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주비엔날레 2014 – 터전을 불태우라, 살아있는 무대

배은아  독립 큐레이터  

<터전을 불태우라>는 문자 그대로 불태움과 변형, 말소와 혁신, 구속과 투쟁, 소비와 소외, 상실과 회복, 젠더와 성정치, 실재와 가상, 도시와 이민 등 사회적 규범들과 예술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저항과 도약의 이미지들로 꽉 차있다. ‘불’과 ‘집’, 그리고 ‘태우다’라는 반복되는 주제를 통해 부각되는 문화 정체성, 다양한 문화권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반복과 재구성, 과거 작품의 재생과 기존 작품의 해체와 재조합, 그리고 미술관 전체를 관통하는 안무적 디스플레이는 개별 작품이 수행하는 각각의 욕망과 욕구를 ‘재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머물게 하지 않고 ‘가능성의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전시 맥락 안에서 퍼포먼스는 과거와 현재, 정립과 반정립, 체제와 반체제의 혁명적 잠재력을 체화(體化)하면서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발해 사회적 정치적 역동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5개의 전시 공간은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상호 소통하면서 터전을 불태우라는 대주제 아래에서 통합된다. 각 전시장의 입구와 출구에는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확장시키는 설치, 사운드 혹은 퍼포먼스와 같은 장치가 배치되는데, 이들은 관객의 기존 관람방식에 개입하면서 몸의 물리적 자극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시대성에 집중하도록 한다. 알로라 & 칼사디야의 <음계(기질)와 늑대>는 정렬된 20인의 인위적인 환대의 제스처를 통해 전시장 입구를 차단함과 동시에 경계를 넘어서는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새로운 영역을 수용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확보한다. 우르스 피셔의 아파트를 재현한 건축물 <38 E. 1st St.>의 입구에 배치된 피에르 위그의 <네임 아나운서>는 입장하는 관객의 이름을 실내로 호명하면서 안과 밖의 경계를 확장한다. 호명된 이름은 건축물 내부를 뒤덮은 3D 디지털 프린트 벽지의 스타일리시한 인테리어와 그 안에 애매하게 배치된 뜬금없는 예술작품들과 어색한 혹은 불편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수행력(performativity)은 퍼포먼스가 아닌 조각과 설치, 회화를 통해서도 획득된다. 제1 전시장 출구에 설치된 구정아의 <그것의 영혼>은 흔들리는 벽을 통해 출구의 위태로움을 경험하게 하며, 제2 전시장 입구의 피오트르 우클란스키의 <무제(크게 벌려)>는 마치 목젖을 통해 인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흡입력을 느끼게 한다. 제4 전시장의 출구에 설치된 카르슈텐 횔러의 <일곱 개의 미닫이문>은 입구의 <음계(늑대)와 기질>에 대한 답변으로 무한 반복되는 출구와 입구의 운동성과 함께 유년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본전시에서 퍼포먼스는 역사의 허구성을 표출하고 사회적 규범을 비판하면서 과거의 순간과 운동, 작품, 사건을 현재진행형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일본작가 에이 아라카와와 한국 공연기획자 임인자는 아스팔트라는 가상의 광주지역 극단을 창립하고 1980년대 독재정권의 억압 시대에 활동한 연극 집단의 인물들을 재조명한다. 레나타 루카스의 아파트 창문 <불편한 이방인이 될 때까지> 앞 횡 한 광장에서 펼쳐지는 홍영인의 <5100:     >은 광주민주화운동의 기록물에서 발췌한 이미지들을 동시대의 움직임으로 안무한다. 로만 온닥의 <시계태엽장치>는 시간과 관객의 관계를 공간 속에 육화(肉化)하고 그 흔적을 축적한다. 관객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간의 감옥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감금된 채 사라져간 수많은 희생자의 억압된 삶을 떠올린다. 미술관의 구조적 개입을 통해 완성되는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 님과 노래를 위하여>는 미술관 방송시스템을 점유하며 비상사태의 순간에 폐체조(肺體操)를 준비하는 역설적인 작전을 제시한다.
개막 기간에 선보인 세실리아 벵골레아 & 프랑수아 세뇨와 정금형의 도발적인 안무는 본전시가 꿈꾸는 쾌락적이고 유희적이면서 급진적인 사건의 소용돌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댄 플레빈의 붉은 네온 라이트 <매복으로 사망한 이들을 위한 기념비(내게 죽음을 상기시켜준 P. K.에게> 앞에서 공연된 벵골레아 & 세뇨의 <실피데스>는 신화 속 공기의 요정을 연기한다. 검정 라텍스 주머니에서 잉태된 요정들은 삶과 죽음, 환상과 실재, 그리고 가능과 불가능성의 관계를 재구성하면서 몸이 가지고 있는 현전성을 부각시킨다. 정금형의 <심폐소생술 연습>은 바닥에 누워있는 연습용 마네킹과 만들어내는 에로틱한 움직임을 통해 사물에 존재성을 부여하고,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존재성을 획득하는 역학관계를 드러낸다.
<터전을 불태우라>에서 퍼포먼스는 전시 디스플레이의 새로운 방법론 그리고 시각예술의 한 매체로서 몸과 정체성, 움직임과 정치성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 현대미술에서 퍼포먼스는 더 이상 스스로의 정체성에 만족하지 않고 주변의 것들과 관계하면서 오히려 이를 전복하고자 한다. 퍼포먼스를 포함한 400여 점의 작품은 전시장을 감싸는 검붉은 연기, 꿈틀꿈틀 앞으로 기어 나오는 문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난로, 그리고 쉴 곳을 잃은 유골들의 컨테이너와 함께 살아있는 무대를 연출한다. 문화사가 하비 파커슨이 말했듯이 근대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터전을 불태우라>는 경직된 사고와 고정된 관점을 불태우고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 속에 사라진 저항정신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다. 이 모험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출발한다. ●

2 (3)

로버트 하이네켄 <뉴스 아메리카에서 깨어나다> 복합재료 1986

작은 방으로 꾸며진 전시장 안에는 뉴스 이미지가 모든 면에 도배되어 있다. 마네킹은 뉴스를 보면서 보이고 들리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미국 시민을 의인화한다.

2 (21)

겅지안이 <쓸모없는> 혼합재료 2004

지인들에게 쓸모없는 물건을 받아 그 이유를 메모로 붙이고 물건들을 기능별로 분류해서 체계적으로 배치했다. 중국의 물질문화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찰한 작품이다.

3 (9)

레나타 루카스 <불편한 이방인이 될 때까지> 2014

비엔날레 전시관 남측 파사드에 맞은 편에 보이는 아파트 창문을 재현했다. 한국 사회의 획일화된 주거환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4 (5)

에이 아라카와 & 임인자 <비영웅극장(극회 광대, 놀이패 신명, 극단 토박이, 가상극단 아스팔트의 극중인물 연구> 설치 2014

두 작가는 1980년대 시민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는 극을 상영한 극단들을 토대로 제3의 가상 극단을 만들고 주목받지 못했던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려내었다.

[section_title][/section_title]

interview

협력큐레이터 에밀리아노 발데스(Emiliano Valdes)

  “이번 비엔날레의 도전은 젊은 작가,  새로운 작업”

EMILIANO 2이번 전시에 참여하기 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개인적인 소개를 부탁한다.
과테말라 출신으로 런던과 메데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콜롬비아 메데인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수석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5년 넘게 과테말라 소재 스페인문화센터(Centro Cultural de España)에서 비주얼아트의 큐레이터이자 책임자로 일했으며, <도큐멘터 13(dOCUMENTA13)>와 레이나소피아 국립미술관(the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현재 《컨템포러리 매거진》을 발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식의 형태, 공공 프로그램 생산, 예술과 문화, 그리고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에서 예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소감을 말해달라. 광주비엔날레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 전시에 함께 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며, 전문적인 팀과 같이 일하게 된 것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비엔날레가 해마다 성장하고 전문적으로 변화해갈 뿐만 아니라, 이전에 행해졌던 비엔날레와 같이 획기적인 전시를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제시카 모건과 함께 일하면서 일하는 스타일, 전시 스타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달라.
제시카는 매우 기민하고, 영특하며, 철저한 큐레이터다. 그녀와 함께 일한 것은 영광이었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인상깊은 에피소드를 말해달라.
이번 비엔날레의 도전은 대규모의 연구, 제작 지원, 향후 설치가 요구되는 많은 수의 새로운 커미션 작업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놀랍도록 전문적인 아티스트들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는 작품들이 최고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힘써야 했다.
이번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이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의 작업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전시에 참가한 젊은 작가와 중견 작가들은 (비록 이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진 않을지라도) 개인으로서 또는 그룹으로서, 모두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예리하며, 사려 깊고, 유능한 작가들이다. 그들을 알게 되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리서치 과정 역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separator][/separator]

협력큐레이터 파토스 우스텍(Fatos Usteck) 

 “동시대 한국미술의 토대를 들여다본 보기 드문 기회”

FatosUstek이번 전시에 참여하기 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개인적인 소개를 부탁한다.
이스탄불 출신으로 현재 런던을 중심으로 독립큐레이터이자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스웨덴의 린코핑 대학에 출강하고 있으며 작가   퍼 휴트너(Per Hüttner)와 함께 2015년 봄 개관하는 스톡홀름 노벨 뮤지엄(Nobel Museum)을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또한 2016년에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열릴 그룹전 준비를 하고 있다. AICA Tr의 멤버이며, 국제적인 미술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현대미술잡지 《Nowiswere》을 창간해 필진으로 일했다.
협렵 큐레이터라는 개념이 모호하다. 이번 전시에서 당신이 진행한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 부탁한다.
나와 에밀리아노 발데스는 전시 준비 초기단계부터 협력큐레이터로 참여했으며, 배은아 씨는 올해 초 진행 도중에 합류했다. 우리의 역할은 다양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일이었는데, 작가 리서치를 하는 것부터 제작 과정을 확인하고 기금 지원서를 작성하고, 예산 범위를 설정하고 대출 목록을 작성하는 일 등이었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인상 깊은 에피소드를 말해달라.
전시 콘셉트를 정하는 과정에 작가 리서치 기간을 여유있게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자료에 접근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영어로 번역된 출판물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좀 더 심도 있는  정보를 얻고 리서치를 풍부하게 하기위해 많은 큐레이터와 역사학자와 대화도 많이 나눴다.
이번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이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한국 예술신이 젊고, 드라마틱하며,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상에 대한 개념적인 관찰뿐 아니라 미디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예술적인 흐름이 존재한다. 동시대 한국미술의 토대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한국내의 미술흐름과 공예의 역사를 배우는 것도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큐레이팅 리서치 내내, 세대 구분없이 다양한 예술가들을 탐험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이러한 예술신도 미술시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시장의 요구안에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예술가가 많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나는 비엔날레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이들 대부분이 1970~1980년대를 관통하는 역사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슬비기자

