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민화야말로 진정한 우리그림이다
정병모(경주대 교수)는 민화의 매력에 빠져 20년 넘게 민화를 연구하고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찾아나선다. 그는 〈반갑다 우리민화전〉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 등 많은 다수의 민화전시를 기획했고 《만화보다 재미있는 민화 이야기》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등을 출간했다. 현재는 민화학회 회장이자 한국민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타공인 민화전문가 정 교수에게 민화의 모든 것을 물었다.
민화라는 용어 자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학회나 포럼 등에서 ‘민화’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용어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민화라는 용어에 대해 좋아하는 이도 많지만,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었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다. 그 대안으로 한민화, 겨레그림, 생활화, 천인화, 서민회화, 한채화 등 여러 용어가 제안된 바 있다. 하지만 새로 제안된 용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화를 대체하거나 보편화되지 못했다. 민화라는 용어는 그 타당성 여부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 애틋한 느낌으로 인해 사랑을 받는 것이다. 결국 명칭은 학자나 연구가들의 뛰어난 이론보다 일반인의 취향과 기호에 의해 생명성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대민화의 예술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저변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토양 속에서 세계적인 예술가가 배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화의 대중화는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예컨대 19세기 중엽 유럽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미술이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같은 이들이 미술의 대중화를 부르짖었으나 이론과 구호에 그쳤고 실제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이론가가 아니라 주부의 취미생활로 시작해 이룩한 민화의 대중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성공한 예로서 특기할 만하다.
조선후기 풍속화는 서민이나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서민이 그리던 그림이다. 풍속화와 민화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담론은 무엇이며 두 장르 간 영향관계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풍속화와 민화는 다른 분류기준에서 나온 개념이다. 풍속화는 산수화, 화조화와 같이 제재별로 분류한 것이고, 민화는 궁중회화, 사대부회화와 같이 신분별로 구분한 것이다. 뿌리는 다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사회가 붕괴되고 하류계층의 서민문화가 발전했다. 그 첫 번째 징후가 18세기의 풍속화로 나타난다. 이 시기 풍속화는 사대부 및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수요처는 주로 궁중이고 정치적 목적이었을 때 진정한 서민회화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서민의 생활상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에 힘입어 19세기에는 진정 서민화가가 제작하고 서민 및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 유행했다. 그것이 민화다. 이러한 추세는 20, 21세기에 대중문화로 이어져 오늘날 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즉 풍속화와 민화는 18세기 이후 역사의 수면으로 떠오른 서민문화의 표상이고, 현대에 대중문화의 발전을 가져온 모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민화를 ‘19세기의 문화’로 인식한다.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민화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대표작품이 있는가. 또한 역사가 긴 민화를 문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술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9세기는 민화가 성행한 시기이지, 민화의 역사가 시작한 시기는 아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선사시대 암각화가 민화 역사의 시작이고, 좁은 의미로 보면 통일신라시대 처용문배가 시작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백성들이 대문 앞에 처용문배를 붙여서 역신을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정한 민화인 백성의 그림으로는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예라 할 수 있다. 원래 한국의 회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와 같이 채색화가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사대부의 이념에 맞는 수묵화와 문인화가 화단을 주도하면서 채색화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후 18, 19세기에 민화를 통해 그동안 소홀히 했던 채색이 기적처럼 부흥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후기 민화의 역사적 의의 중 하나다.
민화를 그린 주체는 서민이지만 그 문화를 서민만이 향유한 것은 아니다. 민화와 궁중회화는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민화와 궁중회화는 기본적으로 수요가 다르다. 민화는 서민이나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고, 궁중회화는 왕실에서 쓰인 그림이다. 그렇다보니 민화는 크기도 작고 안료나 종이와 같은 재료도 비싼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궁중회화는 크기가 크고 재료도 비싸고 좋은 것을 사용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여부’이다. 민화는 표현주의적 성향을 띠는 반면, 궁중회화는 사실주의적 묘사를 중시한다.
