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The 5th Fukuoka Asian Art Triennale 2014

아시아의 진짜 모습은?

‘미래세계의 파노라마-새롭게 피어나는 시대 속으로(Panorama of the Nextworld-Breaking out into the Future)’를 주제로 한 <제5회 후쿠오카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 2014>가 9월 6일부터 11월 30일까지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및 주변 지역에서 열린다. 미술관이 직접 개최하는 이 트리엔날레는 올해 ‘새로움’을 화두로 삼고 대회의 방향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이번 대회가 이야기하고자 한 ‘아시아성’을 직접 보고 들은 필자의 글을 소개한다.

김주원  미학, 일본 CCA 기타큐슈 비지팅 펠로

타자(他者)의 인식은 공간의 구획을 가능하게 한다. 이전까지 추상적 공간 개념으로 여겨지던 ‘아시아’가 후쿠오카 아시아 트리엔날레(The 5th Fukuoka Asian Art Triennale 2014, 이하 ‘FT5’))를 통해 명시화된 것도 어느새 5번째가 되었다. 1999년 이래 아시아 현대미술에 관한 담론 형성과 전개를 이끌어온 FT의 이번 주제는 ‘미래세계의 파노라마 -새롭게 피어나는 시대 속으로(Panorama of the Nextworld-Breaking out into the Future)’이다. 아시아 21개국 지역의 젊은 시각미술가 46명의 작품이 초청, 소개되었다.
잘 알다시피 FT는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The Fukuoka Asian Art Museum, 이하 ‘FAAM’)의 지속적인 조사연구, 교류사업의 성과와 축적을 기반으로 한다. 일회성의 블록버스터로 지형 변동을 꾀하는 여타 국제 비엔날레류 전시의 과감함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며,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의 지금’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아시아 각국의 미술전문가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이번 FT5의 예술감독 역시 FAAM 사업관리부장이자 학예과장인 구로다 라이지(黒田雷児)가 맡았다. 그는 FT의 ‘새로움’을 강조한다. 먼저 외부 위원으로 구성된 작가 선정위원회를 폐지하고, 미술관 내부 협의를 통해 작가를 선정했다. 트리엔날레의 방향성과 성격을 보다 확고히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구로다 라이지의 표현대로 갱신의 의지를 보여준다. 30여 년에 걸쳐 미술관이 축적한 방대한 자료, 정보는 물론 미술관의 지속적인 교류사업을 통해 구축한 전아시아에 걸친 인적 네트워크의 협력도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이다.
트리엔날레/비엔날레가 미술관의 미션, 컬렉션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국제적인 스타급 큐레이터나 예술감독 개인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통찰력에 크게 의존하는 여러 비엔날레 등을 비교대상으로 두고 보면, 서구 시각에 종속되는 오리엔탈리즘이 재생산될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 의지일 수도 있다. 또한 정치적, 전략적으로 제국의 시대 이후 아시아에 관한 한 해석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일본의 강한 자신감의 발로인 듯도 하다.
어쨌든 트리엔날레와 미술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각국에서 전개되는 현대미술의 ‘가치’와 ‘의미’는 미술관적 조사연구와 교류의 지속성 속에서 전시되고 호명됨으로써 그 다양한 변주가 리얼한 무게를 갖게 될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24. WATAGATA 후쿠오카부산 Arts Network, 2010년 발족. Tanaka Chisato(후쿠오카 거주)의 전시장면

WATAGATA 후쿠오카부산 Arts Network(2010년 발족) Tanaka Chisato(후쿠오카 거주)의 전시광경 Photo by 김주원

트리엔날레, ‘어느 것이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도
FT5는 ‘열려있는’ 미래를 주목하면서 일상과 밀접한 시각문화예술 전반을 다루고 있다. 열려 있는 미래는 결코 이미지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궁 같은 현실의 일상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대회에 비해 작가성이 두드러지는 작가 개인보다 출판, 게임, 애니메이션 등 대중에게 친근한 장르를 다루는 작가이거나 그룹, 또는 교류활동 자체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예술개념의 정의 불가능성 논제가 ‘어느 것이나 예술이 될 수 있다(an open concept)’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미국의 미학자 모리스 와이츠(Morris Weitz)를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전시는 총 5개의 세부 범주로 구성되었다. ‘글로벌리즘의 끝에서(From the Far Corners of Globalism)’, ‘집단이라는 환상(Beyond the Collective Illusion)’, ‘일상 속의 소실점(Into the Dead Zone)’, ‘이미지의 연금술(Through Visual Trans-mutations)’, ‘멋진 신세계로(Towards a Brave World)’가 그것이다.
작품은 구분된 범주와 상관없이 전시 되었고《  트리엔날레 비주얼가이드 북》도 마찬가지로 편집되었다. 기획자들은 작품이 여러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관람자의 상상력과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른 재해석을 기대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작품과 작품, 작품과 전시, 전시와 관객 사이의 해석적/이해적 관계망 구축에는 실패한 감이 없지 않다. 국가별 또는 주제에 따른 범주별 구분방식도 아닌 전시에서 결국 관객이 마주하는 건 작품 개별이거나 전시 전체이다.
국제전시에서 관객에게 작품 개별을 강조하는 경우, 흔히 그렇듯이 21개 국가 개별의 섬세하고 특정한 역사와 그로 인한 현재적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관객에겐 이번 트리엔날레가 선택한 46명의 작품을 대면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다는 인상이었다. 대중적 감각에 호소하는 시각문화 일반이라 하더라도 현실 속 우리의 일상은 그리 녹록하거나 만만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컨대, 국가와 민족, 전쟁과 이데올로기, 난민과 이민, 정치와 종교 등의 역사적, 사회사적 이슈가 이미지와 기억, 자연과 소멸, 관계 등의 일상성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문경원 전준호의 신작 <묘향산관>(2014), Studio Revolt, Sugano Masahiro, Kosal Khiev의 <Unite Us>(2013), Nguyen Trinh Thi의 <Landscape Series>(2013), Haider Ali Jan의 <Survival>(2010) 등등은 그 예다. 더군다나 이 작품 대부분이 시간을 요하는 영상작업이라는 점도 관람의 어려움을 더했다.
반면, 개별 작품이 아닌 전시 전체를 덩어리로 대면했을 경우, 관람객은 감각적으로 기획자의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일본 FT5에서 호명된 각 나라의 시각예술은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관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이해와 오해의 가능성 사이에서 공명한다. 다소 과장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아시아에 관한 셀프-오리엔탈리제이션의 충동을 자극하거나 투어리즘의 변종 등을 생산할 위험도 다분하다. 올해 새롭게 설치한 특별전시에 소개된 <몽골화의 새로운 시대 : 전통에서 현대에로>의 대다수 작업과 Prilla Tania(인도네시아)의 <E(Japan)>(2014), Pema Tshering(부탄)의 <Sound of Time>(2010), The Maw Naing(미얀마)의 <Between the Pages>(2011), Muhammad Alinormin Hj Omarali(부르네이)의 <Life of a Pensioner>(2013), Lu Yang(상하이)의 <UlterusMan>(2013-14), Bu Hua(베이징)의 <The Last Phases of the Future>(2014), PHUNK(무국적)의 트리엔날레 포스터와 월페인팅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작업에도 근대적 이미지 속의 지역성이 강조되거나 일본의 망가나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SF적 요소가 눈에 띄었다. 물론 내용적 측면에서는 상이하지만 감각적으로는 기획자의 시각을 가늠케 하는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로 다가왔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 질서의 변동과 경제발전을 토대로 아시아는 통합에의 전망을 품게 되었다. 그 통합의 실마리를 ‘미술’에서 찾는 FT5는 올해의 특징으로, 일본은 물론 국제적으로 전혀 소개된 바 없는 각국의 신진작가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던 시대가 있었던가. 이제 아시아의 모든 길(미술)이 후쿠오카로 통할 날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국제전람회로서 FT에 전시 이후 출품을 미술관에 컬렉션하는 등의 적극성도 대회와 미술관에 대한 신뢰를 배가된다.
FT나 미술관은 ‘아시아성’을 규정하고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기제로서의 미술관과 전시라는 형식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더라도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호명, 전시, 출판되는 시스템 안에 배열되는 한 어느새 후쿠오카 초, 후쿠오카 발 ‘아시아다움’은 만들어 질 것이다.
‘몽골화’ 등 일반적인 미술개념의 기준으로는 소재도 기법도 다소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작업과 ‘일본 대표’ 작가가 아닌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후쿠오카의 일러스트레이터 요시나가 고타쿠의 작업, 그리고 후쿠오카와 부산을 잇는 지역 간 네트워크 그룹인 WATAGATA Arts Network의 활동과 프로그램 등을 비중 있게 다루는 등의 선택은 분명 미술관을 기반한 갱신과 새로움에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과 활동의 성격들이 미학적 조형적 측면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는데 올해 트리엔날레가 다시 되묻고 있는 질문, 즉 ‘예술/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끝나지 않는 반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는 국제전으로서 30여년 이상에 걸쳐 지속적으로 아시아 미술을 조사, 연구, 수집, 데이터화해 온 FT가 이미 역사가 되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어느새 5회 째의 후쿠오카초(初), 후쿠오카발(發) ‘아시아’의 역사가 말이다. ●

본격적으로 트리엔날레가 시작되는 7층 미술관 입구 최정화 작품 Photo by 김주원

본격적으로 트리엔날레가 시작되는 7층 미술관 입구 최정화 작품 Photo by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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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35. 구로다 라이지<제5회 후쿠오카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 2014>예술감독 구로다 라이지(黒田雷児)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FAAM) 학예과장

“ ‘지역’의 문화와 그 사회에 기초한 표현을 주목했다”

FT는 다른 비엔날레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
아시아의 21개국・지역에서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작가를 선정한다. 이는 전지구화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둘째, 미술관 내부의 지속적인 조사에 기반을 둔 기획과 운영, 작품 수집에 있다. 이와 같은 전시 운영방식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번 FT5의 특징 중 하나는 신진작가를 대거 초청한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작가를 소개하는 것이 FT의 특징이다. 또 이전의 전람회와는 다른, 새로운 경향을 보여야 하는 것이 트리엔날레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FT4에서 FAAM 10주년과 맞물려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작가도 출품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로컬리즘에 기초한다. 후쿠오카의 지방성도 아시아의 지역성과 같은 무게로 존중한다.
FAAM과 FT가 표방하는 ‘아시아성’은 무엇인가?
공식 정의된 적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아시아성을 정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실천으로 탐구되고 실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성’이 아니라 ‘아시아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특정 아시아 지역의 문화·사회·역사를 아시아의 작가가 주체적으로 표현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FT5에 대한 내 인상은 상당 부분 팬시하고 망가적이었다.
젊은 작가의 만화적 애니메이션적 혹은 SF적인 작품이 이번 FT5에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일본 만화가 세계에서 인기를 모으는 거대 산업인 것은 맞지만, ‘만화=일본문화’ 식의 인식은 동아시아에서만 통용되고 있다. 실제로 필리핀, 인도, 인도네시아에서는 미국 만화의 영향이 크다.
당신들 관점에서 ‘아시아’와 서양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구체적으로 어느 작품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흥미로운 의견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정반대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FT가 작품의 ‘무국적화’를 진전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FT처럼 아시아의 전통예술 양식, 형식, 주제를 다룬 ‘전근대적’ 성격의 작품은 지양하고 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의 Prilla Tania는 인도네시아의 전통문화와 예능을 참조하여 국제미술계에서 평가 받는 작가와는 다르다. 서양과 아시아라는 이분법이 아닌 ‘지역’의 문화와 그 사회에 기초한 표현을 주목했다.
당신들이 보는 한국미술계의 특성은 무엇인가?
‘한국미술’ 아님 ‘한국미술계’? 잘 모르겠다. 다만 일본보다는 미술관 건축, 행정적 지원, 개인 컬렉터 같은 현대미술을 둘러싸고 큰돈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이고 국제적 경험이 있는 작가와 큐레이터가 부쩍 늘었다.그러나 예술로서의 근원적인 충격력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내외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과대평가를 받는 작가가 적지 않은데 특히 서구 경험이 있는 작가가 그렇다고 본다. 후쿠오카=김주원

 

[World Topic] Go Betweens: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

중개자들, 어린이라는 장르

일본 롯폰기에 있는 모리미술관에서 5월 31일부터 8월 31일까지 <Go Betweens-아이들을 통해서 보는 세계전>이 열렸다. 전시 타이틀을 언뜻 보면 어린이를 위한 전시로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시는 어른의 고정된 시각이 세계를 보는 ‘상식’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어린이가 세상을 살피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을 소개한다. 또한 아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다양한 요소를 바라보는데, 매개자로서 아이들은 어른에게 색다른 세상 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글 제목을 보고 우선 당신은 ‘이 글은 별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넘길지 모른다. 어린이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까. 나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바로 그 같은 관심의 선별이 어떤 선입관에서 연유한 것인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간과하게 하는지가 이 글의 주제다.
지난 5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열린 <고 비트윈스: 아이들을 통해 보이는 세계(Go-Betweens: 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는 개막 시기도 그렇거니와, 전시 명을 통해서도 언뜻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들의 전시’라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5월 가족의 달부터 8월 여름방학까지, 관객 특수(特需)를 기대하고 여는 ‘대중 기획전’ 또는 ‘패키지 전시’ 유형의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고 비트윈스>를 두고, 전시장 곳곳에 핑크색과 파란색의 장난감 같은 순진무구한 작품들이 즐비하고,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줄 맞춰 전시를 관람하며, 미술관 교육프로그램을 따라 아이들이 이것저것 미술 체험을 하는 현장을 눈앞에 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기획전은 그런 알록달록하고 명랑 쾌활한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주제 면에서 보면 어른들이 고민해야 할 현실의 무거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복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의미심장한 전시다. 물론 전시 부제에 보듯이 그런 현실의 문제를 어른들의 관점이나 주장 대신 ‘아이들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하는데, 우리가 이 전시를 특별히 주목할 이유가 여기 있다. 요컨대 <고 비트윈스>는 맑은 동심이라며 아이들을 낭만화하지 않는다(그것은 어른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중심에서 밀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그렇다고 어른들, 특히 국내외 미술계 전문가들만의 리그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전시는 우리가 속한 세계의 리얼리티를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그 리얼리티란 글로벌리즘의 시대적 조류를 좇아 문화적 다양성, 차이, 이주, 유목, 다문화, 다자적 교류가 당연시되는 사회 내부에서 불안, 갈등, 배타, 고립, 단절, 혼란의 양상이 이미 발생했고 언제나 작용 중인 실재다. 어른이자 소위 전문가인 내가 이렇게 논리적 언어로밖에 쓰지 못하는 그 리얼리티를, <고 비트윈스>는 아이들의 얼굴 표정, 몸짓, 말, 꿈, 판타지, 그리고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 자잘하게 축적되는 내면의 일들(을 다룬 작품들)로 드러낸다.

