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Shirin Neshat

위· 연작. (사진 맨 왼쪽) RC Print and ink 116×78cm 1994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아래· 연작 중  2012 ⓒ Shirin Neshat, Galerie Jerome de Noirmont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광경

위·<알라의 여인들> 연작. <알라의 여인들_침묵의 저항>(사진 맨 왼쪽) RC Print and ink 116×78cm 1994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아래·<왕서> 연작 중 <군중(Masses)> 2012 ⓒ Shirin Neshat, Galerie Jerome de Noirmont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광경

Shirin Neshat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 1957~)의 작업은 바로 그녀의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 출신으로 이슬람 문화권 영향하에 성장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이주한 쉬린 네샤트의 작업은 이란의 정치, 역사, 그리고 이슬람 여성문제 등을 폭넓게 다룬다. 그녀의 대규모 회고전이 4월 1일부터 7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영상, 사진작업 50여 점이 소개된다. 이를 계기로 《월간미술》은 쉬린 네샤트의 육성으로 그녀의 작업세계를 들어보고 이와 함께 이번 전시의 의미를 살펴본다.

이슬람 디아스포라 여성작가의 교훈주의와 상징주의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조교수

이란 디아스포라 작가인 쉬린 네샤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현대예술계에서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해 온 인물이다. 2010년 간행된 네샤트의 작품세계에 대한 카탈로그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아서 단토 등이 보낸 비평적 성찬, 2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격동(Rapture)>(1998)의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첫 장편영화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2009)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등은 그의 국제적 명성을 입증하는 일부일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전 이후에 여는 첫 번째 개인전 대상으로 네샤트를 선정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슬람 여성이 처한 억압적 조건들을 주제적, 형식적 일관성을 갖고 표현해 온 그의 작품세계가 서구예술계에서 대중적 주목을 받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샤트의 사진과 영상설치 작품들을 엮어주는 두 개의 키워드는 교훈주의(didacticism)와 상징주의(symbolism)이다. 교훈주의는 이 작품들이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근본주의가 부과한 억압적 성차별주의와 서구적 고정관념의 이중구속에 사로잡힌 이슬람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전지구적 예술시장에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졌음을 뜻한다. 상징주의는 이러한 이중구속의 국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네샤트의 작품들이 공유하고 변주하는 구조와 수사법들의 상징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징성을 네샤트는 사진 작업에서는 시각적 요소들의 강렬한 충돌을 통해, 영상작업에서는 두 개의 스크린 분리와 병치를 통해 구현해왔다.
네샤트의 흑백사진작품으로는 초기작 <알라의 여인(Women of Allah)>(1993~97) 연작과 최근작에 속하는 <왕서(王書), The Book of Kings)(2010)들을 볼 수 있다. 네샤트의 이름을 최초로 각인시킨 <알라의 여인>의 사진들은 이란 여성들의 손과 발의 클로즈업, 또는 히잡을 착용하고 총으로 무장한 여성의 정면 얼굴의 클로즈업을 제시한다. 신체의 표면에는 이란의 현대시인 포러흐 파록자드와 타헤레 사파르자데의 여성주의적 시구들이 뚜렷한 페르시아어 서체로 각인되어 있다. 이 일련의 이미지들에서 유기적 신체와 비유기적 총 사이의 충돌, 이슬람 사회에서 노출이 용인된 신체 부분들인 눈, 손, 발의 가시성과 가리워진 신체의 비가시성 사이의 대립,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긴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뚜렷한 도상적 가치를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이중성들은 이슬람 여성에게 부과된 이슬람근본주의와 서구적 편견에 대항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들이다. 한편으로 히잡으로 가리워진 여성의 신체는 이슬람근본주의적 혁명의 폭력성과 종교적 권위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인물들의 도발적인 정면 시선과 파편화된 몸, 총은 비서구 여성을 수동적인 볼거리의 대상 또는 핍박받는 희생자로 구획하는 서구적 응시에 대한 도전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뚜렷한 페르시아어 서체는 이슬람 문화의 신화적 과거와 오늘날 이란의 정치적 긴박함을 모두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현대 이란 젊은이들의 얼굴 표정에 드러나는 정서적 강렬함을 표현한 초상사진 연작인 <왕서>에서도 반복된다.
이슬람 성정치학적 논제들의 시각적 형상화
네샤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인증한 작품들은 흑백의 영상 설치작품 3부작인 <격동>, <환희(Rapture)>(1999), <열정(Fervour)>(2000)이다. 이 작품들 이전까지 내러티브가 배제되고 모니터의 조형적 배치에 의존한 비디오작업을 하던 네샤트는 이 3부작에서 영화적 편집과 내러티브를 전면적으로 차용하고 변형함으로써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의 초기 경향을 대표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16mm로 촬영되었으며 다리우스 콘쥐 등의 촬영기사와 필립 글래스 등의 음악 등 극장용 예술영화의 제작 시스템에 의존하기도 했다. 레이몽 벨루르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2채널 설치를 공통적으로 활용한 이 작품들은 영화사에서 대화 장면과 시점 쇼트, 나아가 두 개 이상의 사건들의 시간적 동시성과 상징적 연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발달해 온 평행편집의 논리를 갤러리 설치공간으로 연장시킨 결과다. 평행편집에 대한 의존은 그만큼 이 작품들이 적어도 복수적인 이미지 트랙들의 편집과 스크린 공간의 배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순명료하다는 점을 뜻한다. 남성과 여성을 스크린 단위에서 분리시키고 관객들에게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몽타주를 촉구하는 설치방식은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전통적으로 상정한 남녀 분리라는 성정치학적 논제들을 시각적이고 개념적으로 형상화한다. 배우들의 퍼포먼스와 의상 또한 이러한 대립주의에 상응한다. <격동>에서 남자가수는 흰 셔츠를 입고 청중을 뒤편에 두고 13세기 이란의 시를 가사로 한 열정적인 사랑 노래를 부르며, 여자가수는 어두운 화면을 배경으로 아무런 청중 없이 노래한다. <환희>에서 흰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성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동안 검은 차도르를 입은 여성들은 광야를 떠돌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열정>에서 동일한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두 남녀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네샤트의 대립주의는 스크린 배치의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격동>과 <환희>에서 남성과 여성의 행위는 서로를 바라보는 일종의 쇼트-역쇼트 구조로 전개된다. <격동>에서는 한쪽 스크린에서 남자가수가 노래를 하는 동안 다른 스크린에서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다가, 이 남자가수가 노래를 마치고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동안 여자가수가 얼굴을 드러내고 노래를 하게 된다. <환희>에서 남성들의 종교적 응시는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모습과 병치되며, 이후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을 남성들이 성벽에 머무른 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대비들은 관람자가 두 개의 이미지 트랙을 일종의 시점 쇼트로 상징적으로 연결시킬 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격동>과 <환희>는 두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로 귀결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시선 교환이 동일한 극적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슬람의 전통적 여성 자아와 현대적 여성 자아를 대면시킨 2채널 작품인 <독백(Soliloquy)>(1999)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교환과 대조적이다). 이때 두 스크린 사이의 공간은 이슬람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환원불가능한 차이(<격동>에서 남자가수와 여자가수의 시청각적 차이, <환희>에서 이슬람 전통에 구속된 남자들과 이를 벗어나려는 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개인전은 네샤트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교훈주의와 상징주의의 면모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시다. 이러한 면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관람객의 판단으로 남는다. 네샤트는 일련의 강연 및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드러내는 뚜렷한 이분법들이 이슬람 여성에 대한 억압적 상황들을 유지시키는 문화적, 정치적 대립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장해왔다, 이러한 이분법들이 한편으로는 비서구 하위주체들의 타자성과 혁명 이후 이란 사회의 견고한 보수성을 그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 대중에게 알게 쉽게 이해시키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이 담보할 수밖에 없는 환원주의적 단순성, 그리고 비서구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를 상징주의적으로 전달할 때 수반되는 자기-오리엔탈리즘(self-Orientalism)의 한계 또한 네샤트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관람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이다.
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설치방식에서 보완해야 할 점 한 가지를 지적한다. 네샤트의 작품에서 사운드는 이미지 트랙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필립 글래스의 섬세한 미니멀리즘 스코어를 들을 수 있는 <패시지(Passage)>(2001)가 아니더라도, <격동>에서 서로 대비되는 남자가수와 여자가수의 목소리(분명한 가사와 청중을 가진 남자가수의 노래, 그리고 남성중심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여성적 타자성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여자가수의 독백적인 노래)는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하며, <열정>에서 남성 종교지도자의 연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르면 ‘오페라와 같은 음악적 성질’을 띤다. 그러나 한정된 공간들 속에 여러 작품을 설치하다보니 개별 작품의 볼륨이 너무나 낮으며, 작품들 사이의 사운드 간섭 또한 문제점으로 남는다. 이후 전시에서도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을 비중있게 구현하게 될 미술관 측에서 세심히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다. ●

· 중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환희(Rapture)> 중 <바위투성이 해변가에서 여성들이 성스러운 선물에 맞춰 무작위로 이동하여 모인다>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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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린 네샤트,
뉴욕에서 만나다

