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_전창림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전창림

미술대학에서 강의하며, 미술대학 교재를 출판했고, 명화를 해설하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색채학회에서 제가 내미는 명함을 본 분들은 대개 깜짝 놀랍니다. 미술 전공이 아니라 생소한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과 미술이 무슨 관계인가? 진학 상담을 할 때도 미술계로 가는 사람이 화학에 관심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미술가와 과학자가 거의 동의어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특별한 천재가 아니라도 중세의 화가들은 직접 물감을 만들며 상당한 화학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공학과 재료에 관한 높은 지식을 갖춘 미술가들이 있었기에 기술적으로도 실현이 쉽지 않은 조형구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저는 미술대학을 진학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술의 꿈을 못 버리고 유학지를 프랑스로 정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화학이 너무 어려워 한눈을 팔지 못하였고 결국 화학과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학에 눈을 뜨고 보니 이 화학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벤젠의 구조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육각형 조형물입니다. 특히 이 육각형 고리에 약간의 방울(산소 원소 표시가 O2이기 때문)이 달린 아스피린 구조를 보면 조화와 균형과 약간의 파격이 어우러지면서 심플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환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화학자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진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화학을 비롯하여 기술공학 분야는 효율성과 유용성을 놓고 다툽니다. 아름다움은 그 다음이죠. 그러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진리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합니다. 이 말의 역(逆)도 진리입니다. 맛 좋은 떡이 아름답습니다. 요즘은 제품마다 성능은 거의 비슷하여 디자인이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기까지 성능을 발전시키려는 피눈물 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야말로 기술과 미학의 완전한 융합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물질은 새로운 성질과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물질로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면 새로운 예술이 되겠지요. 전통적인 재료로 만드는 작품에 수많은 미술가가 끝없이 도전하여 이제는 하늘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재료만으로는 표현양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료를 바꿔야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제 재료에 대한 연구가 미술가에게 필요합니다. 화학이 미술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미술은 시각적 결과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재료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 재료가 나타내는 모든 성질과 형태적 변화를 미술에 응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미술대학에서 미술재료학과 색채화학을 강의합니다. 또한 미술작품에 숨어 있는 과학적 요소들과 화학적 문제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저의 책《 미술관에 간 화학자》가 미술과 화학을 융합하였다고 대입 논술교재로도 쓰인다고 합니다만 저는 ‘미술과 화학의 융합’이라기보다는 ‘미술가를 위한 화학’을 제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화학과 재료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학문으로 정립하여 각 미술대학에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를 담당할 미술과학자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미술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미술가는 자기 작품을 세대를 넘어 보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 기법도 응용할 수 있습니다. 융합과 통섭을 외치는 시대에 우리 미술가들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새로운 재료와 미술재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많지 않지만 미술을 위한 화학과 융합학문을 정립하는 데 뜻을 같이 할 분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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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은 한양대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물감과 안료의 변화나 색의 특성 등 미술과 화학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현재 홍익대 과학기술대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대학원 색채전공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화학회, 공업화학회, 한국화학공학회 회원이자 한국색채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그림이 법의학과 만나니 억울함의 탈도 벗겨지더라_문국진

그림이 법의학과 만나니 억울함의 탈도 벗겨지더라

법의학자 문국진

인권이 침해된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법의학적 감정(鑑定)을 의뢰하게 된다. 이때는 사람만이 아니라 각종 증거물들이 대상이 되며,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서는 시신도 부검한다. 만일 시일이 오래 경과하여 시신이나 증거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게 되는 것이 지금의 법의감정 분야 실정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 고인과 관계되는 문건이나 창작물이 남아 있다면 이를 분석해 법의학이 목적하는 인권의 침해 여부를 가려낼 수 없을까를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정신의학에서의 병적학(Pathography)
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문호나 장인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정신분석을 실시함으로써 살아생전 작가의 정신적 질병이나 당시의 심리상태 등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병적학이다. 현존하지 않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문헌이나 작품 분석을 통해 고인의 정신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법의학계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생각 되었다. 따라서 고인의 유물이나 문헌 및 작품 등을 통해 법의학 분야에서도 사인이나 인권의 침해 여부를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능성 여부를 시험해보기에 이르렀다.
spec19첫 번째 시험 대상은 화가 반 고흐의 작품이었다. 그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사망했기 때문에 타살 또는 사고사라는 의견이 분분했으며 사인에 대해 많은 의문을 남겼다. 필자는 그의 작품과 문헌들을 면밀히 검색하여 그의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급성법발성 복막염’이며 ‘자살’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를《 반 고흐 죽음의 비밀》(2003)
이라는 저술로 펴낸 바 있다. 각종 문건의 분석을 마치 시체를 부검(剖檢)하듯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문헌검색을 ‘문건부검(Book Autopsy)’이라 칭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창작물 등의 흔적을 탐지하고 탐구하여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법의학의 이런 분야를 ‘법의탐적론(Medicolegal Pursuitgraphy)’이라 칭하기로 했다. 법의탐적론의 대상이 되는 각종 창작물 중에서도 미술작품이 가장 좋은 분석 대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화가는 역사화나 인물화 등을 그릴 때 시대가 부여하는 목적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고증을 참작하고 철학적 지성과 자신만의 미적 혼(魂, 예술적 영감)을 융합해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에 미술작품은 곧 그 환경과 시대를 증언하는 무언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보는 이의 안목과 전문성에 따라 그 해석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행위자체가 제2의 창작행위라 할 수도 있다. 이는 그림을 보는 감상자 각자의 경험과 전문성에 따라 마음속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감상결과가 생겨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의 미적 기교보다 현 시대적 비판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 그 결과 명화들 가운데는 인권에 대한 침해를 경고하고, 인권의 수호를 찬미하는 등의 여러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도 있었다. 즉 스페인의 거장 고야의 <벌거 벗은 마하>(1800)의 모델이 누군가에 대하여 작가가 함구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 비화해 200여 년간 의문의 화제가 되어 오던 것을 작품들의 법의탐적론적 분석으로 모델은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가려내어 오랫동안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리던 알바공작 가문이 이제는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고인이 된 알바 공작부인의 영혼도 시름을 풀고 고이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술작품의 법의탐적론적 분석으로 억울했던 누명을 벗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 학문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쾌거라 하겠다. 동시에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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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은 대한민국 1호 법의학자이자 국과수 창립 멤버이다. 1925년생으로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과수에 들어가 법의관으로 활동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본 후루하다 다네모노가 쓴 《법의학 이야기》에서 “사람에게는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법의학의 길에 들어섰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예술가의 사인(死因)과 작품을 의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해석하는 ‘법의 예술 병적학’ 분야로 여전히 수사 중이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판소리와 풍속화, 조선후기 아방가르드 예술

