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희의 몸으로 쓴 일기

1990년대를 만든 작가들
윤난지 | 미술사

왼쪽 〈반영 - 기억〉 혼합매체 162×112×61cm 1992
가운데 〈어쩔 수 없는 난제들 - 기억〉(6개 패널 중 하나) 모노타입 137×99cm 1992~1993
오른쪽 〈어쩔 수 없는 난제들〉 혼합매체 크기미상 1994

모더니즘과 그 맹아인 추상미술의 역사는 칸딘스키의 유명한 경구,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향해 정진해 온 과정이다. 신경희(1964~2017)의 작업을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20세기 주류 미술의 대전제를 흔드는 결정적인 예를 문화변방의 한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수공 기법으로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기억과 관련된 모티프들을 구현한 그에게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었다.
판화, 바느질 등 ‘마이너’ 매체로 개인사 같은 ‘작은’ 이야기를 담은 신경희의 1990년대 작업은 20세기라는 대서사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당대 문화의 주요 지표다. 그것은 밀레니엄 전환기의 산물이자 새 밀레니엄을 예견하는 시대의 나침반이다. 이 시기 작품 제목으로 가장 많이 쓰인 ‘어쩔 수 없는 난제들(irreconciable difficulties)’ ‘기억(memory)’ ‘퀼트(quilt)’ 등은 이러한 작업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키워드다. 작품의 내용이나 방법을 지시하는 이 용어들은 제목이 달라진 2000년 이후에도 그 의미가 이어지는 신경희 작업의 축이다.
우선, ‘어쩔 수 없는 난제들’은 그가 미국에서 판화 수업을 받으며 작가 활동을 시작한 1991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제목으로 사용한 어휘다. ‘화해할 수 없는’ 혹은 ‘양립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이 영어 어휘를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온전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가가 영어 제목을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에게 작업은 삶과 예술에서 만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난제들’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주체와 세계, 현실과 이상 등 서로 다른 국면들이 교차하면서 부각되는 다양한 입장들을 일정한 결론으로 수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렴해 온 20세기 주류 문화의 전제를 벗어난다. 판화, 사진, 회화, 바느질, 오브제, 설치 등의 매체와 구상, 추상, 문양 등의 형식, 과거의 기억과 현실 비판, 미래적인 비전 등의 내용을 아우르는 다원주의(pluralism)의 샘플을 만들어낸 것도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왼쪽 〈일기 - 공허〉(부분) 혼합매체 54.5×222.5cm 1995
가운데 〈어쩔 수 없는 난제들 - 깊이〉(부분) 혼합매체 162.5×112.5cm 1996
오른쪽 〈어쩔 수 없는 난제들 - 기억〉(부분) 혼합매체 162×112cm 1997

‘어쩔 수 없음’은 특히 또 하나의 키워드인 ‘기억(memory)’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난제들 - 기억〉이라는 제목이 빈번히 쓰이듯이, 기억은 그에게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주요 출처가 되었다. 여러 시간과 공간,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기억이라는 저장소에서 그는 서로 다르거나 모순되는 것들이 출몰하는 상상력의 원천을 발견하였다. 이미 석사학위 논문(1989)에서부터 기억의 조형적 표현을 다룬 것처럼 1 기억은 신경희 작업의 출발점인 셈이다.
자신과 가족의 옛 사진,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이미지나 오브제, 언젠가 본 책의 한 페이지나 명화의 한 장면 등 기억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그의 그림은 지극히 개인적인 따라서 매우 불투명한 이야기의 파편들이 출몰하는 얇은 스크린인 셈이다. 화면 깊숙이 뚫고 들어가는 투명한 이해의 통로가 원천적으로 닫힌 이러한 자서전적인(autobiographical) 그림은 20세기라는 이른바 대서사 시대의 종말을 알리면서 작은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포스트모던 증후를 나눈다.
특히 ‘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경우는 자기고백적인 국면을 의식적으로 부각한 예다. 작가가 이를 “일기 형식의 책 작업” 2이라고 했듯이, 옛날을 환기하는 이미지, 어릴 때 그린 그림과 이름표 등 지난 시간의 물질적 파편, 그리고 기억 속에 맴도는 다양한 패턴과 글씨가 출몰하는 직사각형 단위들을 책의 페이지처럼 펼쳐 놓은 이 작품들은 그의 일기책인 셈이다. 반복적 문양처럼 쓰인 ‘공(空)’이라는 한자처럼, 이는 이미 지나가버린 ‘없는’ 시간의 흔적이다. 작품의 부제(副題)인 ‘비어 있음(emptiness)’ 즉 ‘부재(不在)’의 구현물인 그 일기는 끊임없이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삶의 유한함을 환기한다.
다양한 기법이 혼용된 신경희의 작업에서 주요 매체로 쓰인 것은 판화다. 판화는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찍는’ 기법이라는 점에서 기억을 남기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그가 판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이후로도 이를 다른 기법과 병용하면서 지속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옛 사진을 화면에 새긴 포토에칭과 과거를 소환하는 이미지들을 찍어낸 실크스크린은 마치 뇌리에 각인된 기억의 파편들 같다. 서로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지워진 형태상의 특성뿐 아니라 전 화면을 누비며 불쑥불쑥 드러나는 모습 또한 기억을 닮아 있다.
판화와 함께 신경희가 주로 사용한 기법이 또 하나의 키워드인 ‘퀼트(quilt)’다. 이 둘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기억을 남기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판화로 ‘새긴’ 기억들을 퀼트로 ‘꿰맨’ 것인데, 이는 199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신경희 작업의 독특한 국면이다. 특히 ‘퀼트’라는 제목의, 조각보를 닮은 작품들은 바느질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명시한 예다. 주류 미술사에서 여성의 영역으로 할당된 마이너 매체를 자신의 메이저 매체로 삼은 것인데,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당대 주요 담론으로 부상한 여성주의와의 교차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정치적 투쟁으로서의 여성주의라기보다 여성의 생물학적, 문화적 특성을 남성의 그것과 동등하게 아우르는 본질주의에 가깝다.
한 땀 한 땀 이어가는 손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하는 바느질은 작가에게 기억을 육화(肉化)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물질 속에 새기는 기전으로 자신의 몸을 동원한 것인데, 스스로 만든 수제종이를 바탕 재료로 사용한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술가의 몸과 물질이 만나 그의 삶을 문자 그대로 ‘구현(具現)’하는 이런 매우 ‘구체적인’ 공정은 고도의 추상성을 향해 정진해온 모던 아트와 그 역사의 반전을 시각화한다.