날짜 3월 19일  |  장소 뉴욕 소호의 쉬린 네샤트 작업실

인터뷰이 쉬린 네샤트 작가  |  인터뷰어 김유연 독립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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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연(이하 ‘김’)  1993년 뉴욕 프랭클린 퍼니스에서 당신의 개인전 <알라의 여인(Women Of Allah)>을 보았다. 당시 여성의 얼굴과 발에 총구가 겨누어지고 그 위로 텍스트가 영사된 장면이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여기서 폭력의 의미와 역사적 유산의 상징이 함축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당시 전시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이러한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중동 여성을 향한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서구의 시각과 이슬람 내부에서 보는 시각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는가?
쉬린 네샤트(이하 ‘쉬린’)  당신은 그 전시를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 쇼는 내 첫 번째 전시였다. 1990년대에 다시 이란에 돌아간 이후 <알라의 여인>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상황은 매우 나빴고 이란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이주했고, 당시 내 작업이 마음에 들지않아 더 이상 예술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알다시피, 나의 남편인 박경(Kyung Park)과 함께 뉴욕 Storefront for Art in Architecture 비영리기관을 운영하는 데 주력을 다했다. <알라의 여인>은 처음 이란으로 돌아간 뒤에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일어났던 이슬람혁명의 여파와 이란의 상황으로 인해 국가의 변형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여성의 위치와 예전의 이란이 페르시아 및 이슬람화해 있었던 상황에 주목했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와 이슬람혁명 후의 주요 개념에 대한 이해에 흥미를 가졌다. 나는 이 주제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가진 주제임을 깨달았고 다행히 외부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였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은 흥미있는 주제를 주축으로 노력하는 학자나 사회주의자와 다름없었다. 나에게는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사이를 중재해 표현하는 특이한 방식이 있었고 그것이 테러리스트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전투적인 여자라면, 모든 것이 훨씬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알라의 여인>은 기본적으로 이슬람의 전투적 여성에 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이미지의 시리즈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 촬영되던지 간에, 구성 요소들의 완벽한 이분법성, 미와 감성, 에로티시즘의 역설, 강하게 양식화된 흑백이미지를 항상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폭력, 잔인성, 압력의 제안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이미지는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매우 아름답다. 나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역설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알라의 여인>이 종교와 사람들에게 인해 세뇌당하는 과정,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들과 신(神) 사이에서 가두어진 방식을 들여다보기 위한 창구이다.
  1998년에 당신은 세상이 놀랄 만한 영상설치작업 <격동(Turbulent)>을 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두 개의 비디오작업 <환희(Rapture)>(1999)와, <열정(Fervour)>(2000)을 제작한다. <격동>은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설치는 성과 사회, 그룹과 연관된 개인에 관한 변증법을 보여주기 위해, 양 채널 비디오 스크린을 이용했다. 이란 출신 망명작가로서 서구적 측면과 이란과 이슬람문화의 문제점, 특히 이슬람법에 의해 제한받는 이슬람 여성의 본성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어려웠던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쉬린  1993~1997년 사이에 완성한 <알라의 여인> 이후, 1998년부터 나는 사진작업에 대해 좌절을 느끼기 시작했고, 내가 다뤄왔던 테마와 주제들에 지쳐있었다. 이란 정부와의 문제로, 더 이상 자유롭게 이란에 갈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에게 <격동>은 매우 혁신적인 작업이다. 이는 형식적 매체를 사진에서 영상으로 변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 요소에서 영상은 비록 흑백사진과 매우 흡사하지만, 유동적이고 서술적이며 음악과 구성이 내재돼 있었다. 여기에 나는 풍경, 안무, 음악, 퍼포먼스를 포함하였다. 그것은 나 자신과 나의 예술적 언어를 위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주제별로
<격동>과 함께 <알라의 여인>에서 나의 관점에 대해 좀 더 중립적이려고 노력했고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본 실제상황을 관찰했다. 하지만 <격동>에서 작품은 더욱 비평적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리고 이란 내부의 억압에 대해서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최근까지 나는 이란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나의 작업은 점점 더 비판적이 되었고 여전히 예술적이고 우화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풀어갔다. <격동>은 음악산업에서 여성 부재에 대해 집중한 작품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여성의 음악산업 진출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남성은 좀 더 순응적인 타입의 노래를 하고 예상 가능한 해답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중 없이 노래하는 여성은 음악에 대한 당국의 규칙을 언제든지 깰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소리, 우수에 젖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여성이 처한 선택권이 없고 소외된 환경과 상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훨씬 거칠고 강하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실험적이기도 하다.
  2001년에 당신은 필립 글래스(Phillip Glass)와 함께 <패시지(Passage)>라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의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그리고 만약에 이 작업을 만드는 데 당신과 필립이 직면했던 문제점이나 절충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두 명의 예술가가 아주 다른 시각으로 접근 한 것같다.
쉬린  수잔과 쇼자 등 이란인들로 이루어진 팀과 수잔의 목소리 영상작업을 만든 후에, 나는 갑자기 필립 글래스의 사무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는 몇몇 영화감독에게 배경음악을 작곡할 단편 필름을 맡기고 있었다. 한 명은 마이클 루브너(Michal Rovner) 감독이었고, 피터 그린어웨이(Peter Greenaway) 감독, 아톰 에고얀(Atom Egoyan) 감독, 고프리 레지오(Godfrey Reggio) 감독 등이었다. 이것은 굉장한 기회였다.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그에게 제안했다. 나는 모로코로 촬영을 하러 갔고 그가 어떠한 음악이나 악기를 이용할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허구적이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나의 작업은 아랍적인 요소가 강하고 <패시지>의 주제는 애도와 장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란여성인 수잔과 작업한 이후, 어떻게 내가 미니멀한 음악을 하는 서양의 백인 남성과 같이 일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콜라보레이션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사실 내가 기획한 음악에 흡족했다. 우리가 꼭 이란인과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굉장한 발견이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어도, 아이디어의 토대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얼마든지 같이 일할 수 있다. 나는 또한 목소리가 아닌, 소리와 음악만으로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필립 글래스와 일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후, 류이치 사카모토(Ryuich Sakamoto)라는 작곡가와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이라는 작업을 하게 된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한 것은 굉장한 협업이었고 나와 음악의 관계, 콜라보레이션 등에서 중요한 돌파구였다고 느낀다. 진실된 작업을 위해서 모국 출신만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자신의 지평선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 당신은 독일 ‘카셀 도쿠멘타11’ 지원으로 <새들의 논리(Logic of The Birds)>를 완성하고, 같은 해에 <투바(Tooba)>를 만들었다. 대부분 작품처럼, 이것은 시적인 알레고리와 마술적인 리얼리즘의 형태를 조합한다. 그리고 당신 작품은 페르시안 작가 샤누시 파시퍼(Shahrnush Parsipur)의 여성성 나무(a feminine tree), 투바(Tooba), 파라다이스의 나무(tree of Paradise)가 중심이 되는《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무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종교적인 상징을 갖는다. 유대인 탄생 신화의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에는 도교적인 전통에서 신성한 복숭아와 마찬가지로 불멸의 의미가 부여된다. 불교적 전통에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다. 페르시안 전통에서 나무가 갖는 상징성과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필름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관련을 갖게 되는지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는가?
쉬린  <투바>는 멕시코에서 촬영했다. 그 필름을 찍기 전 2001년 9월 11일 9·11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2002년 봄이었다. 나는 평화롭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중동으로 돌아가 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이 시기에 적합하지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업이 그 어떤 것보다 9·11 참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이 작품은 시적이고 메타포이다. 투바의 나무는 코란에 존재하는 신화적 대상이다. 파라다이스의 나무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나무이다. 그래서 여성성을 대표하기 위하여 파라다이스의 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이란과 풍경이 유사한 와하카라는 곳의 풍경에 이 나무를 배치시키기로 했다. 그곳에는 척박한 언덕이 있었다. 우리는 언덕 중간에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나무로 둘러싸인 벽을 만들었고 이것은 나무와 관계가 형성되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투바 나무 주변의 정원을 은신처로 삼으려는 무리, 남성과 여성에게, 그것은 절대적으로 신성시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종교의례와 성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있다. 나에게는, 비록 이것이 허구적이라 하여도, 이들에게서 영감을 받으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유대인이거나 힌두교인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된다. 그들의 동작에는 강렬함이 있었고 그들이 옷을 입은 방식은 매우 모호하지만 명백히 힘이 있고 종교적이었다.
  그것은 파라다이스로의 여정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쉬린   정확한 말이다. 그것은 마치 오아시스, 안식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에게는 9·11사태를 돌이켜볼 때와 같이, 사람들이 느꼈을 상처와 불안전성의 양면을 뜻한다. 세계적으로, 우리는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시적인 연극방식에서 인간이라는 무리는 항상 안전하게 보이는 나무 아래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무라는 성스러운 곳에 도달하자마자 나무, 투바(Tooba)는 사라진다. 점령함으로써 성스러운 장소를 상실한다. 이것은 지극히 이란적이며, 이 점에서 나는 이란 문학에 찬사를 보낸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당신은 여러 분야에 걸쳐 사진, 필름, 비디오 설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작업하였다. 당신의 첫 번째 영화 필름 <여자들만의 세상>(2009)은 독일 헤센 지방의 영화제에서 평화특별상과 66회 베니스영화제(2009)에서 은사자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무엇이 당신을 이러한 영화필름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들었으며, 어떻게 발전했는가?
쉬린  2003년 <투바>를 만들고 나서, 나는 약간 지쳐 있었다. 그전에는 매체가 사진이었던 반면, 지금은 영상으로 바뀌었고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간 완전히 다른 것을 해야 할 시기라고 느꼈다. 현재까지 나는 여러 편의 영상을 만들었고,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나는 절친인 쇼자, 그리고 영화계에서 온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나는 수많은 영화를 보았고, 갤러리와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 영화로 인해,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일을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고 아직 두려웠다. 2002년인가 2003년의 어느 순간, 내가 도쿠멘타(Document)에 나갔을 때, 내 생각에 2002년 <투바>를 출품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미술계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내가 떠나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가 내게 왔을 때 나는 영화로 만들고 싶은 스토리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샤누시 파시퍼가 쓴《여자들만의 세상》을 찾았다. (샤누시 파시퍼(Shahrnush Parsipur)는 1946년 2월 17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80년대 말에, 파시퍼는 그녀 이야기와 관련해 다수의 출판사와 잡지《 Donya-ye Sokhan》과의 인터뷰 등으로 테헤란 문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은 4년7개월간의 감옥 생활 이후에 쓴《 투바와 밤의 의미-1989(Touba va ma’na-ye Shab)》였다. 감금 이후, 1990년에 그녀는 단편소설을 출판했다. 파시퍼가 1970년대 말 집필을 끝낸《 여자들만의 세상(Zanan Bedun-e Mardan)》과 같은 연작을 재출판. 첫 번째 챕터는《 Alefba, no. 5》(1974) 이다. 이란 정부는 1990년대 중반에《 여자들만의 세상》을 판금 조치하고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1990년대 초반, 파시퍼는 네 번째 소설인 450페이지 분량의 여성 돈키호테에 관한《 푸른색의 이유(Aql-e abi’rang)》를 완성하는데 이는 1992년 초반까지 판금되었다. 1994년 파시퍼는 미국으로 건너가《 감옥의 기억(Prison Memoire)》을 쓴다. 이는 450페이지 분량으로 그녀가 각각 다른 감옥에서 보낸 4번의 시간에 관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1996년 그녀는 다섯 번째 소설을 썼는데 이는 900페이지짜리 과학소설《 Shiva》이다. 1999년에는 여섯 번째 소설인 300페이지 분량의 《나무의 정신이 가진 고통과 작은 모험(Maajerahaaye Saadeh Va Kuchake Ruhe Deraxat)》을 출판한다. 2002년 그녀는 700페이지 분량의 일곱 번째 소설《바람의 날개 위에서(Bar Baale Baad Neshastan)》를 쓴다. 그녀는 그 이후 이란을 떠나 현재는 미국에 거주한다. 브라운대학교의 국제 연구를 위한 왓슨 인스티튜트와 혁신적인 글쓰기(Creative Writing and the Wat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프로그램의 첫 번째 국제 작가 프로젝트 펠로십 수상자이다) 그녀는 매우 유명한 이란의 소설가인데 매우 힘든 삶을 살았고, 망명했으며, 감옥에 수감됐고 정신적 질병을 앓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했고 어느 면에서는 초현실적이었다. 이란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이었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이란문화 외부로부터 오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의 사건과 문제는 전세계의 어떠한 여성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녀가 신을 묘사하는 대목은 매우 시각적이었다. 나는 이 책이 내가 흥미를 가진 것들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점은 문학이 지닌 마술적 리얼리즘이었다. 이것은 영화로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쳤고, 모로코에서 촬영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대본을 다시 썼다. 2009년 2년의 수정과 4년의 글쓰기를 합해 총 6년에 걸쳐 만든 영화가 개봉되었다. 당신은 내가 그 상을 받을 때 얼마나 흥분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김  당신의 사진 이미지에는 당신이 직접 쓴 글이 더해진다. 이 텍스트들은 언어로서, 초상화를 넘어 시각적으로 가려진 베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쉬린  글씨체는 각기 다른 매력들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학적인 매력이다. 당신이 이것을 그래픽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크고 진한 글씨체의 텍스트와는 반대되는 작은 텍스트는 사진에 다른 영향을 준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그런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글 혹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이미지에 또 다른 측면의 정보 및 복합성을 제공하는 방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글의 경우, 번역되었을 때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10세기의 <왕서>에서 가져온 그림을 예로 들면, 이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이므로 그러한 혁명의 폭력적인 측면에 대한 진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진에 추가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의도를 더욱 잘 나타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은 겹의 모호성을 나타낸다. 시적이자 정치적이고 역설적이기도 하며 여성 대 남성, 전통 대 현대의 대립적인 것을 나타낸다. 당신은 사회의 역사적 뿌리를 깊이 생각하며 어떻게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한다. 또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있으며, 존재와 사람의 조건에 대하여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며, 예술과 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쉬린   정말 좋은 질문이다. 내 생각에 나는 때때로 덜 정치적이고, 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만든다. 나는 예술세계에서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치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게 되면 사람들은 바로 당신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균형을 유지해야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설교하려고 하는, 즉 설교적인 예술로 추락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시적인 것이면서도 더욱 심원한 것, 더욱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나는 정치적인 예술가로 낙인찍히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예술가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란인이며 나의 조국은 정치적인 문제, 혁명 및 기타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자연히 나는 그에 반응하게 된다. 내가 스위스 출신의 예술가였더라면, 즉 내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동시에 나는 설교하지 않고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항상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이 어려운 노선을 따라서 걷고자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 작품에 대하여 너무 정치적인 면만을 보고 예술적인 면을 보지 않거나, 그와 반대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때때로 좌절하기도 한다. 보도매체에서도, 즉 기자들도 실제 예술작품을 보기보다는 그 작품에 대한 정치적인 측면을 과장하고 있다. ●

