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유휴열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작가 유휴열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다. <신명난 生/놀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4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열린 전시에는 1970년대 초기작부터 알루미늄을 이용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을 헤아리는 작가의 작업 여정에서 엄선된 작품 120여 점이 선보였다. 회고전 성격의 이번 전시는 작가 유휴열이 몸담고 살아온 시간과 장소에 깃든 예술적 성취를 확인하는 기회였다.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95×260cm 2001∼2002

<추어나 푸돗던고>(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95×260cm 2001∼2002

예술이라는 놀이를 통한 삶의 관조와 유희

이태호  익산문화재단 사무국장

우리나라 명산 중 하나인 모악산자락 밑에 작업실을 마련해놓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작가 유휴열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지역작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전형(典型)과 모범을 보이는 작가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미술실기대회를 휩쓸면서 두각을 나타낸 그가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꾸준하게 창작의욕을 불사르고 있는 점도 대단하거니와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한 변화와 실험을 거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더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유휴열의 작품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비단 방대한 양의 작품 숫자로부터 기인한 것만이 아니라 지난 50여 년 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변화무쌍한 작품 성향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유휴열은 타고난 재능과 예술가적인 기질, 그리고 여기에 성실함마저 겸비한 작가다. 작가는 모든 것을 작품으로 말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창작을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82년 전주 금하미술관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발점으로 하여 1990년대 초반에 그가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조형세계는 이미 많은 평론가와 이론가들에 의해 그 진가(眞價)를 인정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작품이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유휴열 작품의 이런 변화무쌍함은 그의 예술가적인 기질뿐만이 아니라 전위적(前衛的)인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과 더불어 실험정신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이다. 삶과 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고요한 수면을 견디지 못하고 끓어 넘치는 활화산과도 같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강렬한 색채와 역동성, 독특한 마티에르는 작품에 대한 열정의 분출과 다름없다. 이번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형식의 <유휴열의 生/놀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감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감각 너머의 세계를 표현해내고 있다. 보들레르가 인간의 우울과 이상을 동시에 그리려고 했던 것처럼, 랭보가 감각을 활짝 열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들여다보려고 했던 것처럼, 유휴열은 감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감각 너머의 세계를 표현해내고 있다. 전북도립미술관 전시 제목인 <유휴열의 生/놀이>는 이런 그의 작업들을 포괄하여 총망라하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화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휴열의 生/놀이>는 단순히 작가 개인적 삶과 인생을 담아내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과 인생의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얼과 흥, 신명뿐만이 아니라 한(恨)까지 내포되어 있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화두이기 때문이다. 삶과 인생 자체를 하나의 놀이이자 축제로 인식하는 그는 이번 전시 <유휴열의 生/놀이>에서처럼, 작가 개인의 자의식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민중의 한(恨)과 욕망, 울분 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승화시키면서 예술을 일종의 삶의 정화이자 축제로 펼쳐보인다. 필자는 이것을 ‘예술이라는 놀이를 통한 삶의 유희’로 정의하고 싶다. 따라서 <유휴열의 生/놀이>는 비단 연작의 제목이라기보다는 그의 예술적 화두에 가깝다.

