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Artist in Residence

Guillaume Clermont 귀욤 클레몽

귀요미인물 (1)

 같은 모티프, 다른 장소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여자친구가 작년에 서울의 한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그녀가 이미 한국 사람들을 알았기 때문에 나도 함께 4월 25일부터 열리는 그룹전에 참여하게 되었고 또 금천 레지던시에 지원하게 되었다. 또한 3개월이라는 기간도 매력적이었다. 더 짧은 경우는 그곳에서 삶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동안 캐나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레지던시는 작업 지원을 받고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예술적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새로운 언어권으로 왔다.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생활이 어렵지 않은가 그점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내가 독일에 갔을 때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알파벳이 같기 때문에 아주 기초적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리고 이곳(한국)에 왔을 때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숫자와 몇몇 간판의 영단어뿐이다. 내 작업은 같은 작업이 상황과 지역의 배경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분석되느냐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작업이 더욱 기대되고 흥미롭다. 비록 서구화가 전 세계에 퍼져있다고 하더라도 서구적인 방식이 나라마다 다르게 흡수되고 반영되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에 내 작업의 중심이 있다.
이동하는 장소에 따라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내 생각에 사고 전개방식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체류하는 국가가 바뀐다고 해도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작업에 새로운 환경은 직접적인 변화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분명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10년 뒤에 나타나든지 내가 한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 갔을 때 나타나든간에 영감은 갑자기 떠오르게 마련이다.
작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마르세유의 도서관에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16세기 네덜란드 해골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에 그 해골을 그리고 조금씩 변형을 가한다. 위에 색을 덧칠하거나, 바탕을 다르게 만든다. 회화 작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이 작품을 내가 작업한 나라의 길거리 어딘가에 버린다. 잘 그린 그림을 갤러리에, 못그린 그림을 길거리에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똑같은 완성도의 그림을 길거리에 버리는 것이다. 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나의 그림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작업이 완성된다. 결국 나의 작업은 내가 이동하는 지역 곳곳에 위치하게 된다. 서울에서도 같은 작업을 할 계획이다. ●

바요타귀욤 클레몽(왼쪽)은 1983년 캐나다 몬트리올 출생이다. 캐나다 퀘벡 라발대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몬트리올 UQAM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술잡지 《E IL TOPO》의 에디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www.guillaumeclermont.org

 

 

Hanna Hildebrand 한나 힐데브란트

한나 (6)

지역주민과의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전에 덴마크, 독일 등지의 레지던시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내 작업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 여러 사람과의 콜라보레이션에 입각한 분석과 기록의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이러한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좋은 기회이고 새로운 거주지는 작업에 최적의 장소이다. 주변의 다양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 지역사회와 주민들과의 자연스러운 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천 레지던시는 한국에 관심이 있는 독일인 친구의 소개로 지원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며 주변의 한국인 학생, 작가들을 알고 지내왔기에 한국이 낯설지는 않다.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작업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 끊임없이 거주지를 옮기며 노마딕한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환경을 향한 갈망과 이주는 나뿐 아니라 현대미술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성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작업의 기반은 탐험이자 탐구이다. 전혀 다른 환경은 창작에 활기를 불어넣고 인간에 대해 새로운 고찰을 하는 시작점이 된다. 내가 속해있던 문화와는 거리가 먼 생활 방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회에 대한 조사가 내 작업의 기본이기에 지속적인 이동은 작업의 필수적이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작업의 방향이 변하는 편인가 난 작업 방식을 반복하지 않는다. 내가 유일하게 반복하는 방식이 있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계속 이동하면서 작업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작업은 참여미술의 형태를 띤다. 내가 조정한 틀 안에서 관람객 혹은 작업 참여자들이 퍼포먼스를 하는 셈이다. 이러한 참여자의 기여는 내 작품의 실질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관람자는 나의 예술적 행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 못하겠지만 난 작가로서 다양한 태도와 변수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서울에서 하려는 예정된 작업이 있는가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몇몇 여성을 만났다. 나는 상대방의 경험과 일상적인 삶을 나눈다. 이 지역 주민들을 만나 특정 오브제를 두고 서로 그 물체에 대해 의견을 나눌 생각이다. 물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인터뷰를 진행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오브제를 사이에 두고 타인과 소통하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시각적 관계를 맺기를 취하려 한다. 나는 언어를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있다. ●

한나 힐데브란트(가운데)는 1978년 이탈리아 코도에서 태어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타델슐레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세르비아 멕시코 미국 등 세계 각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Baj ta 바요타

바이요따 (5)

이주와 이동의 역사

한국의 인상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지원동기가 궁금하다 친구 중 하나가 난지스튜디오에 참여했다. 그 친구의 추천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국적인 지역으로 가서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은 나에게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은 매우 다르게 느껴져 방문해 보고 싶었다. 헝가리에 비해 한국은 굉장히 큰 나라다. 수치적으로 서울의 인구가 헝가리 전체 인구의 약 2배이며 경제적으로도 훨씬 발전했다. 서울에 오니 그 규모가 그대로 느껴졌다.
당신의 작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난 루마니아의 트란실베니아 사람이다. 내 프로젝트의 시작은 트란실베니아의 전통적인 쥐덫에서 찾을 수 있다. 아주 단순한 구조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격자구조의 형태인데 자연스러운 연결과 먹이를 탐할 때 움직여 쥐를 잡는 이러한 전통방식은 나로 하여금 움직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유럽 사람들의 삶은 이주와 이동의 역사다. 현대에 와서 이동은 훨씬 보편적인 행위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많은 트란실베니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헝가리 및 다른 국가로 이동했다. 요즘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동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지만 정작 작품이 무거워 운반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무거운 설치 위주로 작업하다보니 막상 작품의 운반이 어려웠다. 그래서 좀 더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작업으로작품 이동이 편리하도록 시도한 적도 있었다. 팝업북처럼 접었다가 펼 치면 작업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술이 꼭 이동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한다. 이곳(금천예술공장)에서 하는 작업도 크기문제로 일정 정도 두고 떠나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내 실질적인 작업의 일부이고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계획한 작업이 있는가 작업을 할 때 플라스틱같은 비자연스러운 재료를 피하려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 재료인 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를 찾아 사용해보고 싶다. 지금 생각으로는 대나무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 소나무는 헝가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대나무가 나에게는 더 지역성이 강하다. ●

바요타(오른쪽)는 198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아카데미, 헝가리 부다페스트 헝가리안 아카데미에서 파인아트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www.bajota.com

 

 

Adam Thompson 아담 톰슨

SONY DSC

최적의 창작환경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 서울을 방문한 건 2007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수학한 한국인 친구가 기획한 그룹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한 독일갤러리가 KIAF에 참여하면서 나의 작품을 소개했는데 한국에 나를 알리는 좋은 기회였다. 서울의 여러 레지던시에 지원 하였고 운좋게도 2011년 창동 창작 스튜디오, 2012년에는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여했던 레지던시에서 어떤 후원을 받았는가 창동창작스튜디오는 작업실, 각종 생활편의시설과 일정정도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항공권의 경우 개인적으로 유네스코 장학금을 받아 해결했다. 금천예술공장은 비슷한 금전적 지원과 더불어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작업할 기회를 제공했다. 결국 두 곳 모두 원하는 가능한 대부분의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유럽에서도 몇몇 레지던시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다른 소관이므로 한국의 방식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국경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외국에서 작업하려면 여전히 힘든 점이 있을 것 같다 예술가는 어느 때보다 더 노마딕한 삶을 살 수 있다. 비자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다른 기관을 통해 지원을 받아 아시아와 유럽을 규칙적으로 오갈 수 있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있다. 그 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런던과 한국을 오가며 전시하고 교육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미술기관이나 작가들과 어떤 경로로 관계를 맺는가 한국의 친구들 대부분은 런던에서 공부한 작가여서 국제 미술계 정보를 함께 공유하곤 했다. 서울에서 작업했지만 한국의 갤러리와 일을 해보거나 전시를 한 적은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작업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건 맞지만 꼭 전시를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은 갖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 체류 후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변한 점이 있는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내 작업의 과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다루는 재료/자료(materials)와 이를 교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에서는 변화를 자아냈다. 나는 한국에서 수많은 재료/자료를 취합하여 작업이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럽으로 돌아와 리서치 작업을 한다. ●

 

 

Romy Achituv 로미 아키투브

로미인물

비자갱신을 위한 무의미한 여행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찾은 경로가 궁금하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2000년 미디어 시티 서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화여대의 뉴미디어 과목 방문교수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는 홍익대의 WCU 리서치 교수로 머물렀다. 내 계약기간 만료일이 다가옴에 따라 적당한 스튜디오와 거주방법을 찾다가 이곳 학생들과 동료, 친구들을 통해 레지던시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계속 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에 열리는 전시에 초대를 받았다. 이 전시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규모가 커서 지역적으로 제작을 요한다. 내 작업의 매체와 장비는 배로 운반하기 어려워 한국에 더 머무르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와 내가 가진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한국에 적어도 1년은 더 머물 생각이다. 그렇지만 레지던시 기간이 끝나고 스튜디오와 거주방법을 찾지 못하면 떠나야만 한다.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동과 거주의 제약이 따르는 것 같다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대학의 계약이 끝나고 레지던시가 만료되자 나는 3개월 관광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지금은 7월을 시작으로 2개의 레지던시에 연속해서 참여하게 되어 한국에 8개월간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해가며 3개월에 한 번씩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해외에 다녀와야 하는 것은 여전하기에 화가 나는 부분이다.
예술가의 비자 및 거주 문제의 개선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우선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비자연장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거주를 연장하는 선택권을 주는 것이 매우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종합적인 해결책은 좀 더 긴 기간 동안 지속하여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는 예술가를 위한 비자를 따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국내 예술가들에게 제공하는 것과 동등하게 외국인 예술가에게도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장기 레지던시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해외작가로 활동하면서 미술관 갤러리 등 한국 미술 기관들로부터 차별적 시선이나 불편한 점을 느낀 경험이 있는가 외국인으로서 느낀 차별은 없었다. 다만 많은 한국 동료작가가 경험하듯 나 또한 예술가에 대한 이중잣대를 느꼈다. 이는 세계적인 미술계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다. 한국 미술계 내부의 기관들도 그들이 필요할 때만 예술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얻을 것이 없으면 무시하는 사례를 봤다. 일반적으로 미술계에서는 어떠한 관용도 느끼기 어려운데 한국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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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예술공장 국제교류 프로그램