[Exhibition Topic] SeMA Biennale Mediacity Seoul 2014

Ghosts, Spies, and Grandmothers

올해로 8번째를 맞이한 <SeMA 미디어시티서울2014>(9.2~11.23)는 미디어라는 매체보다는
주제를 강조한다. 아시아에 대해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과연 아시아란 하나로 답할 수 있는 개념인가?
전시 제목이기도 한 ‘귀신 간첩 할머니’를 통해 해독해야 할 주술, 암호, 방언과 기억해야 할 섬과 산 같은 장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 모호해진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귀신이 없어진다

강홍구  작가

청탁을 받아 이글을 쓰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글을 쓰는 데 적격자가 아니다. 우선 비엔날레 종류의 미술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국내외 여러 비엔날레를 보고, 참여도 해보고 내린 결론은 그렇다.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전시는 대개 거창한 주제를 내걸고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모아 보여준다. 돈도 많이 쓴다. 그걸 다 집중해서 관심 있게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애초에 관객이 전시를 어떻게 잘 보느냐에 큰 관심이 없다. 몇 명이 오느냐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래서 보고나면 화가 나거나 다리가 몹시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행히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규모와 짜임새 면에서 그렇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전시의 제목 때문이다.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내 정서와 감각 등은 섬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버린다. 신안군의 작은 섬인 내 고향은 곳곳이 귀신 나는 곳이고 도처가 죽은 자들이 묻혀있던 곳이었다. 집마다 있던 성주, 조앙 등의 집안 귀신들 말고도 일종의 동네 귀신으로 탱자나무 길 아래 차일 귀신, 터진목에 애장터의 애기 귀신에다 뻘밭에는 도깨비들이 있었다. 그리고 해당화 피던 모래밭에는 6.25 때 철사에 손이 묶여 죽은 사람들이 영광에서 떼로 떠밀려와 묻혀 있다고 했다. 바닷가에서 보았던 사람의 두개골은 돌을 던져도 잘 깨지지 않고 단단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넋을 건지는 굿이 바닷가에서 가끔 벌어졌고, 육탈을 기다리는 빛 바랜 초분이 밭 귀퉁이나 야산에 웅크리고 있었고, 어둡고 축축한 여름밤에는 안개 속에 도깨비불이 날았다.
귀신들을 잘 보고 만나는 사람들은 할머니들이었다. 밭 매고 집에 오다 보고, 날이 흐릿하고 빗기 품은 바람이 불 때 동네 고삿길에서 보고, 바닷가에 갯것하러 갔다 만났다. 간첩도 마찬가지였다. 섬 뒤로 펼쳐진 서해 바다가 간첩들이 드나드는 통로였다. 특히 바로 옆인 임자도에서 일어난 간첩단 사건은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다. 조그만 섬에 전투경찰대 일개 소대 정도가 참호를 파고 몇 해 동안 주둔했던 것이다.
이 따위 경험들은 물론 전시와 직접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귀신과 할머니와 간첩’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정서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린다. 일종의 병적 고착이다.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는 데 적격자가 못된다. 전시 제목만 들어도 어릴 적에 보던 서늘하고 으스스하지만 이상하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고 싶은 상엿집 분위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란 그럴 만한 질문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귀신, 간첩, 할머니>는 언젠가 던져야할 좋은 물음이고 있어야만 할 전시였다. 주제를 중심으로 한 전시의 짜임은 불필요한 오버 없이 담담했고 동선도 큰 무리는 없었다. 전체를 둘러보고난 인상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랐다. 상엿집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전시 제목인 세 단어가 만나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를 보고 싶었는데 그건 없었다. 그러니까 전시 전체의 구성이 병렬적이었고 그것이 전시 전체의 의도였던 것도 같다.
좋은 작품이란 역시 일종의 질문이다. 답이 아니다. 하지만 비엔날레나 그룹전의 어려움은 작가들이 질문에 대해 답을 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 이 전시도 일부는 그러했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언급한 양혜규의 작업은 내가 보기엔 그 깔끔함과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잘 쓴 답처럼 보였다. 양혜규의 작업은 평소에 해오던 작품의 무속적 변주이다. 양혜규의 작품들은 대개 무언가를 모으고, 움직이게 하고, 이동 가능하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방울이라는 소재를 모으고,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고, 수동으로도 돌릴 수 있게 만들었다. 때문에 무속용 소도구인 방울을 이용한 잘 다듬어진 작업 그 이상 어떤 것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정보과잉 상태의 작품들에 관해서다. 그런 작품들은 거의 관습적으로 입체, 설치, 영상, 텍스트, 드로잉을 한 묶음으로 공간에 모아 동어반복 상태를 만든다. 물론 그 사이에 매체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말이 되풀이될 때 반복적 공허함도 매체에 따른 점층적 효과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메인 작품을 위한 장식으로 보인다. 때문에 오히려 작업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만다.
다른 하나는 일부 작품들이 가지는 약간 과도한 계몽적 태도이다. 나는 이것을 알고, 조사했고 작업했기 때문에 당신들도 알아야 한다는 강박증은 보는 사람의 피로도를 높인다. 물론 전시 주제의 영향도 있겠지만 정보와, 계몽과, 예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예민한 재고가 필요해 보였다.

쑤 위시엔  비디오(21분8초)와 설치 2013

쑤 위시엔 <화산치앙> 비디오(21분8초)와 설치 2013

김수남  연작 중에서 함경도 망묵굿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아카이브용 피그먼트 인화 40×58cm 1981

김수남 <한국의 굿: 만신들 1978-1997> 연작 중에서 함경도 망묵굿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아카이브용 피그먼트 인화 40×58cm 1981

불편함이 핵심이다
나는 미술관에서 비디오나 영상작업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상 하나만 보아도 힘든데 그걸 연속 본다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흥미 있었던 것은 영상들이었다. 여러 개가 있지만 몇 개만 들자.
우선 베트남 프로펠러 그룹의 <쿠치의 게릴라들>이 그렇다. 내용은 간단하다. 베트남 호치민시 외곽에 쿠치터널이라는 지하터널이 있다. 쿠치터널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과 싸우기 위해 복잡하게 판 이른바 땅굴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곳에서 요즘 서구의 관광객들이 총알 한 발에 1달러를 내고 AK47이나 M16을 쏜다. 특별한 연출도 없는 다큐멘터리이다. 모든 장면은 슬로 비디오로 상영된다. 관광객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총을 쏘고 그것을 잡는 카메라의 위치는 총구의 정면이다. 물론 방탄유리 뒤라고는 하지만 뭔가 불안한 느낌이 좀 든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웃고 총을 쏘는 관광객과 베트남전 당시에 만든 선전영화 내레이션이 부딪치면서 지극히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든다. 어쩌면 전쟁이 끝나고 통일을 이뤘으니 전쟁터를 관광상품화하는 여유를 가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보는 내내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핵심이다.
다음은 에릭 보들레르의 일본 적군파를 다룬 <시게노부 메이와 시게노부 후사코, 아다치 마사오의 원정과 27년간 부재한 이미지> 라는 긴 제목의 다큐멘터리이다. 유감스럽게도 다큐가 너무 길어 다 보지는 못했지만 본 내용만으로도 지극히 인상적이었다. 다큐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영화와 테러가 유사하다고. 이는 물론 적군파 전투원인 에키타 유키코가 썼다는 “혁명의 시나리오는 영화 각본과 같은 식으로 쓰여 있어야만 한다”에서 따온 것이리라. 영화가 시나리오를 쓰고, 다시 검토하고 등장인물을 캐스팅하고, 스태프들을 모아서 촬영하듯이 테러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테러는 목표물을 정하고, 어떻게 작전을 펼칠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자금과 테러리스트들을 모은 뒤 실행한다. 물론 테러에 재촬영이란 없다. 그리고 피차의 목숨이 걸려있다. 섬뜩했다. 테러를 일종의 예술로 볼 수 있다는 시각 자체가 무섭다. 아니다. 이건 인간이 세상 모든 일을 해나가는 기본적인 태도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할 때는 시나리오를 쓴다. 글로 쓰건 상상하건 꿈을 꾸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시행한다. 대부분 성공하지는 못한다. 예술이란 어쩌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그래서 실패한 시나리오에 대한 보상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렇다. 그래서 테러에 대한, 테러리스트에 대한 다큐란 실패한 테러에 대한 만가(輓歌)이다. 젊은 시절 기사만 보아도 충격적이었던 적군파 사건이 수십 년이 지나 미술관 속에 들어왔다. 냉전, 혹은 열전의 일부였다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지만 여운은 간단치 않다.
다음으로는 미하일 카리카스의 <소리 내는 아이들>과 김인회를 비롯한 무속 연구가들의 굿을 기록한 영상물이다. <소리 내는 아이들>이라는 작업이 흥미를 끈 것은 살풍경한 배경과 아이들 사이의 기이한 대비도 대비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소리가 무당들의 무가와 겹쳤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노래하고 소리 지르는 과정들이 일종의 굿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속 연구가들이 기록한 굿은 내가 서울에 와서 보았던 퍼포먼스에 가까운 굿들보다는 훨씬 굿 같았다. 굿의 원형들이 담긴 비디오들은 상태가 나빴지만 매력적이었다. 물론 너무 많아 다 보지 못했다. 정말 필요해서 열리는 굿판과 행사로서의 굿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그걸 아우라라고 해야 할지 절실함의 차이라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 그리고 김수남의 사진뿐만 아니라 직접 연관이 없을지라도 이갑철의 신기어린 사진들과 육명심의 인상적인 무당 사진들이 같이 전시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물론 전시장에서 만난 디렉터의 말처럼 굿 영상물과 사진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 몇 해 동안 고향인 신안군을 촬영하느라 섬을 돌았다. 섬에도 이제 귀신이 없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들도 더 이상 귀신을 보지 않는다. 산 속에서 나무를 하다가 친인척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환청으로 듣던 할아버지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이들도 없다. 귀신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즉 기억하고 호명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전시도 마찬가지다. 이름 부른 메아리가 얼마나 멀리 퍼질지는 알 수 없지만 아시아인의 식민지 경험과 냉전과 열전, 20세기에만 거의 1억 명 이상이 강제로 죽은 곳에서 그 피해자, 여성, 고통에 대한 질문은 당연히 지속되어야 하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디렉터의 표현대로 그들이 보내는 주문과 암호와 방언은 마땅히 기억되고 해독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과도한 사명감이나 자신감, 혹은 이 전시와 상관없이 요즘 일부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죽은 자들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마땅히 경계해야 하리라. 언젠가 거대한 규모의 넋 건지는 굿이 진도에서 벌어져야겠지만 그때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산자의 부끄러움과 겸손함일 것이다.
참, 섬 주변에 간첩도 없는 것 같다. 배를 타고 북쪽에서 남쪽 섬까지 드나들었다는 그들의 소식도 끊긴 지 오래이다.●

프로펠러 그룹  비디오 20분4초 2012

프로펠러 그룹 <쿠치의 게릴라들> 비디오 20분4초 2012

필라 마타 듀폰트 (왼쪽) HD비디오 5분4초 2013 최진욱 와  각 캔버스에 아크릴 97×130cm 2000

필라 마타 듀폰트 <이상적인 포옹>(왼쪽) HD비디오 5분4초 2013 최진욱 <북한A>와 <북한B> 각 캔버스에 아크릴 97×130cm 2000

 

[Exhibition & Theme] The Art of ‘Dansaekhwa’

단색화(單色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근래 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전>(8.28~9.19)와 우양미술관의 <고요한 울림전>(8.12~10.12) 등 단색화와 관련한 전시가 잇달아 열리면서 이를 두고 어떤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이곳저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색화’는 극대화된 모더니즘의 표상으로 여겨지면서 서구의 미니멀 회화나 일본의 모노하 등과 비교된다. 그러나 단색화는 동시대의 사회적 고민과 유리된 유미주의적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분명 시점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차이에 대해,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한 논의를 거쳤는가? 여기 두 필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단색화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어본다.

