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people] 2014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 조민석

한국 건축사 100년, 남과 북의 두 얼굴

예견된 소식이었을까.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한국관은 참가한 65개의 국가관 중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미술과 건축을 통틀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관이 사자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지난 6월 13일 예술가의집에서 이번 비엔날레 한국관을 이끈 커미셔너 조민석(매스스터디스 대표)을 비롯 큐레이터 배형민(서울시립대 교수), 안창모(경기대교수) 그리고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참여한 가운데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비엔날레 수상에 대한 관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날 회의장은 취재진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좌중의 흥분된 분위기와 달리 막상 수상을 이끈 조민석 커미셔너는 “수상자를 호명할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며 비록 격앙된 어조이지만 의연한 태도를 취했다. “비엔날레 초반 감독과 심사위원들이 한국관 전시에 보인 뜨거운 관심을 보며 자신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은 삼성미술관 리움 블랙박스의 건축가로 한국에 잘 알려진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다. 그가 제시한 비엔날레 국가관의 공동 주제는 <근대성의 흡수(Absorbing Modernity: 1914~2014)> . 반면 조민석이 이끈 한국관의 제목은 <한반도 오감도(Crow’s Eye View: The Korean Peninsula)>.  조민석은 렘 쿨하스가 전시를 통해 이끌어내고자 하는 맥락을 정확히 짚어냈다고 평가받는다. 렘 쿨하스가 소장으로 있는 네덜란드 설계사무소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근무한 경험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렘 쿨하스는 비엔날레를 통해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 자체가 조명받기를 바라며 건축의 각 요소(element of architecture)에 주목한 전시를 꾸몄다. 한국관의 경우, 한반도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연결하는 주제로 남한과 북한의 건축 형상 변화에 주목해 100년 한국 건축의 큰 획을 담아냈다.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대립관계에서 남과 북이 주고받는 건축 현상에 주목하며 우연과 필연, 개인과 집단, 영웅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등을 아우르는 한반도 건축의 단편들을 모았다. 보편성과 전체성을 전제로 한 건축용어인 ‘조감도’와 대비되는 ‘오감도’란 이상의 시에서 빌려온 용어로 마치 퍼즐조각을 모으듯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는 크게 ‘삶의 재건(Reconstructing Life)’, ‘모뉴먼트(Monumental State)’, ‘경계(Borders)’, ‘유토피안 투어(Utopian Tour)’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됐다. 안세권, 알레산드로 벨지오조소, 닉 보너의 컬렉션, 최원준, 마크 브로사, 강익중 등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당초 북한의 건축가가 직접 참여하거나 공동 감독의 큐레이팅 형식을 고려하여 여러 통로를 거쳐 접촉하며 의사를 타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닉 보너의 컬렉션, 찰리 크레인, 필립 모이저 등의 외국인 작가들을 통해 북한의 건축을 살폈다. 특별히 이번 비엔날레는 공모 방식으로 커미셔너를 선정하였고 공모 과정을 포함하여 약 14개월간 동일 주제로 전시를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어 전시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축가 조민석은 올해 11월 플라토에서 또 하나의 건축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내년에는 이번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를 아르코미술관으로 옮겨와 전시할 예정이다. 그는 앤서니 폰테노와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유명전>을 공동 기획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굵직한 건축 전시를 이끌고 있는 건축가이다. 건축 전시기획자이자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한 젊은 건축가는 한국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임승현 기자

조민석은 1966년 태어났다. 연세대 건축공학과와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OMA, 조슬레이드 아키텍처 등에서 일하며 유럽과 뉴욕의 다양한 건축 및 도시 계획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99년과 2003년에는 미국 프로그레시브 아키텍처 어워드를 수상했고, 2000년에는 뉴욕 건축연맹에서 주관하는 미국 젊은건축가상(뉴욕건축가연맹)을 받았다.

베니스 (2)

베니스 (1)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전시전경

 

 

[Sight & Issue] Art Basel

바젤에서 발견한 미술시장의 민낯

올해 45회째를 맞는 아트바젤(스위스 바젤 메세 플라츠, 6.19~22)은 철저히 작품을 구매하는 이들을 위한 잔치였다. 몇 년 전까지 보였던 ‘프레스 프렌들리’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공식 개막 전날. 프레스 등록과 동시에 본전시장을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었던 예년과 달리, 이번에는 오로지 VVIP와 대회 관계자, 그리고 참여화랑 관계자를 제외하곤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아트바젤의 전략적 행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285개 화랑이 참여하는 아트바젤의 첫인상은 전언했다시피 이전보다 구매고객 중심인데다 이전보다 확장된 행사규모, 그리고 특정 작가의 작품으로 쏠리지 않는 다채로움이 돋보였다. 특히 부속행사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비엔날레급 전시로까지 비치는 <Art Unlimited>는 규모가 훨씬 커졌으며, 또 하나의 부속행사였던 <14 Rooms>는 아예 독립되고 특화된 아트바젤만의 전유물이라는 느낌을 충분히 주었다. 약 한 달 전 열린 아트바젤 홍콩의 첫 대회가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가운데 아트바젤의 자신감은 최상에 이르렀다는 생각이다.
세계 경제가 어렵다 하지만 이번 아트바젤만큼은 예외였다. 일반인 공개 전인 6월 17일 VIP 공개 당시 15분 만에 앤디 워홀의 자화상이 3200만 달러(한화 325여억 원)에 팔렸으며,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는 400만 달러(한화 40여 억원)에 거래됐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   블룸버그》는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헤드라인을 ‘바젤의 백만장자들은 미술이 현금보다 나은 투자(대상)라 확신한다’고 뽑았다.
아트페어 못지않게 관람객을 즐겁게 만든 것은 <Art Unlimited>였다. 특히 국제갤러리 소속으로 출품한 양혜규(왼쪽 페이지 아래 오른쪽)의 <서사적 분산을 수용하며-비카타르시스 산재의 용적에 관하여(Accommondating the Epic Dispersion-On Non-cathartic Volume of Dispersion)>(2012)는 높이가 10m, 넓이가 800m2에 이르는 대형작품으로 <Art Unlimited> 입구에 설치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블라인드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 관람객의 시선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이 작품은 ‘디아스포라’가 사회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베를린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 중앙홀에 설치됐던 것을 바젤로 옮겨와 소개했다. 양혜규는 이번 전시에 대해 “기존의 디아스포라가 내포한 의미를 작가로서 확장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이 작품이 비록 아트페어에 전시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후 뮤지엄 등의 기관과 콜라보레이션하고자 하는 일종의 예고인 셈”이라고 밝혔다.  3년 전부터 이 전시를 기획한 뉴욕 출신의 지아니 예처(Gianni Jetzer)는 <Art Unlimited>가 비엔날레의 한계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상업성과 비상업성보다는 작업이 함의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있다고 생각했다”라며 “비엔날레와의 차이로 큐레이터의 역할을 들 수 있다. 비엔날레는 큐레이터가 하나의 주제로 작업하는 프로젝트지만 아트페어는 전시되는  작품이 갤러리의 사정에 의해 바뀔 수 있고 시장에 기반한다”라고 답했다.
또 하나의 부속전시인 <14 Rooms>도 아트바젤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4 Rooms>는 데미안 허스트, 요노 오코, 브루스 나우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 14명의 작가의 기념비적 퍼포먼스를 재현한 전시로, 14개의 방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관객은 각각의 방에 입장해 실시간으로 재현되는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있었다.

바젤=황석권 수석기자

· 전시광경. 산티아고 시에라의  2014 퍼포먼스

<14 Rooms>전시광경. 산티아고 시에라의 2014 퍼포먼스

 

 

[Sight & Issue] Sung Donghun in Taipei

다루기 힘든 재료와 겨루다

IMG_8497철을 소재로 중량감 가득한 작업을 해온 조각가 성동훈. 그가 타이베이(台北)에 머물며 진행한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었다. 6월 4일 타이완의 철강기업 둥화(東和)강철의 먀오리(苗栗) 공장에서 열린 <제2기 둥화강철국제레지던시 작가전시회(東和鋼鐵第二屆國際藝術家 駐廠創作成果發表會)>에서 타이베이 작가 쑹쉬더(宋璽德)와 성동훈의 작품이 전시된 것이다. 성동훈은 25점을 출품했으며 그의 작품은 전시장 실내외에 배치됐다. 이를 위해 성동훈은 약 3개월 동안 이곳 공장에 머물면서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 전시는 둥화강철이 세운 둥호아트파운데이션이 주최한 것. 전시 개막 전날 성동훈의 이곳 작업장을 찾았다. 둥호강철은 성동훈에게 철슬러지 30톤을 제공했으며, 공장 한 켠에 별도의 작업장을 조성해줬다. 성 작가는 “약 25년 동안 철을 주된 재료로 작업했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철제품을 만들고 남은 폐기물인 슬러지에 눈이 갔다. 철의 어머니 같다고나 할까? 이 재료는 부피가 크고 중량이 상당하며 용접이 힘들어 쉽게 다룰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를 재료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당초 주최 측은 철강 및 H빔 등 철과 관련한 생산품을 제공한다고 했지만 성 작가는 제철소 입장에서는 폐기물로 여기는 슬러지에 더욱 눈길이 갔다고 한다. 폐기되는 것이 당연했던 슬러지는 그의 손을 거쳐 돈키호테로, 의자로, 황소 등으로 변신했다. 제작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고. 처음 사용하는 소재여서 여러 실험 단계를 거치느라 그랬다. 재료의 특성상 이번에 출품한 작업은 마치 현무암이나 풍화된 돌처럼 거친 느낌이 가득하다.
둥화강철에서 성 작가에게 제공한 지원은 파격적이라 할만하다. 철을 가공하고 다루는데 있어 공장의 기자재와 장치는 물론, 과장급 간부가 책임을 맡은 별도의 인력도 제공했다. 그래서 성 작가는 한국에서 작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개막식에 참여한 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축사에서 “최고 품질의 철을 마다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슬러지를 긁어내 이러한 장관을 연출한 성동훈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며 “철조각이 차갑고 단단한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성동훈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야생적인 힘이 넘친다”고 말했다.
이미 타이베이 주밍미술관과 가오슝의 피어2(Pier2)에 작품이 소장된 성 작가는 올해 말까지 타이베이와의 인연을 지속한다. 9월 투씨아트 갤러리(ToSee Art Gallery)와 함께 하는 ‘타이베이아트페어’와 쑨원미술관(Sun Yat Sen Museum in Taipei)에서의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타이베이의 유리회사와 함께 이번 둥화강철과 진행한 유형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둥화강철아트파운데이션은 둥화강철이 1000만 타이베이달러(한화 약34억 원)를 출연하여 설립한 것으로 다수의 국제적인 예술행사를 후원 및 주최해왔다. 이번 국제레지던시프로그램은 2회째이며 타이베이와 해외작가 각각 1인을 후원한다.

