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제2회 광주화루

한국화의 정체성과 젊은 모색

김상철 | 동덕여대 교수

전은희 〈오래된 집 – 만석동〉 한지에 채색 162×454cm 2018(최우수상)

광주화루가 올해로 2회를 맞았다. 지난해 출범한 광주화루는 여러 면에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중 한국화만을 공모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색일 것이며, 중앙-서울/수도권이 아닌 광주라는 지역에서 전국 규모의 대단위 공모전을 개최한다는 점 역시 특기할 사항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광주화루가 우리가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심사방식으로 공정성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점들은 광주화루가 지니고 있는 특징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미술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화는 여전히 정체성 문제와 더불어 침체와 부진이 만성적인 현상으로 고착되고 있다. 더불어 여타 사회문제와 같이 문화의 중앙 집중현상 역시 날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과거 명실상부하지 못했던 공모전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채 불식되지 못한 현실에서 과연 공모전이라는 고전적 형식이 유효한가 하는 점 역시 충분히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주화루가 반가운 것은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회의와 비판에 앞서 실천을 통한 타개를 모색하고, 비판을 통해 대안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김선영 〈비워지는 시간〉 장지에 채색 145.5×336cm 2017 (우수상)

이번 제2회 광주화루는 ‘한국화의 미래 지향적 비전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가 또는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화 진흥에 기여할 수 있는 작가를 발굴·지원하기 위해 한국화 공모전을 개최한다.’라는 기본 취지로 진행되었으나, 작년과 달리 작가상 제도는 시행되지 않고 공모에 의해 김민호, 김선영, 박병일, 박재철, 전은희, 정경화, 조민아, 진희란, 한상아, 한승엽 등 10인의 작가를 선정하였다.

정경화 〈별이 빛나는 밤에 Ⅱ〉 종이에 먹과 금분 136×276cm 2018

선정된 작가들의 면면은 실로 다채롭다. 수묵과 채색이라는 한국화의 전통적 장르 구분을 두루 포괄함과 동시에 이질적인 재료와 표현을 통해 새로운 전형을 선보이기도 한다. 작가 개개인의 개성을 차치한다면, 이들의 작품을 통해 오늘의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전반적인 경향과 면모, 그리고 지향을 일정 부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점은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던 방만한 작업들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묵과 채색이라는 전통적 장식을 차용하되 이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해석을 통해 개성을 드러내며 자신이 속한 시대를 반영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상호 이질적인 재료의 혼용을 통칭하는 혼합재료의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설사 다른 재료를 사용했더라도 근본적인 조형 심미에서는 전통적인 그것을 원용하거나 주관적 해석을 통해 표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공공적 가치와 덕목을 전제로 한 전통회화의 조형 내용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경험이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자신이 속한 시대를 반영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점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더불어 비록 지필묵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지만 과거의 중봉을 전제로 한 선의 조형에서 벗어나 다분히 구조적이고 묘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진희란〈한계령길〉 순지에 수묵담채 160×150cm 2017

박재철〈비천한 길 Ⅰ〉 한지에 먹, 채색 130×162cm 2017(대상)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 박재철의 경우 내밀한 개인의 일상사를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화면은 일종의 채집증적인 집요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표현함으로써 무엇인가에 육박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힘을 보여준다. 비록 수묵 담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의 작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에 대해 충실하고 집중함으로써 회화 본연의 힘을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이민호의 작업은 동일한 대상에 다양한 시점을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생겨나는 오묘한 시각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특히 목탄 등을 차용한 작업의 구조는 흑백으로 이루어져 수묵을 연상케 할 뿐 아니라 실상과 허상, 현상과 본질 등 수묵 본연의 정신을 새삼 상기시키는 인상적인 것이었다. 정경화의 작업은 극히 섬세한 수묵의 운용을 통해 밤하늘의 별자리를 감성적으로 표현해냈다. 그의 작업은 수묵에 대한 풍부한 해석력과 재료에 대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선영의 경우 채색을 전제로 하지만 필의 흔적을 살린 표현주의적 화면으로 독특한 개성을 발산하고 있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의 호흡을 반영하며 이루어지는 속도감 있는 필의 구사는 그의 작업을 굳이 채색으로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개성적인 것이다. 박병일의 작업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담묵의 정교한 구사로 탄탄한 구성력을 확보하고 원근을 배제한 평면적 구성으로 화면을 확장시키고 있다. 마치 탈색된 것과 같은 무채색의 수묵 화면은 매우 풍부한 변화를 통해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수묵의 확장된 해석이라 할 것이다. 전은희의 경우 일상적인 구석, 혹은 소외된 공간에 대한 집요한 표현으로 채색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낸 경우이다. 삶에 대한 애잔한 회상과 그 기억을 반추하는 감성적 접근은 평범한 대상을 특별한 공간으로 치환시키며, 그것은 과장이나 수식과 같은 기능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요함과 성실함을 통해 구축되어 독특한 가치로 전해진다. 조민아는 익명의 개인을 통해 현대인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들과 공간 설정을 통해 다양한 메시지들을 전해주고 있다.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화면 구조는 그것이 일정한 서사적 내용들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 등에 맞춰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진희란의 작업은 산수에 대한 변용이다. 어떤 부분은 실경산수를 연상케 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극히 관념적이고 전형화된 모양으로 표출되기도 하는 이색적이고 신비한 표현은 그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매력이다. 수묵담채의 고전적 표현 양식을 이처럼 개별화된 개성으로 표출해낼 수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한상아의 경우 광목을 통한 수묵의 운용을 통해 표현력을 극대화하고 작위적인 것과 무작위적인 것의 대비를 통해 매우 사변적인 화면을 구축해내고 있다.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담묵의 점들과 강한 발묵의 대비는 수묵의 신선한 해석으로 다가온다. 한승엽은 다분히 객관적인 시점으로 대상을 포착하고 이를 점묘로 구축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반복적인 작업의 결과를 통해 구축되는 화면은 객관적인 사실성의 왜곡을 통한 보는 재미와 더불어 수묵 특유의 깊이 역시 확보하고 있다. 특히 바탕색의 변화를 통해 수묵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방식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정적이고 담백하며 정교한 화면에 돌연 등장하는 아비의 존재는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는 오브제 같은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작가의 이야기를 견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눈길을 끈다.