‘어른 중심주의’가 가능하지 않은
어떤 친절한 어른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일이 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부정적인 문제로 인식되거나 골치 아픈 일을 아이들과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고, 토로하지도 않고, 의논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문제적인 일 자체를 아이들의 삶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일은 오롯이 어른들만 겪고, 어른들만 알며, 어른들끼리만 의논하고 해결할 수 있는/해야 할 어른들 세계의 문제라고 단정한다. 피상적으로야 어린이는 사랑하고 보호할 대상이지만 실상 어른들의 무의식 속에 그들은 이미 항상 아무것도 모르고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도 별로 없는 약자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주인’ 또는 ‘다음세대’라는 말을 써도 그 어린 주인공들의 세계를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어른 중심주의’다.
예컨대 2000년대 들어 싫든 좋든, 원하든 원치 않던 동시대인 모두가 따라야 할 계율처럼 된 세계화와,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우리 대다수가 정주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의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고, 국적불문 및 지역불문의 의식주 상품과 문화 소비재를 소비하고,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며 우리나 그들도 아닌 낱알의 익명의 존재들이 된 상황을 ‘어린이’의 관점과 구체적 경험의 수준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특히 이 질문을 학자, 비평가, 큐레이터들에게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부터 ‘글로벌리즘과 연관된 비판적 연구, 글쓰기, 기획’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현재도 여전한 마당에 우리는 거의 한 번도 그 이슈를 어린이의 내면, 경험, 지각, 정서라는 층위에서 탐색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리미술관의 아라키 나쓰미(Araki Natsumi)가 기획한 <고 비트윈스>는 21세기 들어 우세한 가치로 떠오른 유동성, 이동성, 이질성, 혼종 등을 어른들의 시각과 판단으로 검토하는 대신 아이들의 모습, 행동, 감수성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해서 “다른 문화들, 현실세계와 상상세계, 성년과 유년”이 공생, 각축을 벌이는 현실의 차원을 미술로 훑어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떠올려보자. 중년이 다 돼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타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 그리고 그 부모를 따라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어린아이. 부모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그곳의 이질적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포사회 안에서 제한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아이는 그 낯선 곳의 문화적 습속을 빠르게 습득해나간다. 그래서 차차 아이가 자신의 부모와 이민 간 나라의 사람들 간 소통 및 사회생활의 각종 일들을 맡아 하게 된다. 영미권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중개자(Go-Between)’라고 부른다. 사실 차이를 뜻하는 단어 ‘difference’에서 ‘fference’는 라틴어로 ‘전달, 운반’ 또는 ‘관계’를 뜻하는 단어 ‘ferre’를 어원으로 하는데, 그럼 중개자로서 이민자 아이들은 모국과 이국 사이에서 길을 잃은 부모세대에게 차이의 문화를 전달하고 서로 관계 짓는 역할을 한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르게는, 그런 어린이들 자체가 이름 그대로 이 상태와 저 상태 사이, 익숙한 문화와 낯선 문화 사이, 자유로운 이동과 뿌리 뽑힘 사이, 다양성과 정체 없음 사이를 실존적으로(go between) 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현존은 어른의 시각을 특권시하는 어른 중심주의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고 비트윈스>가 주목한 대상이 바로 그런 유년의 세계다. 전시에는 20세기 초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아이 사진을 통해 서구사회의 아동 노동착취 문제를 불러일으킨 루이스 하인(Lewis W. Hine)부터 한국의 김인숙과 원성원, 나라 요시토모(Nara Yoshitomo)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작가, 또 네덜란드, 호주, 핀란드 등 다양한 국적과 작업 성향을 가진 26팀/28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전시는 그 다양성을 배경으로 한 작품 속의 어린이들이 어떤 의미와 모습을 띠고 경계와 차이로 가득한 세계를 중개하고 있는지, 차이가 차별이 되는 어른 중심사회에서 어떻게 상처받거나 소외되며 왜곡에 빠지는지 등을 5개 섹션의 대규모 전시를 통해 펼치고 종합한다. ‘문화를 넘어’, ‘자유와 고립의 세계’, ‘고통과 갈등의 기억’, ‘어른과 아이 사이에 낌’, ‘다른 차원들 사이를 움직이기’가 그것이다. 섹션 주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전시된 여러 작품에서 조명하는 ‘고 비트윈스/어린 중개자들’은 그 용어의 유래처럼 부모세대보다 강한 적응력으로 자신에게 강제 이식된 낯선 삶을 마찰이나 고통 없이 유연하게 살아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거나 자유롭거나 행복하지 않다. 거기에는 예컨대 테레사 허바드와 알렉산더 비르클러(Teresa Hubbard & Alexander Birchler)의 비디오에서 여자아이가 즐거운 커뮤니티로부터 배제된 채 비를 흠뻑 맞으며 혼자 생일파티를 치르는 것과 같은 이방(異邦)의 서러움이 있다. 김인숙의 <달콤한 시간들>에 담긴 조선인민학교 출신 두 소녀의 성장기는 재일교포 2세, 3세의 가족사진과 더불어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 이민자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며 구축한 마이크로월드를 드러내는데, 그 미시세계는 비연대기적(anachronic) 시간과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성을 품고 있다. 이는 원성원이 사진합성기법을 통해 만든 <나의 일곱 살> 사진연작 속 시간 및 복잡성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김인숙의 사진에서 착오적 시간과 문화적 복잡성은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의 역사라는 외적 강압이 작은 개인을 넘어서 오랜 시간 교포사회에 파생시킨 결과다. 반면 원성원의 사진은 작가의 유년기 사적 경험과 기억을 사진의 객관성과 디지털 이미지합성 기술력을 혼합해 동심의 얼굴을 한 무시간적 가상세계로 변형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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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 도모코 Lost Boundaries 영상설치(7분) 2012 Copyright MORI ART MUSEUM All Rights Reserved.

파괴적이며 활동적인
원성원 작품 속 가상성을 야마모토 다카유키(Yamamoto Takayuki)의 <새로운 지옥> 영상설치작품과 대구로 논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이번 모리미술관 전시를 위해 4일에 걸쳐 아이들과 워크숍을 했고, 그 과정에서 선생의 경력을 살려 아이들에게 불교 만다라 등 일본미술사의 각종 지옥 형상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거기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해골이 눌어붙은 집, 갈기갈기 찢긴 심장, 외눈박이 귀신 등 총천연색 지옥도/설치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해 어른이 훈련시킨 발표 방식으로 카메라 앞에서 설명하는데, 작가는 최종적으로 그 영상과 새로운 지옥이미지를 함께 전시에 내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이의 상상력이 새하얀 도화지 같다거나 상실한 유년기가 가상의 풍요로 넘친다는 식의 묘사가 얼마나 어른들의 상투적 사고인지 새삼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린아이들의 감각과 지성이 전통과 어른들의 교육에 의해 어떻게 주조되고, 그 아이들이 다시 자기 현실의 무엇을 중개하는지 두려운 눈으로 보는 일이다. 어린이란 어른의 보호 아래 고정된 일차원적 객체가 아니라 부모의 문화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먹어치우고, 자신의 문화를 만들며, 다시 그 스스로 부모의 문화가 되는 파괴적이고 활동적인 중간자인 것이다.
감상자들이 <고 비트윈스>에서 꽤나 충격적이고 어린이들의 전시로 부적합하다고 꼽을 작품은 아마도 기쿠치 도모코(Kikuchi Tomoko)의 <잃어버린 경계들> 영상일 것이다. 또 말로 꺼내기 민감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느끼는 작품은 장오(Zhang O)의 <아빠와 나> 사진 연작이 아닐까 싶다. 베이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모코는 <잃어버린 경계들>에서 하이틴 소녀가 남자로서 연상의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맺으며 자본주의적 성장으로 흥청거리는 중국 도시의 구석을 헤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습관적 감성으로든 도덕의 이름으로든 그런 모습을 아이들과 결부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의 사진들에서는 서구에 입양된 아시아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의붓아버지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른 감상자 입장에서 그 포즈들은 부녀관계로는 부적절한 어떤 육체적 관계와 성적 교환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느낌은 머리 굵은 어른의 입양에 대한 편견이나 몹쓸 상상력에 기인한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자신에게 강제된 삶의 조건에서 사랑받고 살아남아야 하는 입양아동의 본능이 노출된 효과일 수도 있다.
어른들이 쉽게 단정해버리는 아이들의 속성은 ‘어리고 연약하다, 순진무구하다, 귀엽고 예쁘다’는 것 등이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라는 존재는 애완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 비트윈스>의 작품들 속 여러 양상처럼 어른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나가야 하는 존재다. 그들에게도 글로벌리즘은 현실이며, 소통과 관계는 어려운 문제다. 어른만이 아닌, 어린이라는 특정 지대/장르를 통해 세계를 보고, 경험하고, 판단할 필연적 이유가 그 가운데 깊게 도사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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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Betweens: 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전 그림책 라이브러리 광경 Photo: Sakano Takaya Photo courtesy: Mori Art Museum, Tokyo Copyright MORI ART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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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원 Oversleeping (from the series My Age of Seven) C-print 86×120cm 2010 Copyright MORI ART MUSEUM All Rights Reserved.

 

[World Report] Simultaneous Echoes

hola!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의 젊은 세대 미디어아티스트 10명이 참여한 전시 <동시적 울림(Simultaneous Echos)전>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7월 23일부터 9월 30일까지 열린다. 이 전시의 무대인 포르타밧미술관은 아르헨티나 4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유명 사립미술관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 취재를 통해 이번 전시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이준희  본지 편집장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브라질 월드컵의 열기가 식어가는 즈음에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월드컵 준우승의 아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위치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울과 정확히 12시간 시차가 난다. 따라서 우리나라와는 낮과 밤이 반대고 계절 또한 반대다. ‘남미의 파리’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시 전체가 전형적인 유럽 도시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오래된 유럽식 건물과 잘 정돈된 공원은 영락없는 유럽 한복판 풍경이다.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를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지만 거리나 식당에서 마주친 시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한국대사관 외벽엔 때마침 한국을 방문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자한 얼굴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황이 아르헨티나 사람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현수막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오히려 여유와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이처럼 아르헨티나는 국민 대부분이 백인이고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느 남미 국가와 달리 원주민의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설까? 그들은 문화적인 자존감과 우월의식이 넘쳐났다. 그 이면엔 침략과 점령을 통한 식민지배라는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감춰져 있음은 물론이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한류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그 중심엔 이른바 ‘K-Pop’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한국 대중가요가 있다. 한국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클래식 연주자에 대한 관심도 크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미술이나 현대무용 같은 순수예술 분야 교류도 점차 확대되어가는 추세다. 이와같은 문화외교의 중심에 중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아르헨티나에 있는 중남미한국문화원(원장 이종률)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젊은 미디어아티스트 10명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전시 또한 중남미한국문화원에서 추진하는 문화사업 ‘K-컬처 4중주(팝, 영화, 클래식,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사된 것이다.
예술매체이론 박사인 경일대 사진영상과 손영실 교수가 기획한 <동시적 울림전>이 열린 포르타밧미술관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근래 개발된 신도시 지역에 있다. 마치 바다처럼 넓은 강변에 위치한 미술관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느 오래된 건물과 달리 현대적이다. 미술관 설계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가 했다. 서울 종로2가 사거리에 있는 삼성 종로타워와 도쿄아트페어가 열리는 도쿄 국제포럼 빌딩이 그의 작품이다. 그것들과 비교해 포르티밧 미술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뇰리 특유의 건축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2008년 개관한 포르티밧 미술관의 역사 또한 흥미롭다. 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COLECCION DE ARTE AMALIA LACROOZE DE FORTABAT’. 즉 ‘아말리아 라크루제 드 포르타밧의 컬렉션을 모아 놓은 미술관’이란 뜻이다.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  1층은 카페와 아트숍 등이 있고,  2층과 3층에서 기획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도 3층 공간을 활용했다. 지상층보다 훨씬 넓은 지하 전시장에서 컬렉션이 상설전시된다. 지하 1층 상설전의 첫 작품은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 <Portrait of Mrs. Amalia Lacroze de Fortabat>(1980)이다. 앤디 워홀 특유의 색채로 표현된 아말리아 포르타밧 여사가  이 미술관을 만든 주인공이다. 바로 옆에 걸린 흑백 인물사진을 보면 상당한 미인임을 알 수 있다. 재밌는 사실은 아말리아 여사의 성(姓)이 원래는  포르타밧이 아니었다는 것. 유부녀인 아말리아를 보고 한눈에 반한 아르헨티나의 부호이자 시멘트 사업가였던 포르타밧(Retrato del senor Alfred Fortabat, 1919~1994)의 끈질긴 구애로 결국 아말리아는 원래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재혼했다고 한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포르타밧과 재혼한 아말리아는 포르타밧이 죽은 후에도 시멘트 사업을 더욱 번창시켰고, 그러면서 수준 높은 미술작품을 수집해 미술관까지 건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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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빈 <임상빈> 싱글채널비디오 음향 11분 35초 2013

 

백남준의 후예들
한편 이번 전시를 기획한 손영실 교수는 올해가 백남준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 되는 해임을 전면에 내세웠다. 백남준의 인지도는 남미에서도 매우 높다. 아르헨티나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젊은 미디어아티스트를 소개하면서 그들을 ‘백남준의 후예’로 각인시킨 기획자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백남준의 명성과 맞물려 최첨단 디지털 산업이 발달한 한국에서 온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은 현지 미술계로부터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참여작가 류호열, 뮌(김민선+최문선), 박준범, 오용석, 유비호, 이예승, 이이남, 이종석, 임상빈, 한경우는 200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한국 3세대 미디어아티스트로 구분지울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 기반을 둔 영상과 음향, 설치 등 다양한 표현매체를 다루는 이들의 작품은 개인의 내밀한 감수성 문제부터 사회·정치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손영실 교수는 “정치/문화/사회적 정체성이 재편되고 전이되면서 급격한 변모를 거쳐 온 한국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와 개인, 예술과 삶, 기술과 예술이라는 이항대립적 관계에서 파생된 현상을 동시대의 시각으로 진단하고자 이와 같은 전시주제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출품작가 가운데 뮌, 이예승, 이종석이 손영실 교수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직접 방문해 현장에서 작품을 설치하고 워크숍에 참여했다. 부부 작가 뮌은 올봄 코리아나미술관 개인전 <기억극장>에서 선보여 큰 호응을 받은 미니어처 권투 링 모양의 작품 <앙상블-Ethics Business>과 영상 <Set(American wooden house)>를 독립된 전시공간에 설치했다. 이예승은 오브제와 그것에 비친 그림자를 이용한 설치작업 <Cave into the cave : A wild rumor)> 새 버전과 관람객 소리에 반응해서 점멸하는 전구 작품을 전시장 곳곳에 설치했다. 그리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장면을 느린 카메라 워크로 섬세하게 표현한 류호열은 소형 모니터를 이용함으로써 관람객의 집중도를 높였다. 이 밖에도 임상빈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사운드와 입모양 영상작품을 출품했고, 나머지 작가의 작품은 삼성전자 현지법인으로부터 협찬 받은 TV모니터를 통해 디지털 영상을 상영하는 방식으로 공개됐다. 이틀 동안 두 차례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한결같이 많은 관람객이 이이남의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감상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여러 전시를 통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거니와 작품이미지가 전시 팜플렛과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동서양의 명화 이미지를 차용해 디지털로 번안한 이이남의 작품이 서양인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전시를 함께 관람한 중남미한국문화원 이종률 원장은 미술에 문외한이라며 겸손해하면서도 “한국은 1979년 <한국미술 5천년전> 이후로 대규모 해외전시를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식 해외 전시가 60여 회 열렸고, 1994년에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1945년 이후 일본미술:하늘을 향한 비명>이라는 큰 규모의 전시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대미술 경우에도 비엔날레를 통해 외국 작가를 초청하는 사례는 많지만, 한국 작가를 외국에 적극 소개하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에 기자는 한국 현대미술을 외국에 프로모션하기 위한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했던 전시 <박하사탕전>이 지난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4개월 동안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순회한 적이 있노라 궁색하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댓구했다. 그런가 하면 현지에서 만난 이민 2세 출신 작가 조용화 씨는 “국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나의 뿌리는 한국” 이라며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앞으로도 한국미술의 발전을 기대하며 관심 갖고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남미뿐 아니라 그동안 서구 일부 국가에 편향된 미술교류의 통로를 보다 다각화하고 넓힐 필요성을 절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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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승 Cave into the cave : A wild rumor 가변크기 설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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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손영실<동시적 울림전>을 기획한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손영실 교수

