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김윤신

한원 (15)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담은 작가 김윤신은 80의 고령에도 청년작가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잘라 조각하고, 햇살 머금은 빛깔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오로지 조각의 재료에 매료되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터를 잡고 오랜기간 작업해온 작가 김윤신의 화업 60년을 되짚어 보는 대규모 개인전이 6월 11일부터 7월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이어진다. 1세대 여성 조각가의 작품에 담긴 영혼의 울림에 귀를 귀울여 보자.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 김윤신의 회화와 조각

최태만 국민대 교수

6월 11일부터 7월 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영혼의 노래·김윤신 화업 60년전〉이 열린다. 1980년부터 상명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1983년 겨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자연과 문화, 사람에 매료돼 아예 학교를 사직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진화랑(1988), 현대갤러리(1990), 동아갤러리(1995), 박여숙화랑(2003) 등의 초대를 받아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2007년 국민일보갤러리에서 회화를 중심으로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보면 이번 개인전은 근 8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하는 전시다. 그것도 팔순을 맞아 조각과 회화를 엄선하여 보여주는 전시라는 점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레스 지역에 있는 김윤신미술관의 김란 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윤신과 함께 연구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현대조각사를 연구하며 1970년대 그의 나무 조각 자료를 수집한 바 있던 나는 그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만났다. 팔순의 원로작가임에도 활달한 그를 직접 대하였을 때 평생 작업에만 전념해온 한 예술가의 강한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김윤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중에서도 1988년 진화랑 개인전에 이일이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일은 1960년대 중반 파리에서 김윤신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단발머리에다 블루진 바지차림의 그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언뜻 분간하기 힘들었고 행동거지가 또한 그러했다”고 썼다. 과연 그러했다. 내가 만난 김윤신은 작업에 전념하다 방금 작업실에서 출발한 양 수수하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차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때부턴가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생각 속의 잡념을 모두 지워버리고 마음과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조각가 최종태 역시 어느 날 나에게 ‘이 나이가 되니 머릿속의 전쟁이 사라지고 생각이 투명해졌다’라고 말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이야 80의 나이가 무색하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어르신을 일러 ‘노익장’이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자 때만 하더라도 나이 70에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하여 종심(從心)이라 했으니 80쯤 되면 온갖 집착과 잡념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에게 김윤신은 투명한 정신을 지닌 원로예술가로 비쳤다. 그런 맑은 영혼은 그의 회화작품에서 깨끗하고 밝은 원색으로 표현된다. 그의 회화에서 특징적인 이 원색의 향연은 팜파스 대평원의 녹색과 푸른 하늘, 광활한 자연에서 성장하는 다양한 나무와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화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그재그의 선은 산수를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그리고 적·청·황·흑·백색은 한국의 전통 오방색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이 색채와 형태들로 직조된 화면은 말 그대로 낙원의 이미지이자 마음의 풍경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 추출한 모티프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분할하는 면과 면을 연결하는 곡선의 율동은 이 작품들을 서정적인 색면추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우아한 회화는 그냥 순수한 추상화이거나 색채로 표현한 서정시가 아니라 작가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임을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회화작품은,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만물의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까지, 영원한 삶의 나눔을(合과 分)주제로 하였다. 나눔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깊은 내면에는 원초적 생명력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것을 향한 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노래, 그 영혼의 소리는 다양한 색상의 파장으로 선과 면을 이루어 사랑과 나눔을 표현하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김윤신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입체로 표현하면 그의 조각이 될 것으로 믿는다. 단일한 것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의 형태가 결합된 형태 속에 재료 자체가 지닌 결과 다른 결을 더 붙인 조각의 경우 회화와의 관련성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조각이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경우가 많으므로 조각의 입체적 구조가 회화에서 평면적인 구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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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알가로보 50×47×45cm 2014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다
1959년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기 전해에 열린 제7회 국전에서 〈아침>으로 특선을 하며 조각가로서의 전도가 양양했던 그는 홍익대 미대 재학 중 구상인체조각을 추구하던 김경승으로부터 로댕의 조형을 터득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미국에서 철 용접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용접 실기실을 개설한 김정숙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용접기법을 이용한 철조작업을 발표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였으며 사진자료만 보더라도 한때 이 새로운 기법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철조작업보다 앞선 초기 작업이 민간신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반면 철조에서는 재료기법의 특성 때문인지 형태를 구축하려 했음이 두드러진다.
1964년 파리로 유학을 가서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닐 때는 한국의 박을 이용한 부조와 판화에 전념했다. 귀국 후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은 목조에 집중된다. 특히 긴 통나무를 사용해 마치 돌탑처럼 표현한 조각에서는 토템을 현대조각의 논리로 소환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가 민속적인 것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십자가의 형태에 부적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인 형태를 해체, 재구성하여 새긴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파리 유학시절 제작한 판화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할 즈음인 1973년 그는 권영우, 김구림, 김종학, 김창열, 송번수, 이우환, 정건모 등과 함께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당시로서는 작품만 출품했지만 이것이 남미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아예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1974년에는 서울대 미대 출신인 이양자, 안성복 등과 의기투합하여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에 앞장섰다. 여성조각가들의 활동무대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여류조각가의 권익을 옹호하며, 여류조각가의 국내외 활동과 상호간 활발한 협조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1974년 1월 12일에 창립한 이 단체는 그해 9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3명의 창립회원이 출품한 작품들로 창립전을 개최했다. 당시 청주사범대학에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초대 총무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목조건축의 가구(架構)인 공포(栱包)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출품했다. 같은 해에는 대학의 한 해 후배인 정관모가 회장으로 활동한 한국청년작가회도 창립했다. 이러한 단체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김윤신은 1983년 12월 학기말을 이용해 조카가 살고 있던 아르헨티나로 떠나 한 달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기왕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였으니 관광만 하지 않고 대표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면서 그는 광활한 대지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 특히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지 못한 재료인 단단한 재질의 나무가 지천에 널려있음을 발견하고 아르헨티나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그는 이복형 대사에게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대사와 공보관의 주선으로 로베르토 델 비자노(Roberto del Villano)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미술관장을 만난 것은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김윤신으로부터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비나노 관장은 먼저 작품부터 보자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빈민촌에 임시로 마련한 작업실을 방문한 비자노 관장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식물원의 야외공간을 전시장소로 주선하여 시립미술관 초대로 1985년에 열린 전시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자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아예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국립미술관(Palais de Glace)을 포함하여 아르헨티나의 여러 도시의 주요 미술관은 물론 멕시코의 국립예술의궁전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에서 온 중남미의 여성조각가이자 화가로서 자기 위상을 구축했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김윤신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알가로보, 팔로산토, 케브라쵸와 같은 나무를 재료로 한 조각을 제작했다. 팔로산토는 전기톱을 사용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단단한 재질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무겁고 단단한 나무를 자르고 켜는 과정이 마치 성직자의 수행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김윤신의 조각은 대체로 수직적인 것이 많다. 그것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나무의 생명력에 대한 그의 예찬이 추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안〉연작의 경우 축은 수직이지만 그것을 횡으로 감싸고 있는 고리와도 같은 형태가 많은 큐브로 구성돼 단순함 속의 복잡함, 질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 규칙적이지만 그것을 단순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에 운동과 리듬을 부여한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shape)가 작품의 옷이라면 그곳에 새겨진 요철과 빗금은 조각의 피부이자 혈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부로 우리의 시선이 틈입할 수 있는 공간의 여유를 허락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정중동(靜中動)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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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김윤신

성장하는 생명에의 예찬
1987년부터 브라질에서 구한 오닉스와 같은 준보석의 돌을 사용한 작품도 발표하고 있다. 톱으로 자른 표면의 무늬는 이 돌에 축적된 시간의 궤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무와 다른 정서, 즉 무한에의 동경, 대지의 알인 바위가 품고 있는 시간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아가 그의 조각은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의 구조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수직으로 직립한 두 개의 나무를 세워놓은 작품은 당간지주를 연상시키고, 나무의 표면에 새긴 사선의 흔적은 대지의 주름을 연상시킨다. 회화에서 보여준 낙원에의 동경이 조각에서는 그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로 향한 생명예찬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는 형태와 재료의 질감을 존중하면서 작가의 의지가 깃들어있는 표면의 작업의 흔적은 그의 생각이 자연 너머의 절대자를 향하고 있음을 추측게 만든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초월을 향한 수행의 기록인지 모른다. 아마 그에게 노동에의 헌신은 기도의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잡념을 비우고 작업한다는 그의 말, 그것이 최근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전기톱으로 나무의 표면에 상처를 내면서도 그것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일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합이합일(合二合一)’은 그래서 왠지 불교의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를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면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로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

김 윤 신 Kim Yunshin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70년부터 14년간 홍익대 상명대 성신여대 등에 출강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정착해서 활동하고 있고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미술관을 개관했다. 아르헨티나와 서울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 참여했다.

ARTIST REVIEW 김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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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Break oneself > 182×102cm(각) 1988, < The spirit age・nsa1994607 > 180×88cm(각) 1994

사진은 재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현대미술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수는 1980년대에 회화, 판화, 설치 등 타 매체를 적극 활용해 사진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을 선보여 한국 사진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다. 6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The New Wave in Korean Photography 1988-1998 DAE SOO KIM>을 통해 다양한 사진적 실험을 통해 내면 세계를 표현한 김대수의 초기 작업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때를 아시나요?

