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민재영 다시, 드로잉

1.3~15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이성휘 |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지난 1월초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민재영의 개인전은 그간 그의 필치로 각인되어 온 촘촘한 가로선을 배제하고 느슨한 드로잉과 벽화작업으로 색다른 시도를 보여준 전시였다. 민재영은 지난 십 몇 년 동안 도시의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들 중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들을 포착하여 화폭 위에 촘촘한 가로선을 빼곡히 채운 수묵채색화로 그려왔는데, 사루비아 전시에서는 기존의 촘촘하고 치밀한 붓질이 아닌 힘을 뺀 드로잉과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이 인상적인 벽화 작업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는 민재영이 사루비아다방의 SO.S(sarubia outreach & support)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진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루비아 다방은 2015년부터 작가들을 중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SO.S를 시작했고, 이중 민재영은 개인전 5회 이상의 경력을 가진 40~60세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사루비아는  SO.S를 통해서 작가의 창작의 조력자이자 작가 고유의 언어를 복원시켜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일회성의 전시를 치러내는 것보다는 창작의 결과물 이면에 감춰진 작가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다보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민재영의 말에 의하면 큐레이터들은 지난 1년 반 동안 작가들의 작업실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고민을 듣고 새로운 가능성을 같이 모색해왔다고 한다. 작가가 가진 스펙트럼이 더 넓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존에 작가가 확립한 방식을 답습하기보다는 외려 깨버리는 쪽으로 유도했으며, 그들의 설득이 작가로 하여금 드로잉에 대한 실험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에서 민재영은 수묵채색화가 아닌 드로잉에 매진했을까? 작가와 큐레이터는 변화 추구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이 생각났다. 호크니는 한때 수채화에 매진했는데, 회화에는 손, 눈, 마음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 회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받아서였다고 말했다. 호크니에게 이 세 가지가 고루 중요했던 것은 잘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것에서 한층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리라. 즉 회화는 시각적이면서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그동안 민재영이 그려온 작품들은 거의 사진을 소스로 한다. 그가 작업으로 다뤄온 소재가 현대인의 삶, 그 속의 피로감 같은 것인데, 이를 사진으로 먼저 촬영한 후 수묵채색화로 다시 옮기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자주 도시의 군중과 트래픽 잼에 가까운 도로 상황을 그리곤 했는데, 이러한 장면들을 선택한 것은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고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사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할 당시부터 전통적인 재료로 오히려 현대적 장면을 그리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동양화의 선묘가 일루전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가로선의 중첩을 시도했다고 했다. 동양화의 먹 자체에는 매료되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인상파 식의 명암 표현을 추구한 것이다. 특히 그의 가로선은 TV 모니터의 주사선이 중첩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RGB디지털 화면을 연상시킨다. 초창기부터 그가 사진을 활용한 점에서 그에게 사진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는 대상들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도구였고, 동양화를 통해서도 시각적 일루전을 추구하는 시도를 가능케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사진의 시선에 익숙하고, 사진이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으로 포착해내는 구도에도 익숙하다. 이러한 사진을 회화로 가져올 때, 인상파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까지 이미 수많은 시도를 보아온 우리들은 더 새로운 것을 기대하게 된다. 누군가는 회화가 아예 사진을 의식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근래 민재영은 회화에서 보편과 공감을 추구하던 것에서 개별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시작을 나는 이번 사루비아 전시 출품작 중 하나인 목탄 드로잉에서 발견한다. 물에서 부표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이 장면은 오랫동안 작가의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다. 이번 전시에는 이 작품 외에 모든 출품작이 사진을 소스로 한 드로잉이라는 점에서 저 부표에 손이 닿을 때까지 안간힘을 써야 하는 작가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감지된다. 작가는 사석에서 인생이 안 바뀌는데 그림이 어떻게 바뀌냐는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이미 스스로 무료함을 느껴 SO.S를 친 게 아닌가. 저 부표를 향해 헤엄쳐 나아가는 것을 응원한다.