“첨단기술과 문화가 결합한 국가 이미지를 심어줬다”

아르헨티나에서 전시를 개최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한국의 미디어아트 작업을 해외에 선보일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르헨티나 중남미한국문화원이 2013~2014년 중점사업 분야를 한국미술 전시로 지정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1년 넘게 여러 차례 전시기획안을 아르헨티나 주요 미술관에 제출했고, 이런 과정을 거쳐 올해 초 전시가 결정됐다.
현지 관객의 반응은? 아르헨티나 주요 신문기자들은 물론이고 미술 관계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특히 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백남준에 대한 기억 속에서 이번 전시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들은 백남준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남준 이후 한국의 미디어아트가 어떤 양상으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한국의 젊은 미디어작가들의 모습을 백남준과 비교해보려는 듯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아쉬웠거나 어려웠던 점은? 한국과 물리적으로 먼 남미라는 점이 가장 큰 장애였다. 작품 운송이 쉽지 않은 환경에 대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 기획의 첫 단계에서부터 작품 운송 문제는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모니터 기반의 싱글채널 작업이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됐다. 일부 설치작업은 작가가 현지에서 직접 설치했는데,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좀 더 역동적으로 보일 수 없었던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을 전시 주제의 모티프로 설정한 점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에서 백남준의 명성과 인지도는 어느 정도인가? 이번 전시는 백남준과 젊은 미디어아티스트의 미디어아트에 관한 시선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차이와 간극을 드러냄과 동시에 급격하게 개인화한 미디어의 변용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히 전시 기간 중에 ‘한국 현대 미디어아트와 백남준의 유산들’이라는 주제의 워크숍이 포르타밧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2시간가량 진행된 워크숍에서 ‘한국 미디어아트의 역사와 특성’을 주제로 발제를 하고, 참여 작가의 작품을 보다 자세히 소개했다. 이 자리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호르헤 라 페를라 교수 등 아르헨티나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이 여럿 참여했다. 그들은 한국의 미디어아트를 여전히 생소하게 받아들였지만, 백남준에 대해서는 뜨거운 관심을 표출했다.
이번 전시가 향후 전시기획을 추진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되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전시 개막 직후 현지 관계자로부터 남미 순회전 제안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실행 여부를 좀 더 차분히 고민해보려 한다. 앞으로 한국 미디어아트의 담론을 확산시키고 동시에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위한 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는 전시를 준비할 계획이다. 우선 내년에 프랑스에서 개최할 예정인 전시기획안 확정 작업을 서두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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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열 LCD, 싱글채널비디오, 플렉시글라스 17×34×5cm 3분 2013

 

 

[World Report] Alibis – Sigmar Polke 1963-2010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2010). 69세를 일기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그의 이름이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작가의 작가’로 불리며 지독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했던 그를 회고하는 전시 <알리바이 1963-2010(Alibis 1963-2010)>(MoMA, 4.19~8.3)가 열렸다. 그의 작품 약 250점을 선보인 이 전시는 왜 지금 우리가 폴케를 되돌아 봐야 하는지에 답하고 있다.

현자의 돌을 찾으려 한 연금술사의 행적

서상숙  미술사

지난 2010년 오랜 암투병 끝에 69세를 일기로 숨진 독일작가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2010) 회고전, <알리바이 1963-2010(Alibis 1963-2010)>이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모던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석 달 반의 전시 일정을 마치고 8월 3일 폐막한다. 폴케가 작품을 준비하며 기록한 메모나 스케치를 볼 수 있는 노트북과 스케치북을 포함, 250여 점의 작품이 연대기순으로 전시되고 있다.
<알리바이전>은 폴케가 세상을 뜨기 전 기획된 전시다. 폴케는 모마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한다는 것을 알았고 초기 준비단계에 참여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작품을 선정했고 어떻게 디스플레이 하기를 원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전시장을 도는 내내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는 색깔 하나하나까지 자신이 직접 만들어 썼으며 작업실에 조수를 두지 않고 직접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까다로운 절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며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생애의 마지막까지 새로운 재료와 방법을 탐구했던 폴케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지난 4월 19일 개막 이후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폴케는 만화 같은 드로잉과 코믹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 그리고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듯한 자신의 이미지로 ‘익살꾼’이라고도 불렸다. 나치 치하에 태어나 어린 시절 서독으로 망명했고 분단국가와 히틀러, 대량 학살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살아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트와 유머 그리고 풍자가 곁들인 작품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전후작가로 자리매김한 폴케는 그러나 독일 분단의 역사를 빼고는 논의가 되지 않는다.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라는 전시 타이틀 역시 ‘나는 아무것도 못봤다’라는 뜻으로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침묵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역사성과 시대성에 대한 인식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였다.
폴케는 그와 함께 전후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가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를 통해 그 명성을 쌓은 것과는 반대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진, 필름, 옷감, 비소 등 화학물질을 비롯 과일과 채소, 심지어 달팽이까지 이용한 색채실험, 유리, 미술사, 정치사회적 풍자, 신문과 광고이미지 등 다양한 주제와 방법을 통해 작품을 제작하였다.
MoMA의 이번 회고전 역시 어느 한 작가의 개인전이 아니라 그룹전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각기 다른 스타일의 페인팅은 물론 퍼포먼스,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비디오, 사진, 조각, 인스톨레이션 아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 다양한 양식뿐만이 아니라 팝, 신표현주의, 개념미술, 옵아트, 포스트 페인터리 추상, 신구상주의, 후기 색채추상주의 등 지난 20세기 중반이후에 일어난 모든 미술운동이 여기저기에 각각 돌출하고 있다. 이 같은 실험정신으로 폴케는 자주 ‘미술계의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한동안 완성되지 않은 듯한 작품, 모방한 듯한 작품, 기회주의적 작업, 독창적인 스타일을 정립하지 못한 작가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실천되고 정립되어가던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폴케의 작업은 제2, 제3의 커리어로 불리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제 그의 작품은 장르와 형식, 그리고 중심이 해체, 변형, 혼합되고 결합될 수 있으며 어프로프리에이션이라는 모방의 개념 역시 하나의 방법으로 인정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으로 새롭게 검증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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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케전이 시작되는 2층 아트리움에 들어서면 <감자 하우스(Potato House)>(1967)라는 설치작업이 눈에 들어온다. 미니멀리즘 건축처럼 나무판을 십자형으로 묶어 간결하게 지어진 이 구조물에 가까이 가면 감자가 구조물 전체에 달려 싹이 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감자판은 근처의 벽에 걸린 평면작업 <감자 드로잉(Potato Drawing)>(1969~70)에도 붙어 있다.
폴케는 동독의 올레스(현 폴란드 올레슈니차)에서 태어나 4살 때 가족과 함께 나치와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튜빙겐으로 도망갔다가 1953년 동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서베를린으로 망명했다. 당시 12세이던 폴케는 평범한 가족여행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자는 척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폴케는 당시 독일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뒤셀도르프에 정착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된다.
1958년 2차세계대전 이후 첫 다다 전시가 열린 곳이 뒤셀도르프이고 1960년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사이 톰블리 등 미국작가들의 작품이 상업갤러리에 전시되기 시작했으며 1962년에는 조지 마치우나스, 백남준, 요셉 보이스, 오코 요노 등이 참여한 전위예술그룹인 플럭서스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폴케는 18세이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2년 동안 뒤셀도르프의 한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 같은 새로운 미술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1961년 요셉 보이스가 교수로 재직하던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폴케는 후에 요셉 보이스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미술의 매체 (미디엄)를 제시하고 ‘예술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재조명한 “나의 영웅”이라면서 그의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폴케의 전 작품에 흐르는 다다의 영향과 실험적인 매체의 이용, 사회적 운동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개념은 이때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23.9cm 1975 폴케의 이 자화상은 1975년 뒤셀도르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는 마약과 명상, 그리고 섹스 웨이브의 시기였으며 폴케는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때 찍은 사진은 그의 작품에 수시로 이용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Edgar Wachenheim III and Ronald S. Lauder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무제>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23.9cm 1975 폴케의 이 자화상은 1975년 뒤셀도르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는 마약과 명상, 그리고 섹스 웨이브의 시기였으며 폴케는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때 찍은 사진은 그의 작품에 수시로 이용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Edgar Wachenheim III and Ronald S. Lauder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작업실이라는 실험실
1963년에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만난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콘라드 뤼그(Konrad Lueg), 만프레드 쿠트너(Manfred Kuttner)와 전시를 갖게 된다. 당시 리히터는 동독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에게 주어지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후에 휘셔(Fisher)로 성을 바꾸고 갤러리스트로 변신한 뤼그는 우편국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폴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팔아 생활비를 벌던 시절이었다. 가구가게를 빌려 전시를 연 이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독일 팝아트를 소개하는 첫 전시”라고 밝히고 자신들의 작업을 ‘자본주의적 사실주의(Capitalist Realism)’라고 명명했다. 동독에서 망명한 작가들로서 사회주의에 대비되는 서독의 팝아트 작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폴케는 양말, 셔츠, 플래스틱 일상생활용품, 도넛, 초콜릿 등 음식물을 소재로 앤디 워홀이 주도하던 미국 팝아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업을 지속하며 독일 팝미술의 탄생에 동승한다. 폴케는 “당시 미국 팝아트는 우리에게 신세계였다”면서 “거대한 변화의 시기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볼펜으로 날개 달린 벌레를 종이화면 위쪽에 조그맣게 그린 <더 적은 노동, 더 많은 급여를!(Less Work, More Pay!)>(1963), 모나 리자를 99센트에 판매한다는 볼펜 드로잉, <모나 리자(Mona Lisa)>(1963), 화면 오른쪽 상단에 입과 소시지를 든 손을 마치 실수로 페인트가 묻은 듯 조그맣게 그리고 화면 전체를 소시지 링크로 가득 채운 <소시지 먹는 사람(The Sausage Eater)>(1963) 등은 서독으로 이주한 후 보게 된 자본주의 생활에 대한 코멘터리다.
폴케의 래스터(점방식) 페인팅 시리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이용한 신문사진과 만화를 인쇄하는 기술인 벤-데이 도트(Ben-Day Dots) 기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1963년 미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해에 그려진 “리 하비 오스왈드의 초상 (1963)”에서 시작된다. <여자친구들(Girlfriends)>(1965~1966)에서 보이는 것처럼 폴케의 래스터 페인팅에 나타나는 점들은 하나하나 연필에 달려있는 지우개로 스탬프처럼 찍거나 펠트마커로 색을 덧칠함으로써 뭉개진 듯한 효과를 내는데 이것은 리히텐슈타인의 기계로 찍어낸 벤-데이 도트와 다른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폴케의 래스터기법은 2007년에 제작된 <광선을 본다(Seeing Rays)>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전생에 걸쳐 구사한 그의 시그너처 기법이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일본에서 개발된 합성섬유가 유행하자 폴케는 섬유 자체를 캔버스로 쓰는 작업을 진행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미지를 넣어 배너처럼 만든 <마오(Mao)>(1972)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1972)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0년대는 요셉 보이스, 한나 다보벤으로 대표되는 개념미술이 득세하던 시대로 독일의 페인팅은 언더그라운드로 들어가면서 휴지기를 맞는다. 폴케 역시 페인팅을 멈추고 여행을 떠난다. 사진기와 캠코더를 들고 파리,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은 물론 뉴욕,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타일랜드 등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이집트 등 198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를 여행한 것이다. 명상과 마리화나가 유행하던 1970년대 폴케의 사진작업은 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이용한 것이며 이 자료들은 몇 년 후 그의 작업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된다. 자신조차 곧잘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폴케의 작업에 마약에 의한 환각상태를 상징하는 버섯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팜추리와 성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는 일련의 작업이 진행된 시기다.
1980년대는 “재현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독일의 신표현주의가 나타나 성공한 시기로 잭슨 폴록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에 이은 미니멀리즘 그리고 앤디 워홀을 중심으로 하는 팝아트로 미국이 잡았던 세계미술의 주도권을 독일로 옮겨 오는 전환기를 맞는다. 폴케와 리히터 역시 새로운 표현형식의 에너지에 힘입어 페인팅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이 시기 폴케의 색깔 찾기 실험을 시작하고 ‘연금술사’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우라늄, 비소, 라벤더 오일, 유성가루, 진사, 터키 공작석, 석화석고, 전기석, 규산염 광물, 밀랍 등은 물론 달팽이의 진액에 빛과 산소를 쬐어 보라색을 만들었는데 그 과정을 비디오로 찍기도 했다. 이 보라색은 그리스, 로마시대에 황족들의 옷감에 물을 들이기 위해 달팽이 진액을 사용했다는 기록에 착안한 시도로    <보라색(Purple)>(1986) 시리즈에서 볼수 있다. 1982년 작 <네거티브 밸류Ⅱ(Negative Value Ⅱ)>를 만들면서 시장에 나와있는 보라색을 쓴 폴케는 시판하는 색깔에서 찾을 수 없는 ‘찬란한 색조’를 찾기 위해 달팽이 진액을 이용했다고 한다. <금덩어리(Lump of Gold)>(1982)는 독약인 비소를 직접 캔버스에 바른 작품이며 <우라늄(핑크)> 시리즈는 1992년에 작업한 것으로 빛에 민감한 사진건판과 네거티브에 우라늄 방사선 자국을 남긴 것이다. 이 같은 색채실험 작업은 1986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대표로 참가했을때 소개되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폴케의 전 작품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프는 나치 독일에 관련한 것들이다. 1984년 시작해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망루(Watch Tower)> 시리즈, <사냥 탑(Hunting Tower)>(1984) 등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철책과 망루를 표현하고 있고 나치경찰의 모자를 쓰고 돼지를 데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경찰견(Police Dog)>(1986) 역시 긴장과 비극이 감도는 작품이다.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제목으로 한 <파가니니>(1981~1983)에도 나치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놀라운 그의 연주가 실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유령이 하는 것이라는 소문을 토대로 나치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알레고리가 들어있다.
<이렇게 앉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고야를 따라서)>(1982) 등 고야, 알프레드 뒤러, 막스 에른스트 등 거장들의 작품에서 차용한 이미지 작업들은 ‘포스트 모던 플레이’라고 불리며 그의 또다른 시도로 꼽힌다.
복사 중에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옮기면서 나오는 이미지를 추구한 1990년대의 <프린팅 에러> 시리즈, 이미지 위에 이미지가 겹쳐 보이도록 하기 위해 개발해낸 양면이 볼록한 2000년대의 <렌즈 페인팅> 시리즈 등 새로운 색과 이미지를 찾기 위한 그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이같이 평생에 걸쳐 미술 실험을 계속한 폴케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 젊은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몇몇 그의 작품은 여러 작가의 대표작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대학생이던 1963년 제작한 <무제(점)(Untitled(Dots))>은 종이 위에 수채화 물감과 과슈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의 작은 점을 일렬로 찍은 작품으로 1986년에 시작한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의 <점(Spot)> 시리즈와 매우 유사하다. 차이라면 폴케의 수작업에 비해 허스트는 조수를 고용해 점과 점의 간격까지 수학적으로 계산한 기계적인 완벽한 점을 추구한다는 것뿐이다. 이밖에도 마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페터 휘슬리(Peter Fischli)와 다비드 바이스(David Weiss) 듀오, 라라 슈니트거(Lala Schnitger) 등이 폴케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 꼽힌다.
폴케의 마지막 작품은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다. 죽기 한 해 전인 2009년 마지막 창문을 완성한 이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그의 실험작이었다. 12개의 창문 중 구약성서의 이미지가 들어간 5개를 제외한 7개를 기원전 3, 4세기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화려하고 신비한 색깔의 돌, 옥수(agate)의 조각으로 만들었다. 암과 투병하면서 이 종교적인 예술작업을 이뤄낸 폴케. 50년 전 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전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자신을 떠올리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한평생 실험을 거듭하며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찾으려 한 폴케. 연금술사들이 비밀실험을 거듭하며 찾으려 했다는, 그 어떤 금속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비의 물질, ‘현자의 돌’을 과연 그는 찾은 것일까. <알리바이전>은 뉴욕 전시 후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10월 1일부터 2015년 2월 8일까지), 그후에는 폴케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다 숨진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 미술관(Museum Ludwig, 2015년 3월 14일부터 7월5일까지)으로 옮겨 전시된다. ●