최건수 사진비평

나보다 년식이 십년쯤 앞선 사람들은 영화 ‘국제 시장’을 보았다. 그리고 보신 분들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의 이미지에 몸을 맡겼다. 오래 묵은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는 전쟁과 가난이라는 유산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관객의 눈물로 스스로 증명했다.나 같은 7080 초노는 영화 ‘세시봉’을 선택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명동 맥주집이나 하드 락카페를 전전했던 세대들이 선택한 영화들이다. 주말이면 통기타 하나 달랑 매고 교외선 기차에 의탁하여 일영이나 송추로 향했다. 거기서 봉두난발 장발을 휘날리며 미친 듯 고고와 트위스트를 췄다. 그 시절의 낭만이고 모던의 몸짓이었다.내가 낭만과 모던에 투신했을 때, 김대수는 미국으로 유학(1981)을 했고, 내가 1980년 내내 군사정권에 맞선 데모대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반독재 구호를 외칠 때, 홀연히 귀국(1987)하여 대학 훈장(1988)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한국 사진의 ‘새로운 물결’의 한 아이콘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게 1988년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 시좌전>이다. 이 전시는 사진가 구본창이 기획했는데, 결과적으로 기존의 한국 사진을 근본부터 뒤흔들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당시 이 전시장을 찾은 내 입장도 그랬다. ‘이것도 사진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대체 유학을 가면 이런 사진을 배우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제까지 보고 해온 사진을 전면적으로 점검해 볼 이유가 생긴 것이다. 여하튼 이 전시회에 참여했던 사진가들(구본창,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은 이후 승승장구하고 한국사진의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은 곱씹어 볼 일이다.(이규철은 작고)그 이후, <11월 한국사진의 수평전(1991/1992/1994)> 은 이 전시의 확대 재생산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한국 사진에 밀려 온 새 물결은 무엇일까? 그게 ‘바람 찬 흥남부두’가 2015년에 ‘국제 시장’으로 환유되듯이 전통적 의미의 사진이라는 도그마에 환몰 되었던 족쇄가 비로소 풀리고 그것들을 일시에 뽕짝 수준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김대수의 초기작 같은 이미지에 충격을 받고 열광하는 사진가가 있다면 그 또한 아마 그 의식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국제 시장’ 언저리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다. 오늘날은 지지고 볶는 것이 얼마나 현란한지. 또한 얼마나 빠르게 바뀌는지. 그 수준에서 다시 김대수의 초기 사진을 대하니, 어쩌랴 그만 영화 ‘세시봉’이 생각나고, 그의 사진을 ‘세시봉’과 등가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것이다.‘그 때를 모르시는 분’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이야? 인화지 위에 오일 페인팅을 하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는 것이 뭐 그리 신기하다고? 동판 위에 사진을 인화하고 부식하여 보여주면 사진이 아니라고? 미술 판에서 성공 못하고 대접 받지 못하니까 사진판에 기웃 거린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재현과 복제라는 미덕에 기댄 ‘바람찬 흥남부두’ 세대가 틀림없다.조금만 관심 기우려 세계 사진의 흐름을 살펴보면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진의 경향은 소위 만드는(make)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록과 재현 사진 반대 축에 진영에 속한다. 사진 초기부터 끊임없이 타진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었다. 이 시기는 김대수를 비롯한 유학 1세대들의 유학 시기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변화 현장에서 그 흐름에 합류했던 것이다. ‘사진은 사진이다.’ 라는 구시대를 지나 ‘사진이 예술이 되고 이미지’가 되는 새 시대에 호응했다. 물론 만드는 사진도 표현 방법에 따라 구성 사진(Fabricated photography), 연출사진(staged photography), 손질된(Manipulated photography), 창조사진(Invention photography), 계획사진(set-up photography) 등, 다양한 이름을 얻게 된다. 변화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순수한 모던사진은 지루해졌고, ‘라이프’ 혹은 ‘룩’같은 화보잡지의 폐간과 맞물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용도 폐기 될 위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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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이후・nba1990103 >(오른쪽) Archival pigment print 120×150cm 1990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사진적 실험
이런 환경 변화에서 스스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 ‘사진이 사진이어야 하는가?’일 것이고, 혼돈 속에서 사진가들은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서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진은 기계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적 표현의 도구로서 점검 받게 되었다. 사진의 역사 내내 꿈꾸어 왔던 세계가 실현 가능해 진 것이다. 기록의 용도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인 표현 도구로 그 지평이 확장 된 것이다.김대수의 초기 사진은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1988년 귀국 후 첫 개인전이었던 <창조 그리고…>는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한에서 열렸는데, 그 때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표현 방법이 새롭다. 그러나 더 궁금한 것은 이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읽혀지기를 원하는가?” 그는 말했다. “자유롭게…,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모 생각대로 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외적 요인 속에서 스스로 한 독립 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작품은 작가가 만들었으나, 작품의 행로는 작품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이미지가 품은 다층적 발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귀국 후 초기 십년간은 세계 사진의 흐름 속에 있었다. <빛으로 탐구>(1983) 와 <창조 그리고…>(1985), <태초에>(1990), <탄생 이후>(1990), <영의 시대>(1994)> 그리고 <지혜의 땅>(1996)이 그것이다.이것들의 주제는 ‘생명’ 혹은 ‘죽음’ ‘영(靈)’ 같은 인간의 기본적 문제와 그가 몸담은 기독교적 관심에 천착하고 있었던 까닭에 묵직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찍는다는 사진적 행위 만에 의존하지 않았다. 물감을 바르고, 수없이 많은 선을 그어보고, 바른 물감을 걷어내는 예술 행위들의 흔적들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순간을 잡아내는 사진가의 모습이 아니고, 스스로 해야 할 예술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몸의 예술을 사진에 녹여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기존의 사진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신선했다.<사진 새 시좌전> 이후 25년이 지났다. 오늘 날의 한국 사진은 거침이 없다. 좌고우면하면서 눈치 보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씨앗들은 뿌려 준 것이 세시봉 시대의 모던 사진가들의 형식실험이 밑거름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대표아이콘인 김대수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고 즐거운 것이다. ●

김 대 수 Kim Daesoo
1955년 태어났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미국 파슨스 디자인학교 사진학과에서 학사, 프랫 인스티튜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3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1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사진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ARTIST REVIEW 방정아

2015__낯선고요

오른쪽 페이지 <낯선 고요> 캔버스에 아크릴 91×116.8cm 2015

2015_the Hal

< The Hall > 캔버스에 아크릴 181.8×259cm 2015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작가 방정아가 부산 공간화랑에서 개인전 <기울어진 세계>(4.22~5.5)를 열었다. 작가는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하고 삶의 리얼리즘을 여실히 드러낸다.

납작한 세계에 납작하게 매달리기

조선령 부산대 교수

방정아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면 하나 하나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보기보다 작가가 통과해온 시대의 두께들이 작품들과 공명하는 지점을 다소 거창하게 고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을 지켜봐온 사람이 느끼는 개인적인 의무감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임무가 항상 비평적 임무에서 시작된다는 벤야민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시대의 불씨’와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비평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작품을 시대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방정아의 1993년작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2015년작 <The Hall>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시대의 ‘공기’와 관련된 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라는 명칭이 아직 낯설지 않을 무렵 그려진 <바다 끝에 선 여인들>은 첫눈에도 시퍼런 결기로 뭉쳐있다. 날카로운 선과 강한 붓자국, 신경질적이지만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색채, 무게있는 볼륨감, 그리고 화면을 꽉 채운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인물들의 배치가 보인다. 마치 뒤러의 <네 사람의 사도>를 연상시키는 이 구도는 거친 삶을 살아온 익명의 여인들의 육체에 기념비적 엄숙성을 부여한다. 화면 중앙에 비어 있는 공간을 둠으로써 인물들을 좌우로 나누는 조형적 배려를 하고 있음에도 결국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인물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인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심적인 에너지는 캔버스 틀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반면 이번 공간화랑 전시에 출품된 <The Hall>은 비어있는 공간이 없는데도 빈 공간이 무수히 발견된다. 아니 공간 그 자체가 스스로를 비워내는 것으로, 아니면 더 이상 공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혹은 공간의 입체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듯하다. 볼륨감은 극소화되고 세계는 납작해졌다. 선은 더 이상 강렬하지 않고 뭉그러지고 으깨진 채 어디론지 방향 모를 곳으로 흘러내린다. 인물들은 마치 인체 데셍의 기초를 무시하듯 삐뚤게 묘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파스텔톤이라고 하는 중성적이고 온화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아크릴 물감의 무딘 금속성 느낌이 극대화된 화면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포기한 채 제멋대로 발라진 물감들로 인해 무기력한 둔중함으로 응고된다. 이 같은 변화는 같은 전시에 출품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낯선 고요>에서 몇 개의 거친 붓질로 단순하게 나누어진 무의미한 면들은 역시 공간이 삭제된 납작한 세계를 보여준다. 박제된 사슴의 텅 빈 눈과 같은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이 세계가 카드로 세워진 위장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회화라는 매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실험이자 어쩌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을 어떤 이행의 과정이며,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변화된 감수성의 차이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세계는 납작해졌다. 아감벤의 말처럼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이 극단적인 현실성의 사회는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노골적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꽉 차 있어서 동시에 아무런 의미도 소유하지 못한다. “대체가능성”이 모든 잠재성의 공간을 차지했다. 앞뒤와 두께를 가진 풍경 대신 들어선 깊이 없고 비밀 없는 장면들, 생명을 상실한 듯한 비유기적인 인물들은 그대로 오늘날의 세계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세계는 한편으로 사적인 것을 말소시켰지만 동시에 공동체 역시 삭제시켰다. <바다 끝에 선 여인들>에서 빈 공간은 인물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The Hall>에서 그러한 결합은 없다. 인물은 원근법 법칙에 들어맞지 않게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일관된 크기도 없고, 적절한 장소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오려붙인 공간, 아니 차라리 공간의 부재라고 해야 할 어떤 것이 발견된다.

