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ART SPACE

김주현 (1)

김주현 개인전
갤러리 시몬 3.12~5.15

이번 개인전 제목은 <나선연구>로 명명됐다. 익히 알려졌듯 작가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점 선 면을 마치 기하학적 연구의 결과물처럼 보여준다. 이에 관람객은 마치 우주 혹은 물리학적인 공간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다양한 모형과 드로잉 등이 함께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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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 (2)

한반도 오감도
아르코미술관 3.12~5.10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황금사자상 수상 한국관 귀국전>인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당시의 전시를 재현했다. 100년에 걸친 남북의 건축적 현상과 진화 과정에 대한 연구결과를 담은 이 전시는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타이틀을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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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술관 (1)

노벨로 피노티 개인전
서울미술관 2.28~5.17
1966년과 1984년 <베니스비엔날레> 이탈리아관을 수놓았던 작가의 첫 한국전시다. 대리석과 청동을 소재로 한 19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 전관과 더불어 야외에도 작품을 설치, 산책하듯 그의 작업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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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2인 (2)

1981년 5월 27일
아라리오뮤지엄 in Space 3.4

한국 실험미술의 태두 김구림과 시인이자 《공간》편집장을 지낸 조정권 2인이 펼치는 퍼포먼스.
타이틀에 적시된 날짜에 행해졌던 퍼포먼스를 재현한 것으로 아라리오뮤지엄이 들어선 舊 공간사옥 내 소극장의 재개관에 맞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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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크뇌벨 (2)

이미 크뇌벨 개인전
리안갤러리 서울 3.5~4.18

‘알루미늄 회화’라는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작가의 근작 7점을 선보이는 전시. 전후 독일 추상조각을 대표한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대담한 형태와 원색을 구사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든다.

SPECIAL FEATURE 우리 옛 그림 민화의 재발견

*본 기사에 실린 도판과 해설은 《한국의 채색화》(정병모 기획, 다할미디어, 2015)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민화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우리 그림이다 말 그대로 ‘백성(民)의 그림(畵)’ 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남녀노소에게 사랑 받는 하나의 미술장르로 우뚝 섰다 현재 민화 인구는 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산되며 그 증가세가 꺽일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세계 곳곳에 소장된 우리의 궁중회화와 민화를 권의 책으로 묶은 한국의 채색화 가 발간되었다.
일부 중년여성사이의 여가활동 대상으로 여겨지던 민화가 이제 주류 미술계의 문을 당당히 두드리고 있다. 바야흐로 민화의 예술성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월간미술 은 근래의 민화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 민화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인 민화 라는 명칭부터 새롭게 접근하고자 한다. 다채로운 고전 민화를 살펴보며 민화 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와 저급한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한다 또한 민화 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짚어봄으로써 세계미술 속에서 우리 민화가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엿본다 오색찬란한 민화 속 색의 향연이 자연의 색을 입은 봄꽃과 함께 당신의 눈과 흥을 자극할 것이다.

八景圖
팔경도는 특정 지역의 경관을 여덟 가지의 주제로 묶어 이름 붙이고 이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아마추어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 팔경도는 기법적인 편의성으로 인해 완성도는 약하지만 기발한 발상과 해학성이 돋보이고 설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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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종이에 채색 73.4×32.4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김세종 소장)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민화 산수화 가운데 가장 빈번히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존의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소상팔경도의 화제가 지닌 특징들을 각각 잘 살리고 있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은 육지로 들어오는 배를 그렸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은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티프가 그려져 있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구한말에 이르러 한국적인 팔경도가 꽃을 피웠는데 그중 하나가 관동팔경도다. 그림의 구성이 어린아이들의 그림처럼 상식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지만,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기존의 화풍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虎獵圖
호렵도는 세기 이후 유행한 그림으로 그 내용은 청나라 왕공귀족의 군사 훈련을 겸한 대규모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부분)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
“원래 호렵도는 관아에서 무장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돋보이게 하거나 벽사의 용도로 제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해학적인 호렵도는 기능적인 측면보다 조형적인 측면에 주력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기법을 해학적인 표현과 연결시켜 어떤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도드라져 보인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故事人物圖
역사나 설화 문학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인물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고사인물도라고 한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삼국지연의도와 신선도가 어우러진 것이다. 첫 세 폭은 ‘삼국지연의도’ 중의 장면, 나머지는 다양한 신선의 모습을 담았다. 바둑을 두는 신선의 모습에서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동굴 속에서 두 노인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구경하다 집에 와보니 수백 년이 흘렀더라’는 왕질의 고사를 떠올릴 수 있다.” – 유미나(원광대 교수)

冊巨里
책을 비롯하여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물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거리란 먹을거리 입을거리처럼 복수의 의미다 책거리 가운데 책가 즉 서가로 구성된 그림을 책가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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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종이에 채색 355×128cm(각) 8폭 병풍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8폭 가운데 두 폭은 표피豹皮를 걷어 올린 공간에 문방구와 기물이 빼곡히 배열되어 있다. 책가 앞에 장막을 설정한 장한종 양식의 책거리와 관련이 깊은 민화 책거리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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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10칸의 서가를 책으로만 가득 채운 책가도이다. 정조 연간에 책만 빼곡히 채워서 그린 책가도의 초기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책가도의 제작 시기는 19세기로 본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花鳥圖
화조를 주제로 한 그림은 민화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내용이 다양하고 표현된 물상의 종류와 형태 및 채색의 변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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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도(蓮池圖)> 비단에 채색 177×75.4cm(각) 4폭 병풍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연지도(蓮池圖)
“여러 쌍의 원앙새는 주체할 수 없는 연꽃의 향기에 취해 이리저리 연꽃을 완상하며 분주하게 물결을 가르고 있다, 원앙금침을 수놓아 자식을 많이 낳고 부부 금슬이 좋기를 기원하는 신혼방에 펼쳐졌을 법한 그림이다.” – 이경숙(박물관 수(繡)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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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조도(花鳥圖)> (부분) 종이에 채색 90.4×37.2cm(각) 8폭 병풍 19세기 (일본 개인 소장)

화조도(花鳥圖)
“매화, 파초, 초롱꽃, 대나무, 모란, 소나무, 연꽃, 백일홍으로 구성된 화조화 병풍이다. 화조로 이루어진 자연이지만, 따뜻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묘와 소나무 잎 표현으로 보건대, 제주도 민화일 가능성이 높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翎毛・魚蟹圖
호랑이의 이미지는 선사시대 바위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등 이른 시기부터 즐겨 제작되었다 민화로 전해진 호랑이 전통은 상징성이 강해지면서 호랑이는 부패한 관리 까치는 민초를 대변하게 되었다 물고기의 경우 벽사뿐만 아니라 다산을 상징하는 길상적 소재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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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작도(虎雀圖)> 종이에 채색 100.5×60cm 19세기 (이우환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호작도(虎雀圖)
“민화 호랑이 그림에는 대부분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참새가 까치 대신 호랑이의 상대역을 담당한 점이 이채롭다. 참새 외에도 토끼나 꿩 등이 호랑이의 상대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등용문 고사가 충실하게 묘사되어 배경에 패방牌坊 모양의 용문을 표현한 중국의 약리도와는 달리 우리의 어변성룡도는 일출하는 태양이나 태극문, 또는 장식적인 여의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 조에스더(미국 사우스웨스트대 교수)

文字圖
문자를 소재로 한 민화로서 원래 한자의 상형성에 기인하며 그 시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화 문자도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발전했다 문자도는 다른 소재보다 윤리성과 이념성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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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文字圖)> 종이에 채색 55×40.5cm(각) 8폭 병풍 19세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문자도(文字圖)
“이 효제문자도 8폭은 판화로 글자의 윤곽을 찍은 후에 내부를 흑색 바탕으로 채우고 다시 각종 동물, 새, 화초, 일월日月, 운문雲文 등을 그려넣은 것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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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부분) 종이에 채색 95.2×34.8cm(각) 6폭 병풍 19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의禮意 염치廉恥 국원菊遠 강산江山 등 여섯 폭이 남아 있는 비백서 문자도 병풍이다. 비백이란 큰 붓으로 먹을 묻혀 재빨리 큰 글자를 쓸 때 먹이 묻은 곳과 묻지 않은 곳이 뚜렷이 대비되어 필획 중 흰 부분이 마치 날아가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SPECIAL FEATURE 행복을 담은 색깔 그림 길상화吉祥畵 다시 보기

윤범모 가천대 교수

‘미술계의 숙원 사업’이던 우리의 채색화를 집대성한 두꺼운 채색화 도록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 발행)가 바로 그것.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채색화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감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 아름답다! 우리 색깔 그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회화작품 가운데 이렇듯 아름답고, 멋있고,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진정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의 그림이다. 그런데,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의문 사항 하나, 그것은 바로 기존 한국미술사 관련 저술들의 한계이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기왕의 한국회화사 관련 저술에서는 우리 채색화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색깔 그림’을 푸대접하고 무시했던가. 작가명과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민화’는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하자’가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채색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다

그동안 한국회화사 연구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예술관은 한마디로 예술 천시관賤視觀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취미생활 정도의 여기餘技로 여겼지 직업적 대상이 아니었다. 예술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애물단지 정도, 그래서 사대부가 가까이 할 대상은 아니었다. 문인 당사자들이 여기라고 주장한 수묵 문인화를 가지고 한국회화사의 골간으로 삼아 기술했으니, 이는 불구의 연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문인화는 중국풍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니, 민족 회화의 독창성 문제를 생각할 때 한계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그림,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초상화와 기록화, 불화와 무속화, 그리고 이른바 민화로 이들의 공통점은 채색화이다. ‘민화’는 채색화의 꽃이다. 따라서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회화사 연구의 시각 교정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채색화》는 이 점에 대해 절규한다. 절규!
흔히 한민족을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인은 백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로거리에서 흰옷 입은 사람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실제로 국가 기관에서 한국인의 색채선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 그것은 파랑색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 민족의 색채 선호 역시 파랑색이 1순위라는 조사보고서가 있다.) 바닷가 출신 사람들은 완벽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가, 섬 출신 김환기는 파랑색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통영 출신 전혁림 역시 파랑색을 작품의 기저로 삼았다. 오방색의 단청을 보자. 여기서 바로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단청과 같은 원색의 농채濃彩를 좋아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2차색인 간색間色을 좋아한다. 일본 미인도에 보이는 간드러지는 색깔과 필선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한민족은 밝고 짙은 원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채색화가 한민족의 심성 표현에 적합했던 것이다. ‘민화’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민화’는 무명의 저속한 하수의 그림이 아니다

