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The Art of ‘Dansaekhwa’
단색화(單色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근래 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전>(8.28~9.19)와 우양미술관의 <고요한 울림전>(8.12~10.12) 등 단색화와 관련한 전시가 잇달아 열리면서 이를 두고 어떤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이곳저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색화’는 극대화된 모더니즘의 표상으로 여겨지면서 서구의 미니멀 회화나 일본의 모노하 등과 비교된다. 그러나 단색화는 동시대의 사회적 고민과 유리된 유미주의적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분명 시점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차이에 대해,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한 논의를 거쳤는가? 여기 두 필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단색화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어본다.
단색화의 사회적 위치 또는 가치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 미술비평
이 글은 1970~80년대 한국 단색화(또는 모노크롬 회화)의 사회적 위치, 또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재고해보려는 시도다. “비판적으로”라고 했지만 이 글은 당시의 단색화를 사회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간단히 내치는 접근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은 단색화를 하나의 사례로 삼아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예술의 위치를 한국의 현실에서 반성적으로 숙고하는 작업이기를 희망한다.
주지하다시피 1970~80년대 단색화에 관한 사회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현실과의 괴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다”(현실과 발언 창립취지문)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단색화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구상과는 별개의 것임”(이일)을 분명히 하면서 “표상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하나의 독립된 실재”(이일)를 제기하려 했다. 또는 “세계를 비표상적으로 이해하는”(김복영) 작업으로 나아갔다. 여기에는 ‘현실’ 또는 ‘실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자리한다. 단색화를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에게 현실은 1970년대 또는 1980년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뜻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화면에서 적극적으로 일루전을 제거하고 물성을 초극하려는 의지” (오광수)로 표상되는 단색화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괴리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을 그와는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가령 이일은 현실이 “단지 객관적 여건으로서 주어진 것으로만 그치지 않으며 필경은 주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할 하나의 세계”라고 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 현실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김열규를 인용하여 “관념, 개념, 또는 지식에 의해 가로막혀있지 않은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을 말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 자신에 의해 현실이라는 것에 뒤집어씌어진 가면을 벗긴 사물과의 만남”(이일)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70년대의 단색화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든, 그에 반대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든– “거대 주체가 부여한 허상 내지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김복영)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바, 자신이 지닌 신념, 이데올로기를 정의로운 것으로 단정하고 그러한 신념에 따라 악으로 간주된 것을 공격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념,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색화(와 담색화 담론)가 비표상적 관점에서 제기한 표상(재현)에 대한 근본적 반성은 확실히 사회적으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이렇게 “사물을 표상으로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면서 “사물로 복귀하는”(김복영) 접근은 또한 아도르노가 지적한 대로 “아무런 위험도 없게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리 주어진 것을 자신으로부터 배제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지극히 빈곤한 것, 비명, 어쩔 도리 없는 무기력한 제스처”가 나타난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단색화의 역사적 전개, 특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단색화 작업의 양상을 볼 때 설득력이 있다.
현실과의 괴리? 가장 현실적인 것?