〈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두 작품 사이에 있었던 작가의 전시들 중에서, 필자는 2008년 대안공간 풀에서 개최된 개인전 <세계>를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꼽고 싶다. 이 전시가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The Hall>의 차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정아는 정확한 원근법적 공간 혹은 널찍한 하나의 장소를 등장시켰는데, 이러한 공간의 제시는 단지 그 공간이 와해되는 지점을 포착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혹은 공간이 스스로를 말소하는 지점의 다른 이름임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었다. 작가는 언뜻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듯한,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발생한 보이지 않는 파국이 은밀하게 중심을 삼키고 있는 소름 끼치는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재개발구역>에서 그것은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로, <자연사>에서는 한쪽 구석에 널브러진 동물의 사체로, <안 보이는 사람>에서는 불길한 녹색 연기로, <세계3>에서는 땅을 잠식하는 보라색과 회색의 덩어리들로 표현되었다. 모래사장, 풀밭, 도로, 하수구, 연기 등의 형태를 띤, 그러나 사실은 더 이상 공간이나 형상이 아닌, 흘러내리면서 화면을 지우는 이 덩어리들은 방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을 지워버리면서 세계를 납작하게 만드는 어떤 산사태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그렇게 공간이 지워진 세계를 <기울어진 세계전>에서 만난다. <기울어진 세계전>의 작품들은 더 이상 그린다는 행위의 결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작품들은 마치 캔버스 표면 위에 기름처럼 얹혀서 화면을 기울이면 한쪽으로 흘러내릴 듯한 미끌미끌한 껍데기 같다. 두께 없고 방향 없고 중심 없는 이 그림들은 시대의 납작함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아니, 기묘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납작한 세계 속에서, 아니 세계에 ‘매달려’(납작한 세계 속에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서는 ‘납작 엎드리기’가 필요하다. <네…>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한 태도는 형식에서도 반향된다. 묘사가 필요없다는 듯이, 공간과 볼륨과 색채가 다 귀찮다는 듯이 납작 엎드려 있는 그림. 이러한 그림은 아감벤 말마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비선택’이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인 저항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방 정 아 Bang Jeongah
1968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서대 디자인&IT 전문대학원 영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갤러리 누보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2년 부산청년작가상과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산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ARTIST REVIEW 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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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기우제 > 점토 바세린 3.5×12m 2015

화면에 구축된 대상을 표현하는 재료는 바로 그 대상에서 추출했다. 열에서 전기, 다시 열로 변환하는 에너지의 순환을 통해 생명이 탄생한다. 수분을 상실하여 쩍쩍 갈라진 흙 사이는 바세린겔로 메워 더 이상의 건조를 막는다. 이렇듯 백정기가 구축한 작품은 비가시적인 운동의 기운을 구체적 장치와 행위로 보여준다. 모두 그의 개인전 <Mind Walk>(두산갤러리, 6.3~7.4)이 이야기하는바, 백정기가 작품에 녹여낸 ‘수행’의 과정을 살펴보자.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바이스디렉터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상대의 조건이 되고 그렇게 인연이 되어 서로에게 복잡, 미묘하게 영향을 끼치면서(연기론(緣起論)) 중층적으로 이어진다(중중무진(重重無盡))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처럼 이번 백정기 개인전도 우연하게도 가뭄이라는 지금의 심각한 자연재해를 떠올리게 해서 기묘한 느낌이 앞섰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처럼 보이는 <기우제> 때문인 듯싶은데,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을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마음을 담은 기우제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 것이다.
전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바깥 현실과의 이러한 연결들은 사실 외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 근거 없는 것들이겠지만 세상사란 어쩌면 이렇게 근거 없는 것일지라도 마음의 동(動)함에 따라 현실에 특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가뭄으로 세상이 타들어가니 자연 앞에 무력한 한낱 인간으로서 그 비과학적인 효능효과와 상관없이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근거 없는 믿음이라도 가지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쌓여야 세상의 어떤 변화들이 생기는 법일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을 굳이 동양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바탕에 서양의 이성 혹은 과학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작동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획, 분리하는 사유의 흐름들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설정들을 문제시하고, 그 분리 이전의 통합된 원형 상태를 지향한다. 곧 세상 만물이 서로 교류, 융합되어 있어 끊임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돌고 도는, 혹은 주름 짓고 펼쳐지는 그런 사유체계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서구의 과학적인 방법론과 테크놀로지를 차용한다. 서구의 과학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기 위해 다시 과학적인 방법론을 ‘전용(appropriation)’하는 셈인데, 그런 면에서 일종의 의사(擬似, pseudo)과학, 혹은 주술이나 연금술에 가깝고, 과학적 원리의 엄밀한 작동보다는 특정한 의미의 연결이나 발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은 예술적 실험이나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작가의 의중이 드러나는 작업이 <기우제>다. 전시장 한 벽면을 흙으로 바르고 흙과 함께 벽면에 접착시킨 물이 증발하면서 생겨난 균열된 틈을 바세린으로 메운 이 작업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오기를 소망하는 행위에 불과한 기우제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물건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다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으로, 그러한 힘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종의 주술 행위이다. 비/반과학적 행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대지의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도록 상징적 염원과 소망으로써, 대자연을 치유하고 순환케 하는 각별한 의미를 담아내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 역시 이러한 의미에 더해 자신의 작업 일반을 함축하는 (예술적) 대상의 갈라진 틈을 메우려 한다. 이때의 갈라진 틈은 실재 작업에서 갈라진 물리적 틈일 수도 있겠지만 대지와 자연의 갈라진 틈, 나아가서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간극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간극과 틈을 메우려는 행위는 그렇기에 분리되고 구획된 것들을 연결 접속하고 봉합함으로써 대자연의 원리가 서로 순환하여 흐르도록 하는 근원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자연 속 물의 역할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작업에서 특히나 물을 소재로 한 작업이 많은데, 2008년 <Pray for Rain: Mhamid>는 사막화가 진행되는 모로코에서 작가 스스로 샤먼이 되어 한국의 전통 기우제의 요소를 접목한 퍼포먼스 작업이고, 2010년 <Sweet Rain>은 전시공간에 사카린을 섞어 단맛이 나도록 한, 이른바 단비가 내리게 한 관객 참여형 설치미술 작업이다. 이때의 작업들도 실재의 ‘비’라는 물리적인 현상보다는 대지를 순환케 하는 상징적 촉매재로, 물의 특정한 의미를 발현시키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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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기: 촛불과 흙> 달걀, 초, 식물, 열전소자, 백열램프, 유리, 나무, 스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4

의미의 확장과 공감의 전파
작가는 이처럼 어떤 현상의 물리적인 작동 자체보다는 그 물리적 작동과 연동되어 발생하는 의미의 발생과 구현에 더 비중을 둔다. 의미의 구동장치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전용’한 셈이다. 이러한 의미의 발현은 다시 더 많은 의미로 연결, 확장되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물 대신 바세린을 사용한 점은 물(바소르, wassor)과 기름(오레온, oleon)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을 융합시키는 바세린의 어원상 의미도 있겠지만 화상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을 치유해야 했던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연결되는 식이다. 앞서 말한 의미들에 치유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2007년 <Vaseline Armour> 연작부터 사용한 바세린은 작가가 생각하는 치유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바세린으로 장갑, 투구, 갑옷을 만들어 전신을 보호하는가 하면 건물의 갈라진 틈을 보수하려 했던 이 작업은 작가의 치유 개념이 개인적인 치유인 동시에 사회적인 치유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피부 보습제에 불과한 바세린을 상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 같은 비과학적인, 하지만 어떤 믿음 때문일 것이다. 주술일 수도 있겠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이 가진 이러한 주술적인 면모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접촉주술: 새싹, 개나리, 진달래, 영산홍> 연작과 <접촉주술: 16개의 보> 작업은 작품명 자체를 접촉(감염)주술(contagious magic)로 설정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 융합되어 있으니, 떨어진 후에라도 어떤 기운에 의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감주술(homeopathic magic)’로 명명된 작업도 있는데, <유감주술: 매화>는 작가의 아버지와 함께 협업한 신작으로 예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를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먹으로 그리고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게 안테나 구실을 하게 함으로써, 매화의 신묘한 기운을 도처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러한 기운과 에너지를 받느냐 못받느냐 아니라 그 기운을 확산시키려는 마음, 곧 공감(empathy)의 차원일 것이다. 믿음이나 소망 말이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발생시킨다는 유감(모방)주술은 사실 잘못된 미신이거나 그 자체로 과학적 타당성, 유효성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간절한 마음이나 선용(善用)의 차원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기우제 역시 마찬가지다. 비나 물을 바라는 마음을 습한 속성을 유지하게 하는 바세린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확장시키고 안테나처럼 널리 전파되는 매화그림으로 매화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널리 공감시키려는 그러한 마음, 혹은 시도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시 시도된 <무제: 부화기와 촛불>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촛불의 열로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계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가시적인 기계적 작동과 장치에 앞서, 간절한 염원을 상징하는 촛불로 밤의 불길한 기운을 몰아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탄생케 하려는 그 (엉뚱하기만한) 의도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작가가 활용하는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는 이처럼 마음을 경험하고, 가시화함으로써 이를 관객과 공감하려는 그저, 한낱 장치일 뿐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립된 세상의 간극과 틈을 연결, 교류, 융합시키려는 엉뚱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과 경험들을 통해 과학, 주술, 연금술과 비슷하지만 결국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만의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을 펼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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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類感)주술: 매화> 한지, 전도성 잉크, 송신기, 라디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5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잉크로 그린 그림을 안테나로 삼아 송신기에 연결하고 전시장 내부의 라디오에서 전파를 수신한다

