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 WIEN German Art since 1960 Selected Works from the Essl Collection

외르크 임멘도르프  캔버스에 유채 230×170cm 1992 ⓒ Sammlung Essl, Klosterneuburg / Wien, Foto: Mischa Nawrata, Wien

위 외르크 임멘도르프 <기다리는 꿀벌 II(Wartebiene II) > 캔버스에 유채 230×170cm 1992 ⓒ Sammlung Essl, Klosterneuburg / Wien, Foto: Mischa Nawrata, Wien 아래 <1960년 이후 독일미술전> 전시광경 2015 ⓒ Photo: Peter Kuffner / Essl Collection Klosterneuburg / Vienna.

오스트리아의 에슬 미술관(Essl Museum)에서는 이 미술관이 소장한 독일 작품 중 독일 현대미술가 21명의 대표작 80여 점을 선별하여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Deutsche Kunst nach 1960)전>을 열었다. 2015년 6월 24일부터 11월 15일까지 계속된 대규모 특별전을 통해 제시된 20세기 후반기 독일의 현대미술이란 어떤 미술을 뜻하며 독일미술사에서 어떤 궤도를 구축했을까? 에슬 미술관이 해석하고 제시한 전후 독일 현대미술의 로드맵을 살펴보도록 하자.

독일 현대미술을 정의하다

박진아 미술사

에슬 미술관이 기획한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Deutsche Kunst nach 1960)전>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의 독일 현대미술은 정치적 역사와 그에 대한 자성의식의 표현으로 요약된다. 에슬 컬렉션의 본 주인인 카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가 독일 회화와 조각의 남다른 애호가여서 이 분야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거창하고 포괄적인 제목만큼 내용 역시 알찬 전시로 미술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항간에는 있었다. 또 이 전시가 개막하자마자 오스트리아의 일간지 《데어 슈탄다르트(Der Standard)》는 에슬 미술관이 이번 전시 카탈로그를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 우송해 홍보했다고 보도하고 전시용 미술작품 대여 사업을 해보려는 카를하인츠 에슬 관장의 비즈니스 속셈이 엿보인다며 이 전시회의 기획 의도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 미술관은 지난 한두 해에 걸쳐 풍랑을 겪었다. 에슬 미술관은 본래 바우막스(Baumax)라는 대형 DIY 건축용 재료 및 장비 소매 체인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오스트리아인 사업가 카를하인츠 에슬 회장이 60년 넘게 수집한 개인소장품을 모아 2003년 현대미술관으로 개관한 사설 현대미술관이다. 지난 2014년 가을, 바우막스 사가 파산 위기를 맞자 에슬 회장은 채무를 이행해 직원 해고를 막기 위해 당시 시세 8600만 유로(한화 1200여억 원) 어치의 개인 미술소장품을 대거 매각해 미술계에 화제가 되었다.
잘 키운 미술 컬렉션은 인생을 살다보면 마주할 수 있는 ‘3D 위기’ 즉, 이혼(divorce), 사망(death), 빚(debt)이라는 인생의 3대 고비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개인 자산이라고 했던가? 카를하인츠 에슬 관장은 값진 미술 컬렉션 덕분에 사업체 부도를 막고 바우막스 사를 둘째아들에게 물려준 후 현재는 미술 큐레이터로 변신해 자신의 소장품을 십분 활용한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에 대한 변치 않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독일 미술사조를 조망하는 이 전시는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 두 화가를 독일 20세기 후반기 전후 미술계의 귀감이자 모범적 전형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에슬 부부가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두 화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여서 두 화가의 전 창작기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유별난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애호가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 두 화가야말로 20세기 전반기 독일 미술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뒤틀고 전복시켜 독일 회화사의 궤도를 새로 그은 주인공이라고 전시는 선언한다.
여느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 에슬 컬렉터 부부가 천착하는 예술적 영감이자 동시에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두 화가의 영원한 모티프는 인간의 몸이다. 바젤리츠가 인간의 몸을 거꾸로 세워 고전 그리스 미술의 이상적 신체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 유럽 회화와 미의식을 재정의하려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면, 뤼페르츠는 인간의 몸을 동강 내어 회화와 조각으로 재반복해 구현하며 특유의 육중하고 기념비적 조형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후 냉전기에 접어든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최첨단 문화예술 사조를 주도하는 예술 아방가르드의 대륙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1940년대 중엽부터 1960년대까지 뉴욕을 휩쓴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여 엥포르멜 미술(Art Informel)과 타시즘(Tachisme)이라는 대륙권 유럽식 추상표현주의 사조가 유행했다. 특히 라이프치히 출신의 하르트비히 에버스바흐(Hartwig Ebersbach)는 당시 동독에서 행위주의 구상회화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스처럴 회화(gestural painting)를 고집한 외톨이로 꼽히는데, 그의 굵직한 필치로 물감을 두껍게 겹겹으로 덧바르는 기법은 이후 1980년대 독일을 휩쓸 포스트모던기 신표현주의를 예고했다.
한편, 이즈음 동서독을 합쳐 독일에서 주로 실험된 대세적 사조는 기하학적 추상주의 회화였다. 대체로 순수조형 창조라는 냉철한 입장에서 과거 동독권에서 순수추상이나 기하학적 추상이 격려되었는데, 예컨대 오늘날 사진을 능가하는 극사실적인 회화로 더 유명해진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도 본래 제스처 개념을 연구하여 추상적 이미지로 구성해 회화로 옮기는 차갑고 분석적인 기하학적 추상주의로부터 출발했다. 이 시기 독일 기하학적 추상주의 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두 화가 귄터 푀르크(Gunther Forg)와 이미 크뇌벨(Imi Knoebel)도 표현주의 회화 속 화가의 붓 필치나 물감 칼 등으로 남겨진 인간적 수공 흔적을 일절 제거해낸 듯한 냉철한 추상을 추구했다. 푀르크는 양식적인 면에서 1920~3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 이탈리아 파시즘, 소비에트 연방 건축 이론에 담긴 건축적 조화와 비율이론을 추상회화로 번안해 표현하고 싶어했다. 크뇌벨은 유사한 미니멀리즘 추상주의 접근방식을 취하되 2차원 색면회화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하고 싶어했다.
전후 독일의 미술을 거론할 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동서 분단 상태는 독일 국민은 물론 미술가들의 역사적 유전자와 기억에서 여간해선 지우기 어려운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이 전시는 1960년대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정치적 제약과 단절을 극복하며 예술적 교감과 우정을 지속하려 애쓴 동서독 미술인들의 노력이 저변에서 면면히 이어졌음을 말한다. 예컨대,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주도한 서독 출신 화가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와 동독 출신 화가 A.R 펭크(A.R. Penck)가 나눈 예술적 우정은 잘 알려져 있다.
언뜻 보기에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표현양식을 구축했음에도 임멘도르프와 펭크는 모두 전후 냉전기, 동서 분단이라는 독일의 정치적?사회적 현실로부터 영감을 받아 미술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꿰하려 시도했던 지극히 정치적인 미술가였다. 두 화가 모두 미술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끝내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변치 않는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실제로 임멘도르프의 1980년 회화작품 <오스트외르크(Ostjorg)>에는 미래 언젠가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져 독일이 하나로 통일될 그날이 오면 동독 땅을 직접 밟으며 방문할 날이 올 것이란 화가의 희망과 예견이 담겨 있다.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는 과거 동독 라이프치히 출신으로서 라이프치히 화파인 펭크의 계보를 이어 중견급에 이른 네오 라우흐(Neo Rauch)다. 1998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동서독이 통일된 후, 전세계 미술시장의 성장세에 힘입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라우흐는 오늘날 자국 내에서보다 미국에서 높은 인기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그는 독일의 역사, 유독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아 짙은 파토스와 우수에 가득 찬 인물들을 등장시켜 모호한 분위기로 연출한 알레고리 회화로 그려내어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독일의 역사를 단선적 내러티브로 이야기해주는 듯 보이면서도 화가 개인의 확고한 정치사회적 선언이나 주장은 일절 배제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그의 작품이 지닌 강점이다.
하지만 라우흐보다 한 세대 앞서 ‘가장 독일적인 화가’라는 별명을 얻은 화가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다. 지난 수십 년 그는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지만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테마로 작업한다는 이유로 특히 1980년대부터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독일적인 화가로 평가받아왔다. 키퍼의 회화는 독일 고대 신화, 동화와 전설, 문학작품과 역사에 이르는 실존적 주제부터 옛 독일제국 독수리 휘장, 셰퍼드견,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남부 흑삼림지 같은 독일의 전형적 심볼에 이르기까지 어두웠던 근대사를 상기시키며 독일 국민의 마음 깊은 곳 속죄의식에 호소한다. 2차원적 회화에 납, 진흙, 모래, 풀을 뒤섞어 입체적 질감을 더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그는 역사란 신의 자연과 창조력의 불가분성과 자연의 순환적 섭리처럼 돌고 도는 외면할 수 없는 힘이라고 말하며 관객의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누른다.
독일 회화가 창조적인 측면에서나 문화적 파급력 측면에서 가장 다양하고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 시기는 두말할 것 없이 1980년대였다. 이번 에슬 미술관의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전>의 약점은 컬렉션 소장품 중 핵심인 1980년대 독일 작품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에슬 컬렉션이 이 전시를 개최한 기간에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 미술관(Stadel Museum)에서는 <1980년대 서독에서의 구상회화(The 80s-Figurative Painting in West Germany)전>(2015.7.22~10.18)이 열려 1980년대 독일의 현대미술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며 에슬 컬렉션에서 볼 수 없던 이 시대 작품들에 대한 보충 및 주석 구실을 했다.
게다가 <1980년대 서독에서의 구상회화전>은 그 시대를 경험한 세대들이 다시 한 번 유럽 전역을 깊숙이 뒤흔들었던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향수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이 전시는 1980년대를 서독 포스트모던기로 보아 시대적?지리적으로 전시 범위를 한정하고 당시 독일 구상미술을 부활시킨 일명 ‘융게 빌데(Junge Wilde)’ 즉, ‘젊고 거친 청년들의 회화운동’의 최고점이라 규정한다. 유럽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문화를 뒤흔들던 1980년대 미술은 단도직입적이고 강렬하며 도발적이다 못해 때론 폭력적이며 체제 조롱적이어서 1980년대 융게 빌데의 미술은 ‘나쁜 그림(bad painting)’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매스미디어, 정치를 상징적 코드로 변환하다
사실 표현주의는 근대기 독일 미술에 면면히 흘러온 예술적 에너지이자 잠재력이었다. 일찍이 18세기 말과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는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심오함과 경외로부터 깊은 창조적 가치를 발견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낭만주의는 사실상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중세시대의 공동체 위주에 자연친화적이던 과거 인류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 철학은 20세기 초엽 독일 표현주의 운동으로 폭발적인 창조력을 발휘했고, 다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가 되자 젊고 패기 넘치는 화가 집단들이 주도한 1980년대 후기 독일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로 폭발한 것이었다.
1980년대 융게 빌데 시대는 과거 서독의 4대 도시 함부르크, 쾰른, 뒤셀도르프, 베를린을 창조 중심부로 급부상시킨 시기였다. 또 이때는 혈기왕성한 젊은 미술인들이 각양각색의 목소리와 미술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도 거머쥘 수 있던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다. 폴란드 출신이나 쾰른으로 건너와 활동을 시작한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는 자본주의적 사실주의(Kapitalistischer Realismus) 운동을 일으켜 조악한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은근슬쩍 소비사회를 조롱하는 안티-아트를 이끌었다. 오늘날 독일 미술시장의 막강한 세력이 된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은 고급예술과 서브컬처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 콜라주 회화로 단숨에 독일 회화사의 한 위상을 확보했고, 마르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는 그만의 천재적 기발함과 표현력으로 1980년대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을 국제적 위상으로 끌어올렸다. 1960년대부터 플럭서스, 팝아트, 아르테포베라 영향하에 혼자 묵묵히 작업하던 독일계 스위스 미술가 디터 로트(Dieter Roth)가 드디어 예술성과 재능을 인정받아 거장으로 주목받은 때도 바로 1980년대였다.
1990년대 이후가 되자 독일 회화에선 매스미디어가 정치라는 상징적 코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리히터(Daniel Richter), 요나탄 메제(Jonathan Meese), 팀 아이텔(Tim Eitel) 같이 퍼포먼스, 설치, 뉴미디어 등 새로운 소통 미디어를 역사, 매스미디어, 대중문화라는 주제와 결합해 회화로 끌어들인 젊은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야하고 현란한 색채의 구상회화로 일명 사이키델릭 펑크 화가로 불리 199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다니엘 리히터는 올 초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Schirn Kunsthalle)에서 개인전 <다니엘 리히터-안녕, 당신을 사랑해(Daniel Richter. Hello, I Love You)전>(2015.10.9~1.17)에서 커리어 중간휴지기를 선언하고 이전보다 더 추상화되고 더 요란한 색채로 강도를 높인 회화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편, 스스로를 ‘문화적 주술사’라 부르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요나단 메제(Jonathan Meese)는 회화, 드로잉, 조각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며 현대사회 속의 마약 중독자, 펑크족, 신나치주의자 등을 소재로 해 독일 도시에서 창궐하는 여러 하위문화적 어두운 흔적을 고발하듯 격렬하게 표현한다.
국제 미술계는 범주와 마케팅상의 편의를 위해 국가별 전형적 미술가를 찾아 고착화하며 독일 미술가들 또한 미술계 프리즘에 속해 있다. 그 결과 주목받는 독일 출신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역사와 정치라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이는 특히 젊은 독일 미술가들을 압박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재능있는 미술가가 여러 미술사 속에서 나타났다 잊혔다.
21세기로 접어든 후부터 독일의 신진 미술가들은 독일의 역사와 과거나 정치 등의 무거운 주제로부터 탈피해 한결 동시대적 주제를 다루려 한다. 일명 ‘저속한 취향’의 화가로도 불리는 악명 높은 마르틴 에더(Martin Eder)는 앙고라 고양이를 안은 채 선정적 포즈를 한 젊은 여인부터 신성 모독적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고딕 서브컬처 미학을 담은 극사실주의적 회화로 대중적 시각문화를 논한다. 안젤름 라일레(Anselm Reyle)는 화려한 색채와 고광택으로 마감한 회화작품이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재활용한 조각으로 고급과 저급 예술 또는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유희하며, 안톤 헤닝(Anton Henning)
은 회화를 3D 인테리어 디자인의 연장선상으로 포섭해 2차원적 회화의 3차원적 공간성을 실험하는 작업을 한다. 이 전시는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가 지적재산권의 무의미성을 꼬집으면서 예술은 자유롭게 모방되고 재창조되어 향유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어머니(Mother)> 조각 연작으로 결말을 맺는다. ●

