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폐허뿐인 세상의 미술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용어가 새삼 각광을 받는 모양이다. 도심재활성화라고 곧잘 번역되는 이 단어는 한 도시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던 산업의 양상이 바뀜에 따라 도시를 구성하는 인간의 생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예전에는 필수적이었던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은 버려지게 된다. 그러면 작업실로 쓰기 위해 집세가 저렴한 큰 공간을 찾던 예술가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새로운 생태계가 일궈진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상업지구로 변모해서 집세가 오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수학공식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을 목격하기 위해 굳이 뉴욕이나 런던 같은 서구의 대도시를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뒤늦게 맞은 근대를 스쳐 보내버린 제3세계의 기형적인 도시들에서 이러한 현상은 보다 압축적이고 흥미롭게 재현되는 듯하다. 바로 서울말이다.
600년이 넘은 도시라고 하지만, 서울은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에 큰 전쟁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보통 눈부시다고 수식되는 경제 발전의 기반을 여전히 건설업에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2011년 직전까지
서울
은 수많은 대규모 공사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몇 개의 동 단위 면적이 넘는 지구를 송두리째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아파트 건설과 연관된 경제적 역학 관계에 대해서 이 글에서 깊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꽤 오랜 시간, 아니 6.25전쟁이 끝난 서울의 시민들은 단 한 번도 안정된 주거 환경 속에서 인생 전체를 설계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서울을 규정짓는 이미지 역시 쉽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동에 큰 아파트 단지가 생긴 직후였을거다. 내가 유년을 보낸 서울의 서북부는 한창 연립주택 공사 붐이 일었다. 원래 나의 동네에는 마당이 있는 1층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언덕이 많아 수박 크기의 각진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시켜 둔 축대가 곳곳에 있던 동네였다. 이런 동네에 소규모 건설업자들과 복덕방 주인들과 집주인들이 다같이 합세해서 오래된 집을 헐고 연립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아마도 보다 많은 가구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 정책과 맞물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는 새집을 분양받아 재산을 늘리려고 했던 서민의 풋풋한 재테크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환경은 나에게 공사장에 대한 특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공사가 시작되면 인부들은 모래를 쌓아뒀는데 큰 무덤 크기였다. 바다에서 퍼왔는지 모래에는 작은 조개껍데기가 섞여 있었고, 놀이터가 없던 변두리의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 놀았다. 인부들은 옆에 세워 둔 체에 모래를 걸러내고 시멘트와 섞은 뒤에 등에 지고 일일이 ‘공구리’를 쳤다. 수평에 맞춰 실을 묶고 거기에 따라 벽돌을 쌓았다. 동네 전봇대마다 세로로 된 작은 현수막이 붙었는데, 어쩌구 빌라, 저쩌구 맨션이라는 이름의 새집을 20평 남짓의 크기로 분양하고 실입주금은 얼마라는 내용이었다. 그 빨갛고 노란 현수막과 모래의 밝은 황토색, 벽돌의 붉은색과 시멘트의 회색, 내가 겪은 유년의 이미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러한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북서울 (10)

강북지역의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잊혀진 풍경과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강북의 달>(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10.7~11.23)의 전시장 광경.

구슬모아당구장

대림미술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 ‘구슬모아 당구장’의 건물 외관

세월이 흘러 그렇게 지어진 연립주택이 평균 20년 정도 되었을 시점이 되자 마지막으로 아파트 단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해서 잠실, 노원구, 양천구 등 아파트로 특징적인 주거 형태를 구성했던, 서울의 전통적인 동네가 아닌 동네들도 아파트를 원했다. 이러한 재개발은 잠실과 반포에 대규모로 계획된 야트막한 주공아파트를 새로 짓는 것과는 좀 달랐다. 붉은색 벽돌, 초록색 옥상, 노란색 물탱크로 대표되던 서민들의 언덕은 힐스테이트 같은 이름으로 새단장되었다. 이러한 난리통을 거쳐 결과적으로 궁극의 목표였던 시세 차익을 얻은 서민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2000년대에 유년을 보낸 청년 작가들에게 동 단위로 철거되어 엉성한 가림막 사이로 보이는 폐허의 이미지는 내가 동네에서 보았던 작은 공사장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막막하며 또한 쓸쓸한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스프레이 래커로 ‘철거’라고 쓴 집들은 한동안 철거되지 않았고, ‘원주민 부동산’ 같은 맞춤형 상호를 양산했다. 모든 경제지표는 경쟁하듯 우울한 전망을 암시했고, 계급투쟁의 원리를 전지구적으로 공유하게 된 스마트폰을 맞이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마치 공적처럼 일상화되었다.
올해 초에 나는 회화를 중심으로 하는 살롱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는 총 69명의 작가가 150여 점의 작품을 낸 기형적으로 큰 규모의 전시였고, 참여한 작가의 대부분은 20대에서 30대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러한 규모는 처음 생각보다 좀 더 커진 것인데, 이는 젊은 작가의 작품들이 예상보다 그다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자연과 맞물리는 풍경이 아니라, 도시를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도시의 틈새, 무너진 콘크리트와 그 주변을 담은 작업이 두드러졌다. 특히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주변을 들러 작가들을 만났을 때, 나는 꽤 많은 작가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쉽고 진정성 있는 접근법으로 일컬어지는 ‘제 주변에서 소재 찾는 법’을 시전했을 때, 그들이 계속해서 버려진 현대적 건축물에 집착하듯 달라붙는 장면은 꽤 신기했다.
신기함의 원인은 이러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겪어야 할 유년은 대강 예측이 가능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사교육을 통해야만 입학이 가능한 정도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사실과, 미술문화를 가깝게 여기기 위한 배경 부모의 문화적 취향은 한국에서라면 아파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위 중산층의 선택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마 현재 젊은 작가의 대부분은 폐허로 이루어진 환경과는 먼 공간에서 성장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을 받고 미술가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폐허는 무엇일까? 우선 그들에게 폐허란 존재하지 않은 과거를 향수하기 위한 관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과거, 즉,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대한 일말의 기대 대신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물리적 공간에 미술가로서 본인의 처지를 대입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치 사회운동처럼 실천을 담보로 하는 미술이 폐허를 집중적으로 리서치해 온 이유는 파괴의 스펙터클 자체가 주는 묘한 쾌감이 그릇된 현실을 폭로하는 이미지로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러한 운동은 자칫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오히려 작품 속의 미적 흐름이 가능한 공간을 차단하는, 때문에 굳이 미술작품으로 호명해야 할 이유가 없는 콘텐츠 덩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오히려 폐허는 젊은 작가들에게 앞서 제시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그럴싸한 영단어가 주는 어감대로, 전지구적으로 공유된 지역-생태-재활-자생 등의 비교적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유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한 해, 서울의 수많은 지역은 미술가들에 의해 ‘공공 리서치’라는 작업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리서치 과정의 대부분은 커뮤니티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감상적 인식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우선 서울에만 500개가 넘는다는 지역 축제의 과잉 현상이 낳은 콘텐츠의 혼종교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이라는 별명을 얻은 시민과 ‘쉬운’ 예술의 만남을 주선하는 수많은 행사에서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수많은 조형 설치물을 한 지역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미술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할 ‘공공 리서치 미술작업’과 변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깊은 운명적인 결핍이 있다. 그 결핍은 이제 더는 폐허나 오래된 커뮤니티가 현대적 도시의 보편적 경향을 드러내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뉴욕의 PS1과 런던의 테이트모던이 헌 건물을 미술공간으로 전용한 사실에 대한 수많은 연구 자료가 존재하며, 그렇게 폐허를 의도한 인테리어 디자인은 이미 쇼핑몰 디자인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나간 유행이기도 하다. 현재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을 제시해서 각을 세우려는 태도가 더 이상 ‘대안공간’이라 불리는 전시장만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옛 기무사 건물을 존중하는 방식이나, 대림미술관 등의 대형 전시장에서 구슬모아 당구장 같은 (대안의) 대안공간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폐허가 지칭하는 문화적 지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논의를 계속해서 진행해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2014년까지 서울의 미술계에 던져졌던 ‘폐허’라는 공간, ‘도시’라는 화두는 이미 살점이 다 뜯긴 채로 다시 어딘가에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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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한 커먼센터 개관전 <오늘의 살롱>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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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한국의 동시대미술을 두 세대의 작가군으로 묶은 10쌍의 작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청춘과 잉여>(커먼센터, 11.21~12.31)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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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케이크갤러리와 팀황학동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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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의 일부 되기”

케이크갤러리는 2010년부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솔로몬 아티스트 스튜디오’가 그 이름을 바꾼 전시 공간이다. 처음 이름이 입주건물명인 솔로몬빌딩에서 딴 것이라면, 이번 이름은 이 건물의 독특한 구조에서 땄다. 부채꼴 모양의 건물에는 마치 케이크를 잘라 놓은 듯 켜켜이 작은 공간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모양새를 한 것은 황학동 중고품시장이라는 특성상 작은 공간에 많은 상점이 들어 설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황학동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은 제작·유통되어 누군가의 소유물로 쓰이다가 그 기능을 다한 후 거리에 나온 것들로 이곳에서 말끔히 단장하고 다시 진열대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까 시장의 제도적인 단계를 지나거나 (어떤 이유로든) 그 효력을 잃은 물건들이 제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상품으로 재출현하는 ‘최후의 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어느 호시절에는 건물에 빈 공간 하나 없이 상점과 작업장이 입주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임대가 되지 않는 건물의 일부 빈 공간에 미술인들이 찾아오면서 전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 공사 이후, 문화인류학이나 도시계획학 등 연구를 위해 황학동을 찾던 발걸음이 사라져갔다. 모두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이곳 시장도 싹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정부는 이 지역을 가리는데 급급했고, 서울의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론할 때 황학동이란 이름을 배제했다. 하지만 지금도 황학동 시장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목도한 이상, 미술을 매개로 기록하고 전시로 드러내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황학동’은 리서처 5명(노해나 안성은 윤민화 이소라 장한별)과 작가 5명(손준호 오진욱 이호인 최기창 최우진)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황학동 솔로몬빌딩 104호를 거점으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2014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황학동 중고품시장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서, 오늘의 황학동 시장을 기록했다.
솔직히 말해서 미술을,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이 반드시 지역성이나 장소성에 기반을 둔 당위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학동 시장의 중앙상가 건물인 솔로몬빌딩의 일부를 점유하고 ‘그곳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은 묘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한 때는 자신들의 거처이자, 상점이 있었던 솔로몬빌딩에 낯선 젊은이들이 찾아들어서 예술을 한다며 전시회를 열고, 그들끼리 어떤 행사들을 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할까. “아마도 그런 일은, 청계천변의 노점상들을 싹 갈아엎고 그럴싸한 상가 건물들을 일렬로 세워둔 일이나, 텃밭을 가꾸던 곳에 들어선 롯데캐슬과도 같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생소한 또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고민을 거듭한 끝에 ‘팀 황학동’을 기획하게 되었다. 황학동 시장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섞이지 못하는 미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황학동과 함께 ‘팀’을 이루고 싶었다.
윤민화・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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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갤러리가 위치한 건물 외관

팀황학동 (15)

팀황학동의 전시장면

 

 

[Exhibition Focus] 어부들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건과 이면을 과도한 연출 장면으로 재현하는 작가 조습.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10월 8일부터 11월 5일까지 갤러리 조선에서 열렸다. <어부들>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작업한 신작을 선보였다. 디자인문화비평가 최범은 조습의 최근작은 ‘밤의 대한민국’을 포착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확립한 조습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개념과 형식으로 무장한 포스트민중미술 대표주자

