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기억의 장치’로
설계하는 사람들 ⑤

박연주 디자이너
양서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학예연구사
김선혁 레벨나인 대표

4월 특집기사 ⑤

박연주
디자이너

전시는 어떤 ‘몸’으로 재매개되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형식은 책이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가깝고 익숙한 매체이기도 하지만, ‘몸’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물리적·구조적 인상 때문이기도 하다. 책에서 ‘몸’은 두 가지 층위로 작동한다. 사물로서 존재하는 물리적 신체(object)와 그 안에 담긴 내용이자 체계인 본문(body text)이다. 즉 사진이나 비평 같은 데이터가 편집과 디자인, 제작 공정 등을 거치며 고유한 부피와 무게를 가진—‘두 가지 몸’을 가진 —사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전시는 구조적으로 재배열되고 책은 전시와는 다른 시간적·신체적 경험을 전달하게 된다. 전시라는 시공간적 사건의 휘발을 손에 잡히는 사물로 압축함으로써 책은 독자의 서가와 기억에 장기 체류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전시가 책이라는 물성으로 옮겨질 때 무엇이 벗겨지고 무엇이 새롭게 생성되는가?
전시장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한 몰입의 공간이다. 이 입체적인 공간 경험은 사진으로 기록되면서 평평해지고 작품이 가진 현장감과 아우라는 필연적으로 약화된다. 그러나 지면 위에 납작해진 평면적 질서는 페이지를 넘기는 물리적 시차와 책의 3차원 구조를 거치며 새로운 읽기 흐름을 만든다.

2017년 하이트컬렉션의 《파이널 판타지》 도록 작업이 기억에 남는다. 일반적인 기획전 도록이 작가별 정보를 분절해 담는 편집 관행을 따른다면, 이 책은 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읽도록 설계했다. 독자는 작가나 필자를 즉각 인지하기 어려운 상태로 페이지를 넘기며 사전 인식 없이 텍스트와 이미지의 연속적 흐름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전시를 ‘개별 작가들의 모음’으로 기록하기보다, 서사적 긴장감을 가진 ‘장면 전환의 연속’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도록이 전시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도록을 전시의 상태에 반응하는 유동적 산물로 여기고, 전시 혹은 작가의 세계와 질서 속에서 ‘균형추’로 만들 때 흥미로워진다. 책의 구조와 정보의 배치, 물성의 결합을 통해 전시의 흐름에 순방향의 힘을 보탤지, 의도적인 역방향의 브레이크를 걸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시가 거대한 스케일과 권위적 서사로 압도한다면, 도록은 예민하고 섬세한 구조를 취함으로써 무게중심을 비틀 수 있다. 반대로 휘발성이 강한 전시라면 사후적 단단함과 사전적 엄밀함을 갖춰 깊이를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도록은 전시가 미처 설명하지 못한 공간의 여백을 메우거나 과잉된 감각을 정제하는 장치이자, 전시와 더불어 총체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작동해야 한다.

《파이널 판타지》 하이트컬렉션 2017 전시 도록 pp.194~195
글: 김대환 〈천하삼분지계〉

《파이널 판타지》 하이트컬렉션 2017 전시 도록 pp.212~213
글: 김대환〈난치기〉,〈고부조저부조〉제공: 박연주

도록은 전시의 ‘소비기한’을 어떻게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도록을 통해 전시의 소비기한을 연장하는 동력은 책을 만드는 주체들 —작가, 기획자, 큐레이터, 사진가, 비평가, 편집자, 디자이너, 제작자 등—이 각자의 직업윤리에 따라 매체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만들자’라는 태도를 넘어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불가역적 상태를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밀도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실시간 수정이 가능한 디지털 매체와 달리 인쇄된 책은 되돌릴 수 없다. 이 ‘수정 불가능함’은 매체의 한계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책에 강력한 권위와 영속성을 부여하는 원천이 된다.