백 정 기 Beak Jungki
1981년 태어났다. 국민대 입체미술과를 졸업했다. 영국 첼시 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수료하고, 영국 글래스고 미술학교 순수미술과(석사)를 졸업했다. 국내 및 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WORLD REPORT| NEW YORK

새 휘트니 미술관은 최근 뉴욕의 명소로 급부상한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이라인 파크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고 미술관 입장객들에게 뉴욕시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미술관 뒤쪽은 계단식으로 디자인되었다.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America Is Hard to See

1930년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설립한 휘트니뮤지엄이 50여 년 만에 이사를 감행했다. 새 보금자리는 로어 맨해튼 웨스트빌리지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갠스부어트가(街). 뉴욕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천문학적인 건축비를 들여 렌조 피아노가 설계하고 완공한 휘트니뮤지엄은 개관전 <America Is Hard to See>(5.1~9.27)을 시작으로 관람객을 새집에 맞이했다. 허드슨강을 바라보며 우뚝 선 뉴욕 미술의 자존심 휘트니뮤지엄의 집들이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허드슨 강변에 세워진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

서상숙 미술사

2008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이며 미술관 건축의 노장, 렌조 피아노(77)가 설계한 새 건물의 디자인을 발표하고 2011년 5월 기공식을 함으로써 큰 기대를 모은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 휘트니 미술관이 완공되어 지난 5월 1일 개관했다. 새 주소는 99 Gansevoort St. New York City, NY 10014. 맨해튼 서남단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전망 좋은, 422억 달러짜리 9층 빌딩이다.
개관전은 <America Is Hard to See>(5.1~9.27)로 휘트니의 컬렉션에서 고른 작가 400여 명의 작품 600여 점이 전시된다. 그중 25%가 처음 수장고를 벗어난 작품들이다. 1900년 이후 현재까지 유일하게 미국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수집해온 휘트니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미국현대미술사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인 미트패킹 디스트릭의 갠스부어트가(街)에 위치한 새 휘트니는 폐쇄된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만들어 2009년에 개방한 후 (현재도 구간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60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는 등 뉴욕의 명소로 각광받는 하이라인 파크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또 지리적으로 뉴욕의 가장 큰 화랑가인 첼시와 맞닿아 있고 뉴뮤지엄과 그 주변에 형성된 새로운 화랑가 로어 이스트 사이드(LES)와 더불어 뉴욕 현대미술의 중심지를 다운타운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관 며칠 전 휘트니가 기자들을 초대해 49년 만에 옮기는 집들이(프레스 프리뷰)를 하던 날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이 흥분과 기쁨이 넘쳤다. 하루종일 미술관 직원들과 렌조 피아노 건축사무실과 시공사 직원들이 그룹으로 나뉘어 미술관 구석구석을 소개했는데 “이 보존연구실은 미술관이 처음으로 갖게 된 것” “극장을 처음으로 갖게 되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제 테라스가 생겼으니 야외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등등 ‘처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앙증맞은 모양에 맛도 일품인 미니 피자와 컵케이크도 무한정으로 제공되었다. 집들이에 음식이 빠질 수 없는 건 세계 정상의 미술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49년 전 2000여 점이던 소장품이 현재 2만2000여 점으로 늘었고 21세기에 들어 현대미술 장르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1966년 지어진 업타운 메디슨 애비뉴 건물의 한계성을 절감한 휘트니가 이전을 결정하고 8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휘트니와 57억 달러를 쾌척한 뉴욕시의 야심적인 프로젝트였다.
2001년 다운타운인 월스트리트의 쌍둥이 빌딩을 테러리스트에게 잃은 뉴욕시는 2007년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뉴뮤지엄을 유치하고 이어 휘트니 미술관까지 이전하도록 도움으로써 다운타운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두 미술관의 다운타운 이전/개관은 단순히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부서진 집을 새로 지어주고 불타버린 옷을 새로 사 입히듯, 상처받은 다운타운의 뉴요커, 나아가 전 뉴요커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희망을 주는 프로젝트여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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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휘트니 미술관은 허드슨 강변에 세워져 멋진 전망을 자랑한다. 동시에 태풍, 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비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photograph by 서상숙)

미술관 기능을 우선시 한 설계
뉴뮤지엄이 개관하면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는 갤러리가 모여 들어 새로운 화랑가로 각광받고 있을뿐만 아니라 음식점, 호텔, 패션스토어가 잇달아 문을 열어 마약중독자와 홈리스들의 거리에서 개성있는 예술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휘트니가 위치한 미트패킹 디스트릭은 본디 정육점과 정육기구들을 팔고 포장하는 공장이 있던 곳이다. 1960년대 게이 나이트클럽이 처음으로 이곳에 문을 연 이후 현재까지 입장하기가 까다로운 나이트클럽이 많은 지역이며 1990년대 후반부터 알렉산더 매퀸, 스텔라 매카트니,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등 고가의 패션스토어가 문을 염으로써 패션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휘트니 미술관은 10여 년 전 미술관이 소유한 인접 빌딩들을 연결해 기존 미술관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단계에서 구조적인 문제에 부닥치면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지난 2009년 뉴욕시가 소유하던 현재의 부지를 매입함으로써 이전이 확장되었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미술관 설립자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트 밴더빌트 휘트니 여사(1875~1942)가 1918년 휘트니 미술관의 전신인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연 곳이자 1930년 미술관을 연 그리니치 빌리지도 있어 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한다.
새 휘트니 미술관은 무엇보다 미술관 기능을 우선순위에 놓고 지어졌으며 ‘소통’과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구조를 띤다. 완공 전 빌딩 외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한 사람들조차 개관 후 일제히 찬사를 보내고 있다.
《아키텍스 뉴스페이퍼》의 앨런 브레이크는 “전시실의 알맞은 조명, 신중하게 계산된 도시와 강의 전망, 묵상의 순간들을 제공하는 휘트니는 뉴욕에서 가장 만족할 만한 미술관 환경을 갖춘 곳”이라고 극찬했다. ‘모양보다 기능’에 충실한 렌조 피아노의 디자인은 그가 설계한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2003년 이후 휘트니의 미술관장으로서 이번 이전개관을 총괄해온 애덤 와인버그는 “퐁피두 미술관처럼 전시공간과 더불어 사람들이 모여 미술을 매개로 소통하는 광장의 개념으로 새 휘트니를 짓고 싶었다. 그것이 렌조 피아노를 설계자로 선택한 이유”라면서 “메디슨 애비뉴의 브루어 빌딩에서 아쉬웠던 점이었는데 이번 새 건물은 1층을 입장료 없이 누구나 들어와 즐길 수 있도록 개방했다”고 밝혔다. 34가에서 시작돼 2.33km에 이르는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에 있어 뉴욕시의 명소와 만나는 광장의 개념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새 휘트니 미술관은 총면적 20,500m2의 9층 건물로 전시공간은 4600m2다. 구건물에 비해 전시공간이 50% 이상 늘었다. 바닥은 재활용 소나무를 깔았으며 최대한 자연광이 비치도록 설계되었다. 기둥을 없애 공간을 자유롭게 구획할 수 있다. 특히 5층은 기둥이 없는 뉴욕의 미술관 중 가장 큰 전시실을 자랑한다. 비디오와 영화 상영, 퍼포먼스 등을 할 수 있는 최대 204석의 작은 극장도 옛건물에 없던 것. 이 극장은 야외 테라스로 연결된다. 보존수복센터와 교육센터 역시 새로운 공간이다.
허드슨 강변의 입지를 살려 전시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면서도 강이 보이는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통창을 설치하고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소파를 놓았다. 그리고 4개의 야외 테라스를 설치해 허드슨 강과 뉴욕의 스카이라인, 하이라인 파크로 이어지는 전망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야외 테라스로 이어지는 8층의 카페는 그 전망만으로도 들러볼 만하다. 특히 하이라인 파크 쪽의 일조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미술관의 조망권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계단식 테라스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씀이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휘트니는 강 옆에 위치함으로써 홍수와 태풍의 위험을 간과할 수 없다. 이를 고려해 건축자재를 선택하고 설계에도 반영했다. 특별히 3층 이하에는 전시실이나 작품 수장고를 만들지 않았다. 1층에는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소품들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남쪽과 동쪽에는 홍수 때 침수를 막을 이동식 벽이 설치되어 있으며 하수구도 대량의 물이 한꺼번에 빠져 나갈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고 한다. 연료 탱크, 물을 빼내는 펌프와 더불어 비상시에 전력을 가동하는 시설도 갖추었다. 미술관 북쪽에 뉴욕시 소유 공터가 있어 필요하다면 확장할 수 있다는 것도 휘트니의 새 건물이 지닌 장점이다.
이전 개관 후 휘트니는 부관장 겸 수석큐레이터로 38살의 스캇 로스코프(Scott Rothkopf)를 임명하고 2004년 이후 부관장 겸 수석큐레이터를 맡아온 다나 드 살보(Dana De Salvo)를 국제협력관계 담당 부관장으로 발령해 안팎으로 휘트니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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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리스의 조각이 놓인 7층의 아웃도어 갤러리. 야외전시장인 구 휘트니에 없던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관람객들에게 뉴욕의 전망을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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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크루거, 도널드 마펫, 프레드 윌슨, 데이비드 해몬스 등 1980년대의 정치사회적 기류를 상징하는 작품.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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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전엔 휘트니 소장품 중 1900년 이후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600여 점이 전시된다. 백남준, 제프 쿤스, 찰스 레이등의 작품이 보인다.(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WORLD REPORT| MILANO & VENICE

