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FESTA 14

world report | Prishtina

올해로 14회를 맞는 유럽형 노매딕 비엔날레 마니페스타(Manifesta)가 동유럽 서(西)발칸 지역 코소보(Kosovo)의 수도 프리슈티나(Prishtina)에서 열렸다. 현지 언어로 ‘검은 새들의 땅’이라는 뜻의 코소보와 ‘물의 샘’으로 불리는 수도 프리슈티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경한 나라이며, 1998년 유고슬라비아 내전 후 독립했지만 여전히 영토 분쟁지역이다. 분쟁지역에서 비엔날레를 연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지만 마니페스타 14는 오히려 코소보의 역사적, 지역적 특수성에 주목한 ‘참여적 도시주의(Participatory Urbanism)’를 통해 지속가능한 논의와 배움을 실천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번 행사는 다수가 참여하는 공동기획의 형식을 통해 프리슈티나의 경제문화적 중심지였던 프리슈티나 그랜드 호텔이나 유고슬라비아의 강압통치를 증언하는 헤르티카 스쿨 하우스 등 프리슈티나의 유의미한 도시 공간에 개입하는 공공프로젝트와 함께, 낙후된 도시의 미래에 관해 시민들이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코소보의 역사와 도시의 유산들을 재고하고 배움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 마니페스타 14를 만나보자.

코소보 내셔널 라이브러리 건물 전경 

검은 새들의 땅을 배회하는 유기견과 예술 산책 

백기영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서(西)발칸 지역의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에서 인도네시아 예술콜렉티브 루앙 루파(Ruangrupa)가 공동체의 실험으로 분주하고, 베니스 비엔날레가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 감독을 필두로 여성 예술가들의 에코페미니즘적인 창작의 에너지를 그러모으고, 알제리 출신 작가 예술감독 카더 아티아(Kader Attia)가 베를린에서 포스트콜로니얼의 현재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고독한 전투를 감행하고 있을 때, 시드니 비엔날레에서는 콜롬비아 출신 예술감독 호세 로카(Jose Roca)가 법적 인격권을 획득한 강(江)들을 주제로 호출하며 원주민의 문화를 다시 주목하는 전시를 기획하는 한편,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는 우테 메타 바우어(Ute Meta Bauer)는 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작가들을 이스탄불로 데려와 비엔날레를 기획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여행이 보다 자유로워진 올 한 해, 동시대 예술 이벤트의 중심에는 남반구가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이 글로벌 이벤트들이 국제적인 예술담론에 주목하고 있을 때, 올해로 14회를 맞는 유럽형 노마딕 비엔날레 마니페스타(Manifesta)는 동유럽 서(西)발칸 지역의 코소보(현지 언어로 ‘검은 새들의 땅’이라는 뜻)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비엔날레를 개막했다. 유럽연합의 출범과 함께 유럽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이 비엔날레는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에는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개최되어 필자는 방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전에 개최된 12회 팔레르모 마니페스타의 기억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다. 당시 팔레르모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난민과 이민자들이 모여서 만든 ‘행성적 정원(The Planetary Garden)’으로서의 도시를 보여주었는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는 정치사회적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노마딕 비엔날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기획으로 회자된다.
올해 전시가 열리는 프리슈티나(‘물의 샘’)는 1998년 ‘코소보 전쟁’으로 불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치르면서 자치권을 인정받아 2008년에 독립했지만, 여전히 세르비아와 영토분쟁 중인 지역이자 부분적 승인 국가의 수도다. 이 때문에 코소보 여권으로 갈 수 있는 나라는 매우 제한적이다. 도시 곳곳에는 자신들의 자치권을 지켜주는 서구 열강의 국기가 코소보 국기와 굳건한 연대를 자랑하고 있었다.

