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새로이 발굴한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사료 세 가지
이태호 | 명지대 교수, 문화예술대학원장
공재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문인화가이다. 그의 탁월한 묘사기량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하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서거 300주기를 추모하여 대규모의 도록 발간과 함께 <공재 윤두서전> 을 마련하였다. 윤두서와 관련한 조선후기 서화와 문학, 그리고 학예를 망라하는 빅 이벤트였다. 해남윤씨 집안의 자랑인 녹우당綠雨堂의 대표가 가사문학의 효시 ‘고산 윤선도’에서 그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로 바뀌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윤두서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 글에서는 내가 새롭게 만난 윤두서 일가의 세 가지 회화사료를 살펴보겠다. 첫 사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천하지도>로, 이 지도가 윤두서의 중국지도임을 검토한 것이다. 둘째는 단양 하선암 바위글씨에서 발견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이다. 셋째는 윤두서의 손자 윤위가 그린 <구택규 초상>으로, 요근래 세상에 나온 그림이다. 이들도 <공재 윤두서전>에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필자의 게으름 탓에 이제야 소개하게 되었다.
윤두서의 중국지도, <천하지도>
<천하지도>는 조선 닥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18세기초의 대작인즉,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摠一覽之圖>라는 명칭으로 진작에 알려져 있었다.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1929년 박봉수에게 당시로는 엄청 고가인 3000원에 구입했던 지도이다. 필자는 최근 학술심포지엄에서 이 지도에 대해 윤두서 제작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이태호, <조선후기회화의 사실정신과 지도, 그리고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대동여지도간행 15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국립중앙도서관, 2011) 접힌 소책자 형태가 현재 녹우당에 소장된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와 흡사하여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국화무늬 능화판으로 찍은 <천하지도>의 표지에는 활자식 명조체로 ‘천하지도, 부 조선 류구국天下地圖 付 朝鮮 琉球國’이라는 묵서가 씌어 있다. 현재의 장황은 19세기 말 이후 다시 꾸민 상태이다. 제목과 같은 글씨체의 ‘천하대총일람지도’를 별지에 써서 지도 위에 덧붙였고, ‘조선국’ ‘류구국’ 등을 써 넣었다. 뒷면에서 음각의 ‘德’자와 그 아래에 붙은 양각의 ‘弼’자를 배치한, 2cm가량의 붉은 인장으로 찍은 전서체 ‘덕필’이 눈에 띈다. 위치로 보아 소장자가 찍은 것이다. 이는 재표구하면서 본래 지도 뒷면에 있던 도장을 오려다 붙인 듯하다. ‘덕필’은 윤두서의 조카뻘인 윤덕필(1723~1793)로 생각된다. 윤덕필은 해남윤씨 어초은파 중시조인 윤효정의 넷째 아들 윤부尹復의 6대손으로 강진에서 종택을 이루었다. 언제 윤덕필의 소유로 넘어갔는지 모르나, <천하지도>가 윤두서의 작품일 개연성을 높여주는 소장인이다.
윤덕희는 윤두서가 중국지도·조선지도·일본지도를 그렸다고 밝혀 놓았다.(<恭齋公行狀>) 현재 녹우당에는 윤두서의 조선지도인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지도인 <일본여도日本與圖>만이 전해져, 이 <천하지도>가 윤두서의 중국지도임을 점쳐본다. 조선과 류구를 함께 그려 넣고 ‘천하지도’라고 표제가 바뀌었지만,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중국지도라 이를 만하다. 붉은색 선묘의 도로표시, 같은 색 외곽선과 노랑이나 파란색 바탕에 지명을 써놓은 방식, 약간 길쭉한 지명의 행서체, 그리고 <천하지도>의 필치와 회화적 분위기가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와 근사하다. 특히 전체적으로 사막, 만리장성, 산악, 강과 호수, 바다 표현과 색채감이 한 폭의 그림다운 맛을 돋운다. <천하지도>의 제작시기 또한 윤두서가 두 지도를 그린 1710년대와 멀지 않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천하지도>는 북경·남경의 양경兩京과 13성省의 명나라 행정체계를 바탕으로 삼았고, 만주지역의 영고탑寧古塔과 오라烏喇, 그리고 심양審陽을 승격시킨 성경盛京 등 청나라 초기의 새 지명이 공존하는 지도이다. 이를 통해 청조가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의 정황을 읽어내기도 한다.