CRITIC 직관의 풍경

2016.12.15~2017.1.22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
남선우 |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실재와 그에 대한 인식 사이의 낙차, 혹은 말과 말 사이의 미끄러짐 같은 오해 없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까?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에서 열린 전시 《직관의 풍경》은 실재를 직접 알아낼 방법이자 이를 시각적으로 경험케 할 방법으로 직관(intuition)을 제시했다. 그리고 작업에서 직관의 방법론을 뚜렷하게 보이는 예로 김웅현, 노상호, 박경근, 박광수, 안지산, 윤향로의 작업을 들었다. 그러나 “동시대 일군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직관적 사유에 대한 정리이자 시각적 시도”라는 전시의 기획 의도는 개별 작업과 전시 자체와는 별개로 크게 공감 가는 말은 아니었다.
우선 직관은 세계를 파악하는 직접적인 방식이지만,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이며, 직관이 일어나는 곳 내부에서만 성립하는 폐쇄적 구조를 갖는다. 직관으로 무언가를 명확히 인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개인이 직관으로 포착한 세계의 파편을 작업으로 구현하면 이를 또 다른 개인이 자기 직관으로 포착해야만 하는 대화의 방식은, 모두가 귀를 막고 말을 전달하다가 마지막 사람이 엉뚱한 대답을 하면 ‘아 우리가 이렇게나 대화가 안 됐구나!’를 확인하고 깔깔깔 웃고 끝나는 게임 같은 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이 전시가 작가들이 직관으로 헤아린 세계를 관객이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미끄러짐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직관적이지 않은 다른 소통에서 생기는 미끄러짐과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하다.
그보다 이 전시는 2016년 다양한 층위의 장소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장면들을 한 자리에 압축해 놓은 듯한, 또는 그 장면들과 모종의 연결을 가진 뒷이야기 같은 전시로 보였다. 작년 초 애니메이션 〈심슨〉을 프레임 단위로 분리해 인물을 삭제하고 다시 겹친 다음 일민미술관 2층 벽면에 아주 납작하게 박았던 윤향로는, 이번 전시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여자 주인공들이 변신하는 장면에서 화면 가득 내뿜는 에너지를 스크린샷으로 포착하고 추상화처럼 가공했다. 그 결과물은 표면 뒤에서 빛을 발하며 매끄럽고 얇게 떠 있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화면 하나와 너무도 촉각적인 카펫 같은 표면 하나로 구현되어 나란히 놓였다.
정주영 방북, 대전엑스포, 금 모으기 운동 등 1990년대의 특징적 사건들을 토대로 만든 가짜 이야기에, 한때 사진이 그랬던 것처럼 진실의 증거로 쓰이곤 하는 영상 푸티지를 섞었던 김웅현은 그간 빈 창고(웨스트웨어하우스), 점포가 빠져나간 건물(아시바 비전) 등 주로 서울 유휴공간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헬보바인과 포니〉의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 가을 작가가 산파로 분한 퍼포먼스에서 태어난 분홍색 포니들이 기다란 비닐 풍선을 타고 떠 있는 〈Pong Pong Pong〉을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산고가 끝나 전보다 가뿐히 매달린 듯한 엄마 포니와 비스듬한 스크린에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작년에 박광수는 신한갤러리에서 들썩이는 리듬에 맞추어 커다란 화면 가득 들어찬 선들이 움직이는 영상을, 금호미술관에서는 빼곡한 검은 선으로 치밀하게 완성한 어두운 숲의 이미지를 다양한 크기의 여러 작업으로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어두운 숲의 모습보다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쪼개진 뒷모습이 더 인상적으로 보이는 두 작업과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숲 안쪽을 들여다보게 되는 한 작업 〈Deep Sleep Deep〉을 새로 선보였다.
노상호는 웨스트웨어하우스 개인전에서 주목받았던 특징들을 압축하고 변형해서 보여주었다. 즉, 의류 매장을 연상시키는 촘촘한 디스플레이 방식과 프레임 없이 공중에 매단 대형 캔버스, 작업의 디테일을 확대한 간판과 인쇄물 등을 축소판으로 제시하되, 갤러리 공간에 맞게 세팅을 정제하고 보는 이의 시선을 달리 의도했다. 예를 들어 지난 전시에서 좁은 간격으로 켜켜이 걸어 그사이를 탐험하듯 다니게 했던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 시리즈는 육각의 폐쇄된 구조 안에서 제자리를 한 바퀴 돌며 조망할 수 있었다.
작년 북서울 시립미술관에서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았던 박경근의 작업 〈1.6초〉는 이번에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 보는 두 화면에 투사되었다. 한쪽 화면은 몸통과 가지가 모두 돌아가는 놀이기구 같은 시점으로 생산라인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다른 쪽 화면은 설비 구조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양쪽의 시점은 서로 바뀌기도 하며, 관습적인 방향으로 회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역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규칙적인 속도로 생동감 있게 돌아가는 주황, 노랑, 초록색 설비와, 회색 작업복을 입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대비가 가까이 마주한 두 화면에서 더 두드러졌다.
합정지구 밖으로 난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안지산의 작업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아 아슬아슬한 순간을 주로 포착하고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이후 장면을 보는 듯하다. 〈The Sea of Pink Ice〉의 바닥에는 건물 어디선가 뜯어낸 아이소핑크가 널브러져 유유한 빙하를 연상시키고, 가까스로 지탱했을 〈Broken Flower〉의 무거운 꽃머리는 꺾여 버렸다. 이미 17세기에 친인척 문제로 명망을 잃은바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위에 반쯤 떨어진 채 붙어있는 현 권력자의 포스터는 추락이 당연해 오히려 긴장감이 없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2016년에 보여주었던 풍경을 굳이 이번 전시의 풍경과 일일이 비교한 이유는 이 전시가 한 해 동안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들의 다음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직관적인’ 생각 때문이다. 미술관, 유휴 공간, 신생 공간 등 다양한 층위의 장소에서 보았던 이 작업들은 개별로서도 의미 있었지만, 그 작업을 포함했던 전시들 또한 2016년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사건과도 같았다. 그 장소에서 잘려 나와 갤러리라는 또 다른 성격의 공간에 들어온 작업들은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지금 만들어진 이 장면 이후를 올해는 또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그러고 보니 벌써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갔다.

