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 정체성의 갈등 현장
미술이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필자는 100여 년이라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시공간 속에서 예술가들의 문제의식과 고민을 주제별로 살펴보고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펴보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미술사적 접근보다는 인문학적 접근에 가깝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 개인의 정체성과 시대적 요구 사이의 갈등 관계 속에서 작가들이 예술가이자, 사회 구성원으로 그들의 경험을 어떻게 작품에 반영했는지 주목한다.
강성원 미학
이 글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의식’과 ‘고민’이 ‘작업’에 나타나는 바를 주제별로 살피고자 한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어찌 보면 비평가들이 해 온 비평방식의 전제이거나 주제가 있는 기획전에서도 보이는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주제로 작품을 파악하는 방식이 관행적이 되면서 놓쳐버린 매우 중요한 지점들이 있다고 여겨지기에 한국미술 전체를 대상으로 주제별로 다시 읽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작가가 작업에서 표현하는 미적, 일상적 경험과 판단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른다. 성장 문화와 구가하고 지향하는 생활도 작가별로 다양하다. 새로운 비전을 향한 계기도 나름대로 특별하다. 이런 다양성과 차이들은 새로운 미적 차원에서 작가의식이나 주제의식으로 전환되고 응축된다. 작가마다 공유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같은 시대라도 다른 시대상황인식을 보일 수 있거나 가족관이나 성(性)정체성, 역사관이나 문화관, 민족관 등에서 다른 마음과 생각을 내비칠 수 있다. 여기서는 작가의식이 펼쳐지고 전개되는 작업상 ‘문제의식’의 지평과 비전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과 얽힌 맥락들을 드러내고 그 내용을 다시 지난 100여 년의 시공간이라는 위상적 퍼스펙티브로 수렴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그림’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매체가 ‘행위’든 ‘설치’든 또는 ‘평면’이든 작품주제가 창작방법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의 차원’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작품주제가 작가나 평론가의 전시서문 글 속에서나 작품제목 정도로만 인지되거나 상품가치 인증을 위한 문화적, 기술적 참조 곧 배경 정도로만 문제시되고 있다. 물건 혹은 상품인 ‘작품 자체’의 이미지보다 가치 있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의 콘텐츠는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바 ‘내용’이자 내용을 작품으로 만드는 ‘창작방법’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근대미술 도입부터 지금까지 작가들이 작품의 주제와 소재, 매체와 방법을 고민하던 문제의식의 큰 흐름이나 구체적 사례 혹은 연관성을 보려고 한다. 암암리에 혹은 의도적으로 상업적인 요소를 포함할지라도 작가는 자신의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한다. 삶을 어떻게 대상화 하는지, 공공에 말 거는 방식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그리고 작업에 임해 자연과 사회에 대한 느끼는바 내용–이런 태도와 방식이 공공가치인데–을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투’, 작가적 정체성이 담긴 내용과 형식에 대한 작가의 고유한 가치론이 작품을 예술의 차원에 진입시키며 예술을 인문학적 정신의 산물로 만든다.
한국 미술사의 표상은 작가나 작품의 연대기가 아니라 작품에 깃든 생과 사, 인간과 문명과 자연에 대한 문제의식의 차원에서 나와야 한다. 작품이 지닌 결과적인 내용의 예술적 가치가 ‘미적 차원’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작가의 마음이 ‘미적 문화’인데, ‘미적 차원’ 속의, ‘미적 문화’ 상의 작가적 고심(苦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치 있고 그래서 미술사와 미술의 ‘문화적 콘텐츠’와 ‘미술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작품이라는 ‘물건’은 이러한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다. 물건인 ‘작품’은 일종의 하드웨어이다.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물건 그 자체로 하나의 특별한 미술관이다. 작가는 자신의 개별 작품, 곧 개별적인 특별한 미술관의 연속 생성을 통해 자신만의 미적 콘텐츠를 연구하며 생성시켜나간다. 그 결과가 작업의 진정한 콘텐츠인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다. 작가가 주제와 창작방법으로 해 온 일들의 성격을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프로젝트나 프로그램 혹은 엔터프라이즈(기업충동)의 기획성을 띤다. 이번 시도는 이런 ‘일’, 곧 작품이라는 미술관에 ‘사회적 차원’의 내용을 자신만의 전시연출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기획의 미적 차원과 미적 문화를 서로 매개하고 맥락화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들이 행한 기획의 전체상을 ‘작품 주제’라는 연결고리로 매개해보려는 것이다. 필자는 작품 주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여기서 한국 근현대미술사 아카이브의 새로운 정립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기에, 본인이 선호하는 주제들을 선별했다. 주제 범주들은 사실상 서로 연결된 문제여서 편의상 큰 틀의 분류를 가능하면 유지하되 필자의 관심에 우선하는 주제영역만을 살펴볼 것이다 .