하지만 1970년대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그저 빈곤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김복영을 인용하면 그들이 자발적인 자기해체 또는 자기소멸을 통해 기도한 물성과의 만남은 “물성의 범자연적 결정체로서 모노크롬 회화를 성취하고 그로 하여금 자연의 권화를 갖게 함으로써 사회현실로부터의 억압에 맞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예술이 억압적 사회현실에 맞서는 나름의 방식이다. 이 경우 “주체의 소멸 결과로서 얻게 된 범자연적 권위”(김복영)란 지배이데올로기에 굴종하지 않기 위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거처로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거처가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되려면 거기에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타의식이 전제되어야 하고 작품 자체의 긴장은 외부세계의 긴장에 대한 관계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1970~80년대 현실에서 많은 경우 단색화 제작과 담론은 지배이데올로기 내지는 사회와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기보다는 당대 한국 사회가 요구한 ‘전통’, ‘민족적 정체성’ 담론과 한데 얽혀 진행되었다. 이런 문맥에서 그것을 외견상 유사해 보이는 일본의 모노하나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구별하려는 작업이 진행됐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의 단색화에 고유한 특성으로 상정된 비물질성, 정신성, 손맛(드로잉) 같은 자질들은 곧장 한국성, 동양성 담론과 연결되었다. 그렇게 일체의 의미가 소거된 텅빈 기표로서 단색화는 어떤 특정한 욕망들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되었다. 물론 그 욕망들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다. 가령 김영나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모노크롬 미술은 이제까지의 서양미술 추종일변도에서 좀 더 동양적인 과묵한 색채와 뉘앙스, 극소의 표현을 통해 전통문화에서 자연관, 정신성, 수묵회화, 자기 수양, 문인화의 전통을 계속했고 이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되었다. 또한 미네무라 도시아키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무엇을 한국의 아이덴티티로 삼을 수 있으며 또 그런 회화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란 물음에 답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과”다. 1970년대의 작가들에 김환기를 더하여 “김환기, 이우환의 청색과 백색 여백, 그리고 이동엽의 백색공간, 그것은 학의 날갯짓과 선비의 욕망 자체이다”(윤익영)는 식의 서술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일체의 허상 내지는 가상에 대한 거부에서 사물로 복귀한다는 단색화의 한 귀결이 한국성, 또는 동양성 담론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 결합을 통해 단색화는 많은 것을 얻었다. 특히 그 결합을 통해 단색화는 사회적인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 공개적으로 상찬될 만한 것이 되었다. 물론 그 결합은 애초의 단색화 작업이 갖는 사회비판적 계기를 상당 부분 거세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구의 물질문명에 반하는 동양적, 또는 한국적 정신성의 회복”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유의미한 비판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됨으로써 단색화(그리고 단색화를 제작하는 행위)가 어떤 유토피아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앞서 김영나의 발언 곧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단색화는 단절이 극복된 어떤 유토피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시 아도르노를 인용하면 “유토피아를 가상이나 위안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예술이 유토피아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또한 “예술은 화해의 가상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화해되지 않은 것 가운데에서도 화해를 견지한다”(아도르노)고 했다. 지금 “우리 고유의 자연관과 사유에 입각한 정신의 세계를 회화 평면을 매개로 육화하는 작업”(윤진섭)으로 설명되는 단색화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1970년대의 단색화 작업이 “물상화되고 소외된 닫혀진 자기완결 세계”에 대한 비판(이우환)에 기초해 장소의 열림을 지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자기의 대상성을 투명하게 하는 존재”(이우환)의 등장은 그것이 처음 등장한 시점에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짓된 것으로 부정하는 비판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지워버린 깨끗한 텅 빈 화면은 곧 갖가지 욕망(그 가운데는 화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이 포함될 것이다)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되었고 욕망들은 그 깨끗한 것을 오염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1970~80년대의 단색화는 사회적으로 역설적이다. 어쩌면 단색화의 사회적 의의란 그 역설을 우리 앞에 생각할 거리로 던져주었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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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모노톤아트(Korean Monotone Art)를 다시 말하며
김미경 한국예술연구소KARI 대표, 강남대 교수
최근 국내외에서 ‘단색화(Dansaekhwa)’라는 이름으로 한국 ‘모노톤아트(Monotone Art)’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이제 정말 그것은 국제화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미술시장만 뜨거워질 뿐 정작 그것을 촉발해 온 연구 담론은 뒷방 신세가 된 것 같다. 한국현대미술을 사랑하고 연구해 온 연구자로서는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논리 앞에서 왠지 허탈감을 느끼며 담론 없는 국제화 현상은 곧 사그러들 수밖에 없음을 우려하게 된다. 필자는 20여 년 전 소논문 <한국의 실험미술-AG를 중심으로>에서부터 서구 미술에서 고유명사화되지 않은 음악적 용어인 ‘모노톤’을 사용해왔고, 박사논문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에서나 지난 4월 뉴욕근대미술관(MoMA)에서 한 전문가 특강에서 큰 공감을 얻었던 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AG를 중심으로> 1998,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 2000,
《 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 2014) ‘모노톤아트’를 번역하면 ‘단색조(單色調) 예술’이다. 이 ‘조(調)’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지며 미술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도 모노톤과 모노크롬(Monochrome)은 매우 다른 맥락을 이룬다.