한 번의 독서로 소진되지 않는 구성, 즉 이미지와 텍스트의 다층적 관계, 유연한 서사 그리고 책을 만드는 이들의 엄밀한 태도가 전제된다면, 책 앞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판단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박연주
언어, 타이포그래피, 책의 구조와 배열, 순서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디자이너. 헤적프레스를 통한 출판 활동과 대학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양서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학예연구사

전시는 어떤 ‘몸’으로 재매개되는가?
전시는 전시 기간이 끝나면 사라지지만 기획안, 설치 도면, 홍보물, 사진, 영상 등 그 과정에서 생산된 자료들은 기록으로 남는다. 아카이브에 수집되는 것은 전시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시를 가능하게 했던 ‘과정’의 기록이다. 전시가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기보다 전시를 둘러싼 기록의 시간이 전시장 밖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아키비스트의 입장에서 전시를 바라보는 시간의 범위는 조금 다르다. 아카이브에는 전시 이후뿐 아니라 초기 구상이나 무산된 안, 수정된 동선 같은 이전의 과정 자료들이 함께 축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준상 평론가의 컬렉션에는 발표된 비평문뿐 아니라 초고, 메모, 서신 등이 함께 남아 있다. 전시장에서는 완성된 결과만 보이지만 이러한 기록을 함께 보면 전시가 어떤 고민과 판단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전시는 전시장 안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만, 아카이브에서는 기록으로 분류되고 관계 속에서 연결되면서 하나의 컬렉션으로 조직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는 전시장 밖에서 기록이라는 몸으로 계속 존재한다.

전시가 자료가 되는 순간 무엇이 달라지는가?
자료로 남는 순간 사라지는 것도 분명 있지만 아카이브에서는 현장에서 보이지 않던 정보가 새롭게 드러나기도 한다. 기록들은 아카이브로 수집되어 정리, 기술 과정을 거치며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기획안, 서신, 도면 등을 함께 보면 전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같은 전시 포스터라도 기획자나 작가의 활동 기록인지, 미술관의 운영 기록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맥락 안에 놓이게 된다. 아카이브에서는 자료의 형태나 주제보다 그 자료가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다른 기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이렇게 정리된 기록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초기 전시 기록 사진을 근거로 오랫동안 뒤바뀌어 있던 작품의 상하 방향을 확인하고 작가의 의도를 복원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시의 감각적 경험은 기록으로 옮겨지지 않지만, 전시를 둘러싼 정보와 맥락은 아카이브 안에서 오히려 두꺼워진다.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신전동인 전시 전경 196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이건용 기증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어떤 기록이 전시를 다시 호출하게 만드는가?
때로 작은 자료가 전시를 다시 불러오는 시작점이 된다. 1960~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은 오랫동안 신문 기사에 실린 흑백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전시 현장을 촬영한 컬러 사진이 발견된 적이 있다. 강국진의 유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이 기록은 이후 관련 전시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전시와 아카이브의 관계는 일방향이 아니다. 전시가 아카이브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아카이브가 새로운 전시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작품이 유실되었더라도 전경 사진이나 작가의 메모, 설치 기록을 통해 작품의 존재와 전시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이후 전시에서 작품을 대신하거나 과거 전시를 재구성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전시와 아카이브는 사후 기록과 원자료의 관계라기보다, 서로 다음 전시를 불러오는 관계에 가깝다.

전시의 ‘소비기한’이 있다면 언제까지라고 생각하는가?
전시장 안에서의 경험만 놓고 보면 전시는 소비되는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시를 둘러싼 기록까지 포함하면 전시는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다. 소비기한이라는 비유가 성립하려면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수십 년 전의 기록이 이후의 연구나 전시에서 새롭게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것은 기록이 체계적으로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축적이 가능하려면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아카이브를 통해 과거의 전시를 다시 읽듯이, 현재의 전시 역시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시 호출될 것이다. 아카이브는 전시의 시간을 단순히 연장하기보다 전시의 의미를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두는 일에 가깝다.