작업에는 작가의 몸과 마음 문화의 특별한 역사와 방향성이 표현된다. 그러면서도 한편 생활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이데올로기적 교육의 틀에 갇혀 있거나 체화되지 않은 사회적, 정치적 반향을 담기도 한다. 어쨌든 작가는 그야말로 무언가를 공공화하기 위해, 가치를 얻기 위해, 가치론을 인정받기 위해 이전 생의 전 역사와 이후 생의 전 계획을 투여한다. 게다가 모든 작업은 비참하고 비굴한 사회에 대한 나름의 엄중한 저항이다.
작가의 작업에 대한 이런 이해를 전제로 다룰 주제 범주는 크게 1) 개인적 조건이나 지역적,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작가의식,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의식과 2) 인간과 자연, 사회와 문화, 사건이나 사물의 체계 혹은 상태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태도, 마지막으로 3) 예술과 가상의 문제 등 예술적 소통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 등이다. 이 같은 주제들을 따라가기 위해 작가의 진술을 우선적 자료로 검토할 것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화하려 했던 부분, 곧 작가 자신의 특수한 표현이자 그가 속한 사회 전체의 특수한 표현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생활관계와 생활요구의 측면에서 이 내러티브들을 파악할 것이다. ‘작업’과 ‘진술’을 매개해 작업이 생산되기까지의 미적 문화에 놓인 생(生)의 발로(發露)의 내적, 외적 계기들과 지향성이 그려내는 그림을 볼 것이다.
지향에서 표현되는 정체성이란 본래 이중적 기능을 지닌 개념이다. 정체성은 주어진 역할과 기대에 자기를 동일화하는 동일시의 개념인 동시에 이러한 동일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른 비전을 바라보는 개인과 사회의 저항적 자의식이기도 하다. 정체성은 고착적이거나 불온하다. 특히 우리처럼 전통에서 현대로의 이행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시기와 겹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으며, 민족 분단과 냉전적 이념대결을 겪고 있는 사회의 개인은 정체성 인식이 선명히 이중적이고 분열적이다. 개인은 혼란과 불안, 긴장 속에서 사회생활을 유지한다.
이 장(章)에서는 작가 개인의 작가적 정체성 문제를 주제로 작가의식과 시대의 요구가 맞물려 갈등하는 지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정체성 개념의 이중적 기능에 대한 작가의식은 특히 미술작품에선 명료하게 드러나고 근대초기 이후 거의 모든 작업의 근본적 문제의식 혹은 기본적 태도로 나타난다. 따라서 맨 먼저 이 문제를 관통해나가야 전체 주제들이 역사적으로 제대로 맥락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 동일시와 저항 의식
요즈음 포스트콜로니얼 담론 같은 다양한 이슈들에서는 마치 유목적 이주 개념이 탈근대성의 마지막 대안처럼 제시되면서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느 때보다 전 지구적으로 민족적, 문화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차치하고 보더라도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국경을 벗어날 때 국가적 아이텐티티를 보증하는 도규멘트 없이 갈 수 없는 것이 현재 인류의 생활세계이다. 근대적 국경이 확정된 이후 그럴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한 개인의 사회적 존재를 공인해주는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 그 시스템에서 증명하는 개인의 자기동일성 증서를 요구하지 않는 생활세계, 진공의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권 없는 도경(渡境)은 밀입국이요 범죄이다.