페트리트 하릴라지(Petrit Halilaj) 〈태양이 지면 우리는 하늘에 그림을 그릴거야(When the sun goes away we paint the sky)〉 2022

참여적 도시주의(Participatory Urbanism)
사실, 세르비아와 알비니아계 코소보인의 민족적 갈등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절부터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티토 장군이 승리하면서 코소보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티토가 죽고 세르비아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민족 탄압이 가속화되었다. 알바니아계 코소보 민족주의자들이 아뎀 야샤리를 주축으로 봉기하면서 1989년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처럼 23년 전 전쟁을 겪은 분쟁지역에서 비엔날레를 개최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다. 이미 마니페스타는 그리스와 터키 분쟁지역이었던 사이프러스에서 6회 마니페스타를 개최하려다가 중도에 포기한 경험이 있다. 러시아 내부의 불안정한 요인들로 10회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간신히 문을 열었다. 디렉터 헤드윅 피진(Hedwig Fijen)은 이번 마니페스타는 팔레르모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예술감독 1인의 관점에 따라 기획되는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공동기획의 형식을 띠는 것이다. 트리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시건축사무소 CRA-카를로 라티 아소시아티(CRA-Carlo Ratti Associati)와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학자, 큐레이터, 작가인 캐서린 니콜스(Catherine Nichols)과 같은 중개자(mediator)의 활동도 각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CRA-카를로 라티 아소시아티는 도시 공간에 개입하는 공공프로젝트를 통해서 이 프로젝트의 전체 사이트를 연결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낙후된 도시 공간에 시민들이 모여서 서로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는 현장을 마련하였으며, 캐서린 니콜스의 경우 2년 반의 시간 동안 학제적인 프로그램 〈It matters what worlds world worlds〉를 통하여 지역의 작가와 기획자들이 지역의 역사와 이야기들을 내러티브 프렉티스 센터(Center for Narative practice)와 협업하고 수집하였다.

이불 〈기꺼이 취약해지기 위한 의지- 금속화된 풍선 V4(Willing to Be Vulnerable-Metalized Balloon V4)〉 2015/2020 1937년 국가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날다가 폭발하면서 불에 타버린 힌덴부르크(Hindenburg)의 기구를 연상시키는 이 풍선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건축물의 대표 격인 ‘청소년과 스포츠 센터’ 건물에 설치되었다. 이 공간은 1시간에 50센트를 내야 하는 주차장 공간으로 활용중이다.

프리슈티나 그랜드 호텔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가장 확고하게 보여주는 첫 번째 전시 장소는 프리슈티나 그랜드 호텔이었다. 1978년 유고연방 시절에 문을 연 이 호텔은 프리슈티나의 경제문화적 중심지였으며 수백 점의 예술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하였다. 전쟁 후, 민영화되면서 총 350개의 객실 중 1% 정도만 투숙객을 받고 있으며 빈 공간은 스포츠클럽, 여행사, 나이트클럽 같은 시설로 유지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이 호텔은 유고연방이 표방했던 사회주의의 이상과 자부심이 무너진 현재의 프리슈티나를 보여주는 증인이자 상징이다. 호텔 건물 옥상에는 페트리트 하릴라지(Petrit Halilaj)가 제작한 대형 간판작업 〈태양이 지면 우리는 하늘에 그림을 그릴거야(When the sun goes away we paint the sky)〉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해가 지면 이 간판 위로 다섯 개의 별이 차례로 켜졌다가 꺼지면서 지표면으로 내려앉는다.
전시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마질린다 혹사(Majlinda Hoxha)의 사진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호텔 로비 구석구석에 설치된 사진들은 도난당한 미술작품들을 따라 티토가 묵었던 3층 객실로 이어진다. 5성급 호텔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낡은 객실의 잔해가 나뒹구는 지하 1층부터 9층까지 황폐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들에는 층별로 주제기획전 〈거대한 계획(The Grand Scheme of Things)〉의 7개 키워드 – 이행(Transition), 이주(Migration), 물(Water), 자본(Capital), 사랑(Love), 환경(Ecology), 회의(Speculation) – 에 관한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건물 지하의 식당 부엌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에는 오프시즌 콜렉티브(Off Season Collective)의 작업이 있었는데, 2019년부터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작가, 큐레이터, 연구자들이 함께 서발칸 지역을 여행하면서 전쟁 이후의 지역사회를 답사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기록한 영상과 설치작품이 소개되었다. 이처럼 이번 마니페스타는 지역의 여러 상황에 어떻게 예술가들이 개입할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다. 이 프로젝트의 참여자, 작가, 연구자들의 활동은 반드시 어떤 작품으로 귀결되지 않기도 했는데, 불완전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과도 같은 상태를 드러내는 진술들이 시적인 언어들과 함께 등장한다. 이런 기록들은 독립잡지 《FESTA》를 통해 글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총 25개의 역사적인 장소에서 펼쳐지는 전시의 이해를 돕고 지역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슈들을 소개했다.