1975년 5월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韓國 五人の作家五つのヒンセク白展)>은 근본적으로 임진왜란의 역사가 말해주는 일본의 조선 침략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백자 사랑을 상기시키는 ‘일본인의 시각’이 깔린 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마모토 다카시라는 일본의 화랑주가 시도했던 이 최초의 공식적인 한국 모노톤아트 전시에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가 잠재되어 있음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김미경, <素-素藝로 다시 읽는 한국 단색조 회화> 2002,《 한국현대미술자료 약사(1960-1979)-정치 경제 사회와 함께 보는 한국현대미술》 2003) 물론 식민 지배가 끝난 이후 30년 만에 부활한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야마모토는 광복 전 함경도 청진에서 일본군으로 주둔했으며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이지만 골동상으로서 조선의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우환, 김미경 2002년 인터뷰) 문제는 모노톤아트의 기원이 되어버린 일본 전시를 역사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흰 창호지를 중첩시켜 붙여나간 일련의 작품을 1971년 제2회 AG전에 출품한 서승원, 흰 바탕에 유리컵을 그려 1972년 <앙데팡당전>에서 평면 1등을 차지한 이동엽, 같은 전시에서 흰 바탕에 흰 베개 이미지를 그린 허황, 1973년 일본 무라마쓰(村松) 화랑에서 <묘법>을 전시한 박서보, 1962년부터 흰 창호지 작업을 해 온 권영우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에 포함된 작가들이다. 1970년대 일본인에게 조선 백자를 다시금 상기시킨 ‘흰색’이라는 공통점 외에 이들은 전시 이전이나 이후에 함께 만난 일도, 모노톤아트와 관련된 미학적 담론을 주고받은 일도 없었다. 이우환의 소개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일본 비평가와 일본 화랑주가 기획한 모노톤아트의 공식적인 첫 일본 전시는 그렇게 식민주의 ‘타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는 예전에 모노톤아트가 ‘모노크롬(Monochrome)’이라 불리는 현상을 우려했는데 최근에는 ‘단색화(Dansaekhwa)’로 불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모노크롬’이라는 용어를 쓰는 순간 모든 논의가 서구 담론의 하부구조가 되기 때문이며, 아직 국제화 초기 단계라서 서구인들은 아직 그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단색화’는 문자 그대로 ‘단색(單色)’ 즉 ‘한 가지 색깔’이라는 모노크롬의 개념도 벗어날 수 없고 ‘그림 화(畵)’로서 ‘그림’이라는 개념적 한계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서 제기된 ‘모노크롬(Monochrome)이 아니라 단색화(Dansaekhwa)’라는 외부 기획자의 주장은 그 용어들을 나란히 병기한 데서 자기 모순을 입증했다. 용어는 그것을 말하는 화자의 담론적 태도와 개념의 에센스가 집약돼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노톤아트’가 결코 ‘한 가지 색깔로 된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의 미술인들은 거의 모두 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색깔로 된 그림’이라는 뜻의 ‘단색화’를 쉽게 사용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러 가지 색조(tone)가 있고,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스트 페인팅(Modernist painting)’이나 ‘아메리칸 타입 페인팅(American type painting)’과 같은 모더니즘적인 ‘그림(회화)’ 개념의 평면성(flatness)을 훨씬 뛰어넘는, 시공간의 물질과 장소성의 프로세스 문제가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진지하게 자각해야 한다. 윤형근이나 박서보, 정창섭이나 정상화의 작품을 일부 모더니즘 회화 개념으로 다룰 수는 있겠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심지어 김장섭이나 김용익의 평면 오브제, 심문섭의 평면적 작업들을 어떻게 ‘단색화’라는 말로 다룰 수 있겠는가?