한 국가 내에서도 소위 주민증이나 시민증 없이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주민증이나 시민증 없는 개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실체적 존재의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알다시피 우리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 체계적이고 통합적으로 아이덴티티 도규멘트를 관리한다. 이러한 의미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는 개인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근본 귀속, 특정 사회의 구성원의 자격을 표시한다. 정체성 아이덴티티 없는 개인은 ‘자연상태’의 인류에 불과하다. 아이덴티티 표지가 없는 자는 법에서 규정하는 의무와 권리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해당 공동체 윤리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데 저항한다면, 그는 스스로 추구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대개 민족적 정체성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자신의 국가를 선택할 여지는 있으나, 지배 정권과 체제의 존속과 번영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반체제적이라고 규정될 때 그는 불온한 ‘개성’이 된다. 주어진 국가적 정체성 자체를 부정한다면 내국에서는 체제전복자요 외국에서는 망명자이거나 무국적자로 누구도 그의 생명을 보호할 공적 필요가 없다. 체제 내의 생존이란 한 개인의 생존의 시작이자 끝이다. 생의 성취와 비전의 모든 전망은 체제 내에서만 전개가 가능하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고, 더군다나 민족문화는 피의 계보 문제 같은 것이어서 민족적 정체성의 새로운 기획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민족문화는 인류에게 생명의 기원이나 원죄 같은 것이다. 혹 어느 옛날 북구 유럽의 전설적 숲, 중국의 태산, 동화 속 지하 동굴 세계, 무지개 너머 인류의 마지막 땅이 있거나, 아직 어떤 인류도 발 딛지 않은 지구 같은 별이 있어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모세의 탈애급에서처럼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구에서 국가 영토가 아닌 곳은 없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과 침략 등 제국주의적 식민화로만 다른 국가의 영토를 침탈할 수 있다. 변할 수 있다. 수호지의 양산박은 이제는 불가능하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서구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이식으로 아시아의 제패를 노렸다. 본토인과 내지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기제를 작동시키려 했다.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는 별도의 정체성 규정개념이었다. 강대국의 꿈은 일찍이 일본의 근대적 기획의 큰 틀이었다. 내지(內地) 작가들은 일제 식민체제하에 동화되어야 했다. 근대적인, 자유와 평등의 개인에 대해 알자마자 내지인 정체성과 근대 가정과 사회구성원 정체성, 동시에 전통의 계승자이자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투사의 정체성을 자신 안에, 자의식 안에 공존시켜야 했다.
한국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강대국을 향한 근대화 발전을 추구했다. 부국강병과 체제이념 확립을 향한 정권의 국가 정체성 구축 요구는 서구 강대국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념을 빠르게 삶의 지표로 끌어들였다. 미국의 제3세계 근대화 발전모델을 바탕으로 미국식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독립국가 국민으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고 현대문화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도 부국강병과 자주적 주체성 확립을 위한 민족적, 역사적 정당성 토대로 생활세계에 접목됐다. 이후 거센 민주화운동 물결 속에 민족문화의 민중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움직임, 나아가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티 담론의 홍수 속에서 결국 작가들은 ‘작가적 정체성 갈등’ 자체를 그림의 시작으로, 주제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진욱의 <그림의 시작>과 박재철의 <난 나비야> 혹은 원성연의 <Piling Yes-terday>나 김광열의 ‘분홍색 그림’ 시리즈에서처럼 작가들은 스스로 작품을 통해 자가 치유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의 작업에선 인물, 물체 등을 어떤 특정한 배경/풍경 속에 배치시켜 어떤 감정들을 이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작업의 스타일을 바꾸게 된 배경 중의 하나는 그동안 해오던 서술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데에 있다. 동시에, 나 자신의 현실, 나와 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관계, 거기에서 생기는 갈등, 감정을 넘어서 더 깊은 순수한 내면의 세계로 가고 싶은 필요가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게 한 것 같다.” (김광열)
작가들은, 아니 작가들만이 내 정체성이 왜 그래야 되는지를 물을 수 있다. 묻는 일을 ‘일’로 할 수 있다. 예술의 특권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아니면 이러한 정체성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세계시민’이 되는 길뿐일 것이다. 코스모폴리타니즘(사해동포주의)은 세계시민권자의 정체성으로만 작동된다. 세계시민권자의 영토는 문화적 영토이다. 한국 작가로서는 백남준이 대표적으로 세계시민의 문화권 특권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그의 발언과 태도들은 이런 특권을 누리는 자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자유로웠지만, 실제 그의 생활은 세계시민의 문화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떠돌아야 했고, 세계시민으로서 동·서양 문화의 다양한 정체성을 이종교배하는 작업을 그만두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보거나 한국인이 보거나 그는 한국인이자 외국인이었지만, 백남준 자신은 스스로를 한국인이자 세계시민으로 여겼을 것이다. 떠돌면서 지독히 공허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작가들의 작가의식에 은폐된, 거대하고 조용하나 미세한 자기분열을 계속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정체성 강요는, 체제 순응적이든 파괴적이든, 이러한 정체성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업기제로 작동하며 이들의 모든 작업을 둘러싸고 있다.