WORLD TOPIC | TOKYO Simon Fujiwara < White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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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 전시광경 Installation view at Tokyo Opera City Art Gallery 2016 ⓒ Simon Fujiwara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RO NASU photograph: MISHIMA Ichiro 아래 < Untitled(Plum Tree) > 2016 ⓒ Simon Fujiwara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RO NASU photograph: MISHIMA Ichiro

사이먼 후지와라의 개인전 타이틀이 왜 <화이트 데이>(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 1.16~3.27)로 명명되었는지 전시장에 들어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이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이른바 ‘화이트 데이’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극단화된 ‘감정 소비’의 한 단면이다. 지금을 정의하는 요소인 역사, 사회, 정치, 문화 등을 바라보는 후지와라의 시선은 직접적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하얀 전시장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그 누구의 시선도 수용하는 거대한 용기(容器)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비추는 거울

마정연 미술비평

1982년 런던에서 태어난 사이먼 후지와라 (Simon Fujiwara)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국립조형미술대학에서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뒤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다. 2010년에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카르티에상을, 같은 해 아트바젤에서 바로워즈상을 수상하고 2012년 테이트 세인트 이브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등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젊은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싱가포르 비엔날레, 타이베이 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등의 국제전과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헤이워즈갤러리,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가했다.
2016년 1월 16일부터 3월 27일까지 신주쿠에 위치한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에서 가 개최 중이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이어 이듬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소개된 바 있기 때문에, 건축가인 일본인 아버지와 무용가인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출생 배경이나 게이로서의 성적 아이덴티티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다만 후지와라가 일본에서 미술관 규모의 개인전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외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까 싶다. 큐레이터 시노부 노무라가 개인전을 제안, 후지와라의 승낙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본 전시의 타이틀은 기획 초기 단계에서 이미 유력한 안이었다는 화이트데이.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생각하는 그 화이트데이가 맞다. 작가는 왜 이 단어에 주목했을까? 그는 사랑과 감사라는 행복과 가장 밀접한 감정을 초콜릿이나 선물 교환을 통해 표현하는 풍습을 개인의 감정과 소비를 연관시킨 시스템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본 전시에서 작품으로 제시된 제품(product)의 생산 과정과 디스플레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해당 미술관에서 그간 열린 다른 전시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설정된 동선을 따라가면 새하얀 카페트가 깔린 긴 통로로 이어진다. 오프닝 직후 관객들의 마음속에는 막 내린 눈길을 처음 걷는 것 같은 설렘과 죄책감이 교차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두 개의 사물을 비추고 있다. 하나는 영국의 고급 백화점 쇼핑백에 담긴 모피, 또 하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꽃봉오리가 맺힌 매화나무 가지로 그 주변에는 동전들이 흩어져있다. 일반 시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고급 백화점이 몰락한 광산업과 섬유 산업의 도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아이러니와, 작은 대가를 지불하고 큰 보상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동전을 던지고 기도하는 신사의 풍습이 후지와라가 보여줄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들을 예고하고 있다.
동전들을 따라간 곳 역시 새하얀 공간이다. 곳곳에 구멍이 뚫린 바닥의 흰 카페트는 물론, 화이트큐브의 특징인 흰 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전시장 공간의 약 절반이 여백에 가깝게 활용되었다는 점이 새롭다. 익숙한 동전들 사이에 19세기 멕시코의 플랜테이션에서 사용되던 자체 화폐와 일본이 점령 중인 필리핀에서 발행해 종전(終戰)과 동시에 쓸모없는 종잇장이 되어버린 지폐로 만든 부채가 눈에 띈다. 식민지배가 계속될 거라 믿은 일본과 식민지배의 잔재를 취미생활로 연결시키는 필리핀인들에게서 각기 다른 낙관주의를 볼 수 있다. 화폐는 바닥에 놓인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가면, 나치가 ‘예술행위’로서 파괴한 탑의 고철을 덧댄 탭댄스 슈즈, 그리고 독수리의 모티프로 이어진다. 독일의 동물원에서 가져온 독수리 석조와 미술관 소장품에서 차용한 독수리의 그림에서 동서양이 공유하는 권력의 상징을, 전후 나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훼손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독일 지하철의 독수리 부조에서 권력과 역사에 대한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권력과 역사에 대한 시선은 북한의 만수대예술단 화가들에게 의뢰, 제작한 회화작품 시리즈 (2015)로 이어진다. 공식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에는 신선한 우유가 유통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 화가들은 본 적이 없는 소재를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그린 셈이다. 우유라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그림 뒤에는 거대한 명함이 걸려 있는데, 읽어보면 전형적인 중소기업의 말단 영업사원임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원치 않는 명함을 건네며,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24시간 내내 일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일본 사회의 가장 작은 부품이다. 후지와라는 각기 다른 높이로 천장에 걸린 캔버스와 패널, 모니터가 겹치는 이 공간을 일본 건축의 특징인 장지 미닫이문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전시회장 중앙에는 투명한 작업실이 설치되어, 흰 가운을 입은 스태프가 수작업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2015~) 시리즈는 모피 표면의 털을 제거함으로써 드러난 피부를 캔버스화한 작품이다. 후지와라는 털로 덮여있을 때는 럭셔리한 상품이었던 모피가 생물학적 속성을 감추지 못하는 죽은 짐승의 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특정 문화권과 사회계층에 속한 관객들의 반응이 매우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짐승의 피부 건너편 전시실에는 권력의 피부가 전시되어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라고 인식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의 피부다. 그녀의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의뢰해 메르켈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파운데이션으로 색칠한 리넨을 캔버스에 고정한 작품 (2015)은 권력자의 겉껍데기와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권위의 피상성을 언급한다.
또 한 명의 강한 여성,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2020년 도쿄올림픽 국립경기장 모델이 뒤집힌 채 전시되어 있다. 제목은 (2016). 우연의 일치이지만, 본 전시의 담당 큐레이터는 국립경기장 건립 백지화 논란이 일어나기 전인 2014년에 하디드의 첫 개인전을 담당했었다. ‘배송 사고로 더럽혀진 부분을 가리기 위해’ 오프닝과 전시 첫날에는 작품 위에 생오징어가 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투명한 흰색으로 변해가는 죽은 오징어의 피부는, 오징어라는 별명을 가진 하디드의 건축에 대한 야유와 국립경기장 사태를 둘러싼 국민적 수치심을 연상시킨다. 후지와라는, 일본 사회가 문제를 지우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더러움과 얼룩을 직면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나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강한 두 여성 사이로 보이는 것는 익명의 소녀들이다. 2011년의 런던 폭동에 참여해 체포된 빈곤층의 16세 소녀 레베카는 2주간의 갱생 지도 여행으로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 보내져 대량생산공정과 수천 년 전 대량생산되어 진시황릉에 묻힌 테라코타 군대를 견학한다. 여행의 끝에 그녀를 같은 방식으로 대량 복제해 만든 것이 테라코타 색의 석고상 시리즈 (2012)다. 현재까지 약 130명의 레베카가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약 100명이 전시에 참여했다.

형식적 제약이 없는 것이 미술
두 번째 전시실에서 레베카들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의 제목은 (2015)다. 새하얗게 표백된 공간에서 석고 조각상의 받침대 위에 앉아 쓰레기를 주우며 살아가는 자신의 가족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리아의 스페인어는 음악처럼 아름답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실제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3D CG의 손이 화면을 터치하고 넘기고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마리아조차 CG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곳에 또 다른 창이 뜨고, 3D CG의 손을 제작한 독일인 막스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그 역시 일상적인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메라가 조금 물러섰을 때, 영상을 보고 있는 관객들이 거의 동시에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그 직후 조심스럽게 주변의 시선을 살핀다. 막스가 팔이 없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장면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심리적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끔 교육받은 일본인들이 여지껏 의식한 적 없었던 행복에 대한 고정 관념과 그 잠재된 폭력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영상 속에는 쓰레기 분리수거통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뒤돌아 보면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 레베카들 사이에도 같은 형태의 검은 오브제가 늘어서 있다. 이들의 타이틀은 (2015), 독일어로 ‘나’를 의미하는 단어다. 사회 전체의 생산소비 사이클의 일부분인 개인이 그 시스템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분리의 윤리는 독일 사회 속에 200종류가 넘는 분리수거통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작가가 무기를 연상시키는 검은 동으로 색을 덧칠한 순간, 쓰레기통은 인종 분리를 둘러싼 20세기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장치로 변모한다.
혼인에 의한 인종 간 유전자의 교환에 대한 인식은 서서히 변화해왔다. 일본어에서는 혼혈을 의미하는 단어로 영어의 ‘하프(half)’가 쓰인다. 누군가를 ‘반쪽’ 취급하는 차별어인 줄 알았던 이 단어는 독특한 선천적 매력을 갖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사용되는 일상용어이다. 일본 사회는 혼혈에 대해 얼마만큼 관용적인가. 전시장 바닥의 카페트가 잘려나간 부분 사이로 보이는 얼굴의 주인공은 아프리카계 혈통을 받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대표하는 미인이 될 수 없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미야모토 에리아나이다. 관객들은 ‘순수한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가져온 ‘검은 미인’의 얼굴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거대한 눈은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손꼽혀 온 하얀 피부의 정치성을 고발한다.
아름다움의 정치성이라는 면에서 후지와라의 소속 갤러리 타로 나스(TARO NASU)에서 동시 개최되고 있는 전시 을 언급하고 싶다. 미키모토가 발명한 양식진주에는 인공적으로 삽입된 이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개의 자기치료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순결과 원만함의 상징이기도 한 이 하얀 보석은, 남성이 혼인을 약속하는 증거로 여성에게 건네는 보석으로 사랑받아왔다. 조개에 이물질을 삽입하는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에서 잔혹함을 느끼는 것은 감성의 문제이겠지만, 성인 여성이라면 산부인과의 금속 의료기구가 몸 안에 들어오는 차가운 이물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진주를 삼키고 X선 사진을 찍은 작품 (2015)을 선보인 이 전시는 화이트데이와 더불어 일본의 발명품인 양식진주를 통해, 인공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폭력성 그리고 폭력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후지와라는 한 인터뷰에서 무엇인가를 온전히 완성하는 것을 꺼려 온 자신에게 형식적인 제약이 없는 분야가 미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대미술에 정해진 형식이 없다는 말은 곧 모든 형식을 가진 분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 전시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작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캡션 없이 뒤섞여 있는 오브제, 캔버스, 설치, 조각, 영상들은 각기 다른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배치한 것은 작가지만, 개념 간의 연상을 통해 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다. 이 비결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작품 기능을 하는 의 본질적인 힘이다.
출품작 가운데는 큐레이터인 노무라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아이가 동물원에서 본 동물 중 마음에 드는 동물을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가 그 그림을 보고 만든 인형을 크리스마스에 선물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한다. 유치원의 선생님은 아이가 보라색으로 그린 봉고가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대신, 어머니가 따라 만든 인형의 꼬리 부분이 그림과 조금 다르니 고쳐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지와라는 크게 기뻐하며 그림과 인형을 빌려 (2009~2013)와 의 사이에 배치했다. 단 하나의 잣대를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보는 세상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시점,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 다양한 가치관이야말로 ‘반쪽’의 일본인인 작가가 일본 사회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 전시를 통해 후지와라라는 아티스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듣고,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지 아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를 다시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WORLD TOPIC | GUANGZHOU The 1st Asia Biennial and The 5th Guangzhou Triennial

최근 ‘아시아’라는 키워드는 서구에 대항하는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시대 글로벌 현상과 밀접하게 연동되며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또 다른 움직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 남서부 광둥성의 성도(省都)인 광저우에 위치한 광둥미술관에서는 기존에 진행해온 <광저우트리엔날레>와 더불어 <아시아비엔날레>(2015.12.11~4.10)를 새롭게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는 17개국 5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지리적, 역사적 정의를 뛰어넘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안했다.