 캔버스에 아크릴 227×908.5cm 2013~2014

<엄뫼, 모악> 캔버스에 아크릴 227×908.5cm 2013~2014

삶의 총체로서의 예술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필연적으로 전위적이고 다양한 실험들을 통하여 파생된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로 귀결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고, 작품에서도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기존의 개념들을 해체하고 거부하면서 늘 새롭고 신선한 방향으로 정진(精進)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재료 또한 마찬가지이다. 회화로부터 조각 및 설치작품으로 변화하는 작품의 성향뿐만이 아니라 회화물감, 흙과 도료, 한지와 합판, 돌, 수지, 알루미늄 등 재료 선택에서도 다양한 실험정신을 발현해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마치 카멜레온과도 같이 변화무쌍하다. 의미를 전달하는 모든 소통 과정에는 메시지 운반자로서의 매개수단 혹은 의미의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매체(medium)가 필요하다. 즉 모든 소통과정은 ‘매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체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위한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자 그 절차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된다. 예술작품과 표현 활동이 의미 소통의 수단이자 과정이라고 본다면, 그 매개인자가 되는 기술적 보조수단과 물질적인 표현수단을 일차적으로 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의 매체가 표현을 위한 재료나 단순한 도구의 중성적 성격이었다고 한다면, 유휴열이 다양한 재료를 통해 다양한 작품의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록 재료가 바뀌고 표현방식이 달라졌다 해도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자연적인 소재와 삶의 방식이 ‘놀이’라고 하는 예술적인 소재와 행위 자체로 전이되어 작품에 전착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놀이로서 살아있는 삶과 인생 그 자체이며, 그러한 재료들은 작가가 살아있음을 중개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작고하신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은 유휴열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삶의 총체로서의 예술’이라고 정의하면서 그의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애착, 그리고 인간의 아픔에 대한 진지한 공감, 삶에 대한 수용의 너그러움이 깔려있다고 하였다. 그 끈끈하고 너그러운 열기가 그의 작품에 인간적인 밀도를 지니게 한다는 것이다. 오광수 선생은 유휴열의 작품에서 음악성이 흘러넘쳐 가락과 리듬과 기운이 넘치고, 시각적인 대상이 쉽게 청각적인 것으로 전이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실세계를 예술이라는 놀이를 통하여 감각적으로 담아내는 부정형의 카오스(Chaos)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카오스 속에서도 질서와 법칙(Cannon)을 발견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 엿보이는 카오스적인 ‘무질서’는 다시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다가가 세계에 활력을 주면서 새로운 생명질서를 창조해내고 있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 엿볼 수 있는 생명의 원시성과 놀이를 통한 유희성의 회복은 다름 아닌, 물질문명에 물들어가는 인간존재에 대한 회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Hu- manist)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삶과 인생 자체를 ‘놀이’라고 하는 은유적인 언어로 표현하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잠시 그의 화력(畵歷)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유휴열의 작품 시기는 크게 몇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작업을 시작해서 다양한 탐색과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모색한 1970년대와 1980년대 후반, 다음으로는 1990년대 초반 흙을 주재료로 활용하여 <生/놀이> 연작이 제작되는 무렵부터 2004년 <추어나 푸돗던고> 연작에 이르는 유휴열 특유의 작업방식이 안착한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루미늄 작업을 통해 빛과 놀이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하면서 삶의 원형적 세계를 담아내는 최근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초기작에는 구상(具象)작품뿐만이 아니라 앵포르멜 형식의 추상작업, 1970년대 후반부터는 남관(南寬) 선생의 작품이 연상되는 반(半)추상 작품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는 합판작업을 중심으로 일종의 탈(脫)캔버스 작품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프랑크 스텔라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해체주의적 비정형 회화작품이나 액션페인팅 및 독일 신표현주의 성향의 작품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유휴열의 회화작품에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내면세계에 대한 강렬한 표현욕구와 자유분방한 붓 터치를 통한 독특한 마티에르, 색채구성 등은 미국의 액션페인팅이나 독일 신표현주의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하지만 유휴열의 작품이 언뜻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인 자기표출의 표현방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삶과 인간적인 체험을 곱씹으며 그것을 오늘의 인간 조건의 차원으로 여과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로써 풀어내지 못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서 풀어내는 일종의 한(恨)과 같은 것이 작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1990년대 후반 판소리의 장단을 주제로 한 일련의 시리즈와 군무(群舞)의 춤사위를 주요 소재로 2000년대에 연작으로 제작되었던 <추어나 푸돗던고> 시리즈는 이 시기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 이때부터 다층적인 놀이 개념이 그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알루미늄을 재료로 활용한 작품들도 매우 신선하다. 그가 알루미늄이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삶의 그것처럼 작품의 울림과 리듬이 빛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해와 달, 장생도, 토끼와 거북이, 꽃과 새, 만다라 등 우리의 민간신앙을 통해 전수되어 내려온 고대 이래의 신화적 세계나 불교적 세계 같은 삶의 원형적 세계를 지속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필자가 서두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유휴열이 자신의 작품에서 던지고 있는 화두인 <生/놀이>는 작가의 인생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관조를 통한 투영(投影)이자 투각(透刻)이라고 말할 수 있다. 50년이란 내공 깊은 화력(畵歷)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예술을 삶의 정화이자 축제로 인식하는 그의 작품 전반에는 삶의 유희성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해학, 삶과 인생에 대한 진지함마저 담겨 있다. 유휴열의 작품에는 그의 모습과 심성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들의 희로애락 역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최근에 그린 대형작품 <모악산의 춘하추동>은 우리네 인생의 희로애락 또는 생로병사와도 많이 닮아있다. 그렇다! 유휴열의 그림은 우리의 모습, 우리네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네 서민들의 삶에 대한 한과 신명, 슬픔과 기쁨이 내포되어 있다. 원초적인 욕망, 삶과 인생에 대한 발산과 응어리진 마음을 물감과 몸짓을 통하여 표현하는 그의 작품들은 회화적 몸짓과 다름없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굴곡진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 모악산처럼, 그는 어느새 모악산을 많이 닮아있었다. ●

유휴열은 1949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전주대학교 미술교육과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82년 전주 금하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0여 회의 개인전과 5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전주 모악산 자락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왼쪽) 알루미늄, 자동차 도료 183×366cm 2013~2014  (오른쪽) 알루미늄 260×157cm 2006

<리듬>(왼쪽) 알루미늄, 자동차 도료 183×366cm 2013~2014 <律>(오른쪽) 알루미늄 260×157cm 2006

 

 

 