조민아 〈하나 둘 셋〉 장지에 채색 162×130cm 2018(우수상)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수상작들의 면모는 다양하다. 그러나 일관된 방향성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실험의 양상이나 서구 현대미술을 추종하는 경향은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재료나 조형원리, 혹은 심미적 내용들에 바탕을 둔 개별적이고 개성적인 표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수묵과 채색이라는 경직된 장르 구분 없이 상호 융합을 통해 분방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이 특징이다. 광주화루의 취지가 ‘한국화의 미래 지향적 비전이나 새로운 방향성의 제시’라 한다면, 이번 수상작들은 조심스럽지만 그 성과의 가능성을 기대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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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PEOPLE]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

2017년 촛불혁명이 대한민국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쓰면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또한 국민 모두의 박물관으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출발점에 2017년 11월 취임한 주진오 관장이 있다. 정권 교체 후 역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수장을 맡은 주 관장은 역사학계의 논의를 수렴하며 박물관의 설립 취지와 운영 방향을 다시 가다듬고 있다. 제주4·3 70주년 기념 특별전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가 열리고 있는 박물관에서 주 관장을 만나 이번 전시와 박물관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SPECIAL ARTIST] 김호득

 
작가 김호득은 한국 회화사의 지평을 넓혀온 인물이다. 지필묵이라는 전통을 바탕으로 설치에 이르기까지 형식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내용면에서도 ‘폭포’로 대표되는 자연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그림은 자연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과 원숙한 감각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특유의 필력으로 ‘현대적 동양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동양회화의 동시대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획득한 김호득의 작품세계를 탐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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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환영을 빨아들이는 공간

박영택 |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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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득 〈계곡〉(오른쪽) 광목에 먹 119×251cm(각) 2017

나는 김호득이 1990년대 초반에 자연을 소재로 그린 일련의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 산과 계곡, 풀들의 형태를 슬쩍 빌려 그 생명체들이 마냥 뒤척이는 기미, 격렬한 떨림과 동세를 전달하는 그림이었다. 그것을 가능한 한 온전히 전하려는 붓과 먹, 간간이 개입한 채색은 대단한 테크닉과 통감각적인 맛을 안겨주는 것이어서 눈이 번쩍 뜨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그의 그림 소재는 줄곧 자연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 즉 자연을 떠난 적이 없다. 좁게는 산, 계곡, 물, 폭포, 들, 풀, 꽃에서 받은 인상인데 단지 형태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퍼드덕거리는 떨림이나 기미를 낚아채는 그리기로서, 일종의 비시각적인 것의 가시화란 난제를 필획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본다. 사실 모든 그림이란 궁극적으로 가시성의 세계를 매개로 비가시성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지 않은가? 작가는 이후 바람, 빛, 속도와 시간, 문자, 혹은 움직임과 같은 세계로 적극 옮겨갔지만 이는 자연의 구체적인 형태를 매개로 하는 작업과 항시 반복되고 있다. 사실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좀 애매한 편이다. 왜냐하면 그가 즐겨 그리는 <폭포>를 예로 들면 그것이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 해도 결국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형(形)으로부터 애초에 떠나 있는 것이자 그것이 목적은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이른바 모더니즘에 입각한 추상은 아니다. 그가 평면성이나 물성, 극도로 환원적인 성격의 회화를 지향한 적은 없다. 극소의 필흔과 온통 먹으로만 채워진 종이나 수조작업 역시 자연현상을 환기하거나 보이지 않는 자연의 미세한 기운과 관자의 신체를 상통하게 하려는 배려이기에 그렇다.

김호득 〈흔들림 – 문득〉 가변설치 2018 〈산산물물〉이란 타이틀로 열린 갤러리분도 개인전 설치광경

초기에 그의 작품의 모티프는 자연풍경이지만 결국 화면 위에 남는 것은 선과 먹의 흔적이고 그것들이 요동치면서 자연의 한 순간의 생동함을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안기는 그림이었다. 폭포와 계곡, 세차게 흐르는  물, 시커먼 바위, 산과 나무, 풀과 꽃이었다. 그리고 구름과 바람, 먼지와 열기 같은 것들로 나아갔다. 그림 속에 구체적인 이미지는 뚜렷하지 않은데 작가는 하나의 물체를 표현함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는 최소한의 요약을 추구하며, 좁게 끌어안으면서 그 본질을 건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자연을 보는 시점을 극단화하면서 관자의 눈과 몸을 대상의 내부로 ‘확’ 끌고 들어가는 편이었다. 매우 미시적인 접근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에 무서운 속도감이 있고 세찬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바람이 불고 나무와 풀들이 뒤척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소리,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자연계의 모든 살아있는 것이 부산스럽게 피어오르고 흔들리고 살아나는 그런 소리, 모종의 기미와 운동과 호흡과 떨어댐을 작가는 몸으로 따라간다.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계의 안타까운, 조바심 나는 현전이다. 그림은 결국 한 작가의 몸의 더듬이가 포착한 세계상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예민한 감성과 몸, 신경으로 포착하고 떠낸 세계를 표현해내는 데, 기술하는 데 먹과 붓을 사용하고 그 재료가 더없이 그 표현을 용이하게 해주거나 효과적이라고 보는 이다. 그리고 그 붓과 먹을 쓰되 좀 재미있게 질리지 않게 상투적으로 고정되거나 관습화되지 않게 변화를 거듭해온 이기도 하다. 이 점이 그의 돌올한 존재감이다. 동양화란 결국 선의 예술이다. 그 선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단지 사물의 외형을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데 결코 머무르지 않는 그 선은 묘사를 뛰어넘어 어떤 기품의 경지로 내달린다. 보여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근원을 향해 마구 질주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먹이 붓에 의해 한지/광목의 표면(내부)으로 잠식해 들어가면서 멈춘 어떤 상황성을 안기는데 그게 흡사 자연에서 받은 인상이 되고 자연과 생명현상의 장엄하고 신비하며 뜨거운 어떤 순간을 목도케 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적 활력을 건드려서 고양된 정서와 쾌감을 준다. 그림이 표면이 아니라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디론가 활달한 정신적 비약을 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닌 궁극의 지향점이었다고 본다. 그림은 매개가 되고 고리가 되어 관자들은 이를 징검다리 삼아 저 세계로 비약하는 정신적 활력을 갖는 것, 따라서 그림은 망막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마음 안에서 요동치는 것 말이다.