아시아비엔날레가 의미하는 것

이슬비 본지 기자

중국 남서부에 자리 잡은 해양도시 광저우는 베이징, 상하이에 비하면 미술 관련 기관, 갤러리도 많지 않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활동도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대부터 해양실크로드의 거점이자, 중국이 영국의 끈질긴 통상 요구에 따라 외국에 개방한 최초의 개항장으로 서구 근대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창구 노릇을 했다. 현재는 베이징,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국제 무역 중심지 역할을 맡고 있다. 홍콩과 바로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며 이른 시기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서구와 대결하는 장소이자 근현대 혁명의 발상지로서 앞으로 광저우 현대미술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광저우 현대미술의 대표 기관인 중국 광둥미술관(Guangdong Museum of Art)이 기획한 <제1회 아시아비엔날레/제5회 광저우트리엔날레>가 지난해 12월 11일 개막해 올해 4월 10일까지 계속된다. 1997년 개관한 광둥미술관은 2002년부터 광저우트리엔날레를 네 차례 개최했다. 이번에는 제5회 광저우트리엔날레이자 동시에 이번에 처음 열리는 아시아비엔날레를 통합한 행사로 진행됐다. 광둥미술관 뤄이핑(Luo Yiping) 관장은 “지금까지 미술 담론이 서구 중심으로 주도된 상황에서 아시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경험을 아시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비엔날레가 필요하다”며 이번 행사의 개최 사유를 밝혔다. 그의 발언에는 광저우가 아시아비엔날레를 통해 21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이자 문화예술 허브로 발돋움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라는 하나의 축과 심포지엄과 세미나라는 학술적 행사가 또 다른 축으로 구성되었다. 미술관은 아시아에 관한 담론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2013년부터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각국의 큐레이터 50여 명을 초청해 수차례 큐레이터 포럼과 국제 학술대회를 진행하며 아시아비엔날레의 당위성을 검토하고 이를 확립하고자 힘써왔다. ‘아시아 타임(Asia Time)’을 중심 주제로 내건 이번 행사는 ‘월드 타임(Wolrd Time)’으로 대변되는 서구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을 제시했다. 서구적 속도의 미학, 선형적 발전 개념에 대립되는 동양적 관조와 멈춤의 미학, 비진화론적 회귀의 지혜로 풀이할 수 있다. 행사에 참여한 많은 학자와 큐레이터들은 아시아 타임은 아시아의 독자적인 시간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월드 타임과 긴밀한 연동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전시는 장칭(Zhang Qing) 중국국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헹크 슬래거(Henk Slager) 네덜란드 위트레히트 비주얼아트 및 디자인 대학원 원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우테 메타 바우어(Ute Meta Bauer) 싱가포르 현대미술관장이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헹크 슬래거는 월드 타임과 아시아 타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동양 출신 작가, 서양 출신 작가의 구분을 넘어 시간성 자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인 사라 지(Sarah Sze)는 신문 1면과 마지막 면에 등장하는 기사 사진을 자연 풍경 이미지로 대체하고 다양한 일상용품을 사용한 설치작업 <달력 시리즈(Calendar Series)>를 출품해 시공간을 인식하고 측정하는 방식에 관해 의문을 던졌다. 장칭은 그룹 Big Dipper, 페이융메이(PEI Yongmei) 등 특별한 주제는 없지만 현재 중국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를 중심으로 급격한 변화 속에서 빠르게 도약하는 중국 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테 메타 바우어는 아시아 역사의 다양한 순간을 담은 5명의 작가/팀이 꾸미는 퍼포먼스를 선정해 이번 행사 폐막식에 선보일 예정이다. 김홍희 관장은 ‘아시아’와 ‘여성’을 서구 역사와 부계(父系) 문명에 기재되지 않는 비가시적 타자로 범주화하고, 이 둘의 애매모호한 특성에 내재된 전복적인 힘을 포착해 아시아 페미니즘을 재해석한 큐레이팅을 선보였다. 이 기획은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동아시아 페미니즘 : 판타시아전>에 압축적으로 선보인 것으로 국내 전시가 외국 미술관에 수출된 사례로 손꼽힌다.
특히 작가 함경아는 서양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명화 <모나리자>를 매개로 탈북자들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경험을 인터뷰로 풀어낸 작업을 선보였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북한의 지도자 이외에 누구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금지된 북한이기에 모나리자에 대한 개념은 쉽게 수용되기 힘들다. 작가는 서양 고전풍의 복식을 입은 탈북자들이 모나리자와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남북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도록 유도함으로써 현지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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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민쥔 <묵의(Ink Shirts)> 혼합재료 2015 미술관 중정 계단에 먹물이 묻은 붓으로 칠한 셔츠를 걸어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이 작업은 중국 동시대 미술에서 전통 문화와 사회주의 문화의 복합적인 관계가 어떠한 심리효과로 작용했는지 이야기한다.

아델 아비딘  비디오 16분2초 2015 작가는 팝 문화의 아이콘인 마이클 잭슨의 부활을 가정하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시대 동시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담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Courtesy of the Artist, Work commisioned by Qutar museums Authority

아델 아비딘 <마이클> 비디오 16분2초 2015 작가는 팝 문화의 아이콘인 마이클 잭슨의 부활을 가정하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시대 동시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담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Courtesy of the Artist, Work commisioned by Qutar museums Authority

‘아시아’라는 또 하나의 흐름
그러나 이번 비엔날레는 중국 특유의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미술관 측은 이번 행사가 민감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출품작에 자체 검열을 시행한 것이다. 일상의 오브제들과 유사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통상적인 성의 개념을 해체하는 작가 정금형의 <피트니스 가이드>는 외설적이란 이유로 퍼포먼스가 금지되어 설치와 영상작품만 선보였다. 또한 한국 입양아 출신 네덜란드 여성작가 사라 반 더 하이데(Sara Van Der Heide)의 프로젝트 <독일 평양 열람실 및 정보센터>는 제대로 된 홍보 없이 조용히 공개됐다. 주최 측이 남한과 북한, 중국과 북한 사이의 민감한 관계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시기간 동안 쑨원도서관 3층에 있는 광저우 괴테 인스티튜트를 평양의 독일문화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작가는 2004년 개관했다가 북한 정부의 압박에 의해 2009년 폐쇄된 평양 독일문화원 소장 도서색인카드와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와 김일성의 교류 문서, 세계 169곳에 있는 독일문화원 주소가 찍힌 괴테의 명함 등을 선보임으로써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와 아시아의 상이한 맥락을 드러냈으며, 이와 관련해 분단과 통일, 남북한의 경계를 다룬 작가 10명의 작품을 함께 소개했다.
글로벌리즘 확산 이후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비엔날레급 대형 미술행사들은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동시대 미술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아시아 지역에서는 아시아의 특수성에 집중하는 흐름이 눈길을 끌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경제적인 급성장을 배경으로, 글로벌 맥락에서 아시아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는 현상을 반영한다.
아시아는 더 이상 지리적 범주로서 구분되거나 서구에 대항하는 정치적 개념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아시아를 하나의 구호처럼 피상적으로 접근한다면 이것은 상상 공동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에 관한 탐구는 공동의 역사와 문화적 경험을 공유한 아시아가 자발적인 목소리를 모아 아시아의 다양한 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연대의 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할 수 있다.
다시 이번 행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 미술관에서 비엔날레급 행사를 하나만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텐데 앞으로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를 동시에 진행하겠다니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씩, 트리엔날레는 3년에 한 번씩 열며, 두 행사가 겹치는 해에는 이번처럼 연합전으로 개최하겠다는 계획이다. 광둥미술관의 경우 1년에 60회의 전시가 열릴 만큼 국제적인 규모의 블록버스터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다. 비엔날레가 우후죽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앞으로 이 미술관의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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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융메이 <듀얼 타임 No.2> 캔버스에 유채 2015 급격한 정치, 경제, 문화적 변화와 맞물려 다양한 충돌과 모순을 경험하는 중국의 현재적 상황을 대변한다.

 

 

WORLD REPORT | BRISBANE 8th Asia Pacific Triennial of Contemporar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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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최정화 < Alchemy > 아크릴 LED조명 가변설치 2015 < Cosmos > 2015 아래 < Mandala of Flowers > (바닥 설치) 플라스틱 병뚜껑 2015 ‘APT KIDS’ 프로그램으로 출품된 작업. 개막식에서 아이들이 최정화의 작품을 이용한 체험활동을 하고 있다

 1993년 처음 개최된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Asia Pacific Triennial, APT)>가 올해 8회 대회를 맞았다. <APT>는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미술관(Queensland Art Gallery)이 아시아와 태평양 인접 아시아 국가를 리서치하여 동시대 아시아 미술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려는 취지에서 설립한 전시다. QAG와 현대미술관(Gallery of Modern Art)에서 열린 <APT8>(2015.11.21~4.10)에는 특히, 한국의 최정화, 양혜규, 정은영 작가가 초청받아 그 의의를 더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APT8>의 현장을 현지 취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생생하게 전한다.
현지취재, 사진=황석권 수석기자

전시장에 펼쳐진 아시아의 미술지도

황석권 수석기자

한국보다 1시간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Brisbane). 오스트레일리아에서 3번째 규모의 도시인 이곳은 1859년부터 퀸즐랜드(Queensland)의 주도였다.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대부분 태평양과 인접하여 놀라운 자연풍광을 뽐내는 골드코스트(Gold Coast)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도심에도 이런 광경 못지않은 문화적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한국에선 초겨울인 11월이 브리즈번에선 여름이다. 이곳의 강렬한 태양빛을 받으며 브리즈번 강을 건너자 퀸즐랜드미술관(Queensland Art Gallery, QAG)과 현대미술관(Gallery of Modern Art, GOMA)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주변에 문화 콤플렉스가 조성되어 있다. 이번 <APT>가 열리는 두 미술관을 비롯, 박물관과 과학관, 주립도서관, 대규모 공연장(QPAC)이 강변의 산책길에 조성되어 있어 산책을 하다 바로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다.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Asia Pacific Triennial of Contemporary Art, APT)>는 바로 QAG와 GOMA에서 열린다. APT 측은 1993년 처음 열린 <APT>부터 지금까지 이 행사를 통해 소장품을 확충해왔다는 점에서 여타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와 차별성을 갖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차별점은 몇 가지 더 있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인 ‘APT KIDS’를 1999년부터 전시에 적용해왔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책 출간과 원거리 거주 아이들을 위한 투어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06년부터는 ‘APT CINEMA’를 열어 동시대미술과 영화(영상)의 조우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운영방식을 이어온 <APT>는 지금까지 누적관람객 240만여 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56만여 명이 다녀가 최다 관람객을 기록했다고 한다.
전시 형식에서도 차별점은 드러난다. 트리엔날레 형식을 취하지만 전시에는 특별한 주제가 없다. 여기엔 루벤 키한 (Ruben Keehan) QAG 아시아담당 큐레이터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리서치에 근거한 학술적 연구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전시에서는 큰 주제하에 작품을 늘어놓는 형식보다 상이한 작업을 비교하면서 보는 데서 유의미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전시기획팀의 의도가 숨어있다. 어떻게 보면 미술 빅이벤트들이 주제로 내세우는 ‘표어’들은 관람객에게 선입견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이 비슷한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APT8>이 주제를 드러내지 않기에 오히려 관람객은 스스로가 나름의 주제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관람객은 주제를 찾고, 주어진 맥락을 따라야 하는 스트레스 없이 전시장을 누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 형식이 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그것은 마치 아시아의 지도를 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APT>가 꽤 오랜 기간, 그리고 지속적으로 아시아 지역 작가에 대한 방대한 리서치를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출품작가를 보면 이른바 지역적 치우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른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터키부터 ‘중동’으로 불리는 서아시아, 인도 및 중앙아시아, 그리고 한국과 중국, 일본이 있는 동아시아까지 아시아 지역을 섭렵해 보여준다. 따라서 주제에 따른 동선에 맞춘 디스플레이 방식을 취하지 않는데다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국가가 메인 공간을 차지하는 법도 없어 전시는 ‘비교’를 통한 관람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도작가 칼리얀 조쉬(Kalyan Joshi)의 <Hanuman Chalisa>(2015)나 몽골의 노민 볼드(Nomin Bold)가 제작한 <Tomorrow>(2014) 같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신화적 상상력 가득한 작품을 만나다가 필리핀 작가 라야 마틴(Raya Martin)의 <Now Showing>(2008) 같은 일상을 담은 영상작업을 보게 되는 식이다.
전시 장소별로 몇몇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자. 우선 QAG. 이곳에선 이른바 토속적(vernacular)인 작품이 꽤 많이 눈에 들어왔다. 주로 종족성이나 민속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이 점점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동시대미술과 어떤 영향관계에 있는지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인 대니 멜러 (Danie Mellor)의 <Deep(forest)>(2015)은 작품 그 자체와 디스플레이가 마치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정글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도 작가의 토속성 짙은 작품도 이번 전시의 백미로 꼽힌다. 앞서 소개한 대니 밀러의 작품과 비교하여 볼 때, 각 원주민 종족 고유의 종교성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칼파 파투아(Kalam Patua), 푸슈파 쿠마리(Pushpa Kumari), 만투 치트라카르(Mantu Chitrakar) 등의 인도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형식과 요소, 그리고 사건이 담긴 작품을 출품했다.
GOMA는 설치와 영상작업이 주를 이뤘다. 대부분 아시아에 거주하는 이들의 일상과 사회상이 담긴 작업이었다. 중국 류딩(Liu Ding)의 <New Man>(2015)이나 필리핀 키리 달레나(Kiri Dalena)의 <Erase slogans>(2015), 뉴질랜드 안젤라 티아티아(Angela Tiatia)의 <Edging and seaming>(2013)이 그예다. 만나기 힘들었던 아시아 여러 국가의 작가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던 점도 흥미로웠다. 미얀마 민테인숭(Min Thein Sung)의 <Another Realm(horse)>(2014)은 만화를 출력해 부착한 벽면 앞, 천으로 외관을 덮은 군마상 작업이며, 네팔 힛만구룽(Hit Man Gurung)의 <Yellow helmet and gray house>(2015), 파키스탄 하이데어 알리 얀(Haider Ali Jan)의 <Laughing>(2008) 연작이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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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 Sol LeWitt Upside Down-Structure with Three Towers, Expanded 23 Times > 알루미늄블라인드 637.5×1127×707cm 2015