최범(이하 최) 조습 씨 작품은 이미 많이 알려져서 그동안 간간이 봐왔어요. 처음 본 건 2000년《 디자인 문화비평》(안그라픽스) 2호에 실린 기사에서였고, 실제로 프린트된 작품을 본 건 2005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린 개인전 <묻지마> 전시로 기억하고 있어요.
조습(이하 조) 199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번째 개인전은 2001년 인사미술공간에서 <난 명랑을 보았네>라는 타이틀로 열었습니다. 최범 선생님은 2005년 <묻지마> 전시 때 처음 뵌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작가 경력 15년이 넘었네요. 나도 평론을 시작한 지 25년이 넘었고요. 그동안 여러 평론가가 조습 씨에 대한 글을 발표했는데, 지난해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조습 씨의 <일식> 개인전에 서문을 쓰면서 저도 뒤늦게 조습 평론가 대열에 합류했어요.
사회/과학 문화/과학적인 측면에서 좀 더 폭넓고 다양한 해석을 받고 싶어서 2013년에 최범 선생님께 <일식> 전시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아마도 2005년 <묻지마>하고는 조금 다른 작업이라서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했습니다.
초기 조습 씨 작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저는 조습의 팬이 됐어요. 완전히 내 스타일이었죠.(웃음) 그래서 처음부터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조습의 작품을 보면 시각적으로 워낙 세고 너무 직접적이라 해학, 풍자, 패러디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저게 뭐야?’ 하며 장난 같다는 인상을 먼저 받죠. 또 사진작가인지, 퍼포먼스 작가인지 작가로서 조습 씨의 정체를 초기에는 헷갈려 하기도 했죠.
한국이란 나라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뭐든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별 관심도 없죠. 미술 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굳이 제 직업을 명명하자면 ‘현대미술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일식> 전시 서문 ‘밤의 시간과 벌거벗은 생명들’을 쓰기 위해 조습 씨에 관한 10여 편의 글을 찾아서 찬찬히 다 읽어봤어요. 심광현, 임근준, 노명우 등 웬만한 평론가는 다 썼더라고요. 내가 보기에 조습의 작업은 순수 형식주의보다는 내용주의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조습에 관한 텍스트를 읽는다기보다는 조습이라는 사람을 읽는 프레임, 다시 말해 조습이라는 작가가 한국 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그 틀을 분석하려했지요. 특히 <일식> 연작은 조습의 이전 작업과 많이 달랐어요. 가장 먼저 눈에 띈 형식적인 변화는 낮이 아닌 밤에 촬영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분장 작업도 두드러졌고요. <일식> 연작을 보면서 작업이 변하는 변곡점의 시기임을 감지했습니다.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서 1월부터 6월까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일식> 은 그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간 중에 제작한 연작이죠. 저는 군대를 못 가서 그런지 강원도 최전방 지역에서 생활은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수복지구인 양구, 화천, 인제에서 반공주의 혹은 전쟁의 기억은 제가 흔히 도시에서 느끼던 관념적 반공주의하고는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일식> 연작은 기존 작업과 달라서, 어떻게 읽어야 하나, 처음엔 당황했어요. 하지만 조습 씨와 이야기하고 들여다보면서 서서히 파악됐죠. 조습의 표현 양식이 변하는 계기와 의미는 무엇일까? 고민하면서요. 결론적으로 저는 지금까지 조습 씨의 작업을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합니다. 1999년부터 2012년까지를 1기로,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2기로 말입니다. 1기와 2기의 시각적 차이는, 1기는 배경이 주로 낮의 공간인데 반해 <일식> 연작부터 시작되는 2기는 아직 진행형이지만 배경이 밤이에요. 이런 밤의 풍경이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하는 걸 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걸로 보여요. 1기 낮 시기 작업은 낮의 대한민국을 그린 것이죠. 낮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웃기고 자빠진’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조형언어의 형식은 패러디, 조롱, 해학, 풍자, 전복…, 이고요. 이처럼 낮의 대한민국의 모순을 비판하고 공격하던 태도로 대상에 천착하던 조습은 새로운 생각과 깊이를 얻게 됩니다. 2012년부터 밤의 시대로 들어가 밤의 대한민국을 포착하게 됩니다. 낮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 거죠. 낮의 대한민국의 모순을 비판하고 공격하던 중 그 이면을 포착하게 됩니다. 낮의 사건을 일으킨 진짜 진앙지를 만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사건의 배후는 결국 밤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아요.
강원도 양구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기억하면 딱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그건 밤과 추위입니다. 고도가 높은 지역이고 거주한 시기가 겨울이라서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요. 그리고 해가 떨어지면 제가 처음 경험하는 아주 새까만 밤이 찾아오죠. 그래서 어딜 가든 손전등이 필요한데 그 손전등 불빛 아래 나무, 눈, 돌 뭐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하나가 추위인데 건물 밖에 있는 물건 중에 얼어붙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배우 섭외나 장소 물색 등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등장 인물은 전문 배우가 아니고 주로 제가 평소에 알고 지내는 작가 혹은 동료 선후배들입니다. <일식> 연작은 촬영장소가 주로 강원도라서 4일이나 5일씩 촬영을 하고 돌아왔는데 이번 <어부들> 연작은 촬영지가 제주도라서 2달 정도 제주도에서 합숙 촬영을 했습니다. 다행히 제주시에서 작업실을 빌려줘서 체류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예술인복지재단에서 기금을 지원받아서 마지막 후반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뭐 남자들끼리 지내는 군대 내무반 생활과 비슷합니다.(웃음) 촬영이 전부 바닷가에서 이루어지다보니 간조·만조 물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름이라 낮이 길어진 탓에 촬영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고요. 확실히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고 왔습니다.(웃음)
물리적 비용이나 육체적으로도 힘들겠지만 사람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을텐데?
지금까지 촬영하다가 못 버티고 중간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짧은 시간에 촬영을 해야 해서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문 배우들보다 훨씬 헌신적이고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야 가능한 일이죠. 간혹 제가 잠든 와중에도 이번 작품 촬영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보면 참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좀 더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촬영하다보면 제 자신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사진가도 있고 화가, 조각가도 있고 정당에서 일하는 정치인도 있어요. 그분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자신이 화면에 과장되게 나오는 모습 그 자체에 만족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평상시와는 다른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거죠. 일탈의 경험인데,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시대에 반미치광이가 되어 보는거죠. 대놓고 미친 척하고 살 수는 없지만 사진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니까요.(웃음) 그래서 촬영을 하다보면 어떤 축제 같기도 해요. 요즘 자주 회자되는 일종의 사진 ‘굿’판을 벌리는 자(者)들인거죠. 그들에게는 일종의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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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갤러리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일식〉 전시광경

검은모래,피그먼트프린트,2014

〈빨래〉 피그먼트 프린트 2013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이번 전시 제목인 <어부들(Fishermen)>에 등장하는 인물-군상(群像) 역시 2기의 첫 작업인 <일식> 연작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밤의 공간이 배경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버림받은 자, 누구나 죽여도 되는, 인간이 아닌 존재, 버러지 같은 생명들로 보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주목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즉 ‘벌거벗은 생명’처럼 보입니다.
저는 요즘, 세월호 참사 이후 창작에 대한 공허함을 느끼는데 아무리 힘들었어도 세월호 사건 이전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죠.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참사 이후 창작에 대한 욕망이 사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정신적 공황상태 같은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배신감이 이번 <어부들> 연작에 중요한 중심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봄, 제주 4·3항쟁 기념 전시 때문에 제주도를 여러 번 오가면서 바다와 관련된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작업도 사실 물속에 수장된 사람보다는 그 사람들을 건져내는 육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죠.
저 역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어요. <어부들> 전시에 나오는 사람들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입니다. 원초적 욕망, 살아야겠다는 욕망만 있는 광인의 이미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좀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정상적이지 않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상징이라고나 할까요. 조습 씨는 <어부들> 연작을 통해 바로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습 씨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한국 현대사의 밑바닥 모습은 <일식> 연작에서처럼 휴전선 일대를 헤매는 일종의 공비들이거나, 인간이라고 보기 곤란한 ‘어부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미친 것 같은 어부들의 모습에서 ‘원초적 생명력’ 같은 진부한 해석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대사처럼 “우리, 인간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요. 또 다른 질문을 해보죠. 현대미술 어법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람객은 조습 씨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어떤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이 드러나는 방식, 즉 형식 때문에 내용적인 측면에서 놓치는 게 많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하게 됩니다.
요즘 미술 하는 사람들도 미술을 잘 모르는데요.(웃음) 제 작업은 저를 이해해주는 ‘고정 팬’과 가는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기존 ‘고객’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인가요?(웃음) 고정 팬을 위해서 가겠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미술제도의 혜택을 보는 ‘제도권 작가’로 미술 시스템에 안착하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예컨대 미술 시스템에 문외한인 일반인에게 이우환의 어려움과 조습의 어려움, 그 자체는 같습니다. 하지만 두 작가의 어려움은 완전히 다른 겁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는 조습이 이우환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죠. 그건 작가마다 특화된 조형언어 측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대상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조습 씨의 이번 작품이 너무 예쁘고 완성도가 굉장히 높아서 어떻게 이해할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글쎄요. 그리 잘 만든 사진 같지는 않은데요.(웃음) 요즘 최근 사람들에게 제 작업이 ‘물화(物化)’됐다는 얘기를 듣기는 해요. 제 생각에도 예전에는 행위와 과정 자체를 즐기는데서 끝이었다면, 지금은 그 결과에서 완성된 시각적 효과를 찾으려고 노력하합니다. 오래 하다보니 장비를 다루는 기술이나 연출 등에서 양식적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결국은 카메라나 후보정, 프린트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웃음)
누군가는 이런 테크닉이나 스킬이 좋아진 것이 작품의 의미와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너 작품 팔아먹으려고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지?”라고 물어 볼 수도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얘기하시는 분은 없어요. 예전에 제 작품이 팔릴 확률이 3% 미만이었다면 지금은 9% 정도까지 높아진 것 같아요. 이런 확률 수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소위 미술판에서 ‘잘나가는 작가’가 되는 건데, 저는 앞으로도 기껏해야 지금 이 정도를 유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서 미술작품을 파는 것은 100% 작가의 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걸작 중에 걸작은 이한열 걸개그림을 패러디한 <습이를 살려내라>(2002년)일 텐데, 이런 작업을 하던 친구가 ‘미술관 작가’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습이 미술관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거든요.
2012년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열린 <달타령>과 2013년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일식>을 비교하면서 몇몇 분이 그런 점을 아쉬워하라고요. 더 다듬지 말고 날것 같은 모습, 시대의 야만성, 우리들의 탐욕 등을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분들 눈에는 계속 다듬어지고 제도화된다는 느낌이 나나 봐요.
사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이런 것이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모순이고, 작가들은 이 모순과 함께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부들> 작업이 리움에 소장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타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의 부르주아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만약에 이런 작업을 리움이 수용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속물적 수용이지 조습 작품의 메시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메시지 수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모순을 일정정도 수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영향 받은 외국 작가는 있나요?
미술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외국 작가보다는 생각을 같이하는 한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가까이는 ‘현실과 발언’ 선생님들부터 조금 더 가까이는 2000년대 중반까지 대안공간 풀이나《 포럼 A》가 그분들이죠.
생각보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납니다. 나는 1980년대를 관통한 70년대 학번이고, 조습 씨는 90년대 학번입니다. 20대 초반에 선배 세대들이 겪은 1980년대에 대한 동경, 혹은 자신이 겪지 못한 시대경험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있지 않나요.
원래부터 제가 발 디디고 사는 시대의 모습에 호기심이 많았어요. 1980년대를 안 살아본 자의 한(恨)이랄까?(웃음) 지금은 1970년대를 경험하고 있지만요.(웃음) 그렇게 지금 사회 변화의 원류를 찾고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거죠.
조습은 역사의식 빼면 시체! 역사의식을 작업의 기반으로 삼아, 콘텐츠는 하드코어 같지만 시각적 형식은 매우 자유로워요. 바로 이 지점이 기존의 리얼리즘 미술과 구별되는 차이점이고 여기에 쾌락과 재미가 덧붙은 작업이지요. 내가 앞서 첫눈에 조습 씨의 작업을 이해한다고 한 것도 그 지점입니다. 민중미술과 포스트민중미술의 차이라고나 할까. 저는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디자인 쪽에선 1980~90년대 미학운동이 없기 때문에 민중미술 판에 참여했지요. 하지만 민중미술에 정치적 측면에서만 동의한 것이지 미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개념적 의미에서만 동의한 것이죠. 이런 면에서 조습 씨의 작품은 나에게 시각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쾌락을 줍니다. 이런 개념과 형식의 조합을 ‘포스트민중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조습 씨 팬이 됐다고 한 겁니다. 조습 씨의 작품은 기존의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에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으니까요.

