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강영민
하트는 사랑의 상징이다. 그런데 강영민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하트는 깊이 들여다보며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언뜻 사랑의 의미가 사라지고 기호만 덜렁 남아있는 듯한 그의 작업은 익살스럽지만 예리한 정치적 목적성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번뜩인다. 그렇다면 강영민의 작업세계는 한 마디로 설명된다. “사랑의 부재를 통해 사랑을 말한다”는.
사랑의 화가 강영민론
이택광 | 경희대 교수
팝아티스트 강영민을 정의하는 말은 ‘발칙함’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조롱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발칙하다는 수사학에 걸맞은 작가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평가가 다소 단편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강영민은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온 이력을 뽐내지만 지금의 작가를 이해하는 시발점은 <사랑하면 진다>는 네 번째 개인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그가 ‘하트 화가’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의 작품 주제에서 하트는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화가’이다. 하트를 그려서가 아니라, 겉으로 장난스럽게 보일망정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를 만하다고 본다. <사랑하면 진다>가 개인의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면, <만국기전>은 집단의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구성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언제나 하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하트야말로 사랑 아니냐”고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하트는 하트지 사랑일 수 없다. 사랑은 휘발되어버리고, 하트만 남는다. 하트는 싸늘히 식어버린 사랑의 화석이다. 강영민은 이 사랑의 흔적을 화폭에 남긴다. 그의 하트는 귀엽게 웃거나 입맛 다시거나 울고 있지만 도형으로 전락해 있다. 도형은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표정마저 기호화되어 있다. 이렇게 표정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 하트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혼란일까.
그의 하트는 사랑의 기호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말하자면 사랑 자체를 지시한다. 사랑이 지워진 자리에 하트가 온다. 마치 사랑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지만 사실상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하트 기호일 뿐이다.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만국기전>이었다. <만국기전>에서 그는 태극기를 비롯한 이른바 국가 상징에 예의 무표정한 하트를 그려 넣고 ‘내셔널 플래그’라고 이름 붙였다.
태극기를 예로 들어보자. 그가 태극기에서 태극문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트를 채워 넣자 갑자기 태극기는 다른 무엇이 되었다. 태극문양이 없는 태극기는 태극기가 아닌 것이다. 생긴 모양은 태극기처럼 착시를 일으키지만 곧 태극기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은 깨닫는다. 태극문양의 자리에 하트를 그려 넣으면 하트기라고 불러야 할 터이다. 강영민은 이 작업을 통해 ‘내셔널 플래그’ 또는 ‘국기’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태극기는 태극문양이지 깃발 일반이 아니다. 다른 ‘내셔널 플래그’ 역시 그렇다.
그는 ‘내셔널 플래그’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트로 교체함으로써 ‘내셔널 플래그’의 의미를 드러냈다. 그 의미는 결과적으로 특정한 ‘내셔널 플래그’를 특별한 장소에 고정시키는 특수성의 산물이라는 것이 강영민의 메시지이다. 세상의 반응은 구태의연했다. 발칙하다는 찬사에서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까지 쏟아졌다. 그가 건드린 지점은 어디일까. 강영민은 이런 작업을 통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던 국가와 상징의 결합 관계가 허구임을 폭로했다. 무릇 예술이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성의 범주’를 해체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에 도전해서 그 허구성을 드러내야 한다.
강영민의 작업은 이런 전략을 구사한다. 일단 하트라는 기호 자체가 사랑의 물신화에 대한 폭로이다. 왜 사랑은 하트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이 관계는 자명하지 않다. 그의 하트는 사랑을 대체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상징에서 정작 빠져 있는 것이 사랑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엽고 아름다워야 할 사랑의 기호가 괴이하고 수상쩍은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사랑의 화가’라고 불려야 하는 것일까. 그는 사랑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급진성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의 뿌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하트는 사랑의 신화에 대한 패러디이다. 하트가 무엇인가. 바로 심장, 또는 마음의 상징이다. 심장에 마음이 담겨 있다는 발상 자체가 신화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의 상징으로 하트를 인준한다. 강영민의 하트를 보면서 관객은 아무 의심 없이 ‘사랑’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 하트의 기호에 없다. 이 공식을 그의 ‘내셔널 플래그’로 옮겨 오면 더 심각해진다. ‘내셔널 플래그’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뀌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셔널 플래그’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든 요소가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 상징은 무엇일까.
강영민은 ‘내셔널 플래그’에 하트를 그려 넣음으로써 국가적 상징과 국가의 동일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가 하트를 집어넣은 지점은 이데올로기와 주체가 만나는 접점이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요청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쾌락을 취한 필수요소이다. 태극기는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증상을 지속시키는 쾌락의 대상이다. 주체는 이 쾌락의 대상을 사랑한다. 이 주체의 사랑이 곧 증상이다. 강영민은 이 사랑의 대상을 하트로 기호화한다. 태극기의 태극문양이 곧 국가의 정체성이라면, 이 정체성이야말로 사랑의 대상이고 하트다.
광화문에 모인 탄핵반대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태극기라는 국가적 상징의 의미이다. 태극기는 탄핵반대집회 참가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애국자’, 다시 말해서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태극기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이 상징을 하트로 기호화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 ‘애국자’에게 이런 화가의 ‘개입’은 불순하게 보이거나 불경하게 받아들여진다. 왜 그럴까.
그 까닭은 이데올로기야말로 일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체와 특수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모두가 국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의 사랑’만이 특별하다고 ‘애국자’는 믿는다. 그런데 강영민의 하트는 그 사랑이 실제로 일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어야 할 태극기에 대한 사랑이 하트의 일반성으로 환원될 때, ‘애국자’는 국가와 동일시했던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만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의 사랑은 가짜다라’는 구별짓기가 등장한다. ‘국가에 대한 사랑’이 결코 ‘나의 사랑’만일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서 그런 국가에 대한 사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영민의 하트는 ‘애국’의 외설성을 적나라하게 증언한다.
역설적으로 강영민은 이처럼 사랑의 부재를 통해 사랑을 말하는 화가이다. 그에게 사랑은 유토피아적 충동이기도 하다. 사랑을 통해 강영민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무주의를 넘어선 우리 존재의 지속성이다. ●
강영민은 1972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2004년부터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1999), 거리예술시장 희망시장 전시기획팀장(2002) 등을 지냈으며, 〈팝아트협동조합전〉(2014) 등 다수의 전시에 기획자로 참여했다. 현재 김포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