김호득 〈문득 – 폭포 ㄱㄴ〉 캔버스에 먹 130×162cm 2011

그는 동양화 재료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기억되지만 여전히 지필묵이 중심이다. 먹의 깊은 어두움과 붓 내지는 먹과 물을 실어 나르는 여러 재료(일부러 망가트린 붓과 딱딱한 종이의 단면, 콩테, 손가락 등)를 가지고 한지, 광목천, 갱지나 캔버스 천 위에 생생하고 격렬하게 더러 침잠되고 더없이 고요하게 흔적을 남긴다. 생천에 아교 칠을 하거나 아예 그 천 자체에 직접 시술하기도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입자가 성글고 평평한, 이미 포근한 색 자체가 깃든 광목을 즐겨 사용한다. 광목은 일정한 두께를 지닌, 바탕 면 자체가 오브제로 가설되어 필과 먹의 얹힘을 종이와는 달리 보여준다. 광목은 흡수하기보다는 뱉어내는 편인데 그것이 신체의 감각을 필선으로 전달하는 데 용이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아가 한지를 뭉친 종이죽에서 먹을 머금은 한지를 구겨서 뭉쳐놓은 것, 종이죽을 계속 칼로 이겨서 도마 위에 찰떡처럼 붙여놓은 오브제나 먹물 묻은 종이를 구겨 응고시키고 나무판에 붙여놓아 수묵을 오브제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기보다 훨씬 촉각적이고 생생한 손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니까 손가락과 손바닥의 힘이 묘하게 조절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상황 아래 기기묘묘한 형태를 지닌 것들이 불쑥불쑥 나온다. 이후 공간으로 나아가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성을 극대화하게 되는데 2009년부터 본격화되는 입체와 설치작업이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부터 그는 ‘측량할 길 없는 근원적 생명’이란 주제의 작업을 공간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나 마음의 흔들림, 그리고 우주의 기운과 삶을 관계 짓는 사이, 우연히 떠오른 생각 혹은 찰나적 깨달음 등을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보는데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그림에 반영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그것이 공간에 설치화, 오브제화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해 보인다. 일정한 크기의 광목이나 한지를 빨래처럼 널고 그 아래쪽에 먹물을 풀어놓은 수조를 만들어놓는 식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을 보는 이들에게 고요히 목도하게 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느끼게 하는 등 주어진 공간에 있는 관중의 몸을 감싸는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라는 그 찰나의 시간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이를 지바 시게오는 “한지, 물, 먹 따위 한없이 비물질화되기 쉬운 재료를 써서 공간의 움직임, 흔들림, 혼돈을 억제하려 시도한다.”고 평한다. 관자의 신체가 공간에 투여되고 여기에 놓인 오브제들과 공모관계로 엮이는 상황 설정이 작가의 의도인 셈이다. 이는 결국 물질과 비물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을 겪게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의 가능태로서의 공간, 생성태로서의 활성적 공간, 무한한 잠재성으로 들끓는 공간 연출이다. 지극히 얇고 어둡고 몇 개의 단서 같은 붓질이 던져진 것들 사이에서 마구 피어나는 활력의 미세한 흐름을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이 설치가 그의 그림과 같은 어법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김호득 〈겹 – 사이〉 광목에 먹 74×121cm 2013

묘사를 뛰어넘은 선(線)의 경지 이번 갤러리분도에 전시된 작업은 2014년 전시와 거의 동일해 보인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서 그려낸 산수화의 변형된 그림은 흡사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연상시키는데 화면 가득 필세만이 차있다. 평면작업과 설치작업이 함께 선보이고 광목에 힘찬 필선 몇 개로 그려진 그의 대표작 <폭포>도 빠짐이 없다. 지바 시게오의 표현대로 “폭포의 형태가 아니라 폭포가 있는 공간 전체를 표현”한 그림으로서 “어떤 형태가 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움직이는 사물이 되고 있다.” 작가는 광목 위에 검은 먹과 붓질 그리고 물을 가지고 모종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고 그 행위가 화면에 모종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계와 무관한 상도 아니다. 광목천의 표면에 응고되고 스며들고 들러붙은 얼룩들이 그대로 매력적인 상황, 사건을 만들어낸다. 우리들은 기꺼이 누런 광목천 위에 먹물이 문질러지고 스며들고 번져나가거나 튕겨진 자취를 통해 모종의 상황을 연상할 수 있다. <폭포>라는 제목을 달았기에 이를 통해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물줄기와 그 굉음, 부서지는 물보라, 그로 인해 움찔하는 내 몸이 감각들, 주변의 자연공간의 떨림을 추체험하게 된다. 화면은 무한한 생성과정을 가장 간소한 꼴로 보존하며 일종의 역동적 이미지로서 무한한 풍부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는 일부분만 보여주는 전략이다. 나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대상을 좀 더 잘 보게 하는 일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억을 반추시키고 꿈꾸게 하고 회상과 여운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망막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시(視)욕망을 짐짓 억누르고 망막 이외에 몸이 지닌 다양한 감각기관과 정신적 활력을 통해 상상하고 지각하게 한다. 나는 이 폭포 그림과 같은 것이 그가 제일 잘하는 영역이라고 본다. 사실 그는 이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전에 윤규홍의 지적처럼 그는 “자신의 패턴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새로운 패턴이라는 역설”을 시도하는 작가다.

김호득 〈폭포〉 광목에 먹 120×81cm 2017

우리 화단에서 많은 이가 김호득을 “한국 동양화계가 처해있는 난관을 헤쳐 나갈 남다른 처방전을 가지고 있는 작가”(박춘호)로 인식하고 있다. 동양화를 동시대의 현대미술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욕망이 큰 그는 그런 시도를 지속해왔고 일정한 성과를 내왔다. 그러나 새삼 그의 1990년대 초 이후 작업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현란한 여러 시도가 동시대 현대미술과의 여러 유사성 아래 풀려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독자성은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그만의 필력으로 전달하는 데서 나오는 감각인데 그것이 이후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엿보이는 유사한 설치, 연출 작업들과의 친연성 아래 풀려나오는 것은 다소 아쉽다.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통해 이미 익숙해진 타 장르와 엇비슷한 것을 시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동양화작업의 현대화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동양화의 현대적 작업’ 이란 과제 같은 것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하여간 그래서인지 그는 여전히 그의 득의작이라고 여기는 <폭포>( 구체적인 자연이미지를 매개로 한)를 빼놓지 않고 선보인다. 나는 그 <폭포>가 시간이 지나고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아주 곤죽이 될 때까지 나아가는, 현기증 나는 경지를 만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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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호 득 

1950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회 개인전을 열었다. 제22회 금복문화상, 제15회 이중섭미술상, 제2회 토탈미술상, 제4회 김수근문화상을 수상했다.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를 정년퇴직하고 현재 경기도 여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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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소장 미술품 첫 대국민 공개 특별전 < 함께, 보다. > 사랑채에서 개최

청와대는 7월 29일까지 소장품특별전 <함께, 보다.>를 청와대 사랑채에서 개최한다. 청와대 소장품이 전시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잘 알려져있지 않던 소장 작품들을 직접 관람 할 수 있는 기회로, 전시의 자세한 내용을 살펴본다.

