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완 –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이완 –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3.7 – 4.5

사루비아다방에서 개인전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가 열리기 한 달 전 이완은 다음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제 작업에 관심있거나 참여할 의향이 있는 분은 참여 의사를 제 페이스북 메세지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먼저 일러두어야 할 참여 조건이 있습니다. 참여자 개인당 들어가는 제작비용 20만 원 중 15만 원은 참가자 개인부담으로 책정했고, 나머지는 제가 부담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제작된 작업은 원목 수공 의자의 형태가 될 것이며 전시 후 참여하신 모든 분께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이완은 페이스북을 통해 모집한 30명의 참여자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1cm를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작가는 제각각 인식하는 1cm를 기준으로 1m 길이의 자를 만들고, 이 자를 이용해 ‘같은 수치’를 지닌 ‘다른 크기’의 의자를 제작했다. 또한 참여자에게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그들의 답변을 인터뷰 영상으로 제작하였다. 이 인터뷰에는 각자가 인식하는 다른 크기의 1cm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답변이 쏟아진다. 관객은 같지만 다른 크기의 의자에 앉아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을 듣는다.
<사회참여예술>은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하는 방법을 실험하는 행위예술의 하나이다. 이완의 이번 개인전은 사회참여예술이 만들어지고, 전시되며, 공유되는 규격화된 방법을 차용한다. 참여자를 페이스북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모집한다. (그들에게 명확한 금전적 참여조건을 제시한다.) 참여조건에 동의한 이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반응의 결과물은 작가의 작품으로써 전시된다. 이들은 제각각 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참여가 ‘예술작품’이 되는 과정을 정서적으로 경험한다. 또한 해당 경험에 대한 약간의 저작권을 주장하며 결과물의 일부를 소장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한국 근현대를 상징하는 작가의 수집품이 진열된다. 대통령의 회고록과 시계, 김정일 사망 소식이 담긴 신문 등 다양한 한국 역사의 흔적을 작가는 선별하여 전시한다. 공인의 기록물이나 언론매체가 다루는 역사라는 객관화된 시점과 그 시대상을 수집하여 진열한 작가라는 개인의 주관적 기억은 대비된다. 이완은 이번 전시를 ‘네이션(nation)’이라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고, 형성된 집단의 개별주체들의 주관성은 그들이 동의하고 있는 객관적 기준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실험이라고 소개한다.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국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국민을 의미한다. 네이션은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인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계 외부에 위치한 참가자들과 협업하여 예술 밖 네이션과 예술 안 네이션의 구분과 정의를 질문한다.
이완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억하는 객관적 관점과 주관적 관점을 대비한다. 대비의 과정에 ‘우리’를 이루는 구성원이 참여하며, 그 결과물은 공유된다. 작가는 예술 밖 개인의 예술 참여나 교류, 협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양식과 객관적 기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양지윤・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큐레이터

[Review] 최소한의 최대한

최소한의 최대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2.28 – 4.27

‘최소한’이라는 표현은 늘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단어다. 미술에 있어 특히 그렇다. 미니멀리즘과 같이 재료의 사용이나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던 움직임이나, 미시세계에 대한 관심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다. 헤이리에 위치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에서 열린 <최소한의 최대한>은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최대한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작가 3인의 작품세계를 조망한 기획전이다.
전시에 소개된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회화의 범주 안에서 ‘최소한’이라는 개념을 나름의 조형어법 아래 진지하게 탐구한 결과로 보인다. 우선 이강욱은 세포처럼 작은 입자들이 나름의 질서아래 화면 곳곳에 집적되어 있는 모습을 통해 전체와 부분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고찰한다.
그의 작업은 언뜻 최소한의 선과 점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보인다. 하지만 캔버스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전후의 깊이감과 시간성, 미디엄으로 마감된 표면 아래 자리한 미세한 이미지가 빛의 산란현상으로 인해 무한반복, 확장되는 모습은 그의 작업이 결코 구체적인 대상의 표현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확장된 시공간 안에서 대상화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거시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정승운의 <공제선>은 가늘고 긴 실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수차례 물감을 쌓아올린 후, 벽과 벽 사이를 가로지르도록 설치하여, 전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현수선을 만들어낸 작업이다. 작가는 최근 몇 년간 <공제선> 연작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대상이 만나 만들어내는 경계면을 다양한 조형어법으로 노련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얇은 실 위에 얹혀진 물감층으로 최소한의 양감과 적당한 무게감을 만들어, 백색의 공간 안에서 유려한 곡선들이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늘어진 풍경을 연출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공제선의 추상적 이미지는 백색의 공간을 배경삼아 허공에 그린 커다란 색선의 드로잉과 같은 효과를 전달한다. 주어진 공간에 감각적으로 개입하는 그의 감각적인 면모와 회화적 표현에 대한 작가의 오랜 성찰을 다시금 환기시킨 작업이다. 이강욱과 정승운이 회화적 물성을 바탕으로 한 최소한의 표현에 집중했다면, 오윤석은 삶의 기억 속에 자리한 구체적인 형상들을 지워나가면서 결국엔 본래의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든 단색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의 회화에서 보는 이가 얻는 최소한의 정보는 알 수 없는 글자나 표식으로 뒤덮인 화면, 혹은 그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얼룩 같은 이미지의 흔적들이지만, 그가 만든 회화의 표면은 작업과정을 역방향으로 기록한 4분33초의 영상작업에서 보듯이 삶을 성찰하기 위한 일종의 수행처럼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획득해 나간다.
최소한 혹은 최대한이라는 표현은 그 범위와 대상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전시는 3명의 작가가 경험한 세상의 모습을 각자 나름의 가장 압축되고 정제된 형식으로 시각화하여 성찰하는 방식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추상적 경향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황정인・독립큐레이터