진행 정리・이준희 편집장

습이를 살려내라, 디지털 라이트 젯 프린트, 2002

〈습이를 살려내라〉 디지털 라이트 젯 프린트 2002

조습(본명 조병철)은 1976년 온양에서 태어났다.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 10회와 〈제2회 타이틀 매치전 이강소 vs 조습〉(쌈지스페이스, 2003), 〈코리안 랩소디〉(삼성미술관 리움, 2014)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13회 오늘의 젊은예술가상〉(문화관광체육부, 2005)을 수상했고, 쌈지스페이스, 비즈아트(상하이), 도쿄윈터싸이트(도쿄), 창동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인천아트플랫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최범은 1957년 태어나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디자인》 편집장,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 출판사 시지락 대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계약 교수, 〈200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 희망제작소 간판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hibition Topic] Donald Judd

20세기 미술의 거장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개인전이 10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다. 도날드 저드는 1960년대 초부터 1994년 타계할 때까지 전통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재료 및 기술, 형태, 반복과 색채 등을 엄격하게 탐구해 회화도 조각도 아닌 오브제를 제작하고 ‘특정한 사물’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제>(1991)를 비롯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작가의 입체작품 총 13점을 만날 수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특수하다

정은영  한국교원대 교수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국내 개인전이 열렸다. 1991년 이후 20여 년 만이다. 전시의 첫인상은 ‘저드의 미니멀아트가 바야흐로 ‘클래식 모던’이 되었구나’로 요약된다. 이는 단지 도날드 저드라는 이름이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올해는 그가 작고한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해다), 그의 작업이 지닌 ‘클래식한’ 원리가 현재의 동시대미술을 배경으로 하여 비로소 확실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본 단위인 모듈을 정확하게 반복하고 리듬감 있게 변주하는 단순한 구성, 재료의 본래적인 재질과 속성에 어떠한 자의적 표현이나 사적인 감정도 더하지 않은 절제된 태도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모더니즘의 진면목을 확인한다.
그러나 ‘클래식 모던’을 단순히 세련되고 편안한 조형미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저드뿐 아니라 미니멀리즘의 핵심을 간과하는 것이다. 1960년대 초 뉴욕에서 등장한 미니멀아트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래(古來)의 질문과 갈수록 첨예해지는 현대미술의 난제(難題)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예술의 종말’이나 ‘역사의 종언’과 같은 이른바 ‘끝내기’ 담론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로 인하여,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는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클래식 모던’의 표면을 지탱하고 있는 저드의 이면(裏面), 미니멀리즘의 중핵(中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미니멀리즘이 겪은 역사적인 부침(浮沈)은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이론과 현장에서 드러난 아이러니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처음 등장했을 당시 미니멀아트는 마이클 프리드와 같은 모더니즘 이론가들로부터 그 단순한 사물성이 모더니즘의 순수성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세운 신표현주의 회화가 유행했을 때에는 그 단순한 형식성이 억압적인 모더니즘의 온상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미니멀 작업에서 출발한 젊은 작가들이 개념미술이나 프로세스아트 혹은 대지미술로 외연을 확장하여 그 내적인 유연성을 실험할 때, 페미니즘 미술가와 이론가들에게 금속 박스와 강철판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된 차가운 권력의 상징으로 고착되어 파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순적인 반응은 미니멀리즘 자체의 복합적인 위상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정점에서 그 형식을 사용하여 그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내파(內破)한 역사적인 접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회고하건대 모더니즘의 형식 속에 탈(脫)모더니즘의 맹아를 품고 있던 미니멀아트는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을 잇는 통로에서 상황에 따라 어느 쪽으로도 열릴 수 있는 문과 흡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저드의 사물들, 예컨대 매끈하게 처리된 알루미늄 판이나 맑은 순색의 플랙시글라스, 아연 도금한 강철 박스나 대형 합판으로 만들어진 입방체에서 전통적인 조각도, 그것이 해체된 설치도 아닌, ‘명료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구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명료하지만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은 상이한 방향으로 열릴 수 있는 하나의 문이다. 단순한 구조와 절제된 구성에 방점을 찍는 이는 ‘적을수록 많다’는 모더니즘의 격률을 되새길 것이고, 회화도 조각도 아닌 입방체가 벽에 걸려 있는 상황에 방점을 찍는 이는 그 사물들의 ‘기이한 위상(位相)’에 주목할 것이다. 30여 년에 걸친 저드 작업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서 당신은 어느 쪽으로 문을 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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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왼쪽) 나무 91.5×152.4×152.4cm 1989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편이다.
저드는 이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을 ‘특수한 사물들(specific objects)’이라 불렀다. 미니멀리즘의 필독서라 여겨지는 저드의 비평문 <특수한 사물들>(1965)은 바로 이 “회화도 조각도 아닌 것(neither painting nor sculpture)”을 상찬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1 한때 사람들은 이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을 지칭하는 데에 ‘알 수 있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초기 저드를 대표하는 밝은 선홍색(cadmium red light)의 목제 구조물을 ‘신발 걸이(shoe rack)’라고 부르거나 내부가 드러난 코르텐 강철 박스가 층층이 쌓인 연속 구조물을 ‘스택(stack)’이라 칭하는 등, ‘알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한 명칭을 붙여 대상을 규정하는 일종의 ‘개념적인 길들이기’를 시도한 것이다.
‘특수한 사물’은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드의 대답이다. 어찌 보면 그는 ‘예술작품’이라는 용어를 ‘특수한 사물’이라는 구문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예술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을 ‘구체적이고 분명한’ 형용사로 대체하고, ‘작품’이라는 위계적인 존재를 ‘사물’이라는 비위계적인 차원으로 환치한 것이다.
특수한 것은 특정하고(particular) 분명하며(distinct) 개별적(singular)이다. 특수와 개별, 이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일차적인 존재방식이며, 따라서 ‘특수한 사물들’은 사실상 모든 존재자를 일컫는 말과 다름없다. 우리는 이 특수와 개별을 주어진 범주에 따라 분류하고 일정한 개념에 적용하여 보편과 일반에 귀속시킨다. 보편과 일반이 관념의 영역이라면 특수와 개별은 존재의 영역이다. 하지만 보편 관념은 추상될 뿐 오직 개별 존재만이 살아지고(lived) 체험된다. 저드가 개별을 보편 속에 포섭하는 일체의 개념을 거부하는 이유다.2
“존재하는 것들[만]이 존재하며,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편이다. 여기에 그것들이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동등하고 단지 존재할 뿐, 가치나 관심은 우연한 것에 불과하다.” 3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저드의 화법은 단도직입적인 ‘직설법’이다. 어떠한 은유나 상징에도 의존하지 않는 즉물적인 사태(事態) 속에서 저드의 ‘특수한 사물들’이 무엇인가 말을 건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특수하다’는 것이리라. 저드의 말대로, 여기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추론이나 연역도 필요치 않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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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왼쪽) 나무 알루미늄에 채색 121.9×210.8×121.9cm 1988 (1963년 작품 재 제작)


1 Donald Judd, , 《Arts Yearbook 8》, 1965, pp.74~84. 수많은 작품을 거론한 이 글에서 저드는 정작 자신의 작업은 언급하지 않았고 비평문 끝에 “내가 아니라 편집자가 내 작품의 사진을 삽입하였다”라고 첨언하며 비평가 저드와 미술가 저드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그가 자신의 작품을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수한 사물’로 보았음은 확실하다.
2 저드가 미니멀아트라는 용어를 거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용어의 부적절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때 유행했던 것처럼 미니멀리즘 대신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더 효과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개별 작가들의 차이를 무효화하는 단체 명칭, 즉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대체해버리는 개념적인 용어였다는 뜻이다.
3 Donald Judd, <Black, White, and Gray>, 《Arts Magazine》,  Vol.38, No.6 , March 1964, pp.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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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저드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도날드 저드 재단 공동대표 플래빈 저드(Flavin Ju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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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저드의 개인전을 맞아 그의 아들이자 도날드 저드 재단 공동대표인 플래빈 저드가 내한했다. 한국 교원대 정은영 교수는 지난 10월 30일 국제갤러리에서 플래빈 저드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저드의 삶과 작업세계에 관해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20여 년 만에 한국에서 도날드 저드의 개인전이 개최되었습니다. 저드 재단(Donald Judd Foundation) 공동대표로서 소감이 어떠신지요.
플래빈 저드(이하 ‘FJ’) 1991년 한국에서 처음 저드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만, 이번 기회를 통해 아버지의 주요 작품들을 선보이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도날드 저드는 1946~1947년에 주한미군으로 한국에서 복무했습니다. 부친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번 개인전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FJ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1991년 전시를 위해 방한하셨을 때 매우 기뻐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주한미군으로 복무할 당시 한국은 그가 겪은 서양 문화와 많이 달랐지만 40여 년 후 다시 방문한 한국은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죠. 1980년대에 조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께서 박스 하나를 보여주셨는데, 그 안에 엄청난 액수의 한국 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미군부대에서 용광로 만드는 작업을 하며 받은 추가 수고비였는데, 당시 작업을 도와주셨던 한국 노동자 두 분에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 돈을 모두 미국에 들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 돈을 그들에게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이번 전시를 즐겁게 참관했습니다. 특히 작품이 설치된 방식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 전시에서 특별히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FJ 전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간 내에서 작품이 조화를 이루는가’하는 점입니다. 20여 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되는 개인전이기 때문에 (일반) 전시보다도 관람객의 동선을 많이 고려했습니다. K3 전시관의 경우 공간의 특징에 따라 작품과 작품 사이를 비교적 여유있게 배치하였습니다. 가끔 연작 시리즈를 병렬 배치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작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상호관계를 고려해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저는 특히 K3 전시관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은 전시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서로 마주보는 식으로 배치되어, 함께 공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각각의 작품이 작품 안의 공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간과 작품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드를 컬러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특히 밝은 선홍색(cadmium red light)은 저드의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색채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초기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FJ 그는 색채에 관심이 매우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드가 “차가운 느낌의 작품을 많이 만든다”라고 하는데 핫핑크나 선홍색은 결코 차가운 색채가 아닙니다. 이런 평판은 편견이 만든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저드는 이 빨간색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색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색깔이죠. 특히 초기에는 이런 색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저드의 작품은 역사적인 맥락보다는 공간적인 상황이 매우 중요한데요.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매우 역사적인 미술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FJ 저드는 사실 역사적인 배경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인 맥락, 곧 미술사적인 측면을 작품에 연관시키는 상황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드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작품에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렇게 보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30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들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저드는 당시 사람들이 깊이 탐구하지 않은 매우 새로운 요소를 탐구했고, 저드 이후에 많은 작가가 비슷한 요소를 탐구하면서 이제는 저드가 개척한 영역이 문화적으로 익숙해지고 나아가 하나의 장르로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텍사스 주 마파(Marfa)에 있는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 미술관과 저드가 지은 집을 방문했을 때, 저드의 작품에서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무시간적(timeless)과 역사성이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FJ 네, 현대적인 느낌도 들고 옛날 느낌도 들었을 겁니다. 어제 만든 작품 같기도 하고 또 수십 년 전에 만든 작품 같기도 합니다. 작품 자체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해놓은 작품 전체 배치를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단 하나의 변화도 더하지 않았어요.
저드의 작품은 역사적인 참조점(reference)이 없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주는 시간을 관객이 그대로 느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FJ 시간적 개념이 필요 없이 그 작품 자체가 강렬하게 다가온다면 보는 사람은 시간적인 프레임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습니다. 우리는 신전의 허물어진 부분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드의 작품에는 그런 면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시간적 차이나 흐름도 느끼지 않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지 그 작품이 강렬하다면 시간적인 이해나 인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드의 작품을 경험주의나 실용주의와 연관지어 언급하곤 하는데요. 실용주의나 경험주의 철학이 저드의 작품에 어떻게 묻어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FJ 적절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철학이 플라톤의 철학을 전복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모든 사물에 그 사물의 존재를 결정하는 이데아 혹은 언어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전까지는 사물을 존재 자체로 인식했습니다. 저드는 플라톤 이후 2000년 이상 지속된 관념적인 철학을 타파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검증할 수 모든 것의 정의 또한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확장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범주화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는 과학적으로 실재하는 것,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형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했습니다. 실재하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역사적인 궤적에 의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수용하는 작품세계를 추구했습니다.
저드가 1920년대의 미국철학에 관심이 있었나요?
FJ 네, 특히 (기호학자) 퍼스(Charles S. Peirce)를 좋아했습니다. 저도 퍼스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수학적인 논리철학으로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으로는 문화를 설명할 수 없죠. 문화는 수학의 논리적 범주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언어와 보통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들여다보는 학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퍼스의 기호학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죠. 또한 그래서 저드의 작품이 계속해서 기본적인 물리학과 과학적인 영역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저드는 (수학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드는 세계가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철학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의 중심을 보면 물리학적인 측면이 다분합니다.
저드의 작품은 비(非)위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지요.
FJ 아버지는 미국 중서부 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중서부에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돼 있는데요. 굉장히 실용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 그런 생활방식이랄까요, 아버지는 그런 면에서 중서부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컨대 미주리 농장에서 별을 본다고 하면 그 별을 보면서 얼마나 고상한 생각을 많이 하겠습니까? ‘신이 별을 만들었구나’, ‘이 세계가 굉장히 흥미롭구나’하는 식으로 생각하겠죠. 아버지는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흥미로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저드의 말이 있는데요.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입니다. 이러한 저드의 철학이 이번 전시 작품에 그대로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FJ 네, 그게 바로 아버지께서 좋아하고 탐구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저드의 작품이 언어에 저항한다는 점입니다.
FJ 네, 언어에 대항해야만 합니다. 서너 문장으로 축약되는 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 국제갤러리 개인전은 한국 관객들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도날드 저드의 주요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입니다.
FJ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히 이 전시는 그의 작품들이 공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어떤 흐름을 지니고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시대별로 다양한 형식의 작품으로 구성했습니다. 작품 간의 연관성이나 작업 전체의 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rtrait of Donald Judd 1991_high res

도날드 저드 1991© Judd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La Mansana de Chinati-The Block, Southwest Studio, Marfa, TX

텍사스 주 마파에 위치한 치나티 재단 (La Mansana de Chinati/The Block)남서부 스튜디오 내부광경 © Judd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Exhibition Topic] Changwon Sculpture Biennale 2014