*양서윤
미술사와 기록관리학을 전공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아키비스트로 강국진 공성훈 최욱경 등 한국 현대미술 작가 아카이브 구축 및 활용을 담당했다(2013~2024). 현재 아카이브 수집·연구 및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김선혁
레벨나인 대표

전시는 어떤 ‘몸’으로 재매개되는가?
전시와 아카이브의 경계에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전시가 몸의 감각이 주도하는 경험이라면, 아카이브 역시 정보를 읽어나가는 감각이 작동하는 또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아카이브를 하나의 시공간적 사건을 기록한 데이터에 한정하면 전시 아카이브가 굉장히 납작해진다. 전시는 큐레이터가 직조한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정보의 압축이다. 그렇기에 아카이브는 전시 속에 존재하나 쉽게 읽히지 않던 응축된 정보를 해체하고 구조화된 정보 체계로 되돌리는 과정이어야 한다. 여기서 구조화는 누구라도 읽기가 가능한 데이터 형식을 의미하는 동시에, 큐레이터가 전시에 부여한 암묵적인 관계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레벨나인〈이름게임〉《이름의 기술》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24

전시를 데이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무엇이 벗겨지고 무엇이 새롭게 생성되는가?
최근에는 전시와 동떨어진 아카이브가 아닌 전시 안에서 발생하는 아카이브적 경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전시와 관람객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는 지금까지 아카이브의 영역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의 《이름의 기술》에서는 관람객이 작품에서 연상한 단어들로 제목을 생성하여 약 1만3000건의 새로운 이름이 데이터로 쌓였고, 202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료지 이케다》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전시 공간에서 느낀 감정을 1만4000건의 작품-감정 데이터로 구축했다. 이는 전시에 늘 존재했지만 포착되지 않았던 관계를 기록하려는 시도였다.

전자가 작품에서 파생된 언어를 아카이브한 것이라면, 후자는 작품이 유발하는 감정을 아카이브한 사례다. 앞으로의 전시 아카이브는 물리적 시공간의 기록뿐만 아니라 큐레이터의 의도와 관람객의 경험이 교차하는 입체적인 지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벨나인 〈Ryoji Ikeda Logbook《2025 ACC 포커스: 료지 이케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5

아카이브는 전시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카이브가 사건으로서의 전시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하다 보면 종종 전시가 이루어진 특정 시공간의 기록이나 과정 자료의 보존으로 귀결되곤 한다. 그러나 전시와 아카이브의 관계는 선후의 관계가 아니다. 아카이브는 전시 이후에 수행되는 기록의 과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전시와 아카이브를 동일한 큐레토리얼 실천의 산물로서 병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전시가 하나의 물리적 사건으로 실현되지 못했더라도 기획이나 큐레토리얼은 충분히 기록될 수 있으며 이는 분명한 전시 아카이브가 된다. 아카이브가 물리적 공간의 기록을 넘어 작품의 의도, 큐레이터의 관점, 관람객의 감정을 어떻게 ‘살아있는’ 정보 구조로 기록할것인가가 나의 중요한 질문이다.

레벨나인〈시간을 잇는 사람들: 질문 스테이션〉《RE:BORN, 시간을 잇는 보존과학》 국립고궁박물관 2025

전시의 ‘소비기한’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술작품만큼 하나의 대상이 그 자체로 복잡한 정보의 층위를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이유로 전시에서 아카이브라는 행위가 때로 작업처럼 다뤄지기도 하지만, 아카이브적 작업과 전시 아카이브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시 아카이브는 거대한 ‘정보의 집’으로서 시간이 지나도 누구나 해석의 도구 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정보의 맥락이 변형되거나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전시를 기록한 영상이 남아 있다고 해서 전시의 소비기한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전시의 소비만큼 중요한 것은 기획의 생산이라고 본다. 만약 아카이브가 큐레토리얼 실천을 정보의 형식으로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새로운 전시의 생산기한을 앞당길 수도 있다. 전시 아카이브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미래 어느 큐레이터의 영감에 닿아 새로운 기획이 피어날 때이다. 그 지점에서 전시 아카이브는 미술 현장의 큐레토리얼 실천을 이어가는 촉매로 작용한다.

*김선혁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을 졸업하고 레벨나인 대표이자 숙명여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 2025 아트디렉터,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운영전략 수립 연구책임을 수행했다. 《료지 이케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5),《RE:BORN, 시간을 잇는 보존과학》(국립고궁박물관, 2025),《이름의 기술》(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24) 등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2026년 4월호 (VOL.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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