폴케는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미술의 방법뿐 아니라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도 실험을 거듭했다. 과학자들이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던 방식처럼 우라늄을 빛에 민감한 플레이트에 놓아 만든   (사진 왼쪽,1992) 시리즈, 그리고 은박지, 합성수지, 심지어 운석의 가루까지 써서 만든 (1988) 시리즈가 보인다 © 2014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 Jonathan Muzikar. All works by Sigmar Polke © 2014 The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Germany

폴케는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미술의 방법뿐 아니라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도 실험을 거듭했다. 과학자들이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던 방식처럼 우라늄을 빛에 민감한 플레이트에 놓아 만든 <우라늄(핑크)>(사진 왼쪽,1992) 시리즈 그리고 은박지, 합성수지, 심지어 운석의 가루까지 써서 만든 <스피릿>(1988) 시리즈가 보인다 © 2014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 Jonathan Muzikar. All works by Sigmar Polke © 2014 The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Germany

<알리바이전>에는 폴케의 스케치와 드로잉과 메모, 만화 등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 등이 들어 있는 그의 노트북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 특히 노트북에는 스케치에 색을 칠하고 종이를 잘라 붙이는 등 끝마무리가 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만큼 완벽성을 추구해 놀랍다. 노트북을 놓은 유리상자 위에
몇 대의 아이패드를 놓아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서상숙

폴케의 전시가 시작되는 모마의 아트리움. 심플한 구조물에 감자를 매달아 놓은 <감자 하우스>(사진 맨 왼쪽, 1967)는 감자가 싹이 나고 썩기도 하는데 전시기간에 썩은 감자는 다시 모양이 비슷한 새로운 감자로 대체하고 있다.
© 서상숙

<모던 아트(Moderne Kunst)> 캔버스에 아크릴과 래커 150×125cm 1968 베를린 <모던 아트전>에 출품했던 폴케의 작품.
추상화를 퇴폐예술로 간주하던 나치시대, 전후에는 나치의 만행을 침묵으로 덮으려 했던 독일을 이 그림으로 패러디한다.
Froehlich Collection, Stuttgart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무제>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23.9cm 1975 폴케의 이 자화상은 1975년 뒤셀도르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는 마약과 명상, 그리고 섹스 웨이브의 시기였으며 폴케는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때 찍은 사진은 그의 작품에 수시로 이용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Edgar Wachenheim III and Ronald S. Lauder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왼쪽·<케타의 안개 낀 푸른 하늘/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Quetta’s Hazy Blue Sky)/Afghanistan–Pakistan>의 한 장면 16mm 필름을 옮겨 담은 비디오 34분33초 1974~1976 1970년대 폴케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여행하면서 거리에서 현지인이 원숭이를 놀리는 것을 보고 찍은 필름의 한 장면.
개인 소장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오른쪽·<슛 페인팅(Soot Paintings)>의 한 장면
16mm 필름을 옮겨 담은 비디오(컬러) 42분12초 1990
개인 소장
폴케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독일의 전후작가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 페인팅을 떠올리게 하는 폴케의 비디오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폴케는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미술의 방법뿐 아니라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도 실험을 거듭했다. 과학자들이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던 방식처럼 우라늄을 빛에 민감한 플레이트에 놓아 만든 <우라늄(핑크)>
(사진 왼쪽,1992) 시리즈,
그리고 은박지, 합성수지, 심지어 운석의 가루까지 써서 만든 <스피릿>(1988) 시리즈가 보인다 © 2014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 Jonathan Muzikar. All works by Sigmar Polke © 2014 The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Germany

 

[World Topic] Money and Art – Thirty Silver Coins Collection Haupt

미술과 돈,
그 특별한 관계의 신선한 화학작용

‘미술’과 ‘돈.’ 미술이 본격적인 시장의 시대로 빨려들어가는 지금 이 두 가치가 가지는 의미는 상호 이질적이거나 불가분의, 극한의 관계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돈을 주제와 모티프로 한 작품 앞에 선다면? 하우프트 컬렉션이 펼치는 <Money and Art전>은 극대화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경전과도 같은 ‘돈’을 미술이라는 도구로 풍자하고 있다. 더불어 일관된 맥락에 근거한 컬렉션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신원정  미술사

독일의 오래된 격언 중에 “돈은 그에 대해 떠들어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자코 소유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돈에 얽힌 문제를 입에 담는 것을 경계할 뿐 아니라 자신의 부와 재산을 자랑하는 것도 경고하는 이 속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되지만 때로 대놓고 언급하기에는 껄끄러운 존재, 돈과 자본—그건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이 활발히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그와 불가분의 관계지만 상황에 따라 금기시되기도 하는 돈이 떳떳하고 당당하며 그러면서도 고상함과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미술현장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돈을 다룬 미술작품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 장소이다. 베를린을 관통하며 흐르는 슈프레 강가에 자리한 하우프트 컬렉션이 바로 그곳이다.
개인 소장의 미술컬렉션은 특정 예술사조나 장르에 초점을 둠으로써 전문성을 살리고 여타 컬렉션과의 차별화를 추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율리아 슈토섹 컬렉션의 경우 동시대미술 중에서도 비디오아트나 영화 등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에 전문화된 컬렉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베를린만 해도 쟁쟁한 현대미술 전문 컬렉션이 여럿 되지만 개념미술을 표방하는 하우브록 컬렉션을 제외하면 모두 별다른 제한 없이 포괄적으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한 가지 테마에 중점을 둔 현대미술 컬렉션은 정말 보기 드물다. 한국에도 수입되는 리터 스포츠 초콜릿사의 공동대표인 마를리 호페-리터가 설립한, 초콜릿 모양처럼 정사각형의 작품만을 수집하는 리터 컬렉션 정도가 테마 컬렉션으로서 비교적 단기간에 자리 잡았을 정도이다. 하우프트 컬렉션은 게다가 돈이 주제라니 뭔가 새롭고 신선하다.
약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비교적 젊은 컬렉션은 독일작가 그리고 베를린에서 작업하는 작가 작업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국제적이고—아쉽게도 아직 한국작가의 작업은 없다—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200여 점 작품의 공통점은 오직 한 가지, 직간접적으로 돈을 다룬다는 점이다. 주제가 명백한 만큼 수집 대상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전체적인 컬렉션의 모양은 다소 단조로울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예측은 기우에 불과했다. 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전이나 지폐를 구체적인 소재나 재료로 사용한 작품에서부터 돈의 교환가치와 같은 추상적 측면에 초점을 둔 작품, 거시적인 관점에서 ‘부’의 개념에 접근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오늘날 자본의 의미와 영향력을 탐구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장 작품들의 깊이와 스펙트럼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화폐가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된 작품의 경우 지폐 위에 문구를 적어 넣기,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하기, 종이접기나 오려내기, 훼손과 같은 물리적 변형 또는 특정 부위만 남기고 색칠해서 새로운 상징을 창조해내는 등의 방식이 있다. 또한 공작・공예에 가까운,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수작업으로 제작된 작품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전 세계 통화 중에서도 미국 1달러 지폐는 미술 재료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다. 비록 불황과 미국 경제의 약화로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며 국제통화로 통하는 게 미국 달러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큰 상징성을 지니는 1달러 지폐가 재료로 사용되면서 그 위에 투영된,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강대국 미국이 가지는 힘과 영향에 대한 암시나 풍자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있다. 유로화를 다루는 작업에서는 지폐에 내재된 다층적인 의미가 작품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부’를 대변하는 화폐 자체로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오직 경제원리 하나로 한 배를 타게 된 유럽공동체의 딜레마(역사・문화・종교・정서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는 동시에 또한 지극히 이질적인 유럽 국가들의 모순성)를 상징하는 매체이기도 한 점이 유로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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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베궁 누르 & 플로리안 괴페르트 <캐시 풀> 3D 애니메이션 스틸 4분25초 2006 Repro: Hermann Büchner

독창적인 테마에 근거한 컬렉션
바튼 리디체 베네스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지폐를 접거나 말아서 해당 국가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템을 만들었다. 미국인인 작가의 눈에 비친 각 나라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개성만점이다. 약통처럼 동그랗게 말린 미국 1달러 지폐에서는 캡슐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1회용 티백 모양으로 접힌 영국 파운드 지폐 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이 관람객과 눈을 맞춘다. 맥주병 뚜껑과 와인 코르크 마개 모양으로 접힌 독일 마르크 지폐, 고행을 위한 못 박힌 침대를 연상시키는, 가시들로 뒤덮인 인도의 루피화와 초밥을 집어 든 젓가락 모양으로 길쭉하게 말린 일본 엔화가 각각 액자 안에 전시되었다. 만약 한국 지폐가 있었다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대만 작가 리밍웨이의 <미술을 위한 돈>(1997)은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 5점과 미국달러 지폐를 접은 것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1994년 1월 1일 10달러 지폐 아홉 장을 접어서 각각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1년간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을 방문하여 상황을 기록했다. 12월의 방문 시에 그중 절반이 넘는 5명이 지폐의 오리가미 조각을 여전히 예술작품으로 인지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반면 3명은 쇼핑이나 먹을거리를 사는 데 돈을 써버렸고 나머지 1명은 조각을 도둑맞은 상태였다. 레디메이드 작업을 대하는 시각에서 현격한 개인차를 실감할 수 있으며 미술의 맥락 안으로 끌어들여진 평범한 일상용품이 아니라 교환가치를 가진 화폐가 실험의 대상이었기에 나온 흥미로운 결과이다. 예술과 현실을 두고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소장품 중에는 화폐의 도안이나 이미지를 모티프로 한 작품도 다수 보인다. 영국의 저스틴 스미스는 <비거 뱅-블랙>(2009)에서 세계 각국의 지폐 이미지로 각 나라의 땅 모양과 크기를 재현했다. 나라별로 상이한 영토와 국력,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의 상관관계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직접 주화나 지폐를 제작하는 작가도 많다. 네덜란드의 안네 드 브리스는 자신의 작업 <기억에 근거한>(2012)을 위해 사람들에게 1유로 동전의 앞면에 있는 그림을 보지 않고 오직 기억에 의존해 그려볼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 중에서 4개를 선정해 동전으로 주조했다. 같은 사물을 놓고도 사람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 니콜라우스 에버스탈러는 <크라스코브 I> 연작에서 ‘허니’화를 제작했다. 10~1000허니에 달하는 총 6장의 지폐 앞면에는 유럽작가지원재단이 있는 폴란드의 크라스코브성이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비양심적이고 무분별한 자본과 권력의 남용이 빚어내는 피폐한 결과가 우의적으로 묘사되었다.
현실과 긴밀하게 연관된 돈 혹은 자본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수집하기 때문에 소장품들에서 특히 세계정세와 급변하는 동향을 읽을 수 있는 것도 하우프트 컬렉션의 강점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대해 공동 큐레이터인 티나 자우어랜더는 말한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인해 신자본주의를 향한 비판은 미술에서 가장 시의성 강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에 구입한 작품들인 매튜 생피엘의 <위키달러>나 한스 티햐의 <금융상품>은 바로 이런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그 못지않게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를 들 수 있는데 페리스테리 온의 <부서진 아프리카>와 같은 작품이 그 예이다.” 한국에 체류하며 작업하는 캐나다 작가 매튜 생피엘이 1달러 지폐 이미지를 변형해서 만든 디지털아트 작업 <위키달러>(2013)를 보면 한때 전 세계를 발칵 뒤집은 스캔들이 절로 천연색으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한다는 건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크기와 작가들의 인지도만 앞세울 뿐 실제로는 실망스러운 퀄리티의 작품들만 가득한, 빛 좋은 개살구 식의 진부한 컬렉션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독창적으로 테마를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모습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높이고 다른 컬렉션과의 차별화를 위한 효과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새로운 작품을 구입할 때 옥석을 가려내는 선구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그 여부에 따라 향후의 입지와 발전상이 결정될 것으로 여겨진다. 성장통을 갓 넘긴 젊은 컬렉션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하우프트 컬렉션의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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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생피엘 <위키달러> 디아섹 21×50cm 2013 Photo: Mathieu St-Pie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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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스미스 <비거 뱅-블랙> 잉크젯 프린트 104×135cm 2009 Photo: Justine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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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돈을 주제로 한 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 슈테판 하우프트

