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전시, 인용하고 가필하기

권혁규 뮤지엄헤드 책임큐레이터

4월 특집기사

전시의 등허리, 척추가 부서졌다. 마디마디가 끊긴 매체의 현재는 한때 그것이 지녔다고 말하던 특정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줄기가 파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여전히 어떤 형태를 유지한다. 전시는 더 이상 전시장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미지와 텍스트, 아카이브로 변환되며, 공간 밖으로 전시 이전과 이후의 시간으로 확장하고 지속된다.

전시를 전시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모든 전시는 잠시 존재했다 사라진다. 그리고 이 속성은 전시의 다양한 전개와 작동을 만들어 낸다. 사라질(지는) 전시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 가설되는 하나의 상황이고, 작품, 공간, 관객, 제도적 조건이 일시적으로 교차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형태를 가지지만 지속보다 소멸에 가까우며,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사라진 순간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기록뿐이다. 그렇게 전시는 잠시 조직되었다가 흩어지는 ‘관계’들의 배열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매체보다 강한 물리적 현존성을 드러낸다. 전시의 시간은 제한적이지만, 그 짧은 지속에서 공간과 시간을 분명히 점유하는 몸의 감각이 환기되기도, 특정 장소와 역사가 지금 이곳에 강하게 조직되기도 한다. 전시에서 작품의 배치와 동선, 빛과 소리 등의 다양한 요소들은 관객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하나의 구체적인 경험을 형성한다. 이 현존성은 오래 지속되는 기념비적 물질성과는 다르지만, 구체적인 경험과 현재를 구성하는 일시성은 물질성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강화하는 역설적인 형식을 이루기도 한다.

동시대 큐레이팅은 이 같은 전시의 특정성을, 그것의 역설을 가로지르며 형성되는 듯하다. 사라짐을 본질로 확장하기도, 그 일시성을 더욱 강조하는 현존의 장면을 보다 선명히 그려내기도 한다. 전시를 하나의 매체로 탐구해 온 동시대 큐레이팅의 짧은 역사 안에서 이는 전시의 비물질적·담론적 전환의 차원에서 논의되어 왔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는 이를 단적으로 확인시킨다. 이 심포지엄은 국내 미술계에서 (지금까지도) ‘큐레이팅’을 중심 의제로 삼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단순한 담론의 장이 아니라 그 공백 자체를 가시화하고 재구성하는 장면처럼 다가왔다. 심포지엄 명칭이 보여주듯 본 논의에서 제기된 질문은 동시대 뮤지엄이 직면한 핵심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뮤지엄의 임무가 과거와 같이 작품을 보존하고 이를 중심으로 전시를 꾸리는 데에 있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국내외 현장에서 큐레이터와 이론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1 공통적으로 지적된 바는, 큐레이팅이 더 이상 ‘물리적 전시’를 생산하는 실천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전시의 형식으로부터 이탈하거나 이를 확장하는 다양한 큐레이팅 실천의 변형이 주요한 논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이는 행사 이후 출판된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국립현대미술관, 2019)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제목에서 ‘큐레이팅(curating)’이 아닌 ‘큐레토리얼(the curatorial)’이라는 용어를 채택함으로써 큐레이팅을 특정한 직무나 행위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담론적·개념적 장으로 재정의하는 실무적·이론적 전환을 다시금 함축한다.