일찍이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의 도록에 서문을 썼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백색’도 아니고 ‘모노크롬’도 아닌 ‘흰 색’의 일본식 표기이자 특수명사처럼 사용된 ‘흰새쿠(ヒンセ)’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까닭을 밝혔다. ‘중간색을 사용하면서 화면이 지극히 델리케이트하게 마무돼 있는 회화들’이 서구의 백색 모노크롬(단색)과 달리, 색채를 없앤 흰 화면도 아니고 형태를 배제한 흰 공간도 아닌 ‘우주적 비전의 틀’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반면 또 하나의 서문을 썼던 이일은 안타깝게도 “백(白) 또는 백색(白色)이 한국 민족과 깊은 인연을 지녀온 빛깔이며, 빛깔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이라고 하면서도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이들의 화면 그것은 혹시 모노크롬의 것으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렸다. 이후 한국현대미술계의 작가와 언론, 그리고 비평은 이 ‘모노크롬’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상용화는 비운을 맞았다. 게다가 일본 ‘모노하(ものは)’ 용어의 뜻도 모른 채 이우환의 회화와 모노하 작업들을 혼동하면서, 모노크롬과 혼용한 ‘모노하’(?)라는 국적 불명의 말도 비평계에서 나왔다. 쉬운 길이 언제나 바른 길은 아니다.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 유신시대는 한편으로 언더그라운드 실험미술을, 다른 한편으로 모노톤아트를 잉태했다. 이 두 가지 경향은 한국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담론화할 수 있는 양대 산맥으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에서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모노톤아트는 양면성을 띠는데 하나는 현실 초월적인 노장 사상의 무위적 태도가 소위 ‘한국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표방한 군부정치 국가관에 공교롭게도 부합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거기에 최병소처럼 군부정치에 침묵으로 일관되게 저항하는 태도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김용익처럼 모노톤아트의 정치 권력화에 담론적으로 저항한 경우도 주목된다. 국가가 이들을 ‘한국적’이라 간주했으므로 언더그라운드 실험미술과는 달리 탄압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모노톤아트의 내부에는 이렇듯 국가권력이나 미술권력에 저항하는 작가와 국가관에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작가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을 넘어서서 다면적인 모노톤아트의 정치 사회적 측면을 보여준다.
다양한 방법론들의 강점
모노톤아트에는 작가마다 독특한 방법론이 있었고, <에꼴 드 서울전>이나 <서울현대미술제>와 같은 단체전을 통해 모노톤아트가 집단 정치화했을 때도 개성적인 방법론들은 건재했다. 그 점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양상 그리고 모노크롬과 모노하 사이에서, 이우환과의 우정관계 속에서 간과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행위와 물성, 프로세스와 반복, 평면성과 공간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작가마다 독특하게 갖고 있는 방법론 중 내가 최근 주목하는 것은 하종현과 최병소 작가의 방법론이다. 단지 조형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적 의식을 동반하며 조망하는 것이다.(김미경, <최병소論-소멸하며 태어나다> 2006, <지우기의 미학> 2013, <하종현: 발언과 침묵의 예술> 2008, <기(氣)・통 (通)・시(時)・공(空)-하종현론(河鍾賢論)> 2012) 나로서는 박서보와 심문섭의 초기 작업들과 김용익의 작업 등에 대한 연구 또한 진행 중이다. 쉬포르 쉬르파스(Suports/Surfaces)가 유물론적 해체 방식으로 캔버스와 틀을 대하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한 방법론이 있었다는 점이나 모노하 작가들 간에는 더욱 복잡한 ‘모노’에 대한 해석적 방법론이 있었다는 점 등은 그 미술 경향들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한 요체였다. 따라서 모노톤아트의 커다란 담론적 경계 안팎으로 이들 방법론이 더욱 심화 연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는 지난 9월 1일 국제갤러리 심포지엄에서 이우환 작가에게 ‘모노톤아트와 이우환의 담론적 관계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답변은 분명할 수 없었다. 모노하 맥락에 있든 회화와 3차원 공간의 관계에 있든 이우환과 모노톤아트 작가들의 인간적인 우정 관계 이상의 미학적 공감대를 작업과 개념에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모노톤아트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하면서도 그 미학적 토대에서 자신의 작품을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도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에서 다시 한 번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모노톤아트가 전시되는 현상은 미술시장의 경제논리를 보여준다.
모노톤아트는 이우환을 매개로 일본에서 기원적인 첫 전시가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간단치 않은 갈등관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우정 전시는 이어졌다. 이우환과 함께 세계 미술시장으로 나아가는 모노톤아트에서 우리는 이제 ‘인간적인 친구 관계’와 ‘미학 담론’을 구별하여 다룰 수 있는 지성 정도는 갖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