민화라는 용어를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민화를 무명의 저속한 하수下手의 그림이라고 개념 정리했다.(물론 하수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무튼 민화하면 3류의 그림, 심하게 말해서 시골 장돌뱅이의 막그림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민화의 본질을 무시한 것이다. 민화는 그렇게 무명의 하수 그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저속한 그림도 아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민화작품의 독창성과 상징성, 장식성과 해학성 등 특성은 결코 하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나름대로 훈련된 과정을 거친 수준급 화가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보하여 그린 작품이다. 하여 민화는 마을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춘 공동체 사회의 시각적 산물이다. 민화세계의 특성으로 동심童心을 들 수 있는 바, 동심의 표현은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이다. 추사 김정희의 〈板殿〉(강남 봉은사 현판)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미술의 제작 과정처럼 익명성은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아프리카 미술은 마을의 공동의지를 작품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작가명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술작품처럼 작가의 개인 브랜드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화의 무명성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겨진다.
기왕의 민화 걸작전은 상당부분을 왕실회화 작품으로 꾸몄다. 근래 궁화宮畵 관련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궁화와 민화의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왕실에서 사용한 궁화를 두고 백성 민民자를 붙이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화나 민화는 똑같은 채색화이고 커다란 의미에서 형식과 내용이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궁화의 작가는 도화서 화원이었고, 군왕에게 진상하는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수 없는 신하의 신분이었다. 궁화에 작가명이 누락된 것은 시대적 환경의 반영이다. 이런 궁화가 민간에 퍼져 유행하면서 이른바 민화의 세계가 광역화되었다. 궁화와 민화는 재료를 비롯 표현형식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평가하게 한다. 민화의 물결은 점차 넓게 파급돼 민화의 독창성과 함께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민화라는 용어의 비과학적 부분이다. 민화는 하수의 저속한 그림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궁화와 민화의 경계선 구별 짓기에 어려움이 있다. 궁화와 민화의 완벽한 구별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수용자 중심의 이와 같은 구별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화원이 똑같은 그림을 2장 그려 한 점은 왕실에 진상하고, 또 한 점은 민간의 친지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궁화인가, 민화인가. 더군다나 화원은 중인 출신으로 피지배계층에 속한다. 왕공사대부 계층도 아닌 중인 출신이 궁정화풍을 이룩하면서 그린 것이 궁화이다. 하지만 궁화의 광역화 현상은 민화와 대동소이한 형상을 만들게 했다. 요즘의 현상은 궁화와 민화를 한 형제로 볼 것인가, 남의 집 식구로 볼 것인가, 혼란을 자초하는 꼴이다. 무엇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 현재 민화 그리기 붐은 전국적으로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다. 10만 명 이상의 민화인구는 한국 문화현상의 아주 독특한 흐름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민화’라고 그리는 내용을 보면, 대다수가 궁화라는 점이다. 민화공모전 수상작은 궁화를 모본으로 삼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궁화는 민화보다 규모로 보나 내용의 품격으로 보나 고급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궁화 취향은 시대적 추세의 반영이다. 그래서 민화라는 용어를 고집한다면, 궁화라는 보물창고를 잃게 된다. 굳이 민화라는 용어를 쓰고자 궁화라는 전통을 방기해야 좋을까.
이른바 민화의 내용은 대부분 행복추구이다.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화조화 부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남은 모란 그림, 이는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모란병풍 그림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또 장례식도 거행했다. 모란 사랑의 조형적 증거물이다. 책거리, 문자도, 인물화, 산수화 등 민화작품에 내재하는 기본적 심성은 바로 행복 추구이다. 산수화도 넓은 의미로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한 일본인 학자는 민화라는 용어를 차라리 ‘행복화幸福畵’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용어의 신선하지 않음,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지난 3월 열린 ‘경주민화 포럼’에서 출전이 확실한 ‘길상’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길상화吉祥畵’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궁화와 민화를 모두 아우르면서 우리 채색화의 특성을 담아낼 용어, 무엇보다 무명의 저속한 그림이 민화라는 야나기 이론의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산물이었다. 물론 새로운 용어가 자리매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말기 왕실에서부터 시골의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행했던 우리 식의 그림, 그것의 형식은 채색화였고 내용은 길상화였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사찰에서도 길상화를 그렸다

채색화의 전통을 온전히 지킨 곳은 사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찰은 고려의 찬란한 불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채색의 전통을 지킨 공로, 이는 정말 박수 받을 일이다. 어째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민화’가 대대적으로 그려지면서 유행했을까. 거꾸로 표현하면, 이 시기는 정치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민간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 궁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듯 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행복을 담은 그림을 좋아했다. 길상화를 보면서 괴로운 일상생활을 잊고 내일의 행복을 꿈꾸었다. 마치 망자亡者를 위무慰撫하기 위한 감로도甘露圖가 이 시기에 유행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역설적 표현은 세상을 훈훈하게 한다. 길상화 속의 풍자정신과 상징성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 돋보인다.
오늘날 사찰 벽화에 남아 있는 민화풍의 그림들, 사찰이 바로 민화 제작의 모태 역할을 했음을 증거하는 부분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 물려주는 그림, 이런 내용이 왜 사찰 벽화에 그려졌는가. 산신각의 산신도는 타종교를 배려한 불교의 산물이라 볼 수 있지만, 불교와 무관한 민화풍 소재의 사원 벽화는 정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조선시대 말기의 사원경제는 매우 열악했다. 제지업이 사찰에서 흥행했던 것도 경제난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려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찰은 채색 물감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채색물감은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청 담당 가운데 소묘력을 요구하는 그림, 바로 별화別畵 담당 화가는 민간용 민화를 그릴 수 있었다. 벽에 그린 내용을 종이에 그리면 바로 ‘민화’가 됐다. 이런 민화작품에 작가 이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까치 호랑이를 그려주면서 굳이 스님의 법명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증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고암 이응노가 주인공이다. 그는 1920년대 초 상경하기 직전 고향(홍성, 예산)의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 당시 사찰에서는 민화를 많이 그렸는데, 고암도 그곳에서 일당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건장한 남자의 하루 품삯이 20~30전 할 때 고암은 1원을 받았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그린 내용은 까치 호랑이 그림이었다. 뒤에 고암은 일당 5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고암은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서 상경할 수 있었다.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 이는 매우 흥미롭다.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은 민화작가의 위상을 제고시키면서 민화의 성격을 다시 헤아리게 한다. 사찰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채색 전통을 지켜 온 보루였기 때문이다. 채색화의 위상 재고를 요구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우리의 길상화를 위하여. ●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SPECIAL FEATURE 민화야말로 진정한 우리그림이다

정병모(경주대 교수)는 민화의 매력에 빠져 20년 넘게 민화를 연구하고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찾아나선다. 그는 〈반갑다 우리민화전〉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 등 많은 다수의 민화전시를 기획했고 《만화보다 재미있는 민화 이야기》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등을 출간했다. 현재는 민화학회 회장이자 한국민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타공인 민화전문가 정 교수에게 민화의 모든 것을 물었다.

민화라는 용어 자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학회나 포럼 등에서 ‘민화’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용어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민화라는 용어에 대해 좋아하는 이도 많지만,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었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다. 그 대안으로 한민화, 겨레그림, 생활화, 천인화, 서민회화, 한채화 등 여러 용어가 제안된 바 있다. 하지만 새로 제안된 용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화를 대체하거나 보편화되지 못했다. 민화라는 용어는 그 타당성 여부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 애틋한 느낌으로 인해 사랑을 받는 것이다. 결국 명칭은 학자나 연구가들의 뛰어난 이론보다 일반인의 취향과 기호에 의해 생명성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대민화의 예술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저변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토양 속에서 세계적인 예술가가 배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화의 대중화는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예컨대 19세기 중엽 유럽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미술이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같은 이들이 미술의 대중화를 부르짖었으나 이론과 구호에 그쳤고 실제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이론가가 아니라 주부의 취미생활로 시작해 이룩한 민화의 대중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성공한 예로서 특기할 만하다.

조선후기 풍속화는 서민이나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서민이 그리던 그림이다. 풍속화와 민화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담론은 무엇이며 두 장르 간 영향관계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풍속화와 민화는 다른 분류기준에서 나온 개념이다. 풍속화는 산수화, 화조화와 같이 제재별로 분류한 것이고, 민화는 궁중회화, 사대부회화와 같이 신분별로 구분한 것이다. 뿌리는 다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사회가 붕괴되고 하류계층의 서민문화가 발전했다. 그 첫 번째 징후가 18세기의 풍속화로 나타난다. 이 시기 풍속화는 사대부 및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수요처는 주로 궁중이고 정치적 목적이었을 때 진정한 서민회화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서민의 생활상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에 힘입어 19세기에는 진정 서민화가가 제작하고 서민 및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 유행했다. 그것이 민화다. 이러한 추세는 20, 21세기에 대중문화로 이어져 오늘날 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즉 풍속화와 민화는 18세기 이후 역사의 수면으로 떠오른 서민문화의 표상이고, 현대에 대중문화의 발전을 가져온 모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민화를 ‘19세기의 문화’로 인식한다.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민화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대표작품이 있는가. 또한 역사가 긴 민화를 문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술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9세기는 민화가 성행한 시기이지, 민화의 역사가 시작한 시기는 아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선사시대 암각화가 민화 역사의 시작이고, 좁은 의미로 보면 통일신라시대 처용문배가 시작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백성들이 대문 앞에 처용문배를 붙여서 역신을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정한 민화인 백성의 그림으로는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예라 할 수 있다. 원래 한국의 회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와 같이 채색화가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사대부의 이념에 맞는 수묵화와 문인화가 화단을 주도하면서 채색화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후 18, 19세기에 민화를 통해 그동안 소홀히 했던 채색이 기적처럼 부흥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후기 민화의 역사적 의의 중 하나다.

민화를 그린 주체는 서민이지만 그 문화를 서민만이 향유한 것은 아니다. 민화와 궁중회화는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민화와 궁중회화는 기본적으로 수요가 다르다. 민화는 서민이나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고, 궁중회화는 왕실에서 쓰인 그림이다. 그렇다보니 민화는 크기도 작고 안료나 종이와 같은 재료도 비싼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궁중회화는 크기가 크고 재료도 비싸고 좋은 것을 사용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여부’이다. 민화는 표현주의적 성향을 띠는 반면, 궁중회화는 사실주의적 묘사를 중시한다.

《한국의 채색화》에서 보듯 채색화는 불화, 궁중기록화 등도 포함할 수 있게 범주가 확장된 용어다. 실제로 승려들도 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채색화라는 용어에 불화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가 있는가.

도록의 제목이 ‘한국의 채색화’, 부제는 ‘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다. 한국 회화는 크게 채색화와 수묵화로 나뉜다. 채색화 가운데 이번 도록에서는 궁중회화와 민화만을 담았다. 따라서 채색화는 민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상위개념이다.
채색화를 내세운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묵화 위주로 편성된 화단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일본화 하면 채색화를 가리키고, 중국화 하면 수묵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국화 하면 수묵화를 가리킨다. 수묵화는 중국 사대부문화의 산물로서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대표적인 중국문화이다. 수묵화 혹은 문인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 아니라 고고한 중국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중국적인 성향이 강한 수묵화보다 자신의 개성이 강한 채색화를 내세웠다. 일본에서 수묵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배울 데가 없어서 한국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문화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등 화려하게 전개되어 온 전통 채색화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중국식의 수묵화가 조선 화단을 지배해온 것이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한국화=수묵화”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제는 한국적이면서 전통적인 채색화를 부활시켜서 우리의 진정한 회화를 찾자는 취지를 갖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화 작가의 맥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조선시대 민화는 6·25전쟁 이후 격동기를 겪으면서 그 전통의 맥이 잠정적으로 끊어졌다. 다행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이 1970년대 말부터 한국의 조자용, 김호연, 김철순, 이우환, 일본의 이타미 준 등에 영향을 주면서 민화가 되살아났다. 예전의 민화작가는 거의 사라졌지만, 문화재 수리 보수, 수출화 제작 등으로 그림 작업을 하신 분들에 의해 되살려져서 오늘날 민화로 이어진 것이다.

