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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터틀 & 임충섭
〈사물이 마법을 붙잡는 방법〉

〈60 Seconds〉아상블라주, 키네틱, 부조 76.2×76.2×25.4cm 2000

오브제에 스며든 예술 장인들의 마법의 숨결

이필 |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두 예술 장인의 만남

예술 장인 임충섭과 리처드 터틀(Richard Tuttle)이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조우했다. 1941년에 탄생하여 일평생 작업에 전념해온 두 작가의 행보는 달랐지만, 이 흔치 않은 만남이 이미 예정된 것이 아니었나 싶게 필연성을 느끼게 한다. 그 정도로 그들의 정신세계는 예술을 통해 닿아있다. 1960년대 각각 뉴욕과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두 작가는 임충섭이 1973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훗날 이러한 조우를 예견했다.

터틀과 임충섭을 ‘예술 장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예술가로서 철학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들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수공예적 테크닉으로 작업의 승부를 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비디오,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 새로운 형태의 예술 활동이 현대미술의 전환을 꾀하던 격동기에 조용한 물결처럼 전통에 도전했다. 임충섭과 터틀의 매체 작업의 백미는 부조 오브제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드로잉, 회화, 조각의 특징을 결합한 부조 형태의 오브제 설치작업에 주력하며 이들 매체의 경계에 유동적으로 접근했다. 부조를 벽에 걸거나 세우는 그들의 작업은 그 조형성과 관객과 만나는 방식에서 설치미술의 또 다른 차원을 열었다. 동시대 미니멀리즘이 전시공간에서 작품과 관객의 신체 사이 일정한 거리를 요구했다면, 작가의 세심한 손길이 닿은 터틀과 임충섭의 오브제 작업은 관객이 작품 가까이 다가가 뜯어보게 만들며 작품의 구조와 텍스처, 내부적 공간에 빠져들게 한다.

조형을 하는 예술가의 손길을 중요시하는 그들의 작업은 미술사적으로 미니멀리즘의 경직성을 탈피한 포스트미니멀리즘이라는 공통어로 만난다. 터틀은 1965년 베티 파슨스(Betty Parsons)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특유의 ‘최소의’ 미학으로 주목받았다. 1975년 휘트니 미술관 개인전에서는 과도한 단순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로도 터틀은 미국미술의 커다란 흐름에 편승하거나 이즘을 위해 자신의 예술철학을 희생하지 않았다. 한편 1960년대 한국에서 설치미술을 탐구하며 〈앙가주망전〉 등에 전시했던 임충섭은 ‘새로움’을 찾아 이주한 뉴욕에서 빠르게 동시대의 탈매체적 경향을 흡수했다. 1979년 로버트 핀커스 위튼(Robert Pincus - Witten)의 기획전에 전격 발탁되었고 이후 샌드라 게링(Sandra Gering) 등 뉴욕의 갤러리에서 규모 있는 설치작업을 선보임으로써 한국 설치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그 발자취는 201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임충섭, 달, 그리고 월인천지〉에서 조명했다.

두 거장의 작업은 예술가의 사유와 노동집약적 손길을 담고 있으며 입체파의 콜라주, 다다의 아상블라주, 러시아 구축주의의 전통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재료나 물성에 대한 접근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의 삶과 예술철학을 읽을 수 있다. 터틀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상당히 직관적이면서도 작품 내 구조적 공간과 그 공간들의 관계와 해석에 구체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종이나 합판을 자르고 아크릴을 칠하고 펜으로 드로잉을 하는 그의 오브제 작업은 공간, 빛, 선, 색채, 형태, 크기, 표면 등 감각과 즉시성에 의존한다. 기성 오브제를 쓰기도 하지만 그는 주로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상태의 원시의 재료를 자르고 붙여 조형한다. 그 물성과 재료의 원시성은 터틀의 직관과 만나 수사학적이 된다. 시인이기도 한 터틀의 작업은 마치 시와 같이 추상적이며 모호하고 정확한 언어구조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고를 담고 있다.

