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The Art of ‘Dansaekhwa’

단색화(單色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근래 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전>(8.28~9.19)와 우양미술관의 <고요한 울림전>(8.12~10.12) 등 단색화와 관련한 전시가 잇달아 열리면서 이를 두고 어떤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이곳저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색화’는 극대화된 모더니즘의 표상으로 여겨지면서 서구의 미니멀 회화나 일본의 모노하 등과 비교된다. 그러나 단색화는 동시대의 사회적 고민과 유리된 유미주의적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분명 시점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차이에 대해,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한 논의를 거쳤는가? 여기 두 필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단색화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어본다.

단색화의 사회적 위치 또는 가치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 미술비평

이 글은 1970~80년대 한국 단색화(또는 모노크롬 회화)의 사회적 위치, 또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재고해보려는 시도다. “비판적으로”라고 했지만 이 글은 당시의 단색화를 사회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간단히 내치는 접근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은 단색화를 하나의 사례로 삼아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예술의 위치를 한국의 현실에서 반성적으로 숙고하는 작업이기를 희망한다.
주지하다시피 1970~80년대 단색화에 관한 사회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현실과의 괴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다”(현실과 발언 창립취지문)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단색화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구상과는 별개의 것임”(이일)을 분명히 하면서 “표상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하나의 독립된 실재”(이일)를 제기하려 했다. 또는 “세계를 비표상적으로 이해하는”(김복영) 작업으로 나아갔다. 여기에는 ‘현실’ 또는 ‘실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자리한다. 단색화를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에게 현실은 1970년대 또는 1980년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뜻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화면에서 적극적으로 일루전을 제거하고 물성을 초극하려는 의지”     (오광수)로 표상되는 단색화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괴리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을 그와는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가령 이일은 현실이 “단지 객관적 여건으로서 주어진 것으로만 그치지 않으며 필경은 주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할 하나의 세계”라고 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 현실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김열규를 인용하여 “관념, 개념, 또는 지식에 의해 가로막혀있지 않은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을 말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 자신에 의해 현실이라는 것에 뒤집어씌어진 가면을 벗긴 사물과의 만남”(이일)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70년대의 단색화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든, 그에 반대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든–      “거대 주체가 부여한 허상 내지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김복영)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바, 자신이 지닌 신념, 이데올로기를 정의로운 것으로 단정하고 그러한 신념에 따라 악으로 간주된 것을 공격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념,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색화(와 담색화 담론)가 비표상적 관점에서 제기한 표상(재현)에 대한 근본적 반성은 확실히 사회적으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이렇게 “사물을 표상으로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면서 “사물로 복귀하는”(김복영) 접근은 또한 아도르노가 지적한 대로 “아무런 위험도 없게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리 주어진 것을 자신으로부터 배제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지극히 빈곤한 것, 비명, 어쩔 도리 없는 무기력한 제스처”가 나타난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단색화의 역사적 전개, 특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단색화 작업의 양상을 볼 때 설득력이 있다.

김기린 (사진 맨 왼쪽, 1977) (가운데 설치, 1980년대)

김기린 <Visible, Invisible>(사진 맨 왼쪽, 1977) <Inside, Outside>(가운데 설치, 1980년대)

현실과의 괴리? 가장 현실적인 것?
하지만 1970년대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그저 빈곤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김복영을 인용하면 그들이 자발적인 자기해체 또는 자기소멸을 통해 기도한 물성과의 만남은 “물성의 범자연적 결정체로서 모노크롬 회화를 성취하고 그로 하여금 자연의 권화를 갖게 함으로써 사회현실로부터의 억압에 맞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예술이 억압적 사회현실에 맞서는 나름의 방식이다. 이 경우 “주체의 소멸 결과로서 얻게 된 범자연적 권위”(김복영)란 지배이데올로기에 굴종하지 않기 위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거처로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거처가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되려면 거기에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타의식이 전제되어야 하고 작품 자체의 긴장은 외부세계의 긴장에 대한 관계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1970~80년대 현실에서 많은 경우 단색화 제작과 담론은 지배이데올로기 내지는 사회와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기보다는 당대 한국 사회가 요구한 ‘전통’, ‘민족적 정체성’ 담론과 한데 얽혀 진행되었다. 이런 문맥에서 그것을 외견상 유사해 보이는 일본의 모노하나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구별하려는 작업이 진행됐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의 단색화에 고유한 특성으로 상정된 비물질성, 정신성, 손맛(드로잉) 같은 자질들은 곧장 한국성, 동양성 담론과 연결되었다. 그렇게 일체의 의미가 소거된 텅빈 기표로서 단색화는 어떤 특정한 욕망들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되었다. 물론 그 욕망들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다. 가령 김영나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모노크롬 미술은 이제까지의 서양미술 추종일변도에서 좀 더 동양적인 과묵한 색채와 뉘앙스, 극소의 표현을 통해 전통문화에서 자연관, 정신성, 수묵회화, 자기 수양, 문인화의 전통을 계속했고 이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되었다. 또한 미네무라 도시아키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무엇을 한국의 아이덴티티로 삼을 수 있으며 또 그런 회화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란 물음에 답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과”다. 1970년대의 작가들에 김환기를 더하여 “김환기, 이우환의 청색과 백색 여백, 그리고 이동엽의 백색공간, 그것은 학의 날갯짓과 선비의 욕망 자체이다”(윤익영)는 식의 서술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일체의 허상 내지는 가상에 대한 거부에서 사물로 복귀한다는 단색화의 한 귀결이 한국성, 또는 동양성 담론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 결합을 통해 단색화는 많은 것을 얻었다. 특히 그 결합을 통해 단색화는 사회적인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 공개적으로 상찬될 만한 것이 되었다. 물론 그 결합은 애초의 단색화 작업이 갖는 사회비판적 계기를 상당 부분 거세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구의 물질문명에 반하는 동양적, 또는 한국적 정신성의 회복”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유의미한 비판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됨으로써 단색화(그리고 단색화를 제작하는 행위)가 어떤 유토피아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앞서 김영나의 발언 곧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단색화는 단절이 극복된 어떤 유토피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시 아도르노를 인용하면 “유토피아를 가상이나 위안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예술이 유토피아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또한 “예술은 화해의 가상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화해되지 않은 것 가운데에서도 화해를 견지한다”(아도르노)고 했다. 지금 “우리 고유의 자연관과 사유에 입각한 정신의 세계를 회화 평면을 매개로 육화하는 작업”(윤진섭)으로 설명되는 단색화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1970년대의 단색화 작업이 “물상화되고 소외된 닫혀진 자기완결 세계”에 대한 비판(이우환)에 기초해 장소의 열림을 지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자기의 대상성을 투명하게 하는 존재”(이우환)의 등장은 그것이 처음 등장한 시점에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짓된 것으로 부정하는 비판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지워버린 깨끗한 텅 빈 화면은 곧 갖가지 욕망(그 가운데는 화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이 포함될 것이다)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되었고 욕망들은 그 깨끗한 것을 오염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1970~80년대의 단색화는 사회적으로 역설적이다. 어쩌면 단색화의 사회적 의의란 그 역설을 우리 앞에 생각할 거리로 던져주었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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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모노톤아트(Korean Monotone Art)를 다시 말하며