예술가와 기획인력, 민간영역의 국제화 통로
1990년대 후반 광주시립미술관의 ‘팔각정창작스튜디오’(1995)와 ‘쌈지스튜디오’(1998)를 필두로 한국에도 레지던시 스튜디오가 발흥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중앙정부와 광역시도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이른바 ‘2세대 레지던시’가 설립돼 국공립 레지던시 스튜디오가 20여 개에 달하고 지속 확장세에 있다. 여기서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11개 창작공간 중 금천예술공장은 설립단계부터 ‘국제 레지던시 스튜디오’를 표방하며 출발하였다.
2009년 출범한 서울시 창작공간사업의 좌표에서 ‘국제교류’의 미션을 부여받은 금천예술공장은 해외교류사업 원년인 2010년 이후 5년차에 이르렀다. 올해부터 에이팩스아트(Apexart, 뉴욕), 거트루드 컨템포러리(Gertrude Contemporary, 멜버른), ISCP(International Studio&Curatorial Program, 뉴욕), 관두미술관(Kuandu Museum of Arts, 타이베이) 등 해외기관과 1:1 예술가교환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참여작가는 1개월에서 3개월간 해당 해외기관에 거주하며 창작활동 혹은 창작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설계된 도시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된다.
교류 2년차인 2011년부터 이 프로그램은 작가교환-거주 및 체류비 지원의 기초적 교류방식을 넘어 당해의 특정주제를 선정하고 이에 따른 작가를 각 기관에서 선발하여 금천예술공장의 국내 작가들과 3개월간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왔다.
각 기관에서 선발된 예술가들은 매해 11월 금천예술공장에서 기획하는 <커뮤니티&리서치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이슈 또는 미학적 소재를 현장 ‘리포터’의 핍진(乏盡)함 또는 ‘액티비스트(activist)’의 태도로 작업해왔다.
국제교류사업에 넓게는 입주예술가 국제공모, 국제심포지엄까지 포함된다. 이들 해외예술가와 전문가의 유입을 통해 동일 공간에 함께 작업하는 국내예술가를 국제화하고 해당 센터가 입지한 지역을 국제화하며, 기획인력을 국제화하고 무엇보다도 레지던시 스튜디오로 우수 예술가 유입을 견인한다. 문화예술계 국제교류사업은 국제동향에 무척 예민한데, 근래 스페인의 경제난으로 3년간 교류 중이던 마드리드의 앙가(Hangar)는 재정난으로 교류가 단절되었으며,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요코하마에 위치한 ‘BankArt1929’는 지원자가 한명도 없는 사태를 맞이한 바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시점엔 국제공모로 선발된 해외예술가들이 입국을 꺼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대부분 4인 전후의 기획행정인력을 보유한 영세한 창작스튜디오에서 국제업무는 ‘인력의 국제화’라는 긍정적 측면의 한편으로 국가별로 조금씩 다른 해외비자 발급 문제의 해결, 단기 여행비자를 통해 입국하는 예술가들에게 경제활동이 불허되는 데 따른 창작지원비 등의 어려움을 실무자에게 안겨준다. 그러나 해외예술가의 초청과 장기체류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바, 국제 레지던시 스튜디오를 통해 유입된 해외예술가들이 국내 사립미술관과 대안공간 전시에 참여하면서 ‘초청 및 체류비용’의 부담 없이 국제 프로젝트를 가능케 하는 인프라를 현재의 창작스튜디오가 제공하고 있다.
김희영ㆍ 금천예술공장 총괄매니저

[특별기획] 자유로운 학습의 기회를 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AMA + (Art Major Asian Plus Scholarship) 장학생 프로그램

자유로운 학습의 기회를 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의 증가와 더불어 한국의 미술대학에서 수학하는 외국인 학생 수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 학생과의 교류는 학교의 국제적인 명성과 이미지를 높이는 방편이기도 해 각 대학에서는 다양한 교류 및 장학금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 학생을 보다 많이 유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월간미술》은 다수의 학교 프로그램 중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AMA Plus 장학생 프로그램(Art Major Asian Plus Scholarship)을 통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에 재학 중인 파키스탄 출신의 사디아(학부 1학년)와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니마(전문사 3학기)를 만나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한 동기와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AMA Plus .
인터넷으로 장학프로그램을 알아봤다는 불니마는 “방글라데시의 예술교육 프로그램은 한국에 비해 범위가 협소하고 매우 경쟁적인 구조다. 해외로 나가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교육을 받고 싶었다”고 지원동기를 말했다. 방글라데시의 대학에서는 작업 기법과 기술 측면을 강조하고 극심한 경쟁구도 시스템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불니마는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자신의 생각, 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리얼리즘식의 작법을 강조하고 반복하는 방글라데시 대학의 교육방식과 차이를 느낀다”고 했다. 방글라데시의 대학은 고득점을 얻은 소수의 학생만 논문에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교수의 미감에 맞출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파키스탄에서는 2학년이 되어야 구체적인 전공을 정하는 시스템으로 수업 일정이 짜여 있다. 이 때문에 사디아는 파인아트 전공만 조형예술과에 지원 할 수 있는 조항에 따라 2학년이 되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예술교육도 방글라데시와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을 중요시한다. 예컨대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지역으로 가서 실경수채화 작업을 하는 과제는 가장 보편적인 수업 방식 중 하나라고 한다. 사디아와 불니마는 “컵을 그리라는 주제를 정해주면 우리나라(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학생들은 모두 컵을 그린다. 같은 주제를 제시할 경우 한국 학생들의 캔버스에는 컵이 등장하지 않는다. 컵이라는 개념만을 가지고 전혀 다른 형상을 구현해낸다”며 학생의 사유와 사고가 강조되는 한국의 교육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에서 수업을 들으며 가장 어려운 점으로는 한결같이 ‘언어’를 꼽았다. AMA Plus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타 장학프로그램과 달리 입학 전에 단 3개월의 어학연수 과정이 주어진다. 프로그램 지원 시 한국어 능력에 대한 증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 지원자의 한국어 수준은 걸음마 단계이거나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3개월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느낀다.“팀별로 서로의 작업에 대해 논의 할 때 정말 곤란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한국어로 말하는 그들의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도 못해 아쉽다”라고 사디아는 말했다. 이미 11년간 수업을 들은 불니마는 “이제 수업시간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의견을 표현할 수준은 되지 못하는 정도”라고 했다. 유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들의 원활한 수업진행을 위해 입학 전 어학연수 기간을 늘리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어학을 제외하고 이 프로그램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사디아는 학부과정을 마치면 전문사 과정에, 불니마는 전문사과정을 끝내면 박사과정에 지원할 생각을 갖고 있다.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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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iew

<유니버셜스튜디오, 서울전> 6.17~8.10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은 2014년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을 포스트뮤지엄으로 설정하고 그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와 주제를 선정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2014세마골드 <노바디> (3.11~5.18)는 이러한 의도에 해외로 이민을 갔거나 장기거주하며 작업하는 중년의 한인 여성작가 3명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상반되게 현재 국내로 이주했거나 장기거주하며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국내 거주 외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 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6월 17일부터 8월 10일까지 열린다.
은 폴 카젠더, 올리버 그림, 사이먼 몰리, 탈루 L. N 등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외국인이 아니라 최소 1년 이상 한국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다. 한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작가들의 경우 한국에 대한 자신만의 이해와 관점이 생기고 이것이 그들의 작업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타나게 된다.
전시 제목인 <유니버설 스튜디오(universal studio)>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영화 배급사이자 배급사에서 운영하는 테마파크와 동명이다. 전시를 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조아라 큐레이터에 따르면 “영화 테마파크로서 갖는 판타지, 유희적 이미지가 ‘문화적 판타지’로 연결된다고 생각해 전시제목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외국인이 한국에 거주하며 갖게 되는 한국의 일상과 문화에 대한 ‘낭만화’와 이들과 이들의 작업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낭만적 시각이 ‘문화적 판타지’로서 압축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낭만적 시각은 긍정 혹은 부정적 시각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다. 참여하는 작가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하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들 개개인의 한국 생활이 작업에 녹아들어있다고 판단된 작가들이다. 작가로서 그들의 보편적인 고민과 개인적인 삶의 스토리가 어떻게 작품에 구현될지 기대된다.
결국 이번 전시는 “외국인 거주자 비율이 비교적 낮은 한국에서 다른 직업이 아닌 예술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외국 작가 개개의 삶과 시각을 시각예술작업을 통해 미시적으로 접근하여 관람객과 공유하고 그들이 본 한국문화, 그리고 그들을 보는 한국인의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장을 마련하는 데 의의”가 있다. 임승현 기자

아래·올리버 그림(Oliver Griem) Multimedia installation; 3D print figures, moving light, light, sound scape 2013

올리버 그림(Oliver Griem) Multimedia installation; 3D print figures, moving light, light, sound scape 2013

[특별기획] 예술가와 국경(國境)

예술가와 국경(國境)