《한국의 채색화》에서 보듯 채색화는 불화, 궁중기록화 등도 포함할 수 있게 범주가 확장된 용어다. 실제로 승려들도 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채색화라는 용어에 불화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가 있는가.
도록의 제목이 ‘한국의 채색화’, 부제는 ‘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다. 한국 회화는 크게 채색화와 수묵화로 나뉜다. 채색화 가운데 이번 도록에서는 궁중회화와 민화만을 담았다. 따라서 채색화는 민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상위개념이다.
채색화를 내세운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묵화 위주로 편성된 화단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일본화 하면 채색화를 가리키고, 중국화 하면 수묵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국화 하면 수묵화를 가리킨다. 수묵화는 중국 사대부문화의 산물로서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대표적인 중국문화이다. 수묵화 혹은 문인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 아니라 고고한 중국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중국적인 성향이 강한 수묵화보다 자신의 개성이 강한 채색화를 내세웠다. 일본에서 수묵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배울 데가 없어서 한국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문화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등 화려하게 전개되어 온 전통 채색화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중국식의 수묵화가 조선 화단을 지배해온 것이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한국화=수묵화”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제는 한국적이면서 전통적인 채색화를 부활시켜서 우리의 진정한 회화를 찾자는 취지를 갖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화 작가의 맥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조선시대 민화는 6·25전쟁 이후 격동기를 겪으면서 그 전통의 맥이 잠정적으로 끊어졌다. 다행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이 1970년대 말부터 한국의 조자용, 김호연, 김철순, 이우환, 일본의 이타미 준 등에 영향을 주면서 민화가 되살아났다. 예전의 민화작가는 거의 사라졌지만, 문화재 수리 보수, 수출화 제작 등으로 그림 작업을 하신 분들에 의해 되살려져서 오늘날 민화로 이어진 것이다.
민화는 형식과 틀이 정해져 있다는 편견이 있다. 민화에서 창작성은 어디까지 허용되며,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민화를 모사하는 분들은 대부분 아마추어로서 취미생활로 하거나 문화재로서 기술을 전승하는 분들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인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처럼 우리 그림인 민화를 모사하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주부의 경우 오랫동안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민화를 통해서 찾으며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고 있다. 그분들에게 무작정 창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오히려 미술의 대중화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민화가 일본의 민화와 중국의 민간연화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
민화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일반 사람들이 피카소나 김홍도의 비싼 그림을 집 안에 걸 수는 없다. 대부분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값싼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한다. 그것이 민화가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고, 아시아에도 당연히 나라마다 민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조선민화는 일본 민화나 중국의 민화인 민간연화와 비교할 때 전통적이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뛰어나 매우 현대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해학과 변형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민화는 판화 위주로 발달한 일본이나 중국 민화와 달리 주로 붓 그림으로 그렸다. 그로 말미암아 민화는 비슷한 것은 있어도 똑같은 것이 드물고 약간씩 변화를 주어 다양하게 발달했다. 이러한 점이 조선민화가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전국 각지 대학의 부설기관과 민화연구소를 통해 민화강습이 이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식 학과를 개설해 민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다. 작가와 이론가 사이의 관계와 교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존 미술대학의 교수들께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술계가 어려워지면서 지방 미술대학의 순수미술 학과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보건대 민화계는 놀라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민화 시장을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을 당연히 대학에서 키워야 하는데, 정작 미술의 주체들은 이러한 현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술대학도 현실적으로 변모해야 한다. 지금의 민화 추세로 보아 전국에 적어도 2~3개의 민화학과가 생겨야 하고, 미술대학에서는 민화에 대한 실기 및 이론 강의를 개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시도가 필요할 때다. 민화센터의 수장이자 30년간 민화를 공부해 오신 전문가로서 우리 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한다.