[Review]회화를 긋다

회화를 긋다

갤러리 세줄 4.18-5.31

갤러리 세줄에서 ‘회화를 긋다’라는 주제로 중진작가 최병소, 박기원, 장승택, 도윤희의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뉴미디어 장르의 복잡하고 화려한 이미지, 시대를 풍자한 팝아트, 협업의 공존개념 작품들이 넘쳐나는 한국의 여느 전시장과는 달리 꾸준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예술의 이상적인 목적에 접근하는 작가들의 전시는 오랜만에 미학적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1980년대 한국의 미술계는 민중미술의 경향과 한국적 추상과 미니멀리즘, 개념작업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1990년대는 해외유학파들이 들어오면서 포스트모던의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2000년부터 상업적 명성을 떨치며 미술계를 장악한 젊은 블루칩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섬세한 변화를 추구해 자신만의 세련된 감각을 연마해온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시각예술의 본질에 해당하는 회화 장르 안에서 최소한의 선과 색채만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천장이 높고 넓은 면적의 화이트큐브 전시장과 잘 어울리며 내재된 에너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1층에는 장승택과 박기원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장승택은 물감과 붓이 아닌 화학적 질료를 통해 시대적 회화를 실험하며 세련된 현대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것들을 표현한다. 이번 작품은 색채를 사용하여 약간의 변주를 준 화면 안에 최소한의 움직이는 선을 통해 감각의 미세한 부분을 흔든다. 하나의 엷은 표면에 원을 그리고 층층이 쌓아 만든 화면은 정지된 형태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보는 이를 뿌옇고 모호한 심연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박기원은 장지로 된 화면을 비스듬한 선으로 분할하고 그 면 안에 촘촘하게 선을 그어 다양하게 작동하는 공간의 질서와 변화를 그려낸다. 사각 평면이라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비정형적으로 분할된 면들과 그 안에 각각 다른 감각으로 표현된 선들은 시간에 따라 축적된 세계의 조합이다. 사계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이나 사물은 선으로 대입되어 선이 만든 면, 그리고 그 면들이 만든 공간 안에 감정이 흘러들어가는 명상적 작품이다.
2층 전시장에서 도윤희의 대작들과 최병소의 신문지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윤희의 회화는 형태의 흔적과 선들의 분절이 무채색 화면에 섬세한 감각으로 혼합되어 화면 전체로 퍼져나간다. 배경의 무의식적이며 원초적인 성층의 표현은 시간의 다양한 흔적들을 암시하고 그 위에 씨앗, 줄기의 시작과 같은 형태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생성된 비정형의 유기적 형상은 식물의 뿌리처럼 보이거나 산과 같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된다. 확실한 형태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의 이중구조로 그려진 회화는 감각적인 것과 비감각적인 것을 느끼게 하며 존재의 비밀에 섬세하게 다가가게 한다. 최병소의 작품은 신문지의 한 면은 그대로 보여주고 다른 한 면은 연필로 내용을 지워 검은 화면을 만든 것이다. 그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싣는 신문의 활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연필을 사용해 검은 색이 전면을 뒤덮을 때까지 그려 한 폭의 추상화로 표현했다. 작가는 편향, 왜곡, 변질이라는 매체 안의 숨은 속성에 대한 시니컬한 거부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 예술의 순수함 속에 그것들을 가둬놓는다. 그려지면서 내용은 비워지고 채워지면서 화면은 비워지는 조형과 삶의 근본구조가 함께 수반된 작품이다. 검은색 표면은 흑연으로 축적된 두께와 작가의 반복적 드로잉에 의한 힘의 밀림으로 요철이 생성되면서 추상표현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과 개념적 태도에서 출발한,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열린 개념의 새로운 추상이다.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는 시대가 원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영리한 작가들의 작품이 각광받는 미술계에 묵묵히 충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깊이 파 들어가며 초월적 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을 상업화랑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황은 모더니즘을 경험하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돌입하였기에 이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감상을 해보지 못했다. 현란한 이미지의 제공과 투자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재의 우리 미술계는 예술의 원래 목적인 본질을 깊이 사고하게 하는 중진, 원로들의 작품을 조명할 기회를 많이 마련해 삶과 예술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찾고 또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김미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Review]소음인가요