(오상학,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 창비 2011) 일본의 위치를 글로만 써놓고 류구국을 크게 강조한 것도 이 지도의 특징이다. 또 일반적인 류구지도와 달리 상하가 뒤집혀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조선에서 내려본 시점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지도가 16~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가운데, 이 <천하지도>는 조선을 가장 자세히 그린 사례이다. 경도京都와 함흥, 평양, 해주, 원주, 공주, 전주, 대구, 제주 등 8도 소재지의 원이나 네모 표식과 더불어 주요 지명과 강·산·섬의 이름이 가득하다. 1680년대에 등장하는 무산茂山이나 순흥順興 등의 지명이 있고, 1712년 5월 15일 조선과 청의 국경협약에 따라 백두산에 세운 임진정계비壬辰定界碑가 보이지 않음은 이 지도의 제작시기를 1680년대 후반~1712년 이전으로 짐작게 한다. <천하지도>가 백두산정계비를 표시한 녹우당의 <동국여지지도>보다 앞서 그려졌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산맥의 흐름보다 농담으로 주요 산들을 독립해 강조한 표현이나 바다의 파도형 물결무늬는 고식으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인촌기념관 소장)를 비롯한 16~17세기 중국지도의 유형이 잔존한 증거이다. 윤두서는 1712~15년경 <동국여지지도>를 그리면서, 왜곡이 심하던 <천하지도>의 조선 영토 남쪽과 제주도·대마도를 상당히 수정하게 된다.
<천하지도>를 포함한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에 대하여, 한국지리학 연구의 중추이자 권위인 이기봉 박사는 “창조적이지는 않지만, 앞 시기의 사례를 정성스레 베낀 지도들이다. <천하지도>의 경우 중국 간행본을 모사하면서 제작자의 식견에 따라 조선 부분에 당시 지명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평가한다.
윤두서는 자화상을 치밀하게 그렸듯, 땅의 초상 또한 세세하게 지도로 제작했다. 그가 지도를 베낀 큰 이유는 병법을 연구하고 무기를 제작하는 등 병류兵流, 곧 군사학에 관심이 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장수나 호걸형의 자화상 이미지에 걸맞는, 사내다운 취미이다. 동시에 그는 천문학이나 수학에도 전문성을 지녔다. 1706년 12월에 송나라 수학자 양휘의 《양휘산법楊輝算法》을 필사했다고 본다. 청나라 황정黃鼎이 저술한 백과전서 《관규집요管竅輯要》(80권 25책)를 여럿이 필사하면서 직접 삽도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두서가 중국의 과학서적을 모사하던 이 시절, 1706년경 전후에 중국지도인 <천하지도>도 제작했을 법하다.
윤덕희의 단양 바위글씨와 <도담절경도>
이번에 윤덕희의 <도담절경도>를 대하면서, 언젠가 충청북도 단양을 답사할 때 발견한 하선암의 바위글씨가 떠올랐다. 단양팔경의 시작인 제1곡 하선암下仙巖
큰 바위 아래의 조각바위에 오른쪽부터 ‘윤덕희尹德熙’, ‘윤덕후尹德煦’, ‘윤덕염尹德廉’, ‘권엄權儼’이라고 새긴 네 사람의 이름이 나란하다. 바위글씨들은 약간 비뚤하고 고졸한 행서체이다. 윤덕희의 서풍은 아니니, 나머지 셋 중의 한 명이 썼겠다. 이렇게 명승고적에 새져진 바위글씨는 훌륭한 사료가 된다. 포항 내연산 폭포의 ‘겸재 정선’, 삼척 무릉계곡 용추폭포의 ‘정선과 이병연’, 단양 사인암의 ‘이인상과 이윤영’, 양산 통도사의 ‘김홍도와 김응환’ 예처럼, 바위글씨에서 유명인사의 이름이나 시같은 필치를 만날 때 반갑기 그지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옹連翁 윤덕희(1685~1766)는 윤두서의 9남3녀 중 장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문인화가의 길을 걸었다. 82세로 장수하면서 집안을 건사했다. 윤두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막내인 윤덕증(1714~1778)이 돌 지난 해였으니 윤덕희는 대가족의 맏형으로 아버지의 역할마저 해야 했다. 윤덕희의 단양 유람에 동참한 윤덕후(1696~1750)는 윤두서의 넷째 아들이고, 윤덕염(1702~1754)은 여섯째이다. 윤덕희는 1746년 6월 남쪽으로 가는 윤덕후에게 애정이 서린 이별의 징표로 <선면산수도>(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부채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섭서葉西 권엄(1729~1801)은 관찰사, 대사간, 판서 등을 두루 지낸 문신文臣이다. 세 형제의 여행에 나이 어린 권엄이 왜 참가했는지 궁금해서 해남 윤씨 족보를 뒤지니, 윤두서의 둘째인 윤덕겸(1687~1733)의 사위로 나온다. 권엄은 나이로 보아 윤덕겸의 늦둥이 딸과 결혼했다. 윤덕겸의 사후인 1745년 전후에 맏형 윤덕희가 챙겼을 혼사이다. 이들 네 명의 생졸년과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윤덕희가 1747년 3~4월 금강산을 여행(《금강유상록》)하기 이전인 1745년 전후에 단양팔경을 다녀간 듯하다.
