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류장복 – 투명하게 짙은

류장복 __ 투명하게 짙은

일민미술관 10.17~12.7

류장복의 긴 여행은 창에서 다시 시작된다. 철암과 한남동, 성미산을 두루 돌아본 작가는 이제 그의 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창을 통해 25편의 일상을 일기처럼 그리고 썼다. 창을 통해 보이는 그의 풍경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따라서 내일도 다를 수 있음을 상상한다. 같은 창밖의 각기 다른 풍경들은 작가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짧고 간결한 내러이션을 통해 두툼하고 짙은 그의 기억들이 깊은 바닷속처럼 푸른 빛으로 펼쳐진 사이로 사건과 사고가 끼어들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이라면 다 알 수 있을 처절한 슬픔이다. 시커먼 탄가루가 흩날리는 철암의 슬픔과 하루하루 더디게 견디는 삶의 터전을 써내려 온 작가의 그림 같은 글씨가 더욱더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
창은 안과 밖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연결되는 통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검푸른 풍경은 우리의 눈을 현혹하여 흡사 그것이 진실로 존재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우리의 시지각 대부분은 기억에 의해 조작 혹은 지배된다. 해서 작가는 자신의 풍경이 기억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보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대변할 또 다른 작가 자신을 창 바로 앞에 세워놓았다. 흡사 장난감처럼 보이는 그 장치들은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이미 그러함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연주하고 설명한다. 그렇게 이중의 창들의 낯익은 풍경을 쫓아가다 덜컥 그 빛이 너무 짙어 투명한 슬픔을 만난다.
창밖 풍경 사이사이 일기 같은 일상 속으로 치고 들어온 그 짙은 슬픔들은 희미하고 불안하다. 느닷없이 터진 눈물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오히려 더 그칠 수 없었던 울음.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슬픔들. 기억을 더듬어 찬찬히 바라보던 그 풍경 속에, 우리의 일상 속에 숨은 슬픔은 결코 우리의 순수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듯하다. 넋놓고 바라보던 풍경 위로 겹쳐지는 사건들을 따로 끄집어낼 수도 기억 저편으로 밀어놓을 수도 없었던 작가는 최대한 담백하고 객관적으로 툭 던져 놓았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온다. 그 객관적인 사건들을 통해 신기루에 현혹된 사막의 이방인처럼 우리는 감춰놓았던 기억들을 아무 대책없이 좇게 된다. 심연으로 빠져드는 뱃머리처럼, 손가락 사이를 뚫고 흐르는 눈물처럼, 멍하니 응시하는 언론인의 힘 풀린 동공처럼, 잔뜩 밀려오는 한낮의 식곤증을 날려버릴 것 같은 가자지구의 검은 연기처럼 우리는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수상한 낌새들을 좇아 한 번 더 작가의 창너머 풍경들을 샅샅이 살피게 된다.