판소리와 풍속화, 조선후기 아방가르드 예술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현주

판소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나에게 그림은 더 이상 한가롭게 감상하고 즐기는 여기적 대상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풍속화는 내 학문 속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자기를 학술적으로 대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건 어찌보면 불행한 일이다. 학문적으로 연결되면 그림이라는 즐거움의 대상도 괴롭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풍속화를 학문적인 시선으로 골똘하게 바라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판소리와 풍속화가 지닌 비슷함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풍속화가 판소리 연구자인 내게 의미를 지닌 존재로 다가온 건, 처음에는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다. 대학 시절 서예와 동양화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산수화도 좋았지만 풍속화에 관심이 더 많이 갔다. 풍속화에 보이는 유려한 붓놀림을 흉내내면 붓글씨를 활용한 새로운 묵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품어봤던 것이다. 어쨌든 김홍도와 신윤복을 비롯해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김득신 등 많은 풍속화가의 작품을 뜯어봤던 그때 경험이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되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특히《춘향전》에서 이도령과 방자가 광한루 구경을 나갔다가 그네 뛰고 목욕하는 춘향을 발견하고 혹하는 묘사 장면이라든가, 야밤에 춘향집으로 은밀하게 이동하고 춘향과 통정하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곧바로 혜원의 <단오풍정>, <월하정인>, <야금모행>, <연소답청>, <삼추가연> 등의 그림들을 머리에 떠올렸던 것이다. 마치 춘향전 작가가 그런 그림들을 보고 서술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화공이
《춘향전》을 읽고 그런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는 거꾸로의 논리도 가능하다. 이렇게 신기한 그림과 사설의 연상작용이 판소리와 풍속화를 연결하는 내 이력의 첫걸음이 되었다.
spec16처음엔 정황상의 유사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좀 따져보니 판소리와 풍속화 양자가 만나는 지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상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아주 자세하게 뜯어보는 사실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든지, 당시 금기시되는 환경 속에서 과감하게 성적 노출을 감행한다든지, 대상을 희화화하여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든가, 여러 각도의 시선들을 배치하여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관점을 드러내는 구조상의 상동성 같은 것도 볼 수 있었다. 양자가 비슷해진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분위기가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둘 사이의 상상력 차원의 교류도 작용하지 않았겠나 판단된다. 소설 작가에게 당시의 풍속화나 민화가 주는 회화적 상상력이 어느 정도는 작동하지 않았을까.《춘향전》의 언어 자질을 정밀하게 따지다보면 강렬한 시각적 어휘소(語彙素)들이 널려 있음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강렬한 원색의 색채소, 매우 역동적인 형상소와 동작소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건 당시의 색채와 운동감각을 주도했던 풍속화와 민화를 빼고 말하긴 어렵다고 본다.《춘향전》 언어의 이러한 회화성은 춘향전의 영상화 작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난 보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 춘향이 그네를 뛸 때 흰색 붉은색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장면을 카메라가 잡고 있는데, 그건 ‘백백홍홍난만중(白白紅紅爛漫中)’이라는《춘향전》 언어를 가지고 고민한 결과가 아닌가. 소설 작가에게 회화적 상상력이 작동한다면, 풍속화가에게는 소설적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소재 그림 대다수는《이춘풍전》이나《왈자타령》,《절화기담》 등과 같은 당시의 세태소설들과 테마, 분위기, 정조, 표현방식 등에서 상당한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혜원은 유곽이 있는 뒷골목과 거기 사람들의 생태를 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책가의 소설본들을 빌려 읽는 데도 관심이 아주 많았던 듯하다.
내가 풍속화와 판소리에 견인되었던 이유의 하나는 화공과 광대의 그 치열했던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숱한 난관에도 불굴의 의지로 그림과 소리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판소리 광대들은 천민으로부터의 계급적 해방, 그리고 무당 집안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비원을 소리에 담아내고 있고, 풍속화 화공들도 신분의 한과 사회적 냉대 등의 환경 속에서 시대정신을 화폭에 담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들의 도전적인 실험정신과 투철한 장인정신이 없었다면 전대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찬연하게 등장한 아방가르드 예술로서의 풍속화와 판소리가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문화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조선후기 문학과 판소리를 보고 있는 한 풍속화는 아마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내게 다가올 것 같다. 거울처럼 상대가 되는 장르를 비추면서 문화론적인 반사작용을 할 것이므로. ●

김현주는 서강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춘향전의 연행론적 연구》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썼다. 현재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전서사체 담화분석》 《구술성과 한국서사전통》 《판소리 담화 분석》등을 저술했다. 판소리와 풍속화를 소설과 회화적 상상력으로 서로 소통하는 존재로 보고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연구한 《판소리 소설을 읽으며 풍속화를 보다》를 펴냈다. 이 저서에서 정조시대 문학과 회화에 주목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흐르는 물이 담긴 어항_신현림

흐르는 물이 담기는 어항

시인 신현림

푸른 물고기떼가 내게 헤엄쳐오듯 미술에 대한 즐거운 기억부터 떠올려보자. 중3때 반장이었던 나는 잔소리 심한 담임의 수업시간이면 반항한답시고, 일종의 미술의 역사 개략서인 교재를 읽곤 했다. 몰래 먹는 찹쌀떡처럼 야릇한 기쁨에 떨기도 했다. 고흐, 구스타프 크림트, 마티스, 뭉크, 마그리드, 자코메티를 통해 미술의 마력에 이끌렸고, 들판을 뛰어다니듯 자유한 미술세계의 신비한 매력을 맛보았다. 하지만 코믹하게도 미술대회마다 학교 대표로 나가 상을 타도 방학 때와 졸업 후에 후배로부터 상장만 전달받던 일이나 고1때 미술학원을 돌며 가격만 묻고 돌아온 쓸쓸한 날과 우리 반이 특별 구급반으로 뽑혀 미술반 가입 기회를 삭제당하는 등등 우울한 기억들이 참 많다. 예술가는 밥을 굶는다고 엄마는 미대 진학을 반대하셨고,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투사였던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의 반복으로 고단해진 엄마의 인생 앞에 미술대학 진학의 내 꿈은 사치였고 죄였다. 그러다 재수시절 엄마에게 떼를 써서 싸게 서양화과 입시를 위한 데생과 수채화를 배웠다. 낙방과 도전 끝에 응미 쪽에 합격했으나 반년 다니다 자퇴, 원하던 학교 진학에 실패한 4수생은 심각한 불면증을 얻어 병원과 성당을 오가며 13년을 죽을듯이 앓아봤다.
국문과 선택은 단지 내가 무식한 거 같아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인생에는 반드시 세렌티피티가 있다. 2학년 문예사조사 수업 때 바로크사조 발표를 준비하며 나는 ‘모든 예술은 한곳에서 만난다’ 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통섭에 감을 잡은 것이다. 이후 시, 소설만이 아닌 허버트 리드, 곰브리치 예술사……. 무엇보다 철학책은 필독서라 여겼으므로 쉬운 책부터 독파해나갔고, 전보다 더 열심히 전시장을 찾으며 카탈로그도 꼼꼼히 읽곤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니 보이더라. 예술이 먼지, 내가 뭘 해야할지. 이제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며 절망은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는 시작이라고 나는 간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지리도 불면증을 떨치지 못한 채,의원직을 딱 한 번 하신 아버지 덕에 취직하여 번 월급으로 판화 1년, 유화 1년을 배울 정도로 미술에 압도되는 애착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 31세 때 사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사진을 찍고싶은 갈망이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이번에는 사진에 미쳐서 어머니께서 해주신 아파트 전세비를 빼서 사진 공방을 다닐 때 새로 이사간 흉가 같은 데서 부들부들 떨며 살기도 했다.
낮엔 애들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고 틈틈이 시를 쓰고 밤에는 사진 공부하면서 3수 때는 지원 대학원을 바꿔 들어갔다. 사람이든 학교든 인연이든 금세 풀리더라. 편집증적일 정도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 방구석에는 아직 정리 못한 사진파일이 가득하다. 남은 어렵지 않게 입학하는 학교를 나는 왜 이다지도 지지리 힘들게 들어갈까. 나는 왜 이럴까, 회의하며 정말 남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눈물겹게 싫었다. 하지만 고뇌와 고통은 인생을 깊이로 파헤쳐가는 과정이며 기회였음을 이제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한다. 늘 내 인생의 표어처럼 냉장고 문에 붙여둔 마르쿠제의 글메모가 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부드럽게 가슴에 비쳐들지만 글은 예리한 문 모서리같이 슬쩍 가슴을 긋고 지나간다. “예술적 진실과의 만남이란, 일상생활에서 아직껏 느껴지지도 이야기되지도 또 들리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만드는 낯설음을 자아내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서 이루어진다.”
낯설음, 새롭게 하기. 예술에서 진정성과 함께 너무나 귀한 덕목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으나 새롭게 발견하는 시선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나는 세계 사진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사진 영상에세이를 세 권 냈다. 중앙일보에 1년5개월 연재를 다시쓴 현대 세계사진사를 주제별로 묶은《 나의 아름다운 창》 외에《 희망의 누드》《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이 있다. 또한 사진과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에《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이란 책도 낸 바 있다.)
우리 존재는 흐르는 물이며, 물고기며, 물풀이다. 예술은 그렇게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존재를 환기시키는 고민이며, 되살리는 기억이고, 그 기억을 담으려는 어항이다. 시와 미술, 사진의 어항 모습은 다르나 인생의 관점과 진실의 이미지를 다룬다는 면에서는 다 똑같다. 넉달 전에 쓴 내 시를 읊어보면 조금은 쉽게 가닿을지도 모른다.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시간에
죽은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떼를 품고 싶어해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우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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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은 시인이자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미술관련 저서로는 사진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희망의 누드》 미술 에세이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등이 있다. 사진작가로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사과밭사진전>등 3회의 사진전을 열었다. 2012년에는 울산국제사진 페스티벌 한국작가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고양이를 부탁해_고경원