위 안지산 〈The Sea of Pink Ice〉(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259cm 2016

CURATOR'S VOICE 복행술

2016.11.17~12.11 케이크 갤러리

조은비 | 독립 큐레이터

〈복행술〉 전시의 철수 작업은 단 세 시간 만에 끝났다. 설치와 철수를 반복해온 지난 몇 년간 줄곧 그러했지만, 전시를 준비를 해온 수개월의 시간에 비해 전시 공간의 ‘리셋’은 너무나 신속하고 명쾌하게 끝이 난다. 물론 전시의 생명력이 그 물리적 현존에 의해서만 유지된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전시 도록과 아카이브, 작가-기획자-관객이 공간에서 함께 나눈 질문과 이야기들의 무형의 연결… 그렇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지난 시간을 복기한다. 물론 아직(혹은 영원히) 전시와의 거리두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를 통해 전시라는 일시적 사건을 향해온 내 생각의 실타래를 짧은 지면을 빌려 공유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오늘날 언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말의 생산과 유포, 전파가 빠른 시대에 문장은 짧아졌고 단어들은 ‘우물가(井)’를 맴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키워드에 익숙하지 검색창에 ‘문장’을 써넣지 않는다. 조합된 문장보단 파편적인 단어가 더 많은 검색 결과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효율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대상이나 사건을 ‘키워드’로 지시해 이외의 것은 빠르게 망각시킨다.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몇 개의 ‘키워드’는,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환원이며 본질 실종일 것이다. 정치인들의 각종 레토릭에서부터 혐오 발언 등 오늘날 더욱 교묘하고 악랄해진 ‘말’의 홍수는, ㅡ???인터넷의 위력이 거세진???ㅡ 동시대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손쉬운 명명 행위를 통해 대상과 사건에 딱지를 붙이고 낙인을 찍어 분류하는 폭력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하나, 내가 주목한 것은 비단 매체 환경의 변화와 맞물린 언어의 무기력함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명료한 개념 속에 자리하기 힘들거나 자극적인 말에 의해 배제되어온 ‘언어’를,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그 의미에 더 섬세하게 주목하고 싶었다. 이러한 고민을 둘러싸고, 나는 언어의 표면에 ‘막(veil)’을 친다는 비유로 전시의 알레고리를 제시했다. 의미를 하나로 규정하려는 ‘익숙한’ 의지 앞에서, 미술(언어)에 잠재한 ‘불확정성’을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무언가를 직시하기 위해선 ‘키워드’가 대상의 표면에 완전히 들러붙기 전에, 그 사이로 침투해야 한다는 일종의 ‘미적 개입’에 대한 개념적 은유였다. 물론 전시에 참여하는 다섯 작가(팀)의 작품이 실제로 언어적 작용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집단적 망각과 퇴행의 징후들을 ‘해마’를 통해 우화적으로 드러낸 김영글의 영상부터, 유토를 입힌 구조물이 케이크 갤러리의 표면을 느린 속도로 회전하는 이미래의 “뼈가 있는 것”, 전시장 곳곳에 의뭉스럽게 걸려 있는 정희승의 사진과, 둥근 표면 안쪽에 공통적으로 ‘빈 공간’을 품고 있는 이제의 회화, 그리고 서신의 물음표에서 출발해 미지의 오브제를 만들어낸 양윤화+이준용의 작업까지. 말하자면,
그들의 개별 작업은 공통적으로 물음에 즉답하지 않고, 행위는 일정 자세를 유지하며, 사물은 미완의 상태에 머무른다. 하나의 ‘언어’에 ‘안착(landing)’하지 않고 기표와 기의 사이를 끊임없이 배회함으로써 말의 어리석음 또는 오류를 시각적,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전시기획’이 삶에서 생겨난 구체적인 질문을 미술이란 형식을 통해 물질화해내는 ‘(공동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전시의 첫 질문은 과연 어떻게 되돌아올 수 있을까? 요컨대 나는 이 전시를 통해서, 무수한 말에 짓눌리는 작금의 사회에서 쉽게 잊히거나 누락된 존재의 발화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 미술에 있어 그 모호성이야말로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이를 ‘전시화’하게 하는 가능성이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하며 〈복행술〉 서문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규정되지 않는, 그럼으로 미지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불확정적인 것들은, 한 가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을 스스로 배태하고 있기에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 〈복행술〉은 조은비가 기획해 케이크 갤러리(2016.11. 17∼12.11)에서 열린 전시로, 김영글, 이미래, 이제, 정희승, 양윤화+이준용 작가가 참여했다. ‘복행’(復行)은 항공기가 착륙 직전에, 행로를 뒤집어 다시 날아오르는 조작을 의미한다. 이 전시에서는 안착하지 않고 우회하는 기술이라는 의미로 ‘복행술’이란 조어를 만들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cakegallery.kr 참고.