[Exhibition] 로니 혼(Roni Horn) 개인전, 《Remembered Words》

자연, 정체성, 이원성에 천착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가, 로니 혼(Roni Horn)의 국내 4번째 개인전이 5월 25일부터 6월 30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ART BOOK] 통섭 시대의 예술적 사유

통섭 시대의 예술적 사유


에릭 캔델 지음 / 이한음 옮김 《통찰의 시대(The Age of Insight)》 알에이치코리아(RH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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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캔델은 192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지금껏 생존해있는 신경과학자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캔델은 역사와 문학, 정신분석, 그리고 신경과학을 두루 연구한다. 이것이 《통찰의 시대》가 뇌과학과 예술사, 심리학, 인문학을 통섭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우리는 캔델의 통섭 시도 기저에 환원주의(reductionism) 에 대한 지향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환원주의는 근대적 과학과 학문의 기본적 방법이다. 그것은 연구대상을 그 구성성분들로 나누어 그 각각을 – 캔델이 말한 것처럼 – 한 번에 하나씩 집중적으로 살핌으로써 우리의 시야를 점진적으로 넓히고, 그렇게 부분들에 대한 지식의 양적 축적이 언젠가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 하에 환원주의자 캔델은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로 구성된 20세기 초 빈 모더니스트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과학적 환원론은 이렇게 연구대상으로서의 전체를 그 부분들로 나누기를 전제하지만, 그 이상의 함의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결정적으로, 각 부분들의 연구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특정한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환원될 수 있다. 빈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모더니스트들이 보여준 예술적 활동을 신경과학적/ 뇌과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다. 빈 모더니스트들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은 뇌의 활동에서 나오기에, 그 활동을 관찰함으로써만 그 활동의 결과인 미술작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으며, 미술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정신활동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뇌와 그 작동 결과인 마음이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뇌과학자들에는 두 부류가 있는 것 같다: 20세기 초 빈에서 활동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호의적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한때 정신분석을 공부한 의사 캔델에 따르면 1890년에서 1918년에 이르는 기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활동하던 프로이트를 비롯한 의사들은 인간 마음의 모더니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 관점을 그림을 통해 제시한 화가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등과 함께 말이다. 이 모더니즘 관점은 인간의 행동 결정에서 무의식적 본능이 맡은 역할을 강조한다. 이 관점을 이론적으로 잘 고안한 빈 의대의 의사들은 인간의 모든 정신 과정은 – 모든 정신 질환도 포함하여 – 뇌의 생물학에 토대를 둔다고 주장했으며, 그 의사 중 한 사람인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상당수가 비합리적이며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에 토대를 둔다고 제안했다. 캔델은 이 관점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의 책에서 빈 모더니스트들의 무의식에 집중한다.

캔델의 이러한 연구는 그가 생각하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터 잡은 것이다. 캔델은 세기말의 빈에서 기원하여 지금도 계속되는 예술과 과학 사이의 대화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 왔다고 말한다. 첫 단계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과 빈 의대 연구자들이 마음의 무의식 과정에 관해 깨달은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30년대에 빈 미술사학파가 도입한 미술과 인지심리학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속된 시기다. 세 번째 단계는 199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인지심리학이 생물학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정서적 신경미학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다. 캔델이 한 것은 이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이었다.

캔델의 연구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의 기저에 꼭 무의식과 정서만 있다고 봐야 할까. 의식적 사유는 어떨까. 20세기 중후반의 예술 중에는 보다 명시적인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 같은 합리적이며 의식적인 정신활동의 결과물도 많이 있다. 캔델의 연구를 공부하고 나서 캔델을 또 다른 거인으로 여기고 그 어깨 위에 올라야 할 필요가 있다.

손영실 |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예술매체이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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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TOPIC <격자적서신>중국에 상륙한 예술혁명가들

백남준 〈푸른 부다(Blue Buddha)〉 150-2x205x250cm 1992-1998(Gallery Artlink 소장)

Lettres du Voyant

Joseph Beuys × Nam June Paik

요세프 보이스 〈We are the Revolution〉 191x100cm 1972

중국 상하이 하우아트 뮤지엄에서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월 20일 개막해 5월 13일까지 〈견자적 서신(LETTRES DU VOYANT: Joseph Beuys × Nam June Paik 见者的书信:约瑟夫 · 博伊斯×白南准)〉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와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역임한 하우아트 뮤지엄 윤재갑 관장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전시로 하우아트 뮤지엄 공식 개관전이다. 독일을 무대로 실험적인 전위미술 운동을 이끌었던 두 주역의 작품을 직접 경험한 상하이 현지 미술 관계자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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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상륙한 예술 혁명가들

유정아 | 미술사

19세기 말 상하이는 중국이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일차적인 통로였다. 중국인들이 사실상 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조계지로 몰려들면서 중국인과 서양인이 만나는 공간으로서 근대 상하이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푸둥 지역은 황푸강의 동쪽으로, ‘서양 귀신들’이 들어와 놀던 상하이 와이탄 조계지와는 달리 오랫동안 변두리로 남아 있다가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 경제를 담당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경제 특구로 거듭났다. 푸둥 지역에는 현재 외국계 은행과 투자회사, 물류회사, 유수 기업의 연구개발센터, 고급 호텔과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화려한 고층 빌딩들 사이에 위치한 하오미술관(昊美术馆)에서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전시 ‘투시자의 편지’(Lettres Du Voyant, 见者的书信, 2018. 1.20~5.13)가 열리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랭보(Arthur Rimbaud)의 편지를 인용한 이 전시는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960~80년대 백남준의 행위미술, 비디오, 멀티미디어 작품들과,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협업작품들, 그리고 보이스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다수의 사진과 영상자료, 실물자료, 다큐멘터리 등의 아카이브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중국 상하이 광동구에 위치한 하우아트 뮤지엄은 원홈 아트호텔(One Home Art Hotel)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사진은 한국작가 이용백의 작품이 설치된 원홈호텔 외관. 하우아트 뮤지엄은 이 호텔내에 있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들
모든 대상을 눈에 보이는 현상과 다르게 관찰할 수 있는, 곧 미지의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투시력을 지닌 예술가, 시인 랭보는 1871년 5월 13일과 15일, 각각 스승과 친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자신을 ‘투시자(voyant)’라고 불렀다. 투시자는 선지자 혹은 예언자와는 다르다. 랭보의 ‘투시자’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구성요소를 찾아나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랭보의 편지 속 구절처럼,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인식”을 토대로, “자신의 영혼을 탐색하고, 이를 조사하며 시험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로서, “자기가 발명한 것이 느끼고 팔딱거리고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자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는 자”이다.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시인 랭보가 제시한 투시자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유쾌하게 선언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1층 전시장에서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백남준이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 준 선물인 비디오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프레임 속에 네온과 각종 오브제들을 구성하여 인간의 얼굴을 형상화한 <네온 TV: 버튼>(1990), 오래된 모니터 속에서 촛불이 은은히 빛나고 있고 붓다가 그것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붓다>(1996), 고깔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온몸 곳곳에 모니터와 전자장치, 금속 등을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 <로봇 피에로>(2000) 등의 작품들이, 아직은 백남준의 이름이 생소한 중국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이어 어둡고 캄캄한 방에 들어서면 여러 대의 스크린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켜 투사하는 빛과 환영적인 이미지들을 만나게 된다. 이 중첩된 스크린들이 쏟아내는 영상 이미지에 매료된 관객들은 신기한 듯 여러 번 멈춰 서서 화면을 바라본다. 다중 모니터와 카메라, 폐쇄회로들의 복잡다단한 배치 속에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과 <바이바이 키플링>(1986)의 유쾌한 음악과 춤들이, 주파수를 변형시켜 생성해낸 전자영상 신호들, 그리고 형형색색의 영상화면들과 함께 경쾌하게 다가온다.      

