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민재영 다시, 드로잉
1.3~15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이성휘 |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지난 1월초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민재영의 개인전은 그간 그의 필치로 각인되어 온 촘촘한 가로선을 배제하고 느슨한 드로잉과 벽화작업으로 색다른 시도를 보여준 전시였다. 민재영은 지난 십 몇 년 동안 도시의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들 중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들을 포착하여 화폭 위에 촘촘한 가로선을 빼곡히 채운 수묵채색화로 그려왔는데, 사루비아 전시에서는 기존의 촘촘하고 치밀한 붓질이 아닌 힘을 뺀 드로잉과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이 인상적인 벽화 작업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는 민재영이 사루비아다방의 SO.S(sarubia outreach & support)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진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루비아 다방은 2015년부터 작가들을 중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SO.S를 시작했고, 이중 민재영은 개인전 5회 이상의 경력을 가진 40~60세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사루비아는 SO.S를 통해서 작가의 창작의 조력자이자 작가 고유의 언어를 복원시켜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일회성의 전시를 치러내는 것보다는 창작의 결과물 이면에 감춰진 작가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다보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민재영의 말에 의하면 큐레이터들은 지난 1년 반 동안 작가들의 작업실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고민을 듣고 새로운 가능성을 같이 모색해왔다고 한다. 작가가 가진 스펙트럼이 더 넓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존에 작가가 확립한 방식을 답습하기보다는 외려 깨버리는 쪽으로 유도했으며, 그들의 설득이 작가로 하여금 드로잉에 대한 실험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에서 민재영은 수묵채색화가 아닌 드로잉에 매진했을까? 작가와 큐레이터는 변화 추구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이 생각났다. 호크니는 한때 수채화에 매진했는데, 회화에는 손, 눈, 마음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 회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받아서였다고 말했다. 호크니에게 이 세 가지가 고루 중요했던 것은 잘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것에서 한층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리라. 즉 회화는 시각적이면서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그동안 민재영이 그려온 작품들은 거의 사진을 소스로 한다. 그가 작업으로 다뤄온 소재가 현대인의 삶, 그 속의 피로감 같은 것인데, 이를 사진으로 먼저 촬영한 후 수묵채색화로 다시 옮기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자주 도시의 군중과 트래픽 잼에 가까운 도로 상황을 그리곤 했는데, 이러한 장면들을 선택한 것은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고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사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할 당시부터 전통적인 재료로 오히려 현대적 장면을 그리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동양화의 선묘가 일루전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가로선의 중첩을 시도했다고 했다. 동양화의 먹 자체에는 매료되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인상파 식의 명암 표현을 추구한 것이다. 특히 그의 가로선은 TV 모니터의 주사선이 중첩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RGB디지털 화면을 연상시킨다. 초창기부터 그가 사진을 활용한 점에서 그에게 사진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는 대상들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도구였고, 동양화를 통해서도 시각적 일루전을 추구하는 시도를 가능케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사진의 시선에 익숙하고, 사진이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으로 포착해내는 구도에도 익숙하다. 이러한 사진을 회화로 가져올 때, 인상파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까지 이미 수많은 시도를 보아온 우리들은 더 새로운 것을 기대하게 된다. 누군가는 회화가 아예 사진을 의식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근래 민재영은 회화에서 보편과 공감을 추구하던 것에서 개별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시작을 나는 이번 사루비아 전시 출품작 중 하나인 목탄 드로잉에서 발견한다. 물에서 부표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이 장면은 오랫동안 작가의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다. 이번 전시에는 이 작품 외에 모든 출품작이 사진을 소스로 한 드로잉이라는 점에서 저 부표에 손이 닿을 때까지 안간힘을 써야 하는 작가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감지된다. 작가는 사석에서 인생이 안 바뀌는데 그림이 어떻게 바뀌냐는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이미 스스로 무료함을 느껴 SO.S를 친 게 아닌가. 저 부표를 향해 헤엄쳐 나아가는 것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