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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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현 진 Bek Hyun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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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현 진 Bek Hyunjin
1972년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를 중퇴했다. 가수, 작곡가, 화가, 시인 등 전방위적인 장르에서 활동한다. 1997년 어어부밴드로 첫 앨범을 발표한 이래 꾸준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으며 단편 영화의 배우와 감독을 맡기도 했다. 밀라노, 빈, 런던, 쾰른 등지에서 9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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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에 관련하여

이번 작업을 얘기할 때, 남한식 혹은 서울식 휴게실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한 적 있는데, 설치를 끝내고 보니 엄밀하게는 남한에 위치한 서울이란 지역에 ‘이런 식의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잠시 머물며 잡담도 하고 멍하니 있어 보기도 하고 뭔가를 발견해보려고 주의도 기울여보고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고 잊기도 하고 다짐도 하고 낙담도 하는, 서울 혹은 남한을 닮은 ‘이런 식의 어떤 공간’. 각설하고, 나는 내가 디자인한 소리가 꽉 차있는 이런 물질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 휴게실이 운영될 5개월간 서울에 위치한 ‘이런 식의 어떤 공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참, 이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 중 하나인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이라는 시는, 현재 페리지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그 근처>를 구성하는 한 요소인 <그 근처>란 시와 일종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관계로, 두 개의 전시는 단단히 링크돼 있음을 밝힌다. 여기에 그 두 편의 시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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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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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

사람이 있다. 어렵게 어렵게 취직을 했다.
결혼을 한다. 계절이 몇 번 바뀐다.
실직을 했다. 어렵게 치킨집을 열었다.
손님이 없다. 계절이 뒤죽박죽이었다.
폐업을 했다. 공기가 엉망진창이다.
이혼을 한다. 썩거나 타들어갔다.
부채는 많다. 쓸 손이 없다.
전등이 있다. 환하다.
바다에 간다. 크고 아주 길게 숨을 들이켠다.
파도를 본다. 크고 짧게 숨을 내뱉는다.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이 빈소에 있다.
편육을 몇 점 집어먹으며 소주를 마신다.
곧 너무 취했다.
빈소를 빠져나온다.
버스를 탄다. 내리니 모르는 곳이다.
간신히 가로수를 붙잡고 비틀거리며 오줌을 눈다.
습하다.
보노보가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 걸 본다.
휴대폰 배터리는 반 이상 남아있다.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은 혼잣말한다.
왜 죽어, 죽긴 왜 죽냐고 이 병신아, 왜 죽냐고.
위 문장은 조금씩 변형되며 한참 동안 반복됐다.
바람은 휘몰아치다가 말았다.
며칠 후,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은 걷다가 홀린 듯 멈춰
서서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시간이 지난다.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은 우연히 당신이 머물고 있는
어떤 휴게실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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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처

사람이 있다. 어렵게 어렵게 취직을 했다.
결혼을 한다. 계절이 몇 번 바뀐다.
실직을 했다. 어렵게 치킨집을 열었다.
손님이 없다. 계절이 뒤죽박죽이었다.
폐업을 했다. 공기가 엉망진창이다.
이혼을 한다. 썩거나 타들어갔다.
부채는 많다. 쓸 손이 없다.
전등이 있다. 밝다.
바다에 간다. 크고 아주 길게 숨을 들이켠다.
파도를 본다. 크고 짧게 숨을 내뱉는다.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이 빈소에 있다.
육개장을 가끔 떠먹으며 소주를 마신다.
시간이 지난다.
취했다.
빈소를 빠져나온다. 걷는다.
습하다.
바람은 휘몰아치다가 말았다.
간신히 가로수를 붙잡고 비틀거리며 오줌을 눈다.
뿔이 전선에 걸린 채 매달려 있는 염소를 본다.
좀 더 걷다가 휴대폰을 놓친다.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은 혼잣말한다.
병신… 병신아 왜 죽어, 죽긴 왜 죽냐고.
위 문장은 조금씩 변형되며 한참 동안 반복됐다.
며칠 후,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은 걷다가 홀린 듯 멈춰
서서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영원히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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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홍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