타이베이=황석권 수석기자

 

Hot Art Space

한국에 이주한 외국인 작가들을 소개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전>이 6월 17일부터 8월 1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계속된다. 1년에서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10개국 13인의 작가를 모았다. 2009년 작고한 에밀 고를 제외한 참여 작가들은 집, 언어, 문화적 판타지, 여권, 서울이라는 주제어를 제시받아 이에 맞는 작업을 선정하여 전시한다. 전시기간 동안 베르너 사세, 사이먼 몰리, 탈루 엘엔이 참여하는 라운드 테이블(6월 26일)과 폴 카잔더와 루크 슈뢰더의 아티스트 토크(7월 3일)가 진행되어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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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1)

리안 (3)

이동기와 김현기의 2인전이 5월 22일부터 7월 5일까지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열린다. 아토마우스부터 추상미술에 이르는 이동기의 작품과 극사실적인 재현기법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형상을 만든 김현기의 작품 약 20점이 전시됐다.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가 혼성된 이미지에서 독특한 혼성의 세계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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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아라리오 (1)

작가에게 뮤즈는 창작의 근원이자 원천이다.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개최한 <강형구와 그의 뮤즈, 마릴린전>(5.13~7.20)은 강형구가 그린 마릴린 먼로 작품을 비롯해 작가가 20여 년에 걸쳐 전 세계에서 모은 방대한 양의 마릴린 먼로 초상, 사진, 포스터, 책 등의 자료 컬렉션을 함께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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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환_인사미술공간 (3)

‘아르코 영 아트 프론티어(AYAF)’에 선정된 배윤환의 개인전 <WAS IT A CAT I SAW?>가 5월 9일부터 6월 5일까지 원서동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언어유희를 차용한 전시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서사보다는 이야기의 출발점에 중점을 두었다. 50미터의 대형 연속드로잉이 절반은 펼쳐지고 나머지는 말려있는 형식으로 전시되어 전체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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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1)

이한열기념관 재개관을 기념한 특별전 <열사에서 친구로>가 6월 9일부터 7월 9일까지 열린다.
박경효, 강영민, 낸시랭, 임경섭, 차지량, 홍태림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이한열을 중심으로 열사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과  정의를 제시하고 세대 간의 교차와 ‘청춘’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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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한옥 (2)

화해와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하트이미지를 전통 회화 속 모란과 화조그림에 접목한 김용철의 개인전 <하트와 모란, 그리고 숲에서의 만남>이 6월 18일부터 25일까지 갤러리 한옥에서 열렸다. 최근 강릉으로 주거지를 옮긴 작가는 색다른 풍광, 공기를 맞으며 느낀 신선한 감정을 그림으로 옮겨 힘찬 생명력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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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젤리_갤러리 로얄 (1)

전시장에 육각형 캔버스를 이용한 작품이 가득 찼다. 5월 22일부터 7월 13일까지 갤러리 로얄에서 열리는 <로얄 젤리전>은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 7명의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에너지원인 로얄젤리처럼 예술적 자양분의 공급원이 차세대 예술가의 육성임을 은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 사회, 역사적 주제, 철학적 사유를 반영한  작품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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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김윤수_누크 (6)

김윤수, 노충현의 2인전 <지금 그리고 저편>이 5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누크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다루며 ‘지금 여기’를 표현하는 노충현과 바람, 하늘, 바다 등과 같은 자연의 풍경들로 ‘저편’을 다루는 김윤수의 만남으로 주목됐다. 다른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두 작가의 작업은 관람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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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라갤러리

브라질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과 브라질 양국 간 문화·경제적 교류를 모색하는 취지의 전시인 <함성 SHOUTS OF KOREA 2014>가 6월 11일부터 7월 31일까지 KOTRA 오픈갤러리에서 열린다. 한국과 브라질의 유망 작가 22인이 참가하여 선보이는 40여 점의 작품과 참여기업 협업제품 15점을 함께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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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2)

이야기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며 얻어지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이면의 본질이나 대상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정서를 표현한 일곱 작가의 전시 <구경꾼들 SPECTATORS>이  6월 11일부터 7월 5일까지 두산갤러리에서 열린다. 구지윤, 류노아, 오용석, 유현경, 이제, 이혜인, 장파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며 경험을 이미지로 창조해내고 이를 접한 관객은 경험의 흔적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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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_조현 (2)

맨드라미 작가 김지원의 개인전이 <지평선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5월 23일부터 6월 22일까지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렸다. 표현은 단순하고 담백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꽃의 색은 화려하다. 맨드라미는 단순한 생명력을 가진 꽃으로서 그려지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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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1)

현대인의 시각으로 진경산수화를 재해석한 석철주의 개인전 <夢그리고 몽>이 6월 6일부터 8월 9일까지 서호미술관에서 열린다. 청색이나 분홍색 바탕에 흰색 아크릴 물감을 바르고 다시 물로 닦아내기를 반복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기법을 넘나드는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몽유도원도 시리즈’의 최신작을 모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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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영_송은아트큐브 (2)

이건영이 5월 30일부터 7월 9일까지 송은아트큐브에서 <흰 그늘진 마당>이란 제목으로 개인전을 갖는다. 작가는 이름을 상실한 공간 즉 용도나 목적을 잃고 버려진 공간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파괴된 자연과 그 폐허 위로 다시 회귀하는 자연을 이중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관객은 생성과 파괴가 겹치는 어두운 흑백사진 사이에서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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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표 (1)

패션 광고 이미지 속 모델을 보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여주에 위치한 샘표스페이스에서 열리는 <perfect skin>(6.2~7.4)은 이를 표현하는 두 작가의 전시다. 전상옥은 광고 속 모델을 캔버스로 옮겨와 감각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를 다시 재현하며 욕망과 진실 사이를 표현했다. 지희킴은 대중잡지 이미지를 수집 조작하여 현대 여성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전시는 관객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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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수_이유진갤러리 (1)

공간을 컴퓨터 데이터화하면서 얻어지는 우연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를 자신만의 언어로 변형하는 경현수의 개인전이 5월 30일부터 6월 28일까지 열렸다. 이유진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으로 2012년부터 시작한 색과 조형에 대한 탐구와 기하학 추상의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는 <debris>시리즈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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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익훈 (4)

신화, 팝, 고전 등을 주제를 실험해 온 엄익훈의 개인전 <조각의 환영>이 6월 7일부터 19일까지 DMC홍보관갤러리에서 열렸다. 금속 재료로 만든 추상의 철조각에 빛을 더해 그림자를 조각과 병치시켰다. 그는 빛을 철저히 계산해서 조각과 함께 전시장 벽에 평면의 인물을 그려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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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크 (1)

최소한의 선으로 동네 풍경을 묘사하는 윤명순의 개인전 <하루, 욕망하는 풍경>이  6월 11일부터 24일까지 아트파크에서 열렸다. 구리선과 혼합매체를 용접하여 사용한 작품은 보는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입체감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일상의 모습은 압축적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운동감있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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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규 (4)

정문규 (13)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는 김인태와 김병철의 2인전 <집중과 확산>이 5월 16일부터 7월 13일까지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정문규미술관에서 열린다.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인간의 문제를 풀어가는 두 작가의 작품이 서로 문답을 하듯이 병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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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울

사랑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이승령의 개인전이 6월 11일부터 17일까지 리서울갤러리에서 열렸다. 작가는 소통의 부재가 만연하는 현대사회에 주체와 타자 구분없이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며 아름답고 따뜻한 색채를 사용하여 포근함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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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채남 (3)

자연의 모습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그려내는 소채남의 네 번째 수채화 개인전이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6.11~17)을 시작으로 교동아트미술관(6.17~23)과 갤러리 아무(6.24~7.31)로 이어진다. 은은한 색채와 아련한 풍경이 어울어져 수채화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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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3)

소나무를 그리는 박정연이 7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6월 18일부터 24일까지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스케일이 큰 작품들을 선보여 관객이 마치 소나무 숲에 와있는 듯 착각을 일으켰다. 작가는 황금색은 조화로움과 순수함을, 소나무는 건강함과 당당함을 담고 있다며 황금소나무의 의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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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_세종 (2)

꽃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보여온 박정희의 개인전이 5월 27일부터 6월 8일까지 세종호텔 세종갤러리에서 열렸다. 작가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상상의 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의 회화작품 40여 점을 선보였다. 다채로운 색채미를 내뿜는 그녀의 작품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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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_인사아트센터 (1)

김성호 개인전 <새벽, 빛을 품다>가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다. 빛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새벽의 아름다움과 바다의 고요, 빛을 머금은 도시의 아련한 감수성 등 거칠면서도 섬세한 붓 터치로 감각적인 새벽의 풍경을 담아냈다.