혼융, 그 자체로 정체성이 되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에서 3명의 작가(양혜규, 정은영, 최정화)가 출품했다. <APT>는 첫 대회부터 한국작가가 꾸준히 참여했던 바, 양혜규와 최정화의 작품은 퀸즐랜드미술관 로비에 설치됐다. 양혜규의 출품작은 <Sol LeWitt Upside Down-Structure with Three Towers, Expanded 23 Times>(2015)다. 작가가 솔르윗에게 헌정하기 위해 제작했다고 밝힌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표현방식인 블라인드를 연결하여 구축했다. 미술관의 높은 천장에 설치된 이 작업은 하부 풀(pool)에 놓인 다리를 지나며 감상할 수 있다. 10m 폭에 3m 높이의 규모로 QAG 로비를 장식하고 있다. 최정화의 작품은 바로 옆에 설치됐다. 그의 <Alchemy>(2015)와 <Cosmos>(2015) 또한 양혜규 못지않은 규모인데, 플라스틱 체인이나 구슬 등을 엮은 형형색색의 줄을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린 형태다. 정은영 작가는 국극 배우의 세계를 조명한 <Act of Affect>(2013)를 출품했다. 전시기획 담당자는 “관람객들이 한국인의 삶, 특히 한국여성의 삶에 접근하게 하고 싶었다”는 취지를 밝혔다. 또한 한국 작가에 대해서는 “작품의 디스플레이에 있어 강렬하고 성숙함이 발현되어 매우 세련됐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앞서 전했듯 <APT>의 차별화된 프로그램 중 하나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최정화의 작업도 전시와 아이들 프로그램에 동시에 출품됐다. 전시 오픈식이 끝나고 작품 아래에 마련된 원형의 놀이터는 최 작가가 마련한 여러 크기와 형태의 플라스틱 병뚜껑을 맞춰 색다른 형태를 만들며 노는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주정부 문화부 장관이 이곳을 직접 찾아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체험하는 광경은 이례적이었다. 이처럼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여느 미술 빅 이벤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키한 큐레이터는 아이들을 미술관의 중요한 관람객으로 대하고 있다며 “관람객이 미술관에서 환영 받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관람객은 환영받는다는 느낌이 없다면 전시장을 찾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예술작품은 관람객을 만날 특별한 기회를 놓칠 것이다. 아이들은 본디 창의적인 존재다. 그리고 어른이 거부하는 예술의 형태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동시대미술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람객이다.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예술을 접하는 기회의 교육적 가치를 매우 높게 생각하고 있다”고 <APT>가 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중요시 하는지 설명했다. 그래서 매회 <APT>는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출품하는 작가를 선정한다고.
전시를 둘러보면서 <APT>가 왜 아시아미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지 매우 궁금했다. 역사적으로 백호주의가 기승을 떨친 전력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꽤 오랜 기간 이진 이민정책이 가져온 문화의 혼융이 이제는 바탕에 깔릴 정도가 되었을 것이고, 시장의 시대에 접어든 국제 미술계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서구이자 아시아라는 묘한 정체성을 가졌기에 “이 지역이 걸어온 문화적 정체성의 혼재와 전이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스스럼이 없다”는 점을 오히려 강점이자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유진상, 《월간미술》, 2016년 1월호, 104쪽) 즉, 그들은 여러 문화의 혼융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분석에 대해 전시장에서 만난 오스트레일리아 미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동의했다.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가 그토록 발견하려 발버둥친 아시아성에 대한 단서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한다. “<APT8> 같은 전시는 모호하고 좀처럼 그 외양을 드러내지 않는 ‘아시아성’을 발견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서구의 시선으로 보는 아시아미술의 면모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루벤 키한, QAG 아시아담당 큐레이터) ●

니콜라 몰레(Nicolas Mole)  2015

니콜라 몰레(Nicolas Mole) < They Look at You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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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번 강에서 바라본 GOMA전경

브리즈번 강에서 바라본 GOMA전경

interview

“아시아 미술의 특징은 오랜 역사와 빠른 변화의 조합”

루벤 키한(Reuben Keehan) QAG 아시아미술 담당 큐레이터

1993년에 시작된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APT)>는 한국에서는 덜 알려져 있다. 우선 <APT>를 소개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겠다.
<APT>는 아시아와 태평양 인접 아시아 국가의 미술에 초점을 맞춰 3년마다 퀸즐랜드미술관이 주최하는 대규모 전시회다. 전시는 갤러리 내부 기획으로 열리며, 다수의 출품작을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다.
1993년 처음 열렸으며 서구의 미술관에서 아시아와 태평양 인접 국가의 미술을 선보였다는 독특한 전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전시의 규모와 시야를 넓혔다. 1회 <APT>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남태평양과 동남아,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미술에 초점을 맞췄다가 제2회 <APT>부터는 이들 국가를 포함해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 참여국을 넓혔다.

알려졌다시피 일반적으로 큰 미술이벤트는 특별한 주제를 내건다. 그러나 <APT>는 이러한 주제를 표방하고 있지 않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전시의 특별한 주제를 표방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APT>가 매우 복잡 다양한 세계 미술작품을 아우른 학술적 연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태평양 인접 국가에는 약 45억 명의 인구가 밀집해 있다. 따라서 특정 주제에 맞는 특정 작업을 찾는 것보다 상이한 작업들끼리 대화하게끔 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렇게 해서 인도 토속미술 옆에 전시된 최정화 같은 작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세계의 예술을 비교하는 것에서 배우는 점이 많다.

이번 <APT8>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인접국가의 동시대미술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연구를 통해 발견한 아시아의 정체성과 아시아 작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를 말하라면 아시아를 통틀어 발견되는 ‘융합’의 다른 정도라고 하겠다. 아시아는 수천년 동안 문화와 언어 그리고 전통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서구화는 이런 점에서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현상인데 작가들이 서구의 재료 혹은 테크닉을 이용하더라도 각자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한 차별화된 시각에서 작업한다.
간혹 작가들이 자신들이 속한 커뮤니티와 관련 있는 이슈를 서구의 기법을 이용해 작업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동시대의 이슈를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이 내가 아시아 미술 전체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이다. 나는 동시대 아시아미술 전문가로서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의 미술에 특별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여기는 세계적으로 매우 역동적인 지역이며 새로운 경향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미술계는 기반이 잘 구축된데다 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 동시에 미얀마, 캄보디아 그리고 몽골 등지에서도 다양한 미술의 출현을 목격했다. 아시아의 오랜 역사와 빠른 변화의 조합은 매우 고무적이다.

한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미술계는 매우 낯설다. 오스트레일리아 미술계에 대해 소개를 부탁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미술은 유럽에서 온 정착민, 원주민, 그리고 1970년대부터 유입된 이민자, 즉 라틴아메리카, 중동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태평양 인접국가 등지에서 온 이들의 미술이 혼융된 매우 독특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관람객이 <APT>에서 목도하는 바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의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스트레일리아 미술은 국제적이지 않아, 해외에 많이 노출되지 못했다”라고.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미 국제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미술의 강점은 앞서 말한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배우는 것이다.

이후 APT의 행보에 대해 묻고 싶다.
8회 <APT>를 개최하고 이제 겨우 한 숨 돌리고 있는 상태다. 다음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기상조다. 다만 각 <APT>는 그 자체로 독립된 전시이지만, 연속된 전시이기도 하다. 다음 전시를 위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당장 할 일은 리서치 진행 계획을 수립하고 과거 22년간 전시를 녹여낼 수 있는 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브리즈번=황석권 수석기자

EXHIBITION FOCUS William Kentridge Peripheral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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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간의 거부> 5채널 영상설치 사운드 나무 2012 아래 <위비는 진실을 말한다> 35mm 컬러영상 (디지털로 변환) 사운드 1996~97와 <그림자 행렬> 35mm 애니메이션영상 1999이 순차적으로 상영되고 있는 전시장 광경

직전 세기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펼쳐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곳에서 급진적 활동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그 실상을 전한 작품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의 한국 첫 개인전 <윌리엄 켄트리지-주변적 고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12.1~3.27)이 개막,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잘 알려진 그의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비롯, 영상과 음악, 역사 등이 망라된 대표작이 출품됐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화, 정치가 담긴 켄트리지의 전시를 살펴보면서 그가 제시하는 키워드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생각해 본다.

불확실성의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이윤희 미술비평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예술가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과 관련된 정치적 격동기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에도 포함된 애니메이션 형식의 작품들이지만, 그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여 문학과 공연예술까지 아우르는 다매체적 작업을 지속해왔다. 남아공 출신의 백인이면서, 기존의 매체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 탈장르적 경향을 보이는 작가임과 동시에, 자신이 처한 지역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해 왔다는 이력은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성들을 담지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는 데 촉매가 되었다.
남아공의 거의 모든 백인이 그러하듯이, 그는 조상이 선택한 이주를 통해 그곳의 일원이 되었다. 남아공의 백인 이주는 이미 17세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켄트리지 가문은 유대인 혐오기류가 전 유럽에 팽배하던 19세기 말에 이주했다. 유대계인 그의 가문은 박해를 피해 증조부 시절에 남아공에 정착했고 몇 세대에 걸쳐 정계와 법조계에 영향력을 가지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넬슨 만델라와 살해당한 흑인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의 편에 서서 활동한 인물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대개 불필요한 일이겠으나, 켄트리지의 경우 당시 남아공의 상황과 집안 배경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1989년의 <요하네스버그, 파리 다음으로 위대한 도시(Johannesburg, 2nd Greatest City after Paris)>를 시작으로 2003년의 <조수간만표(Tide Table)>에 이르는,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Drawings for Projection)>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도 그의 출신 배경은 참고가 될 만하다. 이 연작들에서 각각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예민한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는 두 인물은 모두 어딘지 작가의 얼굴을 닮아 있다. 한 사람은 줄무늬 양복을 입은 풍채가 좋은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줄곧 누드로 등장해 유약한 느낌을 주지만, 둘 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백인 남성이다. 펠릭스(Felix Teitlebaum)라 이름 붙여진 누드 남성은 켄트리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반영하여, 양복을 입은 소호(Soho Eckstein)라는 인물은 켄트리지가 조부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인 만큼, 두 인물이 모두 작가를 닮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두 인물은 대개는 명백하게 구분되지만 때로는 비슷해 보이고 어느 순간 한 인물이 다른 인물로 변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켄트리지가 가진 이중적 정체성의 반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부여한다. 그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전선에 선 집안의 일원이지만, 백인 거주지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흑인 고용인의 도움을 받고 백인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다니며 유럽적 문화와 전통을 교육받았다. 자신이 스스로 가해자편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남아공의 백인이라는 자기 존재 자체가 모순적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아프리카에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인 자신은, 완전한 백인 가해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종주의에 맞서는 투사도 아니고, 그 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내재하며 동시에 유럽적 전통에 뿌리를 둔 자신의 예술적 감성에 대한 고뇌도 엿보인다. 그는 유럽 전통의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다. 그의 전방위적인 활동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uchner)의 희곡을 패러디한 작품(<하이펠트의 보이체크(Woyzeck on the Highveld)>(1992))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남아공의 상황에 빗댄 작품(<아프리카의 파우스트!(Faustus in Africa!)>(1995))으로부터,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즈의 귀환>, 쇼스타코비치의 <코> 등의 기존 오페라를 새로이 해석해 자신의 영상프로젝션, 무대디자인과 더불어 공연으로 올리는 작업에 이르렀다. 그는 유럽의 고전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그리고, 다시 써서, 다시 제시한다. 그가 과거의 예술에 개입하여 다시 제시하는 메시지는 최신의 세트장과 영상과 의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학작품이나 오페라 속의 줄거리에 배태되어 있는 모순적 상황들을 끄집어내서 반복하고 회의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존의 작품에서 선명했던 서사는 비틀어지고 균형감을 잃고 모호한 종말을 맞는다.