“돈은 시대의 미학적 감성을 반영하고 중요한 문화적 성과를 담고 있다”

sth_vor_herfurth_2013_kirsten_700 groß하우프트 컬렉션을 간단히 소개해달라.
화폐의 변화나 시대의 미학적 감성을 반영하고 중요한 문화적 성과를 담고 있으며 , .
수집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1990년부터 내 소유의 법률사무소를 운영해오며 20년이 넘는 기간 미디어와 출판물 관련 저작권 전문 변호사로 꾸준히 일했다. 의뢰인 중 상당수가 갤러리스트, 미술관 관계자,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였던 까닭에 일찍부터 그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컬렉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의 작품을 새로 구입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헤르만 뷔히너 박사와 티나 자우어랜더로 이루어진 큐레이터팀과 함께 주기적으로 아트페어나 전시를 방문하며 돈을 주제로 하는 작업을 찾는다. 그리고 수시로 작가나 갤러리스트들에게서 다양한 제안을 받는다.
이런 정보들을 세심하게 평가해서 작품 구입 여부를 토론하고 결정한다.
컬렉션의 역사를 뒤돌아보았을 때 어떤 부분이 특히 자랑스러운가.
소장품들을 총괄하는 첫 번째 컬렉션 도록이 2013년에 출간되었다.
208쪽에 달하는 책에서 두 큐레이터는 120개의 도판을 바탕으로 총 15장에 걸쳐 하우프트 컬렉션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머니아트의 역사와 의미를 다루고 있다.
유경험자로서 장차 개인 컬렉션을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작품 구입 시 장물이나 모조품을 피할 수 있게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지난 2001년 한 갤러리스트가 나를 대신해 <크노헨겔트-견본집>을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크노헨겔트>는 볼프강 크라우제가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역에서 펼친 퍼포먼스로 에이알 펭크, 올라프 니콜라이, 클라우스 슈택 등 54명의 작가가 참가해 지폐를 제작하고 1993년 11~12월에 그 지역의 여러 상점과 술집에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그에 병행해서 전 지폐의 견본을 담은 책 두 권이 제작되었고 바로 그중 하나를 내가 소장하게 된 것이다. 몇 년 후 볼프강 크라우제와 얘기를 하던 중 사실은 그가 도둑맞은 책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의 너그러운 이해 덕분에 좋은 결말로 끝났지만 정말 아찔한 경험이었다.
20년 후의 하우프트 컬렉션은 어떤 모습일까.
독일에서 전시들을 성공적으로 열고 난 후 우리는 이제 유럽과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려 한다. 20년 후에는 많은 국제적 전시를 멋지게 해낸 컬렉션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컬렉션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인식의 장을 넓히게 되기를 바란다. 훌륭한 작품 구입을 통해 컬렉션의 확장과 발전이라는 목표가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마지막으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고향인 베를린에 우리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이 생긴다면 정말 행복할 거다.

베를린=신원정 통신원

슈테판 하우프트(Dr. Stefan Haupt, 1962년생)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베를린에서 변호사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1997년 이래 각종 강의 및 강연활동을 해왔다. 2006년부터 《저작권 보호를 위한 베를린 도서관 연합》 총서의 발행자 및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www.sammlung-haupt.de
www.facebook.com/sammlung.haupt
매월 첫째 화요일 오후 5시에 큐레이터가 직접 컬렉션을 안내한다.
방문을 원하면 ts@sammlung-haupt.de에서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World Report] 8th Berlin Biennale for Contemporary Art

비엔날레라는, 이제는 익숙한 형식의 전시행사는 논쟁과 그로 인한 담론 형성이 주된 목적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5월 29일 개막해 8월 3일까지 열리는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bb8)를 둘러싼 호불호의 논쟁이 격렬하다는 소식이다. 스펙터클한 광경을 자제하고 지적이고 진지한 감상에 주안점을 둔 작품이 주로 출품된 이번 베를린비엔날레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섬세하게 변주된 다양한 층위의 담론

신원정  미술사

2년을 주기로 베를린 미술현장의 여름은 두 달이 넘는 기간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다. 한껏 고조된 분위기의 한복판에는 바로 ‘베를린비엔날레’가 있다. 8회째를 맞은 올해의 비엔날레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최종 선정된 콜롬비아 출신 캐나다 큐레이터 후안 A. 가이탄이 제시한, 19세기 독일의 정치 및 인문학과 자연과학에서 큰 족적을 남긴 코스모폴리탄인 빌헬름과 알렉산더 폰 훔볼트 형제를 2014년의 베를린에서 재조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전시 프로젝트 제안서는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지난 5월 28일 개막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전시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이례적인 전시공간이다. 베를린비엔날레에서 전시 장소의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행사 주관기관이자 도시의 심장부라 할 미테 지역에 자리한 쿤스트베르케 전시관 외에 어떤 다른 장소와 지역을 선택하는지가 비엔날레 총감독이 미리 하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올해 비엔날레는 쿤스트베르케 외에 서베를린 깊숙이 위치한 달렘 박물관과 하우스 암 발트제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데 미테 지역을 기반으로 삼았던 이전의 비엔날레와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모습이다. 달렘 박물관의 비엔날레 세션은 유명 작가를 다수 포함하고 있고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획 의도에도 가장 잘 부합한다. 이번 비엔날레의 근원지라 해도 무방할 만큼 달렘 박물관의 의미는 크다. 베를린과 포츠담의 경계선에 위치한 하우스 암 발트제 전시관은 분단 시절 서베를린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 전시공간으로 손꼽혔지만 통일 후에는 변두리가 되어버린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베를린 중심부의 전시기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베를린의 한복판에서 남서쪽 가장자리로 지축을 옮긴 이번 비엔날레는 미테나 크로이츠베르크처럼 화려하고 자유분방하며 소위 ‘핫’한 지역 대신 전원적이고 부유하며 보수적 분위기의 서베를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허름하고 훼손된 버려진 건물이나 가능한 한 뜻밖의 장소를 택해왔던 그간의 행보와는 달리 전통적인 박물관을 주무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이색적이다. 이번 전시 주제 또한 흥미롭다. 동서 냉전기간 높은 장벽이 도시 한복판을 관통했던 베를린은 독일 분단의 역사와 아픔의 흔적을 생생히 간직한 채 통일 후 조국의 건설적인 미래를 위한 독일인들의 의지와 노력이 특히 건축적인 부분에서 열매를 맺은 도시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는 당연하게도 베를린, 더 나아가 특히 치부를 포함하는 독일의 역사를 주요 테마로 삼았고 그래서 ‘베를린영화제’처럼 베를린비엔날레 역시 정치성이 기저를 이뤄왔다. 강한 정치성의 표방과 사회비판 성향은 그간 전 세계적인 비엔날레의 홍수 속에서도 베를린비엔날레만의 개성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는 지난 회차의 비엔날레에서 그만 극단에 치우치고 말았다. 시위 운동가들이 쿤스트베르크 주전시실을 점령했던 제7회 베를린비엔날레는 정작 미술은 없고 정치만 보인다는 혹평을 받았고 심지어 비엔날레의 폐지가 거론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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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넬 <무역> 특별 제작한 쿠바산 목재 액자 10점(왼쪽 벽); 드로잉 약 48점(오른쪽 벽); 가운데 책상 위 오브제, 그래픽, 작가의 책 3권과 사운드트랙, 쿠바산 금속바 위 텍스트, 종이 위 디지털 프린트 가변 크기 2014

전년 대회의 위기를 극복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2014년의 베를린비엔날레는 선동적인 외침 대신 섬세하게 변주된 다양한 층위의 담론으로 채워진 모습이다. 식민지 상황을 겪은 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각국에서 53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는 글로벌리즘에 대한 비판적 조명과 포스트식민주의적 담론이다. 지적 유희로서의 현대미술 감상을 강조하는 큐레이터의 의도는 다수의 전시작에 드라마가 빠지고 담백함과 절제가 전시장 분위기의 주조를 이루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디오작업의 수가 준 대신 종이를 매체로 하는 소규모의 작품이 훨씬 많고, 수집과 아카이빙을 키워드로 하는 작업이 많은 것도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고 하겠다. 베를린 자유대학 캠퍼스에 인접한 달렘 박물관 건물에는 아시아미술관과 민속학박물관 그리고 유럽문화박물관까지 총 3개의 전시기관이 들어서 있다. 현대미술과 민속학적 유물을 융합시키려는 큐레이터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의 민속유물과 고미술품 사이에 끼어든 현대미술 작품들에서 위화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식물도감과 표본을 연상시키는 알베르토 바라야(Alberto Baraya)의 <비교 연구, 인조식물 표본>(2002~현재)에서는 18~19세기 새로운 종의 발견자들에 의한(또는 이들을 위한) 드로잉과 오늘날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상징하는 인조식물이 유리진열장 안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정교함 덕분에 마치 생화처럼 여겨지는 조화는 자연과 인공의 가상 대치를 통한 원본과 모조품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고무하고, 박물관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런 모조품이 갖는 가치에 대한 숙고를 촉진한다. 흔한 교통표지판처럼 여겨지는 베아트리스 곤잘레스(Beatriz González)의 설치작업 <특별한 사진들>(2014)은 자세히 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픽토그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간을 메고 홍수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이나 사체를 나르는 사람 등 열악한 환경의 콜롬비아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담겨 있다.
플래시 전구를 사용한 카르스텐 횔러(Carsten Höller)의 <7,8헤르츠>(2001/2014)는 달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장소 특정적인 작업 중 하나이다. 작가는 콜럼버스 미대륙 발견 이전 시대 금 골동품 전시실의 조명을 7과 8.6헤르츠 사이의 진동수로 깜박이도록 조작했다. 안구를 격렬히 자극하는 무한 스타카토의 섬광은 원래 박물관 소장품인 황금빛 미술품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한편 기존의 전시품과 새 미술작품의 경계도 허물어 버린다. 작은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설치작업 <무제>(2014)는 그 전시실의 원래 주제였던 테마를 작가 개인의 작업으로 흡수해버렸다. 예전부터 벽에 설치되어 있었던 안내판 위 문구 ‘유럽의 영향으로 인한 문화의 변화’는 작가가 따로 첨가한, 현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진들(예를 들어 세관을 통과하는 수입 과일들) 및 오브제(유명 상표의 운동화 등)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수준 높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중심부와 동떨어진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등한시되어 온 달렘 박물관을 베를린비엔날레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고 동시대미술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새로운 담론 형성의 장을 마련한 비엔날레 총감독 후안 A. 가이탄의 용감한 시도에 대한 평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직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신진 작가가 중립적 화이트큐브가 아닌, 기존의 제도적 전시 공간에 자신의 작업을 채우는 경우 그는 과연 독자적인 색깔과 목소리를 살려낼 수 있을까.《  쥐트도이체차이퉁》의 비평가 카트린 로르히는 저명한 미술관에 전시할 기회를 얻었을 때 주최 측이 요구하는 규범과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입장의 작가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을 제기한다. 한편 현대미술과 민속 유물을 융합시키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성공적인 나머지 관람객이 자칫하면 상설전시품 속에 위화감 없이 섞여 있는 비엔날레 출품작을 간과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개인적으로 특히 아쉽게 느껴진 부분은 비엔날레의 모든 전시장을 다 돌고 났을 때 좋은 작품이 적지 않았음에도 딱히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작업이 떠오르지 않았던 점이다. 관심의 집중을 막기 위한 조치로 인해 모든 혹은 여러 작품에 골고루 힘을 분산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모든 작품이 비슷한 강도의 (희미한)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은 전시기획자 입장에서 더 고민해봐야 할 부분일 것이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치열한 철학·정치·사회비판적 고민을 절제된 제스처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도 있게 풀어내려 한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흥미롭게도 호불호가 극명히 갈린다. 호평과 혹평 그 어느 쪽이든 단편적인 평가에 그치지 않고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큰 강점은 이런 모순성과 시끌벅적한 문제 제기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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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 아비디 <펀랜드(카라치 연작 중)> HD 비디오, 칼라, 사운드(비디오 스틸) 2014  Courtesy Bani A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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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암 수하일 <사색하는 주인공> 프로젝트 2013  Courtesy Mariam Suhail; GALLERYSK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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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베를린비엔날레 예술총감독 후안 A. 가이탄

“비엔날레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바란다”

bb8 (2)이번 비엔날레는 특히 국제적, 다문화적으로 느껴진다. 참여 작가 선정기준은 무엇이었나.
일부는 예전에 함께 작업하면서 알게 된 작가들로 그들과는 그간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는 지적 토론을 꾸준히 해왔다. 그리고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어 초대한 작가도 많다. 넓은 시각으로 전시에 어울리는 작업을 선정했기 때문에 선정된 작가들이 국제적인 면면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국가성이나 지역성 측면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개별 작가가 개인적 관심사와 흥미를 작업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이다.
주요 전시장이 서베를린에 위치한 점은 이전 비엔날레와 완연히 차별되는 모습이다.
최근 몇 년간 베를린의 문화적 중심이 된 미테 지역뿐 아니라 베를린이라는 도시 전체로 전시의 포커스를 확장하고 싶었다. 하우스 암 발트제 전시관과 달렘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전시 공간을 바탕으로 현재 미테 지역에서 보이는 18/19세기의 부흥운동과 같은 경향을 능가하는, 더 광대한 전망과 가능성을 창조하고 싶다.
달렘 박물관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비유럽권 미술품과 민속학적 컬렉션을 보유한 달렘 박물관은 매우 흥미로운 장소이다. 방문객들이 여느 미술작품을 볼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기 소장품에 접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비엔날레 전시 외에도 박물관 상설전을 구경하며 현대미술과 민속학적 유물 간의 전시 및 수용상의 차이점을 직접 느낄 수 있을 거다.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비판적 사고를 추구하는 현대미술의 방법은 현대미술이 전시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민속학적 유물들은 전시 기획상 좀 더 특별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상이한 두 대상이 한 장소에서 만나면서 발생하는 현상들, 예컨대 얼마나 이단적인 전시방법이 각각의 맥락에서 다르게 적용되었는지 그리고 그때 사용된 장치들로 인해 미술품과 유물을 대하는 관람객의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경험이다.
광활한 쿤트스베르케 미술관의 주전시실이 소규모 작품들로만 채워진 광경은 놀라움을 넘어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비록 개별 크기는 작지만 작품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거대한 군(群)을 이루는 모습을 보라! 우리는 논제라는 관점에서 미술작품에 접근했으며 또한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데 드는 시간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종이를 매체로 한 작업이 특히 많이 보인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사회·정치적 비판의 목소리가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미술매체로는 드로잉만한 게 없다. 어떤 작업이든 시작 단계와 아이디어의 윤곽을 잡아가는 과정에 드로잉이 있다.
화려함과 스펙터클 대신 절제되고 차분한 분위기를 택한 이번 비엔날레는 독일 특유의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거대한 제스처와 시각적 이미지의 과잉을 기대하는 건 어쩌면 한국적인 모습이 아닐지? 내가 생각하는 독일의 정서는 좀 다르다. 이번 비엔날레는 지적이고 주의 깊은 감상을 요하는 작업들로 변주되었다. 이를 통해 대규모 전시에서 놓치기 쉬운, 느린 템포의 명상적이고 축약적인 미술에의 접근을 이루었다. 소비와 토털패키지적 체험을 추구하는 현대미술계의 자본주의적 욕구에 지나치게 부합하는 거대 제스처를 지양하는 전시가 처음부터 우리의 목표였다.
관람객이 전시에서 어떤 인상을 받기를 바라는가.
이번 비엔날레는 미술이 현재 처한 응급상황을 조명하고 특히 예술의 비판적 역할과 기능, 즉 우리의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발달시키고 촉진하는 길을 열어줄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 방문객들이 비엔날레라는 형식으로 열리는 전시가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베를린비엔날레가 끝난 후 어떤 개인적인 계획이 있는가.
거의 2세기 동안 실종 상태인 고야의 머리를 찾는 탐험을 시작할 예정이다!
베를린 = 신원정 통신원

후안 A. 가이탄(Juan A. Gaitán, 1973년생)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과 밴쿠버 에밀리 카 미술디자인인스티튜트 출신의 작가 겸 미술사학자이다. 웨스트 프런트 협회 임원 및 밴쿠버 모리스 & 헬렌 벨킨 아트갤러리 객원 큐레이터(2006~2008), 로테르담의 비테 드 비트 현대미술센터 큐레이터(2009~2011),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아트 칼리지 겸임교수(2011~2012)를 거쳤다. 전시 기획 외에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해 온 그는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프랑스 댕케르크 노르파드칼레 현대미술 지방재단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World Report] 같은 언어, 다른 문화, 하나의 전시

<비엔나 베를린-쉴레에서 그로스까지 두 도시의 미술전>이 베를린(2013.10.24~1.27)과 비엔나(2.14~6.15)에서 순차적으로 열린다. 비엔나와 베를린의 예술을 통한 교류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로 20세기 초 근대미술을 매개로 두 도시가 주고받은 영향과 그 전개의 차이점 등을 보여준다. ‘독일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문화적 차이가 확연한 두 도시의 거리와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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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비엔나 베를린 두 도시 이야기전> 전시 광경 © Belvedere, Vienna.
위.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비엔나 베를린 두 도시 이야기전> 전시 광경 © Belvedere, Vienna.