김미경  한국예술연구소KARI 대표, 강남대 교수

최근 국내외에서 ‘단색화(Dansaekhwa)’라는 이름으로 한국 ‘모노톤아트(Monotone Art)’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이제 정말 그것은 국제화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미술시장만 뜨거워질 뿐 정작 그것을 촉발해 온 연구 담론은 뒷방 신세가 된 것 같다. 한국현대미술을 사랑하고 연구해 온 연구자로서는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논리 앞에서 왠지 허탈감을 느끼며 담론 없는 국제화 현상은 곧 사그러들 수밖에 없음을 우려하게 된다. 필자는 20여 년 전 소논문 <한국의 실험미술-AG를 중심으로>에서부터 서구 미술에서 고유명사화되지 않은 음악적 용어인 ‘모노톤’을 사용해왔고, 박사논문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에서나 지난 4월 뉴욕근대미술관(MoMA)에서 한 전문가 특강에서 큰 공감을 얻었던 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AG를 중심으로> 1998,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 2000,
《   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  2014) ‘모노톤아트’를 번역하면 ‘단색조(單色調) 예술’이다. 이 ‘조(調)’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지며 미술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도 모노톤과 모노크롬(Monochrome)은 매우 다른 맥락을 이룬다.
1975년 5월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韓國 五人の作家五つのヒンセク白展)>은 근본적으로 임진왜란의 역사가 말해주는 일본의 조선 침략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백자 사랑을 상기시키는 ‘일본인의 시각’이 깔린 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마모토 다카시라는 일본의 화랑주가 시도했던 이 최초의 공식적인 한국 모노톤아트 전시에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가 잠재되어 있음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김미경, <素-素藝로 다시 읽는 한국 단색조 회화> 2002,《  한국현대미술자료 약사(1960-1979)-정치 경제 사회와 함께 보는 한국현대미술》 2003) 물론 식민 지배가 끝난 이후 30년 만에 부활한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야마모토는 광복 전 함경도 청진에서 일본군으로 주둔했으며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이지만 골동상으로서 조선의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우환, 김미경 2002년 인터뷰) 문제는 모노톤아트의 기원이 되어버린 일본 전시를 역사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흰 창호지를 중첩시켜 붙여나간 일련의 작품을 1971년 제2회 AG전에 출품한 서승원, 흰 바탕에 유리컵을 그려 1972년 <앙데팡당전>에서 평면 1등을 차지한 이동엽, 같은 전시에서 흰 바탕에 흰 베개 이미지를 그린 허황, 1973년 일본 무라마쓰(村松) 화랑에서     <묘법>을 전시한 박서보, 1962년부터 흰 창호지 작업을 해 온 권영우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에 포함된 작가들이다. 1970년대 일본인에게 조선 백자를 다시금 상기시킨 ‘흰색’이라는 공통점 외에 이들은 전시 이전이나 이후에 함께 만난 일도, 모노톤아트와 관련된 미학적 담론을 주고받은 일도 없었다. 이우환의 소개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일본 비평가와 일본 화랑주가 기획한 모노톤아트의 공식적인 첫 일본 전시는 그렇게 식민주의 ‘타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는 예전에 모노톤아트가 ‘모노크롬(Monochrome)’이라 불리는 현상을 우려했는데 최근에는 ‘단색화(Dansaekhwa)’로 불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모노크롬’이라는 용어를 쓰는  순간 모든 논의가 서구 담론의 하부구조가 되기 때문이며, 아직 국제화 초기 단계라서 서구인들은 아직 그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단색화’는 문자 그대로 ‘단색(單色)’ 즉 ‘한 가지 색깔’이라는 모노크롬의 개념도 벗어날 수 없고 ‘그림 화(畵)’로서 ‘그림’이라는 개념적 한계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서 제기된 ‘모노크롬(Monochrome)이 아니라 단색화(Dansaekhwa)’라는 외부 기획자의 주장은 그 용어들을 나란히 병기한 데서 자기 모순을 입증했다. 용어는 그것을 말하는 화자의 담론적 태도와 개념의 에센스가 집약돼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노톤아트’가 결코 ‘한 가지 색깔로 된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의 미술인들은 거의 모두 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색깔로 된 그림’이라는 뜻의 ‘단색화’를 쉽게  사용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러 가지 색조(tone)가 있고,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스트 페인팅(Modernist painting)’이나 ‘아메리칸 타입 페인팅(American type painting)’과 같은 모더니즘적인 ‘그림(회화)’ 개념의 평면성(flatness)을 훨씬 뛰어넘는, 시공간의 물질과 장소성의 프로세스 문제가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진지하게 자각해야 한다. 윤형근이나 박서보, 정창섭이나 정상화의 작품을 일부 모더니즘 회화 개념으로 다룰 수는 있겠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심지어 김장섭이나 김용익의 평면 오브제, 심문섭의 평면적 작업들을 어떻게 ‘단색화’라는 말로 다룰 수 있겠는가?
일찍이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의 도록에 서문을 썼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백색’도 아니고 ‘모노크롬’도 아닌 ‘흰 색’의 일본식 표기이자 특수명사처럼 사용된 ‘흰새쿠(ヒンセ)’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까닭을 밝혔다. ‘중간색을 사용하면서 화면이 지극히 델리케이트하게 마무돼 있는 회화들’이 서구의 백색 모노크롬(단색)과 달리, 색채를 없앤 흰 화면도 아니고 형태를 배제한 흰 공간도 아닌 ‘우주적 비전의 틀’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반면 또 하나의 서문을 썼던 이일은 안타깝게도 “백(白) 또는 백색(白色)이 한국 민족과 깊은 인연을 지녀온 빛깔이며, 빛깔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이라고 하면서도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이들의 화면 그것은 혹시 모노크롬의 것으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렸다. 이후 한국현대미술계의 작가와 언론, 그리고 비평은 이 ‘모노크롬’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상용화는 비운을 맞았다. 게다가 일본 ‘모노하(ものは)’ 용어의 뜻도 모른 채 이우환의 회화와 모노하 작업들을 혼동하면서, 모노크롬과 혼용한 ‘모노하’(?)라는 국적 불명의 말도 비평계에서 나왔다. 쉬운 길이 언제나 바른 길은 아니다.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 유신시대는 한편으로 언더그라운드 실험미술을, 다른 한편으로 모노톤아트를 잉태했다. 이 두 가지 경향은 한국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담론화할 수 있는 양대 산맥으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에서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모노톤아트는 양면성을 띠는데 하나는 현실 초월적인 노장 사상의 무위적 태도가 소위 ‘한국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표방한 군부정치 국가관에 공교롭게도 부합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거기에 최병소처럼 군부정치에 침묵으로 일관되게 저항하는 태도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김용익처럼 모노톤아트의 정치 권력화에 담론적으로 저항한 경우도 주목된다. 국가가 이들을 ‘한국적’이라 간주했으므로 언더그라운드 실험미술과는 달리 탄압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모노톤아트의 내부에는 이렇듯 국가권력이나 미술권력에 저항하는 작가와 국가관에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작가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을 넘어서서 다면적인 모노톤아트의 정치 사회적 측면을 보여준다.

단색화(우양) (9)