[Review] CLOSE-UP

CLOSE-UP
두산갤러리 3.5 – 4.12

‘본다’는 것은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보는 방법’은 세상을 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보는 방법, 관점을 다르게 하면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보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다른 감각으로 보고 느끼게 한다.
익히 알다시피 유승호와 함진은 작품을 ‘가까이, 자세히 보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놓쳐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작가들이다. 지난해 두산 레지던시 뉴욕에 참여했던 이 두 작가의 전시 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만들어낸 세상, 마치 팽창하는 우주에 빨려 들어가는 지각을 경험하게 한다.
유승호와 함진은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는 유사한 보는 방법으로 큰 것과 작은 것, 밖과 안, 전체와 부분, 나와 너, 그림과 글씨처럼 상반된 것들의 조합에서 오는 메타포, 경계의 불분명함에서 오는 보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함진은 군집된 작품들로 전시장을 원시 정글로, 또는 행성들이 생성되는 우주공간으로, 생명이 태동되는 공간으로 펼쳤다. 전시장 전체에 유기적으로 설치된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작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린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것에서부터 어떤 형태인지 불분명한 것들이 존재하며 전체와 부분, 형상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다.
또한 유승호가 펼쳐내는 세상 역시 전혀 다른 것들이 공생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림이 품고 있는 글씨, 서로 전혀 다른 언어이지만 둘이 엮어내는 세상은 하나이다. 마치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이물질인 박테리아가 나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물질에서 생명체가 생겨난 것처럼 유승호의 그림들은 글씨에서 그림이 생성된다. 그림은 글씨의 의미를 형상화하여 글씨로 순환된다.
작고 하찮은 것들은 변화하고 변신하며 서로 공생하면서 지구를 생성, 변화시켰던 것처럼, 적대적 생물종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생물종이 되었던 것처럼, 유승호, 함진의 작품은 그 작고 하찮은 것들이 공생하여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린 마굴리스가 “미생물은 우리들 속에서 생존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그들 속에 살고 있다”고 했던 것처럼, 지구 생명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물들이다. 그래서 작고 하찮은 것들은 가장 작으면서 동시에 가장 크다. 유승호, 함진이 의도하는 바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마이크로코스모스, 다른 것들이 공생, 공서하는 세상을 가까이 자세히 보자는 것이리다.
이번 전시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전의 성격을 띠지만, 유승호, 함진이라는 기발한 두 작가의 조합이기에 꽤 많은 기대를 했다. 그렇기에 두 작가의 작품이 단순히 기계적 방식의 조합으로 전시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가 빚어낸 경이로운 세상을 다른 지각으로 경험하게 하는 마이크로코스모스는 여전히 경이롭고 아름답다.

박수진・복합문화공간 에무 디렉터

[Review] 센서십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센서십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대안공간 루프 2.13 – 3.21