(사진 오른쪽) 철 알루미늄 자전거부품 발견된 오브제 253×150×150cm 2012

<무제(풀무)>(사진 오른쪽) 철 알루미늄 자전거부품 발견된 오브제 253×150×150cm 2012

견고한 상식을 깨다
기존의 명확했던 것을 곱씹어 회의하는 방식은 그가 작업실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에도 개입되는 태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의 애니메이션은 종이 위에 목탄 드로잉을 기본으로 한다. 단색의 한계뿐 아니라 정착액을 뿌리기 전에는 지워지거나 번지기 쉬운 단점을 가지고 있는 목탄은 유럽미술의 전통에서 볼 때 결코 주된 재료가 아니다. 그러나 켄트리지는 목탄의 단점을 자신의 드로잉 작품, 드로잉을 기반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형식의 작품에 동력으로 삼았다.
그는 종이에 목탄으로 어떤 형상을 그리고, 그린 형상을 부분적으로 지우고 거기에 덧그리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대개 7~8분 정도 되는 한 작품에 적게는 20장, 많게는 60장의 드로잉 작품이 사용되는데, 분당 수백 장이 사용되는 셀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볼 때 많은 연속 장면이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식이다. 연속된 장면, 그러니까 커피포트가 엘리베이터로 변했다가 수직갱도로 변하는 장면이나 검은 전화기가 고양이로 변하는 장면, 건물에 물이 들어차 잠기는 장면, 빈 벽에 그림이 차례로 걸리기 시작해 벽 전체에 빼곡히 들어차는 장면 등은 각각 하나의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다. 물론 최종적인 드로잉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로잉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그리고 번지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그리는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화면이 구조적 완결성을 가진다는 기존의 견고한 상식을 흩어버린다.
게다가 그린 것을 지우고 덧그릴 때, 이미 그려진 것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화면에 흔적을 남긴다. 그는 처음 목탄 드로잉을 할 때 지울 부분을 완벽하게 지우려 노력했지만, 지워지지 않고 남는 흔적들이 일종의 시간의 은유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과거를 깨끗이 세탁한 현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지워진 흔적들과 그 위에 덧그려지는 형상들이 정지된 화면의 제한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다.
매끈하게 완결된 화면 대신 덜 지워진 흔적 위에 중첩해서 그리는 것은, 스토리보드 없이 시작해 형성 과정 그 자체의 순간에 의존하는 서사 구성 방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 기저에서 추구되는 가치가 명료성, 일관성, 완벽성에 대한 거부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은 끊임없이 일관되고 명료한 의미를 찾는 기존의 습성을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켄트리지가 관객을 낚아 올리는 미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소호의 부인과 펠릭스가 사랑에 빠질 때 등장하는 물고기, 점점 차올라 범람하는 홍수의 이미지 등은 관객을 도상학적 해석의 늪에 빠뜨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료한 해석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나 그리스로마 전통의 도상을 넘어, 각 사물에 대한 개인적 도상학을 구축하여 해석의 여지를 개방하고 넓히는 것 역시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특성이다.
다채널 영상작품들은 해석 그 자체를 분열시키는 더욱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덟 편의 영상이 동시에 상영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말은 내 것이 아니다(I am not me, the horse is not mine)>(2008)에서 타틀린의 기념비가 여러 채널에서 반복되는 점, 오페라 <코(The Nose)>에서 사용되었던 코의 형상이 빈출하는 지점 등이 일관된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한눈에 일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스크린상의 내용이 단일한 결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퍼포먼스의 일환인 강연에서는, 켄트리지 스스로 연사가 되어 미리 준비된 발언을 하지만 자신의 강연 내용을 혼란에 빠뜨리는 영상들이 상영되어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메시지 해독의 시간을 청중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켄트리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어느 하나로 수렴되기보다는 단서가 되는 특정 지점으로부터 무한히 발산된다. 남아공에 사는 백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다른 나라의 정치 상황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고의 궤적, 세계의 가장 변두리에서 사적인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는 소재의 착종, 그리다가 중간에 멈추어버린 것 같은 수많은 드로잉 작품, 서로 지지하다가도 배반하는 내용의 영상의 동시 상영, 잘 알려진 고전 작품들의 재맥락화 등, 이 모든 켄트리지의 작품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점은 불확실성에 대한 신뢰이다. 불확실성만이 확실하다는 것, 이는 논리적 귀결을 예견하고 어느 지점에 깃발을 꽂아 그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시대가 종결되었고, 이제는 장님이 지팡이를 더듬듯 어디가 길인지 더듬어가며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운데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아주 없지는 않은, 그리하여 이해 가능과 불가능의 사이에서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즐거움이자 괴로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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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국내 첫 개인전 연 윌리엄 켄트리지 William Kentridge

“예술 없이는 인생이 지속될 수 없다”

IMG_0240우선 한국에서의 전시를 축하한다. 먼저 소감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다
직전에 중국 베이징의 울렌스현대미술센터(Ullens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전시(2015.6.27~2015.8.30)를 열었다. 이번 한국에서의 전시는 이보다 규모가 더 크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공간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작품과 공간의 만남, 일종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인데 아직 공간에 친숙하지 않아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고 있다.
역사적 공간에서 전시되는 당신의 작업과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화이트 큐브에서 보여지는 당신의 작업은 어떤 차이를 가질 것으로 보는가?
예를 들면 <Refusal of Time>은 어디에서 전시되든 매번 변화를 주었다. 그런데 다르게 보여준다해도 투박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을 설치할 때 완벽하고 깔끔한 공간이 아니라 항상 거친 공간에 설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작품을 운반할 때 썼던 박스, 벽에 설치하고 남은 나무조각들을 이용했다.
예전에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불가능할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무엇인가?
아티스트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관람객은 작품을 보면서 어떤 변화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나도 영화나 소설, 미술작품 등을 보고 내 자신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을 확인하고 소신을 갖게 된 경험이 있다. 즉 자아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말이다.
예술에 과연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이에 대해 <다른 얼굴들> 작업과 연계하여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
내 작품이 어떤 이에게는 치유의 힘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사실 예술 없이는 인생이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예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 은유,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서 우리가 구현하는 의미에 동의하는 것이 있다. 이것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항상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는다. 작업에서 기본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인가?
내게 컬러감이 있었다면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을 텐데. 흑백 작업은 내가 컬러 작업을 못하기 때문이다.(웃음)
<Lesson> 연작을 보면 켄트리지가 켄트리지에게 질문한다. 자기를 타자화한 작업처럼 보인다
내가 만약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면 더 이상 작업을 안해도 되겠다.(웃음) 모든 작업은 나를 찾기 위한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생을 마감할 때 이게 바로 나였구나 확인하는 것 같다. 사람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명의 나를 작업실로 불러 재미있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그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업을 떠나 당신이 기억하는 성장과정을 듣고 싶다
좋은 질문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찍어주신 영상을 보면, 좀체 가만있지 않았다. 뭔가를 항상 보여줘야 했다. 그러니깐 자신의 존재감을 강조하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항상 만들고 확인받고자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많은 드로잉을 선물했다. 그 드로잉과 지금 내 작업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작업은 딱히 어떻다 설명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작업은 무엇이다”라는 말을 직접 듣고 싶다
나는 메시지 등 작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고려하지 않는다. 단지 무엇인가 만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까 제작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황석권 수석기자

WORLD TOPIC | BEIJING Ai Wei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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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왕씨사당(汪氏祠堂) > 명말대 1300여 개의 나무조각에 채색 2100×1680×942cm 2015 < Chandelier >(아래 설치작업) 구리 수정 조명 400×241×231cm 2015(갤러리 콘티누아 설치작업) 아래 < Spouts installation > 1만여 개의 송대 주전자 꼭지 495×430cm 2015(당인당대예술공간 설치작업)

중국 작가들에게 물었다. 지금 베이징에서 누가 가장 ‘핫’한 작가냐고. 십중팔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이웨이웨이’였다. 중국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하고 가택연금당했던 중국 미술계의 앙팡테리블 아이웨이웨이의 전시가 베이징 5개 전시장에서 동시에 열렸다. 중국 정부 기관의 허가를 받은 첫 개인전이라는 점도 놀라운 일이고, 전시장 벽을 뚫는 등의 파격적 상황과 결부되어 전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아이웨이웨이가 전시장에서 풀어낸 고심의 흔적을 살펴보도록 한다.

베이징의 앙팡테리블, 아이웨이웨이

권은영 미술사

한 도시에서 생존 작가의 개인전이 5개의 각기 다른 기관에서 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중대형 화랑이 손을 잡고 공동으로 기획하여 벽을 뚫어가며 한 명의 작가 개인전을 동시에 개막, 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일 것이다. 베이징은 물론 중국 내외의 예술 애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대망의 주인공은 바로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이다.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베이징에서 정식으로 당당하게 첫 개인전을 여는 그가 우리에게 당당히 쏟아내는 이야기에 어찌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미술계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관련 소식에서도 왕왕 접하게 되는 아이웨이웨이. ‘반체제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식상할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안에서는 서슬 퍼런 비판을 받고 밖에서는 손바닥이 뜨거워질 만큼의 박수를 받아왔다. 2011년 81일간 구금당했던 그가 4년여 만에 중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았다는 소식이 한창 회자되던 중에 돌연 중국 주재 영국대사관이 6개월 비자가 아닌, 20일 단기 비자만을 발급해줬다는 소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가 1993년 중국에 귀국하고 처음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공개적으로 개인전을 쏟아냈다. 지난여름, 아이웨이웨이는 베이징의 5개 공간에서 서로 다른 4개의 개인전을 연이어 선보였다. 중국의 한 기자는 “베이징에서 그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낼 수 있는 날이 올줄 몰랐다”며 그의 전시 소식을 전했고, 그의 전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6월 6일, 베이징 798예술구의 대표적인 화랑인 이탈리아계 ‘콘티누아 화랑(Galleria Continua)’과 화교계 ‘당대당인예술센터(?代唐人??中心)’가 ‘아이’, ‘웨이웨이’로 작가 이름을 사이 좋게 나누어 걸고 그의 개인전을 동시 개막했다. 이틀 뒤 같은 798예술구의 ‘마금석공간’(魔金石空?)에서 역시 ‘아이웨이웨이 개인전: AB형’(艾未未?展:AB型))이 개막했다. 그리고 건축가로서 아이웨이웨이 자신이 2007년 설계한 차오창디(草?地) 예술구의 미국계 ‘체임버스 파인 아트(Chambers Fine Art)’에서 6월 13일 <호랑이(彪)전>을 개막하고, 뒤이어 19일 같은 예술구의 ‘305박물관(305 Museum)’에서 <대단한 일(挺事?的)전>을 단 하루 선보였다. 지난 4년간 꾹꾹 참고 숨겨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한달음에 풀어놓은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역시 그는 ‘중국’이라는 큰 화두를 꼭 쥐고 있었다. 유구한 역사, 사회주의 국가 건설,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퇴색한 전통 그리고 인권. 가장 먼저 아이웨이웨이 개인전 축제의 포문을 연 ‘콘티누아 화랑’과 ‘당대당인예술센터’의 공동 기획전 <아이>, <웨이웨이>는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두 개의 전시공간을 뚫어 명나라 시대의 건축물을 세워 큰 관심을 받았다. 아이웨이웨이는 중국 전역을 다니며, 시간을 머금은 사연 많은 사물들을 모으기로 유명하다. 이번에 그는 장시(江西)성 우위안(?源)현 샤오치(?起)촌에 있던 400여 년의 역사를 품은 ‘왕가의 신주단지를 모시고 있는 사당(汪家祠)’을 통째로 베이징에 옮겨왔다. 본래 왕가에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건물을 ‘월국공’(越?公) 왕화(汪?)가 개보수하여 다시 지은 왕가사당은 제사를 지내고, 축전을 하는 등 집안의 중대사를 함께한 가문 회합의 중심에 서서 전통을 쌓아왔다. 하지만 1950년대 지방 유지였던 왕씨 일가는 사회주의 혁명의 타파 대상으로 지목당했고, 왕가사당은 국가가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왕씨 일가는 물론 국가로부터 방치된 사당은 결국 중당(中堂)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소수의 편에 선 작가
1500여 개의 부분으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립된 전시장 속 왕가사당은 사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국의 화려했던 근세는 물론 질곡의 근대, 그리고 현대 중국의 풍파를 고스란히 머금었으니 오죽할까. 결국 왕가사당은 왕씨 일가의 가문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중국 전체의 역사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미술 전문 매체 《야창(雅昌)》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선조의 기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인류 문명은 한 줄기 강과도 같아 아주 먼 곳에서부터 흘러 흘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강이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오늘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며 정체성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사람들이 종종 망각하지만, 좋든 싫든,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의 우리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체임버스 파인 아트의 <호랑이전>을 읽을 수 있다. 화랑의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뿌리가 잘린 대형 고목이 터줏대감처럼 서 있다. 마치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를 떠올리게 하는 대형 고목은 대문과 화랑 입구 사이를 막고 있어서, 관람객은 고목을 빙 돌아 화랑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 또한 육중한 고목의 존재감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한걸음에 화랑에 진입할 수도 없게 만든다. 시골 마을 어귀에나 있었을 법한 대형 고목에 눈길을 주다 보면 돌연 고목의 가지 가지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고목의 가지들은 자연 그대로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붙여 놓은 가지들이다. 2009년부터 청나라 시대 이전 사찰의 고목을 수집해 온 작가는 서로 다른 고목의 뿌리와 줄기들을 융합하여 또 다른 거대한 고목을 만드는 새로운 연작을 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역시 중국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명나라 시기를 제외하고 그 전후에 굴곡 많고 여러 가지가 얽히고 설킨 고목을 이용하여 가구를 만들거나 장식물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 명나라 시기의 단아한 가구와는 상반되는 이러한 화려하고 희귀한 형태의 가구는 지금도 중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작가는 전통 공예에 속하는 고목을 활용한 가구를 예술작품으로 승격시켜 다시금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국의 과거를 이야기하던 작가는 798예술구에서 <AB형>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중국을 이야기했다. ‘경고’ 문구에 자주 사용되는 노란색으로 사방이 칠해진, 좁은 벽으로 양분된 전시장을 수백 포기의 “철 잡초”(?草)들이 관통하고, 천장에는 일상 생활에서 지나치기 쉬운 옷걸이를 모빌처럼 엮어 늘어뜨렸다. 앞선 3곳의 전시장에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사물들로 소통했던 데 반해, AB형 전시장에선 철, 잡초, 옷걸이라는 현대사회 일상 소재들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잡초는 한없이 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반면 철은 본래 건축 자재이면서도 강인함을 상징한다. 이 두 상반되는 성질을 머금은 <철 잡초>와 <옷걸이 모빌>을 통해 작가는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꼬집고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민초를 연상하게 하는 <철 잡초>를 보고 있자니, 소수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곤 하는 작가의 오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 일련의 개인전에서 전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온화했다. ‘반체제’, ‘인권’ 등 윗선의 심기를 거스르던 목소리는 잦아들고, 대륙 모두의 공공의 적 ‘사인방’에 대한 인민의 눈높이에 맞춘 일침이 돋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SNS에 작업실에서 도청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올라 안타깝다. 현 정부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무더웠던 올여름 798예술구를 더욱 뜨겁게 달구던 아이웨이웨이 전시들이 하나 둘 막을 내리고 있다. 갤러리 콘티누아만이 아이웨이웨이와 함께 올 연말을 마무리할 듯싶다. 그가 들려주는 400여 년 중국의 역사 이야기는 2015년 말까지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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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웨이웨이 Ai Weiwei
1957년 태어났다. 베이징 영화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 미국에 거주하면서 행위예술과 설치미술 작업을 시작했다. 1993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실험예술가의 모임 ‘이스트빌리지’를 결성하기도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1999), 카셀도쿠멘타(2007), 광주비엔날레(2012) 등에 출품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체육장 냐오차오(鳥巢)를 헤르초크&드뫼롱과 협업하여 설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정부가 올림픽을 지나치게 선전한다는 이유로 정작 개막식에는 불참했다. 2011년 공안에 연행되어 81일간 구금되기도 했으며, 여권을 압수당하고, 1년여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EXHIBITION TOPIC Yinka Shonibare MBE