임대식·아터테인 대표

[Review] 김호득 – 그냥, 문득

김호득 __ 그냥, 문득

김종영미술관 10.17~12.5

북악산과 북한산이 맞닿는 곳에 있는 김종영미술관. 입구에 걸린 전시 플래카드에서 작가 김호득 특유의 검은 획이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생명력의 분출, 나아가 근원적 생명개념을 탐색하는 작가가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미증유한 수묵의 세계를 펼칠지 미술관 초입에서부터 궁금증이 발동한다.
미술관 입구에서 신관 ‘사미루’로 연결되는 투명유리로 된 중간지점에 한지로 된 격자무늬 구조물이 먹물로 채워진 수조(4×7m) 위에 4개의 납작한 돌을 디디고 부유하듯 사뿐히 세워져 있다. 이전의 수조작업은 어두운 공간에서 순백의 한지들이 점진적으로 수조를 향해 내려오면서 먹물 속으로 측량할 길 없는 깊이를 반영하게 했다. 작가는 이 수직의 심연을 창조의 계시처럼 제시했다. 이 작업을 바라보는 관람자는 시간과 공간의 한 특별한 틈에 고립되어 있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어두움과 수직성 대신 밝음,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그리드를 보여주고 있어서 작품의 부분들이 건물 안과 밖의 여러 요소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바람에 실려온 늦가을 햇살은 한지 구조물에 반사되어 수조 속으로 떨어진다. 수면에 반사/투영된 작품과 건축공간의 여러 층위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한정된 공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고 있다. 산세와 계곡의 흐름에 순응하여 배치된 미술관 공간에 맞춰 건물의 안과 밖, 자연과 인공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이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곳, ‘사미루(四美樓)’의 의미를 공감하게 한다.
계단을 따라 관람자의 동선은 자연스레 <계곡변주> 연작, <글자> 연작과 풍경추상화로 구성된 1층 공간으로 연결된다. 이 세 종류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연과 합일한 자아라고 하겠다. 특히 두 폭으로 나란히 배치한 <물>은 언어와 이미지, 형상과 소리의 경계를 단숨에 허문다. 쏟아져 내리는 물은 스스로를 광폭하게 소유하고 점차 녹아들다가 마침내는 대자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나는 다섯 개의 큰 화면으로 이루어진 <계곡변주> 앞에서 수묵화의 현대화를 위해 고군분투해 온 김호득의 40여 년 필묵 운용이 정점을 찍는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앞으로 그가 전개할 수묵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계곡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 온전히 선에 의한 골조만 남았다. 가시적인 대상을 점진적으로 소멸시켜 대상의 내면으로 진입한 결과, 농담 없이 순수한 먹으로만 무위자연의 본질을 추출하게 된 것이다. 광목천을 가르며 자유자재로 공간 유희를 하는 검은 획들은 계곡이선사하는 광시곡이 되어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3층으로 올라가면 브랑쿠시의 얼굴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는 응축된 둥근 형상의 소품들이 눈에 띈다. 젊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작가의 의식을 지배하는 화두였던 자신을 향한 헌신의 표상인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계곡작업처럼, 작가 스스로 그림의 주제가 된 자화상에서도 이전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 대신 고뇌에 찬 인간의 정수를 정제해내게 되었다.
1년 전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김호득은 세로로 아주 긴 ‘人’자 형상의 수묵화를 선보였다. 자코메티의 절망적인 존재로서 비물질화된 가느다랗고 긴 인간 형상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에서도 주체는 작가 자신이다. 실존주의의 명제처럼, 김호득 또한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감과 싸우며 인간존재의 성찰로 나아가고 있다. <그냥, 문득>은 존재를 확인하는 찰나, 긴 기다림의 연장선상에서 건져올린 시간의 소중한 선물과 같은 것이다.

박소영·P.K. 아트비전 대표

[Review] 강승희

강승희

노화랑 11.12~27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시류에 치여 점차 그 존재감이 희석되는 대표적 장르가 판화다. 이런 시점에서 강승희의 이번 동판화 개인전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가장 전통적인 제작 방식인 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제작된 100점의 작품엔 25년 이상 활동한 판화가로서의 전문적인 노하우가 담겨 있다. 작가 강승희는 판화장르가 미술대중화의 선봉에 섰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 전성기의 주역이다.
특히 제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1988)와 제10회 대한민국미술대전(1991)을 연이어 대상으로 석권한 이력은 그가 국내 판화계의 대표주자로서 얼마나 큰 주목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더구나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줄곧 고수하면서도 표현 소재는 주변의 현실에서 찾았다. 이처럼 동시대적 감성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주제의식을 이어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강승희는 동판화 고유의 단색 톤을 고집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 역시 검은색의 향연이었다. 또 새벽풍경 일색이다. 새벽은 강 작가가 검은색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빛을 사로잡은 검은 장막이 아니라, 품었던 빛을 서서히 뿜어내는 새벽 기운의 색이다. 어둡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검은색은 아픔과 고독을 치유하는 힐링의 힘을 지녔다.
그런데 새벽풍경으로 포착된 장면들 중에 도심 언저리의 정경들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저 멀리 내려앉은 별꽃처럼 켜진 빌딩숲의 불빛들, 추수한 지 얼마 안 된 들판의 온기, 마치 사람처럼 고고하게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는 소나무나 자작나무들…. 이는 서울 도심을 떠나 인접한 김포시에 자리 잡은 작업실에서 만난 풍경들이다. 비록 탁 트인 김포평야 혹은 원경의 시원한 한강하류 강줄기라도 왠지 모르게 사람냄새가 채 가시지 않는 이유 역시 작가의 숨은 의도인지 모른다.
제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강승희의 감성은 어쩌면 서울이란 대도시를 커다란 섬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은 아닐까.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에서의 고독,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과 인공의 불빛 속에서도 떨칠 수 없었던 외로움의 무게, 이 둘은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을 것이다.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실타래는 검은빛을 만나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 어떤 아픔의 상처라도 부드럽게 감싸줄 것만 포근함을 지니게 된 것이다.
강승희의 작품이 보여주는 담백하고 섬세한 번짐의 매력은 수묵화 못지않은 호소력을 지녔다. 그 시각적인 표현들이 먹물과 여린 붓이 아니라, 강철 침으로 금속판을 긁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동판화 본연의 전통적인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일반 노출부식 기법 이상의 작가적 노하우를 발휘한 회화적 독창성은 그를 지탱하는 중요한 경쟁력이다. 부식판화가 지닌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성의 선에서 더없이 부드러운 감촉을 이끌어내는 서정적인 감수성이 일품이다.
강승희 판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 중에 탁월한 여백의 운용 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화면을 장악한 색은 오로지 검은색이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빛을 발산하는 존재감이다. 어떤 작품은 백색이 여백인가 싶으면, 또 다른 작품은 흑색이 여백이다. 서로 반전과 충돌을 거듭하는 흑백의 묘한 여백 운용이 곧 작품의 생동감을 자아내는 에너지원인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적인 감성이 녹아있다. 마치 자연의 너른 가슴에 안긴 도심은 외로운 고독의 섬이 아니라, 어느새 지친 현대인의 가장 평온한 쉼터가 됐다고 말하는 듯하다.