박재철 <난 나비야> 한지에 수묵채색 70×70cm 1998
한국 미술가들의 민족·문화적 고민
일제 식민지시대 시작과 거의 동시에 우리 미술가들도 서구적 미술가로서의 작가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유학과 독서 등 매체를 통해 서구문물을 접하면서 갑작스레 서구적 작가의식이 생겨났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서구적 작가의식이란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가의 창조성, 개성을 예술의 근본으로 여기는 태도 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런 의식은 동양 예술가에게도 전통적으로 요구됐던 사항이다. 개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을 좋은 그림으로 치는 기준은 동양화론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미 일정 정도로는 지금의 서양식 작가관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식이 어느 정도로는 존재했지만, 그래도 새삼스레 ‘드러났다’는 것은 서양적 대상 선택과 대상의 재현 방법, 서양식 재료의 장인적 마스터가 예술가가 그려낸 ‘미적 차원’이 생활세계를 뛰어넘은 인간 정체성의 ‘진실한’ 무엇이라고 보는 예술을 위한 예술관의 일정한 태도와 접목되면서 동시대의 근대적 예술관으로, 당시의 공적인 서구적 작가의식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에서다. 근대 초 우리 작가들의 서구적 작가의식이란 결국 전적으로 새로운 예술관의 이식이나 수용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식으로 달구어진 작가의식이다. 하지만 바로 이래서 당시의 작품들은 습작에 가까워 장인적 기량에서나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을 창작방법으로 체계화하고 전수하는 차원에서, 세계의 거장들이라 평가받는 작품들과 동등하게 견주기는 힘들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서구 역사에서도 20세기는 사회생활의 전 분야에 혁명적 변화가 시작된 시대였다. 모진 격랑의 시대였다. 더군다나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은 도처에서 전쟁과 파괴, 학살이 자행되고, 작가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잿빛 산문의 세계에 대응해 새로운 기법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넘어 리얼한 현실세계를 대상에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화단에 인상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적 작풍과 유사한 작업이 많았다는 것은, 이들이 바로 이런 화풍을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인상주의나 상징주의, 표현주의 화풍이 주관적 시선에서 인물과 정물, 풍경을 스케치풍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유화에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이 인물이나 실내 정경, 집, 길 등을 스케치풍으로 그려내기가 수월했기 때문에도 그렇다고 보인다. 이 시기는 근대미술 발전도상의 첫 신(scene)으로 작가의 정체성 혼란이 작품 생산의 질을 넘어 짓누르던 때였다.