윤덕희의 노년 필치로 어눌하게 그린 비단그림 <도담절경도>는 1763년에 그린 <송월농현도松月弄鉉圖>와 마주하여 서화첩 《보장寶藏》(녹우당 소장)에 들어 있다. 단양을 유람한 지 근 20년 뒤 실경을 추억해서 그렸을 수묵화이다. 중경에 도담島潭 세 봉우리를 우뚝하게 과장해 배치하고, 멀리는 치악산경이다. 화면의 왼편 구멍이 뚫린 봉우리는 도담삼봉의 맞은편 북쪽 강언덕의 석문石門이다. 이 그림처럼 석문과 삼봉이 한 화면에 담길 시점을 실제 현장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윤덕희가 단양의 명소 도담 풍광을 그렇게 기억해 구성했을 것 같다. 또 윤덕후에게 그려준 <선면산수도> 역시 강변의 험준한 벼랑과 산세에서 단양풍경을 연상케 한다. 윤덕희의 기억에 따른 합성과 변형방식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 형식을 완성한 겸재 정선(1676~1759)의 화법과도 유사하여 흥미롭다.
윤두서의 손자, 윤위의 <구택규 초상>
윤위의 <구택규 초상>은 관복차림의 문신 흉상이다. 2012년 가을, 프랑스에서 국내로 반입돼 옥션에 출품되었다.(제125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 도록, Lot.414, 2012, 9) 족자로 꾸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림에는 이름이 없으나, 초상화의 아랫단에 ‘1760년 7월(음력) 피눈물을 흘리며 썼다’는 단정한 예서체의 글에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확인된다. 글쓴이는 병조판서를 지낸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이다. 그가 떠올린 ‘중년 이후의 아버지’, 곧 초상인물은 한성부판윤을 지낸 존재存齋 구택규具宅奎(1693~1754)이다. 1750년경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범재泛齋 윤위尹愇(1725~56)라고 밝혀 놓았다.
윤위는 윤두서의 일곱째 아들인 윤덕현尹德顯 (1705~72)의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다. 32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범재집》이 전하고, 서문을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지었다. 윤위의 아들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1752~1821)이 요청한 서문에서, 정약용은 절친인 윤규범의 천재성 못지않은 윤위의 문학세계를 서성書聖 왕휘지·왕헌지 부자에 빗대서 칭송했을 정도이다. 윤위가 그린 초상화의 출현으로, 윤두서 집안에서 삼대에 걸쳐 배출된 문인화가는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구택규 초상>은 50대 사대부 문관의 고집스러운 품위가 가득한 비단그림이다. 오사모에 분홍색 단령포 차림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관복 초상화 방식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세심한 선묘의 희끗희끗한 수염이나 붉은색 입술, 음영을 살짝 넣은 기법은 <윤두서 자화상>에서 배웠을 법하다. 이마와 눈가 주름, 코와 안면의 검버섯 같은 피부병 묘사까지 사실감이 서늘하다. 어깨선의 수정 흔적이나 몇 가닥 옷주름에 보이는 조심스러운 붓자욱은 문인화가의 담백한 감성을 물씬 풍긴다. <구택규 초상>은 소품의 흉상이지만 단아한 명작이다. 윤두서의 뛰어난 소묘력 유전인자가 기존에 알려진 연옹 윤덕희-청고 윤용 부자보다 윤위에게 내려진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