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 천국

EXHIBITION FOCUS

리경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4K 단채널 비디오, 멀티채널 사운드, 거울, 5분 56초 2018
사진 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간은 물 앞에서 나약한 존재다. 그건 5,000년 전도, ‘인류세’라고 명명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광주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물의 숭고함을 되돌리고자 하는 전시, 〈아쿠아 천국(Aqua Paradiso)〉(6.9~9.12)이 열리고 있다. 11인(팀)의 작가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을 신화, 정치, 심리, 환경 등의 이슈를 통해 들여다보고 미디어, 사진, 회화 등의 시각예술로 풀어냈다. 전시는 어떤 위기도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관람자에게 양서류의 폐와 아가미를 가지고 수면을 흐르듯 유영하길 권할 뿐이다. 2021 뉴뮤지엄 트리엔날레와 제23회 시드니 비엔날레, 그리고 이어 내년 광주비엔날레까지 물을 소재로 전시를 꾸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전시가 추후 어떤 둑이 될지 기대하며 헤엄쳐보기로 하자.

〈띠르따 페르위타사리(Tirta Perwitasari)〉 벽에 목탄, 카본 안료
300×1826.9cm 2022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생명적인 물질 ‘물’이
증언하는 대홍수의 예감과
곤드와나 세계상

김남수 | 안무비평

물은 생동한다. 물은 기억한다. 이는 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의 과학이자 대장장이의 과학(들뢰즈)이면서 장인이 만들어내는 ‘테크노사이언스’(라투르)일 수밖에 없다. 즉 오스트리아 삼림감시원 출신의 과학자 빅터 샤우버거는
비- 아인슈타인계 과학으로서 물=생명성의 물질을 입증해냈다.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40년간 대양계를 항해하면서 뱃전에 부딪혀 꺾이는 굴절패턴(reflective pattern)을 마치 “법의학자가 범죄자의 지문을 정확하게 읽듯이” 읽는 ‘웨이 파인더(way finder, 暗海者)’가 폴리네시아 물의 과학자임을 천명한다.
우리 예술동네에서는 철학/미학의 번안이 필요한데, 가령 생동하는 물질을 이야기하는 제인 버넷이 그럴듯한 술어 체계로 금속이나 돌을 다루듯이. 아뿔싸! 불행히도 물은 변화무쌍하게 생동하는 물질이라 지나쳐 버렸다. 백남준은 이런 경우에 쓰일 ‘시간은 스치듯 지나간다’라는 말은 프랑스어밖에 없다고 했다. 물의 관점을 낚아채 올리는 것은 태초부터 인류의 과제였고, 동아시아에선 “물보다 좋은 것은 없다(上善若水)”라는 노자류의 언명으로 오랜 전통을 유지해왔다.