백기영 경기문화재단 수석학예사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가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 독일에서 자신의 평생 동지가 될 플럭서스 동료들과 만나 현대미술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예술가로서 성공의 토양이 된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업했다. 2006년 결국 그는 뉴욕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이렇게 극동아시아와 유럽, 미국문화를 가로지르며 6개국의 언어를 구사했던 대표적인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다. 1984년 1월 1일, 텔레비전 위성방송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했던 백남준은, 전 세계 2500만 명이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즉 텔레비전 세상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실현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1984년 설날 뉴욕과 파리를 거점으로 하여 미국과 독일, 프랑스 그리고 한국에 동시 방송되었다. 이미 동유럽의 몰락을 예견한 그는 “예술가의 힘은 국경의 벽을 넘는다”고 하면서, 1986년 도쿄-뉴욕-서울을 연결한 <바바이 키플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하여 위성 작업 <랩 어라운드 더 월드>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텔레비전의 가능성을 실험함으로서 전 세계를 시공간으로 통합하는 우주적 예술로서의 확장을 꾀한 셈이다.
백남준의 국경을 넘나드는 전 지구적인 예술 활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20세기 정보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예술가들 뿐 아니라, 인류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았다. 니꼴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그의 책 《래디컨트》에서 이런 세계화된 환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뿌리와 줄기를 동시에 가진 식물에 비유했다. 래디컨트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유목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과 접속한다. 이런 ‘래디컨트’ 형 예술가들은 최근 전 세계를 이동하며 비행 마일리지를 축적하고 있다. 특히, 서구 유럽에 비해서 미술제도나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지역 출신의 작가들은 서구 주요 도시와 자신의 모국을 오고가며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서구유럽의 국가들은 역량 있는 예술가들이 자국에 체류하는 것이 얼마나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가들을 자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의 이동(Mobility)’을 장려하는 문화예술지원정책도 확대하고 있는데, 현재 전 세계 레지던시 기관네트워크를 담당하고 있는 레즈아티스(Resartis)에 등록된 단체만 해도 현재 70개국 400여 기관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예술가들의 이동을 촉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관이 노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국제교류를 기반으로 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이 지역마다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지역의 대안공간이나 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있는 프로젝트형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이 그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비자제도의 장애물
그러나 정작 예술가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문화교류의 필수적 요소인 ‘체류’의 문제에 있어 실질적인 어려움들이 존재한다. 3개월 미만까지는 전 세계 여행자의 대부분이 별 어려움 없이 어느 나라 건 체류할 수 있으나, 누군가 좀 더 오래 체류하기를 원한다면, 혹은 예술가로 그 나라에 정착하기를 원한다면 쉽지 않은 난제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예만 봐도, 정작 3개월 이상 장기간 체류 하고 있는 외국인 작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국내에 체류하는 예술가들의 유형과 그에 따른 비자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제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여행비자로 오기 때문에 대분의 작가는 무비자 체결 협력국가에서 오고 아닌 경우는 1~3개월 체류비자를 발급해 줌), 한 쪽 배우자가 한국인으로 결혼을 통해 동반자 비자로 체류하는 작가(F-3), 최근 대학에서 영어수업을 필수화 하면서 교수로 체류하는 작가(E-1), 공부하러 온 유학생 작가(D-2), 드물기는 하지만 영어 학원 강사(E-2)나 국내 다른 직종에 취업하여 체류하면서 작업하는 작가(C-4/단기체류, 문화예술은 D-1 비자로 분류)들로 순수하게 예술 활동만을 위해서 체류하고 있는 작가(D-1)들이 그 예다. 반면, E형 혹은 D형으로 분류되는 장기체류를 위한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취득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소위 해당분야의 전문가여야만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문제는 문화예술분야에서 있어서 그 전문성을 어떻게 확인 하느냐에 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전문성이란 학력증명을 위한 졸업증명서와, 국전이나 공모적의 수상경력 같은 것에 불과하다. 공연예술 쪽은 더 심각한 상황인데, 정작 예술가들보다는 유흥업소의 무희들에게 예술흥행비자(E-6)가 더 많이 발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2006년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교류를 위한 문인화 기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2007년에는 다문화 밀집지역인 안산의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를 운영하면서 2008년과 그 이듬해에 이어 듀얼게임(Dual Game)을 통하여 예술가 스스로가 매니지먼트하는 예술가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2009년에는 새롭게 개관된 경기창작센터를 통해 약 2년 6개월 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예술가들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한 바 있다. 이러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의 운영에서 일반적으로 외국인 작가들은 국내에 3개월 미만의 기간 동안 체류한다. 그러나 외국작가들의 관광 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타자로서 객관적인 시선을 지역문화공간에서 얻어 내고자 한다면, 이들의 체류기간은 너무 짧다. 지역협력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 외국인 작가들은 부족한 정보와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나마 통역을 통해서 끝없는 정보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내 지치거나 자신의 피상적인 정보만 가지고 작업을 끝내고 자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에서는 외국인 작가들이 D-1이나 C-3 비자를 취득하기도 했는데, 3개월 여행비자가 아닌 그 이상의 체류비자를 얻으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 한다. 특히, 예술가들의 체류비자를 처리해본 경험이 없는 지역의 출입국관리소의 관계자들은 이들 예술가를 마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취급 하면서, 좀처럼 체류비자를 내주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가능한 채널을 모두 동원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레지던시에서는 작가들을 3개월 여행비자로 한정해서 받거나 더 머물고 싶은 경우는 인근 국가인 일본이나 중국으로 한번 나갔다가 다시 귀국하는 방법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각 나라와 맺고 있는 쌍방주의 외교정책으로 인해서 딱히 정해진 규칙도 없고, 사례가 발생하면 직접 해당 기관과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볼 때, 창조경제의 핵심 주역으로 예술가를 국가정책의 모델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의 외국인 예술가 체류 비자 문제를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비자문제의 해외사례
그러면,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외국인 예술가 비자 정책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을까. 예술가체류 비자정책을 관용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들은 캐나다와 미국과 같은 다문화 국가들이다. 캐나다에서 유학을 한 외국인 학생은 졸업 후에 일할 수 있도록 3년 체류 비자를 받게 된다. 이 비자로 체류하는 도중에 영주권을 얻거나 영구비자를 취득하게 되면 캐나다에 계속해서 체류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도 비슷한데, 졸업 후 1년간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라는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지고, 이 기간 동안에 주요 갤러리나 예술관련 기관에서 활동하게 되면, 그 활동 기간이 얼마나 확정 되었는가에 따라 비자를 연장해 준다. 즉 예술가가 만일 활발히 활동해 3년간의 예술가 비자(O-1B)를 지원해 줄 갤러리를 찾으면, 그 비자를 신청해서 3년간 더 연장할 수 있다. 물론 3년 후에 영주권을 신청해서 취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별도의 체류를 위한 비자문제는 없어진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영주권이나 비자취득 요건이 까다롭지 않은데도 이 기간 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느슨하게 생각하다가 간혹 불법체류자가 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유럽의 국가들은 북미의 다문화 국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예술가 비자정책이 까다롭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우리나라보다는 관용적이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친 예술가가 지속해서 체류를 하려면 재학시절에 보다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하고 전시나 수상경력 같은 것들을 바탕으로 갤러리와 전속을 맺거나 쿤스트 페어라인이나 독일의 미술제도 기관에서 확증된 전시 일정이나 계획, 더 나아가서는 1년 간 예술 활동 스케줄과 일정 금액 정도의 수입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친절한 미술계 인사를 만나면, 불법이지만 이 또한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해 주기도 한다.) 이 증빙서류를 바탕으로 외국인 예술가는 1년 혹은 2년 비자를 받는데, 보통은 1년 비자를 받는다. 문제는 최초 취득은 쉽지만, 연장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비자 기간이 끝나면 다시 2년 비자를 신청할 수가 있고 이렇게 해서 5년을 지속해서 체류하면 “영구체류 예술가 비자(Unbefristete Aufenthaltserlaubnis)”를 얻을 수가 있다. 다만, 첫 연장 시부터 독일 세무서에 등록되어 있어야 하고 수익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다. 특히 일년 수익금으로 7,000유로(10,000,000원) 정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변호사나 세무사를 통해서 진행해야 한다.
통계청이 2013년 10월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체류 외국인이 150만7000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인구대비 3%가 넘는 외국인이 살고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중에 10만8천명의 유학생들이 체류하고 있고 문화예술 전문가(D-1) 비자를 취득해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90명 정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의 모 대학에서 4년을 유학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일본인 작가가 찾아와서 리트머스에서 체류서류를 준비해 줄 수 있는지 부탁해 왔다. 담당 큐레이터와 대표가 출입국관리소를 여러 차례 오고가며 장기체류를 돕고자 했는데, 현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작가였지만, 예술을 통한 실질적인 소득을 증빙할 수 없었던 작가는 자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안산 원곡동에서 “바벨 디스코스(Babel Discourse)”라는 생활문화 공동체 사업에서 만나 인도네시아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주었던 작가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안무를 전공한 그녀는 한국에 좀 더 체류하며 작업하고 싶었지만, 비자 체류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바로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예술계의 국제화를 위해서 한국에서 유학하거나 한국과의 교류 사업을 통해서 한국에 우호적인 친한파 예술가들이 국내에 편하게 체류하면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많은 항공료를 들여가며 해외에서 예술가들을 초청해 오는 방식보다 더 낫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 같은 정책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예술계가 외국인 체류를 위한 비자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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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주 (1)

www.salad.or.kr 박경주 (주)샐러드 대표

다문화 창작 집단 샐러드 – 다문화의 핵심은 문화다양성

2005년 독립미디어 인터넷 다문화방송국 샐러드TV(구 이주노동자방송국)를 설립해 지금까지 이주민과 정주민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을 통해 문화다양성을 추구해왔다. 최근 활동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샐러드 TV는 2011년 이후 잠정 휴업상태이며, 2009년에 이주민 커뮤니티와 문화다양성 공연을 위해 이주민들이 배우로 활동하는 극단 샐러드를 창립했다. 지금은 문화예술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국제결혼 등으로 발생하는 현상과 문제 등을 희곡부터 연출까지 내가 직접 맡아서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국어, 영어, 다국어로 ‘샐러드 붐’이라는 신문을 내고 있다. 내용은 극단 공연 소식에서 샐러드 이주민 단원들이 직접 작성하는 문화다양성에 관한 기사로 확대하고 있다. 2012년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됐으며 올해 문화예술단체에서 (주)샐러드로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사회적기업 인증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다문화’가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다문화의 개념이 편향된 측면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관련된 콘텐츠가 많이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는 어떤 정책이 나와도 사회적인 인식이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지금은 덜하지만 초기에는 행사성 사업이 많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앞으로 20년은 더 사회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다문화’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다문화의 핵심은 문화다양성으로 이것은 국적에 따른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소수자 문제, 경제 소외계층 등 많은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데, 지금 과하게 국제결혼 가정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보니 국제결혼으로 입국하는 여성의 주된 출신 국가인 중국, 베트남 등을 중심으로 다뤄지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현재 다문화 이미지는 상품화된 측면이 많다. 또한 지난 10년간 이슈화된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최근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극단 샐러드의 활동은 어떤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이주노동자방송국을 운영할 때 이주노동자들이 삶과 연계된 문화활동을 통해 주체적인 목소리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극단 샐러드는 이주민들에게 문화예술 일자리를 창출하고 문화예술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래 예술을 하던 사람도 있고, 한국에 와서 예술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
극단 단원들은 주 20시간에서 40시간씩 일하며 이들에게 정식으로 급여를 지급하고 사회보험도 제공하고 있다. 수습기간에도 연습비와 출연료를 지급한다. 샐러드 아티스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정식 단원 중에서 우수한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 이들이 직접 연출을 한다거나 스스로 창작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들이 10년 후에도 예술가로 활동하리라 장담하긴 힘들지만 중요한 건 그런 사례를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극단을 5년 넘게 운영하면서 공연에서 만난 관객이 2만 명이 넘는다. 창단 당시에는 무료 공연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대부분 유료 공연을 하고 있다. 예술활동 외에 이주민 공연예술 아카데미도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 미술분야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공연을 하면 수익이 생기기 때문에 아카데미 수료 후에 취업활동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는데, 미술 분야는 아무래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되어 아직까지 시도하지 않고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 작가들이 주로 서구권 출신에 집중되어 있다. 아시아계 예술가의 경우 국내 거주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 같다 단기로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 말고는 찾기 힘든 것 같다. 생활비도 비싸고 특히 예술가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일거다. 현재 국내 대학에서는 재정적인 문제로 국외 유학생을 많이 유치하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경우 예술분야 아시아 장학생 제도도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졸업 이후 실질적으로 국내에 거주하면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유치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2012년 국내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록밴드 ‘곱창전골’ 멤버들이 샐러드와 전속계약을 맺어 예술가 비자를 받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예술가 비자 제도에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일명 예술흥행비자라고 불리고 있는 예술가 비자(E-6)는 기본적으로 허가 받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서는 주로 공연예술 쪽에서 이 비자를 받아 입국하고 있다. 러시아 무희들, 아프리카 공연단 등이 이에 해당되며 비자 신청시 기본적으로 공연장과의 계약서를 증빙자료와 본국에서 동일한 활동을 한 경력을 증빙할 수 있는 영상자료를 제출하여야 한다. 이들의 비자취득 자격심사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맡는다. 과거 예술 이주노동자의 덫이 된 예술흥행비자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들이 인신매매, 성매매, 임금 체불, 폭력 등 인권침해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만약 공연장과의 계약서가 없다면 국내 소속사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소속사를 통해 문화부장관의 고용추천서를 받아 출입국에 비자 신청을 해야 한다. 한해 문화부 장관의 고용추천을 받는 경우는 20여명이라고 하니 얼마만큼 비자 취득이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취업하겠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계약 관계가 있어야하며 고용주는 근로자의 신원보증도 해주어야 한다. 예술가하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프리랜서 직업이다. 그러나 국내 출입국법상 외국인 근로자는 고용주와의 사업계약이 있어야 비자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비자를 받는 것이 희박한 것 같다. 선진국에서처럼 예술활동 증빙자료, 갤러리 대표나 큐레이터, 교수 등 관련분야 전문가의 추천서, 그리고 현지에서 진행할 프로젝트 제안서 등을 증빙하여 예술인 비자를 신청할 수 있도록 관련제도가 바뀐다면 앞으로 더 많은 이주민예술가들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본국에서 이미 예술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유학생들의 경우 학업이후 예술가 비자를 받아 활동한다면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메이드인코리아’ 상표를 붙인 이주민예술가들이 국내 예술시장의 다양성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극단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가 현재 극단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극단 설립 6년차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 같다. 작가로서 나에게 샐러드는 새로움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예술프로젝트다. 이러한 예술적 실험이 지속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매년 한해 살림을 위해 새로운 도전에 부딪혀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예술 활동을 하고 싶어 극단의 문을 두드리는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있는 한 예술과 사회, 예술과 삶의 경계에 대한 샐러드의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이슬비 기자