위〈복화술〉 전시광경. 이제 〈더미〉(왼쪽 벽) 캔버스에 유채 150×200cm 2010

CRITIC 양유연 불신과 맹신

2016.11.24~12.29 갤러리 룩스

신양희 | 아마도예술공간 큐레이터

양유연의 〈불신과 맹신〉에서는 인간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엿볼 수 있다. 어떤 날 어떤 시간에 벌어진 사건, 그리고 그가 마주했던 순간이 그림이 되었을 때, 그 세계가 밝지 않다는 것, 그 세계를 살아내는 인간의 모습도 결코 가벼울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세계는 음울하게 보인다. 이처럼 양유연은 세계의 모순 앞에서 불안하고 불완전한 상태에 놓인 인간을 그려냄으로써 모순의 한 측면에 주목한다. 그래서 빛을 세밀하게 조절하였지만 어둠은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물감이 깊숙이 스며들었음에도 비집고 나온 상처와 같은 흔적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림들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보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훼손하는 행위이겠지만, 그럼에도 구별되는 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허수아비1〉, 〈쇼윈도우〉, 〈명암〉, 〈질식〉에서 허수아비와 마네킹은 인간을 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그 자신의 본분에 맞게 경화된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신체를 가진다. 그들을 인간이라 볼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렇게 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 희망 없음 앞에 속수무책이 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그렇게 무기력하게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작업들이 인간의 모습을 표면으로만 다루고 있다면, 〈엉킨 손〉, 〈에우리디케〉, 〈붉은 못(사냥)〉, 〈흔(痕)〉, 〈Stuck〉은 좀 더 극적인 사건을 끌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인물들은 외부로부터의 충격 혹은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여러 손에 짓눌린 얼굴, 얼굴을 죄어 오는 손, 핏빛 물속에서 몸을 온전히 숨길 수 없는 헐벗은 신체, 온몸에 남은 구타의 흔적,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야 마는 신체. 이 인물들의 고통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그림들이 현실의 어떤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이들의 통증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손길이 느껴질 때,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응시하고, 우리는 그것을 방기하거나 기만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그림 속 인물들은 안정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인물이 부재한 〈백열〉, 〈결코, 이어지지 않는 길〉,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에서도 음울한 상태는 이어진다. 현재의 어떤 장소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이 그림들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어둠 속의 빛마저 구원을 약속하지 않고,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도 까마득하다. 이 풍경들은 현실을 회피하듯 막을 내린다. 그렇게 작가가 유보한 세계는 또다시 우리의 현실로 이어질 것이다.
양유연이 마주한 현실은 어둡고 우울한 감정을 유발하는 인물, 사건으로 치환되어 있다. 세상을 향한 그리고 인간을 향한 작가의 연민은 한 측면으로 귀결됨으로써 우리 삶의 어두운 측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서치라이트〉의 응시하는 그 사람처럼, 우리는 양유연이 그려낸 고통스러운 삶과 그 삶에 놓인 인물들을 응시하는 목격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배제된 그 어떤 그림도 무의미하다고 그와 함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나친 연민을 넘어서는 일도 필요할 테지만.