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Review] 저온화상 – 홍콩과 서울을 잇는 낮은 목소리

저온화상 __ 홍콩과 서울을 잇는 낮은 목소리

아트 스페이스 풀 11.6~12.7

실제 수신자가 많든 적든 매스미디어는 이름값하듯 다수를 향한다. 귀 기울이는 이가 많든 적든 길거리의 시위는 세상을 향한 외침이다. 그러나 그 둘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다. 특히 후자가 예술가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트 스페이스 풀의 전시 <저온화상: 홍콩과 서울을 잇는 낮은 목소리>는 그 목소리의 차이를 서울의 작가 김동규와 홍콩의 수산 챈, 씨앤지를 통해 또렷하게 들려준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인 홍콩의 듀오 작가 씨앤지(클라라&검)는 끊임없이 거리로 나선다. 홍콩의 중국반환기념일에 길거리 약혼식을 올리고, 두 딸을 데리고 “우산 시위”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미디어에 포착되면, 검이 그 장면을 유화 드로잉으로 그린다. 그 그림은 이미 미디어를 통해 확산된 사진과 기사를 옮긴 것이지만, 거친 필치는 매스미디어가 표방하는 신속하고 객관적이며 사실적인 성격을 흐려버린다. 수산 챈은 민주화 시위의 장면들을 덤덤하고 소박한 드로잉과 글을 통해 자신이 직접 발행하는 신문이나 포스터 등의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자신만의 마이크로미디어를 만든다. 또 검은색 천으로 얼굴을 가린 범죄자들의 모습을 드로잉에 담아 미디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장치가 미디어를 통해 무차별적 불온함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상황을 짚어낸다.
이렇게 홍콩 작가들이 미디어의 속성을 거스르며 미디어에 개입하는 것을 보면서, 김동규는 그들 움직임의 특징을 언어 안에, 정확히 말하면 언어의 빈 틈 안에 오롯이 녹여 넣는다. 매스미디어가 재빨리, 또렷하게, 종종 정신을 어지럽힐 정도로 시끄러운 목소리로 다수의 귀를 사로잡는 것과 달리, 이들은 느리고, 때로는 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세상에 대해 읊조린다. 다수를 위한 세상의 큰 마디들을 비켜가는 이들의 표현방식을 김동규는 매끈하게 분절되지 않은 언어로 번역한다. 그는 <구순 협주곡>에서 광둥어로 된 문장을 읽고, 또 홍콩 작가들에게는 한국어로 발음하기 쉽지 않은 문장을 읽게 한다. 상대방의 언어로 읽은 문장은 느리고 부자연스럽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잘 전달되지 않지만, 바로 그 비규범적인 언어의 사용이 울림을 만들고, 작위적이지 않은 연대를 엮어낸다.
사실 홍콩과 서울 두 도시의 시위대가 이 예술가들이 주목하는 마디 없는 연대를 이미 읽어내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공유한 노란 리본에서 드러난다. 거대 국가에 반환된 민주주의는 세월호 참사로 무너져내린 마음들만큼이나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이들은 작은 표지를 공유하여 길고 지루한 서로의 저항을 위로하려 한다. 김동규가 홍콩의 작가들을 만나기 전 세월호 유족들의 시위 현장에서 벌인 퍼포먼스의 흔적인 <개나리부터 은행나무까지>는 종이가 찢어질만큼 격하게 그어놓은 볼펜 자국들로, 걸러지지 않은 격함이 자못 생경하다. 그러나 그 격함에 대한 영상 하나쯤 남겼을 법한 상황에서 별다른 기록도 없이, 스카치테이프로 조심조심 연결되어 모로 걸린 종이들은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발음들을 타고 울렁거린다.
낡은 LP판 튀는 소리처럼 이들의 낮은 목소리는 정해진 마디를 따르지 않지만 매끈한 소리들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든다. 다만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도 가볍고 일시적인 빈티지 취향(요즘 “아시아”는 일부러 공장에서 만들어낸 빈티지 같다)에 머물지 않기를,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다그치게 된다.

