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이건희 컬렉션과 이건희 기증관

일시|2021년 8월 14일 금요일
장소|정준모 연구실
참석자|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도재기(경향신문 논설위원)
진행·정리|염하연 기자

월간미술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 목록이 완전히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기증작의 의의와 수준은 어떻게 보시는지.

정준모

먼저 이번 기증은 매우 의미 있는, 우리 문화예술사에 기록될 역사적인 사건이다. 다만 기증된 2만3000여 점의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가 끝나려면 최소한 2~3년이 필요할 것이다. 모두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일부 국보, 보물 그리고 유명작가의 근대미술품만을 두고 명작, 명품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것은 좀 더 시간과 품이 들어가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 기증품 전시는 대개가 국보와 보물로 이루어져 이미 검증된 작품만 전시되고 있고,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기증작 전시도 이미 잘 알려진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중이 선호하는 경향의 유명작가 유명작품으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국보, 보물이라면 무조건 귀하고 좋은 것이라고 치부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르던,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찾아내고 이를 국보 보물 또는 근대문화재로 등재하는 일일 것이다.

도재기

맞다. 기증작의 전반적 수준을 이야기하자면 각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와 연구를 거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기증작 모두가 최상의 작품, 명작인 것처럼 알려진 것은 우려스럽다. 벌써 기증관 건립을 발표한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 기증은 사적자산인 2만3000여 점의 미술품을 공적자산화한 것이자 한국 기증사를 다시 쓸 정도로 의미가 크다. 그 뜻을 충분히 기려야 하지만 기증관 건립을 통해 이룬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월간미술

작품에 대한 전문가와 대중의 평가 기준이 다를 수 있겠다.

정준모

그렇다.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명작, 명품과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명작, 명품의 기준이 다르다는 게 문제다. 사실 유명작가의 유명작품도 중요하지만 시장이나 대중의 가치와는 다르게 전문가들은 학술적, 미학적, 미술사적 가치와 소장품의 맥락을 잇는 매개 역할을 하는 작품들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대중은 이름난 것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거나 전문가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향후 2차, 3차 전시에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실망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일례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국중박에 왔지만 〈금강전도〉는 삼성에 남았다. 로스코, 자코메티 작품도 마찬가지다. 삼성도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기 때문에 작품의 일부를 자신의 컬렉션에 넣었을 것이다. 이번 기증을 통해 리움은 향후 20세기 이후 국제적인 현대미술에 집중해 여타의 국공립미술관과 차별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도재기

전문가에게 의미 있는 작품과 대중의 관심 작품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모든 작품이 엄청난 것처럼 알려지는 바람에 막상 모두 공개되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언론이나 일부 전문가들이 사실은 기증작 전체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찬양부터 한 것이 문제였다.

월간미술

아무리 시간이 촉박했다고 해도 이번 전시에 대중이 좋아할만한, 소위 유명한 작품들을 한꺼번에 내놓은 이유가 궁금하다.

정준모

작품들을 나누어 주제와 소재, 기법이나 연대별로 전시를 구성하면 좋았겠지만, 소위 유명작품으로 한 상을 걸게 차려 내놓는 데 급급했다는 감상을 지울 길 없다.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이다. 문체부도 좀 밀어붙인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정작 이번 기증 이후 이 작품들에 대해서 기증받은 기관은 물론 누구 하나 제대로 평가를 한 사람이 없다. 기증작이 많아 6개월 안에 평가를 완료할 수도 없다. 지금은 모두가 진작(眞作)이며 적어도 보존 상태가 중간 이상은 가는 작품이라는 전제에 맞는 작품들로만 전시를 연 것이다. 예를 들어 기증된 작품의 상태나 훼손 여부, 혹여 있을지 모를 도굴 또는 도난품 그리고 위작(僞作) 여부도 함께 따져보는 일이 선행되었어야 했다. 현재 국중박은 2024~25년이 되어야 유물 정리가 끝난다고 발표했지만 이후의 조사연구가 더 중요하며 필수적이다.