독백(Soliloquy)> 젤라틴 실버프린트 43.5×56.8cm 1999 Copyright Shirin Neshat, Courtesy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독백(Soliloquy)> 젤라틴 실버프린트 43.5×56.8cm 1999 Copyright Shirin Neshat, Courtesy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Exhibition topic] 그룹 뮌 – 기억극장

Memory Theater

김민선(사진 왼쪽)과 최문선으로 구성된 부부작가 그룹 뮌의 개인전 <기억극장>(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3.20~5.30)이 열린다.
전시 타이틀이 말하듯 이번 전시에서 뮌은 ‘기억’과 ‘극장’을 주목한다.
즉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인 차원에서 기억이라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요소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에만 놓여있지 않은 ‘기억’이 매체를 통해, 그리고 매체에 어떻게 놓여있는지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물성과 이질성, 미디어아트의 분더캄머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기억은 당신의 내부 어딘가만이 아니라 사물/사태에도 저장돼 있다. 당신이 이전에 갔던 어느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문득 생각나는   ‘잊고 있던 장면’이나, 만졌던 어떤 물건을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옛일의 잔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장소나 물건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이 지나간 흔적이, 당신이 매만졌던 자국이 그것들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바르부르크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라는 이름 아래 수천의 이미지를 수집했을 때, 벤야민이 기억을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체험된 것의 매체’라고 정의할 때, 그 기본적 인식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사물/사태들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논할 미디어아티스트 뮌(Mioon)의 작업을 통해 말하자면, 아티스트인 당신이 몇 년 전 참가했던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작업실 어딘가에 당신의 행위로 남은 흔적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또 크리스마스 때 트리를 장식했던 붉은 구슬장식은 당신의 손톱에 긁힌 자국을 아직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듯 물리적 차원에서 물질의 몸체에 저장된 기억은 종종, 인간의 머릿속이나 마음에 떠오르는 추상적 기억보다 훨씬 구체적인 지각과 감정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일종의 미디어이다. 생리학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기억과는 달리, 그것들은 생생한 물리적 현존으로 그와 연관된 이들의 느낌, 정서, 의식을 깨우고, 불러  모으고, 여기서 저기로 전달하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의 기억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현재 공간이나 사물의 흔적 또는 자국으로 제시함으로써 선형적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그리움이나 회한을 일으킬 수 있다. 혹은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의 감각이나 판단을 재생산하고 나아가 새롭게 조직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지나가버렸지만 그 장소나 물건이 지금 여기 여전히 존재하는 한. 이런 맥락에서, 물질을 기반으로 시각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미술만큼 기억의 미디어로서 효과적인 것도 드물다. 사물의 현존을 즉자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설치미술과 기술공학적으로 시공간의 질서를 조작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 그리고 그 둘의 결합 형태 전시라면 특히 그렇다.

 스테인리스 스틸 전구 픽셀글라스 180×100×40cm 2014

<Character(Point, Line, Plane)> 스테인리스 스틸 전구 픽셀글라스 180×100×40cm 2014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린 뮌의 개인전 <기억극장>이 미술관 관람객 개개인의 내밀한 미적 경험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공감을 얻는 조건도 이와 관련해 볼 수 있다. 핵심만 먼저 말하자면, 뮌의 <기억극장전>은 기억을 공간과 사물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그 차원에서 감상자와 전시작품이 상호 매개될 통로를 구축했다(도록 글 가운데 이 전시는 “보통 ‘기억’에서 요청하는 서사나 이미지들을 찾기란 힘들다”고 단언한 김남수의 관점은 인간중심적 사고 범주에서 기억을 규정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사적으로 전유하면서도 타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감각 지각의 장(場)을 생성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 어느 구석에나 방치돼 있는 유행 지난 장식품이나 장난감,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찍었으나 오래된 앨범 안쪽에 묻혀있고 컴퓨터 파일 중 하나로 축소된 사진들, 분명 이유가 있어 거기 그렇게 놔뒀는데 까맣게 잊고 지낸 비닐봉지 속 정체 모를 물체들. 이것들은 나만의 것이지만 또한 누구나의 삶에 엇비슷한 경험과 기억의 대상으로 잔존하는 사물들이다. 뮌은 그처럼 일시적 경험의 때가 묻어있고 다종다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삶의 잔재들을 아상블라주해서 빛과 그림자의 유희로 가득 찬 캐비닛(<오디토리엄(Template A- Z)>)을 만들었다. 또 그 잔재들로 유년의 추억과 청장년의 회한이 얽힌 크리스마스트리 형태의 구경꾼상자(<오프 스테이지>), 전시장 귀퉁이 전기 콘센트에 연결된 채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다만 알 수 없는 말소리만 흘려보내는 흰색 봉지(<독자의 극장>) 작품을 제시했다. 폭 7미터, 높이 3.2미터의 거대한 크기의 설치작품 <오디토리엄>은 마치 르네상스 시기 백과사전적 수집을 통해 탐욕스러운 호기심을 충족시켰던 이들의 분더캄머(Wunderkammer)처럼 미술관 관람객 주위를 감싸고 돌며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다섯 가족의 기억을 장식 형태로 매달고 있는 <오프 스테이지>는, 마치 19세기 카이저파노라마를 보듯이, 의자에 앉아 사각형 상자를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로 관객 개인과 익명의 가정사를 내밀하게 연결시킨다. 그리고 작가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레지던시 경험에서 연유한 <독자의 극장>은 작은 비닐봉지 속의 소형녹음기가 이방의 언어(네덜란드와 아프리카의 혼혈어)를 전시장 저층부로 흘려보내며 마치 무의식에 억압된 기억의 소음처럼 감상자의 신경을 두드린다. <커튼 콜>은 또 어떤가? 미술관의 건축구조를 살려, 10미터 길이의 통로 형태 허공에 설치한 세 겹의 붉은색 커튼들이 열리고 닫히며 언뜻언뜻 인형의 깜빡이는 눈을 보여주는 영상설치작품. 그것은 어렸을 때 내가 인형을 좋아라 가지고 놀다 문득 이유 없이 느낀 무서움, 그 기이한 체험의 순간을 다 커버린 내 머릿속에 반복 상연시킨다. 커튼의 개폐처럼 의식 위로 드러냈다 감췄다 하면서.
뮌의 <기억극장전>이 이상과 같은 리뷰를 가능하게 하는 지점은 각 전시작이 단지 공허한 조형적 오브제로만 놓여있지 않아서고, 예술적 개념이나 서사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다. 작품들은 앞서 썼듯이 개인적 기억의 환기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물질적 조건을 갖췄으되,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작용한다. 또 역으로 작가가 기억을 집단의 상황극이나 가정 내의 대소사로 정의하는 데서부터 사적-집단적 경험이 교환되는 방식 등을 건드리는 데까지 작품 외적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작품의 물질적 현존을 짓누르지 않는다. 그 점에서 뮌의 최근 작업은 잡다한 물질과 하이-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감각 지각적 의미를 가진 사물이자 보고 만질 수 있는 질료를 가진 의미로서 미디어아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조명 장식품 280×460×460cm 2014

<오프 스테이지(Off Stage(Making Ornament))>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조명 장식품 280×460×460cm 2014

이질성의 미디어아트로
그런데 뮌, 이제야 밝히지만 김민선과 최문선 두 사람으로 이뤄진 이 작가그룹의 미디어아트에서 물질 및 물리적 기술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뮌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2006년부터 꾸준히 미디어기술과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설치미술을 국내 미술계에 선보여왔다. 아마도 많은 이가 흰 깃털을 이어 붙여 만든 스크린 위에 이집트 피라미드나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전경이 투사되는 작품 <관광객 프로젝트>(2003)를 뮌의 대표작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 박수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이미지를 400개의 홀로그램 판에 담아 원형극장 형태로 구축한 <홀로오디언스(Holoaudi-ence)>(2005)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감상자도 꽤 될 것이다. 이렇게 예로 든 뮌의 이전 작품들은 글로벌리즘의 관광산업에 대한 비판적 접근, 무대와 객석이라는 이원구조를 뒤집어 봄으로써 주체와 타자 관계에 대한 재고를 주제로 삼은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별도로, 사실 감상자 입장에서는 작품의 설치 효과 및 장치로서의 기계적 작동에 더 매혹되고, 더 감탄하게 됐던 미디어아트다. 그러니까 이때 뮌의 작품들은 작가 입장에서 일종의 메시지나 발언을 비중 있게 다루고자 했더라도, 수용자는 작품의 스펙터클과 표피적 자극에 매혹(현혹)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2009년 작인 <우연한 규칙>에까지 이어진다. 인터랙션 영상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 주식시장의 데이터 변화에 실시간 반응하는 전자나무 숲은, 뮌이 의도한 바와 달리, 감상자에게 자본주의의 역학을 뒤돌아보는 인식적 장보다는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명멸하는 가상현실이미지에 눈부셔하는 체험의 순간을 주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일정한 가치를 갖는 미디어아트다. 하지만 자신의 사고와 감각을 작품의 물리적 현존에 삼투하고자 하는 작가들만큼이나, 감상자 또한 작품의 표면 혹은 순간적 효과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구경꾼 역을 벗어나 감성과 판단력을 가진 능동적 경험자로서 작품과 관계하고 싶어 한다. 뮌의 이전 작품들의 가치에 한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감상자 주체의 욕구다. 그런데 이번 뮌의 전시에서 가령 나나 당신은 이미 써진 글 위에 새로운 글을 겹쳐 쓰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처럼, 다르면서도 엇비슷하고, 공약불가능하면서도 상호 매개되는 무엇을 개시하고 중층화할 수 있다. 거기서는 작가의 창작시간과 감상자의 향유시간이 물질을 매개로 겹쳐지고, 이미지기억의 작용공간과 심미적 주체의 피드백공간이 모터처럼 사소한 공학 장치에 힘입어서라도 확장된다. 뮌이 <기억극장>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감상자가 전시를 관통해서 그와 같은 개시, 중층화, 확장을 실행했다면 뮌의 미디어아트에 이질성이 도입된 것이다. 이질성은 16세기 분더캄머, 즉 경이의 방을 축성한 가장 중요한 비가시적 힘이었다. 뮌의 미디어아트가 감상자의 이질성을 물질 아래서, 장치 너머에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동일시라는 제한 바깥에서 적극화할 이유가 그와 연결된다.●

<오디토리엄(Auditorium (Template A-Z))(부분, 후면) 캐비닛, 오브제, 조명, 모터 700×500×320cm 2014

<오디토리엄(Auditorium (Template A-Z))(부분, 후면) 캐비닛, 오브제, 조명, 모터 700×500×320cm 2014

 

[뉴페이스 2014] 장종완-비상식적인 현실과 비이상적인 천국

비상식적인 현실과 비이상적인 천국

작가 장종완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해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 개구지다고 말하듯 대화를 나누다보면 예리하고 강한 눈에 장난기가 서서히 묻어난다. “어떻게 놀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비꼬아 풀어낼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작업이 출발한다는 작가는 비현실적일 만큼 완벽한 천국의 이미지에 해학과 풍자를 더한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천국의 진지하고 영적인 이미지는 오히려 웃음을 자아낸다.
작가가 그리는 천국의 이미지는 연극무대와 비슷하다. 평소 작업을 연극무대라고 상정하는 작가는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그의 세 번째 개인전 <황금이빨>(4.12~5.2)의 공간을 마치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연출했다. 막을 열고 입장한 전시장에서 회화작품과 애니메이션을 선보였는데 핀조명으로 작품을 비춰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연극무대의 이미지는 전체 공간뿐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천국의 배경을 작가는 하나의 연극무대라고 상정하고 무대마다 다른 등장인물을 배치시킨다. 그곳에 등장하는 배우는 기이한 형상의 동·식물이다. 종말 이후의 세상이 아닐까 여겨질 만큼 상상할 수 없는 자연재해, 재난, 범죄 등이 새로운 형태로 발생한다. 작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택시 운전기사에게서 받은 특정 종교의 홍보지에서 단박에 작품의 모티프를 찾아냈다. 비상식적인 일이 정신없이 일어나는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홍보지에 등장한 천국의 이미지는 비이상적으로 완벽했다. 이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지금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함께 뛰어노는 초원의 모습은 우리의 세상을 풍자하는 회화처럼 느껴졌다. 평소 이발소 그림, 선전선동 포스터 등에 관심이 있던 작가에게 이러한 회화적 구조와 구성은 큰 영감이 되었다.