정창섭 <묵고(默考) No.95523>(사진 오른쪽) <묵고(默考) No.95524> 120×60cm(각) 1995

다양한 방법론들의 강점
모노톤아트에는 작가마다 독특한 방법론이 있었고, <에꼴 드 서울전>이나 <서울현대미술제>와 같은 단체전을 통해 모노톤아트가 집단 정치화했을 때도 개성적인 방법론들은  건재했다. 그 점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양상 그리고 모노크롬과 모노하 사이에서, 이우환과의 우정관계 속에서 간과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행위와 물성, 프로세스와 반복, 평면성과 공간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작가마다 독특하게 갖고 있는 방법론 중 내가 최근 주목하는 것은 하종현과 최병소 작가의 방법론이다. 단지 조형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적 의식을 동반하며 조망하는 것이다.(김미경, <최병소論-소멸하며 태어나다> 2006, <지우기의 미학> 2013, <하종현: 발언과 침묵의 예술> 2008, <기(氣)・통 (通)・시(時)・공(空)-하종현론(河鍾賢論)> 2012) 나로서는 박서보와 심문섭의 초기 작업들과 김용익의 작업 등에 대한 연구 또한 진행 중이다. 쉬포르 쉬르파스(Suports/Surfaces)가 유물론적 해체 방식으로 캔버스와 틀을 대하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한 방법론이 있었다는 점이나 모노하 작가들 간에는 더욱 복잡한 ‘모노’에 대한 해석적 방법론이 있었다는 점 등은 그 미술 경향들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한 요체였다. 따라서 모노톤아트의 커다란 담론적 경계 안팎으로 이들 방법론이 더욱 심화 연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는 지난 9월 1일 국제갤러리 심포지엄에서 이우환 작가에게 ‘모노톤아트와 이우환의 담론적 관계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답변은 분명할 수 없었다. 모노하 맥락에 있든 회화와 3차원 공간의 관계에 있든 이우환과 모노톤아트 작가들의 인간적인 우정 관계 이상의 미학적 공감대를 작업과 개념에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모노톤아트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하면서도 그 미학적 토대에서 자신의 작품을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도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에서 다시 한 번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모노톤아트가 전시되는 현상은 미술시장의 경제논리를 보여준다.
모노톤아트는 이우환을 매개로 일본에서 기원적인 첫 전시가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간단치 않은 갈등관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우정 전시는 이어졌다. 이우환과 함께 세계 미술시장으로 나아가는 모노톤아트에서 우리는 이제 ‘인간적인 친구 관계’와 ‘미학 담론’을 구별하여 다룰 수 있는 지성 정도는 갖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우환 (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28.5×161.8cm 1974

이우환 <점으로부터>(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28.5×161.8cm 1974

박서보 (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194.5×260cm 1972

박서보 <묘법 No. 10-72>(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194.5×260cm 1972

정상화 (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226×181cm 1980

정상화 <무제 80-9-23>(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226×181cm 1980

하종현 (사진 맨 왼쪽) 마포천에 유채 194.5×269.5cm 2006

하종현 <접합 06-010>(사진 맨 왼쪽) 마포천에 유채 194.5×269.5cm 2006

 

[Exhibition Focus] 건축적 부록

Architectural Supplement

협업을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부부작가 이부록, 안지미가 이번에는 소설가 김연수와 함께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9월 18일부터 10월 8일까지 갤러리 잔다리에서 열리는 <건축적 부록전>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다.
세 명의 예술가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적 시점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다시 30년이 지난 2048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폭력으로 제거할 수 없는 오류의 세계