< High Tea Ⅲ >(맨 왼쪽) 마네킹, 더치왁스, 패턴천 등 혼합재료 410×122×80cm 2015

나이지리아계 영국 작가 잉카 쇼니바레 MBE의 대규모 개인전 <찬란한 정원으로> (5.30~10.18)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를 풍자적으로 표현해 역사의 이중적인 측면과 문화의 혼종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일본 제국주의를 경험한 한국적 상황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예술은 마술이자 연금술이다

이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잉카 쇼니바레는 영국이 자랑하는 멀티미디어 작가로서 회화, 조각, 공예, 의상디자인, 사진, 연극, 오페라,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쇼니바레의 국제적인 명성과 작품세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가 단순히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가 아니라 나이지리아 태생 흑인이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임을 인지하고서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의 가닥이 풀린다. 작가 입문 시절 흑인이 왜 아프리카 미술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변호사를 아버지로 둔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강한 지적 호기심에 자존감도 강했지만, 영국사회에서 그에게는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 작가라는 주변적인 정체성이 부여되었다. 자신의 내면과 외부에서 규정하는 정체성의 불일치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는 외부에서 부여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타협함으로써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자신에게 부여된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아프리카 문화의 정체성을 작품에 담고자 ‘더치 왁스(Dutch-wax)’ 염색 직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향후 그의 작품에 필수적인 주재료가 된다. 일명 ‘아프리카 천’이라고 불리는 이 직물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시장을 겨냥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면직물인 바틱(Batik)과 유사하게 제조한 것으로 인도가 시장의 매력을 잃자 아프리카로 유입되어 크게 유행하게 되고 이제는 아프리카에서 자체 제작할 정도로 아프리카화한 유럽 제품이다. ‘아프리카 천’은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허구적인 개념임을 드러내는 문화 혼종(混種)의 실제적인 예로서 문화적 혼종성을 예찬하는 쇼니바레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재료이다. 그의 작품은 외부에서 요구하는 아프리카성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규정하는 문화적 정체성의 실체가 얼마나 근원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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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Victoria philanthropist’s Parlour >(맨 오른쪽) 더치왁스 패턴천, 카펫, 가구 등 혼합재료 259×487×508cm 1996~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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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ash Willy >(오른쪽) 실물크기 마네킹, 더치왁스 패턴천 등 혼합재료 132×260×198cm 2009

분노? 그런 건 없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대규모 쇼니바레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그의 작품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분노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답한다. 그는 과거 유럽의 제국주의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 거부할 수 없는 역사임을 인정한다. 나아가 그는 제국주의가 양산한 문화의 혼종성을 진정으로 즐긴다. 그에게 제국주의는 인간의 역사에서 문화가 어떻게 뒤섞이게 되었는지를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이며, 자신의 성장 배경은 그러한 제국주의가 한 개인에게 적용된 과정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적 혼종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적극 수용한다. 제국주의가 양산해낸 문화의 혼종성 시대, 그리고 그것을 환영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는, 자신과 같은 흑인 장애인에게 예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제국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과 수용이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 미술계의 인종차별 문제에는 신랄하다. 1980년대에 그는 해체주의에 열광하고 데리다와 프란츠 파농을 공부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작품 곳곳에 백인중심주의적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그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닐 당시 뼈저리게 경험한 ‘차별’은 흑인작가에게 전시와 활동 기회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작가로서 첫발을 떼려 할 때, 중심무대에서의 활동은 요원해 보였다. 그는 많은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 그가 골드스미스를 졸업할 당시 단 한 명의 흑인 작가도 런던의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그가 성공을 거둔 후 작품만을 평가하여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는 대안공간을 연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흑인 작가로서 생계를 꾸려갈지 막막하던 그에게 모델이 된 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미술운동이었다. 그는 미술계의 소수집단인 여성들, 특히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모델로 하면서도 지나친 정치성이 예술의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예술의 정치적 표현은 형식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피상적인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정치적인 질문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동력이었다. 예술성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사회적 구조나 자신의 신체적 장애에 대한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아름답다는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술가적 기질과 재능을 타고난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술을 통한 재현의 정치학, 혹은 재현의 정치학에서 예술성의 확보임을 강조한다. 쇼니바레에 의하면 작품의 형식미는 관객과 소통하는 창구 구실을 한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해 비판해야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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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of a Victorian Dandy(19.00 Hours) > C 타입 프린트 183×229cm 1998

 필름 14분28초 2005

< Odile and Odette > 필름 14분28초 2005

엄숙한 역사의 무게 덜기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문화적 혼종성의 근원인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한 탐구와 비판적 재현은 쇼니바레 작업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그는 엄숙한 역사의 무게를 예술적 유머와 위트를 가미해 덜어낸다. 1962년생인 그는 자신을 68세대로 규정하면서 역사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한다. 그 무거운 역사를 가볍게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것은 마술사이자 연금술사인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영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영국과 나이지리아 문화의 충돌과 결합에서 잉태된 문화의 혼종성과 자본주의를 후기-식민주의 세대 특유의 거리두기와 유머와 위트로 표현한다. 그의 두 문화의 혼종성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개인적 체험은 광범위하게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국가 간, 인종 간의 역학관계를 통찰하게 이끈다. 찰스 황태자로부터 MBE(Member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상을 기꺼이 받고 그 이후 자신의 이름을 ‘Yinka Shonibare MBE’로 쓰는 점도 문화의 혼종성을 수용함과 동시에 제국주의라는 역사의 엄숙주의를 예술로써 공중에 띄우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의 위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한 관객이 구체적인 작품 제작 방법을 묻자 쇼니바레는 마술사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알려주는 걸 봤냐면서 말해줄 수 없다고 재치 있게 답한다. 역사의 무게를 던 가벼움은 관객에게 오히려 역사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대구미술관 기자회견장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가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쇼니바레는 직접적인 답을 피했다. 자신이 어떻게 팀을 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지 기술적인 문제만 간단히 언급했다. 하지만 수년전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그는 당당하게 본인의 모습을 닮은 목발 짚은 18세기 귀족의 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흑인이라는 제약과 몸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는 예술의 연금술을 통해 누구라도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일까. 현실을 넘어선 그 지점에서 예술이 시작된다는 믿음은 인간 쇼니바레의 신념이며 그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의 몸은 갈수록 약해지고 말의 속도마저 느려지고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해질수록 그의 작품 규모는 커져가고, 쾌활한 유머와 위트를 가미한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깊고 넓어진다. 그가 앞으로 마술과 연금술 같은 예술의 날개를 달고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할지 더욱 기대된다. ●

EXHIBITION FOCUS John Baldessari

존 발데사리 (7)

위 < Storyboard (In 4 Parts): Arm of Chair With Mans’ Hand Resting On His Knee >(왼쪽) 혼합재료 82.8×132.7cm 2013   아래 < Double Bill:…And Manet > (왼쪽) 혼합재료 152.4 ×152.4cm 2012

일상적 소재와 새로운 매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분방한 작업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방향을 상징하는 작가, 존 발데사리의 개인전이 6월 3일부터 7월 12일까지 PKM갤러리에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1996년 개인전이 열린 이후 처음 열리는 전시로 2008~2015년에 제작된 작품 15점을 선보인다. 80세가 넘은 현재, 팝아트와 개념미술 계보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경향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현대사회의 단편성들, 그 넌센스의 조합자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파편처럼 등장하는 일상적 장면들과 그 속에 숨은 현대사회의 민낯, 평이함에 가려진 모순들을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가 존 발데사리 개인전이 서울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모더니즘이 주도했던 1950년대, 미술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탈-모던, 반-모던의 해체적 관점과 대중문화의 급부상을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수용했다. 팝아트의 일상적 소재와 매체의 다양화에 영향 받은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가볍고 자유분방한 취향을 바탕으로 텍스트, 영화 스틸, 사진과 인쇄기법, 동영상, 퍼포먼스, 입체, 설치와 디자인 등 폭넓은 소재의 활용과 작품 제작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없는 부조화의 기호들을 병치하고 분명한 주제의 전달을 방해하는 분절적 방식을 채택하면서 현대 도시와 개인의 삶을 반영하는 작가로 평가되었다. 이런 그의 미술은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와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개념미술의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미술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마르셀 뒤샹이후 언어기호의 사용과 그 구조분석에서 오는 기묘함-탈이성이나 범이성이라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신뢰와 수용에 대한 거부와 확대-을 이용하거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예술, 메타-아트는 꾸준히 탐색되고 시도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은 일상과 미술의 관계, 미술과 하위미술(광고, 디자인, 상업적 이미지 등)의 관계, 매체의 전형성과 제작 방식의 회의로 이어지면서 재료와 내용, 작품의 존재 등에 변화를 가져왔다. 개념미술의 또 한 경향은 이미지의 차용인데, 특히 영화나 기타 대중매체에서 생산된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것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낯익은, 익숙한 이미지의 분절적 상황은 이성적이고 일관된 이해를 좌절시킴으로써, 분명하게 도출되지 않는 기의를 더듬어내는 과정에서 관객들의 다양한 경험을 자극하고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다. 동시에 로고스로 대표되던 합리적 인식과 기호의 투명성에 대한 반발을 가져왔고, 이것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자 현실문화의 한계로 이해되었다.