‘큐레토리얼’은 큐레이터 마리아 린드가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개념을 경유하여 정식화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2 무페는 ‘정치(politics)’ 대신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후자가 기존 정치 개념이 은폐해 온 ‘적대(antagonism)’를 드러내는 차원에 주목한다. 이와 유사한 개념쌍으로서 큐레이팅에 대별되는 큐레토리얼은 전통적 의미의 전시 제작(exhibition making)이 포착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해 온 요소들을 가시화하는 이론적 틀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큐레이팅이 큐레토리얼로 확장되는 과정은 전시 형태의 단순 변형이 아니라 전시라는 제도적 형식에 내재한 권력 구조와 인식론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뮤지엄 전시는 특정 계층과 문화가 구축해 온 질서를 재생산하고 교육하는 장치로 비판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반성은 전시의 형식과 내용 양쪽에서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 변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전시의 ‘비물질화’였다. 하랄트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1969)와 《도쿠멘타 V》(1972)는 이러한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제만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시도로서 미술 작품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시각문화적 오브제들을 전시에 포함시켰다. 더불어 그는 전시를 하나의 완결된 대상이 아니라 ‘사건’이나 ‘과정’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전시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전시-관객 모델을 재설정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1985년 퐁피두센터에서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인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큐레이터로 초대되어 전시 《비물질》을 선보였다. 리오타르는 전시를 말 그대로 ‘비물질’로 천명했는데, 그에게는 전시가 서구 물질문명의 기반을 해체할 하나의 시도로 여겨졌던 듯하다. 큐레이터로서 리오타르는 5개의 주제어에 따라 공간과 전시를 구획했고, 관객은 주어진 주제어에 관한 철학적, 이론적 성찰을 담은 대화록을 가이드 삼아 전시를 관람해야 했다. 이때 작품의 캡션, 설명, 작품 배치를 따르게 하는 전형적인 동선은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 주어진 작품도 물리적인 오브제보다는 비물질화된 미디어, 오디오 등이 다수를 차지했고, 관객은 담론의 미로 안에 던져졌다.

이 같은 사례들은 전통적으로 ‘전시 만들기’를 중심으로 편성된 뮤지엄과 전시의 구조를 질문한다. 작품의 오브제적 가치, 작가의 의도에 관한 주석, 역사적 서술로서의 전시 설명, 제도적 공간으로서의 전시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전개된 전시의 비물질화 경향은 1990년대 비엔날레 모델의 세계적인 유행 속에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던 듯하다. 이 시기 대규모 전시를 총괄하는 감독으로서 큐레이터들이 주목받았고, 이들은 미술 실천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조직하며 큐레이팅의 언어로 ‘탈-전시’의 경향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큐레이팅의 “담론적 전환(discursive turns)”이라 정리하기도 한다.3

카트린 다비드의 실천은 이 전환의 주요한 계기로 언급된다. 다비드는 최초의 여성, 비독일인 디렉터로 1997년 도쿠멘타를 감독하며 새로운 큐레이팅 모델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서구 모더니즘의 상징으로서 ‘화이트 큐브’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양한형태의 공간을 전시의 무대로 삼았다. 관객은 도시 곳곳의 공공장소, 야외 공원에서 온갖 사회적 관계들이 드러나는 가운데 작품과 이야기를 마주해야 했다. 무엇보다 기존 도쿠멘타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 미술 현장을 소개하는 한 섹션을 도입하며 《도쿠멘타 X》은 글로벌 아트의 ‘타자’가 아닌 모더니즘의 한 예시로서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했다(이후 다비드의 관심은 아랍 미술로 확장되었다).4 또 ‘100 Days/100 Guests’와 같은 프로그램을 도입해 100일 동안 매일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토론과 강연을 진행하였다. 이는 기존의 전시 형식과 매체의 경계를 이탈하여 담론과 수행, 그리고 시간적 축적을 통해 큐레이팅 실천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위 사례들은 큐레이팅이 더 이상 작품을 선별하고 배치하는 기술적 행위에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큐레이팅은 담론적 층위를 적극적으로 포괄하는 실천으로 확장되었다고, 여기에는 비물질적으로 전개되는 대화, 사변적 사고의 수행, 열린 생산의 형식들이 포함된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동시대 큐레이팅에 관한 논의가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큐레이팅의 비물질화와 담론화가 심화할수록 전시의 매체적 조건과 물리적 경험을 고찰하는 움직임이 병행되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언더 블루 컵』에서 카트린 다비드의 ‘화이트 큐브’ 부정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다비드를 포함한 오늘 큐레이터의 몇몇 시도들이 미술의 역사와 기능의 망각을 가속화한다고 지적한다.5 크라우스는 1990년에 발표한 논문「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 논리」에서도 전시가 개별 작품의 미적 체험을 제공하지 않게 되었을 때 오히려 자본주의 논리에 수렴되는 스펙터클적 공간 경험과 오락에 머물게 될 것을 우려했었다.6

비슷한 맥락에서 클레어 비숍은 뮤지엄/전시를 성찰하며 다시 역사로, 물리적인 오브제로, 물질적인 전시와 전시 공간으로 돌아간다. 비숍은 『래디컬 뮤지엄』에서 오늘날 다수의 뮤지엄이 물리적 소장품의 축적보다는 기획전이나 비물질적 이벤트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7 전통적인 뮤지엄이 소장품을 기반으로 역사화하고 서사화하는 전시를 구축해 왔다면, 동시대 뮤지엄은 퍼포먼스를 비롯한 비물질적 미술을 반영구적인 형태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비숍은 이러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며, 그것이 단순한 전시 형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이면서 또 문제적인 전환임을 지적한다.