안지미 (이하 안) 2002년 일주아트센터에서 열린 <동상이몽전>에서 작가와 디자이너로 처음 만났죠. 당시 저는 일주아트센터에서 리플렛과 도록 등 시각이미지를 총괄하는 객원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부록 씨는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로 전시에 참여했어요.
1996년부터 북 디자이너로 출판계 일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뭔가 다른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점에 이부록이라는 작가를 만난거죠. 같이 작업한 것이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부록 씨는 영상작업에서 다른 매체로 확장하려는 시점에 저를 만나서 작업 영역이 좀 더 확장하지 않았나 싶어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서로 이런 얘기를 해본 적 없는 것 같네요.
이부록 (이하 이) <동상이몽전> 리플렛을 통해 지미 씨와 함께 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우리는 서로의 작업에서 매력을 느꼈죠. 이후 200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두 번째 개인전 <워바타> 때 픽토그램 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함께 작업을 시작했고, 당시로서는 전시와 책이 만나 서로 보완해 완결되는 방식의 전시였어요. 만일 우리가 그때 만나지 않았다면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지 예측할 수 없어요. 원래부터 책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전시와 책이 같이 나오는 일이 흔하지 않았죠. 도록과 책은 확실히 다르잖아요. 그런 점에서 전문적인 편집능력을 가진 지미 씨의 도움이 컸고 이후 전시와 동시에 책을 기획해 발간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취한 것 같아요.
안 전시는 관람객이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보지 않으면 안되는 한계가 있는데 반해 책은 시간과 공간에 자유로운 편이죠. 물론 책 역시 독자가 구입해서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없죠. 전시와 책 두 매체 모두 각자 폐쇄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굉장히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점 때문에 두 매체를 연결하면 굉장히 흥미롭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사실 처음부터 협업을 하자고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부록 씨가 저를 통해 출판에도 밀접하게 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작업을 많이 했죠.
이 본격적으로 협업한 것은 2008년 청계천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부터죠.
안 2008년 청계창작스튜디오에 함께 입주해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청계천에 살다시피 하며 청계천이 주는 이상한 매력에 흠뻑 빠져 지냈어요. 제  경우 동교동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유학한 4년 빼고는 거의 홍대 지역을 떠난 적이 없는데,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을 잘 몰랐던 거죠. 청계천에서 노동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저는 기존의 커머셜한 작업을 대폭 줄이고 부록 씨와 함께 컨셉추얼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이때 청계천 주변 구도심을 탐사한《  창백얼굴》과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 뒤집어 보기를 시도한《  UPSET NEWYORK / NY》, 두 권의 책이 나왔죠.
《  창백얼굴》은 작은 피규어의 목 부분에 자석을 이식해 얼굴이 바뀌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드러낸 것이라면《  뉴욕》은 같은 피규어가 뉴욕이라는 도시에 이식되어 거꾸로 박혀있는 모습, 책을 거꾸로 뒤집어서 보면 도시가 뒤집혀 있는 풍경이에요. 마침 우리가 뉴욕으로 여행을 간 시점이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직후라서 모든 사고의 패턴이 바뀌는 순간이었죠. 서울과 뉴욕만큼 모든 것이 빠르게 사라지고 변화하는 도시도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자가 한국 생활을 체험하고 쓴 기사를 봤는데, ‘미래도시를 보려면 서울로 가라’ 그런 내용이더군요. 유럽은 과거 전성기 때의 기억에 집착해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국은 모든 것이 시시각각 새롭게 바뀌며 24시간 돌아가는 미래세계 도시라는 거죠. 하지만 세월호 사건의 충격으로 한국 사회가 과연 선진국을 건설한 건지, 작동 불능의 도시를 건설한 건지 의아해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다시 청계천 얘기로 돌아갈까요.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 고층빌딩과 동대문시장 사이에 있는 특이한 공간이죠. 사회적으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문화적 유산이자 정치적 발판 구실을 했죠. 이후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의해 청계천창작스튜디오가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프닝 때 오세훈 시장이 온다고 떠들썩했죠.(웃음)
결국 스튜디오 운영도 정치적으로 활용되다보니 주체가 없이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시설관리공단을 떠돌다 결국 3년 만에 사라졌어요. 근데 청계천이라는 공간이 과거의 화려했던 시기에 비해선 못하겠지만, 근대화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곳이고, 실제로 무엇이든 만들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만들어내는 보물상 같은 곳이었죠. 그때 청계천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앞으로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저희 작업의 뿌리는 청계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 그러고 보니 2004《  워바타 전쟁 그림 문자》(명성출판사)부터 10여 년 동안 우리가 낸 책이 총 11권이 되었네요. 그러지 않아도 처음엔 10년쯤 지나면 우리가 하는 작업의 윤곽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물론 지금 딱 뭐라 정의내릴 순 없지만 여태까지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이 참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동안 매번 지원금을 받아 책을 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그 사이 독립출판 붐이 일어났지만 초창기 때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출판을 계속 해왔죠.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뭔가 만들어 내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원금은 곧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하는 만큼 작업이 단순 자기만족에 그치면 안돼요. 작업 내용도 그렇고 작업태도에도 작업 자체는 사회 환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죠. 그림문자에서 출판한 책은 2006년 작가 김태헌의《  1번국도 –평택에서 임진각까지》가 첫 작업이고 그 다음부터는 전시와 연계해서 우리 책을 주로 냈죠. ‘업셋프레스’는 프로젝트 이름이고.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 작업은 추상적인 개념의 언어가 많아요. 그렇다보니 소통이 수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면에서는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타자와의 소통일텐데 지금까지 작업은 소통에 소극적이지 않았나. 다들 작업이 난해하다고 얘기해요. 물론 쉬운 예술이 곧 좋은 예술은 아니지만 작업도 깊이가 생길수록 훨씬 편안하게 소통되는 것 같아요. 작업이 아직은 너무 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미 씨 말대로 어떻게 하면 작업으로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네요.
단적으로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등 픽토그램의 경우 디자인적 개념이자 소통을 위한 세계 공통언어인 픽토그램에 새로운 개념을 덧붙여 다른 의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작업이었어요. 픽토그램이 보편성 추상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재단한 부분을 복원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했는데, 픽토그램이라는 굉장히 기능적 언어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해 기능성을 제거한 작업 즉, 다양한 오류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어요.
일종의 오독놀이, 파자놀이인데, 평화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평화라는 개념은 인류에게 존재하지 않아요. 단어는 있지만 의미는 일치하지 않는 그런 용어들이 많죠. 지미 씨가 프랑스에서 유학했다면 저는 DMZ (비무장지대)에서 유학했다고 말하곤 하는데, 감옥처럼 완전히 고립된 그곳에서의 복무생활은 은둔형인 저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요.
DMZ는 남과 북이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서로 유토피아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통해 이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의 장소이죠. 불통의 극단적인 지점이 전쟁이라 할 수 있는데, 픽토그램은 가장 원시적인 언어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작업에 도입했어요. 이후에도 스티커프로젝트 작업으로도 파생되어 이어졌죠.
《     세계인권선언》(프롬나드)의 경우 충분히 예술적이면서도 위트가 있고 소통에도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선언문을 가지고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워바타》(2004)를 출간해준 선배와 술자리에서 1948년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작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부록 씨와 작업하게 되었죠. 의외로 많은 사람이 세계인권선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더라고요.
활자로만 머물렀을 때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죠. 선언문을 읽어보면 짧은 문장에 응축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에 참 어렵게 느껴지는데 부록 씨가 익숙한 이미지를 차용하고 또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선언문을 대비시켜 보여주니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됐죠. 그 작업을 하던 2012년은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오큐파이(occupy)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죠. 당시 “1% 대 99%”라는 구호가 시각화되면서 파급효과가 굉장히 커졌어요. 기회가 된다면 선언문의 시각화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 싶어요.
제 경우 군생활 이후《  한겨레 21》에 카툰 연재를 위해 진보와 보수성향의 기사를 동시에 읽으면서 의식을 깨우치게 된 게 그 작업의 근간이 됐어요.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배권력을 비판한 팔레스타인 출신 만화가 나지 알 알리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죠. 카툰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발언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세계인권선언’을 시각화한 작업이었죠. 해독이 안되는 텍스트가 의미없듯이 해석이 안되는 이미지도 무의미하죠.
잔다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 <건축적 부록>은 부록 씨와 소설가 김연수 씨와 협업하는 새로운 시도였어요. 김연수 씨와의 인연은 1998년에 시작되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협업을 하게 되었죠. 소설가와 설치작가의 협업과정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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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록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2005~2014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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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록 <금자탑> 나무 자석 철부산물 2014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대한 질문
사실 지난 4월 세월호 사건 이후 저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아 예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굿모닝 미스터 오웰전>에 참여하면서 조지 오웰의 텍스《  1984》와 백남준이 바라본 1984년, 그리고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대해 좀 더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오늘날 30년 전에 비해 긍정적인 면은 더 발전했지만 감시사회, 시스템의 문제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도 더 극대화됐죠. 현재를 담고 있는 미래에 대한 입장에서 소설과 같은 형식을 책으로 풀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차에 김연수 씨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고, 함께 작업하게 된거죠.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 지하1층은 빅데이터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에 사라진 어떤 인물에 대한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소설과, 종이책이 사라진 미래사회에 책을 복원하는 지하출판의 개념으로 풀었고, 지하 2층은 청계천에서 수거한 폐기물을 활용해서 유물이나, 우주 폐기물처럼 보이게끔 했어요. 이번 전시는 1984년 백남준이 바라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비추어 세월호 이후 시스템 문제를 건드리고 있어요.
그 당시 미디어를 송출하는 인공위성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인공위성이 우주 쓰레기가 되었잖아요. 청계천의 쇠들의 꿈도 사실은 인공위성이나 탱크가 되는 것이죠. 청계천에서 우주에서든 쓰레기가 되어버렸어요. 빅데이터도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수집된 정보이지만 쓸모없어 버려지는 것을 상징하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청계천에서 소외받은 것들에 대한 메시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금자탑으로 연결되죠.
이전의 작업이 사라지는 근대 풍경에 관한 것이어서 과거에 대한 재해석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과거, 현재, 미래까지 보는 계기가 되었죠. 이번에는 오웰의 입장을 통해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설정이죠. 세월호 이후의 문제들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종이책이 금지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두운 곳에서 비밀스럽게 책을 보듯 스폿 조명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부록 씨가 효과적인 조명을 찾아냈죠.
정보통제와 상호감시, 자기검열 등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노트북용 USB LED조명과 콘셉터 등을 조합한 것인데, 미래조명은 최소한의 전력과 최대한의 전달효과라는 가정에 따른 거였어요.
무대에서 자주 활용되는 스폿조명의 개념은 사실 집중되는 곳이 아닌 그 이면을 생각하자는 것인데, 언론의 방식을 포함해서 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에서 택하는 전시방식처럼 과거의 시간을 차단해서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죠.
이번 전시를 준비 과정에 이부록 씨는 설치작업에 집중했고, 저는 김연수 씨와 협업해서 책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기존의 작업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작업이 어느 정도 분리된 것 같아요. 앞으로 부록 씨는 작가로서 프로젝트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이고 저는 내년에 출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협업이 올해처럼 활발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폭력을 동력으로 하는 사회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는 한 <스티커 프로젝트> 등 기존 작업은 계속 진행할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다른 타자와 함께 하자는 생각에 저 스스로 분열해서 지난해부터 ‘이무부(리무부, 李無不, Remove)’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어요. 부록을 제거하다 이런 식으로…. 저는 은둔형 성격이지만 협업의 필연성을 동시에 느끼고 있어서 제 안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끊임없이 이중사고가 일어나고 있어요. 협업하면서 느끼는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자본화된 예술가와 그에 저항하는 예술가 사이의 충돌 등 여러 측면에서 이중사고가 발생하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분열하게 되었어요. 내 안에서 다른 입장도 보고, 나 자신도 그런데 타자와는 더 심할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분열이 가속화될 것 같아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작가가 계속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겠죠. 단지 부록 씨는 이름을 바꿔 나가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름 설명하다가 장황하게 되었는데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작업은 이부록의 것이고 저 작업은 이무부의 것 그런 건 아니죠.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안지미와 이부록이 지난 10년간 출간한 책

안지미와 이부록이 지난 10년간 출간한 책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안지미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파리 ISCOM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정병규 디자인, 월간 《지오》, 솔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으며 2003년 작가 이부록과 함께 출판사 ‘그림문자’를 설립해 시각 이미지 생산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부록은 197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으며, <제5회 광주비엔날레> <신호탄전> (국립현대미술관), <1번 국도>(경기도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안지미와 함께 <Sticker Project> (아르코미술관/ 그림문자), <세계인권선언> (이음갤러리 / 프롬나드), <금지된 숲> (복합문화공간에무 / 그림문자), <Warvata> (인사미술공간, 인더페이퍼갤러리 / 두성북스) 등을 전시와 출판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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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 <건축적 부록전>에 참여한 소설가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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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협업