흐르고 반사되고 넘치는 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창조원 전시 〈아쿠아 천국〉은 물의 포스트휴먼적인 관점이 물 스스로 역사를 아카이브 하고 물의 파동으로 그 굴절패턴을 통해 증언하는 현장이었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처럼 우리 익숙한 관습의 눈앞에서 미끄러질 수 있었다. 우선 리경의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영상은 1977년 동명의 백남준 작곡을 모티프로 하여 하늘과 땅을 물로 연결하는 하늘사다리 작업이었고, 천지연(天地淵,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못) 폭포를 마치 희년(jubilee)의 매체로 활용하였다. 매우 리터럴하면서 정공법적인 작업이었는데, 테드 창의 〈바빌론의 탑〉처럼 그 자체가 제주산(産) 모종의 신학적 스토리를 배태하고 있었다. 어쩌면 대홍수의 예감은 비가 아니라 이 폭포로부터 시사되고 있었다고 할까.
곧 인도네시아의 이 이란의 〈술루 이야기〉는 바다의 물빛이자 색빛이 변화하면서 퍼스 기호학의 인덱스 기호로써 역사와 정치를 발언하는 문제작이었다. 물빛이 살짝 변하듯 인도네시아이든 필리핀이든 유사한 얼굴빛을 가졌음에도 치열한 종족분쟁, 말 탄 기마유목민과 생명나무 이미지가 초현실적으로 포토몽타주된 식민의 역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여하기 짝이 없이 야생적 사고가 건재한 것의 과시 등등이 검푸른 바다의 톤으로 시사된다. 애월 앞바다를 방불케 하는 비췻빛 바다와 조개무늬에서 연원한 “옷은 존재의 집이다”(성경)라는 언명처럼 조개무늬 옷 등이 드리워져 국가 체제로부터 탈주한 해적들의 마냥 자유로운 삶의 구가를 증언한다. 그러나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표상이 드러나듯 정치권력이 개입하면서 다시 바다는 검푸른 악마의 톤으로 바뀐다. 이처럼 이 이란의 포토몽타주 수법은 물의 민중적 과학이란 언어를 신화와 정치가 기묘하게 결합된 세계로 굉장히 과격하게 벽화처럼 드러냈다.
이러한 과감한 연결이자 결합의 감각이 물의 포스트휴먼적인 관점이 물 스스로의 빛의 변화, ‘밝’ 문명의 사상적 환함과 ‘검’ 문명의 사상적 검푸름 사이의 대조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 예외적이지 않아서 〈아쿠아 천국〉 전시는 기본적으로 물의 빛, 패턴, 색채 그리고 물의 질감으로 전시장을 아카이브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아카이브는 물의 굴절패턴이 부리는 마술적 사실주의이자 초현실주의의 영역이었다. 이는 아시아 권역에서는 동시대 미술의 언어로서도 당연한 것( ! )인데, 마리안토의 〈띠르따 페르위타사리〉에서 땅과 물의 교섭에 등장하는 “물의 신”으로서 용의 권능이 대지의 신화화를 보여주는 것이 단적이다. 물의 응축을 진행시키는 인도네시아 민중과학의 장치가 전형적인 테크노사이언티스트(기술과학자)로서 라투르 스타일의 산물인데다가 그것이 용의 권능을 조정하는 것은 물 자체의 와류적 ‘내폭(imflosion)’(빅터 샤우버거의 용어)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진다. 확실히 저 아래 곤드와나 — 북방의 ‘로라시아’에 대응하는 남방의 초대륙 — 스타일의 과학, 남방과학에는 이름 없는 기술과학자의 놀라운 세계가 이미 배태되어 있음을 이 아카이브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대홍수의 전조는 이 응축과 내폭의 장치가 망가지면서 일어나는 것일까.
아드리앵 M과 클레어 B의 증강현실 참여작 〈아쿠아 알타〉에선 기술적 수준이 매우 높은 증강현실을 통해 이미/항상/아직 대홍수가 일어난다. 태블릿 PC와 QR코드를 접목한 시각적 장치는 대홍수 설화가 현실화되는 흐름 속에서 헤어진 두 연인이 머리칼 — 마치 메두사의 대지적 인덱스 기호 — 기호를 통해 비극과 제의의 작은 의식을 치르는데, 궁극적으로는 신에게 대항하는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닥드정의 〈원천미술〉 역시 곤드와나 스타일의 NASA 버전이라고 할 만한 기술적 수준인데, 아폴로 13호에서 배태된 신물질이 작가의 모습과 사운드에 의해 갑작스러운 플럭스(flux, 유동)를 보여준다. 이는 거의 ‘달’의 권능에 따른 대양계의 움직임을 우주적 소품으로 함축한 시학적 테크놀로지의 안무 세계였다. 첨단과학에 의해 합성된 물질이 돌고 돌아 달에 의해 조종되는 대양계의 파도처럼 춤추는 은유로서의 신물질이란 것이 아이러니하다. ‘달’ 권능의 낯설게 하기 효과로서.
권혜원의 〈액체 비전-프롤로그〉 역시 빛의 도시 광주에서 사라진 수원지를 찾아서 저 아래 흐르는 물의 표면에 눈동자를 대고 물 바깥과 물속을 동시에 수정체 수축 현상으로 시각적 프로토타입을 실험하는 모티브가 곤드와나 스타일이었다. 양서류뿐만 아니라 물총고기까지 이 한 눈의 두 눈 보기는 지구의 역사를 아카이브해온 것.
리우 위는 〈이야기가 넘쳐 홍수가 될 때〉를 통해 우리에겐, 특히 아시아문화전당에서도 생소한 대만 신화 — 다분히 발효적이고 하이누웰레(Hainuwele, 死體化生)적인 — 를 대홍수 스타일로 가다듬었다. 지렁이부터 우주뱀에 이르는 이미지 그림자극 속에서 본래 오뉘의 근친상간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재생되어온 인류의 역사적 원죄를 유머러스하게 스쳐 지나간다. 인간이 없는 세계, 인간이 없던 선조적인 세계이면서 가까운 미래의 세계가 민중의 이야기하는 힘에 의해 신화가 된다는 것은 이 환등기 같은 기술의 번안으로서 필연적이다. 기술은 설화로 번안된다는 것.
반면, 김태은은 〈구원_증발〉에서 히포크라테스의 담즙 이론을 따라 벤야민의 토성좌에서 핵심인 흑담즙을 정색하고 탈수해버리는 행위를 통해 신화가 아닌 현실의 근대주의적 폭력으로 대응해본다. 애써 해학과 아이러니를 빼는 위악적인 작업으로 하루 1000톤씩의 지하수를 펌프질로 퍼낸다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그 음각(陰刻) 형태를 조명했다고 할까.
또한 참여 형태의 에코 오롯의 작업이나 부지현 작가의 작업 역시 ‘착한 예술’의 혐의는 있겠지만, 착살하게 물의 관점에서 정색하고 스치는 시간들을 낚아채 올리는 작업이었다.
이기모 큐레이터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다종다기한 물의, 혹은 유동체의 현실적이며 초현실적인 물질이 빠키의 〈무의식의 원형〉처럼 사방에 뿌리는 파동과 파동의 간섭무늬로써 접근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이만큼 테크놀로지와 신화 사이, 민중의 저 아래로부터 유포되어온 이야기 경전을 미래의 대홍수 디스토피아로 연결 짓는 전시가, 성실하면서도 뛰어난 물질적 전시가 있었는가 싶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구름 같은 폭포(위베르 다미슈)가 저 남방의 곤드와나 대륙에서 펼쳐지는 지구사이자 미래사로서 그리고 신화적인 첫 페이지로서 시원하게 내리는 전시가. 처음으로 되돌아가 천지연 폭포에 가서 득음하고 싶었다.

이 이란(Yee I-Lann) 〈술루(Sulu) 이야기 1〉 디지털 C 프린트 61×183cm 2005
아드리앵 M & 클레어 B(Adrien M & Claire B) 〈아쿠아 알타-거울을 건너서〉
팝업북, 증강현실 28×23cm(각, 팝업북 10점) 2019
닥드정 〈원천미술〉(설치 부분) 자성유체, 전자석, 전자석 컨트롤러, PC 가변설치 2016~2022

에코 오롯 〈제주산호뜨개〉 털실, 솜 가변설치 2018~2022
권혜원 〈액체 비전-프롤로그〉 16채널 비디오, 8채널 사운드 가변설치 2022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리우 위(Liu Yu) 〈이야기가 넘쳐 홍수가 될 때〉 2채널 스크리닝, 비디오 설치, 컬러, 스테레오, 토우 모델 12분 38초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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