아시아 12개국에서 21명이 보내 온 영상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검열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밖으로든 안으로든 ‘검열’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과 그런 현실의 이면에 도사린 권력·욕망·학살·자본·공포 또는 무관심·관음증·거리두기에 대해 다룬다. 영상이 현실을 반영하는 미디어라면, 그 내부에서 퍼포밍하는 예술가의 정체성은 고발자이거나 풍자를 다루는 광대이거나 혹은 진실 고백자들이다. 고발과 풍자, 고백의 언어는 그러므로 미디어의 이면에서 공명하는 카오스에 가깝다.
한 작가 한 작품의 언어는 오직 하나의 개념을 검열의 공명언어로 타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징후들과 1세기>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솜폿 칫께손퐁은 <질병과 100년의 세월> (2008)을 제작했는데 그는 <징후들과 1세기>에서 검열로 삭제된 6편의 장면을 모아서 다시 서사를 부여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상황도 불순해 보이지 않는 영상들이 왜 검열을 받고 삭제당해야 하는지를 듣는 과정에서 관객은 소름 돋게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유란 것들을 보면 1960~70년대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던 대중가요에 대한 검열요인들처럼 그것은 매우 가벼운 키치적 냉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독재)권력이 행한 검열놀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전시 <검열>이 던지는 충격은 작품들이 현실의 사건들로부터 미학적 사건을 전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마디로 출품작 모두 작가들이 살았던/살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미학적 리얼리티를 뿌리로 하고 있다.
예컨대 타이완 작가 두페이스의 <위산(玉山)에서의 모험>이 1947년 2・28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면, 캄보디아 작가 크바이 삼낭은 <뉴스페이퍼 맨>을 통해 프놈펜의 벙칵 호수 개발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낭은 대대로 호숫가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4000여 가구의 삶을 내쫓고 호수를 매립한 대기업의 ‘개발 폭력성’을 이야기한다. 중국의 페이준은 게임의 인터페이스 기능을 차용해 만든 에서 소통의 공론장 문제를 공론화한다. 민주주의의 공론장을 허락하지 않는 중국 정부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조차 검열해 온 지 오래다. 중국의 그런 현실을 인지한다면 페이준이 펼치는 게임 인터페이스 상의 ‘민주적 수다’가 무얼 뜻하는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보여주는 루양의 개구리 춤은 더 충격적이다. 그는 해부학 실험실에서 구해 온 개구리 사체에 센서를 부착, 비트에 맞춰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형국을 재현한다. 뇌와 몸통의 일부가 없는 이 잔혹한 날몸뚱아리가 추는 춤이야말로 통제사회가 요구하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일본에서 온 는 후쿠시마 원전의 이야기다. 원전건물 안으로 들어간 한 사내가 CCTV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통제된 그곳으로 들어가서 카메라의 눈을 직시하며 손가락을 치켜 든 사내. 익명의 이 사내가 펼치는 행위는 검열과 통제의 위험사회에 대한 ‘맞짱’일지 모른다.

김종길・경기문화재단 기획팀 뮤지엄운영파트장

[Review] 이상원 – THE MULTIPLE

이상원 – THE MULTIPLE
영은미술관 3.1 – 30

이상원은 2006년부터 일상에서 사람들이 여가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의 작업에서는 공원에서 걷고 뛰는 사람들, 스키를 타는 사람들, 수영을 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여가활동의 종류는 다르지만 스키나 수영, 걷고 달리는 사람들은 지역이나 시간에 관계없이 서로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상원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여러 사람이 취하는 공통된 자세와 행동을 패턴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있는 군중의 모습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단편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제목인 ‘multiple’은 이런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인물의 집합을 보여주는 소재적 측면과 함께 최근 이상원이 집중하는 회화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의미한다. 이상원의 초기 작업에서는 여가활동이 벌어지는 장소가 화면의 큰 부분을 구성하고 여가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화면을 구성하여 행위의 주체인 사람들은 아주 작게 표현되었다.
초기 작업들과 달리, 최근 작업에서는 인물의 행위 자체에 좀 더 주목해 행동양식의 공통점을 찾고 이를 회화적으로 실험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는 1년간 프랑스, 이탈리아, 한국의 다양한 장소와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관찰한 작업이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수채화로 그린 작은 종이 작업 100여 장이 서로 조합되어 커다란 해변을 이룬다.
이 해변의 풍경은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서로 다른 장소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로 구성된다. 그리고 해군 병사들이 모여있는 <사열>은 스티로폼으로 만든 형상을 나무판 위에 찍고 모자와 손 부분만을 덧칠한 방식으로 제작됨으로써,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은 사라지고 해체되어 전체적인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색과 형태로 재조합된다.
역시 인물들이 더욱 단순화되어 간략한 형태와 색채로만 표현되고 원근감 없이 화면의 모든 곳이 균일하게 채워지면서, 인물들의 모습과 행위는 회화적 실험의 구성요소로 변화하게 된다. 화면 안에서 이루어진 회화적 실험은 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실험으로 확장된다.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해변에 모인 사람들을 담은 이 작업은 거의 동일한 풍경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린 4개의 작업을 같이 전시되어 이상원의 다양한 시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특히 전체가 균일하게 표현된 화면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도록 바닥의 낮은 좌대 위에 놓은 작업은 평면화된 화면을 그가 불꽃축제 현장에서 실제로 보았던 시점과 유사한 시점으로 보게 만들면서, 회화로 구성되기 이전에 그가 관찰했던 시점을 전시장 공간 속에 되살리고 있다.
그동안 이상원은 회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영상, 설치, 공연 등으로의 확장을 통해 다양한 회화적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상원이 그간 지속해 왔던 다양한 회화적 실험의 양상을 보여주면서도 대상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언어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한다. 