이부록 씨와는 10년 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소설집을 펴낼 때 처음 알게 됐다. 여기서 알게 됐다는 것은 그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편집자가 내 소설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며 일러스트레이션을 청탁했는데, 나중에 출판된 책을 보니 과연 소설과 그림이 서로 어울리는 바가 있었다. 편집자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작업을 위해 내 소설을 읽어본 이부록 씨는 자신이 대학 시절에 쓴 글과 비슷하다는 소감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매우 독특한 소설을 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때는 사람들이 ‘표지의 이 괴상한 피에로는 너냐?’라고 종종 묻곤 했던 그 얼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전혀 모를 때였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 2010년 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랑 광화문광장에서 이상의 <오감도> 연작 11편을 낭독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하는 작업을 했던 구민자 씨가 통인동의 시청각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연락을 해왔다. 아울러 전시작품 중 하나가 내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필사한 노트라며 내게 잠시 시간을 내어서 소설을 낭독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린 작은 낭독회가 끝난 뒤, 찾아온 관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표지에 실린 그 얼굴, 그러니까 이부록 씨였다.
그가 10년 전의 인연 때문에 내 낭독을 들으러 통인동까지 찾아올 리는 없다는 걸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인가 얘기를 들어보니 솔깃한 바가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백남준 씨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위성쇼를 선보인 지 올해로 30년째가 되는 해여서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기념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백남준의 기획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쓴《  1984》를 1984년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것이었다. 조지 오웰은 1984년의 세계를 전체주의적 통제가 일반화된 디스토피아로 그렸지만, 백남준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연결된 세계를 낙관적으로 봤다.
이부록 씨는 그 기념전의 연장선에서 디자이너 안지미 씨와 나, 이렇게 셋이서 조지 오웰의《  1984》를 2014년 서울에서 되돌아보는 전시를 하자고 내게 제안했다. 그 제안은 흥미로웠다. 1984년에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인상적으로 시청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1984년의 그 감동을 되새겨본다면 어떨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 자신부터가 중학교 2학년생에서 40대의 중년이 된 것처럼, 이 세계 역시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변한 게 틀림없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2048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한 편 쓰기로 했다.
내 소설 속의 서울은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가 아니라 빅 데이터가 모든 개인의 사생활을 파악하고 있는 세계다. 어떤 점에서 조지 오웰의 예측은 옳았다. 1984년에는 세계의 각 도시를 위성 생중계로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과학기술이 제시했다면,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까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이 시대에는 점차 사생활의 종말이라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완전한 통제사회를 뜻한다. 이 통제사회에서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라는 이슈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이부록 씨와는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지금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서로 공감했고, 지금까지 해온 각자의 작업 안에서 그 공감의 맥락을 연결하자고 방향을 잡았다. 안지미 씨의 디자인 역시 디스토피아에 도래할 종이책의 종말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소설과 미술의 접점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테지만, 경험해보니 서로 만나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협업이었다. 이부록 씨와 안지미 씨, 두 사람과의 유쾌한 대화를 통해서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김연수・소설가

 

[Review] 강애란 – 책의 근심, 빛의 위안

강애란 – 책의 근심, 빛의 위안

갤러리 시몬 8.28~10.26

알루미늄이나 종이죽으로 캐스팅해 만든 ‘책 보따리 오브제’들까지 넣는다면, 강애란은 거의 15년이 넘는 동안 책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와 인식론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씨름해왔다. 그녀의 책들은 도서관과 서점의 선반 위에 놓여 오랜 역사의 축적된 지식을 암시하기도 했고, 계몽의 빛으로서 이성과 지식을 외치듯 안으로부터 밝은 빛을 발하기도 했으며, 보자기와 끈에 묶여 감추어짐으로써 은밀한 주술적 행위로서 지식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강애란이 제시해 온 실제의 책, 가상의 책, 멀티미디어로 이루어진 책들의 세계는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가 공존하는 ‘이질성’으로서의 세계이자 지식의 무게로 가득 차 있는 장소들 또는 ‘숭고함의 공간(The Space of Sublime)’이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탈물질화하는 시대에 책의 미래에 대한 우려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했던 그녀의 책 설치작품들이, 관람자의 ‘인터랙티브 읽기 방식’ 혹은 ‘공감각적 읽기 방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 인터페이스, 그리고 비디오이미지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애란 전시는 여전히 책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리얼리티와 버추얼 리얼리티가 중첩된 공간 안에 LED와 비디오이미지들, 촉각적인 사물들과 추상적인 숭고의 의미들이 공존하던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표현 방식 및 내용에서 구체적이고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우선 1층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는 이전에 3차원의 공간에 놓이던 ‘책-사물들’이 2차원의 회화 공간 안에 ‘책-그림들’로 존재하게 되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책-그림들’은 마치 기하추상과 극사실주의 사이 혹은 평면과 사물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가 혼용해 온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의 타협점을 보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12명의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 2층의 비디오설치 작품들이다. 그동안 책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작가는 이제 책 안에 기록되는 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빛을 발함으로써 비어있던 라이트박스로서의 디지털 책이 존재의 외적인 부분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지나간 아픈 역사 속에서 체험된 슬픈 삶으로 꼭꼭 채워진 책 속의 이야기들(비디오 영상들)은 작가의 시선이 내부로 향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가 만드는 책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서문에도 쓰고 있듯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작품은 작가의 작업 궤적에서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 아픔이자 사회적 이슈이기도 한 위안부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그동안 여성과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와해시켰던 작가 강애란의 미술가로서의 위상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되어 책의 내부에 자리 잡게 된 배춘희 할머니의 노래와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대 여성들의 삶과 예술, 문학으로 관심을 옮겨가고 있는 작가의 내적 시선의 확장을 기대해본다.
전혜숙・이화여대 교수

[Review]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8.22~9.28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서진석과 아시아 20개국, 20명의 기획자 공동기획으로 ‘2014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이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렸다. ‘민주주의와 예술’이라는 개념을 공공적 담론으로 확장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이번 전시는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른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정체성을 아시아 각국의 사회, 공공적 예술가들의 새로운 해석적 관점으로 살펴본다. 한국의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이항대립적 민주주의처럼 20세기 타의에 의한 근대화와 급격한 성장을 겪은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적 산물로서 이식된 민주주의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민주화를 체험해왔다. 처음 모든 국민이 자신이 일처럼 아파했으나 이제는 진영의 논리에 빠져 더 이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세월호 문제처럼 이분법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생명의 가치가 경시되는 이 시대에 공공적 예술 활동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인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모색해보는,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전시였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은 아시아 각국의 사회적, 공공적 예술가들의 시각을 통해서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미와 정체성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아직도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이항대립적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의 특징을 특유의 미적 감성으로 표현하는 배영환은 <유행가-이상한 열매>라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캔버스에 깨진 술병 조각으로 인권운동의 상징처럼 된 빌리 홀리데이의 동명 제목의 노래 가사를 형상화했다. 소재와 내용면에서 대중성과 통속성, 키치적인 하위문화를 통해 정치적 언급을 드러내는 작품으로서 전체 전시공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지만 큰 울림을 전해주었다.
일본의 비디오아트 그룹 침↑폼은 <실시간>이라는 영상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현장에서 실시간 중계하듯 흰 천을 바닥에 펴놓고 붉은색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는데 마치 일본 국기처럼 원으로 시작한 그림은 곧 방사능 표시문으로 완성된다. 작가의 몸에 상처를 내는 작업을 통해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치사회적 이슈를 충격적 퍼포먼스로 해석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중국의 허옌창과 종교가 중심이 되는 교조적 민주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인도 작가 케미 바센느 그리고 왕이 지배하는 군주제의 가치관이 민주주의에 영향을 주는 태국 작가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20세기 외세에 의해 개방을 하고 근대화된 서구적 산물로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성장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특수성 위에 이식된 서구식 민주주의는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며 아시아 각국의 정체성을 이뤄왔다. 이렇듯 서로 다른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아시아 국가들에 민주주의라는 의미는 서로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서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주의 양상들을 예술을 통해서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먼지 하나에도 우주가 담겨있다’는 말처럼, 개별적인 것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개별이 조화를 이루면 우주가 되고, 우주는 개별의 존재 이유 하나하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가 절실하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은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점을 지나 자기분열의 위기를 맞은 시대에 던지는 작은 담론적 질문이자 과거와 현재에 걸쳐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정체성을 되짚어 보는 것을 넘어서서 21세기 미래의 새로운 조화론적 민주주의와 예술의 공공적 역할에 대해 논의하고 전망하는 전시였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존중과 공감’이라는 가치를 배우고 ‘민주주의와 예술’이라는 공공적 담론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공동연구와 시각이미지 생산을 통하여 아시아 민주주의라는 중요 담론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협의체의 다음 행보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전동휘・예술학