단색화의 사회적 위치 또는 가치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 미술비평

이 글은 1970~80년대 한국 단색화(또는 모노크롬 회화)의 사회적 위치, 또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재고해보려는 시도다. “비판적으로”라고 했지만 이 글은 당시의 단색화를 사회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간단히 내치는 접근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은 단색화를 하나의 사례로 삼아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예술의 위치를 한국의 현실에서 반성적으로 숙고하는 작업이기를 희망한다.
주지하다시피 1970~80년대 단색화에 관한 사회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현실과의 괴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다”(현실과 발언 창립취지문)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단색화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구상과는 별개의 것임”(이일)을 분명히 하면서 “표상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하나의 독립된 실재”(이일)를 제기하려 했다. 또는 “세계를 비표상적으로 이해하는”(김복영) 작업으로 나아갔다. 여기에는 ‘현실’ 또는 ‘실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자리한다. 단색화를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에게 현실은 1970년대 또는 1980년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뜻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화면에서 적극적으로 일루전을 제거하고 물성을 초극하려는 의지”     (오광수)로 표상되는 단색화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괴리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을 그와는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가령 이일은 현실이 “단지 객관적 여건으로서 주어진 것으로만 그치지 않으며 필경은 주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할 하나의 세계”라고 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 현실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김열규를 인용하여 “관념, 개념, 또는 지식에 의해 가로막혀있지 않은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을 말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 자신에 의해 현실이라는 것에 뒤집어씌어진 가면을 벗긴 사물과의 만남”(이일)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70년대의 단색화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든, 그에 반대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든–      “거대 주체가 부여한 허상 내지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김복영)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바, 자신이 지닌 신념, 이데올로기를 정의로운 것으로 단정하고 그러한 신념에 따라 악으로 간주된 것을 공격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념,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색화(와 담색화 담론)가 비표상적 관점에서 제기한 표상(재현)에 대한 근본적 반성은 확실히 사회적으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이렇게 “사물을 표상으로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면서 “사물로 복귀하는”(김복영) 접근은 또한 아도르노가 지적한 대로 “아무런 위험도 없게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리 주어진 것을 자신으로부터 배제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지극히 빈곤한 것, 비명, 어쩔 도리 없는 무기력한 제스처”가 나타난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단색화의 역사적 전개, 특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단색화 작업의 양상을 볼 때 설득력이 있다.

김기린 (사진 맨 왼쪽, 1977) (가운데 설치, 1980년대)

김기린 <Visible, Invisible>(사진 맨 왼쪽, 1977) <Inside, Outside>(가운데 설치, 1980년대)

현실과의 괴리? 가장 현실적인 것?
하지만 1970년대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그저 빈곤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김복영을 인용하면 그들이 자발적인 자기해체 또는 자기소멸을 통해 기도한 물성과의 만남은 “물성의 범자연적 결정체로서 모노크롬 회화를 성취하고 그로 하여금 자연의 권화를 갖게 함으로써 사회현실로부터의 억압에 맞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예술이 억압적 사회현실에 맞서는 나름의 방식이다. 이 경우 “주체의 소멸 결과로서 얻게 된 범자연적 권위”(김복영)란 지배이데올로기에 굴종하지 않기 위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거처로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거처가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되려면 거기에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타의식이 전제되어야 하고 작품 자체의 긴장은 외부세계의 긴장에 대한 관계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1970~80년대 현실에서 많은 경우 단색화 제작과 담론은 지배이데올로기 내지는 사회와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기보다는 당대 한국 사회가 요구한 ‘전통’, ‘민족적 정체성’ 담론과 한데 얽혀 진행되었다. 이런 문맥에서 그것을 외견상 유사해 보이는 일본의 모노하나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구별하려는 작업이 진행됐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의 단색화에 고유한 특성으로 상정된 비물질성, 정신성, 손맛(드로잉) 같은 자질들은 곧장 한국성, 동양성 담론과 연결되었다. 그렇게 일체의 의미가 소거된 텅빈 기표로서 단색화는 어떤 특정한 욕망들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되었다. 물론 그 욕망들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다. 가령 김영나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모노크롬 미술은 이제까지의 서양미술 추종일변도에서 좀 더 동양적인 과묵한 색채와 뉘앙스, 극소의 표현을 통해 전통문화에서 자연관, 정신성, 수묵회화, 자기 수양, 문인화의 전통을 계속했고 이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되었다. 또한 미네무라 도시아키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무엇을 한국의 아이덴티티로 삼을 수 있으며 또 그런 회화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란 물음에 답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과”다. 1970년대의 작가들에 김환기를 더하여 “김환기, 이우환의 청색과 백색 여백, 그리고 이동엽의 백색공간, 그것은 학의 날갯짓과 선비의 욕망 자체이다”(윤익영)는 식의 서술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일체의 허상 내지는 가상에 대한 거부에서 사물로 복귀한다는 단색화의 한 귀결이 한국성, 또는 동양성 담론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 결합을 통해 단색화는 많은 것을 얻었다. 특히 그 결합을 통해 단색화는 사회적인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 공개적으로 상찬될 만한 것이 되었다. 물론 그 결합은 애초의 단색화 작업이 갖는 사회비판적 계기를 상당 부분 거세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구의 물질문명에 반하는 동양적, 또는 한국적 정신성의 회복”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유의미한 비판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됨으로써 단색화(그리고 단색화를 제작하는 행위)가 어떤 유토피아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앞서 김영나의 발언 곧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단색화는 단절이 극복된 어떤 유토피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시 아도르노를 인용하면 “유토피아를 가상이나 위안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예술이 유토피아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또한 “예술은 화해의 가상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화해되지 않은 것 가운데에서도 화해를 견지한다”(아도르노)고 했다. 지금 “우리 고유의 자연관과 사유에 입각한 정신의 세계를 회화 평면을 매개로 육화하는 작업”(윤진섭)으로 설명되는 단색화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1970년대의 단색화 작업이 “물상화되고 소외된 닫혀진 자기완결 세계”에 대한 비판(이우환)에 기초해 장소의 열림을 지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자기의 대상성을 투명하게 하는 존재”(이우환)의 등장은 그것이 처음 등장한 시점에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짓된 것으로 부정하는 비판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지워버린 깨끗한 텅 빈 화면은 곧 갖가지 욕망(그 가운데는 화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이 포함될 것이다)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되었고 욕망들은 그 깨끗한 것을 오염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1970~80년대의 단색화는 사회적으로 역설적이다. 어쩌면 단색화의 사회적 의의란 그 역설을 우리 앞에 생각할 거리로 던져주었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

[section_title][/section_title]