위〈허수아비1〉(오른쪽) 장지에 아크릴 148.5×105.5cm 2015

CRITIC 김윤경 Reverse and Penetrate

2016.12.2~1.15 김종영미술관

이수균 |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13회 김종영조각상’을 수상한 김윤경 작가의 개인전이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김윤경은 신체(특히 피부), 옷, 건축적 공간, 생물학적 환경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피부는 신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막으로서, 내부이면서 외부, 안이면서 바깥을 의미한다. 또한 피부는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 고정된 형태를 부수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따라서 피부는 고정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예술가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면 이러한 피부의 이중성과 다의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가 피부의 이중성에 대해 품고 있는 철학적 고찰과 예술적 성찰의 결과가 바로 김윤경 작가의 전시 제목 ‘Reverse and Penetrate’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피부를 뒤집어서 안으로 파고든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작가의 피부에 대한 관심은 그 피부와 맞닿아 있는 옷으로 이동한다. 즉 작가의 상상력은 수사법상 환유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경향이 있다. 환유란 시간이나 공간상 가까운 것들을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갈매기를 보고 바다를 연상하거나, 잔을 보고 술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따라서 우리의 피부와 닿아 있는 옷을 피부 혹은 어떤 사람의 신체로까지 상상하고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렇게 피부나 인간의 신체로 의인화된 옷을 통해서 작가는 다시 그 조작 가능성을 더욱 확장한다. 즉 옷이 본래 가지고 있던 사회적 기능과 옷이 가지는 피부와의 동질성을 결합하여 현대인이 사회 속에서 처한 위치나 고립감, 정체성의 혼란, 또는 정체성 재발견을 위한 몸부림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에게 유연하면서도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가진 옷을 통해 인간의 문제를 탐구하고 재발견하는 것이 실제의 인간 보다 훨씬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의 가능성이 더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작가의 설치작업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창문이나 문, 혹은 피부의 역할을 하는 벽면과 같은 건축 공간이다. 즉 건축적 공간은 다시 환유적 상상력의 영향을 받아 거주자의 신체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서 창이나 문은 피부처럼 공간의 안과 밖을 가르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당연히 작가는 이번에는 은유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유사한 기능을 가진 두 대상을 동일한 것으로 상상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김윤경은 문이나 벽을 설치하고 옷감을 배치하며 피부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 옷감 위에는 에볼라, 지카, 메르스 바이러스들이 우글거리듯 온통 가득하다. 바이러스 역시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왕래하는 인간 신체의 안이면서 바깥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안과 밖인 신체, 경계나 형태가 모호한 신체,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관계, 유동적인 사회적 관계 등을 통해서 작가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윤경 작가가 영혼과 육체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피부와 옷, 신체를 상징하는 구조물을 통한 작가의 작업은 차후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날 것이다.

위 〈Viruscape-4 Windows〉(왼쪽) 혼합재료 173×75×35cm(각) 2016

CRITIC 이동욱 LOW TIDE

2016.12.29~7.9 아라리오뮤지엄 제주 동문모텔Ⅱ

하진희 | 제주대 미술학과 강사

우리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모든 것이 속도와 빠름의 미학으로 포장된다. 인간이 존재 의미를 사색하고 사유의 시간을 보내며 느림의 미학을 즐기면서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그 산더미 같은 정보의 환영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다. 가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이동욱의 작품은 ‘왜’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동욱의 작품 앞에서는 좀 더 찬찬히 그 작품을 들여다보고 음미하고 싶어진다. 그의 대학시절의 작품, 두 남자가 바퀴를 돌리는 주제를 시작으로 인간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그의 고민은 시작된다. 크기가 다른 두 남자가 끊임없이 바퀴를 돌린다. 두 남자의 크기나 돌리는 속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둘 중 누구든 돌리기를 멈추면 안 된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그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상의 바퀴를 끊임없이 돌리면서 각각의 하나는 다른 하나의 존재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어 슬픈 현실이다.
이동욱의 인간과 인간이 처한 현실에 대한 탐구는 그가 선택하는 주제, 재료와 기법에 의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금속의 강인함과 차가움을 달콤한 벌꿀의 부드러움으로 스르르 무너뜨린다. 그래서 결국은 형태가 없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녹여버리는 삶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또한 전쟁의 수많은 죽음을 넘어 얻어진 승전 트로피에 흘러내리는 벌꿀은 전쟁의 살생을 감추는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그 달콤함에 취하는 순간 어느새 우승의 영광은 녹아 없어진다. 또한 유리병 속에 갇힌 남자의 섬뜩한 모습에는 이동욱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암시와 함께 끊임없이 바퀴를 돌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동욱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서슬 퍼런 장도 위에 드러누운 누드의 남자, 때로는 유리병 안에 갇힌 기이하면서도 미숙한 남자, 벌꿀로 속이 채워진 도금된 금속 위에서 총을 쏘는 남자, 원반을 던지는 남자, 장도를 끄는 남자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동욱은 이처럼 다양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삶의 무게를 가차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재료인 금속, 폴리머클레이, 유리 등은 작가의 생각과 기법을 유기적으로 연관시키기보다는 서로 다름을 통해 보는 이의 시선을 묶는 역할을 한다. 작가가 이러한 자신에게 익숙한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어 주제의 순수성을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택하는 작가의 실험을 기대해 본다.
이동욱이 ‘모두 다 흥미로운’ 을 위해 수집한 다양한 원석들을 보며 그의 부지런함과 인내심에 놀라게 된다. 또한 그가 인간 존재에 대한 고뇌와 허무를 뛰어넘어 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오르려 시도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연의 개체들이 지닌 길지 않은 거친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몸짓은 한없이 작고 초라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암시가 아닐까. 그러나 이동욱이 처음 암시했던 것처럼 그는 이 순간에도 또 다른 비상을 위해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바퀴 돌리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위〈Amor〉 혼합재료 15×10×10cm 2008

CRITIC 김형석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2016.12.2~10 갤러리 담