민화는 형식과 틀이 정해져 있다는 편견이 있다. 민화에서 창작성은 어디까지 허용되며,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민화를 모사하는 분들은 대부분 아마추어로서 취미생활로 하거나 문화재로서 기술을 전승하는 분들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인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처럼 우리 그림인 민화를 모사하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주부의 경우 오랫동안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민화를 통해서 찾으며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고 있다. 그분들에게 무작정 창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오히려 미술의 대중화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민화가 일본의 민화와 중국의 민간연화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

민화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일반 사람들이 피카소나 김홍도의 비싼 그림을 집 안에 걸 수는 없다. 대부분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값싼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한다. 그것이 민화가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고, 아시아에도 당연히 나라마다 민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조선민화는 일본 민화나 중국의 민화인 민간연화와 비교할 때 전통적이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뛰어나 매우 현대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해학과 변형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민화는 판화 위주로 발달한 일본이나 중국 민화와 달리 주로 붓 그림으로 그렸다. 그로 말미암아 민화는 비슷한 것은 있어도 똑같은 것이 드물고 약간씩 변화를 주어 다양하게 발달했다. 이러한 점이 조선민화가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전국 각지 대학의 부설기관과 민화연구소를 통해 민화강습이 이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식 학과를 개설해 민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다. 작가와 이론가 사이의 관계와 교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존 미술대학의 교수들께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술계가 어려워지면서 지방 미술대학의 순수미술 학과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보건대 민화계는 놀라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민화 시장을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을 당연히 대학에서 키워야 하는데, 정작 미술의 주체들은 이러한 현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술대학도 현실적으로 변모해야 한다. 지금의 민화 추세로 보아 전국에 적어도 2~3개의 민화학과가 생겨야 하고, 미술대학에서는 민화에 대한 실기 및 이론 강의를 개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시도가 필요할 때다. 민화센터의 수장이자 30년간 민화를 공부해 오신 전문가로서 우리 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한다.

성철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가슴을 친다”라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력으로 팝을 부르는 것보다 우리 가요를 부르는 것이 듣는 이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림도 마찬가지다.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한 민화가 오히려 예술적인 감동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민화만큼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예술도 드물다. 민화는 분명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장르이다. 이를 널리 알리거나 이를 토대로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다면, 다른 무엇보다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그림을 창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행・ 정리 임승현 기자

 2004년 민화조사차 일본 구라시키민예관를 찾은 정병모 교수

2004년 민화조사차 일본 구라시키민예관를 찾은 정병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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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콘텐츠는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 민화를 집대성한 단행본《한국의 채색화》출간

MM_SP_채색화이 책은 일찍이 “민화만이 세계시장에 먹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민화를 조사한 정병모 교수의 열정으로 기획되었다. 필자는 정 교수의 부인으로서 1992년 12월 중국의 민간연화를 함께 조사하러 간 적이 있다. 중국과 수교하기 바로 전이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겁 없이 중국 북경에 내려 20여 일간 중국의 연화를 조사하러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때를 계기로 정 교수는 우리나라 민화가 어느 나라 민화보다(주로 중국과 일본) 세계시장에서 큰 파급효과를 미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정 교수는 2010년부터 명품도록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은연중에 출판사를 운영하는 필자가 출간해주길 바랐지만 비싼 도록이 판매되기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제안하지 못했다. 당시 어려워진 회사 형편상 엄두도 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2013년 봄 우연히 민화작가 두 분과 차를 마시면서 민화명품도록 이야기를 꺼냈고, 그중 한 분이 투자 제안을 했다. 그분의 한마디에 이 책의 기획은 본격화되었다. 1권을 기획했던 것이 3권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한 분의 개인투자자가 또 나타났고, (재)가나문화재단에서 선뜻 책값을 선지불하는 식의 투자를 약속했다. 우리 회사의 마케팅팀은 도록에 클라우드펀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즉 민화작가들이 투자자가 되어 선투자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결국 최소한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그 배의 가치를 지니는 책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민화작가회와 전국 지역마다 터를 잡고 있는 민화작가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고(아니 정 교수를 믿고) 사전 예약을 해주었다. 그 결과 출간 전, 예약이 450건에 달했고, 책의 제작비는 전혀 염려하지 않고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정 교수는 그냥 도판수집과 논문의 방향성만 제시하면 되는데, 최고의 명품을 만들겠다는 고집(열정)으로 제작 과정에 개입해 사사건건 부딪쳤다. 정 교수는 정말 “슈퍼갑”이었다. 중요한 사항에서는 정 교수와 편집장, 디자이너 그리고 필자가 합의해서 결정을 내리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사항에 3사람이 동의하면, 나는 맞서 싸웠다. 바로 종이의 결정이고 표지에 대한 결정이다. 지금은 결정에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가지지 못한 자부심을 느낀다. 어떤 분야건 좋은 콘텐츠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려운 시기를 거쳐 출간한 이 책은 더욱 가치있는 작업이었다.
《한국의 채색화》는 여러 가지로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정병모 교수의 필생의 과제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살아생전 자신의 과제를 이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 세월을 민화에 미쳐있었던(?) 정 교수 개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는 민화계의 큰 업적이다. 좋은 명품을 모아놓았다는 점에서다. 이 아름다운 한국의 채색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모아놓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세 번째는 출판계의 향상된 기술이다. 이 책을 예약하기 전 많은 분이 일본의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를
생각하며 과연 그 정도 수준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다. 몇 해 전만 해도 도록은 수입지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책 시대가 도래한 때에 이러한 미술 도록이 이후에 또다시 출간될 수 있을까. 혹 종이시대의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최고를 지향해 만들었다. 이 책을 앱북으로도 기획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주는 아름다움은 인쇄물을 따라가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 도록을 통해 우리의 민화가 글로벌한 콘텐츠로 드라마, 음악에 이은 제3의 한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에 자포니카 선풍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현재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페루에서도 민화 체험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불황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좋은 콘텐츠를 만들게 된 것은 민화인의 열정과 열망덕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민화인의 열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애 Sni Factory 대표

 

 

SPECIAL FEATURE 민화民畵, 발화發花하다

(사)한국민화센터(이사장 정병모)에서 주최하는 <경주민화포럼2015>가 지난 3월 20, 21일
양일간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렸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포럼은 2013년 논의한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복기시켜 다시 포럼의 중심으로 삼았다. “같으면서 다른 세계, 궁중회화와 민화”라는 부제와 함께 열린 이번 포럼은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쟁, 궁중 채색화와 민화의 개념 구분, 우리 민화를 포함한 서민/민중들의 문화에 뿌리 박혀 있는 웃음의 미학, 민화에 대한 양식사적 접근 등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첫날 포럼에서, 첫 번째 토론자로 참여한 윤범모(가천대 교수)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7년 사용하면서 정리한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용어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길상화’를 민화를 대신할 용어로 제시하면서 좌중은 크게 술렁였다. 이후 “한국 웃음문화의 전통”을 발표한 조동일(서울대 명예교수)가 “민요, 민담과 함께 민화는 ‘민民’자 돌림 3형제이다. 민요나 민담이 ‘민’을 낮춰 부른다는 인식을 주지 않듯 민화라는 용어의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용어 문제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현재 전국 민화관련 인구는 약 1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종 교육기관을 통해 민화를 배우는 일반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민화를 배우고 그리는 많은 이들은 민화에 대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궁금증 또한 상당하다. 그 동안 한국미술사에서 민화에 대한 연구는 문인화에 비해 다소 평가절하 되어왔다. 미술사학계의 개념정의가 확립되기 이전에 일반인들이 역으로 상아탑에 질문을 던지고, 개념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포럼에서 못다한 논의는 포럼 첫날 밤 약 2시간의 ‘번개 토론’으로 이어갔다. 이 자리에는 안휘준(서울대 명예교수), 윤열수(가회박물관 관장), 윤범모(가천대 교수), 정병모(경주대 교수)(왼쪽 사진)를 포함한 민화 이론 및 작가 관계자 약 30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화의 개념정의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먼저 ‘민화’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자는 주장을 한 윤범모 교수는 “민화의 개념을 먼저 짚어야 한다며 개념이 변하면 용어도 변해야한다”며 “민화 연구에서 궁화와 민화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덧붙였다. 정병모 교수는 “현대민화의 개념을 포용할 수 있는 상위개념으로서의 용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최근 민화와 궁중화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채색화’를 내세워 도록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윤열수 관장은 “‘채색화’는 한국적인 용어가 아니라 어디에도 쓰일 수 있는 독창성이 없는 언어다. 하지만 ‘민화’는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경쟁력있는 용어다”라며, ‘민화’ 명칭 사용을 이어갈 것을 주장했다. 한편 안휘준 명예교수는 ‘서민화’ ‘위민화’ 혹은 ‘전승화’라는 다양한 용어를 제안했다. 민화는 우리의 전통미술을 계승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전승화’를 사용하면 민화를 떠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민화에 대해서도 조선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장르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화원화가 출신이거나 아마추어 화가들이 주변사람을 위해 그린 그림을 민화라고 볼 수 있다며 “어떤 용어든지 시대 변화에 따라 내용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포럼과 특별토론에 참여한 다수의 작가들은 주로 민화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민화라는 용어를 오랜 기간 사용해 왔기에 대중에게도 낯익고 오히려 반감도 없다는 것이다. ‘민화’에 담긴 계급요소나, 궁중회화와 민화의 모호한 구별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정리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서는 소재의 폭을 넓혀 창조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궁중회화와 민화의 구분 짓기를 꺼리는 경향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조선시대의 민화와 현대민화는 그 용어는 같으나 개념은 전혀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모아졌다. 민화는 궁중이 사라진 후, 궁중회화까지를 흡수했고 신분제가 사라진 이후 민화를 제작하고 향유하는 사람도 변화했다. 민화의 표현은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으나 오늘의 시대를 반영하는 미감과 독특한 창조성은 고전민화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요소다.
이날의 토론은 ‘민화’에 대한 개념정의와 그 장르의 분류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민화인구가 10만명에 육박하고 국제 미술사에서 한국미술의 한 장르로서 논의되려면 국내의 미술사적 개념정리는 선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작명’의 문제를 떠나서 그 개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학문적 접근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화시장을 확장시키고 그 기반을 튼실히 하기위해서 학계의 활발한 논의와 학문적 정의가 필수불가결하다. ●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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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엄재권 (4)“민화에 대한 인식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엄재권 (사)한국민화협회 회장

민화가 각광받고 있다.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민화는 접근성이 매우 높다. 일단 화실이 전국 각지에 있다. 전국 대학 부설기관 평생교육원만 40곳이 넘는다. 이 회원들이 대부분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기초적인 민화는 초보라도, 열흘 정도만 배우면 한 작품이 완성된다. 기존에 있는 초를 따서 그 위에 색을 칠하면 작품이 탄생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꾸준히 하다보면, 민화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한국민화협회 회원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민화협회 회원만 400명이 넘는다. 입회 절차가 까다로운 편이다. 민화협회 공모전 대상을 받으면 30점, 특선 15점, 입선 8점, 미술대전 대상 10점을 얻는다. 민화협회 공모전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30점을 채우면 입회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민화에 입문한 지 최소 5년 이상이 되어야 자격요건을 갖출 수 있다.