[특별기획]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

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

이윤종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반도는 고대부터 크고 작은 외세 침탈의 역사를 겪어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까지 한반도에서 ‘외국’이란 언제나 중국 아니면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차지하는 크기가 워낙 큰 데다, 한반도가 서구의 시각에서 소위 ‘극동(Far East)’이라 불리는 동아시아의 맨 끝에 위치한 것도 모자라 북·남미 대륙 혹은 유럽과의 연결 통로인 태평양마저 러시아부터 동남아 지역까지 이르는 기다란 일본 열도에 가로막혀 있는, 고립된,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게다가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반백년 이상 지속되면서, 일제강점기에 한국 독립 운동의 근거지였던 러시아의 연해주와 지금은 중국 연변 지역인 간도와의 접근성마저 북에 가로막혀 차단되면서, 남한은 더더욱 외국 혹은 외국인과의 교류가 드문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이래 전략적으로 고도성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김영삼 정부의 국가정책적인 ‘세계화’ 추진 이후, 대한민국도 서서히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물결에 편입하면서 서울은 이제 제법 다인종, 다문화가 자연스러운 코스모폴리스(cosmopolis)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 글은 6·25 전쟁 이후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급변해온 한국 사회의 문화적, 인종적 인식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중심으로 그 속에서 그려지거나 비쳐지는 외국인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이후인 1950년대부터라는 전제하에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만화, 영화, 대중음악, 잡지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문화가 존재하고 사랑받았고 이를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영화 전문가로서 필자가 영화 분야에 관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의 영화 중 필름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몇 편에 불과하고, 현존하거나 복원한 영화들 속의 외국인도 시대적 특성상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나운규 등의 영화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제 치하 초기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풍토하에서 일본인은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메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1941년 작 <반도의 봄(이병일)>의 영화 속 영화인 조선 영화 <성춘향>의 일본인 제작자처럼 조선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중립적인 인물로서 표현되기도 했다.
광복 전 한반도의 외국인이 주로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면, 광복 후 6·25 전쟁 전후 냉전시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외국인이란 미군 부대 주변의 미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이나 비즈니스맨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냉전시대에 미국 혹은 미국인은 한국이 생각할 수 있는 서구와 서양인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제유적인 존재였다. 이웃나라이긴 하지만 당시 동구권의 중심국들로서 각각 중공이라 불리던 중국이나, 소련이라 불리던 러시아와의 교류가 남한 사회에서 미국이라는 정치, 경제적 초강대국이자 거대 서방세계 우방국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외국인의 절대 다수 또한 미군이었고 드물게 일본인이 등장하곤 했다. 특히 미군들은 다수의 한국 영화 속에서 ‘양공주’라 불리던 미군 기지촌 주변 한국인 직업여성들의 고객 혹은 연인으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들은 가끔은 진정한 사랑에 빠져 그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에서 구원해 “아름다운 나라”인 미국으로 데리고 가는 남성 구세주의 역할도 맡았지만, 대부분 그녀들을 홀대하고 학대하거나 무책임하게 임신시킨 채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버리는 매정한 남성들로 그려졌다. <지옥화(1957, 신상옥)>, <오발탄(1961, 유현목)>,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이만희)>, <육체의 고백(1964, 조긍하)> 등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들 속 미군은 주로 후자로 묘사되었다.
미군이나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양가적인 인식, 즉 정치·경제적 구원자/원조자인 동시에 정신적, 문화적 착취자/수탈자라는 인식은 1970~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계속 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미국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방관했다는 거센 비판과 함께 영화 속에도 반미주의적 흐름이 강하게 드러나, 미군이 아니더라도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일반 미국인 남성도 한국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함으로써 정신적인 타격을 주는 민족적 위협을 상징하는 서사적 장치로 자주 동원되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이장호)>, <깊고 푸른 밤(1985, 배창호)>, <여왕벌(1986, 이원세)>, ,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장길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장길수)> 등이 그러한 서사 장치를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 스웨덴 입양아인 수잔 브링크의 실화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후 영화화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 장길수)>에서는 스웨덴 백인 남성들이 미국인을 대신한 서사 장치로서 (외국에서 성장한) 한국 여성에게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주는 외국 남성으로 활용되었다.
미군이나 백인 남성에 대한 보다 복합적인 시선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다. 김기덕 감독은 <수취인 불명(2001)>과 <해안선(2002)> 등의 영화에서 미국/미국인과 한국/한국인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설정하지 않고 미군 병사나 그 한국인 혼혈 후예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꾀했다. 봉준호 감독도 천만 관객 흥행작 <괴물(2006)>에서 한강에 유독 물질을 방류해 대형 유전자 변이 괴물을 제조하는 도덕적 결함을 지닌 미군 장교뿐 아니라 그 괴물에 맞서 싸우는 미군 병사를 병치시킴으로써 미국과 미국인/미군에 대한 한국인의 복합적인 심리 상태를 표출했다.

복잡하고 세분화된 시선
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인/미군으로 대표되던 외국인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보다 다양하게 세분화되기 시작한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 도시와 최근에 한국관광공사 사장까지 지낸 독일 출신 사업가이자 방송인인 이한우/이참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다양한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귀화 한국인으로서 정착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특히 이참은 1994년 KBS 드라마 <딸 부잣집>에서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 사위로 등장해 한국 드라마 속 외국인 배우의 포문을 열었고 이후로도 SBS의 <천국의 계단(2003)>, MBC의 <제 5 공화국(2005)>등의 드라마에도 꾸준히 출연해 한국에 거주하는 유럽 혹은 미주 출신(재연) 배우 지망생들에게 꿈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 유럽계 외국인들의 방송 출연 빈도는 매우 높아져서 KBS의 예능 프로인 <잘 먹고 잘 사는 법(2002~)>의 “팔도유랑기” 코너에 출연했던 벨기에 출신의 줄리안, 프랑스 출신의 티에리, 한국계 프랑스 입양아 출신인 필립을 비롯해 MBC 드라마 <탐나는 도다 (2009)>에 주연급으로 출연한 프랑스 출신 황찬빈(피에르 데포르트) 등도 한국인 시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 다문화가정의 증가와 함께 시행된 한국 정부의 다문화정책에 따라 백인에 국한되었던 한국 대중문화 속 외국인의 인종적, 문화적 스펙트럼도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KBS의 예능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는 유럽과 미주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한국어가 능숙한 미녀들을 게스트로 섭외해 다문화주의를 주제로 다양한 토크를 유도하며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다. 물론 포맷의 식상함으로 장수 프로그램으로 안착하지는 못 했지만, 이후 다문화가정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으로 KBS에서 1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방송하는 <러브 인 아시아> 등의 프로그램과 함께 한국 내 비백인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와 행복을 찾는다는 소재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SBS 드라마 <황금신부 (2007~2008)> 이후로 공중파 일일 드라마들은 점차 한국에 거주하는 동남아시아계 신부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이 혹은 이들의 자손들이 한국의 인종주의에 의해 고통 받는 불행한 일상을 영화 속에서는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기도 하는데,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의형제(2009, 장훈)>, <완득이(2011, 이한)> 등이 특히 그러했다.
2010년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영화나 TV 드라마뿐 아니라 가요계에서도 외국인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KBS의 최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스타가 된 방글라데시 출신 가수 방대한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해 한국인에게 익숙한 연예인이 되었다. 특히 한류를 겨냥한 한국 아이돌 그룹 속에는 닉쿤(2PM), 빅토리아(F(X)(위 사진)), 페이(미쓰에이) 등의 아시아계 스타들이 포진해 있다. 물론 닉쿤은 음주운전 사고로 물의를 빚은 후 예전에 비해 한국 내에서의 인기가 상당히 주춤하고, 한때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슈퍼주니어의 한경도 그룹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론 이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외국인 가수의 시초는 아니다. 1999년 데뷔한 남성 트리오 Y2K의 일본인 형제도 한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다. 또한 2011년 슈퍼스타 K를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록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드러머는 브레드는 백인 미국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문화 속 외국인은 이제 미국과 일본, 중국이라는 제한적 국적의 고리를 풀고 다양한 나라 출신들로 확대되었다. MBC 군대 체험 예능 프로그램인 <진짜 사나이>를 통해 스타 개그맨으로 자리를 굳힌 샘 해밍턴이 호주 출신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다. 2014년 현재 다양한 분야의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백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나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도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의 비백인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환상하에서 오랫동안 타인종이나 외국인에 대한 공포와 경멸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의 정치, 경제적 지원하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백인 미국인 이외의 외국인에 대해 양가적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우호적인 감정을 품을 틈도 없이 한국인들이 바삐 살아와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보다 열린 시선과 자세로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진정으로 포용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외국에 나가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감내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먼저 외국인에 대한 그러한 시선을 폐기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차별하여 차이를 만드는 시선부터 먼저 거두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

[스페셜 아티스트] 이진용-이것은 가방이 아니다

이것은 가방이 아니다

작가 이진용에게 구상과 추상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는 스스로를 본질주의 작가(本質主義, Essentialist)라고 말한다.
비록 외형상 극사실회화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대상을 보고 그리지 않으며 그 그림은 머릿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 이진용의 이런 발언은 대상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그림을 구상회화라고 주장했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대척점에 있지만 일맥상통 한다. 5월 24일까지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갤러리 바톤에서 이진용의 대형 신작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손때 묻은 낡은 가방-그림은 그 속에 담긴 시간의 축적과 감동을 작가 이진용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해 표현한 또 다른 차원의 추상회화로 읽힌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이진용은 가방과 책이라는 구체적인 사물과의 유사성 속에서 그것을 재현했다. 보는 이는 가방과 책을 모방한 그림을 통해 그 대상을 재인식한다. 그것은 거대한 벽화이기도 하고 캔버스로 이루어진 설치와도 같다. 한쪽 벽면 전체가 완전히 그림으로, 화면으로 직립해 있다. 다른 쪽 벽에는 책등을 보여주는 대형 화면이 가설되어 있다. 사각형의 캔버스 틀이 그 자체로 부풀어 올라 사물 자체가 되어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배경 없이 그대로 사물이 되어 육박하는 그림은 자신의 존재감과 그 존재 위에 얹혀진 시간의 깊이와 세월의 연륜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본래의 크기보다 훨씬 커지는 데서 오는 압도감이 우선적으로 망막을 막아선다. 실제 여행용 가방과 오래된 책들이 놓여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려진 그림이다. 가죽 가방의 질감과 세부장식, 부착된 스티커 그리고 낡은 책등과 빛바랜 종이, 갈라지고 삭은 시간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고서의 상황성을 묘사한 그림은 탁월한 재현술에 기반을 둔다. 무척 잘 그려진 그림이다. 고영훈과 이석주의 책 그림, 강형구의 인물화, 이정웅의 붓그림 등을 연상시키는 놀라운 눈속임 기법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가는 가방과 책을 그렸기보다는 그 사물을 빌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힘, 그에 따라 변화하며 서서히 소멸해가는 존재의 허무, 비애 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단지 보이는 대상의 묘사가 목적이 아니라 내용,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니타스적인 정물화의 흔적이 감지되기도 한다. 사실 모든 사물은 그 시간의 힘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것들이고 죽어가는 것들이다. 따라서 오래된 사물은 유한한 인간에게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존재다. 그것이 수집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진용은 오랜 세월동안 엄청난 사물들을 수집해왔다고 한다. 그가 그려낸 오래된 책과 가방 역시 그의 수집목록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하면 수집이란 심리적으로는 흥미요, 생리적으로는 성벽(性癖)이다. 수집은 물건을 향한 정애다.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는 그러한 정의, 기연(機緣)을 만드는 일이다.(야나기 무네요시,《  수집이야기》, 산처럼, 2008) 수집은 물건에 대한 이해를 강화하는 길이다. 무언가 자신을 몰입하게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집하고자 하는 욕망은 무척 인간적인 행위일 것이다. 수집은 합리적인 조치이기보다 훨씬 불가사의한 작동을 한다. 특정 사물을 편애하고 이를 모으는 사람은 수집하는 물건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찾아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렘브란트는 명화를 모으는 데 가진 돈을 모두 탕진했다. 워홀 역시 대단한 컬렉터였다. 우리의 경우 김환기, 도상봉, 권옥연, 김종학 그리고 구본창, 현태준 등이 알려진 수집가/작가들이다. 특별한 골동품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물건을 수집하고 여기에서 그 조용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귀 기울이고 그 사소한 것들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된 기호이나 감성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수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해나간 경우에 해당한다. 이진용 또한 대단한 수집가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온갖 오래된 사물들을 수집하고 이를 완상하면서 그것이 지닌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그 아름다움은 오래된 물건의 피부에 서식하는 시간, 죽음의 자리다. 특히  정신과 물질을 담는 용기이자 전달 매체인 책과 가방이 주는 아름다움,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그 속에 배어있는 장인정신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매료된 그는 그러한 아우라를 그리고자 한다.
“제게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운명입니다. … 저는 옛사람들이 만든 물건에서 만져지는 장인정신과 그것들을 지녔던 사람들의 손길과 견뎌온 세월에서 무한한 감동과 전율을 느낍니다. … 이런 것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이자 역사겠지요. 저는 이런 것들의 소중함과 여기서 느끼는 감동과 에너지를 제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습니다.”
(전시도록에 실린 김순응과의 대담에서)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그가 수집한 물건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수집한 물건의 외형을 그대로 모방,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것들을 첨가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억겁의 시간’과 그로부터 받은 ‘감동과 에너지’를 그림 밖으로 표출하고자 하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극사실적인 그림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강변한다.
“제 작품은 극사실주의가 아닙니다. 아니 사실주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상을 보고 그리지 않습니다. 제가 가방을 그릴 때 그 가방은 제 머릿속에서 나옵니다. 제가 무수히 많은 오래된 가방에 축적된 시간을 보면서 받았던 감동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어 그림으로 표현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겁니다. … 저는 대상의 본질이나 사물의 진실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굳이 카테고리를 정하라면 저는 본질주의 작가(Essentialist)가 되고 싶습니다. … 저는 사물의 본질적인 무엇,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한 무엇 그리고  객관을 그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시도록에 실린 김순응과의 대담에서)