장종완(7)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 종이 위에 색연필 23×32cm 2014

2012년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정하고 애니메이션, 회화로 연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황금이빨>은 작가가 꾸준히 고민하는 주제와 형식의 연장선이다. 불가능한 로맨스가 실재하는 새로운 세상과 황금이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상정하고 그의 과거의 모습인 고독한 양치기의 꿈을 다룬 작품이다. 이 양치기는 꿈에서 절대자가 되어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다스리며 궁극에는 새로운 세기를 창조하려 한다. 양치기는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 외친다.
암울하고 힘든 세상을 그리는 작가 자신의 현실은 어떨까. “별다른 재주가 없어서 작업한다. 모두가 힘들다고 하니 나까지 힘들다고 하지 않겠다” 그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내용은 날카로웠다. 마치 부드럽지만 매서운, 그가 그린 연극무대처럼.

 나무, 프로젝터, 기계장치, 이빨조각 110×72×225cm 2014

<황금이빨> 나무, 프로젝터, 기계장치, 이빨조각 110×72×225cm 2014

Jang Jongwan장종완은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개인전 <S.O.S(save our souls)>와 <Double meaning>, <Korea Tomorrow 2011>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임승현 기자

[뉴페이스 2014] 차미혜-세상의 모든 울림을 끌어안다

세상의 모든 울림을 끌어안다

우리의 눈은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이미지를 망막에 품었다가 스치고 지나간다. 대안공간 풀에서 작가 한진과 2인전으로 열린 <회색의 바깥전> (4.11~5.31)에서 차미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놓치는 그러한 일상의 풍경을 미세하게 포착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2채널로 구성된 영상작품 <무인칭을 위한 노래>(2013)는 탁자 다리에 비치는 햇빛의 머뭇거림, 누군가의 머릿결이 천천히 나부끼는 모습 등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법한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녀가 감싸 안은 풍경은 정지 화면 같지만 미묘하게 움직이며 연약하게 숨을 쉰다. 죽었지만 자신이 죽은지 모르는 화자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영상과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여러 시선이 교차하고 비껴가면서 누구의 시선인지 모호해지며 낯설고 심지어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미혜 2_Song_for_Zero_person

<무인칭을 위한 노래> 2채널 HD영상 HD 컬러 무음 8분45초 2013

“무엇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 무인칭이라면, 무인칭에 ‘대한’이 아니라 ‘위한’ 노래라고 한 것은 이를 애도하는 심정으로 모두가 다인칭이 되는 불완전하지만 가능한 영역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사운드는 없지만 작가는 이 작품에 ‘노래’라고 제목을 붙였다. 차미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각자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물의 맥박과 같은 울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고.
16mm 필름으로 작업한 신작 <얼굴 없는 얼굴>은 꿈에서 본 얼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차미혜는 꿈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추상적이면서도 반복되는 이미지를 ‘꿈의 후렴’이라 부르며 텍스트와 퍼포먼스 작업으로 확장시켰다. 작가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얼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단다. “예전에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질문을 했다면 지금은 나들과 너들, 타자의 얼굴들, 제가 가지는 여러 가지 얼굴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차미혜는 인터뷰 동안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지만 “잘 모르겠다”는 표현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이 세상이 분명하다면 저는 아마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A 혹은 B보다는 A와 B 사이의 틈과 같은 모호한 부분들이 저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이 부분에 잠재된 가능성을 보는 것에 흥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결코 개인적인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의 경험과 기억에서 출발하지만 일단 작품으로 풀어내면 그것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통해 다른 경로로 각자의 경험과 기억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관심 있는 꿈이나 기억과 같은 주제가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측면은 있지만 보편성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차미혜는 얼마 전 작업을 끝낸 <얼굴 없는 얼굴>에서 좀 더 나아가서 동시대 살아가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연극하는 자아를 풍부하게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퍼포먼스 광경 2014

<얼굴 없는 얼굴> 퍼포먼스 광경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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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없는 집> 시리즈 잉크젯 프린트, 가변크기 2013 대안공간 풀에서 열린 <회색의 바깥> 전시광경

Cha Mihye
차미혜는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계원예대 시간예술과를 졸업했고 파리국립고등예술학교에서 영상예술을 전공했다. 2013년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첫 개인전 <울림, 지나칠 수 없는>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9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출품해 아비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스에 참여한 바 있다.

이슬비 기자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백호. 그 고귀한 상징-中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첫 회에 이어 호랑이 그림을 통해 풍부한 상징의 숲, 민화를 조명해본다. 원초적인 미감을 다룬 민화는 일반적인 조형원리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흔히 잘 그리지 못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필자는 민화가 현실이 아닌 이상세계, 즉 영화된 세계를 그린 것이라고 강조한다. 호랑이 그림은 영기문의 집합체로서 ‘생명이 생성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호랑이는 고대부터 산을 숭배했던 한국문화에서 전 국민적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산신(山神)의 위상을 차지했다.

호랑이는 산신(山神), 나라의 수호신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호랑이는 우주의 기운이 응집된 영화된 존재들인 사신(四神) 가운데 백호(白虎)임을 조형분석을 통해서 밝혀보았으나, 이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이므로 좀 더 다루어보려 합니다. 이에 앞서 한국문화에서 호랑이가 차지하는 위상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바보 호랑이’로까지 폄하된 산신(山神)의 위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난 회에 호랑이가 아기 호랑이들을 거느리는 도상을 다루었지만, 그 상징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미 호랑이와 아기 호랑이들이 장난치며 노는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모양 영기문(靈氣文)이 끊임없이 생명생성의 과정을 보여주듯이, 고대 조형에서 청룡이나 백호나 봉황 등이 항상 아기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생명생성 과정의 상징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작품들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으나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설명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용과 마찬가지로 백호도  위대한 생명력을 무한히 낳습니다.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많다고 하여 <진주 호랑이>라고 부르는 도상과 흡사한 민화가 또 있지만 양식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 시즈오카 세리자와케이스케(靜岡市立美術館) 미술관 소장 <호랑이 가족>(상단 이미지) 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지만 그 상징적 표현은 매우 뛰어납니다. 즉 우선 눈을 보면 둥근 눈 안의 동공(瞳孔)이 다른 그림과 달리 3중(重)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량보주를 웅변하는 것입니다. 눈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발산합니다. 여러 글에서 무량보주를 나타낸 용의 눈을 다루어온 것처럼 용의 속성을 지닌 백호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줄무늬 영기문, 턱 밑의 보주와 파동, 견갑골 부근에 밀집한 보주들과 줄무늬 영기문, 무릎의 제1영기싹 영기문, 꼬리 끝의 무량보주 등 마치 지난 회 수록  작품들을 보고 흉내 낸 것 같지만, 어미 백호와 아기 백호들이 영기문의 집합체임을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입니다. 이 그림에는 소나무에 까치가 없습니다. 다른 호랑이 그림들에는 까치가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심지어 다섯 마리가 있거나 한 마리도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까치는 기쁜 소식 전해준다는 원래의 뜻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 필요불가결의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호랑이와 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소나무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글씨로 보아 부적(符籍)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도 2-1. 리움 미술관

민화를 흔히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원근법의 무시, 대소(大小)의 극적인 대비, 불합리한 구도 등 조형의 원리를 무시한 그림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익살, 대담한 구도, 동심 어린 표현 등 긍정적 평가도 따릅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따라야 합니다. 지난 회 수록 작품은 잘못된 그림이 아니라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소 대비도 무시한 대담한 양식의 비현실적 그림으로 새로운 장르를 열어 보이는  ‘민화양식’이라 부르려 합니다. 그 개념은 연재하는 동안 정립될 것입니다. 민화는 현실을 잘못 그린 것도 아니고 현실을 익살스럽게 그린 것도 아닙니다. 민화는 첫 회에 분석한 것처럼 현실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현실을 도피한 것도 아닙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처럼 일체의 표현원리를 무시하고 그린, 현실이 아닌 영화된 세계를 그린 것입니다. ‘영화된 세계’란 이상적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이상세계 표현에는 불교회화에서처럼 일반적 표현원리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아니란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구려 무덤벽화나 불교회화나 민화를 통틀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민화양식’이라 일단 부르려 합니다. 그러므로 민화양식이란 사대부나 화원의 그림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민화양식은 매우 풍성한 상징의 숲입니다. 그러나 사대부나 화원의 그림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상징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무덤벽화나 불교회화와 민화는 숭고한 상징의 숲이어서 앞으로 우리는 그 신선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 충격적인 상징의 숲을 거닐며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조형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랑이 가족을 보고 흔히 ‘자손번창’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영화된 조형이므로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숭고한 조형의 세계입니다.
이 어린이 그림 같은 호랑이 가족은 누가 그렸을까요? 어수룩해서 호랑이가 전혀 무섭지 않고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못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세부를 살펴보면 앞에서 분석하며 설명한 그림보다 훨씬 더 영화시킨 그림임을 알게 되고 오히려 경이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무량보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림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영화(靈化)의 방법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렸을까요?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어느 전문화가가 그린 것을 보고 흉내 내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언뜻 비슷해 보여도 독창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심(童心)의 세계에서 유전적으로 인간에게 잠재하는, 근원적인 진리의 표현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고구려 벽화에서 느끼는 경이를 민화들에서도 똑같이 느낍니다. 그러므로 민화를 연구하려면 고구려 벽화 연구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 성과로는 풀리지 않고 내가 해독한 고구려 벽화의 조형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학교의 ‘교육과정’이란, 상상력을 상실하는 과정이고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이루어진 조형미술의 올바른 연구는 인간의 무의식계를 넓히는 과정이고 영성(靈性)을 되찾는 과정의 작업들입니다. 그 근원적 조형정신이 화려하게 부활한 민화의 연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호랑이는 산신(山神)입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위대한 신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악마를 퇴치하듯 호랑이는 악마를 물리칩니다. 그러나 세속적이 되어 잡귀를 쫓는 현세이익적 벽사의 기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호랑이, 영기의 집합체
일본 구라시키민예관(倉敷民藝館) 소장 <눈이 네 개인 호랑이>(그림 5) 작품은 호랑이의 신격화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매우 훌륭한 그림으로 한국회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 합니다. 순수한 민화양식입니다. 놀랍게도 눈이 네 개이고 눈동자는 둥근 보주로 나타냈습니다. 눈이 네 개인 것은 중국 한대(漢代)에 방