도재기

국중박의 경우 문화재 등록, 유물 번호를 넘버링 하는 데만 2년, 기초적인 연구에만 최소한 5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중심으로 내놓았다. 국가지정문화재는 이미 학술적 평가가 끝난 작품들이자 그동안 철저한 관리를 받아 보존 상태도 좋다.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는 작품들이다. 국현의 경우도 대중성 있는 작품들인데, 치밀한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월간미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이하 이건희 기증관)을 개관하겠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준모

이건희 컬렉션을 한곳에 모두 모아 소장, 전시, 관리하겠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통합관 설립의 근거로 ‘이건희 회장이 시대와 유형을 따지지 않고 작품을 모았다’는 것인데 실은 이건희 회장이 작품을 가리지 않고 모은 것이 아니다. 이건희 컬렉션은 사실상 이병철 회장 컬렉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병철 회장은 주로 금속, 전적, 불상, 도자, 근대미술 위주로 수장했고 그 후 이건희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주로 명작 명품, 그리고 20세기 미술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다양성’으로 규정해 한곳에 모으겠다는 것은 억지다. 사실 이번 기증품은 이병철과 이건희의 세대 차이, 관심과 안목의 차이가 확연히 보이면서 하나의 컬렉션으로 합해져 있는 컬렉션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도재기

2대에 걸친 컬렉션이라 특정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삼성가 컬렉션은 이병철 회장이 모은 작품에 이건희 회장, 여기에 홍라희 전 관장의 컬렉션이 더해진 것이다. 삼성가 작품의 소유권은 이건희, 홍라희, 삼성문화재단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번에 기증된 것은 이 회장 소유의 컬렉션이 상속되는 와중에 기증이 이뤄진 것이다. 기증작 중 60건이 국가지정문화재다. 삼성가가 소장한 전체 국가지정문화재의 약 40%로 추정된다. 기증관은 먼저 기증작에 대한 연구와 조사 이후 생각해야 할 문제인데, 문체부가 너무 서두르고 있다.

월간미술

그래서 이건희 기증관이 세워지더라도 리움의 2중대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 같다.

도재기

기증작의 수준을 파악할 땐 컬렉션의 전체적인 양과 질을 봐야 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대충 파악되는데, 이외의 문화재나 근현대미술품은 리스트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이건희 기증관을 논의하는 ‘위원’이란 분들도 2만3000점의 내막을 파악하고 논의를 하는지 의문이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 기증작들보다 리움이 소장한 것이 더 낫다고 본다. 특히 문화재의 경우, 국가지정문화재만 해도 리움이 이번에 기증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다. 기증관을 세우더라도 다 같은 삼성가 컬렉션이라는 점 등에서 리움과 차별성이 없다. 그래서 정부가 국민 세금 1500억 원을 들여서 리움 분관을 짓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월간미술

그렇다면 문체부는 왜 이건희 기증관 설립을 주장하는 것인지.

도재기

거칠게 얘기하면, 작품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번듯한 건물 하나 짓고 보자는 전근대적 전시행정, 한건주의라고 본다. 문체부는 ‘통섭’이라는 이름하에 곳곳에 기증된 작품들을 다시 모아 기증관에 통합시키겠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맥락을 잡고 모은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족들이 한 곳에 주면 훨씬 간단하고 편할 것을 굳이 기증처 선별을 위한 시간과 노력, 공을 들여 기증품을 지역별, 기관별로 기증했을까? 아마도 지역별 안배도 고려했을 것이고, 소장됨으로써 소장품의 가치가 더 돋보일 곳을 고심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을 한곳에 모으겠다는 문체부 방침은 기증의 뜻을 오독한 것으로 보인다.