한국 모노톤아트(Korean Monotone Art)를 다시 말하며

김미경  한국예술연구소KARI 대표, 강남대 교수

최근 국내외에서 ‘단색화(Dansaekhwa)’라는 이름으로 한국 ‘모노톤아트(Monotone Art)’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이제 정말 그것은 국제화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미술시장만 뜨거워질 뿐 정작 그것을 촉발해 온 연구 담론은 뒷방 신세가 된 것 같다. 한국현대미술을 사랑하고 연구해 온 연구자로서는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논리 앞에서 왠지 허탈감을 느끼며 담론 없는 국제화 현상은 곧 사그러들 수밖에 없음을 우려하게 된다. 필자는 20여 년 전 소논문 <한국의 실험미술-AG를 중심으로>에서부터 서구 미술에서 고유명사화되지 않은 음악적 용어인 ‘모노톤’을 사용해왔고, 박사논문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에서나 지난 4월 뉴욕근대미술관(MoMA)에서 한 전문가 특강에서 큰 공감을 얻었던 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AG를 중심으로> 1998,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 2000,
《   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  2014) ‘모노톤아트’를 번역하면 ‘단색조(單色調) 예술’이다. 이 ‘조(調)’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지며 미술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도 모노톤과 모노크롬(Monochrome)은 매우 다른 맥락을 이룬다.
1975년 5월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韓國 五人の作家五つのヒンセク白展)>은 근본적으로 임진왜란의 역사가 말해주는 일본의 조선 침략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백자 사랑을 상기시키는 ‘일본인의 시각’이 깔린 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마모토 다카시라는 일본의 화랑주가 시도했던 이 최초의 공식적인 한국 모노톤아트 전시에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가 잠재되어 있음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김미경, <素-素藝로 다시 읽는 한국 단색조 회화> 2002,《  한국현대미술자료 약사(1960-1979)-정치 경제 사회와 함께 보는 한국현대미술》 2003) 물론 식민 지배가 끝난 이후 30년 만에 부활한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야마모토는 광복 전 함경도 청진에서 일본군으로 주둔했으며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이지만 골동상으로서 조선의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우환, 김미경 2002년 인터뷰) 문제는 모노톤아트의 기원이 되어버린 일본 전시를 역사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흰 창호지를 중첩시켜 붙여나간 일련의 작품을 1971년 제2회 AG전에 출품한 서승원, 흰 바탕에 유리컵을 그려 1972년 <앙데팡당전>에서 평면 1등을 차지한 이동엽, 같은 전시에서 흰 바탕에 흰 베개 이미지를 그린 허황, 1973년 일본 무라마쓰(村松) 화랑에서     <묘법>을 전시한 박서보, 1962년부터 흰 창호지 작업을 해 온 권영우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에 포함된 작가들이다. 1970년대 일본인에게 조선 백자를 다시금 상기시킨 ‘흰색’이라는 공통점 외에 이들은 전시 이전이나 이후에 함께 만난 일도, 모노톤아트와 관련된 미학적 담론을 주고받은 일도 없었다. 이우환의 소개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일본 비평가와 일본 화랑주가 기획한 모노톤아트의 공식적인 첫 일본 전시는 그렇게 식민주의 ‘타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는 예전에 모노톤아트가 ‘모노크롬(Monochrome)’이라 불리는 현상을 우려했는데 최근에는 ‘단색화(Dansaekhwa)’로 불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모노크롬’이라는 용어를 쓰는  순간 모든 논의가 서구 담론의 하부구조가 되기 때문이며, 아직 국제화 초기 단계라서 서구인들은 아직 그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단색화’는 문자 그대로 ‘단색(單色)’ 즉 ‘한 가지 색깔’이라는 모노크롬의 개념도 벗어날 수 없고 ‘그림 화(畵)’로서 ‘그림’이라는 개념적 한계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서 제기된 ‘모노크롬(Monochrome)이 아니라 단색화(Dansaekhwa)’라는 외부 기획자의 주장은 그 용어들을 나란히 병기한 데서 자기 모순을 입증했다. 용어는 그것을 말하는 화자의 담론적 태도와 개념의 에센스가 집약돼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노톤아트’가 결코 ‘한 가지 색깔로 된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의 미술인들은 거의 모두 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색깔로 된 그림’이라는 뜻의 ‘단색화’를 쉽게  사용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러 가지 색조(tone)가 있고,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스트 페인팅(Modernist painting)’이나 ‘아메리칸 타입 페인팅(American type painting)’과 같은 모더니즘적인 ‘그림(회화)’ 개념의 평면성(flatness)을 훨씬 뛰어넘는, 시공간의 물질과 장소성의 프로세스 문제가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진지하게 자각해야 한다. 윤형근이나 박서보, 정창섭이나 정상화의 작품을 일부 모더니즘 회화 개념으로 다룰 수는 있겠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심지어 김장섭이나 김용익의 평면 오브제, 심문섭의 평면적 작업들을 어떻게 ‘단색화’라는 말로 다룰 수 있겠는가?
일찍이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의 도록에 서문을 썼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백색’도 아니고 ‘모노크롬’도 아닌 ‘흰 색’의 일본식 표기이자 특수명사처럼 사용된 ‘흰새쿠(ヒンセ)’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까닭을 밝혔다. ‘중간색을 사용하면서 화면이 지극히 델리케이트하게 마무돼 있는 회화들’이 서구의 백색 모노크롬(단색)과 달리, 색채를 없앤 흰 화면도 아니고 형태를 배제한 흰 공간도 아닌 ‘우주적 비전의 틀’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반면 또 하나의 서문을 썼던 이일은 안타깝게도 “백(白) 또는 백색(白色)이 한국 민족과 깊은 인연을 지녀온 빛깔이며, 빛깔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이라고 하면서도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이들의 화면 그것은 혹시 모노크롬의 것으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렸다. 이후 한국현대미술계의 작가와 언론, 그리고 비평은 이 ‘모노크롬’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상용화는 비운을 맞았다. 게다가 일본 ‘모노하(ものは)’ 용어의 뜻도 모른 채 이우환의 회화와 모노하 작업들을 혼동하면서, 모노크롬과 혼용한 ‘모노하’(?)라는 국적 불명의 말도 비평계에서 나왔다. 쉬운 길이 언제나 바른 길은 아니다.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 유신시대는 한편으로 언더그라운드 실험미술을, 다른 한편으로 모노톤아트를 잉태했다. 이 두 가지 경향은 한국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담론화할 수 있는 양대 산맥으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에서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모노톤아트는 양면성을 띠는데 하나는 현실 초월적인 노장 사상의 무위적 태도가 소위 ‘한국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표방한 군부정치 국가관에 공교롭게도 부합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거기에 최병소처럼 군부정치에 침묵으로 일관되게 저항하는 태도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김용익처럼 모노톤아트의 정치 권력화에 담론적으로 저항한 경우도 주목된다. 국가가 이들을 ‘한국적’이라 간주했으므로 언더그라운드 실험미술과는 달리 탄압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모노톤아트의 내부에는 이렇듯 국가권력이나 미술권력에 저항하는 작가와 국가관에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작가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을 넘어서서 다면적인 모노톤아트의 정치 사회적 측면을 보여준다.

단색화(우양) (9)

정창섭 <묵고(默考) No.95523>(사진 오른쪽) <묵고(默考) No.95524> 120×60cm(각) 1995

다양한 방법론들의 강점
모노톤아트에는 작가마다 독특한 방법론이 있었고, <에꼴 드 서울전>이나 <서울현대미술제>와 같은 단체전을 통해 모노톤아트가 집단 정치화했을 때도 개성적인 방법론들은  건재했다. 그 점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양상 그리고 모노크롬과 모노하 사이에서, 이우환과의 우정관계 속에서 간과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행위와 물성, 프로세스와 반복, 평면성과 공간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작가마다 독특하게 갖고 있는 방법론 중 내가 최근 주목하는 것은 하종현과 최병소 작가의 방법론이다. 단지 조형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적 의식을 동반하며 조망하는 것이다.(김미경, <최병소論-소멸하며 태어나다> 2006, <지우기의 미학> 2013, <하종현: 발언과 침묵의 예술> 2008, <기(氣)・통 (通)・시(時)・공(空)-하종현론(河鍾賢論)> 2012) 나로서는 박서보와 심문섭의 초기 작업들과 김용익의 작업 등에 대한 연구 또한 진행 중이다. 쉬포르 쉬르파스(Suports/Surfaces)가 유물론적 해체 방식으로 캔버스와 틀을 대하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한 방법론이 있었다는 점이나 모노하 작가들 간에는 더욱 복잡한 ‘모노’에 대한 해석적 방법론이 있었다는 점 등은 그 미술 경향들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한 요체였다. 따라서 모노톤아트의 커다란 담론적 경계 안팎으로 이들 방법론이 더욱 심화 연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는 지난 9월 1일 국제갤러리 심포지엄에서 이우환 작가에게 ‘모노톤아트와 이우환의 담론적 관계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답변은 분명할 수 없었다. 모노하 맥락에 있든 회화와 3차원 공간의 관계에 있든 이우환과 모노톤아트 작가들의 인간적인 우정 관계 이상의 미학적 공감대를 작업과 개념에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모노톤아트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하면서도 그 미학적 토대에서 자신의 작품을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도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에서 다시 한 번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모노톤아트가 전시되는 현상은 미술시장의 경제논리를 보여준다.
모노톤아트는 이우환을 매개로 일본에서 기원적인 첫 전시가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간단치 않은 갈등관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우정 전시는 이어졌다. 이우환과 함께 세계 미술시장으로 나아가는 모노톤아트에서 우리는 이제 ‘인간적인 친구 관계’와 ‘미학 담론’을 구별하여 다룰 수 있는 지성 정도는 갖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우환 (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28.5×161.8cm 1974

이우환 <점으로부터>(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28.5×161.8cm 1974

박서보 (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194.5×260cm 1972

박서보 <묘법 No. 10-72>(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194.5×260cm 1972

정상화 (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226×181cm 1980

정상화 <무제 80-9-23>(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226×181cm 1980

하종현 (사진 맨 왼쪽) 마포천에 유채 194.5×269.5cm 2006

하종현 <접합 06-010>(사진 맨 왼쪽) 마포천에 유채 194.5×269.5cm 2006

 

[Special Artist] 정복수

작가 정복수의 그림은 인간의 육체에서 시작해 육체로 끝난다. 그가 그린 인간의 모습은 벌거숭이다. 심지어 몸 속 머리속까지 보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얼굴과 몸은 생물학적 인간의 형상인 동시에 정신과 내면의 초상이다. 지난 40여 년간 한 가지 테마, 즉 인간의 육체에 몰입해 온 정복수의 ‘그림 그리기’는 수행자의 몸짓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이 시대 인간의 비망록이다. 인간의 본질과 원형을 탐구하며 자의식의 심연을 드러내는 작가 정복수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그린 욕망지도, 몸 지도