고양이를 부탁해

고양이 전문기자 고경원

‘길고양이’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도시의 무법자, 혹은 달갑잖은 불청객. 언론매체에서 길고양이 뉴스를 다룰 때 묘사하는 방식은 대개 그랬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이 진실만을 기록한다고 믿지만, 어떤 관점으로 편집되느냐에 따라 사진의 메시지는 달라진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경험했기에, 부정적인 필터를 거쳐 편집된 길고양이가 아닌,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웹진 기자로 일하던 2002년 여름부터 길고양이를 찍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이다 보니 꼬질꼬질한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세상모르고 곱게 자란 집고양이보다 고단한 삶을 의연하게 이어가는 길고양이들이 내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기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동지를 발견했을 때의 연대감에 가깝다.
고양이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사진이 별 감흥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 사진을 찍는 이유가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길고양이의 삶을 더 생생하게 전하니까. 그리고 그 사진이 무심했던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거리의 고양이에게도 사연과 감정이 있고, 소중한 삶이 있음을 눈으로 보게 된다면 생명의 무게가 좀 더 묵직하게 와 닿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찍은 길고양이 사진은 1인 미디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공유되며, 단행본으로 제작되어 오프라인에서도 독자들과 만난다. 첫 책《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갤리온, 2007)를 펴낼 때만 해도 길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다룬 한국 작가의 사진 에세이가 전무했기에, 출판기획자로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보람이 있었다. 최근에는 지난 10년간의 길고양이 관찰기를 모아《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앨리스, 2013)을 펴내기도 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다양한 분야와 접목될 때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고양이와 여행, 예술 이야기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2007년 여름부터 ‘세계 고양이 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고양이 여행자의 눈으로 각국의 애묘(愛猫)문화와 고양이 명소를 소개하는 작업인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 여행》(아트북스, 2010)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공존’이라는 주제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일본 외에 타이완, 스웨덴, 프랑스 등 다른 나라의 고양이 여행기도 순차적으로 쓰고 있다.
spec12고양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 창작하는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세계를 알리는 것도 요즘 주력하는 일 중 하나다. 고양이를 사랑한 예술가의 작업실 탐방기《 작업실의 고양이》(아트북스, 2011)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순수예술 작가뿐 아니라 고양이 만화를 그리거나, 길고양이를 위한 제품 디자인을 하는 분들도 인터뷰하고 있다.
길고양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물운동가처럼 활동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고양이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꾸준히 한 목소리를 낼 때, 길고양이 문제는 동물운동의 영역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2009년 9월 9일에 시작한 ‘고양이의 날’ 기획전도 그런 마음을 담은 것이다.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민간 속담이 있지만, 그 말이 무색할 만큼 길고양이들의 삶은 짧고 고단하기만 하다. 1년에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생명을 생각하는 날이 있기를 바라며 9월 9일을 ‘고양이의 날’로 삼아 매년 기획전을 열고 있다. 9월 9일은 고양이의 강한 생명력을 뜻하는 아홉 구(九)와, 고양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오랠 구(久)의 음을 따 정한 날이다. 또한 동음이의어인 구할 구(求)의 뜻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자비로 진행하는 행사이다 보니 예산이 빠듯해 무상대관이 가능한 전시장을 섭외하는 게 가장 어렵지만, 올해도 뜻 맞는 분들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

고경원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2001년부터 웹진 및 잡지기자로 일했다. 2002년부터 여름 길고양이의 삶을 글과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고양이와 관련된 저서로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하다》 《고양이, 만나러갑니다-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여행》 《작업실의 고양이》등이 있다. 국내외 고양이 문화와 길고양이 이야기를 그녀의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블로그: http://www.catstory.kr/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_주영하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

민속학 교수 주영하

어릴 적에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사생대회에 나가서 제법 큰 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릴 적 일이지 대학원에서 음식의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미술은 추억이었다. 그런데 옹기 장인을 조사하면서 그들이 펼치는 미학에 빠져서 전국의 장독대를 뒤진 적이 있다. 아무리 사물이라도 자주 보면 더 자세히 보이기 마련이다. 매번 만나는 옹기의 문양과 형태를 필드노트에 그리다 보니 어느새 옹기 그리는 일은 밥 먹듯이 쉬웠다.
1990년쯤, 옹기 때문에 만난 그림이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다. 너무나 매력적인 기산 풍속화에 빠져들면서 먼저 옹기와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였다. 그것을 화집으로만 보니 옹기를 그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 제법 큰돈을 들여 몇 장의 기산 그림을 큰 그림으로 인화 하였다. 이것을 공부방 벽에 붙여 놓고 매일같이 내 얼굴 들여다보듯이 보았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다가 점차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나왔다. 바로 ‘독점’이란 화제의 그림이었다.
급기야 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어 옹기 장인을 찾아 나섰다. 마침 그해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충남 홍성 갈산의 고 이종각 장인을 알고 있던 터라 그 일은 쉬웠다. 이종각 장인도 처음 이 그림을 보고는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왔다. 가마의 제작과 창불구멍의 기능, 그리고 일꾼들의 역할 분담까지. 이 인터뷰가 바탕이 되어 나는 기산의 ‘독점’ 그림 하나를 가지고 200자 원고지 80매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오로지 백성을 배 불리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대안으로 음식을 다루었다. 비록 허균과 같이 전국의 맛있는 음식을 짧은 글로 적은 선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정(食政)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적어놓은 음식 관련 기록이 실제로 행해진 일인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실제로 행해진 것이라 해도 그 현장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2000년부터 다시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기산의 ‘독점’을 두고 했던 작업 방법을 떠올렸다. 먼저 중앙일보에서 펴낸《한국의 미-풍속화》편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고구려 때의 고분벽화는 물론이고 안중식의〈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까지 수십 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spec10이들 그림 역시 매일 거울을 보듯이 읽었다. 그래도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남의 밥그릇을 넘보는 듯하여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 대학 비문자(非文字) 연구센터(당시 상민문화연구소)에서 진행하던 기록화 자료 읽기 작업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그림 자료와 사진자료를 사료로 보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이용했다. 특히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일반 백성의 일상생활을 그림 자료를 통해서 읽어내는 작업은 마치 현장을 복원하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내의 한 식품회사 사보 담당자가 음식을 주제로 연재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 자료를 가지고 음식의 역사를 풀어보자고 응답했다. 그 편집자가 작명한 연재의 제목이 그 이후 단행본의 책 제목이 된《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그림 속에 음식 자체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화원들이 사진 찍듯이 그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상 식사 장면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러니 나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음식과 관련된 그림은 음식을 소비하는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현장감은 조선시대 음식사를 연구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다. 더욱이 음식의 색감은 그림 속에서 분명히 감지된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 그림 자료는 현장은 물론이고 음식의 색과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이해하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사료이다. ●