프라다파운데이션 기획전 시리얼 클래식

렘 쿨하스가 설계한 포디움에서 개막된 그리스 로마시대 고전조각을 독창성과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 전시다. (사진 이영란)

Fondazione Prada
Serial Classic | Portable Classic | An introduction | In Part

세계적인 명품브랜드들이 속속 미술관을 세우는 가운데 밀라노에 프라다재단이 세운 폰다지오네 프라다가 5월 9일 정식 개관했다. 900여 명의 미술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화려한 개막식을 가진 이 미술관은 총 9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중 3개 전시장을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가 맡아 설계했다.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컬렉션을 자랑하며 이탈리아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폰다지오네 프라다를 방문했다.

전복적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의 예술실험, 날개를 달다

이영란 전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그날 오후 미우치아 프라다(66)는 ‘Bar Luce’(바 루체)에 있었다. 베니스에서는 비엔날레가, 밀라노에서는 엑스포가 막 개막한 시점이었다. ‘Bar Luce’(Luce는 ‘빛’이라는 뜻)는 밀라노 남쪽에 새롭게 조성된 ‘Fondazione Prada’(폰다지오네 프라다) 내에 위치한 아담한 카페다.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프라다(PRADA)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예술애호가인 미우치아는 폰다지오네의 공식 개관(5월 9일)을 하루 앞두고, 모두 9개에 달하는 공간(건물)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카페를 점검 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하며 “당신의 오랜 꿈이 결실을 보았다. 감회가 어떠냐”고 묻자 미우치아는 “아, 내일부터 관람객을 맞는다. 이 시대 예술의 의미에 대해 늘 질문해왔는데 여기(Fondazione)에서 사람들과 함께 그 답을 찾고 싶다”고 했다. 미우치아는 미국의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47.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연출)에게 카페 인테리어를 맡겼다. 이에 앤더슨은 1950, 60년대 이탈리아 영화풍으로 실내를 고졸하게 꾸몄다. 천장과 벽은 밀라노 도심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 ‘갤러리아 빅토리오 엠마누엘레’(아케이드)가 프린트된 월페이퍼로 장식했다.
명품업계에서 ‘별종의 패트론’으로 꼽히던 미우치아는 보다 체계적인 예술공헌을 위해 1993년, 남편(파트리지오 베르텔리 회장)과 함께 프라다재단을 만들었다. 또 밀라노시 남쪽 라르고 이사르코(Largo Isarco) 지역의 낡은 증류주공장도 사들였다. 언젠가는 ‘아트’가 살아 꿈틀대는 흥미로운 사이트로 바꿔놓겠다는 꿈을 갖고서 말이다.
그러곤 마침내 1만9000m2 규모의 미술관 콤플렉스를 조성했다. 우리로 치면 구로공단 같은 곳에, 대단히 혁신적인 아트전진기지를 만든 것이다. 뻔한 것, 제도권의 것을 거부하고 언제나 ‘도전과 전복’을 추구해온 프라다 부부의 예술실험은 국제 미술계의 이슈가 되곤 했는데 이번에 그 실체가 만천하에 공개된 셈이다. 도대체 이 범상찮은 커플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들의 컬렉션엔 어떤 작품이 포진해있을까 궁금했던 미술계로선 메가톤급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카타르왕국의 알 마야사 공주, 악동작가 데미언 허스트와 마우리치오 채틀란, 제프 쿤스,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 오쿠이 엔위저, 다사 주코바, 카를라 소차니 등 900여 명의 유명인사가 이사르코로 몰려들었다.
1910년대에 지어진 옛 술공장의 사무실과 실험실, 창고, 술탱크 등 7채 건물의 리노베이션과 3채 건물의 신축은 미우치아의 오랜 파트너인 렘 쿨하스(71. OMA 대표)가 맡았다. 쿨하스와 OMA는 용도폐기된 건물의 내외관을 되도록 원형 그대로 살려 전시실과 어린이도서관 등을 만들었다. 또 본격적인 현대미술 기획전시를 위해 앞마당에 ‘포디움’과 ‘극장’을 새로 추가했다(층마다 층고가 달라지는 거대한 ‘탑(Torre)’은 공사 중). 따라서 프라다의 예술캠퍼스는 연대가 다르고, 높낮이와 형태가 다른 건물들이 미묘하게 어우러지며 색다른 화음을 선사한다. 모두 6개 섹션으로 이뤄진 전시 또한 마찬가지다.
장관을 이루는 것은 포디움(podium)이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초현대식 유리건물인 포디움 1,2층에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조각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주됐는지를 ‘독창성과 모방’이라는 상반된 맥락에서 살펴본 〈Serial Classic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베니스에서 개막된 〈Portable Classic전〉과 짝을 이룬다.
살바토레 세티가 큐레이팅한 이들 전시는 고전조각은 물론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조각과 현대의 재현작, 미니어처가 총망라돼 서양미술의 뿌리인 ‘클래식’과 이를 차용한 예술 간의 연결점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위대한 걸작과 유실된 원본, 그에 기반을 둔 무수한 복제본 및 재현작을 다각도로 훑었는데 특히 그리스조각 ‘원반 던지는 사람’과 로마시대의 ‘웅크린 비너스’, 아폴로 및 헤라클레스 상은 다양한 시리즈가 나와 눈길을 끈다. 카피본 제작시 적용되는 법칙(캐논)과 기술도 공개돼 흥미롭다. 양 전시에 나온 조각만 150점이 넘는다.
옛 술공장의 작업실을 개조한 남쪽(sud)갤러리와 너른 창고갤러리에서는 프라다의 ‘지난 25년 컬렉션’을 집대성해 보여주는 〈An Introduction전〉이 막을 올렸다. 프라다의 컬렉션은 1970년대 예술영역에서 시작해, 뉴다다이즘을 거쳐 미니멀아트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그중 이번에 공개된 70여 점의 회화와 설치작품은 미우치아 컬렉션의 방향성을 감지케 한다. 이브 클라인, 피에르 만조니, 도널드 저드, 바넷 뉴먼, 에드워드 케인홀즈,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이 나왔다. 특히 마지막 전시실의 자동차 설치작업은 가히 압도적이다. 우아한 롤스로이스를 검댕이로 만든 뒤 새 깃털을 흩뿌려놓은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작업과 월터 드 마리아, 사라 루카스의 자동차 작업은 대단히 전복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북쪽(nord)갤러리의 〈In Part전〉은 전체와 부분 간 함수관계를 성찰한 전시다. 타이틀은 루치오 폰타나와 피노 파스칼리의 조각난 바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명명됐다. 만 레이, 프란시스 피카비아,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존 웨슬리, 데이비드 호크니 등의 회화, 사진, 설치, 비디오작업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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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거대한 증류주 탱크가 있었던 공간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수조작품 < Lost Love > (2000)이 자리잡았다. (사진 이영란)

프라다재단 미술관 루이스 부르즈아 4875

한쌍의 남녀를 한 몸에 결합시킨 루이즈 부르주아의 조각 < herself-and single >. (사진 이영란)

