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사용, 미술비평의 문제
여전히 글로벌 큐레이터를 자처하는 이들이 국제미술계 (international art scene)라는 실체는 모호하지만 경쟁 면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미술 장(場)을 가로질러 다니고 있다. 또 여전히 세계 곳곳에 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전시(말 그대로 ‘펼쳐 보이기’) 이벤트가 만연한 상황이다. 하지만 체감컨대 2000년대 초반을 ‘큐레이터의 황금시대’로 변조한 전시기획 열풍은 한풀 꺾였고, 아트 비즈니스 광풍이 ‘미다스의 손’처럼 모든 것을 도금할 기세로 미술 구석구석까지 덮쳐들고 있다. 그러는 사이 파악하기 쉽지는 않지만, 우리 곁에서 솔솔 다른 국면이 조성되는 분위기다. 바로 한국 미술계에 덧씌워진 ‘비평의 위기’라는 지겹고 둔한 수사학을 뚫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미술비평’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과 육성책이 새 빛의 파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하나금융그룹과 맺은 업무협약(MOU)에 따라 ‘세마(SeMA)-하나 평론상’을 제정해 공모에 들어갔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예술경영지원센터를 통해 미술비평 활성화 사업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안다. 개인이기는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기성세대 비평가로서 다음 세대 작가 및 비평가와 함께 하고자 ‘2015 비평 페스티벌’을 기획해 6월 중순 실행시켰다. 이 사례들은 형식과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지금 여기 미술 장에서 비평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것의 독자적 역량과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미술패러다임의 시그널일 수 있다.
동시에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보면, 여기 미술계에서 비평의 모색은 현실사회의 문제적 징후들과 결부시켜 생각할 만한 테제로 부상한다. 비유하자면,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피부가 벗겨진 채 서로 살을 부비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사회생활에서 겪는 고통이 커지고, 그 민감도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분노조절장애’ 같은 말들이 횡행하고, 실제로 지극히 평범(하다고)한 사람이 분노조절에 실패해 이유 없고 무차별적인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다. 반대 현상도 있다.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마구 쓰는 존댓말,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공허한 직위들, 시도 때도 없고 의미도 없이 내뱉는 과잉 언사가 넘쳐나는데, 그 비약적인 말들은 결국 우리의 삶이 얼마나 혹독하고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한지 보여준다. 그만큼 우리가 날것의 세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는 뜻이며, 그만큼 세상에 대한 큰 공포로 소극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난 시기 정체되고 외면 받았던 비평이 최근 관심사로 부상한 맥락을 이와 결부시켜 생각해본다. 요컨대 핏빛 살벌한 날것의 세상과 피부가 벗겨진 우리 사이에 ‘말’이라는 거즈, 중간재, 매체가 다시금 관건이 되었다고 말이다. 그 말을 어떤 시각, 판단, 해석, 서술, 의미화, 발화의 테크네(Techne) — 이것이 단순한 비난이나 비판과는 전혀 다른 비평의 몫인데– 를 따라 사용해야 세계가, 우리 자신이, 사물이, 예술이, 현상이 온전하고 온건하게 상대와 맞닿고 이해받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사실 현실에서 말의 힘은 약만이 아니라 독(毒)을 내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한때 청년세대담론의 젊은 기수라 불린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청년논객 한윤형의 잉여탐구생활》에 넋 놓고 감정이입하는 순간, 당신은 논객도 독자도 뭣도 아닌 그냥 ‘잉여’다. 또 예컨대 당신이 세간에 유행어로 떠돌고, 정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규정한 청년세대의 “삼포(연애・결혼・출산 포기)” 현상을 ‘내 얘기’라고 동조하는 순간, 당신은 그냥 삼포를 내면화한 세대원 중 하나에 불과해질 위험이 있다. 애초 그 말들은 비판의 생산성, 판단의 시의성, 변화의 잠재성을 내적 힘으로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이 특정 발화자/주체의 이름 아래서 사회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해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익명은 부지불식간에 잉여의 기만적 위안에 젖어 퇴행해간다. 과거에는 목에 걸린 떡처럼 갑갑하게 짓누르던 잉여적 삶이, TV 예능프로그램처럼 재미있는 미션이 주어지고 독특한 취향과 기질을 구사할 수 있는 생활 형태로 여겨지며 사람을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또 공동체의 지속, 사회 안전망, 보편적 복지에 관한 국가 책무와 공적체계의 기능을 두고 국민으로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놓친 채, 운명론으로까지 비약한 사회의 부정적 현상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동일시하게 된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것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아서이고, 내가 결혼과 출산을 꿈꿀 수 없는 것은 내 형편상 미래를 확신할 수 없어서라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그런 일들이 국가와 사회의 공적시스템이 책임지고 지켜낼 공공의 몫이 아니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운인 양 말이다. 그럴 때 말의 힘, 이를테면 비판의 자생력과 변화를 향한 인식의 활동성은 현실 순응적 기만으로, 집단적 자포자기의 마취로 전도되며 한껏 독을 피워 올린다. 그리고 그 독이 점진적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과 세상을 찌른다.