작가들은 일본 식민지체제의 내지인으로 오랜 기간 장인적 기술의 연마나 연구, 오랜 공을 들인 기념비적 대작을 생산할 방법은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문화의 정체성만은 간직하고 싶었겠으나 일제는 지방색 차원에서는 이를 허용하되 민족적 주체성 차원에서는 반체제적이라고 탄압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가 되겠다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좌파 진영에서는 반민중적이라 비판하는 가운데, 작가 대다수는, 실제로 당시 제국주의적 친일 관피아가 아니라면, 이른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홍보전시에 작품을 출품하고 싶지 않아도 대개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찬가지로 좌파 문화예술계의 활동에 굳이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시대에 전업 작가의 삶이란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나마 작가로서의 명맥을 이어갈라치면 관전에라도 출품하거나 주류매체에 삽화라도 그리면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상은 원대하고 자유로웠으나 실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인데, 바로 그만큼 이들의 작품은 정물이나 실내, 소녀, 부인상 혹은 가로변이나 풍경 스케치 등을 위주로 한 소품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박수근이나 이중섭, 김환기나 장욱진의 작품들이 천재적 장인정신 화가군의 반열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들어서는 결국 백남준이나 이우환 등 해외에서 그들의 지적문화 수준에서 함께 어울리고 성장한 작가들이 우리 미술계의 최고봉으로 자리매김하는 현실이 생겨나고, 이 상황은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민도 국내 작가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외에서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작품의 핵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우리 미술의 역사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우리 작가들의 피와 땀과 생활에의 의지, 자기보존의 논리, 그로부터 피어난 치열한 삶의 궤적이자 문화요, 우리가 소중히 보존하고 이어나가야 할 우리 정체성의 보루이다.
백윤문 <분노> 비단에 채색 191×151cm 1935
정체성과 예술가의 역활
백윤문의 작품 <분노>를 보면, 그것이 그림 속 일본인의 분노이건 조선인의 분노이건 상관없이, 당시로서는 드문 작가의식을 담아낸다. 우리 근대화단의 친일 작가로 분류되는 작가들도 작품 속에 일본인을 등장시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백윤문은 일본화풍의 감각에 조선 풍속화의 모티프를 앉히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일상에서 어떻게 보면 투정 어린 싸움을 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분노’라는 제목을 붙였다. 백윤문도 국화(國畵)의 발전방향을 모색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고, 전통의 계승과 외래 화풍인 일본화풍의 접목을 시도했던 것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식민지체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 그림에서처럼 내지인 본토인 하면서 깊이 얽혀 살며 사소한 문제들에서도 부딪혔을 실제 생활모습을 그렸다.
대부분의 근대 작가들은 향토성(민족적 정체성)을 화두로 삼을 때 우리끼리의 생활모습, 그중에서도 시골풍경과 조선 사람들을 주제로 한다. 아니면 구본웅의 주장에서처럼(구본웅의 1934년 조선미전 전시회평) ‘조선인의 생활의 모던화’에서 향토성을 파악한다. 올바른 우리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길을 발달한 근대조선의 거리모습, 서구식 실내정경과 정물표현에서 보았다. 그런데 실제 구본웅 작품의 정수는 친구이던 이상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대개 이 작품에서처럼, 그림 공부를 위한 유학이 작가의 개성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작가의 예술적 개성을 살리기 위해 굳이 유학을 갈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 이인성의 예술관에 가깝다. 이 문제는 구본웅의 개인 처지(신체상의)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인물화 속 이상의 태도나 모습에 작가 말대로 생활의 모던화가 표현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 작가들 작품 중에서 우수한 것은 구본웅의 이 작품처럼 이인성의 예술관에 가까운 것이 많다. 나혜석의 작품들이야말로 구본웅의 주장에 해당된다고 보이지만, 그녀의 작업에 엿보이는 ‘생활의 모던화’ 표현은 피상적인 인상의 문제일 뿐이다.