권진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이번 김형석의 개인전을 함께 본 다른 작가는 김형석의 회화에서 ‘계절감’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는 이 표현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의 대화는 예전 작품들과 비교해서 보자면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들이 화면의 형식이나 회화의 물질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다른 차원으로의 이행을 그려냈다고 축약된다. ‘계절’은 빛과 대기로 이루어진 환경이고, 자연의 궁극적인 질서이며, 일정한 공간에서 형성되는 어떤 시간의 특성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계절은 작가 김형석이 선택한 어떤 의식과 유사성을 갖게 된다. 이 의식은 ‘생활-세계로부터 안간힘을 써서 벗어나’ 감각들로 수렴되는 것들을 이미지의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미학적 몰입 혹은 생생함이라고 볼 수 있다.
2011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개인전을 열어 온 작가의 이번 전시는 그동안 발표했던 회화 시리즈의 연속선에서 읽힌다, 그리고 이 시리즈를 넓게 보면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표현대로 상실과 소진의 시대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회복’하는 것이다. 회화의 존재론적 질문과도 같은 주제를 붙잡고 있는 작가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활의 범주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재현하고, 이들을 무질서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재배치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김형석의 회화는 사실적 재현
에서 더 나아가 그 본질을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리얼리즘적인 태도를 지닌다.
그것은 어떤 시각적인 유사성이나 소재의 구체성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피적인 유사성과 구체성을 부정하는 회화가 역설적으로 획득하는 인식적 감각의 리얼리즘이다.
철학적 사유를 가시화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김형석 회화의 형식이 푸코가 논한 벨라스케즈나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형석의 회화가 지금 현재 한국이라는 지역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서구의 미술사로 편입되지 못하는 다행스러우면서도 불행한 지점은, 그의 회화에 내포된 지역적 도상에서 출발한 동시대적 감각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 산, 손, 건축적 공간, 불, 바람, 도자기 등은 현실의 그것들과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현실의 상태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도상으로 존재하고, 이 상징들은 서로 어긋난 시간과 공간에 얽혀 어떤 비가시적인 정신 상태를 전한다. 그리고 이 불명확하고 징후적인 정신의 상태에서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닌 그림을 보는 자의 위치에서 동시대적 감각과 동화되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눈’을 얻는다. 다른 말로, 공감을 얻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전시는 사상 최대의 인원이 집결하는 촛불집회가 계속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주요 현장인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를 통과해야 진입할 수 있는 삼청동의 조그만 갤러리에서 열렸다. 어수선한 시국의 현장을
거쳐야만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그의 회화를 보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어느 공간으로 훌쩍 넘어가는 일종의 ‘신성한 힘’을 경험한다. 이러한 추상적 차원의 경험은 현실에 시사적인 문제나 사건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지만, 대신 현대 사회에서 회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조건을 더욱 두드러지게 인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지금 시대에서의 회화가 어떻게 사회심리적인 사고를 촉발시키는지에 대해 엇갈리는 해답을 제시한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찾고자 했다면 반대로 우리는 그림을 ‘보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회화를 통해 호출된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특정한 감각이 전이되는 생생함이 있다. 이 생생함은 현재 사회에서 무한히 가변하는 여러 조건, 상황, 이미지와 그것의 기호들이 우리와 맺는 복잡한 관계의 작용에서 비롯된다.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감각 세계의 경험을 우리는 김형석 회화의 ‘계절감’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도〉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60×60 cm 2016

CRITIC 노충현 자리

2016.12.8~2.11 페리지갤러리

김소영 | 출판기획

몇 해 전 겨울, 함박눈이 내려 흰 눈에 잠긴 한강시민공원을 보았을 때, 노충현의 그림이 떠올랐다. 장마철 홍수에 불어난 한강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한강을 보거나, 한강시민공원에 갈 때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유독 어떤 ‘계절’에 그랬다. 한강을 담아내고 있는 노충현의 〈살풍경〉에서 내가 본 것은 그래서 한강시민공원의 모습이 아니라, 앞서 지나간 계절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했었다.
이번 겨울, 페리지 갤러리에서 열리는 노충현의 개인전은 앞서 언급한 〈살풍경〉 시리즈와 함께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 시리즈다. 10년 전인 2006년에 대안공간 풀에서 처음 선보인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동물원’이란 장소를 그렸다. 특히 오랑우탄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이 사람(관객)을 위해 쇼를 하는데 쓰이는 기구와 장치들을 그린 그림들이 이 시리즈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작가는 이런 구조물을 그린 그림의 제목을 ‘서커스’라 붙였다. 그리고 그림 속 모습은 어쩐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기이하고 아슬아슬한 동물원의 위태로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2006년 대안공간 풀과 2015년 소소 갤러리 개인전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이번 〈자리〉 시리즈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크게 달라진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원의 벽화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물원의 벽화에는 동물들이 그려있다. 홍학이나 물새, 그리고 원숭이 같은 동물이 그려진 벽화를 작가는 다시 그림으로 그렸다. 그래서인지 어떤 그림은 벽화가 아니라, 실제 동물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자리’ 시리즈는 동물이 없는 동물원이었던 앞선 시리즈의 내용과 크게 달라진 것일까.
그런데 여전히 동물이 주인공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수의 그림에서 동물은 벽화에 그려진 모습으로 나타나고, 실제로 동물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은 무척 조심스럽게 그려져 있으며,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또한 동물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희미하게 등장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그림의 배경에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것도 눈에 띄는데, 이 부분도 이전 그림들과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노충현 작가는 ‘자리’를 장소(space)나 공간(place)으로 번역하지 않고 ‘Zari’라 표기했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 ‘동물원’은 물론 작품의 주인공이겠지만, 어떤 역사적이고 문화 정치적인 장소이거나 공간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충현의 〈살풍경〉에서 ‘계절들’이 감지되던 것처럼, 이제 〈자리〉 시리즈에서도 다른 것을 볼 차례이다.