정준모

이건희 컬렉션의 질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업적을 쌓을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기증은 기증일 뿐이다. 대가를 바라는 것은 기증이 아니다. 그렇다면 통합관의 명분이 무엇인가? 이건희의 컬렉션 철학이 ‘시대와 종류를 안 가리고 다 모은다’는 것이므로 통합관을 만들겠다는 건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병철 때부터 이루어진 2대에 걸친 컬렉션이기에 때문에 그렇게 다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컬렉션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수장하게 된다. 좋은 작품을 수집하려면 섭치나 부족한 작품도 일괄해서 구입해야 하는 것이 컬렉션의 세계다. 흔히 컬렉션의 수준을 평가할 때, 1000점 중에 좋은 작품이 100점이라면 900점은 태작(䭾作)이라고 한다. 하지만 10%에 불과한 수작 100점의 가격이 총액의 90%를 차지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국중박과 국현이 이번에 삼성가로부터 기증받은 기증품을 문체부의 뜻대로 통합관에 내어 주는 것에 동의했느냐는 것이다. 만약 동의했다면 이미 수증한 작품이나 향후 수증할 작품들에 대해서도 문체부의 요청 또는 지시에 따라야 하는 선례가 생겨 정말 걱정이다. 관장들이 직을 걸고라도 막아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월간미술

이건희 기증관 설립을 놓고 지방자치단체의 유치 경쟁이 과열되기도 했었다.

정준모

지방자치단체들이 이건희 소장품 내역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지역에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참 어불성설이었다. 쇼비니즘적 지방주의이다. 지방 분권이라는 게 무엇인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건희 기증관은 관련 또는 유사시설이 아예 없는 도시나 군청소재지로 가야 한다. 저는 지금 지역에 있는 공립박물관과 미술관부터 돌아보고 부끄럽지 않게 운영하면서 새로운 박물관 미술관 유치를 주장했으면 한다. 현재 자기 자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새로운 아이를 예쁘다고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라 속이 좀 아팠다.

서울공예박물관 어린이전시실에서 내려다본 송현동 부지 전경

도재기

지방자치단체들이 민망스러울 정도의 이유를 내세우며 기증관 유치 경쟁을 벌였다. 지자체장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쇼였다. 사실 지자체들은 기증관 유치가 아니라 현재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박물관, 미술관들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지나 먼저 살피고, 자성해야 했다.

월간미술

통합관을 만들 때 지방미술관은 제외하고 국중박과 국현에 기증된 작품들만 한자리에 모으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준모

지방미술관은 지방정부 소속이라 손을 대지 못하고, 문화부 산하인 국중박과 국현 작품만 통합하겠다는 것이다. 통합관은 중세의 ‘분더카머’와 비슷하다. 자꾸 정부가 과도하게 생색을 내려다보니 되레 기증의 뜻이 흐려지고 있다. 작품을 기증받은 전문 기관인 국중박, 국현에서 판단할 문제다. 삼성이 아무 조건 없이 작품을 기증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가장 큰 조건은 작품을 국중박과 국현에 나누어주었다는 사실 자체다. 광주, 대구 등등도 마찬가지다. 이 원칙을 무시하면 안 된다. 작품을 기증받은 사람이 마치 점령군처럼 이제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한다”는 식이면 앞으로 누가 기증을 할까. 게다가 작품을 성격에 맞게 나누는 것이 기본이다. 이번 기증도 그래서 문화재는 국립박물관으로, 미술품은 현대미술관으로 나누어 기증한 것이다. 1986년 프랑스 정부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루브르와 퐁피두 등이 소장한 근대미술품을 오르세로 집중시켰다. 루브르박물관의 역사는 나눔과 분가의 역사다. 루브르의 해양 관련 비서양유물들은 트로카데로 박물관과 생제르맹의 국립고고박물관, 퐁텐블로 궁전에 나누어주었다. 서양 해양 관련 유물은 1943년 샤오궁의 인류학박물관과 해양박물관으로, 1945년에는 아시아컬렉션을 기메박물관으로, 1882년 장식미술관 등으로 선택과 집중을 꾀했다. 그리고 이렇게 통합하는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중세부터 초기 루브르 시대에 있었던 낡은 방식일 뿐이다. 만약 그런 실험을 하려면 일단 규모도, 가치도 실패의 리스크가 가장 작은 선에서 시도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필 이런 위험한 시도를 ‘유사 이래 최대’라는 이건희 컬렉션을 가지고 한다는 것에 대해 걱정이 앞선다.