협회의 주요 활동과 교육 진행과정이 궁금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민화로는 우리 협회가 유일하다.
또 구청의 허가를 받은 평생교육원을 운영한다. 지도자과정, 신입생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이론과 실기를 두루 가르친다. 1기의 경우에는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론 강좌를 맡아서 진행했다.

협회 산하 기관 도화원은 어떤 곳인가.
협회에 속한 기관이지만 아직 그 형태가 애매하다. 교육기관은 아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논의할 생각이다. 공모전 대상 수상자가 도화원에 입회한다고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민 중이다.

민화협회 신임 회장으로서 협회를 이끌어갈 계획이 궁금하다.
회장의 임기는 2년, 한번 연임이 가능하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계획을 면밀히 짜서 실행해 나가겠다. 우선 한때 부는 바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질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첫째 목표다. 그래야 민화가 한 단계 더 도약 할 수 있다. 학회에서 세미나를 할 때, 몇몇 이론가만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민화에 관심 있는 모든 이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전국에 흩어진 협회들을 모아서 연계하려고 한다. 민화협회 외에도 민화전업작가회, 우리민화협회, 민화센터 등 다수의 민화관련 단체 및 기관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민화협회 회원과 겹친다.
임승현 기자

SPECIAL ARTIST 김주호

테라코타를 비롯해 나무와 돌, 그리고 단단한 철판에 이르기까지 조각가 김주호가 다루는 재료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재료가 무엇이든 그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은 초지일관 뚜렷하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찰과 사유로 포착한 세상의 표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김주호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작가정신과 표현방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김주호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말하는 조각들

성완경 인하대 명예교수

김주호 작품의 출발점은 ‘지금 여기’이다. 가까운 곳에 눈길을 주면 세상이 돋보기로 보듯 새삼스럽게 보인다. 거리의 삐까 번쩍 요란하고 누추한 간판들도 새롭게 보인다. 소통은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돋보인다는 것은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고 나와 상대방이 서로 궁합이 맞았을 때 가능하다. “내 삶에서 나에게 관심을 끌려는 어떤 것을 알아봐주는 것, 이것이 소통의 기본이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꼼꼼히 보는 것, 일상 속을 걸으며 끊임없이 찬탄하는 것, 기어코 무언가 찾아내 무릎을 치고 사랑하고야 마는 것. 어쩌면 이것이 그의 작업의 민중적 지평이자 발견자로서의 전위미학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막걸리엔 ‘생’자가 붙은 생막걸리가 대세인데 그 생막걸리병의 다양한 라벨들을 보며 그는 삶의 충동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배운다. 발견을 하고 철학을 한다. 대중적 삶의 지혜와 이름 없는 인생들의 에너지에 관해. 그것은 사랑이다. 그에게 소통이란 이처럼 사랑과 발견에 기초한 것이다. 항상 눈 맞추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김주호 작업의 출발이다. 그의 조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조각이기를 열망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말하는 조각이자 춤추는 조각, 사랑스럽게 몸을 뽐내는 조각, 타자의 시선을 받으며 행복을 뽐내는 신체들이다. 몸짓, 함박웃음 혹은 미소, 교환, 발화로서의 조형.
그의 조각 재료는 흙, 돌, 나무, 쇠, 발견된 오브제 등이다. 흙을 원통형으로 감아 쌓아 올린질구이(테라코타) 인물상들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이 시기에 통나무에 작업한 나무 조각들도 재료만 바뀌었지 기본적으로는 통 형태의 질구이 작업과 유사한 세계를 보여준다. 따뜻하고 밝고 해학에 넘치는, 삶의 다양한 표정들을 뿜어내는 작품들이다. 불규칙한 나뭇가지들을 자유롭게 이용한 최근의 ‘책조각’들은 더 날렵하고 더 언어적이다.
2012년 6월 관훈미술관과 나무화랑 개인전 때 나무화랑 쪽에 설치된 나무에 채색한 소품 조각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 조각들은 모두 책 모양으로 채색되고 글씨가 쓰여진 나무판자 위에 놓였는데 책 표지에 <그때 그 사람들-100년>, <너에게 침을 뱉어라>, <남북 왜 악수하기 힘들까>,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Folk Art in Korea>, <Sculptures from objects>, <Art in Nude> 같은 단어가 책 제목처럼(그리고 작품 제목처럼) 적혀 있는 작업이다. “책이 말을 한다/ 눈길을 끄는 표지/ 서서히 그들의/ 몸짓이 일어난다./ 손짓, 몸짓하며 나온다./ 광복 60년의 몸짓이/ Nude의 매혹적인 눈길도/ 책이 내 손길보다/ 먼저 와 있다.”(작가의 작업노트)
최근의 철판작업들은 드로잉 선을 따라 철판을 도려내어 그것들을 연결하고 구부려 공간 속에 펼치거나 세워놓은 작업인데 이 같은 발화의 새로운 실험을 보여준다.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전시광경. 앞쪽에 보이는 작품 (MDF에 에나멜페인트 2008)는 부천천만화박물관에서 열린 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만화가 윤승운의 캐릭터를 응용했다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사람사이> 전시광경. 앞쪽에 보이는 작품 <룰루 하하>(MDF에 에나멜페인트 2008)는 부천천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타임캡슐을 열다>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만화가 윤승운의 캐릭터를 응용했다

  64×21.5×16cm 혼합토(섭씨 1070도) 2015

<창문-2> 64×21.5×16cm 혼합토(섭씨 1070도) 2015

작가와 닮은 작품
김주호가 살고 있는 곳은 강화도다. 강화도에서도 아주 깊은 곳이다. 김주호는 강화도에 20년째 살고 있다. 강화도에서 지금은 퇴직한 직장(보성고등학교)이 있는 서울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출퇴근했다고 한다. 최근 김주호는 생애 첫 레지던시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했다.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겐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의 잘 갖추어진 철조작업장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유였다. 플라스마 용접 절단기, 크레인 등 장비가 잘 갖춰진 그곳에서 그는 봄과 여름 6개월 동안 땀 흘리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을 두 전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서울 북촌의 가회동 60, 다른 하나는 평창동의 김종영미술관이었다. 앞의 것은 개인전이지만 규모가 아주 조촐했고 뒤의 것은 5명을 초대한 기획전(<인간 그리고 실존전>)의 한 부분이지만 규모도 제법 컸고 작품수도 더 많았다. 작품은 모두 철판 용접 환조와 드로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드로잉은 빠르고, 날카롭고, 자유롭고, 도상학적으로 풍부하고 흥미로웠다. 철판조각은 바로 그 드로잉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발화하는 조각, 녹아내리며 가스 방울이 되어 떠오르는 발포제 약과도 같은, 혹은 만화의 말풍선 같은, 혹은 만화의 그림 글자나 동작선 같은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조각들이다. 그 속에는 만화가 있고 언어가 있고 기호가 있고 연극이 있고 퍼포먼스가 있고 몸짓이 있고 패션이 있다. 풍물놀이의 도리깨질이나 목구멍을 튀어나온 밥풀이나 (만화의) 말풍선 같은 것들이 턱턱 들어가 있는 듯한 조형들이다.
김주호는 발견하는 사람이다. 김주호의 발견은 대개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된다. 앞서 잠깐 얘기한, ‘생生’막걸리를 마시다가 ‘생生’자 들어간 막걸리가 많다는 걸 발견했다는 얘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 발견 후 2010년 봄부터 그는 생자 들어간 막걸리 통을 모았다. 국순당 생막걸리, 서울 生生막걸리, 生장수막걸리, 덕산 生막걸리강화, 쑥生막걸리, 생배다리막걸리 등…. 그러면서 김주호는 거기서 우리 시대의 맥을 읽을 수 있다는 발견을 한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생은 여러 분야에서 쓰여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자가 붙은 단어를 좀 더 나열해 보면, 생비지, 생고기, 생금(치약), 생생우동, 얼큰 생라면, 순한 생라면, 생칼국수, 생짜장면, 생, 생머리, 생방송, 생생 정보통, 생생도시…. 결국 그는 생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생자 바람이 막걸리에 집중되면서 더 확실히 맥을 잡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生을 이렇게저렇게 분석해보는 것은 작품 제작에 도움이 되어서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하다. “작가는 자기 나름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자기 주변에서 찾을 때 더 실감나는 작품이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가 찾는 것은 생생세상, 생생풍경이다. 일상 속 지금, 지금 여기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생생한 옷매무새, /마음껏 자랑하는 당당한 포즈, /길거리 여기저기 /사람이 아름답다 /꽃보다” 바로 이것이 생생풍경이다. 그의 중립적으로 품위 있고 우아하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질구이 인물상들이 뿜어내는 무척 섬세하고 편안하고 당대적인 아우라의 핵심이 이것이다. 흙의 터치, 사실과 과장, 포즈와 표정, 단순화, 장신구, 질구이의 질감을 관통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당하고 편안한 당대의 미학이다. 놀라운 성취이다. 목조와 석조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성취의 바탕에는 삶의 진실과 소통에 대한 그의 소박하고도 질긴 믿음과 추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어깨 두들기며 걱정 말라는 든든한 이웃’을, ‘(그들과) 함께 하는 흐뭇함’과 ‘따스한 이야기’를, 그리고 ‘어제가 좋아 보이고 내일이 괜찮을 것 같은 지금 여기’를 사랑하는 작가이며 답답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그리고 전통적 삶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이웃이다. 본질적으로 그의 작업은 웃음과 사랑의 회복을 선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알아보며 “여기요!”라고 외칠 때 인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작가. 그것이 김주호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김주호는 5·18 때 헌병대가 쓰던 건물에서 열린, 필자가 기획한 프로젝트3 <집행유예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사병휴게실에 천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인물상 5점을 자유롭게 배치하여 숨 막힐 듯 음울한 이 건물에 유머러스한 공간을 연출했다. 당시 이 작품 제작을 위한 현장 설명회에 참석하고 나서 그가 쓴 ‘친절하고 자세한 답사일기’에 이런 대목이 적혀 있다.
“자유관의 다큐감상. 5·18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 그 수뇌들. 모두 지금은 대접 받으며 잘살고 있다. 달라진 것 없잖아. 오, 이 깨끗한 역사. 하얀 브로크 벽면. 누군가 낙서를 할 만한 브로크 벽면인데도, 저 흰 칸. 칸. 칸. 아무도 손대지 않은 관심 밖. 그 옆 골프장에는 평일인데도 고급 승용차가 꽉 찬 것과 참 대조적이군. 깨끗한, 조용한 민주화의 현장. 권위와 폭력과 위선과 망각의 건축물을….조롱하자! 자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얼마 전 내가 본, 김종영미술관의 <인간과 실존전>은 그때로부터 11년 후에 열린 전시인데 이 전시 카탈로그에 김주호는 <나는 본다>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말’을 기고했다. “외국 관광객이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판문점이라 한다. 그럴 테지 선 그어놓고 넘어갔다 하면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게 희한하게 보일 게다. 세계가 하나다 하고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데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런 구경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밑바탕에는 우리의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분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한다. ‘… 아 글쎄 통 무슨 당인가 하는 거 뭐야 이 새끼 있잖아. 무기까지 있다 하잖아. 그 새끼 같은 놈이 아직 …’
재판도 받기 전에 국민재판에서 판결이 났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다. 우리의 아픈 현실이 내 눈에 차츰 다가온다.” 김주호의 발견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에만 머물지 않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단 현실의 모순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편함이나 낯섦을 우리 모두 비껴갈 수 없듯이 그의 시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김주호의 집에 갔다. 그의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밥상은 그와 그의 아내의 인상만큼이나 정갈했다. 동네사람들하고 뚝딱뚝딱 지었다는 그의 집은 2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 겸 지하 공간이 그의 작업장이고 그 위층이 살림집이다. 마당 한켠에는 흡사 농가처럼 허름한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는 그곳에서도 작업을 하는데 겨울에는 주로 별채로 지은 작업장 안에서 한다고 한다. 살림집 아래층이나 별채 작업장 건물이나 모두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두 공간 모두 한 개인의 오랜 작업과 시간이 숨 쉬는, 작은 신전이나 성소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작품은 마당에도 있는데, 그것들은 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소박하게, 또는 태연하게 비바람과 햇빛에 온몸을 내놓고 있다.
김주호는 조용한 사람이다. 그는 욕심이 없고 성의를 다해 사람을 대하고 풍족하지 않은 삶이지만 창호지의 여백처럼 정갈한 여유가 몸에 밴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입가의 밥풀 같은 미소가 절로 나오게 하는 작품들은 바로 그런 ‘정갈한 여유’에서 나오는 유머인지도 모르겠다. 바쁘거나 강파른 성정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유머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호호호, 푸하하, 훗후후, 낄낄낄, 룰라하하, 갈갈갈 거리며 말을 건다. 그의 인물들은 정답다. 김주호의 유머는 혼자 즐기는 유머가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의 유머다. 그의 다양하고 방대한 테라코타 작업들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의 표정과 몸짓이 바로 그런 종류의 유머인 셈이다. 그것들은 드로잉 철조에서 다시 새로운 표정을, 좀 더 낄낄대고 풍자적이고 날카로운 유머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김주호는 ‘지금’, ‘바로 여기’의 작가다. 김주호야말로 그 자신이 생막걸리이고 생생작가다. ●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앞쪽) 스틸 패널116.5×39×8cm 2013,  종이에 아크릴 150×300cm 2013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인간 그리고 실존> 전시광경. <휘날리다>(앞쪽) 스틸 패널116.5×39×8cm 2013, <금수강산> 종이에 아크릴 150×300cm 2013

