촌의 지하 공간이나 공장 공간을 손봐서 작품 저장 공간(매장 공간? 저장 후 봉인?)을 만들고 안 팔린 작품들이 쌓여 있는, 죽음을 앞둔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거해서, 작가는 작품의 ‘포기 각서’를 쓰고 국가는 그 작품들을 일단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말하면 타임캡슐 묻듯이 하자는 얘기와 유사해 보이는데) 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최 관장이 나라에 건의해주십사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가 생존한 동시대에 관중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냥 버리는 것도, 사후에 뿔뿔히 흩어지는 것도 견디기 힘든 심정이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묻어버리라’는 얘기다. 얼마나 부조리하고 웃픈(우습지만 슬픈) 얘기인가.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이며, 기질적 개성과 가치론적 세계관을 함축한 작품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그리고 전통과 자연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탐구를 보여주는 작품들, 민중적인 동시에 귀족적인 깊은 울림을 간직한 정통적인, 정공법적 자세의 작품들이 점점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생물종의 멸종 위기와 유사할 정도의 미술생태계의 위중한 현실이다. 이 문제를 미술의 사회적 인식 문제 차원에서 그리고 미술 수용의 제도적 틀의 차원에서 잘 살펴보고 나아가 복지와 사회안전망의 차원에서도 대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기술한 2018년 뉴스 이야기는 한 작가의 작품이 어디에 어떻게 놓였으면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온 나의 행복한 상상이었다. 2회전 서문에서 나는 전시작 대부분이 나중에 확대해서 완성하는 것을 전제로 한 소형 작품인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시작들이 이 같은 ‘완성’을 위한 물적 공간적 조건들을 만날 것인지는 이번 전시 이후의 작가의 행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지금 최병민의 양평 작업장을 가 보라. 그리고 거기 쌓여 있는 마케트가 대부분인 100여 점의 작품을 보라. 거기 한 조각가의 비극이 만개해 있다. 이 푸른 오월에. ●

최 병 민 Choe Byoungmin
1949년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8년 제3미술관에서의 첫개인전을 시작으로 금호미술관(1992), 나무화랑(1993, 1995, 2011, 2012), 모란미술관(2008), 관훈갤러리(2012)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경기도 서종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최병민

2011년 나무화랑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 전시광경

왼쪽 페이지 <山> 브론즈 34×19×17cm 2011(maque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