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홍수연 Drawn Elephant: 추상 抽象
8.30~10.29 코리아나미술관

서지은 |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달이 진다(The Moon Gets Down)〉(사진 왼쪽)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분 7초 2022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지난 두 달간 진행된 홍수연의 개인전 〈Drawn Elephant: 추상 抽象〉은 가보지 않은 길,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그 길을 선택한 작가의 과감한 결단과 중견작가의 창의적 시도 및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후원하고자 하는 코리아나미술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미술관은 동시대 국내 미술현장에서 다소 사각지대에 놓이기 쉬운 여성 중견작가에게 예술적 실험을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고, 작가는 이를 활용해 새로운 도전과 탐구의 결과를 선보일 수 있었다. 개인전의 경우 대부분 작가 개인의 역량이 전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 홍수연의 개인전에서는 기획의 요소가 다각도로 주요하게 작동했다. 따라서 이 글이 실리는 섹션의 제목처럼 ‘기획자의 목소리’를 담아 어떤 관점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유효한 전략이 되었는지를 짧게나마 나눠보고자 한다.
추상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이어가며 추상 회화를 제작해 온 홍수연은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추상抽象’이라는 원초적 개념을 다시 주목했다. 추상의 ‘상’에 쓰인 한자어가 ‘모양 상像’이 아닌 ‘코끼리 상象’임을 새롭게 인식한 작가는 지난 30년간 추상 회화에 천착해왔지만 정작 그 개념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 접근했음에 대한 자기반성과 동시에, 추상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추상의 한자 의미를 직역한 제목 〈Drawn Elephant〉와 같이 내재된 코끼리를 추적하고 그것을 끄집어내려는 여정이었다.
작가는 지난 2년여간 코리아나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염두에 두고 신작 제작에 온 힘을 쏟았고, 작가와 미술관 학예팀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과 미술관을 주기적으로 오가며 작품의 진행 과정과 전시에 대해 밀도 있는 논의를 이어갔다. ‘전시의 구성’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새롭게 발표되는 신작은 이번 전시의 시발점이자 이유였지만, 신작만을 전시하기보다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작업적 진화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전시실로 구성된 코리아나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그 특성을 활용해 작가의 작업적 전환점(turning point)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전시 연출에서도 서로 대비를 주고자 했다.
평면의 화면과 재료의 물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홍수연은 2010년경부터 작품에 쓰이는 색을 과감하게 제한한 회색 시리즈를 통해 공간이나 형태, 서로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균형과 긴장감 등을 더욱 예민하게 조정하면서 변화를 만들어냈고, 이후 팽팽한 긴장감과 균형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들을 이어왔다. 전시의 1부 공간인 c - gallery 에서는 신작의 바탕이 되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을 선별하여 새로운 챕터로 진입하는 작가의 작업적 진화를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시장 내 가벽이 각 섹션을 완전히 구분 짓기보다는 가벽의 교차지점에 통로를 내어 벽색의 연결 등을 통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각각의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짜임새 있는 공간이 되도록 조성했다.
또한, 공간 안쪽에 위치한 ‘드로잉 룸’에는 작가가 트레팔지 위에 해먹, 과슈의 흔적을 입힌 드로잉 작품 〈시간의 어딘가(Somewhere in Time)〉 연작 중 7점이 전시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작가가 기존에 해왔던 액자 설치 방식을 따르기보다 작업의 핵심인 ‘레이어(layer)’의 개념과 연결되는 동시에 트레팔지의 속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입체적인 설치를 구상했다. 그 결과, 앞뒤로 투명한 아크릴판을 겹쳐서 고정시킨 7점의 크고 작은 드로잉이 모빌과 같이 부유하듯 떠 있는 형태로 설치되었다. 작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깔끔하게 보일 수 있는 아크릴판을 손수 제작하는 열정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더욱 효과적인 설치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에 가까웠던 c - gallery와 달리, 전시의 메인 무대인 c - cube는 비교적 높은 천장과 공간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콘크리트 원기둥, 그 가까이에 더 높은 천장으로 뻗어있는 긴 벽 등이 특징적이라 깊은 바다 혹은 우주의 심연을 떠올리며 작품을 구성하고, 공간을 연출했다. 홍수연이 야심차게 선보이는 6점의 신작 회화 연작 〈의미 있는 우연(Synchronicity)〉과 새롭게 시도한 2점의 영상 작품이 전시된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앞서 언급했던 전시 공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창조된 작가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변화를 향한 작가의 처절한 몸부림은 기존 작품에서 두드러졌던 작가의 통제와 긴장을 해체했고, 작품에 붙여진 제목처럼 캔버스 위에 작가가 촉발시킨 사건들이 만든 ‘의미 있는 우연들의 일치’를 통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특히 작가가 이번 개인전에서 매체에 대한 실험적 시도를 통해 선보이는 영상 작품 〈달이 진다(The Moon Gets Down)〉는 천장에서 내려와 공중에 설치된 앙면스크린(rear- projection screen)에 투사하여, 2차원 회화에 숨어 있던 이미지들이 영상 속에서 새 생명을 얻어 3차원의 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느낌을 더욱 강조하였다. 또한, 전시장의 공감각적 분위기를 형성하며 그 모체가 되는 다른 회화 작품들과 서로 조응을 이룰 수 있게 했다. 그 외에도 함께 선보이는 회화에 비추는 조명을 1부 공간과는 다르게 사용해, 빛으로 투사되고 있는 영상 작품과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조성하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곳은 c - cube에서 전시 관람을 마치고 들어서게 되는 ‘크리에이터스 룸(Creator’s Room)’이다. 전시를 찾은 많은 이들이 이 공간에서 상영되고 있는 7분 40초 가량의 작가 인터뷰 영상을 집중해서 보는 모습을 자주 마주할 수 있었다. 작가의 언어로 풀어낸 설명, 그리고 그와 교차되는 작업실의 모습과 작업의 과정, 작품의 세부 장면들이 어우러져 전시와 작품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도왔다. 거기에 더해 작가의 작업실 한쪽에 고이 숨겨져 있던 20년 전 제작된 ‘그림  -  껍질’들을 발굴, 소환하여 벽에 설치하였고, 관람객들이 직접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레이어 카드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작은 체험 공간도 마련해 호응을 얻었다.
이번 개인전을 통해 작가가 끌어올린 코끼리, 그리고 그것을 담아냈던 전시의 방식이 서로 극단에 있기보다는 어떠한 균형점을 찾으며 관객에게 다가갔기를, 그리고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코끼리(혹은 그 무언가)를 떠올려 보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Drawn Elephant: 추상抽象〉 코리아나미술관 전시 전경
〈의미 있는 우연 07 - 22(Synchronicity 07- 22)〉(사진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5×154 cm 2022
〈코끼리 꺼내기(Drawn Elephant)〉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26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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