위 〈사다리〉(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261cm 2016

CRITIC 무진기행

2016.11.22~2.12 금호미술관

양효실 | 미학, 미술비평

금호미술관의 한국화 기획전 〈무진기행 〉은 국내외적으로 주목받는 30~40대 작가 14명의 작업 90여 점을 통해 ‘동시대 맥락 안에서 재해석된 이상향 개념을 살펴보는’ 전시이다. 비장소적이고 무시간적인 이상향은 그(한) 시대의 삶(현실)에 결핍된 것의 환상적 충족이고, 그렇기에 이상향은 삶(현실)을 가리는 베일로 봉사한다. 자주 이상향은 과거추수적인 향수와 연접(連接)한다. 향수는 지금의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하려는 변혁의 태도가 불가능할 때, 혹은 그 태도가 탄력을 잃을 때 동시대를 압도한다. 2016년 미술계가 단색화나 민중미술 회고전에 힘을 실었다면 이는 두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대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제시될 경향이 부재했거나 문화적 보수주의가 쇄도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당연히 시간적 연속성에서 이탈하는, 환원을 거부하는 새로운 이름들, 경향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류 상업 갤러리들이 전통, 향수,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는 회화, 작가성, 기념비성과 같이 운송 가능하고 유지 가능한 또는 사고 팔기에 좋은 ‘미술’의 복귀이자
반복이 또 일어났다는 것이다.〈무진기행〉에 전시된 한국화는 수묵, 담채, 채색화부터 아크릴 채색화까지 형식적으로 다양하다. 전시의 프레임을 이룬 개념으로서의 한국화와 이상향은 전시 작가들을 묶기 위한 불가피한 전제이자 최소한의 유사성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관객은 복고적 동양주의 대신에 80여 점의 작품에 내포된 스토리텔링이나 서사에 사로잡힐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나 일상 경험, 한국 근대사, 탈맥락적 은유나 상징에 바쳐진 풍경들 앞에 서서 관객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읽기’를 시작할 것이다. 이 읽기는 14명의 작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 맥락’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에 이상향은 무시해도 좋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기획자는 이상향과 연관된 전시의 세 단계(국면)를 ‘갈등의 공간, 현실’, ‘현실 속 도피와 휴식의 공간’, ‘현실 너머의 이상’으로 차별화했다. 이것은 ‘성찰적’ 태도이다. 현실은 비루하고, 자의식적인 개인-예술가는 무력하고, 쥐고 있는 패는 도피이고, 그렇기에 이상(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획자는 동양적 이상향과 전통??-??매체??-??한국화를
끌어들이면서도, 작가들이 ‘문제화하는’ 동시대성에 주목함으로써 반복과 복귀가 아닌 차이와 이탈을 도모한다. 젊고 비판적이다. 외연은 낡은 것이지만 내포는 전복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전시 제목인바 김승옥의 1965년 소설 《무진기행》에서도 이번 전시 기획의 세 단계 구도가 읽힌다는 것이다. 다시 읽어본 소설에서 나는 주인공 남자의 유약한, 자조적인, 자기연민에 가득한 상념이 순천-무진을 식민화, 박제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33세의 사내는 서울-현재를 벗어나 고향-과거로 숨어들지만, 또(더 이상) 돌아오지 않으려면 이상향-환상을 지워야 하기에 현재의 무진을 외면하거나 모독한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이것은 젊은 여선생이 주인공에게 서울-이상향으로의 도피에 끼워주기를 간청할 때, 그리고 무력한 여선생을 폭력적으로 ‘다룬’ 뒤에 오직 소설의 독자만이 자신의 ‘선’의를 읽게 한 뒤 여선생에게 보낼 편지를 찢을 때 정점에 도달한다. 무진을 이상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서울만큼 환멸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주인공은 무진을 ‘시체가 썩어 가고
있는’ 곳으로 읽는다. 그의 악행과 악의는 출구 없는 현실, 대안 없는 현재와 연접한다. 지식인 김승옥의 자폐적 내면이 무진과 여선생에 대한 일방적 대상화를 요청했다면, 2016년의 우리는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할 의무가 있다.
2016년의 전시는 현대 문학의 ‘경전’ 《무진기행》을 복고적으로 인용하면서도 ‘동시대 맥락’ 안에서 재고하려 한다. 전시작 중에는 명상, 절제, 담백, 화해와 같은 정서적이고 관념적인 이상향을 가리키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관객을 더 압도하는 것은 잔인함, 교활함, 비극성, 그로테스크, 직면이다. 14명 중 12명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 그녀들의 작업이 전통적 매체에 머무른 채로 현재(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좋다. 《무진기행》에서는 혼자 서울로 갈 수 없었던 여선생, 남자에게 자신을 맡겼던 여자(들)이 2016년 〈무진기행〉에서는 무진에 남아 계속 싸우고 갈등하는 것이다. 예술이 자조적 위선과 기만의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아니 작가 개인의  환멸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생한’ 현실을 착취하지 않으려 한다면, 혹은 복고적 이상향을 위해 현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아니 동시대 맥락 안에서 전통, 이상(향), 과거, ‘경전’과 같은 이념을 재고하려 한다면, 심지어 지금??-???여기의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꾼들을 읽게 된다면, 징글징글한 삶이란 결국 우리를 계속 살게 만드는 유혹이고 내기인 게다.