소음인가요

서울시립미술관  5.13-6.22

사운드아트 전시를 표방한 <소음인가요>는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즉흥음악, 전자음악, 실험적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전개해 온 뮤지션 19명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현대예술에 민감한 관람객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권병준, 최준용, 트랜지스터헤드 등 국내 인디음악에서 잘 알려진 이들 이외에도 초대된 뮤지션은 모두 2000년대 이후 국내 각종 전시에 특별 이벤트나 개막공연의 형태로 활발하게 참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국내의 아방가르드 음악과 현대예술 분야의 크로스오버를 점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지금까지 독립적인 장르보다는 전시행사의 부속물로 수용되어 온 낯선 소리들과 비트들을 어떻게 현대예술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또한 이 뮤지션들의 공연이 가진 본원적인 일회성과 덧없음(ephemerality)을 넘어서 이들의 작업을 보존하고 경험하는 데 적합한 인터페이스는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이 전시를 둘러싼 분위기(ambience)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식 중 <소음인가요>는 두 번째 문제의식의 분위기를 불어넣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서구 현대예술에서 사운드아트가 미적 대상이자 독립적인 연구주제로 부상하는 데 있어 핵심적으로 작용한 키워드들인 노이즈, 청취, 침묵, 물질성, 잠재성, 시공간 등은 이 전시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작업들에서 다양한 진폭과 주파수로 환기될 수 있다. 하지만 전시의 구성이 이러한 키워드들 대신 아방가르드 음악과 전자음악의 장르들을 분류체계로 활용하기 때문에 관람자가 사운드아트의 개념과 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대신 전시는 국내 전자음악의 역동적이고도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망라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이 아카이브에 접근하고 경험하기 위해 효과적인 인터페이스를 마련하는 데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장에 설치된 19개의 아날로그 텔레비전 모니터는 사운드아트의 경험적 대상인 소리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하드웨어의 물질성을 환기시키며, 찰나성에 사로잡힌 공연에 일정한 시공간적 지속성을 부여한다. 아울러 뮤지션들의 홈페이지와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를 함께 소개하여 관람의 경험이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장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관람자가 특정 뮤지션의 음원과 소개자료를 직접 CD로 구워 DIY 리플릿을 제작할 수 있게끔 했다.
비록 현대예술에서 사운드아트의 경향과 미학적 논점들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이 전시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작업을 살펴보면 서구 사운드아트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국내 뮤지션과 예술가들의 작업들에서 어떤 영역들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어 있고 어떤 영역들이 부족한지를 파악해볼 수는 있다. 전자음악과 즉흥음악은 발달해왔지만 비주얼 뮤직(visual music)이나 갤러리 설치작품의 형태로 청각적 시공간을 구축하는 예술적 경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음인가요>전은 오늘날 국내 사운드아트의 현주소를 소개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한 발전방향들을 암시하고, 해당 분야를 테마로 한 더욱 본격적인 전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김지훈・중앙대 교수

 

[Review]임승천 –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임승천  __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성곡미술관 5.2-7.27

‘네 가지 언어’라는 부제로 열린 임승천 개인전은 4막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연극 같다.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가설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다가오게 하는 강력한 가설이다. 거기에는 문학이나 연극, 영화같은 서사가 있지만 그러한 시간적 형식이 공간적 형식으로 번역될 때 간극이 발생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도약과 비약이 있는 것이다. 서사적 요소들은 선형적 배열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조합되어 읽힌다. 열린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사와 형상은 서로를 받쳐주기 때문에 의미의 방향타는 존재한다. ‘상실’로 이름 붙은 1전시실은 심해의 풍경처럼 연출됐다. 제 몸보다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큰 물고기는 비대한 욕망의 덩어리이며, 주변에 배치된 사실적 혹은 신화적 인물들은 이 괴물의 희생자다. 희생자들은 발이 묶여있고, 등골마저 빨린 상태이다. 전시실 앞의 여주인공은 손에 피를 묻힌 채 경고하고, 이 모든 광경을 숙고하는 눈이 셋인 괴물/선지자 캐릭터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노시보(Nocebo)’로 이름 붙은 2전시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 남녀 사이의 거짓말이 야기하는 비극의 무대다. 여성의 거짓말로 남성이 거인으로 석화되는 신화적 장면이다.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와 사회를 무대로 하며, 언어에 실린 욕망이 주체와 객체를 모두 상징적 구조의 노예로 만든다. ‘고리’로 이름 붙은 3전시실은 희로애락의 4개 가면을 쓴 무뇌인들이 발목이 묶인 채 줄줄이 연결된 군상의 무대다. 이 집합적 정체성은 실제로는 원자화되어 있기에 강제적 연결이 필요하다. 연결망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그물 같은 멋진 생태계가 아니다. 이성 및 합리성과 거리를 두는 이 분열적 개체들은 연좌제처럼 죄를 공유하는 클론들일 뿐이다.
‘순환’으로 이름 붙은 4전시실에서 서커스 천막 안 4단 케익 같은 구조는 조트로프(Zoetrope)처럼 돌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막 안의 구조물은 위로부터 시스템의 지배자/관리자/향유자/파괴자 순으로 배열된다. 체제를 선전하는 요란한 깃발, 감시하는 시선, 캉캉 춤 같은 소비의 향연 아래에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벽을 치는 노동자는 시스템의 최말단 희생자이자 그에 도전하는 세력이다. 빙빙 도는 이 순환적 구조는 이익을 창출하는 기술로 환원된 사회를 상징하며, 각 계층을 이루는 문화적 정체성은 권력이 동원하는 요소일 뿐이다. 작가는 막간극에 잠시 등장한다. 막과 막 사이의 공간에는 가면 쓴 얼굴과, 원근법의 소실점에 위치하면서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흐릿한 유리창을 손으로 닦는 자폐적 인물이 보인다. 그는 가면이나 층층의 구조 뒤에 숨어있지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표한다. 보이지 않는 구조는 주인공들 못지않게 힘을 발휘한다. 심해처럼 색을 칠한 <Missing>은 무의식과 상실의 무대를 말하며, <Nocebo>에서 멀리 마주한 남녀를 연결짓는 것은 언어의 망이다. <Link>와 <Circle>은 사회 속 인간들이 맺는 관계망 그 자체이다. 구조는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를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인간은 그러한 구조의 산물이며, 익명적 구조에 얼굴 표정을 부여한다. 거대 물고기는 촘촘한 비늘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굼뜨다. 목적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유지 확대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현대의 비대화된 관료제를 닮았다. 비슷한 것들이 줄줄이 엮인 4면상의 군상은 4지 선다형 문제를 푸는 학생처럼 주어진 것 안에서만 자율성과 자유를 구가할 따름이다. 임승천의 작품은 이러한 체계 속에서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나 내밀한 자아도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선영・미술비평