[특별기획] Lee Ufan in Versailles

베르사유의 무지개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6월 12일자 문화란에 이런 헤드라인을 실었다. “그(이우환)는 베르사유궁의 완벽함을 극복했다”고. 프랑스 역사와 문화의 자존심 베르사유궁에 입성한 이우환은 그렇게 환대받았다. 1973년 관광차 처음으로 베르사유궁을 방문했다던 그는 팔순(八旬)을 앞두고 이곳에서 전시를 하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이우환의 개인전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베르사유궁, 6.17~11.2)가 열린다. 베르사유궁 실내와 궁정(宮庭) 그리고 그랜드 카날(Le Grand Canal)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그의 작품 10점은 베르사유궁과 조화를 이뤄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산책동무가 되었다. 우리 미술계에서 이우환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월간미술》은 이번 베르사유 전시뿐만 아니라 그의 작가 인생 전반을 걸쳐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우선 그의 일대기를 통해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비평가 및 전략가적 면모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주변의 상황을 정리해 본다. 그다음 일본 전위미술운동인 모노하(物派)에 몸담았던 당시 이우환의 활동을 정리하며, 우리 단색조 회화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시각을 전달한다. 또한 파리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현지 취재와 이번에 출품된 작품을 철학적 시각으로 풀어내는 글도 싣는다. 이번 기획은 그에 대한 완결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인 그의 행보에 일종의 쉼표를 찍는 것이다. 지금 이우환은 우리에게 어떤 작가인가?

현지취재, 사진=황석권 수석기자

<Relatum-The Cane of Titan> 철 바위 500×10.5cm(철봉) 175×180×145cmcm(바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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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Dialogue X> 철 바위 350×450×5cm(철판, 각, 2점) 130×134×130cm/150×135×130cm(바위, 각, 2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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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The Shadow of the Stars>의 부분

 

Versailles Lee Ufan

<Relatum-The Shadow of the Stars> 37개의 철판, 7개의 바위, 석회석, 대리석 40m(37개의 철판으로 만든 구 지름) 2014 Courtesy the Artist, kamel menour and 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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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Dialogue Z> 철 바위 300×400×4cm(철판, 각, 2점) 137×150×115cm/126×150×117cm(바위, 각, 2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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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Four Sides of Messengers> 철 4개의 바위 400×250×2cm(철판, 각, 4점) 2014

 

Versailles Lee Ufan

<Relatum-Earth of the Bridge> 철 바위 400×300×2cm(철판, 각, 2점) 170×160×113cm/145×180×140cm(바위, 각, 2점) 2014 Courtesy the Artist, kamel mennour and 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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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The Tomb, Homage to André Le Nôtre> 철 바위 300×270×180cm(파낸 땅구멍) 268×296cm(구멍 바닥 철판) 90×140×130cm(바위) 2014

 

 

[특별기획] 베르사유 작가 이우환, 외부와의 대화

베르사유 작가 이우환, 외부와의 대화

심은록  미술비평, 철학

베르사유궁은 어떻게 보면 작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나 자칫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장소가 가지는 역사적 상징과 규모에 압도되거나 그것과의 이질감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우환의 이번 전시는 베르사유와 작품이 서로 소통하는 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필자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우환의 작품을 분석하며 작품과 공간이 나누는 대화에 귀 기울인다.

베르사유 궁전은 ‘전통과 현대와의 대화’를 목적으로 2008년부터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주세페 페노네 등 세계적인 현대작가 전시를 잇달아 개최하고 있다. 첫 번째 초대작가인 제프 쿤스의 전시가 개최되자마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베르사유의 전통과 명예를 모독한다며,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외국의 미술애호가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제프 쿤스의 전시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훌륭했다. 그런데 너무 훌륭해서 작품만 보이고 작품이 놓인 장소인 베르사유궁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전시의 목적인 베르사유의 전통과 현대 미술 간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단지 현대미술만의   ‘모놀로그’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작가의 경우에는 ‘조화’를 지나치게 염려한 결과, 그의 작품은 베르사유궁의 웅장함과 찬란함에 묻혀버렸다. 이 경우도 베르사유와 현대미술의 ‘대화’가 아니라, 베르사유의 ‘모놀로그’가 되었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고 싶어선지, 올해는 ‘대화’와 ‘관계항’의 대가인 이우환이 초대되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대화’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라 할지라도 아시아인이 과연 프랑스의 오랜 역사와 철학이 담긴 베르사유 궁전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회의가 일었다.
6월 17일, 마침내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전>(6.17~11.2)이 막을 올렸다. 까다로운 입맛과 날카로운 혀를 지닌 프랑스 미술애호가들은 감탄했다. 베르사유도 보이고 작품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우환의 작품은 노쇠하고 무거운 베르사유에 생동감과 젊은 역동성을 주었고, 베르사유는 작품에 장엄함과 신비를 더해 주었다. <이우환 베르사유전>에는 총 10점 (실내 1점, 실외 9점)이 설치되었으며, 작가는 관람객들의 동선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작품을 정원을 산책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상하도록 배치했다. 이 글에서는 이우환의 ‘외부와의 여러 가지 대화법’ 가운데, <관계항-솜의 벽>을 통해서 ‘전통과 역사’와의 대화법을,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와 <관계항-바람의 날개>를 통해서 ‘자연’과의 대화법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전통과의 대화법 : <관계항-솜의 벽>

<관계항-솜의 벽>은 베르사유 궁전의 가브리엘 건물(Aile Gabriel) 내에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이 건물에 들어가면, 멀리 이 작품과 그 배경인 내부건물이 보인다. 내부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에는 모던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원주(colonne)들이 있고 이 원주 가운데에 가브리엘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아래층에는 모던하고 남성성이 표출되는 도리아식 원주들이 있고, 이 대리석 원주들 한가운데 이우환의 솜으로 된 원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솜으로 된 원주 꼭대기에는 커다란 돌이 마치 주두장식인 것처럼 가뿐히 앉아 있다. 그리스로마의 건축양식에서 주두장식은 시대적 특징과 성격을 반영하면서 서로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루이14세의 유명한 두 왕실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와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에 의해 지어진 베르사유의 건물 외부는 대부분 프랑스식 고전주의 양식을 따른다(반면에 내부는 대부분 바로크적 양식이다). 루이15세의 왕실건축가 앙주-자크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은 이러한 프랑스식 고전주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또한 모던한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가브리엘 건물’을 설계했다. 프랑스식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 양식은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美)의 표상인 그리스로마 양식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모던하고 날렵한 모양의 그리스로마 양식 원주가 세워졌다.
<관계항-솜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면, ‘원주’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벽’의 한 단면이었음을 바로 깨닫게 된다. 이렇게 ‘벽’을 ‘원주’로 착각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작가의 거듭된 숙고를 거친 의도 때문임에 틀림없다. 가브리엘 조각상을 가운데 둔 도리아식 원주와 이오니아식 원주가 정면으로 보이는 바로 그 위치에서만 <관계항-솜의 벽>은     ‘원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위치에서 단지 몇 도만 방향을 바꾸거나 조금만 위치가 바뀌었어도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없다. 특히, 기존의 원주들이 없었다면, <관계항-솜의 벽>은 이러한 사고로 이끄는 암시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관계항-솜의 벽>은 허물어진 벽의 모습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지에 가보면, 원주들은 세월의 폭풍을 견뎌내고 서있지만, 건물들의 벽은 거의 온전한 것 없이 무너져 있다. 바로 그 허물어짐에서 영원성이 보인다. 금방 신축된 완벽하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에서는 오히려 영원성을 느낄 수 없다. 반대로,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있는 성의 폐허나 고대 조각들을 보면 먹먹할 정도의 영원성이 느껴진다. 존재성 혹은 현존성이 그만큼 사라지면서, 시간, 자연, 영원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의적인 느낌이 ‘솜이라는 가벼운 존재성’과 ‘영원성의 자취인 허물어진 벽’ 그리고 이미 ‘영원의 시간을 겪은 자연석’으로 재현되었다. 더욱이 <관계항-솜의 벽>이 그리스로마의 초월적이고 영원한 미를 표상하는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과 원주들 사이에 놓여 있기에, 이러한 양의적인 감성은 더욱 극대화 된다.
육중한 돌이 가벼운 솜 위에 가뿐히 앉아 있는 이 작품은 ‘트릭’을 사용했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은 이우환 조각의 초기 스타일이다.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느낌과 효과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이번 베르사유 전시 출품작에 철봉과 자연석을 사용한 <관계항-거인의 지팡이>가 있는데, 이는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에 있는 작품과 같은 종류의 마티에르를 사용한 같은 이름의 연작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같은 이름을 지니지 않았다면, 연작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이우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일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내 작품을 포함하여 모노하 작가들의 작품은 공간이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모노하 작가들의 예전 작품을 그대로 재생하거나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대와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관계항-솜의 벽>이 비록 작가의 초기 조각 스타일을 연상시킨다고 할지라도, 이 작품은 ‘이곳 현재(sic et nunc)’에서만 가능한 기능을 한다. <관계항-솜의 벽>뿐만 아니라 베르사유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이곳 현재’라는 시공간성과 관련하여 기능하고 있다. 이는 베르사유 전시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곳에서 그가 전시해 온 방식이다.