요제프 보이스의 오브제 작품과 각종 포스터 등이 전시된 아우아트 뮤지엄 2층 전시장 광경. 요제프 보이스 전시는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장 그레고르 얀센이 큐레이팅 했다.

전시장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의 우정의 기록들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특히 독립된 공간에서 큰 화면으로 다시 보게 된 <코요테 Ⅲ> (1984) 퍼포먼스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만남과 교감은 전시 주제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설정이었다. 도쿄의 소게쓰 홀에서 벌어진 이 퍼포먼스에서 두 예술가는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의 피아노를 맞대고 서양 고전음과 동물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하모니를 들려준다. 언뜻 들으면 두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그래서 결코 어울리지 않을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마치 재즈의 즉흥 연주처럼 서로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 독일 감독 안드레아스 파이엘(Andreas Veiel)의 다큐멘터리 <보이스(Beuys)>(2016)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요제프 보이스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라는 명성답게, 영화는 보이스에 관한 푸티지 장면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관객들로 하여금 예술가 자신의 말과 표정을 직접 듣고 보게 만든다. 영화 속에는 평상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자 벗은’ 보이스의 모습도 등장하고, 그가 다른 이들과 날선 논쟁을 벌이거나 혹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딘가 당황하거나 난처해하는 표정들도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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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곧 혁명이다.

1984년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1986년 〈바이바이 키플링〉을 비롯해 백남준의 초기작부터 각종 자료가 출품된 이 전시장은 김남수가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2층에서 만나게 되는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는 1층 전시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백남준의 미디어 작품들이 온갖 시청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면서 관람객들을 매료시켰다면, 보이스의 전시는 관람객 자신이 적극적으로 대상에 다가가 꼼꼼히 읽고 관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동안 미술관 측에서 소장해 온 작품들을 기반으로 세심하게 조사하고 연구해 온 노력을 실감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문헌과 시각자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마치 고대 박물관처럼 체계적으로 배치된 아카이빙 자료들 앞에서, 우리는 보호 유리 상자 앞으로 다가가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대상을 일일이 세밀하게 조사하는 고고학자가 되어야 한다.

전시 주제는 ‘모든 이는 예술가이다’, ‘예술의 확장 개념’, ‘사회조각’, ‘플럭서스와 해프닝’ 등 보이스가 제시했던 주요 개념 혹은 활동별로 구분되어 있고, 관련된 각종 사진, 회화, 선언문 같은 시각자료들이 벽을 따라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며, 전시장의 내부공간은 <비트린(Vitrine)> 시리즈로 알려진 유리 진열장이 다수 배치돼 있고 그 안에 그가 사용했던 일련의 오브제들, 안내 책자, 선언문, 엽서, 가방, 상자, 장미꽃, 펠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예술과 삶의 일치를 꿈꾸며, 개인 각자가 지닌 에너지와 창조력을 통해 보다 이상적인 휴머니즘을 실현하고자 했던 요제프 보이스의
예술세계가 기존의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 장르와는 다르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에 선뜻 다가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아보였다. 전시는 이를 충분히 고려한 듯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별도의 문서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 현장이 다소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것에 비해, 전시 개막일 하루 전에 상하이의 괴테하우스에서 열린 강연회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 그레고르 얀센(Gregor Jansen)은 요제프 보이스의 주요 개념들을 자세히 소개했고, 중국의 예술청년들은 상당히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 혁명의 시기에 중국 미술계가 부르주아 예술을 배격하고 예술의 공공성, 혁명성, 사회성을 추구했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현재 중국 청년들이 요제프 보이스의 예술세계에 보이는 깊은 관심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을 통한 대중교육, 사회혁명, 공공토론과 사회참여 등은 개혁개방 이후 여러 모순에 당면한 중국 미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그날의 뜨거웠던 토론과 논쟁을 떠올리면서, 나는 2층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장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자료 제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강연과 토론이 열리는 ‘사건의 현장’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고민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조용했던 미술관은 어느 순간 요제프 보이스가 꿈꾼, 예술과 일상이 만날 수 있는, 나아가 그 힘이 혁명으로 전화하는 현장으로 변모할 수 있지 않을까. 박제가 된 미술작품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개인의 창조력을 이끌어내고, 이를 새로운 사회구성의 힘으로 만들어내고 싶어 했던 그의 예술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전시에서 만난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생애와 작품들을, 우리가 지나치게 현실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혹은 다가서기 힘든 신비주의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랭보는 ‘투시자’로서 시인의 길이 초현실적이거나 환영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 ‘일하는 자’로서 예술가의 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세 예술가가 보여주고 있는 공통분모, 즉, 일상과 예술이 맞닿아 있는 곳, 그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힘, 현재 상하이 푸둥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투시자의 편지’가 미지의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어쩌면 의외로 간단한 것일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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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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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REPORT] WIEN 브루노 지론콜리

〈Ohne Titel(Untitled)〉1975–1976, Sammlung Sigmund, Niederösterreich © mumok, Photo: Stephan Wyckoff Bruno Gironcoli. In der Arbeit schüchtern bleiben (Shy at Work), mumok, 3. Februar – 27. Mai 2018 / February 3 to May 27, 2018

 

Bruno Gironcoli

시간이 흘러가면서 많은 작가가 세상을 등진다. 2010년 74세로 타계한 원로 조각가 고(故) 브루노 지론콜리 (Bruno Gironcoli, 1936~2010)도 그랬다.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조각을 대표하는 작가이지만 그의 이름은 세계 미술계에서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그의 회고전(2.3~5.27, Wein MUMOK 루드비히 근현대미술관) 부제가 ‘쑥스러운 조각가’였던가! 이번 전시에서는 조각가이면서도 드로잉을 독립된 작업으로 병행한 그의 유작이 소개됐다. ‘은둔형 작가’였던 그는 세상에 없어도 그의 사색의 흔적은 이렇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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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는 조형한다

박진아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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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조각가 브루노 지론콜리는 제50회 베니스비엔날레 오스트리아 대표 작가로 선정되어 오스트리아 미술계 인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제미술계의 스포트라이트를 앙망하며 베니스비엔날레 대표작가 선정이라는 영광을 애타게 기대하던 당시 유망 신세대 작가들은 실망했다. 발칙・도발적인 콘셉트와 충격적인 비주얼의 설치작업과 퍼포먼스 작업에 경도된 젊은 콘셉추얼 작가들에게 주목하던 당시의 미술계와 언론도 의외라고 평했다. 그해 나는 영국의 한 미술 잡지에 기고할 기사를 쓰기 위하여 브론콜리의 작업실에서 작가를 인터뷰했다. 베니스비엔날레 오스트리아관 대표 작가 선정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자 아프리카 원시조각과 가면 컬렉션으로 빼곡한 아틀리에서 앉아있던 그는 “나의 자르디니 전시는 우연(Zufall)일 뿐”이라고만 대답했다.