월간미술

컬렉션 자체의 성격뿐 아니라 해외 미술관의 사례만 봐도 이건희 기증관에 모든 컬렉션을 통합해서 모으자는 주장의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 예산도 문제다.

정준모

문체부는 이건희 기증관을 짓는 데 최소 1500억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박물관 미술관의 건축비는 평당 1,000만 원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 기증관은 1만5000평(약 4만9587㎡)짜리 건물이 되고 그중 약 3분의1이 순 전시 면적이 된다. 여기에 수장고 등을 빼면 순수하게 전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은 3000평 정도다. 그 많은 기증품을 보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연간 유지보수비, 인건비를 추산해보면 연간 550억은 소요될 것이다. 1500억의 국민 세금으로 기증관을 짓는다고 했을 때, 30년만 지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기 시작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도재기

맞다. 기증관의 문제는 건물의 건축이 아니라 향후 막대하게 들어갈 운영비다. 해마다 몇백억 원씩의 세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문체부가 건립을 발표하기 전에 이 같은 장기 운영방안 등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묻고 싶다. 뒤늦게 연구용역을 준 것으로 면피가 되지 않는다. 기증관 건립은 기증의 취지, 향후 효과 등 다양한 측면에서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수장고도 문제인데 문화재와 근현대미술품은 재료도 달라서 같은 곳에 보관할 수 없고, 수장고 하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보존 수복 기능도 커져야 한다.

정준모

회화도 종이에 그린 것과 캔버스에 그린 것은 한 수장고에 보관할 수 없다. 기증품의 구성이 워낙 다양해서 각기 다른 컨디션의 수장고가 소장품의 유형별로 필요하고,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전문 레지스트라와 보존 수복을 담당할 컨서베이터도 소장품의 유형별로 확보해야 할 텐데 과연 통합 이건희 기증관에서 이런 모든 역량을 구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재기

특히 이건희 기증관을 세운다면 향후 큰 논란거리가 하나 생길 것이다. 기증자가 나올 때마다 국가가 국립기증관을 세워 줄 것인가? 누구는 세워주고 누구는 세워주지 않는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문체부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할 수 있어야 이건희 기증관 건립도 가능하다.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것이니까.

월간미술

이건희 기증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점들을 왜 고려하지 않고 건물 설립을 추진하려는 것인지.

“국립근대미술관은 이건희의 소장품 기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기증관에 버금가는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선진국으로서 꼭 갖춰야 할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정준모

도재기

기증관의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뭔가 번듯한 것을 만들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별도의 전시실이나 특별관을 지어 기증의 뜻을 살리자’는 것이다. 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기존 국중박이나 국현에 특별 전시실/관을 만들자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런데 새로운 건축물을 지어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의 욕심이 대통령의 말을 확대, 재해석해 벌어진 일이라고 본다.

정준모

국중박에는 이홍근 선생을 비롯한 여러 기증실이 있다. 이런 기증실이나 기증관을 만들라는 뜻이었지 별도의 건물을 지으라는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건희 기증관 설립을 검토하는 데 관련된 인사들이 과연 전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통합관을 만드는 것은 시대적인 것, 뮤지올로지적인 관점에서도 맞지 않다. ‘새로운 통합형 패러다임을 만들어서 복합적인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 이건희 기증관의 설립 근거인데, 말은 좋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인 동시에 분할하는 추세에 역행하는 처사다. 통합관을 추진하는 이들이 “문화적 융·복합성에 기초한 창의성을 구현”할 수 있다면 차라리 주저하지 말고 국중박과 국현을 통합할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더욱더 큰 융·복합의 성과와 시너지가 날 터이니 말이다.