정진우・두산갤러리 큐레이터

[Review] 조해영 – CINNABAR GREEN DEEP

조해영 – CINNABAR GREEN DEEP
갤러리 비케이 2.18 – 3.23

조해영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풍경이 연상되는 초록색(전시제목도 cinnabar green deep)을 변주한 작품들이 펼쳐져 있다. 좀 더 유심히 보면 이 초록색의 화면들은 몇 가지로 나눠지는 다른 질감과 표면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한 작품이지만, 조금은 이질적이고 다른 분위기의 화면을 보여주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채집한 각각의 풍경을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작가가 풍경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낯선 공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신과 외부환경이 서로 확신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지각이나 판단이 매우 불완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지만, 좀처럼 확신할 수 없는 대상으로써 ‘장소’를 선택하게 되었다.
작가가 이러한 장소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일견 풍경처럼 보이지만, 어떤 장소 일부분을 절취하여 그 표면을 다루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선택한 대상이 실재하는 장소이지만 어떤 시간과 공간을 연상시키거나 인식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나 상황을 담지 못하게 하려고 선택한 방법이다. 즉 공간적 특성이 드러날 만큼 화면의 프레임이 충분히 넓지 않게 구획을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잔디 운동장의 일부만을 잘라 내어 격자만이 보이도록 하고, 그 부분조차 도식적인 이미지로 공간이 풍기는 개성을 지워 흐릿하게 한다.
이미지의 경계면을 잘라 대상을 다루게 되면 구체성을 인식할 수 없게 되고 답답함과 낯섦으로 장소의 표면이 화면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결국 색면으로 재구성되고 표면이 강조되면서 패턴화되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어디에라도 있을 것 같지만 생경한 풍경(의 표면)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각각의 기억 속 장면으로 다시 화면을 유추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화면의 바깥으로 밀려나간 숨은 장소의 기억과 서사가 추상화된 표면을 통해 주관적인 시선을 주고받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임종은・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큐레이터

[Review] 네오산수

네오산수
대구미술관 2.11 – 5.18

동양에서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산수화는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소재를 넘어서 그리는 사람들의 정신적 자세가 집약된 전통이다. 옛것이 현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고 박물관 속에 있으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전통은 과거가 지금 일상 속에서 계속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컨대 우리 일상에서 멀어진 한복은 하나의 의례로만 존재할 뿐 더 이상 전통이 아니다. 산수화는 어떤가?
산수화가 예술체계 속에서 전통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 제도와 정신이 온전히 이어지는 것이지, 장르적 양식이 교조적으로 보존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 생각도 틀리지 않다고 본다. 산수화뿐 아니라 예술 전체에 관해서 우린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산수화 개념을 엄밀하게 정해진 기준보다 훨씬 넓게 잡는 쪽이다. 그런데 대구미술관의 <네오산수전>은 이 도식 안에서 애매한 지점에 있다.
전시 제목이 ‘새로운(neo) 산수’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지난 것도 있단 말이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형식을 중시하는 정통적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게 아닌가? 이 전시는 새로운/낡은 도식으로 평가되는 현대미술의 언로 안에서 새로움을 선언한다. 마치 ‘새 정치’가 부동층에 속한 유권자를 향한 수사적 용어인 것처럼, 새로운 산수는 정통 산수화를 고수하려는 진영과 형식 실험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의 진영, 두 편에 속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는 참신한 표제로 다가설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미술관이 품어야 할 한 가지 미덕은 충족되는 셈이다.
그래도 논의할 주제는 남는다. 새로움에 의해 작동되는 현대미술 속에서 이미 존재하던 ‘새로운 산수화’와 ‘새로운, 새로운 산수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만약 있다면 그 차이는 뭘까? 전시에 참여한 31명의 현대미술가는 그 재진입(re-entry)의 체계 질서를 극단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작가들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네오산수전>은 현대의 과학·기술로 인하여 크게 바뀐 인간의 미적 태도를 끌어들인다. 인공과 자연의 대립 구도 또한 전시에 출품된 뉴미디어나 형식 실험 미술이 굳이 아니더라도 예술사에서 오래된 가정이다. 이처럼 고전적인 예술의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다.