안소현·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Review] 차종례

차종례

분도갤러리 11.3~29

대구에서 처음 선보이는 차종례의 개인전에선 2009년부터 2014년에 제작한 20여 점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작품은 <드러내기/드러나기(Expose exposed)> 연작으로 이루어졌다. 전시된 작품을 대면하고 처음 느낀 감상은 같거나 다르게 반복되는 뾰족한 돌기나 봉긋 솟은 둥근 모양의 형태들이 마치 수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든 풍경 같은 것이다.
작가의 <드러내기/드러나기> 연작의 리듬감은 자연과 인공, 평면과 입체, 선과 형이 빚는 일종의 도형퍼즐(puzzle)이다. 이 미묘한 형상의 퍼즐과도 같은 작품을 보면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선’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벽면에 설치한 사각의 퍼즐이나 바닥에 놓아둔 입체에도 부각시켜 놓은 시각적 패턴이고, 나무판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놓은 건축적 덩어리에 장단의 흐름 따라 ‘드러내기/드러나기’하는 형태(形態)이다. 크거나 작은 돌기 모양의 원뿔이 깎고 깎이며 그 실체가 선(line)인지 형(shape)인지 혹은 선과 형, 그 어딘가의 중간지점에서 만나 회화가 조각이고 조각이 회화가 되듯이 나무의 결 따라 역동적인 리듬감을 ‘드러내기/드러나기’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느낀 감상이었다.
이러한 선과 형이 갖는 형태에 대해 좀 더 가까이 그리고 깊게 들어가 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선과 형이 외적인 형식이지만, 작가는 소재의 내적인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한 유기적인 곡선의 ‘드러내기/드러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시된 작품을 담아 와서 이미지로 펼쳐 보자니 작가의 드러내기는 선의 율동으로 시각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시각효과는 예민한 촉수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드러나는 선, 재목의 편차가 생기는 측면(edge)의 울림이다. 이 측면의 울림인 선은 나무의 실체를 이루는 결이자 혼이고 미의 형식이다.
이렇게 마치 잠든 나무의 결을 일깨워 원뿔이나 버섯 모양의 형상 따라 나무의 형과 결을 발굴이라도 하듯 깎아내는 작가의 솜씨는 긴 노동의 시간과 반복을 통해 회화인 조각이거나 조각인 회화가 된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을 포개놓은 시공간의 만남이고 섬세한 선과 형이 교차하는 탐미의 순간이다. 이 탐미의 시간은 시·공간이 포개지는 지점에서 만나는 나무의 결, 뾰족한 돌기가 부분과 전체를 이루며 무심한 나열 같지만, 작가의 섬세한 감성의 결과 나무의 결이 조형적인 형태를 입고 만나는 조각적 풍경이 된다. 이러한 시각적 울림은 나무를 다루는 정교한 조각술(carving)로 직선과 곡선이라는 원석을 찾아 보석으로 가공하듯 형과 선의 폭과 넓이에 강약과 장단의 리듬감을 부여한 입체 도형퍼즐이고 빠른 속도와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서 액체가 굳어 고체화된 선형퍼즐이다.
크고 작은 전시를 감상한 뒤 나의 선입견을 얼마나 벗기는가에 따라 여운이 길거나 깊게 남는다. 전시를 보고 나서 종종 선입견이 주는 약과 독의 경계가 어디쯤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번 분도갤러리 차종례의 전시를 보고 나서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여운은 인공적 형상의 집요한 반복이 주는 시각적 리듬이었다. 그리고 난 그러한 여운을 따라 선과 형의 울림이 주는 여운을 잡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 노트를 통해 선입견의 문을 열고 다른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의 작업은 노동과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오브제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드러내기/드러나기> 연작은 수동과 능동, 작가와 관람자만이 있을 뿐 주어진 정보가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나의 제작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결정하길 원한다. 선입견이 배제된 상태에서 관람자가 맘껏 상상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우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일상적 오브제의 무심한 나열에서 대양(大洋) 한 지점에서 일어난 한 조각의 파도가 태풍으로 성장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는 감상의 자리는 ‘드러내기’를 위한 감성의 결 따라 ‘드러나기’로 만나는 곳일 것이다. 그 시간 그 장소에는 마치 수행하듯 ‘깎고/깎여서’ ‘드러내기’와 ‘드러나기’가 하나가 되는 시각적 울림이 있다.