주영하는 1962년 경남 마산의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풀무원 김치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음식사를 접했다. 1993년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김치, 한국인의 먹거리-김치의 문화인류학》《음식전쟁 문화전쟁》《음식인문학 》《맛있는 세계사》 등의 저서가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감동으로 하나 되는 예술_권순훤

감동으로 하나 되는 예술

피아니스트 권순훤

피아노를 전공한 내가 미술가와 미술작품을 다루는 책을 쓰게 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다. 2007년 12월, 런던의 왕립음악학교에 시험을 치르러 간 나는 귀국 전 파리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술관 해설을 담당하는 ‘이용규’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그가 하는 일에 대한 관심보다 파리를 속속들이 아는 친구와 도시의 정취를 한껏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관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친구의 말에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했다.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과연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으로 작품을 보았다. 작품 감상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한 친구의 설명을 듣고 그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친구는 어떤 직업의 주인공을 그렸는지, 침대 위의 고양이가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림 속 주인공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그림에 담긴 사회적 분위기와 비판적 어조의 상징 등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고흐의 그림에 보이는 강렬한 붓터치는 고흐의 정신적인 압박감과 심신의 질환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르누아르 그림의 모델은 당시 르누아르의 애인이자, 로트렉과 다른 거장의 애인이기도 했던 누구였다는 점 등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무릎을 탁 쳤다. 클래식 음악도 이와 유사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이 있는데, 이를 공연에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이 여행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진행하게 된 공연이 ‘미술관에 간 피아니스트’였다. 훌륭한 프로듀서들과 함께 작업한 이 공연은 유료관객 매진이라는 즐거운 기록을 남기며 무척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미술관에서 얻은 감동이 클래식 공연장에서도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한발 더 나아가서 이 두 가지를 통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저서가 얼마 전 출간된《 나는 클림트를 보면 베토벤이 들린다》다.
spec5왜 클림트를 보면 베토벤이 들릴까. 나는 이 두 예술가가 가진 ‘미완의 사랑’에서 힌트를 얻었다.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베토벤과 줄리에타 귀차르디에. 클림트는 동생의 처형이던 에밀리 플뢰게와의 이룰 수 없던 사랑을 <키스>라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이 그림은 두 남녀가 절벽에서 불안하게 키스하는 장면을 담았는데 남성은 여성의 입술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볼에 키스를 하며, 여성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두 사람이 처한 당시의 상황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이 작품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감상자로서 예술작품을 느끼는 데 ‘감동하는 마음’이 중요하기에 감상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와 그가 작곡한 <월광 소나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베토벤이 당시 만났던 명문가의 소녀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와의 사랑의 감정이 녹아있는 곡으로 베토벤은 그 소녀에게 이 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당시 음악가라는 직업의 사회적인 위상이 귀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에는 힘든 위치였다. 월광곡에는 베토벤 스스로 명문가의 자제인 줄리에타와 정말로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음에도 경제적인 풍요, 사회적인 배경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여러 감정이 녹아 있다. 특히 1악장에는 이러한 베토벤의 암울한 정신적 고뇌가 녹아 있다. 그리고 이 곡이 완성될 때쯤 줄리에타 귀차르디에는 집안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여 다른 귀족과 결혼을 했다. 베토벤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3악장은 그 분노를 담아 작곡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3악장은, 과연 이 악장에 <월광>이라는 제목이 가당키나 한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든 예술은 ‘감동’이라는 조그마한 ‘점’이 되는 곳에서 최후에 조우한다고 말하곤 한다. 미술, 음악, 영화, 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의 최종 목표는 ‘감동’이다. 또한 그런 ‘감동’ 뒤에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작가의 삶과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미술 속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가의 삶을 떠올리고 음악인으로서 음악을 다양한 각도로 이해한 듯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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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훤은 피아니스트, 네오무지카 대표, 서울종합예술학교 겸임교수로 그의 이름 뒤에는 많은 타이틀이 따른다. 가수 보아의 큰오빠도 그의 타이틀 중 하나.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영국왕립음악원에 합격했으나 전문 피아니스트가 되기보다는 클래식 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선택했다. 다양한 장르 간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고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옛 그림은 나의 친구이자 멘토_손태호