윤규홍・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 예술사회학

[Review] 달의 변주곡

달의 변주곡
백남준아트센터 2. 26 – 6.29

백남준의 1965년 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이울어가는 모습을 12개의 TV로 재현한 작품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달은 예나 지금이나 ‘원격시(遠隔視)’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무엇보다도 달의 특성은:1)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그것을 볼 수 있고, 2) 끊임없이 변화하며, 3)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지구의 생명은 달의 영향으로 생겨나고 진화했다. 그것이 조석간만을 통해, 순환의 주기를 통해 지구의 표면을 휘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운동성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비약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백남준이 달을 떠올리면서 그것의 모습을 일련의 연속사진으로, 아니 연속 비디오로 다루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순환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실제의 달을 촬영한 것이 아닌, 진공관 TV에 자석을 대거나, 구형으로 생긴 물체를 촬영한 것이다. 이번 <달의 변주곡>에 전시된 작품은 2000년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1997년에 제작된 비디오가 추가되어 총 13개의 TV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기획자인 이채영 큐레이터는 달의 ‘느린 시간성’에 방점을 찍었다. 달은 지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차고 이지러짐 자체가 한 달이라는 시간대를 주기로 느리게 전개된다. 이러한 느린 움직임은 특정한 시간적 한계점까지 지연이 이루어질 때 시각적으로 대상이 정지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달의 스펙터클은 그것의 정지 혹은 극단적 느림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가시-하 지각(infra-percep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review2ok이번 전시에서 특히 놓쳐서는 안될 작품은 벨기에 출신 다비드 클라르바우트(David Claerbout)와 히라키 사와(Hiraki Sawa), 그리고 안규철의 작품이다. 다비드 클라르바우트는 2012년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전시된 2013년 작 에서도, 한 장의 사진을 수많은 각도에서 본 입체적 이미지로 바꾸기 위해 그는 각각의 인물들을 25개의 이미지로 재촬영하여 같은 공간 안에 재구성해 넣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매우 느리게 움직이면서 한 장면을 바라본 것과 같은 동영상이 만들어지는데, 클라르바우트는 여기에 시선의 추상적 이동이라는 섹션을 추가함으로써 매우 형이상학적인 시선을 만들어냈다. 비를 피해 모여 있는 인물들의 군상을 떠나 비에 잠긴 흙탕길을 따라 이동하는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근원적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세계의 물질성을 보여준다. 느린 움직임을 통한 또 다른 작품인 은 처음부터 끝까지 디지털 기법으로 그려낸 가상적 풍경의 가상적 조합으로 이어지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수작이다. 느린 카메라의 이동을 따라 배경음악과 함께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자연의 풍경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클라르바우트가 ‘시간의 단면’을 다루기 위해 스틸이미지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히라키 사와의 2007년 작 역시 이 전시의 중요한 부분이다. 총 6개의 패널 위에 투사된 사와 특유의 굵은 입자(grain)들로 이루어진 영상들은 각각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낡은 벽시계 위에서 현재의 시간을 보여주는 <파편> 외에 짙은 흑백영상들로 이루어진 <새와 바다>, <이끼>, <벽에게 말을 걸다>, <순간을 위하여>, <돌아오는 길> 등의 제목이 달려 있다. 극도로 아름답고 시적인 풍경이나 적요한 실내장면을 보여주는 뒤의 5개 영상에서는 언뜻언뜻 풍경 속에 원자력발전소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중에 일어날 3·11 재난을 놀랄 만큼 묵시적으로 예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상작품은 실제로 사와의 고향을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듯한 시간의 흐름은 이 작품에서도 대기 속에 가득 찬 흐릿한 입자(particle)들로 흩어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규철의 설치작업들 가운데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2014년 작 <달을 그리는 법>은 이 전시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밝은 전시장 안에서 여러 개의 둥근 거울을 이용해 조명을 반사시켜 한곳으로 모은 결과, 벽 위에는 예민하고 둥근 달 모양의 빛이 떠오른다. 이 시적이고 아름다운 설치작품은 그 간결한 형식만큼이나 뚜렷하게 달 모양의 빛을 한곳에 중첩시키는 작업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느림은 여기서 이 중첩의 퍼포먼스를 가리키며, 동시에 여러 개의 레이어로 이루어진 달빛의 흐릿함 속에도 깃들어 있다. 전시장 야외의 잔디 위에 파란색 글씨로 크게 쓰인 는 전시기간 중에 자라게 될 잔디에 덮여 서서히 사라진다고 한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선언된 파릇한 ‘새로운 삶의 첫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봄날의 아름다운 생명감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선언이 삶으로 변해가는 느린 시간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역시 안규철의 시각적 시(詩)세계를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외에, 료타 쿠와쿠보의 2013년 작 는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선보인 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세권의 장기 프로젝트인 <서울 뉴타운 풍경> 연작은 전시 주제를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작품의 해석을 시도했다는 장점을 보여준다. 조소희의 설치작품들 가운데에선 <비과학적인 촛불의 시학 II>가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의 지각을 손에 잡힐 듯 보여주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달의 변주곡>은 주제의 해석만큼이나 개개 작품의 적확함과 수월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롭게 느끼게 하는 전시라고 하겠다. 

유진상・계원예대 융합예술과 교수

Preview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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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 2014 The Whitney Biennial -3명의 큐레이터, 3개의 전시, 하나의 비엔날레