더없이 매혹적인 동시에 유용하다
프라다의 새 캠퍼스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은 ‘Haunted House(유령의 집)’이다. 옛 건물 전체에 순금(gold leaf)을 입혀 유난히 도드라지기도 하지만(쿨하스는 ‘의외로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4채 건물이 하나로 조합된 갤러리에는 놀라운 통찰력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들어찼다. ‘유령의 집’이라는 이름도 미우치아가 지었고, 로버트 고버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선별해 영구 설치한 것도 그녀다. 인간의 몸과 공공질서, 섹슈얼리티, 종교와 개인을 다룬 ‘똑 떨어지는 작품들’은 관람객의 의표를 여지없이 찌른다.
그러나 대중이 가장 환호하는 공간은 3개의 장엄한 갤러리로 이뤄진 ‘Cisterna’이다. 100년 전 증류주 탱크가 있던 공간에는 에바 헤세, 피노 파스칼리, 데미언 허스트의 정방형 작품(큐브)들이 자리를 잡았다. 전시타이틀은 3부작을 의미하는 ‘Trittico’. ‘부드러운 조각’의 작가 에베 헤세의 <케이스2>, 파스칼리의 매력적인 1960년대 설치작품 <1입방미터의 흙>, 대형수조 속에 산부인과 수술대와 진료탁자(수술용 메스에 진주목걸이와 금반지가 놓여있다)를 설치하고 수백 마리의 열대어를 풀어넣은 데미언 허스트의 <Lost Love>를 감상할 수 있다. 인간존재와 그를 둘러싼 조건을 탐색한, 서늘한 작업이다. 극장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에게 영감을 준 이미지들을 찾아나선 필름이 상영되고 있고, 지하 공간에는 토마스 데만트의 묵직한 설치작업이 자리를 잡았다.
프라다의 아트캠퍼스는 근래들어 명품 패션하우스들이 너나없이 예술공간을 오픈하고 있어 별반 새롭지 않을 수 있다. ‘이미지 제고를 위한 흔한 전략’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폰다지오네 프라다는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우선 장소다. 라르고 이사르코는 도처에 후기산업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후미진 지역이다. 프라다 폰다지오네도 겉으로 봐선 다른 공장들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담벼락에 현재의 기획전을 알리는 스크롤 전광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아트월드’가 펼쳐진다.
다음으론 재단과 기업 간 철저한 선긋기가 차이점이다. 프라다재단은 출범 초부터 ‘브랜드(비즈니스)와 아트는 완전히 별개’임을 강조해왔다. 미우치아는 아트에 비즈니스가 얽히는 걸 무척 싫어했다. 루이비통이 ‘예술과의 협업’을 통해 큰 실익을 거뒀고, 샤넬 또한 자하 하디드와 함께 세계를 순회하는 ‘모바일 아트프로젝트’를 펼치면서 각국의 미술가들에게 샤넬의 2.55핸드백을 작품화해줄 것을 요구한 데 반해 미우치아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선을 긋는다. 새로 조성된 밀라노 폰다지오네는 물론이고, 베니스 전시장 어디에서도 프라다 로고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예술 자체로 존재해야지, ‘프라다를 위한 예술’은 그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단 설립 이래 미우치아는 뜻 맞는 예술동지들과 똘똘 뭉쳐 내밀하게 활동해왔다. 제르마노 첼란트(큐레이터)와 렘 쿨하스(건축)가 그들로, 이들 삼각편대는 ‘컬트집단’이라 불릴 정도로 기이한 프로젝트들을 터뜨려왔다. 프라다는 1990년대 초부터 아니시 카푸어, 루이스 부르주아, 샘 테일러-우드, 월터 드 마리아, 마크 퀸의 작품전을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 열었다. 또 댄 플래빈의 밀라노 성당 프로젝트, 엘름그린&드라그셋의 텍사스 마파사막에서의 프로젝트도 시행했다. 게다가 무모하다 싶으리만큼 혁신적이었던, 서울 경희궁에서의 움직이는 건축프로젝트(프라다 트랜스포머)도 진행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좌파와 럭셔리’를 오갔던 미우치아의 이율배반적이고도 불가해한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하랄트 제만의 기념비적인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1969년 베른)를 오늘로 불러내, 재해석해낸 베니스 프로젝트(2013)는 “비엔날레 본전시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어쨌거나 문화예술이 ‘더없이 매혹적인 동시에 유용하며, 세계와 삶을 또다른 각도로 성찰하게 한다’고 믿는 미우치아에게 폰다지오네 프라다는 지금껏 해온 실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전위와 혁신을 지향해온 그녀의 도전을 이제는 우리가 즐길 차례다.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입장료도 그닥 비싸지 않다.  10유로다. ●

포터블클래식

프라다재단의 베니스 전시관에서 오는 9월13일까지 열리는 < Portable Classic전 > 밀라노의 < Serial Classic전 >과 짝을 이룬다. (사진 이영란)

 

 

WORLD REPORT| HAVANA

the 12th Havana Biennale   Between the Idea and Experience

현재 세계 여러 나라 도시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는 약 150여 개. 이 가운데 베니스, 상파울루, 휘트니비엔날레를 3대 비엔날레로 손꼽는다. 그리고 이스탄불, 상하이, 광주비엔날레 등이 특색 있는 비엔날레로 주목받고 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개최되는 아바나 비엔날레는 이른바 ‘제3세계 국가’에서 열리는 대표적인 비엔날레로 알려졌다. 올해로 12회째인 아바나 비엔날레가 지난 5월 22일부터 6월 22일까지 아바나 시내 곳곳에서 열렸다. 특히 이번 아바나 비엔날레에는 한국작가로 유일하게 한성필이 참여했다. 박불똥, 임옥상(1993)과 故 박이소(1994) 이후 20여 년 만이다. 《월간미술》이 아바나 비엔날레를 현지 취재했다.

정치와 예술이 교차하는 풍경

이준희 편집장

‘아바나 비엔날레’는 아니, ‘쿠바’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럼에도 쿠바라면 막연히 카리브 해(海)의 낭만과 이국적인 이미지가 먼저 연상된다. 이런 선입관을 품게 된 배경엔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혹은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선율과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기에 개인적 경험을 덧붙이자면,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 연상된다. 2,500개의 빈 맥주병 위에 ‘감시원 청소배’라는 글씨가 낙서처럼 쓰여진 낡고 작은 나무배를 올려 놓은 설치작품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쿠바 출신 알렉시 레이바 카초였다. 아바나 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한 작가의 당시 나이는 스물넷.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에 걸맞게 미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쿠바를 탈출하는 보트피플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아바나에 입성하기까지 꼬박 서른 시간이 걸렸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를 해준 쿠바교민(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쿠바의 연인>(2011) 정호현 감독)에게 카초의 근황을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카초는 현재 쿠바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아티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통신과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아바나에서 아주 예외적으로 와이-파이 (Wi-Fi)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이를 기반으로 공공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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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구엘라(Alexander Guerra) < Sweet emo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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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뉴엘 A. 헤르난데스 카르도나(Manuel A. Hernández Cardona) < Love is calling you >

제3세계 미술을 넘어서
쿠바는 북한과 더불어 지구상에 몇 안 남은 사회주의 국가다. 1960년대 초 미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미국의 철저한 경제봉쇄 정책으로 오랫동안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왔다. 하지만 최근 사정은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조만간 양국 국교 정상화에 합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50년 넘게 고립된 채 자립경제 기치를 내걸고 사회주의를 고수해온 쿠바의 문호가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아바나 국제공항은 노랑머리 백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온 그들은 쿠바가 자본주의 물결에 오염되기 전, 사회주의 쿠바의 순수함(?)을 체험하기 위해 아바나로 여행 온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가 만들어낸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일까? 이번 아바나 비엔날레에는 서구 유명 작가가 대거 참여했다. 애니쉬 카푸어(영국), 다니엘 뷔랭(프랑스), 앙리 살라(프랑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이탈리아), 티노 세갈(영국) 등이 대표적이다.
‘아이디어와 경험 사이(Between the Idea and Experience)’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아바나비엔날레에는 44개국 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 가운데는 미국에서 온 작가가 35명이나 된다. 쿠바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바나 비엔날레가 처음 시작된 해는 1984년이다. 그런데 올해가 12회란다. 30년 동안 3차례나 제때 비엔날레가 열리지 못한 탓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비엔날레 개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아바나 비엔날레가 서구의 여타 비엔날레와 차별되게 보여준 정체성은 한마디로 ‘안티-스펙터클’로 요약할 수 있다. 아바나 비엔날레는 그동안 베니스 비엔날레나 카셀도쿠멘타 같은 서구의 대규모 국제미술제에서 주목받지 못한 아티스트를 발굴해왔다. 동시에 쿠바를 비롯해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제3세계 작가에 주목해왔다. 이런 경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작품 내용과 전시 장소에서도 드러난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아바나 비엔날레 출품작 대부분은 상업성 짙은 컬렉터나 권위적인 미술관 관계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즉, 거래 가능한 완결된 오브제 작품보다는 전반적으로 퍼포먼스와 공연, 음악, 무용 등 일회성 작품이 강세를 보인다. 따라서 전시장소와 공간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전시장과 생활공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도시 곳곳이 전시장이다. 바닷가나 낡은 건물이 밀집한 오래된 골목이 비엔날레의 무대다. 이처럼 아바나 비엔날레는 시민의 생활터전 속 깊이 침투해 있다. 일반 시민을 위한 이런 의도는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내포하며 공공미술로서의 기능을 강하게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작가 한성필의 작품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성필은 건물 파사드(façade)와 복원 공사 중인 가림막을 촬영한 사진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쿠바의 옛 국회의사당 건물인 카피톨리오(Capitolio) 바로 맞은편 건물 외벽에 설치된 작품 <조화로운 아바나(Harmonious Havana)>는 아바나 시민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경주 감은사지삼층석탑(유홍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 표지에 실린 바로 그 탑이다)을 촬영한 한성필의 사진이 프린트된 대형 가림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바나 구시가지(Habana Vieja)의 오래된 유럽식 건물 사이에서 아주 낯선 볼거리를 제공했다.
한편 한성필이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하게 된 과정은 이러하다. 작가는 지난해 아바나 비엔날레 큐레이터 팀으로부터 비엔날레 참가 제안을 직접 받았다. 아바나 비엔날레는 사회주의 국가답게 한 명의 특정 큐레이터가 아닌 쿠바 ‘위프레도 램 현대미술 센터(Wifredo Lam Contemporary Art Center)’라는 기관 산하 큐레이터 팀에 의해 공동 조직된다. 이들 큐레이터 팀은 전 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참여 작가를 리서치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한성필 외에 몇몇 한국작가에게도 비엔날레 참여를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제안에 응하지 못했고, 유일하게 한성필만 오케이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단 참여를 수락한 한성필은 그때부터 적지 않은 전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던 중 외교부 산하 주멕시코한국대사관(대사 전비호)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현재 한국과 쿠바는 미수교 상태다. 그래서 주멕시코한국대사관에서 쿠바를 상대로 한 대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앞서 밝힌 대로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가 곧 성사되면, 한국과의 수교 또한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정부도 미국처럼 정치에 앞서 문화예술분야에서 쿠바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다각도로 모색하던 터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성필의 작품은 한국과 쿠바 양국간 우호협력의 교두보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성필의 작품은 아바나 현지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현지에서 직접 목격한바, 여전히 아바나 시대를 굴러다니는 자동차 중 대부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생산된 이른바 ‘올드카’였다. 그리고 나머지 차량 중 20~30%는 한국산 자동차였다. 한국은 벌써 그들에게 아주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밖에도 K-Pop과 드라마를 통한 한류 열기가 다른 남미 국가 못지않았다. 그동안 멀게만 여겨졌던 쿠바가 생각보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우리와 가까워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안토니오 엘리지오(Antonio Eligio)