지역주의 비엔날레의 씨앗

‘달 그림자(月影, The Shade of the Moon)’를 주제로 한 <2014 창원조각비엔날레>가 돝섬, 마산항중앙부두, 창원시립문신미술관, 창동 일대에서 9월 25일부터 11월 9일까지의 대장정을 마쳤다. 조각 장르에 한정하는 특이한 성격의 비엔날레인 <창원조각 비엔날레>는 그러나 지역에 대한 생태 연구를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현대미술을 체험하게끔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오늘날 예술이 주창하는 ‘예술의 공공성’을 어떻게 현현해야 하는지를 풀어냈다는 의미다. 도시 곳곳에 펼쳐진 비엔날레 현장을 지상(誌上) 공개한다.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격년제 국제미술행사 의 전시 주제 ‘달그림자(月影)’는 최치원의 월영대와 마산공단 여성노동자들의 달그림자, 그리고 오늘날 통합창원시의 앞바다를 비추는 야경을 두루 꿰는 화두다. 그것은 도시의 역사성을 동시대 삶의 공간에 투영하는 일이다. 나아가 이 프로젝트는 조각의 의미를 넓혀 퍼포먼스와 공동체예술로 확장했다. 창원시립문신미술관과 돝섬, 마산항 중앙부두 등에 자리한 조각작품 이외에도 부림시장과 창동일원 등 마산 원도심 곳곳에서 지역사회와 동행하는 공동체예술을 내세웠다. 통합창원시의 에너지를 공공미술과 공동체예술의 흐름에 접목하여 동시대 첨단의 의제를 모아 밀물처럼 밀고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이른바 비엔날레급 전시의 허영을 걷어치우고 삶 속으로 파고드는 예술을 지향했다. 이러한 의도의 성패 여부를 떠나 두 번째 비엔날레를 치른 창원의 도전과 실험은 오늘날 난무하는 비엔날레에 대해 무용론을 펼치는 따가운 시선들 앞에 지역주의 비엔날레의 씨앗을 제시했다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차별화 전략은 광주와 부산, 서울, 대구를 거쳐 마산 앞바다에까지 떠오른 ‘비엔날레물신’의 강림하심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달렸다. 비엔날레물신은 전지구적 미술의 첨단 의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증빙하는 예술작품들을 폼나게 선보임으로써 동시대 미술문화권력의 지형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곤 한다. 창원의 전략은 이와 반대로 가는 일이었다. 출발점은 장소였다. 창원은 거대한 전시장을 꾸미지 않고 도시공간 곳곳을 선택했다. 한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열리는 격년제 국제미술행사들 가운데 이렇듯 전시장 바깥 삶의 공간을 주요 장소로 선택한 행사는 여지껏 없었다. 조각프로젝트라는 규정에 갇혀 조각작품들을 모아서 일회성 전시에 출품하거나 단선적인 장소특정성에 머무는 조각들의 나열을 피하기 위해 <창원조각비엔날레>는 도시의 서사를 끌어들였다. 도시의 장소성으로부터 출발한 창원의 프로젝트는 지역주의 비엔날레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창원을 위한, 창원에 의한, 창원의 예술축제로 나아가기 위한 밑그림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전시 주제 ‘달그림자’는 시각예술을 전시장이라는 고유의 장이 아닌 삶의 공간으로 확장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최태만 예술감독은 이은상, 이원수, 김종영, 문신 등 창원 출신 예술가들을 언급하며 창원시민에게 이번 프로젝트가 달그림자처럼 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달그림자라는 문학적 수사를 구사했다. 달그림자는 자연스럽게 삶 속으로 스며드는 예술을 은유한다. ‘달은 온 세상을 비추고, 예술이 그 달그림자처럼 세상으로 스며든다’는 슬로건은 말잔치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다. 마산합포구 월영동의 월영대는 9세기경 마산 합포에 머물렀던 최치원이 세운 정자다. 그가 머물며 시문을 읊던 월영대의 정신이 천년의 세월을 건너 동시대예술축제의 화두로 떠올랐다. 마산합포구는 물류집산지이자 해운의 거점으로서 한국의 산업화 시대를 이끈 장소이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은유하는 장소이다. 도시의 역사를 동시대 삶의 현장에서 재확인하고 그 에너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서 작은 섬을 둘러보고, 부둣가를 걸으며 대형조각을 만나고, 미술관 전시장에서 눈밝은 큐레이터가 모은 좋은 작품들을 만나는 사이 관객은 도시 공간 자체의 매력과 예술 사이의 밀착관계에 빠져들 만했다. 이러한 관객 동선의 구조를 내밀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이 시장통과 골목길이다. 시민들의 삶의 공간 속에서 그들의 내밀한 서사와 호흡하면서 예술을 만나는 일. 그것은 공간을 떠돌며 시간의 층위를 만나고 그 속에서 도시의 장소성을 재발견하게 하려는 기획 의도를 담고 있다. 예술작품 자체에 짓눌려 정작 도시의 시공간을 만나지 못하기 십상인 비엔날레 동선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도시 속으로 스며들고자 하는 일이다. 시장 속 예술가들의 작품들에는 깨알 같은 만남의 과정들이 선연히 배어있다.
박경주는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생방송 좌담과 이주여성 요리대회를 펼치고, 샤르밀라 사만트는 전성기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활동했던 옛 여공 공동체와 협업했다. 허태원은 봉제업의 현장성을 추적하며 공동체에 다가섰으며, 옥정호는 부모님의 고향인 마산의 개천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다문화 상황에 적응하여 혼성문화를 창출하는 타이완의 첸칭야오는 시장 사람들과 체조를 했고, 김월식은 시장 상인들의 염원을 적은 소원종이와 폐지로 시장불(佛)을 만들었다. 공원과 미술관에 놓인 조각들도 거대 조각의 무게를 덜어내고, 장소에서 서사를 끌어내려는 작업이 많아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조전환은 돝섬 한켠에 자리잡은 소박한 불상에 전통건축의 모티프를 따서 유리집을 지어주었고, 정만영은 돝섬의 팔각정에서 마산의 소리를 들려준다. 천경우는 시민들의 지리적 인지를 추상화하여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리짠양을 비롯한 조각가들의 인체 형상 조각은 오늘날 빈곤한 서사로 인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국 미술계의 현실과 대비되는 깨우침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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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나 < A void > 혼합매체 1200×400×800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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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무늬만 커뮤니티 <시장불(市場佛)> 혼합매체 400×400×400cm 2014

대회의 진정성과 실효성은 지속적인 실천이 관건
<창원조각비엔날레>는 마산 출신 조각가 문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에 시작한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 출발했다. 당시 창원시립문신미술관이 있는 추산공원에 국제조각공원을 조성했고, 이를 확장하여 2012년에 <창원조각비엔날레>를 만든 것. 돝섬에서 열린 첫 번째 행사와의 차이점을 들자면 전시장소를 도시 곳곳으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조각의 범주를 퍼포먼스 아카이브 시민참여형 작업 등으로 확장한 것도 변화다. 또한 작가군을 형성하는 시각 또한 남다르다. 창원은 몽골 베트남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타이 타이완 파키스탄 등 아시아 11개국의 작가 41인(팀)을 초청했다. 아시아 작가에 주목한 것은 서구 중심의 비엔날레 지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다. 유럽이나 미국 중심의 국제미술계 흐름을 추종하는 여타의 비엔날레들이 1세계 중심의 전지구화 문화권력을 확대 재생산하며 아시아와 한국의 예술을 스스로 주변부의 것으로 만든다는 비판적 성찰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전지구화와 동행하는 비엔날레들이 국제주의의 미망에 갇혀 국제적으로 유명한 비엔날레급 작가들 중심으로 게임을 벌이며 유명 큐레이터들을 모셔와 1세계 중심의 미술잔치를 벌이는 것에 비해 지역성의 화두를 가지고 아시아지역 예술가들과 창원을 접목하려는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행사는 분명한 차별화지점을 가진다. 특히 근대 도시들이 안고 있는 도심공동화 문제에 대해 창동시장의 창동예술촌, 부림시장의 공예촌 등의 인프라에 주목하고 전지구 미술계의 주변부 국가나 도시의 예술가들을 한국 작가들과 연계하는 데 공을 들였다. 창원의 시간과 공간을 집약하는 장소성에 동시대 전지구적 문맥 속에서의 관계망 만들기 차원이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마산의 장소특정성을 내세운 비엔날레로 특성화됐다.
예술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고민은 이번 프로젝트의 최대 관건이다. 그것은 일종의 실험이자 모험이었다. 시민들의 삶의 공간을 따라 걸으며 도시를 체험하는 것과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을 한 꾸러미로 엮어낸 발상은 분명 전시장미술과는 다른 현장미술의 장점이다. 광주비엔날레가 대인시장프로젝트를 특별전 형태로 끌어들인 바 있고, 부산비엔날레도 도시공간 속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간간이 기울였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배치해 시장바닥에서 비엔날레의 주력 콘텐츠들을 만나게 하려는 시도는 보기 어려웠다. 지역성이라는 거창한 화두를 내건 데 비해 현장에 둥지를 튼 실행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은 매우 버거워 보였다. 다양한 욕망들이 공존하는 삶의 공간에서 예술로서 소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준 일련의 전시물들은 이번 프로젝트의 좋은 성과이면서 동시에 단기간에 걸친 공동체예술의 과제를 보여주었다.
‘확장된 조각 개념으로 지역사회와 동행하는 비엔날레’를 표방한 이 행사는 시민들을 관객으로 조직하기 이전에 예술창작을 통한 문화생산의 동반자로 만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문제는 최태만 감독의 이러한 구상을 1년 남짓한 준비기간과 두어 달의 전시 기간에 제대로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지역사회와 동행하는 예술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은 한두 해 꼼지락거려서 될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의 구상은 일회성 말잔치에 그칠지 아니면 명실공히 도시의 지역성을 담보하는 예술프로젝트로 자리 잡을지가 달려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도시공간의 해석과 참여와 개입의 예술은 지속적인 실천에 의해 그 진정성과 실효성이 판가름날 사안이다.
창원을 비롯한 대다수 비엔날레가 아직은 난민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조직위원회의 이름으로 해마다 예술감독을 바꿔가며 그때그때 다른 지향과 방법론을 적용하는 비효율성을 넘어서야 한다.
물론 새로운 시각을 가진 예술감독을 통해 서로 다른 관점의 예술흐름을 따라잡는 것이 비엔날레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조사연구와 업무추진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언제까지 야전에 텐트 치고 게릴라처럼 수십억 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국제미술행사를 일회용 담당자들에게 맡겨둘 것인가. 조직을 비대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더라도 지금처럼 기획인력들을 일회용으로 소모하는 구조에서는 좋은 행사를 만들기 어렵다. 국제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힌 비엔날레 사냥꾼들에게 한국의 몇몇 도시만한 먹잇감도 드물다는 뒷담화를 걷어내려면 일회성 인력과 조직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신생 비엔날레인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지역성과 공공성을 담보한 창원시민의 예술축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타도시 비엔날레들에서 발생하는 운영상 불협화음을 불식할 수 있는 중장기계획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유난히 불미스러운 일이 도드라졌던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가 여전히 광주와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보다는 현대미술 담론의 최전선에 치중하거나 저급한 문화권력놀이에 골몰한 것에 비해 창원은 차분하게 도시의 정체성과 시민의 삶에 다가서고자 했으며 동시대미술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창원은 이 행사의 지속성과 차별화를 담보하기 위해서 ‘지역사회와 동행하는 공동체예술’이라는 문제의식이 말 그대로 도시 속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도 그들처럼 비엔날레 할 수 있다’는 단선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시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지향하는 지역주의 비엔날레의 씨앗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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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움직이지 마세요> 광목천 10×50×65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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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승효상 <앨리스의 방> 혼합매체 980×480×300cm 2014 예전 카페로 쓰이던 공간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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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지역성의 문제는 동시대미술의 주요담론”


예술감독 최태만 국민대 교수

_MG_1356<창원조각비엔날레>의 특징과 이번 대회에 중점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바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창원조각비엔날레>의 특징이라면 신생 비엔날레이고(2회), 조각비엔날레라는 점이다. 또한 전용 전시관이 없다.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지역을 답사하면서 조각의 장르적 특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파종하듯이 도시에 설치하는 것은 이 대회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현대미술을 경험하는 대회로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국제비엔날레를 지향하지만 지역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한 방향성이 작가 선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작가도 소수의 유럽 작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아시아 작가로 국한했다. 창원이라는 도시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작가진은 이에 부합하는 이들로 구성했는데 각 국가의 비수도권 작가를 주로 선정했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발견한 창원(마산)을 정의한다면?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이미 사라진 마산’에 주목했다. 몽고정으로 상징되는 일본 정벌을 위한 여몽연합군 출병의 전초기지이자 개항도시, 식민지 수탈의 현장,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병참도시였으며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와 부마항쟁, 경제개발시기 수출자유지역으로서 도시의 성장과 뒤이은 도심 공동화현상 등 우리가 마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많다. 신마산지역으로부터 창동 등의 원도심에 이르기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즉 골목들로 연결된 마산은 현대미술이 침투할 공간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산은 나에게 ‘곰삭은 도시’로 기억된다.
비엔날레라는 미술 이벤트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 풀어내기 사이에서 야기되는 호불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014년은 거의 ‘비엔날레 풍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러 도시에서 비엔날레가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됐다. 따라서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성과 동시대미술의 담론 생산기지를 지향하기보다 오히려 지역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지역성의 문제가 동시대미술의 주요담론임을 확인하고자 했다. 전시공간을 마산 원도심으로 확장하고 커뮤니티아트를 집중적으로 배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는 조각을 기반으로 하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도시 읽기(urban literacy)’에 집중한 결과 시민 참여형 프로젝트가 많았으며, 이것이야말로 이번 비엔날레의 독자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대회가 차기 대회에 어떤 의미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올해 <창원조각비엔날레>에 대한 반성과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추진위원회도 임의 기구인데다 상설 사무국조차 없기 때문에 대회의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지역의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이고. 창원조각비엔날레추진위원회를 법인으로 만들고 사무국을 설치해야 한다. <창원조각비엔날레>는 결국 창원 시민의 문화예술축제가 되어야 한다. 이제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존재가 창원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이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시민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는 비엔날레는 소모성 행사가 될 확률이 높다.