임충섭 작업은 캔버스, 드로잉, 사진, 오브제, 아상블라주, 키네틱, 영상, 대형 공간설치 등 매체의 스펙트럼에서는 터틀의 그것보다 더 방대하다. 그중 오브제 작업은 형을 자유롭게 제작하고 캔버스 천을 씌워 오브제 자체를 만드는 자유형 캔버스와 일상 오브제를 조합한 아상블라주 작업으로 나눌 수 있다. 자유형 캔버스 형틀을 만드는 작업은 장인의 숙련된 손기술이 필요한 조각적 부조 작업으로서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특수한 오브제’의 포스트미니멀한 형태인 ‘정교한 특수한  -  오브제’라고 부를 수 있다. 임충섭은 뉴욕의 거리를 산책하며 버려진 물건을 줍는 보들레르의 플레누어(Flâneur)이자 벤야민의 넝마주이이며, 프루스트의 사물의 기억을 인식하는 복합적인 예술가이다. 특히 기성 오브제를 재구성하고 조합하는 그의 태도는 인류학자의 그것이다. 그는 타인이 쓰던 사소한 플라스틱 오브제에서 인류의 역사와 필요, 그에 따른 과학기술의 진보와 같은 축적된 시간을 인식한다. 플라스틱 오브제는 마술과도 같이 영겁의 시간을 품은 화석화한 형태로 재탄생한다. 그는 또한 공예 장인적 노동을 통해 기억을 직조하는 스토리텔러이다. 디아스포라 작가인 임충섭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국의 기억을 파내어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에 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온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사상, 건축, 전통 재료, 의복 등 한국적 미학이 단단하게 기초하고 있다.

〈A Thread and Thousand River〉 비디오 프로젝션, 키네틱,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0~2021

리처드 터틀 〈Euterpe(music)〉 전나무 합판, 소나무 격자 스트리핑, 우드 글루, 못, 스프레이 페인트, 플라스틱 스푼, 플라스틱 용기, 캔버스 83.8×76.2×22.9cm 2019

리처드 터틀〈Grandaddy Blue〉전나무 합판, 소나무 격자 스트리핑, 우드 글루, 스프레이 페인트 72.4×61×5.1cm 2019

임충섭을 위한 터틀의 시

이번 전시는 터틀이 동료 예술가 임충섭에게 보내는 존중이다. 임충섭과 터틀이 서로에게 무심한 듯 각자의 예술세계를 추구하며 뉴욕에서 보낸 시간은 50년 가까이 된다. 터틀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임충섭을 위해 “Placid Reminder”라는 짧은 시를 선사했다. 제목은 임충섭의 작업이 은은하고 잔잔하게 무언가를 상기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His dedication /sharing, hard work /combine in spirit /and mind generosity. 풀이해보면, 터틀의 짧은 시구는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예술에 오롯이 바친 임충섭의 삶, 그의 고된 노동과 아낌없는 시간을 바친 작품이 감상자에게 주는 충만함, 예술가의 정신과 합일된 그의 작품의 진정성, 성숙한 작가의 사려 깊은 마음을 노래하는 듯하다. 터틀의 시에는 평생 외길을 걸은 동료 예술가만이 느끼는 존경과 유대 의식이 담겨있다. 터틀은 “예술가는 우주와 같아서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를 바라볼 때 본질이라는 커다란 맥락에서 서로의 본질을 깊이 이해한다”고 했다. 터틀과 임충섭은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 - Strauss)의 용어에 의하면 21세기의 브리콜뢰르(bricoleur)들이다. 일상 재료와 예술가의 직관과 손재주가 만나 탄생한 그들의 작업은 세상을 담으면서도 고전적인 예술작품의 존재를 지키며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페이스 전시의 의미

페이스갤러리에서 두 노장의 만남은 한국미술의 가시화라는 측면에서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역사상 시대를 이끄는 갤러리스트의 커리어는 작품에 대한 애정과 열정, 동시대 예술을 이끄는 선견에서 비롯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갤러리스트의 예리한 눈은 시대를 앞서 훌륭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여 공공에 알리고, 미술관 전시와 컬렉션의 문을 두드린다. 그린버그의 말대로 예술이 황금의 탯줄과 연결된 것을 거부할 수 없다면, 그 황금의 탯줄에 걸맞은 예술가의 작품을 알아보는 역할도 갤러리스트의 사명임을 현대미술의 방향을 주도했던 많은 갤러리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각 문화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만남을 제시했으며, 이는 미술관 컬렉션의 지형을 바꾸고 국내 · 외 미술사 및 미학 연구에 작은 변화를 몰고 오리라 기대한다 .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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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3월호 월간미술  ARTIST REVIEW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