자연과의 대화법 :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 <관계항-바람의 날개> 그리고 ‘대운하’

베르사유의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작품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이하, 아치)가 보인다. 높이 12미터와 길이 30미터의 스테인리스스틸로 된 아치의 양 끝에는 두 개의 자연석이 놓여 있다. 아치 밑에는 아치와 똑 같은 크기의 스테인리스스틸이 긴 융단처럼 바닥에 깔려있다. 정원 초입에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에 서면, 저 멀리 정원 끝에 있는 또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이 보인다. 사실, 후자는 융단이 아니라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대운하이다. 스테인리스스틸 융단과 대운하 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놀라울 정도로 모양과 색감이 일치해 대운하가 또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이라고 착각할 만큼 비슷하다.
<아치>와 ‘대운하’ 중간에는 ‘녹색융단’이라고 불리는 푸른 잔디밭이 있고, 그 위로 이우환의 또 다른 작품
<바람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40개의 거대한 스테인리스스틸로 구성된 이 작품의 반(20개)은 잔디밭 위에 누워있고, 또 다른 반은 세워져 있다. 미풍처럼 혹은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굴곡진 스테인리스스틸 판들은 아치에서 운하를 오가는 바람의 움직임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이우환의 작품은 정원이 시작되는 <아치>에서부터 <바람의 날개>를 타고 정원 끝에 있는 ‘대운하’까지 3부작(triptyque)처럼 밀접하게 연결된다.
아치의 양끝에 있는 자연석처럼, 이우환의 조각은 언제나 자연에서 가져온 돌을 원래 상태 그대로 전시해왔다. 전시장에 자연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으면서도 그는 이를 ‘ready-made’(여기서는 ‘자연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re-made’(‘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시선이 갔다는 것은 이미 순수하게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는데, 더욱이 자연을 전시장에 옮겨다 놓았으니 이는 re-made이다”라는 작가의 설명은 슈뢰딩거의 유명한 가설 ‘동시에 살아있고 죽은 고양이’를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자연을 볼 때, 본다는 그 행위로 인해 자연(슈뢰딩거에 의하면 ‘양자’)과의 관계가 발생하며 자연(‘양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자의 고민과 똑같이, 그는 보기 이전의 자연을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왔다. ‘대운하’가 비록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이번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연을 옮겨오지 않고, 있는 상태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시켰다. 이로 인하여 그가 바라던 것이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가 조각에서 ‘자연’(자연석)을 차용해왔듯이, 이번에는 베르사유의 ‘대운하’를 그의 작품으로 그대로 차용하면서, 거대한 3부작인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 <관계항- 바람의 날개> 그리고 ‘대운하’가 성립되었다.
이 글의 도입에서 언급했듯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에서 ‘전통과 현대미술의 대화’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의 초대 작가인 제프 쿤스도 그의 예술목적이 ‘소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프 쿤스의 ‘소통’과 이우환의 ‘대화’는, 비슷한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 이우환 작가에게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통’과 이우환이 말하는 ‘대화’의 차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Communication(소통)’은 ‘community(공동체)’에서 나온 말이니까 공동체 내부의 일을 암시한다. ‘Communication’이란 community의 ‘identity(정체성)’로서 이미 공통견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진다. 그래서 이는 ‘common sense(상식)’는 되지만 공동체 밖의 세계, 타자와 통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correspondence(조응)’는 공동체 내부에 국한되는 ‘dialogue(대화)’가 아니기에,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킨다거나 어떤 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서구적인 표현으로 ‘dialogue’라고 할 때는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여기 사람들의 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하고는 또 다른데, 서양에서 ‘dialogue’는 ‘monologue’에서 나온 것으로, ‘monologue’가 깨진 상태가 ‘dialogue’이다. 에고(ego)가 깨진 상태에서 오는 것이 ‘dialogue’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말하는 ‘대화(對話)’는 서로 대(對)하고 마주하고 말하는 것(話)이기에, 서로가 대면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고, 처음부터 에고(ego)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에고가 깨지거나 답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제프 쿤스의 ‘소통’의 경우와 관련해서 미셸 푸코의 설명을 추가할 수 있다. 푸코는 사람들이 담론하는 경우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미세한 권력(pouvoir)이 작용한다고 했다. 소통하면서 상대를 설득하여 화자의 의도를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거나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우환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대화’하고 ‘관계성’을 가진다. 관계를 맺으면서도 개별적으로 남을 수 있는 미묘한 상황에 대해, 타자성에 대해 늘 고민해온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계는 그 자체에 의해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유지한다. 타자로서의 타자는 우리가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되는 오브제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이우환의 조각은 오브제로 환원되지도 않으면서, ‘돌은 돌대로’, ‘철판은 철판대로’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이번 베르사유의 전시에서도, 그의 조각품은 조각품대로, 베르사유 정원은 정원대로 존재케 하면서, 관계에 의해 서로의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서로의 신비 속으로 초대되어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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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Wavelength Space> 철 150×500×1.5cm (세로설치, 총20점)/150×24320cm(바닥설치, 총20점) 2014

맨 위 이미지 <Relatum-Wall of Cotton> 바위 솜 270×40cm(솜에 싸인 벽) 30×30cm (바위, 각, 2점) 2014 이번 출품작 중 유일하게 실내에 설치되었다. 1969년에 제작된 <Relatum-System> 연작을 변형한 작품

[특별기획] 이우환 작업이 벌이는 관객과의 끊임없는 대화

성하(盛夏)의 계절을 맞은 베르사유는 따가운 햇살로 가득했다. 2013년 유럽을 휩쓴 이상 고온 현상이 낯설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럽 특유의 쨍쨍한 햇살도 강렬했다. 그 아래 베르사유궁을 마주하고 선 이우환의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Relatum-L’arche de Versailles)>의 은색 호(弧)가 유난히 반짝였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외관을 대표하는 베르사유궁과 이우환의 아치는 과거와 현재, 화려함과 단순함, 서구와 동양 등 대립되는 다양한 요소가 마치 기싸움을 벌이듯 마주서 있었다. 폭 15m에 이르고, 높이 11m에 이르는 이 아치는 양 옆의 바위에 기댄 것처럼 세워져 있었고 베르사유궁의 정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출입문 같아 보였다. 이미 《르몽드》에 실린 프랑스의 저명한 비평가 필립 다장(Philippe Dagen)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이우환은 “시골 길에서 비가 멈추자 뜬 무지개를 봤다. 그것이 너무 근사해서 언젠가 저것을 모티프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 일을 잊고 있었지만. 그런데 베르사유궁에서 그랜드 커널이 보이는 곳에 서니 예전에 무지개를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무지개를 만들 수는 없지만 아치를 만들면 그 당시 걸으며 느낀 공간에 대한 감동과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라며 작품의 모티프를 설명했다.
6월 12일 프레스컨퍼런스를 마치고 겨우 시간을 내어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따로 마주한 이우환은 일정에 쫓겨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듯 보였다. 기자간담회 준비로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며 어린아이처럼 손에 꼬치 하나를 들고 나타난 그는 그마저 다 먹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는 총 10점이 베르사유궁 실내외에 설치되었다.
이 전시를 위해 이우환은 50여 회 이곳을 방문했다. 베르사유궁에서 전시한다는 것은 작가의 일생에 단 한 번 올까말까 한 매우 드문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베르사유궁은 1973년에 관광차 처음 왔었다. 그때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정원이 인공적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 나무를 사각형, 원통형, 구형으로 깎아놓았더라.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나 같은 작가가 개입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환경에서 작품을 하면 자연성이 너무 강해 내 작품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깐 비자연적이고, 인공미가 강하며, 산업적으로 발전한 공간에서는 내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완벽한 정원을 만든 앙드레 르 노트르가 자신에게 완벽과 또 다른 공간을 열어달라 부탁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런 르 노트르에 대한 오마주 형식의 작품이 바로 <Relatum-The Tomb, Homage to André Le Nôtre>이다. 이 작품이 놓인 공간은 그간 폐쇄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으로 이날도 따로 관리인의 도움을 얻어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우환은 이 작품에 대해 “르 노트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덩어리처럼 땅 밑에 웅크리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알프레드 파크망 전 퐁피두센터 관장은 “모든 작품은 신작으로 베르사유궁이라는 공간에 맞춰 작업했다. 물론 베르사유궁의 모든 공간을 사용할 순 없었지만 선택할 수 있는 한 그가 직접 전시 공간을 찾아내어 베르사유와의 대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특히 몇몇 작품은 신작일 뿐 아니라 형태와 구조 면에서도 전혀 다른 방식을 띤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사유궁이란 공간이 그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본다”며 이우환의 작업이 베르사유궁에서 특별한 무엇을 만들어냈음을 강조했다.
오픈된 공간에 펼쳐놓은 작품이어서 화이트큐브에서 만났던 이우환 특유의 경건함과 작품 주위를 맴도는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진 듯하다는 기자의 말에 파크망은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베르사유궁의 환경이 다른 화이트큐브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부분을 증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Relatum-The Shadow of the Stars>나 <Relatum-The Tomb, Homage to André Le Nôtre>의 경우, 관객은 작품과 개인적 관계를 느끼고 경건한 묵상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업은 갤러리에 놓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람객의 수가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같은 의미를 띤다. 작업에 사용하는 물질, 작업의 구성과 외부 즉 관람객과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베르사유궁을 방문하는 이는 하루에 약 2만5000명이라고 한다. 또한 여름 성수기에는 그 수가 10만 명까지 훌쩍 늘어난다고. 그들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우환의 작품을 스쳐지나게 되는 셈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내 이름이나 작품의 의미를 알 필요는 없다.
그저 ‘아 신기하다’ ‘여기 이런 작품이 있네’ 정도의 감흥을 받으면 된다. 언뜻 들어보니 관객들에게서 그런 반응이 있어 좋았다. 내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
건강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엉망진창이다. 허리도 좋지 않다. 정말 쓰러질 것 같다. 그런데 백남준이 그랬듯 아무리 작은 전시도 다음은 없다는 생각으로 열의, 성의와 돈, 생각을 몽땅 다 털어넣는다”라고 답하며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떴다.