상씨(方相氏)란 사람이 장례 때 악귀를 쫓았으므로 후에 가면(假面)으로 만들되 눈을 각각 두 개씩 네 개를 뚫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입은 가능한 한 크게 벌렸는데 긴 혀를 강조하기 위하여 용의 입과 모양 같게 했습니다. 가슴에는 영기문이 있는데 채색분석 결과 붉은색으로 칠했습니다. 장례식 때 방상씨가 궁궐에서 왕릉까지 가는 길에 제일 앞에 서서 악귀나 잡귀를 쫓기도 하고, 왕릉에 도착해서는 관을 땅에 묻기 전에 먼저 흙을 파놓은 광에 들어가서 방상씨가 가진 창으로 네 귀퉁이를 쳐서 광 속 시신이 들어갈 자리의 악귀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그런 벽사의 강력한 조형을 호랑이의 조형에 응용한 것은 기발한 착상입니다. 그림은 기품이 있고 구도가 훌륭합니다. 반차도에 의하면 방상씨는 붉게 칠한 가면을 쓰는데 황금으로 4개의 눈을 만들고 검은색 옷과 붉은색 치마를 입고 곰 가죽을 걸친 채 창을 잡고 방패를 치켜들고 다닙니다.
그러면 호랑이의 실체를 살펴볼까요? 산악숭배 신앙에서는 우주의 중심이 곧 산입니다. 한국은 산이 많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산과 산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산에 있으면서 산을 지키고 담당하는 신령(神靈)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종의 ‘산의 정령’입니다. ‘숲의 정령’이기도 합니다. 신체(神體)는 호랑이 또는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한국에서 산신신앙은 수렵문화 단계에 이미 출현했으며 이때 산신은 산의 일체를 관장하는 ‘자연의 주인’으로 인식했으므로, 신체인 호랑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산신 할아버지와 호랑이는 둘이 아닙니다. 일본 도쿄민예관(東京民藝館) 소장 <산신도>(그림 6)를 보면, 호랑이 몸에서 의인화(擬人化)한 산신이 생겨나고 백호에서 산신이 생겨나는, 산신과 호랑이가 하나인 멋진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랑이는 불화에서 신선 같은 존재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데 사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 같은 산신이 바로 곧 호랑이, 즉 영화된 백호입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국가제사의 대상 대부분이 산신이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전〉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고 호랑이에게 제사 드리며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고대의 산악숭배 신앙은 집단, 즉 국가·부족·마을 단위 형태의 신앙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개인과 마을 단위의 신앙으로 변모해 호랑이가 전 국민적 경배의 대상이 되어 마침내 사찰에서 산신각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점점 감히 대웅전 옆에까지 다가갑니다. 마을마다 산신당, 산왕당, 서낭당, 성황당 등을 만들어 산신을 숭배하게 되어 우주 최고의 신이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최남선은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 신성한 동물의 으뜸은 호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호랑이는 조선 최대의 동물이며 조선인의 생활에 끼친 영향이 크니 그중 신화, 전설, 동화를 통하여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들은 설화세계 최고이며 호랑이 및 호랑이 설화에 대한 민족적 숭앙 또는 기호는 어느 틈에 다른 모든 이야기를 밀어내버렸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한갓 벽사의 염원으로 축소되어 호랑이가 삼재부적에 나타나서 품격이 현세 이익적이 되어버려 맹수로서의 용맹성이 부각되었을 뿐 고차원으로 승화된 백호의 이미지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만 민화에서 이처럼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백호와 청룡의 관계를 다룰 것입니다.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까치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채색분석할 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눈=보주는 적색으로 영기싹은 생명의
싹이므로 연두색으로 칠하려고 노력한다.
① 처음으로 눈을 보주(寶珠)로 표현한다.
② 동공양쪽으로 면으로된 제2영기싹이 절대의
진리를 눈으로 표현한다.
보주에서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
백호가 만물의 근원
두 눈 사이의 보주가 여래의 이마처럼 크다.
③ 수염. 보통 호랑이의 수염이 아니다.
④ 긴 혀 → 영기문
⑤ 얼굴과 가슴에 보주를 부여. 표범의 둥근 점이 아니다. 표범의 둥근 점이 보주가 되다.
⑥                    만물 생성의 근원
⑦ 꼬리 끝에서 시작하여 몸으로 얼굴로 차례로 화생(化生)
⑧ 동양에는 서양에서처럼 사조가 없다? 오로지 법고창신(法古創新)!
⑨ 온몸에 영기문을 부여한다.
⑩ 발가락과 발톱은 연꽃잎처럼 아름다운 영기문. 붉은 색조의 반구형은?
⑪ 갖가지 영기문의 집합체(集合體) ‹ 집적(集積) 보주·제2영기싹·제1영기싹(면·선)
연꽃잎 모양 영기문 …

3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53×87cm 조선시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까치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① 이마의 큰 보주. 그 보주에서 발산하는 영기문이 뚜렷하다.
② 이마의 대보주에서 무량한 작은 보주가 생긴다.
③ 두 눈=두 보주에서도 영기문이 발산, 파동을 이루며 발산하기도 한다.
④ 이마의 곡선                 일종의 파상문
⑤ 코, 콧구멍도 보주
⑥ 입은 앞에서 본 모양과 옆에서 본 모양과 함께 표현한다.
⑦ 입가에서도 용에서처럼 줄무늬 영기문을 발산한다.
⑧ 양 입가의 곡선에 맞게 같은 형태의 영기문이 파동을 이룬다.
⑨ 몸에도 줄무늬 유려한 영기문을 부여한다.
⑩ 빨간 보주들을 부여한다.
⑪ 호랑이와 표범의 무늬는 영기화(靈氣化),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⑫ 호랑이의 분노상: 영기가 극에 달하면 분노상을 띈다.
⑬ 채색분석에 의해 해석도 올바르게 하고 호랑이를
영기화생(靈氣化生)시킨다.

4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19세기 (개인 소장)

5 <눈이 네 개인 호랑이> 종이에 채색 116×80cm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눈이 네 개인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① 혀를 길게 내밀 수 없으므로 입을 가능한 한
길고 크게 과장하여 변형시켜서 혀가 길게
보이게 했다.
② 왜 눈이 넷인가?
③ 혀를 길게 강조했다.
④ 용의 입과 백호의 입
⑤ 몸의 영기문

6 <산신도> 종이에 채색 103×71cm 19세기 후반 (일본 민예관 소장)

 

Art book

스스로의 눈으로 작품을 보라

정준모 《한국 근대미술을 빛낸 그림들》 컬처북스 2014

아트북 (11)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과 덕수궁분관장을 역임한 미술평론가 정준모가 근대미술 관련 저서를 출간했다.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 재직 당시 <한국근대회화 100선>을 주관했던 경험이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저자는 1900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 전통미술과 서구의 근대미술이 만나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시기에 한국 미술의 정체성이 어떻게 조형화되었는지 살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작품들은 소위 ‘명품’ 위주보다는 미술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정도를 따져 작가 92명의 작품 108점을 선정해 수록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이미지 중심으로 편집해 작품을 감상하기에 좋다. 작품 해설, 작가 소개도 충실하고 부록으로 근대미술사 개론과 연표를 수록해 깊이를 더했다. 저자는 “이 책의 근본 개념은 도록이다. 우표만한 도판으로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제대로 보지 않고 유명 작가, 명화만 좇는 현상이 만연하다. 명화는 사람들 각자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지 남의 판단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의 증인’인 만큼 우리의 뿌리인 근대미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 등 워낙 혼동의 시대이다보니 근대 작가에게 ‘친일’ 혹은 ‘월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가 많다. 저자는 “사람이 살다보면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기 때문에 양면을 함께 봐야 한다”면서 “잘못한 것은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이 맞지만 대부분의 친일논쟁이나 부역 논란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상대방을 내치기 위한 명분으로 거론된 적이 많다. 목적이 정당하지 않다보니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그는 6・25전쟁을 기록한 미술작품을 분석한 저서《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를 출간 준비 중이다. “작가들이 민족상잔의 비극을 모른 척했다고들 하지만 찾아보니까 분명하게 존재한다. 찾지도 않고 자료가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를 정리하는 사람으로서의 태도가 아니다.”
이슬비 기자

정준모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서양화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토탈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덕수궁분관장,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겸 전문위원, 대변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청주국제공예비엔날 레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화 속 미술관》, 번역서로 《미술관 관람의 길잡이》 등이 있다.

지형도 그리기는 현재 진행형

박영택 《한국현대미술의 지형도》휴머니스트 2014

박영택 (1)

아트북 (10)박영택은 많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경험으로 다수의 서문과 리뷰를 작성함과 동시에 큐레이터의 습성으로 마치 전시를 기획하듯 테마를 정하고 책을 저술해왔다. 지난 2001년《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시작으로 2014년 현재까지 그가 출간한 책만 15권이 된다. 저자는 최근 한국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담아 한국현대미술의 흐름과 성격을 정리하는 책《  한국현대미술의 지형도》를 출간했다. 이 책은 한국현대미술을 시대, 그룹, 작가별로 나눠 정리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벗어나 비평가인 저자의 주관으로 대표 작가와 각 작가의 대표작을 선정하여 계보를 만들어낸 뜻 깊은 시도다.
샤머니즘적 주술과 영성을 나타낸 박생광, 한국의 자연주의적 성향을 이어오는 변관식과 이상범, 한국 모더니즘의 기원적 작업을 한 김환기 등이 8인의 선배 작가를 필두로 그들의 작업과 맥을 같이하는 작가 총 109명과 그들의 대표작을 보여주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독자적이고 방대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책 저술 과정에서 자료가 넘쳐나다보니 오히려 자료에 매이는 측면이 있었다. 취합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숙지가 부족했던 듯하다”며 아쉬운 점을 말했다. 현대미술의 도판을 사용할 경우 개별 작품의 저작권을 모두 요청해야 하지만 출판사와 저자가 최대한 힘써 저작권을 가진 이들과 접촉했음에도 연락이 취해지지 못한 작가와 도판이 일부 있었다. 또 수많은 자료의 취득 과정에서 부득이 누락된 각주 및 정보들이 있다.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타난 실수인데 그 중 한 예로 김동화의《  화골》에서 오윤, 안창홍, 윤형근 등의 작가를 다룬 글을 인용하면서 주를 달지 못하고 기재한 점을 들 수 있다. 이 부분을 포함해 저자가 언급했던 미흡한 부분 및 누락된 내용은 향후 개정판에서 보완될 예정이다. 이 책의 작가와 작품 선정은 보는 관점에 따라 첨예한 의견이 교차할 수 있는 위험부담이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평론이란 “객관적인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론가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목소리를 높여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서구 비평가나 철학가의 사상에 맞춰 한국미술을 정리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평가의 취향과 학문적인 시선을 독립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크다.
박 교수는 이 책을 기반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을 그리는 일을 앞으로 계속해 보완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개정판을 만드는 데 공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임승현 기자

박영택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약 10년간 일했고 1995년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했다.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2010 아시아프 전시 총감독, 2013 강정 대구현대미술제 전시 총감독 등을 지냈다. 현재 경기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트북 (1)아이웨이웨이블로그
아이웨이웨이 지음 / 오숙은 옮김

중국 현대미술가 아이웨이웨이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포스트 3000여 개 중 110여 개를 간추려 묶은 책. 예술작업과 사회 운동의 경계에서 활동하는 그의 글을 통해 중국 인민의  삶과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미메시스 520쪽·25,000원

아트북 (8)한국미술사의 라이벌
이태호 지음

한국문화사의 격동기인 18~20세기의 회화 동향을 네 쌍의 아이콘으로 추렸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 대향 이중섭과 미석 박수근. 여덟 작가에 대하여 각각 쌍벽으로 대조해 설명한다.
세창출판사 384쪽·20,000원