도재기

덧붙이자면, 문체부는 국민 문화향유 기회 확대, 문화강국 이미지 강화 등을 기증관 설립의 이유로 든다. 근데 1500억 들여 새 기증관을 세우는 것보다 그 예산을 국중박, 국현에 투자한다면 그 효과가 기증관 건립을 통한 것보다 훨씬 크지 않겠는가. 한국을 대표하는 국중박, 국현을 방치하듯 하고, 개인 컬렉션을 기반으로 하는 새 기증관을 세워 국가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봐도 국제적으로 비웃음을 살 일이다. 문체부는 지금 기증관 건립이 아니라 기존 양대 기관의 활성화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때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이번 기회에 외부 전문가, 기관들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관의 역량을 보여준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도재기

정준모

이건희 소장품 기증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국중박과 국현, 양 기관의 컬렉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이건희 기증품에는 학문적 맥락과 예술적 흐름으로 볼 때 중앙박물관이나 국현의 소장품들과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작품이 많다. 이가 빠진 곳에 이가 난 형국인 것이다. 게다가 이를 통해 씹을 힘도, 소화력도 좋아졌다. 이건희 기증관에 1500억을 쓸 것이 아니라 국중박과 국현을 지원하고 보강하는 데 쓴다면 그 효과는 독립된 기증관의 십배 백배 클 것이다. 사실 국현의 4개관 작품 구입비가 40억 남짓, 지방관 포함 총 14개 관인 국립박물관의 소장품 구입예산도 40억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박물관인 통합기증관을 또 개관한다는 것은 “기름 없어 세워둔 자동차를 두고, 새로운 자동차를 사는 것”과 다름없다. 있는 것부터 제 몫을 하도록 지원하고 키워주어야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도재기

국중박과 국현이 지금보다 예산이나 인력이 확충된다면, 또 기증관보다 차라리 국립근대미술관을 세운다면 기증의 뜻도 충분히 살리고 문체부의 정책적 목표 달성도 훨씬 쉬울 것으로 본다. 갖출 것을 갖춘 곳이라 기름만 넣어주면 빠르게 잘 달릴 수 있는 전문기관이니까.

월간미술

말씀하신 것처럼 기증관 설립보다는 수증자와 수증받은 말씀하신 것처럼 기증관 설립보다는 수증자와 수증받은  작품에 대한 책임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 같다.

정준모

그렇다. 예를 들자면, 국현에 기증된 작품 중 모네, 피사로, 고갱 등의 작품이 있다. 이런 작품을 수증하기 위해서는 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짝이 맞지 않는 작품의 경우 맥락을 만들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작품들을 추가로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갱의 초기작 〈무제(Untitled)〉(1875)는 고갱이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그린 것이다. 고갱 작업의 맥락을 위해서는 최소한 고갱의 작품이 시대별 양식별로 7~8점은 추가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을 누가 어떻게 메꿀 것인가.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컬렉션을 어떤 맥락으로 완성할 것인가는 이제 이를 수증한 기관의 몫이다. 만약 통합 기증관의 경우 새로운 작품들을 수집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2만3000점의 작품이 있다 해도 기대하는 융·복합의 성과는 미미할 것이다. 무조건 기증받았다고 환호할 것이 아니라 컬렉션을 수증함으로써 우리가 떠안은 책임은 무엇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엄중한 고민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도재기

피사로의 작품은 그나마 시장을 다룬 국내외 작가 작품들과 어떤 맥락이나 연결고리를 찾을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런데 도저히 짝을 지을 수 없는 기증 작품들을 그저 기증관에 몽땅 모아 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국중박과 국현에 있으면 활용방안 연구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월간미술

작품의 보존, 수복, 연구, 활용방안도 중요한 부분이다. 기관들이 소장품을 제대로 관리하고 연구와 전시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려면 어떤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할까.

도재기

전적(서적)의 경우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다. 우리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자료인 셈이다. 그런데 국중박에 기증된 전적은 한자만 안다고 해서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번 컬렉션은 국중박과 국현 내부 인력의 역량을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국중박 민병찬 관장은 전적 연구를 위해 외부 전문가들을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이번 기회에 외부 전문가, 기관들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국중박, 국현 학예사들은 모든 네트워킹 활용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기관의 역량을 보여준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정준모