베르사유=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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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광경

[특별기획] 작가로 전략가로서 이우환

류병학  미술비평

한 작가를 규정하는 작업은 그의 일생 전반과 주변 환경과 주고받은 영향 등 이른바 맥락을 살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우환이라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 어떻게 대화하고 부대꼈는지 점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가 어떻게 동시대미술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역사가 깊고 위대한 명소인 베르사유궁 정원에서 전시회를 하게 돼 기쁘고 흥분됩니다. 이 완벽미를 지닌 인공정원 속에서 완벽을 넘어선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게 제 작업의 의도였습니다.” 지난 6월 12일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전> 기자회견에서 이우환은 벅찬 감회에 젖어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일명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인 베르사유궁을 현재진행형의 공간으로 되살리는 야심 찬 프로젝트로 2008년 제프 쿤스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제적인 스타 작가들을 차례로 초대해왔다. 이우환은 아시아 작가로는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2010년)에 이어 두 번째다. 전시를 기획한 알프레드 파크망(전 퐁피두센터 관장)은 “파리 주드폼(1997~98),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2011)에서의 회고전 이후 열리는 이번 베르사유 전시는 이우환 예술세계에 또 하나의 전기를 이룰 것이며, 그는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떻게 이우환은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월간미술》은 필자에게 ‘작가로 전략가로서 이우환’을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다.

미술비평가로서의 이우환

이우환(1936년생)은 1956년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에 밀항한다. 그는 1961년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나 고민 끝에 철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화 학원을 다니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1960년대 중반 《매일신문》의 <현대일본미술전>과 쉘 주최 <현대일본미술전>에 몇 차례로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당시 그는 일본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작품’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같다. 1968년 이우환은 곽인식의 추천으로 한일 문화교류 일환으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참여한다. 196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세중은 곽인식과 함께 이우환을 선정한다.
1969년은 이우환에게 뜻 깊은 해이다. 그는 <오브제에서 사물로>를 미술출판사 미술평론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비평상을 받고, 국제청년미술전에 응모하여 수상한다. 그는 당시 일본 미술계에 ‘핫’한 모노하(物派)에 비평(<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 <다카마쓰 지로-표현작업으로부터 만남의 세계로>)으로 개입하여 일본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힌다. 이를테면 이우환은 급진적인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미술계에서 작품보다는 평론으로 주목받았다는 말이다. 1971년 이우환은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한다. 당시 이우환의 평론은 철학과 출신답게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이론을 미술에 접목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하이데거의 예술개념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신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성 개념을 ‘모노하’에 접목했다. 이우환의 미술평론은 1960년대 말부터 한국미술계에 ‘이론공부 열풍’을 일으킨다. 이우환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 중반까지 40여 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지만, 1960년 초 철학도의 길을 포기했듯이 이후 미술비평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걷는다.

아티스트로서의 이우환

하지만 이우환의 아티스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 사건과 1971년 파리비엔날레 사건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구겐하임미술관은 <재팬, 아트, 페스티벌>에 이우환을 선발했지만, 일본 측은 이우환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시 초대를 보이콧한다. 그리고 《르몽드》를 위시해 적잖은 파리 언론매체에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이우환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결국 그는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일본작가 신분으로 출품할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아티스트로서 이우환의 행보를 알려면 그의 전시 경력을 살펴보면 된다. 이우환은 1973년부터 2008년까지 당시 일본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한다. 1973년 그는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는데, 그가 일본미술계에 자리매김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의 ‘일본현대미술전’에 출품하지 못했던 이우환은 197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이우환은 도쿄화랑의 파워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뒤셀도르프미술관 그룹전을 계기로 사방팔방으로 독일 메이저 갤러리들을 물색한다. 그는 1976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보쿰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리처드 세라 등 국제적인 미니멀아티스트들이 소속돼 있던 갤러리m은 유럽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이다. 당시 갤러리m의 딜러인 알렉산더는 유럽미술계의 파워맨이었다. 1976년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우환은 그다음해인 1977년 ‘카셀도쿠멘타’에 초대된다. 갤러리m의 딜러 알렉산더의 파워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1974년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그룹전(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했던 그는 1978년 당당하게 개인전을 개최한다. 같은 해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유명 미술관인 스테델(STADEL)에서 개최한 조각전(Z. B. Sculpture)에 초대된다.
이우환은 또 한국의 메이저 갤러리인 갤러리 현대에서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는 프랑스의 메이저 갤러리 중 하나인 갤러리 드 파리(Galerie de Paris)에서 1984년부터 1995년까지 개인전을 연다. 1986년에는 퐁피두미술관에서 개최한 <일본의 아방가르드(Le Japon des Avant-Gardes)전> 에 초대된다. 1994년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무디마미술관(Fondazione Mudima)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구겐하임 소호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Scream against the sky>에 초대되고, 국립현대미술관과 갤러리 현대 그리고 인공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은 갤러리 현대가 금전적 지원을 편집디자인은 인공갤러리가 맡았다.
이우환은 영국의 메이저 갤러리인 리슨갤러리에서 1996년과 2004년 그리고 2008년 개인전을 개최한다. 1997년에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파리 주드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퐁피두에서 기획한 그룹전 <Made in France>에 초대된다. 1978년 프랑크푸르트의 스테델에서 그룹전에 초대된 이우환은 1998년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어서 1999년에는 독일의 저명한 른 루드빅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룹전 <Kunstwelten im Dialog>에 초대된다. 2001년에는 영국 런던의 저명한 테이트모던에서 기획한 그룹전<Century City>에 초대된다.
2003년 이우환은 삼성미술관(호암갤러리, 로댕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같은 해 그는 일본의 모리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룹전(Happiness)에 초대되고, 2004년 도쿄국립미술관의 그룹전 <Ecole de Limpa>에 초대된다. 2006년엔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2007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된다. 2008년 그는 <이우환 베르사유>를 후원하는 갤러리 중 하나인 뉴욕의 메이저 갤러리 페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2011년에는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2014년 베르사유궁에서 이우환 개인전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단편적인 이우환의 전시경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전자는 이우환이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메이저 갤러리의 역할이다. 물론 유럽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우환의 개인전들 중에는 이우환 개인의 노력으로 성사된 것이 적잖다. 필자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이우환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당시 50대 말이었던 이우환은 자신의 도록들을 직접 들고 미술관 관계자를 찾아다녔다. 한마디로 이우환에게 매니저가 없었던 것이다. 와이? 왜 이우환은 매니저도 없이 혼자 고군분투한 것일까?  이우환 왈,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문득 “내 인생을 통해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며 교육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후자는 세계미술계의 권력으로 부상한 미국에서의 전시경력이다. 이우환은 유럽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한 반면, 미국에서는 2008년 페이스갤러리의 개인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시경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와이? 왜 이우환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우환 왈, “미국미술계가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필자는 <쓰리스타와 이우환>(2003)에서 이우환이 미국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의 외향이 아니라 이우환의 상업적 시스템 결여에 있다고 보았다. 그 대안으로 필자는 쓰리스타에게 그동안 구축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여 이번(2003년 삼성미술관) 이우환 회고전을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 순회할 수 있게끔 공격적인 마케팅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2011년 삼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는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삼성과 이우환

