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예술을 둘러싼 질문들

심혜련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5월 특집기사 ②

인공지능이 예술의 도구에서 스스로 창작하는 존재처럼 등장하기 시작한 이래 ‘예술가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과거 사진 기술의 등장 때처럼 ‘예술’의 개념을 놓고 과거로의 회귀 경향도 보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인간의 지각 방식과 예술 수용의 변화는 놓치기 쉽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어떻게 의도하고 활용하며, 그 결과를 어떻게 예술로 작동시키는가에 대해 글을 통해 살펴보자.


일러스트 ©May Kang

예술가로서의 인공지능

예술과 기술은 분리 불가능한 관계다. ‘테크네(Techné)’를 중심으로 그들 간의 오래된 관계를 강조하지 않아도 예술은 늘 기술과 함께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늘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특히 예술에 기회이자 위기였다. 새로운 기술은 야누스적인 얼굴을 하고 예술과 만난다. 한쪽의 얼굴은 예술에 새로움을 주는 도구로. 또 다른 한쪽의 얼굴은 예술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의 사신 역할을 한다. 야누스가 과거와의 단절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듯이 예술과 기술의 만남은 양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예술과 기술의 만남이 극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기술은 예술과 아주 자연스럽게 만나 예술을 서서히 변화시키곤 했다. 예술가들에게는 세계관의 변화, 표현 도구의 변화, 표현 내용의 변화를 가져다주고 수용자들에게도 변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전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예술과 기술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보장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알리는 기술의 등장은 예술의 ‘세계사적 전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술과 기술의 관계에서 세계사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들이 있었다. 사진, 영화의 등장 그리고 디지털 매체들의 부상이 바로 그 경우다. 지금 예술은 또 다른 전환기에 서 있다. 과거보다도 훨씬 극적인 그러한 전환기 말이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의 기준은 인공지능이 되었다. 생성형 AI의 등장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도 빨리 모든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분야를 막론하고, 이제 사회는 인공지능에 대한 문해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분류되고, 우리의 일상도 이제 인공지능과 함께하기에 이르렀다. ‘인공지능과의 공생’ 또는 ‘공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그 어떤 분야보다도 예술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활약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지적인 능력’으로는 인간은 이제 인공지능과 비교 불가능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공지능은 ‘언터처블(untouchable)’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인간은 인공지능과 인간을 굳이 구별하면서, 자신의 우수성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한 시도 중 하나가 수리적 능력이 아니라, 감성적 능력을 중심으로 인간 본질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인간만이 예술적 행위를 하고 예술적 향유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또한 급변했다. 또 다른 ‘인공지능적 전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은 챗GPT를 중심으로 한 대화형,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과 그것의 대중화이다.

인공지능과의 공동 제작은 물론이며, 이제 인공지능에 대고 말만 하면 인공지능이 혼자 뭔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그리고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를 중심으로 ‘예술’과 ‘놀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인간이 아닌 인공물이 음악도 만들고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영상도 만들어낸다. 그것도 ‘뛰어난’ 결과물들을 아주 ‘빠르게’ ‘많이’ 만들어낸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인공지능과 예술을 둘러싸고 많은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많은 질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예술가로서의 인공지능’의 인정 문제였다. 이 문제는 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질문들을 가능하게 했다.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적 향유와 가치 등등의 문제들에 다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들이 제기되는 방식 그리고 이러한 물음들로 인한 논쟁들이 전개되는 방식이 좀 이상하다. 본질적인 물음이라는 이유로 논쟁들이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 또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자율성, 예술가의 천재성, 예술가의 창의성과 상상력 그리고 예술 또는 예술작품을 대하는 수용자의 태도에 대한 논쟁들이 어느 순간에는 디지털 매체 그리고 기술 복제 시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점의 회귀가 과연 바람직할까? 예술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논쟁일까?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에 그 ‘누구나’가 반드시 인간이어야만 하는지의 논쟁은 예술을 둘러싼 물음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만들어 버린다. 출구가 없다. 물음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될 뿐이다. 이런 물음들에 매몰되어 우리는 정말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예술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세계사적 변혁’의 시간이 다가왔는데, 우리는 과연 이에 잘 대처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인공지능 이전에 예술과 기술을 둘러싼 문제들