아트북 (6)바람을 품은 돌집
김인철 지음

건축가 김인철이 건축 과정을 기록한 책으로 네팔 지역의 건축과 문화를 전한다. 하나의 집을 완성하기 위해 땅은 물론 사용할 사람의 일상까지 연구하며 삶에 가장 어울리는 집을 짓기 위해 건축가가 어떤 노력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담았다.
집  288쪽·20,000원

아트북 (7)공명의 시간을 담다
구본창 지음

사진가로서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필름에 담는 과정을 엮은 사진 에세이. 사진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며, 사진이 현대예술의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대표적인 역할을 한 사진가 구본창의 30년 사진 인생을 한 권에 담았다.
컬쳐그라피 312쪽·14,000원

아트북 (5)콤플렉스
할포스터 지음 / 김정혜 옮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얼굴이 되어버린 스펙터클한 건물들을 이해하는 길을 안내한다. 때로는 협업으로, 때로는 경쟁의 형태로 만나온 미술과 건축의 관계를 해부하며 정치·경제적 가치와 만난 건축이 생산하는 광경에 대해 성찰한다.
현실문화 392쪽·28,000원

아트북 (4)사물유람
현시원 지음

시각이미지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 사물들의 ‘삶’ 또는 ‘운명’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담은 에세이로 동시대 시각문화를 탐구한다. 현직 큐레이터이자 현대미술 연구자이기도 한 저자가 자유롭게 풀어놓는 생각들이 사물 안팎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실문화 248쪽·16,500원

아트북 (9)키치, 달콤한 독약
조중걸 지음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은 키치가 어떤 모습으로 현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고 극복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사전적 분석이 아닌 예술, 정치 등의 영역에 만연한 키치의 본 모습을 분석한다.
지혜정원 320쪽·30,000원

아트북 (2)현대중국의 새로운 이미지 언어
김영미 지음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 격동의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매체의 발화를 고민하며 이러한 지점을 통해 포스트 사회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중국의 보통 사람들을 읽어낸다.
이담북스 345쪽·29,000원

아트북 (3)실기 수업 방법론
로이스 헤틀랜드 외 지음 / 김세은 옮김

미술 수업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사고의 습관”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로 면밀한 연구 내용을 담고 있다. 수업을 어떻게 조직하고, 이끌어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과정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미진사 288쪽·20,000원

 

Art Journal

여타 아트페어와의 차별화를 꾀해 성공한 부산아트쇼

‘2014부산아트쇼’, 현장 판매액 비약적 증가
올해 3회째를 맞은 아트페어 ‘2014부산아트쇼’가 4월 18일부터 21일까지 부산 벡스코 제2전시장 전관에서 열렸다.
이번 ‘2014부산아트쇼’는 16개국 162개 화랑이 참가, 1000여 명의 작가 작품 4000여 점이 출품됐다.
지난해보다 커진 외형만큼 관람객 수와 매출액도 증가했다. 조직위원회 잠정집계에 따르면 관객은 4만여 명, 현장 판매액은 약 85억 원에달한다. 이는 지난해 관람객 3만3000여 명, 현장 판매액 51억 원에 비해각각 20%, 60% 증가한 것이다. 개막 이틀 전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대부분의 특별 프로그램이 취소된 채 행사가 치뤄졌다. 그럼에도 성과는 지난해보다 나아졌다.  조직위 측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거둔 성과임을 감안하면 부산아트쇼가 출범 3년 만에 국내 최대 아트페어로서 위상을 확고히 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이번 아트쇼의 예술감독을 맡은 김지연 큐레이터는 성공 요인에 대해 “3회 대회를 거치면서 갑자기 성공한 것이라기보다는 근 10년간 대형 아트페어를 열어 마켓 가능성을 실험한 성과가 이제 나오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특히 비영리 활동을 하는 부산 미술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한 고민이 이같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운영위원회가 컬렉터 유치에 힘쓴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부산아트쇼의 특징으로는 아트페어가 열리는 곳곳에 아트페어 외 다양한 전시 개념을 심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예가 <벡스코 영 아티스트 어워드>,<아트 악센트>,<아트밴드>,등이다.  김 감독은 “이런 프로그램들에 대해 관람객이 페어장에서 볼거리가 풍부하다는 평가를 내렸다”며 “일반관람객과 컬렉터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전했다. 아트 쇼의 장기적 비전에 대해서 김 감독은 “시장이 선호하는 작품보다는 그것과 거리를 둔 작업을 선보이는 것이 오히려 시장의 체질과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산=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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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ㆍ간첩ㆍ할머니를 통해 아시아를 본다

<미디어시티 서울 2014> 전시 주제 및 참가 작가 발표
<미디어시티 서울 2014>의 주제 및 참여 작가가 발표됐다. 이번 행사는 9월 2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관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주제로 이때 ‘귀신’은 지배적 역사 서술에서 누락된 유령을 불러와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징한다.

‘간첩’은 아시아의 식민지 경험과 냉전시대를 주목하기 위한 키워드다. 특히 분단상태인 한반도에서 ‘간첩’은 간첩사건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 금기, 망명, 은행 전산망 해킹, 영화 흥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정보의 흐름과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다. 귀신과 간첩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증인인 ‘할머니’는 소외와 억압의 표상으로 최근 위안부 할머니를 둘러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전쟁 폐해의 핵심에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다른 한편 할머니는 민중의 염원이라는 확장된 의미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박찬경 전시감독은 “이번 행사는 아시아를 지정학적 개념이 아닌 ‘생각하는 방법’이자 공동체적 기억인 매우 복잡한 영역으로 보기를 제안한다”며 “신작 12점을 선보일 예정으로 역대 최대 규모”라고 밝혔다. 참여 작가는 양혜규, 배영환, 최원준, 김수남, 민정기, 닐바 귀레쉬(터키), 타무라 유이치로(일본), 쯔엉 꽁 뚱(베트남, 사진) 등 현재 34명이 확정됐으며 최종 작가 명단은 5월 중에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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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을 주제로 사진의 스펙트럼 넓힌다

<2014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감독 선정 및 주제 발표
대구사진비엔날레_알레한드로 카스테요테_주 전시 감독(스페인)2014대구사진비엔날레>가 오는 9월 12일부터 10월 19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예술발전소 등지에서 개최된다. 이번 행사는 ‘사진의 기억(Photographic Narrative)’이라는 주제로 급속히 변화하는 사진의 표현방법과, 사진 원래의 정체성에 관하여 다양한 관점의 시각을 보여주고자 한다.
주 전시는 ‘기원, 기억, 패러디’를 키워드로 삼아 사진과 진실, 사적/집단적 기억으로서의 사진, 그리고 예술형식으로서의 사진의 이면 등 동시대사진의 다층적인 면모를 관람객 스스로 해석하고 경험하도록 구성된다. 전시감독은 마드리드 국제사진전 <포토에스파냐>의 창립자이자 제13회 감독을 역임한 알레한드로 카스테요테(위 사진)가 맡았다.
<이탈리아 현대사진전>과 <전쟁 속의 여성전>으로 구성된 특별전은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장 안젤로 조에와 대구미래대 석재현 교수가 각각 큐레이터를 맡아 현대사진의 다양한 표현방법과 과거의 기억을 사진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보여줄 예정이다.
한편 젊은 작가 발굴 프로그램인 ‘포트폴리오 리뷰’의 올해의 우수작가로 선정된 작가는 <2015휴스턴 포토페스트> <발견展>과 <2016휴스턴 포토페스트> ‘포트폴리오 리뷰’에 초대될 예정이다. 행사기획은 송수정 큐레이터가 맡았다. 사진예술에 대한 미학적 성찰과 동시대사진의 담론을 제시하는 국제사진심포지엄은 경주대 김성민 교수가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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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대 미술장터, ‘홍콩 아트바젤’

한국 갤러리 10곳 참여, 한국 작가 참가 비율 늘어나
홍콩 (1)아시아 최대 아트페어인 ‘홍콩 아트바젤’이 3월 27일 처음으로 국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홍콩 전시컨벤션센터(HKCEC)에서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는 39개국 245곳 갤러리가 참가하고 국내에서는 아라리오갤러리, 학고재, 국제갤러리, 원앤제이갤러리, PKM갤러리, 갤러리 스케이프, 갤러리 EM, 갤러리 인, 리안갤러리, 박여숙갤러리 등 10개 갤러리가 참여한다. 또한 홍콩의 블라인드 스팟 갤러리(노순택), 싱가포르의 STPI(양혜규), 일본의 오타파인아츠(이수경), 미국의 수잔느 비엘메터 로스 앤젤레스(민윤희) 등 6곳에서는 한국 작가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올해는 홍콩 아트센터와 공동주최로 필름섹션이 추가된다.
4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은 미국 마이애미에 이어 2011년 ‘홍콩아트페어’를 인수했으며 지난해 ‘홍콩 아트바젤’은 첫 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6만3000여 명이 다녀갔다.
홍콩 아트바젤 매그너스 랜프루 아시아 디렉터(위 사진)는 “홍콩 아트바젤은 단지 아시아의 예술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량 있는 작가들을 글로벌 무대에 소개하는 자리”라며 “전 세계 갤러리와 아시아 갤러리가 다양하게 진화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부터는 미술계 성수기를 피해 3월에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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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 미술운동의 플랫폼

대구현대미술가협회가 운영하는 ‘스페이스129’ 재개관
대구 미술계에서 ‘스페이스129’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주로 동시대미술을 옹호하는 작가들이 모여 활동한 스페이스129는 대구현대미술가협회(이하 대구현미협)의 부설 공간이었다. 1997년 대구 도심 인근 삼덕동에서 문을 연 이래 이곳은 대구현미협 작가들의 결집지인 동시에, 삼덕동 거리를 젊은 문화 명소로 일구어내는 구심점 구실을 했다. 스페이스129는 삼덕동 시대를 마감하고 같은 중구 동인동으로 이전했다. 대구현미협 달성군 가창에 있는 폐교 건물에 레지던시형 창작 스튜디오를 조성하면서, 스페이스129는 또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이름도 스페이스 가창으로 바뀌었다. 스페이스129가 이처럼 이사를 거듭한 까닭은 재정적인 어려움과 대구현미협 조직 안팎의 여러 변화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이스129는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면서, 시기를 같이했던 다른 전시 공간 상당수가 사라지고, 현대미술을 내세운 화랑과 대안공간이 늘어난 지금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올해 새롭게 조직을 가다듬은 대구현미협이 봉산문화거리로 옮겨 스페이스129를 재개관했다. 재개관 기념 초대전이 1부와 2부로 나뉘어 지난 4월1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이 단체전에 초대된 작가들(1부 권정호 김정태 김호득 박남희 최병소 홍현기, 2부 김결수 노중기 박승수 백미혜 이태현 정태경 최기득)은 대구현미협의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한 미술인들이다.
물론 이들의 작품만이 대구현미협과 스페이스129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출범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는 과정을 전시를 통해 하나씩 재생하는 기획 의도는 좋았다. 한정된 공간 안에 여러 미술인의 작품을 공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작품 수와 크기 면에서 제한되고 선별적으로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점은 아쉽다. 이 또한 200명에 가까운 대구현미협 회원들의 회비와 기금마련전의 출품을 통하여 꾸려진 운영비가 있어서 가능한 사업이다. 앞으로 스페이스129는  현대미술 작가들에게 타당성 있게 낮춰진 비용으로 대관을 추진할 예정이다. 여기에 더하여 공간의 장소성과 규모 특성에 맞춰 다채로운 미술운동을 이끌어가는 일이 지역 미술계에서 부여받은 이곳의 역할이다.
대구=윤규홍 통신원

SAMSUNG C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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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지역미술에 새로운 활기를 더한다

대전창작센터에 열린 <2014 넥스트 코드전>
대전 최현석대전시립미술관이 청년 작가 발굴과 육성을 연례행사로 기획한 청년작가전 <2014 넥스트 코    드>(3.4~5.6)가 개막했다. 올해 참여 작가는 오완석, 최현석, 안권영이다. 존재의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에 주위의 오브제를 오려내고 붙이는 행위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는 오완석은 이번 전시에 대전의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조각을 이용해 대전이라는 공간에 대해 일상적 사물/작품, 일상의 공간/전시공간이라는 경계의 안팎에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한국화를 전공한 최현석은 민화나 궁중 기록화의 요소를 차용하여 현대를 반영하는 사건이나 사회의 단면을 풍자한다. 안권영은 기존의 철을 매개로 한 용접작업에서 벗어나, 거대 자본의 투입으로 변해가는 도시와 자연에 주목하는 영상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독립예술매개공간 12.8의 디렉터이기도 한 그는 소규모 전시와 협력과정을 살아 숨 쉬는 예술로 담아내는 데 매진하고 있다. 이번 전시가 설치와 회화, 영상 분야에서 다채로운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침체된 지역 미술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대전=이정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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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문화적 위기에 대한 질문

듀오 작가 엘름그린&드락셋 전시 열려
북유럽 출신 듀오 작가 엘름그린&드락셋(Elmgreen& Dragset)이 4월 3일부터 5월 3일까지 갤러리 페로탱 홍콩에서 듀오전을 연다.  이번 전시를 통해 엘름그린과 드락셋은 글로벌화한 현대 사회에서 유럽의 역사적 정체성과 문화유산이라는 딜레마에 대한 관심을 조명한다. 두 작가는 2002 광주비엔날레, 2007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 참가한 바 있다.