위 임태규 한지에 먹, 채색 346 x 828cm 2009

COLUMN 예술가의 권리: 표준계약서와 아티스트 피

“예술은 이상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꿈을 꿀 수 있는 곳이자 상업주의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예술하는 사람치고 예술로 생계를 꾸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술평론가이자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배우자인 바버라 로즈(Barbara Rose)의 회고다. 그렇듯 예술은 돈벌이에는 관심 없는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의 피난처 같은 곳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소명 의식을 가지고 예술 활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자발적 선택이나 예술의 특성이 예술가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유예해도 된다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예술가라면 경제적 보상이나 상업성에 무관심해야 한다며 순수성과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정당한 대가와 권리를 인정하는 시스템의 부재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있다.
미술품의 시장 가치나 경매가 기록 경신이 미디어의 헤드라인으로 오르내리고 예술의 가치와 예술품의 거래 가치가 혼재하는 시기, 예술은 산업이나 상업의 영역이어서는 안 된다거나 예술가는 창작 활동에 따른 감정적 보상과 사회적 존경심으로 먹고산다는 말은 공허하다. ‘2012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문화체육관광부, 2013)에 따르면 미술 창작 활동을 통한 월평균 수입이 전혀 없다고 응답한 미술인은 약 33%, 경제적 보상에 대한 만족도는 1.29(5점 만점)로 매우 낮았다. 불공정한 보상과 경제적 불안정성, 저작자로서의 권리 침해 등이 예술창작 활동을 방해한다는 증거는 많다. 예술 창작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권위마저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욱 문제다.
예술생태계 개선을 위해선 예술가 복지에 앞서 적법하고 ‘정당한’ 권리 보장과 ‘정당한’ 보상체계 구축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서 계약관행에 대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를 개발·보급하고, 미술인보수지급제도(artist fee) 연구를 진행한 사실은 긍정적인 일이다. 아티스트 피는 전시라는 형태로 공공의 장 안에서 작품 공표와 전시 참여에 대해 지급하는 보수의 성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예술창작도 최종 결과물뿐만 아니라 참여와 활동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 예술가의 창조적이고 지적인 노력과 노하우를 사회문화적 기여 또는 공공재적 성격으로만 치부해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의 정당한 보상 지급 문제는 공정한 계약 체결과도 직결된다. 계약문화의 전통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특히 예술계의 경우, 구두 형태의 간단한 합의 또는 동의서 수준의 일방적 계약서 사용이 관행이 됐다. 내용적으로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수준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된 데는 낮은 권리 의식과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들 책임이 있다. 불공정 계약문화는 궁극적으로 미술계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고 예술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한다. 예술가 역시 자유계약 원칙에 따라 자유의사에 의한 거래와 경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 개발은 정부가 나서서 예술계에 건전하고 공정한 계약 및 거래 관행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표준계약서는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한다. 특정분야 또는 직군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계약 내용에 대한 표준 양식이자 불공정한 계약을 예방하는 준거로서의 기준을 제시한다.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는 저작재산권, 저작인격권, 정보요구권 등을 포함한 저작자로서 당연한 권리 주장이 어려운 예술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계약 불이행이나 운송 및 보관 시 미술품의 훼손이나 멸실 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조항들을 담았다.
물론 표준계약서는 거래의 모델이 되는 서식이자 표준화된 내용을 모아놓은 문서에 불과하므로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 법적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부당하게 계약기준을 하향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불공정 금지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표준계약서를 토대로 하되 계약당사자의 여건, 계약의 목적 및 성격, 세부조건 등에 따라 계약당사자 간 협의를 통해 계약서를 수정·변형하여 활용해야 한다. 계약서의 조건과 내용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 경솔하게 서명을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표준계약서든 미술인보수제도든 예술가와 예술계종사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동반돼야 한다는 점이다.
캐슬린 김 법무법인 중정 변호사, 홍익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