* 이 글은 <2013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및 전시도록에 실린 필자의 글을 재 수록한 것입니다.

 

ARTIST REVIEW 김종인

바우하우스 교장을 지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 … 예술가와 공예가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예술가는 고귀한 공예가이다…”라고 말했다. 작가 김종인은 도예가 혹은 공예가라는 제한한 타이틀로 규정지울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실용성과 조형성, 그리고 실험성과 예술성을 한 몸에 지닌 확장된 개념의 공예조형예술품이기 때문이다. 공예(가) 본연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며 일상의 삶과 깊이 관계 맺고 있는 김종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살아 있는 도자기, 생각하는 작가

조혜영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역사적으로 또는 미술사조적으로 볼 때 미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성격의 작가들이 존재해왔다. 어떤 작가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작품만 열심히 했다고 한다면, 의식과 사상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흐름을 선동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작가 김종인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단지 작품만이 아닌 도자기분야와 공예분야 안에서 시대와 접목되는 새로운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김종인은 자신을 포함해 한국의 여성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김종인은 여성작가로만 구성된 도예그룹 ‘흙의 시나위’를 결성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위치-정신 등에 대한 고민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1990년대 후부터는 한국의 현대공예를 대중에게 알리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마니미니재미 가게”이다. 마니미니재미는 ‘많이, 작게, 재미있게’를 뜻한다. 그런가 하면 김종인은 이 시기에 이미 인터넷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설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연을 통해 전파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공예를 결합시켜 활성화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2000년대에는 본인이 본보기가 되어 도자의 가치 제고 및 활용 방안에 대해 고민했고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후학들에게 현실적으로 생업에 필요한 교육을 해왔다. “세라믹 클라스Ceramic Class”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으며 전시 현장에서도 수업을 진행하는 등 살아있는 미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제자들과 작가들에게 믿음을 주고 영향을 주면서 지금은 훌륭한 멘토로서 김종인만의 팔로잉following이 형성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에 선보인 인체 모티프 작품

2012년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세라믹 클라스Ⅱ>에 선보인 인체 모티프 작품

컵이나 접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선보인 2013년 아원갤러리 개인전 광경

컵이나 접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선보인 2013년 아원갤러리 개인전 광경

김종인을 생각하다
김종인하면 우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독특한 모양의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취미이며 짧은 머리와 헐렁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된 의상의 코디로 다소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외모는 작가로 살아 온 그녀의 경험들을 대변해준다. 필자는 1990년 중반 당시 최고의 한국 현대도자 행사 중 하나로 여겨졌던 <진로국제도예지명전>을 통해 김종인을 처음 만났다. 그때의 인상적인 모습이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우선 김종인은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느 한 부분도 소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작업에 대한 열정, 후학들에 대한 애정, 한국 미술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 등 혼신을 다해 매일매일 노력한다. 그런 모습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인내와 노력의 시간들이 지지대처럼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한국의 현대도예는 조형적 표현에 집중했기 때문에 현대도예 작가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모두 조형적 작업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대도예 작가란 대학에서 도자전공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의 피터 볼커스Peter Voulkos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조형에 대한 추상적 표현 즉 쓰임이나 기능적인 도자가 아닌 흙이라는 재료적 물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집중된 다양한 표현들이 1990년대 한국에서 시도되었다. 당시 한국의 현대도예는 미국의 로버트 아너슨Robert Arneson, 리처드 쇼Richard Shaw, 커크 맹거스Kirk Mangus와 같은 작가들의 추상 표현적 도예에 영향을 받았다. 도자를 공부하던 많은 학생이 조형적 도자의 본고장인 미국 서부의 대학들로 유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흐름 안에서 김종인은 미국을 선택하기 보다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영국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도자분야의 작가가 조형적 표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만큼 흙이라는 매체로 거대한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 1990년대 영국 조형적 도자분야의 대표 격인 질 크롤리Jill Crowley, 모 접Mo Jupp, 파멜라 룽Pamela Leung, 마틴 스미스Martin Smith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김종인은 당시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공부했다. 매체의 다양성 즉 흙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재료를 혼합해서 사용하게 된 김종인의 작품적인 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골드스미스 대학은 미술분야에 자유롭고 열린 교육을 하기로 유명하다. 하고자 하는 개념과 생각만 뚜렷하면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을 제재하지 않는 미술교육으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스티브 매퀸Steve McQueen과 같은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따라서 김종인의 많은 실험은 여기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골드스미스에서 공부를 마친 후 김종인은 도자로 잘 알려진 영국 웨일스 카디프 미술대학교Cardiff College of Art and Design,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이수했다. 지금은 카디프 미술대학교 하면 도자분야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한국인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종인은 본인의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여성 인체 작업을 주로 했으며 전시를 통해 선보였다. 설치미술 개념으로 여성의 인체와 관련된 사물found objects을 특정 공간에 배치하면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여성성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같은 주제로 여러 번 전시하면서 생각이 정리 된 듯하다. 실제보다 더 큰 사이즈의 여성 인체를 제작하여 도자 고유의 장식기법인 투각기법으로 표면을 장식하기도 하고, 인체를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 흙을 사용했으나 마치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금속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작품은 마치 태고의 원형을 간직한 아프리카의 나무 조각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체 작업을 하던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에서 본인의 가족사를 보여주는 설치 전시도 기획한 바가 있다. 사진과 다양한 사물 그리고 김종인 특유의 인체형상들로 전시가 이루어졌다.
그 외에 김종인은 실용성을 기반으로 하여 물레고 용기 형태들을 제작했다. 푸드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해 식기세트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당시 MBC 드라마 <궁>의 소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조형적인 작업보다는 다시 실용적인 도자기로 돌아가는 흐름에서 맞추어 김종인은 갤러리 현대, 목금토木金土갤러리 등에서 실용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김종인은 색이 짙은 점토를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붉은 점토를 좋아한다. 발색이 효과적이어서 표면 장식을 하기에 적절한 점토이다. 영국에서 배운 색 사용 기법을 한국의 다양한 장식 기법에 접목시켜 화려하고 따듯한 느낌의 장식으로 애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최근에는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사물found objects로 해학적인 얼굴표정과 인체를 만들어 군집을 이룬 설치작업을 한다. 마치 키스 해링Keith Haring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그라피티graffiti 작업과 유사한 표현을 입체적으로 시도한다. 미술 장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대에 김종인은 도예 또는 공예 작가로 정의 내리기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는 작가로 볼 수가 있다.
공예페어-마켓은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접할수 있는 행사이지만 1990년대 후 2000년대 초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김종인은 공예를 활성화하는 시도로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진행했는데 처음에는 전시 개념으로 작게 시작한 것이 점차 규모를 키우고 공예분야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마켓 개념으로 브랜드화되었다. 이렇듯 현실적 접목을 시도하는 김종인은 공예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생업이 중요한 젊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돌파구를 보여주었다.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기획할 때마다 참여 인원이 증가하고 판매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지금은 홍익대 주변이나 대학로 등 여러 장소에서 크고 작은 공예페어가 열리지만 10년 전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 현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선보이기 위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습이 기대된다.
도자기를 판매하고 상품화하는 작업은 작가들에게는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작가 김종인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작업에서 늘 현실과의 접목을 시도한다. 얼마 전 갤러리 세인에서 개최된 기획전시에는 ‘병Bottles’의 형태를 주제로 하여 화려하고 따듯한 장식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였다. 상업성과 작품성이 물과 기름처럼 나눠지는 것이 아닌 시대의 흐름 또한 녹여낸 조화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작가 김종인의 작품에서는 늘 신선한 시도와 변화를 엿볼 수 있어,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한국의 도자기 분야를 포함한 예술분야를 보다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시도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김종인은 만들고 가르치고 느끼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

2015년 2월 27일부터 3월 13일까지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개인전 에 선보인 ‘병(Bottle)’ 시리즈 전시광경

2015년 2월 27일부터 3월 13일까지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개인전 <세라믹 클라스Ⅴ>에 선보인 ‘병(Bottle)’ 시리즈 전시광경

김 종 인 Kim Jongin
1957년 태어났다. 서울여자대학교 공예학과와 University of London, Goldsmiths’ College, Postgraduate Diploma in Ceramics, South Glamorgan Institute Higher Education, MA in Ceramics를 졸업했다. 1990년 공간화랑에서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부터 <마니미니재미가게>를 기획했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ARTIST REVIEW 박미화

2013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2013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작가 박미화는 자신의 작품을 ‘마음의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내 작업에서는 다양한 물질(재료)이 등장한다. 흙, 모래, 시멘트, 종이, 스티로폼, 나무 등. 각 재료는 그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다른 목소리들은 결국 한 가지 소리를 내게 된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다. 따라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늘 한 가지 흐름을 가져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물질들이 내 마음과 만났을 때 내 작업은 관념이 아닌 살아있는 증거로 남게 된다. 다만 ‘물질’과 ‘관념’의 유혹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고, 내가 표현해야할 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질과 정신이 어우러진 박미화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물질에 새긴 마음의 기록

박영택 경기대 교수

흙은 질료덩어리다. 그것은 본래의 형체가 없다. 물의 농도에 따라 질퍽이고 물컹하다가도 단단해지는가 하면 말라버리며 균열을 일으키다 먼지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을 받으면 더없이 단단해진다. 물과 불, 공기의 양에 따라 흙은 자유자재로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흙은 가변성이자 본래의 확고한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물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여백 같은 물질이고 구멍과도 같다. 고형과 액체 사이에서 유동하는 물질이 흙이다. 흙의 이 수동성은 외부 환경을 자기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수시로 몸을 바꾸는 넓고 깊은 포용성과 맞닿아 있다. 가연성을 지니며 더없이 활성적인 물질인 흙은 미술에서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재료이다. 그것은 보는 이를 상상하게 하고 그 손길과 육신의 노동을 받아들이며 원하는 형상으로 마음껏 변할 순종의 마음으로 편하게 자리한다. 흙을 다루는 이들은 미지의 표정으로 질펀한 이 촉각적인 물질을 주무르고 쳐대고 굳혀서 원하는 상 하나를 만들어가는 체험, 신비스러운 유희에 빠진 이들이다. 그 체험은 흙으로부터 나와 그와는 전혀 다른 물질로 환생하는 기이한 경험이자 세계의 기원을 이룬 창조주의 능력에 근접한 매혹적인 행위, 놀이이다.