 

같은 언어, 다른 문화, 하나의 전시

박진아  미술사

베를리니쉐 갤러리 시립미술관과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는 사상 최초로 비엔나와 베를린의 근대미술이라는 공통 주제로 협력 기획한 <비엔나 베를린-실레에서 그로스까지 두 도시의 미술전(Vienna Berlin: The Art of Two Cities. From Schiele to Grosz)>을 베를린(2013.10.24~1.27)과 비엔나(2.14~6.15)에서 차례로 개최한다. 일찍이 19세기 말엽부터 국제적 메트로폴리스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한 두 도시 사이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창조적 교류관계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전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세기전환기 무렵, 비엔나와 베를린 두 메트로폴리스가 문학, 무대예술, 음악 영역에서 강도 높은 예술적 실험과 상호협력 관계를 이루었던 사실은 근대문화사 연구와 문헌을 통해서 잘 알려져있다. 미술영역에서도 이 두 도시는 긴밀한 창조적 협력관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오늘날까지 미술사학계에서 사각지대로 남은채 더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 같은 사실에 착안하여 베를리니쉐 갤러리와 벨베데레 갤러리는 이번 전시 <비엔나 베를린-두 도시의 미술전>을 기획해 20세기 초엽 미술과 장식예술 영역에서 이 두 메트로폴리스가 지닌 공통점, 차이점, 창조적 교류활동과 상호영향 성과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공유하는 독어 문화권이지만 두 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은 매우 다르다. 독일어만을 사용하며 단일민족 의식을 지녔던 독일과는 달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일찍이 중세부터 서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국의 변함없는 고도(古都)였다. 중유럽권과 발칸을 포함한 동유럽권에서 온 이민자들로 수도 비엔나는 인구구성 면에서나 언어 면에서 다인종·다언어가 들끓던 다문화 멜팅포트였다. 도시 풍경도 널찍하게 뻗은 블르바드 대로와 위풍 당당하고 육중한 낭만주의풍 건축물에서부터 초현대식 신건물들이 어깨를 맞댄 채 공존하는 베를린은 그 첫인상부터 남성적이다.
반면, 바로크풍의 휘황찬란한 장식과 아르누보 곡선 장식의 건축으로 수놓아진 비엔나는 한결 여성적 인상을 준다. 두 도시 시민들의 성향도 매우 달랐다. ‘베를리너는 합리주의 지향적이고 실리주의적이며 흘러간 과거에 대한 감상주의를 질색하고 급속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하려는 침착 냉정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반면, 비엔나인들은 아늑함을 좋아하고 사탕발림 대화와 세련된 사교생활을 중시하는 오연하고 퇴폐적인 사람들’이란 평판을 받았다.
20세기가 개막하자마자 비엔나는 베를린보다 앞서 중유럽권 예술의 허브(hub)로 급부상하며 유겐트스틸과 아르누보, 표현주의를 두루 실험하며 베를린으로 전파했다. 독일 모더니즘의 기수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1908년 ‘비엔나 공방운동(Wiener Werkstätte)’은 과거 비엔나 시각문화 정신을 이어받아 이 시대에 이룩할 수 있는 시각언어와 색채로 활력있고 우아하고 생의 환희를 환기시키되 절제있고 공격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비엔나다운 양식을 이룩했다”(<Die Architektur auf den Ausstellungen in Darmstadt, München und Wien>,《   Kunst und Künstler》, 1908년 제6년 12번 호, pp.491~495)고 칭찬하면서 비엔나 공방운동을 독일 모더니즘이 본받아야 할 미적 모델이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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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 라세르스타인 <식당에서> 1927년 © Private Collection, Photo: Studio Walter Bayer.

상반된 성향의 두 도시
하지만 베를린의 미술가들은 문화정책 기관에서 수입을 인가한 근대주의 미학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베를린 분리파는 한결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을 띠었는데, 특히 막스 페히스타인(Max Pechstein)과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는 과거 정부주도하에 창설된 베를린 분리파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신베를린 분리파(Neue Berlin Secession)를 창설하고 독일적 근대미술운동을 표방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이겐 슈피로(Eugen Spiro)나 막스 리버만 (Max Liebermann)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 인상주의에 기대어 초기 베를린의 미술정체성을 구축하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친불(親佛)주의 유대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비엔나에서는 프레데릭 모튼(Frederic Morton)의 소설《  황태자의 마지막 사랑(A Nervous Splendour)》풍의 세기말적 멜랑콜리가 대기를 감싼 가운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문학, 사상, 미술에 폭넓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ilmt),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안톤 파이스타우어(Anton Faistauer) 같은 화가들은 모두 정신분석학에서 언급하는 성적억압과 무의식의 관계를 그림으로 탐색했는데, 그래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 속에는 공손을 우선하는 구시대적 예의범절과 적대적 정면충돌을 기피하는 비엔나인들의 오랜 집단적 무의식이 억압되었다가 폭발 직전의 순간에 이른 듯 팽팽한 긴장감이 담겨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은 나란히 싸우다 패망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국가에 실존적 위기였음과 동시에 두 도시를 더 가깝게 연결해준 촉매제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전달된 표현주의 회화에 담긴 인간본능과 무의식이라는 주제는 어쩐지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고방식을 지닌 베를린 화가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했다. 그 대신 베를린 화단에서는 루드비히 마이드너(Ludwig Meidner), 콘라드 벨릭스뮐러(Konrad Felixmüller), 루돌프 벨링(Rudolf Belling) 같은 신예 베를린 표현주의 화가들을 발굴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광란의 시기를 목도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이라는 포장지로 미화하기보다는 무자비하게 전개되던 근대 도시의 변화상과 그 속을 배회하는 도회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술은 본질적으로 도시미술(urban art)이라 했다. 만사가 합리적 이득에 입각해 좌지우지되고, 수많은 익명의 도시인이 공생하며, 초고속 개발과 변화가 가능했던 베를린은 분명 오랜 역사와 전통의 무게를 못이겨 정체돼버려 ‘죽어가는 도시’ 비엔나보다 근대적 생리가 잘 갖춰진 도시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다시 한 번 경제회복을 서두르던 베를린의 모습은 신즉물주의 회화 속에서 신시대 대중교통, 공장, 레스토랑과 카페, 상가와 아케이드로 북적대는 거리와 그 속을 배회하는 도시빈민과 익명의 군중이 얼버무려진 대도시 풍경화로 기록되었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신즉물주의 회화 속에는 당시 무대예술의 중심지로서 베를린인들이 자각했던 문화적 우월감이 드러나 있다. 화가들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큐비즘의 조형언어를 즐겨 차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예컨대 오토 딕스(Otto Dix). 루돌프 슐리히터(Rudolf Schlichter), 게오르크 그로스(George Grosz),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Albert Paris Gütersloh), 안톤 콜릭(Anton Kolig), 로돌프 바커(Rudolf Wacher)는 그 같은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이들의 회화에는 메트로폴리스 베를린 특유의 거침없는 대립적 성향과 전투적 성향이 엿보인다.
급속한 근대화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는 법이던가. 전에 없이 커진 사회문제도 떠안고 있었다. 더 벌어진 빈부의 격차, 구시대와 신시대 간의 갈등, 도시빈민으로 내몰린 수많은 군상과 그들의 고통을 더 첨예하게 경험한 베를린의 화가들은 날 세운 사회비평적 관찰 결과를 사실주의 그림으로 기록했다. 베를린의 도시 변화상을 날카로운 눈으로 포착했던 크리스티안 샤트(Christian Schad)는 실은 오스트리아의 사회비평적 화가 헤르베르트 뵈클(Herbert Boeckl)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다.
전통의 고도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타고난 성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비엔나는 이제 미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미의 역영에서 베를린이 비엔나를 제치는 날이 오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미적 본능이란 손톱만큼도 없이 오직 분석적이고 실리적이어서 한 톨의 상상력도 없는 베를린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노력 끝에 비엔나를 제쳤다. 정신적 노력이 천부적 재능을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비엔나의 여류 미술평론가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은 1889년 빈분리파(Wiener Secession) 출간 예술평론지《   베르사크룸(Ver Sacrum)》에서 이렇게 한탄하는 글을 썼다. 100년 전과 현재,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쌍의 오드커플처럼 매우 다른 기질과 세계관을 지닌 두 도시 비엔나와 베를린은 미술의 생산지이자 창조적 중심지로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125년 전, 저물어가던 비엔나의 예술적 우세를 탄식했던 추커칸들이 우려했듯, 또 “오스트리아의 미래는 과거에 있다”고 비엔나 출신의 카바레 휴머리스트 헬무트 콸팅거가 풍자했듯이 비엔나인들의 집단적 무의식은 흘러간 과거의 영광과 황홀이란 향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조나 레러(Jonah Lehrer)는 창조성의 비결을 논한 책《  이매진(Imagine)》에서 문화와 출신 배경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도시 속 마찰’이 벌어지는 환경 안에서 창조적 생산력이 늘어난다고 했다.
일찍이 20세기 초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문화계에서 성공하려면 메트로폴리스로 나가라’고 했다. 대도시와 창조적 생산력 사이의 연관관계를 암묵적으로 시사한 것이었다. 그래선지 오늘날 수많은 야심찬 젊은 미술인은 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작업하고 있으며, 인터넷 스타트업을 꿈꾸는 인터넷 전문가들 역시 속속 베를린으로 가 창업한다.
현재 유럽연합 내 실질적 정치주도국이자 경제최강국이 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예술과 정보통신기술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소프트파워 1번지로 재부상했다. 20세기 미완의 과제를 풀면서 ‘영원히 건설 중인 도시’임을 베를린은 재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

오토 루돌프 샤츠  1929년 Belvedere, Wien, © Michael Jursa.

오토 루돌프 샤츠 <풍선 장수> 1929년 Belvedere, Wien,© Michael Jursa.

[World Topic]Barbara Klemm

 1969 © Barbara Klemm  © Barbara Klemm

위 <제니스 조플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969 © Barbara Klemm  아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베를린> © Barbara Klemm

Barbara Klemm.
Photographs 19682013

오늘날 포토저널리즘의 살아있는 전설인 바바라 클렘(Barbara Klemm, 1939-)의 작품세계를 되짚어보는 회고전이 마틴-그로피우스-바우(Martin-Gropius-Bau)미술관에서 열렸다.
<Barbara Klemm. Fotografien 1968~2013전>(2013.11.16~3.9)이 바로 그것.
3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그녀가 특정 저널에 소속된 사진기자를 넘어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말해준다.
《월간미술》은 바바라 클렘을 베를린에서 직접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굴곡진 세상, 그녀의 카메라에 포착되다

신원정  미술사

다곡진 독일 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으로 유명한 바바라 클렘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Frankfurter Allge- meine Zeitung)》(이하《 FAZ》’) 사진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포토저널리즘의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날로그 미학과 흑백의 감성이 치열한 사실주의와 잘 버무려진 그의 작업을 기리는 전시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마틴-그로피우스-바우 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은 제목에도 드러나 있듯 1968년부터 2013년까지 바바라 클렘의 사진작업을 집대성했다. 300여 점의 전시작에는 독일 보도사진의 아이콘이 된 유명 작품들은 물론 미공개 작업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찍은 예술가들과 풍경 사진들은 작가의 방대한 작업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포토저널리즘과 순수예술의 성공적인 접점에 자리하는 그의 사진이 가진 예술성과 매력을 확인하는 혹은 발견할 수 있었던 이번 전시는 특히 사진이 실린 신문지면을 함께 전시해 그림과 텍스트의 관계를 고찰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평생 자신을 사진기자로 생각해 온 작가가 은퇴 후 (타의로) 예술가의 위치로 포지셔닝되었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호칭과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베를린에서 작가와 만나 인터뷰했다.