김옥렬·아트스페이스펄 대표

[Review] 권경환 – 마르기 전 규칙

권경환 __ 마르기 전 규칙

일민미술관 10.17~12.7

권경환 개인전 <마르기 전 규칙>은 ‘마르기 전’이라는 완결 전 작업과정의 상태에 빗대어 모호함과 모순된 상태를 의미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합의된 작가만의 ‘규칙’들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르기 전이라는 작업과정이 화이트큐브 안에서 다소 현장감 넘치는 무대로 연출되었다.
작가는 종이, 끈, 천, 대나무, 비닐봉지, 시멘트 등 저렴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하다가 우연찮게 발생되는 다양한 변형과 변용, 의도되지 않은 반복 작업행위의 흔적과 파편,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유희를 무대 위에 소품처럼 펼쳐놓았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매체를 제한하여 다양한 잉여 생산물들의 스펙터클함을 약화시킨다. 이것은 일상의 현실 속에서 작가로서 체감하게 되는 존재론적 저항이며 앙상하고 뾰족한 잉여의 모습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는 장치다. 또한 의도된 가내수공업적 작업행위와 상당히 공들인 정교한 수공작업의 대비를 통해 작가는 예술의 정치적 과정에 주목하며 내장된 예술의 위계화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다.
작가 권경환은 그동안 대중매체나 기호 이미지에 개입하여 수동적이고 우둔한 소비자로 전락한 작금의 사회에 비판적 시선을 던져왔다. 2008년 토탈미술관에서 전시한 <물론,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라는 작품은 일련의 정교한 작업과정을 조작함으로써 스펙터클 이미지 사회의 모순을 재치 있게 지적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권력, 전쟁, 죽음의 구체적 이미지를 직접적 방법으로 채집, 드러내었던 이전 작업과는 다르게, 2013년 몽인아트스페이스 레지던시를 거치면서 이번 작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태도와 은유적이고 쉽게 의미를 내비치지 않는 개념적인 작업방식을 보인다. 일민미술관 1층을 채운 제한된 미디어들의 오브제 설치는 시장체제에 흡수되어 반성적 사유와 주체적 삶을 살게 하는 사회적 역할을 상실한 미디어에 노골적 회의감을 드러내며, 환상을 부여잡은 채 모든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육당한 현대인의 모습에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변화와 통일, 균형과 대비를 통해 팽팽하게 비닐봉지를 펼치시오>, <부서지기 쉬운 조각>, <의자에 앉는 방법>, <불순한 합의> 모두 작가의 진지한 작업태도, 작업방식을 통한 심오한 성찰,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섬세함이 있다. 작가의 날선 감각의 영상, 설치, 조각작품들은 무대 위 소품으로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풀리지 않는 어려운 암호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한 가지로 읽히지 않는 작품의 난해함은 다소 관객을 불편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관심과 의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켜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고 사유하게 하여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번 개인전과 함께 일민미술관 2층에서는 시적인 제목들로 구성하여 선정된 진시우, 류장복 작가의 전시가 함께 열렸다. 권경환 설치와는 또 다른 동시대문화에 비판적인 정서를 띠고 있는 진시우 작가의 난해한 개념적 오브제들과 –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물질성, 예를 들어 양철통, 까만 비닐봉지, 빨간 테이프, 번쩍이는 노란표면 등 우리가 혐오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클리셰는 조금씩 어긋나 틈을 드러낸다 – 류장복의 어둡고 짙은 철암의 풍경은 서로 결을 달리한다. 전체적으로는 세 전시가 ‘시각문화의 인문적 담론생산’이라는 중압감 때문에 다소 유연하지 못하게 구성된 느낌이다.