“이 사람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양행(洋行)할 심산도 있으나 양행한 결과에 자기 작품대성(大成)의 표가 생길는지요? 이것도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 생각하며 양행은 현대 인간의 간판이라고도 생각합니다마는 나는 그렇게 양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 예술상 개성을 죽이지 않는가 하는 위험한 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자기 향토를 영원히 떠나서는 도리어 실망성이 생기리라고 생각됩니다. 근본적 색채는 어머님의 뱃속에서 타고 나온다” (이인성, <조선화단의 X광선>,《 신동아》, 제39호, 1935)
이인성이 이런 의도하에 야심 찬 대작으로 준비한 것이 <경주의 산곡에서>이다. 그런데 사실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는 강한 지역적 토속성을 띠면서 일제가 민족성이라는 개념 대신 강제하던 ‘지방색’이 많이 묻어난다. 그리고 구본웅이 ‘조선인의 생활의 모던화’라고 했던 주장에 걸맞은 작업들은 이인성의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성과 구본웅, 나혜석의 작품에는 공통적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강한 예술적 성취의 욕망을 지니면서, 유학을 통해서건 국내에서 습득한 것이건 예술로 개인의 개별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의지이다. 예술을 매개로 멋진 근대적 세계시민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한 정서로 충만돼 있다는 점에서다.
아래 글은 당숙 구본웅에 관한 구광모 씨의 기록이다. 그가 직접 목격한 상황은 아니요, 구본웅의 생각이라는 부분도 구광모 씨가 개연적인 상황으로 붙인 것 같지만, 구본웅과 나혜석, 이상의 사고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실제 나혜석과 구본웅, 이상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가적 자의식의 면모는 이 광경에서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월(나혜석) 선생님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자아와 글로 나타내는 자아가 서로 다르신 것 같아요. 그림으로 보면 매우 서정적인 분 같으신데, 글로 보면 매우 투사적이세요. 그렇죠? 정월은 대답 대신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이상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물론 습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조선어로만 글을 써야 될까요? 일본어나 영어나 불어로도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정월의 이러한 답변에 구본웅은 이의를 달았다. 조선에서 일어로 시와 소설을 쓰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까지 친일파 문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가설일 수 있겠지만 편협한 생각이야. 편협한 여론에 밀려 창작력을 소실하면 안되지. 우리가 조선 사람만을 위해, 또는 조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은 영원한 것이고 국가나 사회라는 벽을 뚫고 갈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 정월의 힘있는 조언에 이상은 크게 고무되었다. … 그러나 구본웅은 이상과 정월의 정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남긴 일본어 작품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친일 문학인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편견과 몰이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상의 시공간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일부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마감될 때까지 완고하게 지켜간 시간적인 편견과 조선반도라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구광모, <友人像과 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신동아 논픽션》, 통권 518호, 2002)
향토성 문제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두고 김복진은 “조선의 미술이 이민 미술과 대립하며 항쟁하는 데에 가장 많이 그 힘을 의촉(依囑)하고 자부하였던 향토성은 자본주의 문형으로 하여 지역선(地域線)이 무너지며 이민 취미로 말미암아 개변되어 가는 도정에 서 있다. 조선미술의 유일한 무기는 이와 같이 하여 나날이 좀이 먹어가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김복진, <조선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 개벽》, 1926.1)
구본웅 <우인상>캔버스에 유채 65×53cm 1935
식민지 시기 최초의 개인전을 연 사진작가 정해창도 “나도 한때 허탕한 남자로 자처하고 일생을 방종하게 지내보겠다던 청춘도 있었으나 그것도 전생에서 팔자를 타고나야 되는 모양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발길을 돌린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고 싱거운 노력 같기도 하나, 갈 길이 이뿐이므로 아니 갈 수도 없는 것이라 내 발이 닿은 곳마다 기왕 지나온 노중(路中)에서 묻고 붙은 여러 가지 흙덩이가 사방에 떨어지니 새 친구는 반갑게 보아주지 않는 것이다. 묵은 친구들은 비웃고 있는 것이다”(정해창, <여인의 행색과 매화장, 사조>,《 무허 정해창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작품집》, 1958, pp.15~16)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정해창도 역시 과거와 현재 사이에 걸쳐진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두고 고민했다. <정물>은 작가의 정체성 확립의 문제를 두고 고민한 그만의 방식을 드러낸다. 스스로의 고민을 ‘정물적(靜物的)’ 인 관조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여인의 인물 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그의 거의 모든 작품사진에서 대상과 소재, 주제는 사진 속 세계에 갇혀 영원히 고착된, 잃어버린 이야기의 고향이듯 고색창연한 미학적 구도 속 대상들로 정물화 (靜物化)된다. 장면들은 식민지 지식인의 애잔하고 불안한 정조(情調)로 물든다. 그는 이 애상(哀想)을 근대적 풍경을 구성하는 세련된 정취의 미학으로 포착한다.