소녀상__조합토1220도산화소

<소녀상>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5×21×14cm 2015

흙과 불 그리고 형상
박미화의 작업은 흙(물질)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흙은 모든 상념과 상상력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로부터 발아한 상을 받아내는 한편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작가는 흙에 숨을 불어넣고 자신의 온기를 밀어넣어 저 흙과 자신의 마음과 정신(관념)이 맞닿은 접점에서 파생한 결과물을 조심스레 건져 올린다. 그것은 작가의 계획된 의도나 목적에 부합하기보다는 흙 자체의 본성과 작가 자신의 성향이 손상되지 않는 지점에서 밀려나온 것들이다. 흙으로부터 출발하는 박미화의 작업은 흙의 본성과 느낌, 그 상태를 가능한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발아되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흙과 함께 다루어지는 모래, 시멘트, 종이, 스티로폼, 나무 등의 물질 또한 동일하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여러 물질을 매만지며 그 물질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밀어넣는다. 작업이란 결국 작가의 몸과 마음이 또 다른 물질에 기생해 나가는 일이고, 그 재료들을 자신만의 체온, 마음의 결, 음성을 드러내는 일이자 자신의 몸을 갖고 물질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박한 물질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매만져 내놓는다. 희한하게도 그 모든 것은 흙의 맛을 물씬 풍기며 아득한 시간의 자취와 생명체에 대한 경의와 예의로 가득하다. 어떤 물질을 다루든 결국 흙의 색채, 질감, 맛이 나게 다룬다. 자신만의 감각, 색깔,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전시장 전체로 확산되는 작품 설치에서도 엿보인다. 역시 공간을 자신의 흐름으로 조율하고 있다. 이처럼 물질을 생명체처럼 다루며 그 위에 생명의 흔적, 기운을 절박하게 올려놓고자 하는 작가는 자신의 육체와 기억에 따라, 육체의 기억에 따라 그 물질을 인식한다. 작가는 의식하는 사람이자 물질로 사유하는 이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생명에 대한 예의”(작가노트)다. 삶에서 마주한 다양한 사연, 타인의 상황, 비극과 참상들 그리고 책(문장)과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 작업의 단서로 풀려나온다.
박미화의 작업은 채색 테라코타가 주가 된다. 그 외에 판(나무판, 종이, 스티로폼 등)에 채색을 입히고 긁고 파내는 기법을 통한 회화작업이 함께 한다. 근작에는 나무와 풀, 야생화, 손과 발, 사람의 얼굴, 숫자와 문자들이 오래된 느낌을 주는 물질의 표면에 새겨져있다. 사라진 생명체들, 세월호의 비극이 참혹하게 새겨져 있다. 소멸된 생명체에 바치는 진혼의 성격이 강한 작업이 주를 이룬다. 물질들이 작가의 심정을 반영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변신을 거듭한다. 한편 테라코타작업은 조합토로 성형된 형태에 화장토를 바르고 초벌한 후 다시 화장토를 발라 섭씨 1,200도에서 소성한 것이다. 뜨거운 불을 맞아 성형된 흙은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한다. 온기를 품은 흙이 사람과 동물, 식물의 형상이 되고 그 무엇인가를 연상시키는 오브제가 되었다. 색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을 비벼 넣기 위해, 상처를 올려놓기 위해 화장토를 바르고 소성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으며 착색한 나무나 스티로폼의 표면에는 수없이 칼로 긁고 파내는 과정을 올려놓았다. 모두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지루하고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작업을 자신의 의도나 목적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재료 자체의 발언을 존중하고 이념이나 논리, 개념을 앞세우기보다는 재료와 자신이 만나 불가피하게 이루는 것을 용인해내고자 한다. 작업들은 암시적이며 지워진 듯, 미완성인 듯 혹은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지워진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으로 가득하다. 모든 작업은 흙 자체가 지닌(혹은 흙의 느낌으로 가득한 맛) 소박하고 무심하게 주무르고 구워낸 흔적을 지문처럼 지녔다. 흙과 흙 이외의 물질을 다룬 입체나 부조, 평면작업 모두가 회화적인 분위기와 오래된 흔적을 두텁게 지니고 있다. 표면의 균열과 탈색되거나 희박한 색채로 인한 색감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드리워준다. 무심한 제스처와 자연 그대로의 물성을 끌어내면서 수수께끼 같은 형상과 표정, 신비스러운 색채 역시 가득 안겨주고 있다. 흡사 오래된 흙벽에 난 알 수 없는 스크래치나 부분적으로 박락된 벽면의 느낌이 나기도 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도 풍겨 나온다.
특별한 목적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상, 원형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호출해내고 이를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빚고 불에 굽거나 표면 처리를 해서 가능한 한 오랜 시간, 낡고 퇴락하고 박락된 느낌으로 응고시킨 이미지, 물질들이다. 그것은 수백 년, 수천 년 땅속에 있다. 이제 갓 나와 핼쑥해진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자신의 생애를 이루었던 시간의 결과 자기 몸이 기억해내는 모든 것을 호명해 이를 흙과 불로 이겨 만든 것들이다. 개별적인 형상들, 흙으로 구워낸 오브제들은 마치 특정 텍스트의 행간을 암시하는 낱말이나 부호들처럼 전시장 공간에 흩어져 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거나 화산재를 맞거나 깊은 지층 속에 박혀있던 것들이 출토되어 햇살 아래 파리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특정한 성소에서 나름의 기능을 했던 이미지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 공간을 추억하며 졸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쌓여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날의 심상心象에 따라 흙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다.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흙 위에 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리고 나무칼로 흙을 잘라낸다. 수수께끼 가득한, 나도 알 수 없는 눈빛들,,.어설프고 모호한 상,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재료와 기법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불러올 수 있다면…” 이라고 말한다.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3×19×11cm 2005

<서있는 어머니>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3×19×11cm 2005

박미화의 작업은 지워지고 희박해진,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고 뭉개진 얼굴과 몸체로 이루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힘과 아득한 사연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 존재의 생애를 다만 희뿌옇게 어른거리게 해준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하다. 소멸과 부재의 자리를 아련하게 추억하게 해준다. 따라서 그가 만든 이 희박해진 상, 불가해한 표면은 결정적인 볼거리를 망막에 안기는 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심안으로 보아야 하는 상이고 희미하고 사라져버리기 직전의 추억의 이미지들이다. 무엇인가의 잔해이고 죽은 것들이고 망실된 것들이자 도저히 잡히지 않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은 흙이 섭씨 1,200도의 불을 맞은 자취이자 녹슬고 희미해지는 절묘한 색채를 피처럼, 녹처럼 뒤집어쓴 것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또한 시간의 입김 아래 허물어지는 벽면이자 사물의 피부들이다. 그 위에 얹힌 흔적, 상처는 주술적이며 신비스러운 영감으로 가득하다. 명시성과 구체성에서 한 발짝 물러난 얼굴이고 몸이다. 머지않아 사라질 얼굴이고 몸들이다. 겨우 끄집어낸 형상들이고 마지못해 드러난 잔해들이다. 기억과 추억 속에서, 상처 속에 나온 것들은 모두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련하다. 암시적인 덩어리, 모호한 상을 통해 보는 이들은 상상력을 증폭하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부분을 겹쳐놓게 된다. 사실 미술에서 완성이란 개념은 무의미하다. 완성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흙 자체를 무심하게 다루고 불에 구워내 인간의 손길이 깃든 인공의 것인지 혹은 돌이나 나무 둥치 그대로인지 구분이 안가는 지극히 무심한 작업들이다. 작가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없고, 자연과 인공의 경계도 지우고 전통과 현대의 갈등도 없고 죽음과 삶의 가늠, 혹은 물질과 마음의 분리도 더 이상 무의미한, 완성과 미완성을 넘어 자리하는 영속성, 신비한 종교성, 유한한 생애를 초월하는, 아니 포월하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아우라) 하나를 불멸로 새겨놓고자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이 짓는 유일한 표정이자 진실과도 같이 다가온다. ●

박 미 화 Park Mihwa
1957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공예전공)과 미국 필라델피아 University City Art League, 미국 템플대학교 타일러 미술대학원에서 도자조각을 졸업했다. 1989년 미국 필라델피아 펜로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2015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인사동 갤러리3에서 13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왼쪽)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54.5cm(지름) 2014 (오른쪽) 골판지 위에 목탄 60×50cm2014

<꽃을 바치다>(왼쪽)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54.5cm(지름) 2014 <선인장>(오른쪽) 골판지 위에 목탄 60×50cm2014

 

EXHIBITION TOPIC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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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 사부 <댐의 그림자>(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46×123cm 2008 ⓒSerban Savu, Courtesy David Nolan Gallery, New York (위)세르반 사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캔버스에 유채 135×180cm 2011 ⓒSerban Savu, Courtesy David Nolan Gallery, New York Serban%20Savu_The%20Card%20Players.jpg

답이 없는 질문이 있다. “회화란 무엇인가?”
역시 그런 질문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답을 찾는 과정에 있음을 증언하는 것일지 모른다.
3월 19일부터 6월 7일까지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는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전>도 그러한 부류의 질문에 다름 아니다. 국내외 작가 12명의 작품 35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기획된 전시다. ‘회화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회화의 기원’으로 보는 역설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다수의 중심이 넘실대는 그림