고충환  미술비평

느끼는 사람에게 삶은 비극이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이라고 했다. 느낌으로 사는 사람에게 삶은 순간순간이 고통의 연속이고, 생각으로 사는 사람에게 삶은 우습지도 않을 만큼 우습다는 얘기다. 느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삶에 밀착된 삶이며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생각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삶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의 집 불구경 하듯 관망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세계를 읽는 코드는 원체는 다중채널이지만, 그 채널은 크게 정신코드와 몸코드로 구분되고 모아진다. 당연히 상대적이지만, 정신코드로 사는 사람이 있고, 몸코드로 사는 사람이 있다. 정신코드가 발달한 사람이 있고, 몸코드가 발달한 사람이 있다.
정복수는 몸으로 사는 사람 같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사람 같다. 겉과 속이 같아서 속이 없는 사람을 생속이라고 한다. 작가는 그런 생속 같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 같다. 심성이 투명해서 그럴 일도 없겠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때문에 속에 없는 말을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 같다. 그런 사람은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믿는다고 했다. 그럼, 표면만 보고 표면을 믿는다는 말인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지의 정치학이 대세인 시대에,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한 시대에 표면만큼 의심스러운 것도 없음을 다들 안다. 그래서 행간읽기와 이면읽기가 중요한 거다. 그럼 다시, 작가는 표면만 보고 표면을 믿는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런 사람의 감각촉수는 거의 동물적이기 때문에 우회를 모른다. 대상 자체를 직접 겨냥하고 사물 자체를 직접 향한다. 그래서 행간읽기며 이면읽기랄 것도 없이, 사물대상 자체를 바로 꿰뚫어본다. 뭐 직관이며 혜안이랄 것까지는 없을 것 같고, 생속(속이 따로 없는)이 생속(사물대상의 진상)을 알아보고, 투명한 것이 투명한 것을 알아채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정복수는 그렇게 몸으로 살고 몸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의 몸 그림은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사람들을 그린 것이기도 하고, 인간일반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그림 속 사람들은 꼭 누구를 그렸다기보다는, 그저 익명적 주체들을 그린 것이고, 심지어 성기가 아니라면 남녀 구별조차 없는, 그런 그림이다.
다시, 작가는 몸을 그린다. 성기가 노출된 것으로도 알겠지만, 발가벗은 몸을 그린다. 창자와 같은 장기가 적나라한 것으로 보아 거듭 벗겨진 몸을 그린다. 옷을 벗기고 살 껍질을 벗겨낸, 그런 몸을 그린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몸속 장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을 그린다. 투명한 몸? 투명한 사물이 유행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시계, 투명가전, 투명액세서리가 유행이다. 그 자체가 시대양식 내지 모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신시대를 증언해주는 알레고리처럼 읽히는 것은 왜일까. 표면만 봐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시대, 온통 정체를 까발리기에 급급하고 연연해하는 시대, 그래서 더 이상 숨을 수도 숨을 데도 없는 시대에 대한 증거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로 온통 이런 이데올로기며 저런 이념, 이런 가치관이며 저런 세계관, 이런 진리며 저런 진실, 이런 상식이며 저런 합리로 첩첩이 중무장한, 그리고 그렇게 중무장 뒤에 숨는 사람들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복수가 그린 투명인간은 바로 이런 시대적 증언으로 인해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사람들의 옷을 벗긴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 옷은 계급과 신분의 기호다. 그렇게 계급과 신분으로 사람들을 포장해주는 위선의 옷을 벗어던지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옷은 그렇다 치고, 살 껍질은 또 왜 벗기는가. 살 껍질은 문명이 만들어준, 또 다른 옷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인본주의와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유통되는, 이성과 상식과 합리라고 새겨진 레테르를 무슨 장신구처럼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도덕과 윤리로 중무장된, 그런 옷이다. 그 옷을 벗겨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이 자연에서 문명으로, 문맹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억압된 것들이 귀환한다. 야생과 야성, 본성과 본능, 동물성과 식물성, 무의식과 잠재의식, 폭력욕망과 살해욕망, 마술과 주술과 같은 어둠의 자식들이 줄줄이 되돌아온다. 작가는 사람들의 옷을 벗겨 그렇게 귀환한 탕아들을 보고 싶고, 맞이하고 싶고, 방기(방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인(문명화 이전의 본연의 인간)의 도래며 회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되돌아오는 것들이 줄줄이 잇지만, 그것들은 크게 욕망과 욕구로 모아진다. 욕망과 욕구는 하나같이 억압된 것이란 점에서 같지만, 욕망이 영원한 결핍으로 조건 지워진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란 점에서, 그리고 욕구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생물학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이란 점에서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욕망과 욕구가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욕구가 해소되면 꼭 그만큼 욕망이 억압된다. 욕구를 좇으면 꼭 그만큼 욕망이 허해진다. 욕구가 없으면 덩달아 욕망도 없어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해소되거나 덜어졌다는 착각을 줄 수는 있다. 불완전하지만, 금욕주의가 의미를 갖는 이유로 봐도 되겠다. 게다가 자본주의 시대에 욕망은 또 다른 의미기능을 수행한다.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욕망은 사실은 또 다른 욕망 아님 더 큰 욕망을 불러들이기 위한 계기로서 작동하며, 따라서 욕망 자체는 결코 채워지지도 해소되지도 않는다. 애당초 욕망은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욕망은 존재론적 결핍 아님 존재론적 원형 같은 것으로서 주체가 세계의 맨살과 대면하는 일(현상학적 에포케와 불교의 면벽수행이 겨냥하는)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실체를 알기도 붙잡기도 어렵다. 생물현상과 유리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현상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욕망하는 인간을 그리는가, 아니면 욕구하는 인간을 그리는가. 표면적으로 작가는 욕구하는 인간을 그리고, 생리적 인간을 그리고, 허기진 인간을 그리고, 실존적 인간을 그리고, 지금 여기의 긴박한 인간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욕구로 나타난 그 생리적 현상은 욕망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뿌리의식에 연동되고, 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의 긴박한 인간을 그린다고 했다. 말하자면 작가가 일종의 투시도법을 적용해 그린, 엑스레이필름 기법을 적용해 그려서 보여주는 신체의 부분들, 이를테면 성기와 창자, 눈과 입술은 사실은 이 신체부위들로 대리되는 인간시장의 탐욕과 권력다툼을, 그리고 건전한(건강한?) 욕망의 표출을 그린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마구 남근을 휘두르고 싶다.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법의 입법자가 되고 싶고, 질서의 집행자가 되고 싶고, 권력의 주체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빨아줄 용의가 있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심지어 인간마저 상품으로, 통용되는 이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너를 밟아줄 준비가 돼 있다. 작가는 그런, 상대를 향해 날름거리는 세 치 혓바닥을 그리고, 상대를 유혹하는 고혹적인 입술을 그리고, 전시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단단한 놈을 그린다. 그리고 건강한 성욕과 건전한 식욕을, 축복처럼 터지는 성기의 환희와 절정을 그리고 창자의 추억을 그린다.

 나무에 유채 110.4×89.5×6.5cm 2004~2010

<존재의 집> 나무에 유채 110.4×89.5×6.5cm 2004~2010

 캔버스에 유채, 오브제 259.1×193.9×6.5cm(입체 143×40×20cm) 2008~2011

<꽃이 떨어지는 시간> 캔버스에 유채, 오브제 259.1×193.9×6.5cm(입체 143×40×20cm) 2008~2011

존재의 비망록
창자의 추억? 작가는 몸으로 살고 몸으로 그린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는 몸으로 보고 몸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욕망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온몸으로 본다. 그래서 몸 전체에 눈이 달려있다. 작가는 또한 온몸으로 욕망한다. 그래서 몸 전체가 성기다. 무슨 말인가. 작가에게 욕망의 지점들은 특정의 신체부위에 연루되지도 한정되지도 않는다.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욕망의 성분들은 몸 바깥쪽으로 확장되고, 몸 안쪽으로 연장되며, 의식 너머로 범람하고,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신체 부위는 더 이상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예속되지 않고, 오로지 욕망의 성분들에 연동될 뿐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신체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대신 욕망의 성분 여하에 따라서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대상, 자유자재로 재편되고 재구성되고 재구조화되는 대상으로 본다. 여기서 대상은 곧 몸에 해당하고 주체에 해당한다.
다시, 무슨 말인가. 작가의 자의식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다.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어떻게 갈리는가. 모더니스트는 세계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서 구조화돼 있고, 주체 역시 그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총체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이런 세계의 형이며 주체의 꼴이 사실은 신념 내지 욕망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말하자면 그에게 세계는 파편화돼 있고, 주체 역시 조각나 있다. 그래서 겨우 부분인식만을, 그러므로 불완전인식만을 할 수가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맥락 속의 사유가 가능할 뿐이다. 맥락 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텍스트 밖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런 맥락 아님 저런 맥락 속에서 저마다의 세계를 짓고 공 굴릴 뿐. 거대담론과 대서사와 같은 거시적인 비전이 흘러간 옛 노래로 치부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작가의 그림에서 신체가 마구 절단되고 자유자재로 결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신체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욕망지도를 그린 것이고 몸 지도를 그린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창자 끝에 매달린 성기를, 허벅지 안쪽에 숨어 있는 입술을, 가슴 위에 정박한 입술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작가는 이런 그림이 지겹다. 허구한 날 욕망을 직시해야 하고, 항상 의식의 성기(레이더?)를 곧추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한 자기 그림을 밟아달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밟아서 그림이 더럽혀질 때 비로소 그림은 완성된다고 보고, 최소한 그림이 의미를 획득한다고 본다. 무슨 말인가. 작가가 그린 그림을 밟는다는 것은 작가를 밟는다는 것이다. 마조히즘인가? 마조히스트인가? 맞다. 그러나 그 마조히스트는 감각적 쾌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인식을 향하고 존재인식을 겨냥한다는 점이 다르다. 욕망을 외화하고, 욕망을 직시하고, 욕망을 죽여라. 그러면 비로소 욕망(불교에서의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죽음을 담보할 때만이 그렇다는 전제를 기억할 일이다. 조르주 바타유 식으로 말하자면 마조히스트는 작은 죽음이고 예비적인 죽음이다(바타유는 에로스를 작은 죽음이라고 했다).
작가는 리어카에 화구를 싣고 전국을 주유하면서 오로지 그림만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림이 지겹다면서, 다른 한편으론 오로지 그림만을 그리고 싶단다. 이 무슨 모순화법이고 이율배반인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지겹기 때문에 그려야 하고, 지겹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 할 줄 아는 것이 그림밖에 없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림밖에 없고, 세상에 복수할 수 있는 무기가 그림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이 삶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했다. 태어난 이유를 해명해주는 것으로 치자면 오로지 미학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내면으로 숨는다고도 했다. 내면 말고 따로 숨을 데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면과 미학은 하나로 통한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미학은 더 이상 삶을 아름답게 해주고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휘황찬란한 무엇, 의미심장한 무엇이 아니었다. 미학이란 자기 내면을 파고들고, 삶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복수는 195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85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9년 청년작가회관에서 첫 개인전 <바닥畵-밟아주세요>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0회 여회 개인전과 <한국미술 -인간 동물 기계전>(국립현대미술관 1997),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가나아트센터, 2001) <다시보는 1970-80년대 한국미술>(서울시립미술관, 2012)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작업실에서 작업한다.

20

<하늘로의 여행> 캔버스에 유채 72.7×90cm 2008~2011

 

[Exhibition Focus] 건축적 부록

Architectural Supplement

협업을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부부작가 이부록, 안지미가 이번에는 소설가 김연수와 함께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9월 18일부터 10월 8일까지 갤러리 잔다리에서 열리는 <건축적 부록전>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다.
세 명의 예술가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적 시점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다시 30년이 지난 2048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폭력으로 제거할 수 없는 오류의 세계