2012년 아라리오갤러리 청담에서 열린 이진용의 개인전 광경. 작가가 수집한 물건과 그림이 함께 전시됐다

2012년 아라리오갤러리 청담에서 열린 이진용의 개인전 광경. 작가가 수집한 물건과 그림이 함께 전시됐다

기교와 철학이 겸비된 작가
주관을 부정한 객관의 세계를 그대로 응시하고자 하는 것, 동시에 그 객관의 세계에 상상력과 변형이라는 주관의 산물을 삽입하려는 시도로 이루어진, 주관/객관이 한자리에 서식하고 겹쳐지는 그리기!
흥미로운 것은 최근 극사실적인 그림에 대표적인 작가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그림을 극사실주의 혹은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보수적 기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상상력과 변형, 연출을 동원해 이전의 사실주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피상적으로는 대상과 닮아 보이는 그것이 실제로는 허구의 이미지로 가득한 거짓의 세계, 이른바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것이다. 이는 강형구의 작가의 변(辯)과 매우 유사하다. 초상화의 경우 그 연출방식도 매우 흡사하다. 이진용의 그림은 실제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의 산물이 된다. 수십 년간 수많은 책과 가방, 그리고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관계와 가치, 시간들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인 기억들과 영상, 물리적 감촉에 대한 시각화가 오랜 시간 축적되면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회화적 구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과 가방의 이미지들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한 화가의 극단적인 추구의 결과인 셈이다. 가방과 책의 외형 그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극한의 탐구와 절제된 고도의 예술적 테크닉의 이상적인 결합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이진용에게 재현이란 단지 눈앞에 자리한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 그 자체로 귀결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재현된 존재들로 인해 환기되는 정서나 느낌의 고양에 있다. 주어진 대상의 즉물적인 묘사 너머의 무엇인가를 환기시키는 작업이란 얘기다. 그러니 다분히 관념성이 강한 그림이다. 그가 그려낸 가방과 책은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그가 상상해서 다시 연출한 가짜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기존 책과 가방을 참조해서 이루어진다. 사실 그 위에 슬그머니 허구를 창출하는 전략이다. 왜곡과 변형, 연출을 통해 리얼리티보다 더 실재적 효과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대 극사실주의를 기법으로 내세우는 작가들의 작업 알리바이로 작동된다.
“인간이 상상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 말입니다. 작품의 힘은 ‘경탄’에서 나오고 경탄은 무엇이 인간의 한계 밖에 있을 때 나옵니다. 그림에 대한 경탄은 이론이나 철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미술은 문자 그대로 시각예술(視覺藝術, Visual art)입니다.”
(전시도록에 실린 김순응과의 대담에서)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여전히 일루전/모방의 즐거움에 호소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물의 표면을 열심히 따라가보는 그리기이자 사물의 질감에 대한 편집증적 편애에 해당한다. 오로지 표면만을 애무하는 그리기는 회화의 본질적인 영역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는 사물의 감각적인 질감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고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일이다. 새삼 미술행위가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관계되어 이루어지는 형국을 조망하고 그 눈속임에 기반을 둔 조형행위의 여러 상황을 통해 미술의 가장 오래된 본성을 부활시키고 있는 동시대 극사실적인 회화의 존재 이유 및 그 전략과 어법, 특성들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과연 이진용의 이 같은 그림이 기존의 사실주의적 그림들과 어떤 변별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대회화로서 어떠한 의미 있는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재현의 논리, 동일성의 법칙에서 빠져나온 비재현적 회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20세기 이후 회화는 사실상 그러한 재현의 논리로부터 달아나는 방법을 지속해서 모색해왔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단지 모방적인 회화의 닮은꼴을 변형하거나 약간 틀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를 추인하는 재인과 상식, 그 특정한 가치판단을 내포하는 도그마 자체를 문제시하는 선에서 풀려나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

 

(왼쪽) 캔버스에 유채 131×194cm 2013 갤러리 바톤 전시광경

<Hardbacks #H1H05> (왼쪽) 캔버스에 유채 131×194cm 2013 갤러리 바톤 전시광경

 

이진용은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1984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조현화랑, 박여숙화랑, LA Artcore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등에서 24회 개인전을 열었다. 부일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MBC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대전 등에서 수상했다. 현재 부산에서 작업하고 있다. 

[작가리뷰] 김미루 – 미메시스의 능력 회복을 위하여

미메시스의 능력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통해 인간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작가 김미루의 개인전 <낙타가 사막으로 간 까닭은?>(3.27~4.29)이 트렁크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동안 도시, 돼지우리 속 누드 사진으로 충격을 던진 작가가 이번에는 사막에 몸을 던졌다. 여자의 벗은 몸을 금기시하는 모슬렘문화권의 이 사막은 옷을 입은 채로도 견디기 힘든 악조건이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김영옥  이미지 비평, 연세대 문화학과 강사

하얀 스카프와 긴 장옷으로 머리와 몸을 감싼 한 여자가 사원 마당에 앉아 있다. 그녀 앞에는 우유가 가득 담겨 있는 함지박이 놓여 있다. 작은 몸의 쥐들이 함지박 둘레에 달라붙어 열심히 우유를 마시고 있다. 우유를 충분히 마신 쥐들은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가 손등을 타고 넘기도 한다. 소소하고 즐거운 놀이를 하듯이 쥐들의 움직임은 가볍고 발랄하다. 가끔씩 그녀 자신도 손바닥으로 우유를 길어 올려 입술을 축인다. 사원을 찾은 마을 주민들 중에 그녀를 여신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다. 그녀 앞에서 절을 하거나 아이의 손을 이끌어 그녀의 옷자락을 만지게 한다. 그녀의 축복이 아이에게 가 닿기를 소망하면서. 이것은 아티스트 김미루가 만든 동영상의 장면이다. 그녀는 인도의 북부 비카네르에 있는 까르니마따 쥐 사원에 가서 쥐들과 함께 우유를 마시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원의 뜰은 고요하고 쥐들과 함께 우유를 마시고 쥐들의 사랑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평화롭다. 쥐들을 무서워하거나 더럽다고 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퍼포먼스가 꽤나 의아하고 기이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김미루가 어떤 아티스트인지 조금이라도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띨 수도 있으리라. 자신의 웹 홈페이지에서 김미루는 ‘쥐를 사랑하고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실제로 쥐들은 그녀의 아티스트 경력에 중요한 키워드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사랑하고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키우며 돌본 동물이 쥐고, 쥐를 찾아 나선 걸음이 그녀를 지하 터널로 이끌었다. 그녀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언더그라운드 아트’ 작업은 그러니까 쥐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7년 Ted talk에서 자신의 언더그라운드 사진작업을 소개할 때 김미루는 쥐와의 이 인연을 가감 없이 전한다.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서 지하도시 탐험 여정을 설명하는 그녀는 매우 수줍어 한다. 다른 Ted 연사들과는 달리 그녀는 무대 위에서 큰 동작을 만들지도 드라마틱한 목소리 연기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거의 하나의 점처럼 제자리에 서서 가끔 비칠 듯 말 듯 미소를 띠며 일정한 톤으로 지하도시 탐험과 그 결과로 남겨진 사진들을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은 약간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수줍음을 타는 여자가 <Naked City Spleen>과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처럼 ‘대담한’ 시리즈를 기획하고 수행했단 말인가. 그녀의 작업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부드럽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말하는 방식,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나면 그녀의 사진이 전하는 느낌들은 더 깊어지고 순전해진다.
김미루는 모든 동물에게 친화력을 느낀다. 그녀에게는 사람 또한 하나의 동물 종(animal species)일 뿐이다. 그녀가 쥐를 그리거나 찍을 때, 혹은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와 함께 피부를 맞대고 엎드리거나 기면서 감정을 나눌 때, 쥐나 돼지는 ‘인간의 무엇’을 위한 은유가 아니다. 동물을 은유로 사용한 역사는 이제 너무나 오래되어 동물이 식구의 일종이었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과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람들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다. 동물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친화력’은 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그녀가 의과대학 학생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동물에 대해 그 어떤 ‘인본주의적’ 비유 관습이나 유사 생태주의적 감정을 갖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근원적이고 명료하다. 돼지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은 돼지 새끼를 해부하면서 얻은 지식, 즉 생명체로서 돼지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기관조직을 지녔다는 깨달음으로 더욱 깊어졌지만 그녀에게 인간이나 쥐, 돼지나 새, 꿀벌, 낙타 등은 모두 등가적인 가치를 지니는 종이다. 모두 동물세계의 서로 다른 구성원이다. 쥐와 돼지가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둘 다 인간들이 ‘더럽고 비천하다’고 낙인찍으며 가장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회피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녀는 쥐나 돼지를 ‘더럽고 비천함’ 혹은 ‘더럽고 비천한 존재로 내몰리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미루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내게  그녀의 이미지 작업에 깃든 매혹이나 영감의 많은 부분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녀의 지하세계 탐험 작업에서 쥐는 인간과 똑같이, 어쩌면 인간보다 더 오래, 인간보다 더 깊숙이 도심에 깃들어 살고 있는 도시의 거주민이다. 지상세계에서 상처받다 지하에 내려와 비로소 피난처를 발견한 노숙인이 그렇듯, 카타콤에 잠들어 있는 1300년 된 해골이 그렇듯, 폐허가 된 설탕공장 뜰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는 들개나 토끼들이 그렇듯, 하수구나 지하터널에 기거하는 쥐들도, 살아있는 유기체(a living organism)인 저 도시의 거주민이다. 해부학에서 훈련된 감각으로 도시의 피부 아래가, 도시의 보이지 않은 부분이, 도시의 무의식이 궁금한 그녀에게 쥐는 영리하고 친절한 동반자다. 인류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은유의 전략이나 전술에 기대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수정한 예들을 알고 있다. 근대 후기에 서구 남성들은 (타이티로 간 고갱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비서구 여성들에게서 덜 오염되고 덜 왜곡된, 그만큼 더 원초적이고 순결한 자아의 은유를 찾았고, 탈근대에 동일성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타자성의 철학을 세우고자 했던 철학가들은 (니체나 데리다, 레비나스가 그랬듯이) 여성을 바로 그러한 비동일적인 타자성의 은유로 재발견했다. 마찬가지로 동물은 인간이 가장 빈번하게 은유로 불러내는 대상이다. 급속도로 추진된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들은 동물들에게서 태곳적 인간의 원초적 동물성의 모습을 찾곤 했던 것이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의 삶에서 은유는 필연적이다. 모든 은유가 대상을 타자화한다고 볼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은유는 궁극적으로 자아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혹은 반성적 자아의 보존을 위해 대상을 은밀하게 소비하고 타자화한다.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에서 벗은 몸으로 돼지와 함께 있는 그녀의 이미지들이 품은 아름다움이나 선한 충격은 김미루가 돼지에게, 돼지가 김미루에게 은유가 아닌 냄새와 촉감이 있는 몸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철학가 김상봉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주체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꿈꾸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를 정동적으로(affective) 감응케 하는 미학적 실천은 이토록 감응이 불가능해진 맹목적 자본합리성과 우울한 시물라크르의 시대에 윤리적 열림의 단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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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그리고 사막
도시 탐험가들에게 버려진 장소,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시간 속에서 저 홀로 스러져가고 황폐해져가는 장소는 놀이터고 명상과 정화의 사원이다. 사랑을 잃었을 때나 고립감이 심할 때, 소외와 우울로 힘들 때, 버려진 장소(deserted place)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준다고 김미루는 말한다. 도시 탐험 사진작업자들은 버려진 채 남겨진 장소를 그 장소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기적인 미적 추구를 위해 착취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화려한 성공과 미래를 약속했던, 그래서 한때는 사람들로 들끓었던 디트로이트 공장들에서처럼 폐허가 된 장소들은 도시의 이루지 못한 꿈의 역사를 품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희망과 꿈과 좌절이 부서져 나뒹구는 파편들처럼 그곳을 떠돈다. 그래서 폐허 자체의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대신 이야기를 함께 담고자 하는 시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곳을 채웠던, 여전히 유령처럼 그곳을 감돌고 있는 집단적 소망과 심리적 애착의 숨결을 되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녀는 버려진 장소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이것이 진정한 기록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그 장소 안에서 장소의 일부가 되기로 한다. 그녀가 <Naked City Spleen>과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사진작업을 하면서 옷을 벗은 까닭은 두 가지다. 옷을 벗음으로써 특정 개별성을 지시하는 문화적 요소를 지우고 보다 보편적인 자연의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관객들이 몸으로 그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벗은 몸은 이미지와 관람객 사이에 촉감적 매개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연결고리 혹은 통로가 된다. 비주얼 포인트로서의 역할도 중요하다.
폐허의 경우 이 두 가지 요인은 폐허 자체의 이중적 의미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한때 기술문명과 역사의 발전, 소비문화의 화려함을 뽐내던 1900년대 초기의 공장들은 너무나 빨리 자연으로 되돌아가버린다. 김미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자연이 먹어버린다.” 거대한 구조물들이 그렇게 쉽게 금방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사람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동안 버려진 것들과 함께하다보니 새것이 얼마나 금방 낡은 것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겠더군요. 집, 사무실, 쇼핑몰, 교회, 등등…다들 금방 낡아버리죠. 변치 않는 것에 대한 우리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지 또 인간이 세월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절감했어요.”
이러한 깨달음은 그녀에게 숭고에 대한 느낌을 일깨웠다. 그러나 그녀가 폐허나 지하세계를 탐험하며 깨달은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그 폐허 같은 공간들이 도시의 잊혀진 기억을 참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 터널이 그렇듯이 한때 도시의 번영을 위해서 지어졌던 구조물들이 지금은 도시민들의 일상으로부터 밀려나 완전히 잊혀져버린 추방자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녀에게는 중요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 장소에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책임과, 그러한 장소를 안식처로 삼고 있는 추방자들의 삶을 기억할 책임은 하나로 겹쳐지며 그녀 사진의 중요한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구성한다. 그녀의 TED 연설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말하듯이 옷을 벗은 그녀가 없다면 그 사진들은 단지 아름답고 멜랑콜리한 폐허의 사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옷을 벗은 그녀가 있기에 그 사진들은 초현실주의적 매직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도시가 꾸었던 꿈이 어른거리고, 도시의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어떤 웅얼거림이 함께 울린다. 벗은 도시의 우울. 근대 초기에 보들레르가 통렬히 감지하고 시로 표현했던 대도시의 우울은 이렇게 21세기 김미루의 폐허 사진에서 다시 한 번 멜랑콜리의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보들레르의 시 <백조>는 그녀의 사진에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으리라. 일상의 산보 길에서 새로 생겨난 카루젤 광장을 맞닥뜨린 보들레르는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백조를 떠올린다. 그의 상상력 속에서 이 백조는 다시 불행한 운명에 처하게 될 앙드로마크를, 앙드로마크는 다시 유배당한 사람들, 패배자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비애를 삼키는 사람들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숭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김미루는 버려진 장소, 폐허에 가서 숭고함을 느꼈다고 했다. 으스스해서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참을 수 없이 끌리는 매혹을 느끼면서, 그토록 찬란하고 거대했던 구조물이 그토록 빨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매우 작게 느껴졌다고 했다. 초월적인 것, 고양된 것,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는 숭고함은 재현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비판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칸트에게서 불가해한 자연의 무한함과 대결하는 고독한 주체의 원형적인 모습을 가리켰던 숭고함은 포스트모던에 와서는 지배적인 담론, 관습, 의미체계 너머에 존재하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의 지표로서 많은 이론가들을 매료시켰다. 김미루의 경우에 그러나 숭고함을 드러내는 자아는 위축된 보잘 것 없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 자체’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 ‘범속한 몰아’, ‘범속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자아다. 그녀의 경우 자아는 대결하지 않는다. 형언할 수 없는 것과 그것의 사진적 재현에서 오히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벗은 몸과 함께 몸적으로 구체화된다. 벗은 몸이 ‘덜’ 사적이고 ‘더’ 보편적이기에 옷을 벗었다는 그녀의 말은 탁월하게 이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서 자아나 주체는 물러선다. 왜냐하면 그녀는 인간 역시 단지 하나의 동물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숭고함이 어떤 ‘장소’로, ‘지상세계’의 억압에서 오히려 벗어난 ‘지하생활자’들의 평화로운 공존의 장소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초월적인 숭고한 힘과 고독한 대결을 벌이는 자아의 모습도 물리치고, 또한 친숙하고 틀에 박힌 기존의 관습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숭고함의 정취를 표현하는 그녀만의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숭고함에 대한 그녀의 느낌은 자아를 내려놓고, 다시 말해 기꺼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무위의 평화와 해방에 도달한다. 평화를 찾아 사막으로 간 낙타처럼.
폐허를 찾아, 사막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는 미루의 여정은 도피도 아니고 이전 시대로의 보수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후퇴도 아니며,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모방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동일성의 세계에서 유사성의 세계로 옮겨감으로써 평화로운 위반을 실천하는 그녀만의 새로운 미학이다. ●