오세원·문화역서울 284 운영팀장

[Review] 이강원 – 풍경의 이면

이강원 __ 풍경의 이면

갤러리 플래닛 11.7~12.5

이강원은 전통적인 조각의 방식을 고수하지만 풍경을 소재로 하면서 재료의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현대조각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개인전이 갤러리 플래닛에서 열렸다. 다소 아담한 전시공간에 단색조를 띤 일련의 입체물들이 차분하게 놓이듯 설치되어 있어 전반적인 분위기가 단아하게 느껴졌다. 2005년 “A Scene”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연 후 활발하게 활동해오다, 2008년 전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흔적전> 이후 6년 만의 전시이니만큼 작가에게는 의미가 더할 것이며, 미술계의 기대치가 가중된 만큼 부담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작가의 성격만큼 차분했고, 공간은 작아도 내용은 풍성했다. 이는 작가가 조각으로 풍경을 표현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소재 선택에서 재료, 그리고 공간 구성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노력하고 심사숙고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일반적으로 미술에서 조각은 크게 재료를 깎아내는 ‘조각’ 과 재료를 붙이는 ‘소조’ 로 나눈다. 거기에 소조로 만든 형틀에 액체 상태의 물질을 부어서 굳히는 ‘주조’ 가 있다. 이강원 작가는 이를 ‘구르기’와 ‘흐르기’라고 설명한다. 돌이 구르면서 깎이고 용암이 지표 위로 흐르면서 굳어가는 자연 생성의 과정이 조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로서 조각은 어찌됐든 인위성을 갖는데, 조각의 기본 형식을 자연 현상에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작가는 자연과 도시를 포괄하는 풍경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풍경의 가장 큰 범주인 빛과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서 크레파스를 녹여 색덩어리를 만들고, 가공고무를 깎아서 그림자조각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알루미늄, 브론즈, 레진 등 더욱 다양해진 재료를 사용해서 풍경의 요소들을 표현하는데, 이는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고려해서 재료의 빛깔, 가공성, 질감 등의 적합 여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료의 특이성에 주목하기보다 표현의 확장을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스테인리스는 강도가 높아 가공이 어렵고, 알루미늄은 주조 시 유동성이 약한데, 작가는 이미지를 구상하면서부터 이러한 재료의 성질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현대조각은 “풍경 속에 있는 풍경 아닌 것”(로잘린드 크라우스)이 되었다. 조각은 예전에 벗어났던 건축과 결합하거나, 미술 외적인 것을 다시 끌어들인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건축의 부분이거나 삶과 완전 분리되지 않고, 조각의 주체성을 유지한 채 하나의 중심으로서 그들과 결합한다. 이강원 작가의 작업이 전통조각을 고수하면서 풍경을 다루는 방식은 이러한 현대조각의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순영·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Review] 오치규 – 여백에 말 걸다