개념미술의 반미학적 반관습적 시각
이런 경향을 선도했던 미국 서부 개념미술의 대표적 작가 존 발데사리는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계보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시각적 요소보다는 문자, 언어를 주로 사용한 회화작품인 글자 작업을 시도했다. 자신의 필치가 작가의 흔적이자 특징이 될 수 있기에 이를 거부하고, 글자를 쓰는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문자를 제작하게 했다. 또는 보편적 언어의 패턴, 공적 글씨 스타일을 빌려오고 장식 없는 글자체를 사용하는 등 작가의 주관성, 창조자로서의 신화를 해체하려고 노력했다.
1970년에는 자신의 대학시절 작품인 1953년부터 1966년에 제작된 회화를 모두 불태우는 〈화장〉프로젝트를 시도, 다 타고 남은 재를 모아 과자로 구워내고 유골함에 넣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작품도 종결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으로, 작품의 영원성, 가치의 불변성 등을 거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작품들은 주로 영화의 스틸컷을 비롯, 사진이미지와 문자(텍스트)를 결합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wrong〉연작에선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여러 장면과 글자를 함께 보여준다. 일상의 비틀기는 헛웃음이 나오는 유머를 느끼게도 하지만, 어떤 메시지도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그는 시각적으로 화려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미술과 장인정신의 고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발데사리는 개념미술의 반미학적 반관습적 시각을 강하게 지지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얼굴이나 이미지를 둥근 원으로 가리고, 서로 일치하지 않는 장면과 전혀 문맥을 파악하기 힘든 문서의 일부(주로 기술적 설명서에서 자주 차용)를 화면 안에 병치하는 방식도 기호의 전달에 스며든 각각의 채널과 상호간 소통의 장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 발데사리는 대중적 매체, 예술의 표현들에 숨어있는 어법의 전형화를 꼬집고, 이를 통해 무언가 공감을 창조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거부하길 원하는 듯하다. 이런 그의 작업은 신디 셔먼, 로버트 롱고, 바바라 크루거, 리처드 프린스 등에게 영향을 주고, 1980년대 이후 미국 미술의 중요한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오랜 기간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발데사리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무심함, 심각하지 않은 태도, 그리고 미학적 기술 없음이다. 물론 최근에는 작업방식이 훨씬 깔끔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아졌지만, 작가의 의도는 굳이 그것에 큰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미국 동부, 즉 뉴욕을 중심으로 한 개념미술은 언어와 그 구조 속에 깃든 인식의 편재함, 관습적 사고와 미술제작의 전통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매체의 서열과 이데올로기, 자본력에 저항했다.
이와 달리 서부 개념미술 작가들은 특별한 사조에 공통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서부 작가들은 모더니즘적 전통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또한 미술사적 관습에 대항하는 방식에서도 조금 자유로웠다. 그들은 감성을 강조하거나 작가마다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이질적 상황이나 내용을 연결시켰다. 발데사리는 그런 점에서 서부 개념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생산한 다양한 대중적 이미지를 적극 사용하고, 그것에서 어떤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맥락과 부분의 관계에서 보이는 애매성, 소위 메시지의 본질과 매체의 속성에 대한 질문, 그로부터 파생된 단편성과 유머, 재미 등을 추구했다. 언제나 영화, 문학, 기술 등 일상적 소재를 적극 수용하고 쉽고 단순한 이미지를 생산하지만, 동부의 남성성이 이끄는 거대하거나 치밀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 작가는 그의 특징적인 작품들을 보여준다. 〈Double Bill〉에선 미술사 거장들의 회화와 현대 이미지를 결합시켜서 이미지를 모호하게도, 동시에 대가들의 특징을 부각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했다. 〈Pictures & Scripts〉는 영화의 한 장면과 상관없는 텍스트의 결합을 시도했는데, 발데사리의 대표적 구성법이다. 이질적이고 상이한 방향과 해석을 지향하는 기호의 충돌은 결국 어떤 의미로도 수렴될 수 없는 딜레마를 제공한다. 〈Board play〉 연작은 한 작품을 구성하는 주된 색채를 도출하고, 그것과 관련되기도, 관련 없기도 한 다른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일종의 스토리보드 형식을 가져왔다. 영화나 광고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작가는 통일을 위한 과정이지만, 파편화되고 분절된 실체를 갖는 이상한 조합을 보여주었다. 전시에서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여러 매체, 다양한 레퍼런스들, 복합적 차용의 역사가 느껴졌다. 이런 긴 작품 활동을 이어오면서 그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기호들의 모호함, 언어, 시각적 이미지들과 그것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위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비판한다고는 할 수 없다. 불일치를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통해 시각예술의 범주를 확장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발데사리 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단편화된 기호들과 파편화된 문장들을 표현함으로써,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뿐 아니라, 단절과 몰이해, 소통의 부재와 표피적 관계의 일상성을 가리킴으로써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침투한다. 도시의 일상, 시각기호로 가득 찬 공간의 모습이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간들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도 공감을 불러온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보듯, 그는 화면을 그리드처럼 나누고 부분과 관계의 독립된, 또는 모호한 관계를 강조한다. 병치와 화면분할이란 형식과,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는 관계라는 주제는 서로를 보완하고 더욱 굳게 한다. 작품의 어법과 메시지의 불변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소통의 대상이 발견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개인전이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한 점차 장식적으로 변해가는 화면도 거장이기보다는 노장으로서 발데사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운 빠지는 대목이었다.●

WORLD REPORT| NEW YORK

새 휘트니 미술관은 최근 뉴욕의 명소로 급부상한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이라인 파크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고 미술관 입장객들에게 뉴욕시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미술관 뒤쪽은 계단식으로 디자인되었다.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America Is Hard to See

1930년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설립한 휘트니뮤지엄이 50여 년 만에 이사를 감행했다. 새 보금자리는 로어 맨해튼 웨스트빌리지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갠스부어트가(街). 뉴욕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천문학적인 건축비를 들여 렌조 피아노가 설계하고 완공한 휘트니뮤지엄은 개관전 <America Is Hard to See>(5.1~9.27)을 시작으로 관람객을 새집에 맞이했다. 허드슨강을 바라보며 우뚝 선 뉴욕 미술의 자존심 휘트니뮤지엄의 집들이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허드슨 강변에 세워진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

서상숙 미술사

2008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이며 미술관 건축의 노장, 렌조 피아노(77)가 설계한 새 건물의 디자인을 발표하고 2011년 5월 기공식을 함으로써 큰 기대를 모은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 휘트니 미술관이 완공되어 지난 5월 1일 개관했다. 새 주소는 99 Gansevoort St. New York City, NY 10014. 맨해튼 서남단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전망 좋은, 422억 달러짜리 9층 빌딩이다.
개관전은 <America Is Hard to See>(5.1~9.27)로 휘트니의 컬렉션에서 고른 작가 400여 명의 작품 600여 점이 전시된다. 그중 25%가 처음 수장고를 벗어난 작품들이다. 1900년 이후 현재까지 유일하게 미국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수집해온 휘트니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미국현대미술사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인 미트패킹 디스트릭의 갠스부어트가(街)에 위치한 새 휘트니는 폐쇄된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만들어 2009년에 개방한 후 (현재도 구간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60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는 등 뉴욕의 명소로 각광받는 하이라인 파크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또 지리적으로 뉴욕의 가장 큰 화랑가인 첼시와 맞닿아 있고 뉴뮤지엄과 그 주변에 형성된 새로운 화랑가 로어 이스트 사이드(LES)와 더불어 뉴욕 현대미술의 중심지를 다운타운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관 며칠 전 휘트니가 기자들을 초대해 49년 만에 옮기는 집들이(프레스 프리뷰)를 하던 날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이 흥분과 기쁨이 넘쳤다. 하루종일 미술관 직원들과 렌조 피아노 건축사무실과 시공사 직원들이 그룹으로 나뉘어 미술관 구석구석을 소개했는데 “이 보존연구실은 미술관이 처음으로 갖게 된 것” “극장을 처음으로 갖게 되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제 테라스가 생겼으니 야외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등등 ‘처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앙증맞은 모양에 맛도 일품인 미니 피자와 컵케이크도 무한정으로 제공되었다. 집들이에 음식이 빠질 수 없는 건 세계 정상의 미술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49년 전 2000여 점이던 소장품이 현재 2만2000여 점으로 늘었고 21세기에 들어 현대미술 장르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1966년 지어진 업타운 메디슨 애비뉴 건물의 한계성을 절감한 휘트니가 이전을 결정하고 8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휘트니와 57억 달러를 쾌척한 뉴욕시의 야심적인 프로젝트였다.
2001년 다운타운인 월스트리트의 쌍둥이 빌딩을 테러리스트에게 잃은 뉴욕시는 2007년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뉴뮤지엄을 유치하고 이어 휘트니 미술관까지 이전하도록 도움으로써 다운타운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두 미술관의 다운타운 이전/개관은 단순히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부서진 집을 새로 지어주고 불타버린 옷을 새로 사 입히듯, 상처받은 다운타운의 뉴요커, 나아가 전 뉴요커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희망을 주는 프로젝트여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whitney panoramicview

새 휘트니 미술관은 허드슨 강변에 세워져 멋진 전망을 자랑한다. 동시에 태풍, 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비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photograph by 서상숙)

미술관 기능을 우선시 한 설계
뉴뮤지엄이 개관하면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는 갤러리가 모여 들어 새로운 화랑가로 각광받고 있을뿐만 아니라 음식점, 호텔, 패션스토어가 잇달아 문을 열어 마약중독자와 홈리스들의 거리에서 개성있는 예술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휘트니가 위치한 미트패킹 디스트릭은 본디 정육점과 정육기구들을 팔고 포장하는 공장이 있던 곳이다. 1960년대 게이 나이트클럽이 처음으로 이곳에 문을 연 이후 현재까지 입장하기가 까다로운 나이트클럽이 많은 지역이며 1990년대 후반부터 알렉산더 매퀸, 스텔라 매카트니,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등 고가의 패션스토어가 문을 염으로써 패션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휘트니 미술관은 10여 년 전 미술관이 소유한 인접 빌딩들을 연결해 기존 미술관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단계에서 구조적인 문제에 부닥치면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지난 2009년 뉴욕시가 소유하던 현재의 부지를 매입함으로써 이전이 확장되었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미술관 설립자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트 밴더빌트 휘트니 여사(1875~1942)가 1918년 휘트니 미술관의 전신인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연 곳이자 1930년 미술관을 연 그리니치 빌리지도 있어 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한다.
새 휘트니 미술관은 무엇보다 미술관 기능을 우선순위에 놓고 지어졌으며 ‘소통’과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구조를 띤다. 완공 전 빌딩 외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한 사람들조차 개관 후 일제히 찬사를 보내고 있다.
《아키텍스 뉴스페이퍼》의 앨런 브레이크는 “전시실의 알맞은 조명, 신중하게 계산된 도시와 강의 전망, 묵상의 순간들을 제공하는 휘트니는 뉴욕에서 가장 만족할 만한 미술관 환경을 갖춘 곳”이라고 극찬했다. ‘모양보다 기능’에 충실한 렌조 피아노의 디자인은 그가 설계한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2003년 이후 휘트니의 미술관장으로서 이번 이전개관을 총괄해온 애덤 와인버그는 “퐁피두 미술관처럼 전시공간과 더불어 사람들이 모여 미술을 매개로 소통하는 광장의 개념으로 새 휘트니를 짓고 싶었다. 그것이 렌조 피아노를 설계자로 선택한 이유”라면서 “메디슨 애비뉴의 브루어 빌딩에서 아쉬웠던 점이었는데 이번 새 건물은 1층을 입장료 없이 누구나 들어와 즐길 수 있도록 개방했다”고 밝혔다. 34가에서 시작돼 2.33km에 이르는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에 있어 뉴욕시의 명소와 만나는 광장의 개념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새 휘트니 미술관은 총면적 20,500m2의 9층 건물로 전시공간은 4600m2다. 구건물에 비해 전시공간이 50% 이상 늘었다. 바닥은 재활용 소나무를 깔았으며 최대한 자연광이 비치도록 설계되었다. 기둥을 없애 공간을 자유롭게 구획할 수 있다. 특히 5층은 기둥이 없는 뉴욕의 미술관 중 가장 큰 전시실을 자랑한다. 비디오와 영화 상영, 퍼포먼스 등을 할 수 있는 최대 204석의 작은 극장도 옛건물에 없던 것. 이 극장은 야외 테라스로 연결된다. 보존수복센터와 교육센터 역시 새로운 공간이다.
허드슨 강변의 입지를 살려 전시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면서도 강이 보이는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통창을 설치하고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소파를 놓았다. 그리고 4개의 야외 테라스를 설치해 허드슨 강과 뉴욕의 스카이라인, 하이라인 파크로 이어지는 전망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야외 테라스로 이어지는 8층의 카페는 그 전망만으로도 들러볼 만하다. 특히 하이라인 파크 쪽의 일조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미술관의 조망권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계단식 테라스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씀이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휘트니는 강 옆에 위치함으로써 홍수와 태풍의 위험을 간과할 수 없다. 이를 고려해 건축자재를 선택하고 설계에도 반영했다. 특별히 3층 이하에는 전시실이나 작품 수장고를 만들지 않았다. 1층에는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소품들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남쪽과 동쪽에는 홍수 때 침수를 막을 이동식 벽이 설치되어 있으며 하수구도 대량의 물이 한꺼번에 빠져 나갈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고 한다. 연료 탱크, 물을 빼내는 펌프와 더불어 비상시에 전력을 가동하는 시설도 갖추었다. 미술관 북쪽에 뉴욕시 소유 공터가 있어 필요하다면 확장할 수 있다는 것도 휘트니의 새 건물이 지닌 장점이다.
이전 개관 후 휘트니는 부관장 겸 수석큐레이터로 38살의 스캇 로스코프(Scott Rothkopf)를 임명하고 2004년 이후 부관장 겸 수석큐레이터를 맡아온 다나 드 살보(Dana De Salvo)를 국제협력관계 담당 부관장으로 발령해 안팎으로 휘트니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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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리스의 조각이 놓인 7층의 아웃도어 갤러리. 야외전시장인 구 휘트니에 없던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관람객들에게 뉴욕의 전망을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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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크루거, 도널드 마펫, 프레드 윌슨, 데이비드 해몬스 등 1980년대의 정치사회적 기류를 상징하는 작품.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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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전엔 휘트니 소장품 중 1900년 이후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600여 점이 전시된다. 백남준, 제프 쿤스, 찰스 레이등의 작품이 보인다.(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WORLD REPORT| MILANO & VENICE

프라다파운데이션 기획전 시리얼 클래식

렘 쿨하스가 설계한 포디움에서 개막된 그리스 로마시대 고전조각을 독창성과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 전시다. (사진 이영란)

Fondazione Prada
Serial Classic | Portable Classic | An introduction | In Part

세계적인 명품브랜드들이 속속 미술관을 세우는 가운데 밀라노에 프라다재단이 세운 폰다지오네 프라다가 5월 9일 정식 개관했다. 900여 명의 미술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화려한 개막식을 가진 이 미술관은 총 9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중 3개 전시장을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가 맡아 설계했다.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컬렉션을 자랑하며 이탈리아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폰다지오네 프라다를 방문했다.