 

[Review]정정주 – Scotoma

정정주  __  Scotoma

갤러리 조선 4.30-5.29

정정주의 작업은 건축의 모형과 내부에 설치된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모형 내부의 건축적 이미지를 외부로 끌어오는 설치 영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부를 은밀하게 비추는 그의 영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면서 ‘바라보는’ 친숙한 공간을 카메라의 눈으로 재투사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보여지는’ 불안한 응시의 지점을 유추하게 하였다.      ‘응시의 도시’로도 불리는 그의 대표적인 영상설치 작업은 시선의 주체이자 응시의 대상으로 관객의 자리를 재위치지으면서 우리를 복잡한 시각의 장(場)과 그것이 야기하는 인간의 알 수 있는 불안감에 진지하게 연루시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응시는 시각장을 지배하는 코기토로서의 주체개념을 해체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이기도 하다. 사물이 나를 응시하는 주체의 경험과 주체보다 선행하는 타자의 응시는 대상을 지배적으로 바라보는 통합적 의미로서의 주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응시의 개념을 유추하게 하는 이번 전시 <암점(Scotoma)>의 대표작인 영상 설치 <응시>는 바로 이러한 시각과 주체의 문제를 의미화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시장 중심에 대칭적으로 위치한 기다란 레일을 중심으로 두 개의 프로젝터가 서로를 향해 다가오고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각각의 프로젝터 앞에는 작은 비디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서서히 다가오고 물러가는 반대편 프로젝터의 느린 이동과 렌즈로부터 나오는 눈부신 빛을 담아내고, 이를 실시간으로 전시장 벽에 투사시킨다. 두 개의 프로젝터가 가까워질수록 빛의 점들은 강화되고 동시에 영상화면은 흰색의 빛으로 점점 차오른다. 관객이 들어섰을 때 마주하는 것은 바로 근원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는  산재한 빛들이다. 프로젝터 기계와 영상화면 속에서 동시에 나오는 이 빛들은 라캉이 말한 정어리 깡통의 빛, 알 수 없으나 산재하는 타자의 응시를 은유하는 듯하다.
정정주의 작품 <응시>에서 관객은 작품을 바라볼 뿐 아니라 카메라에 의해 포착되어 비디오 영상 안에 포섭되면서 또 다른 관객의 시선의 대상이 되고 만다. 보고 보여지는 이러한 중층적인 시각의 메커니즘 속에서 관객은 지각의 혼란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마주한다. 이러한 불안감은 시각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데서 나오는 상실감, 위협적인 응시를 감지하였을 때 느끼는 심리적 상태와도 같다. 작가가 거주하는 아파트 거실을 찍은 영상과 지인들의 아파트 거실을 찍은 영상을 섞어 전시장 전체에 회전시키는 영상 작품 <5개의 거실>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증폭시킨다.
지금까지 언급한 응시와 주체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때, 작가가 두 개의 작은 영상 <두번째 창문>과 <바다방>을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로부터 끌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호퍼의 회화가 카메라가 바라보는 앵글과 유사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선다. 정정주의 영상에서 창문으로 가시화된 공간과 그 너머에서 들어오는 빛은 호퍼의 회화처럼 화면이라는 공간적 틀을 벗어나 화면 밖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안을 바라보는 응시의 지점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배명지・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Review]노석미 – 높고 높은 풀 위로