GP Elmgreen Dragset selection HR-29 F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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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하 화백 추모전을 위해 가족이 나섰다

광주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와 다형다방에서 전시 개최
이강하 가족사진이강하-향기로운 아테네남도의 풍경과 정서를 화폭에 담아온 故 이강하 화백(1953~2008)의 6주기를 맞아 뜻깊은 추모이벤트가 열렸다. <화가 이강하 초대전>(무각사 로터스 갤러리 4.8~5.31)과 <양림동의 화가들 아카이브  전>(양림동 다형다방 4.1~20)이다.
<화가 이강하 초대전>은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를 돌며 그린 작품과 한국 전통미술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어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무엇보다 이 전시회가 특별한 건 이 화백의 딸 이선 씨가 직접 기획했다는 점이다. 생전 ‘맥’ 연작을 통해 불교적이면서도 민족적인 것을 이야기했던 이 화백의 작품을 관심 있게 지켜봤던 무각사 주지 청학 스님의 요청으로 이뤄지게 됐다. 이에 앞서 광주 양림동 다형다방에서 열린 ‘양림동의 화가들 아카이브전’인 <이강하, 그 도도하고 짙푸른 물너울>은 이 화백의 아내 이정덕 씨가 기획한, 일종의 사부곡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이정덕씨는 지난해 ‘양림동 문화활동가 양성과정’에서 전시기획을 배운 후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이 화백이 생전에 썼던 노트와 작품도록, 습작 스케치북, 기행문, 각종 전시회 포스터, 소장품 등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유품들이 전시됐다.광주=박진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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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그리다

박남재 화백 개인전, 교동아트미술관에서 열려

레이아웃 1전주 (2)지난해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한 전북화단의 거목 박남재 화백의 전시회가 3월 18일부터 30일까지 교동아트미술관(관장 김완순)에서 열렸다. 이번 개인전은 15호부터 150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작품을 선보였다. 개막식에는 지역의 선후배 작가는 물론 각계각층의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하여 망구(望九)의 나이에도 창작에 전념하는 원로의 열정에 존경의 마음을 담은 박수를 보냈다. 이번 전시는 자연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를 표현하건 내면의 리얼리티를 포착해 독창적인 색감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으로 일관되게 구상회화의 길을 걸어온 박남재 화백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전시회로 기획되었다.
박남재 화백은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중퇴하고 조선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이후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상, 오지호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 2011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60년 화업을 조명하는 전시회와 2013년에는 미술세계 본상 수상과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기념 초대전을 차례로 개최했다.전주=최정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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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최종 3인 후보 발표

슬기와 민, 여다함, 장민승 선정돼
제15회를 맞이하는 ‘2014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최종 3인 후보로 슬기와 민, 여다함, 장민승이 선정됐다. 선정작가 3인은 에르메스 재단의 지원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심사위원단으로 작가 공성훈, 작가 홍승혜, ‘샤르자 비엔날레 12’ 주은지 큐레이터, CAPC 현대미술관 알렉시 바이앙 수석큐레이터,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팡웨이 창 시니어 큐레이터로 구성됐다.
슬기와 민은 “장식적 기능에 치우친 기존의 디자인 개념을 넘어 출판, 비평, 전시, 협업, 번역 등을 통해 예술에 대한 진정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여다함은 현실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영역을 넓히려는 작가로서 “대상과 관찰자라는 대상주의적 재현의 정치학에 벗어나는 작가적 태도가 돋보인다”는 점이 선정의 이유가 됐다. 사진가, 음반 프로듀서, 가구디자이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 장민승은 “역사적인 중요 장소를 텅 빈 공간으로 재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한 시대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탈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에르_슬기와 민

여다함장민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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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작가들의 활약의 장

제33회 홍익루트전 열려
홍익대학교 회화과 출신 여성작가들로 구성된 동문 홍익루트가 4월 16일부터 21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협회전을 열었다. 1982년 첫 협회전을 연 이래 매해 열어왔으며, 올해가 33회째 전시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전시 서문에서 “우리 미술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중요성 측면에서나 역할 측면에서 현저하게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성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진 데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홍익루트와 같은 단체의 노력과 역할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한국미술 지형이 형성되었다”고 밝혔다. 김령 제정자 김영자 황영자 남영희 전명자 정강자 등 1959~2014년 졸업생 95명이 참여했다.
김령 홍익루트 회장은 “그동안 회원 개개인이 성장하면서 한국화단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홍익루트’의 현재를 점검하면서 그 미래도 엿볼 수 있는 뜻 깊은 전시”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미술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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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에 대한 실험적 고민

오민, 파리국제예술공동체 입주 작가로 선정돼
오민 작가오경민-Suite1

미디어아티스트 오민이 삼성문화재단이 지원하는 파리국제예술공동체(Cité International des Arts) 입주 작가로 선정됐다. 삼성문화재단은 “소리에 관한 감수성과 공간을 다루는 구조적인 사고가 흥미롭고, 시테 아틀리에를 활용한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2014년 7월부터 파리국제예술공동체에 거주하는 1년 동안 통제와 위계질서에 대한 연구와 작업을 <5 Portrait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오민은 서울대학교 기악과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고 예일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독일, 네덜란드에서 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라익스아카데미, 금천예술공장에서 레지던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삼성문화재단은 한불 문화교류 및 한국인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60년까지 파리국제예술공동체(Cité)에 15평 규모의 아틀리에를 장기임차, 운영하고 있다. 선정된 작가에게는 왕복 항공료, 아틀리에 관리비와 작품 활동비가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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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과 침식으로 이루어내는 한글그림

서양화가 이승현의 네 번째 개인전
오랫동안 ‘우리 소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매진해온 서양화가 이승현의 개인전 <한글그림 아리랑>이 4월 1일부터 2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한글갤러리에서 열렸다. 작가는 우리 소리를 담는 그릇이 한글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한글 글꼴이나 자음, 모음의 형태를 다양하게 변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조형적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작가는 “누구나 쉽게,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생활 속의 예술을 추구한다. 한글을 조형적으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우리소리의 흔적을 찾으며 쉼 없이 따라가고 싶다”고 밝혔다.
작품 제작 과정은 간단치가 않다. 캔버스에 다채로운 물감을 수없이 겹칠하고 이를 갈아내고 다시 덧칠하는 과정은 우리가 발 디디고 살고 있는 대지의 지층이나 문화가 오랜 세월동안 퇴적과 침식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승현은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중등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2011년 퇴직이후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4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갤러리 인데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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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view 미국 소노마카운티미술관에서 열린 <제주 4·3전> 공동기획자 안혜경 아트스페이스 씨 대표

“제주 4·3은 미국 역사의 일부”

안혜경 (2)이번 전시가 미국에서 열리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이 전시가 미국 샌타로사시에서 열리게 된 데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멕시코 출신의 작가 마리오 우리베(Mario Uribe)의 공이 크다. 2006년에 열린 샌타로사시와 제주도 문화교류 행사를 통해 이 작가를 알게 됐고 그의 작업이 마음에 들어 2008년 아트스페이스 씨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마침 그때가 4·3 60주년 즈음이라 제주에서 여기저기 행사가 많이 열렸고 제주를 방문한 우리베는 4·3이 미국과 관련이 있는 만큼 미국에도 알려야겠다며 먼저 전시를 제안했다. 하지만 전시가 열리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전시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마리오 우리베 부부와 다이앤 관장이 내한해 직접 작가를 만나고 작품 선정을 하는 등 그들의 열정 덕분에 전시가 성공적으로 열릴 수 있었다.(아래쪽 사진)
전시에 대한 현지 반응은 어떠했나 다이앤 에반스 관장은 개막식 인사말에서    “4·3을 다룬 작품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고 내용이 매우 의미 있다”며 “4·3은 제주도의 역사일뿐 아니라 미국 역사의 일부”라고 밝혔다. 당일 1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했고 교포들도 자녀를 데리고 전시를 둘러보았다.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미국의 다른 도시에 이 전시가 순회할 수 있도록 알아보겠다고 나선 사람도 꽤 된다.
최근 영화 <지슬>, <비념>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제주에 정착하는 예술가가 많아지면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4·3을 주제로 한 작품이 자꾸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의 경우 작업의 밀도가 떨어지고 치유나 이런 쪽으로 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반면 오래 작업한 작가는 구체성이 있지만 통찰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부분에서 서로 소통하며 접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제주는 4·3뿐아니라 고유의 무속신앙과 같은 다양한 요소가 내재된 곳이다.
2006년 아트스페이스 씨를 개관했다. 공간 운영은 어렵지 않나. 제주도는 워낙에 컬렉터 층이 약해 운영이 쉽지 않다. 갤러리로 등록했지만 나의 지향점은 복합문화공간이다. 한국에서는 작품이 좋고 나쁘고보다 작가의 유명세가 중요하다. 그걸 좇다보면 좋은 전시를 만들기 힘들다. 이 공간은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서 만든 것이다. 제주=이슬비 기자

소노마 (4)

 