성철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가슴을 친다”라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력으로 팝을 부르는 것보다 우리 가요를 부르는 것이 듣는 이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림도 마찬가지다.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한 민화가 오히려 예술적인 감동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민화만큼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예술도 드물다. 민화는 분명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장르이다. 이를 널리 알리거나 이를 토대로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다면, 다른 무엇보다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그림을 창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행・ 정리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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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콘텐츠는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 민화를 집대성한 단행본《한국의 채색화》출간
이 책은 일찍이 “민화만이 세계시장에 먹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민화를 조사한 정병모 교수의 열정으로 기획되었다. 필자는 정 교수의 부인으로서 1992년 12월 중국의 민간연화를 함께 조사하러 간 적이 있다. 중국과 수교하기 바로 전이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겁 없이 중국 북경에 내려 20여 일간 중국의 연화를 조사하러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때를 계기로 정 교수는 우리나라 민화가 어느 나라 민화보다(주로 중국과 일본) 세계시장에서 큰 파급효과를 미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정 교수는 2010년부터 명품도록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은연중에 출판사를 운영하는 필자가 출간해주길 바랐지만 비싼 도록이 판매되기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제안하지 못했다. 당시 어려워진 회사 형편상 엄두도 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2013년 봄 우연히 민화작가 두 분과 차를 마시면서 민화명품도록 이야기를 꺼냈고, 그중 한 분이 투자 제안을 했다. 그분의 한마디에 이 책의 기획은 본격화되었다. 1권을 기획했던 것이 3권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한 분의 개인투자자가 또 나타났고, (재)가나문화재단에서 선뜻 책값을 선지불하는 식의 투자를 약속했다. 우리 회사의 마케팅팀은 도록에 클라우드펀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즉 민화작가들이 투자자가 되어 선투자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결국 최소한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그 배의 가치를 지니는 책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민화작가회와 전국 지역마다 터를 잡고 있는 민화작가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고(아니 정 교수를 믿고) 사전 예약을 해주었다. 그 결과 출간 전, 예약이 450건에 달했고, 책의 제작비는 전혀 염려하지 않고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정 교수는 그냥 도판수집과 논문의 방향성만 제시하면 되는데, 최고의 명품을 만들겠다는 고집(열정)으로 제작 과정에 개입해 사사건건 부딪쳤다. 정 교수는 정말 “슈퍼갑”이었다. 중요한 사항에서는 정 교수와 편집장, 디자이너 그리고 필자가 합의해서 결정을 내리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사항에 3사람이 동의하면, 나는 맞서 싸웠다. 바로 종이의 결정이고 표지에 대한 결정이다. 지금은 결정에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가지지 못한 자부심을 느낀다. 어떤 분야건 좋은 콘텐츠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려운 시기를 거쳐 출간한 이 책은 더욱 가치있는 작업이었다.
《한국의 채색화》는 여러 가지로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정병모 교수의 필생의 과제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살아생전 자신의 과제를 이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 세월을 민화에 미쳐있었던(?) 정 교수 개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는 민화계의 큰 업적이다. 좋은 명품을 모아놓았다는 점에서다. 이 아름다운 한국의 채색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모아놓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세 번째는 출판계의 향상된 기술이다. 이 책을 예약하기 전 많은 분이 일본의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를
생각하며 과연 그 정도 수준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다. 몇 해 전만 해도 도록은 수입지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책 시대가 도래한 때에 이러한 미술 도록이 이후에 또다시 출간될 수 있을까. 혹 종이시대의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최고를 지향해 만들었다. 이 책을 앱북으로도 기획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주는 아름다움은 인쇄물을 따라가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 도록을 통해 우리의 민화가 글로벌한 콘텐츠로 드라마, 음악에 이은 제3의 한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에 자포니카 선풍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현재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페루에서도 민화 체험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불황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좋은 콘텐츠를 만들게 된 것은 민화인의 열정과 열망덕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민화인의 열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애 Sni Factory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