오치규 __ 여백에 말 걸다

가나인사아트센터 10.29~11.3

오치규의 개인전이 열리는 전시장 1층은 원색의 에너지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음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두꺼운 선이 드로잉 된 원색의 평면작업과 그 원색의 화면을 바탕으로 한 동일한 원색의 입체 작품 그리고 흰 바탕에 파란 선으로 드로잉 된 평면과 그를 근간으로 한 도자기들로, 한 작가의 작품으로는 다소 많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의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고 현재 충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현역 디자이너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작업이 단순히 회화나 판화 등 평면작업을 넘어 도자기와 입체작업에까지 이르른 것으로 볼 때 그의 예술을 향한 지속적인 연구와 창작에의 열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작가는 그간 수차례의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이나 대상들에서 소재를 찾고 있다. 최근 그의 평면작업은 화사한 파스텔 톤에서 벗어나 강렬한 원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보다 단순화하여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내적 조화라는 화면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절제를 통한 최소한의 이미지로 선과 색, 면이라는 회화의 기본 구성 요소들이 적절히 배합되고 여백과 어우러져 내러티브하고 서정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가 원색으로 된 단색조의 화면, 그중에서도 오방색을 주로 사용하는 것은 한국적인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의 대결 구도가 아닌 모든 자연의 생명체와 우주가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동양적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과 여백을 중시했던 동양미술의 전통적인 방식을 수용하고 그것을 변환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얻어낸다. 정적이며 소박한 한국의 미와 정서가 스며있는 동시에 색채와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화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물을 본 순간의 감정을 제한하고 선, 색, 면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만 표현된 화면은 적게 칠함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를 돋보이게 하여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작가가 가진 에너지의 원천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 있다. 생과 사, 만남과 헤어짐, 일상의 희비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연들을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작가로서의 시각이다. 수많은 사람이 만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가듯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소재와 영감을 얻어내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화면을 완성해간다. 그의 작품 속 여백들은 비어있음으로 해서 보는 이들과 교감하고 그들의 상상과 상념들로 채워 넣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말하듯이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의 본질을 봐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여백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닌 못다한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다.

손소정·롯데갤러리 대전점 큐레이터

[Review] 장은의 – 사소한 환상

장은의 __ 사소한 환상

갤러리 조선 11.11~26

주로 영상작업을 해온 작가 장은의는 실재와 허상이 중첩된 공간 속에서 작가-작품-감상자 간의 관계 양상을 모색해왔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눈>(2008), <프로젝트 플레이어스(Project PLAYERS)>, <스케치북-손그림(Handzeichnung)>(2009)등은 관람자의 눈이나 작가의 손을 작품 감상과 제작 과정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그 과정들은 작가나 미술계의 의도적 장치들에 의해 가려진 계기들을 환기시키며 그 가설적 인과관계를 밝히고 있다.
함부르크 조형예술학교 수석 졸업 후 8년 만에 연 첫 개인전 <진정한 사랑>은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드로잉으로 실재와 비실재라는 기억과 재현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것이 2009년부터 “나는 그림을 머리로 그리는가, 눈으로 그리는가, 손으로 그리는가” 고심해온 작가가 작품과 재현의 상관관계를 도출하는 가설들을 작품 완성 이전으로 소급하여 현재화했다면, 이번 전시는 회화작업을 통해 일상을 예술로 전환시키는 절차들에 대해 탐색한다. “마음을 움직인 순간”을 작업 변수로 삼고 그 구체적이고 검증적인 절차를 위해, 작가는 일상적 감성의 단편들을 표본 추출한다. 그 일차적 자료는 사진인데, 작가는 오히려 순간을 영원 속으로 저장시키는 그 “편리한 문명”의 도구가 “진정한 나의 시간”을 빼앗았다고 말하면서, 그 잃어버린 시간을 그림을 통해 재-현(re- presentation)하고자 한다. <엄마의 배, 풍요> 등은 엄마의 과거와 사랑을 불러들이고, <푸른산>은 간판 위 구호처럼 ‘셀프’ 넘기를 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청소 1,2,3>은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손금 위로 고인 <오아시스>의 물은 마음을 움직인 계기들을 지도 위의 기호처럼 새긴다. ‘사소한’ 일상 속에 내재된 개인적 체험과 정서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다. ‘비물질적’인 시간의 영원함을 “욕망”하며, 작가는 직관에 의해 기록된 일상의 순간을 그렇게 환기시키고 각인시킨다. 그 보여주기 방식은 미술계의 구조와 그것이 작동되는 원리 등에 무심한 듯 보이는데, 이는 자기과시적인 모습 대신 온전히 그림이 되는 계기들을 추적하고자 함이다.
작가는 미학적 위계를 제시하기보다 옛 접착식 앨범을 연상시키고자 노란색 페인팅 칠로 각 작품들의 소소한 내러티브를 엮고 있다. 전시 의도를 구현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나, 노스탤지어 자극을 견인하는 이러한 방식은 그림의 소재가 된 사진 이미지를 담은 프로젝션 장치에 비해 미흡해 보인다. 사진적 재현과 회화적 재현 사이의 간극을 드러냄으로써, 비물질적 계기들을 재-현해낸 공간적 장치가 이미 ‘사소함’에 대한 작가적 통찰의 유의미성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물질적인 광학적 조건들을 통해 큰 공간을 채우던 이전 작업의 충만함과는 달리, 힘을 빼고 초연한 듯 보이는 작업들 속에서 그 사소함이 “생각과 그림을 비워가는 것”에 대한 귀결로 보인다. 재현 매체나 전개 방식에는 큰변화를 보였지만 작가의 ‘그림에 대한 사랑’이 다양한 변인들을 관통한다. 작가와 작품, 일상과 그림 사이의,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련의 가설들이 작가 장은의의 다음 전시를 기대하게 한다.