서상숙  미술사

1932년 시작, 2년마다 열리는 휘트니비엔날레 제77회 전시가 지난 3월 7일부터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휘트니미술관에서 개막해 5 월 25일까지 계속된다. 마셀 브루허가 설계한 현재의 빌딩에서 열리는 마지막 비엔날레로 개막 3일 전에 있었던 프레스 프리뷰에서 미술관 직원들은 물론 작가들, 그리고 그 건물을 드나들며 취재를 해왔던 전 세계의 기자들 모두가 미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앞장서서 지켜보았던 휘트니미술관과 비엔날레에 대한 경의와 향수를 표했다. 비엔날레의 도록 표지도 휘트니 건물의 외벽에 물감을 칠하고 종이에 문지른 프로타주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미술관은 현재 맨해튼 다운타운 미트패킹 디스트릭에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짓고 있다. 2015년 완공 예정인 이 건물에서 다음 비엔날레가 열려야 하지만 공사의 진척 상황에 따라 계획할 예정이어서 2016년 비엔날레는 열리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비엔날레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관 소속이 아닌 외부큐레이터 3명만으로 진행되었다. 뉴욕근대미술관(MoMA)의 수석큐레이터인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 미디어와 퍼포먼스아트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현대미술관(ICA)의 부큐레이터이자 작가인 앤터니 엘름스(Anthony Elms), 그리고 작가이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예일대에서 강의하는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다.
이들은 또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코머는 지난해 9월 뉴욕으로 옮기기 전 테이트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런던에서 10여 년 동안 거주했으며 엘름스는 3년 전 필라델피아로 옮기기 전 시카고에서 7년, 그래브너는 오랫동안 위스콘신 주와 일리노이 주에서 2개의 대안공간을 운영하는등 지역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세 명의 큐레이터는 지금까지 협업형태로 이루어지던 비엔날레의 전통을 깨고 독립적으로 작가 선정에 나섰으며 휘트니미술관 2, 3, 4층 중 한 층씩을 맡아 전시를 꾸몄다. 3개의 전시를 통해 3개의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비엔날레가 된 것이다.
《 뉴욕타임스》의 미술담당 기자 할렌드 카터는 기사에서 이번 비엔날레를 “거대한 3단 케이크”에 비유하기도 했다.
도록도 ‘세 명의 큐레이터에 의한 세 개의 다른 비엔날레’라는 특징을 살려 한 권으로 이루어졌지만 3부로 나눠 각자의 방식대로 편집하고 종이 질도 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것이 눈길을 끈다. 큐레이터들 그리고 미술평론가들의 난해한 글 대신 작가 본인, 동료, 낯선 사람들로부터 들은 작가 개개인의 작품 소개에 비중을 둔 것도 신선하다.
이번 비엔날레에 초대된 작가는 모두 103명으로 2012년의 2배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작품들이 빼곡히 전시돼 (특히 4층) 작품 하나하나에 필요한 공간이 적절히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전시장 이외에도 층계에 설치된 작곡가 샬레만 팔레스타인(1947~, Charlemagne Palestein, 엘름스 선정)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휘트니미술관 로비 천장의 전구에 스피커를 설치한 세르게이 체렙프닌(1981~, Sergei Tcherepnin, 코머 선정)의 인스톨레이션, 지하식당의 발코니에 설치된 라다메스 주니 피게로아(1982~, Radames “Juni” Figueroa, 코머 선정)의 하우스 프로젝트, 그리고 시간별로 진행되는 퍼포먼스까지 합치면 다른 어느해보다 많은 양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래브너가 52명, 코머가 27명, 엘름스가 24명의 작가를 각각 선정하였다. 시카고,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 중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나 일하고 있는 두 명의 큐레이터의 성원에 힘입어 이례적으로 중부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이 대거 선정되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성은 ‘하이브리더티(hybridity, 잡종성)’다. 19세기에 처음 언급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하이브리더티의 개념은 ‘어떤 문화도 섞이지 않은 것, 즉 순종은 없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20세기에 시작된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이브리더티가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심화된 하이브리더티의 확산은 미술의 정의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2년 전 76회 비엔날레에서 미술과 비디오는 물론 음악, 퍼포먼스, 댄스 등을 함께 초대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는데 이번 비엔날레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 깊이와 다양성을 과감하게 확장했다. 단순히 장르의 혼합 내지는 크로스오버라는 영역의 확장을 넘어 ‘이것도 미술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1세기의 르네상스맨(우먼)이라고 할 만큼 이번에 선정된 작가 중 상당수가 미술작업뿐만 아니라 음악(악기 연주, 작곡, 녹음), 문학, 비평, 사업, 출판, 영화와 연극감독, 배우, 시인, 소설가, 정치운동가 등을 겸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개리 인디애나(1950~, Gary Indiana)는 1970년대부터 미술작가로 활동하면서 소설가, 극작가, 연극감독, 배우 등을 겸업해왔다. 심지어 본인조차 자신이 미술가라고 여기지 않던 사람이 다수 포함되었다. 큐레이터들은 그들의 지적 작업과정이 미술과 다를 게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브너가 선정해 전시되고 있는, 2008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설가 데이빗 포스터 월래스(David Foster Wallace)가 죽기 직전까지 쓰고 있던《 창백한 왕(The Pale King)》의 작업노트는 과연 미술품인지 문학 유품인지 경계가 모호한게 사실이다.