.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그곳의 인쇄용판 제작부서에서 일하다가 정식 사진기자로 자리 잡게 된 거다. 거기서 오래 근무한 건 사진기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측의 태도와 특히 훌륭한 동료이자 멘토였던 볼프강 하우트와 함께 일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부모님께서《      FAZ》를 구독하셔서 어릴 적부터 그 신문을 접해왔고, 기사보다는 사진에 훨씬 흥미가 가면서 나도 나중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사진으로 진로를 정하고 인물사진 전문 사진관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사진에 대한 갈증은 더 심해졌다.
가까이에서 본 당신은 ‘보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FAZ》의 보수적인 성향과 논조가 거슬린 적은 없었나. 당연히 거슬렸지!(웃음). 하지만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내 사진의 인쇄를 허용했다는 점에서 그 정도의 진보성은 가진 신문이었다고 본다. 글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사진의 역할은 정말 크다. 독자들은 사진을 먼저 보기도 하고 기사를 먼저 읽기도 한다. 간혹 기사 내용과 사진 사이에 간극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자신의 사진과 기사 사이의 괴리를 실제로 느낀 적이 있나. 내가 찍은 사진이 특정한 메시지를 가진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어떤 사건 현장을 보고 셔터를 누를 때면 항상 나의 개인적인 인상을 최대한 생생하게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주관적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매번 소위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때로 신문에 실린 사진과 그 옆에 자리한 기사 내용이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이다.
플래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마 평생 두세 차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기억나는 건 솔리다르노시치(자유노조, 역자 주)와 정부 간 원탁회의 취재차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다. 입국했을 때 문득 폴란드의 하늘이 우중충해서 일광만으로 찍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더라. 공항에서 서둘러 플래시를 구입했는데 정말 유용했다.
플래시 사용을 꺼리는 건 미적인 이유에선가. 아무래도 그렇다. 플래시를 터뜨린 사진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를 싫어한다.
등장 인물들이 자신이 찍히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사진이 많다. 기자로서 존재감을 조절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었는가. 아무도 나를 못 보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 물론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커다란 카메라를 눈앞에 대고 있는 사람을 어찌 못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공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주목받는 정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자신의 존재가 잊힐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내 존재에 익숙해져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그때 셔터를 눌렀다.
당신의 사진에서는 냉정하고 엄격한 시선과 어떤 요소도 빠짐없이 다 통제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그래서 참 독일적이라고 느꼈는데 이에 동의하는가. 정말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내가 주로 고민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정치가 오랜 기간 내 작업의 중심을 이루다보니 내 사진이 외국에서도 수용될 수 있을지 여부였다. 프랑스나 영국 혹은 이탈리아인들이 전시장에서 내 사진을 보았을 때 과연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까, 흥미를 가지게 될까 하는 것.
그럼 독일적인 작가라고 불려도 괜찮다는 건가. 그렇다. 어차피 나는 독일인이니까. 아마 내가 2차 대전을 직접 겪은 구세대에 속해서 내 작업이 더 그런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줄곧 전쟁이 초래한 결과와 특히 독일이 저지른 잘못을 성찰해왔다. 항상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고 역사가 남긴 교훈을 절대 잊지 않으며 무엇보다 다시는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기자도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
사진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혹시 한국에도 와본 적이 있는가. 어쩌다 보니 이번 전시에는 빠졌지만 한국 사진도 있다.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1년 전쯤 현지의 인상을 전하고자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부산까지 갔었다. 거대한 불상에 압도당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시 얘기를 해보자. 1968년을 시작 시점으로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1967~1968년 즈음에 학생운동이 발발했다. 당시 나는 인쇄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아 사진기자의 길을 걷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2010년 카를스루헤 시립미술관에서 큰 규모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와 비교했을 때 베를린 전시는 어떤 점이 다른가.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내 사진이 실린 신문 지면을 전시했다는 것이다. 그 외 일부 작품들은 베를린에서 완전히 다르게 배치되었다. 칼스루에의 전시장소가 다소 외곽지역이었던 반면 마틴 그로피우스 전시관은 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해서 만족스러웠고 더 여유 있고 흥미로운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사진과 실제로 그 사진이 실린 신문의 지면을 같이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건 정말 중요했다. 신문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내 사진들이 의뢰 작업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내가 단지 예술을 하는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특정 신문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는 점 말이다.
전시 준비에 어느 정도로 가담했나. 기획의 전 부분에 걸쳐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시작 선정과 배치에서 내 의견이 절대적이었다. 한편 건축가로 수십 년간 이곳에서 근무해온 직원의 도움도 컸다.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어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전시작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나. 회고전이었기에 가능하면 모든 종류의 작업을 다 조금씩 선보이고 싶었다. 그 결과 스포츠 분야만 제외하고는 – – 사실 간간이 운동 사진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 -모든 주제를 전시했다. 유명한 작품들이 포함되는 건 당연하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작업들도 선보이고 싶어서 소장 자료를 열심히 뒤졌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생각보다 많이 찾지 못했다.
지난 2010년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수여하는 ‘막스 베크만상’을 수상했다. 회화, 조각, 그래픽,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에게 수여되는 이 상을 사진작가가 받은 건 당신이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무이하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난다.(웃음)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는 회화적 예술성과 미학을 사진 특유의 사실주의와 훌륭하게 접목시켰다는 것이었다. 사진기자에게 어 예술가적 자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가. 미적 의식을 바탕으로 탄생한 사진은 강한 힘을 가진다. 훌륭한 조형미와 구도를 갖춘 사진은 그에 담긴 내용과 관점을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메시지를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심미적인 안목이 점점 더 쇠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쉽게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순간 구도가 좋은지 또는 예술적인지 주의를 기울이길 소홀히 하게 된다. 너무 많이 찍다보니 점점 덜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완전히 다른 성향과 방식의 사진 찍는 법이 어느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어쨌든 사진기자들도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첨단기술의 카메라가 보편화된 현재가 사진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매체의 민주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시각도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 현재의 상황은 재앙에 가깝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이런 현상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의 인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심지어 사진이 남지 않으면 현장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눈은 항상 카메라나 휴대전화에 고정되어 있다.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분야에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젊은 시절의 나는 매우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건 사실 아주 환상적이었다. 주목과 견제를 받지 않아 내 할 일을 맘껏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알려지고 나를 경계하는 이가 많아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싸움은 각오해야 한다.
뻔뻔하고 다소 무례한 태도도 거기 포함되는가. 난 그렇게 막돼먹지는 않았다. 최대한으로 꼽아도 한 서너 번 정도?(웃음).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사진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당신의 사진들이 사람들의 눈과 시각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는가. 물론. 이번 전시에서 많은 젊은이가 내 사진을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뻤다.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다른 나라의 빈곤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를 희망한다. 거창하고 성대한 작업이 아닌, 내 사진처럼 작고 소박한 작품도 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확인해서 기쁘다.  ●

 1993 © Barbara Klemm

<모스크바, 러시아> 1993 © Barbara Klemm

mgb13_p_klemm_21_portrait바바라 클렘은 1939년 독일 뮌스터에서 태어났다. 사진기사 견습 직후(1955~1958)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치·문화부 사진기자로 활동했다(1970~2004). 1992년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2000년 다름슈타트 전문대학 사진학과 명예교수로 초빙 받았으며 2011년에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독일 사진협회에서 수여하는 ‘에리히 잘로몬 박사상’(1989), ‘헤센문화상’(2000), ‘베스트팔렌 미술상’(2000), ‘막스 베크만상’(2010), ‘라이카 명예의 전당상’(2012)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

 

[World Report] Martin Creed

위 Work No. 1086-Mothers> 백색네온 철 500×1250×20cm 2011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Hugo Glendinning 아래  2013 ⓒ the artist  Photo Linda Nylind

위 Work No. 1086-Mothers> 백색네온 철 500×1250×20cm 2011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Hugo Glendinning  아래 2013 ⓒ the artistPhoto Linda Nylind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허위적이면서 현학적인 예술에 대한 논의는 마틴 크리드(Martin Creed, 1968~) 앞에선 부질없는 장광설일지도 모른다. 그의 개인전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What is the Point of it?>(1.29~5.5)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의 작업세계는 다양하다는 말이 진부할 정도다. 시각과 청각, 강약의 변주, 미적 대상과 일상의 오브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고정화한 예술에 대한 태도에 일침을 가한다. 다시, 그가 묻는다. “그래서! 예술이 뭔데?”

Martin Creed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행위는 모두 창조적인 행위이다.’ 마틴 크리드(Martin Creed)가 한 말이다. 그가 이번에는 관객에게 도리어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What is the point of it?)’ 반문하며, 지난 30여 년간 자신의 예술 행보를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으로 돌아왔다. 전시는 런던 템스 강변 사우스 뱅크(South Bank)에 자리한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열렸다. 영국 내 크리드의 개인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진 이번 전시는 마틴 크리드의 대표적 작품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크리드 특유의 자기지시적인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작품들이 한자리에서 빚어내는 다중감각적인 자극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주가 되었다.
생활 밀착형 예술가, 크리드의 일상과 평범한 사물을 소재로 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다소 황당하고 허무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성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1년 크리드에게 영국 현대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의 영광을 가져다준 작품은 텅 빈 갤러리 안에서 5초 간격으로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작품번호 227: 점멸하는 불빛(The lights going on and off)>(2000)이었다. 이에 분노한 한 관객이 이 작품을 향해 계란을 집어던졌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이디어를 특별한 미적 경험으로 바꾸는 크리드는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빅벤을 비롯한 영국 전역의 종탑들이 일제히 3분간 종을 울리며 스포츠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타종 행사 <작품번호 1197>을 기획해,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다운 재기발랄한 감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린 레고 타워, 크기 순서대로 쌓은 종이상자와 책상, 의자, 합판, 벽돌, 철빔 등 크기별, 면적별, 길이별로 쌓아 올려 만든 피라미드 형태의 작업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반복적인 쌓기는 크리드가 1992년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대표적인 작업 방식 중 하나이다. 벽면 전체를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페인팅과 설치작업도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크리드의 작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1000개의 브로콜리에 각기 다른 색의 물감을 칠해 하나씩 찍어 그린 <브로콜리 프린트(Broccoli prints)>(2009~2010)와 계단 통로의 양쪽 벽면을 150개의 접착 테이프로 한 줄 한 줄 채워 완성한 <작품번호 1806>(2014)의 줄무늬가 대담한 색조 대비를 이루며 시각적 운율을 더한다.
점점 크게, 점점 작게, 상승과 하강, 강약중강약의 시각적 변주가 보여주는 반복의 코드는 전시장 곳곳에서 청각을 자극하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음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피아노 연주, 웃음소리, 전시장 한켠에서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문과 커튼,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피아노 뚜껑. 이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리로 전시장은 쉴 틈 없이 분주하다. 테라스에 주차되어 있던 포드 자동차 <작품번호 1686>(2013)은 일제히 모든 문과 창문이 열리고, 보닛과 트렁크가 열리고, 와이퍼가 돌아가고 라이트가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오며 경적을 울려대다가 이내 다시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시각과 청각으로 수용되는 반복적 리듬감이 크리드 전시 전체를 연주하는 음표가 된다.
전시의 모든 음악적 요소는 크리드의 밴드 뮤지션으로서의 삶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크리드는 1994년부터 밴드 음악 활동을 하며 정식 음반도 여러 장 발매했다. 미술과 음악에 경계를 두지 않는 그에게는 공연도 작품이다. 전시 제목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도 사실은 크리드의 노래 제목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라이브 퍼포먼스 <작품번호 1815>와 <작품번호 1020>을 4월 8일 사우스 뱅크 내 클래식 공연장인 로열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과 퀸 엘리자베스 홀(Queen Elizabeth Hall)에서 각각 선보이기도 했다.
작품, 세상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되다    
크리드의 작품이 늘 경쾌한 유머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머리 바로 높이 위에서 아찔하게 돌아가는 <작품번호 1092: 엄마들(Mothers)>(2011)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2미터 높이, 12미터 길이의 ‘엄마들(Mothers)’ 네온사인은 가속도가 붙어 돌아갈수록 더욱 위협적이다. 가장 친밀한 존재이자 거대한 존재,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엄마’라는 메시지를 이보다 더 강렬하고 심플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움츠러든 머리를 숙이면 바닥에는 각기 다른 템포로 돌아가는 39개의 메트로놈(Metronomes)의 째깍째깍 소리가 심리적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전시의 하이라이트 격인 <작품번호 200: 주어진 공간을 반쯤 채운 공기(Half the air in a given space)>(1998)는 말 그대로 절반이 풍선으로 가득찬 방이다. 누군가에게는 풍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유아적 유희에 한껏 취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터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숨막히는 공포의 공간이 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풍선방에 입장하는 관객에게 호흡곤란 증세나 폐쇄공포증을 초래할 수 있는 만약의 사태에 유념하라는 경고문이 적힌 안내장을 나눠준다.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려면 마지막 전시실의 <구토와 대변(Sick and Shit)> 영상을 피할 수가 없다. 화이트 큐브 공간 안에서 사정없이 구토하는 사람과 쪼그리고 앉아서 힘겹게 대변을 보는 사람들을 찍은 장면을 인내심 있게 바라보는 일은 거북함과 동시에 묘한 쾌감이 뒤엉켜 역설적인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크리드의 작품에는 이렇게 양가적 태도와 감정이 공존한다.
크리드가 ‘반복’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를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선배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무의미해보이는 행위의 반복과 변주, 그리고 익살 속에서 삶의 허무와 부조리, 인간 존재의 치열함과 불확실성을 탐구했던 베케트. ‘다시 시도하라,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나는 예술이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에 열중할 뿐’이라고 말하는 크리드의 말과 닮았다.
거창한 준비와 작업 과정보다는 지금이라도 당장 방 안에서 손에 잡히는 재료들로 뚝딱뚝딱 만들었다가 금세 해체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고, 아이디어나 순간의 행위 그 자체, 소리, 빛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만드는 크리드 작품의 미술사적 원류는 사실 익숙한 것들이다. 뒤샹 이후 레디메이드 일상 용품들의 갤러리 출입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고, 플럭서스 그룹의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가 점멸하는 자동차 라이트와 경적으로 연주 퍼포먼스를 시도한 바 있다. 쌓기와 긋기의 반복적인 구조와 표현은 미니멀리즘에서, 몸 밖으로 배출되는 체액, 신체성에 대한 실험은 빈 행동주의자들의 신체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드의 예술이 여전히 유쾌한 울림을 주며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이유는 그의 네온작품 <작품번호 232: 온 세상+작품=온 세상(The Whole World+The Work=The Whole World)>(2000)이라는 방정식이 지시하는 크리드의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세상의 일부이고, 세상의 전부라는 것. ●

(부분) 흰풍선 가변설치 20.5cm(풍선 지름) 1998  Courtesy Giardino dei Lauri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부분) 흰풍선 가변설치 20.5cm(풍선 지름) 1998 Courtesy Giardino dei Lauri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 2008 ©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courtesy Ikon Gallery, Birmingham  photo: Stuart Whipps

· 2008 ©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courtesy Ikon Gallery, Birmingham photo: Stuart Whipps

Martin Creed, Work no 299마틴 크리드는 1968년 영국 웨이크필드에서 태어났다. Slade School of Art at University College London을 졸업했다. 1987년부터 작품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글에 번호는 붙여 작품 타이틀로 사용했다. 2001년 <Work No. 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로 터너프라이즈를 수상했다. 1994년 그의 밴드 오와다(Owada)는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으며 밴드 해체 후에도 음반을 발매하고 공연을 하는 등 꾸준히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월드 리포트] 2014 The Whitney Biennial -3명의 큐레이터, 3개의 전시, 하나의 비엔날레