안토니오 엘리지오(Antonio Eligio) < TONEL > 이 작가는 쿠바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CRITIC 윤석남 ♥심장

윤석남_서울시립 (1)

위 윤석남 <종소리> (앞의 작품) 혼합재료 2002, 아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윤석남 개인전

서울시립미술관 4.21~6.28

김미정 미술사

지난 30여 년간 줄곧 여성문제에 천착해온 윤석남(1939~ )의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 1층 홀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민중미술운동으로 시작된 한국 여성주의 미술은 산업화의 약자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점차 여성적 경험과 그 표현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이견 없이 윤석남 화업의 결산은 곧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를 조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칫 사회운동의 한 분파로 축소되고 말았을 페미니즘 미술이 시적인 함축과 문학적 서정성을 겸비한 윤석남의 열정에 의해 한층 풍부하게 펼쳐져왔다는 데 또한 화단과 비평가들의 평가는 일치하고 있다.
<윤석남 ♥ 심장>으로 간결하게 명명된 이 전시는 1980년대 화가의 초기작과 여성주의 미술운동이 구체화되던 시기의 자료들, 어머니 연작과 역사 속 여성을 다룬 설치작품들, 문학과 윤석남 미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섹션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윤석남의 초기작에서부터 이미 아마추어를 넘어서는, 화면을 장악하는 힘과 분명한 주제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여성과 현실전>과 <시월전>에 관한 자료들은 1980년대 활발했던 여성주의 미술운동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마흔, 결혼생활의 헛헛함을 메우기 위해 뒤늦게 그림을 배웠다고 해서 윤석남이 화단의 변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별 소득 없이 주류 남성들의 패거리 화단 정치에 소비되지 않은 것이 외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윤석남은 자주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주제를 길어 올렸다. 서른아홉에 홀로된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작가는 낡아 버려진 목재들을 주워다 이어 붙였다. 폐목처럼 거칠게 조각난 삶을 통합해낸 어머니의 견고한 모성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이자 기념비였다. 이후 윤석남은 중산층 여성의 정체성 불안에서 여성성의 본질, 모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호랑이의 꼬리(Tiger′s Tail)>에 출품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여러 변주를 거쳐 손이 길게 늘어난 여인상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모성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에서 피 흘리는 거대한 진홍빛 심장으로 구체화했다.
모성의 끊임없는 신화적 재구축과 인간애로의 확장. 이는 지난 30년간 윤석남의 미술을 한 구절로 압축한 말이다. 모성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굴곡이 많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모성은 더욱 처연하여 무엇을 보태기도 허물어버리기도 어려운 정서적 영역이다. 어머니의 헌신은 미술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적 텍스트로도 쓰였는데 소설가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의 프롤로그에서 어머니를 성모의 이미지에 중첩했다. 윤석남은 여성성을 병든 세계를 품어 안는 베풂과 희생의 미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바리공주 설화를 모성의 은유로 시각화했다. 윤석남의 여성주의 작품세계가 자생적이든 이후 학습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이든, 윤석남의 신화적 설화나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은 미국 페미니즘 미술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를 위시한 1970년대 과격한 서구 페미니즘 미술가들도 상실된 역사 속 여성을 되살리고 신화 속 여신의 이미지를 끌어내 사용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칼리나 이슈타르처럼 공포와 그로테스크함으로 여성 심리의 불안정성이나 몸의 비천함, 양육과 파괴의 이중성을 표현했던 서구의 예와는 달리 윤석남의 바리공주는 명백하게 효와 복종, 양육이라는 한국적 유교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성주의에도 국적이 있는 것인지, 기실 바리데기 신화가 전통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윤석남의 작품은 성 정체성의 전복을 꿈꾸는 여성주의와 가부장 이념으로 구축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한 경계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어머니의 눈>에 맞춰 쓴 <모성, 역사 그리고 여성의 자기진술>에서 여성주의 사회학자 조혜정이 완곡하게 지적했던 것으로, 결국 중요한 것은 체험적 모성성의 실상과 작가의 자기 진술이라고 저자는 강조했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한데, 언젠가 고백한 것처럼 딸의 방해를 받을까 심지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림에 몰두했다는 화가의 열정적 자기애와 어머니의 희생적 삶에 대한 향수는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윤석남의 일련의 우아한 작품에서는 상충하는 이데올로기와 선언이 슬쩍 봉합된 모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3년 <핑크룸>은 화가가 내면을 열어젖힌 것으로 해석되곤 하는 작품이다. 날카롭게 박힌 가시 때문에 결코 앉을 수 없는 화려한 의자들, 붉은색 구슬은 무의식 속 여성의 분열과 상처를 초현실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남의 방에서는 초기의 회화만큼 그 복잡미묘한 여성의 리얼리티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왜 그런가.
국문학자 권보드래는 식민지시대와 해방기, 1950년대 약진했던 여성성은 1960년대 이후 후퇴했다고 했다. ‘신여성’, ‘자유부인’과 ‘아프레 걸’이 풍미하던 팜므 파탈 여성유형은 민족의 자력에 끌려 현모양처와 희생자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 재현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그 시조인 나혜석 때에 가장 선명하고 처절했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역조는 1990년대 이후 공감이라는 힐링 풍조와 맞물려 한층 부드러워졌다. 국내에도 꽤 알려진 《만들어진 모성》의 저자 엘리자베스 바탕테르(Elisabeth Badinter)는 “나는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여성의 본성보다는 여성들이 지닌 각기 다른 수많은 경험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여성은 만들어진 성”이라고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언급이 너무 진부하다면 “세상의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흑과 백으로 인종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한 유명한 트랜스젠더 여성 CEO 마틴 로스블랫(Martin Rothblatt)의 주장도 상기해볼 만하다. 나 역시 경험적으로 모성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고 게다가 불완전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요는 사회적 계층과 젠더 역할의 차이에 따른 각자의 개별적 체험이 문제이다.
이미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에 대한 수많은 헌사가 있으므로 모성의 재현에 대한 나의 불편함이 화가의 작품세계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평생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싶다”는 윤석남은 그 존재 자체로 울림과 무게가 있다. 전시장에는 확실히 여성 관객이 많았다.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여학생 단체 관람객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전시장 벽 한쪽에서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이 뻗어 올라간 그로테스크한 윤석남의 <자화상>이 메두사처럼 강렬한 응시의 빛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그 날 푸른 시선에 압도되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로 말이다.