[Review] 임영숙

임영숙

월전미술문화재단 한벽원갤러리 8.26~9.7

향기 향(香)자는 벼(禾)가 햇볕(日)에 익어가는 것을 뜻한다.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는 분명 시각적인 것이지만, 이를 감성적인 것으로 변환시켜 그 감동을 배가시키는 옛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다. 이 벼(禾)가 사람의 입(口)에 들어가게 되면 평화로움을 뜻하는 화(和)가 된다. 이에 이르면 단순한 글자 하나에 담긴 의미가 예사롭지 않게 전해진다.
작가 임영숙의 작업은 밥을 주제로 한다. 하얀 쌀밥에 꽃을 더하는 그의 화면은 정갈하고 소박하다.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화면은 현대미술의 난해한 설정이나 교묘한 복선의 구조 같은 것은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 평범한 일상성을 통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직설적인 듯하고 즉물적인 듯하지만 그것을 통해 전해지는 시각적 메시지는 결코 단순한 한두 마디의 단어로는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삶의 어떤 부분들과 연계되어 묘한 여운을 증폭시키며 전해진다. 그것은 지식을 통해 읽힌 이성적인 앎의 결과가 아니라 극히 인간적인 감성을 통해 감지되는 안온한 정서의 확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하얀 쌀밥으로 대변되는 삶의 상징성은 이미 그 의미가 반감되었지만, 밥은 여전히 특정한 정서와 감성의 상징으로 읽힌다. 작가는 하얀 쌀밥을 가득 담고 갖은 꽃으로 장식하였다. 그것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삶과 인간에 대한 의식의 구체화인 셈이다.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을 통해 내밀한 사유를 개진하는 작가의 섬세한 감각은 그 자체가 소박하고 따뜻한 것이다. 굳이 과장하거나 꾸밈이 없이 소박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감성은 수용성 안료 특유의 부드럽고 침착하며 깊이 있는 색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수렴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고답적인 전통주의나 경직된 소재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것이기에 더욱 신선하고 반갑다.
미술, 혹은 문화가 지닌 공능 가운데 하나가 영혼, 혹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치유라 할 것이다. 작가가 전해주는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은 그저 한 끼의 배를 채우는 물질이 아니라 문명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물질이 범람하는 시대에 인간과 그 삶에 대한 정신적인 위안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밥 한 그릇으로 축약된 시대적 담론이자 밥 한 그릇으로 표현된 감성의 확인이라 할 것이다. 향기 향(香)자가 시각적 이미지를 감성적인 내용으로 수렴하여 그 상상의 외연을 무한대로 확장하듯이 작가는 흰 쌀밥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화면으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감성의 성찬을 배려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Review] 시대의 눈 – 회화

시대의 눈 –  회화

OCI미술관 9.12~10.31

그곳에 가면 물감 냄새가 자연스레 콧등에 와 닿으며 눈과 머리를 자극한다. 어렴풋한 잔상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미술관의 흰 벽은 그간 수많은 이미지의 거소였다. 2010년에 개관한 OCI 미술관은 시작부터 회화에 대한 고집스러운 시선을 드러냈다. 신진 작가부터 젊은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고, 중견 작가들의 날카로운 혜안 또한 놓치지 않고 회화가 가는 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미술시장의 침체로 인해 그간 마켓에서 선호되던 회화가 잠시 주춤하고, 대신 설치 형식의 복합매체 작업이 전시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던 시기라 회화에 대한 미술관의 진득한 관심은 화가들에게 여러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회화의 물성과 치열한 화폭 그 자체를 담아내던 전시장에 이번에는 강서경, 공시네, 박미나, 박진아, 배윤환, 안두진, 정수진, 차혜림, 허수영 총 9명의 작품들이 모아졌다. 주로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작가들은 현재 미술계에서 왕성히 활동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는 화가들이다. 이 중 절반의 작가는 국내의 주요 상업 갤러리와 관계하고 있으며, 다수의 작가가 국공립미술관 전시,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 국내외 미술상 수상, 대안공간에서의 활동 등 국내 미술계 시스템과 관련해 총체적인 활동 범위를 지닌다. 본 전시가 접근하고 있는 회화의 ‘동시대성’은 국내 화단에서 대두되어 온 회화의 범주를 관통한다.
작년 이맘때쯤 OCI미술관에서는 <진경, 眞鏡>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화를 동시대적 관점에서 조망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동양화 전시에 이은 두 번째 회화 기획전으로, 한국 현대회화의 현주소를 살피며 컨템포러리 회화에서 두드러진 변화와 특징적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본 전시가 접근하고 있는 회화의 동시대성은 전시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시대의 눈-회화: Multi-Painting>에서 페인팅 앞에 붙은 ‘멀티’는 다중, 혼성, 복합성, 다시점 등 다원주의적 성향의 현시대성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전시장에 걸린 회화작품들에는 켜켜이 내러티브들이 중첩돼 있으며, 화가의 손끝에서 사투한 붓질의 흔적도 가득하다. 게다가 벽으로부터 나와 공간에 놓인 설치 형식으로 인해 회화의 복합적 형식과 중층의 내러티브는 현실 공간 속으로 연장되어 나간다. 전시된 작품에 내포된 멀티의 관점은 내용, 형식, 기법, 소재 등 회화의 안팎에 걸쳐 살펴볼 수 있다.
9명의 작가가 다루는 회화에 대한 관점은 미술관의 수직적인 공간 구성에 의해 세 개의 층에서 진행되며, 각 공간이 특정 주제로 구분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몸의 움직임에 따른 시각적 구성을 따르게 된다. 회화를 멀티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화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대면하는 박진아와 허수영의 작품은 시공간의 흐름을 가시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보인다. 스냅사진을 활용하여 동일 인물의 흔적을 중첩된 시공간으로 파악한 박진아의 회화와 1년간의 계절 변화를 하나의 화면에 겹겹이 중첩시킨 허수영의 회화에는 스쳐지나가는 시공간의 흐름이 그림 속에 담긴다. 비가시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가시적인 실존을 부여하는 과정은 정수진의 회화에 담긴 의식의 다차원적 세계관, 그리고 공시네의 작업에서 상상의 실체가 차원의 과정을 거쳐 회화의 실체로 나아가는 것과 관련된다. 박미나의 ‘딩벳 회화’와 안두진의 회화는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정보, 개념적 교환체계로서의 독창적인 회화의 언어를 구사해낸다. 이렇게 무가 유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다층적 언어는 회화의 매체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들로 이어진다. 강서경, 차혜림의 회화는 설치 형식을 통해 회화적 개념을 공간 속으로 확장시켜 현실 공간과 환영 공간 사이를 매개시킨다. 50m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벽면을 가득히 에워싼 배윤환의 작품에서 회화는 무궁무진한 저장고와 같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다양한 장면과 내러티브를 복합적으로 화면에 배치시켜, 회화에 여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묘사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란 듯이 펼쳐 보인다.
근래 젊은 화가들이 회화의 전통적인 재현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매체적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회화는 더 많은 정보를 유입하고,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들이 화면 안에 담긴다. 가시화를 더하는 과정은 보는 것에 한정된 닫힌 층을 파괴하고, 멀티적인 층으로서의 새로운 층들을 화면으로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다층의 회화들은 더 이상 관람객들로 하여금 유유히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차분히 그림을 감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멀티-회화는 관람객들에게 전통적인 관람 형식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과 환영 공간 사이를 저울질하며, 이 사이의 영역을 더 적극적으로 탐색하길 요한다.
심소미・갤러리 스케이프 책임 큐레이터