국내 모 일간지는 이우환이 삼성가(家)와 친분이 깊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1960년대부터 이병철 선대 회장과 최순우 선생 등 고미술 전문가들 사이에 심부름을 자주 하면서 인연을 쌓게 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과도 그 시절부터 즐겨 어울리며 답사를 다닐 만큼 절친했고, 지금도 종종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아티스트는 개인이다. 따라서 아티스트는 어느 갤러리에 소속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국제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위해서는 메이저 갤러리의 서포트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 대기업의 후원 없이 국제미술계의 스타가 되기는 쉽지 않다.
이우환은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따라서 그는 이건희 회장의 고등학교 선배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 미대를 중퇴했지만)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물론 홍 관장은 서울대 응미과를 졸업했고, 이우환은 동양화과를 다녔다. 1984년  《중앙일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건축된 《중앙일보》 신사옥에 중앙갤러리가 개관했다. 당시 신사옥에 공공작품을 설치할 때 이우환이 자문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우환은 그 이후에도 삼성미술관의 자문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로 미루어 삼성은 이우환에게 후원자가 돼줬으며 이우환은 삼성에 자문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삼성미술관과 이우환은 일류를 지향한다.
2001년 이우환은 호암상을 수상하고, 2003년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대대적인 개인전을 개최한다. 지난 2011년 2월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현직에 복귀한 후 2012년 VIP 달력 작가로 이우환을 선택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인용했던 알프레드 파크망이 주목했던 두 개의 이우환 회고전(파리 주드폼과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미술관)은 삼성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파리 주드폼은 1990년 중반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삼성의 후원을 받아 1997년 주드폼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을 기획한다. 삼성은 201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삼성아시아미술큐레이터’를 설립한다. 첫 큐레이터인 알렉산드라 먼로는 미주 삼성의 후원을 받아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을 기획한다.
야심 찬 프로젝트인 일명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세계미술계의 절대권력을 꿈꾼다. 이를테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가 되는 ‘티켓’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계미술계의 절대권력을 향한 꿈을 이루는 데 재정적 문제라는 현실을 비켜갈 수는 없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의하면 재정위기로 정부 지원이 줄어든 파리의 박물관은 후원금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에 아해(세모그룹 유병언 전 회장)는 2012년 루브르 박물관에 110만 유로(약 15억3000만 원), 베르사유 궁전에 140만유로(약 19억4600만 원)를 후원금으로 기부하고, 그 대가로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궁 미술관에서 아해의 사진전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혹자는 “프랑스 문화예술의 자존심이 자본의 논리에 영락없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자본을 위해 프랑스 문화예술로 장사를 하고 있다.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베르사유전> 개막 기자회견에서 카트린 페가르 베르사유 박물관장은 “이우환의 작품은 우리를 조용하고 매혹적인 그의 시 속으로 이끈다”고 평한다. 하지만 현지 언론 기자들은 이우환 옆에 앉은 카트린 관장에게 베르사유궁에서 개최된 <아해 사진전>에 대해 질문했다. 카트린 왈, “‘아해 전시’는 돈 받고 대관해주는 공간 ‘오랑주리’에서 열린 이벤트였을 뿐이다. 이우환 전시는 베르사유궁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매우 권위 있는 전시”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아해 사진에 관한 카트린 관장의 인터뷰는 그와 전혀 다르다. “그(아해)의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겸손하다. 한 사람이 세상, 자연, 생명을 시적으로 바라보는 점이 이례적이다”라고 평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이우환의 벅찬 감회가 길지 못했을 것 같아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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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팔라조 팔룸보 포사티에 설치된 <Resonance>

위 이미지. 2008년 9월 10일부터 10월 25일까지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전시광경

 

[특별기획] 21세기의 지정학적 노마드 이우환

김미경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소장, 강남대 교수

이우환은 스스로를 노마드(nomad) 혹은 중간자로 정의하는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가 우리 미술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까? 또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유무형의 환경은 이우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계의 시각은? 이러한 많은 질문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필자의 글을 통해 이우환과 우리, 그리고 일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거장이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예술가 이우환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큰 예술로 배태되어 미학적 토론의 대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양은 근본적으로 일본과 유럽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과연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nomad)면서 중간자(中間者)로서의 이우환에게 한국은 어떤 곳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 문화예술은 이우환의 사상 및 예술과 정작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예술가들과 이우환의 실체적인 관계는 어떠한가? 아울러 이우환을 바라보는 일본 내부의 비평적 시각과 일본이 세계에 선보이는 이우환은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서구에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일본이나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계에서 이우환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거장의 사소한 주변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던 그 대목은 먼저 한국에서 논의되어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세계적인 한국인 예술가에 대해 자부하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1956년 여름,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갓 입학한 이우환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가 손에 들려준 약을 갖고 작은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감행했던 대학 1년생의 일본 밀항은 60여 년 전의 은밀한 사건이었고, 현재의 이우환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그는 도쿄의 다쿠쇼쿠(拓殖)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니혼(日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문학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끝없이 글을 쓰던 그가 자신의 열린 사상으로 젊은 일본 작가와 처음 교감했던 글은 1969년 6월 《산사이(三彩)》에 실린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存在と無を越えて-關根伸夫論)>이었다. 무명의 작가이자 비평가가 떠오르는 신예 작가에 대해 쓴 글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세키네와 주변의 작가들에게 사상적 키워드를 제공하며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관계항>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국민미술 ‘모노하’(ものほ)로 불리게 된 일본의 중요한 예술 흐름에서 재일 한국인 이우환은 사실상 결정적인 존재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5년 일본 《비주츠테초(美術手帖)》의 ‘일본근현대미술사 100년’ 특집에서 일본 대표 미술가로 선정된 일,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과 2010년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미술관 건립, 그리고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과 201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전시를 관통하는 이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우환의 사상과 예술의 특성이지만 일본의 국력과 다각도의 모노하 담론도 만만치 않은 뒷받침이다.

‘근대초극’ 논의의 중요성과 일본에서의 이우환

한국 문화예술계에서는 서구 근대나 컨템퍼러리 개념이 혼용되고 있을뿐더러 그것들을 우리에게 대입하는 이상으로 ‘근대초극(近代超克, The modern)’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필자가 《모노하의 길에서 만난 이우환》(2006)에서 상세히 다루었듯이 일본 지성계에서 ‘근대초극’ 논의는 매우 심도있게 전개되었으며 이우환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 근대문명과 모더니즘의 역사를 비판하며 뛰어넘자는 일본의 근대초극은 이우환의 글 <세계와 구조-대상의 와해>(1969.6)나 <컨셉션과 대상의 은폐> (1969.8), <데카르트와 서양의 숙명>(1969.9)에서도 잘 피력되어 있다. 그러나 이우환의 근대초극 관점의 보다 큰 강점은 단순히 서양을 이기는 동양 찬미가 아닌 ‘중간자’로서 서양과 동양의 경계도,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경계도 없는 통섭적 입장으로 열려있는 태도이다. 그것은 모노하 작가들을 그의 주변으로 모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다마(多摩) 미술대학의 비쿄토(美共鬪)가 이우환을 맹공격한 이래 그 공격의 주동이었던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尚嘉)는 물론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나 지바 시게오 (千葉成夫)로 이어지는 일본의 비평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우환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신비주의적 자연주의 파시스트’(히코사카)나 ‘창조를 부정하는 자’(지바), ‘붓을 빼앗기고 추방된 자들이 세운 왕국 모노하의 이우환’(미네무라) 같은 일본의 비평적 관점은 이우환 예술의 성격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노하가 일본의 국민미술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이우환이 껄끄러운 ‘타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세계적인 모노하를 말하기 위해 이우환이 일본의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그의 말은 그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국에서 커서 일본에서 서려고 하니 일본 쪽은 나더러 한국적이라며 침입자 취급을 하려들고 시간이 흐르니 한국에서는 일본 바람을 탄 도망자로 몰려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더 멀리 설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삼십여 년 헤맸더니 그쪽에서는 또 동양적이니 이방인이니 하며 칭찬으로 점잖게 제외시키려 들지 않는가. 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을 쫓아다녀야 하고 생소한 작가와 만나고 함께 전람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열린 자기를 기르는 수 밖에 따로 살 곳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우환 《여백의 예술》(2002)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이우환의 실체적 관계

이우환은 평면회화나 입체설치에서 모두 자신의 미학을 관통시킨다. 1960년대 초엽에 이미 시도된 점과 선의 회화들은 1970년대에 특유의 조형과 미학으로 진화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입체설치는 모노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우환의 회화는 모노하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노하는 평면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공간》을 통해 ‘일본현대미술의 동향’을 처음 국내에 소개한 이우환의 글에는 ‘모노하’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다카마쓰 지로(高松次朗)의 광목 천과 세키네 노부오나 나리타 가즈히코    (成田克彦), 요시다 가쓰로(吉田克郞)의 돌로 눌러 놓은 종이 외에 이다 쇼지(飯田昭二)의 반으로 자른 통나무, 아오야마 고유(靑山光佑)의 인간형체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과 1972년 이우환의 명동화랑 전시, 그리고 이우환이 커미셔너였던 1973년 파리비엔날레 무렵까지 일본 모노하를 둘러싼 새로운 설치 형태의 조형은 한국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모노하’를 특정 카테고리화하지 않던 이우환이 그 용어를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이우환 하면 ‘모노하’를 떠올렸던 국내 비평가들에게 이우환의 회화와 입체는 모두 ‘모노하’라는 이름으로 묶어졌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모노하’는 ‘모노크롬’과 혼동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모노하’는 결코 회화적 개념이 아니며 ‘모노크롬(Monochrome)’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학이 아닌 우정 관계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의 모노톤* 예술