황석권 수석기자

[Special Artist] 유근택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행복은 오늘에 없는가

다양한 실험을 모색해 한국화의 지평을 넓힌 작가 유근택의 개인전 <끝없는 내일>(11.6~12.28)이 OCI미술관에서 열린다. 유근택은 ‘지금’ ‘여기’의 실경에 주목해 구체적인 일상을 담은 한국의 진경을 과감없이 선보인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유근택의 작업에 대한 이런 저런 글들은 한국화(동양화) 영역의 리더 격인 중견작가의 ‘실험성’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다수의 눈이 역시나 비슷하다. ‘실험’이란 말은 신진이나 작가의 초기 경력을 소개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인데, 중견 중에서도 ‘고참’인 작가의 경우라 독특하다. 그런데 뭉근한 회오리가 몰아치며 무서운 힘을 내듯, 중견의 실험이나 명장의 혁신은 그 지긋한 영향력이 젊음의 순간적 변혁보다 큰 법이다. 더구나 그의 작업은 개인적 실험이라기보다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으로 보이기에.
유근택의 수묵채색 회화전이 대규모로 열리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작업한 회화 60여 점이 ‘끝없는 내일’이라는 제목으로 수송동 OCI미술관에 펼쳐 있다. 그의 실험이 더 진척된 게 분명하다. 이번 전시에선 “그를 굳이 한국화가라 부를 필요가 있을까?”라는 철없는 질문까지 들 정도다. 가까이 눈을 붙여 재료를 확인하지 않으면 거의 유화인 줄 안다. 그래서 우린 자문하게 된다. 어디까지 이어받고 무엇을 떨쳐내는 건가. 동시에 무엇을 들여오고 어디까지 열어두는 건가. 지금 우리가 관심 있게 볼 일은 유근택이 과감하게 밀고 가는 실험성의 내용 자체이다.
전시의 중심을 차지하는 그의 <산수> 연작 10점은 가로 2.7m, 세로 1m 크기의 대작이다.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린 회화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표현 기법이 유화를 닮아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을 무색게 하는 그림들이다. 그런데, 전통화의 재료와 매제를 유념치 않고 마주하는 이 풍경에서, 관람자는 동양과 서양을 모두 느낀다. 눈으로 보며 개인적으로 지각한 풍경이란 점에서 서양화의 시각을 지니고, 회화의 골격과 구조가 되는 먹선들이 전체 구성을 이루기에 한국화의 산수를 떠올린다. 더욱이 긴 폭의 전통 산수화를 수평으로 펼치는 파노라마 정경은 역시 동양적 시각구조이다.
그의 전시에서 확인하듯, 다양하게 전개되는 한국화의 표현언어는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고무적이다. 한지와 먹, 그리고 채색이란 재료의 기본은 살리되 그 외 템페라를 도입, 두꺼운 마티에르를 구사한다. 호분(胡粉)이야 한국화에서 본래 쓰는 것이지만, 이를 유화물감 쓰듯 겹치고 올려서 두껍게 표현하는 색채 구사는 한국화의 관습을 탈피한 것이다. 이렇듯 표현의 이탈은 새로운 감성을 불러오고 시각적 효과는 확장된다.
미술의 창작은 과거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이를 현재에 맞게 바꿔야 하는 것이다. 유근택이 한국화 장르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과 과감히 버리는 것을 생각할 때, 흥미로운 건 그러한 취사선택이 대립적이거나 택일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단, 그의 수묵채색화는 실제 풍경에 기반을 둔 지극히 개인적 시각이란 점에 주목한다. 이는 서양 모더니즘에 근거한 개인주의의 발현이라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실사(實寫)는 이미, 또 언제나 심상(心象)의 투영이라는 동양미학의 태도를 지닌다. 양자는 전혀 다르지만, 유근택의 회화에서 무리 없이 섞인다. 객관의 묘사가 바로 심상의 표현인 동양적 태도는 그의 회화에서 세계를 보는 개인 주체의 서구적 시각과 자연스레 맞물린다.
필자가 특별히 주목하는 게 바로 이 점이다. 유근택 회화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매듭’이 두드러지지 않고, 그 ‘충돌’이 유연하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회화가 가진 ‘모호성(ambiguity)’의 실체라 여기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글을 살펴보면, 많은 비평가가 이 모호성을 주목했지만 이를 그의 그림이 지닌 표현기법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주의적 해석은 유근택 회화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모호함이 작가의 특징적 표현기법이함은 모호한 표현에 대한 단순한 묘사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가 동양화에 입문하여 습득하기 시작한 먹과 채색의 사용, 그리고 여기에 템페라와 호분 등으로 붓질한 뒤 주걱으로 뭉개어 초점을 흐리며 표면에서 동요하는 색채의 효과 등은 모호한 기법에 대해 묘사한 것일 뿐, 이 기법과 연관된 내용은 아니다. 필자의 생각은, 다양한 실험을 통한 표현상의 모호성이 동양과 서양을 교섭하는 회화적 공간을 형성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호성이 가진 ‘중간 영역’의 특성 및 ‘독자적 공간성’은 그의 그림면(picture plane)에 확보된 이질성과의 완충지대와 다름없다. 때문에 그의 회화 표면층에서 벌어지는 동양과 서양의 충돌은 붓질의 완충작용을 통해 흔들리고 동요한다. 이러한 회화적 운동감은 모호한 공간의 층위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 충돌이 순전히 호분과 템페라, 그리고 먹을 통해 이뤄지니 그 반복된 운필의 농밀한 색채 감각이 어느새 현대회화의 다채로운 표현언어를 만들어내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의 모필사생(毛筆寫生)이 미키마우스며 피카추 인형, 그리고 자전거, 빨래, 변기를 그려내도 별반 어색하지 않다. 또 멋진 산수를 묘사하는 준법(皴法)으로 물 빠진 충주호나 황량한 돌산을 그리고, 아파트의 커튼 줄이나 실내의 화분 등 도심 속 평범한 일상을 그려도 나름 그럴듯해 보이는 거다. 한국화의 논법에 일상의 생활이 녹아들면서 그의 회화표면은 모호해진다.
이렇듯 회화의 문화교섭 과정에서 유근택이 과감히 버린 것이 있다면, 화가의 정신을 짓누르던 거대 서사이다. 그의 그림의 공간에선 한국화의 관념적 정신주의가 붕괴되고, 그 자리에 물질적 개인주의가 들어온다. 동경의 세계는 일상생활이 대치하고,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던 시적 공간에 실제 삶의 리얼리티가 그 민낯을 들이민다. 지극히 일상적인 개인의 체험은 이상적 세계와 동떨어진 채, 그 뒤죽박죽된 현실의 혼란과 모순, 그리고 갈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실제는 아름답거나 행복하지 않다. 차라리, 현실의 긴장이 평정에의 동경을 밀착되게 요구하고, 지금의 혼란이 미래의 행복을 절실하게 불러온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그리는 그의 그림은 언제나 내일을 지향한다. 전시의 제목이 <끝없는 내일>인 이유이다.
따라서 작가가 회화 전면에 제시하는 소위 ‘일상’이란 그리 단순치 않다. 일상을 풍경에 녹일 때, 그는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를 그릴 때의 태도”로 임한다고 했다. 진경산수가 실생활의 진(眞)풍경으로 전환되는 셈이고, 그 내용은 예측불가하게 다양하며 복잡하게 된 거다. 한국화에서 동경했던 공통의 이상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일상 속에 스며있는 불안과 욕망, 그리고 긴장 등의 복합적 정서가 그림의 표면에서 맴돈다. 그래서 그의 일상의 모습은 확실한 내러티브가 아닌,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뭔가 숨은 느낌의 이야기다.
그렇듯 구체적이지 않고 함축적인 일상의 표현은 그의 회화를 구상과 추상 사이 어딘가에 위치시킨다. 구상의 외양을 갖춘 추상적 내용이 유근택 회화의 모호함의 실체일 수 있다. 이러한 역설이 회화의 평면에 일종의 ‘사이 공간’을 형성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 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가 유근택 회화를 논하며, “눈과 대상 사이의 중간지대”나 혹은 “자립적 회화 공간”이라 명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네무라 도시아키, <언어, 재잘거림, 침묵, 때로는 소음>, 2005 도쿄 21+yo갤러리에서 열린 유근택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참조) 여하튼 그가 확보한 회화면의 자립적 공간은 주체와 대상, 작가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 선보인 <말하는 벽> 연작은 그것이 구상이긴 하나, 제시하는 내용은 알 수 없다. 스토리 라인은 미확정이다. 서울 경복궁 근처 옛 미국대사관저를 두른 높은 돌담장과 그 아래 모인 아이들 모습을 구체적 설명 없이 암시적으로 제시했다. 세밀하게 묘사된 사간동 돌담벼락에서 소곤거리는 아이들의 불안한 뒷모습과 벽의 세밀한 디테일이 묘하게 어울려 뭔가 숨은 일상의 비밀을 애매한 상태로 제시한다. 그림의 소재인 벽이 주는 단절감은 그 앞에 모인 아이들의 은밀한 소외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그러한 비밀스러운 정서와 복합적 감정이 얽혀 있어 이 그림의 ‘구상성’을 의심하게 된다. 요컨대, 유근택 그림의 모호성은 그것이 그의 표현기법뿐 아니라 내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최근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업들의 주제가 “지독하게 조여진 삶 속에서 또 다른 욕망과 꿈을 간직하며 인내하는 지금 한국인들의 정서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보는 내용은 “서양문화가 스며들어와 동양문화와 충돌하는 개념”이며 “우리 삶이 뒤죽박죽된 비빔밥 같은 세상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전시를 거듭 보면서 유근택이 자신의 작업에서 풀어내려는 화두는 결국 이질성에 대한 주체적 수용이란 생각이 굳어진다. 문화적 충돌의 회화적 대응에 보인 그의 표현언어는 대체로 상징과 은유를 활용하고, 때론 팝아트의 모티프와 포토몽타주의 기법을 쓰고, 그래서 신표현주의, 인상주의, 팝 회화, 초현실주의 같은 서구의 이름에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넘어서는 가장 중요한 미적 태도는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관망’의 자세이다. 이것이 동양화의 재료에서가 아닌 보다 근본적으로 그를 한국화가로 여길 수 있는 궁극적 특징이라 여긴다.

유근택 (9)

<말하는 벽>(맨 오른쪽) 한지에 수묵채색 184×209cm 2014

유근택 회화가 지닌 ‘모호성’의 의미
유근택이 깊은 고민과 실험 후 한국화의 현대화를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시한 때는 1991년 관훈미술관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 1990년대 초이다. 작가로서의 성장 배경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친 수묵화운동과,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의 채색화운동이 있었다. 1984년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 한국화 분야의 중심부에서 ‘현대화’에 대한 요구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던 그다.
1980년대 후반은 한국화단에서 서구미술의 영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때였다. 말하자면, 그 다양하고 자유로운 표현방식에 비해 전통과 관습에 매인 한국화의 경직성에 답답함이 더하고 비교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퍼진 신표현주의의 거침없는 표현은 그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때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안젤름 키퍼나 바젤리츠 등의 화집이었다”고 작가는 술회한다. 그의 말마따나 산수화와 사군자를 관습적으로 배우던 한국화 분야의 예비 작가들에겐 “혼란”과 “갈등”이었다. 이러한 한국화단의 위기의식이 그에겐 ‘약’으로 작용한 듯하다.
유근택의 작업에서 중요한 변화는 1999~2000년의 <창밖을 나선 풍경> 연작과 <다섯 개의 정원> 연작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는 2001~2004년에 제작된 <풍경> 연작이나 <사라짐에 대한 경의> 연작으로 이어지며 유근택 회화의 뚜렷한 표현언어를 형성했다. 정원이나 수풀 등의 풍경에서 짧은 필획이 무수히 반복되며 현대적 산수화의 열린 가능성을 보였다. 파묵(破墨)과 선염(渲染)을 적절히 구사하며, 호분과 수묵으로 다양한 기법을 운용하는 그의 회화는 공간에 두꺼운 재질을 쌓아가며 중첩된 형상들 사이 잔잔한 운동과 흔들리는 율동을 연출한다. 그리고 이 운필의 동요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모호한 공간이다.
더불어 2000년대 초부터 자주 등장한 일상의 풍경을 팝의 감각으로 다룬 실내 정경의 그림들은 묘하게도 영국의 현대회화와 통한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영국 북부의 풍경을 보고 그린 실경 회화의 자연스러움이나, 키타이(R.B Kitaj)의 팝아트 회화는 파스텔과 같이 흐릿한 기법과 몽타주 방식에서 예기치 않은 공통점을 보여준다. 작가가 의식하지 못한 동시대의 미적 유사성이 다른 문화의 코드에서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영국의 리얼리즘이 유근택 회화의 실제성과 통하는 면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한 생각으로 이번 전시의 <산수> 연작으로 돌아온다. 거울에 비친 반영인 듯, 아니면 데칼코마니 기법처럼 호수 주변의 풍광과 수면에 비친 경치의 구분이 없다. 실제와 허상을 담은 하나의 풍경이다. 멀리서 보면 동양화의 구성과 관조가 느껴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뚱하게도 파블로 피카소, 르네 마그리트, 마르셀 뒤샹 등의 작품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진풍경을 보이는 또 다른 풍경엔 서구의 이질적 기호들이 호수면을 부유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맥도날드 로고, 그리고 디즈니 캐릭터와 같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아이콘들이다. 이질성은 어떻게든 수용될 일이다. 관건은 ‘비판적 거리감’을 확보하고, 관조하며 중심을 잡는 일이다. 그리고 내 삶을 위해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유근택의 회화처럼 말이다.
수묵채색을 기조로 하는 한국화의 대표 주자로서 유근택이 보여주는 오늘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한국화의 코드를 끊고 대면하는 ‘지금, 여기’이기에, 비록 온갖 잡스러운 오브제가 난무하는 공간일지라도 그 모습을 관망하는 중심이 느껴진다. 이것이 남루한 오늘, 이 자리에서 꿈과 희망을 내일로 미루더라도 우리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이다. 끝없는 내일이 펼쳐진다 해도 현실의 문제를 껴안고 갈 수 있는 한국화의 자신감이다.●