세미오텍스트(Semiotext(e))는 1974년 기호학 등 프랑스의 철학과 예술이론을 미국 미술계에 소개하기 위해 뉴욕의 다운타운에서 소책자를 발간하기 시작한 출판사다. 현재는 캘리포니아로 옮겨 연평균 10권의 책을 발행하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28권 소책자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세미오텍스트를 선정한 큐레이터 코머는 다음과 같이 그 선정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미술가의 목소리(의견)에 관한 것이다. 미술가의 목소리가 그림이나 조각 등의 전통적인 미디엄을 통해서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출판과 저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에게 아이디어의 전파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하며 어떻게 미술가의 목소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지를 진지하게 관찰해보게 한다. 그래서 미술관이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상자(display case)로서뿐만 아니라 지식의 생산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리티컬 프랙티스 사(Critical Practices Inc, CPI, 그래브너 선정)는 비엔날레 기간 비공개로 3개의 라운드업 테이블을 개최하고 그 기록을 배포한다는 프로젝트를 비엔날레 작품으로 출품했다. 미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대안 토론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엘름스가 선정한 수전 하우(1937~, Susan Howe)는 시인이다. 미술가에서 시인으로 전환한 수전 하우는 이번 비엔날레에 미국, 영국, 아일랜드 시인들의 시를 책에서 복사하여 자른 조각을 흰종이의 한가운데에 붙이고 액자에 넣어 시낭송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 레코딩과 함께 출품했다. 언뜻 미니멀리즘 드로잉처럼 보이는 하우의 이 작품은 읽기와 보기, 그리고 쓰기와 살펴보기, 듣기와 느끼기 등 복합적인 문학과 미술품의 다중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룹으로 작업하는 컬렉티브가 8개나 선정되었다는 것도 하이브리더티의 확산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꼽을 수 있다. 작가의 이름과 사인은 그 미술품의 소유권을 영원히 증거하는 것으로 미술계의 오랜 관행인데 컬렉티브는 작가 개개인의 이름과 소유권 (그리고 그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룹이 작품을 만들고 그룹의 구성원과 인원수는 수시로 바뀔 수 있으므로 작가의 이름은 의미가 없다.
아카데미 레코드(Academy Record, 시카고, 2000년 결성), SEL(캠브리지, 메사추세츠주, 2006년 결성), 다국적 그룹인 HOWDOYOUSAYYAMINAFRICAN?(2013년 결성), 마이 바바리언(My Barbarian, 뉴욕, 2000년 결성), 세미오텍스트(로스앤젤레스, 1974년 결성), CPI(뉴욕, 2010년 결성), 퍼블릭 컬렉터스(Public Collectors, 시카고, 2007년 결성), 트리플 캐노피(Triple Canopy, 브루클린, 뉴욕, 2007년 결성) 등이 그들이다.
하버드대 인류학과 교과과정의 일부로 시작된 센서리 에스노그래피 랩(Sensory Ethnography Lab, SEL, 코머 선정)은 현재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인큐베이터로 올라섰다. SEL은 미술이나 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며 아직도 자신들을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시각환경학과와 인류학과의 합동수업 프로젝트인 SEL은 사라져가는 문화를 기록, 연구하는 에스노그래픽 필름을 만든다. 고고학자이며 필름메이커인 루시엔 캐스팅-테일러(1966~, Lucien Castaing-
Taylor)가 2006년 이 클래스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2009년 작 <스위트그래스(Sweetgrass)>는 여러 영화제에 초대돼 상영되는 등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몬태나에서 양을 치는 두 명의 카우보이를 3번의 여름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 그 비주얼의 뛰어난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맥이 끓긴 마지막 양치기의 삶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훌륭한 예술영화가 주는 감동을 그대로 전한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그가 베레나 파라벨(1971~, Verena Paravel)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새로운 클래스 프로젝트 4부작 <리바이어던(Leviathan)>(2012)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을 출품했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등장하는 사나운 바다괴물로 한때 세계적인 고래잡이 항구이며 허먼 멜빌의 소설 《 모비 딕》의 출발지인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어부들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다. 소형 방수카메라를 어부들의 몸과 선박 자체에 부착시켜 근접촬영함으로써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4층 입구에 전시된 게일런 거버(1955~, Gaylen Gerber, 그래브너 선정)의 출품작 <백드롭(Backdrop)>은 거버가 만든 전시벽에 그가 선정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거는 개념주의 작품이다. 거버는 이 벽을 세움으로써 그 자신이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역할전환을 한다. 그는 전시기간을 반으로 나누어 무명인 트레버 쉬미즈(1978~ ,Trever Shimizu), 중견작가로 잘 알려진 셰리 레빈(1947~, Sherrie Levine), 데이빗 하몬즈(1943~, David Hammons) 등 세 작가의 작품을 건다. 쉬미즈는 우연히 거버에게 비엔날레 큐레이터 중 한 명인 그래브너가 자신과 작업실을 같이 쓰는 작가를 방문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거버는 쉬미즈를 자신의 작품의 일부로 초대했다.
이처럼 자신의 작품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역초대한 작가는 거버뿐만이 아니다. 코머가 선정한 리처드 하킨스(Richard Hawkins)와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는 그들의 대학동창이며 1990년 에이즈로 죽은 토니 그린(1955~1990, Tony Green)의 작품을 큐레이팅해 출품했다.
물론 이번 비엔날레에는 미술의 시각적 아름다움의 기본 요소인 선과 색 그리고 형태의 조화를 추구하는 작품 역시 다수 전시되었다. 89세의 고령으로 레바논 출신 시인이자 화가인 에텔 애드난(Etel Adnan, 코너 선정)의 사방 30cm 크기의 작은 오일페인팅과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수채화는 심플하게 그려진 종이그림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공예 요소가 강한 작품들도 대거 선보이고 있다. 그래브너가 선정한 스털링 루비(1972~, Sterling Ruby)와 시호 쿠사카(1972~, Shio Kusaka)의 도자기, 셰리아 힉스(1934~, Shelia Hicks)의 섬유작업, 피터 슈프(1958~, Peter Schuyff)의 연필조각, 조엘 아터슨(1959~, Joel Otterson)의 비즈 커튼, 코머가 선정한 리사 앤 아워바치(1967~, Lisa Anne Auerbach)의 정치적 메시지(글자)가 들어간 뜨개질 작업 등은 공예의 특성인 수작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그래브너는 유일한 여성 큐레이터면서 작가로서 여류 추상작가를 의도적으로 다수 초대했다고 밝혔다. 다나 넬슨(1947~ , Dona Nelson), 에이미 실만 (1955~, Amy Sillman), 몰리 주커만-하퉁(1975~, Molly Zuckerman-Hartung), 루이즈 휘시먼(1939~, Louise Fishman), 로라 오웬스(1970~, Laura Owens), 재클린 험프리(1960~, Jacqueline Humphries) 등이 화려한 색과 붓터치가 어우러진 대형 캔버스를 선보이고 있다. 원로 여성작가들의 추상작업이 최근 세계미술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현상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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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휘트니비엔날레를 기획한 세명의 큐레이터  “하이브리더티를 의미있게 노출했다”