이선영 미술비평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 자극적인 표현에 탐닉하는 이들은 ‘OO는 죽었다’는 식의 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 그렇게 선정적이고 요란하게 종언이 고해지는 대표적 항목으로 신, 인간, 역사, 모더니즘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회화 역시 이 대열의 단골메뉴에 끼어든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끝은 나지 않았고, 종언의 역사만 수백 년 이어가게 생겼다. 하기야 ‘내 그림이 마지막 그림일 것이다’라는 정도의 야심도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도 싱거운 일이다. 마지막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목 끌기에 불과한 사이비 청산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명확한 답이 없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물음은 마치 ‘OO란 무엇인가’로 요약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질문—논리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답이 없는 우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계속 그리면서 또는 쓰면서 답을 찾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다. 만약에 결정적인 대답이 있다면 회화는 정말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제의나 종교로부터 자율화되던 순간부터, 사진이나 영화 같은 다른 경쟁적인 시각매체가 부상한 이후부터 회화의 종언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각 분야의 자율성이 확립되던 시기에, 즉 이미지의 오랜 역사 중 결정적 국면에 해당되는 순수예술의 탄생 시기에 회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자의식적으로 묻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종언의 가능성 역시 떠올랐을 것이다. 회화의 종언은 근대에 탄생한 회화의 몸체에 속해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회화가 죽은 것 같지는 않다. 이전시대와 달리 이미지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수많은 복제매체가 편재하며, 장르 구별이 와해된 지금도 가장 많은 미술인이 하고 있으며, 대중이 미술에 대해 가지는 대표 이미지 역시 그림이다. 공정한 눈으로 돌아보면, 재능 있는 수많은 화가가 매진하고 있는 이 오랜 역사의 예술이 가지는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회화의 건재를 알리는 중간점검 식의 전시가 열리곤 한다.
플라토에서 열린 <그림/그림자전> 역시 왜 회화인가 자문하는 맥락이지만, 그림의 기원을 그림자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현대회화의 특징을 가늠해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주류였던 창이나 거울로서의 비유를 넘어서, 비주류의 역사로 그림을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실물이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선을 베낀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림자 그림은 실물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림과 실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주술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경향은 종교분야에서 유서가 깊다. 저자들에 따르면 주술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림이 실물을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대에 이러한 신화를 처음 기록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는 그림자 그림이 떠나갈 애인을 기념하기 위해,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 구실을 했다고 전한다.

빌헤름 사스날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09 ⓒWilhelm Sasnal,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빌헤름 사스날 <무제(캐스퍼와 앙카)>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09
ⓒWilhelm Sasnal,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백현진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72×230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백현진 <평상심>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72×230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비주류 역사로서의 그림
같은 기원을 공유하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빅토르 스토이치타)도 거울과 대조되는 그림자의 속성을 강조한다. 타자에게 속해있으며 타자를 닮은 그림자 그림은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알린다.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재현은 그림자의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 이상은 아니었다. 그림자로서의 그림은 원본/복제에 근거한 이원론적 사유가 아니라, 차이와 반복의 유희에 의한 허상simulacres에 속한다. 모상이 아닌 허상으로서의 속성이, 그림자/그림의 신화와 현대회화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허상은 무한히 반복되는 사물들의 순환을 보여주며, 이 반복은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두뇌기관의 한 연장으로서의 시각이 체계적인 광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며 이상적인 원형idea의 재현으로 귀결된다면, 그림자 그림은 우연하고 다양한 것이 생성되는 바탕의 자유를 선포한다. 그래서 그림자 그림은 촉각적이다. 이러한 촉각적 시선에 눈이 있다면 뇌의 말단이 아니라 손의 끝에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연인을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그림자 그림은 이성적인 시선의 냉정한 거리감이 아니라, 전신의 피부에 와 닿는 끈적끈적한 것이며 몸과 무의식에 호소한다. 한국을 포함해 영국, 미국, 중국,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물감의 물성과 붓질이 직접 드러나는 회화적painterly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조세핀 할보슨의 화면은 공사장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널빤지 같은 거친 모양새로, 사물과 물감의 물성을 하나로 수렴한다. 케이티 모란의 작은 작품들은 예측 불가능한 기후적 현상과 폭풍같이 몰아치는 붓질을 하나로 만든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모호한 것들을 통해 재현의 투명성에서 그리기의 불투명성으로 이동한다. 어둡고 칙칙하며 두꺼운 화면을 보여주는 질리언 카네기는 무대의 커튼으로 시작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오마주하면서 재현주의를 끝장내려는 의도에 동참한다. 이곳과 저곳 사이를 구별하는 무대적 환영의 거리감은 질척거리는 회화의 대지로 재탄생했다.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보여주는 빌헬름 사스날의 작품에서는 반영된 세계가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역전이 일어난다. 회화는 사진을 포함한 다른 매체의 경험을 종합할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순간 지나가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박진아와 셰르반 사부, 보도사진에서 소재를 취한 리송송李松松의 작품에는 사진적 시각이 있다. 사진과 그림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지표index적 특성을 지적한다. 플리니우스는 그림자를 사람의 흔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 역시 도상적 유사물이자 지표로 여겨진다. 다수의 스냅샷을 한 화면에 결합시키는 박진아, 흐릿한 역사의 기억을 불러내는 셰르반 사부와 리송송의 작품에는 잠재적인 혹은 명시적인 다수의 틈이 있다. 직선적 전망이 아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곳에서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위에 있는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균열과 간극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생성된다. 빛을 모범으로 하는 계몽적 의식의 세계와 달리, 그림자의 세계는 무의식적이다.
이 의식 하부의 불연속적인 세계에 출몰하는 인물들은 대개 낯선 타자들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백현진의 그림들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터치로 조증과 우울증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무의식적 흐름을 보여준다. 데이나 슈츠의 <싱어 송 라이터>는 입체파적으로 조각난 파편으로 활달한 인물을 구축한다. 브라이언 캘빈의 팝적인 초상화는 현실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며 그리기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소수자 또한 타자의 형상을 취한다. 헤르난 바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흑인,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전형적인 초상화 구도에 흑인들을 집어넣은 리넷 이아돔-보아케의 작품엔 작가의 자의식이 투사된다. 그들의 작품은 주류 사회에 의해서 그림자로 취급받는 성적, 인종적 소수자나 아프리카계 영국 여성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정글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촉각적 우주 속 인물(동시에 ‘괴물’)들은 하나의 태양만이 빛나는 지배적 질서에 포착되지 않으려 한다.●

박진아 (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0×182cm 2015   캔버스에 유채 135×183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박진아 <여름 촬영>(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0×182cm 2015
<수평재기> 캔버스에 유채 135×183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헤르난 바스  린넨에 아크릴 182.9×152.4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헤르난 바스 <달빛 정원의 알비노> 린넨에 아크릴 182.9×152.4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EXHIBITION FOCUS BILL VIOLA

시간을 물질적 경험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독보적인 영상세계를 구축한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대규모 개인전(3.5~5.3)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세간의 주목과 동시에 논쟁적인 이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빌 비올라가 지속적으로 보여준 영적세계, 종교적인 상징성과 비디오 미학의 관계 설정에 관한 것이다. 빌 비올라의 작업세계를 조명한 필자 두 명의 글을 통해 이번 전시를 둘러싼 비평적 관점을 주목해본다.

비디오가 사라진 상징과 은유에 대한 경계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국제갤러리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은 매 번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시간을 비디오의 미적 질료로 삼아 삶과 죽음, 영혼과 자연에 대한 초월적 스펙터클을 주조하고 변주하는 그의 작품들은 국내외의 일반 관람객과 주류 언론의 취향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에 호응하듯 이 전시를 소개하는 주류 언론의 기사들은 “고통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 선보여”(《조선일보》 허윤희), “뭉클한 성화를 보는 느낌”(《한겨레》 노형석),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어울리는 전시”(《중앙일보》 문소영) 같은 문구들을 부각시켰다(물론 이 문구들 중 어떤 것들은 비올라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 매체의 물질성과 기법에 대한 탐구와 예술에서의 성찰적 시선을 중요시하는 비평가와 저널들은 비올라의 최근 작품들의 형식과 미적 체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옥토버》의 한 대담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비올라의 작품이 유도하는 경험을 “강렬한 미디어 몰입immersion을 통한 영적 직접성immediacy의 경험이자 마법적 신비주의bewitched mysticism”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인 <수난Passions>, <사랑과 죽음: 트리스탄 프로젝트LOVE/DEATH: The Tristan Project>, <해변 없는 바다Ocean without a Shore> 연작을 망라하는 이 작업들은 포스터의 비판을 어느 정도 확증해주는 듯하다. 이 연작들에서 비올라는 필름과 고화질high-definition 비디오에 힘입어 회화적 도상성과 영화적 생생함을 특징으로 하는 환영적이고 몰입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 이미지들은 인간의 감정과 고통, 영적 모험과 같은 친숙한 종교적 모티프를 구현하는 데 충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세 번째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들은 어떤가.
이번에 소개된 7편의 작품 대부분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제작된 것이지만 지난 2008년 같은 갤러리에서 개최된 두 번째 개인전 작품들(즉 <트리스탄 프로젝트>, <해변 없는 바다> 연작에 속한 작품들)의 형식과 테마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어머니와 아들이 사막을 걷는 모습을 담은 <조상들Ancestors> (2012)과 황야에서 각자 다른 길을 가던 두 여자의 만남을 보여주는 <조우The Encounter>(2012)를 비롯한 3편의 무성 작품은 ‘트리스탄 프로젝트’의 한 작품인 <밤으로의 여로Passage into Night>(2006)와 동일한 공식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지랑이 피어오른 풍경을 가로질러 조금씩 화면을 향해 다가온다.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이행, 탄생과 죽음, 이승과 저승, 무와 유, 현실과 기억의 문턱을 체험하게끔 하는 이러한 도식은 비올라의 대표적 모티프인 물과 불을 관통하는 작품들에서 반복된다. 검은색을 비롯한 여러 색깔의 물을 뒤집어쓰는 남자의 모습을 느린 역재생reverse play으로 장대하게 보여주는 <도치된 탄생>(2014), 밧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남자가 물벼락을 맞으며 정지하고 승천하는 모습을 담아낸 <물의 순교자>(2014)는 <해변 없는 바다> 연작을 이루었던 “물의 벽을 통과하면서 가시화되고 사라지는 인간 존재들”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이 작업들, 나아가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은 포스터가 말하는 “마법적 신비주의”의 결과인가? 포스터에 따르면 비올라의 작품들은 오늘날 미디어문화의 부정적 징후들인 가상화와 비물질화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장치 자체에 대한 의미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퇴행적이다. 나는 이 비판이 공간과 장치의 반영적 탐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점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관람객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중세 성화聖畵와 같은 아우라를 느끼며 관조한다. 전통적인 회화성에 호응하는 듯한 이러한 관람 태도에는 작품의 공간과 장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비올라의 작업이 비디오 이미지를 ‘비물질화’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을 명백한 물질로 경험한다”는 비올라의 말은 그의 1970년대 작업부터 견지된 원칙이었다. 현실은 물론 필름으로도 불가능한 시간성인 시간의 미묘한 감속과 역행은 비올라의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의 핵심이다. 이 경험은 비디오의 기술적 특정성들(전자적 신호의 흐름으로 좌우되는 비디오 이미지의 탄력성, 필름보다 자유로운 시간의 감속과 가속, 고화질 비디오로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이고 영화적인 시각성)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는 비디오의 물질성을 직접적이거나 왜곡된 모습으로 노출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고, 물질성 그 자체와는 다른 상징과 은유들의 표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들은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역사를 규정지은 동시에 공존하고 때로 서로 대립하던 두 가지 경향으로 여기에 어떤 확정적 위계를 둘 수는 없다. 비올라는 1970년대부터 명백히 후자의 길을 탐색해왔다. 그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특징짓는 정지에서 미묘한 운동으로의 이행, 아지랑이와 물결로 상징되는 흐름에 대한 감각, 점에서 인간으로 변형되는 형상의 가변성 등은 이미지의 시간성과 표면을 미묘하게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비디오의 기술적, 미학적 특징들을 물질화한 결과다. 이러한 기술적이고 미적인 특징들이 인간의 감정과 의식, 지각에 대한 빌 비올라의 주제적 키워드들과 연결될 때 감상의 회로가 완성된다.
중요한 것은 비올라의 작품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열어주는 이러한 회로를 마련하지 못한 채 영적 세계의 탐구, 종교적 상징의 형상화 또는 심지어 ‘힐링’의 체험으로 규정짓는 비평적 시선들에 대한 경계다. 이러한 시선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형상화하고 그에 대한 체험을 낳는 데 필수적인 비디오의 물질적, 기법적 국면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결여하고 있다. 이 시선들을 통해 걸러진 비올라의 작품세계는 비디오가 사라진 상징과 은유들의 세계다. 이 상징과 은유들을 가능케 하는 가시성과 흐름, 지속을 고려할 때만이 그의 작품에 대한 찬반양론이 의미 있을 것이다.●