클레어 비숍의 문제의식은 뮤지엄이 견지해 온 역사의식과 권력관계가 충분히 추적되지 못하거나 은폐되는 현실에 있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큐레이팅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성찰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비숍은 유럽의 몇몇 뮤지엄에서 이루어진 소장품 전시를 사례로 제시하며, 전통적 전시가 지닌 가능성을 재조명한다. 여기서 작품/전시가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물리적인 오브제/장소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전시가 특정한 역사를 환기하고 활성화하는 기록의 장이자 공론장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오늘 전시는 단일한 장소와 시간에 묶인 고정된 사건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전시 전경과 작품 이미지들, 비평과 담론, 도록과 아카이브, 그 외 각종 콘텐츠 등 서로 다른 층위와 속도, 맥락과 장소를 가로지르며 전시는 목격된다. 이제 전시는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경유하며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변형되는 분산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시의 척추는 이미 부서졌고, 그 파편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며 전시의 또 다른 장면, 생애를 구성한다. 여기 분명해진 건 동시대 큐레이팅을 전통적 전시의 무조건적 긍정이나 부정으로 이분화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큐레이팅은 전시라는 매체의 형식과 구조를 끊임없이 다시 설계하는 실천에 가깝다.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인을 기원에 가까이하는 고고학자에 비유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고학자는 어떤 시기에 젖어있는 자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시간에 완전히 들어붙어 있지 않은 자, 시간의 간극에서 자신의 시간을 분할하고, 그 안에 휴지기와 불연속을 새겨 넣는 자, 가필하고 인용하고 변형하는 자를 말한다.8 오늘 큐레이팅 역시 이런 고고학자의 태도에서 모종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시의 분절된 시간, 관계의 파편들을 탐색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배열 속에서 다시 조직하는 작업. 동시대 큐레이팅은 기존의 물리적 전시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실천이라기보다, 그 조건과 속성을 다시 읽어내고 재배열하는 비평적 실천일 것이다. 전시는 그렇게 새로운 배열 속에서 출현하고, 다시 사라지며, 단절된 시간의 한 단면(들)을 자신의 피로 이어 붙이는 능력을 지니게 되는지도 모른다.9


1 2018년 4월 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해당 심포지엄 관련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 참고 https://www.mmca.go.kr/events/eventsDetail.do
2 마리아 린드의 큐레토리얼 논의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Maria Lind “The Curatorial” in Wood B. K. (eds.) Selected Maria Lind Writing Sternberg Press 2010 pp.60~88, “Situating the Curatorial” e-flux journal 116 March 2021 pp.1~15
3 Mick Wilson “Curatorial Moments and Discursive Turns” in Paul O’Neil (eds.) Curating Subjects Open Editions 2017 pp.201~216
4 카트린 다비드는 도쿠멘타에 이어 장기 프로젝트 ‘동시대 아랍의 재현’을 기획한다 https://museutapies.org/en/exposicio/contemporary-arabrepresentations-cairo/
5 로잘린드 크라우스 지음 최종철 옮김『언더 블루 컵: 포스트미디엄 시대의 예술』 현실문화 2023
6 Rosalind Krasuss “The Cultural Logic of the Late Capitalist Museum” October Vol. 54 Autumn 1990 pp.3~17
7 클레어 비숍 지음 구정연 김해주 등 옮김『래디컬 뮤지엄: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현실문화 2016
8 조르조 아감벤 지음 양창렬 옮김「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장치란 무엇인가?』난장 2010 pp. 85~87
9 본문에 등장하는 “부서진 척추”와 “피”는 아감벤의 위 텍스트에 인용된 만델슈탐의 시에서 빌려왔다. 오시프 만델슈탐 지음 조주관 옮김「시대」『오늘은 불쾌한 날이다』 열린책들 1996 p.468, 위의 책 재인용

2026년 4월호 (VOL.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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