우고론디노네(Ugo Rondinone) 〈not a word not a thought not a need not a grief not a joy not a girl not a boy not a doubt not a trust not a lust not a hope not a fear not a smile not a tear not a name not a face not a time not a place not a thing〉 유고슬라비아 기념비에 알루미늄 호일 포장 2022

유기견의 도시 프리슈티나
이번 마니페스타는 프리슈티나 거리에서 빈번하게 마주치는 유기견을 비엔날레의 상징 캐릭터로 선정하였다. 이 도시에서는 길 위에 편안하게 누워서 지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낮잠을 자거나 주민들이 던져준 빵 봉지를 뜯어 먹고 있는 유기견을 만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도시 어디에나 거주하며 만나는 누구에게나 그의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유기견들은 낙후된 도시 공간 건물 사이를 배회하면서 오랜 시간 방치된 이야기들을 되살려낸다. 마치 드리안트 제넬리(Driant Zeneli)의 영상에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처럼 말이다. 그의 작업 〈동물들. 옛날 옛적에… 지금에. 트릴로지 (The Animals. Once upon a time…. in the present time. The Trilogy)〉 (2019~2022)에는 프리슈티나에 있는 코소보 내셔널 라이브러리와 알바니아에 있는 트리아나의 피라미드 그리고 북마케도니아 수도인 스코페 우체국의 유토피아적이고 미래주의적인 건축들이 장엄하게 그 위엄을 드러낸다. 그 사이로 어린이 동화에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들이 그가 제작한 동물 캐릭터, 물고기, 뱀, 잠자리, 반딧불이와 함께 흘러나온다. 반딧불이를 집어삼킨 뱀이 몸에서 빛을 내다가 폭발하는 장면은 반딧불이 같은 약자를 얕잡아 보다가 최후를 맞이한 권력자를 풍자한다. 드리안트 제넬리는 그의 대안적 아틀리에에서 프리슈티나 보네베스트(Bonevest)에서 온 비영리 메이커 스페이스 로봇 스페셜리스트와 함께 전시 기간 중에 어린이와 가족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개최했다.

헤르티카 스쿨 하우스(Hertica School House) 전경 

헤르티카 스쿨 하우스의 유산
이 비엔날레에서 배움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는데, 외부에서 온 연구자들과 기획자들은 이 도시를 배우고 주민들과 학생들은 마니페스타를 통해서 배웠다. 이번 비엔날레가 표방하는 배움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25개 장소 중 가장 멀리 위치해 있었던 헤르티카 스쿨 하우스(Hertica School House)다. 이 공간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강압통치 시대 모든 학교와 대학이 문을 닫고 교육이 금지되었던 상황을 증언하는 문화유산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공간에는 당시 학생들이 남기고 간 신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교실의 의자와 책상은 잿더미 위에 간신히 버티고 있고 칠판에는 그날의 마지막 수업에서 기록된 분필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 공간 여러 곳에는 당시의 학생, 교수, 정치인들의 인터뷰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온 라움라보아(Raumlabor berlin)가 건축전공 학생들과 진행한 워크숍은 과거 벽돌공장(Brick Factory) 부지가 국유화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유휴공간의 활용을 상상하게 했다. 그리고 벽돌공장에서는 프리슈티나 도시정책 관계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여기에는 “마니페스타는 프리슈티나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상상한다.”고 쓰여 있다. 그 외에도 드레스덴 미술대학 학생들과 프리슈티나 대학 학생들과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면서 팟캐스트를 제작했던 수잔 필립스(Susan Philipsz)는 이 도시의 자활을 지지하는 적극적 연대를 보여준다. 코소보인들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스페인 작가 루츠 브로토(Luz Broto)는 시내의 한 열쇠가게에서 〈열쇠 바꾸기(Swap Keys)〉를 진행했는데, 열쇠를 교환하기로 합의한 두 사람이 열쇠가게에 가면 두 사람의 집 열쇠를 복사해 주는 프로젝트였다. 복사한 열쇠를 기록한 클리어 파일에는 꽤 많은 사람이 동참한 흔적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보도하는 스페인의 한 신문 기자는 다음 마니페스타의 개최지로 바르셀로나가 선정된 것을 소개하면서 스페인 작가와 열쇠를 교류한 코소보인은 아직도 스페인에 입국할 수가 없다고 썼다. 코소보인들은 스스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그들은 마니페스타를 유치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브릭 펙토리(Brick Factory)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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