노석미  __  높고 높은 풀 위로

자하미술관 5.9-6.1

“너는 왜 일을 하지 않지? 일자리가 없어서 그런 거니? 내가 공장 소개해줄까?” 평소에 늘 집에 있는 나를 노는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잖아.” 그랬더니 그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건 직업이 아니잖아.”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만의 말이 맞기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공장에 다녀야 할까?’라는 생각을 잠깐이지만 정말 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봉제공장의 미싱사면 좋겠다고 말이다.(노석미,《  서른살의 집》 중)
노석미는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고 쉬고 잠을 자며 풀벌레와 바람과 고양이들과 계절과 함께 일상을 조밀하게 그려내며 자유로운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우리 사회가 언니들에게는 결코 편하지 않은 사회이니 쉬운 일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막상 멈추면 불안해하고 자꾸 무언가를 재촉하니 문제다. 게다가 자신만 그러면 누가 뭐라나. 괜히 주위 사람들을 흔들어댄다. 작가는 조급증과 강박에 출렁대는 파도를 자신의 취미로 수용한다. 불안과 불편은 잠시 지나가는 일상의 소소한 일과로 녹아든다.
1990년대 말 노석미의 개인전을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노석미의 작업은 컬러풀한 오브제를 전시장 전체에 매달고 늘어놓은 설치로 관객들은 전시 관람이 곧 작품 속을 돌아다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작업의 섬세함과 몰입의 경험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 후 간명하고 단순한 드로잉과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미지와 함께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 또는 예술관과 연애관을 고백하거나 수다를 떠는 에세이를 담백하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불편할지언정 결코 외롭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은 그녀의 삶의 균형을 잡고 채워주는 힘이자 의지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오랜 시간 공들인 바느질이 주는 깊고 그윽한 풍취가 느껴진다.
그녀의 작업은 태도의 독자성, 수수하면서도 섬세하고 간결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어제와 내일을 염려하면서도 오늘 하루의 삶에 집중하는 생활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녀의 그림은 그림이자 동시에 일기이며 하나의 에세이이자 시가 된다. 풍경처럼 화가의 일상이 잘 버무려져 침전된다. 정교하거나 세련된 재현의 테크닉에 연연하지 않으며 드로잉과 채색과 이야기를 엮듯 이어가고 잠시 뚝 끊거나 방향을 틀며 의도적인 전략이나 계획 없이도 공감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일련의 그림과 에세이는 생활과 결합하는 시간의 아카이브를 만든다. 그녀의 아카이브는 불편함이 곧 아늑함과 멀리 있지 않고 모호한 것으로 채워지는 시간들이 사실은 매우 명쾌하기도 하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생활의 희로애락이 모자이크처럼 또는 조각보처럼 일상과 예술이 분리되기 이전으로 회귀하는 여행을 엿본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드는 과정이 곧 창작인 듯, 오롯이 자신의 시간들로 채운 채 잠시 세상을 지나가는 여행자의 야생성과 경쾌함이 있다. 그녀는 매번 디테일로 가득한 생활로 나아간다.

김노암・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Review]숨을 참는 법

숨을 참는 법

두산갤러리 4.23-5.31

국내의 전시 중에서 제목이 지나치게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안 그래도 작가가 다루는 소재나 형태가 복잡해지면서 미술계의 ‘전문인’들 사이에서도 ‘전위적인’ 작업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여기에 전시제목마저 모호하면 혼돈은 가중된다. 이번 <숨을 찾는 법>에서 각종 해체주의적인 쟁점–언어의 이중성, 소통 불가능성, 모순된 상황, 해석의 다양성, 좌절된 상황–이 재현되는 방식도 그러했다. 전시의 제목이나 작업들이 모호해서 진정으로 관객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거나 단순해서 허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시장 입구에서 “숨을 찾는 법”에 관한 설명이 주어졌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리감 대신에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리감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숨을 찾는 법>이 은유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비평적 사회현실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확히 ‘숨을 참는 법’이라는 제목이 이러한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불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입구에 놓인 구동희의 <부목>설치를 비롯하여 양정욱의 비교적 고전적인 목조 조각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불확실해 보였다. 물론 21세기 서구 인문과학의 발전이 소통의 불가능성을 줄곧 주장해왔고 현대미술도 이러한 주제를 열심히 답습해왔다. 하지만 좌절, 소통의 부재,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공공의 장소에서 구현하고 관객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구동희의 <부목>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다. 시간을 두고 관객의 참여를 이끄는 상황이나 작업 구상단계에서 생성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없었던 탓에 관객은 전시장의 중앙에 놓인 화분과 외곽에 설치된 각종 설치물들을 주시하면 된다. 그러나 전시장의 CCTV를 가리는 파이프, 생명력을 상징하는 화분, 트럼펫과 악기에 달려서 드리워진 현수막을 작가의 설명 없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멋진 소리를 뿜어내지 못하는 악기나 건물의 뒤쪽에나 숨겨져 있을 법한 파이프가 외관으로 노출되어 있는 모습이 모순되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의 설치작업을 그리 단순히 해석해도 될는지, 좀 더 심오하고 독창적인 생각이 숨어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호하거나’의 또 다른 축으로서 양정욱의 작업은 ‘단순하거나’의 위험을 지닌다. 각종 빈티지 물건들이 정교한 목조 조각에 부착된 작업은 보기에나 심지어 듣기에나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빈티지한 목조작업의 정교함과 신기함이 관객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나 ‘아버지는 일주일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등의 제목은 관객을 안도하게 해준다기보다는 허무하게 만든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연민과 이에 투영된 우리 세대의 그야말로 좌절된 상황을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의 엄청난 노력과 기술을 고려해 보았을 때 복잡한 주제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정지현의 <듣기 위해 귀를 사용한 일>은 좌절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각기관에 대한 불신이 무엇인지가 비교적 정확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의 비판을 비껴가고 있다. 작은 소파가 놓인 공간 안에 들어가 전화기를 들게 되면 소리 대신   (예민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고주파의 소리) 불이 켜지면서 앞쪽에 바닷가 풍경의 영상이 펼쳐지고 실내의 환경이 도드라진다. 즉 소리를 듣고자 했으나 시각이 더 자극되는 순간이다. 반면에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안쪽의 불이 꺼지면서 관객은 유리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공간, 구석, 천장, 시각과 청각 등의 이면적인 세계에 관심을 지녀온 정지현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오랜 관심을 현상학적이고 관객 참여적인 방식으로 풀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시의 공통적인 주제에 해당하는 허무주의적인 감수성은 현대미술에서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좌절, 모순, 소통의 부재, 심지어 민주주의의 몰락 같은 단어들이 별반 새롭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허무주의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사고와 인지의 이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다면 좌절, 모순과 같은 개념들은 일종의 칙(chic)한 스타일로 잘못 해석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숨을 참는 법>에서 필자가 좌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동연・미술비평