인공지능을 예술가로 인정하는 문제와 이로써 파생된 예술을 둘러싼 근본적인 물음들은 ‘인공지능과 예술’이라는 영역에서 중요하다. 그 어떤 영역보다도 인공지능의 결과물들과 쉽게 만날 수 있고, 또 그 경험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은 왠지 데자뷰 같다. 낯설지 않다. 물음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으로 인한 예술계의 변화들도 낯설지 않다. 특히 이미지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진의 등장은 오랫동안 교육받은 숙련된 손이 하던 일을 눈이 대신하게 되만들었다. 사진의 등장은 순조롭지 않았을뿐더러, 처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정말 악마의 발명품은 있었고, 이는 빠르게 시각 영역에 침투했다. ‘자연적 시각’은 ‘기계적 시각’과 공존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시각의 또 다른 세계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존재했으나,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하고, 또 시각 주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기계의 눈이 알아채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계의 눈의 등장은 본격적인 기술적 지각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사진이 가져온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처음에는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마치 지금처럼, 기존의 관점에서 사진을 평가하려고 했기에, 초기 사진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의 상황과 유사했다.1 즉 ‘예술로서의 사진’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젤 프로인트(Gisèle Freund)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사진과 관련해서 문제를 제시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벤야민은 ‘사진으로서의 예술’이 ‘사진과 예술’의 핵심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사진이 예술에 가져온 변화들에 대해 주목했다. 더 나아가 사진이 예술에 가져온 변화를 중심으로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기능과 가치 전반에 가져온 변화에 주목했다. 그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카메라의 인정’보다는 카메라의 결과물들이 어떻게 지각되고 수용되는가의 문제가 중요했다. 그는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복제된 기존의 예술작품들이 이전과 다르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수용과정의 변화가 예술의 기능과 가치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물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카메라 그 자체’에도 주목한다. 즉 기계적 장치로 산출한 결과물에 관한 관심을 넘어 기계로 인한 인간 시각의 변화에 주목했다. ‘카메라의 눈’이 대신하게 된 시각 세계와 주체의 변화를 연결한 것이다. 특히 그는 카메라의 눈의 개입으로 인해, 발견된 ‘시각의 무의식(Optisch-Unbewußtsein)’의 세계와 새로운 지각 방식인 ‘분산적 지각(Zerstreuung)’에 주목했다. 시각의 무의식 세계는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함과 동시에 시각의 사각지대 또한 드러나게 했다. 이렇게 드러난 세계는 이미지 영역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물론 카메라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이 이미지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이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역할이 단지 도구로 과소평가되기도 했다. 그 결과 초기 사진은 기계적인 시각을 드러낸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전통적 이미지 생산을 도와주는 역할 또는 전통적 이미지를 대신하는 역할 등을 했다. 기계의 이미지 생산에도 여전히 부정적이었으며 또 예술에 대해 여전히 전통적인 이해를 고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벤야민은 “반기술적 예술 개념”이며, 이는 “예술에 대한 속물적 개념(Banausenbegriff von der Kunst)”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비판했다.2 예술이 당대의 기술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다르게 수용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역시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전통적인 예술 이해에서 벗어나 예술 생산의 과정에서 기술과의 상호작용을 기꺼이 수용했다. 동시에 기술로 인해 변화된 예술 현상에도 주목했다. 대표적으로 다다이스트가 그렇다. 다다이스트들은 포토몽타주라는 방법으로 기존의 이미지들을 ‘재목적화’하고 ‘재매개’했다. 그들은 매우 ‘의도적’으로 행위했다. 때로는 기존 사회와 예술을 조롱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의 생각들을 전달하고자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 행위했다. 그들의 ‘욕망’과 ‘욕구’가 행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치와 기능을 확립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결과물들이 ‘심미적 경험’과 무관하지도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이미지도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나 회흐(Hannah Höch)의 포토 몽타주와 한스 벨머(Hans Beller)의 인형을 오브제로 활용한 사진 작업들은 심미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그 이후 예술과 기술이 결합하는데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이후 다양한 매체들과 예술의 결합이 ‘예술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탄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예술가들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기술이 불행한 수용이 되지 않았던 데에는 예술가의 주체로서의 감성적 결단이 중요했다.

예술이 사기라고? 그렇다면 인공지능 예술은?

