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검은 우유


2020.1.17~2020.3.15 김종영미술관


글: 반이정 | 미술비평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2016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2016

미술품의 재료로 가정해 본 적 없던 것이 미술품의 자격으로 전시장에 등장할 때, 이 급진적인 용도변경만으로도 여느 동시대 미술이 주는 감흥과는 차이 나는 무엇을 받게 된다. 가전제품이나 주방용품을 미술로 둔갑시키는 정크아트가 꾸준한 인기를 보장하는 대중미술 전시 상품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 때문일 게다.

이 전시의 초대작가들이 주재료로 쓴 폐목, 비닐봉지, 머리카락, 스티로폼도 미술 재료로 가정하기 힘들긴 매한가지이나, 재료의 용도변경이되 스토리텔링을 병행시켰다.

구체적인 시공간의 기록이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면, 작업에 대한 기억은 더 조밀하게 남는다. 한국사회 주거문화와 연관된 벽지를 창작의 모티프로 삼은 연기백의 〈농축된 史〉는 1980년경 가정에서 유행했던 패턴의 벽지라는 ‘발견된 오브제’로 만든 설치물로, 세월의 풍파를 견뎠으되 아슬아슬하게 보존된 벽지를 켜켜이 연결해서, 2020년으로부터 30~40년 전 한국 가정의 풍경을 환기시켰다. 2017년 개인전에서 연기백은 오래전 벽지 회사들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진열장에 비치한 바 있는데 이는 동일한 시각 패턴이 반복되는 벽지로 둘러싸인 일반 가정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벽지를 미술과 동일한 시각예술의 반열에 놓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정현 〈무제〉 2020

정현 〈무제〉 2020

정현은 산불로 타죽은 나무의 뿌리와 밑동을 흡사 조형물처럼 외형을 다듬어 전시장에 놓았는데, 그간 나무 침목을 자기 작업으로 전유하던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 현재 더는 사용되지 않는 나무 침목이, 그것이 쓰이던 1980년대 이전 기찻길에 대한 고증인 것처럼, 이번 신작은 2019년 고성-속초라는 특정 시공간을 불길로 뒤덮은 초대형 산불을 고증하면서 자기작업화했다.

해양폐기물에 대한 촘촘한 기록과 현장에서 수거했을 폐기물을 전시장에 설치물 형식으로 전시한 정재철도 특정 사건은 아니어도 만성적인 해양오염 문제를 작업으로 다룬 만큼 시공간의 기록과 작업이 관련이 있을 바, 2017년 개인전도 이처럼 고증의 비주얼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줬는데, 그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전제한 작업을 구상하는 것 같았다.

작품 재료로 가정하기 어려운 소재로 작업하는 최전선에는 폐비닐을 녹여 폐유처럼 변한 액체로 입체 타이포그래피를 설치한 심승욱과 남의 머리털을 모아 그림을 그리는 이세경이 있다. 이세경의 〈Recollection〉을 처음 본 건 동명 제목의 2013년 개인전에서다. 여러 개개인에게 수집한 사연과 머리털로, 그들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공유하는 작업이었다. 전시 제목 ‘새벽의 검은 우유’라는 시구가 들어있는 원전인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폐비닐 작업을 꾸준히 해온 심승욱이 아슬아슬 흘러내릴 듯 검게 굳어버린 글자 설치물로 재현했다.

“버려진 물질과 관객들 사이의 감각을 통한 소통방식을 시험”한 것으로 소개된 이 전시는 기성품을 예술로 전유한 ‘발견된 오브제’나, 수명이 끝난 폐품을 작업화한 ‘정크 아트’ 같은 20세기 주류 미학개념을 교차시킨 기획이라 하겠다. 동시대 미술 전시 기획은 앞서 명문화된 미적 실험들을 합종연횡 연출하면서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것도 같다.

용도를 다하고 수명이 끝난 사물로부터 시각예술의 서사를 찾아내는 작품들에서, 동시대 미술이 현실 공간에서 확보한 틈새를 본다. ●

《새벽의 검은 우유》
2020. 1. 17 ~ 3. 15
김종영미술관

●  < 월간미술 > vol.422 | 202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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