안지미 (이하 안) 2002년 일주아트센터에서 열린 <동상이몽전>에서 작가와 디자이너로 처음 만났죠. 당시 저는 일주아트센터에서 리플렛과 도록 등 시각이미지를 총괄하는 객원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부록 씨는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로 전시에 참여했어요.
1996년부터 북 디자이너로 출판계 일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뭔가 다른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점에 이부록이라는 작가를 만난거죠. 같이 작업한 것이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부록 씨는 영상작업에서 다른 매체로 확장하려는 시점에 저를 만나서 작업 영역이 좀 더 확장하지 않았나 싶어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서로 이런 얘기를 해본 적 없는 것 같네요.
이부록 (이하 이) <동상이몽전> 리플렛을 통해 지미 씨와 함께 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우리는 서로의 작업에서 매력을 느꼈죠. 이후 200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두 번째 개인전 <워바타> 때 픽토그램 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함께 작업을 시작했고, 당시로서는 전시와 책이 만나 서로 보완해 완결되는 방식의 전시였어요. 만일 우리가 그때 만나지 않았다면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지 예측할 수 없어요. 원래부터 책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전시와 책이 같이 나오는 일이 흔하지 않았죠. 도록과 책은 확실히 다르잖아요. 그런 점에서 전문적인 편집능력을 가진 지미 씨의 도움이 컸고 이후 전시와 동시에 책을 기획해 발간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취한 것 같아요.
안 전시는 관람객이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보지 않으면 안되는 한계가 있는데 반해 책은 시간과 공간에 자유로운 편이죠. 물론 책 역시 독자가 구입해서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없죠. 전시와 책 두 매체 모두 각자 폐쇄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굉장히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점 때문에 두 매체를 연결하면 굉장히 흥미롭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사실 처음부터 협업을 하자고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부록 씨가 저를 통해 출판에도 밀접하게 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작업을 많이 했죠.
이 본격적으로 협업한 것은 2008년 청계천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부터죠.
안 2008년 청계창작스튜디오에 함께 입주해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청계천에 살다시피 하며 청계천이 주는 이상한 매력에 흠뻑 빠져 지냈어요. 제  경우 동교동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유학한 4년 빼고는 거의 홍대 지역을 떠난 적이 없는데,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을 잘 몰랐던 거죠. 청계천에서 노동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저는 기존의 커머셜한 작업을 대폭 줄이고 부록 씨와 함께 컨셉추얼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이때 청계천 주변 구도심을 탐사한《  창백얼굴》과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 뒤집어 보기를 시도한《  UPSET NEWYORK / NY》, 두 권의 책이 나왔죠.
《  창백얼굴》은 작은 피규어의 목 부분에 자석을 이식해 얼굴이 바뀌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드러낸 것이라면《  뉴욕》은 같은 피규어가 뉴욕이라는 도시에 이식되어 거꾸로 박혀있는 모습, 책을 거꾸로 뒤집어서 보면 도시가 뒤집혀 있는 풍경이에요. 마침 우리가 뉴욕으로 여행을 간 시점이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직후라서 모든 사고의 패턴이 바뀌는 순간이었죠. 서울과 뉴욕만큼 모든 것이 빠르게 사라지고 변화하는 도시도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자가 한국 생활을 체험하고 쓴 기사를 봤는데, ‘미래도시를 보려면 서울로 가라’ 그런 내용이더군요. 유럽은 과거 전성기 때의 기억에 집착해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국은 모든 것이 시시각각 새롭게 바뀌며 24시간 돌아가는 미래세계 도시라는 거죠. 하지만 세월호 사건의 충격으로 한국 사회가 과연 선진국을 건설한 건지, 작동 불능의 도시를 건설한 건지 의아해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다시 청계천 얘기로 돌아갈까요.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 고층빌딩과 동대문시장 사이에 있는 특이한 공간이죠. 사회적으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문화적 유산이자 정치적 발판 구실을 했죠. 이후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의해 청계천창작스튜디오가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프닝 때 오세훈 시장이 온다고 떠들썩했죠.(웃음)
결국 스튜디오 운영도 정치적으로 활용되다보니 주체가 없이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시설관리공단을 떠돌다 결국 3년 만에 사라졌어요. 근데 청계천이라는 공간이 과거의 화려했던 시기에 비해선 못하겠지만, 근대화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곳이고, 실제로 무엇이든 만들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만들어내는 보물상 같은 곳이었죠. 그때 청계천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앞으로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저희 작업의 뿌리는 청계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 그러고 보니 2004《  워바타 전쟁 그림 문자》(명성출판사)부터 10여 년 동안 우리가 낸 책이 총 11권이 되었네요. 그러지 않아도 처음엔 10년쯤 지나면 우리가 하는 작업의 윤곽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물론 지금 딱 뭐라 정의내릴 순 없지만 여태까지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이 참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동안 매번 지원금을 받아 책을 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그 사이 독립출판 붐이 일어났지만 초창기 때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출판을 계속 해왔죠.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뭔가 만들어 내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원금은 곧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하는 만큼 작업이 단순 자기만족에 그치면 안돼요. 작업 내용도 그렇고 작업태도에도 작업 자체는 사회 환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죠. 그림문자에서 출판한 책은 2006년 작가 김태헌의《  1번국도 –평택에서 임진각까지》가 첫 작업이고 그 다음부터는 전시와 연계해서 우리 책을 주로 냈죠. ‘업셋프레스’는 프로젝트 이름이고.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 작업은 추상적인 개념의 언어가 많아요. 그렇다보니 소통이 수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면에서는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타자와의 소통일텐데 지금까지 작업은 소통에 소극적이지 않았나. 다들 작업이 난해하다고 얘기해요. 물론 쉬운 예술이 곧 좋은 예술은 아니지만 작업도 깊이가 생길수록 훨씬 편안하게 소통되는 것 같아요. 작업이 아직은 너무 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미 씨 말대로 어떻게 하면 작업으로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네요.
단적으로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등 픽토그램의 경우 디자인적 개념이자 소통을 위한 세계 공통언어인 픽토그램에 새로운 개념을 덧붙여 다른 의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작업이었어요. 픽토그램이 보편성 추상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재단한 부분을 복원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했는데, 픽토그램이라는 굉장히 기능적 언어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해 기능성을 제거한 작업 즉, 다양한 오류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어요.
일종의 오독놀이, 파자놀이인데, 평화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평화라는 개념은 인류에게 존재하지 않아요. 단어는 있지만 의미는 일치하지 않는 그런 용어들이 많죠. 지미 씨가 프랑스에서 유학했다면 저는 DMZ (비무장지대)에서 유학했다고 말하곤 하는데, 감옥처럼 완전히 고립된 그곳에서의 복무생활은 은둔형인 저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요.
DMZ는 남과 북이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서로 유토피아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통해 이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의 장소이죠. 불통의 극단적인 지점이 전쟁이라 할 수 있는데, 픽토그램은 가장 원시적인 언어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작업에 도입했어요. 이후에도 스티커프로젝트 작업으로도 파생되어 이어졌죠.
《     세계인권선언》(프롬나드)의 경우 충분히 예술적이면서도 위트가 있고 소통에도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선언문을 가지고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워바타》(2004)를 출간해준 선배와 술자리에서 1948년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작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부록 씨와 작업하게 되었죠. 의외로 많은 사람이 세계인권선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더라고요.
활자로만 머물렀을 때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죠. 선언문을 읽어보면 짧은 문장에 응축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에 참 어렵게 느껴지는데 부록 씨가 익숙한 이미지를 차용하고 또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선언문을 대비시켜 보여주니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됐죠. 그 작업을 하던 2012년은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오큐파이(occupy)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죠. 당시 “1% 대 99%”라는 구호가 시각화되면서 파급효과가 굉장히 커졌어요. 기회가 된다면 선언문의 시각화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 싶어요.
제 경우 군생활 이후《  한겨레 21》에 카툰 연재를 위해 진보와 보수성향의 기사를 동시에 읽으면서 의식을 깨우치게 된 게 그 작업의 근간이 됐어요.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배권력을 비판한 팔레스타인 출신 만화가 나지 알 알리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죠. 카툰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발언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세계인권선언’을 시각화한 작업이었죠. 해독이 안되는 텍스트가 의미없듯이 해석이 안되는 이미지도 무의미하죠.
잔다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 <건축적 부록>은 부록 씨와 소설가 김연수 씨와 협업하는 새로운 시도였어요. 김연수 씨와의 인연은 1998년에 시작되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협업을 하게 되었죠. 소설가와 설치작가의 협업과정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이부록_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_2005-2014-1

이부록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2005~2014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전시광경

DF2B8427

이부록 <금자탑> 나무 자석 철부산물 2014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대한 질문
사실 지난 4월 세월호 사건 이후 저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아 예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굿모닝 미스터 오웰전>에 참여하면서 조지 오웰의 텍스《  1984》와 백남준이 바라본 1984년, 그리고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대해 좀 더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오늘날 30년 전에 비해 긍정적인 면은 더 발전했지만 감시사회, 시스템의 문제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도 더 극대화됐죠. 현재를 담고 있는 미래에 대한 입장에서 소설과 같은 형식을 책으로 풀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차에 김연수 씨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고, 함께 작업하게 된거죠.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 지하1층은 빅데이터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에 사라진 어떤 인물에 대한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소설과, 종이책이 사라진 미래사회에 책을 복원하는 지하출판의 개념으로 풀었고, 지하 2층은 청계천에서 수거한 폐기물을 활용해서 유물이나, 우주 폐기물처럼 보이게끔 했어요. 이번 전시는 1984년 백남준이 바라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비추어 세월호 이후 시스템 문제를 건드리고 있어요.
그 당시 미디어를 송출하는 인공위성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인공위성이 우주 쓰레기가 되었잖아요. 청계천의 쇠들의 꿈도 사실은 인공위성이나 탱크가 되는 것이죠. 청계천에서 우주에서든 쓰레기가 되어버렸어요. 빅데이터도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수집된 정보이지만 쓸모없어 버려지는 것을 상징하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청계천에서 소외받은 것들에 대한 메시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금자탑으로 연결되죠.
이전의 작업이 사라지는 근대 풍경에 관한 것이어서 과거에 대한 재해석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과거, 현재, 미래까지 보는 계기가 되었죠. 이번에는 오웰의 입장을 통해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설정이죠. 세월호 이후의 문제들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종이책이 금지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두운 곳에서 비밀스럽게 책을 보듯 스폿 조명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부록 씨가 효과적인 조명을 찾아냈죠.
정보통제와 상호감시, 자기검열 등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노트북용 USB LED조명과 콘셉터 등을 조합한 것인데, 미래조명은 최소한의 전력과 최대한의 전달효과라는 가정에 따른 거였어요.
무대에서 자주 활용되는 스폿조명의 개념은 사실 집중되는 곳이 아닌 그 이면을 생각하자는 것인데, 언론의 방식을 포함해서 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에서 택하는 전시방식처럼 과거의 시간을 차단해서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죠.
이번 전시를 준비 과정에 이부록 씨는 설치작업에 집중했고, 저는 김연수 씨와 협업해서 책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기존의 작업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작업이 어느 정도 분리된 것 같아요. 앞으로 부록 씨는 작가로서 프로젝트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이고 저는 내년에 출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협업이 올해처럼 활발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폭력을 동력으로 하는 사회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는 한 <스티커 프로젝트> 등 기존 작업은 계속 진행할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다른 타자와 함께 하자는 생각에 저 스스로 분열해서 지난해부터 ‘이무부(리무부, 李無不, Remove)’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어요. 부록을 제거하다 이런 식으로…. 저는 은둔형 성격이지만 협업의 필연성을 동시에 느끼고 있어서 제 안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끊임없이 이중사고가 일어나고 있어요. 협업하면서 느끼는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자본화된 예술가와 그에 저항하는 예술가 사이의 충돌 등 여러 측면에서 이중사고가 발생하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분열하게 되었어요. 내 안에서 다른 입장도 보고, 나 자신도 그런데 타자와는 더 심할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분열이 가속화될 것 같아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작가가 계속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겠죠. 단지 부록 씨는 이름을 바꿔 나가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름 설명하다가 장황하게 되었는데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작업은 이부록의 것이고 저 작업은 이무부의 것 그런 건 아니죠.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안지미와 이부록이 지난 10년간 출간한 책

안지미와 이부록이 지난 10년간 출간한 책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안지미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파리 ISCOM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정병규 디자인, 월간 《지오》, 솔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으며 2003년 작가 이부록과 함께 출판사 ‘그림문자’를 설립해 시각 이미지 생산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부록은 197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으며, <제5회 광주비엔날레> <신호탄전> (국립현대미술관), <1번 국도>(경기도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안지미와 함께 <Sticker Project> (아르코미술관/ 그림문자), <세계인권선언> (이음갤러리 / 프롬나드), <금지된 숲> (복합문화공간에무 / 그림문자), <Warvata> (인사미술공간, 인더페이퍼갤러리 / 두성북스) 등을 전시와 출판으로 선보였다.