옛 그림은 나의 친구이자 멘토

여행사 대표 손태호

꾸벅. 고개가 살짝 꺾이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지만 교실 화면에 떠있는 사진자료는 이내 초점이 흐려지고 만다. 점심시간 이후 오후 수업시간은 항상 이 모양이다. 졸음을 참으려 해도 자꾸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람” 눈을 비비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려본다. 4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다른 아빠들은 자녀 교육문제로 고민할 나이에 강의실에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지금도 그리 익숙하지만은 않다. 어린애들 손잡고 사적지나 문화재를 재미삼아 보러 다니던 내가 점점 옛 그림에 빠진 것은 30대 후반. 미술책에서만 보던 옛 그림을 간송미술관에서 직접 보면서 느낀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후 시간만 허락되면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 호림, 호암미술관 가는 것이 취미였고 옛 그림 전시회가 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지방까지 달려가 관람했으며 인사동, 북촌, 동대문, 장안동 고서화점들을 찾아가 그림 감상하러 왔다고 소장품을 보여달라는 뻔뻔함도 그 당시 새로 발견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며 너무 감동스러워 눈이 빨개지기도 했고 화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서 먹먹하기도 했으며 그런 감정들은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곤 했다. 지쳤을 땐 어깨를 툭 쳐주는 친구가 되기도 했고 소심할 때는 같이 용기 내서 앞으로 걸어가자고 손을 잡아주는 동료가 되주기도 했다. 게으르고 나태할 때는 회초리 들고 호되게 나무라는 선생이기도 했으며 온 세상이 회색으로만 보일 때는 손가락으로 멀리 아름다운 곳을 가리켜주는 멘토이기도 했다. 어느새 옛 그림은 나에게 그런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혼자 좋아 그림을 보러 다니면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스스로의 안목 부족을 절감하고 보다 전문적인 시각과 이론적 토대의 필요성을 느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 학교를 가는 야간 대학원이었지만 새로운 그 무엇을 배운다는 설레임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학교를 다녔다. 딱 반은 즐겁고 반은 힘겨웠던 석사과정 중 그림을 통해 느낀 감동을 한 편 한 편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서 벗들과 소통했던 글들이 어느새 제법 양이 쌓여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내 이름과 사진이 인쇄된 책을 받아들고 내가 너무 전문가 행세를 한 것 같아 조금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동안 그림을 보며 웃고 울고 감동스러웠던 순간들을 정리했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책을 출간한 후 여러 매체와 글로 인연을 맺기도 했고 저자와의 만남 형식으로 강연을 통해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하였다. 나로서는 참으로 예상치 못했던 도전이자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에 이젠 한술 더 떠 지금은 미술학과 박사과정에 도전 중이다. 굳이 박사과정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석사 때 공부했던 불교조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으니 미혹되지 않아야 할 나이라는 불혹이란 말이 참으로 무색하다. 일 년에 한 번도 미술전시회를 가지 않았던 30대 중반 시절부터 생각해보면 참으로 엉뚱한 길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에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는 본업인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고객들에게 세계 곳곳을 소개하며 그곳의 문화와 풍물에 대해 설명하고 상담을 한다. 여행업이 실제 출국하기 전까지는 말로 떠드는 서비스업이다 보니 늘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가 쌓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지근거리고 속상한 마음이 있어도 힘겹게 찾아간 심산유곡에 자리한 사찰에서 너무나 잘생긴 불상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옛 그림 전시회에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그림 한 점을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니 어찌 하겠는가. 늦깎이 학교생활도 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마어마한 학비 고지서를 보며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제외하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같은 관심사의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미와 여가활동이 다 있겠지만 그중에서 그림과 조각, 즉 미술을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여행과 운동은 좋아해서 여행을 다니거나 여러 운동을 취미로 여기는 것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동, 식물을 가꾸고 키우거나 장난감을 모은다거나 쇼핑이 취미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즐거울까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 나에게 안 맞다고 해서 안 좋다는 건 아니고 다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다.
오늘도 난 사무실에 앉아 이런저런 일로 씨름하고 있다. 조각과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딱딱한 일을 반복한다. 여행업이란 게 고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이란 사명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가끔은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자조감이 들기도 한다. 역시 즐기면서 하는 것과 해야 하기에 하는 일은 하늘과 땅만큼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조선후기 화가 조영석과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일하는 자의 모습에 고단함만 있는 그림이 어디 있는가? 윤두서와 윤용의 <나물 캐는 여인>에서 삶에 억눌린 기색이 어디에 있는가? 모두 힘겨운 노동 속에서도 땀의 신성함과 노동의 즐거움도 함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역시 옛 그림은 여전히 나에게 멘토이자 선생이다. 앞으로도 그런 옛 그림과 함께 잘 살아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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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찾다가 여행사, 항공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 인도 서역 전문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다. 2005년 간송미술관 봄 전시에서 단원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를 보고 우리그림에 푹 빠져들었다. 40대에 들어와 불교미술로 관심사가 넓어져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입학해 2011년 조선후기 조각승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불교미술과 조선회화를 쉽게 풀이하는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 blog. daum.net/thson68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미술은 이동한다_윤동희

미술은 이동한다

출판사 대표 윤동희

“회화는 이동한다.” 세계적인 출판사 리졸리(Rizzoli)에서 출간된 피터 도이그(Peter Doig) 화집에 서문을 쓴 리처드 쉬프(Richard Shiff, 오스틴 대학 모더니즘연구센터 디렉터)는 도이그의 그림을 이렇게 정의했다. 스코틀랜드, 트리니다드, 퀘벡, 온타리오에서 성장해 런던, 몬트리올, 트리니다드에서 작가 활동을 하고, 최근에도 런던과 캐나다를 오가며 작업하며 뒤셀도르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화가의 지리적 ‘이동’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수정되는 회화의 개념적·기술적 ‘이동’을 간파한 것이다. 쉬프에 따르면 ‘이동’에는 뿌리가 없고, 안정적이지 않으며 그에 따라 인내가 필요한 부정적인 측면과 변화하는 삶의 조건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한 몸을 이룬다고 한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drifter’를 피터 도이그의 정체성으로 바라본 그의 시각은 미술 안팎을 오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적잖은 위안을 준다.
미술이라는 우연 그리고 운명 그저 막연했다. 밀레니엄 맞이로 세상이 분주하던 시절, 1999년 여름, 낯선 곳에 도착했다. 《 월간미술》.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전문지. 대학시절 애독했던 잡지의 ‘기자(editor)’. 그때까지 미술은 내 시간의 바깥에 있었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 9번 출구를 나와 중앙일보 7층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을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다. 내가 있을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내내 이어졌다. 그래도 미술기자 생활은 즐거웠다. 가야 할 미술 현장도, 만나야 할 미술인들도, 써야 할 미술 담론도 넘쳐났다. 마치 미술기자를 하도록 각본이 짜인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이 내 안에서 솟아났다. “다음엔 뭘 해야 하는 거지?”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공부를 더해 학교에 자리 잡거나, 큐레이터를 하거나, 미술평론가로 살아가거나…….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으니 ‘다른’ 경로를 이야기해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시대는 탈경계를 넘어 ‘초(超)’경계로 나아가는데 미술은 미술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 삶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디자인에 바탕을 두고 책을 만드는 사람. ‘안그라픽스’에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학원에서 시각문화를 공부한 직후였다. 실리콘밸리가 세상을 주도할 준비를 마쳤고, 로버트 라이시(부유한 노예), 다니엘 핑크(프리에이전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세스 고딘(보랏빛 소가 온다), 말콤 글래드웰(티핑 포인트) 등의 ‘구루(Guru)’들이 새로운 삶과 노동, (기술)문화를 예견하고 있었다. 반면 미술은 젊은 작가 전성시대, 미술시장 전성시대, 한국형 팝아트 전성시대, 상업화랑 전성시대 등 난생 처음 찾아온 ‘호황’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미술은 진짜 미술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1960년대 이후 생산된 동시대미술은 그렇게 낡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미술로 향한 발길을 끊을 수 없었다. 미술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강의하고, 광주비엔날레 학술지 편집위원을 병행하고, 젊은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미술무크지.
《 debut(데뷰)》를 창간하며 버텼다.
장르의 경계, 분야의 이동 그리고 새로운 척도 미술기자 5년, 편집자 5년. 10년의 시간을 채우고 2007년 대형 출판사의 투자를 받아 ‘북노마드’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현재까지 130여 종의 책을 만들었다. 연예인 책으로 ‘대박’도 쳐봤고, 달콤한 (여행) 에세이로 지속 가능한 출판을 가능케 했고, 조금씩 미술, 디자인, 건축 곁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미술은 거품이 꺼진 미술시장을 빠져 나왔다. 많은 이가 위기라고 호들갑 떨었지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제부터 다시 미술을 이야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대신 미술이 아닌 것으로 미술을 이야기하자고 다짐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그래픽디자인, 기술문화, 인문학, 고전 등의 화두가 문화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디자인은 미학적 기능을 넘어 우리 시대의 중요한 틀을 형성했다.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가는 ‘제너럴그래픽스(문장현), ‘워크룸’(김형진 박활성 이경수), ‘슬기와 민’ ‘김영나’ 등은 인문학과 예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나아갈지를 아는 그래픽디자인의 ‘선수들’이었다. 그 곁에 전시 도록, 단행본 등의 형태로 문경원, 전준호, 정재호, 유근택, 이동기, 권오상, 문성식, 서용선, 김주현, 임근준, 정은영, 사사(44), 사무소(samuso), 플라토 등의 미술이 함께했다. ‘JOH&Company’의 조수용은 디자인을 플랫폼 삼아 기술문화(네이버), 건축(네이버 그린팩토리), 매거진(B), 외식문화(1호식)의 틀을 바꾸었다. 장르의 경계와 분야 사이의 이동은 새로운 장소와 척도에 적응하고 그것과 관계하게끔 영향을 미친다는 마리아 린드(Maria Lind, 스톡홀름 아트센터 관장)의 말이 옳았다는 것은 독립서점(북소사이어티, 유어마인드, 땡스북스, 가가린, 포스트 포에틱스)이라는 새로운 장소에 적응한 독립출판물들이 보여주었다. 이게 과연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호기심으로 바꾸어버리는 대안적 움직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미술이 다른 영역과의 접점을 모색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알렉스 콜스가 《 디자인과 미술》에서 정리한 대로 19세기 말 비평가 존 러스킨이나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윌리엄 모리스를 시작으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소련의 구축주의,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데사우 바우하우스 등) 그리고 장소-기능-미술 양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호르헤 파르도, M/M, N55, 토비아스 레베르거, 슈퍼플렉스 등 미술을 디자인세계에 팔고, 디자인을 미술세계에 판매하는 예술가들의 실천으로 이어져왔다. 네덜란드 디자이너이자 비평가인 키스 도르스트가 강조한 것처럼 미술과 다른 영역 사이의 경계는 단지 미술로부터 향하는 것이 아니라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이라는 이름의 통섭-융합-협업은 있었다.
자율과 대안이라는 이름의 통섭-융합-협업 최근 나는 또 다른 ‘일’을 저질렀다. 자율적-대안적 미술학교를 꿈꾸며 ‘a. school(에이스쿨)’이라는 소규모 미술학교를 꾸렸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미술대학(원) 학생들이 짝을 이루어 협업을 실천하는 ‘art duo(아트 듀오)’, 외부 전문가들을 모시고 학생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점검하는 ‘critic(크리틱)’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 작가들에겐 기획전을 열어주고, 미술평론가가 인터뷰 또는 비평함으로써 미술무크지《 debut》에 소개하고 있다. 이제 시작인지라 a. school은 아직도 자유파행(自由爬行) 중이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드넓은 대지에서 이리저리 굽이치면서 흐를 그날을 기대하며 지속하려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미술이 현실이라는 실재와 대면할 수 있는지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미술과 접속 가능한 또 다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조정해온(coordinating)’ 지난 시간의 출발과 끝은 결국 미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술의 영토에 머물 생각이 없다. 북노마드를 출판-디자인-미술-교육이 어우러진 ‘스튜디오’로 만들고 싶다. 물론 시대는 수상하기만 하다. 세상의 모든 분야는 ‘기업형’ 독과점에 넘어간 지 오래다. 하지만 내겐 그 사이를 비집고 자율적인 생존을 이어가는 각양각색의 스튜디오문화가 미술, 출판, 디자인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무모한 믿음이 있다. 나는 그 믿음을 믿으려 한다. 기술문화 잡지《 와이어드(wired)》를 창간한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궁극적인 디지털화로 인해 모든 분야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뀔 거라고 예견했다. 산업이든 예술이든 복제 가능한 것은 무료로 나눠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유연성과 분권화, 열린 마음일 것이다. 자신이 속한 특정 분야에서 전형성에 머물기보다 그것이 갖는 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그의 말에 밑줄을 그어본다.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에드 루쉐는 “자신이 전문 사진가로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구성을 만들려고 애쓴다”고 고백했다. 루쉐는 그렇게 함으로써 “눈에 띄는 스타일”을 이루어냈다. 이제 예술은 고유한 목적을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요소들을 배치해야 한다. 내용보다 인기와 상업성으로 일관하는 미술, 출판, 디자인,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술의, 출판의, 디자인의, 기술의) ‘문화’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늘 의심해야 한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이것은 출판이 아니라고, 이것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말이다. ●