 

[Review] 안규철 –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규철 –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하이트컬렉션 8.29~12.13

실패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며 사는 세상에 실패를 목적으로 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전시가 열렸다. 안규철의 개인전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All and but Nothing >은 목표가 없는 온갖 헛수고를 텍스트와 오브제, 그리고 영상작업으로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서로에게 물을 분사하는 <세 개의 분수>, 바람으로 구슬을 굴리는 <바보웅덩이>, 시곗바늘과 시계 자체가 같이 돌아가 시간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 <두 개의 시간>이 정겹게 우리를 맞이하며 먼저 가벼운 웃음을 선사한다. 컴컴한 비디오 방으로 들어가 맞딱드리는 <실패하는 법>은 실패자들의 정곡을 찌르는 10개의 지침으로 1번과 10번이 압권이다. 계획은 세우지 말고 그냥 포기해버리라고 한다. (10. No plan, 1. Give up) 본격적인 헛고생은 프로젝트와 모니터로 보여주는 영상작업인데, 총 10편을 다 보는 데에 100분 가까이 걸린다. 비디오 속 작가는 나무가 되어 아주 천천히 숲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중력을 이기려고 벽 옆면 걷기를 시도하고, 쓸데없이 탱고를 익히기도 한다. 익숙해지면 이내 그만 두는 것은 악기연주도 마찬가지이다. 딸이 좋아하는 음악을 간신히 연주하고 난 후 아코디언을 분해하여 조각들을 마을의 곳곳에 버린다. 한 번의 연주는 다시 재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지만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된다.
헛수고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상 작업은 본격적으로 비디오 방에서 계속된다. 마치 노동으로 참선을 하듯 벽돌을 쌓아 완성되지도 않을 건축물을 짓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사다리에 오르고, 목적 없이 나선형으로 걷고, 땅을 파고 다시 묻는 삽질도 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의 등에 다시 페인트칠을 하는 등의 쓸데없는 노동을 한다. 보고 있으면 한심하고 미련해서 답답함과 지루함이 일지만, 영상에 등장하는 작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무엇이 더 있을까 하는 보는 이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며 끝을 내버린다. 시간과 수고는 아무 소용없이 소비되고, 목적 없는 갖가지 행위를 장시간에 걸쳐 본 관객은 어이가 없다.
그러나 안규철은 헛수고의 과정만을 보여주며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실패를 기억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현 시대에 목적과 성과에 피로한 우리를 위해 손을 내밀고 따뜻한 말을 건네듯 다양한 장치로 관객을 위로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거울을 한곳으로 반사해 전시장에서도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달을 그리는 법>이 마치 시구와 같이 우리를 맞이하였다면,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수많은 비즈를 천장에 매달아 마치 보석으로 만든 커튼과 같은 형상으로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감을 나타내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가는 관객들을 위로한다. 유리잔 연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나는 너를 위해> 역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사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동작이 연속되는 비디오작업에서도  잔잔하고 포근하게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악적인 사운드가 배경에 있었다. 반복되는 실패를 보는 것이 답답하고 미련해도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치유의 효과가 있는 사운드 덕이다.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나는 괜찮아요. I am OK.”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아 보이지만 이러한 사운드는 진정으로 실패를 아름답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작가는 매일 아침 한 장의 노트에 글을 쓰거나 드로잉을 하며 하루를 연다고 한다. 실패에 대한 안규철의 작업노트는 담담하면서도 절절하다. 매번 실패를 주는 사회에 대해 최대의 복수로 자행되는 작가의 의도적인 실패는 이미 성공한 실패이다. 작정하고 시작한 소소한 실패는 성공을 꿈꾸다 매번 좌절한 현실의 뼈저린 기억을 치유해준다. <두 벌의 스웨터>는 한쪽에서는 스웨터를 짜고 다른 한쪽에서는 스웨터를 풀어 결국은 제로가 되는 작업이다. 성과가 없음은 무의미한 것이고 보잘것 없는 것이고 그렇게 행한 사람은 바보이고 미련퉁이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이러한 무의미한 일들을 반복하며 실패를 안고 살고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당연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두려워하며 성공과 목표에 집착한다. 자신이 찾는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없으면서 마구 달려가려고만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숨은 상처와 우울감은 그대로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이번에도 안규철의 작업은 살며시 우리를 달래주고 있다. 의도된 실패를 위해, 무의미한 헛수고를 위해, 작가 자신은 엄청난 노동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괜찮아. 달라지는 것은 없어. 아무 일도 없을거야.”
가슴이 따뜻해진다.
한금현・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 책임연구원

 

[Review] 김민애 – 검은, 분홍 공

김민애 – 검은, 분홍

두산갤러리 9.3~10.4

전시제목은 ‘검은, 분홍 공’이다. 전시 안내문에 의하면 이번 전시는 ‘습관에 관한 소고(Thoughts on Habit)’라는 작가의 지난해 개인전과 연결된다고 한다. 그때 김민애는 전시장 벽을 기준으로 14도 튼 펜스를 전시장에 추가함으로써 관객의 이동을 제한했고, 영어로 번역한 윤동주의 <자화상>을 설치하여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였다. 그런데 전시 개막 몇 시간 전, 김민애는 검은 풍선 3개와 분홍 풍선 1개를 펜스와 벽 사이 등에 끼워놓았다. 미리 계획된 바에 따라 작품을 제작·설치하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의 스타일이 좀 답답했다고 한다. 긴장이 있으면 이완이 있어야 하는 법. 가볍고 소프트하며 부수적이었던 풍선들은 이번 전시의 제목이 되었다.
두산갤러리의 전시장은 네모나다. 김민애는 불투명한 천으로 벽을 세워 방을 조성했다. 그 결과 네모난 전시장 안에 네모난 방이 생겼고, ‘ㅁ’자 형태의 통로가 만들어졌다. 그 통로에서 관객은 불투명한 벽에 비친 사물의 실루엣들과 움직이는 2개의 분홍색 동그라미를 볼 수 있다. 그렇게 통로를 따라 세 번째 모퉁이에 다다르면 문을 마주하게 된다.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면, 작가가 대학 때부터 제작했던 작업들이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지 않은 채, 또 장소특정적이지 않은 채 널브러져 있다. 즉 실루엣의 주인공은 작가의 과거 작업이고, 분홍색 동그라미는 조명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더불어 설치 때 사용한 사다리가 있고, 작업을 포장하고 남은 것을 공처럼 둘둘 말아놓은 것도 있다.
그리고 이 문 옆에 ‘들어가지 마시오’란 말이 반전되어 적혀 있다.(방 안에서 봐야 글자가 똑바로 보임) 방 안에서 밖으로 가지 말라는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밖의 관객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이 텍스트 때문에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 동시에 그는 전시제목, 작가명, 전시기간도 반전된 형태로 벽에 적었다. 이 방에 들어가야만 작품과 텍스트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객은 주변을 맴돌며 작품의 실루엣과 반전된 글자만 보게 된다. 김민애는 이렇게 작품으로부터 관객을 소외시켜버렸다. 게다가 작품으로부터 기존 전시장도 소외시켜버렸다. 그는 기존 전시장 벽과 조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김민애는 관객이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도 관객에게 보일 준비가 덜 되게 함으로써 작품과 관객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업은 관객과의 관계를 통해서, 또 전시장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만약 소설의 2인칭 시점이 미술에도 있다면, 김민애의 이번 작품이 2인칭이 아닐까. 나아가 그런 2인칭을 통해서 작가의 삶을 반성하는 게 아닐까.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코드 액트