 디지털 프린트 101×152cm 2010

<NY 1>디지털 프린트 101×152cm 2010

  디지털 프린트 101×152cm 2011

<Wadi Rum Jordan Arabian Desert 1> 디지털 프린트 101×152cm 2011

김미루는 198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톤햄에서 태어났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랑스어 낭만주의 문학과와 프랫 인스티튜트 회화과를 졸업했다. 2008년 미국 제스타크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Naked City Spleen>을 시작으로 8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가리뷰] 박찬용-투견에서 우상까지

투견에서 우상까지

폭력이 극화된 거친 세상. 작가 박찬용은 인간과 동물의 거칠고 예민한 폭력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투견> <서커스> <동굴의 우상>등은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대표작이다. 그의 예술적 여정을 종합적으로 볼 수있는 개인전이 파주에 위치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3월1일부터 5월 11일까지 열린다. 그간의 작업과 신작을 한눈에 보면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우리시대의 모습을 살펴본다.

김영호  중앙대 교수

박찬용이 <투쟁 그 영원함>(가나아트스페이스, 2000)이라는 제하의 개인전을 통해 투견 조각을 처음 선보인 지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선택한 견종 핏불(pitbull)은 인간에 의해 치밀하게 개량된 싸움개라는 점 외에도 인간을 칭하는 피플(people)과 비슷한 음을 지니고 있어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매체로 세인의 시선을 끌었다. 투견 시리즈 이후 박찬용은 서커스-박제-우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리즈를 통해 인간의 본능적 속성으로서 폭력성에 대한 성찰을 지속해왔다. 이번 파주 출판도시에 자리 잡은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의 개인전은 동물조각가로서 그의 노정을 종합적으로 망라한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박찬용이 전시 콘셉트로 제시한 투견-서커스-박제-우상은 모두가 폭력, 욕망, 정복, 투쟁 따위로 대변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개인전은 노출 콘크리트와 유리를 근간으로 건축된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알바루 시자가 설계)의 백색 공간과 그 안에 설치된 조각작품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조각가로서 예술노정 제1막을 장식하는 중요한 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 거대한 백색공간이 주는 영적 분위기를 장대한 시간을 머금은 동굴 콘셉트로 설정했고 <동굴의 우상>이라는 제명의 신작을 설치했다. 이는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뿔을 가진 들소의 형상이며 길이와 높이가 각각 5.56m와 3.45m에 달하는 기념비적 작업이다. 제명이 <동굴의 우상>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가 이들 원시 짐승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거대한 힘에 대한 열망과 숭배의 심리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역설적인 비판의 태도이다. 투견에서 우상으로 이어지는 박찬용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간의 작품 시리즈에 흐르는 의미들을 살펴보자.
우선 <투견 시리즈>는 박찬용이 동물조각가로서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결정지은 작업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2000년 개인전을 통해 처음 선보인 투견 시리즈의 키워드는 ‘길든 폭력의 본성에 대한 성찰’로 요약될 수 있다. 근대사의 전환기를 살았던 마르크스가 ‘투쟁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선언한 이래 폭력이 역사발전의 수단으로 정당화되면서 수많은 만행이 저질러지기 시작했고, 국가에서 기업에 이르는 구성원들은 폭력을 혁명과 개혁 그리고 지배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따지고 보면 폭력의 역사는 근대사 이전과 이후의 시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으며 길든 폭력성은 인간을 문명화시키는 수단이었고 그 배경에는 지배에 대한 욕망의 본성이 숨어 있다. 박찬용이 투견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폭력의 배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다. 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우성인자 조합체인 핏불은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잔혹한 욕망의 대리자가 된다. 핏불이 인간의 투쟁 본능에 대한 욕망을 대신하는 생명체로 개량 보급되어왔듯이 박찬용은 핏불 조각을 통해 박제화된 욕망의 역사를 구현해낸다. 차가운 알루미늄 재질로 캐스팅하고 속이 텅 비어있는 조각붙임 형식을 통해 탄생한 투견은 실재를 넘어 폭력에 대한 광적인 찬미의 외침을 묵언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커스 시리즈>는 2006년 개인전(한길아트스페이스)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것으로 박찬용이 시도해 온 투쟁본능을 상징과 알레고리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폭력의 속성은 강한 것에 대한 지배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경향을 지닌다. 자신보다 강한 것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써 스스로 강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이다. 야수, 미녀, 난장이로 대변되는 서커스의 3대 구성요소는 투쟁본능의 메커니즘을 따르고 열광하는 대중심리를 드러낸다. 박찬용의 <서커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맹수, 조련사, 무희, 원숭이, 차력사 등이다. 그중 길든 호랑이와 곰은 언제든 도발의 위험을 지닌 맹수다. 조련사는 이 위험한 게임에 의도적으로 개입해 강한 것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속성을 자극하며 채찍과 쇠사슬에 의해 위태롭게 유지되는 스릴을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한편, 회색 알루미늄 재질의 조각으로 캐스팅된 난장이의 형상은 열등한 인간의 상징인 동시에 힘을 잃어버린 현대적 자아의 우울한 반영이다. 때로 차력사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관객에게 열등한 것들에 대한 대립물로서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케 하는 대리인과 다름 없다. 외발자전거를 타는 원숭이는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의 미메시스이며 그 앞에 서 있는 풍만한 몸매와 금발을 지닌 반라의 여성은 원숭이로 대변되는 진화론의 대립물로서 창조론의 상징인 이브의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박제 시리즈>는 2010년을 전후로 등장한 박찬용의 작품경향으로 폭력성 고찰을 위한 새로운 버전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박제는 힘 쎈 것에 대한 열등한 것들의 도전’이다.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박제는 신비하고 강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 욕망이 실현된 산물’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 벽에 걸린 극락조나 사자 그리고 호랑이 따위의 박제물들은 단순히 희귀 동물들의 사체를 보여주는 차원이 아니라 자연에 가해지는 폭력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다. 조각가 박찬용의 손에 의해 태어난 박제물들은 실재 동물이 아니라 실재의 외형을 모방한 조형물이다. 그리고 이 재현의 과정에서 모순과 역설로 점철된 폭력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장치들을 개입시킨다. 가령 <박제-찬란한 아름다움>에서 사자의 갈기는 양가죽과 양털로 대체되어 있으며 때로는 소가죽과 말가죽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는 약육강식의 법칙성 속에서 먹고 먹히는 생명들의 장엄한 순환의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따지고 보면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각양각색의 조류에서 사자, 호랑이, 표범에 이르는 맹수의 박제물들은 귀하고 강한 것에 대한 정복의 욕망이자 승리의 표상이다. 박찬용이 성찰을 요구하는 지점은 바로 자연에 대한 승리의 전리품이 끌어안고 있는 생명과 폭력과 지배와 소유에 관한 것들이다.
욕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
<우상 시리즈>는 2012년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작업으로서 박찬용의 동물조각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된 작품의 규모와 형식 그리고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차원의 성과로 채워져 있어 보는 이를 감동의 세계로 이끈다. 2013년에 제작된 <동굴의 우상>은 이번 개인전의 백미로서 원시 동굴벽화에 등장하는 들소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이다. 작가는 주술의 세계를 품은 거대한 들소의 형상에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 개념을 덧씌워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전개하고 있다. 주지하듯 베이컨은 인간을 편견으로 몰아넣는 우상을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중 ‘동굴의 우상’은 플라톤의 동굴 개념에서 온 것으로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판단하려는 개인적 편견을 말한다. 축성된 공간으로서 미술관에 자리 잡은 거대한 들소는 주술적 영험을 지닌 신상이자 동시에 그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만들어낸 우상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몰(Moule)의 ‘우상숭배란 자기목적 때문에 신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결국 박찬용의 <우상 시리즈>는 현대인의 욕망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이자 인간적 관점, 개인적 소견, 언어적 제한, 철학적 사상 따위에 속박되어 빚어지는 판단의 오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이상에서 보듯 박찬용의 동물조각은 인간의 고통과 폭력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대변하며 관객 앞에 제시되어 있다. 투견-서커스-박제-우상에 이르는 시리즈는 폭력의 기억과 욕망의 역사를 예술적 형식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박찬용이 작업을 통해 제시하는 일관된 개념과 개성적 형식논리는 한국 현대조각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제공해준다. 또한 신생 미술관인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의 건축공간과 작가의 동물조각 시리즈 사이에 맺어진 상호관계의 적합성은 이번 개인전을 한국 현대조각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박찬용(2)