동희는 연세대 영상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월간미술, 안그라픽스, 광주비엔날레 학술지 《눈(noon)》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세종대, 성신여대, 이화여대 대학원, 서울대 대학원, 인천가톨릭대, 동국대 대학원 등에서 미술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북노마드 대표, 미술학교 a. school(에이스쿨) 대표, 세종대 회화과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Art Journal

정부 지원에 힘입어 국내 미술시장에 봄바람 부나

제32회를 맞은 성황리에 폐막
1979년 시작해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아트페어 ‘화랑미술제’가 3월 5일부터 9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번 행사에는 화랑협회 소속 94개 화랑이 참여해 3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특정 작가의 작품이 여러 화랑에서 중복 출품되는 것을 방지해 미술시장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2013년 도입 시행된 ‘집중조명작가’ 제도는 화랑당 주력 작가를 3명으로 제한한 것을 올해 5명으로 늘려 컬렉터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줬다. 방문객 수는 지난해 보다 증가한 3만6000여 명을 기록했고, 다양한 작품들이 거래되어 총 620여 점이 총 37억 원에 판매되는 성과를 거뒀다. 30억8000만 원이었던 지난해 대비 20%이상 증가한 수치다.
한편 개막식에는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참석해 안창홍 의 <꽃>(2009, 왼쪽)과 강주영의 <향기- 떠다니기>(2013, 오른쪽)를 현장에서 구매해 미술시장 활성화에 앞장서려는 적극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총 1억 원의 예산으로 구매된 두 작품은 정부미술은행에 귀속돼 국가기관 대여에 활용될 예정이다. 정부미술은행은 정부 미술품의 전문적 구입과 국가기관 무료 대여 등을 통합한 제도로 올해 6억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유진룡 장관은 “미술시장 활성화에 정부도 힘을 보태겠다. 정부 미술품 구입규모를 점차 확대해 100억 원대로 끌어올릴 것”이라며 “정부는 미술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미술시장 중장기 발전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5월 중에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행사기간 중 ‘올해의 CEO 대상’을 수상한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이 ‘아트콜라보레이션-기업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윤 회장은 화랑의 뛰어난 감각과 인프라를 활용한 아트 콜라보레이션의 성공사례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국내 화랑에는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의 방법을, 기업에는 브랜드 가치 상승 방안과 새로운 투자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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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는 누구일까?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 <올해의 작가상 2014> 후보 작가로 선정돼

aj2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은 SBS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14> 참여 작가로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가 선정됐다. 오는 8월 5일부터 10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선정작가 전시에서 후보작가 4인은 각자 신작을 선보이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
전시작가 4인은 ‘올해의 작가상’ 운영위원회의 미술계 추천위원 10인에 의해 추천됐고, 이숙경 테이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센터 큐레이터, 이영준 계원예대 교수, 구로다 라이지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학예실장, 톰 트레버 전 아르놀피니 미술관장 등 5인의 국내·외 심사위원단의 스튜디오 방문과 인터뷰를 통한 심사를 거쳐 선정됐다. 전시작가에게는 SBS문화재단에서 제공하는 각 4,000만 원의 후원금이 제공된다. ‘2014 올해의 작가’ 최종 수상자는 전시기간인 9월 중에 발표될 예정이며, SBS를 통해 다큐멘터리가 제작·방영되는 혜택이 부여된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수상제도로 자리매김한 ‘올해의 작가상’은 제1회 때 문경원·전준호, 제2회 때 공성훈이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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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예술의 역할은?