왼쪽부터 〈퀼트 - 기억〉 혼합매체 220×153cm 1996, 〈퀼트〉 혼합매체 89×72cm 1998, 〈잠자는 도시〉 혼합매체 220×110cm 2000,
〈정원 도시〉(부분)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62.2×130.3cm 2009

신경희에게 퀼트는 바느질 기법을 넘어 화면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의미한다. 형태들을 미학적 규칙에 따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 혹은 반복적으로 ‘나열하는’ 것인데, 실로 꿰매지 않고 단위형태들을 이어 붙인 작업을 ‘퀼트’로 명명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이러한 이어가기 방법은 예기치 않게 떠오르는 기억을 그대로 따라가기에, 혹은 어쩔 수 없는 난제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 적합한 방법이다.
신경희의 퀼트 작업은 이렇게 몸을 전면에 드러내는 수작업이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형태 배치의 방법에서도 미학적 ‘완성’을 지향하는 주류 미술의 변방을 지시한다. 특히 같은 문양을 반복한 경우는 모던 추상회화의 대안으로 부상한 1980년대 패턴 회화(Pattern Painting)를 떠올린다. 직물이나 벽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그림은 공예와 같은 마이너 아트와의 접점을 드러내면서 추상과 구상, 주류와 주변의 경계를 지운다.
한편 신경희 그림에서 형태 반복은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한다. 장난감 방울이나 알사탕을 떠올리는 땡땡이 혹은 땅따먹기 그림에서 온 낙하산 형태는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기억의 결정체다. 그에게 패턴은 장식적 효과를 넘어 심리적인 의미를 포괄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특히 땡땡이는 야요이 쿠사마의 것과 지평을 나눈다. 그러나 심리적 강박이라는 무의식의 반영인 쿠사마 것과는 달리 신경희 것은 의식적으로 도출된 기억의 단편들이다. 색상과 명도를 달리해 변화를 주거나 수제종이와 비닐, 바늘땀 등으로 다양한 질감을 연출한, 그리고 입체적인 방울 혹은 작은 오브제들로 변환되는 신경희의 땡땡이는 서로 다른 기억의 색깔과 촉감을 재연한다.
이렇게 신경희에게 재료와 기법은 곧 내용이다. 그는 자신만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물성의 ‘구체적인’ 재료들과 그 각각의 물성을 부각하는 판화와 바느질, 콜라주 등 ‘구체적인’ 기법을 사용하였다. 물질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구현(具現)한’ 것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형태들은, 기호학 용어를 빌리자면, ‘지표(index)’ 즉 물리적 흔적으로서의 기호다. 그가 즐겨 사용한 사진 또한 사물에 비친 빛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지표다.
신경희 작업의 요체는 이렇게 사물과 닮은 도상(icon)을 만들어낸 전통 구상미술과도, 보편적인 정신을 투사한 상징(symbol)을 만들어낸 모던 추상미술과도 다른 회화 기호 즉 지표적 기호(indexical sign)를 부각한 점에 있다.3 지극히 개인적인 ‘작은’ 이야기들을 지극히 구체적인 물적 자료를 통해 구현한 그의 그림은 현실의 환영(幻影)을 추구한 구상미술뿐 아니라 이른바 ‘위대한’ 정신을 시각화하고자 한 모더니즘에 대안을 제시한다.