유근택 (8)
유근택은 196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관훈갤러리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5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베이징, 타이베이 등지에서 열린 기획전에 참여했다. 석남미술상(2000),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3), 하종현미술상(2009)을 수상했다. 현재 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Artist Review] 남경민

이상한 방, 낯선 작업실

남경민은 자신이 동경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해 그들의 화실을 꾸몄다.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풍경 속에 머물다>(11.7~12.19)에서 그는 고전을 소재로 우리나라 옛 화가들의 방 안 풍경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꼼꼼한 소품 묘사와 눈길을 사로잡는 색상으로 재현과 상상의 혼합,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양한 서술의 방식이 공존하는 그가 그린 방을 찾아가 본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현대란 역사적 연대기상의 고정된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서동욱)을 지칭한다. 현대미술 역시 그렇다. 진정한 현대미술이란 현재의 삶과 문화에 대응해 그것에 대한 올바른 사유에 바탕을 둔 미술적 행위일 것이다. 단지 동시대라는 시기에 국한된 미술행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현대미술은 현대라는 시기의 삶이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들에 미술이 밀착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힘이 있어야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다. 현대미술은 그런 맥락 아래 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전제로 한다. 다른 이의 삶과 생각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한 미술가의 다양한 실험과 작업이 펼쳐지는 것이다. 고정된, 절대적인 미술의 어법이란 없다. 미술이란 개념도 늘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단련된다. 니체는 고정적 진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나타남이란 ‘관점 수립의 문제’이다. 새로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존의 가치와 진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며 그 기존의 가치를 비판에 부치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다. 존재자들이란 힘의 외관이기에 힘의 의지는 존재자들이 서로 부정하지 않고 차이를 지닌 상태로 나타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니체에 따르면 존재자들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다른 존재자와의 차이를 지닌 채 자신의 본성 가운데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니체를 이은 들뢰즈를 비롯 탈근대철학자들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었다. ‘나’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아우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생성’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를 알려면 “문밖의 낯선 기호”(들뢰즈)와 부딪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유가 발생한다.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에서 온다. 장자 (莊子)에 의하면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긴장된 균형, 판단 중지의 마음을 일컬어 ‘천균(天鈞)’이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문화의 시스템에 길든 익숙한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이자 라캉 식으로 말하면 상징적인 것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업의 궁극적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탈중심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자 진정한 새로움이란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의 전달에 있다고 본다. 그럼 어떻게 타자를 만나지?
남경민은 자신이 동경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해 방을 꾸몄다. 과거 거장들과의 영혼의 교감을 꿈꾸었다고 한다. 작가가 그린 그들의 방, 작업실은 허구의 방이자 환영에 속한다. 미술사를 참고한 공간 연출인 셈이다. 방이란 사적인 공간이고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을 반영하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들로 방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단원과 혜원, 겸재 및 신사임당의 그림이 민화와 함께 그려져 있다. 그 사이로 베르메르나 모네의 그림 등도 슬쩍 끼워져 있다. 서안과 거문고, 경대, 촛대와 서책을 비롯해 문방사우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 공간은 그대로 선비들의 사랑방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조선시대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이전에는 서양 작가들의 작품이 주종을 이루었다면 이번 근작은 조선시대로 옮겨왔다. 작가에 의하면 동양을 잘 알고 싶다는 욕망, 그래야 서양 것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또한 동양화를 ‘현대화’ 하고자 하는 바람도 깃들어 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동양적인 것, 전통을 이해해야 나를 온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며 더불어 지금의 내 안에는 서양과 동양이 혼재하기에 그 둘의 혼융된 상태를 보여주는 화면이 결국 자신의 초상일 것이라는 말이다. 해서 그려진 그림은 시공을 초월하고 기존 자료를 자의적으로 배열해서 이룬 상상화다. 사실 역사란 상상될 수밖에 없다. 남겨진 제한된 유물과 단편적인 기록에 의거해 빈 부분들을 상상력으로 채운 것이 역사다. 작가는 조선시대 겸재나 단원이 거주하고 그림을 그리던 공간, 방 안을 상상해 그렸다. 당시의 물건들, 그림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사이로 낯선 존재들이 개입하고 침입한다. 허구적인 이 방 안 풍경의 연출은 정교한 기법에 힘입어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질하게 마감된, 비교적 커다란 화면에 빼곡하게 자리한 물건들, 화사한 색상으로 도포된 화면, 부분적인 음영 처리, 사라진 그림자, 원근법에 기반을 두면서도 평면적인 화면, 창과 거울, 그림(액틀) 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반영하면서 만들어진 복잡한 공간 연출 등이 눈에 띈다.

동・서양이 조화된 화실
최근 많은 작가가 이렇게 모방과 차용, 패러디 및 이질적인 양식의 공존, 낯선 기호의 충돌, 재현과 가상이 공존하는 묘한 그림을 그려나간다. 기존의 장르개념이나 확고하고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자 ‘나’ 이외의 타자들을 적극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 미술의 융합, 원근법과 동양화기법의 절충, 고전의 패러디 등이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작업인지,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작업인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낯선 기호, 이질적인 양식의 공존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사임당의 <초충도> 속의 나비가 동영상으로 날아다니거나 전기의 <매화서옥도〉 속 주인공이 특정 캐릭터로 대체되거나 책가도를 사진으로, 민화를 플라스틱 오브제로 만들어내는 여러 작업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는 무척 곤혹스럽다. 이처럼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전통에 대한 인식과 그 해석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고민 대신 원본(전통)의 자유로운 참조와 이에 대한 독창적 번역을 과감하게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통이미지라는 텍스트는 고유한 의미를 발현하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권위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원본의 무게가 탈각된, 언제든지 인용하고 조합할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그저 여러 정보 중 하나가 된다. 그에 따라 이 복수적 텍스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작가에 의해 조작 가능한 수많은 기표로 다루어지고 서로는 자유롭게 접합되고 연쇄된다.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온 시각적 텍스트들이 당대 텍스트들과 마구 뒤섞이면서 작품은 다차원의 공간으로 재영토화하고 그 의미는 무수하게 복수화되어 산개한다.
남경민의 그림 속에는 옛사람들이 사용하던 기물과 당시의 그림들이 있는 방에 반복해서 날개, 날개가 담긴 투명 유리병, 화병에 꽂힌 꽃, 스노 볼, 해골, 나비, 손거울 등이 박혀있다. 일종의 알레고리 역할을 하는 도상들이다. 꽃, 해골, 불 켜진 초(꺼진 초), 하나뿐인 날개 등은 죽음, 덧없음 그리고 좌절을 상징하는 도상들일 것이다. 다분히 바니타스 정물화의 도상들을 연상시킨다. 모방해서 그린 그림들 역시 죽은 이들의 그림이다. 화사하고 환하고 명징하게 다가오는 그림 속 이미지들은 실은 부재와 죽음, 소멸 그리고 부재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동되고 동시에 그것들로 인해 영향 받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장치들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 영향 받은 것들, 그로 인해 형성된 ‘나’를 재현한다. ‘나’는 이처럼 무수한 타자, 낯선 기호들로 직조되어 있다. 화가들은 미술사를 통해 접한 옛그림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다.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그림을 익힌다. 미술관과 화집을 통해 영향 받는 것이 화가다. 남경민은 화집 속의 그림들을 차용해서 방을 꾸몄다. 거장들의 작업실이고 작은 규모의 미술관이다. 화면 가장자리에 그려진 커튼은 이곳이 연극무대처럼 가상으로 이루어졌음을 들여다보라는 배려다. 따라서 방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이미지는 저마다 의미를 지니며 서사적 역할을 한다. 단원과 겸재의 방은 그들이 그린 그림,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공간, 그들의 생애와 관련된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방 안에 있는 그림과 창문을 통해 보이는 그림 속 실제 풍경, 거울에 비친 장면 등이 모두 동일한 그림에서 파생되어 선회한다. 따라서 공간은 다층적인 공간, 열린 공간으로 무수히 확장되어 나가는 느낌을 준다. 실재와 가상이 놀이한다. 눈속임과 트릭이 교차한다. 작가는 이렇게 익숙하지만 한 공간에 공존하면서 낯섦을 유발시키는 기호들을 매끈하고 정교하게 그렸다. 유화로 그려지고 쓰여진 고서화와 한문글자는 익숙한 대상들을 무척 낯설게 한다.
남경민은 한 화면 안에 이른바 동양화와 서양화를 뒤섞었다. 특히 동양화가 유화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고전을 소재로 사실적인 기법(극사실에 유사한)의 그림을 그렸으며 실내를 그린 그림은 정물과 풍경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개별적인 소품들을 꼼꼼히 재현하고 장식한 그림이자 숨은 그림 찾기처럼 보는 이들을 즐겁게 참여시키는 그런 그림이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이질적인 문화, 기호가 충돌하고 교차한다. 따라서 이 그림 안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고유한 것, 확고한 것, 단일한 중심은 부재하고 상이한 것들이 어우러져 완성된다. 차이를 지닌 것들이 모종의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은 채 그들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존재한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익숙한 장면이고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어딘지‘언캐니’하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느낌, 그러니까 원래 낯익은 것이지만 동시에 망각된 것이기에 의식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불안한 모호함에서 발생한 ‘낯익은 낯섦’이라고나 할까. 근대 이후 한국미술은 동양과 서양의 갈등과 차이 속에서 어떻게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 그런데 이 ‘한국적 현대미술’ 혹은 ‘전통의 현대화’란 것이 문제적이다. 그것이 과연 실체 있는 것이 될 수 있나? 그 단어가 성립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전통의 현재화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전통에 기반을 둔 한국현대미술이란 것도 무척 애매보호하다. 이 ‘번역’의 문제를 가장 고통스럽게 인식한 이는 박이소였다. 그는 불가능한 두 영역의 순진한 조우 대신에 그 충돌, 차이, 마찰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한 이다.
남경민은 정보를 재배치하고 이를 사실적인 기법으로 공들여 그린 ‘이상하면서도 예쁜’방을 만들었다. 자기를 이루는 ‘타자’들을 수집했다. 그러고는 이를 재배치했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의 차용과 가상의 연출은 보편적인 어법이 되었다. 이는 동시대미술의 주된 방법론이다. 그 사진·영상이미지의 매끈한 피부 또한 그렇게 이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보들의 가상적 연출만은 아니다. 그 이상의 감정이나 해석이 빠지면 그림은 공허해진다. 작가의 뜨거운 몸을 관통한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붓질의 맛이나 그림 전체의 회화적 느낌, 여운 등은 그곳에서 나온다. 그림은 한 작가의 몸이 만든다. 아니 몸을 관통해서 나온 것이 예술이다. 정보와 가상의 연출, 집요한 그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그림이 과연 전통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가의 몸, 결이 어떻게 화면 위로 배어 나오는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남경민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덕성여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1999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창-드러남, 드러나지 않음>을 시작으로 총 9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2006년에는 제6회 송은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차지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송은문화재단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Artist Review] 남계 이규선

남계 이규선(南溪 李奎鮮, 1938~2014)의 타계는 한국화 화단의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추상적 한국화 작업을 지속해 온 고인의 발자취는 한국화를 바탕으로 한 세계 보편성 획득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전시를 기획했던 필자의 글을 통해 남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文人畵를 지향했던 추상화가