이번 이건희 컬렉션을 사전에 살펴본 일부 인사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다만 이구동성으로 충분히, 세심하게 들여다볼 부분이 많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의 가치있는 유물을 발굴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기본적인 연구와 조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 앞서 나간다는 점이다. 사실 내 생각으로는 통합이 아니라 전적류는 한국학중앙연구소나 규장각, 석조유물이나 목기는 민속박물관으로 그리고 국립현대의 근대미술품은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의 초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증품의 성격을 고려해 각각의 전문성을 가진 기관에 장기대여 형태로 나누어 보관 조사·연구하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월간미술

보존, 수복 연구 인력 자체도 부족한 것 같다. 레지스트라와 아키비스트에 대한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정준모

현재 우리나라의 국중박도 국현도 레지스트라라는 직능과 직제가 없다. 현재 유물관리를 맡는 레지스트라의 경우 입사 당시는 학예사로 들어가 유물관리부로 발령을 받으면 레지스트라로 일하다 다시 학예실로 발령이 나면 학예사로 일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해당기관이나 문체부가 통합기증관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중한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월간미술

미술계와 미술언론에서 이건희 컬렉션에 얽힌 이슈를 다루는 방식도 다소 안일했던 것 같다.

도재기

전문지라면 일간지가 받아쓸 수 있는 정도의 분석, 심층적 기사를 써야 했다. 어떻게 미술계에서 10년에 있을까 말까 한 이슈에 대해 이렇게 침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많은 미술평론가, 교수, 큐레이터 등 미술계 사람들은 무엇을 했나. 스스로 ‘유령’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준모

미술계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 비평가, 미술사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그리 말을 잘하시던 분들이 모두 이번 일에는 함구로 일관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월간미술

이건희 컬렉션 기증에 삼성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재기

기증은 숭고한 일이다. 자신의 안목과 시간, 막대한 노력을 들여 애써 수집한 소장품을 사회를 위해 내놓는 일이다. 영원히 기억되고,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물론 삼성의 경우 2008년 검찰의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여러 문제가 확인되어 부정적인 이미지가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증 자체는 의미와 가치가 크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기릴 것은 기꺼이 기리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고 본다.

정준모

기증한 삼성가는 조용한데 오히려 정부가, 문체부가 자꾸 과도하게 자신들을 드러내려 하다 보니, 외려 기증의 뜻이 흐려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길 없다.

월간미술

미술계는 “국중박과 국현에 분산 기증한 뜻을 존중해 양 기관에 기증품의 수장과 관리 향후 확대방안까지 일임하라”, “국립근대미술관을 국현에서 분리·독립시켜 신설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립근대미술관을 설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준모

우리나라가 근대 없이 현대만 있는 나라가 아닌가. 우리나라 근대미술은 척박하다. 한국의 근현대미술 연구자들도 부족한 실정이다. 이병철, 이건희 기증품으로 들어온 1400점이 거의 다 근대미술이다. 그리고 국현이 원래 소장하고 있던 근대미술 작품도 2000여 점에 이른다. 국중박도 꽤 많은 근대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것들을 모아 국립근대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 국립근대미술관은 이건희의 소장품 기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기증관에 버금가는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선진국으로서 꼭 갖춰야 할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국중박이나 국현을 한국의 민족문화를 고양할 수 있는 기관으로 성장시킬 생각을 해야지 이 두 기관을 방치하고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도재기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은 한마디로 잃어버린 우리의 근대를 찾고 회복하는 일이라고 본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격동의 한국 근대사는 고대와 현대를 잇는 핵심적인 고리이지만 연구가 미진하다. 미술사적 흐름이 고대 -  근대 - 현대 - 동시대로 이어지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외에서도 현대미술관보다 근대미술관을 먼저 건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흐름이 끊겨 국현이 현대를 중심으로 근대를 곁가지로 다루는 실정이다.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통해 이 왜곡된 상황을 개선하고, 극소수의 몇몇 작가·작품에만 쏠려 있는 부실한 근대미술사 연구를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증관 건립보다는 국립근대미술관을 세우고, 국중박과 국현 등 작품을 기증받은 기관의 역량을 더욱 보강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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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1년 9월호 특집 <이건희 컬렉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획· 진행 염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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