 

[Review]Two Drawing Project – 열림과 닫힘

Two Drawing Project  __  열림과 닫힘

갤러리 소소 5.13-6.15

오늘의 화가들에게 사는 일과 그리는 일은 대개 분리되어 있다. 미술과 인격은 분리되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진 지 오래고, 무용(無用)을 기본으로 하는 예술이 실제의 삶과 맞닿는 일은 견우직녀의 만남처럼 어렵기만 하다. 삶을 예술처럼 살아가고, 예술을 삶처럼 만들 수 있다면 예술은 사라질 것인가? 김을의 말처럼 “그림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세상은 언제 오려나?”
‘서울 드로잉 클럽’이라는, 이름부터 좀 웃음이 나는 그룹의 전시회가 갤러리 소소에서 1, 2부에 걸쳐 진행되었다. 웬 일요화가회 같은 명칭을 가진 이 그룹의 멤버들은, 서로 제각각의 경향을 가진, 연령대도 차이가 나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그룹의 명칭과는 달리 모두 서울에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전시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더 많이 했던 것 같고, 드로잉에 대한 관점의 깊이와 넓이도 서로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모일 이유가 없을 것 같은 이들이 모여, 전시의 1부에는 각자의 드로잉에 대한 관심을 내보이는 작품을 선보였으며, 2부에서는 여덟 명 작가가 각자 제안서를 쓰고 각각의 제안들에 반응하여 작품을 제작해 전시하였다. <노자(老子)가 가르쳐준 드로잉>(김을), <뜻한 바 없이>(김태헌), <Nothing>(송민규), <그림일기>(이상홍), <사건의 드로잉>(홍원석), <이어달리기(이승현), <15분이 넘지 않게>(이주영), <귤 보고 그리기>(이해민선), 이렇게 여덟 작가의 제안서가 모두에게 발송되어 상대의 제안에 따라 드로잉을 했기 때문에, 하나의 명제에 8점의 작품이 엮여서 보여지는 방식인 것이다.
여덟 작가의 제안들은 제안자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고 예술관을 짐작하게 하기도 하며, 혹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고민과 짐을 상대의 손에 넘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나온 작품들은 대체로 각자의 원래 작풍의 바리에이션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타인의 제안을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15분이든, 7일간이든, 특정하게 소요되는 시간 속에서,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를 만난 흔적들이 ‘드로잉’의 형식으로 드러나는데, 이 드로잉 작품들에서 작가들의 삶의 태도, 타인을 대하는 방식 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윤희・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Review]장재민,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