전복적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의 예술실험, 날개를 달다

이영란 전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그날 오후 미우치아 프라다(66)는 ‘Bar Luce’(바 루체)에 있었다. 베니스에서는 비엔날레가, 밀라노에서는 엑스포가 막 개막한 시점이었다. ‘Bar Luce’(Luce는 ‘빛’이라는 뜻)는 밀라노 남쪽에 새롭게 조성된 ‘Fondazione Prada’(폰다지오네 프라다) 내에 위치한 아담한 카페다.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프라다(PRADA)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예술애호가인 미우치아는 폰다지오네의 공식 개관(5월 9일)을 하루 앞두고, 모두 9개에 달하는 공간(건물)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카페를 점검 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하며 “당신의 오랜 꿈이 결실을 보았다. 감회가 어떠냐”고 묻자 미우치아는 “아, 내일부터 관람객을 맞는다. 이 시대 예술의 의미에 대해 늘 질문해왔는데 여기(Fondazione)에서 사람들과 함께 그 답을 찾고 싶다”고 했다. 미우치아는 미국의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47.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연출)에게 카페 인테리어를 맡겼다. 이에 앤더슨은 1950, 60년대 이탈리아 영화풍으로 실내를 고졸하게 꾸몄다. 천장과 벽은 밀라노 도심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 ‘갤러리아 빅토리오 엠마누엘레’(아케이드)가 프린트된 월페이퍼로 장식했다.
명품업계에서 ‘별종의 패트론’으로 꼽히던 미우치아는 보다 체계적인 예술공헌을 위해 1993년, 남편(파트리지오 베르텔리 회장)과 함께 프라다재단을 만들었다. 또 밀라노시 남쪽 라르고 이사르코(Largo Isarco) 지역의 낡은 증류주공장도 사들였다. 언젠가는 ‘아트’가 살아 꿈틀대는 흥미로운 사이트로 바꿔놓겠다는 꿈을 갖고서 말이다.
그러곤 마침내 1만9000m2 규모의 미술관 콤플렉스를 조성했다. 우리로 치면 구로공단 같은 곳에, 대단히 혁신적인 아트전진기지를 만든 것이다. 뻔한 것, 제도권의 것을 거부하고 언제나 ‘도전과 전복’을 추구해온 프라다 부부의 예술실험은 국제 미술계의 이슈가 되곤 했는데 이번에 그 실체가 만천하에 공개된 셈이다. 도대체 이 범상찮은 커플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들의 컬렉션엔 어떤 작품이 포진해있을까 궁금했던 미술계로선 메가톤급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카타르왕국의 알 마야사 공주, 악동작가 데미언 허스트와 마우리치오 채틀란, 제프 쿤스,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 오쿠이 엔위저, 다사 주코바, 카를라 소차니 등 900여 명의 유명인사가 이사르코로 몰려들었다.
1910년대에 지어진 옛 술공장의 사무실과 실험실, 창고, 술탱크 등 7채 건물의 리노베이션과 3채 건물의 신축은 미우치아의 오랜 파트너인 렘 쿨하스(71. OMA 대표)가 맡았다. 쿨하스와 OMA는 용도폐기된 건물의 내외관을 되도록 원형 그대로 살려 전시실과 어린이도서관 등을 만들었다. 또 본격적인 현대미술 기획전시를 위해 앞마당에 ‘포디움’과 ‘극장’을 새로 추가했다(층마다 층고가 달라지는 거대한 ‘탑(Torre)’은 공사 중). 따라서 프라다의 예술캠퍼스는 연대가 다르고, 높낮이와 형태가 다른 건물들이 미묘하게 어우러지며 색다른 화음을 선사한다. 모두 6개 섹션으로 이뤄진 전시 또한 마찬가지다.
장관을 이루는 것은 포디움(podium)이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초현대식 유리건물인 포디움 1,2층에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조각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주됐는지를 ‘독창성과 모방’이라는 상반된 맥락에서 살펴본 〈Serial Classic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베니스에서 개막된 〈Portable Classic전〉과 짝을 이룬다.
살바토레 세티가 큐레이팅한 이들 전시는 고전조각은 물론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조각과 현대의 재현작, 미니어처가 총망라돼 서양미술의 뿌리인 ‘클래식’과 이를 차용한 예술 간의 연결점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위대한 걸작과 유실된 원본, 그에 기반을 둔 무수한 복제본 및 재현작을 다각도로 훑었는데 특히 그리스조각 ‘원반 던지는 사람’과 로마시대의 ‘웅크린 비너스’, 아폴로 및 헤라클레스 상은 다양한 시리즈가 나와 눈길을 끈다. 카피본 제작시 적용되는 법칙(캐논)과 기술도 공개돼 흥미롭다. 양 전시에 나온 조각만 150점이 넘는다.
옛 술공장의 작업실을 개조한 남쪽(sud)갤러리와 너른 창고갤러리에서는 프라다의 ‘지난 25년 컬렉션’을 집대성해 보여주는 〈An Introduction전〉이 막을 올렸다. 프라다의 컬렉션은 1970년대 예술영역에서 시작해, 뉴다다이즘을 거쳐 미니멀아트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그중 이번에 공개된 70여 점의 회화와 설치작품은 미우치아 컬렉션의 방향성을 감지케 한다. 이브 클라인, 피에르 만조니, 도널드 저드, 바넷 뉴먼, 에드워드 케인홀즈,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이 나왔다. 특히 마지막 전시실의 자동차 설치작업은 가히 압도적이다. 우아한 롤스로이스를 검댕이로 만든 뒤 새 깃털을 흩뿌려놓은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작업과 월터 드 마리아, 사라 루카스의 자동차 작업은 대단히 전복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북쪽(nord)갤러리의 〈In Part전〉은 전체와 부분 간 함수관계를 성찰한 전시다. 타이틀은 루치오 폰타나와 피노 파스칼리의 조각난 바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명명됐다. 만 레이, 프란시스 피카비아,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존 웨슬리, 데이비드 호크니 등의 회화, 사진, 설치, 비디오작업을 만날 수 있다.

밀라노프라다 (1)

과거 거대한 증류주 탱크가 있었던 공간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수조작품 < Lost Love > (2000)이 자리잡았다. (사진 이영란)

프라다재단 미술관 루이스 부르즈아 4875

한쌍의 남녀를 한 몸에 결합시킨 루이즈 부르주아의 조각 < herself-and single >. (사진 이영란)

더없이 매혹적인 동시에 유용하다
프라다의 새 캠퍼스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은 ‘Haunted House(유령의 집)’이다. 옛 건물 전체에 순금(gold leaf)을 입혀 유난히 도드라지기도 하지만(쿨하스는 ‘의외로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4채 건물이 하나로 조합된 갤러리에는 놀라운 통찰력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들어찼다. ‘유령의 집’이라는 이름도 미우치아가 지었고, 로버트 고버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선별해 영구 설치한 것도 그녀다. 인간의 몸과 공공질서, 섹슈얼리티, 종교와 개인을 다룬 ‘똑 떨어지는 작품들’은 관람객의 의표를 여지없이 찌른다.
그러나 대중이 가장 환호하는 공간은 3개의 장엄한 갤러리로 이뤄진 ‘Cisterna’이다. 100년 전 증류주 탱크가 있던 공간에는 에바 헤세, 피노 파스칼리, 데미언 허스트의 정방형 작품(큐브)들이 자리를 잡았다. 전시타이틀은 3부작을 의미하는 ‘Trittico’. ‘부드러운 조각’의 작가 에베 헤세의 <케이스2>, 파스칼리의 매력적인 1960년대 설치작품 <1입방미터의 흙>, 대형수조 속에 산부인과 수술대와 진료탁자(수술용 메스에 진주목걸이와 금반지가 놓여있다)를 설치하고 수백 마리의 열대어를 풀어넣은 데미언 허스트의 <Lost Love>를 감상할 수 있다. 인간존재와 그를 둘러싼 조건을 탐색한, 서늘한 작업이다. 극장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에게 영감을 준 이미지들을 찾아나선 필름이 상영되고 있고, 지하 공간에는 토마스 데만트의 묵직한 설치작업이 자리를 잡았다.
프라다의 아트캠퍼스는 근래들어 명품 패션하우스들이 너나없이 예술공간을 오픈하고 있어 별반 새롭지 않을 수 있다. ‘이미지 제고를 위한 흔한 전략’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폰다지오네 프라다는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우선 장소다. 라르고 이사르코는 도처에 후기산업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후미진 지역이다. 프라다 폰다지오네도 겉으로 봐선 다른 공장들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담벼락에 현재의 기획전을 알리는 스크롤 전광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아트월드’가 펼쳐진다.
다음으론 재단과 기업 간 철저한 선긋기가 차이점이다. 프라다재단은 출범 초부터 ‘브랜드(비즈니스)와 아트는 완전히 별개’임을 강조해왔다. 미우치아는 아트에 비즈니스가 얽히는 걸 무척 싫어했다. 루이비통이 ‘예술과의 협업’을 통해 큰 실익을 거뒀고, 샤넬 또한 자하 하디드와 함께 세계를 순회하는 ‘모바일 아트프로젝트’를 펼치면서 각국의 미술가들에게 샤넬의 2.55핸드백을 작품화해줄 것을 요구한 데 반해 미우치아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선을 긋는다. 새로 조성된 밀라노 폰다지오네는 물론이고, 베니스 전시장 어디에서도 프라다 로고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예술 자체로 존재해야지, ‘프라다를 위한 예술’은 그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단 설립 이래 미우치아는 뜻 맞는 예술동지들과 똘똘 뭉쳐 내밀하게 활동해왔다. 제르마노 첼란트(큐레이터)와 렘 쿨하스(건축)가 그들로, 이들 삼각편대는 ‘컬트집단’이라 불릴 정도로 기이한 프로젝트들을 터뜨려왔다. 프라다는 1990년대 초부터 아니시 카푸어, 루이스 부르주아, 샘 테일러-우드, 월터 드 마리아, 마크 퀸의 작품전을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 열었다. 또 댄 플래빈의 밀라노 성당 프로젝트, 엘름그린&드라그셋의 텍사스 마파사막에서의 프로젝트도 시행했다. 게다가 무모하다 싶으리만큼 혁신적이었던, 서울 경희궁에서의 움직이는 건축프로젝트(프라다 트랜스포머)도 진행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좌파와 럭셔리’를 오갔던 미우치아의 이율배반적이고도 불가해한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하랄트 제만의 기념비적인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1969년 베른)를 오늘로 불러내, 재해석해낸 베니스 프로젝트(2013)는 “비엔날레 본전시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어쨌거나 문화예술이 ‘더없이 매혹적인 동시에 유용하며, 세계와 삶을 또다른 각도로 성찰하게 한다’고 믿는 미우치아에게 폰다지오네 프라다는 지금껏 해온 실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전위와 혁신을 지향해온 그녀의 도전을 이제는 우리가 즐길 차례다.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입장료도 그닥 비싸지 않다.  10유로다. ●

포터블클래식

프라다재단의 베니스 전시관에서 오는 9월13일까지 열리는 < Portable Classic전 > 밀라노의 < Serial Classic전 >과 짝을 이룬다. (사진 이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