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자본주의-신자유주의 그리고 예술의 딜레마
예술과 자본주의 그리고 창의성
신현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2016년 3월 초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에서 침묵시위가 벌어졌다는 뉴스를 이 글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시위대는 ‘인문사범대학’, ‘지식서비스공과대학’, ‘창의예술대학’, ‘뷰티산업국제대학’, ‘휴먼웰니스대학’, ‘교육부’라는 글귀를 쓴 패널에 검은 리본을 달아 ‘조의(弔意)’를 표했다. 교육부가 ‘권장’하고 학교 당국이 ‘실행’하는 ‘통폐합’에 학생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구체적인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뷰티산업대학이나 휴먼웰니스대학 같은 해괴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부터 의외였다. 이른바, ‘돈이 되는’ 학과를 만들어서 ‘취업률’을 올리려는 시도라는 점에도 큰 의문이 없다. 후문으로는 지식서비스공과대학이라는 것도 기존의 자연계를 개편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그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관심이 가는 학과의 명칭은 ‘창의예술대학’이다. 아마도 기존의 음악대학이나 미술대학을 통폐합하려는 시도로 보이지만, 명칭 자체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창의’와 ‘예술’은 오랫동안 긴밀하게 연관되어 왔고, 그 연관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 단어들의 어감이 ‘뷰티’나 ‘웰니스’처럼 그 저의가 노골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혹시 창의와 예술 사이의 연관성이 이제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두 단어가 오랫동안 표상해왔던 어의가 심각하게 변환되고 있는 것일까. 창의라는 단어와 창조라는 단어를 혼용할 수 있다면, 언뜻 ‘창조경제’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친다. 이 정책 용어에 대해 냉소적으로 반응하기에 앞서 ‘창조’라는 단어가 ‘경제’라는 단어와 결합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예술적 창조성과 자본주의 경제의 이분법
‘예술과 자본주의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해 보인다. ‘아무 관계 없다’라는 답이나 ‘적대적 관계다’라는 답이나 그 실제적 뜻은 다르지 않다. 고상한 예술과 통속적 자본주의를 대비시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미학과 경제학은 인간 세계의 전혀 다른 영역이고, 그 화신들인 창조적 예술가와 범속한 경제인은 전혀 다른, 그리고 상극적인 인간 부류일 것이다. 이상의 발상은 예술과 자본주의에 대해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고정관념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 그 고정관념은 매우 강력해서 하루아침에 변할 것 같지 않다.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어휘 중에서, 예술은 예술이고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이다. 그 이분법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예술가와 자본주의의 경계가 더 이상 또렷하지 않다는 게 이 글의 주장이다.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이 아니다. 우선 예술과 연관되던 창조성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하는 과정을 훑어본 다음 이 지점으로 돌아오자.
내가 알고 있는 한 창조는 근대 이전까지는 신의 영역에 속했고 인간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았다. 인간은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창조의 대상으로 이른바 피조물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 단어의 의미가 급격하게 바뀐 것은 근대 초기,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의 창조성이 인정되면서부터다. 인간이 신의 섭리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문화와 지식의 주체가 된 것이다. 즉, 창의성 혹은 창조성은 특별한 인간의 일부 속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지 매우 오래된 것 같지만 실상 5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인류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그리 긴 것은 아니다. 이상의 이야기도 서양 역사에 기반을 둔 것이니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 그 역사는 더 짧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논점은 일단 덮어두기로 하자.
근대가 인간의 창조성이 개화한 시대라는 것은 또 하나의 환상이다. 인류의 극소수는 그랬을지 몰라도 대다수 인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하는 존재로 삶을 보냈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사상가들은 테일러주의(Taylorism)나 포드주의(Fordism)라는 용어를 고안해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가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서 단조로운 작업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공장노동자는 창조적인 예술가와 정반대의 존재였다. 경제적 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예술적 창조를 수행하는 예술가들은 낭만적이고, 보헤미안적인 그리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본주의 경제 및 노동과 대립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던 자본주의에서 노동과 예술은 정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앞서 내가 말한 이분법이란 이런 시대에서 형성된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이런 이분법이 서서히 흐릿해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예술과 자본주의, 미학과 경제학, 예술적 창조와 자본주의적 노동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에서 언제는 흔히들 신자유주의나 포스트포디즘이라는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실현된 시점을 말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이지만, 이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자본주의와 무언가 다르다.
