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정연두 작업의 연속과 분절에 대하여

문혜진 | 미술비평

정연두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의 이주 서사에 주목하여,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통해 한국과 멕시코를 잇는 사람과 식물의 백년 여행기를 재구성한다. 이번 전시는 20세기 초 한인 이주라는 다큐멘터리적 서사를 넘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접합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탈구된 시공간의 경험, 이질성과 친숙함의 관계, 이주를 둘러싼 세대 간의 문화적·역사적 간극,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이동하고 번역되는 존재 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전시는 9월 6일부터 2024년 2월 25일까지.

〈날의 벽〉 설탕, 허니콤 보드, 흡음재 가변 설치 2023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박홍순

정연두 작업의 연속과 분절에 대하여

문혜진 | 미술비평

짐작건대 《MMCA 현대차 시리즈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이하 <백년 여행기>>에 대한 반응은 다양할듯하다. 2000년대 정연두를 알린 작업이 연출사진이나 사진/ 영상설치의 형식으로 어떤 장면을 연출하고 이면의 세트나 장치를 드러내는 유였기에, 역사와다큐멘터리적 서사가 개입된 이번 작업이 낯설거나 새롭게 느껴지는이가 많을 것이다. 반면, 연출이라는 지점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측면에서 모종의 연결성을 감지하는 이도 있으리라 본다. 정연두 작업 전체의 흐름에서 이 전시가 어떻게 접속되는지, 그 연속과분절의 역학 (dynamics)을 가늠하는 것이 곧 이번 전시의 의의를 판단하는 일일 테다.

<백년 여행기>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중심 악절(leitmotif)은 20세기 초 한인들의 멕시코 이주다. 작가는 멕시코에서 한인 후손들이 광복절 행사를하는것을 보고 전혀 무관해 보이는 요소들이 시공간을 넘어 연결되는것에 깊은흥미를 느꼈다. 특산품으로 팔릴 만큼 제주도에 흔한 백년초가멕시코에서 유래해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에 정착한 식물이라는 점을 떠올린 작가는 한국과 멕시코를 잇는사람 및 식물의 백년 여행기라는 주제에 착안한다.

이주와 이민, 식민, 노동같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가는 2015년 프랑스 레지던시 기간중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을 소재로 여기와 저기 사이>(2015)라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타자와이주, 이민의 문제에 눈을떴다. 이 같은 관심이 동아시아지역성을 중심으로 응집되기 시작한 것은홍콩 헤리티지 아트센터에서 선보인 <높은굽을 신은소녀>(2018)부터다. 1958년 23살에 홍콩에 밀입국한문씨 할머니의 이야기와 2017년 23살이었던 평범한 소녀들의 홍콩에서의 삶이 교차되며 노동과산업이 얽힌 홍콩의 근현대사가 개인의 인생 서사를 통해 재구성된다. 이후 도쿄현대미술관의 의뢰로 제작한 <고전과 신작>(2018)에서는 2차세계대전 당시 폭격 피해를 서술하는 한 할아버지의 증언과동시대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수업, 도쿄의 과거와 전통설화를 이야기하는 라쿠고(落) 공연이 연결되며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과 역사가 만난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인물과 이야기가 연결되는 지점은《백년 여행기>에서도 동일하다. 멕시코 한인 디아스포라의 서사뿐 아니라 2023년 한국에 사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의 이야기, 플랜테이션 노동의 주요 도구였던 마체테(Machete)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합의가 5점의 작업을 통해 이어지는 <백년여행기>의 구성은 비슷하거나 다른 서사를 시공간을 넘어 교직하는 작가의 최근 전략을 공간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과거 한 작업 내부에 국한되던 이야기의 교차는 각각의 이야기가 전시공간의 앞뒤로 느슨하게 이어진 배치를 통해 작업 외부에서 구현된다.

한편 형식적으로도《백년 여행기>에서는 이전 작업의 반향이 엿보인다. 한인 혈통의 부모와 자식을 마주보게 배치한 <세대 초상> (2023)은 사진과 영상의 중간지점이라는 측면에서 <식스포인츠>(2010)를, 서로 다른 두 세대를 교차시키는 2채널 구조라는 점에서는<높은굽을 신은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두 세대가 이미지로 대비되는 <세대 초상>과 달리, <높은 굽을 신은 소녀> 에서는 각 채널이 이미지보다 서사로 나뉘며, 부채꼴의 설치 구조도 대조보다는 느슨한 연결에 방점이 있다. 판소리, 기다유분라쿠, 마리아치 공연을 통해 한인 이민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동명의 작업 <백년 여행기> (2023) 는각기 다른나라의 목소리를 통해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소음 4중주>(2019)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소리가 하나의 이야기를 지칭하는 <소음 4중주와 달리, <백년 여행기>의 노래들은 한인 이민자의 인생이라는 하나의 서사를 다른 목소리로 이어 붙인다. 과거의 형식은 신작에 흔적을 남기지만 궤도를 달리하며 또 다른노래로 변주된다.