 

CRITIC 윤석남 ♥심장

윤석남_서울시립 (1)

위 윤석남 <종소리> (앞의 작품) 혼합재료 2002, 아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윤석남 개인전

서울시립미술관 4.21~6.28

김미정 미술사

지난 30여 년간 줄곧 여성문제에 천착해온 윤석남(1939~ )의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 1층 홀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민중미술운동으로 시작된 한국 여성주의 미술은 산업화의 약자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점차 여성적 경험과 그 표현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이견 없이 윤석남 화업의 결산은 곧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를 조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칫 사회운동의 한 분파로 축소되고 말았을 페미니즘 미술이 시적인 함축과 문학적 서정성을 겸비한 윤석남의 열정에 의해 한층 풍부하게 펼쳐져왔다는 데 또한 화단과 비평가들의 평가는 일치하고 있다.
<윤석남 ♥ 심장>으로 간결하게 명명된 이 전시는 1980년대 화가의 초기작과 여성주의 미술운동이 구체화되던 시기의 자료들, 어머니 연작과 역사 속 여성을 다룬 설치작품들, 문학과 윤석남 미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섹션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윤석남의 초기작에서부터 이미 아마추어를 넘어서는, 화면을 장악하는 힘과 분명한 주제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여성과 현실전>과 <시월전>에 관한 자료들은 1980년대 활발했던 여성주의 미술운동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마흔, 결혼생활의 헛헛함을 메우기 위해 뒤늦게 그림을 배웠다고 해서 윤석남이 화단의 변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별 소득 없이 주류 남성들의 패거리 화단 정치에 소비되지 않은 것이 외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윤석남은 자주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주제를 길어 올렸다. 서른아홉에 홀로된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작가는 낡아 버려진 목재들을 주워다 이어 붙였다. 폐목처럼 거칠게 조각난 삶을 통합해낸 어머니의 견고한 모성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이자 기념비였다. 이후 윤석남은 중산층 여성의 정체성 불안에서 여성성의 본질, 모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호랑이의 꼬리(Tiger′s Tail)>에 출품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여러 변주를 거쳐 손이 길게 늘어난 여인상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모성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에서 피 흘리는 거대한 진홍빛 심장으로 구체화했다.
모성의 끊임없는 신화적 재구축과 인간애로의 확장. 이는 지난 30년간 윤석남의 미술을 한 구절로 압축한 말이다. 모성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굴곡이 많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모성은 더욱 처연하여 무엇을 보태기도 허물어버리기도 어려운 정서적 영역이다. 어머니의 헌신은 미술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적 텍스트로도 쓰였는데 소설가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의 프롤로그에서 어머니를 성모의 이미지에 중첩했다. 윤석남은 여성성을 병든 세계를 품어 안는 베풂과 희생의 미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바리공주 설화를 모성의 은유로 시각화했다. 윤석남의 여성주의 작품세계가 자생적이든 이후 학습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이든, 윤석남의 신화적 설화나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은 미국 페미니즘 미술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를 위시한 1970년대 과격한 서구 페미니즘 미술가들도 상실된 역사 속 여성을 되살리고 신화 속 여신의 이미지를 끌어내 사용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칼리나 이슈타르처럼 공포와 그로테스크함으로 여성 심리의 불안정성이나 몸의 비천함, 양육과 파괴의 이중성을 표현했던 서구의 예와는 달리 윤석남의 바리공주는 명백하게 효와 복종, 양육이라는 한국적 유교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성주의에도 국적이 있는 것인지, 기실 바리데기 신화가 전통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윤석남의 작품은 성 정체성의 전복을 꿈꾸는 여성주의와 가부장 이념으로 구축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한 경계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어머니의 눈>에 맞춰 쓴 <모성, 역사 그리고 여성의 자기진술>에서 여성주의 사회학자 조혜정이 완곡하게 지적했던 것으로, 결국 중요한 것은 체험적 모성성의 실상과 작가의 자기 진술이라고 저자는 강조했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한데, 언젠가 고백한 것처럼 딸의 방해를 받을까 심지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림에 몰두했다는 화가의 열정적 자기애와 어머니의 희생적 삶에 대한 향수는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윤석남의 일련의 우아한 작품에서는 상충하는 이데올로기와 선언이 슬쩍 봉합된 모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3년 <핑크룸>은 화가가 내면을 열어젖힌 것으로 해석되곤 하는 작품이다. 날카롭게 박힌 가시 때문에 결코 앉을 수 없는 화려한 의자들, 붉은색 구슬은 무의식 속 여성의 분열과 상처를 초현실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남의 방에서는 초기의 회화만큼 그 복잡미묘한 여성의 리얼리티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왜 그런가.
국문학자 권보드래는 식민지시대와 해방기, 1950년대 약진했던 여성성은 1960년대 이후 후퇴했다고 했다. ‘신여성’, ‘자유부인’과 ‘아프레 걸’이 풍미하던 팜므 파탈 여성유형은 민족의 자력에 끌려 현모양처와 희생자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 재현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그 시조인 나혜석 때에 가장 선명하고 처절했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역조는 1990년대 이후 공감이라는 힐링 풍조와 맞물려 한층 부드러워졌다. 국내에도 꽤 알려진 《만들어진 모성》의 저자 엘리자베스 바탕테르(Elisabeth Badinter)는 “나는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여성의 본성보다는 여성들이 지닌 각기 다른 수많은 경험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여성은 만들어진 성”이라고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언급이 너무 진부하다면 “세상의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흑과 백으로 인종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한 유명한 트랜스젠더 여성 CEO 마틴 로스블랫(Martin Rothblatt)의 주장도 상기해볼 만하다. 나 역시 경험적으로 모성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고 게다가 불완전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요는 사회적 계층과 젠더 역할의 차이에 따른 각자의 개별적 체험이 문제이다.
이미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에 대한 수많은 헌사가 있으므로 모성의 재현에 대한 나의 불편함이 화가의 작품세계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평생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싶다”는 윤석남은 그 존재 자체로 울림과 무게가 있다. 전시장에는 확실히 여성 관객이 많았다.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여학생 단체 관람객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전시장 벽 한쪽에서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이 뻗어 올라간 그로테스크한 윤석남의 <자화상>이 메두사처럼 강렬한 응시의 빛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그 날 푸른 시선에 압도되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로 말이다.

 

CRITIC 필름 몽타주

코리아나미술관 5.7~7.11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1990년대 이후 영화는 전자미디어의 부상과 더불어 영화적 이미지, 영화장치, 영화적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의 전통적인 경계와 구성성분을 잃고 인접 예술들 및 미디어 인터페이스들로 수렴하고 발산하는 포스트-시네마 조건 (post-cinematic condition) 속으로 진입했다. 이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두 쇼트의 연결을 뜻하는 몽타주는 영화의 특정성을 지탱해온 기법이라는 본성을 유지하면서도 극장 중심의 표준적 영화로부터 이탈하여 현대예술로 이행한다. 이와 같은 몽타주의 확장을 근거로 기존 영상 및 역사적 자료들의 수집과 변형, 재조합을 통해 그것들에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영상 제작의 다양한 실천들을 아카이브 영상 제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실험영화에서 습득영상 제작에 근거한 영화들을 가리키는 파운드 푸티지 영화(found footage film), 과거의 기록을 탐구하는 감독의 주관성이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혼합을 통해 표명되는 에세이 영화, 그리고 무빙 이미지 예술에서 과거의 영화를 포함한 역사적 자료들을 발견과 재구성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아카이브 충동(archival impulse)에 근거한 작업들로 분류될 수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 2011년 개최한 <피처링 시네마(Featuring Cinema)전>은 브루스 코너, 피에르 위그, 크리스토퍼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 등의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파운드 푸티지 영화의 역사,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영화의 형식적, 주제적 모티프들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제시했다. 반면 이번 <필름 몽타주>에 소개된 작품들은 에세이 영화와 현대예술의 아카이브 충동이라는 전통들 속에서 이질적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역사와 기억의 새로쓰기를 시도한다.
하룬 파로키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1995)은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동명의 영화이자 영화사 최초의 영화를 시작으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산업영화와 선전영화들에서 공장과 노동을 재현한 장면들을 재배열한다. 이 방대한 영화적 파편들의 아카이빙을 통해 파로키는 영화와 공장, 노동 사이의 결연관계에 대한 역사를 재구성한다. 안무가 쇼반 데이비스(Siobahn Davies)와 영화감독 데이비드 힌튼(David Hinton)이 공동제작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 (All This Can Happen>(2012)은 몽타주의 다양한 기법들이 에세이 영화의 전형적인 텍스트와 연결될 때 생산되는 풍부한 이미지-사운드 결합들을 제시한다. 걷기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방랑과 노동 사이를 지속적으로 오가는 탈중심적인 내레이션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연속사진과 초기 극영화, 기록영화, 사진 등 방대한 시각적 자료들에 기입된 일상적 제스처들과 다층적으로 연결되면서 20세기 초에 대한 대안적 역사를 구축한다. 엘리자베스 프라이스(Elizabeth Price)의 <울워스콰이어(The WoolworthsChoir>(1979/2012)는 13세기 교회 성가대 좌석에 대한 기록사진과 1960년대 걸그룹의 제스처, 그리고 1979년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화재와 관련된 자료들이라는 3개의 상이한 과거를 비선형적으로 조합하여 새로운 지식들을 낳는다. 이 지식들은 교회 성가대와 현대의 팝문화가 공유하는 합창의 정서적 효과들, 합창단과 걸그룹, 화재 피해자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제스처들이다.
<필름 몽타주전>은 이러한 에세이 영화 및 영상설치 작품들을 노재운, 김아영, 박민하 등의 작업들과 병치시킴으로써 아카이브 영상 제작이 국내외에서 공히 영화와 현대예술 사이의 다층적인 중첩과 교환을 활성화해왔다는 점을 입증한다. 포스트-시네마 조건 속에서 아카이브 영화 제작은 셀룰로이드 영화가 추구해 온 몽타주의 유산들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현재와 미래로 어떻게 새롭게 재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답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노선은 우리의 과거를 항상 다시 기술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시각에 호응한다. 몽타주는 바로 이러한 시각을 구체화하고, 영화적 과거의 파편들을 현재와 잠재적 미래를 향해 열어놓는 다양한 방법들이다.

위 안체 에만, 하룬 파로키 <노동을 비추는 싱글쇼트>(오른쪽) 8채널 영상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