<2014부산비엔날레> 주제 발표

aj3개막 200일을 앞두고 지난 3월 4일 <2014부산비엔날레>(9.20~ 11.22)를 관통하는 주제가 발표됐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본전시 감독을 맡은 올리비에 케플렝(Olivier Kaeppelin)은 ‘세상 속에 거주하기’라는 주제를 통해 “오늘날의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Voyage to Biennale-비엔날레 속의 한국현대미술 50년’을 주제로 기획되는 <비엔날레 아카이브展>은 부산문화회관 대전시실과 중전시실에서 개최되며, 이건수 큐레이터 (前 월간미술 편집장)가 전시 기획을 맡았다. 한편 또 하나의 특별전인 <아시안 큐레토리얼展>은 아시아 주요 도시의 젊은 기획자들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전시이다. 이외에도 다채로운 부대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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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가 11년간 테이트미술관을 후원한다

테이트모던 ‘터바인홀’ 전시 지원 및 백남준 작품 9점 구매

aj4현대자동차가 지난해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2014년부터 10년간 120억 원을 지원하기로 한 데 이어 지난 1월 20일 영국의 세계적인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Tate Muse-um)’과 향후 11년간의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테이트미술관의 원칙상 후원금액은 밝혀지지 않았다.
테이트미술관 니콜라스 세로타(Sir Nicho-las Serota) 총관장은 3월 7일 방한해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자동차가 백남준(1932~2006)의 작품을 9점 구매하도록 후원했으며, 테이트 모던 하반기 첫 전시로 백남준전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테이트미술관은 2010년 테이트 리버풀에서 백남준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소장한 적은 없다. 이번에 구입한 백남준의 작품은 <캔 카>(1963), <세 개의 달걀>(1975~1982), <오피스>(1990~ 2002) 등 1963년부터 그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백남준의 40여 년 작업세계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또한 이번 협정에 따라 테이트 모던의 심장부인 ‘터바인홀’에서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0년간 ‘The Hyundai Commission’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매년 가을부터 봄까지 열리게 된다. 터바인홀은 동시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는 국제적인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1층에서 5층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관통된 초대형 전시장이다. 아니시 카푸어, 루이즈 부르주아, 올라퍼 엘리아슨, 아이웨이웨이 등 세계 정상급 작가들의 전시가 이곳에서 열렸다. 세로타 총관장은 “특별 커미션 작가는 당해 프로그램을 발표할 때 공개한다는 테이트의 원칙에 따라 리스트는 공개되지 않지만 한국 작가는 1명 이상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작가로 첫 전시를 시작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각국의 미술계에는 알려져 있지만 세계 미술계에는 인지도가 낮은 작가를 발굴해 터바인홀 전시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시키겠다”고 말했다.
테이트미술관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총 네 개의 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테이트 모던은 연간 관람객 수가 500만 명이 넘는 세계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현대미술관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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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 작가 12명이 최고의 자산

갤러리 시몬 개관 20주년 기념전

aj5<시몬의 친구들>역량 있는 작가를 꾸준히 발굴하고 지원해 온 갤러리 시몬(대표 김영빈)이 올해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3월 20일부터 5월 9일까지 열리는 <시몬의 친구들전(Simon’s Friends)>에는 문범 배형경 노상균 강애란 최선명 권소원 김주현 황혜선 구자영 김신일 이창원 김지은 등 전속작가 12명이 참여했다. 갤러리 시몬은 1994년 개관년도부터 해마다 4월이 되면 ‘시몬의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작가와 화랑은 친구라는 개념으로 기획해 온 그룹전이다. 신사동 본점과 청담동 분점을 운영하던 ‘강남 토박이’ 화랑에서 2011년 종로구 자하문로에 건축가 유병안이 설계를 맡은 4층 건물을 신축해 활동무대를 옮겼다.
김 대표는 “미술시장이 불황이지만 큰 걱정 없다. 갤러리 20년 운영해서 12명의 작가가 남은 게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전속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작품을 보고 매혹되어야 한다. 작품과 인품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를 싫어한다. 작가의 인품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시퀸으로 작업하는 노상균의 별자리 형상 작품과 책을 소재로 빛과 기술을 이용한 강애란의 작품 등이 출품됐다. 김 대표는 “앞으로 젊은 작가를 계속 발굴해 전속작가를 늘리고 세계무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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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토론의 장

전국 미대 학장협의회 심포지엄

aj7전국미술디자인계열 학장협의회(회장 이순종, 서울대 미대 학장)는 미술과 디자인분야의 교육과 연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예술교육 연구 진흥을 위한 Art Korea(AK)’ 사업을 계획하고, 3월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조국가를 위한 예술교육의 미래’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예술교육과 연구 분야에 대한 국가 지원이 매우 미비한 수준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기조 발제 <창조사회와 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제언>을 시작으로 1부에서는 김성희 서울대미술관장의 <예술교육의 새로운 시대적 요구>, 하준수 국민대 교수의 <국내외 예술교육 연구 지원현황과 한국 예술교육 연구의 과제>, 2부에서는 최민영 성신여대 교수의 <창조국가 구현을 위한 AK사업의 제안> 등이 주요 발제로 진행됐다. 토론에서는 예술교육과 예술진흥을 위한 AK사업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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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벼랑에서 희망을 시작한다.

대안공간 힘이 기획한 지역협업전 <옥상의 정치>

aj17부산 수영구에 새롭게 자리 잡은 ‘대안공간 힘’이 ‘벼랑의 삶, 벼랑의 사유’를 주제로 지역협업전 <옥상의 정치>를 기획했다. 3월 14일 5개 도시(부산, 광주, 대전, 대구, 서울)에서 동시 오픈한 <옥상의 정치>는 옥상을 다루는 작업들을 통해 우리 시대 미술이 삶의 어느 지점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자 한다. 삶의 임계와 미술의 임계를 통해서 우리 삶과 미술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은 부차적 효과일 수 있다.
전시의 연장선에서 동명의 책《 옥상의 정치》가 갈무리 출판사에서 발간된다. 글쓰기를 통해서 ‘옥상’의 의미를 검토하고 도처에 펼쳐진 삶의 임계들을 통찰하려 한다. 삶의 경험 그리고 문학, 영화, 건축, 미술, 역사를 아우르며 동아시아적 맥락을 포괄하는 ‘옥상’을 통찰한다.
부산 전시는 권도유 김경화 김해진 노순택 박항원 방정아 서평주 은주 이영현 전이영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열렸다.부산=김은경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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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미술사에 끼친 효산의 영향력을 조명하다

<효산 이광열–필묵의 흐름전> 열려

aj8전북도립미술관 (관장 이흥재)에서는 <효산 이광열-필묵의 흐름전>(2. 21~4.20)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시서화 삼절에 능했던 효산 이광열(1885~1966)이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끼친 영향력을 명확히 밝히고 전북미술사에서의 위상을 정리하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1935년 호남지역 최초의 서예학원인 한묵회(翰墨會)를 결성하여 서화 발전에 힘썼던 효산은,《 전주부사(全州府史)》를 편찬해 전주 지역의 숨은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많은 작품을 남기는 등 작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향토사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면서 항일정신을 불태운 그는 글씨와 그림 (사군자)분야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1927년과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1930년에는 일본 교토문예전에 입선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효산의 서예, 문인화, 전각, 사료 등 100여 점을 비롯해 효산의 필묵을 이어받은 두 아들인 인당 이영균과 윤당 이기봉의 작품 30여 점, 특별한 인연을 맺은 고암 이응노(1904~1989)와 묵로 이용우(1902~ 1952)의 작품 등 모두 160여 점이 선보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효산과 교유한 묵로 이용우와 고암 이응노의 작품이 한 자리에 선보인다는 점이다. 효산은 17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묵로와 절친하게 하게 지냈다. 효산은 묵로의 작품에 화제를 써주기도 하고 서로 평생을 의지하며 생활했던 인물이다. 고암은 1928년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전주에 7년간 거주하면서 ‘개척사’라는 간판집을 운영했다. 이 당시 고암은 효산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 고암이 효산의 진갑을 기념하여 제작한 <묵죽> 작품이 최초로 공개되어 고암에게 효산이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짐작게 한다. 전주=최정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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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 대중화를 위한 미술박람회