<서커스-막이 오르다> 합성수지에 채색 가변크기 2007

 합성수지 위에  아크릴   730×180×285cm 2014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외부에 설치 전경

<동굴의 우상-코뿔소> 합성수지 위에 아크릴 730×180×285cm 2014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외부에 설치 전경

박찬용은 1964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예술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20여 년간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동물과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꾸준히하고 있으며 현재 파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2002년 송은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으며 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송은 문화재단, 분당 율동공원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World Topic]Barbara Klemm

 1969 © Barbara Klemm  © Barbara Klemm

위 <제니스 조플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969 © Barbara Klemm  아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베를린> © Barbara Klemm

Barbara Klemm.
Photographs 19682013

오늘날 포토저널리즘의 살아있는 전설인 바바라 클렘(Barbara Klemm, 1939-)의 작품세계를 되짚어보는 회고전이 마틴-그로피우스-바우(Martin-Gropius-Bau)미술관에서 열렸다.
<Barbara Klemm. Fotografien 1968~2013전>(2013.11.16~3.9)이 바로 그것.
3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그녀가 특정 저널에 소속된 사진기자를 넘어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말해준다.
《월간미술》은 바바라 클렘을 베를린에서 직접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굴곡진 세상, 그녀의 카메라에 포착되다

신원정  미술사

다곡진 독일 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으로 유명한 바바라 클렘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Frankfurter Allge- meine Zeitung)》(이하《 FAZ》’) 사진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포토저널리즘의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날로그 미학과 흑백의 감성이 치열한 사실주의와 잘 버무려진 그의 작업을 기리는 전시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마틴-그로피우스-바우 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은 제목에도 드러나 있듯 1968년부터 2013년까지 바바라 클렘의 사진작업을 집대성했다. 300여 점의 전시작에는 독일 보도사진의 아이콘이 된 유명 작품들은 물론 미공개 작업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찍은 예술가들과 풍경 사진들은 작가의 방대한 작업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포토저널리즘과 순수예술의 성공적인 접점에 자리하는 그의 사진이 가진 예술성과 매력을 확인하는 혹은 발견할 수 있었던 이번 전시는 특히 사진이 실린 신문지면을 함께 전시해 그림과 텍스트의 관계를 고찰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평생 자신을 사진기자로 생각해 온 작가가 은퇴 후 (타의로) 예술가의 위치로 포지셔닝되었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호칭과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베를린에서 작가와 만나 인터뷰했다.

.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그곳의 인쇄용판 제작부서에서 일하다가 정식 사진기자로 자리 잡게 된 거다. 거기서 오래 근무한 건 사진기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측의 태도와 특히 훌륭한 동료이자 멘토였던 볼프강 하우트와 함께 일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부모님께서《      FAZ》를 구독하셔서 어릴 적부터 그 신문을 접해왔고, 기사보다는 사진에 훨씬 흥미가 가면서 나도 나중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사진으로 진로를 정하고 인물사진 전문 사진관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사진에 대한 갈증은 더 심해졌다.
가까이에서 본 당신은 ‘보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FAZ》의 보수적인 성향과 논조가 거슬린 적은 없었나. 당연히 거슬렸지!(웃음). 하지만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내 사진의 인쇄를 허용했다는 점에서 그 정도의 진보성은 가진 신문이었다고 본다. 글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사진의 역할은 정말 크다. 독자들은 사진을 먼저 보기도 하고 기사를 먼저 읽기도 한다. 간혹 기사 내용과 사진 사이에 간극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자신의 사진과 기사 사이의 괴리를 실제로 느낀 적이 있나. 내가 찍은 사진이 특정한 메시지를 가진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어떤 사건 현장을 보고 셔터를 누를 때면 항상 나의 개인적인 인상을 최대한 생생하게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주관적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매번 소위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때로 신문에 실린 사진과 그 옆에 자리한 기사 내용이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이다.
플래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마 평생 두세 차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기억나는 건 솔리다르노시치(자유노조, 역자 주)와 정부 간 원탁회의 취재차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다. 입국했을 때 문득 폴란드의 하늘이 우중충해서 일광만으로 찍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더라. 공항에서 서둘러 플래시를 구입했는데 정말 유용했다.
플래시 사용을 꺼리는 건 미적인 이유에선가. 아무래도 그렇다. 플래시를 터뜨린 사진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를 싫어한다.
등장 인물들이 자신이 찍히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사진이 많다. 기자로서 존재감을 조절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었는가. 아무도 나를 못 보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 물론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커다란 카메라를 눈앞에 대고 있는 사람을 어찌 못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공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주목받는 정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자신의 존재가 잊힐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내 존재에 익숙해져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그때 셔터를 눌렀다.
당신의 사진에서는 냉정하고 엄격한 시선과 어떤 요소도 빠짐없이 다 통제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그래서 참 독일적이라고 느꼈는데 이에 동의하는가. 정말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내가 주로 고민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정치가 오랜 기간 내 작업의 중심을 이루다보니 내 사진이 외국에서도 수용될 수 있을지 여부였다. 프랑스나 영국 혹은 이탈리아인들이 전시장에서 내 사진을 보았을 때 과연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까, 흥미를 가지게 될까 하는 것.
그럼 독일적인 작가라고 불려도 괜찮다는 건가. 그렇다. 어차피 나는 독일인이니까. 아마 내가 2차 대전을 직접 겪은 구세대에 속해서 내 작업이 더 그런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줄곧 전쟁이 초래한 결과와 특히 독일이 저지른 잘못을 성찰해왔다. 항상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고 역사가 남긴 교훈을 절대 잊지 않으며 무엇보다 다시는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기자도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
사진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혹시 한국에도 와본 적이 있는가. 어쩌다 보니 이번 전시에는 빠졌지만 한국 사진도 있다.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1년 전쯤 현지의 인상을 전하고자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부산까지 갔었다. 거대한 불상에 압도당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시 얘기를 해보자. 1968년을 시작 시점으로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1967~1968년 즈음에 학생운동이 발발했다. 당시 나는 인쇄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아 사진기자의 길을 걷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2010년 카를스루헤 시립미술관에서 큰 규모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와 비교했을 때 베를린 전시는 어떤 점이 다른가.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내 사진이 실린 신문 지면을 전시했다는 것이다. 그 외 일부 작품들은 베를린에서 완전히 다르게 배치되었다. 칼스루에의 전시장소가 다소 외곽지역이었던 반면 마틴 그로피우스 전시관은 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해서 만족스러웠고 더 여유 있고 흥미로운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사진과 실제로 그 사진이 실린 신문의 지면을 같이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건 정말 중요했다. 신문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내 사진들이 의뢰 작업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내가 단지 예술을 하는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특정 신문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는 점 말이다.
전시 준비에 어느 정도로 가담했나. 기획의 전 부분에 걸쳐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시작 선정과 배치에서 내 의견이 절대적이었다. 한편 건축가로 수십 년간 이곳에서 근무해온 직원의 도움도 컸다.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어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전시작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나. 회고전이었기에 가능하면 모든 종류의 작업을 다 조금씩 선보이고 싶었다. 그 결과 스포츠 분야만 제외하고는 – – 사실 간간이 운동 사진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 -모든 주제를 전시했다. 유명한 작품들이 포함되는 건 당연하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작업들도 선보이고 싶어서 소장 자료를 열심히 뒤졌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생각보다 많이 찾지 못했다.
지난 2010년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수여하는 ‘막스 베크만상’을 수상했다. 회화, 조각, 그래픽,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에게 수여되는 이 상을 사진작가가 받은 건 당신이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무이하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난다.(웃음)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는 회화적 예술성과 미학을 사진 특유의 사실주의와 훌륭하게 접목시켰다는 것이었다. 사진기자에게 어 예술가적 자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가. 미적 의식을 바탕으로 탄생한 사진은 강한 힘을 가진다. 훌륭한 조형미와 구도를 갖춘 사진은 그에 담긴 내용과 관점을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메시지를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심미적인 안목이 점점 더 쇠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쉽게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순간 구도가 좋은지 또는 예술적인지 주의를 기울이길 소홀히 하게 된다. 너무 많이 찍다보니 점점 덜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완전히 다른 성향과 방식의 사진 찍는 법이 어느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어쨌든 사진기자들도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첨단기술의 카메라가 보편화된 현재가 사진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매체의 민주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시각도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 현재의 상황은 재앙에 가깝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이런 현상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의 인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심지어 사진이 남지 않으면 현장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눈은 항상 카메라나 휴대전화에 고정되어 있다.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분야에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젊은 시절의 나는 매우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건 사실 아주 환상적이었다. 주목과 견제를 받지 않아 내 할 일을 맘껏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알려지고 나를 경계하는 이가 많아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싸움은 각오해야 한다.
뻔뻔하고 다소 무례한 태도도 거기 포함되는가. 난 그렇게 막돼먹지는 않았다. 최대한으로 꼽아도 한 서너 번 정도?(웃음).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사진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당신의 사진들이 사람들의 눈과 시각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는가. 물론. 이번 전시에서 많은 젊은이가 내 사진을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뻤다.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다른 나라의 빈곤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를 희망한다. 거창하고 성대한 작업이 아닌, 내 사진처럼 작고 소박한 작품도 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확인해서 기쁘다.  ●

 1993 © Barbara Klemm

<모스크바, 러시아> 1993 © Barbara Klemm

mgb13_p_klemm_21_portrait바바라 클렘은 1939년 독일 뮌스터에서 태어났다. 사진기사 견습 직후(1955~1958)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치·문화부 사진기자로 활동했다(1970~2004). 1992년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2000년 다름슈타트 전문대학 사진학과 명예교수로 초빙 받았으며 2011년에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독일 사진협회에서 수여하는 ‘에리히 잘로몬 박사상’(1989), ‘헤센문화상’(2000), ‘베스트팔렌 미술상’(2000), ‘막스 베크만상’(2010), ‘라이카 명예의 전당상’(2012)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

 

[World Report] Martin Creed

위 Work No. 1086-Mothers> 백색네온 철 500×1250×20cm 2011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Hugo Glendinning 아래  2013 ⓒ the artist  Photo Linda Nylind

위 Work No. 1086-Mothers> 백색네온 철 500×1250×20cm 2011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Hugo Glendinning  아래 2013 ⓒ the artistPhoto Linda Nylind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허위적이면서 현학적인 예술에 대한 논의는 마틴 크리드(Martin Creed, 1968~) 앞에선 부질없는 장광설일지도 모른다. 그의 개인전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What is the Point of it?>(1.29~5.5)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의 작업세계는 다양하다는 말이 진부할 정도다. 시각과 청각, 강약의 변주, 미적 대상과 일상의 오브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고정화한 예술에 대한 태도에 일침을 가한다. 다시, 그가 묻는다. “그래서! 예술이 뭔데?”