 비디오/사운드 설치 18분6초 2005/2009

<밤의 기도> 비디오/사운드 설치 18분6초 20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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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비올라_06_Water Martyr 2

<물의 순교자> 비디오/사운드 설치 107.6×62.1×6.8cm 7분10초 2014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비디오 작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김백균 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국내 세 번째 전시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대규모 미술관 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술 애호가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올해 기대되는 전시 중의 하나로 그의 전시를 손꼽는 이가 많았다. 현대미술의 변방인 서울에서 빌 비올라 정도의 유명세를 지닌 작가의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적 있다는 인연을 들어 백남준과 그를 ‘스승과 제자’라는 한국식 아름다운 미담으로 치장해 언론홍보에 활용한 데 힘입은 바도 컸다.
그러나 막상 전시를 보면서 “인간 내면을 어루만지는 영상시인”이라는 빌 비올라에 대한 세간의 호의적 평가와 백남준과 그의 관계를 미화해 인구에 회자되는 ‘뻔한’ 인연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작품안에서 백남준에게 사사 혹은 영향을 받았을 어떠한 사유나 표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의식에 대한 예술적 탐색이나 성찰도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백남준의 연결고리는 작품 안에 흐르는 의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작업을 도운 조수라는 느슨한 외적 유대에만 있고, 단순한 직업적 역할을 스승과 제자 관계로 확대 해석한 것은 백남준 신화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적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일었다. 국제갤러리의 빌 비올라 전시와 짧은 기간 겹쳐 열린 학고재갤러리의 백남준 전시를 참조해 보면서 이러한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백남준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사유하고 무엇을 표현하는지 형식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낼 줄 아는 작가였다. 학고재갤러리의 백남준 전시는 그의 예술세계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핵심 작품들이 출품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그가 TV를 통해서 사유한 탐색의 결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는 TV의 속성을 가지고 ‘논’ 결과, 감각을 통해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온 것들이다. 백남준은 우리가 TV의 속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원리를 상징과 비유를 통해, 세계란 인식의 틀 안에서 의식화된 것들이고, 인식이란 가변적인 허상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것을 우리 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시각적 장치들을 통해 그려냈다.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TV란 전원이 들어갈 때만 화상을 보여주며,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TV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만 화면이 보인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발판을 발로 누를 때만 화면에 화상이 나타나는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은 이와 같은 TV의 속성을 하나의 메타포로 보여준다. 우리의 인식이란 외부의 세계가 내부에 남긴 잔상이다. 그런데 그 잔상은 우리의 감각과 사유의 틀 속에서만 인식된다. 우리의 인식이 이와 같은 TV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백남준이 보여주는 감각과 인식 확장에서 오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백남준은 이처럼 자신이 감각을 통해 느끼고 사유한 그 과정을 시각적 장치를 통해 관객도 느껴볼 수 있도록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빌 비올라는 자신이 느낀 세계의 ‘당위’를 말한다. K3관에 설치된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는 탄생의 반대 지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말하자면 죽음이다. 죽음을 도치된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면 빌 비올라는 죽음을 생명의 소멸이 아닌 새로운 탄생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 화면에 검은 오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어둠 속에 고요히 서 있고 물과 함께 그 검은 오물도 위로 솟구쳐 올라간다. 검은 오물 다음에는 빨간색의 액체가, 그 다음에는 우윳빛의 하얀 액체가, 마지막으로 모래 같은 고체가 올라가고 화면에 남자만 꼿꼿이 선 채 8분22초의 영상은 끝을 맺는다.
이것을 죽음의 과정을 묘사한 알레고리Allegory로 보면, 죽음 후에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육신의 외피를 덮고 있던 검은 오물이 사라지고, 그 다음 빨간 피가 사라지고, 그 다음 우윳빛 살이 사라지고, 그 다음 모래 같은 고체의 뼈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순수한 영혼만 남는 과정으로 유추할 수 있다. 빌 비올라에게 죽음은 육신이 사라지고 순수한 영혼만 남는 탄생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폭포 같은 물줄기 속에서도 강건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이미 주어진 주변의 환경에서 오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고통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각성을 그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 항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일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거나, 신념이라고 하거나 이로부터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생겨났다 할지라도 굳이 그의 생각에 대해 시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읽히고 공공의 장소에서 보인다면 그것을 가치로 평가할 자유가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가 왜 그것을 봐야 하는지와 같은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신념이라면 신념 그 자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신념을 형성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을 이해해야 그 신념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그 신념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될 때만이 그 신념을 지지하거나 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비올라의 작품에서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빌 비올라가 왜 어떻게 그런 생각과 느낌을 지니게 되었는지 하는 과정이다. 화면에 감각과 정신을 집중하고 보고 있다하더라도 어느 순간 어떻게 나의 감정을 작가의 감정에 이입해야 하는지 그 감정 이입의 단서를 화면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감정이입은 불가능했다. 영상 속의 남자가 어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단서가 화면 안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상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현실의 시간보다 느리게 가는 듯한 환상 같은 느낌,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주는 시원함 같은 감각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감각적 쾌감이란 예술작품이 주는 감각을 통해 인식의 확장에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우리가 시원한 폭포 물줄기를 보면서 느끼는 쾌감처럼, 더운 여름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주는 청량감의 시각화와 같은 것이다.
빌 비올라의 신념과 의미
이처럼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일방적으로 발산해버리고 마는 방식은 그의 모든 작품에 동일하게 작동한다. K2관의 <내면의 통로Inner Passage>에서는 사막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산이 있고, 산 앞에 한 그루 나무가 있다. 이윽고 저 멀리서 카메라를 향한 쪽으로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 남자가 화면의 끝, 즉 카메라가 찍고 있는 끝에 다다랐을 때 화면은 격하게 수없이 변화하는 여러 이미지를 보여주고, 희미한 불빛이 길을 비추며 다시 조용한 사막 화면으로 바뀐다. 남자는 뒤돌아서 출발했던 곳을 향해 다시 걸어간다. 그 출발했던 곳이 처음과 다른 점은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그루의 나무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7분12초의 긴 영상은 그 자체로도 지루하다. 더욱 허무한 것은 그것을 다 보고 난 다음 찾아오는 빌 비올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대한 환기이다.
영상에서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걸어 나오는 남자를 유기적 생명을 지닌 하나의 존재로 비유해 보면 우리는 하나의 일자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고 감정을 맛보고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올 때는 하나에서 왔지만, 이 세계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살았느냐는 인과율에 따라 돌아가는 곳은 여러 곳이다.
<조우The Encounter> 역시 단순히 화면상의 두 여인이 평행하게 걸어오고 한 순간 만났다가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다시 뒤돌아서 다른 길로 평행하게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혼자서 인생을 살아간다. 삶 속에서 조우는 우연한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그 조우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아니라 왜 그런지 그러한 이유가 형식을 통해 화면에서 보여야 관객이 그 느낌과 생각에 공감하고 찬사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빌 비올라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겨준 것은 <물의 순교자Water Martyr>이다. 발목이 묶인 순교자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물을 견디며 점점 팔을 벌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고,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죽음에서 빛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까지는 여타의 작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작품의 출품으로 인해 빌 비올라의 작가 의식과 삶의 태도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맞닥뜨린다.
이 작품은 본래 런던 세인트 폴 성당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다. 중세 사회도 아닌 오늘날, 성당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은 성당에 모셔놓고 기도를 하면 될 뿐이다. 과녁 없이 맞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장-뤼 낭시의 언급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전시에 선보인다는 것은 한국 관객이나 미래의 소장가를 얕보았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예술이 무목적적인 것이라는 자각이 없는 작가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삶은 고통이거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그 말 자체로는 그것 이외에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며, 그것의 이유를 작품 안에서 형식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빌 비올라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이외에 백남준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스스로가 하나의 유기적 언어가 되는 백남준의 작품과, 작품 이외의 배경을 다시 말해야 하는 빌 비올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왜 영상이라는 매체로 표현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포괄한다.
영상을 미디어로 이용하는 예술행위는 1920년대 말 살바도르 달리가 <안달루시아의 개>(1928)와 <황금시대>(1931)와 같은 전위영화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비디오 영상 예술시대는 1960년대 소니 포타팩portapak의 발명과 더불어 등장했다. 1965년 백남준이 당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해 ‘카페 오 고고Café au Go Go’에서 그 영상을 방영한 것이 공식적인 비디오아트의 시작이다.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소니 포타팩의 발명은 당시 회화에 식상함을 느끼던 예술가들의 열광적인 지지에 힘입어 ‘뉴미디어아트’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회화의 한계를 자각하고, 회화의 죽음을 예견했다. 그들이 포타팩에 주목한 것은 포타팩이 단순히 영상을 화면에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비디오는 영화의 번거로운 필름 촬영과 인화, 상영의 과정을 편리하게 해준 것만이 아니라 비디오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바를 관찰하고 성찰하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비디오는 자신의 행동이지만 자각되지 않은 행동, 즉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카메라라는 의식 없는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도구로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비토 아콘치,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등과 같은 초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업에는 카메라와 모니터 사이에서 반복되는 피드백을 통한 반사적이고 자기반영적인, 마조히즘과 지루함이 투영돼 있다.
여기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세계와 나’, 그리고 인식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끈질긴 근대적 예술의 과제가 지닌 문제의식의 연장선 위에 있다. 국제갤러리의 빌 비올라 전시에서 ‘나’에 대한 천착이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예술의 과제를 근대 이전으로 되돌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즉 비디오라는 매체는 새로우나 말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평소의 소신대로 ‘죽은 이’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를 말하고, 죽은 이가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디딘 후 다시 돌아가는 순간의 망설임, 떨림 혹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면, 또 불교의 윤회를 믿는다면 그 세계를 ‘선언’할 것이 아니라, 비유나 상징을 통해서라도 ‘묘사’하여 관객도 그 세계를 느끼거나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의 순교자> 비디오/사운드 설치 107.6×62.1×6.8cm
7분10초 2014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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