<A&C Art Festival 2014> 열려

aj9한국미술평론지《 미술과 비평》이 주최하는 <A&C Art Festival 2014(이하 ACAF)>가 3월 15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이 후원한 이번 행사는 한국 미술시장의 대중화, 작가와 컬렉터 간의 교류를 구축하고 역량 있는 작가들이 국제무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올해 7회째를 맞이한다.
회화, 조각, 사진, 판화, 영상 미디어 작품을 망라하는 작가 공모를 통해 선정작가와 초대작가 총 120여 명이 참여해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동시대성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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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 짱돌을 쥐어라

프로젝트 스페이스 반야지에서 열린 여상희 개인전

aj10여상희의 7번째 개인전이 프로젝트 스페이스 반야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제도와 권력, 이데올로기와 전쟁 등 수많은 폭력에 대항하는 분노와 저항 등을 주제로 한 작업들로 구성됐다. 강렬한 색감의 극사실적 유기체를 다루던 이전의 작품들은 최근 큐브 등의 미니멀한 형태와 무채색의 설치작품들로 변모하고 있었다. 주된 매체로 사용된 신문지는 지난해 부산시청에서 열린 <한일 리싸이클링 아트전>에서 선보인 바 있는데, 신문지를 물에 담가 불린 뒤 틀에 응고시킨 작업들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전시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짱돌이다. 신문지를 일일이 만두 빚듯 손으로 꾹꾹 눌러 빚고 매끈매끈하게 닳도록 여러번 바닥에 문질러 동그스름하고 단단한 돌과 같이 윤을 냈다. 짱돌은 때론 저항의 상징으로, 때론 바둑돌과 같이 정치적 사회적 의도의 역학적 점유와 영역 표시, 즉 땅 따먹기를 은유한다. 신문지 역시 물에 풀어지고 문자가 해체되는 현상으로 권력의 옹호자 언론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바로 옆에 놓여있는 콘크리트 큐브들은 체스판을 상징하며 같은 맥락의 영역 찾기 게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한편, 전시장 입구에는 작은 원뿔, 큐브 등의 입체모형들을 방사형으로 쌓아올리고 가운데 동그란 등을 낮게 달아 마치 원자폭탄을 맞은 히로시마처럼 파괴, 소멸되고 재생되는 도시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설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한 도시파괴를 재현하였다. 이것은 또 다른 작은 방안에 있는, 책《 집단 기억의 파괴》와 함께 놓인, 건물이 분진을 일으키며 붕괴되는 모습의 드로잉이나 모형들과 같이, 한 집단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그 속에 담긴 가치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파괴자의 도시학살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들이다.
여상희 작가의 독립자생공간인 반야지의 이번 전시는 기획 의도부터 전시 형식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고정관념 비틀기를 표방했다. 전시기간을 ‘3월’로만 정해 전시시작과 마침의 날짜를 없앴으며, 홍보는 인쇄 매체없이 SNS만을 활용하는 자율적 운영을 시도했다. 작가로서 운영자로서 여상희의 작업 근간은 미술과 사회, 예술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의지와 신념으로 읽힌다. 그것이 끊임없이 그 접점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다음번 선택을 벌써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대전=이정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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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없는 인간과 풍경에 대한 탐구

이상국 화백 별세

aj11소시민의 생활상과 자연풍경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표현해 온 이상국 화백이 3월 5일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7년 전 대장암 판정을 받은 고인은 투병 중에도 작품 활동에 매진했으며, 2011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 이어 지난해 가을에는 관훈동 나무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고인은 1970년부터 약 40여 년간 투박하지만 절제된 조형언어의 그림과 목판작업을 고집했다. 그의 작업의 주제는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풍경’이었다. 삶의 현장에 다가가 <산동네>, <공장지대> <맹인 부부 가수> 등 암울한 시대상을 그려내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산>과 <나무> 시리즈 등 굵고 거친 선과 제한된 색을 통해 자연의 생동하는 기운을 신명나게 표현했다. 고인은 한때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한 바 있지만 미술사의 흐름이나 사조에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천착해 한국적 정서와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 점을 높게 평가받아 2011년 제12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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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 허수아비 철학

서양화가 남궁원 개인전

aj14‘허수아비’라는 인간 대리역을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을 탐구한 서양화가 남궁원의 개인전 <2막1장-Fantasy of Husuabi>(3.19~27)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약 2년간 작업한 회화, 디지털아트, 설치미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의 ‘허수아비 철학’을 심도 있게 표현했다. 허수아비란, “허(虛)- 비움과 나눔, 수(守)-지킴, 아(我)-키움, 비(非)-세움”의 철학을 뜻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지난 44년간의 교직생활을 뒤로 한 채 40여 년간의 작품세계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작가인생을 연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100여 점의 작품을 독도수호기금으로 전달함으로써 의미있는 나눔활동을 펼친다.
남궁원은 가천대학교 회화과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남송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다. 2009 성남시문화상, 2010 문화예술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3 황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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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골목에 담긴 시간의 흔적

제이 안 개인전

aj12오랫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뉴욕을 비롯한 유럽 대도시 거리의 분위기를 독특한 색채감각으로 담아 온 사진가 제이 안의 5번째 개인전 <청계천- 기억될 시간들>이 3월 19일부터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렸다. 작가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청계천 공구상 골목의 독특한 정서와 풍경을 자신만의 색채감각으로 표현한 사진을 선보였다. 사진평론가 김승곤 순천대 교수는 “제이 안의 멈춰선 시간에는 빛과 그림자와 색채가 빚어내는 초현실적인 광경이 민감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적인 조형과 화려한 색채를 가진 도심의 번화가가 아닌 청계천의 뒷골목을 누비면서 이제 곧 사라져 볼 수 없게 될 공구상 거리의 사람 냄새와 이야기를 오랜 세월 그곳에 켜켜이 쌓여서 높은 밀도로 응축된 시간의 흔적으로 담아냈다.
제이 안(안정희)은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동양방송(TBC) 아나운서, 뉴욕 한미방송 아나운서를 했다. 현재 한국여성사진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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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도의 현대적 의미

라오미, <제1회 KOTRA 한류미술공모전> 대상 수상전 열어

aj16서양화가 라오미의 개인전 <행복의 진화>가 KOTRA 오픈갤러리에서 3월 5일부터 26일까지 열렸다. 작가는 지난해 4월 시행된 <제1회 KOTRA 한류미술공모전>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며 이번 전시에는 수상작인 <십장생도 – 복 짓는 길>을 비롯해 십장생도를 다각적으로 해석한 회화작품 13점을 선보였다. 라오미는 “동양의 유토피아를 담은 십장생도를 통해 현대인이 갖는 불로장생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 전시장 전면에는 십장생과 십이지 모양의 전통 나무인형 ‘꼭두’ 150여 개로 채워진 <백수백복도 (百壽百福圖)> 아트월이 설치됐다. 작가가 ‘한류 문화체험 문화교실’을 두 차례 진행하면서 다문화가정 어린이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라오미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인도 뉴델리 한국문화원 오픈 아트월과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외벽에 작품을 설치한 바 있으며, ‘인터파크 아트월 프로젝트 NO.1’ 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주관 아트키스트(ART KIST) 레지던시 1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