2010년 74세로 타계한 원로 조각가 고(故) 브루노 지론콜리(Bruno Gironcoli, 1936~2010)는 20세기 오스트리아의 대표 조각가 중 한 사람이지만 국제 미술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리츠 보트루바(Fritz Wotruba, 1907~1975) 교수의 뒤를 이어 1977년부터 30년 넘게 빈 미술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의 조각학과를 이끌었지만, 그는 빈 프라터 공원 뒤 뵈클린슈트라세에 자리한 커다란 아틀리에에서 두문불출 작업에만 몰두한 은둔의 예술가였다. 실제로 1980년대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 특유의 육중한 대형 금은도금 조각은 때론 폭과 높이가 7-8m에 달할 정도로 초대형이어서 운반이 어렵기로 악명 높았는데, 그 점 또한 여간해서 오스트리아를 벗어나 해외 미술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 한 한 이유였다.

〈Ohne Titel(Untitled)〉 1997, Bruno Gironcoli Werk Verwaltung, Wien © mumok, Photo: Stephan Wyckoff Bruno Gironcoli. In der Arbeit schüchtern bleiben (Shy at Work), mumok, 3. Februar – 27. Mai 2018 / February 3 to May 27, 2018

지론콜리는 양차 대전 사이 격동의 시기인 1936년에 오스트리아 남부 소도시 빌라흐(Villach)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금속 공방에서 금은세공을 배웠다. 청년 금속세공 장인 지론콜리는 1957년 빈 응용미술대학(Universität für angewandte Kunst Wien) 회화과에 진학하며 순수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가 지망생들이 그러했듯 장래 화가가 될 꿈을 지니고 있던 젊은 지론콜리는 미친 듯이 스케치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던 중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캔버스 스트레칭, 틀 짜기, 프라이머 밑칠 작업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회화를 위해 실은 조각작업을 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그는 잠시 회화과 수업을 멈추고 파리로 건너가 1년 동안 당시 프랑스 예술계와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어놓은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 접했다. 특히 이 파리 체류기는 자코메티의 조각작품을 직접 보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분야가 조각임을 깨닫게 해준 분수령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인체 조각의 부피를 2차원에 가까울 정도로 납작하고 가늘게 깎고 제거했다가 다시 부피를 가하여 조형하는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3차원 조각의 ‘변신(transformation)’ 콘셉트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지론콜리는 1960년대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30년 동안 철사와 폴리에스터를 주재료로 삼아 조각과 설치물을 꾸준히 제작하면서 그가 말한 이른바 ‘소외된 인생 속의 파편들을 공간 속에 펼치고 배열한, 세심히 고려된 표면들 (surfaces of considerations)’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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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

〈Entwurf zur Veränderung von Säule mit Totenkopf(해골로 기둥을 바꾸기 위한 디자인)〉 철분 페인트, 종이에 잉크와 과슈 61.8×89cm 1971 Courtesy Städtische Galerie im Lenbachhaus und Kunstbau München © BRUNO GIRONCOLI WERK VERWALTUNG GMBH / ESTATE BRUNO GIRONCOLI / GESCHÄFTSFÜHRERIN CHRISTINE GIRONC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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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60~70년대 빈에서는 아르눌프 라이너와 귄터 브루스가 거리와 공공 장소에서 스스로의 몸을 자해하는 극도로 격렬한 퍼포먼스를 벌이며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도하는 사이, 전설적인 갤러리 네히크스트 상크트 슈테판(Galerie nächst St. Stephan)을 주축으로 한 빈 제1구역 화랑가에서는 조각가 발터 피힐러와 건축가 한스 홀라인이 반(反)미학주의 팝 댄디파를 이끌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씨앗을 싹틔우고 있었다. 지론콜리는 빈 악쇼니스무스(Wiener Aktionismus) 정신으로부터 영향은 받았지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1960~1970년대 미국에서 유입된 개념주의 국제 사조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20세기 후반기, 과거에 대한 향수가 채 가시지 않은 오스트리아에서도 나치정권의 잔재와 가톨릭 문화를 뒤로한 채 경제
재건을 위한 미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쟁 원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형 경제, 대중적 팝 문화가 일상을 적셔들어 갔다. 지론콜리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깊이 없는 대중소비재와 플라스틱 신소재에 담긴 팝 미학에 매료됐고, 그래서 조각의 형태를 잡는 주소재로써 폴리에스터를 주저없이 포용했다. 폴리에스터 합성 폴리머나 유리섬유로 조각의 기초 골조와 모델을 만드는 작업은 본래 20세기 산업디자이너들이 모크업(mock up)이나 제품 프로토타입(prototype)을 제작할 때 쓰던 기법이다. 이렇게 폴리에스터와 금속광택제를 다룬 것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지병으로 오래 고생했음에도 그는 이 20세기 기적과 편의의 신소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Entwurf zu Polyesterfigur(폴리에스터 형상을 위한 디자인)〉 철분 페인트, 종이에 잉크와 과슈 87×110cm 1965 개인소장 Photo: © Galerie Elisabeth & Klaus Thoman/Jorit Aust © BRUNO GIRONCOLI WERK VERWALTUNG GMBH / ESTATE BRUNO GIRONCOLI / GESCHÄFTSFÜHRERIN CHRISTINE GIRONCOL

지론콜리가 본래 금은세공 장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던 만큼 그의 조각 양식은 지극히 디자인적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겸 디자인 이론가인 마리오 갈리아르디(Mario Gagliardi)는 디자인적 요소가 짙은 그의 작품을 3차원으로 펼쳐 놓은 미래주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interactive storytelling) 조각화라고 해석한다. 관객의 시야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미래 비전 내러티브가 달리 전개되며 마치 조각으로 된 공상과학영화를 보는 감흥을 자아낸다. 공상과학 영화나 악몽에 나올 법한 미래 디스토피아 속 괴물 기계에 에델바이스 꽃, 포크와 숟가락, 옥수수, 갓난아기, 개, 원숭이 형상 같은 지극히 진부한 이미지들을 정교하게 배열해 놓았다. 인간보다 훨씬 앞선 기술력을 가진 외계인이 만든 듯 금은으로 말끔히 마감된 폴리에스터 조각 몸체는 어쩌면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은의 케이스 속에 플라스틱 부속과 금속 회로를 채워넣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각종 21세기 모바일 스마트 디바이스에 대한 은유는 아닐까.