이런 말이 아직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애플의 광고를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처음 그 광고를 접할 때 거기서 구래의 자본주의 경제나 노동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광고에서 재현되는 영상이나 문구는 매우 힙(hip)하고 쿨(cool)해서 하마터면 광고야말로 현대의 최고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낄 정도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피라이터는 현대의 시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시대다. 실제로 ‘creative’라는 말을 가장 먼저 흡수한 산업부문은 광고산업이다.
예전에 예술가의 배타적 속성으로 언급되던 창의성, 독립성, 혁신 등의 단어들은 최신 경영학 서적에 너무 많이 등장해서 멀미가 날 정도다. 마치 ‘노동을 예술적·창의적으로 하지 않으면, 직장 그만둘 각오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만약 스티브 잡스(Steve Jobs)나 래리 페이지(Larry Page)를 그저 경영인이나 기업가로 취급한다면, 예술적 감성이 한참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저런 인물들을 지칭할 때 구루(guru)라는 종교적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창의적 기업가는 이제 인간계를 넘어 신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처럼 창의성·창조성이라는 용어는 좁은 의미의 예술 분야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연구해온 나는 좁은 의미의 예술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서 창의성이나 창조성이라는 용어는 자주 등장한다. 특히 ‘도회적 창의성(urban creativity)’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연관짓는 이론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들려온다. 이른바 창조도시에 관한 이론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독립적 예술창작자와 상업적 비즈니스의 결합에 의해 혁신적 경제가 나온다는 이론이다. 즉, 양자는 외주나 하도급 같은 복잡한 관계에 의해 얽혀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예술과 창의성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기업 조직의 경영뿐만 아니라 공간 경제를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의성으로 어떤 장소의 문화적 가치를 상승시키고 예술적 환경(millieu)이 조성되면, 이를 타깃으로 하는 부동산 경제가 작동하여 정작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이론에서도 예술가라는 행위자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자본주의를 인식하는 방법
방금 소개한 이론들은 뉴욕이나 런던 같은 ‘글로벌 도시’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 이제 앞서 덮어두었던 아시아나 한국이라는 상황을 불러와야 할 것 같다. 추상적 논의를 피하기 위해 서울의 한남동을 찾아가 보자. 이곳에는 삼성이라는 한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대기업이 직영하는 미술관부터 카페 경영과 예술 전시를 결합하여 자가발전하려는 공간, 예술가 3명이 월세를 분담하는 작업실을 겸한 갤러리가 공존한다.
내가 이곳을 처음 관찰할 때 ‘셋 사이에 유기적이지는 않더라도 상호관계가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아직은 특별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2010년대 초에 이곳에 자리를 잡은 예술가들의 대안공간 몇몇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앞서 말한 카페는 연예인이 새 건물주가 된 뒤 자리를 비워야 할 형편이다. 한때 이곳을 감돌던 예술적이고 ‘보헤미안’적인 환경은 점차 사라지고 의식주라는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업소들만 ‘힙’한 외양으로 발흥하고 있다. 이 장소는 ‘한국식’ 창조경제의 담론과 실천에서, 대기업과 연예인은 찾아보기 쉬워도 예술가는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공간적으로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 현상을 관찰하다 보니 몇 년 전 ‘작가 사례비’ 혹은 ‘아티스트 피(artist fee)’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생각한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이 미묘하고 복잡한 주제에 대해 훈수를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단지, 어떤 래디컬한 교수이자 평론가가 “노동이란 경제이고 예술이란 자본제적 경제의 타자”라고 말하면서, 예술을 노동이라고 인식하는 주장을 비판하던 글이 기억난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주장에 대해 한 예술가가 “답답하다”라는 소회를 밝힌 것이었다.
나 역시 그 답답함에 동의한다. 그 답답한 감정은 ‘예술은 노동이 아니므로 경제적 보상을 바라면 안 된다’는 논리도, ‘예술도 노동이니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자본주의 경제에 이용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이용당하는 게 단지 예술만은 아니라는 점이 예술가에게 위안의 말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예술과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서로 혼융되면서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식이 답답함을 극복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추상적 논리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장소에서 지배의 새로운 양태를 지각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