whitney3ok2014년 휘트니비엔날레에는 이례적으로 3명의 큐레이터가 각각 독립적으로 작가를 선정해 휘트니미술관 2, 3, 4층 중 한 층씩 맡아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 사진 가운데), 앤터니 엘름스(Anthony Elms, 사진 오른쪽),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다.
그래브너는 시카고 미술대학 교수로 개념미술 작가이자 평론가로서 각종 미술전문지에 글을 기고하고 또 두 개의 대안공간을 소유 운영하는 시카고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인 중 하나다. 밀워키에 위치한 위스콘신대에서 페인팅으로 학사를,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석사) 시카고에 위치한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페인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래브너는 미술작가인 남편 브래드 킬리언(Brad Killian)과 함께 대안미술공간 ‘서버번(The Surburban)’과 ‘가난한 농장(The Poor Farm)’을 운영하고 있다. 그랜트도 신청하지 않고 자비로 운영하고 있는
이 두 대안미술공간을 통해 200명 이상의 작가가 전시했다고 한다. ‘서버번’은 자신의 집 뒷마당에 있으며 ‘가난한 농장’은 2008년 실제 농장을 구입해 아티스트 프로젝트 스페이스로 꾸며 전시를 비롯 무료 서머스쿨,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브너는 이번 비엔날레에 대해 “여성 추상미술작가, 재료의 물질성과 그 영향, 그리고 주목할 만한 개념미술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작가를 중점적으로 찾았다”고 밝혔다.
필라델피아의 현대미술관(ICA)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작가인 앤소니 엘터스 역시 2011년 필라델피아로 옮기기 전 시카고에서 작가 겸 큐레이터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교 미술학과(학사), 시카고 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페인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지역에 산재한 작가의 전시공간 운영을 맡아 한 것을 시작으로 로나 호프만 갤러리의 프레퍼레이터,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대학교의 ‘갤러리 400’의 부관장 등을 지냈다. 미술인들의 글을 출판하며 전시장도 겸하는 ‘하얀 벽(White Walls)’의 편집장 겸 디렉터이며 각종 미술이론지에 평론을 기고하고 있다. “그래브너와는 시카고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라고 밝힌 엘름스는 “그러나 우리 3명의 큐레이터는 독립적으로 작가선정을 했다”면서 “어쩔수 없이 겹치는 작가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는 진지하게 논의를 거쳐 해결했다”고 밝힌다.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휘트니 현 빌딩에서의 마지막 비엔날레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면서 “설계자인 브루허가 남겨놓은 메모를 참고했는데 그중에서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미술관이란 무엇인가’라는 귀절을 마음에 담고 진행했다”고 밝힌다. 그 자신이 드럼 연주자면서 레코드를 수집하는 엘름스는 이번 전시에 시와 문학, 음악에 관련된 미술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포함시켜 눈길을 모았다.
스튜어트 코머는 칼리튼 대학 미술학과에서 미술사를(학사), 그리고 런던의 로열미술대학에서 미술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9월 뉴욕 모마의 수석 큐레이터로 옮기기 전까지 런던의 테이트미술관에서 필름비디오 아트의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실험적인 영화와 비디오를 수집하고 상영하는 ‘탱크 테이트(The Tank at Tate Museum)’의 프로그램이 현재에 이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큐레이터로 꼽힌다. 이번 비엔날레는 “하이브리더티(잡종성)를 의미있게 노출하는 작업을 관심있게 보았다”면서 “이주(migration), 이중젠더(binary gender), 크로스 내셔널(cross-national) 등을 다루는 작품을 관심있게 보고 있다”고 밝힌다. 코머는 “뉴욕은 아직도 미술의 중요한 생산지지만 더 이상 세계미술의 유일한 중심지가 아니다”면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며 국제 비엔날레를 많이 가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다. 

뉴욕=서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