코드 액트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9.4~11.15

신체, 여성 등의 컨텍스트와 퍼포먼스의 수행적 역할에 대한 관심사를 확장시켜 온 코리아나미술관은 <코드 액트(Code Act)>를 통해 관람객에게 흥미로운 감각적 상황들을 제시하고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무용, 드로잉, 조각, 설치, 영화, 연극, 건축, 음악 등 다양한 매체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10명(팀)의 작품은 미술관을 멀티플렉스(multiplex) 공간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시각예술과 퍼포먼스의 공간적 확장을 꾀하였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정금형의 작품 <7가지 방법> (2009/12)은 연극적 무대를 통해 ‘몸’과 ‘오브제’를 매개로 한 소통과 관계를 만들어내는 감각적 상황들에 대해 질문한다. 신체와 오브제(기계)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적극적 관계 맺기를 통한 퍼포밍을 시도한 그룹 코드 액트(Cod. Act)의 작품은 인체의 ‘숨’을 통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영향과 관계에 대한 실험적 영상작업이다. 지하 1층 전시장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작품은 영화적 상상력과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초기 영화에서 사용했던 스톱 모션, 화면 겹침, 디졸브 효과 등을 로맨틱하게 구현하고 시각예술을 영화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혼성의 공간 안에 머무르게 한다.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면 본격적인 프로젝션 룸으로 변모된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일상적인 오브제를 그로테스크하고 뒤틀린 퍼포먼스와 결합하여 인간의 광기와 본성을 표출하는 욘 복(John Bock)의 작업 옆에는 조앤 조나스(Joan Jonas)의 대표작 <리딩 단테 III>(2010)와 뮤지컬 형식을 통해 신체와 오브제의 인터랙션을 기반으로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로리 시몬스(Laurie Simmons)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우스터 그룹(The Wooster Group), 덤타입(Dumb Type), 메리 레이드 켈리(Mary Reid Kelly)의 작업 또한 다양한 오브제와 실험적 무대 연출을 통해 연극, 신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문맥에서 퍼포밍의 형식적인 결과를 포용하고 편입시킴으로써 그동안 경험한 퍼포먼스보다 확장된 층들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캐서린 설리반(Catherine Sullivan)의 <수요의 삼각형(Triangle of need)>(2007)은 영화적 내러티브의 구조 안에서 기괴한 동작과 해체된 언어로 재해석함으로써 직조된 내러티브, 역사적 판타지, 그리고 영화의 파편들을 재구성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한 의미작용과 레퍼런스를 참조하고 있는 만큼 사전에 관련 정보를 알고 간다면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코드 액트전>은 이렇듯 관람(viewership)의 몰입을 통해 우리를     ‘몸’을 매개로 한 퍼포먼스 작품 안으로 안내한다. 다양한 인문학적 맥락 안에서 본인만의 ‘신체’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 온 10명(팀)의 작품들은 퍼포먼스의 다양한 가능성을 살피고 관객들에게 관람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코리아나미술관은 이번 전시 기간 동안 프로젝션 룸으로의 변모를 통해, 다양한 융합과 레퍼런스들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고 교감을 이끌어냄으로써 전시 공간에 유기적인 이음새를 만들어내고 관람객들로 하여금 총체적인 공감각성을 환기시킨다.
홍이지・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Review] 마류밍

마류밍

학고재 9.2~10.5

9월 2일부터 다음 달 초까지 학고재에서 열리는 마류밍 개인전은 ‘펀     (芬)・마류밍’ 탄생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다. ‘펀(芬)・마류밍’은 1993년 마류밍이 그의 행위예술을 통해 처음 고안해낸 작가의 또 다른 자아로, 이번 전시는 작년과 올해 베이징, 상하이에 이어 동일한 제목의 세 번째 전시이다. 이번 서울 전시는 초기 작품들에 대한 기록 영상과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일종의 회고전 형식을 띠고 있다.
전시된 작품은 우선 마류밍의 데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길버트 & 조지와의 대화>(1993)에서부터 여성복을 찾용한 탄생 초기의 ‘펀(芬)・마류밍’, 이후 여성 복장을 벗고 남성의 신체를 드러낸 ‘펀(芬)・마류밍’의 다양한 작품들까지 약 10년간 지속된 마류밍의 행위예술 역사를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외 2004년부터 2008년 무렵 제작된 회화와 입체작품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 최근작을 선보인 본관 전시장에는 2000년대 리옹, 뮌스터에서 관객 참여 형식으로 진행된 ‘펀(芬)・마류밍’ 영상이 입구에서 재생되고 있고, 이어지는 공간에 그 작품들을 토대로 그린 회화-설치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마류밍은 흔히 중국 행위예술의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중국에 행위예술을 시도한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류밍이 행위예술을 처음 접촉하게 된 계기 역시 1980년대 스승의 행위예술 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80년대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의 조류 속에 시작된 중국의 행위예술은 평론가 가오밍루(高名潞)의 지적대로 서구의 행위예술에 대비되는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공연(performance)’ 보다는 ‘신체예술(body art)’ 의 성격이 강하고, 각 작품에서 신체가 다뤄지는 방식은 ‘의식화(儀式化)’, ‘사회화’ 된 특징을 띤다는 것인데, 이는 마류밍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신체에 양성성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흔히 동성애와 관련된 성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마류밍이 무수히 해명했듯, 그는 동성애 경험이나 취미가 전혀 없고, 단순히 성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인간에게 존재하는 각종      ‘이화(異化)’ 현상과 그 실존을 자신의 신체를 통해 집약적으로 제시한 것일 뿐이다. 그가 ‘펀(芬)’이라는 글자를 통해 여성적 자아를 제시하면서도 ‘마류밍’이라는 이름 사이에 반드시 ‘・’을 배치하는 것은 바로 모순된 두 가지 속성 간의 분리와 구분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처럼 ‘펀(芬, 分과 동음)’으로 상징되는 모순적, 궤변적 자아는 관객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듯 다의적 의미의 절대적 ‘미(美)’를 대변하며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그 무엇을 상징한다. 그러나 마류밍의 작업에서 ‘미’는 종종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환경 맥락에 놓임으로써 결국 그의 작품은 인간의 삶과 자유에 관한 사회적 화제로 전환되곤 했다.
2000년대 들어 각종 국제 행위예술제를 통해 그가 관객 참여 형식의 작업을 시도한 것은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수면제를 복용했든 아니든, 즉 마류밍이든 펀     (芬)・마류밍이든 사람들과의 교류는 점차 유형화되었고, 오히려 진정한 소통과 교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사람 대신 10마리의 토끼를 풀어 사람과의 대화를 거절해버린 그는 2004년 홀로 만리장성을 걸은 후에 10년간 함께해 온 펀(芬)・마류밍과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실제로 마류밍의 실패한 첫사랑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기도 한 ‘펀      (芬)・마류밍’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분리’를 체감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는 그리움과 집착을 단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최근 작품들은 그러한 그리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반복적 관조와 사색을 보여준다. 과거 분리-연결된 자아를 게시, 조명했던 그는 이제 분리-연결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묵상하는 듯 보인다. 일명 ‘누화법(漏畫法)’이라는 기법은 결코 정면으로 합치될 수 없는 캔버스의 양면을 안료라는 매개로 침투시켜 양자 사이를 배회하며 그 분리된 양면의 관계에 끝없이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년간 분리-합일이라는 동일한 주제의 양면을 계속해서 왕복하는 마류밍의 작업세계는 그만큼 집요하고 어느 면에서는 자폐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불어 동일한 주제에 관한 고민이 점차 관념적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는 점은 그가 다루는 주제와 40대 중반에 불과한 연령을 고려할 때 과연 충분한 것일까 하는 우문을 남기기도 한다.
이보연・성신여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