박윤조·미술사

[Review] 김민호 – 時 點-연속된 시간의 지점

김민호 __ 時 點-연속된 시간의 지점

월전미술문화재단 한벽원 갤러리 11.1~10

작가 김민호의 작업은 다양한 시점의 중첩에 따른 이미지의 변용을 기본으로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동양회화의 이동시점과 카메라를 통한 고정시점의 대비와 충돌이라는 상이한 가치의 반복적인 중첩을 통한 대상의 해석이다. 이는 단순히 시점의 중첩에 따른 형상의 변화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의 이성적 시각을 아날로그적 감성의 조형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간’(看)은 디지털적 시각이며, ‘관’(觀)은 전통적인 아날로그적 관찰법이다. 그는 무수한 간의 시점을 중첩함으로써 이를 관의 시점으로 변환시키고 있다. ‘간’이 대상의 객관성과 구체성에 주목해 그 깊이에 주목하는 것이라면, ‘관’은 공간의 확장에 주목한다. 이른바 원근이나 투시는 바로 ‘간’의 시각을 화면에 효과적으로 구현하여 종심적인 깊이의 공간감을 구현하기 위한 조형적 장치이다. 이에 반하여 ‘관’의 시점은 좌우, 상하의 전개를 통하여 평면적으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작가의 화면이 규격화된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다양한 변용을 취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장소를 이동해가면서 시점을 변화시키며 대상을 기계적 시각으로 포착하고, 이를 중첩시킴으로써 그 잔상을 통해 형상을 구현해가는 그의 작업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물리적으로는 대단히 기계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극히 모호하고 다중적인 잔상들로 표출된다. 그가 주목하는 두 가지 상이한 가치의 시점 충돌과 같이 화면의 형상들은 허(虛)와 실(實)이 교차되고 변환되며 거대한 잔상들로 표출된다. 견고하고 깊이 있는 화면은 바로 다양한 시점의 반복적 중첩을 시행한 결과물이다. 특정한 대상을 중심으로 시점을 이동하며 수차례에 걸쳐 그리고 지우며 그 내용들을 반복적으로 중첩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전적으로 아날로그적이다. 목탄과 손과 같은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첨단의 기계적인 내용들을 수렴해내는 그의 작업 방식은 재치나 기요에 앞서 일종의 본질에 육박하고자 하는 의지로 읽힌다. 그의 화면이 비록 목탄과 콩테 등 다양한 혼합재료를 동원하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수묵의 그것으로 읽힌다. 이는 단순히 그의 화면이 수묵과 같이 흑백의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백에 대한 조형적 효과를 십분 발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의 화면을 수묵으로 읽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강박적인 읽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화면은 분명 수묵의 사상과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육안에 의한 대상의 객관성은 소실되고 거대한 잔상을 통해 대상을 허의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그의 화면은 분명 수묵의 그것과 매우 근접해 있다.
전통과 현대는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이지만, 여전히 한국화의 화두처럼 제시되고 있다. 그간 적잖은 실험이 이러한 가치로 포장되거나 윤색된 바 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매우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가 보여주는 시점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이의 조형적 표출은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그의 작업은 이미 제시된 화두에 일정한 답할 거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철·동덕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