처음부터 지론콜리의 드로잉은 조각을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다. 흔히 조각가에게 스케치와 드로잉은 최종 조각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착상 또는 창작 프로세스를 위한 준비 과정이지만, 그는 조각과 드로잉을 각기 독립된 창조적 결과물로 보고 평행으로 작업했다. 조각과 대조적으로 드로잉의 장점은 비현실적이고 때론 초현실적인 그의 상상력과 착상을 종이 위에서 맘껏 발휘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조각은 동역학, 정역학, 중력, 균형 등 온갖 물리적 조건을 절충해야만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종이 위 드로잉의 세계란 실현 불가능한 물리적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롭고 제약 없는 ‘사색의 장소(areas of reflection)’였던 것이다.

전시전경 In der Arbeit schüchtern bleiben (Shy at Work), mumok, 3. Februar – 27. Mai 2018 / February 3 to May 27, 2018 © mumok, Photo: Stephan Wyckoff

지론콜리가 새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의 문학에서 깊이 영향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조각 <유리관 속의 모형(Modell in Vitrine)>에
‘머피(Murphy)’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이는 동명의 새뮤얼 베케트 소설에서 인용한 것이다. 나체로 흔들의자에 앉아 무사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며 은둔하는 소설 속 반(反)영웅 머피는 어찌 보면 예술이라는 보호장치 덕분에 바깥 현실과 거리를 둔 채 예술에 몰입할 수 있었던, 민감하고 섬세했던 조각가 자신의 분신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지론콜리는 소설 속 주인공 ‘머피(Murphy)’로 화하여 조각을 ‘조형(morph)’하고 정해진 형상과 심볼 언어를 반복해 사용하여 조각에 등장시킨다.

고통이라는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에 대한 그의 사색은 과슈 드로잉 작품 <체육 시간(Turnstunde)>(1970)에서 체육 교사의 구령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런가 하면 <푸른색의 개 디자인(Entwurf, blauer Fluschi)>처럼 인간에게 시달리거나 유린당하는 동물이나 고문당하는 인간이 폭력적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가 매 조각작품에 반복해 사용한 이른바 ‘백설공주 모티프’ – 에델바이스 꽃, 개, 옥수수, 웅크린 아기, 전구, 하트, 스와스티카, 마돈나 등등 – 는 죽은 듯 얼어붙어 보이지만 공상과학 연재 드라마에 고정 배우들이 재출연하듯 죽었다 되살아오는 망령들이다.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음과 다름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는 백설공주(Snow White)란 ‘저승에서 돌아온 자(revenant)’, 눈만 감으면 보이는 악몽에 대한 은유다.

〈Figur mit ovalförmigen Hängeteilen(정지된 타원형의 조각 형상)〉(사진 가운데), 1984–1990, Bruno Gironcoli Werk Verwaltung, Wien © mumok, Photo: Stephan WyckoffBruno Gironcoli. In der Arbeit schüchtern bleiben (Shy at Work), mumok, 3. Februar – 27. Mai 2018 / February 3 to May 27, 2018

지론콜리는 자신의 작품 속에 담긴 상징이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미술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관객의 심기를 건드리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의 <전자세계(Elektronische Welt)>(제작년도 미상)는 개인 모바일 기기의 보편화와 네트워크 사회, 4차 산업혁명,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가상현실 같은 신유행어가 만연하는 21세기 현대인에게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숙고해 보라고 재촉하는 것은 아닐까? 기이하고 압도적인 조각작업 만큼이나 방대하고 아리송한 브루노 지론콜리를 드로잉 도제사로서 재점검하는 전시 <브루노 지론콜리-쑥스러운 조각가(Bruno Gironcoli, Shy at Work)>는 빈 루드비히 근현대미술관(MUMOK –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 Wien)에서 2월 3일부터 5월 27일까지 진행된다. ●

브루노 지론콜리는 1936년 오스트리아 남부 빌라흐(Villach)에서 태어났다. 인스부르크에서 금세공을 배웠으며 Universität für angewandte Künste Wien(빈 응용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빈 미술아카데미 조각과의 수장이 됐다.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오스트리아관 출품작가로 선정되었다. Grand Austrian State Prize(1993), Austrian Decoration for Science and Art(1997), Prize of the city of Vienna for Visual Arts(1976) 등을 수상했다. 2010년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Wiener Zentralfriedhof(빈 중앙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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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FOCUS 감각과 지식사이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위력 사이