사진은 이미지 제작의 방식을 손에서 눈으로 변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는 기술적으로 복제되고 재생산되었다. 그 이후 ‘새로운 매체’라고 이야기되던 디지털 매체는 이미지를 또 다른 복제로부터 다시 해방시켰다. 이미지는 이제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디지털 매체는 각기 분리되어 있던 지각의 기술들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렀다.3 이미지, 소리 그리고 텍스트의 변형이 동시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시대인 지금, 과연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또 인공지능에 예술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예술가로서의 인공지능의 인정’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유기적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예술의 변화에 주목해야 할 때다. 이와 더불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을 어떤 경우에 예술로 수용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다.

먼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해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이미지 생성(image generation)’이다. 게다가 생성의 시작은 인간의 ‘입’이다. ‘프롬프트(prompt)’로 지시하면, 인공지능은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낸다. 무엇이든 말만 하면 된다. 과거 코닥이 ‘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해라, 그다음은 우리가 다 해준다’고 광고했듯이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들은 무엇이든 말만 하라고 한다. 다 만들어준다고 말이다. 물론 인공지능이 자발적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이 자발성은 인간에게서 나온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아직은’ 요구하며, 인공지능은 그 요구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외주(outsourcing)’하는 단계이지만, 그 외주의 결과는 매우 뛰어나다. 자신의 정보망을 기초로 해서 리믹스한 것이지만, 리믹스의 결과가 매우 훌륭하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 판단을 할까? 매번 우수하다고? 또는 이번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을까? 욕망과 욕구도 없고, 반성 능력도 없는데? 주체성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인공지능은 미메시스(mimesis)와 포이에시스(poiesis)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능력은 갈수록 진화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판단’은 바로 인간이 한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에게는 생성의 사적인 그리고 내적인 ‘동기’도 없다. 명령어에 따라 훌륭하게 ‘리믹스’해 내지만, 인공지능의 리믹스에는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다. 리믹스 문화가 갖는 저항 정신도 또 하위문화로서의 ‘의식’과 ‘자각’도 없다. 인공지능이 아직도 전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결과물에 대한 수용이다.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를 중심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 또는 다른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감성적으로 지각하지 못하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인정 이전에 인공지능의 ‘감성적 지각’, 즉 아이스테시스의 소유 여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아이스테시스다.

다시 예술가로서의 인공지능 문제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인정 여부에서 중요한 기준은 외주의 결과물이 아니라, 외주의 의도와 내용이다. 이미지는 의도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반예술’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외주를 주는 인간을 예술가로 판단해야 한다. 아직은 그렇다. 아직은 인공지능이 외주받는 단계이긴 하지만, 앞으로는 주체적으로 외주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산출할 수도 있다. 인공지능이 먼저 인간에게 제안서를 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술의 기획, 제작 그리고 전시 방식 모두에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단계가 오면, ‘예술가로서의 인공지능의 인정’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콘셉트를 제공한 자가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은 늘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했다. 새로운 시대도 마찬가지다. 예술을 둘러싼 근원적 질문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예술이 갖는 특권적 지위에 대한 반발로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이야기해도, 모든 사람이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가능성’과 ‘인정’의 문제는 다르다. 1980년대 백남준은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예술은 사기”라고. 대중을 대상으로 그들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고등 사기라고 말이다. 이러한 백남준의 기준을 가지고 예술을 정의한다면, 인공지능은 예술가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대중에게 사기치지 않는다. ‘인공지능 환각’에는 사기의 의도가 없다. 단지 오류만이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이 사기치기 시작하면, 그때 예술가로서의 인정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지금은 우리가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외주를 줄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고, 그 결과가 가져올 파급효과에 대해 고민하자. 아무튼 인공지능과 예술을 둘러싼 물음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것도 인간 쪽에서 계속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이것이 호모 에스티쿠스가 가진 운명이다.


1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 심혜련「인공 지능 예술의 수용 문제」『Journal of Artificial Intelligence Humanities』Vol. 14 2023 pp. 9~34
2 Walter Benjam “Kleine Geeschichte der Photograpie” Gesammelte Schriften, Bd. I, 2 Theodor W. Adorno und Gerschom Scholem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91 P. 369
3 기술 매체와 이미지의 관계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심혜련 『21세기의 매체철학: 디지털에서 포스트 디지털로』 그린비 2024 pp.269~289

2026년 5월호 (VOL.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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