[section_title][/section_title]

epilogue | <건축적 부록전>에 참여한 소설가 김연수

DF2B8523

어떤 협업

이부록 씨와는 10년 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소설집을 펴낼 때 처음 알게 됐다. 여기서 알게 됐다는 것은 그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편집자가 내 소설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며 일러스트레이션을 청탁했는데, 나중에 출판된 책을 보니 과연 소설과 그림이 서로 어울리는 바가 있었다. 편집자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작업을 위해 내 소설을 읽어본 이부록 씨는 자신이 대학 시절에 쓴 글과 비슷하다는 소감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매우 독특한 소설을 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때는 사람들이 ‘표지의 이 괴상한 피에로는 너냐?’라고 종종 묻곤 했던 그 얼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전혀 모를 때였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 2010년 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랑 광화문광장에서 이상의 <오감도> 연작 11편을 낭독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하는 작업을 했던 구민자 씨가 통인동의 시청각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연락을 해왔다. 아울러 전시작품 중 하나가 내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필사한 노트라며 내게 잠시 시간을 내어서 소설을 낭독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린 작은 낭독회가 끝난 뒤, 찾아온 관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표지에 실린 그 얼굴, 그러니까 이부록 씨였다.
그가 10년 전의 인연 때문에 내 낭독을 들으러 통인동까지 찾아올 리는 없다는 걸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인가 얘기를 들어보니 솔깃한 바가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백남준 씨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위성쇼를 선보인 지 올해로 30년째가 되는 해여서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기념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백남준의 기획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쓴《  1984》를 1984년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것이었다. 조지 오웰은 1984년의 세계를 전체주의적 통제가 일반화된 디스토피아로 그렸지만, 백남준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연결된 세계를 낙관적으로 봤다.
이부록 씨는 그 기념전의 연장선에서 디자이너 안지미 씨와 나, 이렇게 셋이서 조지 오웰의《  1984》를 2014년 서울에서 되돌아보는 전시를 하자고 내게 제안했다. 그 제안은 흥미로웠다. 1984년에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인상적으로 시청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1984년의 그 감동을 되새겨본다면 어떨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 자신부터가 중학교 2학년생에서 40대의 중년이 된 것처럼, 이 세계 역시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변한 게 틀림없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2048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한 편 쓰기로 했다.
내 소설 속의 서울은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가 아니라 빅 데이터가 모든 개인의 사생활을 파악하고 있는 세계다. 어떤 점에서 조지 오웰의 예측은 옳았다. 1984년에는 세계의 각 도시를 위성 생중계로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과학기술이 제시했다면,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까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이 시대에는 점차 사생활의 종말이라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완전한 통제사회를 뜻한다. 이 통제사회에서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라는 이슈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이부록 씨와는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지금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서로 공감했고, 지금까지 해온 각자의 작업 안에서 그 공감의 맥락을 연결하자고 방향을 잡았다. 안지미 씨의 디자인 역시 디스토피아에 도래할 종이책의 종말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소설과 미술의 접점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테지만, 경험해보니 서로 만나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협업이었다. 이부록 씨와 안지미 씨, 두 사람과의 유쾌한 대화를 통해서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김연수・소설가

 

[Review] 강애란 – 책의 근심, 빛의 위안

강애란 – 책의 근심, 빛의 위안

갤러리 시몬 8.28~10.26

알루미늄이나 종이죽으로 캐스팅해 만든 ‘책 보따리 오브제’들까지 넣는다면, 강애란은 거의 15년이 넘는 동안 책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와 인식론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씨름해왔다. 그녀의 책들은 도서관과 서점의 선반 위에 놓여 오랜 역사의 축적된 지식을 암시하기도 했고, 계몽의 빛으로서 이성과 지식을 외치듯 안으로부터 밝은 빛을 발하기도 했으며, 보자기와 끈에 묶여 감추어짐으로써 은밀한 주술적 행위로서 지식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강애란이 제시해 온 실제의 책, 가상의 책, 멀티미디어로 이루어진 책들의 세계는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가 공존하는 ‘이질성’으로서의 세계이자 지식의 무게로 가득 차 있는 장소들 또는 ‘숭고함의 공간(The Space of Sublime)’이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탈물질화하는 시대에 책의 미래에 대한 우려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했던 그녀의 책 설치작품들이, 관람자의 ‘인터랙티브 읽기 방식’ 혹은 ‘공감각적 읽기 방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 인터페이스, 그리고 비디오이미지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애란 전시는 여전히 책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리얼리티와 버추얼 리얼리티가 중첩된 공간 안에 LED와 비디오이미지들, 촉각적인 사물들과 추상적인 숭고의 의미들이 공존하던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표현 방식 및 내용에서 구체적이고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우선 1층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는 이전에 3차원의 공간에 놓이던 ‘책-사물들’이 2차원의 회화 공간 안에 ‘책-그림들’로 존재하게 되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책-그림들’은 마치 기하추상과 극사실주의 사이 혹은 평면과 사물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가 혼용해 온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의 타협점을 보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12명의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 2층의 비디오설치 작품들이다. 그동안 책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작가는 이제 책 안에 기록되는 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빛을 발함으로써 비어있던 라이트박스로서의 디지털 책이 존재의 외적인 부분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지나간 아픈 역사 속에서 체험된 슬픈 삶으로 꼭꼭 채워진 책 속의 이야기들(비디오 영상들)은 작가의 시선이 내부로 향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가 만드는 책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서문에도 쓰고 있듯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작품은 작가의 작업 궤적에서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 아픔이자 사회적 이슈이기도 한 위안부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그동안 여성과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와해시켰던 작가 강애란의 미술가로서의 위상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되어 책의 내부에 자리 잡게 된 배춘희 할머니의 노래와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대 여성들의 삶과 예술, 문학으로 관심을 옮겨가고 있는 작가의 내적 시선의 확장을 기대해본다.
전혜숙・이화여대 교수

[Review]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8.22~9.28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서진석과 아시아 20개국, 20명의 기획자 공동기획으로 ‘2014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이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렸다. ‘민주주의와 예술’이라는 개념을 공공적 담론으로 확장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이번 전시는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른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정체성을 아시아 각국의 사회, 공공적 예술가들의 새로운 해석적 관점으로 살펴본다. 한국의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이항대립적 민주주의처럼 20세기 타의에 의한 근대화와 급격한 성장을 겪은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적 산물로서 이식된 민주주의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민주화를 체험해왔다. 처음 모든 국민이 자신이 일처럼 아파했으나 이제는 진영의 논리에 빠져 더 이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세월호 문제처럼 이분법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생명의 가치가 경시되는 이 시대에 공공적 예술 활동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인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모색해보는,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전시였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은 아시아 각국의 사회적, 공공적 예술가들의 시각을 통해서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미와 정체성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아직도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이항대립적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의 특징을 특유의 미적 감성으로 표현하는 배영환은 <유행가-이상한 열매>라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캔버스에 깨진 술병 조각으로 인권운동의 상징처럼 된 빌리 홀리데이의 동명 제목의 노래 가사를 형상화했다. 소재와 내용면에서 대중성과 통속성, 키치적인 하위문화를 통해 정치적 언급을 드러내는 작품으로서 전체 전시공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지만 큰 울림을 전해주었다.
일본의 비디오아트 그룹 침↑폼은 <실시간>이라는 영상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현장에서 실시간 중계하듯 흰 천을 바닥에 펴놓고 붉은색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는데 마치 일본 국기처럼 원으로 시작한 그림은 곧 방사능 표시문으로 완성된다. 작가의 몸에 상처를 내는 작업을 통해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치사회적 이슈를 충격적 퍼포먼스로 해석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중국의 허옌창과 종교가 중심이 되는 교조적 민주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인도 작가 케미 바센느 그리고 왕이 지배하는 군주제의 가치관이 민주주의에 영향을 주는 태국 작가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20세기 외세에 의해 개방을 하고 근대화된 서구적 산물로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성장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특수성 위에 이식된 서구식 민주주의는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며 아시아 각국의 정체성을 이뤄왔다. 이렇듯 서로 다른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아시아 국가들에 민주주의라는 의미는 서로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서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주의 양상들을 예술을 통해서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먼지 하나에도 우주가 담겨있다’는 말처럼, 개별적인 것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개별이 조화를 이루면 우주가 되고, 우주는 개별의 존재 이유 하나하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가 절실하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은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점을 지나 자기분열의 위기를 맞은 시대에 던지는 작은 담론적 질문이자 과거와 현재에 걸쳐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정체성을 되짚어 보는 것을 넘어서서 21세기 미래의 새로운 조화론적 민주주의와 예술의 공공적 역할에 대해 논의하고 전망하는 전시였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존중과 공감’이라는 가치를 배우고 ‘민주주의와 예술’이라는 공공적 담론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공동연구와 시각이미지 생산을 통하여 아시아 민주주의라는 중요 담론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협의체의 다음 행보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전동휘・예술학