장재민,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

Project Space 사루비아 다방 5.2-31

그리기의 대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 장재민의 그림은 풍경을 그리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확정적이고 단선적인 풍경 대신에 그의 화면 위에 올라와 있는 풍경은 어쩌면 대상이라기보다 잡을 수 없는 상태이자 기온처럼 보인다. 변화무쌍한 어제와 오늘의 날씨, 더웠다가 추워지는 체온계의 높낮이처럼 그림 안에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한다고, ‘감각’에 의존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장재민이 담아낸 풍경은 확정적 단서가 아닌 쌓인 밤과 낮의 시간, 물 옆의 연기와 숲속 공터 그리고 그 시간들 속으로 사라졌다가 조금씩 몸을 일으켜세우는 여백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채워지는 풍경 사이로 각각의 장면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얽히고설킨 한때를 보여준다. 작가가 잡아낸 한때의 장면을 그는(그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는) 왜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이라 이름붙였을까. 잃어버렸기 때문에 폐허에서 솟아나는 선분홍색의 작은 살덩어리처럼, 그림 속을 가로지르는 붓질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찾고자 한다.
찾기, 그리고 걷고 보며 탐색하는 일은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그림, 그리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른 풍경을 발굴하는 일을 지속하게 한다. 장재민의 그림은 풍경을 불확정적인 미지의 단서들로 둘러싸인 새로운 자리로 불러온다.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대상들을 멀리 또 가까이 보는 굴절된 조감의 시간을 통해 그림 속의 단서들은 하나씩 돌출해 바깥으로 걸어나온다.
초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에 찾은 전시장은 어쩐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전시장에 걸린 몇 점의 캔버스는 벽면에 밀착되어 있지 않다. 툭툭 몇 장면을 축약해 잘라낸 듯 평평하게 걸린 화이트 큐브의 그림들과는 다르다. 전시장에 따로 또 같이 있는 몇 점의 그림은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 안에 갇히지 않고 한 바퀴 둘러본 듯한 사방의 풍경이 되어 바깥의 현실과 겹친다. <Reaction for Nothing>, 가로 468cm에 달하는 긴 그림이 펼쳐져 있다. 어떤 그림은 벽의 모서리를 꼭지점으로 두고 사선으로 걸려있기에 벽에서 살짝 앞으로 튕겨져 나와 벽의 시간과 일정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이를테면 <Blank Sight>가 걸려있는 방식은 중력을 가진 그림의 무게와 지탱하는 벽이 팽팽하게 서로의 긴장 관계를 대칭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서 보이는 산 아래의 이름 모를 장소는 작가가 잡아내고자 하는 ‘비어있음’의 역설로서, 풍성한 상태를 드러낸다. 장소의 구체성은 사라진 대신 그때 존재했던 찰나의 땅, 산, 공기의 감각들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생경하게 더듬는다. 그런가 하면 <Cold Breath>에서 차가운 살얼음 수평 면 위에 수직으로 뻗은 가는 나뭇가지들은 가려진 시야를 복원시키는 날 선 한때의 기록이 되려 한다.
평소와 다른 몸의 감각을 불현듯 체현하는 것. 장재민의 그림에 공존하는 뜨거움과 차가움은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하나의 관통하는 시야 안에서 바라보게 한다. 회색 톤의 정조가 감도는 그림에는 몇 겹의 생채기, 그러니까 붓이 만들어낸 리듬의 흔적이 보일 듯 말 듯 약간의 경쾌함을 남긴다. 작품 <Line and Smoke>의 장면은 미끄러지면서 사라지는 연기의 찰나를 그림으로써 잡아낸다. 전시장에 있는 그림 중 가장 따뜻한 체온이 감도는 그림 <4 Boards>에는 유일하게 사람이 보인다. 발에서부터 허리까지, 하체만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다. 관람객은 얼굴없는 이 사람의 시야를 유추하며 계단 위 공간에 놓인 이 그림을 올려다보게 된다. 사라져 가는 모든 풍경은 장재민의 그림 안에서 유일한 시간을 획득한다.

현시원・독립큐레이터

 

[Review]최혜인 – 小.行.星

최혜인  __  小.行.星

갤러리 담 4.23-5.3

최혜인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는 곡식과 채소 등의 식물에서 소우주(microcosm)를 발견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잡식성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식사 행위의 재료가 되는 곡물과 채소는 발아와 성장을 거쳐 수확됨으로써 인간의 생명 공급원으로 제공된다. 최혜인은 이러한 식물 성장의 순환 과정에서 변화하는 미세한 모습을 포착하여 그것을 우리 삶의 여러 가지 모습과 생명의 순환 과정을 표현하는 시각적 이미지로 응용하고 있다.
씨앗과 낱알에서 싹이 돋고 자라나서 개화와 결실로 이어지는 식물의 순환과정은 태아에서 발달하여 탄생과 성장으로 진화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과학이나 철학에서 탐구와 사유의 중심에 놓고 바라본 시각과 달리 미술에서는 다분히 부차적인 모티프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역사화와 종교화, 인물화에서 무심히 다루어진 주변적인 소재로서의 식물들이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것으로부터 거대한 인간의 서사나 우주의 축소판 같은 내러티브가 도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최혜인의 작품은 이런 면에서 신선하다.
최혜인은 장르의 경계에 구속되지 않고 장지와 순지, 먹, 백토에서 캔버스와 아크릴까지 회화의 재료로 동원할 수 있는한 폭넓은 재료를 도입하여 몇 알의 콩과 쌀이 광활한 우주의 소용돌이와 우뚝 선 산의 모습처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끼리 알록달록한 색상을 띤 채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에서 추상적 화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여성 작가로서 모성과 생명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을 우주의 유동적인 변화와 달의 움직임 등의 천체물리학적 원리로 투사하여 비중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최혜인의 작품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주제 선택만큼이나 작가적인 조형 탐구의 진지함과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생명현상에 대한 과장없는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로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여 시각적으로 언어화해서 관람객과 소통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최혜인의 모티프에 대한 해석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하계훈・단국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