Martin Creed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행위는 모두 창조적인 행위이다.’ 마틴 크리드(Martin Creed)가 한 말이다. 그가 이번에는 관객에게 도리어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What is the point of it?)’ 반문하며, 지난 30여 년간 자신의 예술 행보를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으로 돌아왔다. 전시는 런던 템스 강변 사우스 뱅크(South Bank)에 자리한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열렸다. 영국 내 크리드의 개인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진 이번 전시는 마틴 크리드의 대표적 작품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크리드 특유의 자기지시적인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작품들이 한자리에서 빚어내는 다중감각적인 자극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주가 되었다.
생활 밀착형 예술가, 크리드의 일상과 평범한 사물을 소재로 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다소 황당하고 허무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성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1년 크리드에게 영국 현대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의 영광을 가져다준 작품은 텅 빈 갤러리 안에서 5초 간격으로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작품번호 227: 점멸하는 불빛(The lights going on and off)>(2000)이었다. 이에 분노한 한 관객이 이 작품을 향해 계란을 집어던졌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이디어를 특별한 미적 경험으로 바꾸는 크리드는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빅벤을 비롯한 영국 전역의 종탑들이 일제히 3분간 종을 울리며 스포츠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타종 행사 <작품번호 1197>을 기획해,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다운 재기발랄한 감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린 레고 타워, 크기 순서대로 쌓은 종이상자와 책상, 의자, 합판, 벽돌, 철빔 등 크기별, 면적별, 길이별로 쌓아 올려 만든 피라미드 형태의 작업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반복적인 쌓기는 크리드가 1992년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대표적인 작업 방식 중 하나이다. 벽면 전체를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페인팅과 설치작업도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크리드의 작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1000개의 브로콜리에 각기 다른 색의 물감을 칠해 하나씩 찍어 그린 <브로콜리 프린트(Broccoli prints)>(2009~2010)와 계단 통로의 양쪽 벽면을 150개의 접착 테이프로 한 줄 한 줄 채워 완성한 <작품번호 1806>(2014)의 줄무늬가 대담한 색조 대비를 이루며 시각적 운율을 더한다.
점점 크게, 점점 작게, 상승과 하강, 강약중강약의 시각적 변주가 보여주는 반복의 코드는 전시장 곳곳에서 청각을 자극하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음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피아노 연주, 웃음소리, 전시장 한켠에서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문과 커튼,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피아노 뚜껑. 이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리로 전시장은 쉴 틈 없이 분주하다. 테라스에 주차되어 있던 포드 자동차 <작품번호 1686>(2013)은 일제히 모든 문과 창문이 열리고, 보닛과 트렁크가 열리고, 와이퍼가 돌아가고 라이트가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오며 경적을 울려대다가 이내 다시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시각과 청각으로 수용되는 반복적 리듬감이 크리드 전시 전체를 연주하는 음표가 된다.
전시의 모든 음악적 요소는 크리드의 밴드 뮤지션으로서의 삶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크리드는 1994년부터 밴드 음악 활동을 하며 정식 음반도 여러 장 발매했다. 미술과 음악에 경계를 두지 않는 그에게는 공연도 작품이다. 전시 제목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도 사실은 크리드의 노래 제목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라이브 퍼포먼스 <작품번호 1815>와 <작품번호 1020>을 4월 8일 사우스 뱅크 내 클래식 공연장인 로열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과 퀸 엘리자베스 홀(Queen Elizabeth Hall)에서 각각 선보이기도 했다.
작품, 세상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되다    
크리드의 작품이 늘 경쾌한 유머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머리 바로 높이 위에서 아찔하게 돌아가는 <작품번호 1092: 엄마들(Mothers)>(2011)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2미터 높이, 12미터 길이의 ‘엄마들(Mothers)’ 네온사인은 가속도가 붙어 돌아갈수록 더욱 위협적이다. 가장 친밀한 존재이자 거대한 존재,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엄마’라는 메시지를 이보다 더 강렬하고 심플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움츠러든 머리를 숙이면 바닥에는 각기 다른 템포로 돌아가는 39개의 메트로놈(Metronomes)의 째깍째깍 소리가 심리적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전시의 하이라이트 격인 <작품번호 200: 주어진 공간을 반쯤 채운 공기(Half the air in a given space)>(1998)는 말 그대로 절반이 풍선으로 가득찬 방이다. 누군가에게는 풍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유아적 유희에 한껏 취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터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숨막히는 공포의 공간이 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풍선방에 입장하는 관객에게 호흡곤란 증세나 폐쇄공포증을 초래할 수 있는 만약의 사태에 유념하라는 경고문이 적힌 안내장을 나눠준다.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려면 마지막 전시실의 <구토와 대변(Sick and Shit)> 영상을 피할 수가 없다. 화이트 큐브 공간 안에서 사정없이 구토하는 사람과 쪼그리고 앉아서 힘겹게 대변을 보는 사람들을 찍은 장면을 인내심 있게 바라보는 일은 거북함과 동시에 묘한 쾌감이 뒤엉켜 역설적인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크리드의 작품에는 이렇게 양가적 태도와 감정이 공존한다.
크리드가 ‘반복’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를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선배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무의미해보이는 행위의 반복과 변주, 그리고 익살 속에서 삶의 허무와 부조리, 인간 존재의 치열함과 불확실성을 탐구했던 베케트. ‘다시 시도하라,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나는 예술이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에 열중할 뿐’이라고 말하는 크리드의 말과 닮았다.
거창한 준비와 작업 과정보다는 지금이라도 당장 방 안에서 손에 잡히는 재료들로 뚝딱뚝딱 만들었다가 금세 해체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고, 아이디어나 순간의 행위 그 자체, 소리, 빛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만드는 크리드 작품의 미술사적 원류는 사실 익숙한 것들이다. 뒤샹 이후 레디메이드 일상 용품들의 갤러리 출입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고, 플럭서스 그룹의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가 점멸하는 자동차 라이트와 경적으로 연주 퍼포먼스를 시도한 바 있다. 쌓기와 긋기의 반복적인 구조와 표현은 미니멀리즘에서, 몸 밖으로 배출되는 체액, 신체성에 대한 실험은 빈 행동주의자들의 신체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드의 예술이 여전히 유쾌한 울림을 주며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이유는 그의 네온작품 <작품번호 232: 온 세상+작품=온 세상(The Whole World+The Work=The Whole World)>(2000)이라는 방정식이 지시하는 크리드의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세상의 일부이고, 세상의 전부라는 것. ●

(부분) 흰풍선 가변설치 20.5cm(풍선 지름) 1998  Courtesy Giardino dei Lauri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부분) 흰풍선 가변설치 20.5cm(풍선 지름) 1998 Courtesy Giardino dei Lauri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 2008 ©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courtesy Ikon Gallery, Birmingham  photo: Stuart Whipps

· 2008 ©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courtesy Ikon Gallery, Birmingham photo: Stuart Whipps

Martin Creed, Work no 299마틴 크리드는 1968년 영국 웨이크필드에서 태어났다. Slade School of Art at University College London을 졸업했다. 1987년부터 작품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글에 번호는 붙여 작품 타이틀로 사용했다. 2001년 <Work No. 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로 터너프라이즈를 수상했다. 1994년 그의 밴드 오와다(Owada)는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으며 밴드 해체 후에도 음반을 발매하고 공연을 하는 등 꾸준히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Review]토탈리콜-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

토탈리콜  __  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
일민미술관 4.11-6.8

<토탈리콜전>은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맥락에 따라 보여주기의 제시와 수용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다룬다.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차이는 생산자(작가)에게는 형식의 가변성으로, 수용자(관객)에게는 감상의 자율성으로 요약된다. 이 차이를 좌우하는 것은 공간이라는 요소의 개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의 관건은 작품 배치와 설치에 있어 공간이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일단 블랙박스를 피하려고 한 미술관의 의도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영상물로만 구성된 전시에서 공간의 분리는 이미지와 소리의 간섭을 피하는 손쉬운 방식이나, 영화관과 다른 종류의 지각 경험을 지향하는 기획 의도에 위배된다. 대신 주최 측은 공간을 터 작업 간의 간섭을 수용하되 이를 통제하는 쪽을 택했다. 이 경우 실질적 난점은 이미지보다 소리에 있다. 빛의 산란은 스크린의 방향을 달리함으로써 극복 가능하며, 시각의 인지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타 작업의 존재가 감상에 실질적인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반면 소리의 중첩은 관람의 주요 방해물이다. 모든 작업에 헤드폰을 배치할 때 소리의 간섭은 사라지나 관람 가능한 관객의 수가 제한되고, 스피커를 선택하면 다수의 관객이 관람 가능하나 산란 효과가 극심하다. 미술관은 음향의 유무와 비중, 자막의 존재 여부에 따라 헤드폰과 스피커를 혼합 배치하는 방식으로 이 딜레마에 대응한 듯하다. 예를 들면 스피커와 헤드폰을 혼용한 <고진감래>(2014)를 음향이 없거나 헤드폰만 배치한 작업 사이에 배치해 소리의 충돌을 피하는 식이다. 하지만 대부분 음향이 있는 작업으로 구성된 2층의 경우 미술관 측의 고육지책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방해가 현격해서 이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고충임이 드러난다.
한편, 개별 작업을 공간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은 기획 의도를 구현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 배치에 비해 미흡한 감이 있다. 이 전시에 참여한 9팀 중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셋이나, 그중 상영이 아닌 설치라는 차이를 분명히 구현해낸 작가는 정윤석이 유일하다. 흰 벽 대신 나뭇결이 드러나는 거친 가벽에 투사된 영상은 흔들리는 화면 및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용산참사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육화해낸다. 영화계 기반의 작업 중에서 영사기, 스크린, 관객, 공간이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예는 이행준+홍철기다.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영사기 앞 아크릴판에 반사되어 산란되는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매체의 근본 조건을 드러낸다. 같은 맥락에서 공간의 해석에 있어 의미 있는 시도는 단채널보다 다채널 설치다. 하지만 3채널 작업인 김소영의 경우 채널들의 이미지와 소리가 서로 조응하며 합을 이루기보다 연관된 작업 세 개가 병치된 쪽에 가까웠다. 양면 스크린을 활용한 배윤호의 작업 역시 양쪽 영상 간의 대조가 뚜렷하지 않고 음향의 차이도 모호해서 설치의 효과가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상영 장소는 특정한 관례를 함축한 구축된 제도의 상징이다. 미술과 영화라는 별개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이 전시는 융복합 프로젝트가 부상하는 동시대미술의 추세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르를 규정하는 규범에 대해 재고하는 자기성찰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문혜진・미술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