이수정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피어스 바르네크&매튜 비더만 〈퍼스펙션〉 컴퓨터, 프로젝터, 스피커 2015 패턴을 맞추려 시선을 움직여야 하는 관람객에게 사운드를 들려줘 공간인지에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공간에 대한 재인식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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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에 있어 테크놀로지는 양면의 성격을 지닌다. 인류의 지금을 최신의 문법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은 보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과 지식 사이전〉(3.2~2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바로 그러한 테크놀로지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라 할만하다. 경외와 반성, 낙관과 부정 혹은 비판의식이 뒤섞여 있으니 말이다. 이는 미디어아트가 우리의 현재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꽤 괜찮은 리트머스지(紙)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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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비더만&마르코 펠리한 〈우린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경각심과 지성을 갖춘 시민사회 건립에 대해〉 컴퓨터, 전파발생기, 안테나, 프로젝터, 사운드 2016~ 글로벌통신을 통해 수집한 개인정보 악용 일면을 드러낸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군산업복합체 구조를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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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전당 전시협력감독으로 <감각과 지식사이전>을 기획한 아베 카즈나오는 시카타 유키코와 함께 1990년대 초부터 2001년 폐관 때까지 캐논 아트랩에서 캐논 사의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아트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야마구치시의 문화 교류 플라자 설립을 준비하는 연구자 그룹인 Soft Study Group을 이끈 일본의 대표적인 미디어아트 전문가이다. 10년 이상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문화 교류를 위한 플라자’는 2003년 ‘야마구치 시립예술정보센터’(Yamaguchi Center for Art and Media, YCAM)로 개관했고, 아베 카즈나오는 YCAM의 학예실장과 예술감독을 맡아 지난해까지 국제적인 미디어 아트센터로서 YCAM의 활동을 이끌어왔다. 개관 기념 프로젝트인 라파엘 로자노 헤머의 <Amodal Suspension>(2003),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와 미디어 아티스트 시로 다카타니의 협업 <LIFE – fluid, invisible, inaudible…>(2007), 세상을 떠난 세이코 미카미의 <Desire of Codes>(2010) 등 수많은 작품이 아베 감독과 interlab의 지원을 받아 탄생했다. 2000년을 전후해 영국 리버풀의 FACT, 일본 도쿄의 NTT ICC, 센다이 미디어테크, 한국의 아트센터 나비, 독일 카를스루에의 ZKM 등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인터넷 기술을 활용해 예술문화를 연결하는 예술적 실험이 진행되고 전담 연구 기관이 탄생했다. 캐논 아트랩과 YCAM은 선두 기관으로 새로운 기술의 예술적 수용과 접목을 이끌어왔다. 특히 야마구치시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YCAM은 국제적인 예술가와의 협업뿐 아니라 지역사회 구성원, 특히 아이들이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뉴미디어를 체험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 마련에도 집중해왔다.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실제 삶에 연결할지, 예술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에 대한 고민이 그 속에 담겨 있다. 2014년 8월에 YCAM에서 열린 <Localizing Media Practice>는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달라진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 날 아베 감독의 발언은 대재난 앞에 제기된 근원적인 질문을 담고 있었다. 혁신성과 실험성, 즉 새로운 기술에 대한 실험보다 지역 커뮤니티, 그리고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가 이날 세미나의 주요한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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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다이토 마나베 〈세싱 스트림-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컴퓨터, 센서보드,전자파, 사운드 2014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와 미디어아티스트 다이토 마나베의 협업. 비가시적인 신호를 가시적, 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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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과 지식 사이전>은 1990년 초부터 30여 년 동안 공적 기관에서 새로운 기술과 여러 분야의 예술가, 창작자를 연결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도록 지원해온 아베 감독의 그 깊은 반성과 고민이 어떤 결과를 맺었는지 보여주었다. 참여 작가들은 캐논 아트랩에서 함께 작업했던 마르코 펠리한부터 2014년 YCAM에서 <Promise Park Project>를 통해 인연을 맺은 문경원까지 대부분 아베 감독과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던 작가들이다. 신기술에 대한 경외감이나 낙관주의는 사라졌고, 기술과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과 인문학적 분석, 인류의 삶의 조건에 대한 고민과 비전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의 주를 이루었다. 오픈소스 라이브러리인 오픈프레임웍스 커뮤니티 매니저이자 미디어아티스트인 카일 맥도날드의 작품 <군중 완벽하게 묘사하기>는 런던 버밍엄 빅토리아 광장, 광주 폴리, 네덜란드 담 광장 등 여러 지역의 영상에 대해 사이트 접속자들이 직접 특정 인물을 지정하여 묘사하고, 웹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실 입구에서뿐 아니라 웹(www.exhaustingacrowd.com)으로 접속할 수 있다. 역, 광장, 분수대처럼 촬영된 장소는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자신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그 영상에 대한 타인의 묘사가 웹으로 공유된다는 사실도 미처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2015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감각과 지식사이>를 통해 광주의 지역이 추가되어 확장되었다. 도시 풍경과 인간 군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군중 완벽하게 묘사하기>와 달리, 류이치 사카모토와 다이토  마나베의 <센싱 스트림-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은 일견 추상적으로만 보인다. 사운드와 추상적인 선과 파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사실 ‘전자파’라는 비가시적인 매체를 시각화한 것이다. 작품 주변에서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를 사용할 경우 실시간으로 영상과 사운드가 변화한다. 전자파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진위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지만 우리 주위에 전자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방심하게 되는데, <센싱 스트림-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은 비가시적인 존재를 시각화하고, 사운드의 변화로 감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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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하르셰 아르라왈〈비행하는 팬터그래프〉드론, 화이트보드 2016 물리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시각적 표현을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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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비더만과 마르코 펠리한의 <이니셔티브 API-피닉스 선언과 이니셔티브 API 북극권 지도>는 남극과 북극 지역 거주민들과 오픈 소스 테크놀로지와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협력하고 그들의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두 아티스트가 설립한 비영리 기구이다. 극지에 사는 사람들이 문화와 과학, 테크놀로지와 교육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오픈 소스를 활용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연결한다. 정보 자체가 자본이 되는 정보화사회에서 ‘오픈 소스’는 자본과 권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소외 문제를 해소하고 격차를 줄이기 위한 주요한 전략이자 비전이다. 안보를 위해 정부가 공공연히 개인의 정보를 통제하고 사찰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우린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와 병치하여 전시된다. 즉, 디지털 사회에서 정보의 통제와 공유가 각각 사회를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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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맥도날드,조나스 존게한 〈군중 완벽하게 묘사하기(광주)〉 소셜미디어와 연동하는 영상, 컴퓨터 2017 공공의 장소에 설치된 CCTV를 매개로 해 미래 감시체계의 자동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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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조원 볼트에 전시된 로렌 매카시와 카일 맥도날드의 <사회적인 영혼>은 시각적으로 화려하지만 서늘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참여자의 트위터 계정을 입력하고 사방이 유리로 된 공간 속에 들어가면, 맞춤형 알고리즘이 기존 방문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눈) 계정을 소개해준다. 서로 반사되는 유리 상자 속에서 증폭되는 이미지를 바라보다 보면 그 천문학적인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다. 이미 입력한 정보를 통해 우리를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 속으로 이끌어가는 SNS는 ‘뜻밖의 인간관계’로 확장해주는 순기능을 갖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유한한 생명의 존재인 우리를 계획하지 않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도록 끌어간다. <사회적인 영혼>은 우리가 처한 위험, 오히려 더 고립되고 공허해지는 빈곤한 인간관계의 처연한 초상이다.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키는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들 속에서 하르쉐 아그라왈의 <탠덤 v2>는 일견 밝고 유쾌해 보인다. 웹이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출시된 드로잉 프로그램은 대부분 규칙에 따라 기존 작품과 유사한 형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탠덤 v2>는 반대로 인간이 소프트웨어로 그린 그림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변화시킨다. 기쁨, 슬픔, 분노, 몽상 등 성격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이미지를 조합해나간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우월성, 인간만의 독창성을 기계가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어쩌면 그러한 믿음 자체가 허구일 수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칠 때 밝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이 작품은 가장 암울하고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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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원&전준호〈자유의 마을〉〈자유의 마을_부재〉단채널비디오(각, 총2면) 2017 마을의 오랜 역사와 6·25전쟁 이후 조성된 마을 모습을 각각의 영상으로 대비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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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작품들을 통해 <감각과 지식 사이전>은 우리의 감각과 지식 사이에 여러 층위로 존재하는 미디어 환경과 테크놀로지의 위력을 가시화한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상황들을 대면하게 한다. 기존 현대미술계의 어휘와 맥락에서 벗어나 종횡무진하던 젊은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기획자가 사회와 인간에 대해 날카롭게 되짚어보고,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의 비전을 고민하고 있다. 혁신과 실험을 상징하던 한 세대가 책임감 있는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담았다. 따라서 <감각과 지식 사이>는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일상 속 깊이 침투해 있는’ 오늘날 예술과 기술의 교차점에서 주목해야 할 주제를 짚어준 전시인 동시에 아시아문화전당, 특히 ‘창제작센터’에 건네는 일종의 제언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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