“정해창의 정물사진에 나오는 소재는 … 근대화된 일상을 보여주는 소품과 장승과 한복을 입은 목각인형처럼 조선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소재로 나눌 수 있다. 후경에 램프와 석고상, 전경에 파이프케이스와 파이프, 영문서적을 펼쳐놓아 구성한 사진은 … 서구화된 … 정해창 자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두가지 소재들이 서로 뒤섞여 한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런 현상은 근대화된 삶을 살면서도 작품에서는 전근대적인 소재를 통해 향토색을 추구했던 근대 화가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분열상이기도 하다. 정해창의 사진에서 장승과 한복을 입은 인형은 조선색을 강화하기 위해 등장한 소재라기보다는 알레고리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유지현, <정해창의 예술사진>,《 무허 정해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작품집》(무허 정해창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편), 2007)
여기서의 알레고리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징의 의미일 것이다. 비빔밥 정신이 아닐진대, 알레고리를 통해서나마 정체성의 위상학을 획책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비빔밥 정신’이란 표현은 백남준이 멀티미디어의 특성을 정의하면서 빗댄 말이다. 게다가 ‘한국인은 복잡한 상황을 적당히 말아서 잘 지탱하는 법을 안다, 그 복잡한 상황이 비빔밥이고 우리나라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사실 백남준은 6·25전쟁 중 벌어진 비참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신이 어느 편인지 알 수 없게 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면서 모든 것에 대해 판단유보하게 됐다고도 한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스스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서는 불굴의 비빔밥 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 초기 퍼포먼스에서도 그가 벌인 ‘행위’와 ‘사건’은 그 자신이 직접 겪은 이주적, 이민자적 복합적인 문화적 상황들을 비빔밥적(?)으로 동·서양의 문화를 관통해나가고자 하는 의지의 수행과정이었고, 특히 1970년대 이후 백남준의 작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비빔밥 정신으로 동·서양이 혼합돼있다.
이에 반해 김환기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지만, 그리고 김환기의 작품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 또한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작업의 정체성, 한국미술의 위상이 가장 고민에 찬 부분이었다. 그도 자신이 선택한 결론을 믿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김병기는 말한다. “우리들 현실의 면모 (面貌)는 부단히 변모(變貌)해 가고 있다.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슬기롭게 몸부림치는 현실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다. 나의 작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이러한 현실성과의 연관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저 광야와도 같은 환경 속의 나의 현실성은 나로 하여금 보다 내부에로의 침잠을 가져왔고 또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는 필요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닫혀있던 창문이 밖을 향해 열린 느낌이다. 나는 밖으로 나와야 했고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과 부딪쳐야 했다.”
정체성 갈등을 구체적으로 다시 보면 특정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지구상 모든 개인의 사회적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곧 개인이 오로지 한 개성으로서 세상에 취할 수 있는 권리, 곧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자 하느냐, 아니면 사회구성원인 개인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 곧 의무를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런 요구가 ‘나의 정체성’의 문제에 연관돼 있다. 예술가에 대한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 의무 요구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향한 정체성 요구에 배치된다. 개인이 공동체에서의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그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래서 그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도외시한다면, 그의 권리는 파렴치해지고 만다. 그는 어떻게든 ‘역할’을 맡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정해창 <정물> 1930년대
백남준 <TV 부처> 혼합재료 1974/2002 Ⓒ Nam June Paik Estate
강성원은 1955년 출생했다. 서강대 사학과,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과를 수학했다. 그림마당 민 기획실장, 도서출판 재원 기획실장, 일민미술관 기획의원, 인문학박물관 학예실장, 사무소 기획실장 등을 역임했다.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됐으며, 1999년 월간미술대상 학술평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한국 여성미학의 사회사》(사계절), 《시선의 정치》(시지락),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