말이 무서운 것은 이런 점에서다. 즉 말은 현상을 설명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더 나은 세계 또는 온당한 삶의 구조 짓기와 실체 채우기를 위해 우리가 행동하도록 자극하고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말은 아주 간단히 우리를 염세주의 혹은 자기파괴 역장으로 밀어 넣는다. 또 쉽게 스스로를 현상 판단과 문제 제기의 주체 대신 연민의 대상이나 피동성의 자리로 몰아넣는다. 지금 여기 한국 미술계가 새삼 미술비평을 중요한 실천 영역으로 재인식하고, 그 영역을 새로운 기능과 방법론으로 충전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즉 이렇게 말의 힘이 약과 독이라는 양면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미술비평의 근본적 자리와 역할, 나아가 비평의 미래지향적 용도와 실천법을 모색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청년/젊은/신진미술가들이 기성미술세대의 예술적, 미학적 담론 및 사회 일반의 뒤섞인 담론으로부터 건강함은 취하고 독소는 제거하는 가장 탁월하고 유효한 방법으로 ‘비평’을 추천한다. 단지 미술 창작의 후위(rear-garde)로서 미술 이론적 글쓰기 혹은 개별 작품의 해석과 해설로서 미학적 언술을 넘어, 세대와 집단의 인식을 가늠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근간의 활동으로서 말이다. 직업으로서 비평가와 전문 영역으로서 비평에 한정하지 않고, 준거집단의 정신구조와 행동양식을 뒷받침하는 원천으로서 ‘말의 사용’을 연구하고 다양화하고 깊이 있게 하는 일 말이다.
그런데 미술비평을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에서 말의 차원과 범주로, 지각의 발화와 영향의 청취가 뒤얽혀 돌아가는 힘의 정치학이자 ‘말을 빼앗긴 익명’이 ‘판단력의 주체’가 되는 존재론적 모험임을 이해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각자의 목소리와 화법과 음색과 언어습관을 근거로 서로를 구분하고,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다. 그 구분 가능성과 특정성이 바로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고, 개인으로서 다른 무엇과도 나눌 수 없게 한다. 그럼 미술비평은 어떤가? 구어든 문어든 그것의 말은 각자의 개인성을 가지며, 서로 통약 불가능한 요소들로 나뉘는가? 우리는 그만큼 미술의 장에서 말을, 담화를, 언어를, 문체를 발전시켜왔는가? 어린 화가의 말, 늙은 큐레이터의 화법, 기성 비평가의 문체, 40대 미술이론교수의 논리, 신입 화랑 직원의 대사, 노회한 컬렉터의 이야기 등등으로 분화되고 다양화하는 말들의 세계가 있는가 말이다.
고백건대, ‘2015 비평 페스티벌’을 열기 전까지 내게는 한국 미술계 청년세대와 관련한 편견이 있었다. 나의 선배들이 자주 말했고, 그 와중에 내게도 자연스러워진 편견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티도 안 나는데 힘들기만 한 걸 못 참고,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 미술비평 같은 건 하려 하지 않는다. 다들 화려한 전시기획을 하고 싶어 하지’가 그것이다. 이 편견 때문에 젊은 미술세대에게는 비평 욕망이 별로 또는 거의 없으리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비평 페스티벌’의 와중에 알게 된 현실은 청년미술세대 중에 꽤 많은 이가 미술비평을 원하고, 실제로 실행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힘듦이 아니라 ‘해도 무의미해지는 것’이고, 그들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스타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비평을 업으로 삼아 밥 먹고사는 평범한 현실’이다. 이는 바우만(Z. Bauman)이 짚은 바, “사회적 추방”1을 공공연하게 상연하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TV 쇼 프로그램을 싫든 좋든 내면화한 동시대 젊은이들의 공통된 삶의 생리이자 욕망의 규모로 보인다. 즉 거의 모든 삶의 국면이 오디션 경쟁처럼 절박하고, 한 스테이지를 거칠 때마다 반드시 탈락자나 낙오자를 만들어내는 세상 메커니즘에 익숙해진 세대의 그것인 것이다. 누군가는 그로부터 무슨 힘 있고 독립적이며 창조적인 미술비평이 나오겠는가를 물을지 모른다. 또 무슨 주체적이고, 인식과 감각 지각의 차원에서 고도로 분할된 말의 사용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고 의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런 못미더움과 의구심은 접어둬도 좋겠다. 내가 접한 젊은 미술세대의 비평은 대체로 논리 구성과 분석력과 성실성 면에서 꽤나 학술적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그들의 언어 사용은 장르, 매체, 동서양, 비평대상 등에서 상당히 유연하고 열려 있었다. 그 학술적 면모와 오픈마인드, 그리고 지적 활동의 유연성은 단언컨대 그 세대가 처한 현실 환경이 그/녀에게 준 비평적 능력이고, 그/녀가 그 현실의 가두리에서 절박하게 조합해낸 말의 유형이다. 바흐친(M. Bakhtin)의 언어이론을 따라 말하자면, 지금 여기 젊은 미술세대의 비평 언어는 “인간 활동의 여러 영역에 관계하는 참여자들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구어적・문어적) 발화의 형식”2 중 하나로 기성 미술계에 진입하고 있다. 그 형식을 이룬 8할이 다소 씁쓸하게도 생존경쟁의 현실이고, 평범한 삶을 향한 작은 꿈이라도.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지그문트 바우만, 함규진 역,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p. 56.
2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ㆍ박종소 역, 《말의 미학》, 길, 2006, p. 349.
사진 미술평론가 강수미가 총괄기획한 <2015비평페스티벌>이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동덕아트갤러리, 아트선재센터 씨네코드 선재에서 열렸다. 첫째날 비평워크숍에 참여한 강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