이우환과 몇몇 한국의 실험미술 작가는 시공간에서 물체들이 발휘하는 물질성의 놀라운 생생함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태도를 공유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우환과 한국의 모노톤 예술을 주도한 작가들 간에 맺어진 관계는 사실상 미학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인간적인 우정 관계였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 작가들의 관계는 1968년에 시작되었다. 1968년 7월 한국내 반일감정을 다소 극복하면서 본격적인 한일교류전으로 <한국현대회화전>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이우환이 재일 작가로서 출품한 <퐁경Ⅱ>가 박서보에게 ‘그리지 않은 그림’으로 깊은 인상을 준 사실은 1984년 가을         《화랑》에 실린 박서보의 <이우환과의 만남 68년 이후를 회상한다>에 기록되어 있다.
“…이우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8월… 그는 한국현대회화전에 300호가 넘는 대작 3점을 출품했는데 분무기로 전 화면에 형광도료를 뿜어 놓은 소위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것이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한 열기에 심신이 만신창이로 화상을 입고 있던 서울화단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곧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우환은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과 같이 전시를 하며 어울려 다녔으면서도 자신의 회화의 미학적 입장을 그들과 관련시켜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회화는 한국의 ‘모노톤 예술’과 거의 상관이 없는 예술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유의 출발 지점부터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최근의 국내외 전시에서까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모노톤 예술가들과 이우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 그리고 몇몇 전시 기획자와 국내의 몇몇 비평가가 미학이 아닌 우정관계에서 비롯된 이우환의 태도를 이우환의 미학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영향이 미술계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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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모노톤 예술Monotone Art’
이라 부르게 된 미술 경향은 그것이 ‘단일한 색’을 의미하는 모노크롬Monochrome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단일한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의미하는 ‘단색화Dansaekhwa’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1999년 박사논문 이후 ‘단색조 회화Monotone Painting라 부르기도 했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김장섭 등 중요 작가들의 작업이 단순히 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로 이미 확장되어 있다는 점을 중시하게 되었다.

유목민 중간자 이우환

이우환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이라는 삼각형 속에서 그 어떤 꼭지점도 자신의 철저한 본거지가 되지 않는 일종의 유목민(nomad)이다. 그래서 어디서도 ‘타인(他人)’의 처지를 면치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관계’ 속에서 이동하는 운동성을 갖고 있다. 2013년 파리의 카멜 므누(Kammel Mennour)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신의 회화와 입체설치를 놀랍게 조우시키는 ‘만남’의 관계를 또 한번 새롭게 시도했고 2014년 베르사유전시에서 서구 전통과 아시아의 미학을 조우시켰다.
필자는 올해 4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란 제목으로 한 영어 발제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모노톤 예술의 용어 문제 및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두 가지 정치 사회학적 매핑을 피력했고, 대단히 진지한 반응과 공감을 나누었다. 앞으로 한국의 미술계에서도 이우환과 그의 예술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토론의 장에서 연구자들의 만남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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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므누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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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풍경 Ⅱ> 1968, <한국현대회화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2003년 이우환이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한 컬러 슬라이드)

위 이미지. 이우환 <관계항> 180×230×50cm 1969, 파리 비엔날레(1971) 출품작

사진 :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아카이브 자료

[Exhibition Focus] 윤동천 개인전 병치(竝置)-그늘

지금 지금 지금, 여기 여기 여기, 우리 우리 우리

작가 윤동천은 고도압축성장을 이룬 한국사회의 이면에 도사린 부조리와 모순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해왔다. 6월 18일부터 7월 30일까지 신세계백화점 본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윤동천의 개인전 <병치(竝置)-그늘>은 작가가 포착한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설치, 사진,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며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은 시사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조형어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시의 이모저모를 동료 작가인 석영기 교수(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와의 대담을 통해 소개한다.