서상숙  미술사

1932년 시작, 2년마다 열리는 휘트니비엔날레 제77회 전시가 지난 3월 7일부터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휘트니미술관에서 개막해 5 월 25일까지 계속된다. 마셀 브루허가 설계한 현재의 빌딩에서 열리는 마지막 비엔날레로 개막 3일 전에 있었던 프레스 프리뷰에서 미술관 직원들은 물론 작가들, 그리고 그 건물을 드나들며 취재를 해왔던 전 세계의 기자들 모두가 미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앞장서서 지켜보았던 휘트니미술관과 비엔날레에 대한 경의와 향수를 표했다. 비엔날레의 도록 표지도 휘트니 건물의 외벽에 물감을 칠하고 종이에 문지른 프로타주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미술관은 현재 맨해튼 다운타운 미트패킹 디스트릭에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짓고 있다. 2015년 완공 예정인 이 건물에서 다음 비엔날레가 열려야 하지만 공사의 진척 상황에 따라 계획할 예정이어서 2016년 비엔날레는 열리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비엔날레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관 소속이 아닌 외부큐레이터 3명만으로 진행되었다. 뉴욕근대미술관(MoMA)의 수석큐레이터인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 미디어와 퍼포먼스아트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현대미술관(ICA)의 부큐레이터이자 작가인 앤터니 엘름스(Anthony Elms), 그리고 작가이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예일대에서 강의하는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다.
이들은 또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코머는 지난해 9월 뉴욕으로 옮기기 전 테이트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런던에서 10여 년 동안 거주했으며 엘름스는 3년 전 필라델피아로 옮기기 전 시카고에서 7년, 그래브너는 오랫동안 위스콘신 주와 일리노이 주에서 2개의 대안공간을 운영하는등 지역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세 명의 큐레이터는 지금까지 협업형태로 이루어지던 비엔날레의 전통을 깨고 독립적으로 작가 선정에 나섰으며 휘트니미술관 2, 3, 4층 중 한 층씩을 맡아 전시를 꾸몄다. 3개의 전시를 통해 3개의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비엔날레가 된 것이다.
《 뉴욕타임스》의 미술담당 기자 할렌드 카터는 기사에서 이번 비엔날레를 “거대한 3단 케이크”에 비유하기도 했다.
도록도 ‘세 명의 큐레이터에 의한 세 개의 다른 비엔날레’라는 특징을 살려 한 권으로 이루어졌지만 3부로 나눠 각자의 방식대로 편집하고 종이 질도 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것이 눈길을 끈다. 큐레이터들 그리고 미술평론가들의 난해한 글 대신 작가 본인, 동료, 낯선 사람들로부터 들은 작가 개개인의 작품 소개에 비중을 둔 것도 신선하다.
이번 비엔날레에 초대된 작가는 모두 103명으로 2012년의 2배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작품들이 빼곡히 전시돼 (특히 4층) 작품 하나하나에 필요한 공간이 적절히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전시장 이외에도 층계에 설치된 작곡가 샬레만 팔레스타인(1947~, Charlemagne Palestein, 엘름스 선정)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휘트니미술관 로비 천장의 전구에 스피커를 설치한 세르게이 체렙프닌(1981~, Sergei Tcherepnin, 코머 선정)의 인스톨레이션, 지하식당의 발코니에 설치된 라다메스 주니 피게로아(1982~, Radames “Juni” Figueroa, 코머 선정)의 하우스 프로젝트, 그리고 시간별로 진행되는 퍼포먼스까지 합치면 다른 어느해보다 많은 양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래브너가 52명, 코머가 27명, 엘름스가 24명의 작가를 각각 선정하였다. 시카고,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 중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나 일하고 있는 두 명의 큐레이터의 성원에 힘입어 이례적으로 중부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이 대거 선정되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성은 ‘하이브리더티(hybridity, 잡종성)’다. 19세기에 처음 언급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하이브리더티의 개념은 ‘어떤 문화도 섞이지 않은 것, 즉 순종은 없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20세기에 시작된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이브리더티가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심화된 하이브리더티의 확산은 미술의 정의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2년 전 76회 비엔날레에서 미술과 비디오는 물론 음악, 퍼포먼스, 댄스 등을 함께 초대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는데 이번 비엔날레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 깊이와 다양성을 과감하게 확장했다. 단순히 장르의 혼합 내지는 크로스오버라는 영역의 확장을 넘어 ‘이것도 미술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1세기의 르네상스맨(우먼)이라고 할 만큼 이번에 선정된 작가 중 상당수가 미술작업뿐만 아니라 음악(악기 연주, 작곡, 녹음), 문학, 비평, 사업, 출판, 영화와 연극감독, 배우, 시인, 소설가, 정치운동가 등을 겸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개리 인디애나(1950~, Gary Indiana)는 1970년대부터 미술작가로 활동하면서 소설가, 극작가, 연극감독, 배우 등을 겸업해왔다. 심지어 본인조차 자신이 미술가라고 여기지 않던 사람이 다수 포함되었다. 큐레이터들은 그들의 지적 작업과정이 미술과 다를 게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브너가 선정해 전시되고 있는, 2008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설가 데이빗 포스터 월래스(David Foster Wallace)가 죽기 직전까지 쓰고 있던《 창백한 왕(The Pale King)》의 작업노트는 과연 미술품인지 문학 유품인지 경계가 모호한게 사실이다.
세미오텍스트(Semiotext(e))는 1974년 기호학 등 프랑스의 철학과 예술이론을 미국 미술계에 소개하기 위해 뉴욕의 다운타운에서 소책자를 발간하기 시작한 출판사다. 현재는 캘리포니아로 옮겨 연평균 10권의 책을 발행하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28권 소책자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세미오텍스트를 선정한 큐레이터 코머는 다음과 같이 그 선정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미술가의 목소리(의견)에 관한 것이다. 미술가의 목소리가 그림이나 조각 등의 전통적인 미디엄을 통해서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출판과 저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에게 아이디어의 전파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하며 어떻게 미술가의 목소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지를 진지하게 관찰해보게 한다. 그래서 미술관이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상자(display case)로서뿐만 아니라 지식의 생산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리티컬 프랙티스 사(Critical Practices Inc, CPI, 그래브너 선정)는 비엔날레 기간 비공개로 3개의 라운드업 테이블을 개최하고 그 기록을 배포한다는 프로젝트를 비엔날레 작품으로 출품했다. 미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대안 토론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엘름스가 선정한 수전 하우(1937~, Susan Howe)는 시인이다. 미술가에서 시인으로 전환한 수전 하우는 이번 비엔날레에 미국, 영국, 아일랜드 시인들의 시를 책에서 복사하여 자른 조각을 흰종이의 한가운데에 붙이고 액자에 넣어 시낭송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 레코딩과 함께 출품했다. 언뜻 미니멀리즘 드로잉처럼 보이는 하우의 이 작품은 읽기와 보기, 그리고 쓰기와 살펴보기, 듣기와 느끼기 등 복합적인 문학과 미술품의 다중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룹으로 작업하는 컬렉티브가 8개나 선정되었다는 것도 하이브리더티의 확산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꼽을 수 있다. 작가의 이름과 사인은 그 미술품의 소유권을 영원히 증거하는 것으로 미술계의 오랜 관행인데 컬렉티브는 작가 개개인의 이름과 소유권 (그리고 그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룹이 작품을 만들고 그룹의 구성원과 인원수는 수시로 바뀔 수 있으므로 작가의 이름은 의미가 없다.
아카데미 레코드(Academy Record, 시카고, 2000년 결성), SEL(캠브리지, 메사추세츠주, 2006년 결성), 다국적 그룹인 HOWDOYOUSAYYAMINAFRICAN?(2013년 결성), 마이 바바리언(My Barbarian, 뉴욕, 2000년 결성), 세미오텍스트(로스앤젤레스, 1974년 결성), CPI(뉴욕, 2010년 결성), 퍼블릭 컬렉터스(Public Collectors, 시카고, 2007년 결성), 트리플 캐노피(Triple Canopy, 브루클린, 뉴욕, 2007년 결성) 등이 그들이다.
하버드대 인류학과 교과과정의 일부로 시작된 센서리 에스노그래피 랩(Sensory Ethnography Lab, SEL, 코머 선정)은 현재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인큐베이터로 올라섰다. SEL은 미술이나 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며 아직도 자신들을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시각환경학과와 인류학과의 합동수업 프로젝트인 SEL은 사라져가는 문화를 기록, 연구하는 에스노그래픽 필름을 만든다. 고고학자이며 필름메이커인 루시엔 캐스팅-테일러(1966~, Lucien Castaing-
Taylor)가 2006년 이 클래스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2009년 작 <스위트그래스(Sweetgrass)>는 여러 영화제에 초대돼 상영되는 등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몬태나에서 양을 치는 두 명의 카우보이를 3번의 여름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 그 비주얼의 뛰어난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맥이 끓긴 마지막 양치기의 삶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훌륭한 예술영화가 주는 감동을 그대로 전한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그가 베레나 파라벨(1971~, Verena Paravel)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새로운 클래스 프로젝트 4부작 <리바이어던(Leviathan)>(2012)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을 출품했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등장하는 사나운 바다괴물로 한때 세계적인 고래잡이 항구이며 허먼 멜빌의 소설 《 모비 딕》의 출발지인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어부들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다. 소형 방수카메라를 어부들의 몸과 선박 자체에 부착시켜 근접촬영함으로써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4층 입구에 전시된 게일런 거버(1955~, Gaylen Gerber, 그래브너 선정)의 출품작 <백드롭(Backdrop)>은 거버가 만든 전시벽에 그가 선정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거는 개념주의 작품이다. 거버는 이 벽을 세움으로써 그 자신이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역할전환을 한다. 그는 전시기간을 반으로 나누어 무명인 트레버 쉬미즈(1978~ ,Trever Shimizu), 중견작가로 잘 알려진 셰리 레빈(1947~, Sherrie Levine), 데이빗 하몬즈(1943~, David Hammons) 등 세 작가의 작품을 건다. 쉬미즈는 우연히 거버에게 비엔날레 큐레이터 중 한 명인 그래브너가 자신과 작업실을 같이 쓰는 작가를 방문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거버는 쉬미즈를 자신의 작품의 일부로 초대했다.
이처럼 자신의 작품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역초대한 작가는 거버뿐만이 아니다. 코머가 선정한 리처드 하킨스(Richard Hawkins)와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는 그들의 대학동창이며 1990년 에이즈로 죽은 토니 그린(1955~1990, Tony Green)의 작품을 큐레이팅해 출품했다.
물론 이번 비엔날레에는 미술의 시각적 아름다움의 기본 요소인 선과 색 그리고 형태의 조화를 추구하는 작품 역시 다수 전시되었다. 89세의 고령으로 레바논 출신 시인이자 화가인 에텔 애드난(Etel Adnan, 코너 선정)의 사방 30cm 크기의 작은 오일페인팅과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수채화는 심플하게 그려진 종이그림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공예 요소가 강한 작품들도 대거 선보이고 있다. 그래브너가 선정한 스털링 루비(1972~, Sterling Ruby)와 시호 쿠사카(1972~, Shio Kusaka)의 도자기, 셰리아 힉스(1934~, Shelia Hicks)의 섬유작업, 피터 슈프(1958~, Peter Schuyff)의 연필조각, 조엘 아터슨(1959~, Joel Otterson)의 비즈 커튼, 코머가 선정한 리사 앤 아워바치(1967~, Lisa Anne Auerbach)의 정치적 메시지(글자)가 들어간 뜨개질 작업 등은 공예의 특성인 수작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그래브너는 유일한 여성 큐레이터면서 작가로서 여류 추상작가를 의도적으로 다수 초대했다고 밝혔다. 다나 넬슨(1947~ , Dona Nelson), 에이미 실만 (1955~, Amy Sillman), 몰리 주커만-하퉁(1975~, Molly Zuckerman-Hartung), 루이즈 휘시먼(1939~, Louise Fishman), 로라 오웬스(1970~, Laura Owens), 재클린 험프리(1960~, Jacqueline Humphries) 등이 화려한 색과 붓터치가 어우러진 대형 캔버스를 선보이고 있다. 원로 여성작가들의 추상작업이 최근 세계미술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현상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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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휘트니비엔날레를 기획한 세명의 큐레이터  “하이브리더티를 의미있게 노출했다”

whitney3ok2014년 휘트니비엔날레에는 이례적으로 3명의 큐레이터가 각각 독립적으로 작가를 선정해 휘트니미술관 2, 3, 4층 중 한 층씩 맡아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 사진 가운데), 앤터니 엘름스(Anthony Elms, 사진 오른쪽),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다.
그래브너는 시카고 미술대학 교수로 개념미술 작가이자 평론가로서 각종 미술전문지에 글을 기고하고 또 두 개의 대안공간을 소유 운영하는 시카고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인 중 하나다. 밀워키에 위치한 위스콘신대에서 페인팅으로 학사를,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석사) 시카고에 위치한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페인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래브너는 미술작가인 남편 브래드 킬리언(Brad Killian)과 함께 대안미술공간 ‘서버번(The Surburban)’과 ‘가난한 농장(The Poor Farm)’을 운영하고 있다. 그랜트도 신청하지 않고 자비로 운영하고 있는
이 두 대안미술공간을 통해 200명 이상의 작가가 전시했다고 한다. ‘서버번’은 자신의 집 뒷마당에 있으며 ‘가난한 농장’은 2008년 실제 농장을 구입해 아티스트 프로젝트 스페이스로 꾸며 전시를 비롯 무료 서머스쿨,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브너는 이번 비엔날레에 대해 “여성 추상미술작가, 재료의 물질성과 그 영향, 그리고 주목할 만한 개념미술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작가를 중점적으로 찾았다”고 밝혔다.
필라델피아의 현대미술관(ICA)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작가인 앤소니 엘터스 역시 2011년 필라델피아로 옮기기 전 시카고에서 작가 겸 큐레이터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교 미술학과(학사), 시카고 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페인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지역에 산재한 작가의 전시공간 운영을 맡아 한 것을 시작으로 로나 호프만 갤러리의 프레퍼레이터,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대학교의 ‘갤러리 400’의 부관장 등을 지냈다. 미술인들의 글을 출판하며 전시장도 겸하는 ‘하얀 벽(White Walls)’의 편집장 겸 디렉터이며 각종 미술이론지에 평론을 기고하고 있다. “그래브너와는 시카고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라고 밝힌 엘름스는 “그러나 우리 3명의 큐레이터는 독립적으로 작가선정을 했다”면서 “어쩔수 없이 겹치는 작가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는 진지하게 논의를 거쳐 해결했다”고 밝힌다.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휘트니 현 빌딩에서의 마지막 비엔날레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면서 “설계자인 브루허가 남겨놓은 메모를 참고했는데 그중에서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미술관이란 무엇인가’라는 귀절을 마음에 담고 진행했다”고 밝힌다. 그 자신이 드럼 연주자면서 레코드를 수집하는 엘름스는 이번 전시에 시와 문학, 음악에 관련된 미술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포함시켜 눈길을 모았다.
스튜어트 코머는 칼리튼 대학 미술학과에서 미술사를(학사), 그리고 런던의 로열미술대학에서 미술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9월 뉴욕 모마의 수석 큐레이터로 옮기기 전까지 런던의 테이트미술관에서 필름비디오 아트의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실험적인 영화와 비디오를 수집하고 상영하는 ‘탱크 테이트(The Tank at Tate Museum)’의 프로그램이 현재에 이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큐레이터로 꼽힌다. 이번 비엔날레는 “하이브리더티(잡종성)를 의미있게 노출하는 작업을 관심있게 보았다”면서 “이주(migration), 이중젠더(binary gender), 크로스 내셔널(cross-national) 등을 다루는 작품을 관심있게 보고 있다”고 밝힌다. 코머는 “뉴욕은 아직도 미술의 중요한 생산지지만 더 이상 세계미술의 유일한 중심지가 아니다”면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며 국제 비엔날레를 많이 가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다. 

뉴욕=서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