장준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사
지난 9월 26일, 한국화가 남계 이규선(南溪 李奎鮮, 1938~2014)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웠기에 주변의 아쉬움은 크기만 했다. 작품세계 이상으로 인망이 두터웠던 고인이었기에 미술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도 눈물을 훔쳤다. 올봄 고인의 전시를 기획했던 필자에게도 그의 부고는 충격이었다.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이규선은 20세기 한국화(韓國畵)의 추상적 흐름을 선도해온 대표적인 작가로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50여 년 동안 추상적 한국화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개척해왔다. 그는 ‘동양의 미술은 전통적’이고, ‘서양의 미술은 현대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했고, 그 결과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동양적이면서 서구적인 관점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이규선은 서양화로 미술계에 입문했고, 1950년대 후반 국전에서 서양화로 여러 차례 입선할 만큼 학습기에는 서양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스승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과의 만남을 통해 문인화를 접한 뒤 동양화로 진로를 설정했고, 대학 졸업 이후 일신미술가협회(一新美術家協會), 한국화회(韓國畵會) 등 젊은 미술가들의 그룹 활동을 주도하며 한국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이규선이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는 한국의 미술가들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는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 그리고 정신을 이어받은 한국화 작가들에게 더욱 직접적이고 첨예한 문제였다. 이규선 역시 이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작가가 전통적 방식으로 회귀하거나, 서구의 추상적 방법에 경도되었던 반면 이규선은 한국의 정체성 계승과 세계적인 보편성 획득이라는, 어쩌면 상반되고 이질적인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 이를 위한 그의 방법은 단순히 한국의 전통과 서구적 요소를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의 추상화풍 한국화의 단서는 이렇게 마련되었다.
사실 1950-60년대 한국화단은 “추상미술이야말로 진정 현대적인 미술의 형태이며, 참신한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추상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있을 만큼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규선 역시 이러한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장 두드러졌던 앵포르멜과는 거리를 두고, 기하학적 추상과 전통 문인화의 미의식 및 양식의 융합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노선을 걸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기하학적인 구조와 절제된 선, 강렬한 색채와 먹의 대비를 이용해 한국화에서 추상화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후 1980년대에는 검은색과 다양한 밝은 색의 대비 및 발묵 효과를 이용해 자연의 물상들을 연상시키는 따뜻하고 유쾌하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추상화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동양화의 핵심인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와 대비를 정갈하고 담백한 구성 속에 녹여낸 작품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전통문화의 정신적 뿌리에 대한 고뇌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은 이규선의 예술세계의 또 다른 국면을 보여주었다. 과거의 작품이 수묵 중심의 무채색 화면을 통해 동양의 정갈하고 고요한 미(美)의 세계를 제시한 것이었다면, 2008년을 기점으로 한 작품은 밝고 맑은 색면을 검은색, 흰색의 색면과 함께 조화로운 비례의 수직구성 속에 배치함으로써 아름다운 삶과 자연을 노래하는 듯한 뉘앙스(nuance)를 느끼게 했다. 색채와 구성의 조화에 의한 화면의 아름다움은 작가 특유의 탁월한 감각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의도한 것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미를 스스로의 낭만적이면서도 사유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이처럼 이규선은 일관성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추상적 예술 노선을 걸은 흔치 않은 작가였다. 종이와 먹이라는 전통적 재료를 통해 동양의 정신을 구현하면서도 서구적인 조형 감각을 흡수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현대적인 화면을 만들고자 노력한 그의 열정은 진지했다.
“바르고 나면 뿌옇게 되는 동양화 재료에 불만이 많아 신문지에 유화물감을 짜서 기름을 뺀 뒤 바르기도 하고, 한지를 떠가며 붙이는 콜라주 형식도 적용해보는 등 그림의 소재와 기법 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 보았어요. 그렇게 현대화에 동참하는 입장에서 앞서 나아가고자 했지만, 전통 문화의 정신적 뿌리가 무엇인지도 함께 고민했기에 먹과 화선지는 버리지 않으면서 동양화의 특징적인 것을 살리고자 했습니다”라는 그의 대학시절에 대한 회상은 동양화를 현대화하고 개량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노력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지난 4월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전시를 위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걸쳐 전통적 화제(畵題)에 기초한 <시창청공도(詩窓淸供圖)>, <서창청공도(書窓淸供圖)> 연작 총 21점을 새롭게 그렸다. 신작들은 그가 선비의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환희를 화면에 재구성한 것이었다. 작품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가 전시 개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완성한 600호 사이즈의 대작 <시창청공도12>였다. 이규선은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해 밤샘 작업을 거듭하며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76세의 나이로 쉽지 않았을 작업이었겠지만, 그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이를 극복했다. 이규선이 완성된 화면에서 창문 사이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미지는 화가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과 환희 그 자체였다.
그의 예술세계에서 결론이 된 ‘시창청공도’와 ‘서창청공도’ 연작, 그리고 그간의 오랜 예술여정은 결국 그가 지향했던 것이 최초 자신을 한국화로 이끌었던 문인화(文人畵)였음을 말해준다. 사생(寫生)이 아닌 사의(寫意)의 추구, 에스키스(esquisse) 없는 즉흥적인 작화 방식, 작품 제작에 앞선 인성과 지식의 수양과 이에 대한 강조, 상업성과 거리를 두는 자세 등은 필자가 느끼기에 전통시대의 이상적인 문인화가 못지않은 것이었다. 이는 이규선이 오랜 시간 추구해온 작품세계가 단순히 ‘추상화’라는 범주에만 한정지을 수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앞으로 좀 더 긴 시간이 흘렀을 때 그의 작품세계가 21세기의 문인화로 평가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만나기로 한 찻집에서 그는 부인을 대동한 모습이었다. 이제껏 원로작가를 만나면서 접해보지 못한 다소 낯선 상황이었기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이후 어디를 가든 항상 부부가 함께 하고, 정겹게 대화하는 모습은 한참 어린 필자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러한 그의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성격은 전시준비 과정에서도 목격되었다. 전시 작품의 포장과 운송을 맡은 미술품 운송회사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한 배려의 말을 건네고, 또 식사까지 챙기는 모습은 뭇 예술가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격이 그 작품세계의 기반이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마지막이 되어버린 지난 4월의 전시 이후,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던 그의 예술세계만큼이나 그리워질 따름이다. ●
이규선3
故 이규선(李奎鮮)은 1938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61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국전 특선 및 문화공보부장관상, 국무총리상, 추천작가상(1968, 1970, 1972, 1975)을 수상했다. 1967년 서울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2014년 13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자문위원, 인도 트리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역임했다.

[New Face 2014] 전희경

천국보다 낯선, 무릉도원보다 익숙한

전희경 작가의 캔버스는 일견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마치 산수화나 탱화를 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단순히 양립할 수 없는 표현적 요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최근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겸재 내일의 작가상 2013 수상자-전희경>, 10.29~11.16)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는 대부분 이상향 즉 유토피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욕망의 배출구 등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동양화적인 표현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렇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동양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신에 대한 깊은 관찰이 유발한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보이는 색감이나 관심 분야(동양철학, 불교, 도교 등)를 연상시키는 요소는 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몇 번의 여행도 그 과정이었죠.”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고 서구의 천국보다는 동양의 무릉도원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 작가의 그간의 행보를 보면 스스로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 몰아가는 것 같은 인상이다. “‘자발적 유배’ 를 즐긴다고 할까요? 낯선 곳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저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에 있어요. 익숙한 관계와 환경에서는 자신이 더 견고해지지만, 나아질 수 없는 것 같아요.”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작업한 것이 바로 드로잉 연작이란다. 타이완의 외딴 지역인 타이둥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작업했다. 자신의 현재에 대한 반성을 타이완에서 생산되며 불두(佛頭)를 연상시키는 열대과일인 ‘스쟈(釋迦)’ 형상을 통해 드러냈다. 이른바 108번뇌의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전 작가의 작업은 완전한 추상적 형태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지점이라서 그럴겁니다. 구체적 형상의 이미지들은 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처한 삶의 모습을 그렸다면 <산수화> 연작으로 오면서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이상향을 그리는 데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관심의 이동이 정확한 이미지들을 배제하게 하고 점차 붓질과 색감 그리고 구도적 배치 등으로 화면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경을 연상시키는 ‘제3의 공간’을, 구상 혹은 추상에 치우치지 않고 그 경계에 선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전희경 작가의 작품에선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공통된 형상이 있다. 보기에 따라 인체 장기 등을 연상시킨다. “이 이미지들의 시작은 <바디> 드로잉부터였습니다. 몸의 살들이 겹치는 부분을 반복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리다보니 머리와 팔다리 형상은 사라지고 살들의 모습만 남게 되었죠. 이 형상은 간극과 틈 사이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전 작가는 최근 노년의 삶과 죽음을 그린 <아무르>라는 영화를 관심있게 봤다고 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에 그의 캔버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의 이상향은 단순히 유토피아는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삶은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고요.”
공간을 압도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작가는 ‘버티기’가 삶의 강령이 되어버렸단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토대의 중요성을 ‘현실적’으로 깨달았단다. “60줄이 넘으니 이제야 비로소 산이 세모로 보이신다는 어느 노(老)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저의 빈 그릇을 채울 수 있는 내공, 내공을 쌓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황석권 수석기자

전희경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 부산을 비롯 타이베이 등지에서 8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3겸재정선미술관 ‘내일의 작가’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천에서 작업하고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전시광경

겸재정선미술관 전시광경

[New Face 2014] 이병수

극지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가?

작가 이병수는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노마딕 레지던스의 남극 방문 프로그램에 지원할 계획이었다. 프로그램이 무산되면서 그는 결국 남극에 가지 못했다. 지난 2년여간 그는 실제 장소이지만 상상의 공간으로 남겨진 남극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작업으로 풀어냈고, 최근 개인전을 선보였다. 서울 부암동 ‘공간291’ 에서 개최한 <메이드인 안타티카(Made in Antarctica)> (10.30~ 11.30)가 그것이다.
퍼포먼스 그룹 ‘관악무브’와 협업한 <스쿠아의 공격을 예술적으로 대처하는 7가지 방법>은 남극에서는 우리말로 도둑갈매기라 불리는 스쿠아가 사람들의 머리를 자주 공격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유쾌하게 그려낸 작업이다. <해피캠퍼>는 머리에 하얀 통을 쓰고 외 줄에 의지해 이동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퍼포먼스이지만 척박한 땅, 남극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이와 유사한 방식의 훈련을 통해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한다.
작가는 남극이 가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검색을 통해서 실제 남극 관련 관광 상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만 있으면 남극기지까지 도달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남극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설치작업 <빙산의 일각>은 ‘exploration(탐험, 탐사)’의 도전적인 측면이 필연적으로 ‘exploitation(개발, 착취)’의 문제로 연결되는 지점을 두 개의 영어 단어가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 시작했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남극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작가는 이러한 의문이 필연적으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남극을 ‘극지’, ‘가장자리’ 개념과 연결시켰다. “지난해부터 예술가들의 생존 문제가 화두가 되면서 예술가야말로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밀려서 사회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러한 고민은 지하 전시장에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된 <폐쇄된 위계>에서 잘 드러난다. 각자의 미션이 기재된 남극 연구원의 조직도가 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연상시킨다면 예술가는 어떤 특별한 미션 없이 가장자리에 밀려있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병수는 지금까지 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비현실적 상상을 현실로 끌어들여 진지하게 수행해내고 이를 하나의 경험적 사건으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내왔다. <관악산 호랑이>, <희망을 찾아서> 등 프로젝트 개념의 기존 작업 역시 기교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예술과 사회의 관계와 동시대예술의 실천적인 측면을 우직하게 모색해온 결과다. 이병수는 “예술은 결국 극도로 물질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역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술가의 역할도 남극처럼 통제되고 척박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새로운 틈을 만드는 행위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슬비 기자

이병수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서울대 우석홀에서 열린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언어놀이>(성곡미술관), <미래가 끝났을 때>(하이트컬렉션)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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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291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빙산의 일각>(가운데) 철 구조물에 고무와 포맥스 124×183×10cm 2014

 