석영기(이하 석) 이번 전시는 언제부터 준비 해오셨나요.
윤동천(이하 윤) 제안은 몇 년 전에 처음 있었는데, 지난해 겨울에 일정이 최종 결정됐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겨울방학 무렵부터 준비해온 셈이죠.
전시 제목은 언제 정하셨나요.
막판에 홍보자료 내기 직전에요.(웃음) 5월 중순에 결정했어요. 그전엔 이것저것 망설임이 많았죠. 처음에는 백화점 갤러리가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고객층을 생각하니 입장이 바뀌더군요. 아주 진지한 걸 보이자니 관객들이 재미없어할 것 같고, 남대문시장에서 물건을 사다 놓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내 나이에 너무 치기어린 짓 같고. (웃음) 엎치락뒤치락하다보니 시간이 좀 많이 걸렸죠. 다른 전시보다 수위조절을 하고 콘셉트를 잡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지난 2011년 OCI미술관 전시 때 내건 ‘탁류(濁流)’라는 제목은 비교적 선명했는데, 이번 전시제목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늘’은 이 사회의 ‘그늘’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학생들과 얘기하다보면 젊은 세대들이 우리 때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희 세대에게 그림 그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시작한 터라 별로 불안할 게 없었어요. 못살아봤자 얼마나 더 못살겠느냐는 심정이랄까요.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생각이 다르더군요. 웬만큼 먹고산다는 전제하에 그림을 그리는 거지 절대빈곤은 아예 상상도 못하는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전체가 잘 살게 되니까 그 대열에서 낙오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겠지요. 사실 요즘 젊은 세대는 다들 뛰어나잖아요. 시각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재주도 많고. 만약 제가 요즘 이 친구들하고 경쟁한다면 맥도 못 출거예요. 그런데도 무지 불안해하고 괴로워해요. 자기 신뢰도 없고, 서로 지나치게 경쟁하고. 우리 세대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열심히 일했지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 자식 세대는 잘살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식들 세대는 너무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더군요. ‘삼포(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세대’, ‘잉여세대’, ‘88만원 세대’라고 칭해지는 세대 말입니다. 아! 이런 게 바로 우리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구나 생각하게 됐지요. 그런데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해보니, 너무 많이 먹었더라고요. 아직까지도 남 탓을 하기엔 이미 한참 쪽팔릴 나이가 됐더군요.(웃음) 철이 안 들어서였는지 여태껏 그걸 잘 몰랐어요.
병치(竝置)는요?
병치는 방법론일 뿐입니다. 하나만 갖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늘어놓고 결합시키거나 대조,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식 말입니다.
병치보다는 그늘에 방점을 찍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병치는 보여주는 형식, 방법론이고, 실제로는 젊은 세대에 대한 저의 자책, 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늘-병치’는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치-그늘’로 정했습니다.
20년 전부터 윤 선생의 작품을 봐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하신 것처럼 거의 비슷한 방법론을 유지해온 것 같아요. 20여 년 전, 그러니까 이른바 민중미술 끝 무렵 작품이 대부분 사회적 문제를 현실적으로 부각시켜 서술하는 방식이었는데, 그에 반해 윤 선생님의 방법은 은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란 말이죠.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처음 제기한 작가랄까, 그 그룹의 일원으로 평가합니다. 한편 1990년대 초반 설치작품도 크게 유행했는데, 그들은 형식 자체, 물성의 연장선에서 실험정신을 표현했지 사회적 문제의식을 작품에 적극 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윤 선생님은 이 설치미술을 이용해 사회적 문제제기를 했다고도  할 수 있고, 이 또한 처음 시도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당시 활발했던 민중미술이 퇴보하면서 사라졌다는 거죠. 서술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던 작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정치적 문제가 다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사회적 문제에 관심 갖는 작가가 많아진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는 은유뿐만 아니라 직유, 환유, 제유 등 여러 가지 비유법, 강조법을 써오긴 했습니다만. 결론이 나있는 뻔한 주제를 다룰 때 자주 위트, 유머, 파라독스 등의 역설적 표현을 하는 편이지요. 저는 꾀가 많아선지(웃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장기적으로 투자해야하는 방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물론 종국에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소신은 있지만. 체질적으로 별로 끈기가 없는 것 같아요. 만약에 저 보고 글을 쓰라면 소설가는 못 되고 시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때문에 직설적으로 발언하거나 정공법으로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피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정공법으로 공감을 얻으려면 그만큼 더 정교하고,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나쁘게 말하면 피한 거지만, 좋게 말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환기시킨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때 민중미술 하는 분들과 같이 전시하기도 했는데…
민중미술 쪽에선 제가 갖고 있는 비판의식 때문에 저를 포섭하려 했던 것 같고, 반대쪽에선 제 작업의 실험적인 측면만 보고 현대미술의 일원으로 보려고 했죠. 이렇게 양쪽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지만, 사실은 양쪽에서 다 저를 곱게는 안 봤죠. 어느 한편으로 확실히 입장을 정리하기 원했지만 제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당시는 민중과 모더니즘 이 둘을 놓고 선택을 고민하는 게 현실이었죠. 하지만 이쪽 아니면 저쪽 식으로 진영을 구분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어요.
당시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은 미술적인 주제에 의한 구별보다는 논리, 개인적 유대감, 집단의 소속감 같은 동지애에 치우쳤다고 봐요. 사실 내부적으로는 민중미술이 상당히 다양했는데도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 활동했던 작가들이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돌아와, 윤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방법론적으론 은유적인 방식을 사용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죠.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미적 범주에서 보자면 숭고미 비장미 우아미 골계미가 있는데, 민중미술은 숭고미 아니면 비장미에 해당되죠. 그런데 윤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우아미 아니면 골계미가 느껴집니다. 골계미의 특징은 해학, 위트, 아이러니 등인데, 특히 윤 선생님 작품은 해학적인 미적 범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로서는 해학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가 드물었죠. 조선후기에는 그림뿐 아니라 판소리처럼 해학적인 예술장르가 많았지만, 사라졌고. 근대 이후 모더니즘 시기엔 우아미가 휩쓸었죠. 사회적인 문제 내용은 별로 없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정신적인 고상함을 추구하는 차분한…. 민중미술은 숭고미 아니면 비장미가 대세였고. 이렇게 볼 때 윤 선생님의 해학적인 작품은 미적 범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죠. 조선시대 미학을 이어받았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웃음)
제 작업을 보고 나쁘게 얘기하자면, 산만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하도 여러 가지 매체를 한꺼번에 다루고, 주제도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부분까지 다양하게 건드리니까요. 반면 좋게 얘기하면 실험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요. 뭐 결국은 그 얘기가 그 얘기지만요.(웃음)
또 다른 지점에서 보자면 요즘은 이미지를 채집하는 방식의 작가가 많지만, 1990년대 무렵엔 그렇지 않았죠. 그런 분야에서도 윤 선생님은 선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이번 전시엔 유독 이미지를 채집해서 사용하는 작업이 많이 포함되었지요. 장소가 크면 대개 페인팅을 함께 거는데, 작을 경우 단일한 인상을 주기 위해 양식을 통일하는 편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제가 페인팅 작업을 하는 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지금까지 몇 차례 상을 받은 것도 모두 페인팅작업의 결과였는데. 제가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해도 사람들, 특히 기자들은 위트와 유머를 앞세워 얘기해요. 아무래도 그게 더 인상적이었나 봐요. 제가 보여 지고 싶은 모습과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실제로 페인팅을 할 때는 특성상 이미지 채집보다는 더 본격적으로 작업하는데 그게 잘 부각되지 않는 편이지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네요. 이미지를 채집하고 그 이미지를 활용하는 작가로 인식되어 있고, 그린다는 건 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회화작품만으로 한 전시가 최근엔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회화만 가지고 큰 전시를 해볼 생각이에요. 회화작업을 하면 마치 고향에 온 것 같고 설레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줄곧 해오던 것이었고, 한편으론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다른 작품의 프로세스는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이미 끝을 알고 만들어 가는데, 그림은 그렇지 않거든요. 제게 그림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과정에 반응하고 끝을 찾아가는 작업이에요. 그렇다보니 전시를 준비할 때 제일 먼저 페인팅작업을 해요. 그러지 않으면 막판에 쫓기다 엉망이 되기 십상이죠. 예상할 수 있는 건 미루어도 상관없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건 미리미리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페인팅이 안 풀리면 그 전시 전체를 죽 쑤게 되죠.(웃음)
페인팅을 안 알아준다고 상당히 서운하신 것 같네요.(웃음) 그런데, 손재주도 좋은 것 같아요. 실험성 못지않게 완성도나 밀도 면에서도 아주 완벽하거든요. 메시지의 은유 못지않게 큰 장점이라고 봐요. 상업적 미술에서 요구하는 마감도 잘한다는 얘기죠. 사실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가 하면 앞서 말한 민중미술 세대와 다시 비교하자면 민중미술 작가들은 삶의 현장, 사건 현장 그 자체에서 작업했는데, 윤 선생님은 집 거실에서, 사무실에서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죠. 실재 그 자체가 아닌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은 2차적인 소스를 이용해 작업하는 거죠. 윤 선생님 작품 제작 방식은 그런 전환점에 위치해 있는 것 같아요. 더불어 국제적인 이슈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아요. 보기 드문 경우인데, 제목도 한글로 정하고, 한글을 사랑하시나요?(웃음)
작업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미 미대 입학 전에 정리됐어요. 그리고 대학생활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고요. 그것은 결국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생각이에요. 우리나라 사람한테 보여주는데 굳이 남의 나라 말을 쓸 필요도 없고.(웃음)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세대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선택의 고민을 강요받았죠. 그런데 민중미술은 관점과 태도는 좋은데 방법론에선 좀 그렇고, 모더니즘은 미학적인 측면에선 일정 정도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도대체 소통이 안 되고…, 그래서 그 사이의 접점을 찾자는 게 저의 입장이었지요. 아마 그 당시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테지만.
1990년대, 그러니까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하신 건데, 본인의 작품 관점에서 봤을 때, 요새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거나 윤 선생과 비슷한 주제의 작품을 하는 작가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들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궁금할 듯해서요.
글쎄요, 아주 솔직히 말해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면 전반적으로는 “저걸 왜 하지?”, “저게 재미있나?”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에요.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에 누구나 동의하는 것 같고, 또 그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소통의 수단으로서 작품을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재밌어할까에 대한 고려가 먼저 있어야 할 텐데, 그들에겐 이에 대한 성찰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기호와 취향만 있지. 저는 그 지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저 자신은 남과 소통하기 위해선 작품이 한껏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한편으로 또 다른 움직임이 있지요.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아주 깊게 사회와 연결시키는, 개인과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작업 말입니다. 상당 기간 지속된 이런 움직임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사회와 돈독히 관계 맺고, 결속되어 있는 면모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해요. 비교해보면 내 작업은 여전히 그냥 던지는 듯한 느낌이라서 스스로 반성도 많이 하게 되죠.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이나 사회에 몸담고 합류해서 함께 이뤄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요하게 장기간의 프로세스 자체를 작업으로 이끌어내지도 않으니까요. 저는 여전히 전시장, 미술관 안에서 머물고 있어요. 사실 20년 전에도 어떤 인터뷰에서 “전시장보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미술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는 그런 작업을 더 진행할 요량이다”라고 밝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막상 그렇게 잘 이뤄지지 않더라고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하고 수없이 벼르기만 했지요. 모두 저의 게으름과 실천력 부족이 문제겠지요.
현실 참여 면으로만 보면 윤 선생님의 미술은 미지근하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 다양한 볼거리,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개가 달린다>라는 작품, 좀 당황스럽기도 한데, 이 작품을 보는 저도 아, 나도 개처럼 달리면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지요.
그런데 미술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문자와 이미지가 같이 사용되는 방식은 포스터나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것이고요, 우리 전통미술에서는 문인화 같은 것이죠. 시서화 일체라고 하였는데, 시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그 내용을 시각화하는 것이 문인화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지금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부르죠. 저는 이 <개가 달린다가 전통문인화 방법과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관계 속에 있다고 봐요. 문인화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기수양의 세계죠, 반성적인 자기고찰도 포함되겠고. 일러스트레이션은 소통이 제일차적인 목적이겠고, 작가 본인의 내면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 작품에서는 자기 내면의 성찰과 소통이 동시에 보이네요. 그리고 작품 <촛불-태우다>는 기법이 독특하네요. 색감으로 보면 동판화 같기도 하고.
레이저 커팅기를 이용해서 판화지 표면을 살짝 태운 거죠. 원래 레이저 커팅기는 금속판, 아크릴, 나무 등을 레이저빔으로 절단하는 것인데 그 강도를 약하게 조절해서 작품에 이용했습니다. 판화지 종류마다 타는 정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거치느라 제작하는 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습니다.
촛불도 타고 종이도 타서 완성되는 작품이군요. 주제의식과 매우 일치하는 기법이라고나 할까(웃음) 실제 불난 흔적을 보니까 촛불의 느낌이 더 다가오네요. 그리고 노란색 종이에 검은색 테두리 액자들로 이루어진 작품은 세월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너무 가슴 아파 무슨 말을 더 할 수 없네요.
세월호 사건이 그 작업의 직접적인 동기지만 노란색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윤 선생님 작품을 보다보니 문득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소설이 생각나요. 정치적인 주제, 사회적인 주제보다는 자신의 삶 주변의 일상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소설이죠. 기억나는 대목이 있는데, 몇 년 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던 내용이에요,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부모님 집 건너편 동에 아들 내외가 사는 집이 있지요. 부모님은 밤이면 아들네 아파트 창을 바라보면서, 불이 환하면 아들네가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구나, 불이 꺼져 있으면 아들네가 외식을 하는구나, 불이 흐릿하면 아들네가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생일 파티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내용이죠. 뜨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하기도 하죠. 하지만 소설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죠. 박완서의 소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루듯이,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미술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그냥 천천히 보면서 같이 느끼고,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루고 있다고 봐요. 미지근하지만 20년 이상 묵은 관록에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진행 정리・이준희 편집장

윤동천(오른쪽)은 195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를 졸업했다. 1988년 갤러리 현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8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1회 토탈미술상(1991), 제11회 석남미술상(1992) 제4회 국제 아시아 유럽 비엔날레 금상(1992)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석영기는 1960년 태어나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 조형미술과와 뉴욕주립대 판화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에서 첫 개인전 <컴퓨터사진판화전>(도올갤러리 1991)을 비롯해 <복제미술전>(자하문미술관 1992), <박정희, 박찬호, 그리고 15대 대선-컴퓨터 판화전>(담갤러리 1997), <박정희전>(표화랑 2001) 등 20여 회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윤동천 (42)

<모음집(母音集)-모이다(1933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한,)> c-print 110×550cm(총 20점, 각각 55×55cm) 2014

윤동천 (35)

<정치가기성세대를 위한 도구들>(왼쪽) 종이위에 레이저 76×56cm 2014
각종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도구들을 시각화하였는데, 뻔한 내용이지만 결국은 우리들을 꾸짖어 달라는, 때려 달라는, 질책하고 벌하라는 얘기이다.

윤동천 (19)

<삶의 무게> 시트지, 신문, 폐지, 병, 캐리어 272×436×140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