[Review] 임영숙

임영숙

월전미술문화재단 한벽원갤러리 8.26~9.7

향기 향(香)자는 벼(禾)가 햇볕(日)에 익어가는 것을 뜻한다.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는 분명 시각적인 것이지만, 이를 감성적인 것으로 변환시켜 그 감동을 배가시키는 옛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다. 이 벼(禾)가 사람의 입(口)에 들어가게 되면 평화로움을 뜻하는 화(和)가 된다. 이에 이르면 단순한 글자 하나에 담긴 의미가 예사롭지 않게 전해진다.
작가 임영숙의 작업은 밥을 주제로 한다. 하얀 쌀밥에 꽃을 더하는 그의 화면은 정갈하고 소박하다.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화면은 현대미술의 난해한 설정이나 교묘한 복선의 구조 같은 것은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 평범한 일상성을 통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직설적인 듯하고 즉물적인 듯하지만 그것을 통해 전해지는 시각적 메시지는 결코 단순한 한두 마디의 단어로는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삶의 어떤 부분들과 연계되어 묘한 여운을 증폭시키며 전해진다. 그것은 지식을 통해 읽힌 이성적인 앎의 결과가 아니라 극히 인간적인 감성을 통해 감지되는 안온한 정서의 확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하얀 쌀밥으로 대변되는 삶의 상징성은 이미 그 의미가 반감되었지만, 밥은 여전히 특정한 정서와 감성의 상징으로 읽힌다. 작가는 하얀 쌀밥을 가득 담고 갖은 꽃으로 장식하였다. 그것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삶과 인간에 대한 의식의 구체화인 셈이다.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을 통해 내밀한 사유를 개진하는 작가의 섬세한 감각은 그 자체가 소박하고 따뜻한 것이다. 굳이 과장하거나 꾸밈이 없이 소박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감성은 수용성 안료 특유의 부드럽고 침착하며 깊이 있는 색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수렴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고답적인 전통주의나 경직된 소재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것이기에 더욱 신선하고 반갑다.
미술, 혹은 문화가 지닌 공능 가운데 하나가 영혼, 혹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치유라 할 것이다. 작가가 전해주는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은 그저 한 끼의 배를 채우는 물질이 아니라 문명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물질이 범람하는 시대에 인간과 그 삶에 대한 정신적인 위안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밥 한 그릇으로 축약된 시대적 담론이자 밥 한 그릇으로 표현된 감성의 확인이라 할 것이다. 향기 향(香)자가 시각적 이미지를 감성적인 내용으로 수렴하여 그 상상의 외연을 무한대로 확장하듯이 작가는 흰 쌀밥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화면으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감성의 성찬을 배려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Review] 시대의 눈 – 회화

시대의 눈 –  회화

OCI미술관 9.12~10.31

그곳에 가면 물감 냄새가 자연스레 콧등에 와 닿으며 눈과 머리를 자극한다. 어렴풋한 잔상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미술관의 흰 벽은 그간 수많은 이미지의 거소였다. 2010년에 개관한 OCI 미술관은 시작부터 회화에 대한 고집스러운 시선을 드러냈다. 신진 작가부터 젊은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고, 중견 작가들의 날카로운 혜안 또한 놓치지 않고 회화가 가는 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미술시장의 침체로 인해 그간 마켓에서 선호되던 회화가 잠시 주춤하고, 대신 설치 형식의 복합매체 작업이 전시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던 시기라 회화에 대한 미술관의 진득한 관심은 화가들에게 여러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회화의 물성과 치열한 화폭 그 자체를 담아내던 전시장에 이번에는 강서경, 공시네, 박미나, 박진아, 배윤환, 안두진, 정수진, 차혜림, 허수영 총 9명의 작품들이 모아졌다. 주로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작가들은 현재 미술계에서 왕성히 활동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는 화가들이다. 이 중 절반의 작가는 국내의 주요 상업 갤러리와 관계하고 있으며, 다수의 작가가 국공립미술관 전시,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 국내외 미술상 수상, 대안공간에서의 활동 등 국내 미술계 시스템과 관련해 총체적인 활동 범위를 지닌다. 본 전시가 접근하고 있는 회화의 ‘동시대성’은 국내 화단에서 대두되어 온 회화의 범주를 관통한다.
작년 이맘때쯤 OCI미술관에서는 <진경, 眞鏡>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화를 동시대적 관점에서 조망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동양화 전시에 이은 두 번째 회화 기획전으로, 한국 현대회화의 현주소를 살피며 컨템포러리 회화에서 두드러진 변화와 특징적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본 전시가 접근하고 있는 회화의 동시대성은 전시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시대의 눈-회화: Multi-Painting>에서 페인팅 앞에 붙은 ‘멀티’는 다중, 혼성, 복합성, 다시점 등 다원주의적 성향의 현시대성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전시장에 걸린 회화작품들에는 켜켜이 내러티브들이 중첩돼 있으며, 화가의 손끝에서 사투한 붓질의 흔적도 가득하다. 게다가 벽으로부터 나와 공간에 놓인 설치 형식으로 인해 회화의 복합적 형식과 중층의 내러티브는 현실 공간 속으로 연장되어 나간다. 전시된 작품에 내포된 멀티의 관점은 내용, 형식, 기법, 소재 등 회화의 안팎에 걸쳐 살펴볼 수 있다.
9명의 작가가 다루는 회화에 대한 관점은 미술관의 수직적인 공간 구성에 의해 세 개의 층에서 진행되며, 각 공간이 특정 주제로 구분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몸의 움직임에 따른 시각적 구성을 따르게 된다. 회화를 멀티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화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대면하는 박진아와 허수영의 작품은 시공간의 흐름을 가시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보인다. 스냅사진을 활용하여 동일 인물의 흔적을 중첩된 시공간으로 파악한 박진아의 회화와 1년간의 계절 변화를 하나의 화면에 겹겹이 중첩시킨 허수영의 회화에는 스쳐지나가는 시공간의 흐름이 그림 속에 담긴다. 비가시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가시적인 실존을 부여하는 과정은 정수진의 회화에 담긴 의식의 다차원적 세계관, 그리고 공시네의 작업에서 상상의 실체가 차원의 과정을 거쳐 회화의 실체로 나아가는 것과 관련된다. 박미나의 ‘딩벳 회화’와 안두진의 회화는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정보, 개념적 교환체계로서의 독창적인 회화의 언어를 구사해낸다. 이렇게 무가 유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다층적 언어는 회화의 매체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들로 이어진다. 강서경, 차혜림의 회화는 설치 형식을 통해 회화적 개념을 공간 속으로 확장시켜 현실 공간과 환영 공간 사이를 매개시킨다. 50m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벽면을 가득히 에워싼 배윤환의 작품에서 회화는 무궁무진한 저장고와 같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다양한 장면과 내러티브를 복합적으로 화면에 배치시켜, 회화에 여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묘사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란 듯이 펼쳐 보인다.
근래 젊은 화가들이 회화의 전통적인 재현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매체적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회화는 더 많은 정보를 유입하고,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들이 화면 안에 담긴다. 가시화를 더하는 과정은 보는 것에 한정된 닫힌 층을 파괴하고, 멀티적인 층으로서의 새로운 층들을 화면으로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다층의 회화들은 더 이상 관람객들로 하여금 유유히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차분히 그림을 감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멀티-회화는 관람객들에게 전통적인 관람 형식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과 환영 공간 사이를 저울질하며, 이 사이의 영역을 더 적극적으로 탐색하길 요한다.
심소미・갤러리 스케이프 책임 큐레이터

 

[Review] 안규철 –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규철 –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하이트컬렉션 8.29~12.13

실패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며 사는 세상에 실패를 목적으로 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전시가 열렸다. 안규철의 개인전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All and but Nothing >은 목표가 없는 온갖 헛수고를 텍스트와 오브제, 그리고 영상작업으로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서로에게 물을 분사하는 <세 개의 분수>, 바람으로 구슬을 굴리는 <바보웅덩이>, 시곗바늘과 시계 자체가 같이 돌아가 시간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 <두 개의 시간>이 정겹게 우리를 맞이하며 먼저 가벼운 웃음을 선사한다. 컴컴한 비디오 방으로 들어가 맞딱드리는 <실패하는 법>은 실패자들의 정곡을 찌르는 10개의 지침으로 1번과 10번이 압권이다. 계획은 세우지 말고 그냥 포기해버리라고 한다. (10. No plan, 1. Give up) 본격적인 헛고생은 프로젝트와 모니터로 보여주는 영상작업인데, 총 10편을 다 보는 데에 100분 가까이 걸린다. 비디오 속 작가는 나무가 되어 아주 천천히 숲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중력을 이기려고 벽 옆면 걷기를 시도하고, 쓸데없이 탱고를 익히기도 한다. 익숙해지면 이내 그만 두는 것은 악기연주도 마찬가지이다. 딸이 좋아하는 음악을 간신히 연주하고 난 후 아코디언을 분해하여 조각들을 마을의 곳곳에 버린다. 한 번의 연주는 다시 재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지만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된다.
헛수고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상 작업은 본격적으로 비디오 방에서 계속된다. 마치 노동으로 참선을 하듯 벽돌을 쌓아 완성되지도 않을 건축물을 짓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사다리에 오르고, 목적 없이 나선형으로 걷고, 땅을 파고 다시 묻는 삽질도 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의 등에 다시 페인트칠을 하는 등의 쓸데없는 노동을 한다. 보고 있으면 한심하고 미련해서 답답함과 지루함이 일지만, 영상에 등장하는 작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무엇이 더 있을까 하는 보는 이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며 끝을 내버린다. 시간과 수고는 아무 소용없이 소비되고, 목적 없는 갖가지 행위를 장시간에 걸쳐 본 관객은 어이가 없다.
그러나 안규철은 헛수고의 과정만을 보여주며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실패를 기억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현 시대에 목적과 성과에 피로한 우리를 위해 손을 내밀고 따뜻한 말을 건네듯 다양한 장치로 관객을 위로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거울을 한곳으로 반사해 전시장에서도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달을 그리는 법>이 마치 시구와 같이 우리를 맞이하였다면,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수많은 비즈를 천장에 매달아 마치 보석으로 만든 커튼과 같은 형상으로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감을 나타내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가는 관객들을 위로한다. 유리잔 연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나는 너를 위해> 역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사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동작이 연속되는 비디오작업에서도  잔잔하고 포근하게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악적인 사운드가 배경에 있었다. 반복되는 실패를 보는 것이 답답하고 미련해도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치유의 효과가 있는 사운드 덕이다.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나는 괜찮아요. I am OK.”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아 보이지만 이러한 사운드는 진정으로 실패를 아름답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작가는 매일 아침 한 장의 노트에 글을 쓰거나 드로잉을 하며 하루를 연다고 한다. 실패에 대한 안규철의 작업노트는 담담하면서도 절절하다. 매번 실패를 주는 사회에 대해 최대의 복수로 자행되는 작가의 의도적인 실패는 이미 성공한 실패이다. 작정하고 시작한 소소한 실패는 성공을 꿈꾸다 매번 좌절한 현실의 뼈저린 기억을 치유해준다. <두 벌의 스웨터>는 한쪽에서는 스웨터를 짜고 다른 한쪽에서는 스웨터를 풀어 결국은 제로가 되는 작업이다. 성과가 없음은 무의미한 것이고 보잘것 없는 것이고 그렇게 행한 사람은 바보이고 미련퉁이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이러한 무의미한 일들을 반복하며 실패를 안고 살고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당연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두려워하며 성공과 목표에 집착한다. 자신이 찾는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없으면서 마구 달려가려고만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숨은 상처와 우울감은 그대로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이번에도 안규철의 작업은 살며시 우리를 달래주고 있다. 의도된 실패를 위해, 무의미한 헛수고를 위해, 작가 자신은 엄청난 노동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괜찮아. 달라지는 것은 없어. 아무 일도 없을거야.”
가슴이 따뜻해진다.
한금현・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