Editor's Letter

밥과 예술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직접 본 건 1989년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지금은 없어진 서소문 호암갤러리에서였다. <군상(群像)> 시리즈가 개미떼처럼 보였던 기억이 또렷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보지 못하는 법’, 그때는 그랬었다. 고암을 깊이 알지 못했기에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남준과 더불어 고암이야말로 세계 미술계에 자신있게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인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고암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 2000년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생기면서였다.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기까지 부인 박인경 여사와 윤범모 교수 같은 후학들의 숨은 공력과 가나아트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후 이응노미술관은 2007년 대전시립미술관 바로 옆에 독립 건물을 지어 이전해 오늘에 이른다. 2011년엔 충남 홍성에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도 건립됐고, 올해 프랑스 파리 근교 보쉬르센(Vaux-sur-Seine)에 고암아카데미 건물도 개관한다고 한다.
대전 이응노미술관을 다녀왔다. 그곳에 가면 6월 1일까지 고암의 미공개 기증작품 500여 점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조그만 작품이 있었다. 이번호 표지에 실린 <구성>이 그것이다. 훼손된 원작을 복원한 것으로 고암이 윤이상, 천상병 등과 함께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교도소 안에서 종이와 밥풀을 짓이겨 만든 작품이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서 고암을 생각했다. 차디찬 감방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꼼지락거리며 그것을 만들었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뱃속을 채워줄 눈앞에 밥보다 창작에 더 굶주리고 목말라했던 고암을 말이다.
이 대목에서 유진상 교수의 컬럼(p.60-61)이 오버랩 됐다. ‘전시 지원비’를 받지 못했다고 SNS에 불평불만을 표출하는 (일부) 젊은 미술인의 행태 말이다. 물론 예술가라고 해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작가로서의 합리적인 권리요구 또한 정당하고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제 맘대로 작가를 ‘을’로 규정하고 ‘갑’이라고 칭한 선배 세대를 향해 볼멘소리는 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해도 어린애 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작 예술에 대한 절실함이나 진지함에 대한 고민보다 기껏 당장 제 앞에 놓인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특집에 소개된 13명 ‘미술 친구들’이 오히려 제도권 미술계를 욕망하는 이런 젊은 작가들보다 더 순수하고 진솔해 보인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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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달성 AHAF 운영위원장
황달성 금산갤러리 대표는 미술계에서 늘 새로운 시도로 한국 현대미술을 해외 미술무대에 소개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화랑협회에 제안해 2002년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를 탄생시켰고, 1995년 제정된 <서울판화미술제>를 세계 유일의 판화·사진 전문 아트페어인 <아트 에디션>으로 발돋움시켰다. 취재 차 방문한 <아시아 호텔 아트페어(AHAF) 홍콩 2014> 현장에서 황 대표는 한국미술의 도약을 위해 아시아권 갤러리와의 네트워크 형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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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숨SUMM 대표
조덕현의 개인전과 자하 하디드의 전시를 모두 기획하였다. 이번 달 유난히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늘 친절한 설명으로 취재에 도움을 주었다.《 월간미술》의 2012년 2월호 특집 <2012년을 빛낼 미술인20>에 선정되기도 해 인연이 깊다. 현재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이자 아트디렉터로서 강의와 전시기획 글 연재까지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문화교류 행사를 진행하는 그녀가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길 기원한다.

edi2이경민 이응노미술관 홍보담당전시
홍보담당자는 그 기관의 얼굴이다. 그 임무의 중함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그렇게 보면 대전 이응노미술관 홍보담당 이경민 큐레이터도 그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셈. 고암의 미공개 작품 50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인 이번 <신소장품전> 취재를 위해 각종 자료와 일정을 준비하고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해줬다. 국내 대학에서 불문학과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는 이 큐레이터가 앞으로 이응노미술관을 더욱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

[컬럼] 후배 미술인들에게

후배 미술인들에게

한국의 현대미술 창작영역, 다른 말로 우리가 ‘미술계’라고 부르는 공간은 그것이 생겼을 당시(다시 말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왜곡과 결여를 드러내고 지녀왔으며 앞으로도 상당히 그럴 것처럼 보인다. 미술대학, 미술시장, 미술정책, 미술제도, 미술비평, 미술출판, 지역미술 등등 심지어 미술창작과 그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문제점을 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이 문제점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전부 개선되거나 혁파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현재의 지점에서, 이제까지 해 온 이야기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 한 가지 이슈가 거론되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전시에 참가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 지원비’에 대한 것이었다. 대안공간 루프 서진석 디렉터가 담당한 <제4회 공장미술제>(사진)에서 불거진 지원비 지급 여부에 대한 이슈는 처음에는 공장미술제라는 기획 자체에 대한 성토처럼 보였으나, 그 이후에 이어진 토론의 초점은 공장미술제를 넘어서는 범위의 것이다. 처음부터 ‘전시 지원비’ 정도가 문제 되었을 리 없다. 실은 기성세대, 나아가 사회 전체가 체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좀 더 광범위한 이슈가 제기된 것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군대문화처럼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져 온 몸에 밴 악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치부해버릴 수 있는가?
이번 논쟁은 마치 기업의 노사분쟁처럼 전개되었다. 회사 측 간부들이 노조 측 대표들과 노동조건 등에 대해 따져보는 것처럼 다뤄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성세대라고 토론에 나선 서진석, 김노암 등은 사용자라고 하기엔 턱없는 개인이고 젊은 세대를 대변한 이들 역시 연대를 자처할만한 뚜렷한 예술가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서진석이나 김노암은 지난 15년여의 기간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대안공간을 묵묵히 꾸려온 ‘자원봉사자’ 같은 인물들이다. 정부나 기업, 각 재단의 기금을 열심히 타서 자신들의 기획을 펼쳐온 것 외에 이들이 미술계의 해묵은 열악함의 원흉이 될 만한 이유는 없다. 이들의 활동이 비평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대체로 존중받을 만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다른 독립 기획자들 역시 이들이 거쳐 온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영역은 아직 대안적 지점들에 머물러 있다.
<공장미술제>에 대해 말하자면 1999년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서울대, 홍대로 양분되어 있는 미술계에서 대학 간의 교류와 학벌을 탈피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촉진한다는 것이 주된 이슈였다. 2012년에 이것이 다시 등장한 배경에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과도한 상업화에 대응하여 실험적 작품들을 프로모션한다는 이슈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서 큐레이터에게 실행을 위임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공장미술제>가 2회로 멈췄던 이유는 매우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이 전시기획을 맡고자 하는, ‘총대를 멜’ 자원자가 없었고, 교수들 역시 너무나 피곤한 이 프로젝트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미술대학 교수연합인 ‘대학미술포럼’을 탄생시켰고 이후 ‘대학미술협의회’로 이어져 미술대학 간 연대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번 논란 이후 공장미술제의 지속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테지만, 미술대학교육의 연장선상에서 공유 플랫폼으로서 어떤 방식이 좋을 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리라 본다. 홍태림이나 안광휘 같은 젊은 미술인들이 촉발시킨 이번 논의가 전시 지원비나 부실한 전시기획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더 확대해서 미술에서 불합리하게 과대평가된 비합리적 가치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물처럼 엮여있는 더 큰 문제들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허름한 신비주의로 포장된 예술의 가치나 의의에 대한 논의들, 교육 수혜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미술대학 교육 프로그램의 개선 및 평가방안, 비평에 요구되는 인정하기 어려운 도덕주의적 편견들, 근거 없는 복종이나 추종을 요구하는 선후배 관계나 사제 관계의 관행들, 타인의 노동에 대해 돈으로 표시되는 보상과 거래관계를 평가절하하거나 금기시하는 주제넘은 비난들, 예술가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예술을 공짜라고 생각하는 저열한 관료주의, 주제를 검열하는 파시즘과 안 그래도 힘겨운 예술가들에게 현실정치와 창작을 반드시 뒤섞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죄의식을 조장하고 극단적 진영으로 나눠대는 정치적 징발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 조건들은 2014년 현재 예술적 중세를 지속하거나 재생산하는 핵심적 요인들이다.
나는 이들이 기왕 비평가로 방향을 설정했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세대를 구축하고 또래의 젊은 예술가들이 당대의 독자성을 실현하도록 하고 싶다면 전선(戰線)을 정확히 설정할 것을 권하고 싶다. 큰 전선들과 지엽적인 전선들을 구분하고 현재의 논의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를 가늠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동시대미술을 냉소의 대상으로 깎아내리려는 온갖 ‘무식한 자들(philistines)’과 싸워야 할 것이다. 미술계 내부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술계 전체를 빈곤으로 몰고 가는 사회 전체의 무관심, 평가절하, 편견, 고립 등과 싸워야 할 것이다. 이번 <공장미술제>를 둘러싼 논의가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서진석과 같은 개인이나 공장미술제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이 논의를 ‘먹고사는’ 문제로만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것이 복지논쟁이나 노사분쟁 혹은 세대 갈등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모든 이슈는 예술적 ‘수월성’을 통해 어떻게 탁월한 동시대미술을 제공할 것인지, 그것을 통해 어떻게 미술 전반의 환경을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비평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이제 50대에 접어드는 우리도 더 치열하게 노력할테니 당신들도 노력하기 바란다.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

[핫피플] 한국문화예술연구소장 김미경

아카이빙, 리얼리티에 다가가기 위한 밑거름

강남대 회화과 김미경 교수가 설립한 한국문화예술연구소(Korean Art Research Institute, 이하 KARI)가 4월 10일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새롭게 문을 연다. 김 소장이 2006년 강남역 인근 오피스텔을 빌려 연구소를 연 지 8년 만이다. 갤러리 공간까지 마련해 아카이브, 연구, 전시, 아카데미, 아티스트 워크숍이 한 건물 안에서 가능하다. 김 소장의 오랜 염원이 실현된 것이다. 그동안 연구소는 아카이브 작업을 중심으로 출판, 번역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한국화에 대한 비평을 연구한
《 우리그림 비평》(2008)을 출간했으며, 2011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코리안 랩소디전>에 ‘이상’과 ‘최승희’, ‘1960~70년대 한국의 행위예술’ 영상 제작, 그리고 같은해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데페이즈망-벌어지는 도시전> 기획 등을 해왔다. 김 소장은 “연구소는 비영리기관으로 지원금을 받아서 연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보다 안정적인 연구를 위해 재정 확보 의 자가동력으로서 갤러리를 영리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ARI는 1960~70년대 미술을 중심으로, 1940~50년대 해방공간, 최근 작가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며 아카이브 정리를 하고 있다. 현재 이우환을 비롯해 400명의 작가가 기본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앞으로 계속해서 작가 수를 늘리고 작업 전반에 걸쳐 업데이트할 계획이다. 작가 강국진, 하종현의 경우 숨어있는 자료까지 모두 확인해 작업 전반의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을 마쳤다. 아카이브는 심층 연구를 토대로 전시까지 이어진다. 스페이스 카리아트에서 열리는 첫 번째 전시 <더 모노톤–리피티툼(repetitum)>(4.10~5.30)은 이우환, 하종현, 최병소 3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반복성을 철학적 증상 혹은 징후로 조명한다. 앞으로 ‘모노톤’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일 것이며 8월에 전시와 연계해 영문학술서도 발간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단색조 회화, 모노하, 모노크롬 등 용어에 대한 재검토부터 시작해, 한국의 단색조 회화와 서양의 모노크롬이 공유하는 지점과 차이점을 재조명해 논의의 장을 적극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이 모든 연구의 발판은 ‘아카이빙’이다. 김 소장은 1990년부터 한국 근현대미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며 아카이빙 작업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인이 아니면 누가 한국미술을 연구하겠느냐는 심정에 사명감이 들더라. 한국의 실험미술은 유신시대 언더그라운드로 발생해 미술계 내에서 논의된 적이 거의 없었다. 자료 수집을 위해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7종 신문을 비롯해《 선데이 서울》,《 주간경향》등 4대 주간지까지 꼼꼼이 살폈다.”
하지만 아카이브는 단순한 자료 수집이 아니다. 김 소장은 “아카이브를 검토할 때에는 작가 집에서 굴러다니는 접시도 다시 확인한다”고 말한다. “강국진의 아카이브를 정리하면서 그의 퍼포먼스 <색 물을 뽑는 비닐 주머니>가 한국 최초 행위예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카이빙의 결과로 퍼포먼스 연구의 궤적이 달라질 수 있다. 아카이브는 당대 리얼리티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최근 미술계에서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아카이브 기관이 늘고 있다. 김 소장은 반가운 소식이라며 “자료를 많이 수집하는 기관이 있다면 이 자료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팀이 협업해서 결과물이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또한 “KARI는 앞으로 세계와 교류하는 통로도 넓힐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지난 2월에는 홍콩 파라사이트(Para Site)에서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와 연계해 일본, 한국, 대만의 1960년대 행위예술을 조명한 전시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한국 섹션에 참여해 한국의 실험미술 작업을 선보였다. 그리고 김 소장은 4월 15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단색조 예술’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