〈상상곡〉 사운드 설치, 초지향성 스피커, 서브 우퍼, 앰프, 오디오 인터페이스, 흡음재 조형물, 와이어 가변 설치 2023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전경 2023

〈백년 여행기-프롤로그〉 무대 설치, 혼합매체, 조명, 단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영상, 잉크젯 프린트, 터프팅, 종이에 잉크 가변 크기 35분 14초 2022

역사적 현실이라는 주제는 외견상 사진이나 영화의 매체적 가능성을 활용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던 과거 작업과 거리가 멀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소통과 공감이라는 면에서 기저 연결된다. 초기작 <내사랑지니>(2001)나 중기작 <수공기억>(2008)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를 가시화하거나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꿈이나 기억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이를 가상의 실체화라 칭하지만, 정연두가 다룬 꿈은 판타지라기보다 더 나은 현실에 가깝다. 좀 더 이상적인 현실을 지향하는 것이 꿈이고 실제를 각색한 것이 기억이라는 점에서, 정연두의 가상은 늘 실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가 흥미를 갖는 지점은 꿈이라는 계기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고, 이 과정에서 맺는 관계와 소통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을 관계적 미술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란 실제를 바탕으로 하지만 이 날실과 씨실을 엮는 과정에서 허구가 개입된다. 허구와 실제는 분리되지 않으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는 연출이다. 한국을 떠나 멕시코에 다다른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는 서사적 구성에서도 연출되지만, 《백년 여행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관객을 상상의 이야기로 끌어당기는 공간적 연출이다. 연출은 정연두의 모든 작업에 적용되는 핵심 개념으로 그의 모든 작업은 만들어진 그림(tableau)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무대 연출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2007)나 <시내매지션>(2014)같은 구작에서도 활용된 바 있다. 이들 작업은 연출한 무대와 이를 찍은 영상을 동시에 보여주어 환영을 만드는 재현 장치의 눈속임을 폭로하고, 영상의 환영공간과 현실의 물리적 공간을 뒤섞는다. 하지만 공간설치의 측면에서 무대 연출이 전체 전시 구성과 개개 작업의 설치에 거시적・미시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중요하게 적용된 개념은 층(layer)이다.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고 구성하는층의 개념은 <새-B 카메라>(2013)나 <여기와 저기 사이> 같은 다층 사진(multi-layered photography) 설치에서 선구적으로 실험 바 있으나, 이번 전시에서 층은 개별 작업뿐 아니라 공간 전체로 확장되어 적용된다. 다섯 파트로 구성된 전시의 동선은 오페라나 교향곡, 발레의 악곡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서곡 서울박스에 구현된 <상상곡> (2023)이 (prelude)이라면, 5전시실의 앞 세 파트는 1막, 2막, 3막에 해당하고, 마지막 파트의 <날의 벽> (2023)이 종곡(postlude)을 이룬다. 멕시코 한인이주사를 직접 다루는 것은 중심 부분인 2~4파트이고 처음과 끝인 <상상곡> 과<날의 벽이 다른 소재의 이주노동 서사로 중심 주제를 확장시키며 보편화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본곡과 연결되는 서곡과 종곡은 이번 전시 배치와 잘 부합하는 비유일 것이다. 장면을 만드는 층의 개념은 전시 구성 뿐 아니라 개별 작업에도 긴밀히 적용된다. <세대 초상>은 부모와 자식 세대의 층을 분리해 거리를 부여함으로써 두 세대 간의 역사적·문화적 간극을 전달한다. 설치구조 때문에 물리적으로 부모와 자식 세대 사이에 끼게 된 관객은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두 인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유전으로 인한 유사함과 혈통 및 문화의 혼성으로 달라진 이질감 사이의 괴리는 두 스크린 사이의 거리로 암시된다. 한편 <상상곡>과 <백년 여행기>의 경우 이미지뿐 아니라 소리로 층 개념을 부여한다. <상상곡>에서는 초지향성 스피커를 활용해 고음과 저음을 분리해 소리의 층을 구축했고, <백년 여행기> 의 경우 악단석과 무대가 나뉘어있는 오페라 극장의 구조를 차용해 관객석 앞에 모니터 3대를 설치하고 그 뒤에 중앙 스크린을 놓아 음원의 공간적 위치를 재현했다. <백년 여행기>는 소리의 출처인 3채널 영상을 관객석 및 중앙 스크린과 구분할 뿐 아니라, 이미지의 측면에서도 빛의 층을 형성한다. 중앙의 영상에 삽입된 색채 필터는 백색의 선인장 조형물과 흰 빈백 위에 갖가지 색을 입히며 연극적 공간을 연출한다. 역사적 다큐멘터리와 꿈(허구)은 실제에 기반한 이야기이면서도 각색된 무대를 통해 언제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연출을 통해 만난다. 소통과 연출이라는 지점에서 기존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구현의 방식과 구성에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백년 여행기>는 결과적으로 상당한 도약을 이루어냈다. 매체실험과 역사적 서사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융합되며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타블로를 구성할지, 작가가 꿈꾸는 공감의 경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ᄋ

〈세대 초상〉 2채널 HD 비디오, LED 스크린, 컬러 22분 500×350cm(2) 2023

〈백년 여행기〉 비디오 설치, 4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혼합매체 48분 가변 크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전경 2023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