왼쪽 〈정원 도시〉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89.4×145.5cm 2011
오른쪽 〈정원 도시〉(부분)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52.5×45cm(각) 2006~2013

신경희의 작업은 2000년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주제와 형식에 있어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잠자는 도시〉 연작 (2000~2003)이 시작된 것인데, 이는 작가가 파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도시와 전원을 오가면서 새삼 눈길을 주게 된 도시의 건축적 구조를 재연한 것이다. 건물이나 다리 등 당대 환경을 기하학적 구조로 재연한 이 연작은 무엇보다 시제(時制)의 변화를 드러낸다. 작가의 시선이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의 삶으로 이동한 것이다. 단위 형태를 집적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구축하는 작업방식 또한 현대 건축의 축조 과정에 부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 반복의 방법은 좀 더 균일한 모듈을 적용했다는 점 외에는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솜 방울, 나무 파편, 못 등 재료의 서로 다른 질감과 이를 다루는 손작업을 부각하는 기법 또한 여전히 지속된다. 그가 2000년대 초까지 퀼트를 지속한 것도 수공을 아끼는 작가적 성향을 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수공에의 애착은 말년의 〈정원 도시〉 연작(2006~2013)을 통해 미련 없이 수행되었다. 파주 작업실에 정원을 가꾸면서 접하게 된 자연과 그 생명력을 예찬한 이 그림들은 역설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질병과 함께 시작되었다. 2006년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몸의 이상 징후는4 2009년 암 선고로 이어지는데, 이 시기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 세포나 씨앗 등 생명의 근원을 시각화한 그림들이다. 치밀한 수작업으로 작은 점들을 반복하여 복잡하게 얽힌 미립자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꽃이나 열매, 나뭇결이나 나이테, 혹은 그것들이 어우러진 꽃밭을 그린 이 그림들은 이전의 물방울무늬 그림이 또 다른 차원으로 생장한 것이다. 회화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마치 수공예 재료처럼 다룬 이 그림들은 그의 1990년대 수작업을 떠올린다. 이 연작은 2008년경부터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여 작업을 중단한 2013년까지 화려한 꽃밭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죽음과의 대면이 역설적으로 생명을 예찬하는 방향을 취하게 한 것이다. 무한 증식하는 세포 혹은 디지털 화면의 픽셀 구조를 떠올리는, 절반 이상이 100호 이상 대작인 말년의 그림들은 작가의 시야가 자연과 과학을 통괄하는 우주적 비전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렇게 신경희의 작업은 기억을 불러온 1990년대의 레트로 그림에서 당대 감각을 시각화한 2000년대 초 도시 그림을 거쳐, 이상향에의 비전을 제안한 정원 그림으로 전개되었다. 작가의 시선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진 것인데, 이를 통해 그의 작업은 동시대적 삶에 대한 비판적 통찰로 나아갔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1990년대 그림이 앞으로만 질주하는 시간, 이러한 시간 개념에 근거한 진보 이데올로기에 제동을 건 것이라면 2000년대 도시 그림은 진보에의 꿈이 구현된 현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재연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작, 〈정원 도시〉는 제목처럼 자연과 문명이 공존하는 유토피아를 제안한 것이다.
“작업을 하면서 소망하는 것이 하나 있다. 20년 후, 지금 하고 있는 나의 일기 쓰기 작업을 뒤돌아볼 때, 나의 20여 년 전의 일기처럼 누군가에겐가 보이기 위한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물이 아닌 내 삶의 진실한 기록물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5
1995년 작가의 말이다. 그의 짧은 삶은 이와 같은 소망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는 ‘완벽한’ 작품보다 다양한 의미의 세계로 ‘열린’ 삶의 진실한 기록물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몸’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동원하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소재를 불러올 때에도, 도시의 건축적 구조를 재연할 때에도, 생태주의 유토피아를 그릴 때에도 그는 삶의 출발점인 자신의 몸을, 그 물질적 감각을 동원하였다. 예술가의 몸과 재료가 만나는 과정에 집중하게 하면서 낱낱의 순간, 그 구체성(concreteness)을 체감하게 하는 신경희의 수작업은 그 자체가 삶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몸으로 쓴 일기 즉 작가가 말한 ‘삶의 진실한 기록물’이다.
자신의 몸이 스러져 가는 와중에 그린 마지막 그림들, 그 낱낱의 점들은 몸을, 그 강력한 삶의 증거를 붙잡고자 하는 열망, 그 낱낱의 맥박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그 열망이 현현한 아름다운 세계,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난 화려한 꽃밭에 살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의 육신이 사라진 지금, 그 물적 증거는 그림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몸과 물질의 만남, 그 ‘구체적인’ 순간을 현시하면서.

  1. 신경희 〈기억에 의한 조형적 표현에 관한 연구: 본인의 판화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9(미간행)
  2. 신경희(1995) 〈작업노트〉(제1회 공산미술제 수상작가 초대전 도록) 《Kyung-Hee Shin, 1964~2017》 AMA 2021 p.72.
  3. Charles S. Peirce, “Logic as Semiotic: The Theory of Signs”, Semiotics: An Introductionary Anthology(ed. Robert Innis), Indiana Univ. Press, 1985, p.8. 참조
  4. 신경희(2007) 〈겨울산책〉 《Kyung-Hee Shin,  1964~2017》 2021 p.224.
  5. 신경희(1995)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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