[Review] 사유의 부정정신을 덮는 무력감

사유의 부정정신을 덮는 무력감

무빙트리엔날레 9.27~10.26, 부산비엔날레 9.20~11.22

문화산업이 되어버린 전시, 비엔날레 또는 트리엔날레는 예술의 저항성을 해체하고 상품화하고 작가를 익명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상품화로 이끌려가고 있다. 그곳에는 동일성의 욕망에 빠진 익명의 상품들이 있을 뿐 개별자의 다양한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없다. 동일화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개별성이 사라진 예술은 이미 예술로서의 어떤 존재감도 가지지 못한다. 이 시대 유일한 사회적 저항인 예술조차 상품이 된 전시에 그토록 목을 매는 기획자와 작가는 누구일까. 그 자신을 상품화하고 몸값을 올리려는 작자들이 아닌지. 한 시대를 저항으로, 지식으로, 감성으로 만나는 조망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한 시대를 사유하는 자가 아니다. 그저 장사꾼들이 예술작품인 척하는 시늉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기존 전시와 다른 길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무빙트리엔날레>는 저항의 한 형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전시라는 구조 안에서 행사를 하겠다는 발상은 현실 추수(現實 追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저항은 언제나 기성세력과 다른 의미 맥락과 전략의 전위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에 미치지 못했다. ‘전시’라는 형태에 집착하고 기존 어법으로 대항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무빙트리엔날레>는 현실 추수와 현실 저항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런데 비하면 <부산비엔날레>는 전시라는 기존 시스템의 덕을 톡톡히 보는 입장이다. 비교할 수 없는 예산과 인력자원과 장소와 시간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 덕에 빠지지 않는 모양을 갖춘 셈이다. 이 대비야말로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그러나 전위적 작품들의 시도마저 정비된 공간에 들게 됨으로 순식간에 전위가 제도화되거나 예각이 무뎌지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공장 일부를 빌려서 한 전시를 비롯해 비엔날레 본전시와 특별전은 밋밋하고 무미했다. 또한 작가나 작품은 전시 전체의 맥락에 묻혀 개별성이 드러나지 않고 볼거리로 내몰려 각이 선 사유는 지워지고 재미와 신기함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무력감을 떠안은 셈이다.
<무빙트리엔날레>는 <부산비엔날레>의 비민주적 전횡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고통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번 한 번이면 족하다. 그만한 대응도 없고 의미심장하게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그 대항적 힘을 확인하게 한 것도 여태껏 없었던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행사는 돋보이고 한국 현대미술사에 한 점, 바둑판의 화점에 돌을 놓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가 대항이 아니라 새로운 힘과 조직이 되고 또 다른 권력이 된다면 기존 <부산비엔날레>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하는 전시 운영과 이념은 새로울 게 없다. 그저 또 하나의 전시를 만들고, 작품은 볼거리로 제시되고 예술이 가진 부정 정신을 부각시키기보다 기획자들이 이 전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동의를 구하는 다급함만 보일 뿐이다. 문화연대로 힘을 보이려 한 탓인지 행사는 산만하고 더욱더 볼거리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규모나 작가군이 다르고 장소가 달라도 여전히 기존 전시조직이 보여주는 권력에의 유혹과 다르지 않다. 단순하게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전횡을 용인하는 제도적 미비에 대한 대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술과 조직이 행사하는 지배의 규정들에 벗어나는 일로부터”((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풀빛 2005 p.309) 개별 주체의 인간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전시와 예술과 기획을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시 유사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이를 기화로 다른 힘을 규합하거나 대항이라는 이름의 유사 국제전을 기획하는 주체로 작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트리엔날레가 기존 조직의 미비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불온한 의도로 만들어졌다거나 운영되었다는 지적이 아니다. 조직이란 언제나 같은 속성 안에서 움직이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조직 운영이 우선적이며 개별자의 배려보다 전체의 일관성, 동일성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예술이 가진 근원적 속성인 개별성은 기존 행사와 마찬가지로 동일화의 추세로 이끌려나갈 수밖에 없으며 정작 우리가 주장하고 안타까워하는 예술성과 예술가의 이미지는 상품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그것이 가난을 무릅쓰고 작업장을 지키고 인생을 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자본이 개인의 감수성을 통제하는”(앞의 책 p.311) 이 시대에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엔날레 등의 국제적 행사는 세계를 동질화하고 자본 예속으로서 제도에 종속되게 하고 있다. 부산비엔날레는 물론이고 트리엔날레 역시 국제전이라는 규모가 요구하는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예술은 이제 개별성의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 시대에 대항한 한 시대의 사유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자본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전시 형국은 결국 예술마저 자본재로 만들거나 그저 볼거리를 제공하는 업자들만 양산할 뿐이다
전시 역시 작품과 작가의 개별성을 부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하고 그저 상품시장에 내놓은 다른 전략일 뿐이다. “예술은 사회적 이성의 타락에 맞섬으로써 존재 의의를 획득한다.”(앞의 책 p.330) 그렇다면 유사한 전략으로 상대를 닮은 쌍둥이를 낳는 것은 올바른 저항의 형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조직을 다듬기보다 다른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며, 상품화되는 세태에서 예술을 온전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기획과 의지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개별성은 사회의 거짓에 참답게 저항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개별성이 참다울 수 있는 까닭은 아무리 사회가 거짓되더라도 개체가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름의 모색을 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p.340) 그래서 현실을 비동일성으로 사유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은 당연히 예술의 몫이며 반성의 역할이어야 하는데 기존 비엔날레에서는 그런 기대가 불가능한 것 같고 트리엔날레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다. 아니 그 역시 자본의 한 축에 의해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우려는 개인의 무능이나 전횡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를 놓치는 데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술작품은 반드시 모든 시대에 유효한 가치는 아니다. 특정 시대의 환경이나 작품을 ‘소비’하는 바로 그 사회집단에만 유효한 가치를 전달한다”(오스틴 해링턴, 정우철 옮김《 예술과 사회이론》 이학사 2014 p.34) 이 말을 되씹을 수 있다면 이 두 행사는 정말 누가, 어느 집단이 ‘소비’하는 가치일까. 여행은 완성을 거부한다. 곧 떠나야 할 것이므로 가능하면 몸을 가볍게 하고 짐을 줄이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사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번쯤 나그네 길을 권하고 인생의 짐을 가능하면 가볍게 하기를 체험해보기 권한다.
<무빙트리엔날레>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한다. 몇 군데로 흩어져 있는 전시 장소를 찾아 나서면서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처음 본 연안부두의 작업들, 가방들은 그런 생각을 마구 쑤셔 넣고 마구 내놓는 그런 형용이고 보는 이의 인상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동 가능한 작품들, 이동 가능한 전시, 그것은 이동의 용이성 때문에 많은 것이 용납되고 허용되고 용서되는 것을 의미한다. 완성도도 전시 방법의 임의성도 우발적인 재치도 그렇다. 단조로운 소재, 가방을 가지고 무빙 워커(트랙)를 따라 전개된 볼거리들은 비슷비슷하고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기획자나 전시 주체의 시선은 분명하지만 작가도 개별적 작품도 드러나지 않는 그런 전시이자 연출이다. 그리고 흔히 비엔날레나 외국 작가가 많이 참가하는 전시에서 목격되는 ‘놓고, 달기’라는 가벼운 편의성, 현장에서 수집하고 버릴 수 있는 소재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공중에 매달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놓이고, 평면으로 공간을 차지하는 산개의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 관리 차원에서 주저주저 수동적으로 연출되는 관람객 참여라는 단조로운 방법들도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그리고 산만할 정도로 쌓아놓거나 평면으로 늘어놓기인데 무빙 트랙에 놓인 가방들 역시 이런 맥락의 재현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적당한 거리에서 보는 것, 현장성도, 개입도 없는 ‘보기’의 맥락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일상은 친근한 일상이 아니고 생활은 삶으로서 생활이 아니라 ‘보기’의 거리를 가진, 모더니즘의 재연이다. 작품 보호라는 명분이 이를 정당화한다면 그 역시 모더니즘의 맥락일 뿐 일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다. 지저분한 것들의 성스러움으로 전도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사물들일 뿐이다. 복병산도, 노인정의 전시도 그저 봐왔던 미디어일 뿐 장소에 적절하거나 생활에 치중했거나 이미 거주하는 것과의 괴리를 없앤 것도 아니고 허술하다. 기상청의 계단은 그저 계단일 뿐 그곳에서 전개된 작품은 그런 기대와 급경사의 노역을 전환시킬 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 거기 있기 때문에 그곳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장소로서 전시공간을 배려한 설치라고 보긴 힘들다. 골목길로 이어지는 전시 장소로의 이동이 도리어 새로운 장소에 대한 새로운 경험, 다양한 곡절의 공간을 체험하는 삽상함으로 이어진다.
급진적 전시, <무빙트리엔날레>가 구성한 이 다급함은 순수니 권위니, 완결성이니 하는 것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완성도 거부하면서 질문할 뿐이다. 그러나 <무빙 트리엔날레>는 그저 말의 넘쳐남과 이미지의 궁핍을 보여줄 뿐이다. 시간, 장소, 예산상 어려움을 들어 몸을 피하고 싶다면 행사는 이미 처음부터 그른 것이다. 몸을 숨기지 말고 현상 자체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빙트리엔날레>가 ‘부패한 욕망’과 만나지지 않기를 바란다. 기존 행사에 대한 저항과 반발, 민주적 운영의 새로운 모색이 곧 그들이 내세운 대의와 운영의 정당성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동일시에 빠지거나 자위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적을 만난 꼴이다. 운영의 정당성은 때로 반드시 결실을 얻기 위해서 관료조직에 의존하는 데 너무 잘 길들어져 있는 부산비엔날레와 다른 논쟁점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다.
<부산비엔날레> 역시 편집증적 징후로 여겨지는 전시 연출과 산만하고 상투적인 작품들은 격년으로 재연되는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맥락은 여느 전시, 여느 해와 다르지 않다. <광주비엔날레>나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베니스나 리옹 혹은 <휘트니비엔날레>나 <요코하마트리엔날레>를 눈여겨본 사람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뻔한 작품군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비엔날레는 그저 국제적 스탠더드일 뿐 어떤 전위적 의지도 없이 그저 상업화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흐름에 역주행하는 개체성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고 작가의 존재 이유지만 이 전시에서 작가는 없어지고 전시만 남은, 그런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판단될 것이다. 게다가 사회 비판이라는 다급함에 몰린 듯 제의적인 연출과 작품들이 눈에 띄지만 느슨하기만 하다. 죽음, 고발, 고통, 소외, 축제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민족지적 관습에 의해 이해되기보다 색다른 볼거리로 강요될 뿐이다. 특히 사진 기법으로 재연된 표현과 이를 이용한 설치작업은 현장의 리얼리티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이지만 벽면을 구성해서 현실감을 더하고 제의를 재연하는 연출은 일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강압적 이해를 요구한다. 커다란 인화 가능성에 의한 작업들이지만 이미 낡은 내용이자 방법이다. 그런 것을 두고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거나 생활에 근접한다고 판단한다면 보는 이를 난처하게 할 뿐이다. 장애인을 엿보는 장치나 단골 메뉴가 된 인터뷰와 밋밋한 영상, 사진의 합성 역시 구태의연하고 식상하다.
음식상에 오른 사진작업이나 사진작업으로 가능한 활동사진 등은 디지털 작업을 통해 움직임을 얻고 그 움직임은 가상적 공간을 현실적 공간으로 번안하면서 새로운 실제, 가상실체를 만들고, 현실과 무관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저항의 의미를 새긴다. 그러나 이런 설치들과 구성은 영상기기를 사용하면서 폐쇄적인 공간을 반드시 요구하는 듯하고 그 요구만큼 현실과 거리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 폐쇄적 공간은 사적 공간을 요구하고 영화를 보듯 어두운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공간으로 여기는 장소를 만든다. 이런 맥락의 전시들은 소리, 영상과 더불어 이미 익숙하지만 분명 새로운 미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한바탕 연극적인 소품들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과 삶의 거리는 그곳에서 또 한 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관조의 거리라고 말한다면 생활 속에 거주하기라는 언술은 자기모순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설치와 영상, 오디오를 이용하는 미디어작업은 전시장 안에 또 다른 방을 구성해야 하고 결국 인간을 철저하게 개인화시키고 전체적 맥락보다 개별적 만남을 만들고 총체성을 얻기 힘들게 한다. 전시 구성의 편의성이 전시의 특색이 되고 국제전의 한 경향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까운 것에서 거리를 만든다. 일상과 예술은 언제나 그런 정도의 거리에서 만나지 못한다. 혹 그것을 시각예술의 속성으로 거리를 확보하는 당연한 결과나 한계로 오인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시각이란 언제나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가질 때 제대로 보인다. 그 거리야말로 모더니즘의 온갖 장점과 문제점을 만든다. 삶과 유리된 예술, 상층부의 취향이 된 고가의 예술품, 그리고 전시공간의 제의성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리란 볼거리로 취급되는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일상의 거주는 거주가 아니라 언제나 볼거리의 거리를 만들어줄 뿐이다. 비엔날레의 이런 전시 구성은 상투적이다 못해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사유가 아니라 볼거리의 제공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를 보듯 전체 공간 안에서 개인적 공간, 개인적 만남으로 가능한 즐김의 형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삶의 사유가 아니라 개인적 즐거움을 유도하고 전체를 잃게 한다. 생활 속에 거주하기란 즐김 속으로 관객을 유도하고 고통조차 즐기게 한다. 관객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받치고 있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비엔날레>나 <무빙트리엔날레> 모두 그저 국제적 양식의 스탠더드를 꿈꿀 뿐 어떤 새로운 사유도 찾아보기 힘들다. 볼거리로 제공된 것들을 즐기고 있으면 된다는 투다. 즐김은 스펙터클이고 스펙터클은 내용보다 현존하는 효과에 주목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술은 오늘날 즐기는 것이 되고 말았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Th.w.아도르노, M.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옮김《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p.219)

강선학·미술비평

부산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